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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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늑대의 피'로 유명한 유즈키 유코의 소설로는 세 번째 만나보는 작품이다. 

 제목은 '달콤한 숨결'. 남자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리기로 찬탄을 받던 작가각 처음으로 여성 주인공을 전면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녀가 여성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세계는 아무래도 전작과 다른 이채로운 맛을 주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거기다 유즈키 유코의 소설들은 늘 몰입감 하나만큼은 흔한 말로 '쩔'었으므로 선택은 더 쉬웠다. 역시 이번에도 단번에 읽었다. '달콤한 숨결'은 이야기 구성도 신선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린 소설 처음에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름은 다카무라 후미에. 왕따까지 당할 정도로 볼품없었던 외모를 스스로의 힘으로 멋지게 가꿔 중, 고등학교 시절엔 제법 미소녀란 말을 들으며 연애 편력도 나름 화려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무척 많이 깎여 있다. 외모가 점점 아팠던 시절의 과거로 회귀하는 걸 보면서 그것이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과식증에 해리성 장애까지 앓아버린다. 그러다 응모했던 인기 남자 연예인 디너쇼에 덜컥 당첨되어 후미에는 잃었던 삶의 의욕을 재충전할 기회로 삼고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참석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재충전할 기회가 되었다. 디너 쇼가 아니라 거기서 만난 중학교 동창 때문이었다. 무타라는, 결혼 전 성으로 먼저 자신을 부르며 다가 온 스기우라 가나코는 한 때 미소녀였던 후미에조차 기가 눌릴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가나코는 이건 성형으로 얻은 외모이며 중학교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면서 주인공이 해 준 다정한 말 때문에 힘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의 은혜를 갚겠다면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런칭하려고 하는 '뤼미에르' 화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사가 되어달라고 말한다. 자신은 외모 때문에(그녀는 눈 주위의 상처 때문에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으니 대신 그 일을 해 달라고 하면서 한 달에 50만엔을 그 대가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살림살이라 그만한 돈은 충분히 유혹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그걸 하면 '다시 아름다워질 거야'라는 가나코의 말에 결정적으로 매혹되어 그 일을 받아들인다.


 



 이것만 보면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시름시름 앓기만 하던 삶에 갑자기 찾아온 눈부신 빛과 같은 행운을 얻게 된 여인의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달콤한 숨결'이란 제목도 그런 인상을 마구 부추기고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작가가 누구인가? 하드보일드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즈키 유코가 아닌가! 마치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는 후미에가 가즈코에게 별장 초대를 받는 장면에 바로 뒤이어 독자를 한 남자의 살인 사건 현장으로 인도한다. 도대체 이 사건과 후미에의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독자는 민완 형사 히타와 이제 막 그의 파트너가 된 미모의 여성 형사 나쓰키의 안내로 접점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살해된 남자는 주위에 선글라스를 쓴 여인의 존재로 인해 가나코의 사기 피해자로 보였다. 그런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과 후미에가 점점 더 가나코의 일에 깊게 빠져드는 것이 병행 전개 되기에 우리는 후미애 역시 그런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역시나 너무 밝은 빛은 조심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역시 능수능란한 유즈키 유코는 그런 식상한 전개를 허락하지 않는다. 둘로 나뉘어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반에 놀라운 반전의 사실과 함께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만나게 된다. 모처럼 후미에 인생에 찾아온 찬란한 빛과 같은 것 그 너머엔 그보다 몇 배는 더 무섭고 비정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어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후미에는 정말 태양에 매혹되어 자신의 최후를 앞당긴 이카루스처럼 될 뻔했다. 


