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21세기가 요구하는 가치, 똘레랑스 or 관용(寬容)

20세기와 21세기 사이에 끼여 살아간다는 것은 다분히 혼란스러운 것이다. 시간 혹은 세월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자르듯 나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 또한 새천년 시작의 카운트다운에 의해 급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기의 변화를 경험하는 이들에게 그 의미와 상징, 그리고 인식에 가해지는 충격은 매우 크다. 서기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세상이 큰 혼돈에 빠질 위험을 경고하는 목소리들도 거셌다. 이른바 밀레니엄버그가 와서 말로 다 못할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 말, 세상 곳곳은 들썩거렸다. 앞으로 다가올 21세기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를 놓고 저마다 한 목소리씩 내고 있었다. 20세기를 이끌었던 가치의 한계를 뛰어넘을 새로운 21세기의 가치가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이른바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하는 것들이 그런 목소리에 섞여 나온 것인데,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지금도 가는 곳마다 이런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쳐대고 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가치들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따져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새로운 가치 혹은 인식이 필요할 것만 같다.

내 생각에 21세기는 20세기가 보여줬던 모든 가치와 인식이 뒤집어 엎고 새로운 틀 안에서 형성되어만 하지 않을까 한다. 산업화 · 공업화에 따른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인한 인간 소외, 자본주의가 낳은 비인간적 사회 인식 등등 20세기적 가치들은 21세기 더이상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21세기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는 한미FTA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화는 20세기적 과거의 가치들이 겉모습만 바꾸어, 아니 더 강화되어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인양 들이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21세기에 요구되는 가치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그것은 상생이다. 20세기의 중심 가치들이 모든 것을-인간을, 자연을- 소외와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할 때, 이러한 것은 회복하는 가치, 곧 모든 것이 서로 사는 상생(相生)이어야 할 것이다. 상생의 기반에는 서로가 서로는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른바 똘레랑스 혹은 관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말한다. 21세기에는 '관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2. 관용이란 무엇인가?

1990년대 중엽에 파리에서 택시를 몰다가 온 홍세화는 이 땅에 '똘레랑스'란 개념을 소개했다. 흔히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 두 개념, 즉 '똘레랑스'와 '관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관용은 많은 부분 똘레랑스의 개념에 바탕한다. 홍세화가 소개한 그 똘레랑스말이다. 홍세화와 비슷한 시대에 이 똘레랑스, 그러니까 그것은 번역어인 '관용'에 대해 천착한 우리나라의 철학자 김용환 교수가 1997년에 출간한 『관용과 열린 사회』는 홍세화의 경험적 똘레랑스와 달리 보다 학문적, 철학적, 체계적 '관용'의 저술이란 점에서 주목된다. 여기서는 이 책을 중심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21세기의 필수적 가치 혹은 사회윤리로서의 관용에 대해 살피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관용에 대해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용'은 여기서 말하는 '관용'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 서양의 '똘레랑스'라는 것도 간단명료하게 정의되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똘레랑스'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고, 김용환도 이 책에서 그 정의의 문제를 길게 논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헨드릭 빌렘 반 룬이 따르고 있는 브래태니커의 정의를 따르는 것으로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Tolerance ('참다'라는 뜻의 라틴어 'tolerance'에사 온 말) :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나 판단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 자신의 견해 또는 일반적인 방식이나 관점과 다른 것을 편견 없이 끈기 있게 참아주는 것."(헨드릭 빌렘 반 룬, 『관용』(반 룬 전집 03), 서해문집, 2005. pp.23 ~ 4.에서 재인용)을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관용의 정의로 채택하기로 한다.(관용의 정의에 관해서는 하승우,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 2003. 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관용의 정의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 『관용과 열린사회』의 제1장 '관용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세히 논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하면 복잡하다는 것인데, 김용환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를 관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가 확 와닿지는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3. 우리 사회에 왜 관용이 필요한가?

