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작 '에코 파크'로 부터 6개월 후. 종말을 뜻하는 자정의 시각. 해리 보슈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깜깜한 거실에 앉아서 색스폰 소리를 듣고 있다.' 프랭크 모건의 'CITY NIGHTS' 앨범을.(소설은 정확히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이 앨범이 확실할 것이다. 나도 추천하고픈 멋진 음반이다.)



 그런데, 소설의 첫 시작부터 보슈가 프랭크 모건을 듣는 일은 좀처럼 없다. 유별나서 이런 의문이 든다. 왜 마이클 코넬리는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프랭크 모건은 마이클 코넬리에게 중요한 재즈 뮤지션이다. 성공한 작가가 되기 전 힘든 시절, 그 불안과 암울의 시기를 그는 프랭크 모건을 들으면서 견뎌왔다. 그는 '타임'지에서 '찰리 파커의 제자로 마약 중독자가 되어 감옥까지 갔던 과거를 극복하고 30년이 지난 후 다시 녹음할 수 있었던'(이상은 라인업, P 69) 프랭크 모건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프랭크 모건이 되고 싶었다. 힘든 과거를 극복한 생존자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염원으로 그는 프랭크 모건의 음악을 자신이 한창 창조하고 있던 탐정의 사운드 트랙으로 결정한다. 이제 그 탐정은 내내 프랭크 모건과 함께 할 것이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틸 것이다. 동시에 모건과 같이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조지 케이블의 '구슬프지만 희망을 주는 발라드인 '자장가'를 탐정의 주제가로 주었다.(같은 책, 같은 페이지) 보슈는 지금 바로 그 프랭크 모건의 앨범을 듣고 있는 것이다. 생존자의 음악이자 무엇보다 보슈의 분신과도 같은 음악을. 현재 트랙은 조지 케이블의 'ALL BLUES'다.


 그 때, 전화가 온다. 그를 사건 현장으로 부르는 전화다. 혹시 눈치챘는지? 해리 보슈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만한 '로스트 라이트' 이후로 소설은 늘 전화가 오는 것에서 시작했다. '클로저'도 '에코파크'도 모두 그랬다. 다시 경찰로 복직한 시점에 소설의 시작이 늘 걸려 온 전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언제나 그는 수동적으로 호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게 '소환'으로 보인다. 언젠가의 페이퍼에서 해리 보슈는 지금 새로운 시기가 진행 중이며 그것은 속죄의 여정이라고 쓴 바 있다. 전화는 바로 그 속죄를 위한 호출로 보인다. 그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에 대한 참회로써. 그것은 세상이 무시하거나 은폐해 버렸던 '로스트 라이트'를 찾아내는 것으로 완수될 것이다. 같은 전화지만 '혼돈의 도시'에선 받게 되는 분위기가 참 다르다. 자정, 불 꺼진 방, 'ALL BLUES'라는 음악 제목까지 너무도 음울한 상황에서 소환되는 것이다.


 이 변화된 분위기에는 어떤 연유가 있는 것일까? 그 제공은 전작 '에코 파크'에 있었다. 해리 보슈는 다시 한 번 실수와 잘못을 했고 커다란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또 실패했다. 봉쇄된 '에코 파크'는 영원히 지어지지 않을 후회와 죄책감의 성지나 다를 바 없었다. 이제 그는 그 값을 치뤄야 했다. 자정의 전화는 그 소환인 것이다. 6개월 뒤 해리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업무가 바뀌었고 파트너도 달라졌다. 해야 하는 일은 특히 어려워서 해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살인 사건이었고 파트너는 자신과 무려 20살이나 차이나는데다 다른 문화권 출신이었다. 다시 적응해야 했고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그의 삶은 '리셋'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나가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쉰 여섯 살의 그는 늘씬하고 탄탄한 몸매로 지금보다 2~3킬로그램 더 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 흙갈색 눈은 맑고 또렷했고 산마루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도전을 맞닥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보슈는 자기 눈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살인사건 수사의 기본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현관문을 나가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무리 먼 길이라도 기꺼이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럴 능력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어떤 총알도 자기를 맞힐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P. 13)


 조금 과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자신감에 찬 모습이다. 코넬리는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보슈의 영웅다운 면모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함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해리 보슈에게 있어서만큼은 마이클 코넬리는 새디스트이니까. 맞다. 이건 덫이다. 나중에 뼈 아픈 자각을 안기기 위해 놓아둔 치즈 한 조각.  이 장면은 중요하다. 앞으로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시각이다. 소설의 원제는 'THE OVERLOOK'이다.


 OVERLOOK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내려다 보다, 감시하다 그리고 간과하다. 영어 시간이 아닌데도 이 의미를 모두 말하는 것은 이 세 의미 모두가 소설의 중요 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차례로 이야기해 보자. 

 

 OVERLOOK : 1) 내려다 보다.


 소환한 사건은 한 남자가 스키마스크를 쓴 이들에게 권총으로 살해당한 사건이다. 장소는 멀홀랜드 댐 위의 산마루. 바로 가까이에 한 때 마돈나가 소유했다는 저택이 있는 그 곳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바라는 성공한 삶의 성소와도 같다.


 저택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어서 집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에게는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경이로운 장관을 선사할 것이 분명했다. 보슈는 그 인기 여가수가 탑에 올라가 서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P. 17)


 여기, '내려다보다'가 직접 언급된다. 마돈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여가수다. '아메리칸 드림'은 많은 미국인들의 욕망이다. 그걸 나타내려는것일까? 살인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하루에만 족히 200명이 올라와 어슬렁거리는 곳이다. 여기서 마이클 코넬리는 미국인들이 꿈꾸는 욕망의 진짜 모습을 밝힌다. 그건 내려다보기 위해서라는 걸. 모든 것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싶다는 군림의 욕망. 그것이 미국을 지배한다. 마돈나가 그것을 대변한다. 미국은 타인을 이 야경과도 같이 발 아래에 꿇리려는 욕망의 집합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야경. 마돈나는 매일 밤 이것을 보았던 것인가?


 거기서 OVERLOOK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가 발아한다. 바로 '감시하다'의 OVERLOOK이다.

   

  OVERLOOK : 2) 감시하다


 그건 먼저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피해자의 신분증을 살펴보고 있는데 뜻밗의 인물이 나타난다. FBI 특수 요원인 레이철 윌링. '에코파크' 이후 6개월만이다. 보슈는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보슈와 레이철 사이에 로맨스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에코사건'에서 레이철은 보슈에게 단단히 실망했다. 보슈는 그릇된 판단으로 레이철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녀는 그의 과오를 반사시키는 거울이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이 피해자는 감시 대상이라고. 그것도 국가 안보를 이유로. 놀라는 보슈 앞에 피해자가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준다. TLD라는 반지를.



