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언어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인문학 음식의 언어
댄 주래프스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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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이 쓰는 신조어 중에 ‘창렬스럽다’, ‘혜자스럽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궁금하면 검색어에 ‘김창렬’을 쳐보시라.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넣으면 왕년의 인기 그룹 가수 DJ DOC에 관한 사진과 내용보다는 음식 사진이 더 많이 나온다. 연관 검색어를 보면 ‘창렬푸드’라는 단어도 있다. ‘창렬푸드’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김창렬은 각종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연예계의 사고뭉치로 알려졌다. 합의금으로 가수 활동을 하면서 벌여놓은 수입을 다 쓴다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도 전해진다. 그랬던 그가 식품업계에 뛰어들면서 2009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편의점 음식상품을 내놓았다. 세븐일레븐은 꼬치, 순대, 미니족발 등 야식 위주의 메뉴를 판매했다. 그런데 해당 제품을 구입한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격대비 품질이 좋지 않다는 불만이 나왔다. 포장 속 사진과 비교하면 실제 내용물 구성이 너무 부실해서 과대 포장 의혹이 불거졌다. 누리꾼들은 ‘창렬스럽다’, ‘창렬푸드’ 등의 용어를 만들어 과대포장을 비아냥대기에 이르렀다. 과대 포장 과자를 ‘창렬스럽다’라거나 ‘창렬 과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세븐일레븐은 부랴부랴 음식의 양을 늘렸지만, 이미 돌아선 소비자의 마음마저 잡을 수 없었다. 김창렬은 자신의 이름을 빗댄 신조어가 부실한 내용물이 담긴 과대포장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것에 분노를 드러내어 식품업체를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반대로 ‘혜자스럽다’는 도시락 상품의 양과 질이 모두 뛰어나면서 생긴 말이다. GS25는 2010년에 ‘김혜자 도시락’을 선보였다. 김혜자 도시락은 속이 꽉 찬 구성의 품질로 소비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았다. 가격대비 만족스러운 품질의 상품을 두고 ‘혜자푸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스럽다’는 어떠한 성질이 있음을 의미하는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우리는 음식의 맛을 더 실감 나게 표현하려고 단순하게 ‘맛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더 맛있어 보이려는 표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음식의 맛을 형용사로 표현하는 경향이 많다. 미국 스탠퍼드대 언어학 교수 댄 주래프스키는 맛집 리뷰와 후기를 분석한 결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고급 레스토랑일수록 맛있는 음식을 관능을 자극하는 성적 표현이 난무했고, ‘대단한’, ‘놀라운’ 같은 형용사는 ‘평범한’, ‘나쁜’, ‘끔찍한’에 비해 더 자주 쓰였다. 음식에 대한 호평이 악평보다 많은 사실에 대해서 댄은 먹기 좋고 맛있는 음식을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가 음식의 맛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든다고 봤다. 맛깔나게 먹는 행위를 표현하는 문장은 읽는 것만으로 침을 삼키게 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사용하는 일상의 단어 속에 음식 섭취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창렬스럽다’와 ‘혜자스럽다’ 같은 신조어는 식욕 취향이 반영된 요리의 문법의 또 다른 사례가 된다. 이름에 접미사를 붙여 꼬집는 신조어가 유행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누리꾼들의 기대와 그 기대를 저버린 행동으로 인한 실망감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빗댄 ‘놈현스럽다’는 기대를 저버리고 실망감을 주는 데가 있는 사람이란 뜻이 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을 의미하는 ‘명박스럽다’도 명명백백한 사실이 아니라고 박박 우기는 사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지칭한다. 이처럼 ‘창렬스럽다’는 기대를 저버린 질 나쁜 음식에 대한 실망감을 표현한 말이다.

 

과거에는 음식은 생존의 의미 그 자체였다.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이제 음식은 탐닉과 즐거움의 대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산다. 이러한 심리적 성향을 잘 반영한 것이 고급 레스토랑이다. 외식업소에서 메뉴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메뉴에 의해 식당 하나가 흥하기도, 또 망하기도 한다. 메뉴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물론 ‘맛’이다. 그러나 오늘날 복잡해진 외식시장에서 ‘맛’만으로 모든 것을 승부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메뉴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만약에 레스토랑을 운영할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댄 주래프스키 교수가 쓴 책 《음식의 언어》 제1장 ‘메뉴 고르기 : 메뉴판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네 가지 방법’을 참고하시길.

 

식당을 찾는 고객을 영화관에 온 관객으로 가정해본다면, 메뉴는 영화의 주인공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주인공을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타로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인상적인 이름을 지어주어 관객의 시선을 붙들고 식당을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값비싼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만든다. 또 근사한 느낌이 드는 고급스러운 단어도 넣어도 좋다. 그러면 고객은 음식물을 입으로 삼켜서 먹는 것이 아니라 음미를 한다.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에 남보다 더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이 스며 있다. 실제로 요리를 설명하는 단어가 하나씩 늘수록 음식 가격이 높다. 음식의 출처 즉 음식을 만들면서 사용된 원재료의 출처를 밝혀준다면 고객의 감성에 호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식당은 시골에서 재배한 채소로 음식을 만듭니다’ 대신 ‘어머님이 경기도 이천에서 직접 농사지으신, 땀이 깃든 채소로 정성스레 음식을 만듭니다’라는 문구를 메뉴에 표기하면 레스토랑 음식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음식의 문법은 우리가 미처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 힘에 의해서 음식을 고르고, 주문하고, 먹는다. 감자 스낵(포테이토칩)은 아이들이 자주 먹는 식품 중 하나다. 밀가루를 주원료로 색소나 향료, 맛 페이스트 등을 첨가하는 다른 과자들에 비해 생감자를 그대로 잘라 튀겼기 때문에 트랜스지방이나 식품첨가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믿기 쉽다. 포장지에 적힌 ‘트랜스지방 제로’, ‘저지방’, ‘몸에 좋은 국내산 감자’라는 홍보 문구를 믿고 감자 스낵을 아이에게 사주는 부모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구들은 감자 스낵이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믿게 하게끔 하는 광고업자의 전략이다. 특히 가격이 비싼 감자 스낵일수록 트랜스지방이 없는 건강 감자 스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듯 음식의 문법은 식품 혹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지만, 때론 맹신이 되어 성분 확인을 소홀히 하는 부정적 효과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음식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있다. 풍요 속 빈곤이라 했다. 먹거리가 부족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에서 먹거리는 넘친다. 미각 경험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과 집착이 커질수록 미각을 최대한 확장해 문화적으로 상업화하려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TV와 인터넷, 미디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 중 하나는 단연 ‘맛있는 음식’이다. 매일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고, 사람들은 SNS에 보란 듯이 음식 사진을 올리면서 음식의 맛을 평가한 것을 여러 사람에게 공개한다. 본래 우리 문화는 남들이 밥 먹는 것을 지켜보지 않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먹방 전문 채널마저 생겨나 인기를 끈다. 식탐을 자랑하고, 서로 지켜보는 걸 즐기며 욕망의 해방을 부추기는 현상 속에 요리를 매개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알리고 싶은 인간의 과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현실 불만족에 비롯된 심리적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 사진을 대량으로 올린다. 24시간 미각에 열려 있는 소비자들은 입으로만 음식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청각 등의 오감으로 음식을 즐기며 새로운 미각 경험을 쌓길 원할 것이다. 내년에도 다른 이들의 식탐에 행복해할지, 또 다른 욕망의 관음이 판칠지는 미지수다. 음식의 문법과 먹방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음식을 주문하고 먹는 우리, 심리적 허기를 의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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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6-0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모론을 좋아하는 제갠 요즘 넘쳐나는 먹방과 셰프 프로는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ㅎㅎ

