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고 웃긴 사진관 - 아잔 브람 인생 축복 에세이
아잔 브람 지음, 각산 엮음 / 김영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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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저희 사진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들어가시기 전에 나중에 있을 오해를 미리 막기 위하여 먼저 알려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아! 소문을 듣고 오셨다구요. 그럼, 여기가 어떤 사진관인지 잘 아시겠군요. 다행입니다. 사실 잘 모르시고 오시는 분들이 꽤 계셔서 저희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거든요. 여기는 사진을 찍는 곳이 아니라 보여드리는 곳인데 자꾸만 이런 저런 사진을 찍겠다고 찾아오셔서 저희도 꽤 난감한 처지라서요. 물론 설립자에게 저희도 몇 번이나 건의를 했었죠. 제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사진관이라는 이름은 바꾸자고요. 하지만 안된대요. 사진관이라는 이름 자체에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나 뭐라나. 그렇게 물으셔도 안타깝지만 저 역시 그 담긴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대답해 드릴 수가 없네요. 원래 스님이라서 그런지 그 속뜻을 여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아요. 어떤 땐 그 왜 있잖아요? 염화시중을 내가 직접 재현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요. 아, 이런 저도 모르게 손님께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제가 그동안 좀 쌓인 게 있어서 계기만 있으면 이렇게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래도 손님께 넋두리를 하면 안되는 것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네? 설립자 이름요? 아잔 브람이라고 해요. 맞아요, 외국인이죠. 원래는 영국에서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역시나 놀라시는군요. 다들 그러시더라구요. 외국인인데 스님이라고? 흔하지 않는 케이스이긴 하죠. 염불이나 제대로 외우기는 하는 건가 라고 말하는 손님도 계시고. 그래도 호주 최초로 절도 세웠다고 하니 그렇게 능력이 없는 건 아닌가 봐요. 네. 호주에 사시지만 자주 이리로 오십니다. 오셔서는 이런 저런 좋은 말씀들을 들려주고 가시고는 하지요. 멀쩡하게 대학까지 다 나와서 그 때까지의 삶에 진력이 났는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3년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안착하게 된 것이 불교였다고 해요. 자기 딴에는 17세에 학교에서 우연히 불교 서적을 읽고 바로 자신이 불교도가 될 운명이란 걸 알았다고 하지만. 뭐 그런 말은 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6살 때 우연히 제가 찍힌 사진 앨범을 보다가 여기서 일할 운명이라고 일찌감치 깨달았다면 믿으시겠어요? 뭐라구요? 손님은 7살 때 저와 데이트 할 운명이란 걸 알았다구요. 한 술 더 뜨시는군요. 불행하게도 업무 중에 사교적인 행위는 일체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흑심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얼른 저의 본직에 충실해야겠군요.

 

 제가 업무 중 누적된 불만으로 좀 비난조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진관은 제법 내실 있다고 자부합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능력과 성격이 따로 노는 사람. 사람은 좀 꽉 막혀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 마음 달래주는 실력 하나만큼은 참 뛰어나요. 그러니까 저도 늘 툴툴거리면서 아직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죠. 사표 던지러 갈 때는 일도 양단의 굳은 각오로 가는데 그 앞에서만 서면 왜 그렇게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인지 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아무튼 제가 늘 경험한 것이니까 믿으셔도 돼요. 어루고 달래는 능력만큼은 탁월하다는 것을. 입소문을 듣고 이 사진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어요?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안엔 모두 38장의 사진이 있어요. 아마 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다 다를거에요. 어떤 사진이든 당신 눈에 들어온 사진이 있으면 그 앞에 가서 가만히 서 계시면 되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래요 명상을 하듯이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럼 사진에서 아잔 브람의 목소리가 가만히 들려올 거에요. 저희 사진관은 그런 사진관입니다. 뭐 정확히 말씀은 안하셨지만 제가 추측해 보건대 아마 사진 앨범 같은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런 사진관을 세운 게 아닐까 싶어요. 왜 그렇잖아요? 사진 앨범을 넘기다 보면 같은 사진이더라도 그 때 그 때 마음에 따라 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잖아요. 그저 재밌는 풋풋한 추억만 전해주던 사진이 슬플 때 보니 큰 위로가 되어주던 경우가 있지 않던가요? 또 어떤 사진들은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그 날의 마음 상태에 좌우되는 것이거든요. 아마도 그런 경험이 이러한 모습의 사진관을 세우도록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아 오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편안함 때문이죠. 제가 감탄하는 설립자의 능력이기도 한데 이 사람 참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에 딱 알맞은 예화를 잘도 사진으로 담아 놓거든요. 덕분에 그가 하는 말이 더 쏙쏙 들어와요. 원래 유머가 있는 분이시라 그렇지 않아도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우게 되는데 말이죠. 그러니 부담 없이 둘러보세요. 38장의 사진 그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됩니다. 저희는 절대 야박하게 굴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는 손님을 왕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저희에게 손님은 신이에요. 뭐, 그런 마음으로 모시고 있다는거죠. 하하하!

 

 네? 아! 간판요? 사진관이라는 말만 있어 담백하다구요? 이런, 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웃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너무 뜻밗의 말씀을 하셔서 그만. 사실 간판이 원래 그랬던 건 아니거든요. 그 앞에는 원래 다섯 자가 더 있었어요. 지난 태풍에 그만 날아가 버려서 그렇지. 그걸 여태 수리도 안하고 있었네요. 설립자께서 워낙에 느긋해야 말이죠. 아, 정식 명칭요? 원래 이 사진관의 이름은 '슬프고 웃긴 사진관'이었죠. 그렇죠? 저도 늘 이상하게 생각했다니까요. 도대체 왜 '슬프고 웃긴'이 들어간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니까요. 물어봐도 뭐, 이제 그 결과정도는 예측하지 않으실까요? 염화시중. 차라리 태풍이 좋은 일을 해 준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아무튼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럼. 데이트는 업무 끝나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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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2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는 사진관,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스님이 꽤 별나시네요 영국 사람인데 스님이 되고, 영국도 아닌 호주에 절을 세우다니... 마음먹는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르고 달래주는 것도 잘하신다니...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죠 무엇이든 빨리빨리 흘러가는데,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보고 있어도 괜찮군요
그 점이 참 좋네요


