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거는 시비걸기다. 오늘은 "뭐 그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시비를 거느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뭔가하면 한글 자음의 명칭인데, 이게 생각할 수록 좀 답답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다.
한번 따져보자.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있고, 그보다는 훨씬 적지만 그래도 많은 문자가 있다. 문자의 발달사에서 뒤쪽에 자리하는 것이 음소문자(대개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가리킨다.)인데, 대표적인 것이 알파벳이다. 알파벳은 각기 언어에서 약간씩 다르게 사용된다. 영어나 독일어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이 그렇다. 한글은 이 음소문자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좀더 발전된 형태라고 보는 자질문자에 넣기도 한다. 하여간 한글도 자음과 모음으로 나눌 수 있으니 크게보아 이 음소문자라 해두는 것이 편하겠다.(흔히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다면서 '자질문자'라고 떠든다.)
아, 어려운 소리 하고 있다. 절미하고, 자음과 모음을 가진 세상의 문자들 중에 그 자모의 명칭, 특히 자음의 명칭이 한글만큼 어렵고 복잡한 것이 있을까? 내가 아는 선에서는 '없다'이다.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전국민 80% 이상이 이 한글 자음의 명칭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고 확신한다. 왜 그럴까?
① 자음의 명칭이 모두 2음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음절문자인 일본의 문자도 2음절로 된 것이 거의 없다.(일본어를 잘 몰라서 '전혀'란 말을 쓰지 못하겠다.) 영어나 독일어에서는 간혹 2음절처럼 보이는 명칭이 있다.(F, H, J, K, V, X) 그러나 이것들도 모두 1음절이다. ② 자음의 명칭 패턴에 방해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자음의 명칭을 부여하는데에 일정한 패턴 가운데, 돌출적인 것이 몇몇 들어있어 심각한 장애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여간 우리 한글의 자음 이름은 이러이러해서 헷갈리는데, 이 이름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우리를 헷갈리게 한 주범이 있으니, 바로 '세종대왕'일까? 그건 '아니다'다.
그럼 누굴까? 조선 중종 22년, 그러니까 1527년에 최세진이란 사람이 『훈몽자회(訓蒙字會)』라는 한자 학습서를 지었다. 이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된 1443년이나, 반포된 1446년보다 얼추 100년 뒤의 일이다. 한자를 가르치기 위한 이 학습서에서 한자의 음을 가르치기 쉽게 해주는 방법을 썼으니, 그것은 훈민정음을 이용해서 한자음을 표기하는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표음문자로써 다양한 음을 나타낼 수 있다는 장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훈민정음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최세진은 이 책의 앞자리에 한글자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넣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의 한글 자음의 명칭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 기록된 자음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추려보면,
ㄱ 其役 기역
ㄴ 尼隱 니은
ㄷ 池(末) 디귿
ㄹ 梨乙 리을
ㅁ 眉音 미음
ㅂ 非邑 비읍
ㅅ 時(衣) 시옷
ㅇ 異凝 이응
이런 식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좀 이체로운 것이 있다. 그것은 ㄱ, ㄷ, ㅅ이다. 나머지는 모두 모음이 'ㅣ, ㅡ'가 붙어 초성과 종성에서 자음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공식을 따르면 ㄱ은 '기윽', ㄷ은 '디읃', ㅅ은 '시읏'이 되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가 있다. 잘 보면 최세진이 각각의 자음에 한자를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별다른 뜻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각 자음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그 용례를 보이기 위해 한자를 음차한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ㄴ은 한자 尼의 발음, 그러니까 [니]에서처럼 첫소리에 쓰이고, 隱의 발음 [은]에서처럼 끝소리에 쓰인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ㄱ을 '기윽'으로 해야겠는데, '기'는 '其'로 쓸 수 있었지만, '윽'에 해당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세진은 고민끝에 엇비슷한 '役'을 "아무 이유 없이' 갖다 쓴 것이다.
그런데, ㄷ과 ㅅ은 또 이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ㄷ에 쓰인 한자를 음대로 읽어보면 '디말'이다.(여기서 조금 설명이 필요한데, 池(지)는 당시에 아직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디]와 유사하게 발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 이건 왜 그렇지? 자 여기서도 이유는 동일하다. '읃'을 써야겠는데, 이것에 해당하는 한자가 암만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ㄷ을 받침으로 쓰는 다른 한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음차가 아닌 훈차, 즉 뜻을 가져다 소리를 나타낸 것이다. '末'의 뜻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끝'이다. 당시에는 아직 된소리가 없었다. 따라서 '귿'으로 썼다. 그래서 ㄷ의 용례로 '디귿'을 쓴 고육지책인 것이다.