cyrus 2015-06-09 18:51   좋아요 0 | URL
음식을 먹으면 모든 걸 잊게 만들죠. 그만큼 먹방이 대중을 쉽게 유혹할 정도로 중독성 있는 정신 건강에 그리 좋지 않은 방송이에요. ^^

AgalmA 2015-06-08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스럽다 -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하게 논의를 펼친다. 현재까지 배탈난 사람은 없는 걸로 보고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시샘난 사람들은 있을 걸로 추측한다 [알라딘 서재 야매 백과사전]

cyrus 2015-06-09 18:53   좋아요 0 | URL
지식이 부족해서 북플 서평이나 댓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걸 배우려고 합니다. ㅎㅎㅎ 백과사전 내용에 수정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

fledgling 2015-06-0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신조어인가 보군요~ 알아두고 신세대 애들과 놀 때 써먹어주는 센스!
신조어 2단어로 이렇게 글을 풀어쓸수 있다니..!

cyrus 2015-06-09 18:54   좋아요 1 | URL
`창렬스럽다`라는 말은 되도록 안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운 없으면 김창렬 씨에게 고소 먹을 수 있습니다. ^^

수이 2015-06-08 2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캬하_ 좋다. :)

cyrus 2015-06-09 18:5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

세실 2015-06-0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렬스럽다, 혜자스럽다가 그런 뜻이군요^^ 또 하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5-06-09 18:54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조어를 기막히게 잘 만들어요. ㅎㅎㅎ

narr77 2015-06-09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감으로 먹는 음식~~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6-09 18:55   좋아요 0 | URL
긴 글인데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돌궐 2015-06-09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김사인 시인의 `먹는다는 것`을 읽었던 참입니다.
몇 줄 안되니 한번 옮겨보겠습니다.

먹는다는 것
김사인

내 안을 허락한다는 것.
너에게 내 몸을 열고 싶다는 것 내 혀와 이빨과 목구멍과 대장과 항문을 열어준다는 것 그렇게 음탕한 생각.
또한 지금의 내가 아니고 싶다는 것 지금의 죽음이고 싶은 것 다른 나이고 싶다는 것 사랑을 느낀다는 것.
너를 내 안에 넣고 싶다는 것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것 너이고 싶다는 생각 네가 아닌 나를 더는 견디지 않겠다는 의욕.
너를 먹네
포충식물처럼 끈끈하게, 세포 하나하나까지 활짝 열어 너를 맞네 세포 하나하나까지 너에게 내주네.
그러므로 허락이 있어야 하는 일 모든 구애가 그렇듯이
밥이건 고기건 사람이건
먹는다는 것은 먹힌다는 것 죽음처럼 아찔한 것 길고 황홀한 키스 먹는다는 것은 갖고 싶다는 것 새 자동차를 장화를 장미를 새끼 고양이를 향해 눈이 빛나는 것 같이 있고 싶다는 것 한 몸이 되고 싶다는 것.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랜 식욕의 역사
몸 너머 영혼 속에까지 너를 들이고 싶은 것 네가 되겠다는 것 기어이
먹는다는 것은.

- <어린 당나귀 곁에서>, 52-53쪽



cyrus 2015-06-10 22:58   좋아요 0 | URL
돌궐님, 좋은 시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랜 식욕의 역사’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갑자기 식욕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란 무엇인가 1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파리 리뷰 인터뷰 1
파리 리뷰 지음, 권승혁.김진아 옮김 / 다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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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찬의 단편소설 『신성의 집』(1991년, 《문학사상 12월호》)에서 주인공의 직업은 소설가다. 주인공은 문학이 예전보다 영향력이 떨어졌다고 한탄한다. 과거에 문학은 인간의 외경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감각을 지닌 ‘신성’으로서의 예술이었다. 많은 사람들(독자)은 문학이 스스로 발하는 신성한 빛을 믿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로 들어서면서부터 소설은 ‘화장을 잘해야 팔리는 상품’으로 전락했고, 작가는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을 만들려고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소설이 나온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문학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문학은 이제 점차 소멸하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개월째 한국문학은 베스트셀러 20위권 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이 통 팔리지 않는다. 한국문학의 침체 현상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가들의 역량 부족부터, 급격한 사회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란 분석까지 다양한 진단들이 나온다. 시베리아 기단과 북서풍이 만나면 우리나라에 혹독한 한파가 찾아오듯이 경기침체와 도서정가제는 이미 차갑게 얼어붙은 국내 출판시장에 한파가 되어 찾아왔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도서정가제는 시장의 한파가 되었고 밖으로 나와 서점을 찾는 독자의 발길이 줄어들고 있다. 도서정가제 한파는 독자의 지갑마저 얼어붙게 하였다.

