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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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영문학자 노스롭 프라이는 소설의 본질은 알레고리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의 이번 소설은 그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저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그야말로 알레고리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프롤로그처럼 붙인 '밧줄 마술'의 이야기는 이 소설 전체가 가진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알레고리적으로 본다면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각 장들은 정확히 그 '밧줄 마술'에 대응한다고 하겠다.

 

 '샤머니즘'으로 유명한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양성인'이란 책에서 바로 이 '밧줄 마술'에 대해 특별히 한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우선 이러한 밧줄 마술의 이야기가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인도나 티벳, 말레이시아등 각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주고는 그렇게 이 밧줄 마술은 각 문명에서 신 아래에서 시간과 타자에 엮이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 자기 삶에 대해서 가지는 실존적 불안과 염원을 표상하는 하나의 원형적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고 말해준다. 그 뒤 그는 모든 '밧줄 마술'에서 드러나는 네 개의 공통된 요소들을 보여주는데 바로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네 요소들이란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것, 밧줄을 올라가는 것, 같이 올랐으나 동료인 소년의 몸이 토막 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자들인데 이것이 그대로 이 소설 각 장의 내용에 있어 주가 되는 것이다. 즉 1장이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는, 그렇게 하나로 이어졌던 세계가 그러다 서서히 분리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2장의 이야기는 밧줄을 올라가는, 그렇게 하늘과 사람을 이으려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여기서는 사람을 넘어 사물까지 자신과 이으려는 제이의 이야기가 주가 된다. 3장은 토막 나는 소년의 이야기에 해당하므로 이와 똑같이 이어져 있었으나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동규가 전면으로 나오며 마지막 장은 지켜보는 자들에 해당되기에 제이가 하늘로 밧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거나 들었던 자들인 박승태, 작가, Y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밧줄 마술'은 그야말로 이 소설의 주된 모티브라 아니 말할 수 없는데 엘리아데에 따르면 밧줄이라는 상징은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 속에 포함되어 있고 어떤 조직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과거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같은 책, P. 236) 가운데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미지라 한다. 나는 이러한 밧줄에 대한 이야기가  김영하의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그대로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왜 김영하가 이 소설에서 밧줄이라는 상징을 가져왔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건 문학이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문학이야 말로 밧줄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도처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고통. 더구나 제이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그 밑바닥 십대들의 삶처럼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아서 더 한 고통을 받게 되는 자들의 존재 앞에서 문학은 과연 그 스스로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러한 물음 앞에서 김영하는 문학가로서의 자신의 소임을 재확인하듯 '밧줄'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제이의 '대폭주'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제이는 김영하가 글을 쓰는 것과 똑같이 폭주로 도시에다 '거대한 붓질'을 한다. 그러한 제이의 대폭주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하늘로 이어진 밧줄을 타고 오르는 마술사처럼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존재들을 보게 만들어 이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이의 폭주는 문학이며 그의 승천은 차라리 그 폭주 문학의 완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확실히 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역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세계와 서로가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더 이상 평면의 활자들로는 이 시대에 제대로 문학적 발언을 할 수 없다는 일종의 자조(自嘲)적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제이가 보여준 폭주의 문학은 분명 김영하가 바라는 문학의 이상적 형태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근대란 무엇보다 단절과 배제라고 했었다. 끊임없이 끊어내고 밀쳐내는 게 바로 근대라는 것인데 솔직히 따지고 보면 이 근대야말로 마술이나 마찬가지다. 마술이 본디 실체를 알 수 없는 눈속임이듯 근대에 의해서 자행된 그 모든 논리엔 사실 아무런 진리가 없으며 오로지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위한 시각적 현혹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어주기가 본질인 문학이 그런 근대의 소생이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문명이란 게 또 알고 보면 오디이푸스적이다. 사실 진보란 바로 그러한 '살부(殺父)'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프로이트도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김영하는 오늘날의 고통을 야기한 마술에 문학이란 마술로서 응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마술엔 눈속임이 있지 않다.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것이 아닌 거꾸로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바로 그런 마술사가 되려하며 그리하여 그의 문학이 무엇보다 문득 '자신의 발밑에 있는 무한의 벌판을 보게'되었다는 그의 말처럼 보이지 않았던 세계와 사람을 지금 우리들과 이어주는 밧줄이 되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 바로 그의 그러한 신념의 확인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정말 밧줄 마술을 하는 마술사를 보는 것 처럼 괜시리 흥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통해 다시금 음미하게 된 문학의 의미로 나 역시도 그 밧줄로 사람과 세계와 이어지길 바라는 소망까지 더해져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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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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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라도 너무 다른 그녀, 봉빈...

 

  솔직히 놀라웠습니다.

  인물의 재해석이야 문학이 늘 해오던 것입니다만 소설 '채홍'이 보여준 문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새로운 해석은 그동안의 굳어졌던 역사적 인식을 단번에 무너뜨릴 만큼 압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문학이 이렇게도 현실을 능가할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 이전에 이미 '봉빈'을 알고 계시던 분들이라면 저와 비슷한 감회를 가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 물론 저도 이 소설의 주인공 '봉빈'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대학 다닐 때, 역사를 좋아했던 저는 전공도 아니면서 '조선왕조실록강해'를 수강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선 역사에 처음 공식적으로 기록된 레즈비언이라면서 교수님이 바로 이 '봉빈'을 소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봉빈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그야말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인물은 뛰어났지만 성격이 직선적이고 다혈질인지라 조용한 장차 문종이 되는 세자와는 살가운 관계가 될 수 없었고 그런 문종이 후실들을 더 찾고 그 중 하나가 결국 임신을 하게 되자 질투심에 거짓 임신을 꾸며대질 않나 틈날 때 마다 몰래 외간 남자를 엿보거나 대낮부터 술에 취해 주정을 일삼지 않나 정말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세자빈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봉빈이 결국 폐출되어버린 계기가 된 동성애를 뜻하는 '대식(對食)'도 정말 그런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폐출시키려다 보니 마땅한 구실이 없어 혹시 조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소설 '채홍'에서도 직접 나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궁내에서 궁녀들끼리의 '대식'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고 하니까요. 저의 뇌리 속에 그렇게 박혀있던 봉빈이었기에 사실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온 이가 설마 그 '봉빈'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설 '채홍'에 처음 등장하는 봉빈은 그야말로 그 때 그녀가 직접 만져보기도 했던 가을 국화 처럼 차분하고 단아해 보이기만 했으니까요. 그렇게 늘 저의 기억 속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같은 인상으로만 남아있던 봉빈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에서 보여준 성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는 세종과 조용하고 어질어서 준비된 임금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던 세자에게 그야말로 가해자였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단죄하려 드는 오라버니들 앞에서 절규처럼 쏟아내었던 그녀의 말 그대로 본심을 몰라주는 무정한 세상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모습뿐이었으니까요.