 무대 한 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는 욕망이다. 하지만 삶이란 알고 보면 주연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걸 천천히 그리고 처연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 빛 가운데 설 수 있다는 유혹은 자못 크게 다가온다. 오늘날,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는 한탕주의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만 산다'는 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오직 눈부신 태양만 보고 날았던 이카루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은 그러한 눈부신 빛에 현혹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매서운 경고를 날리는 작품이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생 한방이다!'에 빠져 있는 형국이니까 말이다. 여름밤의 풀벌레들을 유혹하는 환한 아크 등이 그러하듯, 빛에 눈이 멀어 가까이 다가갔다간 몸이 타버리기 쉽상이다. 너무나 밝은 빛엔 언제나 그런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눈이 멀면 직접 몸이 타오르는 걸 느끼지 않는 한 빠져나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사정은 그보다 더 나빠서 냄비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 그 개구리처럼 몸이 마구 뜨거워지는데도 '설마 그럴 리가?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이걸 위해 준비 많이 했잖아.'하는 헛된 믿음에 집착하다 푹 삶아져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에서 살해된 피해자들이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니던가!(나는 지금 피해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썼다. 그렇다. 이 소설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후미에처럼 살면서 한 번은 아니 어쩌면 여러 번 마주하게 될, '실은 내가 별거 아니다'라는 각성의 파고 앞에서 나를 그냥 내던지는 방식으로 익사당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아마도 그 대답 비슷한 것을 주기 위해 난 히타의 파트너 나쓰키가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녀는 가나코도, 후미에도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미모를 소유한 사람이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모델 혹은 연예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형사 일에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작가는 그런 식으로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빛을 얻으려 애써 노력하는 것보다 현재의 삶을 지속적으로 성실히 가꿔 나가는 것이 더 빛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삶에 한없이 충실하다보면 구태여 바깥에서 빛을 찾지 않아도 스스로 빛날테니까. 작가는 나쓰키란 존재를 통해 빛은 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라 전한다. 갈구의 대상은 내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고.


 이런 저런 투기 광풍이 잘 보여주듯(한국 은행에 따르면 현재 39세 이하 MZ 세대는 역사상 가장 빚이 많다고 한다. 20, 30대가 주식을 위해 증권사에 신용 융자만 3조 4297억원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지금은 크고 환한 빛에 많은 이들이 눈이 멀어 있는 상태다. 빛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어둠은 오고 거품은 꺼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지금 상황에 대해 경고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 사실 지금은 뒤쳐지지 않으려고 남들과 같은 속도로 욕망에 뛰어들기 보다는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추락에 대비해야 할 때는 아닐까? 이런 조심스러움 때문에라도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을 한 번 더 들이마시게 된다.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런 나도 기꺼이 껴안고 그저 오늘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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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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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하라 료가 과작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14년 만의 신작이라니 너무했다. 그래서 간만에 만난 그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은 하루 한 페이지씩 아껴가며 읽어야할 것 같다. 여하튼 우리의 사립탐정 사와자키 역시 흐른 시간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20대 청년에게서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닌가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흐른 건 그저 세월 뿐이고 그 외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사무실도 늘 그 자리에 그 간판 그대로 있고 들어오는 의뢰들도 늘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의 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건 한 사람의 의뢰인과 함께 왔다. 이름은 모치츠키. '파이낸셜 저축 은행 신주쿠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그에게서 사와자키는 참으로 오랜만에 '신사'란 말에 어울리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모진 세파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자신의 윤리 의식을 관철하며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 온 사람. 어쩌면 사와자키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그는 나리히라 요정의 이름을 대며 거기 여주인을 조사해 달라고 말한다. 그 때까진 여느 의뢰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사와자키였다. 하지만 그 의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는 의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부동산 업자의 방문도 받는다. 그녀는 사와자키에게 건물주가 퇴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제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사와자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지금까지 사와자키의 일상이란 뻔히 예측이 되는 정해진 궤도 위의 것이었지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곳은 예측이 불가능한 삶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엄습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빠지며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걸 시간이라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내일'이 될 것이다. 내일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야흐로 사와자키 앞에서 지금부터 내일이 펼쳐지려 한다.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의뢰라고 여겼던 거기엔 뜻밖의 것들이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다. 조사를 요청받았던 요정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결과를 보고하러 찾아갔던 의뢰인의 직장에선 은행 강도를 당해 인질로 억류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됨됨이가 올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던 모치츠키의 삶은 자기가 본 겉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급기야 가족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모치츠키의 아파트에선 얼마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간사이 지방의 사내가 욕조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은행 강도를 당하기 직전에 사라진 의뢰인은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래도록 질긴 악연인 야쿠자 하시즈메가 불쑥 찾아온다. 사와자키가 당했던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의뢰는 이렇게 야쿠자 조직까지 연루된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의뢰인을 시작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요정, 동료를 버리고 혼자 달아난 은행 강도가 가진 비밀 등 사와자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미스터리가 도처에 존재했다. 여기도 '내일', 저기도 '내일'이 고개를 빼곰이 들고 비웃듯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너무나 복잡해져 버려 더이상 단순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 사와자키가 그랬듯이, 휴대폰 없이 혼자 맨 몸으로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때는 애저녁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사와자키는 모치츠키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다변해졌어도 늘 자기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은행 강도를 함께 상대하여 인연을 맺게 된, 자수성가한 가이즈라는 청년을 아끼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리라.