 

하지만 국내 작가의 소설이 팔리지 않는 현상만 가지고 소설의 위기까지 말하는 것은 난센스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서의 위기’라고 하는 것이 옳다. 국내 작가의 소설이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이 문학으로 향할 독자의 발길을 빼앗고, 드라마와 웹툰이 문학적 감동을 대체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소설보다 한층 재밌다. 자고 일어나면 기상천외한 사건이 하나씩 일어난다. 세상 자체가 박진감 있게 변화한다. 세상의 변화 자체가 허구보다 더 짜릿하기에 굳이 소설을 찾을 필요가 없다. 누군가는 소설을 읽는 것을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허구적 요소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어봤자 지식을 습득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이런 부정적 인식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소설의 위기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어 왔다.

 

이쯤 되면 소설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점을 감지했을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전달을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하는 시대에 텍스트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문맹자로 전락하고, 이미지의 홍수에 떠밀려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과연 소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적인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파리 리뷰’의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 1》를 읽으면서 소설이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일단 소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소설을 이렇게 배웠다.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꾸민 문학 양식이며 배경과 등장인물의 행동, 심리 따위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이나 사회상을 드러낸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력은 비범한 두뇌를 가지지 않는 이상 뛰어난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의 정의를 제대로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허구적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다.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드는 것이 바로 허구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소설을 ‘조작’, ‘허위’, ‘거짓’에 가까운 의미로 인식한다. 소설의 허구성은 단순히 거짓말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소설의 가치를 폄훼하는 수단으로 변질하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지어내거나 거짓말하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켜 ‘소설을 쓰다’라는 말한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부정행위를 끝까지 숨기려 하거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때 우린 그들에게 ‘소설 쓰지 마라’고 비난한다. 소설과 거짓말은 이렇게 오랫동안 불편한 동거를 했다. 작가 입장에서는 소설이 무시당하는 상황에 자존심이 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토니 모리슨처럼 매일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소설을 쓰는 작가의 노력도 무시하는 꼴이 된다. 작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긴 분량의 거짓말을 만드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소설을 사실과 거리가 먼 허구적 이야기, 거짓말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폴 오스터의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오스터는 작가가 지녀야 할 자부심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제대로 각인시킨다.

 

 

소설은 허구입니다. 따라서 (그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소설은 거짓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소설가는 거짓을 통해 세상에 관한 진실을 말하려고 애를 씁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 중에서, 165쪽)

 

 

움베르토 에코는 거짓말을 인간의 고유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능력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문제지만, 거짓말은 인간의 창작 활동에 절대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만약에 나에게 작가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맛있는 빵을 소설로, 제빵사를 작가로 비유하면서 독자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열심히 만드는 제빵사라고 대답하고 싶다. 거짓말은 효모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빵, 맥주를 만드는 데 유용한 효모와 식품을 부패시키는 효모도 있다. 제빵사는 착한 효모로 먹음직스러운 빵을 만들듯이 작가는 창작에 유용한 거짓말을 원고지 속에 발효시켜 세상의 진실을 듬뿍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독자는 작가가 만든 건강한 이야기인 소설을 맛있게 읽으면 된다. 작가는 맛있는 소설을 써야 한다. 맛있는 소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낯선 조합에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라. 우리는 빵이 맛있어서 먹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설이 재미있어서 읽는다. 결국, 맛있는 소설이란 독자를 사로잡아 이야기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다. 필립 로스는 맛있는 소설은 무엇이며, 맛 좋고 정신 건강에 좋은 소설의 매력을 아는 최고의 독자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제가 원하는 것은 독자들이 제 소설을 읽을 때 소설에 푹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작가들이 하지 못하는 그런 방식으로 독자를 사로잡고 싶습니다. 그러곤 그들을 소설을 읽기 전의 그들 그대로, 그들 외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바꾸고 설득하고 유혹하고 조절하려고 애쓰는 그런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최고의 독자는 이런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고 둘러싸인 의식을 풀어주기 위해 소설의 세계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작가란 무엇인가 1》 중에서, 279쪽)

 

 

소설의 세계는 작가가 지어낸 가공의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세상 혹은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떤 면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거대한 진실의 거울이다. 독자는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 깊은 진실의 자리를 탐사한다. 텍스트가 재현하고 있는 세계의 현실 속에 독자가 발견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일 수도 있고 본능의 진실이거나 영혼의 전율일 수도 있다. 작가는 자기의 진실한 체험, 사상, 느낌을 녹여 전달하고 독자들은 여기에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즉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이나 현실 세계를 발견하면 기뻐하고, 자기 삶에도 당당한 의미가 있음을 작품을 통해 확인하며 안도한다. 또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만나면 놀라거나 분노한다.

 

세상이 빠른 속도로 변화할수록 독자들의 관심이 문학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은 심화될 것이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 작가는 독자의 흥미를 돋는 새로운 서사의 문법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그 중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욱 깊고 넓게 하여 변화한 시대상을 제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작가들이 있을 것이며 반면 저속함과 상업성에 굴복하는 사이비 작가도 나올 것이다. 소설의 위기설이 나돌더라도 작가는 자신이 소설을 써야 할 의미, 작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자문해야 한다.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작가는 좋은 소설을 써낼 수가 없으며 소설을 읽지 않는 독자들 앞에 위축되고, 불행해질 수 있다. 오스터는 작가의 작업에 동감하고, 소설을 훌륭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 작가가 믿을 만한 독자라고 말한다. 진정한 독자는 소설이 어떤 세계보다도 흥미롭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소설의 위기는 기우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 소명을 다 한 것인지 이에 대한 논의는 전문가들의 몫이므로 그쪽으로 넘기자. 일단 우린 작가가 만든 소설의 세계를 믿고 즐기면 된다. 물론 맛있는 소설과 맛없는 소설을 구분하고, 칭찬과 비판을 아끼지 않는 자격을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명쾌한 해결책은 나올 수 없지만 《작가란 무엇인가》 시리즈를 읽으면 어느 정도 실마리를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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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4-25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문맹자는 글자를 못 읽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못 읽는 사람이 될 것” 이라는 말을 벤야민이 했군요. 전 진중권이 말한 줄 알았습니다. 진중권이 인용한 문구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21세기는 벤야민`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5-04-25 17:38   좋아요 0 | URL
벤야민의 글을 읽으면 미래사회를 예견하는 통찰력에 놀라게 됩니다.


stella.K 2015-04-25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나도 작년에 읽었는데 리뷰 쓸 엄두가 안 나더군.
게을러서 시기를 놓쳐버린 걸까? 아무튼 좋긴 했어.