 

  저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다름이 참으로 인상 깊었고 그 다름의 연유가 정말로 궁금했기에 저는 얼른 뒷 페이지를 넘겨 봉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습니다. 김별아 작가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을... 그 모든 게 사실 우리 내부에 간직된 우리의 선입관을 깨뜨리려는 그녀 자신의 호소라는 사실을 말이죠.

 

 

  2. '채홍'의 '봉빈'이 달라야 했던 이유...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선입관이 있습니다.

  선입관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데 때로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습니다만 그것에 대해 그리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듯 합니다. 근대 독일의 역사학자 딜타이 이후로 역사란 진짜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입맛대로 거짓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바꿔서 기록할 수도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죠. 네, 지금에서는 역사가 순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입니다. 시쳇말로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있듯이 말이죠. 그렇게 승자의 입장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게 바로 역사이고 오늘 날 그게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패자들은 때로는 삭제로 지워지는 것이고 때로는 왜곡으로 본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알릴 목소리를 잃게 됩니다. 자고로 이것이 역사 속에서 여성이나 동성애자 등 모든 '약자'이며 '소수자'들이 겪어야 했던 운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 역사학계에서는 지금까지 기술된 역사가 아닌 공식 문헌이나 문학, 혹은 민담 그 뿐만 아니라 세금 계산서나 가게 장부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자료들을 통하여 공식적 역사가 지워버리거나 왜곡한 목소리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금 발굴해 내는 데 오히려 더 치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로 이 소설, 김별아 작가의 '채홍'도 문학이지만 바로 그러한 흐름 가운데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김별아 작가가 실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기도 합니다.

 

 

  2 - 1.  도입부에서 드러나는 다름의 의도...

 

 그녀의 이러한 동기는 소설 도입부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소설의 도입부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기에 흥미를 자아냅니다. 보통 구성상의 특이함은 그대로 작가의 의도인 경우가 많지요. 때문에 '채홍' 소설의 도입부에는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 싶은 작가의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특이한 것이란 정작 주인공인 봉빈이 등장할 때 까지 우리는 총 세 단계를 지나가야 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사가로 돌아왔을 때 봉빈을 바라보는 오라버니의 마음에서 봉빈의 주변 인물이라 할 만한 박나인과 결국 그녀를 왕에게 고발하는 임무를 맡는 김태감을 거쳐서야 비로소 봉빈에게 이르게 되는데요. 왜 작가는 이렇게 일부러 돌아가는 길을 만들었을까요? 바로 거기에 김별아 작가가 실록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만의 시각으로 봉빈을 빚은 이유가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 단계의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에 공통점이 있음이 분명 보게 됩니다. 바로 그 공통점이 김별아 작가가 그리했던 이유를 거꾸로 밝혀줄 터인데 그 공통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봉빈이 폐출되어 사가로 돌아왔을 때 오라버니들이 보인 한결같은 반응에서나 그 뒤 '숨어있는 꽃'에 나오는 '열녀' 혹은 '정절'이라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여성의 욕망을 자신의 뜻대로 길들이기 위해 만든 관념을 의식 깊숙이 내재화시키고 사는 박나인( 또한 이 박나인은 흉금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봉빈과는 얼마나 정반대의 인물입니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조의 모습에서 우리는 왜 김별아 작가가 박나인을 두 번째로 등장하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의 모습에서나 마지막으로 다음 '불의 멀미'에서 내시라서 몸으로는 아내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생각에 아내가 행여 그 때문에 바람나지나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결국 지속적인 폭력으로 자기 아내의 욕망을 길들이려 드는(이것은 그대로 '몸'은 없고 오로지 '말'로써 여성들에게 강압과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가부장적 유교적 관념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김태감의 모습에서 우리가 공히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역사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남성들은 여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기 보단 먼저 지배부터 하려들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끔 길들이려 하는데 그것은 모두 여성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에서 김별아 작가가 왜 에둘러 갔는가에 대한 그 이유가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실록이 쓰여 진 당시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관계란 게 다름 아니라 바로 두려움에서 비롯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관계였다는 것을 말이죠. 바로 이러한 관계 위에서 공식 기록이라며 등장한 '실록'이었기 때문에 김별아 작가는 실록의 봉빈을 그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김태감에서 잘 보여지듯, 남성들은 여성들이 두려우면 두려울 수록 오히려 자기가 아니라 여성 탓을 하며 그렇게 더 '괴물적'인 것으로 만들어 자꾸만 더 가학적이 되는 폭력 행사를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일쑤이니까요. 그러니 김별아 작가는 실록 역시도 똑같은 색안경을 쓰고 봉빈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해서 실록에서는 '준비된 임금'이라며 칭송해 마지않는 문종 또한 이제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는 김별아 작가에게는 한낱 가부장적인 유교적 관념에 완전히 세뇌되어버려 여성과는 제대로 진솔한 관계조차 맺을 수 없는 '반편'이며 뼛속까지 '법도'에 물든 나머지 융통성이라든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정해진 매뉴얼 대로만 움직이는 '법도 기계' 이상의 존재는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문종을 능력으로나 인품으로나 그만큼 준비된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명 하는 바람에 자신의 아들 단종을 비극적으로 죽게 만든 애석한 임금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요 소설'채홍'을 읽으면서는 '과연 이 소설이 그려내는 만큼의 강박증과 소심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단종의 비극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그만큼 김별아 작가가 그려내는 문종 또한 아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3. 다르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연유...