실물은 이렇게 생겼다. TLD에서 D는 DIAMETER로 방사능 계측기를 뜻한다.


 아시다시피 암 치료에는 자주 방사능 물질이 이용된다. 때문에 병원은 그런 방사능 물질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것을 주로 다루는 의학자들이 끼는 반지가 바로 TLD 반지인 것이다. 피해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방사능 물질을 마음만 먹으며 쉽게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다. 다시 말해 방사능 테러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런 테러의 위협 때문에 미국은 TLD 반지를 낀 사람들을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정확히는 감시하고 있다. 때문에 사망자로 보고되자마자 바로 FBI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OVERLOOK이 가진 또 하나의 의미는 발현된다.


 미국이 가진 욕망의 진실을 본 보슈는 이제 미국이 온갖 감시로 얼룩진 세상임을 본다. 테러 방지란 명목으로 미국은 천지사방을 불철주야 감시하고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경찰도 FBI를 감시한다. 그들의 조수 노릇이나 하는 건 사양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한다. 내부든 외부든 예외는 없다. 보슈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핫바지로 만들지 않을까 싶어 FBI에게 날을 세운다. 레이철 윌링도 그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알고보니 피해자는 범인의 협박 때문에 방사능 물질을 밖으로 빼돌려 가지고 온 것이었다. 범인들은 총으로 그를 죽이고 방사능 물질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제 언제 어디서 방사능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토록 긴박하지만 미국의 안전을 책임지는 자들은 혹시 다른 조직이 자기들 몰래 정보를 빼돌리지 않을까만 노심초사한다. 공조는 없다. 다른 조직은 감시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게 감시는 타인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결국 여기서 OVERLOOK이 가진 첫째 의미와 둘째 의미는 연결된다. 오로지 나만 군림하여 타인을 내려다보려는 욕망이 그대로 타인에 대한 감시를 초래한 것이다.


 군림만 하려는 욕망이 거대한 뿌리를 내린 미국에서 타인은 더이상 대화와 협조의 대상이 아니다. 보슈와 FBI 사이에 존재한느 것은 속고 속이는 협잡과 폭력 뿐이다. 둘 다 상대방은 오로지 이겨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결국 OVERLOOK이 가진 마지막 의미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서로에게 군림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만 자신들이 정말 돌아보아야 할 자들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간과다. 뼈아픈 후회를 동반하고야 말 해서는 안되는 잘못.  




 OVERLOOK : 3) 간과하다.


 그들은 놓쳐버린다. 그건 그들이 정말 보아야 할 것이었다. 간과는 보슈가 신참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해줄 때 나타났다.


 30년 전쯤 월셔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어. 여자와 그가 기르던 개가 익사체에서 발견됐지. (P. 119)


 30년 뒤에 어떻게 단서를 찾아 그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통해 선배의 지혜를 들려줄 작정이었으나 애송이라 깔보았던 파트너는 보슈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을 한다. 개는 왜 죽였냐고. 보슈는 당황한다. 거기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 당시에는 개를 왜 죽였는가 하는 의문은 제기되지 않았다.(P. 120)


 그는 간과했던 것이다. 개의 죽음이라고 그 이유 같은 건 무시해버렸다. 보슈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인지 깨닫는다. 그는 사회가 간과해버린 '로스트 라이트'를 되찾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그것이 그의 속죄였다. 하지만 어느새 그 역시 사회가 범했던 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속죄는 사회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이었으나 소설에서 그가 보여주는 경로는 사회와 정확히 똑같았다. 그는 어리석었고 그 때문에 간과했다. 보슈만이라도 보아야 했었는데 남들과 똑같이 무심히 지나쳐버렸다. 이로써 마이클 코넬리는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을 명확히 드러낸다. 우리는 보면서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사실은 눈 뜬 장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보슈에게 느닷없이 닥쳐온 깨달음처럼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렇게 되는가? 애초에 눈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정확히 'THE OVERLOOK'일 뿐이었다. 타인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눈이 아니라 내가 군림하기 위해 내려다보고 혹시 내게 피해가 오지는 않을까 감시만 하는 눈이었다. 눈은 원래 바깥을 보라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 눈이 보는 건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러니 장님과 마찬가지였다. 간과는 당연한 결과였다. FBI가 그랬고 보슈도 그랬다. 성과에 목마른 국토안보부를 이끄는 하들리도 마찬가지였다. 간과했기에 진실을 보지 못했고 어리석게도 계략에 휘둘렸다. 바보들의 우왕좌왕.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간과는 결국 자기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마이클 코넬리는 그 간과, 궁극적으로는 자기 본위적 욕망의 함정을 일러준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위만 보고 가다가는 발 아래 놓인 진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걸. 'THE OVERLOOK'은 부머랭이다. 남을 해치우려 날리겠지만 그건 결국 당신의 뒤통수를 노릴 것이다.


 파트너의 질문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된 보슈는 드디어 이런 말을 내놓는다.


 국민의 안녕과 사회안전은 산마루에 죽어 자빠져 있는 저 남자로부터 시작되는 거야. 우리가 그를 잊으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P. 130)


 이제 그는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줄줄 딸려나오는 기억들. 간과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이미 베트남전에서 경험했음을 알게 된다. 한 마을을 접수하기 위해서 그 아래 땅굴에 숨어있는 베트콩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었다. 지휘관인 대위은 날마다 보슈와 같은 병사들을 내려보냈지만 사상자 수만 늘어났다. 하지만 포기하거나 다른 전략을 취하지 않았다. 간과 때문이었다. 그에겐 오로지 상관의 호감만 보였다. 병사들의 목숨은 보이지 않았다.


 대위는 3군단 지휘부로부터 대책을 마련하라고 날마다 독촉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날마다 늘어가는 사상자 때문에 괴롭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가 가능했지만 3군단 대령의 호감은 대체가 불가능했다.(P. 177)


 그 때, 보슈는 정확히 깨닫는다. '그 전쟁에서 졌다는 것을. 적어도 자신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날, 또 하나를 더 깨닫는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종종 내부의 적과 싸우게 된다는 것을'



보슈가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였을 당시 소속된 부대의 휘장. '열대 번개'라는 번역보다는 '트로픽 라이트닝'으로 번역이 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지명인 '텐 사우전드 팜'은 만 개의 손바닥이라고 하지 않고 그대로 썼기에 더욱 그렇다. 참고로 트로픽 라이트닝은 제25보병 사단의 별명이다. 휘장의 모습 때문에 '일렉트릭 스트로베리'라 부르기도 한다. 벤 스틸러는 이것을 살짝 비틀어 '트로픽 썬더'라는 제목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그 내부의 적이 바로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욕망이었다. 그렇게 뼈져리게 깨달았으면서도 보슈도 결국 내부의 적에게 패배해버렸던 것이다. '에코 파크'에서 자신의 과오를 낳게 만든 것도 이 것이었다. 바로 이 깨달음을 위하여 그는 소환된 것이었다. 그 깨달음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대사 중 하나를 가져온 다음과 같은 보슈의 말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된다.


