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있을 겁니다. 푸하하하...

저를 보고 싶으신 "미모의" 여성 알라디너 분들은 내일 롯데월드로 달려오세요.ㅎㅎㅎ

제가 아이스크림도 사드리고, 회전목마도 태워드릴게요.ㅋㅋㅋ

전, 회전목마 이상은 못 탑니다. 무서워서~~

아참, 오전에 투표는 하고 간답니다. 우리 영길이 형님~~~

글고, 왜들 제게 관심이 없으신 거에요.ㅠㅠ;;

이벤트도 뜸하시고, 결과 발표도 호응이 거의 없네요...ㅜㅜ;;

이글 보시는 nabi님, 나루님, 낡은구두님, 순오기님께서는

http://blog.aladin.co.kr/criticahn/1768178 를 확인해주세요...ㅎㅎㅎ

ㅋㅋㅋ

내일 롯데월드 오셔서 저와 뜻밖의 '동행(同行)'을 해보시지않으시렵니까? ㅋㅋ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ephistopheles 2007-12-19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는 큰 상관이 없는 멜기님의 페이퍼지만 혹시라도 멜기님을 뵙기 위해 롯데월드로 달려가실 분들을 위해 사족을 붙이자면...제목의 내일이란 19일일까요? 20일일까요?

멜기세덱 2007-12-19 02:42   좋아요 0 | URL
크아~~~오늘이군요....ㅋㅋㅋ오늘,...

푸하 2007-12-19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 알라디너는 안 되나요? 그러면 정말 '뜻밖의' 동행이겠군요.^^
근데 남성끼리 노는 것도 재밌을 수 있겠어요.ㅎ~

멜기세덱 2007-12-19 22:24   좋아요 0 | URL
안 됩니다...^^;;

웽스북스 2007-12-1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멜기님 근데 롯데월드를 혼자 가시는 거에요?

멜기세덱 2007-12-19 22:24   좋아요 0 | URL
혼자는 아니고요, 남자 후배 하나, 여자 후배 하나...ㅋㅋㅋ

웽스북스 2007-12-20 00:07   좋아요 0 | URL
아이쿠! 셋이 가시다니, 짝맞추기 힘들었겠다 ㅋ

멜기세덱 2007-12-20 00:10   좋아요 0 | URL
그래서 이 페이퍼를 썼습니다만....웬디양님은 오시지 않았지요...ㅋㅋ

웽스북스 2007-12-23 16:16   좋아요 0 | URL
저 따옴표 해놓으신 말에 지레 쫄아서요 ㅋㅋㅋㅋㅋ

마늘빵 2007-12-1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혼자 거기서 뭐하세요 -_-

멜기세덱 2007-12-19 22:24   좋아요 0 | URL
혼자 아니라고요...~~

마노아 2007-12-19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곡, 거기서 뭐하십니까? 정말 회전목마 이상은 못 타요? 대관람차도???

멜기세덱 2007-12-19 22:25   좋아요 0 | URL
대관람차가 뭐죠?ㅎㅎㅎ
자이로드롭을 타자기에 극구 거절했습니다.
번지드롭은 좀 덜 해보이기에 탔다가 토하는 줄 알았습니다.
범퍼카가 재밌더군요.ㅋㅋㅋ

웽스북스 2007-12-20 00:07   좋아요 0 | URL
자이로드롭, 전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데 나이가 드니까 심장이 걱정되서 못타겠더라고요. 정말 진지하게 정색을 하고 이 말을 했더니 애들이 어이없어했어요 진심인데. 번지드롭은 자이로드롭보다 더 잔인하지요- 자이로드롭은 한방이지만 번지드롭으 끝났구나 싶으면 또올라가잖아요 ㅋㅋ 그래도 저 바이킹이나 청룡열차는 잘타요 ;p 범퍼카는 짱 좋아해요 제가 면허가 없어서 ㅋㅋㅋ

2007-12-19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9 22:26   좋아요 0 | URL
거의 매일같이 들어가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근데, 제가 워낙에 법없이 살 사람이라서...
열심히 살펴보고 있으니 제 능력 닿는데로....ㅎㅎㅎ

세실 2007-12-1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동지 만났습니다. 저두 회전목마이상은 타지 못해요. ㅎㅎ
물론 회전목마 타는것도 즐기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 구경하는 재미로 갑니다.
롯데월드 사람이 넘 많아서 가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즐거운 시간 되셨나요?

멜기세덱 2007-12-20 00:14   좋아요 0 | URL
오늘은 사람이 무척 많더군요. 언제 한 번 같이 가셔서, 우리 회전목마 신나게 타요...ㅋㅋㅋ

라로 2007-12-20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커피잔까진 탑니다~.ㅎㅎ
미모인 제가 빠져서 쫌 그랬겠다요, 미안해요,,제가 바빴어서 페이퍼를 이제야 봤다요,ㅎㅎ


순오기 2007-12-20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애들 어릴 때 데려가서 하루 온전히 살고 나왔어요.
뭐 하나 타려면 어찌나 줄서서 기다려야 하는지... 쩝!
그후 안 가봤습니다. 애들이 다 커서 갈 일도 없고요 ^^
멜기님, 즐거우셨나요?

실비 2007-12-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겠다.+_+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21세기가 요구하는 가치, 똘레랑스 or 관용(寬容)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끼여 살아간다는 것은 다분히 혼란스러운 것이다. 시간 혹은 세월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자르듯 나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 또한 새천년 시작의 카운트다운에 의해 급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기의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그 의미와 상징, 그리고 인식에 가해지는 충격은 매우 크다. 서기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이 큰 혼돈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들도 거셌다. 이른바 밀레니엄버그가 와서 말로 다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 말, 세상 곳곳은 들썩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를 놓고 저마다 한 목소리씩 내고 있었다. 20세기를 이끌었던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21세기의 가치가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목소리에 섞여 나온 것인데,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도 가는 곳마다 이런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쳐대고 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들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따져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새로운 가치 혹은 인식이 필요할 것만 같다.

