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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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

 

 만일 저에게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 대해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내리고 싶군요.

 저에게 아모스 오즈란 광막한 어둠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어둠은 광막하기도 하지만 굳건하기도 합니다. 육중한 몸으로 새 날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듯해 보이니까요. 그건 희뿌연 새벽의 날 선 푸른 여명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멈추고 빛마저 삼켜버리는 단일한 어둠은 그야말로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제겐 그 어둠이 바로 아모스 오즈가 마주한 어둠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내밀어 타자를 껴안을 여지가 전혀 없는 어둠이므로 그것을 마주한 자에겐 오로지 두 개의 길 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기꺼이 삼켜져 완전한 하나가 되든가 아니면 달아나 홀로가 되든가...

 

 오즈는 거기서 두 번째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그는 그의 나이 열 다섯 살 때, 그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는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키부츠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훗날 왜 텔 아비브에 머무르지 않고 그 곳으로 들어갔냐고 묻자 오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때 텔 아비브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키부츠는 충분히 급진적이었다."라고. 말하자면 그는 그 때 자신의 이상이었던 시오니즘을 쫓아 과감히 현실을 버린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달아났습니다. 스스로 원래 성인 클라우스너를 버리고 지금의 성인 오즈로까지 바꿔가면서 말이죠. 그는 거기서 무려 25년을 지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장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키부츠는 일주일 중 단 하루만 그에게 글쓰기를 허락했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그는 열심히 글을 썼고 그렇게 해서 아직도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우는 '나의 미카엘'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일주일 중 삼일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죠. 그 시간동안 그는 열혈한 시오니스트였고 키부츠는 그의 이상이 구현된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키부츠를 떠나게 됩니다. 그 키부츠가 더이상 자신의 이상에 맞는 존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말하자면 그는 다시 달아난 자가 된 셈인데 수십년동안 생활하면서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곳이라 여겼던 그 곳에서 그는 왜 또 달아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건 그 이상이 타협없는 독단이 되어 더 이상 타자를 수용하지 않는 어둠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또한 어떠한 비극을 불러오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게 된 게 바로 오즈가 직접 참전했던 1973년의 제 4차 중동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전횡으로 많은 타인들을 고통과 슬픔에 빠뜨렸는지 똑똑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을 계시를 통해 보았던 요한묵시록의 요한과 같이 그는 자신이 기꺼이 하나가 되었던 그 어둠에 깃들어 있던 진실을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달아난 것입니다. '달아남'이란 거부의 몸짓입니다.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버림입니다. 특히 성경에선 더욱 그렇죠. 믿음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을 비롯 야곱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롯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내내 속세의 질서와 욕망으로 부터 달아납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나 요나를 비롯한 선지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 역시 신의 음성을 듣고 광야를 헤메이게 되지요.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요한도 예수도 달아남의 여정을 똑같이 밟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달아남'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자가 신이 진실을 계시했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제시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아니라 '진실이 너희를 달아나게 하리라'와 어쩐지 같지 않나요? 아마도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유랑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걷게 되나 봅니다. 그러니까 진실이 그를 달아나게 한다면 그 진실을 앎으로 부터 오는 책임이 그를 끊임없이 유랑하도록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랑이야 말로 오즈의 모든 것입니다. 키부츠를 나오게 된 까닭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는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자들 사이를 유랑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삼각관계의 연애담으로 풀어간 '블랙박스' 역시도 욕망과 미련 사이를 끊임없이 유랑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유랑이란 무엇입니까? 머물 수 없는 것.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언제나 다른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끊임없이 맞게 되는 것이겠죠. 그렇게 떠도는 자는 변화의 한 가운데 있으며 쉬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야 말로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이미지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즈의 소설이란 이 글 첫 문장대로 '어둠 속을 흐르는 물'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나 예수에게서 보듯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도 천지가 다 들을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로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외침은 그의 일상이요 선포는 그의 의무인 존재입니다. 아모스 오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즈는 4차 중동전쟁을 통해 자신이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활화산의 비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자는 그것을 알릴 책임 역시 당연히 지게 됩니다. 언제 불타버릴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역시 외쳐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목소리라면 그는 글로써 그것을 해야 했습니다.

 

 근데 왜 문학일까요?