 "챨리는 파도를 안 타니까.(Charlie don't surf!)"(P. 174)  


 이 대사는 영화에서 서핑광으로 나오는 킬고어 대령이 한 대사다. 그는 서핑을 하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멀쩡하게 잘 있는 베트남인 마을을 헬기 부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바그너의 '발퀴레의 비행' 음악을 배경으로 수많은 베트남 민간인들이 헬기의 기관총에 난사당하고 폭발로 죽는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해변을 차지하냐고 묻자, 킬고어는 저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미국은 서핑을 하지만 베트콩은 서핑을 안 한다고. 대사에서 챨리는 베트콩을 부르는 미군의 은어다.(소설의 주에는 빠져있는데 아무래도 은어다 보니 밝혀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킬고어는 자신의 욕망말고는 다른 모든 것을 간과하는 극한의 장님이다. 이 대사를 인용함으로써 마이클 코넬리는 자기 본위의 욕망이 초래한 간과가 얼마나 큰 비극마저 불러올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마이클 코넬리는 이 소설을 썼던 것이다. 'OVERLOOK'으로 점철된 소설을.


 다시 소환된 해리 보슈가 걸어간 속죄의 여정은 이 'OVERLOOK'을 결연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더이상 내부의 적에 휘둘리지 않고 타인들을 인정하고 자신과 대등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이번에 보슈가 찾아야 할 '로스트 라이트'였다. 그건 소설 후반부 다음과 같은 보슈의 고백에서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배수구를 빠져나가는 물처럼 하루하루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그 검은 수쳇구명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이들도 있고 좀 멀리 있는 이들도 있다. 그 검은 구멍이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빙빙 도는 물이 언제 자기를 움켜쥐고 그 어두운 수쳇구멍 속으로 밀어넣을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중요한 건 맞서 싸우는 거야. 보슈는 혼잣말을 했다. 쉼 없이 버둥거려 보는 거라고. 그 물에 휩쓸리지 않도록 계속 버텨 보는 거야. (P. 267)


 그 물이 내부의 적이며, 'THE OVERLOOK'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멋진 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아니라면 누가 과연 이 정도로 주제로 인도하기 위해 세밀하게 형상화하고 정교하게 배치할 것인가? 마음으로 읽다가도 어느 순간 머리로는 두번 세번 읽게 되는 소설. 그러기에 마이클 코넬리를 좋아하고 해리 보슈와의 동행은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 지금까지 한국판 제목에 별다른 불만은 없었는데 이번 작품만큼은 원제 그대로 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위에서 언급한 페이퍼는 아래의 먼댓글로 달아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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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이클 코넬리의 두 번째 기회, 그 속죄의 여정...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4-07-30 06:43 
    누구에게나 두번째 기회가 있는 법이다. 물론 운이 따라야 한다. 누구는 잡고 누구는 잡지 못한다. 미키 할러는 운이 좋았다. 그는 보슈가 말했듯이, 자신의 죗값에 대해 '탄환의 심판'을 받았으나 다시 살아났으니. 단순히 살아났다는 것만이 아니다. 삶 자체가 변했다. 진정한 구원이 어디에 있는 지를 깨달았고 그를 위한 속죄의 삶이 시작되었다. 해리 보슈도 운이 좋았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거리가 어두운 것은 밤보다 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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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은 마이클 코넬리의 그 많은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스탠드 얼론이다. 그녀의 이름은 캐시 블랙. 2000년에 첫 등장한 그녀는 비록 그녀 자신이 주인공인 속편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뒤 해리 보슈의 '시인의 계곡'이나 미키 할러의 '탄환의 심판'등 다른 작품에서 자주 얼굴을 내밀게 된다. 그렇게 마이클 코넬리는 카메오처럼 그녀를 출연시키는데 거기서 코넬리의 연출 방법이 자못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가 단 한번도 캐시 블랙의 온전한 실체와는 만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그녀의 흔적일 뿐이다. 기억 속의 존재나 머그샷과 같은 기록 속의 존재일 뿐이다. 유일하게 실존하는 캐시 블랙을 만날 수 있는 '시인의 계곡'에서 조차 그녀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캐시 블랙이란 진짜 이름의 온전한 실체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번에 나온 '보이드 문' 밖에는 없다. 그 외는 모두 흔적이거나 위장일 뿐이다. 실재가 아닌 실재의 잔여물들. 그러니까 유령이다. 유령이야 말로 실재를 추정하게 만드는 실재의 잔여물이 아니던가. 단적으로 말해버리자. 마이클 코넬리는 '보이드 문'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인 캐시 블랙을 오로지 유령으로만 출현시키고 있다고.

 

  마이클 코넬리의 세상은 단적으로 버림받은 수컷들이 배회하는 세상이다.

  그 가득한 수컷들의 아귀다툼 가운데 캐시 블랙은 홀연히 유령처럼 출몰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마이클 코넬리는 유일한 여성 주인공을 잔여물로써의 유령으로 만든 것일까? 먼저 이 의문을 풀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풀려야 '보이드 문'에서 마이클 코넬리가 진짜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보이드 문'은 거꾸로 풀어가야 하는 작품이다.

 

  마이클 코넬리에게 유령은 무엇인가? 먼저 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캐시 블랙이 유령이 되었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답의 단서를 우리는 보슈라는 캐릭터를 만드는데 영감을 줬던 중세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하다. 코넬리 기자 시절 그가 앉는 책상 위자 뒷 벽에 늘 붙어 있던 그림으로 '블랙 에코'에서도 나오듯이 보슈란 이름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쾌락의 정원'이란 그림인데 사진은 그 중간 부분, 그러니까 점점 죄악에 물들어가고 있는 현세를 나타내는 그림 중 윗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령이 나온다.

 

  그러니까 저기 하늘을 날고 있는 존재들이 유령인 것이다. 그런데 이 하늘의 색깔은 앞쪽에 있는 천상에 있는 하늘의 색깔과 같다. 이러한 동일함은 여기의 유령 또한 하나의 잔여임을 말해준다. 잔여는 흔적이지만 알고보면 실재의 연장이다. 때문에 우리들은 그 흔적을 통해 실재를 추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잔여들은 일종의 틈새와 같다. 그 찢어진 틈새로 현실이 뒤덮고 있는 장막 너머의 진정한 대안 혹은 구원을 보게 하는 그런 창구인 것이다. 유령은 그런 존재다.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그래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 헤메이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오아시스가 실재함을 말해주는, 그렇게 그들의 확신을 보증하는 존재다.

