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처음으로 한나 아렌트란 이름을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작은 아버지 집에 갔다가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예전에 신동아란 잡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제목이 '현대 지성이 꼭 읽어야 할 명저 70 선', 뭐 이런 비슷한 제목의 것이어서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그러다 철학 쪽 명저를 소개하는 장에서 한나 아렌트의 이름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 소개 된 책은 '전체주의의 기원' 명저 선정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한 것이었는데 그 책을 누가 추천했는지에 대해선 당연하게도 잊어버렸다. 소개글을 책 내용도 간략하게 잘 정리하고 흥미롭게 써 놓아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언젠가 읽어보리라 작정하게 되었다.
새삼 이런 기억을 건져 올리게 된 건 한나 아렌트의 주저 세 권이 리커버로 이렇게 묶여 다시 발간된 걸 보았기 때문이다. 요즘 리커버가 꽤나 유행이던데, 한나 아렌트의 책도 거기에 편승했나 보다. 어쨌든 한길그레이트북스의 시리즈 중 하나로 양장본이었던 것이 반양장본이 되었고 가격도 대폭 낮아졌다.
전체주의의 기원만 헤도 리커버는 한 권이지만 원래는 두 권이었고 가격도 각각 28,000원과 22,000원으로 도합 5만원이었는데 세트 전체가 59,400원 밖에 안 하니까 말이다.
예전으로 치면 원래 27,000원인 '인간의 조건'과 22,000원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거의 부록인 셈이다.
문자 그대로 한나 아렌트의 주저들을 만나볼 기회를 호시탐탐 기다렸던 이에겐 정말 좋은 기회가 온 것이다.
미리 산 이들은 배가 좀 아프겠지만....
세 권 중 한나 아렌트가 가장 먼저 집필한 것은 '전체주의의 기원'이다. 그 다음이 '인간의 조건'이고 마지막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몰랐는데 마지막 권은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된 모양이다. 데뷔작이 대표작이라니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열네 살 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통독할 정도로 순수 철학에 흠뻑 젖어있던 그녀를 정치라는 현실 철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한 건 역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대로 독일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 때문이다. 그녀는 어떻게 나치가 그러한 천인공노한 만행을 체제적으로 자행할 수 있었는지 알기 위해 연구를 했고 그 대답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전체주의(TOTALISM)이었다. 원래 전체주의란 말은 히틀러와 함께 이탈리아를 파시즘 국가로 만들었던 무솔리니가 자기 나라를 두고 처음 명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독일의 전체주의를 떠받치고 있던 두 개의 기둥은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였다.
나치는 반유대주의를 통해 독일 내부의 갈등을 타자인 유대인에게 모조리 떠넘겨버리는 것으로 봉합시켰고 그것을 바깥 영토의 정복과 지배를 통해 독일 대중의 지지를 공고화했다.
이런 과정 가운데 독일 대중은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유대인 탓이라 여겼고 또한 여기저기서 선전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승전 소식 속에서 장차 위대한 독일의 일원으로 세계 열방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는 자신을 꿈꾸며 나치의 정책에 협력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핵심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녀의 말년 연구까지 관통하는 핵심이 된다. 바로 사유다.
전체주의는 한 마디로 절대적 복종 체제로, 인간에게 자유로운 사유를 허용하지 않는 체제였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유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파괴에 다름아니다라고 말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무엇보다 정치 역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일 수 있음을 밝힌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의 실천 행위로서의 정치를 철학적으로 탐색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이루는 조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그걸 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마지막 행위가 좀 의아할 수 있을 것인데, 노동과 작업 모두 행위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행위란 좀 다른 개념으로 여기서 행위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노동과 작업은 홀로 된 개인의 행위이며 세 번째의 행위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사 소통할 때 하게 되는 그런 행위를 뜻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사회적, 정치적 행위가 들어가게 된다. 왜 '인간의 조건'을 두고 정치 행위를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책이라고 했는지 이제 아시게 될 듯하다. 결국 참된 인간을 형성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이 정치적 실천 행위를 내세운다. 그것이 한 사람을 인간이라는 주체로 만드는 조건이며 이러한 정치적 실천 혹은 참여가 지향해야 하는 바는 바로 아모르 문디, 즉 세계 사랑이라는 것이다.
즉 나의 이득, 사회적 조건, 계층, 인종, 국적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된 관습적이고 편협한 가치가 아니라 범 타자적 지향으로 모든 이들의 존중과 공존을 위한 참여말이다.
그러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도주 중이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체포된다. 예루살렘에서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에 한나 아렌트는 하던 강의도 내팽개치고 잡지 '뉴요커'의 지원을 받아 기자 자격으로 그 재판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달려간다. 유태인을 어떤 수용소로 보낼 것인가 분류했던 아이히만은 중령으로 그리 높은 계급은 아니어서 히틀러를 생전에 볼 수도 없었던 자였고 그랬기에 홀로코스트 계획을 세우기는 커녕 단순히 하달한 명령을 집행하는 자에 불과했다. 그는 그저 당시에는 법과 같았던 명령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한 자일 뿐이었다. 그런 아이히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무사유의 위험성을 알게 된다. 아이히만은 그런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느냐는 재판정의 질문에 오히려 명령을 어겼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은 이렇게 하여 탄생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가 찾아낸 정말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좋은 실제 사례의 대답이 되는 셈이다.
나 원,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책으로 인해 잠시 추억의 책장을 펼쳐볼 요량이었는데 말이 너무 길어진 것 같다. 내 생각에 한나 아렌트의 작업의 가치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아니 지금은 그녀의 말에 더 귀를 기울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이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으니.
최근 파장을 일으킨 배구계 학폭 사건 때문에 더욱 한나 아렌트의 책들을 다시 묵독하고픈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