 

 종교상에서 세상의 어둠이 가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모두 다 비슷한 형태를 지닙니다. 선지자도 그렇고 예수도 그러합니다. 모두 비유와 암시인 것이죠. 외침과 선포는 진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천국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대답하듯이 비유로서의 이야기로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 오로지 이야기 속에서만 진실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예수는 유대의 세헤라자드인 셈이죠. 사실 모든 세상의 근원을 얘기하는 설화나 전설들 그리고 태초의 세계관들이 담겨있는 신화와 영웅담들 역시도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종교적 담론이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될 뿐 아니라 모든 담론의 원초적인 바탕 또한 이야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여기듯이 한낱 가상의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어둠으로 부터 달아나 유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오즈는 문학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즈에게 문학이란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는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였던 것입니다.

 

 

 

 2007년에 나온 '시골생활풍경'은 그러한 오즈 문학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스라엘의 한 시골마을 '텔일란'을 중심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지만 그야말로 이제까지 아모스 오즈가 걸어온 문학적 여정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작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전히 같은 땅을 디디고 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해야할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모두 여덟 개의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그 중 첫머리에 있는 '상속자'는 단편집 전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의 이혼으로 이제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는 젤니크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텔일란의 집으로 이사왔지만 여전히 옛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듯 이전의 물건들을 광속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미련 속에 서성이다가 문득 부동산의 소유권을 자신들에게 일임해 달라는 한 변호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 땅의 기원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그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 변호사가 바로 팔레스타인을 암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미련으로 변화해야 할 오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젤니크는 그를 꺼려하는데 그는 막무가내로 집안으로 들어오고 결국엔 늘 누워있는 어머니의 침대 위에서 젤니크와 함께 셋이서 누워있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결국 이 단편을 통해서 오즈는 그렇게 한 침대 위에 누운 것 처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동반자적 존재임을 말하며 동시에 자신의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이제 미련을 버리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골생활풍경'의 전체적인 주제입니다. 두번째 단편 '친척'은 젤니크 처럼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길리 스타이너가 변화를 상징하는 자신의 조카인 기드온을 기다리는 얘기인데 오즈는 여기서 전작 '블랙박스'에서 그 누구보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존재였던 '기드온'의 이름을 다시 반복하면서 기드온을 마치 구원처럼 기다리는 길리 스타이너가 왜 그렇게 아프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즉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단편이기도 한 것이죠. 그들이 그렇게 변화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는 세번째 단편 '땅 파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치인이었지만 이제는 고집과 의심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퇴락해버린 노인과 그 딸 그리고 한 아랍 청년의 조금은 기묘한 동거 생활을 묘사하는 이 단편은 그들이 왜 난파선의 쥐들 처럼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분명히 들려오는 어딘가에서 땅이 뒤 흔들리는 소리로 상징되는 세계 자체의 변화때문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그 대지의 울림은 바로 세계 자체가 이제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오즈는 이제 세계 자체가 달라지고 있으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변화란 선택이 아니며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네 번째 단편 '길을 잃다'에서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인 가운데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자를 안다는 것'과 비슷한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당장 어떤 결론을 내지말고 되도록이면 오래동안 그 비어있음을 음미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둠을 만들어내는 독단이란 언제나 두려움 때문에 성급히 결정해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급함이 가져올 수 있는 무모한 위험을 되도록 줄이기 위해서 그는 비어있음을 채우기 보다는 그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 보다 많은 사유를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랑의 태도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렇게 이 단편은 마치 그의 문학이 가진 유랑의 본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관망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비어있음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가급적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이지 노자의 '무위'를 가져옴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비어있음을 바라보는데도 하나의 태도가 요구되어집니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의 단편들은 그 때 요구되어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 태도란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그들을 위해 행위로써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즈는 그 태도의 중요성을 바로 다시 한 번 '소리'를 통해 강조합니다. 세번째 '땅파기'에서 들렸던 대지의 진동음이 이제는 하늘의 성가와도 같은 합창소리로 바뀌는 것이죠. 희미한 암시에 불과했던 그 소리가 이제는 구원의 합창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한 존재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이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니 오즈는 분명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원은 바로 도움을 필요로 하나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그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있다고. 바로 그것이 비어있음을 오래도록 관망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며 만일 여전히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진 고통에 무관심해진다면 결국 닥쳐올 것은 마지막 여덟번째의 단편이 말하는 바와도 같이 지옥이고 그 어둠에 깃들어 나 역시 괴물로 변해갈 뿐이라고 오즈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생활풍경'은 바로 그러한 변화를 껴안으려는 태도의 중요성 그리고 그 태도가 어디까지나 타인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에 기반해야 하는 것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즈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하여 특별히 한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공간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모든 단편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삶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변화의 계기를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공간이란 다름아닌 '벤치'입니다.