희선

ICE-9 2013-07-23 23:44   좋아요 0 | URL
좀 변칙을 부려봤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봄날에 누워있는 나른한 곰처럼 느긋함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희선님의 말씀이야 말로 갓잡은 연어만큼이나 기쁘게 하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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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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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나온 폴 오스터의 신작 '선셋 파크'는 2010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전작인 '보이지 않는'이 2009년에 출간되었으니 채 1년도 안 되어 새로운 작품이 나온 셈이다. 그러고 보니 '어둠 속의 남자'가 나왔던 2008년 부터 꾸준히 1년에 한 권씩 내고 있다. 이러한 시기의 간격은 지금의 폴 오스터를 있게 한 대표작들, 그러니까 뉴욕3부작,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등이 해마다 주루룩 나왔던 19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것이 전기의 대표작이었듯 혹시 이 일련의 작품들은 후기의 대표작들인 셈일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지금 생각하기엔 분명 이 세 작품들은 그럴 값어치가 있어 보인다. 더구나 이 세 작품들엔 어떤 강한 연속성마저 감지된다. 그러고 보니 저번 '보이지 않는 리뷰'에서 한 번 언급했던 것도 같다. '어둠속의 남자'와 '보이지 않는'은 9. 11이 남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반향이라고. '어둠속의 남자'는 정확히 9. 11 이후에 이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작품이었고(이는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이지 않는'은 그 후, 2008년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경제 공황까지 가세한 미국에서 오늘의 현실이 과연 무엇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나를 되돌아보는 소설이었다. 그렇게 폴 오스터는 자신에게서 미국으로 나아갔다. 그럼, '선셋파크'는 어디로 나아간 것인가?

 

  전작 '보이지 않는'의 리뷰에서 나는 그 소설의 마지막이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라고 말했었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다시금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한 현장이라고.

  결국 소설 '보이지 않는'은 이제 만들어 갈 미국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건 한 마디로 이제는 보이지 않게 된, 그렇게 미국이 잃어버렸던 것의 복원이었다. 현재의 미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60년대의 미국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이념들 혹은 가치들...

 

  그런데 '선셋 파크'의 시작도 그러하다. 일종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선셋 파크'의 이야기는 마이스 헬러로 부터 시작되는데 작품의 첫 등장 장면에서 그는 서브 프라임으로 인해 밀린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야반도주해 버린 빈 집에서 그들이 남기고 간 그들의 물건을 청소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집 하나하나가 실패의 이야기이다. 파산과 체납, 빚과 가압류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 (p. 7)

 

  그렇게 마일스 헬러가 소위 '폐가 처리(기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물건을 깨끗이 치워 다른 사람들에게 팔기 쉽게 만드는 일)'를 하는 주인을 잃어버린 집들은 9. 11 때 생겨난 그라운드 제로의 또다른 모습이다. 마일스 헬러는 그런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도록 고용된 인부다. 이는 '보이지 않는'의 마지막에서 세실이 보았던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는 인부들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정반대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현존하는 그라운드 제로를 기초로 역사를 이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 마일스 헬러가 인부로서 하는 일은 그라운드 제로를 없던 것으로 지우는 일이다. 얼른 기존의 흔적들을 제거하여 새로운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에서는 거기에 뭐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선셋 파크'에선 분명히 존재한다. 이 차이는 어쩌면 기억과 망각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이 대지에 새겨진 상처를 영원히 기억하는 것이라면 '선셋 파크'는 새겨진 상처는 다른 흙으로 서둘러 덮어서 망각해버리고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그렇다면 이것은 또 한 번 겪었던 폴 오스터의 절망이 드러난 표현인지도 모른다. 2010년의 미국은 그야말로 '폐가 처리'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시다시피 2009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타개하고 새롭게 재건하기 위해 추진했던 오바마의 금융개혁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생각보다 기득권의 방어는 꽤나 강고했고 결집 또한 대단했다. 그 앞에서 오바마는 무력하기만 했다. 많은 여론의 지지 역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건 미국을 좀 더 바람직하게 재건할 또 하나의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9. 11 이 가져온 기회를 날려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를 공격함으로써 비극을 재빨리 망각하려 했었던 미국은 결국 다시금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 마치 카트리나에 휩쓸린 뉴올리언스 처럼 한 순간에 모든 재화들이, 그와 함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던 모든 가정들이 속절없이 쓸려가고 말았다. 이를테면 또 하나의 엄청난 그라운드 제로가 생겨난 셈이었다. 위기이 재발은 이제 좀 깨달아야 한다고. 더 이상 예전처럼 망각해서는 안된다고 신호를 주고 있었지만 역시나 미국은 아무런 교훈을 배우지 못했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 실패는 미국이 또 한 번 망각을 선택했다는 선언에 다름아니었으니까.

 

   '보이지 않는'에서 조금은 희망적인 미국의 미래를 그렸던 폴 오스터로서는 정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경이었을 것이다. 늘 어떤 위기에 있어서든 '폐가 처리'만 고수하는 미국은 그에게 분명 이대로 영원히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나라로 보였을 것이다. 트라우마가 치유될 순간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꾸만 커져갈 뿐. 마일스 헬러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처럼 타인의 아픔에 민감한 폴 오스터로서는 망각으로 그 개인들의 고통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미국이 더욱 절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셋 파크'는 바로 그 절망에서 잉태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 절망 끝에 나온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의 아이러니함. '선셋 파크'는 그런 아이러니로 충만한 우주이다.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고 구원의 가능성은 그대로 추락의 가능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모퉁이를 돌다가 예기치 않게 강도를 만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은 늘 뒷통수를 타격할 의외의 변수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를테면 모리스 헬러가 소설에서 처음 등장할 때 나오는 친구의 딸(수키) 장례식 장면처럼.

 

 그는 여러 해 전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화창한 날 늦은 오후 휴스턴 스트리트에서 수키와 우연히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수키는 고등학교 무도회에 가는 길이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한 빨간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다. 토마토처럼 붉디붉은 빨간색이었다.(...) 그 날부터 그의 마음 속에서 수키의 모습은 생기발랄한 젊음과 미래의 가능성의 정수를 구현한 모습, 불타는 젊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모범으로 자리잡았다. 이제 그는 한겨울 베네치아의 눅눅한 냉기, 거리로 무릎 높이까지 넘쳐흐른 운하, 불기 없는 방들의 몸이 떨리는 외로움, 그 속의 어둠의 힘에 부풀어 올라 터져 버리는 머리, 이 너무도 많고도 너무나 작은 세계에 의하여 파열해 버리는 삶에 대하여 생각했다. (p. 153)

 

 수키로 인해 언제까지나 세상이 화창하게 지속되리라 여겼던 믿음은 그녀의 예기치 않은 자살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 폴 오스터는 시각적 그리고 촉각적 이미지들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이러한 모리스 헬러의 정신적 추락을 극명하게 부각한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추락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그야말로 느닷업이 맞게 된 루시퍼의 해머였던 셈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그의 아들 마일스 헬러에게도 나타났었다. 그가 무려 7년 동안이나 탕아의 존재로 살았던 것은 말다툼 끝에 밀쳐버린 배다른 형이 길에 넘어져 차에 치여 숨지게 된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사소한 밀침이었지만 그게 가져온 것은 뜻밗의 죽음이었다. 그로 인해 마일스 헬러의 인생은 송두리째 전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역시나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징후도 없이.

