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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ㅣ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평점 :
예언자적인 광인은 적어도 재미있기라도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인간은 오직 가엾을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1]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이 해묵은 주제는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창조론은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고, 진화론은 처음 하등동물에서 시작해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됐다는 것이다. 19세기 전반만 해도 창조론이 대세였다. 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영국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동물의 눈을 시계에 비유하고 시계의 설계자가 있는 것처럼 눈의 설계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설계자는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어떤 존재, 즉 신의 설계 때문에 탄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창조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진화론을 내놓으면서 창조론은 흔들리게 된다. 이후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창조론자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인류의 기원을 화석이나 DNA 분석을 통해 추적하는 과학적 방법에 종교적 세계관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간 대결에 주저 없이 나선 학자이다. 그는 창조론이 과학적 · 논리적 허구를 교묘히 감춘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굴드가 타계한 이후에도 창조론자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국 일부 지역에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과학적 창조론자라고 부르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공세를 펼친다.
진화론과 창조론자들의 전투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이 연일 화제가 되다 보니 일부 기독교단체가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론 부분을 개정 · 삭제해 달라는 요구한 사실이 덜 알려졌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요구해왔다. 굴드는 1940년대에 진화 이론의 핵심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한참 멀었다. 생물 교과서가 진화 이론의 핵심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이 진화 이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 이 틈을 타 ‘한국창조과학회’ 소속 종교인 및 학자들은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수록하도록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은 여전히 창조론이 득세하던 1920~1930년대 상황과 유사하다.
역사뿐만 아니라 기초과학을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성공적인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사고를 깨치고 나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굴드가 필력과 토론으로 창조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에 얽매인 ‘희망적인 사고’를 경계했다. 일부 진화론자는 진화와 진보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가 희망적인 진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하지만 굴드는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는 진화론자들을 비판한다. 진화는 인류를 지구상의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다윈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발전을 설명하려는 열망이 강한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해석했다. 이게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내세운 사회진화론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은 ‘사회진화론’에 가깝다. 유럽 진보주의자들은 이 담론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로 변신했다. 《다윈 이후》는 온갖 오해와 핍박으로 곤욕을 치른 진화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넘어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도 일독할 가치가 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학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수십 년 만에 혹은 수백 년 만에 새로운 이론이 탄생한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한 줄로 딱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진화론을 설명하더라도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 라이엘(Lyell)의 지질학 이론, 그리고 멘델(Mendel)의 유전 법칙 등을 언급해야 제대로 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결국 대중을 위한 과학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내용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다윈 이후》는 이미 폐기되어버린 사소한 이론에서 출발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은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이타주의에 대한 다윈주의적 해석이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진화를 ‘본성’으로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이 주목받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빚어진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진화론을 허술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진화론자들은 스스로 과학적인 검증을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은 건강한 이론이다. 무조건적 믿음을 고수하는 창조론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래도 진화론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굴드 사후 15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 서평 제목의 원문 :
“다윈 이후 100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1959년 미국의 저명한 유전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가 볼멘소리를 했다. (《다윈 이후》 7쪽)
[1] 《다윈 이후》 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