 

 그래서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려움과 의심으로 점철된 일방적 강압과 폭력으로 지워지고 왜곡된 봉빈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려 한다면 실록에 기록된 것에 좌우되지 않고 단순한 사실만을 취하여 그것을 지금까지의 남성만의 관점이 아닌 온전히 여성만의 관점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다져 새롭게 형상화해야 했을 터이니까요.

 

 결국 역사란 기억의 문제입니다.

 역사란 따지고 보면 훗날 전해주고 싶은 기억만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별의 주체가 오로지 남성뿐이었다는 것이죠. 그것도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여기고 이해하려는 남성이 아니라 '열녀'나 '칠거지악' 같은 것으로 여성이란 무조건 남성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만 생각하는 남성들로 말이죠. 그래서 마땅히 이 김별아 작가가 소설 '채홍'에서 했던 대로 여성 자신의 목소리로 여성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편협한 남성들의 손에 의해 지워지고 왜곡된 여성들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되살리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서 는 말이죠. 때문에 '채홍' 후반부에 이루어지는 문종과 봉빈으로 대표되는 '법도'라는 이념과 '사랑'이라는 개인의 욕망간의 대립은 차라리 그 목소리들을 되찾기 위한 투쟁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도가 그대로 체화된 인물인 세자 ' 문종'은 그대로 이념이 가진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일단 봉빈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무심함에서 오는 서운한 감정의 표출도 법도로 마땅히 교정해야 할 시기 많은 아낙네의 잔소리로 여길 뿐입니다. 그래서 들으려 하지 않고 오로지 강요만 합니다. 끝내 듣지 않으면 그냥 피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이건 그대로 법도로 대표되어지는 이념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이념도 들으려는 귀가 없습니다. 오로지 타인을 그 뜻대로 맞추는 말을 하는 '입'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오로지 자기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잘못을 책하면 정작 잘못을 범하고 모자라는 것은 당신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역정부터 냅니다. 그리고 이념은 자신이 아는 만큼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하고 피하려듭니다. 문종 역시도 그러했습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봉빈은 문종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여성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봉빈 앞에 서면 왠지 스스로 왜소해짐을 느꼈고 그래서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이념은 자신의 통제를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 앞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이념은 더욱 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려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태감이 아내에게 지속적으로 가했던 폭행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게 한계에 이르면 이제는 그냥 무시해 버리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문종은 봉빈에게로 가는 발길을 끊어버리죠.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다'라는 이념에 빠져 유태인의 생명을 깡그리 무시했던 나치와도 같이 말입니다. 문종의 모르쇠와 나치의 학살. 이것을 같이 보는 것은 그리 지나친 비유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념의 본성엔 다른 것에 대한 포용이나 이해의 노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자란 얼마든지 쉽게 제거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문종이 봉빈이 폐출될 때 쉽게 인정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결국은 이런 면에서 문종이 봉빈을 바라보는 것이나 나치가 유태인을 바라보는 것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약자나 소수의 목소리들을 그리도 쉽게 지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이념을 향해 나를 인정해 달라는 욕망인 것은 아닙니다. 그건 전체에로의 합일을 꿈꾸지 않습니다. 이념 자체가 전체성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념을 거부하는 개인의 욕망이란 전체성에 매몰되지 않는 그 개인의 고유성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은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냥 날 그 무엇도 아닌 고유한 나 자신으로 보아달라는 그런 욕망입니다. 봉빈이 문종에게 드러낸 것도 그러하지 않았던가요? 법도에서 움직이는 세자빈이 아닌 문종을 향한 애틋한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원래 이름인 '란'이라는 자기 자체를 보아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김별아 작가는 점점 '사랑'을 강조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조선의 유교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과의 동성애 마저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역사적 사실이었다 해도 분명 김별아 작가는 남성 중심의 당시의 가치관을 가장 전복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라도 그 사랑을 가져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념으로는 도저히 포획될 수 없는 개인 욕망의 고유성과 거기에 그대로 빗대어질 남성들 가치에 종속되지 않는 온전히 여성들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죠. 대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들이란 어떤 존재들입니까? 흔히 우리들은 가장 여성다운 인물로 신사임당을 꼽곤 하지요. 하지만 그 신사임당은 알고 보면 남성 중심의 유교적 관념이 원하는 바를 그대로 그려낸 듯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온전한 여성성의 대표일지도 몰라도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남성들이 뒤집어씌운 굴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던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김별아 작가가 따지고 보면 실록에서 자신의 욕망에 가장 충실했던 '봉빈'을, 거기다 조선의 문화로서는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여성들만의 동성애를 가져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 이제 여성중심의 시각으로 다시금 새롭게 여성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하나의 선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것은 지금 역사학자들이 거세게 하고 있는 '공식적'이란 미명 하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들을 되찾아주는 것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만 '채홍'이란 이 소설은 사랑을 강조하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그토록 강조되는 사랑이란 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 의해 왜곡된 여성성이 아니라 여성 고유의 시선과 존재로서 충만한 여성성에 대한 상징과 같은 것으로 말이죠. 때문에 소설 '채홍'의 마지막에 유언처럼 남겨진 봉빈의 이 마지막 말,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행여 그 때도 사랑이 죄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사랑으로 죽으리라는 것을.(p.319)'

 이 또한 그 궁극적 의미에 있어서는 고유하고도 진정한 여성성을 간직하리라는 선언이라 할 것입니다.