소설이 그렇게 폄훼되지 않더라도 소설은 여러모로 불리한 태생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목요일 로쟈님의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군.
많은 독자들이 소설을 일종의 유희로 읽는다는 거지.
하지만 쿤데라나 로버르트 무질 같은 사람은 소설을 인식론의 경지까지
끌어 올린 사람이야. 그래서 좀 어렵지.
난 속으로 그렇지. 소설이 언제까지 그렇게 하찮게 봐야하는 거냐고 나름 긍지 같은 걸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어려운 책은 나부터도 꺼려지거든.
유희를 생각하면 소설을 읽느니 영화를 보는 게 나을 것도 같고.ㅠㅠ

cyrus 2015-04-25 17:45   좋아요 0 | URL
누님 말씀을 듣고 보니 소설을 쓰는 작업도 시를 쓰는 작업 못지않게 힘든 것 같습니다. 독자가 읽을 수 있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도 그런 소설로 인해서 문학이 가벼워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조이스나 무질처럼 기존의 소설을 뛰어넘는 실험적인 창작을 시도하면 문학을 너무 어렵게 만들어서 독자들이 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5개월째 베스트셀러 순위에 한국소설이 단 한 권도 없다는 뉴스를 보면서 쓸데없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는 외국소설을 너무 선호하는 편이라서 한국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소설을 읽는 것 자체를 천박하게 여기는 풍조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무튼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

conviction 2015-04-2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느 행성의 탄생같은 글들, 감성과 지성의 교차가 끈끈히, 잘 얹혀진 글을 읽습니다. 부럽습니다.

cyrus 2015-04-25 17:48   좋아요 0 | URL
과찬의 말씀입니다. 알라딘에서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2015-04-2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인터뷰 모음이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글 하나하나가 정말 예술이더라구요.
인상 깊게 읽었지만, 대가들을 마주하는 기븜으로만 대했는데, cyrus님 글을 읽다가 `소설` 그리고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cyrus 2015-04-26 23:32   좋아요 0 | URL
제가 작가가 될 생각은 없어서 이 책을 읽어서 얻을 게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들을 `대가`라고 부르는지 인터뷰집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이 책 덕분으로 문학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
 
새벽의 인문학 - 하루를 가장 풍요롭게 시작하는 방법
다이앤 애커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새벽은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게만

빛이 된다

(정한모, ‘새벽 1’ 중에서)

 

 

 

 

자연 현상으로 볼 때, 새벽은 아직 사물들이 잠에서 깨기 이전의 시간이다. 태양 빛이 지구 위로 쏟아지는 순간, 침묵을 지키려는 어둠의 장막이 이를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장렬히 산화한다. 밝고 환한 세상을 열어주는 아름다운 한 줄기 빛이 대기를 감싼다. 광명한 세계로 나가는 과도기적인 시간으로 전이된다. 새벽을 거쳐야 밝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밤의 침묵을 깨달을 때 비로소 새벽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만이 스스로 빛을 내뿜어 어둠을 몰아내는 광원이 될 수 있다.

 

어둠의 장막에 제대로 걷히지 않은 새벽길은 꽤 어둡다. 새벽에 일어난 어둑한 길을 걷노라면 아직 동터오기 직전,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이슬방울의 차가움이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밀려온다. 새벽의 기운은 마음속에 들어 있던 나쁜 찌꺼기들을 씻겨나가게 한다. 드디어 뜨고도 보이지 않던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고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빛이 나타나면 꽃과 나무, 흙과 돌멩이, 바위, 풀숲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보고 또 보아 눈에 익숙한 것들이지만 이슬을 머금고 막 어둠에서 벗어난 그것들은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새롭다. 그래서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맞은 아침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 아침이다. 숲 속에서 새 아침을 맞는 기분 역시 어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날아갈 듯한 새 경험의 새 기분이다. 하지만 새벽의 여정은 너무나도 짧다. 풀잎마다 무성하게 맺혀있던 이슬도 아침 햇살이 비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취를 감춰 버리듯이 새벽은 온 자연을 싱그럽게 하고, 조용히 햇살의 커튼 속으로 숨어버린다.

 

새벽은 순수하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모나지 않으니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이다. 그 시간 속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늘 반복된다. 어두운 자궁 밖으로 나오는 아기가 삶을 시작하면, 잠드는 동안 삶이 멈추어져 육신만 남은 껍데기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 꼭두새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때는 가장 이른 새벽이면서 밤과 낮의 경계이자 도취와 현혹, 고통과 환희가 공존하는 전이의 시간이다. 또한, 새로운 기운을 머금은 어둠의 시간이다.

 

그런데 우린 새벽의 기적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저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실용적인 시간으로만 썼을 뿐이다. 몇 년 전에는 ‘아침형 인간’으로 생활습관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아졌던 적이 있었다.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었던 《아침형 인간》의 저자 사이쇼 히로시는 “아침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고 역설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인생을 두 배로 사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반면 야행성 생활에 길들면 매사가 수동적이 되고 무기력해진다고 경고한다. 새벽 기상을 곧 성공과 관련지어 얘기하기도 한다. 성공한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 등의 공통점은 대부분 ‘새벽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새벽은 자기계발을 하는 데 집중도가 높은 시간으로 변질하였다. 아침형, 새벽형 인간 열풍은 곧 시들해졌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불을 댕기면 확 끓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 현상 탓이다. 그저 남들이 그런다니까 유행 따라 한번 해보는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이앤 애커먼의 《새벽의 인문학》은 독자들에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벽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녀의 글은 저마다의 개성 강한 방식으로 지순한 자연 사랑을 담아내기에 더욱 진솔하고, 느낌 또한 강하다. 숲 속에 노래하는 새들, 아침 이슬이 맺힌 거미줄, 일벌의 하루, 정원 그리고 새벽을 밝게 비춰주는 금성까지 자연의 오브제들을 펜 끝에 남아 책 속에 옮겨 놓았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을 가진 저자는 전이의 시간을 마음껏 횡단한다. 애커먼은 우월한 인간의 입장으로 새벽의 세상을 바라보거나 단지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찰나의 새벽을 지배하지 않는다. 새벽은 성공을 위해 지배해야 할 시간이 아니며 우리가 견고하게 믿고 있던 삶을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하는 상실의 시간도 아니다. 비록 짧지만, 다시 한 번 삶에 얽혀들 수 있는 자유의 시간이다.

