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는 사람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날씨도 구리한데(결국 식이 끝나고 비가 왔다.), 마음도 꾸리했다.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애절히 여기게 된 나보다 한 살이 어린 이 친구가 결혼은 한 것이다. 내 마음이 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이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주지 않을 이유는 없다. 구린 것 내 사정이고, 축하는 또 다른 사정이니, 진정으로 이 친구의 결혼을 축하한다.
결혼식이 막 시작할 무렵 도착했다. 식장에 들어서서 진행되는 결혼식을 지켜봤다. 주례가 끝나고 축가가 이어졌다. 신부가 학교 선생님인데, 역시나 축가를 제자가 맡았다. 클래식 기타 연주였는데, 음향 시설이 좋지않아, 뭘 하는지를 들을 수는 없었다. 클라이맥스는 이 친구, 오늘의 신랑의 노래였다. 신부에게 바치는 노래. 멋지게 불러제꼈다. 아무래도 노래 연습을 한 것 같다. 처제란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전해들은 바로는 처제가 바이올린 전공자란다.(이 정보를 입수하고 다정스레 이 친구에게 접근했더니 曰, "며칠 후에 독일로 유학가요.") 노래를 꽤나 잘 불렀는데, 아무래도 좀 모션이 어설프지 않았나 싶다. 하여간 그건 그거고, 중요한 건 이 신랑이 부른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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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나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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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톤 김동규의 중후한 목소리에 실린 이 사랑의 노래는 99% 감동이기에 확실하다. 28의 젊은 신랑의 씩씩한 목소리로 전하는 이 노래도 그 날의 아름다운 신부에게 무한 감동을 선사한 듯이 보였다. "널 만난 세상"에서 "어디서 무얼" 하건, '사랑'만이 '가득'할 것이다. 이에 더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 다만 '시월의 어느' 날만이 멋지겠는가? 사랑하는 두 연인에게는 만날이 '멋진 날'일테다. 더 무엇을 바랄까? 바란다면 죄가 될지 모른다.
이 노래는 예전에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세계적인 바리톤 김동규하고 함께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랄 만큼 아름답게 울렸다. 그러나 이 "어느 멋진 날에" 울리는 이 노래의 감동이 100%가 되기에는 어딘가 1% 정도 모자란 감이 있는 것은 왜일까?
며칠 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 신랑이, 나랑 포함한 직장동료들에게 피자를 쐈다. 모인 자리에서 화제는 결혼식 당일 신랑이 이 멋진 노래였다. 모두들 멋있단다. 노래도 너무 좋았단다. 인터넷으로 원곡을 찾아 듣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고, 나는 '과감히' 말했다. "이 노래에서 틀린 게 있는데, '바래' 아니죠, '바라' 맞습니다."
근데, 반응들이 예상 외였다. 다들 '아 그렇지!'하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아니, '바래'가 아니고 '바라'야?" 눈이 동그레져서 쳐다본다. 전혀 몰랐다는 눈치다. '이거 이 사람들이 다들 대학나온 사람들이 맞나!'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생각건대, '바래'가 아니고 '바라'인 건 대부분 다 잘 알면서 으레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줄만 알았다. 그런다 그게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원래 '바래고, 바램'이었다. 아니 이런!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온다. "'바라다'가 맞고 '바래다'가 틀리다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라다'도 맞고, '바래다'도 맞아." 여기서 '바라다'와 '바래다'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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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다 「동」
① 생각이나 바람대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거나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다.
¶요행을 바라다/도움을 바라다/너의 성공을 바란다.//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란다./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랍니다./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기적이 있기를 바란다./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부디 참석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그는 내심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친구의 사업이 성공했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는다.§
② 원하는 사물을 얻거나 가졌으면 하고 생각하다.
¶돈을 바라고 너를 도운 게 아니다./그는 한몫을 바라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딸부자 집에서 또 딸을 바란다니 의외이다.§
③ 어떤 것을 향하여 보다.
¶우리는 앞만 바라보며 죽을 힘을 다해서 인왕산을 바라고 뛰었다.§
바래다1 「동」
① 볕이나 습기를 받아 색이 변하다. ¶빛 바랜 편지/색이 바래다/종이가 누렇게 바래다/오래 입은 셔츠가 흐릿하게 색이 바랬다./누렇게 바랜 벽지를 뜯어내고 새로 도배를 했다./회색의 대문에 누렇게 빛이 바랜 종잇조각은 여전히 붙어 있었다.≪김승옥, 건≫§
② 볕에 쬐거나 약물을 써서 빛깔을 희게 하다.