 하라 료는 그 가이즈란 청년을 독자에게 마치 어쩌면 모치츠키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연상하도록 재현한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어서 운영 중인 사업체를 포기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이즈의 모습은 요정의 주인과 하룻밤 얽히게 된 일로 내내 마음의 빚을 떠안고 살았던 모치츠키의 모습과 겹친다. 모두가 돈과 권력을 쫓아 방해되는 인정(人情)은 손쉽게 던져버리는데 오히려 그 둘 만은 그 인정(人情)을 위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아낌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바로 그게 열쇠가 된다. 부단한 변화를 요구하며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는 상황의 압박 - 그건 좀 더 약삭빠르게 굴며 속물적이 되라는 은근한 압박이다 -에 대항하여 아무리 하찮은 의뢰라 하여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비용을 받았으면 업무 외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정산해서 남은 것은 돌려주는, 단 한 번도 허물지 않았던 자기 스스로 세운 신념을 관철하여 '사와자키'답게 있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사와자키는 더이상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엘리스가 아니게 된다. 하라 료는 변화의 부름 속에 사와자키가 선택의 기점에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설정을 매개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모치츠키에게 이중적인 신분을 가지도록 한 것이 그 하나고, 나중에 밝혀지는 모치츠키의 은신처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하룻밤 보냈던 요정의 뚜렷한 공간 대비가 그 중 하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명의 모치츠키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지점장 모치츠키의 모습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현실에 타협했을 경우 갖게 될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 하게 되었을수도 있는.


 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처음 열었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려 하는 요정의 묘사를 통하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과하고 늘 신사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의뢰인 모치츠키. 그가 그렇게 신사로 남아 사와자키마저 감명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요정에서의 하룻밤을 통하여 요정의 여주인을 통해 받은 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았으니까.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가이즈는 사와자키에서 자신은 어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자기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따를만한 어른의 모델이 없다는 뜻에서 영어에서 보통 청년을 뜻하는 GUYS가 얼른 연상되는 가이즈란 이름을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온갖 협잡과 기만, 갑질이 점점 정답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한번쯤 자문해 본 우리라면. 차마 양심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속률(速率)을 따라가지 못해 '내일'이 두려웠던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사와자키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도(正道)를 걸으라고. 두려움은 속물적 욕망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만든 허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마지막에서 하라 료는 그걸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와자키가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옮긴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커다란 지진이 엄습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지진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사와자키가 내내 당했던 것처럼.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예전 사무실이 있었던 노후한 건물이라면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마지막 문장이 감명 깊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열쇠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는 '내일'의 문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당당하게 마주하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협에 빈번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p. 422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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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21-03-14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진 서재 오류 때문인지 3월 5일날 올렸던 리뷰가 이상하게도 책 소개 페이지에는 나오지 않아 이렇게 중복인 줄 알면서도 다시 올립니다. 이번에 올리는 것은 소개 페이지에 마이 리뷰로 등록이 되는군요.ㅠ ㅠ
3월 5일날 올린 글엔 희선님 댓글이 있어 중복인 줄 알지만 놓아둡니다.

물감 2021-03-14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읽었습니다. 하라 료의 책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첫편부터 도전해봐야겠어요. 어쩐지 토미오카의 캐릭터가 작가랑 닮았다고 생각이 드네요ㅎㅎ

ICE-9 2021-03-15 03:18   좋아요 1 | URL
물감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기유의 넨도로이드를 삽입한 것은 그것밖에 가진 게 없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물감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정말 기유의 과묵함이 사와자키의 그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쩐지 우연이 필연이 된 느낌입니다.^^
 