 

애커먼이 바라보는 새벽의 세계는 자연이 공존하는 조화로운 세상이다. 새벽을 예감하는 눈에 각인된 새벽의 다양한 장면에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등장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무슨 의미를 주고받는 저들끼리의 대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의 귀에는 언제나 한량없이 즐겁고 밝고 명랑하게 들린다. 새벽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그저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자기 기분을 가지고 새벽의 세계에 아무렇게나 간섭할 일은 아니다. 그 속에 사는 생명 고유의 영역이며 그들의 특권적인 삶의 방식이다.

 

하나가 되는 것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각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피워내며 서로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일도 아름답다. 본래의 아름다움에 영롱한 보석을 달아주는 듯하여 본래의 아름다움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이 새벽의 역할이다. 새벽이 없었더라면 새 아침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한다.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지만 어둠은 무섭다. 어둠이 있고 그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에 새벽을 예감하는 사람은 새 아침의 감동을 새롭게 또 새롭게 되풀이해 만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한테 그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설명했다. 실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전혀 감탄하지 않았다.”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 중에서, 《새벽의 인문학》 187쪽)

 

 

새벽을 예감하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새벽의 인문학》 속에 담은 새벽의 풍경에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새벽에 일찍 눈 뜨는 일은 버겁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저자처럼 소박한 사치의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과연 저자처럼 새벽형 인간이 된다고 하더라도 새벽의 감동은 온전하게 느낀다는 보장은 없다. 글에 나오는 동물들은 자연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사는데 익숙한 도시인에게는 낯설고 생소하다. 게다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종도 있다. 국내 독자에게 낯선 동물을 소개하는 글은 책의 재미를 떨어뜨린다.

 

무한속도 경쟁 사회가 될수록 ‘느림’의 주문은 순식간에 효력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몸에 ‘시간’이 얹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띠 위를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간다. 발전과 계몽을 강조하는 근대주의와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 논리가 더욱 강조되면서부터 새벽형, 아침형 인간은 매력적인 인간형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새벽형, 아침형 인간이 강조하는 근면의 미덕 속에 남보다 우수한 능력을 갖춰, 더 많은 ‘자본’을 가져 경쟁사회에서 승리한다는 공식이 숨겨져 있다. 엄청난 성공의 열매를 먹기 위해 새벽에 일찍 일어나 노동하는 새가 된다면 과연 우리 삶이 행복할까.

 

진짜 새벽형 인간은 오늘 하루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해본다. 새벽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만끽하는 것은 마음의 공부이다. 왁자지껄한 공간에서 들리는 큰소리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삶과 우주, 죽음 등 조용한 서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삶의 교훈을 얻기도 한다. 《새벽의 인문학》은 아름다운 새벽 자연 이야기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새벽 기운이 선사하는 밝음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아침 햇살이 비치면 이내 사라질 것에도 항상 그렇게 새벽은 찾아온다. 자신의 삶이 짧은 것을 한탄하지 않는다. 자신이 머물렀던 그 순간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새벽의 세계가 멋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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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면이 친구가 되서 새벽은 익숙한 광경인데..미안하게도 이웃에겐..괴로울지도 모릅니다.
저놈의 집구석은 밤낮이 없다고...
낮도..밤도..눈 뜨고 있는 시간이 길다보니
가장 에너지가 풍부한 시간이 새벽인지라.. 움직임이 다소 활발합니다.
밀린 청소라든가..산책을 나가는 것도..
보통 새벽이기 일쑤니..말이죠.
새벽 4시부터 6시가 되기전..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cyrus 2015-03-05 23:33   좋아요 1 | URL
저도 새벽 4~6시 사이가 좋아요. 제가 수면 시간이 짧은 편이라 올빼미형과 아침형 인간 중간입니다. 한 번은 새벽 2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데 5시쯤에 눈을 뜬 적이 있어요. 이렇다 보니 방에 불을 끄지 않은 채 잠이 드는 버릇이 많아서 새벽 넘으면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어요.

[그장소] 2015-03-05 23:47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로 밝은것이..눈에 상당한
피로감을 줘서..저는 촉수낮은 불빛을
선호합니다.
혼자있음..스텐드가 더 편하고요.
아늑하기도 하고.
^^

cyrus 2015-03-05 23:53   좋아요 1 | URL
예전에 알라딘에서 책 읽을 때 사용하는 스탠드를 할인 가격으로 판 적이 있어서 샀는데, 이게 불량인지 1년도 채 못 되어 고장 나고 말았어요. 그 스탠드로 새벽에 책 읽을 때가 좋았어요.

AgalmA 2015-03-05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 현실은...새벽 첫차, 특히 버스 타는 분들은 용역일, 청소 등 허드렛일 하시는 분들로 만원이죠. 아침형보다 더 이른 새벽형 인간/대중들인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느냐 하면.....
인문학적 자기계발서들의 반듯한 글들과 (심신수양, 조화...)를 꿈꾸기엔 곤궁한 일상을 비교할 때 ...다들 그들만의 리그 같아서...번번히 쓸쓸해집니다.
좋은 글에 딴지 걸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새벽 거리를 볼 때마다 느낀 단상과 괴리가 많이 느껴져서 몇 자 적었습니다...