 

 '벤치'란 어떤 장소입니까. 한 마디로 영원히 정주할 수 없는 공간이죠. 잠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임시 거처. 그것이 바로 벤치입니다.  오즈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바로 이 '벤치'와 같은 곳으로 여기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치 유랑자에게 있어 주막과도 같이 언제 다시 훌쩍 떠날지 모르는 찰라의 장소가 되어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땅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벤치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집이라는 침범 불가능한 장소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벤치에 같이 앉아 삶을 잠시 나누는 동반자로 여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불현듯 찾아온 '시골생활풍경'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다루고 있는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멀리서 들리는 물의 한숨 소리 처럼 은밀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신이 늘 꾸는 악몽을 좀 상세히 풀어놓은 것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악몽이란 바로 여덟번째 단편일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런 세계가 오기를 두려워하며 그 세계가 오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독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도록 앞의 일곱편의 단편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실 청맹과니들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똑똑히 드러났지요. 모두 자기 몸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우리는 나를 넘어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종일관 답답하고 더러는 분노하는 세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덟번째의 단편을 읽으면서 거기서 그리는 세계가 바로 오늘의 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랑하는 자에게 있어 지금 존재하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이 될 뿐입니다. 보다 크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일 처럼 여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좀 더 우리를 이런 숨막힘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오즈를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결국 구원이란 나를 먼저 허물고 내어주는 순간에 오는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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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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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똥이다. 이번 선거의 최종 결과를 보았을 때 바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뜻이 아니다. 토악질이 난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굳건하다는 의미다.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낙담이다. 선거일. 종일토록 성석제의 '위풍당당'을 읽었다. 성석제를 좋아한다. 때로 그런 작가가 있지 않은가? 마치 자기를 위해 태어난 듯 자기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가가. 성석제는 내게 그런 작가다. 제목도 근사했다. 안 그래도 기죽고 왜소해지는 스스로를 늘 느껴왔던 나날이었다. 앞뒤좌우로 꽉 막힌 사무실을 벗어나 한 번쯤 가슴 죽 펴고 대로를 그렇게 걸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가요로도 넘쳐나는 실연으로 질질 짜는 이야기도 아니고 휘몰아쳐 오는 세상의 채찍질에 넋 놓고 쓰러지는 이야기도 아닌 결연히 일어나 피하려들지 않고 노려보며 온 몸으로 맞서 싸우는 그런 얘기가 정말 읽고 싶었다. '위풍당당'은 그런 내 소원에 응답한 것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강으로 시작했다. 우리 집 앞으로도 강이 흐른다. 그 날의 강은 오후의 햇살이 나른히 몸을 뻗은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선거일이라서 그런지 왠지 지금 세상도 그렇게 강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변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오늘밤 변화된 세상을 승리의 환호와 더불어 제대로 목격하리라 생각했다. 제목처럼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배경음으로 들으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굉장했고 마치 키스를 조르는 여자 아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였고 내가 원하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결말은 달랐다. 변했을 것이라 여겼던 세상은 누군가 싸놓고 치우지 않은 똥처럼 여전했고 '위풍당당'에서 여산이 정욱을 물리쳤을 때 느꼈던 쾌감은 그대로 통한의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우울했다. 이야기는 정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연약한 갈대처럼 세상의 힘찬 손짓 하나에 그대로 꺾이고 마는 존재였다. 그토록 날 채우고 뜨겁게 만들던 이야기가 세상이 보인 더러운 진실 앞에서 이토록이나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데 도대체 이야기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비가 되어 굳어진 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허물어뜨릴 수 있을까? 그렇게 저 강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왜 이야기를 읽을까?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 날의 비관적인 결말과 더불어 나에게 이런 질문을 가지게 했다. 새삼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늘 책을 배반한다. 세상이 책 대로라고 생각하고 살다보면 상처 받는다. 그러니까 그 날 느꼈던 아픔도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 늘 반복적으로 겪었던 아픔을 단순히 한 번 더 느낀 것 일뿐. 그런데도 책을 찾는다. 매저키스트도 아닌데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다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성석제의 이야기가 주는 승리의 감각이 결국은 몽정 끝에 하는 자위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 들으려 한다. 여전히 성석제의 소설로부터 위안을 얻길 바란다. 왜 그럴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위풍당당이라는 말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에서 나온 말이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엘가의 위풍당당은 또 세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다. 오셀로 하니 그것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오셀로 게임'이 생각난다.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오셀로 게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셀로 게임은 동그란 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속 설득해 나가는 게임 같다고. 이제 와 생각하면 내가 책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정말 바랐던 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이 예전처럼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은 진작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비록 거창한 변화는 가져오지 못할망정 '오셀로 게임'처럼 조금씩 하나씩 나를 설득해나가고 있기에, 그렇게 이야기가 주는 단 '한 발자국'의 위안과 희망 때문에 나는 계속 이야기 즉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이처럼 세상에 거센 비가 내릴 때 나 하나 깃들 우산을 난 소설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에 젖지 않고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념을 지켜갈 수 있도록 어떤 응원과도 같은 우산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또한 아닐까? 물론 성석제가 '위풍당당'에서 보여준 낙관이 현실적인 눈으로 보자면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직시 보다 긍정과 희망으로 엮어진 꿈이 사람들을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 마음먹게 만든다는 걸 우리는 또한 자주 보아왔다. 대표적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로 상징되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도 있지 않은가! 갓 잡은 활어처럼 생생한 기운으로 여지없이 충만한 이 소설의 진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소제목으로도 사용한 그룹 '비지스'의 노랫말이 내겐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나는 농담을 시작 했어요.  세상이 모두 울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소설이란 바로 이런 농담이 아닐까?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그래서 나는 그의 농담에 기꺼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계속 그의 다음 농담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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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성석제라는 작가 한 명에서 셰익스피어, 오셀로게임으로, 문학과 소설로 뻗어나갈수도 있군요.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저도 그 농담을 한 번 겪어봤으면 좋겠어요.

