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책 이야기 - 중세사본에서 윌리엄 모리스까지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옛날 사람들은 종종 책을 위험하다고 했다. 진시황제는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켰고, 중세 교회는 많은 책을 이단으로 몰아갔다. 책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갖고 싶은 책과 자신의 목숨을 바꾼 사람도 있다. 데모랭이라는 철학자는 가난했지만, 책을 사랑했다. 빵과 우유로 간신히 연명하는 생활을 했지만, 그가 사는 다락방 안에는 책이 가득 찼다. 어느 겨울날 마지막 푼돈으로 허기를 채우려던 그는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그동안 그토록 손에 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책! 그는 주저 없이 책을 샀다. 그러나 이 책은 데모랭이 마지막으로 산 책이 되고 만다. 이 책을 손에 쥔 그는 이후 기력이 다해 다락방에서 생을 마쳤다.

 

이들에게 책은 ‘사랑’의 대상이다. ‘책을 사랑한다’는 건 책의 내용이나 책 읽는 행위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넘어 책이라는 사물 그 자체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애서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책에 담긴 지혜보다 멋진 표지와 장정을 더 좋아한다. 책들을 모아 책꽂이에 쌓아두는 것만이 관심이다. 책을 보관할 때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소설가 장정일은 누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가면 책 위에 쌓인 담뱃재들을 일일이 닦았다고 한다. 애서가 앞에서 라면 냄비 받침이나 베개 대용으로 사용한다고 말했다간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모르겠다. 선인들은 책에 미친 사람을 서치(書癡)라고 불렀다. 더 나아가, 글을 읽고 책을 들추는 일을 지나치게 즐기는 이를 서음(書淫)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음란한 지경에 이르도록 책을 탐한다. 그러나 애서가들에게 그 음란은 아름답다.

 

탐나는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던 엽기적인 애서가들이 집착한 책들은 어떤 책이었을까. 그 책들은 왜, 어떻게 쓰이고 만들어졌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책 자체를 예술품으로 즐기는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세상에 이광주 선생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는 말라르메의 멋들어진 문장에 어울리는 한 권의 헌사와 같다. 애서가의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 이야기》에 이르기 위해 이루어졌다. 요즘 세상에야 흔하디흔한 것이 책이지만 중세유럽의 사본문화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책’은 정말 진귀하고 값비싼 것이었다.

 

종이가 보편화하기 전엔 파피루스와 밀랍을 칠한 목판, 점토판, 양피지에 직접 글을 적어야 했다. 손으로 옮겨 적는 일을 하는 사람을 필경사라고 한 것은 밭을 가는 것처럼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기 전에 땅을 만들듯이, 기초를 다진다는 의미가 바로 교양의 뜻이다. 성서를 손으로 베껴 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성직자뿐인데 책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본문화의 토양이 처음으로 다져진 곳이 교회였다. 책은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등 극히 한정된 계층만 읽을 수 있고 소장할 수 있었다. 중세엔 성서 한 권을 얻는 대가로 넓은 포도밭을 내놓는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신분 과시용이요 교양계층 유산계층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귀중품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름답게 장식했고 고풍스럽게 만들어졌다.

 

시간은 모든 사물에서 젊음의 신선함을 앗아가는 가차없는 파괴자이지만 때로 그중 일부를 고풍스러운 향수의 대상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도 한다. 현재성이나 효용성이 증발해버린 후에도 그 사물은 과거 한 시대 한 시절의 기념물로 남아 지나가 버린 그때 그 순간의 감미로움을 일깨우는 촉매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책이야말로 그러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순례의 가장 친근한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

 

책이 지닌 미학적 본질을 선호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데 노력한 사람이 바로 윌리엄 모리스다. 말년에 시작된 것이라 뒤늦은 감은 있지만, 모리스가 책 제작 순례를 하게 한 동반자는 책이었다. 모리스는 죽기 전에 완벽하게 인쇄된 책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가 인쇄하고 싶은 책은 항상 자신 곁에 두면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장정, 서체, 문양 등이 긴밀한 조화를 이뤄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는 제본 과정을 모리스는 ‘또 하나의 건축’이라고 불렀다.

 

 

 

 

 

 

모리스는 1891년 출판공방 켐스콧 프레스를 설립하고 온 에너지를 쏟아 53종 66권의 책을 빚어냈다. 새로운 서체를 개발하고 머리글자 장식, 책 테두리 장식을 직접 디자인했다. 한정으로 출간된 책들은 부호나 이름난 장서가들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없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함께 장서가들이 가장 가지고 싶은 책이 모리스가 만든 『초서 작품집』이다. 젊은 시절 모리스는 초서의 글을 탐독했고, 그곳에서 잃어버린 중세의 미를 발견했다. 모리스에게 초서의 글은 ‘아름다운 책을 위한 건축’을 위한 멋진 기자재였다. 중세 영국의 시인 제프리 초서의 작품을 모은 이 책을 위해 모리스는 초서체를 별도로 개발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모리스의 친구인 번 존스의 아름다운 삽화도 들어 있다. 애초 300권을 찍기로 했으나 애서가들의 강력한 요구로 400권을 찍었다고 한다.

 

흔히 수제 책이라면 요즘 한참 부각되고 있는 북아트를 연상하지만, 책을 예술 활동의 대상으로 삼는 북아트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편이다. 소수 계층만 향유하는 예술로만 국한되어 있다. 몇 년 전에 가격이 비싼 예술장정 문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름난 금속공예 작가가 은으로 세공한 케이스를 만들고 한정판으로 제작, 그 희소성을 돈으로 따지기 어려울 정도라 했다. ‘아름다운 책’은 무조건 값비싸고 화려해야만 할까. 혹자는 그저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고 내용이 아닌 디자인에 치중한 ‘아름다운 책’의 가치에 회의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리스는 책의 예술성에 관심이 많은 탓에 텍스트의 중요성을 소홀했다. 본문을 임의로 편집하거나 각주를 붙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리스의 책을 화폐 가치로 환산하려는 시선이 많을수록 모리스가 추구한 책의 정신을 경시한다. 이미 시인, 예술가, 사회주의자로 이름을 드높인 노작가가 남은 열정을 모두 쏟아 부었을 만큼 책 만드는 일은 매력 넘치는 일이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간직하고 선물하는 수제 책에는 책 소유자에 대한 정성 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예술이 낳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답하리라. 그 다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아직도 책에 대한 일말의 숭배의 감정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모리스의 잠언으로도 충분히 포만감을 느낄 만하다. 책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을 위한 종이로 된 물건이 아니다. 책은 수집가를 유혹하는 ‘금단의 과실’과도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5-02-20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단의 과실_ 유혹이 지나치게 크오. 앗 라면 먹어야지 불겠다 ^^

cyrus 2015-02-21 11:13   좋아요 0 | URL
야밤에 라면을! 건강을 생각하십시오. 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