 

 마치 운명이란 게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예측불허다. 어쩌면 이 소설에 만연된 아이러니는 이 예측 불허를 경험한 자의 허망함일지도 모르겠다. 선셋 파크의 집이 거기에 모인 모두에게 겨우 구원의 공간이 되려는 순간 느닷없이 출현한 퇴거 명령 집행을 위한 경찰관에 의해 그 모든 가능성들이 산산히 부숴져 버릴 때 그것을 바라보는 마일스 헬러의 시선에 담겨져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이 있기 전 바로 앞장에서는 선셋 파크의 거주자들 중 가장 행복과 거리가 멀었었던 앨런은 다시금 첫 연인을 만나 이런 고백을 한다.

 

   미칠 것만 같아. 아침에 눈을 뜨면 새삼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잘됐다. 엘

  그래, 잘된 일이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p. 316)

 

  이러한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는 퇴거 집행의 날을 맞이하고 행복에 젖었던 그녀의 두 눈은 공포로 경악하는 두 눈이 된다. 행복이 어느 순간 갑자기 다가오리라는 걸 몰랐듯, 불행 역시 그러하단 걸 그녀는 그렇게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인물 모두가 이런 걸 경험한다. 한 마디로 소설 속 이런 문장으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런 경험을.

 

  지금 그는 어디에 있나? 피할 수 없는 소멸과 계속될 삶의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 위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 186)

 

  이 경험은 정확히 폴 오스터가 2009년 미국의 모습에서 느끼던 것이었으며 2008년 서브 프라임 이후 갑작스럽게 맞이한 재정 파탄으로 인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모든 미국 가정들이 느끼던 것이었다. 그렇게 2001년의 9.11 이 만들어버린 트라우마의 심연은 미국이 내부의 진실된 반성이 아니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외부의 타자들을 지우는 것으로만 끝없이 메우려들었기 때문에 결국 미국인 모든 가정으로 확산되고 말았다. 아마도 미국에서만 유독 일어나고 있는 좀비 영화 붐은 이것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한 순간에 몰락을 경험했던 그들은 역시나 똑같이 단 한 번의 물림, 혹은 긁힘으로 좀비로 변해버리는 것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좀비란 그들이 겪었던 고통스런 기억이 구체화된 산물이요, 그들이 과거와 현재 짊어지고 있는 절망, 무력감 그리고 분노를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는 존재인 셈이다.

 

  이 '확산'은 '선셋 파크'의 소설적 구성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소설은 '마일스 헬러'만의 내면에서 시작하여 차츰 선셋 파크에 모인 네 명의 내면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모두(All)의 내면으로 확장되어 간다. 마치 금융위기로 인해 난파선이 되어버린 이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재민으로서의 그들 하나하나의 내면을 다 보여주려는 것처럼.

 

  이렇게 '선셋 파크'는 지금 당신 곁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소설이다. 그들의 내면 속에 간직된 것을.

 

  지금 확산되고 있는 좀비 영화가 미국인들이 그동안 미국이 했던 것과 똑같이 오로지 타인을 파괴함으로 자기가 겪고 있는 고통을 대리 치유하고 있는 것임을 고려한다면(그러니까 나는 지금의 좀비영화들을 이렇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앞에서 자신이 드러눕고 있는 소파 같은 것으로. 그렇게 자신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술술 드러나고 있는... 이런 면에서 같이 흥행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물에 대해서도 의심의 시선을 던질 수 있다. 사실 '슈퍼 히어로물'은 '좀비물'과 동전의 양면관계다. 좀비물은 타자를 파괴하고 히어로물은 타자를 구원하지만 모두 타자에 대한 내밀한 헤아림은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좀비물에서 타자들이 오로지 자신의 치유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소모품이듯 슈퍼히어로물에서도 타자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그 배경으로 사라져줘야 하는 소모품들인 것이다. 금융위기가 초래한 트라우마 앞에서 좀비물이 '너도 나처럼 당해봐라'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상관물이라 한다면 슈퍼히어로물은 '압도적으로 강해져서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무의시적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렇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의 내면을 아우르는 것이 어쩌면 폴 오스터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지고 싶은 대안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너무 자신의 고통만 바라보려 하지 말고 타인은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지 그 헤아림의 시선을 한 번 던져보라는...

 

  그랬을 경우, 우리가 알게 되는 것 한 가지...

  그건 바로 지금 겪고 있는 힘겨움, 고통들이 나만은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은 또한 그 모든 힘겨움, 고통들에서 나만이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폴 오스터가 독자들에게 주려하는 것을 단 한 문장으로 정의하라면 아마도 나는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한다.

 

  '너만 예외일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는 소설이 점점 모든 인물들의 내면으로 확장되어감에 따라 마일스 헬러만이 고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모두가 다 자신만의 고통과 힘겨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선셋 파크'의 공간에서 연대가 가능했던 것도 그러한 헤아림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살던 선셋 파크 바로 옆에 그린 우드 묘지 가 있었던 것이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종종 거기를 거닐거나 바라본다. 그러면서 거기에 묻힌 그들의 삶을 헤아린다. 선셋 파크의 집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구원의 공간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헤아림이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연대와 구원을 가져오게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듯 하다.

 

  그린우드 묘지는 소설에 종종 나오는 야구 선수들의 생애 와 이어진다. 마일스 헬러와 그의 아버지 모리스 헬러는 한 순간 빛났다가 예기치 않게 은퇴해 버린 야구 선수들의 인생을 자주 떠올린다. 마일스 헬러와 모리스 헬러처럼 느닷없이 루시퍼의 헤머를 맞았던 자들을. 그렇게 그들의 삶이 예외가 아니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린우드 묘지의 존재와 야구 선수들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에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묘지는 9. 11이나 이라크 전쟁, 혹은 금융 위기에서 희생된 이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삶을 헤아려 볼 것을 말하기 위해. 그러면 더욱 우리는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역시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삶의 모든 힘겨움 또는 비극 앞에서 우리는 전혀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우리가 여기에 서 있고, 그들이 저기에 누워 있는 것은 다만 우연이고, 운이 작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선셋 파크'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행복에도 혹은 불행에도 머무르지 못한다. 행복과 불행은 마치 넘실거리는 파고의 높낮이 만큼이나 변화무상하다. 그건 그들의 능력과 노력과도 무관하다. 흡사 눈을 가린채 해변의 모래 사장을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밟게 될 것이 부드러운 모래일지 아니면 깨진 유리 조각일지 그도 아니면 누군가의 배일지 알 수 없다. 우리의 인생 경험에 비추어 봐도 비슷하다. 우리 역시도 그와 같은 상황이다. 고통은 전조도,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소설의 마지막 마일스 헬러가 또다시 뜻하지 않게 당하는 고난이 전혀 억지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도 그런 우리의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지만 '나만은 예외겠지'하는 생각은 여기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하게 한다. 그 예외일 거란 생각 때문에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은 더욱 크게 보이고 거기다 '불운'이란 생각까지 겹치면 더 큰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때문에 그들은 타자들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 좀비물이나 슈퍼히어로물에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투사시키는 것처럼.

