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오파드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8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10월
평점 :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본 욕망에 비추어 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을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해야 겠다.
나는 내가 증오에 대해서도
그만큼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 로버트 프로스트, 불과 얼음 -
'레오파드'는 '스노우맨'에 뒤이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여덟번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문득 떠올렸던 것이 바로 로버트 프루스트의 '불과 얼음'이라는 시였습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차디찬 눈의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스노우맨' 표지와 화산의 이글거리는 용암의 열기를 재현한 듯 보이는 '레오파드'의 표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그 시가 생각났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다를까 '스노우맨'과 '레오파드'는 정말 시 그대로였거든요. 그러니까 차디찬 증오가 연쇄살인을 낳았던 '스노우맨'이 뼛속까지 얼어버릴 정도의 냉기를 지닌 얼음이었다면 뜨거운 욕망에서 비롯된 연쇄살인을 보여주는 '레오파드'는 소설의 마지막 배경처럼 그야말로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불길이었으니까요. 물론 요 네스뵈가 이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만, 얼음처럼 차가운 증오의 '스노우맨'과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욕망의 '레오파드'는 그대로 로버트 프로스트의 세상의 종말에 대한 견해와 같아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레오파드'가 어떤 작품인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레오파드는 한 마디로, 제 몸까지 불살라버릴 정도로 뜨거운 욕망들을 지닌 수컷들이 맹렬하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작품입니다. 그 내뿜는 열기가 너무도 강해서 어느 순간 읽고 있는 마음마저 데어버리게 할 정도죠.
전작인 '스노우맨'처럼 한 단어로 된 간단한 제목이지만 사실 이 단어만큼 요 네스뵈가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을 제대로 담아낸 말은 또 없을 것 같네요. 왜나하면 무엇보다 '레오파드', 즉 표범이란 동물의 습성 때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붓다가 했다는 말이지요. 이 말처럼 사는 동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레오파드'입니다. 혹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서 레오파드를 보게 되시면 한 번 눈여겨 봐 보십시요. 그러면 알게되실 겁니다. 레오파드는 철저하게 혼자 있다는 것을. 그는 고립의 동물입니다. 하지만 고독을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영역 내에 다른 이가 있는 걸 못견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 자신과 같은 종족이 함께 머무르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설마 새끼라 하더라도 그게 자신의 새끼가 아니면 그대로 죽여버립니다. 발정기가 되어 자신이 암컷과 교접을 해야 할 땐, 혹시 암컷이 다른 표범의 새끼를 기르고 있다면 일단 그 새끼부터 죽여놓고 암컷과 교접합니다. 그 정도로 철두철미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문자 그대로의 동물인 것이죠.
한 마디로 레오파드는 공존을 모르는 동물입니다. 요 네스뵈는 분명 그 때문에 레오파드를 제목으로 가져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해리 홀레가 싸워야 하는 적들은 모두 레오파드와 똑같이 타자와의 공존을 모르는, 아니 오히려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존재들이 홀로 존재할 영역 확보를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홍콩에서도 노르웨이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이 수컷들의 인정사정없는 맹렬한 아귀다툼은 '월드와이드'하게 펼쳐집니다. 해리 홀레는 그 한 가운데를 관통해 나가야 하는 것이죠.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저는 늘 해리 홀레가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 갇혔던 테세우스를 건져낸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생각했습니다.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이 요 네스뵈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단적인 비유라면 테세우스는 언제 미노타우르스에게 먹힐지 모르는 미궁에 갇힌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며 해리 홀레는 바로 그 미궁으로 부터 우리의 존재를 구원해줄 길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대안의 빛과도 같은 아리아드네의 실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번에 해리 홀레가 우리보다 앞서서 싸워나가는 미노타우르스는 어떤 존재일까요? 저는 이번 '레오파드'가 바로 앞에 나왔던 '스노우맨' 보다 그 공간적 무대가 좀 더 '월드와이드' 즉 세계적으로 확장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공간적 무대는 앞서도 말했듯, 자신 이외엔 그 어떤 존재의 공존도 허락하지 않는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그래서 이건 하나의 은유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 똑같이 전세계에 뻗쳐있으며 타자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은유 말이죠. 네, 바로 신자유주의 입니다. '레오파드'란 다름아닌 신자유주의를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죠.
해리 홀레는 바로 그 신자유주의라는 미노타우르스와 이 소설에서 전면전을 치르는 것입니다. 피날레의 장면을 보자면 전면전이라 할 수 밖에 없어요.
세세하게 설명하면 스포일러과 될지도 모르니 그러기 보단 앞서 해왔던 대로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을 들어 그걸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요 네스뵈가 정말 치밀한 작가라는 것은 바로 이 공간을 소설에 가져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냐구요? 바로 아프리카의 '콩고' 입니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고 있는 니라공고 활화산이 있는 나라, 콩고. 그 니라공고에서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이 펼쳐지지요. 그런데 요 네스뵈는 왜 하필이면 이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것일까요? 물론 그건 니라공고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큰 이유는 콩고가 가진 역사 때문입니다. 콩고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면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콩고도 한 때 그야말로 레오파드의 영토였음을 말이죠.
