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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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에 목마른 더벅머리 소년, 정(情)을 그리워한 노학자

 

인연은 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스쳐지나가는 찰나적 만남은 한때의 마주침이라 기억도 나지 않는 만남에 불과하다. 그래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이 사람의 명이 다할 때까지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그 만남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확 달라지게 되는 삶이 연출될 수도 있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도 있다. 사실 우연한 만남이 운명을 바꾸는 기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으며 한 사람의 인생 자체를 넘어서 역사의 흐름 한 줄기를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들어가게 할 수 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관계로 발전하는 만남, 그런 만남은 정말 운명을 바꾸는 만남이다. 오랜 기간의 만남은 인연의 폭과 골을 넓고 깊게 만든다. 그런 만남의 인연(因緣)은 아름다운 연인(戀人)으로 바뀐다.

 

비록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의 만남은 우연의 만남으로 인해서 맺어인 인연이 평생동안 서로를 의지해주는 사제로 이어지게 된 극적이면서도 대단한 관계이다. 역사에서 '만약~했더라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이 있기 마련이다. 만약에 정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지 않은 채 조정 내에서 승승장구한 학자로서의 삶을 유지했다면 지금까지도 불가사의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강진에서 이룩한 학문적 성과물들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정다산의 학문 업적에만 손실을 얻는 건 아니다. 진실되게 한결같이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훌륭한 제자 한 명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1802년,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정다산은 외인이나 다름 없었다. 저 멀리 한양에 살고 있는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너무나고 보고 싶었고 그리웠다. 그가 좋아하는 학문 수양과 시작(詩作)만으로도 관계의 정(情)이 결핍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주막집에 작은 서당을 열어 그 곳 마을에 사는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서당에 모여든 아이들 중에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까막눈들도 있었지만 정다산은 친절하게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공부를 시켰따. 서당에 공부하는 아이들 무리 중에는 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아전의 아들이었던 열다섯 살 더벅머리 소년도 있었다.

 

어느 날, 서당에서 공부를 마친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정다산은 그 더벅머리 소년을 따로 불러 서당에 남도록 했다. 그러자 소년은 스승과 단 둘이 있는 상황 때문인지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스승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니, 질문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억눌린 감정들을 뱉어내는 듯한 고민에 가까웠다. 그러자 정다산은 친절하게 소년의 고민을 들어주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 선생님! 그런데 제게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둔하고, 둘째는 앞뒤가 꼭 막혔으며, 셋째는 답답합니다. 저 같은 아이도 정말 공부할 수 있나요?

 

 - 그렇구나. 내 이야기를 들어보렴, 배우는 사람은 보통 세 가지 큰 문제가 있다. 너는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없구나.

 

 - 그것이 무엇입니까?

 

 - 첫째는 민첩하게 금세 외우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가르치면 한 번만 읽고도 바로 외우지. 정작 문제는 제 머리를 믿고 대충 소홀히 넘어가는 데 있다.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지. 둘째,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질문의 의도와 문제의 핵심을 금세 파악해낸다. 바로 알아듣고 글을 빨리 짓는 것은 좋은데, 다만 재주를 못 이겨 들떠 날리는 게 문제다. 자꾸 튀려고만 하고, 진중하고 듬직한 맛이 없다. 셋째, 깨달음이 재빠른 것이다.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않고 대충 하고 마니까 오래가지 못한다.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34~35 -

 

 

정다산은 소년의 고민과 그에 대한 답변을 글로 남겼다. 글의 제목을 '삼근계'(三勤戒)라고 지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다산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소년은 스승이 써준 글이 적힌 종이 한 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이 한 번의 가르침 그리고 스승이 제자에게 건내준 종이 한 장이 더벅머리 소년이었던 황상의 인생을 한 번에 뒤바꿔놓게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오직 황상의 인생 자체에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황상이라는 정직한 제자 한 명을 두게 된 정다산은 18년 동안의 유배 생활에서의 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 동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정신적 부족함들을 채워줄 수 있는 일생 일대에 있어서 중요한 만남이었다.

 

 

 

 

 '제자바보' 정다산, '스승바보' 황상

 

정다산과 황상, 두 사제의 교류 관계는 정다산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실천했을 정도로 정말 대단한 점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이들의 관계가 우직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요즘 젋은 세대들이 인터넷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 중에 '~바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딸바보'라는 용어는'딸을 바라보는'의 준말. 즉 자신의 딸을 각별히 아끼는 아버지를 뜻한다. '딸' 대신에 특별히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을 대상을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정다산은 항상 황상에게 편지를 보낼 정도로 각별히 아꼈고,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유일한 제자였다. 말 그대로 정다산은 '제자바보'였고, 황상은 '스승바보'인 것이다.

 

정다산과 황상의 돈독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황상은 18살에 장가를 가게 되었다.  장가들어 신혼의 재미에 빠진 황상이 그동안 부지런하게 이어져 온 학문 수양에 점점 소홀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자 이를 잠자코 지켜 보고 있던 정다산은 제자의 태도에 대한 실망감과 한심함을 담은 편지 한 통을 보내게 된다.

 

네 말씨와 외모, 행동을 보니 점점 태만해져서, 규방 가운데서 멋대로 놀며 빠져 지내느라 문학 공부는 어느새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다면 마침내 못나고 어리석은 인간이 된 뒤라야 그칠 것이다. 텅 비어 실지가 없으니 소견이 참으로 걱정스럽구나. (중략) 진실로 능히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뜻을 고쳐, 내외가 따로 거처하도록 해라. 마음을 오로지하여 글공부에 힘을 쏟을 수 없다면, 글이 안 될 뿐 아니라 병약해져서 오래 살 수도 없을 터.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137~138 -

 

 

 

황상의 공부 태도에 못마땅하게 여겨 스승이 그에게 각방을 써라고 훈계를 한 것이다. 이제 막 신혼의 달콤함에 젖은 제자 입장에서는 각방을 요구하는 스승의 훈계에 황당할 터. 하지만 황상은 스승이 보낸 편지 한 통 앞에서도 스승의 격노한 모습이 느껴졌던가 보다. 그는 노한 스승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한 뒤 신혼집을 뒤로하고 이전에 스승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고성사라는 절로 올라갔다. 어떻게 보면 공부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정다산의 훈계 그리고 그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황상의 반응이 오늘날 현대의 독자가 보기에는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당시 유교사회 내에서는 사제 간의 예의 역시 부자 간의 예의만큼이나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기본적인 도리였으며 항상 스승의 가르침을 끝까지 따르려고 하는 황상의 한결같은 성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새신랑 황상에게 각방을 써라고 하는 훈계의 의미 뒤에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정다산의 말 못하는 심정이 숨어 있다. 오랜 유배생활하는 동안에 부인의 얼굴이 잊혀질 정도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마당에 신혼생활을 하기 시작한 제자의 모습이 살짝 질투가 날 법했을 것이다. 그리고 황상이야말로 자신이 가르쳤던 강진 서당의 제자들 중에 친아들처럼 여길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제자였다. 외로운 스승은 자신의 곁에 황상과 함께 하기를 바랬다. 특히 자신이 직접 인정할 정도로 시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황상과 함께 시를 쓰면서 관계가 지속되기를 원했다.