 

   그리하여 결국 미국이 저질렀던 잘못처럼 동일하게 늘 그릇된 선택을 하게 된다. 오바마의 금융 개혁은 언제나 자신들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실패하고 우리나라의 아파트 소유자들은 아파트 가격에 대한 자신들의 소망이 우리나라 경제 상황상 관철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한 그 헛된 믿음을 정부가 따를 경우 그로 인해 또 어떤 어려움들이 타인들에게 전가될 것인지 알면서도 자신만은 예외라는, 아니 예외이고 싶다는 생각때문에 그릇된 선택을 한다.

 

  예외는 그렇게 단절을 가져오고 결국엔 늘 더 큰 희생을 대가로 치루게 한다. 아마도 그래서 칸트는 바로 그 예외가 되려는 생각이야 말로 정말 '악마적'인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칸트는 단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악마란 다름아니라 스스로 예외가 되려는 존재들이라고.  

 

  소설 '선셋 파크'는 '나만 예외'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결국 야구 선수 잭 로크도 죽는다. 늘 행운으로 모든 불행을 비켜나갔던 그는 그의 삶을 관심있게 지켜보는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에게 '예외'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죽는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마일스와 모리스 부자는 진정한 화해를 하게 된다.(잭 로크는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이다. 그것은 예외의 한계, 그것이 치유와 구원을 줄 수 없음을 말하는 존재이다.) 즉 우리는 이를 통해 '선셋 파크'가 하려고 하는 말, 그러니까 예외를 버렸을 경우 타인 역시 같은 어려움과 힘겨움 속에 살고 있음을 보게 되고 그렇게 상호 이해의 연대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치유 혹은 구원도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마일스 헬러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보게 된다. 이제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바로 그 시선의 변화가 폴 오스터가 주려 하는 치유와 구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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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폴 오스터의 '보이지 않는' - 외부와 내부에서 바라보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5-30 13:33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ICE-9 2013-05-30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 연결되는 이야기라 '보이지 않는' 리뷰도 링크해 둡니다...

아이리시스 2013-05-3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헤르메스님 리뷰 보니까 제가 유독 이 작품이 재미없던 이유를 알 것 같아요. 저는 미국적 시각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나의 시각'으로 읽었던 듯한데, 내용이 그저그러니까 계속 그러그렇게 읽혔던 것 같네요.

'보이지 않는'은 책을 안 읽어서, 담에 언젠가 읽고나서 리뷰를 다시 읽을 날이 오겠죠^^

희선 2013-05-31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한테는 그런 일 일어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하죠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 일어나지 않을거야 하기도 했는데...
정말 누구한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아픔이 있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것 또한 잘 잊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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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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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신당한 유언들'은 1993년에 나왔다. 1990년에 나온 소설 '불멸'로 부터 3년 뒤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에세이다.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가 쓴 총 10편의 에세이들 중 7번째로 나온 것이다. 소설은 모두 9편을 썼다. 2000년에 나온 '무지'가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이후로는 에세이만 나오고 있다. 굳이 책에 대한 리뷰와는 별로 상관 없을 것도 같은 이런 사실들을 언급하는 건,(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배신당한 유언들'과 그 전에 나온 소설 '불멸'이 아무래도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멸' 바로 전에 나온 '소설의 기술'이라는 에세이가 또 바로 그 전에 나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설인 것처럼 말이다.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렇다고 본다. 밀란 쿤데라 스스로가 말하는 '불멸'의 해설서라고.

 보다 쉽게 비유하자면, DVD나 블루레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 같은 것...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소설 '불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여 '배신당한 유언들'이 알송달송했다면 이참에 '불멸'을 한 번 들춰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에세이에서 모호했던 내용들이 소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혹, 그 정도도 왠지 귀찮다고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정말 보잘것 없는 '리터러시'의 소유자이지만 감히 '배신당한 유언들'이 실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종의 분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찾으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으나 아무래도 한 단어로는 저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셜록 홈즈가 자주 쓰는 참 재수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처음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툭 던져놓고 상대방의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실컷 즐긴다음 구체적 설명이 들어가는 것.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말하면 좋잖아!'하고 돌을 던져도 그냥 맞을 수 밖에 없다. 어쨌든 내 머리의 프로세서는 이렇게 밖에는 작동하지 못하므로....

 

 

  분리의 이야기다. 어떤 분리?

 소설과 소설가의 분리이다.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소설가를 규정짓지 않는 것. '배신당한 유언들'은 결국 이런 말을 한다. 좀 상스럽게 직설화법으로 고쳐보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발 네가 읽은 것을 절대시하지도 말고, 읽을 것을 가지고 나를 어떤 사람이라 판단하지도 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나? 너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만큼 무슨 절대적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부단히 변하는 존재야.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지. 그런 우리에게 책은 잊혀진 시대의 유물, 지워져 버린 생물의 화석과 같은 것일 뿐이야. 너는 솜씨좋은 고고학자처럼 그걸 가지고 나를 유추하려들지. 하지만 그건 너의 상상력이 빚어낸 수사학일 뿐, 진실은 아니지. 그런데도 넌 진실이라 주장해. 너의 상상이 주형한 틀에 나를 맞추려들어. 이건 폭력이지. 더구나 그것이 글이 되었을 경우 그건 불멸이 돼. 기록으로 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도 하지. 진실이 아닌데도 불멸이 되어 진실과 대등한 위치를 가지게 돼. 거기에 대해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하려 해도 소용이 없지. 이미 불멸이 되어버린 글 앞에선 초라한 자기 변명이 될 뿐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해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저렇게 나를 규정짓는 것은 소송과 다를바 없어. 내 '불멸'이란 소설에서 괴테가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죠(P. 136)'이라고 말했듯 말이야. 카프카가 정확히 꿰뚫었듯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고인을 없애기 위해 제기하는 소송인 것이지('배신당한 유언들' P. 340) 난 이게 싫어. 오만한 규정이 싫어. 유언의 진의는 오직 죽은 자만이 알 뿐이야. 우리는 늘 보지 않았나? 같은 유언임에도 불구하고 상속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자기가 한 해석이 옳다고 기꺼이 소송까지 불사하는 것을! 난 그런 것을 경계하려 해. 오만하게 진리라 주장하며 규정짓는 너의 입을 좀 닥치게 하고 싶어!"