¶속옷을 볕에 바래다/출입옷도 아니고 보통 때 입으라고 광목을 바래서 해 놨다.≪박경리, 토지≫§
바래다2 「동」
가는 사람을 일정한 곳까지 배웅하거나 바라보다.
¶그녀는 친정어머니를 역까지 바래다 드렸다./감사역을 비롯한 사람들이 따라 나와서 그들을 바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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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바라다'와 '바래다'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게된다. 그 의미의 차이의 간격이 크기때문에 아무래도 이 둘을 혼돈하면 대략난감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혼동한다. 아니 요즘은 전혀 '바라'지 않고 '바랜'다.
고어에서 'ㅂ(아래아)라다'와 '바ㄹ(아래아)다'가 있었다. 전자가 오늘날의 '바라다'가 되었고, 후자는 '바르다'가 되었다. 예전에 있던 모음 '아래아'는 오늘날 'ㅏ, ㅡ'로 바뀌거나 탈락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둘이 모두 '바라다'가 되지 않고 분화된 것은 나름의 원리가 있긴 하지만, 이 둘의 혼동을 막기 위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바래다1'의 경우 원래부터 '바래다'가 아니었을까 싶다.(과문한 탓에 어원을 잘 모르겠다.) '바래다2'는 '발다+애'의 형태로 분석된다. 분명 이 둘의 차이가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가 혼동하는 것이 '바라다'와 '바래다'인데, 도대체 왜 이 둘이 혼동, 아니 '바래다'로 수렴되는가? 나로서는 좀 알기 힘들다.
원인을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움라우트 현상이 아닐까 싶다. 움라우트란 'ㅣ'모음 역행동화라고도 하는데, '먹이다'를 '멕이다'로 '학교'를 '핵교'로 발음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 움라우트는 그 원인자, 즉 'ㅣ'모음이 있어야 하는데, '바라다'에는 그것도 없다. 하여간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언어학자들이 찾아봐야 하겠다.
우리가 흔히 구어에서 사용할 때는 '바라다'라는 기본형으로 말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바라고, 바라니, 바라서'등이나, "~하기를 바라, 바라요' 등의 활용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활용형들이 좀 불안스럽고 발음하기 불편하다는 이유가 이를 '바래다'로 합치시켜버리는 게 아닐까 추측한다. '바라요'에서는 움라우트의 원인자가 '요'에 있기도 하다. "잘 살길 바라."는 어딘지 어색스럽다. "잘 살길 바래."로 대부분 말한다.
'바라다'를 '바라다'로 사용하는 예는 대부분 구어에서다. 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잘 구분해서 쓴다. 마치 '자장면'이라고 쓰고 [짜장면]이라고 발음하는 것처럼. 그런데 그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위의 노래 가사에서처럼 말이다. 점점 글을 쓸 때도 '바래다'로 수렴되는 현상을 곳곳에서 목격하기도 한다. 아직 '바라다'를 '바래다'로 쓰는 것은 죄(?)가 되지만, 어법이라는 것이 언중의 현실을 따라야 하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바래'도 죄가 없을지 모른다.
한글맞춤법이 언중의 현실을 따라가는 속도가 대단히 무디지만, 우리가 열심히 '바라다'를 '바래다'로 쓰면 지들이 어쩌겠는가? 근데, '바람'이 '바램'이 되면 우리가 '바라'는 것이 왠지 빛이 '바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이래 생각하면 '바라다'를 '바래다'로 쓰기 왠지 거북스럽기도 하다. 아직은 '바램'은 죄가 된다.
덤으로, "회사의 (승패/성패)가 달려 있는 이번 사건에 전 직원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에서 무엇이 맞을까? 당근 '성패'가 맞다. '승패(勝敗)'는 이기고 짐을 말하고, '성패(成敗)'는 성공과 실패를 말한다. '성패 여부, 성패를 가름하다, 성패를 좌우하다' 등처럼 쓰인다. 세상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으로 빠져들고 있어 뭔 일만 있어도 그 일을 이루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보다, 다만 이기고 지는 것만이 중요해 진 것은 아닐까? '승패'는 저기 축구장에나 가서 따지고, 우리는 '성패'에만 신경쓰고 살자.
덤2. 제목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인데, 흔히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도 쓴다. 근데 왜 "십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아닐까? 한글 맞춤법 제52항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자어에서 본음으로도 나고 속음으로도 나는 것은 각각 그 소리에 따라 적는다." 따라서 十日은 십일이고, 十月은 시월이다. 八日은 팔일이고 初八日은 초파일인것 처럼. 마찬가지로 十王은 시왕으로 읽는다. 육월이 아니고 유월이고 오륙월이 아니고 오뉴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