내 생각에 21세기는 20세기가 보여줬던 모든 가치와 인식이 뒤집어 엎고 새로운 틀 안에서 형성되어만 하지 않을까 한다. 산업화 · 공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인한 인간 소외,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적 사회 인식 등등 20세기적 가치들은 21세기 더이상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21세기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는 한미FTA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화는 20세기적 과거의 가치들이 겉모습만 바꾸어, 아니 더 강화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인양 들이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요구되는 가치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그것은 상생이다. 20세기의 중심 가치들이 모든 것을-인간을, 자연을- 소외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할 때, 이러한 것은 회복하는 가치, 곧 모든 것이 서로 사는 상생(相生)이어야 할 것이다. 상생의 기반에는 서로가 서로는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른바 똘레랑스 혹은 관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 21세기에는 '관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2. 관용이란 무엇인가?

1990년대 중엽에 파리에서 택시를 몰다가 온 홍세화는 이 땅에 '똘레랑스'란 개념을 소개했다. 흔히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두 개념, 즉 '똘레랑스'와 '관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용은 많은 부분 똘레랑스의 개념에 바탕한다. 홍세화가 소개한 그 똘레랑스말이다. 홍세화와 비슷한 시대에 이 똘레랑스, 그러니까 그것은 번역어인 '관용'에 대해 천착한 우리나라의 철학자 김용환 교수가 1997년에 출간한 『관용과 열린 사회』는 홍세화의 경험적 똘레랑스와 달리 보다 학문적, 철학적, 체계적 '관용'의 저술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는 이 책을 중심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21세기의 필수적 가치 혹은 사회윤리로서의 관용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관용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용'은 여기서 말하는 '관용'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 서양의 '똘레랑스'라는 것도 간단명료하게 정의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똘레랑스'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고, 김용환도 이 책에서 그 정의의 문제를 길게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헨드릭 빌렘 반 룬이 따르고 있는 브래태니커의 정의를 따르는 것으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Tolerance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nce'에사 온 말) :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 있게 참아주는 것."(헨드릭 빌렘 반 룬, 『관용』(반 룬 전집 03), 서해문집, 2005. pp.23 ~ 4.에서 재인용)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관용의 정의로 채택하기로 한다.(관용의 정의에 관해서는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 2003. 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관용의 정의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 『관용과 열린사회』의 제1장 '관용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면 복잡하다는 것인데, 김용환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관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가 확 와닿지는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3. 우리 사회에 왜 관용이 필요한가?

불행하게도 해방 이후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정치적 저항만을 했을 뿐 관용의 가치를 말하거나 미래 세대를 위해 관용 교육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불관용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용은 철권 통치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머리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의 중요성을 말한 사람은 몇몇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미하다. 또한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는 이미 끝났다고 하지만 21세기에 이른 이 사회는 여전히 불관용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97년에 이 책을 펴내면서 가졌던 이런 문제의식이 1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관용이 없다. 관용에 목마르다. 상황이 변해고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기에 이런 관용이 그리 절실한 것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전혀 달라졌다. 사회가 다원화 되고 개개인이 존중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최고지선인 이 시대에 관용은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저자가 제5장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들"에서 제시한 관용이 절실히 필요한 영역들은 아직도 여전하다. 저자 김용환은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잠정적으로 다원주의 사회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런 다원주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큼직한 걸림돌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관용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문제 영역"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 극복과 동질성 회복", '탈연고주의', "종교적 분파주의의 해체", "배타적인 경쟁의 논리", "학문, 예술, 문화의 자유" 등이다.

여기 저자가 제시한 영역들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 영역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누군가는 말하고 있지만, 북한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말하지만, 개성 공단 등의 경제협력으로 왕래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부르짖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족속들이 거세다. 연고와 연줄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는 사회, 종교적 관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승자독식의 사회, 그도 모자라 사상의 자유까지 통제되고 있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니다. 이러한 영역들에 우리는 여전히 관용이라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던져주어야 한다.

4. 서양의 똘레랑스와 동양의 관용의 만남

우리의 관용과 서양의 똘레랑스가 정확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서양의 똘레랑스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인 관용도 이런 똘레랑스를 껴안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여기서는 이런 접목, 혹은 그간 알지 못했던 동양의 관용의 넓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제우는 말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事人如天(사인여천))고. 사실 이것은 똘레랑스가 가지는 타인을 존중하고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동양적 관용의 경지다. 입때까지 우리말에서 '관용'은 힘을 가진자의 자비 내지 동정으로만 축소되어 사용해 왔지만, 이런 '사인여천'의 개념이 관용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이나 "求同存異(구동존이)" 또한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서의 관용이다. 이것은 앞서 제시했던 21세기의 지향인 '상생'의 경지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공자님은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는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공자가 정리한 『서경(書經)』에서 보이는 '같음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는" 구동존이의 자세는 정확하게 똘레랑스의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 김용환은 '관용의 기능'이 "궁극적으로 갈등의 해소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같음을 추구하는 자세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즉 '구동존이'가 필요한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열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자칫 폭력과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 김용환이 관용을 정의하듯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떤가?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 不可則止(불가즉지).
진심으로 이야기해서 잘 인도하되, 불가능하면 그만둔다.