ICE-9 2012-04-16 23:46   좋아요 0 | URL
정말 지금 제게 간절히 필요한 것도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는 원하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가득한 농담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침 내가 왜 성석제의 이야기를 이토록 즐기는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원하는 문학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쓰게 되었네요. 문학에서 받는 위안이 비록 차 한잔의 따스함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 조금의 꿈꿀 수 있음 때문에 전 아직도 소설을 사랑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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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한 마디로 툇마루의 소설이다. 소설 자체가 툇마루에서 시작되어 툇마루로 끝난다. 그래서 마치 소설이 가지는 전 우주가 오로지 툇마루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툇마루란 어떤 공간인가? 

 완전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바깥도 아닌... 경계의 공간이다.

소세키의 소설 '문'은 마치 그 위에 걸쳐 앉은 듯한 소설이다.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나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로... 소세키는 결단을 주지 않는다. 마치 그 툇마루가 전부인 양 애써 그 곳에 그저 머무르려 할 뿐이다. 연못 속의 겨울잠을 자는 잉어들 처럼 한없이 낮고 조용하게... 그는 왜 이런 식의 문학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계의 공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적 이유 다른 하나는 시대적 이유이다.

 

 먼저, 개인적 이유. 소설 '문'이 연재되던 당시 1910년. 그 전에 한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보고와서(초반의 이토 히로부미 이야기는 이 여행의 체험이 은연중 배여난 것이기도 하다.) 새로이 연재를 시작하려던 그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가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었다. 그는 두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고 결국 그 해 8월 슈젠지 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거기엔 슈젠사란 절이 있는데 바로 이 절이 소설 '문'에서 소스케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최후로 찾았던 산문의 모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사실 '문'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많이 반영된 소설인 것이다. 바로 이 병으로 쓰러진 일과 슈젠지에서의 요양이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느낀 것을 소세키는 하나는 에세이로 다른 하나는 소설로 나타내었는데 그 에세이가 바로 '회상'이며 소설은 '문'이다. '회상'을 읽어보면 그 때의 체험이 얼마나 소세키로 하여금 인생을 달리 보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가 그 치료중에 숨진 일이다. 소세키는 그 에세이에서 치료를 하던 이는 죽고 정작 치료를 받던 자신은 더 오래 살게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한다. 묘하게도 의사가 숨졌을 때 또 하나 소세키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바로 소세키 자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유명한 게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이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몸에다 빛을 준 사람이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의식에 빛을 준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빛을 주었던 사람들은 죽고 그 빛을 받았던 자신은 살았다고... 그 아이러니할 정도의 삶이 가진 예측불가성 앞에서 소세키는 하루 하루 그 때 그 때의 일을 기억할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에세이 '회상'이 되었고 '문'에서의 인상적인 그 마지막 대사 장면으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지배적인 시각이 되어 결국 '문'을 지배하는 조용하고 낮게 웅크린 삶으로 형상화 되었다.