 

 

 

 노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하지만 사람의 관계가 한결같이 유지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정다산은 길고 길었던 유배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황상은 학식 좀 있는 선비들이라면 가게 되는 벼슬아치가 되는 삶의 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농민으로서의 삶의 길을 선택했다. 이 두 사람은 간간이 편지로 근황을 확인했지만 오랫동안 서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지역적 제약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만큼이나 이 두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간절한 그리움뿐만 아니었다. 속세의 삶에 집착하는 몇 몇 제자들로 인해서 정다산은 괴로워했으며 일부 제자들은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황상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사 일에 충실하느라 그동안 충실했던 학문 수양이 예전에 비해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밭과 관련된 복잡한 송사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나 각자 처하고 있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이 두 사람은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했고 만나고 싶었다,

 

그러다가 정다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접한 황상은 드디어 스승을 찾아 뵙기 위해 상경하게 된다. 이 때 정다산의 나이는 75세, 황상의 나이는 49세였다. 황상이 더벅머리 소년 시절 때 정다산을 처음 만난지 34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18년 만에 재회하였다. 백발의 스승은 건강이 성치 않았지만 자신이 아끼던 제자의 방문을 알아봤고 크게 반가워했다. 비록 짧은 체류였지만 49세의 황상은 소년 시절 때처럼 변함없이 정다산의 곁을 지켜주었다. 정다산을 만난 지 이틀 뒤에 황상은 작별의 큰절을 올리고 다시 고향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정다산은 황상과의 만남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노환과 질병으로 인해 의식이 혼미한 상태 속에서도 애제자를 위해서 짤막한 글씨와 작은 선물을 전해주었다.

 

 황자중(=황상)에게 준다.『규장전운』한 건, 중국 붓 한 자루, 중국 먹 한 개, 부채 한 자루,

 연배 한 개, 여비 돈 두 냥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404~405 -

 

 

늙어버린 스승은 예전처럼 제자를 위해서 긴 내용의 시와 편지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힘들지만 간단하게 제자에게 전해주고 싶은 선물의 목록만 썼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짤막한 선물 목록에는 애제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 있다.『규장전운』이라는 책자 한 권을 준 이유는 농사일 때문에 접어두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제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배를 곯을까봐 여비까지 따로 마련해주었다. 스승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계'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다.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자 보은에 49세의 제자는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흐를 뿐이었다. 스승과의 작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못난 제자를 위해 끝까지 배려해주는 스승의 고마움에 황상은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에 황상은 또 한 번 울어야했다. 황상이 떠난 지 이틀 뒤에 정다산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런 스승과 제자, 또 없습니다."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 정 민『삶을 바꾼 만남』pp 13 -

 

 

 

황상은 소년 시절 때 정다산이 강조했던 '삼근계'의 가르침을 절대로 잊지 않았으며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항상 '삼근계'를 마음에 새기며 평생 공부에 매진했고, 관 뚜껑을 덮을 때까지 한마음으로 공부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황상은 정다산의 삶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깊은 산속에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 짓기 등의 공부를 계속 했으며, 늘그막에는 '일속산방'(一粟山房)이라는 조그마한 거처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오직 공부에만 전념했다. 정다산의 제자들이 출세를 위해 공부할 때, 오직 황상은 스승이 입버릇처럼 일러주신 유인(幽人)의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하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해야 할 학교 내 분위기는 예전 같지가 않다. 사제 간의 의리와 정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스승이 어떤 분인지를 묻는 제자가 없는 시대다. 그리고 학교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는 없고 돈과 폭력이 학교를 창고처럼 만들었다. 요즘 정다산처럼 숙제를 어렵게 내주고 토씨 한 개에 변죽을 부리는 선생이 있다면 인터넷에서 몰매를 맞을지도 모른다. 학부모위원회에 회부될 수도 있다. 사실 정다산은 까다롭고 쫀쫀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두 아들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아끼는 제자인 황상에게 보내는 편지글을 보게 된다면 매번 공부할 것을 권하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유배지에 찾아오는 아들들에게 그동아 공부했던 것들을 확인할 정도로 무척이나 깐깐한 스승이었다. 애제자를 위해서 죽을 때까지 보살핀 스승과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어서까지도 어린 시절처럼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스승의 곁을 지킨 제자 그리고 수십년동안 이어져 온 끈끈한 사제 간의 정(情)은 이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정다산과 황상, 두 사제 관계에서 비롯된 일화들은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범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신뢰와 존중이라는 핵심 가치가 녹아 있다. 진정한 교육과 만남이 어떤 것인지 살펴볼 수 있다. 제자는 없고 학생만 있는 요즘 학교 교육의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연인은 사랑하는 남녀관계를 의미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형성되는 마음 깊은 모든 관계를 지칭한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만남도 가식적일 수밖에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적 관계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될 미덕이다. 관계를 아름답게 바꾸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면 내가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연인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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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티카카 2012-04-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의 책 속의 스승은 다산이신가 봅니다^^

cyrus 2012-05-01 14:59   좋아요 0 | URL
네, 사실 블로그 메인사진 밑에 있는 문구가 다산이 황상에게 했던
말의 일부에요. 다산이 황상에게 삼근계를 전해주는 이야기는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에서도 잠깐 소개하고 있어요.
저는 그 책을 통해서 다산의 삼근계을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
 
뇌를 단련하다 - 인간의 현재 도쿄대 강의 1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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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발적인 교양 공부를 하지 못하는 대학생들

 

개학날을 코앞 둔 며칠 전에 오랜만에 안부 인사할 겸 대학 동기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와 10여 분 간 정도 전화를 하다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이야기나 나왔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내일 모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있는데 안 올래?'  그 친구가 학과 생활을 하지 않는 나와 깊은 친분이 있어서 예의상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차피 참석하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학과 생활 안 하는 아웃사이더가 갑자기 신입생들이 모이는 곳에 간다는 게 나나 학과 학생들 입장에서는 서로 어색하면서도 눈치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화제를 돌릴 겸 오리엔테이션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후배들이 신입생들 시간표 짜냐?"  친구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신입생 시간표 짜는 거 간단하고 말했다. 신입생들이 수강해야 할 단대별 필수 교양 과목으로 시간표를 만들면 된다고 했다. 나는  '시간표 짤 때 교수님이나 조교 선생님들은 가끔 조언도 해주시냐? " 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듯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입생 시간표는 선배들이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친구와 통화를 끝나고 난 뒤, 문득 다른 대학교 신입생들이 시간표를 만드는 방법이 궁금했다. 우리 학과처럼 타 대학교 학과도 직접 선배들이 손수 만들어 주는 것일까? 