불행하게도 해방 이후 지난 50여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 아래에서도 정치적 저항만을 했을 뿐 관용의 가치를 말하거나 미래 세대를 위해 관용 교육을 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불관용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관용은 철권 통치와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머리말'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관용의 덕목'의 중요성을 말한 사람은 몇몇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미하다. 또한 "70년대와 80년대의 암울하고 억압적인 통치"는 이미 끝났다고 하지만 21세기에 이른 이 사회는 여전히 불관용이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97년에 이 책을 펴내면서 가졌던 이런 문제의식이 1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직도 우리 사회는 관용이 없다. 관용에 목마르다. 상황이 변해고 시대가 변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기에 이런 관용이 그리 절실한 것으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달리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는 전혀 달라졌다. 사회가 다원화 되고 개개인이 존중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최고지선인 이 시대에 관용은 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저자가 제5장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요청되는 영역들"에서 제시한 관용이 절실히 필요한 영역들은 아직도 여전하다. 저자 김용환은 "한국 사회의 발전 방향을 잠정적으로 다원주의 사회라고 설정"하고 있다. 이런 다원주의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여전히 큼직한 걸림돌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관용의 정신이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관용이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문제 영역" 다섯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데올로기 극복과 동질성 회복", '탈연고주의', "종교적 분파주의의 해체", "배타적인 경쟁의 논리", "학문, 예술, 문화의 자유" 등이다.

여기 저자가 제시한 영역들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제 영역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누군가는 말하고 있지만, 북한의 체제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말하지만, 개성 공단 등의 경제협력으로 왕래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부르짖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족속들이 거세다. 연고와 연줄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는 사회, 종교적 관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 무한 경쟁으로 치닫는 승자독식의 사회, 그도 모자라 사상의 자유까지 통제되고 있는 사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니다. 이러한 영역들에 우리는 여전히 관용이라는 문제 해결의 열쇠를 던져주어야 한다.

4. 서양의 똘레랑스와 동양의 관용의 만남

우리의 관용과 서양의 똘레랑스가 정확히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용은 서양의 똘레랑스에 많이 기울어져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인 관용도 이런 똘레랑스를 껴안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여기서는 이런 접목, 혹은 그간 알지 못했던 동양의 관용의 넓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제우는 말했다. "사람 섬기기를 하늘처럼 하라."(事人如天(사인여천))고. 사실 이것은 똘레랑스가 가지는 타인을 존중하고 나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동양적 관용의 경지다. 입때까지 우리말에서 '관용'은 힘을 가진자의 자비 내지 동정으로만 축소되어 사용해 왔지만, 이런 '사인여천'의 개념이 관용에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和而不同(화이부동)"이나 "求同存異(구동존이)" 또한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보다 훨씬 높은 경지에서의 관용이다. 이것은 앞서 제시했던 21세기의 지향인 '상생'의 경지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공자님은 "남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을 잃지 않음"을 강조했다. 이는 서양의 똘레랑스란 개념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공자가 정리한 『서경(書經)』에서 보이는 '같음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는" 구동존이의 자세는 정확하게 똘레랑스의 개념을 담아내고 있다. 김용환은 '관용의 기능'이 "궁극적으로 갈등의 해소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같음을 추구하는 자세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즉 '구동존이'가 필요한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에 대해 토론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열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만, 자칫 폭력과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자 김용환이 관용을 정의하듯이, '부정적 행위의 자발적 중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떤가?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 不可則止(불가즉지).
진심으로 이야기해서 잘 인도하되, 불가능하면 그만둔다.

이것은 서양의 똘레랑스와 다르지 않다. '不可則止(불가즉지)'는 곧바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폭력과 억압으로 치닫는 것을 막는 방법이다. 다른 기회와 상황에서 다시금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의 통념이 관용에 대해 "지배자의 통치 기술로써 관용을 이해하고 이 때문에 소수의 지배 집단 또는 권력의 소유자들만이 행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으로 관용을 이해"하고 있는 오해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어쩌면 오해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관용은 권력자의 특권이라기 보다 의무이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그 증거다.

