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착각일 뿐이다 - 과학자의 언어로 말하는 영성과 자아
샘 해리스 지음, 유자화 옮김 / 시공사 / 2017년 4월
평점 :
품절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못지 않게 유명한 무신론자 과학자가 또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샘 해리스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샘 해리스의 책을 '종교의 종말' 빼고는 다 읽었는데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2014년에 나온 것으로 2012년에 나온 '자유 의지는 없다'에 바로 뒤이은 저작이다. 샘 해리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은 두 가지 지적 자극 때문이다. 하나는 익숙한 것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게 하여 그 본질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것과 끊임없는 회의와 의심으로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던, 그렇지만 다 안다고 여겼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다듬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전작에서 '자유 의지'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박했던 그가 이번엔 '자아'가 착각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과 근거가 담긴 책이 바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이다. 원제는 'WAKING UP'. 한국어 제목 보다는 원제가 이 책이 말하는 것에 더 적합하다. 정말로 이 책은 '깨어남'이라는 원제 그대로 '영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얼른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다. 보통은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내적인 도정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샘 해리스의 영성도 이와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 없이도 그런 영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으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오로지 당신에게만 명백한) 사실뿐이다.(p. 79)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영성'으로 그는 영성이 무엇보다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없더라고 영적 경험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경험을 종교 체험으로 간주하고 종교를 벗어난 것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경험을 종교적 교리의 렌즈로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는 탓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 체험을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절대 근거 비슷하게 여기기까지 하는데 실제 영적 경험에는 그들의 전통적 믿음을 지지하는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그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착각(p. 21)이라고. 뇌의 미로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르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맞추어 자신이 말하는 영성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환영을 반복해서 잘라내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굳이 신이나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자유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과학으로 도덕이 가능하듯. 역시 영성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성의 모범은 무엇보다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영성 방법은 과학자의 것과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험주의다. 불교의 가르침도, 과학자의 연구도 모두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험을 매우 중시한다. 바로 이것이 왜 '나'가 착각이며 환영에 지나지 않는가에 중대한 근거가 된다. 이것은 2장, '의식'에 가서 본격적으로 설명된다. 의식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잘 보여줬듯이, 자아의 등뼈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나'를 느끼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대로 외부에 있던 영혼의 침입일까?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변화일까? 샘 해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식의 탄생은 조직화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원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 바로 그 원자의 집합이 존재하는 경험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성찰해보아야 할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이다.(p. 75)
그가 이토록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실체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경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의식에 대해 뇌를 통해 밝혀진 것은 뭐란 말인가? UCLA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인지 신경과학자인 그는 답한다. 그것은 의식 자체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식의 내용을 찾은 것 뿐으로 현재까지 뇌를 통한 의식의 연구는 의식 자체와 의식 내용 간의 구분을 짓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p. 85) 그리고 두뇌가 결코 '나'라는 의식의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로저 스페리가 발견한 '분할뇌'를 통해 낱낱이 밝힌다. 분할뇌 사례는 두 가지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는 뇌의 좌우반구가 고도의 기능적 특수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두뇌 자체가 정보의 인식과 행위 의도 그리고 의식 경험 모두에 있어서 분리가 가능하니, 서로 다르게 활동하는 두뇌의 부분들을 두고 하나의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나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별개의 의식을 포함하여 하나의 '나'라는 의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근거란 경험밖에 없게 된다.(그러므로 제목이 말하는 착각의 대상은 '나'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실재에 대한 착각이다. 있는 건 다만 '경험'뿐이다. 이 경험주의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과도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 같다.)
3장 '자아'는 바로 이러한 나를 나로 여기게 만드는 경험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의식이 경험이라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둘이다. 하나는 신체적 연속성의 경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연속성의 경험. 그런데 전자는 후자에 부수적이다. 정신적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이 '경험으로써의 자아'가 왜 우리의 전부인지에 대해 논증한다. 이것을 긍정하게 되면 왜 샘 해리스가 신이나 종교 없이도 영성이 얼마든지 가능한지 또 어떻게 과학적으로도 가능한지 이해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자아가 단지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험의 양태를 스스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원효 대사가 말한 '일체유심조'다. 샘 해리스의 영성은 원효 대사의 것과 많이 닮았다. 그가 왜 불교적 영성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런 식으로 4장, '명상'에서는 영성의 구체적 방법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과 결부되어 설명된다. 알고 보니 샘 해리스는 이런 쪽의 경험이 아주 많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계에 안 가 본 데가 없으며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 오랜 구도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그의 말은 단호하며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으로 '구루, 죽음, 약물'이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서는 임사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 그 방면에 있어 최근 아주 유명해진 책인 이븐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대해 아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1위를 무려 52주나 했다. 그만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발간되었는데, 아주 많은 이들이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이 그만한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뇌를 전문으로 하는 신경외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를 수술한 전문의마저 그의 두뇌가 완전히 정지했다고 증언했기에 저자의 임사 체험은 더욱 실제로 받아들여졌고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샘 해리스는 이 책에서 왜 그 책이 실은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공한 증거는 잘못되었고 과학과 무관하다고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읽었고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혹시 진짜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놀라며 읽었던 터라 샘 해리스의 반박이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다. 근거가 설득력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가 이븐 알렉산더에 대해 논박하는 것은 그 역시 임사 체험 못지 않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덮어놓고 믿지는 않았다.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류 가능성이 다분한 것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여기서 이 책의 진짜 목적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샘 해리스가 이븐 알렉산더에 반대하며 취하는 태도가 실은 영성을 통해 체화시키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깨달음은 내 의지를 신이나 종교에 의탁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기대어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약물과 같은 외부적인 힘을 매개로 이루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비판과 회의가 생생하게 활동하는 이성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지금 내게 찾아온 경험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석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 그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자아의 망집을 허물고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닿고자 하는 영성의 도정이다.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과 유사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p. 430)
샘 해리스도 같은 것을 두려워 한다. 이성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을 막는 모든 것들을, 그저 모든 것이 다 결론이 난 것처럼 달리 보고 생각하는 움직임들을 꼭꼭 자기 아래 가두는 모든 것들을. 부패된 지성이 뿜어대는 악취에 선량한 이성들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자유 의지'나 '자아'처럼 현재 마치 종착역처럼 되어버린 개념들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성을 단 한 단어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자유라고.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자유 말이다. 나는 샘 해리스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 전부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