 

학칙에 의하면 신입생이 수강신청을 하거나 시간표를 구성할 때는 학과 또는 학부 지도교수의 지도를 받은 뒤 정하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이미 학부생 경험이 많은 선배들이 도움을 주는 것도 좋은은 방법이다. 하지만 신입생들은 자신이 대학교에서 무엇을 공부하는지에 대해서 모른 채 대학교 캠퍼스에 온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른 채 선배들이 만들어 준 시간표대로 강의 수업을 듣기 때문이다. 특히 신입생 시간표는 오리엔테이션 전날 또는 당일에 만들어지게 되는데 아직 고등학생 티가 역력한 대학 신입생들이 대학교 강의에 대해서 제대로 알 리가 없다. 이렇다보니 학부생들은 신입생들을 위한 시간표 만드는 것을 선배라면 해야 할 일종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정작 지도교수의 도움을 통해 시간표를 구성한다는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학칙을 모른 채 말이다. 사실 학칙대로라면 신입생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강의를 골라 시간표를 만들되, 지도교수 혹은 선배들이 조언을 통해 도움을 주면 좋겠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을 하기가 어렵다. 교수들은 자신이 맡고 있는 연구나 학술과 관련된 이부 활동 때문에 바쁘고 학부생들은 새로 들어올 신입생들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가지 신경 쓰고 준비하다 보니 시간표 만드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된다.

 

수능시험을 치고 난 뒤, 고등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대학생이라고 할 수 있는 3월까지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나면 고등학교는 일정상 수업을 하지만 예전처럼 타이트하게 공부하는 그런 정상 수업이라고 볼 수 없다.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본다거나 곧 대학생이 될 학생들을 위해 특별 활동식으로 수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어찌 보면 수능시험 끝난 고3 학생들을 위한 시간 때우기 수업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고3 학생들을 위해서 대학교에서 교양강좌를 한다거나 대학교 교양수업을 2학점 정도 신청하여 미리 수업을 듣어볼 수 있는 '고교-대학 연계 학점 인정 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모르는 학생들이 대다수이고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그리고 수시로 이미 대학교 전형에 합격한 학생들에게는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정시 모집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합격 발표를 기다려야한다거나 수능이 끝난 뒤에도 논술고사를 준비해야하는 학생들에게는 대학 연계 학점 인정 프로그램을 신청할 겨를도 없거니 쉴 여유마저도 없다.

 

 

 

 

 대학 신입생들의 고민

 

대학 신입생들은 너나 할것 없이 '후회없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싶다' 고 말할 것이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해 실천하려고 계획을 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정하는 게 쉽지가 않다. 비록 계획을 정한다고 해도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바랐던 것과는 달리 선배들과 술모임에서만큼은 완벽한 출석율을 자랑하지만 성적에서만큼은 '선동율 방어율'에 맞먹는 점수를 받게 된다.

 

그러나 대학생활이 실패하는 원인이 비단 대학생들의 능력과 의지에서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대학교는 사회에 나가서 올바른 교양과 지식을 함양할 수 있는 학문의 장이 아니라 오직 취업을 목표로 하는 취업 준비생 양성소가 되었다. 이렇다보니 대학교에서 듣게 되는 강의들도 대부분 취직을 전제로 한 특정분야에 치우쳐 있게 되며 당연히 학생들은 교양과 전문지식을 아우르는 균형잡힌 능력이 부족하게 된다.

 

먼저 대학생활을 경험한 인생의 선배뿐만 아니라 대학 신입생 시절을 겪어 본 나 역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좋은 대학생활을 보내기 위해서는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 배우게 되는 기초과목을 잘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성과 취미를 고려하지 못한 채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 친구 및 선배 따라 수업을 듣는다면 친구, 선배 간의 우정은 돈독해질 수 있지만 최악의 성적표를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친분 중심의 모임이 강한 학과 생활에만 치중한다면 성적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 학과 생활을 적절히 참여를 하고 있다면 친한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안 듣는다고 해서 우정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신입생 시절은 윗 선배들의 강요를 어길 수 없는 학과 내 위치다. 최근에는 어느 모 학교에서는 단합을 강조하는 학과 생활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교내장학금 수혜 혜택에 불리하게 하여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이런 폐해는 비단 특정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다니는 학교를 포함해서 은밀하게 카르텔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되는 신입생들은 학교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여러가지 상황들이 맞물리게 되기 때문에 자신이 계획했던 대학생활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올바른 지(知)의 체계가 필요하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도쿄대 학부 강의 모음집인『뇌를 단련하다』에서 대학 담장 너머는 참호 속을 뛰어다니며 24시간 내내 총을 쏴야 하는 최전선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대학 졸업생들이 21세기 최전선으로 내던져지려고 하는데도 그들의 머릿속은 여전히 19세기 이전의 것들로 가득 차 있고, 20세기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실정이라고 개탄한다.

