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알라디너를 위한 명언이기 이전에 저 스스로를 위한 명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 카테고리의 글들 모두가 그런 것이긴 하지만, 오늘은 얼마 전의 우연찮은 행운도 있고 해서, 성원해 주신 알라디너 지인들께 감사의 인사를 이 글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연말이잖아요? 한 해 동안 다른 알라디너 분들보다는 턱없이 미미하지만, 많다면 많은 저의 1년 간의 독서를 반성하는 차원이기도 하답니다. 요 며칠 제 머릿속을 맴돌던 명언은 이것이었습니다.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

책 속에 천종(千鐘)의 녹(관원에게 주는 봉급)이 저절로 들어 있다.

 
   

정말 그럴까요? 잘 아시다시피 천종의 녹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알라딘 적립금은 들어있더군요. 이 말과 관련해서 성종과 구종직의 이야기가 전해지더군요. 낮은 관직에 머물던 구종직이 어느날 우연히 궁을 거닐던 성종을 만나 그 앞에서 『春秋(춘추)』를 줄줄이 외웠다는군요.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구종직을 성종은 하루 아침에 부교리로 승차시켰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7급정도 공무원이 하루 아침에 장차관급으로 승진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책을 많이 읽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노력에 걸맞는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온 이 행운이 이런 말로 미화하기에는 제게 너무 자격이 없습니다. 고작 리뷰 하나 용케 써서 어떨결에 봉잡은 것 가지고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을 말하니 이 아니 가당찮은 노릇입니까?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계기로 얼마간 숙연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과연 나는 독서를 통해서 무엇을 얻고, 독서는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럴 때 참 막연합니다. 어떤 가시적인 결과는 전연 보이지 않고, 매일 매일 허송세월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리뷰를 써서 이주의 마이리뷰도 당선된 적이 있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 책이 내게 무엇을 주었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일 뿐이고, 그 이상은 없습니다. 『88만원 세대』도 『만들어진 신』도 천종록은 커녕 일종록 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괜히 머리싸매기만 할 뿐, 내게 돈이 될만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재테크 관련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 같은 것을 읽으면 좀 다를까요? 저는 그런 것들을 가급적 읽지 않습니다만, 그런 책을 읽고 천종록을 얻었다는 얘기를 아직은 듣지 못했습니다. 고사를 보아도 그런 책에서 천종록이 나올 것 같지는 않기도 하구요. 『희망의 인문학』의 리뷰가 당선이 되서 꽤 많은 득을 얻었지만, 그것이 제게 진정한 천종록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이 가르쳐 준 것은, 책, 나아가 인문학을 통해 어떻게하면 천종록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그 왕도를 얼핏 엿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참 정리가 안 됩니다만, 오늘은 이렇게 정리가 안 되는 대로 그냥 주저릴까합니다. 앞으로 저나 여러분이나 책 읽기는 계속하시겠지요? 천 만 금, 억 만 금을 벌기 위해 기를 쓰고 책을 읽으시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무턱대고 읽는 저같은 사람은 간혹 이거 뭔 한가한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그러나 "書中自有千鐘祿(서중자유천종록)"을 생각하면서, 그 천종록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감내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과연 천종록은 무엇일까요? 입신양명도 아니고 일확천금도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아직 진정 잘 모르지만, 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세상에 그나마 쓸만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책이 제게 주는 천종록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올해의 책 중에 가장 값진 것으로『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꼽는데요, 이것은 그 책을 통해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참으로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깨달았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아무 것도 그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어떤 노력도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내가 변화할 때 이 책은 내게 천종록을 준 것이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독서가 천종록을 움켜 쥘 듯 하면서도 놓쳐버린 것만 같습니다. 내년에는 좀 달라질 수 있어야겠죠?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되셨다면, 만종록(萬鐘祿), 억종록(億鐘祿)에 도전해 보시구요. 모두들 편한 밤 되십시오. 멜기세덱이었습니다.

* 이 말의 출처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속담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양한 고사들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도 같고,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아마도 중국 北宋(북송) 제3대 황제(997-1022)였던 眞宗(진종)의 권학문이지 싶더군요. 「眞宗皇帝勸學文(진종황제권학문)」의 "書中自有千鍾粟 (서중자유천종속)"의 변형이 아닐까 싶네요. 말이 나온 김에 이 「권학문」을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느끼는 바가 참 많습니다.

   
 

富家不用買良田(부가불용매량전)
                                  집을 부유하게하려고 좋은 밭을 사는 것은 소용없다.
書中自有千鍾粟(서중자유천종속)
                                  글 가운데 자연히 천종의 곡식이 있도다.
安居不用架高堂(안거불용가고당)
                                  삶을 편하게 하려고 큰 집을 짓지마라.
書中自有黃金屋(서중자유황금옥)
                                  글 가운데 자연히 황금옥이 있다.
出門莫恨無人隨(출문막한무인수)
                                  문을 나설 때 따르는 사람 없다고 한하지 마라.
書中車馬多如簇(서중거마다여족)
                                  글 가운데 수레와 말이 떼지어 있도다.
娶妻莫恨無良媒(취처막한무량매)
                                  장가를 들려는데 좋은 중매 없다고 한하지 마라.
書中有女顔如玉(서중유녀안여옥)
                                  글 가운데 얼굴이 옥같은 여자가 있도다.
男兒欲遂平生志(남아욕수평생지)
                                  사나이가 평생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六經勤向窓前讀(육경근향창전독)
                                  육경을 부지런히 창 앞에 두고 읽어라.

-「眞宗皇帝勸學文(진종황제권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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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7-12-2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많이 음미하고 갑니다.
'책을 읽고 변화할 때 천종록을 준 것이 아닐까'에 공감...
책을 읽고 깨달은 것은 나의 삶에 실천해야겠다는 다짐과 같이!

마노아 2007-12-22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사고에서 깊은 깨우침을 새기는 멜기세덱님이 근사합니다. 많이 공감하며 고개 끄덕여보아요.

2007-12-23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