이것은 서양의 똘레랑스와 다르지 않다. '不可則止(불가즉지)'는 곧바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폭력과 억압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다른 기회와 상황에서 다시금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의 통념이 관용에 대해 "지배자의 통치 기술로써 관용을 이해하고 이 때문에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고 있는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어쩌면 오해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관용은 권력자의 특권이라기 보다 의무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 증거다.

居上不寬(거상불관), 吾何以觀之哉(오하이관지재).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그를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관용은 소수자보다는 다수자가, 힘 없는 자들보다는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유한 자들이 더욱 중시하고 실천해야할 가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힘 있는 자들에게 당당히 관용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동양의 오랜 전통은 이런 똘레랑스의 맹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관용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동양의 관용은 놓치지 않는다. 광무군(廣武君)은 이렇게 말한다.

智者千慮(지자천려), 必有一失(필유일실), 愚者千慮, 必有一得(필유일득).
지혜로운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동양에서 중시되는 겸손의 덕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보면 똘레랑스의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댄 전제도 이런 겸손의 덕목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똘레랑스 혹은 관용의 기본 자세이다.

마지막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의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동양의 속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待人春風(대인춘풍), 持己秋霜(지기추상).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가을서릿발처럼.

이와 비슷한 말로 『幽夢影』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律己宜帶秋氣(율기의대추기), 處世宜帶春氣(처세의대춘기).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

관용의 실천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관용의 실천의 모범적 자세가 될 때 이 땅에 관용이 올곧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5. 무엇을 똘레랑스/앵똘레랑스 할 것인가?

문제는 관용 혹은 똘레랑스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까지 떠벌인 말은 어쩌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들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관용, 아니 똘레랑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의 일러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똘레랑스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한 사회윤리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 것이나 다 똘레랑스하고 관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앵똘레랑스가 된다. 무엇을 불관용할 것인가?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가? 똘레랑스의 정의가 복잡하였듯이 앵똘레랑스의 문제 또한 그 정확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앵똘레랑스해야 할지의 문제는 앞으로 사회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학자나 보수주의자들의 몫이라기 보다는 교육자와 진보주의자들에게 짊어지게 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소수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한 똘레랑스, 그런 세상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앵똘레랑스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항상 우리에게 남는 문제다.

6. 관용교육 - 똘레랑스의 실천을 위하여

김용환의 『관용과 열린 사회』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제6장과 제7장, 그리고 부록이다. 제6장에서는 "관용과 교육'을, 제7장에서는 "관용과 가치 교육의 전략을", 그리고 부록에서는 관용 교육의 구체적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관용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고 보다 적극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교육, 즉 관용교육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와 관련해서는 주로 정당화의 문제와 한계 문제 그리고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집중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연구자들이 앞의 두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어떻게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동안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관용의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결단에 달린 문제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개인의 심성이 너그러우면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관용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순한 논거 위에서 관용을 사(私)적인 태도로 보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이 사회적 가치로서 갈등과 분쟁의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용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결단하고 행동하는 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의 결과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관용의 가치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의 서구 사회가 비록 관용의 영역을 확대해 온 역사이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불관용의 영역은 남아 있으며 오히려 어느 부분에서는 불관용의 영역이 더 많아졌고, 특히 자본주의 정신이 강조하는 경쟁과 생산성의 증가라는 가치가 관용 정신의 필요성을 그만큼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를 정당화하거나 또 관용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 등은 자체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관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며 또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53~4쪽)

이런 점에서 관용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관용 교육이 절실해 진다. 관용 교육의 이런 필요성은 다시금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방법적 문제를 남긴다. 저자 김용환은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여러 분야에서 관용의 가치가 실천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불관용의 근거를 공략함으로써 관용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것은 교육적 차원에서 "규범적인 학교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같은 일반적인 환경" 전범위에 걸쳐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 김용환은 제7장에서 관용교육의 전략적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가 작성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가 부록에 실려 있기도 하다. 저자는 관용 교육의 방향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충서(忠恕)의 가치와 타자 존중의 정신"에서는 공자의 仁과 德의 관점에서 관용을 접목하여 학교나 사회에서 교육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화쟁 정신과 토론 문화의 지향"이란 방향, 그리고 "도적적 공감과 공동체 의식의 계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이러한 관용 교육의 전략이 어떤 식으로 교육과정이나 사회속에 접목되어 실천될 수 있는가? 즉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이 요구된다.

이런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부록에 실려있는데, 이것은 1994년 유네스코가 발간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이다. 학교 교육에서 각 과목별, 또는 통합교과에서 어떤 방법으로 관용을 교육할 수 있을지 그 교수/학습 지도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어나 영어, 나아가 수학에서도 관용의 가치를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적절한 교수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때에 관용 교육이 몸에 체득될 수 있다. 이 부록을 유의깊게 살펴보고 보다 체계적이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관용 교육의 교수/학습 전략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7. 남는 문제들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하승우의 말대로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생명을 얻"고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관용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원론적 차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관용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문제들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적극적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를 실천하자.

문제 1) 무엇을 관용하고 무엇을 불관용해야할까? 이는 막연하지만 언제나 구체적 여건 속에서 물어야할 물음이다. 이를테면 내가 이 리뷰를 언제까지의 기한을 두고 작성해야 한다고 할 때, 불가피하게 그 기한을 어겼다면, 이는 관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비비케이라던가, 뇌물의 문제는 불관용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용과 불관용의 대상이 이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느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 시점에서 무엇에 대해 관용하고, 말하자면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고, 또한 무엇에 대한 불관용해야 하는지, 다시 말하면 어디서부터 불관용해야할지를 하나하나 규정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근시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앵똘레랑스의 대상은 무엇이 있을까?