 

매일 전사자가 나오는 최전선에서의 생존능력을 기르기 위해 대학이 제시하는 커리큘럼 이수를 넘어서 균형 잡힌 교양 습득을 제안한다. 균형 잡힌 교양은 우주 생명 의학 철학 종교 역사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사를 거시적인 눈으로 총괄할 때 얻어진다. 이는 학문을 사랑하는 철학자 정신으로 현대사회의 지적 토대가 되는 자연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해 가능해진다. 급변하는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현대문명을 이해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현대는 과학 위에 구축된 세계이고 과학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근간인 지(知)의 도달점인 자연과학 위에 구축돼 있고, 현실 작동이 이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치사상과 경제사상, 사회사상 등과 달리 과학지식은 전 세계에서 동일한 지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사나 경제사가 아니라 '지(知)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인간의 '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둘러싼 이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결국 인간의 '지'란 인간 자신 및 자신을 둘러싼 타자 또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다. 자연과학에 대한 공부 역시 이런 '관계'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일본 문과대 학생의 과학 교양은 중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운동, 가속도, 질량, 열, 파장, 소립자 등 세계 존재의 근본과 관련된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일본 대학생들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실정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지적처럼 자기 입맛에 맞거나 자기 전공분야에만 한정해서 공부하다보면 소위 이과형 인간, 문과형 인간들로 굳어지게 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20살은 자신의 뇌에 책임져야 할 나이

 

인간이 가진 지식은 일천하다. 아이작 뉴턴은 자신의 업적을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눈에는 진리라는 큰 바다를 앞에 두고 바다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못하고 주변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이나 조개껍데기 한두 개를 주웠다고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위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조금은 우쭐해서 나도 이제 한 인물이 되었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노바디(Nobody)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대학이란 '노바디'(Nobody)를 '섬바디'(Somebody)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요컨대 그는 “빨간 신호등이라도 모두 함께 건너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마흔 살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나는 스무 살이 넘으면 자기 뇌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자는 도쿄대의 젊은 학생들에게 스무 살 무렵의 뇌는 아직 성인의 뇌가 아니라 왕성하고도 유연하게 성장하고 있는 과정의 뇌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두뇌가 말랑말랑할 때일수록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정신적으로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서 젊을 때 최대한 많은 사상적 외도를 하라고 권유한다. 다른 것과 달리 사상에서는 이꽃 저꽃을 옮아 다니는 나비처럼 변덕을 부리라는 제안이다. 대학생 때의 지적 탐험이 중요한 것은 뇌의 유연성과 관계가 깊다. 저자는 그냥 그렇다고 하지 않고, 자연과학 지식을 동원해 이를 치밀하게 설명한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다치바나의 대안들은 인상 깊다. 심지어 영양가 없는 강의는 과감히 제치라고 한다.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젊은 시절의 독서 노트는 그 자체로 독자들에게 던지는 지식의 자극제다. 대학입학을 공부지옥으로부터의 해방쯤으로 여기는 일본과 한국 대학 신입생들이 경청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다치바나의 조언대로라면 신입생들은 어떻게 공부해야 될까?  그는 일부러 휴학을 해서라도 특정 기간을 잡아 그 기간동안 제대로 된 교양 공부를 해야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사실 교양에 목마른 대학생들에게는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곧 취업 준비를 해야하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태어난 모든 대학생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대학교를 졸업해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을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를 위한 토익 공부를 한다너가 따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면 휴학을 할 수 있다만 다치바나처럼 자신을 위한 교양 공부를 하기 위해서 휴학을 한다고 하면 그러한 의도를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 좋은 취지의 휴학임에도 불구하고 취업에 목표를 두지 않는 공부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긴다.

 

지금 대학교가 원하는 교육 목표를 봐서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교양'을 쌓기 위한 제대로 된 교육 프로그램이 나오기는 어려울 듯하다. 학교가 그런 교육 환경을 구축할 때까지 학생들이 마냥 기다릴 수가 없다. 결국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방법 밖에 없다.  진부한 말 같지만 공부와 독서가 유일한 대안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식의 편식을 경계해야 한다. 학문 간의 경계 없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함께 공부하고 이해하는 균형 잡힌 지의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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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2-02-2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그렇다면 마흔살이 넘은 저는 뇌와 얼굴 모두 책임져야하는 거로군요. 어쩜 좋으까잉.. ㅠㅠ

cyrus 2012-02-29 23:20   좋아요 0 | URL
저자의 말에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

2012-02-29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9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홍 2013-01-13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다가 우연히 들렸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읽게 됐어요. 운명론 신봉자까지는 아니지만,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만약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여기저기서 안내표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참 반갑네요. 이미 신입생 시절은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하는 마음에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갈 길이 먼 저에게 바짝 힘내라고 확 꼬집어 주는 것 같아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 전방위적 지식인 정약용의 치학治學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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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의 연구방법

 

온갖 모순과 부조리가 곪아터지던 18세기 조선 사회에 인간 중심의 새로운 학문을 추구한 실학의 완성자, 개혁 군주인 정조의 오른팔로 이상사회 실현에 열정을 바친 개혁사상가, 정조의 죽음뒤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개인의 꿈과 이상을 접고 유배로 점철된 만신창이의 삶을 살아야했던 시대의 불운한 천재. '다산 정약용'이라는 인물을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렵다.

 

다산이 관여한 연구와 저술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동안 다산이 어떤 방법으로 위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는지, 즉 다산의 작업 자체와 과정, 방법에 대한 탐구는 거의 없었다. 정 민 교수는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이유를 다산의 연구방법에 주목했다.

 

다산은 전무후무한, 탁월한 지식편집자였다. 그는 18년 간의 강진 유배생활 동안, 무려 수백 권의 책을 썼다. 책 한 권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많은 지식을 취합한 다음 이를 글로 살려내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베껴 쓰기만 해도 10년이 넘게 걸릴 양이다. 참고서적도 넉넉하지 않은 척박한 귀양지에서 엄청나고 방대한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자료를 분석해 새로운 질서로 통합시키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정보조직화의 귀재였다. 또 언제나 동시에 7∼8가지 이상의 저술작업을 동시에 수행해냈다.

 

다산의 작업방식은 실로 단순 명쾌하다. 먼저 필요에 기초해 목표를 세운다. 관련 있는 자료를 취합한다. 명확하게 판단해서 효과적으로 분류한다. 분류된 자료를 통합된 체계 속에 재배열한다. 이런 작업은 그의 아들과 제자들 간의 역할분담을 통해,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진행했다.