아시고 계시는지요? 콩고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가 오직 한 사람의 개인 사유지가 되었었던 과거를 말이죠. 그랬습니다. 콩고는 한 때 나라 전체가 한 사람의 소유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입니다.
1855년, 그는 콩고를 자신의 사유지로 선언했습니다. 그 선언으로 콩고의 전 국토는 그의 사유지가 되고 콩고에 있는 자원은 물론 살고 있던 주민들까지 모두 그의 개인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레오파드의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소설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나 레오파드를 가져온 이유가 그와 같은 습성 때문이라고 해석했던 것은 요 네스뵈가 이런 과거를 가진 콩고를 소설의 무대로 가져온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레오폴드 2세는 그야말로 의인화된 레오파드가 아닌가요? 어쩐지 레오폴드, 레오파드 그 이름 역시도 비슷하네요. '스노우맨'을 읽어보셨으면 느끼셨겠지만 요 네스뵈는 소설의 표면 보다는 얼른 드러나지 않는 비유와 상징의 영역인 이면에서 소설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인물의 관계든, 공간의 설정이든 주제의 보다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치밀한 계산 하에 배치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오파드'는 그러한 배치가 보다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해리 홀레가 싸워서 대안을 쟁취해야 하는 대상이 거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바로 그 대상이니까요. 여기서 요 네스뵈가 콩고를 가져온 보다 진정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건 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신자유주의를 이대로 계속 방치될경우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가장 극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식으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종언'의 모습인 것이죠. 소설 속에서 콩고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인 '세상의 끝'만 봐도 요 네스뵈가 바로 그것을 두고 콩고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죠.
니라 공고 화산의 모습 - 그야말로 세상의 끝 모습이 아닌가요?
해리 홀레는 지금 그러한 콩고의 도래를 막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지금 '월드와이드'한 상태입니다. 이 말은 노르웨이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죠. 전작 스노우맨이 그랬습니다.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으로 상징되는 노르웨이를 침공한 신자유주의와 싸웠습니다. 단적으로 요 네스뵈는 지금의 노르웨이를 아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노르웨이 역시도 레오폴드 2세 치하의 콩고가 되어버릴지 모른다.'하고 말이죠. 그런 근심은 소설 속 해리 홀레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오슬로도 용암 위에 세워진 도시잖아.'
아니나 다를까 해리 홀레는 다시 돌아온 노르웨이에서 타자와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을 몰아내려는 레오파드적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소설 내내 해리 홀레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크리포스'입니다. '크리포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를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인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더구나 그 크리포스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노르웨이에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음에 대한 반향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요 네스뵈의 두 눈엔 더욱 노르웨이의 불안한 미래가 그려질 수 밖에 없지요. 레오폴드 2세만이 홀로 웃는 콩고가 되어버린 노르웨이...
이건 그저 제 망상만은 아닙니다. 요 네스뵈가 소설 속에 분명히 그 사유의 흔적을 새겨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콩고엔 니라공고 화산말고 다른 하나가 더 등장합니다. 바로 주로 시체들을 던져넣는 키부 호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르웨이에서도 이 키부 호수와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범인이 시체를 던져넣은 뤼세렌호 입니다. 이렇게 콩고의 키부호수와 노르웨이의 뤼세렌호는 이어집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니라공고화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피날레가 이루어지는 니라공고화산 같은 공간이 노르웨이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스타오셋산 입니다. 소설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원인은 바로 이 우스타오셋산에서 잉태되었습니다. 시작의 우스타오셋산과 끝의 니라공고화산. 어떻게 이걸 연속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요 네스뵈는 이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노르웨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 그 콩고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연쇄 살인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스키를 타러 자주 간다는 우스타오셋의 고립된 한 산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해리 홀레는 나중에 미카엘 벨만과 함께 스노모빌을 타고 우스타오셋에서 사라진 연쇄살인범을 추적합니다. 그 때 해리 홀레 눈에 비친 풍경을 상상해서 그려 봤습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것을 막기 위한 해리 홀레의 싸움입니다. 노르웨이의 미래를 건 사투인 것이죠.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소설에서 해리 홀레는 진짜 사투를 벌입니다. 그만큼 요 네스뵈가 지금의 노르웨이를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앞서 해리 홀레를 아리아드네의 실이라 비유했는데 그 행보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처럼 연약하기에 더욱 혼신을 다해 싸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그러한 '레오파드적 콩고'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리 홀레를 통해 보여줍니다. 이면 속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그이니만큼 말로 분명히 설명하기 보다는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바로 해리 홀레의 삶 자체로 말이죠.