문제 2) 관용 혹은 똘레랑스는 실천적 사회윤리이고 이것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어떻게 교육해야할까? 이 관용을 말이다. 교육은 실천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실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정할 수 있지만, 교육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기보다는 그런 시행착오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문제일 수 있다. 잘못된 관용 교육을 받고 이미 졸업해버린 학생들에게 그 시행착오를 수정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 교육의 구체적 내용과 교수/학습 전략이 보다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관용교육의 보다 효과적 전략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와 함께 현재의 학교교육 현장에서 학습되고 있는 불관용의 모습은 또한 어떤 것이 있고, 이들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

그러고도 문제는, 아직 많이 남아있고, 또 남을 것이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같이 걷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가 얼마 전에 제맘대로 '2007 올해의 책'을 8권 선정했는데요,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용옥,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 3. 4.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7. 3. 7.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4. 14.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사, 2007. 5. 18.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5. 23.
김두식, 『평화의 얼굴』, 교양인, 2007. 6. 10.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김영사, 2007. 7. 16.
우석훈·박권일, 『88만원세대』, 레디앙, 2007. 8. 1.

자세한 내용은 마이페이퍼(→ http://blog.aladin.co.kr/criticahn/1752331)를 참조하세요.

막간 이벤트로 위의 8권 중에 올해 최고의 책을 2권씩 선정해 주십사 했는데요, 참여율이 생각보다 저조해서 이 이벤트를 덮을까 했습니다만^^;; 참여해 주신 분들의 성의와 어떨결의 횡재로 인해 파격적으로 이벤트를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벤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 11분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각 분마다 2권씩 선정해 주셨습니다.

우선 1위는 『88만원세대』가 차지했습니다. 총 9분께서 선정해 주셨네요. 압도적인 차이입니다.

2위는 『만들어진 신』으로 4표를 받았습니다.

3위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입니다. 3표를 받았는데요, 맘같아서는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하고 싶습니다.

4위는 『평화의 얼굴』과 『남한산성』이 각각 2표씩을 얻어 선정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6위도 1표씩 얻은 『시간의 부드러운 손』과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가 차지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순위가 좀 높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좀 아쉽군요.

『기독교성서의 이해』는 한 표도 안 나왔네요. 8위가 되겠습니다.

약속대로 『88만원세대』를 선정해 주신 9분 중에 2분을 추첨했습니다. 추첨결과 nabi님나루님께서 당첨되셨습니다. 두 분께는 10,000원 상당의 도서를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댓글로 주소(우편번호 포함), 성명, 연락처를 받고 싶으신 도서와 함께 적어주세요.

제가 횡재를 해서 몇몇분들께 선물을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위 『만들어진 신』을 골라주신 4분 중에 1분을 추첨했습니다. 그 결과 낡은구두님께서 당첨되셨습니다. 낡은구두님께 10,000원 상당의 책을 드리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소, 연락처, 성명 등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3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골라주신 분들 중 추첨한 결과 순오기님께서 당첨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골라주신 마노아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골라주신 쥬베이님께서 10,000원 상당의 책을 선물하겠습니다. 모두모두 축하드립니다.

이상으로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이벤트를 모두 마칩니다.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품절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이벤트
알라디너가 뽑은 2007 최고의 책 1위 - 9표

라주미힌, 웬디양, 정아무개, 순오기, nabi, 쥬베이, Jade, 아프락사스, 나루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이벤트
알라디너가 뽑은 2007 최고의 책 2위 - 4표

라주미힌, nabi, 낡은구두, Jade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구판절판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이벤트
알라디너가 뽑은 2007 최고의 책 3위 - 3표

순오기, 마노아, 나루
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7년 12월 18일에 저장
절판
멜기세덱 선정 '2007 올해의 책' 이벤트
알라디너가 뽑은 2007 최고의 책 공동 4위 - 2표

마노아, 낡은구두


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2-1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욤!!

마노아 2007-12-1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앗, 저 멜기세덱님 이벤트 단골 주인공 되나봐요. 유훗, 감사감사^^ 정말 거하게 마무리 하십니당~ 히힛, 감사히 책 고를게요^^

마노아 2007-12-18 17:46   좋아요 0 | URL
제 글에 제가 리플 달아요^^
브라보 내 인생 - 손문상 화첩산문집<<<요녀석 골랐어요.
2007년의 마무리를 멜기세덱님의 이벤트로 장식합니다. 멜기님의 축복을 나눠받아서 제가 행운이에요. ^^

멜기세덱 2007-12-18 17:52   좋아요 0 | URL
주소도.....남겨 주세요....ㅎㅎ

2007-12-18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쥬베이 2007-12-18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덕 멜기세덱님^^ 정말 감사합니다~ 날아갈거 같아요^^
늦었지만, 1등하신거 축하드려요^^ 책하고 주소는 고민좀 하다 정할께요ㅋㅋㅋ
멜기세덱님 최고~!!

2007-12-1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7-12-1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싸~ 가오리!
멜기님 리뷰 1등하셔서 저까지 횡재하는 거 같아요. 감사 감사~~넙죽 ^^
공지영의 '즐거운 우리집'이나 공선옥의 '명랑한 밤길'중 멜기님이 맘가는 것으로요!

2007-12-19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멜기세덱 2007-12-19 20:51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공선옥을 좋아합니다...^^;;

순오기 2007-12-20 10:04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공지영보다 공선옥이 좋습니다! ^^
두 작가가 똑같이 세번의 이혼과 성 다른 세 아이를 키우던가~~~~?

라로 2007-12-20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얍쌉빠르게 행동했더만 뽑혔네용~.ㅎㅎㅎ
솔직히 전 다른 두권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대세를 따라야 했기에,,,
그눔의 대세가,,,ㅎㅎ
책은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이요.