 

소스케는 튓마루로 나가 앉아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며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거야"라고 대답하고 머리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P. 277)

 

 삶의 예측불가성은 소세키에게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최상의 삶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슈젠지에서의 요양을 그 가장 행복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별 뜻없이 그냥 한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을 경우 가장 불만스런 부분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소스케일 것이다. 소스케는 현대인이 보기에 정말 한심할 정도로 무르다. 매사에 적극성이 없고 그 어떤 곤란한 사건을 만나도 그저 알아서 지나가 주기만을 바란다. 그저 드러나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모토이기도 하다.  늘 '적극적이 되라' '자기 것을 잘 챙겨라'하는 말만을 들어온 우리들로서는 이 같은 심해의 아귀 처럼 웅크린 소스케의 삶이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어떤 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소스케가 왜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알고보니 젊은 시절의 소스케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앞길을 착실히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절친한 친구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현재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소설만 읽으면 이것은 그저 문학적 형상화 같지만 당시의 소세키의 삶을 알고 읽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요양중인 소세키를 그대로 담아낸 모습이 된다. 상상해보라. 병을 가지고 있는 자의 일상이 어떨지? 소세키의 병이 바로 소스케에 있어서는 죄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 때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은 속세인들이 삶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경험이 가져다 준 적극성의 무용함에 대한 인식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의미있는 삶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소설 '문'에서 한 편으론 낯설게도 느껴지는 조용한 은둔의 삶은 그야말로 소세키의 이상적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텅 빈 방에 누워서

잠자코 큰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변함 없네

종일토록 그 자세로 하루를 보냈네

 

 (당시 소세키가 적은 시, 에세이'회상'에서 인용)

 

 

 하지만 소세키가 그러한 삶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세키의 문학은 '사소설'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지만 소세키 자신은 문학을 개인적 영역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당시 근대에 의해 소생된 소설이 다 그랬듯이 소세키에게 있어서도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시대와 교감하는 장(FIELD)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소설이 그랬듯이 근대화된 일본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영국에서의 체류 덕분이었다. 그 때 영국에 머무르면서 소세키는 근대화가 가져오는 장점만큼 단점 역시도 보게되었으며 가장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 속도였다. 교통기관의 빠른 속도, 놀라운 변화의 속도 그리고 한없는 분주함. 바로 그런 것들이 소세키에겐 염려의 근거였고 과연 이런 것들이 일본에게 긍정적인 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비판의 씨앗이었다. 때문에 소세키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을 정반대의 삶을 하나의 모델로서 내어놓는 것이다. 왜 서구의 근대는 마치 소스케가 사는 집 툇마루 앞에 우뚝 선 절벽과 같아서 언제 파묻힐지 모르는 위험을 간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회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실제 그런 집에 살고 있던 사촌이 절벽이 무너져 죽었음을 밝힌다. 그런 면에서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서구 근대의 외침은 소세키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예측불가능성 앞에서 그러한 장밋빛 미래란 의미없는 공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완성된 삶이며 무엇보다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한적함이야 말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목적이든 일단 그것이 개입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로 소세키는 소스케가 외부로 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문'을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정형화 되어버린 서구 자본주의적 일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시각으로써 말이다. 말하자면 소설 '문'은 이제는 우리가 그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아비투스화 되어버린 이 일상이 과연 제대로 된 일상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참조점인 것이다.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인간형의 하나로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낸 것과 똑같은 일을 소세키는 소설 '문'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 병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체득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바로 그 한계지워 진 삶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삶이 아무런 한계를 가지지 않는 것 보다는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삶엔 더 낫다고 본다. 소스케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그 한계의 상징과도 같다. 바로 그 한계 덕분에 소스케 역시도 소설 마지막 대사 처럼 삶에 대해 더 깊이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소세키는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완전한 바깥도 아닌 툇마루라는 경계에 기꺼이 머무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경계라는 한계에 일부러 거주하면서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한 마디로 소설 '문'이 자리잡은 '툇마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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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2-04-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의 인생과 관련해서 아주 깊이 있게 읽으셨네요. 그런데 <문>이 새롭게 번역되었나 봐요? 제가 읽은 건 저렇게 고급스러운 양장본이 아니었거든요.
글 중에 인용하신 <회상>은 어디에 실려있나요? 소세키 책은 다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 실려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