 

 

 

 대학생들을 위한 다산의 '지식공부법' 

 

정 민 교수는 다산의 독특한 공부 방법을 '지식경영법'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제목만 보자면 경영인들을 위한 지식경영 노하우쯤으로 볼 수 있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지식경영법' 대신에 '지식공부법'이 더 어울린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식경영'은 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개선, 개발하거나 혁신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경영을 의미한다. 지적자본을 효율적으로 이용함으로써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성과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움의 열망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했던 다산의 연구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산의 '지식경영법'은 단지 지식경영을 기업현장에 적용하려는 경영인들을 위한 경영지침서가 아니다. 수많은 지식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법칙과 원리를 도출해야하는 교수 또는 졸업논문을 써야한다거나 공부를 어려워하는 학생에게도 다산의 공부법은 유용하다. (성과, 경쟁 중심 사회의 흐름은 올바른 학문 공부를 추구해야하는 대학교도 피할 수 없다. 교수들은 논문 발표 수로 학문 업적을 평가받고 있고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논문 작성은 그저 졸업을 하기 위한 힘든 과정이다. 대학생들은 졸업을 위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논문 한 편을 써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검을 현(玄)자를 칭칭 감는다는 감을 전(纏)자의 뜻으로 알고 누를 황(黃)자를 꽉 누른다는 누를 압(壓)자로 풀이한다. 이것이 그 아이들이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다. 능히 종류별로 접촉해 곁으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정 민『다산선생 지식경영법』중에서, pp 37-

 

다산이 쓴 '천자문'에 대한 평의 일부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뜻으로 시작하는 천자문 공부를 조선시대의 학동들은 많이 지겨워했다. 하늘은 검지 않고 푸른데 검다고 하니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천지'라는 글자를 배웠으면 다음엔 일월, 성신, 산천 같이 연결되는 글자를 배워야 하는데 갑자기 검고 누르다는 '현황'을 배운다. 그러면 청적(靑赤), 흑백(黑白) 등을 배워야 하는데 또 느닷없이 우주(宇宙)를 배우게 한다. 한마디로 천자문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뒤죽박죽 네 글자씩 엮어 운자를 맞춘 계통도 없는 체계도 없던 책이었던 것이다.

 

다산은 아이들에게 효과적으로 한자를 학습시키는 대안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미루어 확장하는'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을 제시한다. 비슷한 것끼리 묶어서 연쇄적으로 가르쳐, 이것으로 미루어 저것까지 알게 하는 학습법이다.

 

종핵파즐은 복잡한 것을 종합하여 하나하나 살피고,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질하듯 깔끔하게 정리해낸다는 뜻이다. 다루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 여기에 휘둘려서 허둥지둥하기 마련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생각이 명징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눈앞에 펼쳐진 어지러운 자료를 하나로 묶어 종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비슷한 것끼리 갈래로 묶고 교통정리를 하고 나면 정보간의 우열이 드러난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가려내고 긴요하지 않은 것을 추려내는데 이 과정이 바로 '종핵'이다. 그 다음은 남은 알맹이에 날개를 달아주는 과정이다. 무슨 말인지 모를 것들은 마고 할미의 긴 손톱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듯 명쾌하게 설명을 보태고, 어지러워 혼동하기 쉬운 것들은 흐트러진 머리칼을 참빗으로 빗듯 깔끔하게 교통 정리한다. 이것이 바로 '파즐'이다.

 

 - 정 민『다산선생 지식경영법』중에서, pp 69~70 -

 

 

오늘날 인터넷, 도서관에는 수많은 정보가 복잡하게 유통되고 있다. 쏟아지는 방대한 정보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따져서 쭉정이는 솎아내고 알맹이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종핵파즐법을 이용하면 복잡한 내용이 비로소 일목요연해지고 단순명료해진다.

 

다산은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때 결코 앞선 것을 그대로 따르는 법이 없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기존에 있던 것을 참고해 새 것을 만들어내는 '변례창신법'(變例創新法)을 역설했다. 옛것을 살피되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발상을 전환하고 성과를 점검하는 것을 창조작업의 요체로 꼽았다.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강의실에서 몇 몇 학생들이 자신이 쓴 과제(레포트)을 제출하거나 어떠한 주제를 선정, 조사하여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많이 봤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만든 과제나 프레젠테이션 결과물은 교수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지 못했다. 이런 결과물들은 대체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가끔 주위 친구들의 과제를 보곤 하는데 내가 봐도 내용 곳곳에 허술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교수로부터 과제 점수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내용의 질보다는 분량에 치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수가 제시한 페이지 수를 맞추기 위해서 어떻게든 주제에 부합되지 않은 자료들을 제시한다. 심지어 현실과 맞지 않은 옛날 자료를 인용하기도 한다. 통계 자표나 표를 제시하면 교수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수십년동안 대학에서 생활했던 교수의 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인용하고 조사한 자료, 예를 들어 학술논문의 내용의 틀에 벗어나지 않아 과제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표절'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이에 덧붙이자면 아예 자료출처도 쓰지 않은 학생들도 있다. 이것은 과제나 논문 작성에 있어서 기본적인 과정인데도 이를 소홀히 여기는 학생들이 꽤 많다) 

 

과제나 졸업논문을 제출해야 하는 대학생들이라면 '변례창신법'의 의미를 소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쓸모없는 지식에 탐닉하지 말 것을 강조한 것은 어떤 지식이 가치 있는 지식인지 판단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지, 어디에 소용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라는 것이다.

 

다산은 실제에 유용한 공부를 하라는 '강구실용법'(講究實用法)을 강조하면서 공리공론은 하나마나한 공부라며 철저히 배격했다. 여러 정보 가운데 가치 있는 것만 추려내 하나하나 타당성을 따져보고 검토하는 '취선논단법'(取善論斷法)은 다산의 실용적인 문제해결 노하우를 집약한 말이다.

정보가 많다고 문제가 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많은 정보를 한 장의 보고서 또는 논문 한 권에 담을 수가 없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유용한 정보를 취하고 쓸모없는 자료를 버릴 수 있어야 문제가 해결된다.

 

그 밖에도 다산은 스스로도 많은 책을 읽고 썼지만, 제자들이나 자식들에게 늘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올바른 독서 방법까지 알려주던 독서가였다.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은 읽는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는 맹목적인 독서보다는 거기서 얻은 깨달음이나 의문 등의 생각들을 따로 메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메모하는 것은 아주 능동적이고도 생산적인 읽기 방법이다. 정보들이 넘쳐 나면서 무엇이 중요한 정보인지 판단하기 힘든 요즘 시대에 독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손을 움직여 메모를 해야 한다. 메모를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들이 추려지고, 정보를 판단하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는 지식공부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인용한 방법 외에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산의 공부비법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바로 '분류'와 '정리'다. 18세기는 조선사회가 최초로 경험한 정보화사회였다. 중국 청나라를 통해 온갖 신문물과 백과사전식 지식이 전방위로 쏟아져 들어온 시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상 처음으로 정보가 범람하던 시기에 다산은 이런 정보를 취합해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으로 이 많은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았다.

 

분류와 정리.  말로만 쉬워 보이지 이러한 방식의 프로세서가 낯선 이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 막연하게 분류와 정리를 한 대학생들에게는 말이다. 나 역시 과제나 수업시간에 발표해야 할 프레젠테이션을 위해서 확보해놓은 방대한 자료들을 분류, 정리할 때가 많았는데 다산의 공부방법을 적용한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공부방법을 몸에 밴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업무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다산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공부한 것처럼 공부하는 방법 역시 자신의 두뇌에 맞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공부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평생 육체만 피곤할 뿐만 아니라 정신마저도 피곤해진다.      