居上不寬(거상불관), 吾何以觀之哉(오하이관지재).
윗자리에 있으면서 관대하지 않으면, 내가 어찌 그를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관용은 소수자보다는 다수자가, 힘 없는 자들보다는 힘 있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유한 자들이 더욱 중시하고 실천해야할 가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힘 있는 자들에게 당당히 관용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동양의 오랜 전통은 이런 똘레랑스의 맹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관용에 전제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동양의 관용은 놓치지 않는다. 광무군(廣武君)은 이렇게 말한다.

智者千慮(지자천려), 必有一失(필유일실), 愚者千慮, 必有一得(필유일득).
지혜로운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동양에서 중시되는 겸손의 덕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보면 똘레랑스의 인간의 불완전성에 기댄 전제도 이런 겸손의 덕목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똘레랑스 혹은 관용의 기본 자세이다.

마지막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의 실천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동양의 속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待人春風(대인춘풍), 持己秋霜(지기추상).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가을서릿발처럼.

이와 비슷한 말로 『幽夢影』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律己宜帶秋氣(율기의대추기), 處世宜帶春氣(처세의대춘기).
자기를 다스릴 때는 가을기운을 띠고,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봄기운을 띠어야 한다.

관용의 실천은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관용의 실천의 모범적 자세가 될 때 이 땅에 관용이 올곧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5. 무엇을 똘레랑스/앵똘레랑스 할 것인가?

문제는 관용 혹은 똘레랑스가 아닐지 모른다. 지금까지 떠벌인 말은 어쩌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말들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보다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하는 것,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누구나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관용, 아니 똘레랑스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의 일러 "정의를 부르짖는 관용"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똘레랑스가 이 땅에 정의를 세우기 위한 사회윤리라는 것인데, 이는 아무 것이나 다 똘레랑스하고 관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앵똘레랑스가 된다. 무엇을 불관용할 것인가?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인가? 똘레랑스의 정의가 복잡하였듯이 앵똘레랑스의 문제 또한 그 정확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인다. 무엇을 똘레랑스하고 무엇을 앵똘레랑스해야 할지의 문제는 앞으로 사회 보편적으로 논의되고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학자나 보수주의자들의 몫이라기 보다는 교육자와 진보주의자들에게 짊어지게 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소수자, 가난한 자, 약한 자, 소외된 자들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한 똘레랑스, 그런 세상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앵똘레랑스가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항상 우리에게 남는 문제다.

6. 관용교육 - 똘레랑스의 실천을 위하여

김용환의 『관용과 열린 사회』에서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제6장과 제7장, 그리고 부록이다. 제6장에서는 "관용과 교육'을, 제7장에서는 "관용과 가치 교육의 전략을", 그리고 부록에서는 관용 교육의 구체적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관용이 이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고 보다 적극적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교육, 즉 관용교육이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와 관련해서는 주로 정당화의 문제와 한계 문제 그리고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집중된다. 불행하게도 많은 연구자들이 앞의 두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다. '어떻게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동안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관용의 문제가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결단에 달린 문제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 개인의 심성이 너그러우면 관용적인 사람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불관용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순한 논거 위에서 관용을 사(私)적인 태도로 보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이 사회적 가치로서 갈등과 분쟁의 조절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용을 실천하는 일은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결단하고 행동하는 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의 결과가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관용의 가치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의 서구 사회가 비록 관용의 영역을 확대해 온 역사이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불관용의 영역은 남아 있으며 오히려 어느 부분에서는 불관용의 영역이 더 많아졌고, 특히 자본주의 정신이 강조하는 경쟁과 생산성의 증가라는 가치가 관용 정신의 필요성을 그만큼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관용의 가치를 정당화하거나 또 관용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일 등은 자체로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관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며 또 실천할 수 있도록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53~4쪽)