ㅅ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한자를 읽어보면 '시의'지만, 衣(의)의 뜻인 '옷'을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ㅅ의 용례로 '시옷'을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최세진이 꾀를 부린 것인데, 당시로서는 탁월한 것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렇게 최세진이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훈민정음을 가르쳐야 했는데, 훈민정음을 가르치르치면서 그 용례를 보인 것에 불과한 것들을 지금은 당당하게도 이름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ㅋ (箕) *한자의 음은 [기]다. 箕의 뜻은 '키', 그러니까 여기서도 훈차를 한 것이다.
ㅌ 治 *현재 한자음은 [치]지만, 당시 구개음화가 되기 이전이어서 [티]로 읽었다.
ㅍ 皮 *이 한자는 '가죽'을 뜻하고 발음은 [피].
ㅈ 之 지
ㅊ 齒 *한자는 '이'를 뜻하는 [치]
ㅎ 屎 *이 한자는 '똥'을 뜻하는 [시]이다. 아마도 당시 [히]로 읽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모두 모음 'ㅣ'와 결합한 용례로 쓰고 있다. 중요도가 떨어졌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들 모두 앞의 것과 같이 2음절로 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하여간 이렇게 해서 지금의 자음 명칭이 정해진 것인데, 1988년 3월 1일 문교부의 '한글 맞춤법' 제 4항에 자모의 순서와 이름을 정해 놓음으로서 공식화되었다. 근데 과연 이게 잘한 짓인지는 모를 일이다.
자, 그렇다면 원래는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쓴 것이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얼추 100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였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이 자음을 뭐라고 불렀을까 궁금해 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세종대왕 당시 녹음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디에 "이렇게 부르시오"라고 써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단지 '이렇게 부르지 않았을까'하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그 단서는 '훈민정음 언해본'과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자 그럼 추정해보자.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면 "ㄱ난('아래 아'로 표기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표기가 잘 안 된다. 감안해 주시기 바란다.), ㄴ난, ㄷ난" 등 처럼 쓰였다. 그런데 '난('아래 아'가 쓰인 것)이란 조사는 양성모음이나 중성 모음 'ㅣ'의 뒤에 쓰이는 조사다. 이 말은 '가' 나 '기' 다음에 오는 조사는 '난'이고, '구' 나 '그'처럼 음성 모음 다음에는 '는'이란 조사가 쓰였다는 얘기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단, 각각의 자음에 양성모음이나 중성모음을 붙여 발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단서를 최세진의『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단서는 각각의 자음의 용례를 보임에서 찾을 수 있다. 모두 'ㅣ'모음이 붙은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ㅋ, ㅌ, ㅍ' 등에서는 아예 'ㅣ'만 붙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종대왕 당시 이 자음을 모음 'ㅣ'를 붙여 불렀다고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음을 세종대왕은 "기, 니, 디, 리, 미, 비, 시, 이, 키, 티, 피, 지, 치, 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한참을 힘들게 돌아왔다. 자 이제 결론을 좀 보자. 지금의 한글 자음의 명칭이 너무 헷갈리는 것 아니냐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서, 이 명칭이 어떻게 붙게 됐는지, 그리고 원래는 어떻게 불렀을지 따져봤다. 여기서 나는 아무래도 세종대왕이 불렀을 법한 "기니디리미비시'처럼 자음 명칭을 정하면 좋지 않겠나 하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다.
뭐, 예것으로 돌아가야 된다느니, 근본을 찾아야 된다느니, 세종대왕님께서 부르신 대로 불러야지 감히 누구 맘대로 바꿔 부르냐느니 하는 뜻에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글 자모의 명칭부터 이따위로 어렵고 힘들게 만들어 놓아서 귀찮고 짜증나고 답답하다 이거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좀 실용적으로, 그러면서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니깐, 그냥 "기니디리미비시이키티피지치히"라고 부르면 좋지 않겠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북한에서는 이 자모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살펴보면 재밌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북한에서 모음은 우리와 같게 부른다. 그런데 자음이 조금 다르다. 북한에서는 자음을 이렇게 부른단다.
"기윽, 니은, 디읃, 리을, 미음, 비읍, 시읏,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자 보시라. 어떤가? 우리는 ㄱ을 '기역'으로 부르는데, 쟤네들은 '기윽'으로, ㄷ을 우리는 아직 '디귿'하는데, 저분들은 '디읃'으로, ㅅ을 우리는 여전히 '시옷' 하는데, 저 똑똑한 사람들은 '시읏'으로 하지 않는가? 게다가 또는 이렇게 불러도 좋다고 『조선말규범집』에 명시해 놓고 있지 않은가?
자음 글자의 이름은 각각 다음과 같이 부를 수도 있다.
그, 느, 드, 르, 므, 브, 스, 응, 즈, 츠, 크, 트, 프, 흐, 끄, 뜨, 쁘, 쓰, 쯔
아 상당히 쪽팔려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젠장.
(참고로, 한글 자모의 명칭 등과 우리말의 역사 등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보시기 바란다. 아주 쉽고 재밌게 우리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