 

 

  4. 이제 전혀 새롭게 쓰여지는 여성 중심의 역사를 향하여...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로서의 봉빈

 

  김별아 작가의 소설 '채홍'이 정말 놀라운 것은(이 글이 '놀라웠습니다.'로 시작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 이제 다시 소설이 빚어낸 봉빈의 모습을 살펴보면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는 폐출될 수밖에 없었던 봉빈의 모든 행위들이 이렇게 다시금 되찾으려 하는 여성 중심의 시각에서 보면 그 모든 게, 그 잃어버린 목소리들을 '문학만이 기억할 수 있다.'고 김별아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이, 온전히 기억하기 위한 행위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원래 여성은 기억의 상징이었습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Memory의 연원이 되는 기억의 신인 '므네모시네(Mnemosyne)도 여신이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것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으로 끌어들인 대표적 작가이기도 합니다. '햄릿'에서의 햄릿 어머니처럼 세익스피의 연극 대부분에서 여성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숨겨진 진실들을 기억하는 존재들로 나오죠. 다시금 새롭게 소설 속에서 묘사되어진 봉빈의 행태들을 살펴보면 봉빈은 마치 이 므네모시네의 화신과도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봉빈이 술을 벗하게 되는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별아 작가는 주의 깊게도 봉빈이 남성 사회에 자신을 편입시키려는 모든 노력들이 좌절되었을 때 비로소 술을 마시게 합니다. 바로 거짓 임신이 그것이죠. 문종의 관심을 가지려면 오로지 임신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은 징후가 있자 무턱대고 믿어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만(그러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과실에 의한 착오였을 뿐이죠.) 그건 그녀가 문종으로 대표되는 남성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자 여성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나마 남아있던 미련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상임신으로 판명 나고 봉빈은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오명 속에 고립됩니다만 사실 그 고유의 여성성에서 보자면 이것으로 마지막 남은 미련마저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봉빈은 그 때 가서야 술을 마셨습니다. '진실할수록 추하고 솔직할수록 퇴폐적인'이라는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장의 첫머리에 봉빈이 술에 대한 느낌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물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요상키도 하다. (...)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 씻긴 듯 지워지며 초라한 나는 내가 아닌 무엇으로 사라진다.(p.184)'

 

  여기서 너절하고 귀접스런 기억들이란 남성 사회에 억지로 스스로를 편입시키려던 기억들이며 '초라한 나'는 그러했던 봉빈 자신을 뜻한다는 걸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물들었던 기억과 자신이 이제 술로 인해 사라지고 다시금 되찾은 여성성의 자아로 그녀는 다시금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녀는 술이 목을 넘어갈 때 '홧홧한 자극만이 남았다'고 합니다. 그게 처음 술을 마실 때 그녀 기억의 전부였습니다. 여기서 감각이 등장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감각이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감각만이 남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 자신을 지배하던 모든 이념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그녀가 조선의 모범적인 여성상으로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파격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행보입니다. 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 있어서는 전복적으로만 보여 질 수밖에 없는 파격으로 고유한 여성성에로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며 그 기억을 다시금 써 가는 것입니다. 그녀의 술은 계속됩니다. 그런데 므네모시네 역시도 그렇습니다. 그 여신은 기억의 연못을 주관하고 있는데 그 물을 마시면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하죠. 그렇게 봉빈의 술은 므네모시네의 물인 것입니다. 그렇게 술을 계속적으로 마신다는 것은 되찾은 고유의 여성성을 계속해서 되새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5.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초혼(招魂)

 

 소설의 제목인 '채홍(彩虹)'은 무지개를 뜻한다고 합니다. 김별아 작가는 왜 그걸 제목으로 택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무지개가 태양의 반대편에 뜨는 이치에서 비롯되었다. 왕이라는 태양이 빛나는 반대편에는 권력과 욕망과 사랑과 질투 등의 인간적인 감정들로 채색된 여인들의 무지개가 떴다. (p.322)'

 

 이제는 아셨겠지만 지금 저의 리뷰는 이 말을 조금 상세하고 길게 써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김별아 작가의 말에서도 바로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그저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되어진 여성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복원하려는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페미니즘 소설입니다. 저는 이렇게 공식적인 역사 기록에 좌우되지 않고 온전히 그만의 시각으로 그것도 보다 확고한 주제 의식에 기반 해서 과감히 써 내려간 이 소설을 참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소설을 우리 내부에 던지는 하나의 호소라고 했습니다만 과거에 지워지고 왜곡되어진 존재들을 다시금 불러내 새롭고도 온전한 생명을 주려 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사실 '초혼(招魂)'에 더 가깝습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그 '초혼'의 현장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왠지 절박하면서도 애타는 듯한 김별아 작가의 이 초혼을 듣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이 세 가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는 모두를 편견 없이 대해야 하고 그 모든 목소리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것을 위해서라는 세상 모두가 반대하는 편이라 해도 기꺼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습니다. 소설 '채홍'은 바로 이 세 가지를 위한 당신을 향한 부르짖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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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1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전에 제게 부끄러워서 리뷰를 못 올리겠노라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런 부끄러운 리뷰를 미친듯이 읽어내렸습니다. 그야말로 제가 부끄럽군요.
제가 <채홍>과 김별아 작가의 의도를 겉멋만 핥아낸것이라면 헤르메스님께서는 그녀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소설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아무리 읽어내고자 해도 외면밖에는 읽어내리지 못하겠던데, 헤르메스님꼐서는 대단하신걸요.

이거이거... <채홍>으로 신간평가단 신청하려고 했더니 안되겠습니다. 쩝

ICE-9 2012-04-02 23:27   좋아요 0 | URL
사실 별 기대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완전 '채홍'에게 반해버렸습니다. 저번에 라비니아 때도 그랬지만 이런 식의 여성성의 독창적 접근 저 완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느낀 것을 그대로 다 쏟아내보고자 했던거죠. 그래서 글은 대책없이 길어지고 또 장황하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그동안 2기에 걸쳐 신간평가단을 했는데 그 짬밥으로 짐작하자면 소이진님은 소설 신간평가단 꼭 되실겁니다. 문제는 저죠 ㅠ ㅠ
 
블레이드 1 - 열다섯 살 소년의 위험한 도망기 놀 청소년문학 15
팀 보울러 지음, 신선해 옮김 / 놀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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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의 팀 보울러와는 전혀 다른 색깔, 아니 아예 어둠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기다렸다.