 

  이는 '보이드 문'에서 캐시 블랙이 새로이 만든 가명이자 '시인의 계곡'에서 해리 보슈에게 나타났을 때의 이름이 '제인 데이비스(Jane Davis)'라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마이클 코넬리가 하도 노골적으로 이름을 지어놓아서 어떻게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제인(Jane)'이란 이름은 원래 'God is gracious!', 즉 '신은 자비롭다'를 뜻하고 '데이비스(Davis)'는 'Son of David', 즉 '다윗의 계승자'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뜻하는 존재가 가지는 이름으로써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이클 코넬리가 일부러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후의 출연이 모두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찾고 있는 구원의 증표임을 뜻한다 마이클 코넬리는 정말로 캐시 블랙을 '쾌락의 정원' 하늘 위를 홀연히 날아다니는 유령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캐시 블랙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캐시 블랙이 어떤 의미의 존재이기에?

  그제서야 우리는 '보이드 문'으로 들어갈 것이 허락된다.

 

  

 

    

  생각해보자. 대관절 마이클 코넬리는 왜 여성 주인공을 가져온 것일까?

  그것도 그냥 여성이 아닌, 엄마를?

 

  그렇다. 엄마다! 이 소설은 엄마가 주인공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해리 보슈를 생각해 보자. 그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그에게 이름을 주었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그는 거친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 살아남기 위한 수컷의 악전고투가 앞에 놓여졌고 죄악 가득한 세상으로 자신을 삼키려드는 '블랙 에코'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형사가 되었다. 그가 형사가 되었던 진짜 이유는 물론 따로 있다. 자신에게 내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엄마가 죽게 된 진상을 알기 위해서이다. 그 진실을 찾음은 세상이 앗아가 버린 엄마를 다시 찾아오는 것과 같다. 그것이 검은 메아리로 부터 해방될 수 있는 진정한 길이었다. 갇혀진 곳에서 메아리는 더욱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메아리로 부터 벗어나려면 비워야 했다. 엄마를 되찾음이란 바로 그것과 같았다. 세상이 덮어버린 어둠의 장막을 찢고 그 틈새로 메아리를 빠져나가게 하여 비우는 것. 그리고 그 텅 빈 공간(void) 안으로 엄마로 상징되는 구원의 빛을 들어오게 하는 것. 형사로서의 해리 보슈의 길은 그런 것이었다. '진실이 너를 자유케 하리라!'란 말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과 같은 길.

 

  여기서 두 가지가 얼른 밝혀진다. 왜 코넬리가 하필 이 작품에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 그리고 제목으로 빈 공간을 뜻하는 '보이드(void)'를 쓴 것인지. 단적으로 그 둘이 연관되기 때문이다. 앞서 왜 코넬리가 캐시 블랙을 유령처럼 만들었는가에 대해 누누히 말했는데 그것도 이 때문이다. '엄마란 존재 = 보이드(void)' 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 작품의 제목은 필연적으로 '보이드 문'이 되어야 했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은 대안의 궁극적 모습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래서 코넬리는 이후의 작품에서 비록 그녀가 구원의 존재이긴 하지만 유령처럼 만들어 그 실체를 지워야했던 것이다. 모든 건 다 연결된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마이클 코넬리를 그저 평범한 스릴러 작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보이드 문'은 보여지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소설이다. 결론처럼 덧붙인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마이클 코넬리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픈 대안의 구현체라고. 그래서 코넬리의 작품 중 사실은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물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덧붙인다.)  

 

  이제 설명이다. 아니, 나만의 견해이므로 변론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버지'라는 것이다.

  동시대의 같은 국적을 가진 작가, 존 하트처럼 마이클 코넬리도 사실은 '아버지'가 핵심이다. 그건 단적으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를 비교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궁극적인 차이점은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미키 할러는 중심에 있지만 해리 보슈는 변방 혹은 경계에 있다. 쉽게 말해 미키 할러는 '인사이더'지만 해리 보슈는 '아웃사이더'다. 이 둘은 사촌인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나나? 이유는 단 하나다. 해리 보슈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로 부터 버려졌기 때문이다. 반면 미키 할러는 아버지가 죽을때까지 내내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렇게 해리 보슈는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축출된 자고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그래서 미키 할러는 아버지의 악습까지도 닮아 그의 복제가 되고 해리 보슈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는다.

 

  결국 아버지다.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들은 따지고 보면 늘 나쁜 아버지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상대하는 자들은 모두 아버지이거나 그 아버지의 복제판이다. 한마디로 마이클 코넬리의 분신들이 맞짱을 뜨고 있는 대상은 '아버지'(라캉적 의미에서 지금 현실 사회의 상징계 질서 전체를 조직하고 떠받치는 주인 기표로써의)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와도 같다. 그런데 독자들이 이걸 못 본단 말이지. 해리 보슈만 해도 모두 6편에 걸쳐 그걸 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스릴러라고만 생각한단 말이지. 어쩌면 마이클 코넬리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기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으며 자신의 소설은 바로 그 나쁜 아버지와 싸우는 것임을 몰라줘서 답답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뜬금없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스탠드 얼론 '보이드 문'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얘기해주마. 도저히 못 알아듣지 못하게!'란 마음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보이드 문'은 설정은 단순해진만큼 의미는 더욱 노골적이 되어 하려는 얘기를 못 볼래야 못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드 문'은 신기하게도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만나는 '탄환의 심판'을 닮았다.