[그장소] 2015-03-05 00:43   좋아요 1 | URL
아하핫...그들이 다 잘되었으면 재벌이 되었어야 하는데..말이죠.
병든 자(저처럼..신경계가 망가지거나)아니면 먹고사니즘 때문에..노동으로 새벽빛을봐야하는..것이 현실이란..
지극한 현실.앞에 아침형 인간은 무슨...아침동생이나 잘...챙기면 다행...뭐~ 이러는^^;

cyrus 2015-03-05 23:43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제가 대학생 때 시험 기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새서 공부하다가 새벽 첫 버스를 탄 적이 많았어요. 그때 첫 손님으로 시장에 과일, 야채 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었어요.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짐을 혼자서 옮기면서 버스에 타시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수이 2015-03-05 0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_ 내 말이_ 모두 다 성공하기만을 바라는 건 물론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겠지만 이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말은 어쩐지 일그러져 보여. 이건 내 마음이 일그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산 속에서 한 1년 푹 썩다 오고 싶어지네_ 이 글 읽으니까_ 물론 순천에서도 썩고 있지만 후후후

cyrus 2015-03-05 23:46   좋아요 0 | URL
혹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 보신 적이 있어요? 월든 호수에 사는 소로처럼 산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해요. 매주 한 사람씩 나오는데 생각보다 산 속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가끔 저도 자연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수이 2015-03-06 11:56   좋아요 0 | URL
응_ 봤지. 시부모님 애청 프로_ 하지만 나는 그리 살기는 힘들듯;; 아주 잠깐이면 모를까;; 근데 혼자 살고 싶다는 건 아니지;;

[그장소] 2015-03-05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의 영향탓도 없진 않지만..그렇다고 그것이 전부 진실일 것이라 믿진 않아요.일각이겠죠...
그러나 분명 성공하기위해 더많이 냉정과 열정이란 이름으로 거침없이 상처를 준 사람들이 많기도 했었을 테고..시간이 가면서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을거라 여겨요.불편한 진실이 아닌...당연한 진실요.
그게..뭐?...하는 식이...되는 ~

stella.K 2015-03-05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읽으려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
마침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을 하느라고 서평 마감일을 지키지 못하면
그도 낭패다 싶어서.ㅠ
나는 잠을 좀 늦게 자는 편이라 아침까지 자자는 주의라서
새벽에 깨어 있는 경우가 별로 없지. 어쩌다 새벽에 잠을 깨도
막상 뭘 해야할지도 잘 몰라 멀뚱멀뚱 하다 다시 잠들거나
어제 보다만 영화를 마져보던가 하는 게 전부지.
오래 전 시나리오 공부할 때 새벽에 일어나서 워크숍 작품을
쓴 일이 있는데 기분이 남다르더군. 새벽을 정복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 기분도 나쁘진 않지만 난 잠이 더 좋은 것 같아.ㅋㅋ

책에 대한 내용 보단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읽어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어. 기회는 또 오겠지?ㅠㅠ

cyrus 2015-03-05 23:50   좋아요 0 | URL
대학생 때 친구랑 술 먹고, 공부할 때 밤을 새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때가 그립습니다. 누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혈기왕성한 청춘을 믿고 새벽을 지배했던 시절이었어요. ㅋㅋㅋ

[그장소] 2015-03-05 23:50   좋아요 1 | URL
이..말투 신선하니 좋은데요!!
툭툭 편하게 던지듯 ...친한 사이같이요.
독백처럼 ...말하듯..좋은것 같아요.

자주 보여 주세요.이런 모습도요.
^^♥

stella.K 2015-03-06 11:31   좋아요 1 | URL
시루스/ 그거 언제든 가능해. 내가 시나리오 학원다녔던
그 시절 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도 젊은애들 틈바구니에서
새벽이 되도록 그짓하고 돌아다녔잖니.
처음엔 그렇게 못할거라고 했는데 닥치니까 하더라.
생각하면 지금 보다 적은 나인데 말야.
나도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해.ㅋ

그장소님/ 전 님이 이렇게 끼어드시니까 더 좋습니다.^^

[그장소] 2015-03-0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stella.k 님. 허락하신다면..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끼어듦을..허해 주십시오.
저는 팬이 될 듯합니다.
이 말투에 묘한 중독성이 느껴져서요.^^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책 이야기 - 중세사본에서 윌리엄 모리스까지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옛날 사람들은 종종 책을 위험하다고 했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켰고, 중세 교회는 많은 책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책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갖고 싶은 책과 자신의 목숨을 바꾼 사람도 있다. 데모랭이라는 철학자는 가난했지만, 책을 사랑했다. 빵과 우유로 간신히 연명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가 사는 다락방 안에는 책이 가득 찼다. 어느 겨울날 마지막 푼돈으로 허기를 채우려던 그는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동안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책! 그는 주저 없이 책을 샀다. 그러나 이 책은 데모랭이 마지막으로 산 책이 되고 만다. 이 책을 손에 쥔 그는 이후 기력이 다해 다락방에서 생을 마쳤다.

 

이들에게 책은 ‘사랑’의 대상이다. ‘책을 사랑한다’는 건 책의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애서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책에 담긴 지혜보다 멋진 표지와 장정을 더 좋아한다. 책들을 모아 책꽂이에 쌓아두는 것만이 관심이다. 책을 보관할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소설가 장정일은 누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가면 책 위에 쌓인 담뱃재들을 일일이 닦았다고 한다. 애서가 앞에서 라면 냄비 받침이나 베개 대용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간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선인들은 책에 미친 사람을 서치(書癡)라고 불렀다. 더 나아가, 글을 읽고 책을 들추는 일을 지나치게 즐기는 이를 서음(書淫)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음란한 지경에 이르도록 책을 탐한다. 그러나 애서가들에게 그 음란은 아름답다.

 

탐나는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던 엽기적인 애서가들이 집착한 책들은 어떤 책이었을까. 그 책들은 왜, 어떻게 쓰이고 만들어졌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책 자체를 예술품으로 즐기는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에 이광주 선생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는 말라르메의 멋들어진 문장에 어울리는 한 권의 헌사와 같다. 애서가의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 이르기 위해 이루어졌다. 요즘 세상에야 흔하디흔한 것이 책이지만 중세유럽의 사본문화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책’은 정말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었다.