2007-12-20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naret 2007-12-20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감사합니다. 처음 남긴 글에 이렇게 굉장한 답례를 해주시다니.
자주 들러야 겠어요. 상품에 눈 먼 나룹니다~^^

2007-12-20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語文生活 바로잡기]

外來語 原音主義 表記의 明暗

沈在箕(서울大 名譽敎授)

우리나라 語文生活(어문생활)의 不條理(부조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漢字語(한자어)를 漢字로 적지 않으려는 風潮(풍조)라 하겠다. 外來語(외래어) 原音主義(원음주의) 表記(표기)도 漢字로 적을 수 있는 中國(중국)과 日本(일본)의 人名(인명) · 地名(지명)에 와서 딜레마에 빠진다.

外來語란 원래 외국어이지만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말 次元(차원)으로 쓰이는 낱말이다. 잉크, 펜, 마이크, 필름 같은 일반명사도 외래어이고 아이젠하워, 아웅산 수지,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사람 이름이나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토크, 프랑크푸르트 같은 땅 이름도 외래어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그런데 世界(세계)의 모든 나라가 이 外來語를 表記하고 發音(발음)할 때에는 자기 나라 말소리의 성질에 맞추어 발음하는 것을 慣行(관행)으로 하고 있다. 예컨대 英語(영어)에서는 프랑스의 땅 이름 'Paris'를 '빠리'라 발음하지 않고 '패리스'라고 발음하며, 러시아의 땅 이름 'Moskva'를 '모스크바'라 발음하지 않고 '모스코우'라 발음한다. 이것이 生硬(생경)한 外國語(외국어)를 자기 나라 音韻體系(음운체계)에 맞추어 歸化(귀화) 定着(정착)시킴으로써 日常(일상)의 言語生活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찍이 이러한 外來語 受容(수용) 原則(원칙)에 따라 二重(이중)의 體系가 通用(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즉 가까운 나라, 중국과 일본의 人名 · 地名은 모두 漢字로 적을 수 있으므로 漢字로 적고 우리나라 한자음으로 읽었고, 그 외의 먼 나라는 그 나라 발음을 존중하여 그것을 한글로 音寫하는 이른바 原音主義를 채택하였었다.

그래서 魯迅(노신), 蔣介石(장개석), 毛澤東(모택동), 北京(북경), 延吉(연길), 上海(상해)가 우리에게 익숙하였고, 伊藤博文(이등박문), 臣秀吉(풍신수길), 東京(동경), 大阪(대판)이 우리 입에 편하게 오르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1986년에 改定(개정) 施行(시행)한 外來語 表記法은 大原則을 原音主義 하나로 固定(고정)시키고, 다만 필요한 경우 漢字를 倂記(병기)하도록 하였고 종전 慣行을 약간 許容(허용)하는 것으로 規定(규정)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세 가지 表記가 共存할 수 있게 되었다.

· 鄧小平 / 떵샤오핑 / 등소평
· 胡錦燾 / 후진타오 / 호금도
· 黃河 / 황허 / 황하
· 臺灣 / 타이완 / 대만
· 北海道 / 홋카이도 / 북해도
· 玄海灘 / 겐카이나다 / 현해탄

그러나 言論(언론) · 出版物(출판물)에서는 漢字가 실질적으로 사라졌으므로 '쑨원', '와이멍구'가 각각 '孫文(손문)'이요, '外蒙古(외몽고)'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의 人名에 이르러서는 철저한 원음주의가 지켜져서 '후꾸사와류기치'가  '福澤諭吉(복택유길)'이요, '나쓰메소세키'가 '夏目漱石(하목수석)'이라고 짐작할 수도 없다.

저들은 우리나라 固有名詞(고유명사)를 모두 자기네식으로 부른다. 金大中(김대중)을 '찐따종', 盧武鉉(노무현)을 '루우쒠'으로 부르고 三星(삼성)을 '싼씽', 現代(현대)를 '쎈따이'로 부른다. 李承晩(이승만)을 '리쇼방', 全斗煥(전두환)을 '젠또깡'으로 부른다.

우리도 중국 · 일본의 고유명사는 우리 한자음대로 읽는 전통을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 『語文生活』통권 제121호 2007.12, 11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07-12-18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예전처럼 우리 한자음대로 읽는 것이 좋아요!
원음으로만 써 놓으니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고욧!
 

* 중학교 때, 우리 국어 선생님은 예뻤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와는 얼추 곱절의 나이 차이가 아니었을까 한다. 1학년 때부터 그 선생님께 국어를 배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국어는 잘하는 편이었지 싶다. 그러니 그렇게 튀는 편이 될 수가 없었다. 특출나게 국어를 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좋아하는 선생님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에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선생님께 장난을 치는 것 밖에 없어보였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되려 더 심하게 장난질을 치듯이, 그때의 어린 나도 선생님께 장난을 많이 치고 어리광도 부리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나를 혼도 내기도 하셨지만, 대부분 자상하게 어리광을 받아주셨던 것 같다. 2학년이 되어서도 그 선생님께 국어를 계속 배우게 됐다. 나이가 좀 들었으니 좀더 강력한 방법을 써야 되겠다 싶었는지, 쉬는 시간 우리 교실 복도로 지나가는 그 선생님을 발견하고는 교실 안에서 큰소리로 "어이, 서 선생"하고 불렀다. 어른들의 목소리를 흉내내겠다고는 했지만, 변성도 안 된 나의 목소리로 그것은 불가했다. 교실 문이 열리고 나를 쳐다보시는 그 선생님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화가 많이 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별 말씀은 없으시고 나를 몇 초간 노려보시더니 교실 문을 닫고 나가셨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5교시 수학시간. 수학자 오일러와 끝자리 하나가 달라서 우린 그를 오일러 동생쯤으로 여겼다. 수학 선생님 말이다. 5교시가 끝나갈 무렵, 그는 나를 불러 따라오라고 했다. 나는 왠일로 그러는지 궁금한 가운데 그 선생님을 따라갔다. 그 선생님을 따라서 간 곳은 이상하게도 교무실이 아니었다. 복도 끝의 한 구석진 공간으로 나를 데려가더니, 나를 막무가내로 패는 것이 아닌가. 백 대를 넘게 맞았다. 당구 큐대를 잘라만든 그의 몽둥이로 나는 손이고 엉덩이가 몽둥이 가는 대로 참 무참하게 맞았다. 그렇게 맞고 나서 나는 내가 왜 맞았는지를 알았다. 감히 학생으로서 선생님께 무례한 언행을 했기 때문이다. 맞을 때는 그렇게 아팠는데, 그 이유를 알고는 왠지 모르게 아플 수가 없었다. 후에 교실 문을 닫고 나간 국어 선생님이 울었다고 들었다. 못내 미안했다.