 '블레이드'

 '칼'을 뜻하는 이 단순한 제목의 작품을.

 

 여기서 '블레이드'는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주인공의 본질이자 지우고 싶어 하는 과거의 상징과도 같은 주인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소설은 특이한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블레이드' 자신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스타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전혀 새롭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미 우리는 알베르 카뮈의 '전락'을 비롯하여 참 많은 작품에서 그런 스타일을 보아왔으니까...

 

 그래도 팀 보울러의 이 스타일이 새로운 것은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말을 듣는 우리를 당당히 작품 속의 한 참여자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블레이드'는 독자인 우리들 자신을 '구경꾼'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며 다른 사람들에겐 잘 내 보이지 않는 속내와 그만이 가진 비밀들을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털어놓는다. 아마도 그의 말을 듣노라면 우리가 느끼게 될 기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해를 받는 '신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이 일을 저지르고 도망가는 '동료' 이렇게.

 

 최근에 유행하는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차용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블레어위치'나 'REC' 같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을 응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방법의 유래야 어쨌든 팀 보울러는 이와 같은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읽고 있는 현재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로 여기게 만든다.

 즉 평면의 2D가 당신이 가진 상상력이란 공간에서 4D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는 팀 보울러가 취한 이러한 독특한 방법론이 무엇때문이냐는 것이다. 그는 왜 상상의 마지노선 뒤에서 우리의 편안히 작품 속의 허구를 관람할 기회를 빼앗는 것일까? 왜 그토록 우리를 작품 속에 끌여들여 '블레이드'가 겪는 모든 사회적 힘겨움을 같이 나눠지게 하려는 것일까? 그 모든 실재(리얼리티)를 우리가 나눠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물음이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좀 전 잠깐 언급했던 대로 이 작품이 정말로 굉장히 어둡기 때문이다. 잠시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다시 위로 스크롤을 해서 표지를 잠깐 보아두는 것도 좋겠다. '블레이드'는 그 이름에 간직된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현재 도망중인 청소년이다. 그에겐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가족도 친구도 없다. 거기다 기거할 만한 곳도 없다. 그는 매일밤을 노숙 아니면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잠을 잔다. 그는 노마드, 즉 '유목민'이며 그를 사회화할만한 그 어떤 기반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TABULA RASA'와도 같은 존재다. 사회의 어떤 의식도 틈입할 수 없는 공백이자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그 공백이자 얼룩인 블레이드는 그렇게 스스로 사회로 부터 부여된 주체가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주체를 만들어간다. 그것을 나타내듯 블레이드는 몰래 들어간 남의 집 서재에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책을 벗하며 '앎'을 얻고 깨우쳐 간다. 바로 팀 보울러는 이러한 블레이드가 보여주는 '순수 주체' 형성 과정에 독자를 깊숙이 참여시키고자 함인데 왜 그렇게 하는가? 무엇을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고 싶어서 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에둘러 얼마전 국내에도 개봉된 영화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을  거칠 필요가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의 가상의 미래를 다룬 묵시록적 영화다. 가상의 미래를 다룬다는 건 근미래에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미래를 다루기에 그런 것이고 묵시록이란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지구란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의미에서 종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영화 조차 그 말을 방증하듯 미래가 사라진 지구를 더없는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찬 지옥으로 그리고 있다. 왜 영화는 아이의 사라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가 미래의 상징이고 미래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지옥도는 고여있는 현재는 썩을 뿐이다 라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가 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비어있는 여백 자체가 담고 있는 무엇이든 그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아이들이 미래라면 그 아이들 역시 각자가 가지고 있고 펼쳐보일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말하는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은 이제 아이들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이 사라졌다는 것의 은유이지 않을까? 이것이 그대로 '고인 현재는 썩을 뿐이다'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이들마저 이 희망없는 어둠과 비참만을 낳고 있는 현재의 고루한 복제품이 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결국 '칠드런 오브 맨'이 하고 싶은 건 이 말 하나다.

 "이대로는 안된다. 뭔가 새로운 것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이 말이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여기에 참여하는 영화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우리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다는 의미에서) 데브라 그레닉의 영화 '윈터스 본'과 '잭 스나이더'의 영화 '써커 펀치'를 들 수 있겠다. 이 두 영화들은 공통점이 여럿 있다. 우선 주인공이 소녀들이다. 거기다 그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다는 점에서도 똑같다. 이것은 그대로 연령대나 처지에 있어 블레이드 역시 공유하고 있다. 두 영화에서 소녀들을 둘러싼 세계 역시 블레이드 만큼이나 그녀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모두 하나같이 어둡고 절망적이며 공격적이다. 소녀들은 그 세계에서 블레이드와 똑같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삶과 자신의 세계를 보전하거나 구원해야 한다. 이 영화들이 궁극에 가서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는 이제 파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부채를 이제 우리 어린 영혼들이 모두 짊어지고 갚아나가야 한다. 이렇게도 억울할 수가!' 영화는 그래서 말한다. '어린 세대들이여, 어른들의 길들임은 오로지 자신이 갚아야 할 채무를 너에게 떠넘기기 위함일 뿐이다. 결국 그 떠넘긴 빚으로 인해 너희들마저 그 어른들과 똑같이 파산과 공황 속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러니 상속을 거부하라! 거세된 어른들을 무시하라! 너희는 애초부터 너희 홀로인 것 처럼 되어야 한다. 그동안의 삶이 가져다준 인습과 상식이라는 것을 버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스스로 찾고 받아들인 가치로써 스스로를 재정립해 나가야 한다. 상속을 거부했을 때에라야 너희는 너희 존재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어른들의 하늘이 아닌 너희 자신들의 하늘을 껴 안을 수 있다. 잊지마라, 너희는 혼자고 혼자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이 영화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잠정적 선언은 놀랍게도 이제는 하나의 경향이다. 우리는 아마도 많은 영화들에서 이들의 편린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공통의 흔적은 그대로 징후이기도 하다. 즉 지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 체제가 서서히 좌초되고 있는 중이란 것의 징후 말이다. 지금 세계는 급속도로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월가 점령', '재스민 혁명'등이 그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그만큼 위기의 시대이고 또 그래서 기회의 시대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칠드런 오브 맨', '윈터스 본' '써커펀치' 같은 영화들은 그러한 전환기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래를 지속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안간힘으로 볼 수도 있겠다. 팀 보울러의 '블레이드' 역시 그러한 안간힘에 동참하는 작품이다. 과거가 남긴 파산에 함몰되지 않기 위하여, 좌초하기만 하는 구 세계의 타이타닉으로 부터 빠져나가기 위하여 아직은 덜 때묻은 그래서 가능성이 남아있는 어린 세대들에게 이제 너희들만의 칼을 갈아야 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 작품인 것이다.