 

종이가 보편화하기 전엔 파피루스와 밀랍을 칠한 목판, 점토판, 양피지에 직접 글을 적어야 했다. 손으로 옮겨 적는 일을 하는 사람을 필경사라고 한 것은 밭을 가는 것처럼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기 전에 땅을 만들듯이, 기초를 다진다는 의미가 바로 교양의 뜻이다. 성서를 손으로 베껴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성직자뿐인데 책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본문화의 토양이 처음으로 다져진 곳이 교회였다. 책은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등 극히 한정된 계층만 읽을 수 있고 소장할 수 있었다. 중세엔 성서 한 권을 얻는 대가로 넓은 포도밭을 내놓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신분 과시용이요 교양계층 유산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름답게 장식했고 고풍스럽게 만들어졌다.

 

시간은 모든 사물에서 젊음의 신선함을 앗아가는 가차없는 파괴자이지만 때로 그중 일부를 고풍스러운 향수의 대상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현재성이나 효용성이 증발해버린 후에도 그 사물은 과거 한 시대 한 시절의 기념물로 남아 지나가 버린 그때 그 순간의 감미로움을 일깨우는 촉매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책이야말로 그러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가장 친근한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책이 지닌 미학적 본질을 선호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데 노력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모리스다. 말년에 시작된 것이라 뒤늦은 감은 있지만, 모리스가 책 제작 순례를 하게 한 동반자는 책이었다. 모리스는 죽기 전에 완벽하게 인쇄된 책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가 인쇄하고 싶은 책은 항상 자신 곁에 두면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장정, 서체, 문양 등이 긴밀한 조화를 이뤄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제본 과정을 모리스는 ‘또 하나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모리스는 1891년 출판공방 켐스콧 프레스를 설립하고 온 에너지를 쏟아 53종 66권의 책을 빚어냈다.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고 머리글자 장식, 책 테두리 장식을 직접 디자인했다. 한정으로 출간된 책들은 부호나 이름난 장서가들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함께 장서가들이 가장 가지고 싶은 책이 모리스가 만든 『초서 작품집』이다. 젊은 시절 모리스는 초서의 글을 탐독했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중세의 미를 발견했다. 모리스에게 초서의 글은 ‘아름다운 책을 위한 건축’을 위한 멋진 기자재였다. 중세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의 작품을 모은 이 책을 위해 모리스는 초서체를 별도로 개발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모리스의 친구인 번 존스의 아름다운 삽화도 들어 있다. 애초 300권을 찍기로 했으나 애서가들의 강력한 요구로 400권을 찍었다고 한다.

 

흔히 수제 책이라면 요즘 한참 부각되고 있는 북아트를 연상하지만, 책을 예술 활동의 대상으로 삼는 북아트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소수 계층만 향유하는 예술로만 국한되어 있다. 몇 년 전에 가격이 비싼 예술장정 문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름난 금속공예 작가가 은으로 세공한 케이스를 만들고 한정판으로 제작, 그 희소성을 돈으로 따지기 어려울 정도라 했다. ‘아름다운 책’은 무조건 값비싸고 화려해야만 할까. 혹자는 그저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고 내용이 아닌 디자인에 치중한 ‘아름다운 책’의 가치에 회의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리스는 책의 예술성에 관심이 많은 탓에 텍스트의 중요성을 소홀했다. 본문을 임의로 편집하거나 각주를 붙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리스의 책을 화폐 가치로 환산하려는 시선이 많을수록 모리스가 추구한 책의 정신을 경시한다. 이미 시인, 예술가,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드높인 노작가가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을 만큼 책 만드는 일은 매력 넘치는 일이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간직하고 선물하는 수제 책에는 책 소유자에 대한 정성 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아직도 책에 대한 일말의 숭배의 감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리스의 잠언으로도 충분히 포만감을 느낄 만하다. 책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위한 종이로 된 물건이 아니다. 책은 수집가를 유혹하는 ‘금단의 과실’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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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5-02-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단의 과실_ 유혹이 지나치게 크오. 앗 라면 먹어야지 불겠다 ^^

cyrus 2015-02-21 11:13   좋아요 0 | URL
야밤에 라면을! 건강을 생각하십시오. 누님. ^^
 
시간 추적자들
하랄트 바인리히 지음, 김태희 옮김 / 황소자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화창한 오후의 어느 날, 시냇물이 흐르는 언덕 위에 앨리스가 언니와 앉아 있다. 그림이라고는 한 장도 없는 지루한 책을 읽고 있던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앨리스는 내심 언니와 같이 놀고 싶다. 그렇지만 책 속에 빠진 언니는 앨리스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앨리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너른 들판을 쳐다본다. 그때 난데없이 토끼 한 마리가 마치 사람처럼 조끼와 바지를 입은 채 두 발로 지나간다. 앨리스는 토끼를 보고 깜짝 놀란다. 토끼는 조끼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더니 놀라서 혼잣말을 한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이렇게 늦었으니…….” 토끼는 부리나케 어디론가 뛰어간다. 호기심에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간다.

 

토끼의 모습은 세상을 움직이게 만드는 시간 속에 사는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시간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 생각에 침투해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꾼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대작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것은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우리는 돈이나 보이는 것을 관리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시간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무감각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만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무자비할 정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집어삼킨다. 그러면 시간이 점점 줄어들수록 우리는 촉박해지는 상황에 직면한다.   

 

Knappe Zeit. ‘제한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씩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남는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하랄트 바인리히는 세계 지성사에 등장했던 사상가와 작가 들이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고, 사용했는지 소개한다. 그가 쓴 책 《Knappe Zeit》는 우리나라에선 ‘시간 추적자들’이라는 재미있는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가, 예술가들은 얼마 남지 않은 ‘빠듯한 시간’을 크로노스에게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쫓아가는 추적자가 된다. 그러면 앨리스가 바쁘게 지나가는 토끼를 쫓아가는 것처럼 독자는 똑똑한 시간 추적자들을 따라가면 된다.