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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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하라 료가 과작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그래도 14년 만의 신작이라니 너무했다. 그래서 간만에 만난 그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은 하루 한 페이지씩 아껴가며 읽어야할 것 같다. 여하튼 우리의 사립탐정 사와자키 역시 흐른 시간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젠 20대 청년에게서 "당신이 내 아버지 아닌가요?"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흐른 건 그저 세월 뿐이고 그 외는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사무실도 늘 그 자리에 그 간판 그대로 있고 들어오는 의뢰들도 늘 그게 그거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있을 수 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 변화의 시간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건 한 사람의 의뢰인과 함께 왔다. 이름은 모치츠키. '파이낸셜 저축 은행 신주쿠 지점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 그에게서 사와자키는 참으로 오랜만에 '신사'란 말에 어울리는 사내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모진 세파에 굴하지 않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자신의 윤리 의식을 관철하며 성실하게 뚜벅뚜벅 걸어 온 사람. 어쩌면 사와자키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그는 나리히라 요정의 이름을 대며 거기 여주인을 조사해 달라고 말한다. 그 때까진 여느 의뢰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던 사와자키였다. 하지만 그 의뢰인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고 있는 의뢰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 만이 아니다. 그는 부동산 업자의 방문도 받는다. 그녀는 사와자키에게 건물주가 퇴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제 오래도록 지켜왔던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시간은 그렇게 사와자키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지금까지 사와자키의 일상이란 뻔히 예측이 되는 정해진 궤도 위의 것이었지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 곳은 예측이 불가능한 삶이다. 갑자기 무언가가 엄습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빠지며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그걸 시간이라는 형태로 비유하자면, '내일'이 될 것이다. 내일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바야흐로 사와자키 앞에서 지금부터 내일이 펼쳐지려 한다.




 말했던 것처럼 평범한 의뢰라고 여겼던 거기엔 뜻밖의 것들이 사와자키를 기다리고 있다. 조사를 요청받았던 요정의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결과를 보고하러 찾아갔던 의뢰인의 직장에선 은행 강도를 당해 인질로 억류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됨됨이가 올바른 신사라고 생각했던 모치츠키의 삶은 자기가 본 겉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고 급기야 가족을 떠나 홀로 살고 있는 모치츠키의 아파트에선 얼마 전부터 함께 살고 있다는 간사이 지방의 사내가 욕조에서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은행 강도를 당하기 직전에 사라진 의뢰인은 어디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래도록 질긴 악연인 야쿠자 하시즈메가 불쑥 찾아온다. 사와자키가 당했던 은행 강도 사건에 대해 상세한 정보가 필요하다면서.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의뢰는 이렇게 야쿠자 조직까지 연루된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의뢰인을 시작으로 조사 대상이었던 요정, 동료를 버리고 혼자 달아난 은행 강도가 가진 비밀 등 사와자키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미스터리가 도처에 존재했다. 여기도 '내일', 저기도 '내일'이 고개를 빼곰이 들고 비웃듯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이미 너무나 복잡해져 버려 더이상 단순 명쾌하게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 사와자키가 그랬듯이, 휴대폰 없이 혼자 맨 몸으로 돌아다녀도 얼마든지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때는 애저녁에 지나가버린 것이다. 그랬기에 사와자키는 모치츠키를 처음 봤을 때 매료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다변해졌어도 늘 자기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또한 은행 강도를 함께 상대하여 인연을 맺게 된, 자수성가한 가이즈라는 청년을 아끼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리라.


 하라 료는 그 가이즈란 청년을 독자에게 마치 어쩌면 모치츠키의 젊은 시절이 이렇지 않았을까 연상하도록 재현한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더이상 속일 수 없어서 운영 중인 사업체를 포기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이즈의 모습은 요정의 주인과 하룻밤 얽히게 된 일로 내내 마음의 빚을 떠안고 살았던 모치츠키의 모습과 겹친다. 모두가 돈과 권력을 쫓아 방해되는 인정(人情)은 손쉽게 던져버리는데 오히려 그 둘 만은 그 인정(人情)을 위해 자신의 돈과 지위를 아낌없이 포기하려 하고 있으니까.


 바로 그게 열쇠가 된다. 부단한 변화를 요구하며 이제 좀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는 상황의 압박 - 그건 좀 더 약삭빠르게 굴며 속물적이 되라는 은근한 압박이다 -에 대항하여 아무리 하찮은 의뢰라 하여도 성실하게 수행하며 비용을 받았으면 업무 외에는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꼬박꼬박 정산해서 남은 것은 돌려주는, 단 한 번도 허물지 않았던 자기 스스로 세운 신념을 관철하여 '사와자키'답게 있을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그렇게 소설의 끝에서 사와자키는 더이상 이상한 나라를 헤매는 엘리스가 아니게 된다. 하라 료는 변화의 부름 속에 사와자키가 선택의 기점에 있었음을 여러 곳에서 설정을 매개로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모치츠키에게 이중적인 신분을 가지도록 한 것이 그 하나고, 나중에 밝혀지는 모치츠키의 은신처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하룻밤 보냈던 요정의 뚜렷한 공간 대비가 그 중 하나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두 명의 모치츠키를 만나게 되는데, 현재 지점장 모치츠키의 모습은 젊은 시절 모치츠키가 현실에 타협했을 경우 갖게 될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어쩌면 사와자키도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 하게 되었을수도 있는.