그렇게 그 국어 선생님을 볼 때마다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장난도 칠 수 없었다. 나는 죄송해서 피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 선생님의 결혼 소식이 들렸다. 다른 학교로 전근 간, 나를 무참하게 때렸던 그 오일러, 수학 선생님과 결혼을 한다는. 나 때문이었을까? 교단에 선 지 얼마 안되는 젊은 여 선생님에게 한낱 어린 중학생의 그 말은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고, 그걸 앞장서서 응징한 그 선생님에게 마음이 간 것은 아닐까? 아 그렇게 나의 어린 로망은 끝나버렸다.

** 중학교 3학년때 성적이 꽤 많이 올랐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어서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가서부터는 반에서 1등도 한 적이 있다. 다 중학교 3학년 때 잠깐 공부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때부터 내가 공부를 잘 한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더니, 나를 대하던 어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마냥 장난꾸러기, 말썽쟁이로만 보시던 어른들이 나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아닌가.

나도 으쓱해져서 제대로 잘 다니지 않던, 교회를 열심히도 다녔다. 고등학교 2, 3학년 때는 성가대도 하고, 찬양단도 하면서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와 집, 그리고 교회밖에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그래도 노래를 잘해서 교회 안의 학생 찬양단의 리더가 됐다. 고 3 때였는데, 그 때 그 찬양단에서 키보드와 피아노를 치던 한 살 아래 여학생이 있었다. 키도 작고, 통통하고, 흔히 주걱턱이라고 불리던 얼굴에, 수줍음 많고 말 없고 조용한, 남학생들한테 정말 인기가 없었던, 그런 여자아이였다. 예전부터 같은 동네에 살면서 쭉 알아왔지만, 찬양단을 함께 하면서 피아노를 치는 그 아이의 모습이 차츰 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 아이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보였다. 그런 그 아이가 나한테는 언제나 친절하고 정답게 대해주니, 그 아니도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이도 그렇고 나도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무척 연애시집을 많이 읽으며 원태연을 천재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손가락 끝으로 원을 그려봐,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이야!! 내겐 이 말이 그때 무척 절절했었다.

발랜타인데이 때, 그 아이가 내게 교회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헉.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확신을 하고 기쁜 마음에 달려가보니, 한 여자아이가 함께 나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엔 같은 찬양단에서 드럼을 치던 내 친구도 오는 게 아닌가? 그렇게 넷이 모였다. 두 여자아이의 손에 각각 초콜렛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내게 초콜렛을 건내는 여자아이는 그 여자아이가 아닌 게 아닌가? 아뿔싸. 이런. 그 아이는 내 친구를 좋아했던 거였고, 나와 또 다른 여자아이는 들러리 비슷한 것이였던 것이다. 나의 로망은 그렇게 또 식어버렸다.

*** 고 3이 끝나갈 무렵, 그래도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서 지역 합창대회를 나간 적이 있었다. 독창, 중창, 합창을 부문별로 각 교회 대표들이 모여 겨루는 대회였는데, 나는 우연찮게도 독창에 나가게 됐다. 그렇지만 입상은 못했다. 너무 떨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친구녀석이 내게 편지를 건내는 것이 아닌가? 그 대회에서 나를 본 한 여고생이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내게 편지를 보내왔던 것이다. 받아 들고 집에와서 읽어보니, 앞으로 좋은 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아이였지만,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지지도 예쁜 걸로 사고 펜도 얇게 잘 써지는 걸로 사고 매일 매일 편지를 썼다. 그런데, 어째 한 문장도 제대로 나가지 않는 게 아닌가? 학교 백일장에서 대필 전문이었던 내가 연애편지를 그렇게도 못 쓸 수가 있다니, 내가 참 이상했다. 한 달이 넘게 수십통의 편지를 쓰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결국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이후 그 여고생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편지도 없었다. 거절당한 것이라고 생각할까봐 걱정이었고, 답장도 못 보낸 내가 못내 밉고 아쉬웠다. 오 마이 로망이여

**** 대학에 들어와서 무척 방황을 많이 했다. 사실 내가 원했던 진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주변 여건이 여의치 않아 사범대학을 오기는 했지만, 대학 생활이 제대로 될리가 없었던 것이다. 학고라는 것도 맞고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하고, 그렇게 지내는 동안 당구도 배우고 바둑도 배우고, 심지어 친구들하고 고스톱이나 섯다, 당구 내기 등등등, 그렇게 밤생활을 하면서 1년을 넘게 지내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를 제대하고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았다. 선생님이라는 것도 전혀 내 적성에 안 맞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길도 무척 흥미롭고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대학 생활을 그때부터 무척 열심히 했다. 대학 친구들과도 어울리고 과내 동아리였지만 동아리활동도 열심히 했다. 시를 쓰고 읽는 동아리였다.