 

올해는 다산이 태어난 지 250주년이 되는 날이다. 특별한 해인만큼 다산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시기적절한 기간이다. 다만, 다산이 워낙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만큼 한 측면만 부각시키는 것은 그의 업적이나 능력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이런 목표를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조직의 체계를 세우고 지식을 수집, 관리한 그의 공부방법도 재평가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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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2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여기에 꾸준하게 글 남기시는 것 보면, 다산의 방법들을 이미 상당수 실천하고 계신듯하여 저도 자극을 받습니다. 다산 선생님의 방법을 보니 하나라도 버릴 게 없네요.

cyrus 2012-02-23 20:53   좋아요 0 | URL
아니요, 방학 마지막 주라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많아서 그래요. 이제 방학도 일주일 정도밖에 안 남았네요 ^^;;

stella.K 2012-02-23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을 오래전에 사 놓고 아직도 못 읽고 있다.
책 엄청 읽네. 아직 개강 안했나?
다산도 다산이지만, 난 얼마 전 정민 교수 강연회 다녀오고
정말 좋았어. 어쩌면 강연회를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시는지.
왠만한 대학 강의처럼 하시더라.
너도 그분 어디서 강연회 한다고 그러면 열 일을 제쳐놓고 가라.
기회가 왔는데 잡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리석은 것 같아.
사실은 내 말이야. 작년인가? 그분 차에 관한 엄청 두꺼운 책
내신적이 있잖아. 그때 강연회 뽑히고도 안 갔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바로 그때 깨달았다는 거 아니니. 나도 참.ㅠ

cyrus 2012-02-23 20:54   좋아요 0 | URL
개강은 다음주 금요일이에요. 방학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저는 이 책 2년 전에 구입해놓다가 조금씩 조금씩 읽다가
도중에 멈추다가, 읽다가 말았던 것만 해도 여러번 되었을거에요.
요즘은 그냥 관심 있는 주제나 필요한 부분만 따로 읽고 있어요. ^^
 
고독의 위로
앤터니 스토 지음, 이순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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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미디어로부터 위로받는 고독한 현대인들

 

어느 연구결과에 의하면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의 중독성이 술, 담배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소셜미디어에 대한 욕구는 술과 담배에 비해 비용이 들지 않으며 일상에 유용하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른바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현대인들은 정말이지 심각하게, 다른 방식으로 분주하다.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주부든,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가 인터넷 미디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스마트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수시로 훑어보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글을 새로 올리고, 트위터로 쉴 새 없이 따끈따끈한 소식을 담고 나르고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간다.

 

확실히 인터넷은 정보의 검색을 용이하게 하고 트위터와 같은 SNS은 여론의 새로운 창구 역할을 거의 실시간으로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발휘한다. 연구팀의 분석대로 비용이 들지 않으면 시간면에서도 효율적이다. 그리고 SNS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과 팔로어를 하면서 폭넓은 인관관계를 맺을 수 있다.

 

최근에는 '트위터봇'이라는 것이 유행을 한단다. 해당 봇이 메시지를 팔로어들에게 보내고, 팔로어들이 보낸 메시지의 키워드를 분석해 사전에 저장한 메시지 중 연관도가 높은 내용을 자동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 트위터봇은 종류별로 다양하다. 좋은 명언을 메시지 삼아 보내는 '좋은글봇'도 있고, 여자친구가 대화를 거는 것처럼 메시지가 트위터에 전달되는 '여친봇'도 있다. 여친봇을 팔로잉한 여자친구가 없는 사람에게 '자기야, 뭐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면 팔로워는 여친봇의 메시지에 답변을 보낸다. 진짜 여자친구가 아닌 여자친구처럼 대하는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트위터봇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욕구, 즉 현대인들이 스마트폰, SNS를 달고 살면서도 여전히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도 정작 현대인들은 외롭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트위터에 팔로워한 사람들의 숫자, 카카오톡에 저장되어 있는 지인들의 숫자 등에 얽매이기도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처럼 자신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트위터의 팔로워라든가 카카오톡에 저장된 '친구'의 수가 수백명이라고 해서 우리는 과연 살아가면서 관계를 맺고 있는 100명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스마프톤이나 컴퓨터에서만 가능하는 온라인 세계가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맞대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저장된 100명 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절반도 채 안 될 것이다. 10%는 가족 관계 또는 비즈니스상으로 필연적으로 만나야 되는 사람이며 나머지 90%는 1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할까 말까하는, 친구인데도 그렇다고 정말 친한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중간한 사람들이다. 연락이 뜸한 사람이 있다면 연락 안 한 채 나 몰라라하고 쿨하게 넘어가든가 아니면 다시 볼 일이 없다면 과감하게 그 사람의 폰 번호나 주소를 지워버리면 끝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의 결별을 익숙하게 여기지 않는다. 안 친해도 그 사람의 인적 정보는 그대로 남겨 둔다. 자신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든다면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질보다는 양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마당발처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이 타인과 관계 맺기에 있어서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이 같이 얽히고설킨 숱한 관계 때문에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과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를 잊은 채 타인의 요구에 맞춰 기능적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이별이나 죽음 같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극복하기 힘든 고통의 나락에 쉽게 빠져버린다.

 

 

 

 

 '대화'도 필요하지만, '고독' 역시 필요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을 연구했던 앤서니 스토는 사랑과 우정 등과 같이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간관계과 행복감을 증폭시켜주는 것과 관련해서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자의 입장에 대해서 상반된 평가가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틀린 말은 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은 트위터와 스마트폰을 즐겨 사용하면서도 그들은 '외롭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 간의 대화를 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트위터는 어찌 하다 팔로워들에게 인간 아닌 인간처럼 대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러한 현상이 자신의 주변에 친하다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정작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인간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 관계가 행복의 절대적 요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 앤서니 스토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왔던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버리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고독의 장점 그리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가 '천재' 또는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인물들 중에는 고독한 삶을 살다가거나 또는 그러한 삶으로 인해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글을 쓰는 작가나 화가, 음악가들은 훗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될 위대한 '명작'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다. '명작'을 탄생하기 위해서 고독한 삶을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창작 활동 이외에는 타인과의 대화를 하는 인간 관계를 외면했으며 특별하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천재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이며 창의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우울증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토는 대중들이 천재를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을 고독의 장점으로 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그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한다.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때 그의 내면에서 진정한 '성숙'과 '통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은 감정을 가장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하며 창조적인 상상력을 증대시킨다. 칸트나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기번, 고야 등 학자와 예술가의 빛나는 업적은 고독에 침잠하는 그들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고독을 느낄 수 있는 시간마저도 없는 현대인들 