 

 

 

  뭐,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극도로 작아지는 자신감이란...) 보잘 것 없는 리터러시의 그물로 포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이렇게나 단정지어 버리다니. 밀란 쿤데라가 정확히 내 심장에다 비난의 화살을 쏘아 퍼부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리뷰라는 것이 어쨌든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니, '진격의 거인'처럼 앞만보고 걸어가는 무모한 철면피가 될 수 밖에...

 

 

  아무튼 밀란 쿤데라는 쇠사슬처럼 자기에게 감겨오는 자신의 글을 통한 이런저런 타인의 아는 척과 규정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글을 쓴 당시의 자신이 정말은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기다 그 때의 생각이 영원히 항구적인 것도 아니고 어제의 내 생각과 오늘의 내 생각도 얼마든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현재의 자신마저 규정하려 덤벼드니 못 참는 것이다.

 

 

  그는 '배신당한 유언들'의 시작부터 누누히 말한다. 가볍게 여기라고. 하나의 농담처럼, 피식하는 웃음처럼 여기라고. 소설가가 마치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의 성전에 자신의 영혼을 봉헌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신념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저 모든 작품을 작가의 농담처럼 생각하라고. 그렇게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주인공의 성격이 휙휙 바뀌어서 일관성을 잃게 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팡타그뤼엘'을 쓴 라블레나 '운명론자 자크'를 쓴 디드로도 여러가지 글의 형식들을 자유롭게 써서 형식의 일관성이 붕괴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사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완전무결한 일관성 보다 프리재즈 스타일처럼 즉흥적 변주를 즐겼으니 그 소설을 무겁게 하는 완전무결함에 대한 요구야 말로 사실은 소설을 질식시키는 것이며 소설을 읽는 당신 자신 역시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첫 머리에 나오는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은 그런 의미다. 스트라빈스키의 즉흥곡 또한 그렇다.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카프카에 대해서 막스 브로트가 했던 것처럼 소송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소송 그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오로지 피고인을 죽이는 '마녀사냥'이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소설 '불멸'에서 괴테의 대답을 낳게 한 헤밍웨이의 고백이 그렇다.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求刑)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군데이면서 이백서른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수음을 했다는 등,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 대지요."('불멸' P. 136)

 

 

 

 이런 식의 떠벌림. 손쉬운 판단, 제멋대로의 자의적 규정들을 막는 것. 다시 말해 배신당한 유언들을 가급적 줄이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라고 보여진다(어디까지나 '나'라는 필터에 걸려진 말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어미를 쓴다.). '어떻게 웃음 혹은 농담이 소송을 막을 수 있을까?' 혹시 아직도 궁금하다면 발터 벤야민이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유머는 선고가 없는 집행의 세계로서, 그 속에는 사면(은총)이 웃음 속에서 요란하게 들려온다.

 

  (발터 벤야민, '고트프리터 켈러에 대한 글 중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 9 (길 刊))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분명하게 발히고 있듯이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이란 사면이 원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구형을 바라는 소송은 유발된 웃음이 가져온 사면 속에서 절대적으로 무화되어 버린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들을, 아니 모든 소설이란 작품들도 그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훌륭한 소설이라 평할 때 쓰는 흔한 잣대들, 그러니까 제대로 된 현실 묘사, 딱 떨어지는 기승전결, 캐릭터의 일관성, 개연성 넘치는 전개와 같은 잣대들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말이다. 더하여 소설가는 자신의 전부를 그대로 녹여내어 작품을 쓴다는 우리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소설가에 대한 환상으로 부터도.

 

 

   그런데 여기까지 읽어보면 왠지 이런 의문이 하나 들지 않는가?

 

  그러니까 왜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그는 이런 이야기를 '불멸'이란 소설에서도 했고, '배신당한 유언들'에서도 한다. 이렇게 형식을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어 보인다. 밀란 쿤데라는 누누히 제발 선을 넘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고 우리의 뇌란 어쨌든 인과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속시원한 법이니 아무래도 밀란 쿤데라가 바지 가랑이를 잡고 못 가게 한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처럼 벽을 뚫고 돌진해 보면 현실의 그가 보인다.

 

   즉, 프랑스 망명 당시의 그가! 75년 그는 프랑스에 망명했고 81년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죽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체코에 있을 때만 해도 적극적인 반체제 운동을 했었던 밀란 쿤데라는 그러나 프랑스에 정착하고나서 부터는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해서 소극적이 되었다. 그는 반체제 운동을 위한 체코로부터의 어떠한 협력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때로는 비판까지 감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체코의 반체제 진영에선 그런 밀란 쿤데라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건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하여 공감과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럽 지식인들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작품의 순수성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훼손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프랑스 정착 후에 쓰여진 '웃음과 망각의 역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불멸'은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서 쓰여진 것이었다. 모두가 어떤 무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키에르 케고어의 책 제목처럼 '이 편이냐 저 편이냐' 선택할 것을 물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은 춤을 추는 원무를 하나 골라 참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개인성을 포기하고 집단의 일원이 되라고. 개성을 나타내는 웃음은 그만두고 단일한 표층의 망각의 일부분이 되라고.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썼다. '존재의 가벼움'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져내야만 하는 '고유한 개인성'을. 그리고 썼다. 이 모든 우스운 짓거리와도 같은 불멸의 폭력 속에 농담으로 맞서기 위하여.

 

 

   그리하여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밀란 쿤데라가 겪은 경험에서 촉발된 사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혹은 자기 변호...) 그는 소설과의 순수 경험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그 너머의 소설가는 생각하지도 말고, 행여 어떤 사회적 혹은 역사적 사실이 여과된 것일까 추정하지도 말며 오로지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 가져오는 순수한 경험에만 몰두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안개 속을 나아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안개 속에 있는 자의 자유이다. 그는 50미터 전방을 볼 수 있고 대화 상대의 모습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며,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모습을 즐길 수도 있고,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그에 반응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안개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것이다.(P. 354 ~ 355)

 

 

