매년 한 번쯤은 서평(Book review)의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이 문제는 하나의 답변으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또 서평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당연히 ‘정답’이 나올 수 없고, 내 의견이 옳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 이원석 《서평 쓰는 법》 (유유, 2016)
그래도 맞든 틀리든 독자는 책에 대한 해석을 명확히 밝힐 줄 알아야 한다. 《서평 쓰는 법》의 저자 이원석에 따르면 서평은 ‘해석’이다. 독자의 해석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review)를 권한다. 이는 독자에게 말 거는 행위에 가깝다. ‘저는 이 책을 좀 다른 관점으로 읽어봤어요. 제가 해석한 대로 읽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서평은 독자와 저자 사이뿐만 아니라 독자와 다른 독자 사이를 대화할 수 있게 한다. 독자는 책의 내용에 대해 자기 생각을 튼실하게 덧붙인다. 이것이 바로 ‘해석’을 기본 뼈대로 완성된 한 편의 서평이다. 그러므로 서평은 독자 생각과 작가의 생각을 비교 · 판단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정리된 대화록이다. 독자들이 독서의 주체로서 책의 내용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반복할 때 적극적인 독자가 됨과 동시에 책에 대한 흥미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다. 독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르다. 이것은 책을 통해 얻은 자신의 해석과 새로운 경험을 서평 쓰기 및 읽기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사고로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게 된다.
서평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문제이다. 앞서 서평은 ‘저자와 다른 독자들에게 말 걸기를 시도하는 해석’이라고 했다. 독후감은 말 그대로 책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정리한 글이다. 서평이 ‘저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정리한 글’이라면, 독후감은 ‘일기’와 유사하다. 독후감은 책과 관련된 자잘한 생각들을 자유로운 형식에 따라 기록하는 글이므로 논리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서평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보다 쓰기 편하다. 책에 대한 자기 생각을 다른 독자들에게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역할은 서평가가 해도 되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독자 중에는 서평과 독후감을 구별하는 일을 전문가(또는 서평가)의 역할로 생각한다. 또 자신의 글이 서평인지 독후감인지 스스로 구별하는 일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대부분 독자는 겸손하다. 자신의 글이 서평의 기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데도 전문성과 거리가 먼 독후감으로 인식한다. 나는 서평과 독후감이 전문성이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구별되는 것을 반대한다. 독자도 서평을 쓸 수 있다. 서평은 서평가 또는 지식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애초에 서평이 전문가들이 쓰는 글이었다면, 《서평 쓰는 법》과 같은 책이 나올 이유가 없다.
서평과 독후감의 관계는 ‘가깝지만 먼 친척’에 가깝다. 그러니까 서평과 독후감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으면서도 뚜렷한 차이가 있다. 궁극적으로 독서는 능동적인 글쓰기 활동으로 연결된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있으면 서평과 독후감을 쓸 수 있다. 결국, 서평과 독후감은 공통으로 자기 생각을 정립하는 글쓰기다. 서평은 독후감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글이 아니다. 독후감이 퇴고의 과정을 거친다면 서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독후감은 서평의 원형, 즉 프로토타입(Prototype)이다. 혹시 내 비유에 대해 오해가 없길 바란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독후감이 퇴고의 진화를 거쳐 서평이라는 ‘완성형’으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를 완벽한 최종 단계로 거듭 발전하기 위한 진보의 과정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진화를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증가’를 증명해주는 신비로운 자연 현상으로 이해했다. 서평도 마찬가지다. 서평은 ‘하나의 해석’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완성형이 아니다. 한 권의 책에 딱 어울리는 완벽한 서평은 절대로 없다. 그 ‘완벽한 서평’이 잘 썼다고 말할 수 없다. 한 권의 책에는 여러 갈래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루어진 서평이 많아야 한다. 서평 작성자는 다양한 해석을 만나면서 기존의 해석을 수정할 수 있다.
서평 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서평에 드러나는 해석들이 거의 같다면, 너무 재미없다. 독자와 독자 간의 대화를 시도할 수 없다. 관계 지향적인 서평의 특성상 또 다른 독자의 해석, 즉 다른 서평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서평이 전체 공개되어 다른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으면, 당연히 다른 독자들의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독자의 비판적 시선은 서평 작성자가 보지 못한 또 다른 관점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러면 서평 작성자는 기존 해석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기존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면 서평을 통해 수정하면 된다. 아니면 과감하게 전면 폐기할 수도 있다. 작가 장정일이 독서를 통해 공부한 이유가 곧 서평을 써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만 하고 자기 입장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사전 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또 공부는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입장만 가지게 되면 남과 소통할 수 없는 고집불통이나 도그마에 빠지게 될 겁니다. 공부해서 자기 입장을 만들고, 또 자기 입장을 깨기 위해 또 공부하고, 이런 것이 공부이고 그게 책 읽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서평 쓰는 법》 102쪽)
한 번 쓴 서평을 쓰고, 또 고치고 하는 일이 서평 작성자의 도리다. 이러한 자기 수양의 과정이 이루어지려면,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그 책에 숨겨진 진가가 천천히 드러난다. 처음에 별로였던 책이 나중에 읽고 나서야 좋아 보이게 되고, 반대로 예전에 좋게 봤던 책이 다시 읽었을 때 크게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독자의 해석이 이해되지 않거나 공감하기 어렵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자신의 서평에 향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 그 독자는 고집불통이다. 다양한 해석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신이 서평에서 시도한 설득이 실패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평 쓰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서평 읽는 일’이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전제 공개’가 된 서평과 독후감은 누군가가 ‘읽기 위해’ 존재하는 글이다. 악의적인 비난이 아니라면, 해석을 비판할 자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