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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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의 함에 가장 먼저 던져지는 건 패배의 기억이다. 

 특히나 그 주체가 패권을 가진 국가라면.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치를 때, 그들은 북 베트남을 얕잡아 보았다. 국력의 수준이 골리앗과 다윗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랬기애 패전은 더욱 쓰라린 상처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서둘러 잊고자 했다. 애써 없던 일로 치부하고 미래만 바라보기로 했다. 경마장의 말처럼 그저 앞만보고 질주하기.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치부하면서. 이것이 배트남 패전 이후의 미국 분위기였다.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로드워크'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첫 문장이 그걸 잘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은 끝났고 미국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p. 11)


 주인공은 도스 바튼.

 '블루 리본'이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그는 현재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자신의 직장도, 집도 옮겨야 할 상황에 빠진 것이다. 그 둘 모두는 그가 정말 사랑한 것이었다. 물론 회사는 지금 다른 사람에 넘어가 오직 자본의 이윤만 추구하는 속된 곳이 되어버렸지만. 과거의 회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직원을 부하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동료로 여겼던 사장이 운영했던 그곳은 인간미로 넘치던 공간이었다. 그건 회사만이 아니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마을 또한 누구 집에 숫가락이 몇 개인지 다 알 정도로 친하게 지냈고 이웃 사이의 다정함이 넘실거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 모두가 변했다. 회사는 돈에 팔렸고 마을은 도로 확장 공사로 이제 지도에서 지워지려 한다. 바튼이 아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마을에 남은 건 오직 바튼 집 하나 뿐이다. 그러나 바튼은 옮길 마음이 없다. 그 집은 그에게 너무나 소중한 곳이기 때문이다. 처음 가정을 이루어 온갖 애환의 기억이 긴 두루마리처럼 집 전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뇌종양으로 어이없이 이별하고만 아들의 추억이 뿌리내린 장소인 것이다. 그는 그걸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집을 옮기는 건 죽은 아들과의 인연을 송두리째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그를 주위의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쇼핑몰에서 만난 부하 직원 비니가 바튼에게 말한 것처럼 다들 그가 미쳤다고 여길 뿐이다. 심지어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아내 매리조차도.


 매리는 말한다. '과거애 발목 잡혀선 안된다'고. 

 그는 퇴거 기한이 코 앞까지 닥쳐왔는데도 이사할 생각을 하지 않는 남편을 떠나면서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그는 바튼에게 말한다. 이제 자신은 과거에서 자유로워졌고 새 삶을 살 것이라고. 그녀는 바튼에게도 그러라고 말한다. 홀로 된 바튼은 실직까지 당하여 매일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딱 두 가지다. 하나는 그걸 장만하기 위하여 아내와 엄청 노력했던 추억이 서려 있는 테이블 TV로 오래된 옛날 영화를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일 밤마다 자동차를 몰고 나가 다른 차가 아무리 클랙션을 울려도 상관하지 않고 제한 속도를 훨씬 초과하여 도로를 폭주하는 것이다. 이건 그대로 그의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갈등 상황을 비유하고 있다.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고 싶지만 한 편으론 자신을 오롯이 삼켜버린 과거의 비극적인 기억에서 빠져나와 새롭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도 안다. 스스로 화염병을 만들어 공사 현장을 붙태우면서까지 저항해 보지만 그 모든 몸부림 또한 바다에 빈 병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하다는 것만 되새긴다.




 그런 그 앞에 두 명의 여자가 나타난다. 

 하나는 밤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도와준 히치하이커 소녀이고 다른 하나는 슈퍼마켓에서 보게 된 한 여인이다. 히치하이커 소녀, 올리비아도 바튼처럼 비루한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안주하지 않고 어딘가에 다른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으로 라스베이거스로 가려한다. 그 곳이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며 거기에서도 긍정적인 것을 찾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튼은 그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았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르게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갖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대견하게 여기고 기꺼이 많은 도움을 주려 한다. 어쩌면 그녀를 통해 밤마다 고속도로를 폭주족처럼 달리면서도 여전히 집으로 돌아오고야마는, 그렇게 이루지 못하는 꿈을 대리충족 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스베이거스에서 올리비아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고 바튼은 또 한 번의 씁쓸함만 더 맛볼 뿐이다. 슈퍼마켓에서 본 여자의 이름은 모른다. 그녀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쓰려져 그대로 죽어버렸다.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다만 죽음이었다. 바튼은 그 여자의 죽음에서 삶을 감싸고 있는 허무의 심연을 본다. 자신이 과거에 함몰되어 있든, 내일을 향해 변화를 향유하든 그 무엇을 선택해도 그대로 무채색의 암흑으로 칠해버릴 공허를.


 그래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미를 남기려 한다. 

 어차피 언제든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렉킹볼을 맞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것에 머리가 깨어지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 자기 존재의 증명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 증명을 위해 과거를 택한다. 남들이 기피하는 과거에 나서서 발목을 내어주고 자신과 같은 자들을 대변하는 존재가 되려 한다. 한 곳만 보고 달려가는 이들은 결코 보지 않는 이들을 위해 자신을 산화해서라도 그들을 보게 만드리라 작정한다. 바튼은 그렇게 성장하고 자신의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이러한 바튼의 발걸음은 동시에 상처를 헤아리기 보다는 어설픈 봉합으로 서둘러 잊어버리기에 급급한 미국에게 강한 비판이 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비극을 양산한다. 참전한 이들은 누구든 영혼을 깊이 옥죄는 고통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이들은 집이란 곳이 정말 필요하다. 그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패전 후의 미국은 그렇게 해주지 못했다. 발전이란 환영을 위해 도로 확장 공사로 있던 집들도 없애버리고 그들을 더욱 올리비아와 같은 집 없는 떠돌이 히치하이커로 만들었을 뿐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올리비아는 그런 미국의 훗날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절망과 환멸의 계속된 집적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바튼은 최후의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이 남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다들 스스로 되새길 수 있도록.


 이처럼 스티븐 킹의 '로드워크'는 패전 후 미국인 영혼에 깊은 탐침을 드리우는 작품이다. 

 가장 비판적이지만 또 가장 사려깊게 오늘의 미국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모색한다. 1983년에 나온 '부적'은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로드워크'는 1981년에 발표되었다. '부적'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닌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 킹을 그저 선정적인 소재로 재밌는 작품을 쓰는 작가로만 여긴다. 그런 이들에게 '로드워크'는 결코 거기에만 그치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부적'과 더불어 '로드워크'는 그가 얼마나 동시대의 문제에 민감하여 그것을 자신의 작품으로 대화하기를 애쓰는가를 감응하게 하여 그가 여전히 거장의 반열에 있는 이유를 짐작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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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1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나라나 안 좋은 건 빨리 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듯해요 어떤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쟁은 더 그렇겠습니다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한번이라도 겪으면 힘들 듯합니다 바튼은 아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집을 떠나지 않는군요 그런 일은 한국에도 있었을 법하기도 하네요

스티븐 킹이 다른 이름으로 낸 소설이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