   왠지 이 글을 쓸 당시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해보면 마야코프스키와 겹쳐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순수경험은 그러니까 훗설이 말했던 판단중지, '에포크'와 같다. 순수하게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란 존재 자체 말고는 내게 선입관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일시 정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므로 제대로 내 시야에 드러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윤리적 물음을 요청한다. 도대체 우리는 글을 가지고 글을 쓴 타인을 어디까지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그건 나를 중심으로 해서 10미터 밖의 안개인가, 아니면 50미터 밖의 안개인가 그것도 아니면 100미터 밖의 안개인가?(이 경우 물론 가까울수록 더 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판단하고자 하는 타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을 가지고 남들이 판단할 경우 나는 그 사람이 과연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나를 판단하고 있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만큼의 거리가 정확히 우리가 남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가 중시하는 순수 경험은 일종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어디서 부터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장소란 물론 바로 우리 눈앞에서 유일하게 안개에 둘러싸여 있지 않아서 뚜렷하게 현존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니까 제목의 '유언'은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지시어인 셈이다.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유언에 곧이곧대로 충실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정확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찍어야 할 방점은 그 유언의 충실이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념의 결과라는 부분이다. 그들은 순수한 그들만의 자의로 유언을 글자 그대로 따르기로 선택했다. 글과 내가 만나는 순수 경험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어떠한 선입관이나 지식의 매개없이 이루어지는 그 경험에 있어서 판단이 어디까지나 내 순수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렇게 하여 개인의 고유성을 건져내고 싶은 것이다. 즉흥이나 변주를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것엔 전체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이제 문학이 오늘날 굳어질 대로 굳어져 버린 소설의 형식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 스타일은 꾸준하게 전형적인 소설 형식을 탈피해 왔는데 그만큼 그가 집단이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개인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현존하는 수많은 글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글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수 년 전 과거의 글들까지 가져와 비난하고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문장만 따와서 공격하는 것도 자주 본다. 인터넷 마녀 사냥이 횡행하고 행간을 읽어내야 하며 저의를 의심하고 추정해야 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어 버린 요즘 시대에 밀란 쿤데라의 이러한 말은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자신의 삶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한 안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개를 슈퍼맨처럼 투시하여 명확한 진실을 알아낼만한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 앞에 놓여진 어느 것 하나를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난관은 이제 사유를 촉발한다. 아마도 궁극에 가선 당신의 결단을 이끌어낼 사유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밀란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독자에게 접하게 하려는 순수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사유야 말로 바로 존재의 고유한 자기 증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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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5-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는 무엇인가를 정해놓고 글에 대해 가르칩니다
시험 문제에 다른 답을 쓰면 틀려요
하지만 글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그게 맞든 틀리든 그것은 작가와는 상관없는 거겠죠
작가는 글을 쓰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듯합니다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해설서를 쓰다니, 재미있네요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지만 소설의 기술은 안 읽어봤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밀수꾼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밀수꾼들' 을 쓴 발따사르 뽀르셀 은 스페인 작가로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이미 16편의 장편소설을 쓴 그에게 이 '밀수꾼들'은 그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사실은 1968년에 세상으로 나왔다. 책 뒷 표지에 실린 소개글을 빌려 내용을 간략하게 말해 보자면, '한 무리의 밀수꾼 사내들이 '보따폭호'라는 배에 밀수품을 가득 싣고' 지중해를 건너가는 이야기다. 그 일련의 여정을 담은 것으로 이야기 자체는 좀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엔 흔히 있으리라 기대되는 주인공 같은 것이 없다. 배에 있는 모두가 다 이 소설에서 아예 비중까지도 동등한 주연들이다. 이러한 일종의 주인공의 '민주화(?)' 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당신이 이 소설이 가진 이야기적 단순함에 좀 실망했다면 이 소설이 가지는 구성상의 특이성은 당신의 흥미를 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소설 자체는 항해 이야기의 원본격이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비슷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배가 다다른 하나의 공간들로 이야기가 분할되어 있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를 얼른 상상하기 어렵다면 어릴 때 본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를 연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소설은 그 '은하철도 999'와 정확히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은하철도 999'와 닮은 꼴은 그것 뿐이다. 거기엔 철이와 메텔이라는 뚜렷하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주인공들이 있지만 '밀수꾼들'에게는 그런 주인공들이 없기 때문이다. 여정이 다다른 곳마다 분할되는 이 이야기는 그 주인공 역시도 돌림노래를 하듯 돌아가면서 맡는다. 하나의 주인공이 오로지 하나의 장소에만 군림하는 것이다. 발따사르 뽀르셀은 그런 구성을 취하면서 그 배에 올라탄 모두가 어떻게 밀수꾼이 되어 '보따폭호'에 올라타게 되었는지, 그 사연을 들러준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장소로 분할된 이야기들은 그 분할된 이야기 토막마저 현재와 과거로 분할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마치 '인수분해' 와도 같은 소설이다. 절대 나눠지지 않는 소수 같은 것을 찾아 끊임없이 나누고 나누는 소설. 그것이 바로 '밀수꾼들'이다.

 

  앞서 오디세우스를 슬쩍 인용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 소설은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그걸 살짝 비튼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 오디세우스도 지브롤터 해협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누비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그건 이 소설의 여정과 그대로 닮아있다. 더구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늘 바다의 어떤 지점이나 하나의 섬을 중심에 놓고 진행되는데 '밀수꾼들'은 그 역시도 닮아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오디세우스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그 오디세우스가 이 소설에서는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부하의 의견 따위는 가볍게 묵살한 채, 자기 계획만 관철시키는 여지없이 몰인정하고 독선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그 원본이 되는 오디세우스에게 늘 따라다니는 비난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랄까, 이 소설을 '영웅없는 오디세우스?'.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사실 여정의 중심이 되는 배를 밀수꾼들의 배로 설정한 것도 오디세우스를 슬쩍 비꼰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발따싸르 뽀르셀이 왜 이렇게 구성을 취했는가도 이해는 간다.

 

  오디세우스는 지금 우리들에게 소설의 원형과 같은 것으로 인지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설의 아르케. 그것이 오디세우스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의 모습은 모두 그로부터 발원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마치 블랙홀처럼 하나의 주인공이 세계를 쑥 빨아 삼키는 것과 같은 구성도 알고보면 오디세우스로 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뽀르셀은 어쩌면 지금 헤게모니를 거머 쥔 그러한 이야기적 구성에 어깃장을 놓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구성했는지도 모른다. 뭐, 근거는 빈약한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상상이긴 하지만.

 

  하지만 이 소설이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외양을 취하면서도 어떤 식의 뚜렷한 변별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왠지 그 상상이 그렇게 근거가 빈약한 것만은 아님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데 당시 스페인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같은 상상은 더욱 신빙성을 띄게 된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와 급격히 이념적 헤게모니를 차지해 가고 있던 사회주의와 그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보수주의가 정면으로 맞붙은 첫 이념의 대결이었다. 물론 나쁜 것은 보수주의였다. 당시 민중들이 지배층만의 이익 추구와 수구에 진절머리가 나서 합법적 선거로써 '사회주의' 정권에다 주권을 양위해 주었는데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지배층들이 프랑코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발발하게 된 것이 스페인 내전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소설이 지루하다고 생각된다면 동시대를 다룬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도 있다.)

 

  내전의 악인은 너무나 분명했고 민간인들의 학살마저 잇달아 일어났으나 바깥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헤밍웨이 같은 지식인들을 비롯한 민간인 개개인들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시 공격받고 있던 '인민전선'을 위해 나서게 되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된 이념 안에서 범 민중들의 연대가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이 소설의 구성은 그같은 역사적 경험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 '밀수꾼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과거를 따라가보면 거기엔 반드시 '스페인 내전'이 있음을 보게 된다. 모두가 각자 다른 모습으로 거기에 참여했고 결국 그게 시발점에 되어 지금의 배에 이르게 되었음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 소설과 스페인 내전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게 된다. 이 소설이 나왔던 68년은 여전히 프랑코 정권이 득세를 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유럽은 '68혁명'이라는 새로운 자유의 물결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었지만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마지막 파시스트 정권이라는 세간의 평가답게 그 물결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밀수꾼들'은 사실 그와 같은 스페인의 상황을 은유한 소설이다.