  당신이 만일 그 둘의 협력이 아니라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싶다면 '보이드 문'은 가장 적합한 선택이 될 것이다. 사실 이 '보이드 문'은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과도 같으니까. 어째서냐고? 그건 설정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두 명의 주인공의 설정이 해리 보슈, 미키 할러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 캐시 블랙은 해리 보슈처럼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다. 반면, 캐시 블랙을 뒤쫓는 사립탐정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자다. 잭 카치는 미키 할러만큼이나 아버지를 우상으로 여기며 그의 자리에 서고 싶어한다. 이런 의심도 해 본다. 미키 할러의 원본이 바로 이 잭 카치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쨌든 참 닮아있다. 앞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차이점을 이야기 했는데 그건 그대로 캐시 블랙과 잭 카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하는 일도 똑같다. 해리 보슈가 아웃사이더로서 사회가 정형화시킨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갔듯이, 캐시 블랙 역시도 그러하다. 그녀 역시 절도범으로 아웃사이더이고 오로지 카지노에서 거액을 딴 사람들만 노리는 나름의 신념이랄까 철칙이 있다. 해리 보슈가 비록 형사이긴 하지만 세상이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들추어내어 사실은 세상에 균열을 야기하는 것처럼 캐시 블랙 역시도 숨겨놓은 잉여의 돈을 훔쳐 세상의 질서를 교란한다. 그렇게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일찍 축출된 자들이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교란하니 그 아버지와 똑같은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는 아들들은 그 균열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둘러 봉합할 수 밖에. 그렇게 미키 할러는 진실 보다는 협잡과 은폐로서 아버지의 법질서를 봉합하고 잭 카치 역시도 원래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는 것으로 벌어진 사회의 틈을 얼른 메우려 든다. 그는 돈을 찾기 위해 추적에 나섰으며 절도에 관계된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늘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같다. 이 소설은 그동안 해리 보슈가 해왔던 대로 잭 카치로 대변되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싸우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좀 더 주제를 명확히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 맞서는 대상 역시 보다 쉽게 주제를 드러내기 위하여 변형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캐시 블랙은 여성이 그것도 모자라 엄마가 된 것이다. 소설은 5년전 불의의 사고로 애인을 잃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다행히 가석방되어 인생을 다시금 새롭게 살고 있는 캐시 블랙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현재 자동차 판매원이다. 그것도 운좋게 성공하여 일확천금을 얻은 주로 젊은 백만장자들을 상대로 차를 파는 판매원이다. 그녀가 주로 상대하는 새롭게 사회의 상층부에 편입한 젊은이들은 미키 할러와 같이 닮고싶은 아버지의 자리로 오르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뜻한다. 캐시 블랙이 그들이 더욱 재빠르게 달려갈 수 있도록 자동차를 판매한다 함은 그녀가 이제 벗어나 있었던 아버지 세계로 편입되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그걸 지속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수감 당시 출산한 딸을 입양한 가정이 이제 자기가 못 볼 곳으로 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딸의 곁에 있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전의 그 일을 반복할 생각을 한다. 딸만 포기하면 언제든 세상인 마련한 안정된 자리에 있을 수 있었지만 그걸 내팽개치고 딸을 위해 기꺼이 불안정한 경계 위의 삶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는 해리 보슈와 캐시 블랙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정반대의 행동이다. 보슈와 블랙의 아버지는 책임지기 싫어서 그들을 버렸다. 하지만 블랙은 그 책임을 스스로 떠맡기 위해 오히려 사회가 주는 안정을 버린다. 이로서 분명해진다. 마이클 코넬리가 왜 엄마를 주인공으로 가져왔는지가. 그가 벌이는 아버지와의 싸움에 있어 엄마의 존재란 자신이 싸우고 있는 이유와 그 대안을 아울러 보여줄 최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을 떠맡고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잭 카치의 추적은 사실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즉 양립불가능성 이다. 아버지의 질서 안에 거하면서 엄마로 있을 수는 없다. 말하자면 진정한 엄마가 되려고 한다면 타협의 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캐시 블랙이 딸에게 진정한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중심이 된 사회 자체에서 완전히 떠나든가 아니면 딸을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다. 자기 구원을 위한 대안은 오로지 아버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 그렇게 완전히 비워진 곳에서만 가능하다.

 

 

 

 

 

   제목 '보이드 문'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 근데, 보이드 문이 뭐죠?"

 "점성학적 현상이야.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기지.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달이 다음 별자리로 들어갈 때까지 '보이드 오브 코스' 상태에 있다고 해. 그게 보이드 문이야" (p. 82 ~ 83)

 

  이렇게 '보이드 문'이란 달이 그 어느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완전히 비어 있는 곳에 있는 달. 그것이 바로 '보이드 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캐시 블랙이 진정한 엄마가 되려면 있어야 할 곳이다. '보이드 문'이 무엇인지 캐시 블랙에게 설명해주는 레오는 그 말을 하면서 그 시간에는 절대 절도를 하려는 방에 있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 방이 있는 호텔은 사실 캐시 블랙에게 트라우마의 공간이기도 하다. 같이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그래서 같이 사회 바깥에서 경계 위의 삶을 살았던 애인 맥스가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던 순간 추락해 죽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곳은 꿈이 한 번 좌절된 곳이고 아버지의 질서를 넘어서려던 이카루스의 날개가 한 번 꺾인 곳이다. 그렇게 호텔 쿨리오 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아버지 질서의 중심이다. 그런 곳답게 거기서는 오로지 내려다보기만 한다.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주인 기표가 그렇듯이 '까마귀 둥지'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며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잭 카치 역시 거기에 고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캐시 블랙이 다시 그 쿨리오를 턴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건 아버지 질서 자체와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 쪽에서는 가장 중대한 위반이지만 캐시 블랙에게 있어서는 그로 부터 가장 머나 먼 벗어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녀는 레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보이드 문'이 일어나는 그 때 있지말아야 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구원이 오로지 '보이드 문'에서만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선언 같은 장면 연출이다.

 

 여기까지도 길게 썼다. 하지만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

 

 사실 리뷰에 이런 설명까지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래서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김에 이쯤에서 결말을 맺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자꾸 들지만 그럴 수 없다. 소설의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 그걸 생략한다면 왠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아, '보이드 문'은 정말 훌륭한 소설이다. 마이클 코넬리가 이 정도로 치밀한 작가였나 왠지 혀를 내두르고 있다. 아무튼 그걸 설명해야 한다. 남은 힘을 다시금 짜내보자.

 

   자, 앞에서 '보이드 문'은 타협의 여지가 없음 을 뜻하는 것이라 말했다. 여기엔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하다. 왜 없는가? 지금은 타협과 관용의 중요성을 소리 높여 부르짖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게 얼마든지 대화와 타협 그리고 관용이 가능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마이클 코넬리의 대답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연히 'NO'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마이클 코넬리가 높은 혜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해리 보슈의 번뜩이는 통찰력은 어쩌면 코넬리 자신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왠지 그렇게 짐작된다.

 

   그래, 그런 세계가 있다. 타협과 관용이 가능한 세계. 물흐르듯이 얼마든지 어울려 살 수 있는 세계가.

 

   요 네스뵈는 그러한 세계를 '조용한 사회'라고 불렀다. 물론 비아냥이지만.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그러한 세계를 '무조음의 세계(MONDE ATONE)' 이라 불렀다. 무조음이란 음악용어로 으뜸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무조음의 세계란 뚜렷한 중심이 없는 세계인 것이다. 그렇게 온갖 다수성으로 넘치는 세계. 그 모든 다수성들이 서로 타협과 관용으로 대등하게 어울리고 있는 세계. 그것이 '무조음의 세계'이다. 굉장히 좋게 보이는 세계다. 하지만 요 네스뵈의 말이 비아냥이었듯이 이 바디우의 말 또한 비아냥이다. 진실로 그리되면 좋겠지만 지금의 세계가 무조음인 건 어디까지나 외양에 불과하다는 비난의 말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면 정말 그러하다. 많이도 분화되고 복잡하게 갈라져서 뭔가 뚜렷한 중심이 없다. 거대 이념들은 애시당초 사라졌고 이제는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똑같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혼란이다. 한 끼 밥을 못 먹어 굶는 아이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산업개발이 한창이던 때를 못 벗어난 것 같은데 어느새 TV에서는 동성애자를 비롯 진보된 성담론들이 당당히 나오고 있다. 그렇게 어디는 정말 말도 안되게 시대에 뒤떨어져있고 또 어디는 정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나 싶을 정도로 앞서고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것들이 마구 뒤섞인 시대다. 그 잡탕찌개와도 같은 상황 앞에서 아무 것도 정의내릴 수 없는 시대, 그래서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이건 환영에 불과하다. 정말은 여전히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갈등을 가리기 위하여 사회가 쓰고 있는 은폐 전략인 것이다. 그건 우리들이 바라보는 무조음이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분명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은밀하게 선별과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판결이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렇게 이 세계의 무조음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화하고 있는 조음성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사람들이 거짓 타협과 그로 인한 위안에 만족하고 살 수 있게끔 환영의 무조음을 조율하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마치 마술사가 본래 의도를 감추기 위해 다른 손의 현란한 손동작으로 상대방의 시선을 교란시키듯이...