 

‘빠듯한 시간’을 맨 처음 사수하기 시작한 사람은 히포크라테스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직계후손답게 히포크라테스는 시간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의 횡포를 간파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로 잘못 알려진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기둥에 새겨진 명언인 ‘너 자신을 알라’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격언으로 일컫는 불멸의 문장을 남겼다. 흔히 ‘인생은 짧고, 기예는 길다’에서 ‘기예’를 예술 개념과 동등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예술의 위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격언이 ‘의술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의아하다. 여기서 말하는 기예는 예술이 아닌 의술에 가깝다. 좀 더 포괄적으로 본다면 살아가면서 전수되어 배워야하는 앎의 내용도 될 수 있다. 이 말 뒤에 “기회는 덧없고, 경험은 미혹하며, 판단은 지난하다”란 말이 이어진 것만 해도 그렇다. 히포크라테스는 예술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것이 아니라 ‘빠듯한 시간’을 올바르게 행동할 것을 스스로 각성하는 동시에 ‘빠듯한 시간’을 무심코 간과하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운명의 세 여신」 1505년

 

 

 

그림 오른쪽에 실패를 들고 있는 여신이 운명의 실을 뽑는 장녀 클로토, 실을 들고 있는 가운데 여신은 운명의 실을 감거나 헝클이는 차녀 라케시스, 왼쪽에 가위를 들고 운명의 실을 자르는 막내 아트로포스다.

 

 

 

히포크라테스의 충고는 수천 년 동안 전해지게 되었고, 후대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사용됐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극 《발렌슈타인》에서 시간을 ‘수천 개의 모래알’처럼 흘러내린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은 자신의 손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모래알들이 얼마 남아있는지 잘 알았고, 흘러내리는 시간의 모래알보다 좀 더 빠르게 예술의 불꽃을 피우고 싶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예술가라도 하나의 실로 된 자신의 운명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는 여신 아트로포스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슈베르트, 모차르트, 라파엘로 같은 조숙한 천재들은 예술의 불꽃을 크게 피우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으니까.

 

실러는 시간을 손에 오랫동안 쥘 수 없는 조그만 모래알갱이처럼 여겼지만,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시간은 살아가는 내내 손에 꼭 쥐고 있어야 ‘돈’이다. 원래 시간의 중요성을 돈의 가치와 동등하게 결부시킨 사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였지만, 시간을 돈처럼 관리하는 방법은 프랭클린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프랭클린은 일분일초를 소중하게 생각해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근면 성실함과 언제나 유익한 일에 힘을 쏟은 결과 초등학교에서 1년간 글을 배운 것이 전부인 그가 피뢰침을 발명하고, 미국 독립 성취에 결정적인 이바지를 한다. 이것 말고도 프랭클린이 이룬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프랭클린은 ‘빠듯한 시간’을 가장 잘 쓰고, 자신의 계획대로 잘 쫓아간 위대한 시간 추적자였다.

 

반면 ‘빠듯한 시간’이 주는 정신적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자꾸 흘러가만 가는 시간을 잡으려고 무진장 애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의 움직임에 쉽게 종속당한다. ‘빠듯한 시간’을 자각하는 수준을 넘어 ‘시간의 노예’가 된다. 앨리스 이야기에 나오는 토끼처럼 시계를 쳐다보면서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계속 시간을 집어삼키는 크로노스에, 생명의 실 한 가닥에 언제 들이댈지 모르는 아트로포스의 가위질이 두렵다. 독일의 철학자 블루멘베르크의 명제처럼 세계는 시간을 앗아간다. 히틀러는 ‘빠듯한 시간’ 안에 게르만 대제국을 만들고 싶었고, 다스리고 싶었다. 오스트리아인의 야욕은 극단적 강박관념을 사로잡혔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 전체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만약에 당신이 《시간 추적자들》을 읽으면서 ‘빠듯한 시간’을 쫓아가는 위대한 인물들을 호기심 가득한 앨리스처럼 따라간다면 시간의 신의 손아귀와 운명의 여신이 들이대는 가위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를 잊지 마시라. 제한 시간이다. 우리는 제한 시간이 정해진 인생의 시한폭탄 하나쯤 가지고 있다. 째깍째깍하면서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 인생의 시한폭탄은 터진다. 재수 없으면 너무 이른 시간에 폭탄이 터지기도 한다. 이 폭탄이 터지면 당신은 가위를 든 아트로포스를 만나고 지옥 또는 천당으로 향한다. 모차르트처럼 일찍 생명의 실이 끊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크바르트는 ‘빠듯한 시간’ 안에서 전력 질주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직시하고, ‘느림’의 삶을 권고한다. 천천히 할수록,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 나오는 새로운 것들은 한순간에 과거의 상징으로 변하며, 새로운 것에 도취할수록 시간의 운동이 너무 빠르게 느껴진다. 잠깐 숨을 고르면 ‘빠듯한 시간’에 대한 초조한 마음이 줄어들고, 협소한 시간의 범위 안에 달성하고 싶은 삶의 목적을 세울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빠듯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된다. 잘 사용하면 프랭클린처럼 부지런한 시간 추적자가 되고, 반대로 시간에 쫓겨 자멸에 이르는 히틀러가 된다. 시간을 소홀히 여기지 마라. 시간의 중요성을 발견한 세네카의 잠언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대가 이용할 줄만 안다면 인생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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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1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쁘게 사는데 시간관리 하는것 같지는 않네요 ^^;; 예전에 프랭클린다이어리를 사용했는데 맨날 똑같은 일정이 반복되다 보니 쓰다가 때려쳤어요 ㅋㅋ

cyrus 2015-02-15 12:11   좋아요 0 | URL
저도 시간관리를 하지 않은 성격이에요. ^^;;

라파엘 2015-02-14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ㅎㅎ

cyrus 2015-02-15 12:16   좋아요 1 | URL
시간을 주제로 다룬 문학, 철학을 소개한 책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작가들이 나옵니다. ^^

수이 2015-02-1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길게 살고 싶어. 즐겁게 유쾌하게. 아 근데 내 속은 너무 좁은가봐_

cyrus 2015-02-15 12:17   좋아요 0 | URL
즐겁게 잘 사시는 것 같은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