 

 당신은 여기에 동참할텐가? 미안하지만 당신에겐 선택의 여지는 없다.

 펼치면 참여하게 된다. 시대가 종종 개인을 원하지 않아도 몰아가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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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5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꽤나 마음에 드는책인걸요. 리버보이작가의 신작이라니! 그나저나 헤르메스님 나 너무웃긴거 같아요. 머리가 찌끈찌끈 아픈데도 쓰리지켜서 결국은 알라딘을하고있거든요. 평소에 진짜 건강하면 전데 감기바이러스는 못이기나봅니다ㅜㅜ동생한테옮은거같아요ㅜㅜ

ICE-9 2012-03-15 20:42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소이진님 만큼 저도 웃길지도...
저역시 팔목은 저리고 허리는 아프고 몸은 열로 들뜨고 있는데도 이렇게 마구 글을 쓰고 있거든요. 소이진님도 감기에 걸리셨군요. 저는 몸살... 흑,우리 빨리 완쾌되도록 해요. 아 참, 블레이드 이 책 정말 재밌어요. 역시 팀 보울러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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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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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는 동안'은 처음 접해보는 작가 윤성희의 '소설집'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이사 준비를 해야했기에 제목 처럼 전혀 웃지 못하고 지냈다. 이사를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정말 할 일도 신경써야 할 것도 많다. 더구나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 가장 힘든 직업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사를 위해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타전을 하고 타협을 하고 계약을 타결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다 세상엔 좋은 사람 배 이상으로 나쁜 사람도 많아서 받게되는 마음의 타격 또한 무시하지 못할 법이어서 하루가 멀다하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생기니 개그콘서트가 낙원으로 여겨질 만큼 이마에 내천자를 문신처럼 새기고 지냈다.

 

   주말 유일하게 챙겨보는 무한도전 역시 파업으로 한달 동안 결방이다 보니 도대체 이렇게 자꾸만 쌓이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지가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로 보내는 것도 한세월이지 주당도 아닌 내가 매일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할 수 없이 틈나는 대로 윤성희의 소설집을 영화에서 경찰 서장들이 자주 그러듯 어딘가 숨겨놓은 위스키를 순간 순간 홀작이듯이 그렇게 읽었다. 제목이 '웃는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책을 통해 좀 웃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나를 위해 흔한 개그 하나 해 주지 않았다. 나는 지은이의 말을 가장 먼저 읽어야 했었다. 이 소설집의 제목이 '웃는 동안'인 이유가 지은이가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들에 한번만은 웃는 모습을 넣어주고 싶었다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란 걸 미리 알았더라면...

 

  한번만이라도 '웃는 모습'을... 이라는 지은이의 말에서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니체가 언젠가의 글에서 왜 사람만 웃는 줄 아느냐고 말한적이 있다. 그것은 웃음을 발명해야 할 만큼 사람의 삶이 어렵고 슬프기 때문이라고... 니체의 이 말은 정말 윤성희의 이 소설집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하나같이 정말 웃음이 필요할 만큼, 외롭고 절망적이고 힘들기 때문이다.

윤성희는 이들 모두에게 이름을 하나도 지어주지 않았는데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없이 별명으로만 불리거나 이니셜로만 지칭된다.) 그것은 이름이 상징하는 한 개인의 고유한 존재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별명이나 이니셜 같은 단순한 사물이 되기를 원할 정도로 외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은 존재가 지워진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된다. 유령은 벽을 넘나들고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실체가 없기에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다. 유대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만으로 가능할 뿐이고 때문에 유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대지를 떠받치는 아틀라스 처럼 저 홀로, 어디로든 이어지지 못한 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그 기억들이 하나같이 파편화된 관계들의 흔적이고 때로는 예전엔 좋았지만 지금은 바래어버린 유물들일지라도 자기마저 포기하면 자신의 존재는 물론이고 자기와 결부된, 그렇게 자신의 기억에 매어달린 존재들 또한 지워지는 것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제아무리 외롭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처해있더라도 왠지 강해 보인다. 그들이 그런 일상에 짓눌러 있지 않다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들은 어쨌든 보살피고 먼 곳에 있는 할머니를 위해 일상을 기록하고 누군가가 듣게될 이야기를 짓는다. 매일 똑같이 늘 제자리로 돌아가는 바윗덩어리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야할 시지프스의 일상이지만 윤성희가 그려내는 인물들은 '그래서 어쩌라고? 백번을 내려와 봐, 백 한 번 올려줄테니...'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관통한다. 그래서 강하다. 아마도 그래서 윤성희의 문체가 앞과 뒤가 뚝뚝 끊기는 단절의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 하나하나가 마치 내지르는 주먹 혹은 안다리를 걸려는 다리로만 보인다.

 

  하지만 낙천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않다. 윤성희의 이 소설들은 그냥 과정일 뿐이다. 삶이 그냥 지속이듯이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어떤 결과가 오든지 상관하지 말라고 하는 듯 하다. 중요한 것은 뭔가의 결과를 원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먼저 행동부터 하는 것이라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말하는 듯 하다. 어쨌든 행동 그 자체로서 구원이 된다. 이 소설집을 읽은 인상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이것이 될 것인데 그래서 이사를 마치고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 뒷정리를 한 탓에 몸도 무너질듯 피곤하고 정신 역시 몸을 따라 혼미와 혼절을 왕복하고 있지만 리뷰를 썼다. 이 리뷰의 결과가 정신착란의 결과물이 되든 난삽의 사르갓소가 되든... 결과는 생각지 않고...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집중을 위해 마신 생맥주마저 한약을 달이듯 의식을 취기로 부채질 하고 있으니...