  왜 소설이 굳이 '밀수꾼의 배'를 가져왔는가? 그 때의 스페인이 밀수하는 자들의 마음과 똑같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내내 경찰의 수색과 추적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을 나타낸다. 점점 넓어지는 경찰 수색을 피해 아예 '죽은자들의 섬'으로 달아나 숨기도 한다. 뽀르셀은 그 시기 스페인 상황이 바로 그렇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에 올라탄 모든 등장인물들은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극도로 불안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 마음의 현재와 과거를 아울러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설 '밀수꾼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은 내게 하나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바로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이란 그림이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모델로 한 이 그림에서 제리코는 뗏목에 올라탄 여러 인물들을 통하여 같은 상황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어떤 이들은 여전히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에 구조를 위한 수건을 흔들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실의에 빠져 낙담만 하고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을 보내는 자가 있는 반면 더없이 무덤덤한 자들도 있다. 그렇게 상황은 하나지만 그 반응은 이토록 다양하며 또한 개별적이다. '밀수꾼들'이 취하고 있는 구성 방식이 이와 같다. 그런데 좀 더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더욱 닮은 점이 드러난다. 그래서 소재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혹시 뽀르셀이 정말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쓴 것은 아닐까도 생각된다.

 

  1816년, 군함 메두사호가 암초에 충돌하여 난파되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보트에 메달린 뗏목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해서 모두 400명의 승선 인원 중 146명이 살아남았다. 그 뗏목을 밧줄로 연결하여 이끌고 있던 보트에는 메두사호의 선장이 타고 있었는데 뗏목이 보트가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자 선장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잘라버렸다. 그래서 뗏목은 오래도록 표류할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엔 살기 위해 인육을 먹게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형법을 공부하다보면 '긴급피난'이라는 것을 배우는데 그 중요한 사례로서 지금도 형법학 교과서에 꼭 인용되는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선장 말인데, 여기 '밀수꾼들'에서도 똑같은 선장이 나온다. 동료 하나가 다쳐서 얼른 육지로 보내 치료를 해야 할 형편이지만 그 선장은 어디까지나 밀수를 성공시켜 자신의 이익을 취할 생각에 그렇게 해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메두사호의 선장과 똑같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유사성이 있어 제리코의 그림이 이 소설에 영감을 준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 선원들의 반응 역시 제각각이다. 어떤 이들은 선장이 말이 옳다면서 따르지만 또 어떤 이들은 선장의 행위가 몰인정하다면서 반박한다. 거기에 가장 많이 반박하는 이가 2등 기관사 쁘루덴시이다. 그는 배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에 대한 선장의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항해 도중 그의 고향 섬에 다다르게 되니 거기서 육지로 보내주자고 요구한다. 이 소설이 당시의 스페인을 담아내고 있으므로 그 환자란 아무래도 당시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에서 박해와 탄압을 받던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선장과 쁘루덴시는 그 사람들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이익만 생각하며 무시해 버리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이익 따위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그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그렇게 이 소설은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만큼이나 인간 군상에 대한 파노라마이다.

 그런 식으로 그 아픔 앞에서 당신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나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소설이다.

 

 더하여 오디세우스와 연결해 보면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이 그저 순수하지만은 않고 어떤 특정의 정치적 효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뽀르셀이 이 소설에서 오디세우스 이래로 이어져 온 기존의 소설적 장치들을 탈피하는 것은 그 소설적 장치들이 세계가 하나를 중심으로 위계적으로 재편된다는 점에서 정확히 프랑코 독재 정권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계이므로 의도적으로 그것을 허물고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존재하도록 소설을 쓴 게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소설적 저항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러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사유의 지점들을 던져주므로 좋게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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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저께 예스24의 퀴즈를 풀다가, 어떤 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지문에 인육을 먹는다가 답이었는데, 제가 틀려서, 이게 무슨 책이고 무슨 문제지 했었는데, (책을 읽느라고 읽는데 맞힌 수준 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ㅋㅋ) 어쩌면 리뷰에 쓰신 저 배의 일이었는지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배 얘기도 있고, 파이 이야기에도 있도, 뭐 여럿 있긴 하지만요. 이 책은 정말..평이 여럿이네요. 헤르메스님은 별 다섯인데.. 스페인 내전이나 스페인 역사를 알고있다면 좀 더 쉬워질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오락가락해요!

ICE-9 2013-04-27 23:22   좋아요 0 | URL
앗 아이리시스님 언제 또 이렇게 다녀가셨나요? 얼른 환영의 인사를 해드려야 하는데 늘 이렇게 늦네요^ ^; 큭큭, 저도 그거 풀어봤어요. 예선 점수가 정말 잘 나와서 어, 이러다 천만원 상금도 턱하니 타는 거 아냐 했는데... 본선 문제는 정말 장난이 아니더군요.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서 제대로 대비하지 않으면 못 풀겠던데요^ ^;
전 솔직히 별점이 후한 편입니다. 후해도 너무 후한 편이에요. 처음 알라딘 서재할 때는 이렇게 많이 노출될지 몰라서 그냥 무조건 다섯개주고 했는데 그게 지금은 타성이 된 탓인지 조금만 만족해도 그냥 다 줘 버리곤 합니다. 그러니 제 별은 너무 믿지 마세요. 앞으로는 별을 줄 때 좀 신중해져야겠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보단 다른 분들을 믿으세요.^ ^

희선 2013-04-27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속에서는 한두 사람이 돋보이지만, 실제 우리 삶은 그렇지 않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그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주인공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안에서 빛나보이고 싶어하지만...
그런데 책을 볼 때는 한두 사람만 따라다니며 보는 게 편하기도 해요^^

스페인 내전을 알고 있다면 소설을 좀더 잘 볼 수도 있겠군요
거기에 헤르메스 님은 '메두사의 뗏목'이라는 그림도 알고 계시는군요


희선

ICE-9 2013-04-27 23:25   좋아요 0 | URL
제 말이 그말이에요. 우리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위계 질서를 만들곤 하는 건 어쩌면 소설적 경험에서 연유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중세만 해도 귀족과 평민 그리고 성직자의 구분이 있을지언정 평민간에는 그렇게 쉽사리 위계를 나누거나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어쩌다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서로 높고 나눔을 만들게 되었는지 그것도 이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거기에 어떤 근대의 동학이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 망상도 해 봅니다^ ^
줄리언 반스의 소설 중에 10과 1/2장으로 된 세게사란 소설이 있는데 거기에 이 메두사의 뗏목에 대한 내용이 있어요. 그 때 제대로 알게 되었죠^ ^
 