이런 점에서 관용이 보다 적극적으로 이 사회에서 실천되기 위해서는 관용 교육이 절실해 진다. 관용 교육의 이런 필요성은 다시금 "관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의 방법적 문제를 남긴다. 저자 김용환은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여러 분야에서 관용의 가치가 실천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불관용의 근거를 공략함으로써 관용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일"이다. 이것은 교육적 차원에서 "규범적인 학교 교육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사회 같은 일반적인 환경" 전범위에 걸쳐 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 김용환은 제7장에서 관용교육의 전략적 방법을 논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가 작성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가 부록에 실려 있기도 하다. 저자는 관용 교육의 방향을 3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충서(忠恕)의 가치와 타자 존중의 정신"에서는 공자의 仁과 德의 관점에서 관용을 접목하여 학교나 사회에서 교육되어야 함을 강조하여 제시하고 있다. 또한 "화쟁 정신과 토론 문화의 지향"이란 방향, 그리고 "도적적 공감과 공동체 의식의 계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이러한 관용 교육의 전략이 어떤 식으로 교육과정이나 사회속에 접목되어 실천될 수 있는가? 즉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이 요구된다.

이런 관용교육의 구체적 교수/학습 방법을 살짝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부록에 실려있는데, 이것은 1994년 유네스코가 발간한 『관용 : 평화의 시작 ; 평화, 인권, 민주주의의 교육을 위한 교수/학습 지침서』의 일부이다. 학교 교육에서 각 과목별, 또는 통합교과에서 어떤 방법으로 관용을 교육할 수 있을지 그 교수/학습 지도안을 제시하고 있다. 국어나 영어, 나아가 수학에서도 관용의 가치를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적절한 교수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때에 관용 교육이 몸에 체득될 수 있다. 이 부록을 유의깊게 살펴보고 보다 체계적이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관용 교육의 교수/학습 전략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7. 남는 문제들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하승우의 말대로 "똘레랑스라는 개념은 실천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 생명을 얻"고 "똘레랑스의 뜻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바로 그 길에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관용을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쌓여갈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은 원론적 차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관용의 실천에서 일어나는 구체적 문제들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것들을 고민하면서 적극적으로 관용 혹은 똘레랑스를 실천하자.

문제 1) 무엇을 관용하고 무엇을 불관용해야할까? 이는 막연하지만 언제나 구체적 여건 속에서 물어야할 물음이다. 이를테면 내가 이 리뷰를 언제까지의 기한을 두고 작성해야 한다고 할 때, 불가피하게 그 기한을 어겼다면, 이는 관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비비케이라던가, 뇌물의 문제는 불관용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용과 불관용의 대상이 이렇게 명확히 구분되지 않느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현 시점에서 무엇에 대해 관용하고, 말하자면 어디까지 관용할 수 있고, 또한 무엇에 대한 불관용해야 하는지, 다시 말하면 어디서부터 불관용해야할지를 하나하나 규정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근시적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앵똘레랑스의 대상은 무엇이 있을까?

문제 2) 관용 혹은 똘레랑스는 실천적 사회윤리이고 이것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어떻게 교육해야할까? 이 관용을 말이다. 교육은 실천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실천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정할 수 있지만, 교육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기보다는 그런 시행착오라는 것이 매우 위험한 문제일 수 있다. 잘못된 관용 교육을 받고 이미 졸업해버린 학생들에게 그 시행착오를 수정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 교육의 구체적 내용과 교수/학습 전략이 보다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관용교육의 보다 효과적 전략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와 함께 현재의 학교교육 현장에서 학습되고 있는 불관용의 모습은 또한 어떤 것이 있고, 이들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

그러고도 문제는, 아직 많이 남아있고, 또 남을 것이고,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같이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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