 

 궁극적으로 아버지란 마술사이다. 그의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 사실은 그가 만들어낸 환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협은 불가능하다. '보이드 문'이야 말로 구원을 위한 절대 공간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이클 코넬리는 마술과 환영을 소설에 가져온 것이다. 아버지 질서를 대변하는 잭 카치의 아버지는 마술사이다. 잭 카치 역시 소소한 마술을 부린다. 그것도 주로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서. 이렇게 단적으로 마술에 의해 지탱되므로 타협이 불가함을 말하기도 하지만 소설 곳곳에 사실 우리가 보는 많은 것이 환영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들어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소설 초반 캐시 블랙이 타고 다니는 차 벅스터는 어떠한가? 왜 그 차에다 마이클 코넬리는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설정을 한 것일까? 거기서 캐시 블랙이 타고다니는 벅스터는 사실 그녀의 차도 아니고 '새 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할부금 미납으로 회수된 차' 라고 굳이 밝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또 캐시 블랙 자체는 어떠한가?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전혀 다른 인물인 것처럼 위장하고 살고 있지 않나?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첫머리부터 그녀는 남에게 본명을 속이고 다른 사람인 것처럼 군다. 마이클 코넬리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인가? 더구나 잭 카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까마귀 둥지를 올려다보며 이런 말을 한다.

 

  잭 카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까마귀 둥지'였다. 카치는 빈센트 그리말디가 지금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리말디가 둥지 위에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노가 문을 연 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 둥지 위에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관례였다.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반드시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말디가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카치는 그 모든 게 이미지 관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교묘한 속임수. 보안에 대한 착각이 보안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P. 166)

 

  소설의 이야기와는 크게 상관없는 그래서 안해도 그만일 말을 이렇게 굳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데 이러한 위장과 착각은 곳곳에 있다. 모두가 남을 속인다. 그리고 모두들 속는다. 남이 만들어낸 환영에 속기도 하지만 어떤 땐 자신이 만든 환영에 스스로 속기도 한다. 소설에서 뭐든 다 알아내는 잭 카치마저도 커다란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음이 드러난다. '보이드 문'은 연속된 거짓말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파노라마다. 진실을 알기란 어렵고 반드시 배신이 뒤따라 붙는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을 것 같았던 무조음의 평온한 세계가 알고보니 그 밑에 도사린 협잡과 배신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막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 질서 자체가 인위적 마술과 같은 환영으로 뒷받침 되고 있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한 것이다. 진실을 알 수도 없으며 배신이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으니 어떻게 관용을 베풀고 타협을 하겠는가? 소설 속에 그 자신이 이리도 잘 형상화한 것처럼 마이클 코넬리는 아버지 질서의 이러한 기만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보이드 문'이야 말로 유일한 구원의 장소임을 캐시 블랙에게 제시한 것이다. 그 빈 허공이 아닌 다른 모든 공간은 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이 같은 주제는 사실 소설 처음에 다 드러난 것이다. 말하자면 거기서 마이클 코넬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정확히 보여준 것이나 같다. 소설의 처음에 캐시 블랙은 한 집을 방문한다. 그 집은 팔려고 내어놓은 집으로 텅 비어있다. 일상의 모든 물건들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는 그 집은 그야말로 아버지 질서가 만들어 놓은 무조음의 세계다. 하지만 텅 비어있다. 실체가 없는 환영의 집인 것이다. 거기에 캐시 블랙은 위장된 차를 타고 위장된 존재로서 위장된 대화를 이어간다. 그게 아버지 질서에 속해 살던 캐시 블랙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처럼 포섭되어 있는 우리 모두의 진실이기도 하다.

 

  집을 나오며 그녀는 이제 '그 수평선을 향해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은 '캐시는 그렇게 마냥 달렸다'로 끝난다. 그게 마이클 코넬리가 이 소설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그는 우리 역시도 얼른 그녀처럼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얼른 우리 자신을 위한 '보이드 문'을 만들어 놓을 것. 이게 소설의 진언이다. 그러면 언젠가 우리 눈을 홀리는 환영의 영사막을 찢고 홀연히 캐시 블랙의 유령이 들어설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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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의 심판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6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상처였다.

 

  오로지 군산복합체의 돈벌이만을 위해서 벌어졌던 그 전쟁은 그 전까지 급속도로 끓어오르던 미국 내의 모든 이상을 향한 움직임에 동결을 가져왔다. 젊은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장으로 끌려가야 했고 살아남은 자들 역시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돌아와야 했다. 60년대의 다채롭게 빛나던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의해 롤링스톤즈의 노래 제목 그대로 'PAINT IT BLACK'이 되고 마이클 코넬리가 '라인업'에서 술회했듯이 해리 보슈를 낳아버린 터널 속 어둠이 되어 버렸다. 보슈는 베트남 전쟁에서 '땅굴쥐'가 됨으로써 어머니의 상실과 더불어 속해버렸던 세상의 어둠 속 그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때로 절망은 그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희망의 발판을 마련한다고 하던가. 그 말 그대로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외부도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없음을 거기서 깨닫고 이제 스스로가 직접 구원을 찾아 나서려 한다. 어둠만이 존재하는 터널 속에 스스로 빛을 가져오는 존재가 되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형사가 되고 자신에게 어둠을 가져다 준 그리고 바로 그 어둠이 뱉어 낸 죽음들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같은 글에서 코넬리는 살인 사건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쨌든 살인사건 현장이란 세상이 뒤집힌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살인 사건 조사란 결국 혼돈과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조사가 아니겠는가? 라고 (라인업, P.75)

 

 그렇게 그는 관찰자요 순례자다. 광막한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와 스스로 경계가 되려는 자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미키 할러.