 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처음 열었을 때 초심을 잃지 않고 늘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려 하는 요정의 묘사를 통하여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과하고 늘 신사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의뢰인 모치츠키. 그가 그렇게 신사로 남아 사와자키마저 감명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요정에서의 하룻밤을 통하여 요정의 여주인을 통해 받은 것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았으니까.


 어려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가이즈는 사와자키에서 자신은 어른 남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는 아닐까 생각하면서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라는 자기 삶의 모델이 되어 줄 존재를 필요로 했다.(어쩌면 지금 청년에겐 따를만한 어른의 모델이 없다는 뜻에서 영어에서 보통 청년을 뜻하는 GUYS가 얼른 연상되는 가이즈란 이름을 준 것은 아닐까 싶다.) 실은 우리 모두가 그러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도덕이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온갖 협잡과 기만, 갑질이 점점 정답이 되어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인가 한번쯤 자문해 본 우리라면. 차마 양심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도덕적이 될 수 있는 세상의 속률(速率)을 따라가지 못해 '내일'이 두려웠던 우리라면.


 그런 우리에게 사와자키는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냥 자신의 정도(正道)를 걸으라고. 두려움은 속물적 욕망이 가능하다고 속이며 만든 허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마지막에서 하라 료는 그걸 선명하게 제시한다. 사와자키가 사건의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옮긴 사무실에 홀로 있을 때, 커다란 지진이 엄습한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 지진은 공간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이 소설에서 사와자키가 내내 당했던 것처럼. 사와자키는 생각한다. 예전 사무실이 있었던 노후한 건물이라면 붕괴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살아있다. 마지막 문장이 감명 깊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리가 찾고 싶은 열쇠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자신의 모습을 포기하는 '내일'의 문이 아니라 여전히 내 모습 그대로 있으면서 당당하게 마주하는 '내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오십 년 이상 살다 보면 놀랄 일이 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탐정 업무를 하는 탓에 죽음의 위협에 빈번이 노출되기도 하지만, 땅 속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폭력이 상대라면 악담을 내뱉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에 들린 담배를 다시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무래도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p. 422 ~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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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6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가 열네해 만에 쓴 소설이라니, 작가가 다음 소설 쓰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사와자키는 사무실을 옮기는군요 지진이 일어났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를 곳에서, 그건 다행입니다 그래도 사와자키 자신은 그렇게 많이 달라지지 않을 듯도 합니다 세상에 떠밀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겠지요

사진 보고 토미오카 기유가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기유 이름 잊어버렸는데, 찾아봤습니다 언젠가 탄지로도 기유 만큼 물의 호흡을 쓸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건 만화책 안 보고 텔레비전 만화영화만 봤습니다 이번 여름에 또 하는가 봅니다


희선

ICE-9 2021-03-14 03:41   좋아요 0 | URL
희선님도 귀멸의 칼날을 보셨군요. 저 또한 애니메이션만 봤습니다. 기유 꽤 매력적인 캐릭터죠^^
사와자키의 태도에서 두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영화 분노의 질주 3편이라 할 수 있는 도쿄 드리프트에서 미스터 한의 대사.
그는 말하죠. 틀에 갇히지 말고 너 자신인 삶을 살아라고
또 하나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 연대기‘
거기서도 기존의 관습적 생각에 지배 당하지 말고 네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라는 말을 최후의 화성인이라고 스스로 선언하면서 함께 온 동료 모두를 죽여서라도 지구의 논리로 화성을 망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스펜더가 합니다. 모두 사와자키의 동료들인 것이죠^^
 
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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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작가의 이름이 하세 세이슈였다. 놀랐다.