 

  아쉬운 것은 좀 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사 준비로 바쁘지 않고 좀 차분히 이 소설집을 벗할 수 있었다면 초반에 나에게 느꼈던 것들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인데... 하지만 기한은 이미 하루 넘겼고, 결국 어쨌든 끝은 보아야 하고... 그래서 이렇게 '웃는 동안'의 나의 리뷰는 미국 드라마 '24시' 처럼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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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0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제가 읽은 헤르메스님의 리뷰 중 가장 인간적인 리뷰였어요. 윤성희의 작품에는 위트가 없을지언정 헤르메스님의 글에서 유쾌함이 묻어나오면 그야말로 더 좋은것이죠.
저는 이 작품을 솔직히 말하자면 돈이 남아서 샀었습니다. 돈은 남고 사고 싶은 책은없고, 해서 마침 한국작품이 나와있기에 같이 주문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책이 오고 '어쩌면'의 첫 문단을 읽고는 덮었습니다.(요새는 책을 다 이렇게 대합니다... 하) 그런데 이 작가 참 특이한것이 문단도 나누질 않고 대화도 한 글로 치더군요. 그런데 이것이 또 부자연스럽지 않은것이 이 작가만의 매력인가봅니다ㅎㅎ

ICE-9 2012-03-01 23:26   좋아요 0 | URL
와! 얼마만에 보는 소이진님의 댓글인지^ ^ 혼미한 정신이 번쩍하고 듭니다. 저 역시 정말 아쉬웠어요. 뭔가 매력이 분명히 있는데 틈나는대로 읽어서 그걸 제대로 우려내기가 힘들더라구요. 결국 기한까지 넘겼으니 난을 바라보듯 관상만하고 있을 수도 없고, 윤성희님의 핵심은 '일단 저질러라!'이니 교주님의 손가락대로 행한 것이죠. 아무튼 체력 방전 정신 방전으로 거의 햇빛에 노출된 흡혈귀 같은 상태이지만 그래도 소이진님 너무 반가웠어요^ ^
 
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사를 간다. 곧!

 

  그 누가 안그렇겠느냐만 이사는 내게 있어 정말 가장 하기 싫은 것 중의 하나이다. 다시 살 집을 구하고 주인이 어떤지 신경쓰면서 계약을 하고 중도금과 잔금을 맞추고 이삿짐 센터 계약을 하고 짐들을 정리하고 도배를 하고... 정말 이 모든게 내게는 전쟁을 치르는 것만 같다. 스무살 때 대학 때문에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는 태어난 후로 단 한 번도 이사란 걸 해본적이 없는 나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집이란 내게 그랬다. 나 이전부터 있어왔고 내가 있는 동안 늘 그렇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존재였다. 집과 나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집 역시 언젠가는 헤어지겠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집은 곧 '나'였고 내가 언제든 안심하고 마음껏 머무를 수 있는 나만의 소우주였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그 영화에 중심에 사실은 아비의 '방'이 있었던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비의 애정을 원하는 수리(장만옥 분)와 또 다른 한 여자는 계속 그의 방으로 오고 싶어한다. 그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아비를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가위에게 있어 언제나 하나의 방이란 그 거주자 자체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아비의 방은 아비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비의 이야기'라는 뜻의 제목인 '아비정전' 이 영화에서 아비의 방은 그  세계의 중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은 그 존재를 받아들임과 같았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비정전'은 하나의 공간이 거기에 거주하는 자아와 얼마나 결부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것은 곧 97년이면 반환될, 언젠가는 떠나야 할 유통기한이 정해진 땅, '홍콩'에 사는 이들이라면 더 절박하게 와 닿을 생각이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구보데타 다케히코의 2007년작 '모두, 안녕히' 역시 공간과 자아의 결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사토루는 초등학교 졸업식날 벌어진 비극적 사건을 바로 가까이서 목격하는 바람에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는 존재이다. 나가려고만 하면 끝내 졸도할 정도로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갇혀있고 다른 의미로는 자신만의 한정된 우주를 가지고 있다. 묘하게도 이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를 많이 닮았다. 아비는 사실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고 싶지만 홍콩을 상징하는 자신의 방에 내내 머무르는데 그 이유는 정작 생모를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을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사토루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도 그 졸업식 날의 비극적 사고가 전혀 예기치 않게 찾아왔던 것(사토루는 만일 어머니가 이혼을 하지 않고 그래서 자신이 아버지 성을 그대로 따랐다면 앞자리에 앉아 그 비극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독백은 그것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우연하게 벌어진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독백이다.) 만큼 자신이 전혀 모르는 단지 바깥에서 그 어떤 일이 느닷없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그 예측불가능성에 따른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아비와 사토루 모두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었던 사정으로 인해(아비는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버린 자들이다.