 

 

 

 

 

 

 

페르낭 크노프  <슈만을 들으며>  1883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재미난 사례를 인용하자면, 그리스의 시골 마을에서는 여자가 사랑하는 남편 또는 연인이 사별하면 5년 동안 애도할 수 있는 기간이 주어지는 풍습이 있다. 이 기간동안 미망인은 검은 옷을 입고 고인의 무덤에 매일 가고 고인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러한 풍습을 통해 그리스 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슬픔의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동시에 앞으로의 여생에 주어진 고독을 견뎌낼 수 있는 면역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19세기 중후반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에게는 매일 오후 시간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여성은 관습에 따라 자신의 욕구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살피는 데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그래서 오후의 휴식 시간은 자신의 마음을 절대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의무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두 풍습은 공통적으로 고독을 심리적인 상처를 나을 수 있게 만드는 치유의 수단으로 이해했다. 슬픈 일이 있으면 혼자서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근대 이후 사회의 주류는 고독을 무시하고 경계하는 쪽으로 변하고 말았다. 앞에서 소개한 그리스처럼 사별한 사람에게 얼마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해주는 문화도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주어지지 않는다. 유교문화의 우리나라에도 부모가 죽었을 때 아들이 상복을 입은 채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곁에 지내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었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삶에 얽매인 현대인들에게는 고인을 추모하고 그리워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러한 삶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독을 외부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상실, 고통, 슬픔 등의 감정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마음속에 그대로 묻어들수록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또 앞으로 자신에게 다가올 슬픔과 고독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악순환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힘겨워지도록 만든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면서도 동시에 독립적 동물이다

 

영국의 호스피스가 몇 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제시해 우리나라에서도 눈길을 끈 적이 있었다.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살펴 보면 시한부 환자들이 가장 많이 후회되는 일로 꼽은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 또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 꿈들'을 후회했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한 것'이 두번째로 후회하는 일로 꼽혔다. 일이 바뻐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나 배우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지 않은 것' 인데 다른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솔직한 감정을 말하지 않아 정신적 피로가 쌓였다는 설명이다. 네번째와 다섯번째로는 '옛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 것' , '변화를 두려워해 즐겁게 살지 못한 것'이 뒤를 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인간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하나는 다른 이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충동이다. 인간 마음 속에 그러한 충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고독은 우리 삶에 있어서 피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은 오래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했던 사회적 동물이라는 범주에만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도 본인 고유의 자아(Self)를 탐색하고, 타인들 앞에서 드러낼 줄 안다.

 

어쩌면 현대인들은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고 싶어하는 충동에 집착하여 정작 자기 내면 스스로 되돌아보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타인 중심의 인간 관계를 중요시하다보니 정작 자신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에 순응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존중감을 뚜렷하게 지니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 받는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일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뚜렷하게 하면 더 이상 타인과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타인을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상호적 관계를 맺고 사는 동반자로 여길 수도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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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1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봤는데, 이 얘기들과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처럼 예술이나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푸는 책은 아니지만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래요. 트위터를 저도 조금 하는데(뭐 거의 한다고 볼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 때로는 올라오는 수많은 멘션들이 이게 다 뭐야..싶다가도 왜 나는 팔로워가 늘지 않나를 생각해보기도 하거든요. 귀찮아하면서도, 또 막상 연결이 끊어짐을 두려워하는 것..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사실 요즘에 트위터 중에 진지하게 읽는 멘션은 오로지 공자봇의 멘션. 모든 인간을 다 제쳐두고, '봇'의 멘션을 가장 진지하게 읽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생각해보니 뭘까..싶네요.)

cyrus 2012-02-19 22:51   좋아요 0 | URL
<과잉연결시대>라는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저는 요즘에는 덜하지만
예전에 유행했던 싸이월드 친구추가에 신경쓰곤 했어요. 그 땐
친구추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공자봇이라는 것도 있군요, 저는 트위터를 하지 않아서
잘 몰랐어요 ^^;; 제가 디지털 문명에 너무 한참 뒤쳐진 느낌이
드네요 ㅎㅎ

루쉰P 2012-02-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완전 요즘 내 얘기네 하며 글을 봤네요 ㅋ 잘 지내시죠 전 고독 속에 빠져 있으니 천재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할까요 ㅋㅋ 이 글을 보며 그런 위로를 느꼈네요 ㅋㅋㅋ 저 땡스 투 하고 이 책 삽니다 완전 딱 내 책이에요 ㅋㅋㅋ

cyrus 2012-02-19 22:53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잘 지내고 계시죠? 요즘 날씨가 많이 추워서
경기 일하시는데 고생 많으시겠어요.

책 내용 중간에 심리학적 이론을 소개한 부분만 빼면 예술가들의 사례들을
읽어볼만해요. 그들로부터 고독을 벗어날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고요 ^^

stella.K 2012-0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친구 한 애는 고독을 너무 좋아해 자기가 파놓은 동굴에서만 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예 자신이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더군.
그 친구 언젠가 나한테 그렇게 말한 거 후회할까?ㅋ
그 친구는 고독이 너무 좋아 그 안에서만 살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약간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을 알아 온 것이 맞나 싶었어.
지적한 두 가지 충동 맞는 말인데, 그것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cyrus 2012-02-19 22:54   좋아요 0 | URL
저도 아웃사이더형이지만 차마 제 입으로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라'라고는 말 못할거 같아요 ^^;;
오히려 제가 포기하고 먼저 연락하거든요 ㅎㅎ
누님 말씀처럼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줄 아는게 중요하죠 ^^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화영 역, 민음사, pp 132~132 -

 

 

 

 

 독서는 많이 하면 할수록 위험하다?