ICE-9 2012-04-13 22:56   좋아요 0 | URL
아, 반딧불이님 제가 너무 답글이 늦었네요. 선거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이제야 서재에 들르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었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 제가 읽은 것은 이번에 비채에서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회상'은 하늘연못에서 나온 '몽십야'에 실려있습니다. 책은 소설이라고 해 놓았는데 사실은 에세이랍니다. 빨리 알려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늦게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하네요. 아무튼 들러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딧불이 2012-04-14 13:57   좋아요 0 | URL
밑줄 그어놓을 것을 보니 분명 읽었던 모양인데....어디가서 소세키를 좋아한다거나 완독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덕분에 <회상>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소세키 소설의 단초가 되었을법한 내용들이 참 많네요. 고맙습니다.
 
굿바이 MB
변상욱 지음 / 한언출판사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굿바이 MB' 왠지 참으로 입에 착착 감기는 제목이다.

  어느새 이제 이 말을 하게 될 시점이 곧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MB 4년. 참 힘들고 길었다. 곳곳에서 보이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권력의 전횡과 철저한 사익추구에서 비롯된 각종 비리들을 보며 화를 삭히느라 힘들었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들로 뻔한 진실들을 가리려는 그들의 천박한 작태들도 개그 콘서트도 한 철이지 그대로 보고있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그 모든 힘겨움의 원인들은 MB정부가 끝이나야 없어질 것 같아서 오매불망 그 끝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다 보니 군대 이병이 느끼는 국방부 시계처럼 참으로 길었다. 하지만 진창에 처박아도 국방부 시계는 멈추는 법이 없다더니 결국 염원하는 그 시간이 가까이오고 말았다. 이제 정말 굿바이 MB를 외칠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얼마남지 않음이 제대로 가능해지려면 한 가지 선행 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곧 다가올 대선에서 올바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때 또 우리가 2007년에 했던 대로 그릇된 선택을 재탕한다면 얼마남지 않음은 얼마남지 않음이 아니라 또 한 번의 5년만 다시 거듭될 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  제대로 선택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선택은 언제나 그릇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행착오를 오직 단 한번으로 그치게 하는 것은 오로지 그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는 것 뿐이다. 그렇게 망각은 반복을 부르지만 기억은 반복의 연쇄를 끊는다. 그래서 우리는 똑똑히 MB의 4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것은 의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MB 4년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굿바이 MB'는 만사를 제쳐두고 우리가 꼭 보아야 할 책이다.

 

   물론 이 책을 읽는 건 힘들다. 만일 당신이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게 힘이 들었다면 이 책 역시 그럴 것이다. 당연하다. 여기엔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이 어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멍청하고도 부끄러운 결과를 초래했는지 여실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바로 우리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그 결과는 그대로 우리들의 부끄러움이며 특히나 기륭전자 사태,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 농성 그리고 용산 참사등에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보자면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온 비극이므로 거기엔 우리의 죄의식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MB4년을 기록한 이 책은 우리의 저급한 욕망이 우리들 스스로에게 할퀴고 간 생채기이며 스스로 욕망의 노예로 자처하는 바람에 삶의 주인자리에서 쫓겨난 비굴함의 수치스러운 기억이다. 그래서 나 역시 지은이 변상욱이 이 책에 대하여 했던 말 '자신의 참회록이기도 하다'에 동감한다. 사실 이 책은 변상욱 기자만의 참회록은 아니다. 정말은 우리 모두의 참회록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 편으론 기억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스스로 반성하기 위해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 수치스러운 기억들을 읽으면서 똑똑히 머리에 새겨두어야 한다. 오로지 집 값을 올려준다는 이유만으로 투표하면 어떻게 되는지? 실현가능한 대안도 없이 그저 막연히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을 뽑아주면 어떻게 되는지? 악의적 왜곡을 일삼는 언론에 놀아나 그들의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 생각하고 따져보지도 않고 묻지마 투표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시효가 지나고 한참 전에 지난 해묵은 이념이나 색깔론에 빠져 자신이 지금 사회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생각지도 않고 투표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쟁취하지 않고 오로지 남이 가져다주는 미래에 만족하며 투표에 무관심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부끄러움 속에서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 필요한 일은 이것 뿐이다. 그 때를 기억하는 것. 그 때  그 일들을 바라보던 당신의 마음은 어떠했나를 기억하는 것. '굿바이 MB'는 그런 당신을 위한, 언제나 뒤적여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하는 사진앨범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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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추천 백개, 천개, 만개!!!!