'스노우맨'에서도 해리 홀레의 삶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만 '레오파드'에서 그의 삶은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스노우맨'이 가져온 비극 때문에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영영 떠나버렸고 이제 아버지마저 세상을 등지려 하고 있으니까요. '스노우맨'에서 해리 홀레는 '스노우맨'에 집약된, 그러니까 배타성으로 충만하여 결국은 비극을 불러일으키고 말 '노르웨이적 광기'로 부터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라켈과 올레그에 대한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구원이었던 라켈과 올레그는 떠나버렸고 결국 해리 홀레는 사랑의 아픈 상처와 절망만을 간직한 채 아예 노르웨이마저 떠나 폐인이 되어버렸죠. 그 해리를 다시 노르웨이로 오게 만든 이가 바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위독했기 때문이었죠. 그렇다고 요 네스뵈가 아버지를 해리 홀레에게 남아있는 구원의 가능성 같은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에서 아버지란 이를테면 하나의 반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해리 홀레가 겪고 있는 상처와 영혼의 방황 같은 것을 보다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주기 위한 반영 같은 것이죠.
비유하자면, 여기서 해리 홀레와 아버지와 관계란 단테의 신곡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신곡에서 단테는 유령인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따라 지옥을 여행합니다. 그런데 신곡이 쓰였을 당시 널리 퍼졌던 유령에 대한 생각 그대로 유령인 베르길리우스는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고 오직 단테가 말을 건네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는 모습만 보자면 그는 마치 에코, 즉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렇게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생각할 때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생각이란 무엇보다 우리 뇌리 속에 어떤 말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마치 그림자가 존재의 뒤를 따르듯이 자연히 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그건 좀 전 생각에 대한 응답일수도 있고 의문일수도 있습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대화란 이러한 모습을 모방한 것이고 그렇게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란 단테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이죠. 한 마디로 사유의 메아리라고 할까요. 저는 해리 홀레의 아버지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해리가 겪고 있는 상처와 절망의 반향이자 동시에 그러는 가운데서도 버티면서 궁극적인 해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사유의 메아리라는 것이죠.
그런 아버지가 마지막 유언과도 같이 자신을 온달스네스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온달스네스... 어머니와 함께 묻히려고요?"
해리는 침묵했다.
"그것도 있고. 동네 주민들과도 묻히고 싶구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누군들 안다고 할 수 있니? 최소한 그들과 나는 같은 곳에서 태어났다.
어쩌면 결국에는 그게 제일 중요한지도 몰라.
같은 종족이라는 거. 우린 같은 종족과 있고 싶어하지."
여기서 아버지는 '같은 종족'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요 네스뵈가 그저 노르웨이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하게 한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같이 묻히고 싶은 동네 사람들이 정작 아버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전혀 모르지만 같이 묻히고 싶어합니다. 이것을 그야말로 타자들에게 온전히 자신을 열어보이는 모습이지 않을까요? 타자와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는 레오파드들과는 전혀 다르게 알지도 못하는 낯설기 그지 없는 타인들이지만 그래도 공존하고 싶다는 마음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이로써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주제 혹은 그가 비춰주는 대안의 빛이 나타나는 듯 합니다. 아버지가 해리 홀레 사유의 메아리라고 본다면 더욱 명확해질 수 밖에 없는 빛인 것이죠. 그건 물론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 포용하는 것, 적극적으로 타자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유언에서 요 네스뵈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레오파드들로 부터 노르웨이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시된 길은 물론 소설 속에서 해리 홀레의 추적과 여정을 통해 충분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네, '레오파드'는 이런 소설입니다.
784페이지의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한 페이지, 한 문장도 버릴 게 없는 속이 꽉 찬 깊이와 재미를 두루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깊이도 깊이지만 묘사되는 장면들이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만큼 선명해서 더욱 빠져서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가 만일 헐리우드 영화 제작자라면 바로 요 네스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 작품의 영화화 판권을 사겠습니다. 그만큼 재미를 담보하고 있다는 말로 들어주시면 좋겠네요.
요 네스뵈가 '레오파드'의 이면에 심어놓은 의미를 추적하느라 정작 작품에 나오는 범인을 이야기하지 못했네요. 스노우맨의 범인도 정말 잔인했습니다만 이 소설의 범인도 역시 잔인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그의 잔인성은 그가 살인에 사용하는 도구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는데 그 도구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름은 '레오폴드의 사과'라고 하는데 레오폴드 황제가 사람들을 고문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원래는 가시 없이 그냥 둥근 모습으로 사람 입 속에 넣는데 저게 딱 숨구멍을 막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걸 입에 넣은 사람은 자신의 손으로는 도저히 뺄 수가 없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점점 숨이 막혀와 결국엔 도구 밖으로 삐어져 나온 철사를 손으로 잡아당기게 되는데 그러면 그림처럼 24개의 가시가 사방에서 뻗어나와 죽여버린다고 합니다. 애용한 사람이 레오폴드 2세이었듯이, 정말 타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레오파드들에게 어울리는 살인 도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진짜 잔인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작가 요 네스뵈 자신이죠. 거듭되는 반전에 반전. 거기다 최후의 일각까지 급박하게 휘몰아쳐가는 위기 상황으로 마치 신경 세포 한 가닥, 한 가닥이 타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노라면 정말 눈 앞에 네스뵈가 눈 앞에 있다면 '제발 이제 그만 애태우란 말이야!'하고 멱살이라도 잡고싶을만큼 잔인하게 느껴지거든요. 정말 그렇게 되는지 안 되는지, 직접 소설을 읽으면서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