 그는 변호사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라면 그는 진실을 만들어내는 자다. 그는 그 어떤 진실이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공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진실이란 것 자체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세상이란 것 자체가 온통 거짓말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 (P.11)

 

 

 그래서 그에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린다. 보슈를 어둠으로 몰고 간 돈이 그에겐 진실인 것이다. 계좌에 찍히는 현금의 액수만이 그가 가진 '정의'라는 법전의 전부다. 그렇게 그는 이 소설 1부의 제목 그대로 '밧줄에 묶인 얼간이'로 살았다. 왜 '얼간이'냐고? 결국 그 '돈'에 의해 총을 맞았으니까. 그렇게 그는 그 자신이 믿었던 진실에 의해 보기 좋게 배신을 당했버렸거든.

 

 

  '탄환의 심판'은 '제리'라는 한 변호사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 제리는 1부에서 할러가 돈을 위해서라면 진실이고 뭐고 물 불 안 가리던 관선변호사였던 시절 법정에서 겨룬 검사였다. 그는 할러에게 패했고 결국 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그를 돈 좀 만지는 변호사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바로 할러였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할러는 흡혈귀였다. 정의를 수호하던 검사를 돈만 수호하는 자신의 동류로 만들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제리의 시작은 할러의 시작과 같았다. 그 역시 돈만 수호하던 변호사였던 아버지에 의해 그런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러와 제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할러의 관계의 복제이고 결국 제리는 할러인 것이다. 그렇게 둘은 도플갱어다. 제리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수임된 안건을 할러가 유산처럼 물려받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제리가 왜 살해당했느냐가 주가 되는 '탄환의 심판'에서 할러가 제리의 죽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대로 전작에서 자신이 (상징적으로)죽어야 했던 그 이유를 밝히는 과정과도 같다. 단적으로 부활한 할러가 자신의 죽음을 다시 조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영화 '킬빌'에서 했던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예수의 부활편' 같은 것이다.

 

  보슈는 진실을 찾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순례를 하지만 할러는 자신의 죽음을 반복한다.

 

  정확히 이것은 보슈의 원래 모델 15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히에로니머스 보슈가 그렸던 그리고 코넬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 자신의 탐정이 바로 그 이름을 가지게 만들었던 그림 '쾌락의 3부작'의 구도와 같다.

 

  보슈가 가장 오른쪽의 지옥도에 속한다면 할러는 그 가운데, 두번째 화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슈와 할러가 각각 하나는 진실을 찾는 자요 다른 하나는 진실을 만드는 자이기 때문이다. 보슈가 진실을 찾는 자가 된 것은 그 어둠으로 떨어지는 데 있어서 그 스스로에게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당한 자다. 어머니가 살해 당함과 동시에 내던져졌으니까. 그러므로 그는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다. 아니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저 바깥에, 어딘가에 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자가 된다. 미노타우르스를 찾아 미궁을 헤메는 테세우스와도 같이. 하데스에게 끌려간 에우리디케를 찾아 내려가는 오르페우스와도 같이. 그렇게 진실을 찾는 자는 코넬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관찰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적으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지옥이란 보슈에게 바로 그 객체이며 그래서 보슈의 우주는 바로 지옥이 된다. 하지만 할러는 그와 다르다. 할러의 비극은 오로지 할러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세계가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습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 오로지 주체 하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관찰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그가 하고 있는 생각이 혹은 일이 옳은지 그른지 되새기는 것 뿐이다. 그에겐 반복만이 전부다. 중세의 지배적 가치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천국, 연옥, 지옥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아마도 쾌락의 정원 3부작 역시도 어쩌면 이 구도에 그대로 들어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할러는 연옥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만한 죄를 짓시 않은 자는 연옥(림보)에 갇힌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내내 자신이 저질렀던 결국 천국으로 가지 못하게 만든 죄를 영겁에 걸쳐 반복하면서 상처받고 뉘우치게 된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소설 '탄환의 심판'은 정확히 할러가 거기에 속해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탄환의 심판'은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의 할러의 여정과 참으로 유사하지 않은가?

 

  그렇게 이제 보슈와 할러는 같은 라인에 선다.

 

 사실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서 할러가 즐겨들었던 '2-PAC'의 'TO LIVE AND DIE IN LA'의 가사처럼 로스엔젤레스와 베트남 전장은 그리 다르지 않다. 로스엔젤레스의 삶 역시도 이 소설 미키 할러의 첫 독백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장만큼이나 혼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일으켰던 전쟁에서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했던 어린 병사들만큼이나 LA 역시 돈 때문에 죽어나가는 이들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다. 제리와 할러 역시도 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머리를 관통하는 총알에 대한 공포는 그대로 LA에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이러한 LA 의미는 할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난다.(수트케이스 시티는 2장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로고 때문에 가방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수트케이스 시티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자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는 타지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아무도 진정한 의미의 닻을 내리지 않는 곳이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 꿈에 이끌린 사람들, 악몽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오는 곳. 1천2백만 명의 시민들은 모두 필요하다면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유적으로도 문자 그대로도 LA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여행 가방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서(P.83)

 

 

  이러한 LA에 대한 시선은 그대로 베트남에 대한 시선과 닮아 보이지 않는가? LA와 베트남의 유사성은 비단 공간적인 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일 둘이 비슷하다면 베트남을 초래한 미국이나 현재의 LA를 초래한 미국이나 같다는 것이며 그건 보슈에게 어둠을 안겼을 때의 미국이나 할러에게 상징적 죽음을 가져다 준 지금의 미국이나 똑같다는 그렇게 시간적으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만일 그렇다면 보슈는 여전히 그 땅을, 그리고 그 때를 떠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베트남의 '땅굴 쥐'라는 지하에서 LA의 형사라는 지상으로의 삶의 전이는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걸어 나온 자를 형상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 할러가 '수트케이스 시티'로 재정의되는 LA로 다시 돌아오는 것과 또 닮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코넬리의 의도는 여기서 명백해진다. 즉 그는 보슈에게 두번째의 기회를 주었듯이 할러에게도 역시 그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보슈와 할러는 서로 만나야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바로 보슈가 할러에게 자기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장면이다. 보슈는 자기가 듣고 있는 뮤지션이 프랭크 모건이라고 말해준다. '라인업'에 실린 글에 의하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감을 준 음악가였다. 코넬리는 말한다.

 

 "내 탐정은 프랭크 모건 처럼 생존자로서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극복하는 남자여야 했다.(라인업, P.69)"

 

  말하자면 프랭크 모건은 보슈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코넬리 자신도 작품을 쓸 때는 꼭 프랭크 모건을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프랭크 모건은 코넬리가 작품 전체에 걸쳐 구현해내려는 우주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독자들이 가장 반대할만한 캐릭터를 창조하기 원했던 코넬리가 그 이유로 만들어낸 할러는 바로 거기에서 코넬리의 우주로 초대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도 같다. 그런데 할러 역시도 그 뮤지선을 알고 있다고 한다. 어릴때 모건이 아버지의 의뢰인 중 하나였다고. 아마도 그 유년 기억의 소환은 코넬리가 초대한 것에 대한 기꺼운 응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슈와 할러는 동반자가 된다. 이는 다른 면에서도 확인되는데 할러가 소원했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슈 역시도 2009에 나온 '9 DRAGONS'에선 태어난 지 몰랐던 딸을 찾게 된다고 한다. 둘이 결국은 동반자라는 사실에 이 보다 더 결정적인 증거가 또 있을까?)