 

   하지만 아비와 사토루는 그 세계를 대하는 데 있어서는 같지 않다. 아비는 그 세계를 부정한다. 그는 늘 '발없는 새'가 되기를 꿈꾼다. 그에게 있어 어머니가 있는 필리핀은 구원의 땅이다. 현재의 홍콩, 그가 있는 방은 기필코 벗어나야 할 유배지이며 그 영혼의 무덤일 뿐이다. 때문에 거기서 나누는 모든 사랑 조차 오로지 순간을 버텨내기 위한 일회용 사랑일 수 밖에 없으며 이별은 숙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니체의 니힐리즘을 강론하면서 니힐리즘, 즉 허무주의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말을 했는데 하나는 부정적 허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한다. 부정적 허무주의는 세상이 허무함으로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아비의 모습이다. 긍정적 허무주의는 어차피 세상의 본질인 허무를 긍정하고 오히려 그 허무로 빈 여백들이 많이 그려졌으므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거기에서 무수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허무주의를 말한다. 이것이 니체가 정말로 원했던 허무주의이며 이 소설의 사토루가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이데거가 말했던 '긍정의 허무주의' 대로 그는 그렇게 한계지워진 자신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다양한 만남과 이별 그로인한 성숙등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창출한다. 사람들은 아파트 단지 안의 좁은 세계가 뭐가 대수롭겠느냐고 혀를 끌끌 차지만 사토루는 그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 들을 수 없는 것 등등을 찾아내며 남들이 좁다고 하는 이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새롭고 다양한 존재와 삶들로 채워져 있는 것인지 깨닫는다. 거꾸로 그 많은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는 애석하게 여긴다. 때문에 신체가 일으키는 발작 때문에 나가지 못하긴 하지만 애당초 사토루 스스로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지금 그가 있는 이 공간이 더없이 완벽하다고 느낀다. 오히려 그 공간의 매력을 알기도 전에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렇게 사토루는 왕가위의 아비와는 정반대의 자리에 서 있다.

 

   그러면 사토루는 어떻게 아비와 정반대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을까? 다른 말로 사토루는 어떻게 긍정의 허무주의를 가질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사토루가 타인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심과 배려는 사토루가 밤마다 아파트 단지를 순찰하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사토루는 그렇게 순찰을 하면서 단지 내의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관찰하며 종내는 그들의 삶에 스스로가 어떤 도움을 줄 지 생각한다. 결국 그러한 관심과 배려로 인해 사토루는 훗날 마리아를 학대하는 아버지에게서 구출해내고 늘 방화의 위험으로 몰락해 가던 자신의 아파트 단지 마저 구하게 된다. 하지만 아비는 달랐다. 그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 그가 사랑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자신이 이해받기 위한 것이었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속한 지금의 홍콩은 언젠가는 떠나야 할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속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맺어지는 인간 관계 역시 부정적 관계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모두, 안녕히'와 '아비정전'을 비교하노라면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울러 타인에 대한 반응까지 결정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때문에 어쩌면 니체도 하이데거도 긍정적 허무주의를 가질 것을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긍정적 허무주의를 갖더라도 그렇게 내 세계를 긍정하더라도 그렇게 하나의 세계에 온전히 집착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토루 처럼 내 세계가 확실하다고 해서 그 세계만 고수하고 사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묻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삶이란 것 자체가 그 무엇이든 제자리에 있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비를 보라 그는 어쨌든 필리핀으로 날아간다. 나 역시 서울로 와서 이리저리 이사를 다닌다. 결국 사토루 역시도 그 세계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나나 아비나 사토루나 다 결별을 하게 된다. 왜?

 

 

   그건 모든 현재엔 다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아비정전'에서 그 이유를 기차로 표현했다. 끝없는 밤을 달리는 것만 같은 기차도 언젠가는 내려야 할 종착역에 다다른다. 결국 아비 역시 그 기차 안에서 숨을 거둔다. 왕가위에게 있어 그 기차는 바로 시간이었다. 흐를 수 밖에 없는 삶의 비유로서의 시간 말이다. 결국 도래할 시간들은  찾아오고 머무르고 싶은 현재는 끝이 난다. 때문에 항구적으로 그 순간에 머물고 있고자 하나 우리는 문득 버스가 멈췄을 때 관성의 작용을 받는 것 처럼  튕겨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금 자기가 있는 그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든 세계는 언젠가 허물어진다. 마치 밀물때 당신의 발 아래에 있는 모래들이 쓸려나가듯이... 아무리 영원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세계이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초침이 당신의 목덜미를 꿰어 원하지 않아도 어디론가로 자꾸만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그 세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던 작별의 순간을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하고 때문에 정작 그 순간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대비할 수 밖에 없다. 해서 구보데타 다케히코는 처음부터 그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진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사토루의 삶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해버렸던 초등학교 졸업식날 같이 졸업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아파트 단지를 떠나는, 바로 그 아이들의 이름들을 챕터의 제목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다케히코는 언젠가는 도래하고야 말 작별의 순간에 앞서 사토루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은 긍정의 허무주의가 궁극엔 그토록 긍정했던 그 자신의 세계마저도 변화 가운데 열어놓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결국 사토루가 그 세계를 긍정하고 기꺼이 받아들였기에 가야할 그 시기가 왔을 때 훌쩍 떠나는 것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다. 즉 다케히코는 소설 전체를 통해 이렇게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긍정적 허무주의가 말하듯 결국 긍정과 변화는 하나라고 말이다.

 

 

  재미있고 정말 빠르게 읽히며 감정의 디테일들이 잘 살아나 있어 절로 사토루를 응원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렇게 자기와 세계의 긍정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운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 대학 입시 강사를 하다가 '삼십대 중반이면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하는 생각에 소설가로 돌아서버린 그 삶의 경험이 있었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어쩐지 아비와 같다고 생각되면 한 번 벗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읽어보면 사토루가 만든 긍정과 변화의 케익의 달콤함에 어느새 도취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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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8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좋은 글이네요.
긍정적 허무주의란 단어에서 실존주의를 보게 되는군요. 제가 생각하는 삶이기도 하구요.

오늘부터 상담받기를 시작했는데, 저의 내재된 '화(분노)'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답니다. 감정이란 종종, 자아로 들어가는 실마리를 제공하니까요. 저는 분노지만, 누군가는 우울, 다른 누군가는 불안과 두려움 등으로 표현되는거죠. 그리고 그 안의 자아가 얼마나 많은 것에 결부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공간과 자아의 결부'라는 문구가 크게 다가옵니다.

이사 잘 하셔요, 좋은 집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ICE-9 2012-03-01 21: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29일 이사를 했고 오늘까지 정리하느라고 헉헉대고 있네요.
아직 여기저기 쌓인 짐들이 많아 여유가 없어요. 빨리 차분히 댓글 달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