이렇게 착 붙는 이름이라니, 그리고 이렇게 착 붙는 리뷰라니!!!!
다시는, 돈 벌게 해주겠다는 꼬드김에 넘어가지 않는 우리이기를!

사실 그런 면에서 이번 김용민 씨 문제는 많은 생각을 남깁니다,
정답도 해법도 없는 문제를요.... 참 어렵더군요. ^^

ICE-9 2012-04-11 03:33   좋아요 0 | URL
와! 이렇게 격하게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저도 이번 선거기간에 일어나는 일들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아무튼 이제는 드디어 투표일인데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발 승리의 웃음으로 크게 웃게 되는 날이었으면 합니다.

얼음무지개 2012-04-1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온지 어언 9년여.. 처음으로 추천이란 걸 해보네요..ㅎㅎㅎ

ICE-9 2012-04-11 03:34   좋아요 0 | URL
9년만의 첫 추천을 저에게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
이 기쁨이 오늘 투표의 커다란 승리로 이어졌으면 정말 좋겠네요.

이진 2012-04-1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멋집니다.
정치를 모르는 저도 이번에는 "무슨 정치가 이따구야?"하면서 살았습니다.
나도 추천 백개, 천개, 만개!!

ICE-9 2012-04-13 22:58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 투표 할 수 있었을 때는 제발 세상이 지금보다는 많이 나아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선거 결과 때문에 더욱 소이진님과 같은 세대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어른들이 너무 자기들 이해타산만 생각하지 말고 미래세대에게 어떤 나라를 물려줄지 생각 좀 하고 투표했으면 좋겠습니다.
 
오 헨리 단편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1892년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무려 자신의 고향으로 부터 5천마일이나 떨어진 뉴욕을 방문했다. 새벽 안개 속에 새벽 닭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산천을 요람을 흔들듯 진동시키는 조용한 자신의 고향과는 달리 뉴욕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사람들의 무리와 자동차들로 쉴새없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마치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활기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뉴욕의 모습은 그야말로 드로르작에게 충격이었고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뉴욕에서 그는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에게 거의 신세계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교향곡 9번,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즉 그 작품은 드보르작이 뉴욕에서 느꼈던 경이로웠던 새로운 활기에 대한 음악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뉴욕은 바로 오 헨리의 뉴욕이기도 했다.

 

 

 