 

  지금껏 같은 산에 살면서도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지만 이제는 같은 정상을 추구하기 때문에. 보슈는 순례를 통해 할러는 반추를 통해 둘 모두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거짓말에 더 이상 오염될 수 없는 밝고도 분명한 진실, 즉 말하자면 쾌락의 정원 3부작중 가장 왼 편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가고자하기 때문에 말이다. 어둠이 없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곳. 말 그대로  'THE BRASS VERDICT'의 세상으로. (BRASS는 소설에서 보슈의 말처럼 총알이란 뜻도 있지만 '녹슬지 않는 황동'을 의미하기도 하니까.)

 

  거기서 보슈는 '엔젤스 플라이트'에서 성냥갑에 적혀 있던 '내면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고 할러는 5부의 제목 처럼 'THE BRASS VERDICT'의 근본적 의미인 '마지막 평결'을 얻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베란다에 남아 도시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도시를 가로지르며 움직였다.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걸러져서 저 위의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갔다. 아름답지만 아주 멀어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구름. 다시는 보슈를 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내가 산의 양편을 하나씩 차지하고 그냥 이대로 살아갈 것만 같은 느낌.(P. 550)

 

 

 아마도 우리가 코넬리의 작품에 열광하는 건 그것이 그저 읽는 재미만을 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적 구성의 완벽함, 놀라운 반전 등이 물론 한 몫을 하긴 하겠지만 보슈와 할러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들의 삶이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보슈는 여전히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진실을 찾아 헤메이고 할러는 마지막의 저 독백 처럼 결코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구름(아마도 이것은 삶에 있어 종국적인 의미라는 'THE BRASS VERDICT' 가진 또 하나의 의미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을 쫓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우리도 내내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보슈와 할러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떤 거대한 세력이 앞을 막아도 배에 총알을 빵빵 맞아도 그들의 시도는, 추적은 포기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아마도 응원을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처럼 세상의 거대한 벽을 느낄 때마다 안정이란 유혹속에 쉽게 자신의 신념을 포기할 때 우리는 종종 원하지 않았던가? 이 모든 왜소함과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누군가 자신만의 신념으로 세상과 대적하는 살아있는 모범이 되어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보슈에게서 그것을 보았고(아마도 이제는 할러에게서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응원하게 되었을 것이고 또 계속 그들의 따라 걷게 되었을 것이다. 보슈가(그리고 이제 할러도) 우리들이 치뤄야 할 싸움을 대신해서 혹은 미리 치뤄주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물론 코넬리는 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 되길 원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마도 그래서 이들은 그 어느 캐릭터 보다 생생하게 빚어졌을 것이다. 읽다보면 분명히 느껴진다. 코넬리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공들여 형상화 시키고 있는지. 그의 말투, 몸짓, 등장하는 장면 하나 하나마다 말이다. 할러가 헐리우드에서 잘 나가는 의뢰인 엘리엇에게 이제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하여 엘리엇의 개인 사무실이 아니라 중립적인 회의실에서 만날 것을 강요하는 건 얼마나 디테일한 묘사인가? 코넬리는 이 모든 인물들이 그저 텍스트 상의 가상이 아니라 실제 우리들의 곁에서 호흡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여겨지길 원한다. 왜? 여기에 하나의 진심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변하지 않는, 바래지 않는 종국적인 진실인 'THE BRASS VERDICT'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그건 소설에서 할러에게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바로 자신의 새로운 운전기사가 된 패트릭 헨슨과의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할러는 그 자신의 믿음과 본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 없이 어려움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다. 패트릭이 그 까닭을 묻자 할러는 이렇게 말한다.

 

 "나도 잘 몰라, 패트릭. 하지만 내가 자네를 돕는 게 나 자신을 돕는 일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

 

  그 전에 할러는 이런 생각을 했다.

 

  지난 48시간 동안 새로 맡게 된 사건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유혹을 느끼는 것이, 역이 내게 줄 수 있는 포근한 세계로 가고 싶은 욕망이 느껴졌다. 약은 지금 내가 서 있는 곳과 벽돌담 같은 현실 사이에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 공간을 점점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이었다. 어쩌면 패트릭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았다.(P. 287)

 

  코넬리가 말한대로 자신의 캐릭터가 프랭크 모건 처럼 과거와 싸우는 인물이기를 원한다면 할러가 두려워하는 약은 돈 밖에 몰랐던, 그래서 죽음을 초래한 예전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는 세상과 섞일 때 마다 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 과거란 전부인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듯이 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는 일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죽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미지 역시 코넬리는 고정된 공간으로 표현한다. 마치 이대로 정지하면 죽는다는 듯이. 그래서 그는 죽지 않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오로지 자신에게 이익일 돌아올 경우에만 희생을 지불하던 자신을 버리듯이 아무 까닭없이 곤경에 빠진 패트릭을 돕는 것이다. 거기다 그를 정처없이 내내 떠돌아다니게 할 링컨차의 운전기사로까지 고용한다.(이건 내내 탐문을 위해 떠돌아다녀야 할 보슈의 또 얼마나 비슷한가?) 그런 패트릭이 운전기사를 맡는 건 또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인가? 그렇게 패트릭은 내내 할러를 움직여갈 것이다. 그렇게 할러를 살려나갈 것이다. 이 모든 코넬리의 정교한 세팅 속에서 드러나는 목소리는 단 하나다. 내면의 안식을 가져다 줄 변하지 않을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머리로만 꿈꾸지 말고 적어도 행동을 하라! 그 것이다. 보슈 처럼 결국은 타인을 살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할러 처럼 자그마한 것이라도 타인을 도와주라는 것이다. 바로 그 행위가 그게 언제가 되었든 결국엔 원하는 그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이 보슈와 할러의 기꺼운 동지가 되기로 작정했다면 아마도 이런 식의 진심에 감응한 결과라고... 그래서 우리는 응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 주기를... 마치 보슈와 할러가 희망이란 신기루에 몇 번이나 속아가면서 정처없이 헤메고 있는 사막 위를 우리를 대신 업고 가기라도 하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란 한 철학자는 무엇보다도 큰 이 세상의 비극은 우리를 인도해 줄 그 어떤 별자리도 없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루카치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보슈와 할러를 가리켜 보이며 말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당신의 돈을 걸어라, 몽땅! 그들은 영원히 지지 않는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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