 

2010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 기준에 의한 대한민국 만 10세 이상 남녀의 연평균 독서량은 약 10.8권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국민 절반 이상이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터넷 창만 띄우기만 하면 손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엔 책보다 흥미로운 TV나 태블릿 PC 등 각종 편리한 기기가 널려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에 비해 독서의 일상화가 자리잡지 않았다. 급속한 정보기기의 발달로 인해서 종이책의 위력이 밀려나는 것도 있지만 문제는 그러한 급속도로 빨라지는 환경 변화에 좇아갈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생활 패턴이다. 망중한의 시간이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며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마저도 쉽지 않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책 안 읽는 우리나라 국민의 독서실태 결과에 대해서 혹자는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아서 못 읽는다고 한다. 졸속한 변명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사실 책을 즐겨 읽는 애독가들도 읽을 책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반면에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하니까.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나 책을 여러 권 읽는 사람이나 인생은 짧고 시간은 많지가 않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나라는 책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지만 우리보다 책을 읽는 게 일상인 유럽에서는 수백년 전만 해도 책을 많이 읽는 것을 걱정하기도 했다. 특히 근대로 넘어오던 시절의 유럽에서는 독서를 만병의 근원인양 비판했으며 '다독'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황당한 것은 여자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였다. 책을 읽으면 갖가지 병에 걸릴 수도 있으며 심지어 여자로서의 기능을 잃을 수 있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더군다나 이러한 주장들이 그 시대에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던 계몽주의자들로부터 나온 것이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 읽는 여자를 어떻게 봤을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책의 제목처럼 '책을 읽은 여자'를 위험 인물로 간주했다.

 

그러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들은 책을 읽었다. 자신들의 책 읽는 행위에 남편들의 핀잔과 불만을 피하기 위해서 혼자만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침실에서 책을 보았고, 하녀들은 해야 할 일도 미룬 채 책을 읽는 주인 어깨 너머 몰래 훔쳐 보기도 했다. 열심히 가사 일을 해야하고 사회적 신분이 미천한 하녀마저도 책 읽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페미니스트의 원조, 책 읽는 여자들

 

당시 유럽은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기독교적 사상을 중요시하는 철저한 엘리트 사회였다. 여기서 말하는 엘리트는 읽고, 문자를 쓸 줄 아는 지식인들, 즉 소수의 남성들이었다. 사회를 지배하던 소수의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성경을 해석할 수 있었던 소수의 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패러다임을 만들었고 기독교적 교리를 강조했듯이 엘리트들도 여자들을 남성의 권력에 따라야 하는 이류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한 것이다.

 

여자에게 독서란 쓸데없는 세계를 꿈꾸게 하고, 가사와 육아라는 신성한 일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사회는 책 읽는 여자들을 의도적으로 비방했다. 책을 읽지 말 것과 책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가져올 위험한 결과를 여성들이라면 꼭 알아야 할 하나의 도덕적 교훈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여자들은 어떻게든지 책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녀들은 독서 행위를 포기한다는 것이 사회 속에서 '나'라는 주체성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되고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갖게 된다.

 

결국 엘리트들의 우려처럼 여자들은 결국 위험해진다. 책을 읽는 그녀들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참여할 줄 아는 주체자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들은 직접 글을 '쓰기'까지 했다. 문화와 지식을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조하는 방법까지 터득한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흐름에 남성 엘리트들은 못마땅게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책 읽는 여자들이야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인 셈이다.

 

그러나 독서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팽배했다고 해서 독서의 역사가 그렇게 어두웠던 것은 아니다. 독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상류층 인사들이나 지식인들에게는 '지적 유흥'이었다. 독서 행위에 대한 인식은 당시 사회적인 관념에 의해서 그대로 반영되었고 자주 변화되었을 뿐이었다. 단지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독서를 쓸데없는 시간낭비, 체력 소모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남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금기가 더 많았던 여자들에게 책을 읽는 일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지 않다

 

독서의 역사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고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역사적 연대는 뚜렷하지 않다. 책 속에 실린 '책 읽는 여자'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책과 독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시대별로 알 수 있다. 그림을 통하여 당시의 책과 관련된 사회의 흐름, 독서의 역사, 책 읽는 여자들의 역사를 보는 방식이 흥미진진하다. '책 읽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은 저자가 바라보는 개인적인 시선에 의해 소개되고 있지만 책을 읽는 독자로서의 상상력으로 그림 속 여자들을 은밀히 만나고 책에 흠뻑 빠져 든 그녀들을 맘껏 훔쳐보는 것도 재미있다. 특히 책을 좋아하는 애독가들에게는 '위험하다'라는 발칙한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하지만 제목에 혹해 책 읽는 여자들은 무조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그것은 수백년 전에 여자들의 독서를 금기시했던 남성 엘리트들의 구시대적인 입장을 재현할 뿐이다. 책 읽는 여자를 보게 된다면 그녀의 얼굴만 보지 말 것. 그녀는 무슨 책을 읽고 있으며 책을 읽는 동안 어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자. 책 읽는 그녀에게서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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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08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력의 주체는 권력의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을 경계했다고 하더군요.
글을 일종의 권력의 도구와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ㅠ.ㅠ

제게도 책 읽는 여자가 더 매력적으로 보여요~~ㅠ.ㅠ

cyrus 2012-02-09 23: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쁘면 더욱 좋고요 ^^;;

꼬마요정 2012-02-0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활자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거겠죠? 그러니 활자의 발명은 우리가 먼저 했어도 구텐베르크가 인정받는 거겠구요... 안 그래도 요즘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이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기웃거리고 있어서 더 반가운 글이었습니다.^^ 추천 하나는 제꺼!!^^

cyrus 2012-02-09 23:01   좋아요 0 | URL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을 읽고 계시는군요? 제가 읽은 건 펭귄에서 나온
두권짜리인데 플로베르의 사실적인 문장 때문에 읽는 데 무척 벅찼던
기억이 나네요. ^^;;

양철나무꾼 2012-02-08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언젠가 '책 읽는 남자는 섹쉬하다~'<---요런 페이퍼를 써서 이 동네 누군가에게 쿠사리를 먹었었는데...^^

이 책 옛날 책 개정판인가 보군요.
님의 페이퍼, 제목도 근사한걸요~^^

cyrus 2012-02-09 23:03   좋아요 0 | URL
기억나요, 사실 나무꾼님의 글이 생각나서 며칠 전에 페이퍼로
쓴 거 있었는데 막상 내용은 전혀 엉뚱한 쪽으로 쓰게 되었고
저 역시 쿠사리 먹었다는..ㅋㅋㅋ

감은빛 2012-02-09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여자는 어떤의미에서는 위험할지는 몰라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책도 어떤 책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아내와 저는 독서취향이 좀 달라서(물론 비슷한 측면도 일부 있지만)
대개는 각각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얘기를 주로 하지요.

cyrus 2012-02-09 23:0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취향도 같으면 금상첨화죠, 그런데 감은빛 사모님은
어떤 책을 좋아하시는지요? 거의 책 읽는 여성분들은 문학을 좋아하시던데
감은빛 사모님도 그러하실 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