  오 헨리는 바로 그러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 시대는 구시대의 유럽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일단 태어나면서 결정되었던, 그렇게 순전히 혈통으로만 계승되던 신분제가 사라졌다. 이제 뉴욕은 전혀 새로운 것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도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 즉 자본이었다. 오로지 돈 만이 사람들로 부터 존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으며 그 돈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 때문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보다 중시되었고 또한 돈은 오로지 실용성만이 가져올 수 있었기에 예술 같이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예술이란 것은 오로지 신흥 부르조아지들의 재산을 빛내줄 경우에만 의미있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이러한 구체적 혈통에서 추상적 자본으로의 전환은 사람들에게 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국인지라 유럽을 단일한 끈으로 묶어두던 기독교적 가치로 부터도 자유로웠었기에(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나 미국 헌법을 초안한 제퍼슨은 공공연히 성경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니 완전히 믿지는 말라고 자주 말했었다.) 그 전환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자본, 즉 돈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가속도를 더해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돈이야 말로 스스로의 존재를 귀족처럼 고양시켜 주고 타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제는 생존을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규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드로브작이 경이롭게 생각했던 신세계의 실상은 그러한 돈에 대한 욕망으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였다. 그 광풍처럼 범람하는 욕망이 바로 활력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 한 가운데 있었던 오 헨리는 중심부로 뛰어들지 않고 오히려 소소한 일상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한결같이 뉴욕인들의 사소한 일상들을 작품에다 담는다.  마치 부엌이야말로 신이 현상하는 장소라며 내내 일상의 공간만을 화폭에 담았던 18세기의 프랑스 화가 샤르댕 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는 역사적 현장 못지 않게 우리의 사소한 일상 또한 얼마든지 극적인 드라마가 일어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욕망, 그 좌절로 인한 애환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노애락을 빛의 스펙트럼처럼 펼쳐보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일상을 담아내면서 돈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가 성급하게 밀쳐내 버린 인간적인 가치들 또한 복원해낸다. 바쁜 일상에 시달리느라 잊어버렸던 웃음, 슬픔, 사랑 같은 사소한 감정들. 그리고 보다 높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보석이나 사치품을 추구하느라 무시해버렸던 사소한 물건들까지. 그는 작품 속에 하나하나 다 살려낸다. 마치 그는 복원전문가 같다. 그렇게 그는 자본주의의 정착과 그로인한 사람들이 가진 더욱 가속화되어버린 욕망 때문에 왜소해졌거나 생명을 잃어버렸던 모든 사소한 것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어 넣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나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예술로 인한 구원 같은 이제는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소박한 꿈들까지... 그렇게 오 헨리의 작품은 사소한 것들로 넘쳐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오 헨리의 중심엔 바로 이 '사소성'이 있다.

 별 것 아닌 일상, 별 것 아닌 감정, 별 것 아닌 사물 모두 이러한 '사소성'을 특징짓는 것이다. 오 헨리의 단편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이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각 단편들 사건의 중요한 국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소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지막 잎새'에서의 한 잎의 잎새라든지 '20년 후'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바로 지명수배자임을 알아보게 한 것이 성냥불이었다든지 '다시 찾은 삶'에서의 장미꽃의 핀이라든지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교환되는 선물은 또 어떤가?

 

  이런 식으로 오 헨리의 작품엔 아주 사소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정작 이 물건들이 가져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고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등의 아주 커다란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왜 이러한 '사소성'에 천착하는 것인지 알게된다. 그러니까 오 헨리는 당시 미국을 주무르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바로 이 사소성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란 재화가 가진 가치를 오로지 효용성으로만 따진다. 하지만 오 헨리의 사물들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판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효용성으로 따지자면 별 것 없지만 그것들이 가져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오 헨리는 사물에 대해 자본주의적 가치가 절대적일 수 없음을, 사물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들을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획일적 잣대로만 볼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문제가 여기까지라면 오 헨리의 이러한 사소성의 집착은 그저 한 작가의 독특성 정도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그 시각 자체가 더 큰 문제를 급기야는 불러오기 때문에 오 헨리의 이 '사소성'의 추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 헨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오는 더 큰 문제란 바로 자본주의가 팽배해짐으로써 사물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이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까지 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재화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효용성, 즉 오로지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만 기준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 오 헨리는 당시에 만연된 극심한 빈부격차나 비인간적인 노동력 착취의 현장에서 바로 이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가 작품 속에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따라서 오 헨리의 '사소성'이란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에 대한 왜곡된 시각 자체와 싸우기 위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 헨리의 사소성은 무엇보다 어느 하나의 잣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사물이 가진 다양성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의 존재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가감없이 펼침은 사람에게 적용되면 어느 신분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정될 수 없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삶 자체에다 갖다대면 자본주의의 획일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포획할 수 없는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오 헨리는 궁극적으로 오로지 하나의 효용성,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낳는 것은 오로지 고고귀한 존재를 그저 도구로 전락시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별 것 아닌 소소한 일상이지만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점점 그 빛을 잃어가는 신세계에 그 자신이 직접 정말 제대로 된 신세계를 가져오려 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온갖 사소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속 사소한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넘쳐나는 그러한 신세계를. 오 헨리는 바로 그 신세계의 세헤라쟈드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과 자신의 삶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아마도 드보르작은 정말은 이것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오 헨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새삼 여기에 그 까닭을 중언하듯 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올 위험을 말할 때 당신 역시도 다 느꼈을 것 같은데, 그 때의 뉴욕과 오늘의 현실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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