어느덧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중간에 휴학 기간이 있어서 내 동기들보다 길게는 2~3년, 짧게는 1년이 차이가 났다. 후배들과 함께 졸업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범대학생들에게는 매년 1회 중요한 시험이 있다. 임용시험이라는 건데, 후배와 함께 그 시험에 원서를 접수하러 가던 택시 안에서, 나는 이대로 대학생활을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11월의 어느 날인가, 나와 高군은 택시를 동승했다. 중등교원임용시험에 당당히 원서를 넣기 위하여 가는 길, 거기서 우리의 시집은 탄생을 엿본 것이다.

7, 8년간의 대학생활이 끝이 보일 무렵, 우리가 당당해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생일대 가장 중요한 시험에 원서를 접수하러 가는 그 길목에서 우리는 왜 시집을 생각했는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조금 아쉬웠을까, 무엇인가 그냥 이렇게 대학생활을 접기는 싫었던 것이다. 낭만이 없고, 이상이 없고, 도전이 없는, 현실에 얽매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닭장 안에 갇혀서 알을 낳고, 알을 낳고, 도축되고 말 그런 현실, 거기에 얽매이는 것만 같아서 그 무엇인가 획기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이 시집이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을 공유하고 또 한 명의 동참자를 떠올렸다. 李군!

…(중략)…

우리의 낭만은 무엇일까? 명색이 우리는 문학하는 사람들이고, 시 쓰는 사람들인 고로, 최고의 낭만은 다름 아닌 이 한 권의 시집인 것이다.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는가? 그는 연희전문시절 손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하여 만든 시집이 있었다. 백석을 기억하는가? 그는 그의 한 권의 시집을 온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고 멋진, 그리고 가장 소중한 추억의 한 권으로 만들기에 힘썼다. 우리도 그런 낭만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이상과 도전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상은 제각각이고 도전은 무한하다. 낭만이 있는 이들에게 이상과 도전은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원대할 것이다.

『청록집』을 기억하는가? 우리의 시집이 거기의 견줌을 얻는다면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집은 우리만의 시집으로 기억되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일 터이다.

…(후략)…

- 시집 서문중에서

 
   

그렇게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돈을 모아서 시집을 만들었다. 도서관에만 처박혀서 시험공부에만 매달려, 잔디밭에 앉아모여 선후배가 막걸리를 돌려 마시는, 그런 여유조차 없이 대학은 너무 각박해져만 가고, 기타를 치면서 신나게 노래부르며 놀던 그런 낭만도 전혀 찾아볼 수 없던 대학생활을 마감하면서 뭔가 기억에 남을 만한 그 무엇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로맨스는 못해봤지만, 낭만을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리고 이렇게 썼다.

   
 

우리들이 만든 것은 시집만이 아니다. 10년이 지난 후에 쑥스러운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추억이다. 그리고 낭만이다.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라고 폴 엘뤼아르는 말했다. 그렇다. 우리들의 꿈이 잊혀지지 않도록 '별' 하나 하늘에 띄운 것이다.

 
   

***** 며칠 전 3번째 임용시험을 봤지만, 결과는 예측가능하다. 낙방이 불을 보듯 뻔하다. 하지만 실망하거나 낙심하진 않는다. 현재 나는 교사가 되기에는 노력도 능력도 매우 부족함을 절감한다. 설령 누구의 백으로 사립에 갈 기회가 생겨도 나는 지금 마음으로는 사양할 것이다. 내년에는 그 부족함을 열심히 노력하여 채우고 싶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멋진 국어선생님이 되는 게 내 당면 목표이다.

누보 로망이라고 할까? 나의 새로운 로망은 멋진 로맨스다. 임용시험에 합격해서 첫 부임하는 학교는 여고였으면 좋겠다. 여고생들의 국어선생님.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선생님이 나오면 죄다 국어선생님이다. 얼마전 KBS에서 한 드라마에서도 양동근이 국어선생님으로 나왔다. 일단 조건은 갖춘 셈이다. 나도 국어선생님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여기서 과감하게 나의 이 누보 로망을 밝히자면, 나는 나의 첫 제자와 아름다운 사랑을 해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없지 않을까? 선생님을 사랑하고 제자를 사랑하는 것은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에 제한될 수 없는 숭고한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 사회윤리 도덕적 문제를 항상 주의를 해야하겠지. 사랑하는 제자를 끝내 잘 지켜주고 가르치고 키워서, 장차 멋지게 결실을 맺는다면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쁜 여제자와 신참 교사의 사랑. 내 가슴 속 깊이 품은 로망이다. 이 로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아 내년이면 서른인데, 이 늙은 신참 교사를 어느 여고생이 좋아해줄까? 걱정은 거기에 있다. 일단 공부나 제대로 해야겠지만.ㅋㅋㅋ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주미힌 2007-12-1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잘 가다가... 마지막에서..
사회면에서 멜기세덱님을 만날 수 있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

멜기세덱 2007-12-14 01:56   좋아요 0 | URL
언제부턴가, 제 페이퍼에 첫 댓글 단골이 되셨네요. ㅎㅎㅎ
진실게임 같은데도 함 나가보려구요...ㅋㅋㅋㅋ