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은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요즘 방영중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계약직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는 정주리는 이 말을 곧잘 버릇처럼 되뇐다. 정주리가 계약직으로 있으면서 매일 느끼고 있듯이 이는 삶이 가진 가혹한 진실 중의 하나다. 그렇게 우리는 언제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사라질 수 있다.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그렇고 그런 수많은 부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나만이 가진 고유의 존재 가치로써 빛나고 싶은 열망은 사실 인간이라는 실존을 가진 이상 근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욕망이기 때문에 이 같은 진실의 확인은 섣불리 잡을 수 없는 악수와도 같다. 그래서 더러는 이를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여기고 순응하기도 하지만 더러는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호히 거부한 채, 저항하기도 한다.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데뷔작, 소설 '침대'에 나오는, 스무 다섯 살에 갑자기 자신의 침대에서 절대 나오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무려 20년 동안 침대를 떠나지 않은 남자, 맬컴은 바로 그 후자였다. 그가 7484일 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저항의 일환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침대는 그 자신에게는 가열찬 투쟁의 장소였다.

 

 

  그가 20년 동안 저항했던 건 어릴 때부터 그는 이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인 맬컴의 동생은 이렇게 증언한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말하는 형은 자기만의 규칙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 규칙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형 자신밖에 없었다. (...) 나는 그저 형이 일으키는 파도에 실려 흘러갈 뿐이었다. 문을 확 닫았을 때 생기는 아주 작은 틈 사이로 날아 들어온 솜털처럼.

 그 시절은 형의 전성기였다.  형도 그 시절이 끝나기를 원치 않는 듯 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죽음 자체는 아닐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p. 42)

 

 

  맬컴은 이런 존재였다. 늘 자기만의 빛깔로 빛나고 싶은 존재. 수 많은 그렇고 그런 전구가 되기 보단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고 싶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용한 말에도 나오지만 나이가 들면서 정주리와 똑같은 깨달음을 얻어간다. 결국 자신도 그렇고 그런 전구 중의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어느 날 맬컴은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남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할래? 네가 훗날 아무 것도 남길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떻겠느냐고. 너를 기억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너를 기억할만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도 없다면? 네가 그저 과거에 있던 누군가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흔해 빠진 인간일 뿐이라면? (P. 182)

 

 

"안 보여?"

"응,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나는 보여. 저게 바로 핵심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면, 굳이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p. 183)

 

 

 

 그리고 그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나를 죽인 채, 남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난 아무 것도 하지 않겠어!'를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그의 존재 자체가 저항이었다. 개인의 개성을 서서히 마모시켜 정형화된 틀로 찍어낸듯한 그렇고 그런 일반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항전이었다. 600KG이 넘는 거구의 그 몸 자체가 철저한 비타협으로 사회로 부터 그가 지켜낸 존재성의 크기인 것이다.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욕망하지 않은 채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을 끌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덴 늘 정해진 방향이 있고 그 방향 그대로 사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맬컴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맬컴은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의 증명이었고 내 고유의 존재 가치를 헛되이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이정표였다. 그의 침대는 마을을 넘어, 나라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수 많은 팬레터가 세계 각지로 부터 날아든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했던 존재 자체로서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섬'이 된 것이다.

 

 그렇게 600KG의 그가 머무르는 침대는 항성이 된다. 수 많은 혹성들이 주위를 도는. 혹성은 당연히 항성이 가진 인력에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맬컴의 아버지는 그동안 내내 미뤄두었던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덤비게 되고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하여 자신을 내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사랑마저 독점하여 늘 질투와 외로움의 고통을 죽부인마냥 안고 살게 만들어 형인 맬컴을 싫어하고 어서 빨리 죽어서 해방되기만을 바랐던 동생마저도 변화되어간다. 그 인력은 어떠한 인력인가? 세상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 자기 고유의 존재 가치를 잃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정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도록 하는 것. 그러니까 스스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해방의 통로를 찾토록 하는 인력인 것이다.

 

 맬컴은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소중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규격화된 존재로 되게 만드는지. 바로 거기엔 기생에 대한 욕망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가진 보다 더 큰 것에 달라붙어 자기 존재의 안정과 지속을 구하려는 욕망이 정작 자신들에게 더한 상처가 되고 있음을 그는 본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바깥의 것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마음 자체가 결국 자신의 것을 모조리 내줘서 자아를 텅 빈 항아리처럼 만드는 것임을 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과 절연한다. 일도, 사랑도, 상식도, 삶의 의미도. 그는 그저 존재하고 순간순간을 살아간다. 육체적 살의 확장은 그 내면성의 확장이다. 그 비대한 몸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듯이 그 안에 충만한 내면성은 사람들이 정말 바라보아야 할 곳으로 시선을 바꾸게 만든다. 진정한 구원과 해방이 있는 곳.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침대'는 그런 소설이다. 비대한 육체에 짓눌린 가족의 고통을 그리는 소설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구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를 말하는 구도의 소설이다.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이 소설이 어렵다거나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는 말기를.

 주제를 우려내는 설정이 독특한 만큼 이야기가 매력적이라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문장이 좋다. 표현도 참신하고. 작가 자신이 뭔가 다른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흥미로움의 순도가 아주 높은 소설이다. 그러므로 정주리가 늘 되뇌는 말들을 스스로도 해 본 분들에게 얼마든지 권해드리고 싶다. 결국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든 이름없는 전구가 되든 그렇게 남의 이목을 끌고 못 끌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빛나고 있는가이다. 크든 작든 어떻든 그 내면에 지니고 있는 빛 말이다. 전구의 크기가 아니라 빛의 크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 신경써야 할 것이 아닐까.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 (P.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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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4-13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뿐이다는 말이기도 하군요
이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구해주기를 바라죠
그래도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자신이 바뀌고 나서 도움을 바라야 하겠군요(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지도)

맬컴을 보고 사람들이 달라지기도 하는군요
자신만의 빛을 위해...


희선

ICE-9 2013-04-15 02:21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은 구원을 향한 내면성과 외면성의 대립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하죠. 종교들마저 거기에 있어선 나뉘어지죠. 선종 같은 것은 내면으로의 깊숙한 침잠으로 해탈을 추구하지만 다른 종교들은 오로지 외부의 힘에 의지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죠. 화이트하우스는 진정한 답은 우리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소설을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자는,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의 상징으로써 내면성이 충만한 공간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침대를 소설 무대의 중요한 공간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 싶어요. 리뷰에서는 안 밝혔지만 사실 이창동의 영화 '밀양'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전도연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여정은 구원에 있어서의 외면성에서 내면성으로의 이행이죠. 그렇게 밀양을 보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욱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희선님께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