조선인 2007-12-14 08:14   좋아요 0 | URL
흑흑 저도 걱정이 눈앞을 가립니다. ㅠ.ㅠ

멜기세덱 2007-12-14 09:57   좋아요 0 | URL
ㅎㅎ 괜한 걱정이세요. 아직까지 로맨스는 안 이뤄지더라구요...ㅋㅋㅋ

웽스북스 2007-12-14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로망스 보셨어요? 크크 그건 정말 모든 선생님들의 '로망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ㅋㅋ 난 선생이고, 넌 제자야!! ^^
그리고 우리 감우성님께서도 '사랑해 당신을' 드라마에서 채림양과 함께 멜기님의 로망을 현실화하셨었죠 ^^ 마지막 부분은 어제의 태그 '드라마'와도 나름 어울리네요, 일단은 임용 첫해에 남고/남중으로 가는 불행이 없길 먼저 기도해야겠네요 ^^

멜기세덱 2007-12-14 01:57   좋아요 0 | URL
어젠 아침드리마폐지론을 쓰려다가 힘들어서 말았어요..ㅋㅋㅋ
아참드라마때문에 맨날 지각을 해서리....ㅎㅎㅎ
아~ 나의 사랑은 어디서 지금 잘 크고 있겠죠? ㅋㅋㅋ

마늘빵 2007-12-14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잘 나가다가.... ㅋㅋㅋ 그나저나 그 시집 한 권 주세요. 제가 시집은 안 읽지만 멜기님 시집은 고이고이 간직하겠습니다.

멜기세덱 2007-12-14 01:57   좋아요 0 | URL
앗, 시집 제고가 많긴 하지만, 민망한뎅....ㅋㅋㅋ

순오기 2007-12-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멜기님은 진짜 제대로 된 로망을 쓰신 거야요.
아~ 우리 막내가 이제 중학교 가는데...그쪽으로 전학시킬까...
은근, 이런 사람이 내 사윗감이었으면 했다고욧! ^^

멜기세덱 2007-12-14 10:00   좋아요 0 | URL
헉! 이제 중학교요?
그럼 앞으로 6년은 더 기다려야 되는 거네요? ㅋㅋㅋ
그럼 36인뎅....ㅋㅋㅋ 하여간 장모님으로 깎듯이 모실 자신은 있습니다.ㅋㅋㅋ

순오기 2007-12-14 10:43   좋아요 0 | URL
호호호~ 장모님으로 깎듯이 모실 자신 있다니, 이번에 거기로 대학가는 큰딸도 있는데... ㅎㅎㅎ

마늘빵 2007-12-14 10:55   좋아요 0 | URL
엇 그렇담 큰 딸은 제게... =333

멜기세덱 2007-12-14 11:43   좋아요 0 | URL
어허,,,,아프군이 나설 자리가 아니에요...ㅋㅋㅋㅋ
근데,,,거기라뇨? 여기 우리 대학 말이에요? ㅎㅎㅎ

마늘빵 2007-12-15 00:48   좋아요 0 | URL
저두 껴주세요.

순오기 2007-12-15 11:1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알라딘에서 사위 둘을 맞아볼까요!
큰사윈 아프님, 멜기님은 막내사위?
거기는 00교대거든요.
교사커플... 최상일텐데... 아이는 내가 잘 키워줄 수도 있고! ㅎㅎㅎ
크~~~~우리애들이 알라딘에서 자기들 팔아먹지 말라네요~ 헉 ^^

멜기세덱 2007-12-15 02:26   좋아요 0 | URL
우왕 거기 교대도 들어가기 꽤나 힘든뎅....ㅎㅎ
큰따님께 축하한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그쪽 교대 수학교육과 교수님 한 분을 잘 아는뎅...ㅎㅎㅎ
아무래도 큰사위는.....ㅋㅋㅋ

순오기 2007-12-15 15:06   좋아요 0 | URL
오우~ 멜기님, 수학교육과 교수님을 아시면 우리딸한테 도움되려나!^^
우리애들 전설의 56점 아시나요? 태그주제 성적표에 올린...ㅎㅎ
과 선택을 무슨 과로 해야 할지....

Mephistopheles 2007-12-14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님이 선생님이 되신다면 왠지 여고생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다니실 것 같은 느낌이..^^

멜기세덱 2007-12-15 02:34   좋아요 0 | URL
이거이거,,,,완전 방송용 멘트처럼 들리는데요....ㅎㅎㅎ

엔리꼬 2007-12-1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멜기세댁님이 이렇게 나이 어리신(?) 분이었나요? 저는 저보다 많다고 생각했는데.. 쿠쿠쿵 아직 서른이 안되셨다니... 님의 페이퍼를 샅샅이 훑지 못했던 저의 불찰이네요.. 전체적으로 한자도 많고 어려운 글이 많아서 그랬나요?? 아무튼 리뷰 대박 축하드립니다.

멜기세덱 2007-12-15 02:35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어리답니다....ㅎㅎㅎ

깐따삐야 2007-12-1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제의 서재글 보고 찾아왔어요! 전 첫 발령을 남중으로 받았었는데 로망은 커녕, 완전 호형호제하며 지냈더랬죠. 야멸찬 현실이 아닐 수 없었지만 듣자하니 멜기님은 꽃미남이라시니깐 여중, 여고로만 가면 대박이겠는걸요?
근데 전 처음에 멜기세덱님이 멜기새댁인줄 잘못 봤어요. 새신랑 앞에서 부채 들고 황진이춤 추는 고운 새댁 쯤으로 생각했다는. 쿠쿠.^^

멜기세덱 2007-12-15 02:35   좋아요 0 | URL
하하하....황진이 춤 추는 멜(랑꼴리)한 새댁....ㅋㅋㅋ

심술 2007-12-14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왜 이렇게 웃기는지. 한참 즐겁게 웃고 갑니다.

멜기세덱 2007-12-15 02:3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

2007-12-15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