 '하세 세이슈하면 비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인 '불야성' 시리즈를 쓴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이런 달달한 소설을 썼다고?' 처음 '소년과 개'라는 소설의 표지를 보았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 때는 그래보였다. 아무튼 개가 주연이고 그 개와의 관계를 통해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라고 들었으니까. 하긴 개를 가지고 '불야성'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작품을 썼다간 애견인들에게 무슨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 불야성 시리즈를 완결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 그렇다면 듬뿍 맛 봐주지! 하세 세이슈가 쓴 달달한 소설의 맛을!'하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놀랍게도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대변되는 후쿠시마 사태를 작품의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주연이 되는 개, 다몬은 그 사태 때 주인을 잃은 개였다(이 사실은 소설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기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미스터리가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여기서 밝혀두도록 한다.) 그 개가 일본을 이리저리 떠몰면서 이런저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소설은 그걸 인물 하나 당 각 장 하나를 할애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의 개'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자주 잊지만 개의 조상은 원래 늑대로 그 늑대가 그러하듯이 원래는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 곳곳에서 개 다몬이 옛 주인을 떠나는 이유가 어떤 일로 인해 더이상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어서라는 게 자주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무리를 이루는 것'을 반복해서 내세우는 것에도 물론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이 계속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가족'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연히 다몬과 만나 그를 거둬들이게 되는 남자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를 홀로 돌보는 누나라는 가족이 등장한다. 남자는 장남이라 거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상 그걸 짊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할 수 없이 절도단의 도피를 위해 자신의 특기이기도 한 차량의 운전을 해 주기로 한다. 그 다음, '도둑과 개'에선 '남자와 개'에서 절도단의 리더로 나온 미겔이 주인공이다. 그는 외국인인데, 소설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남미에서 온 것 같다. 그 역시 누나가 있다. 어릴 때 모종의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고 누나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미겔은 그런 누나를 위해 절도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려주려 하고 있다. 그는 다몬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그건 어릴 때 자신을 도와주고 병으로 죽어버린 개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몬과 함께 하면서 미겔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리, 즉 가족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음 편도 그러하다. 모두 가족이 나오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무너져 있거나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밝혀진다. 다몬을 그런 가족 안으로 들어가 그 일원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역시 달달한 이야기 같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세 세이슈가 달달한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커다란 착각으로 밝혀졌다. 역시 '불야성'의 작가답게 이야기 도처에 범죄와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편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미겔은 자신과 함께 한 이는 모두 죽었다면서 자신이 마치 사신과 같다는 얘기를 한다. 알고보면 다몬이 그런 존재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달달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단 건조한 듯 보이지만 가급적 차가운 느낌을 배제한 문장이 그렇고 개와 가족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그렇다. 하드보일드에 자주 등장하는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자신만의 비극적인 사연과 현재의 고통 때문에 그저 누군가를 포용하거나 자신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외롭고 피로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범죄가 일어나고 죽음이 발생해도 마냥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채 꽃 피우지 못하고 져서 애틋하고 그들이 남겨놓은 잔향들이 아련할 뿐이다. 어쨌든 '화차'로 유명한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나오키 상 수상작으로 정하면서 감동적인 수작이라고 했는데, 감동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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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2-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먼 길을 가는 듯하네요 자신이 갈 곳으로 잘 갔을지... 개를 만난 사람은 자기 식구를 생각하고, 개를 만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네요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도 괜찮을 텐데 개는 그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니... 개도 자기 마음이 있겠지요 개와 만나는 사람 끝이 안 좋다니, 그건 아쉽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희선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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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무려 7년이라니!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이 소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타인의 비극을 한낱 자신을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짜임새와 만듦새에 거장의 아우라가 물씬 느껴졌기에 얼른 다음 작품을 만나길 고대했는데 7년이 지나 이제야 나온 것이다.


 제목은 '빛의 현관'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된 소재는 '집'이다. 주인공인 아오세 미노루는 건축가다. 거품 경제 시절, 무척 잘나갔던 그는 흠모하던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예쁜 딸 하나까지 두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경제가 붕괴하자 그도 함께 몰락해 버렸다. 거기에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과거의 잔향 속에 매몰되어 자존심만 부린 탓에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현재 그는 혼자다. 그에겐 집이 없다. 

 한 곳에 언제나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아오세가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소망. 어릴 때도 그는 집이 없었다. 댐 건설을 위해 콘크리트 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댐 건설 현장을 찾아 떠돌아다녀야했다. 그런 아오세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자연과 새를 만나게 함으로써 머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없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것도 아오세 마음에 또아리 틀고 있는 강한 정주의 욕망을 허물진 못했다. 건축가가 된 것도, 아내 유카리와 완벽한 가정을 형성하고자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욕망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집이 허락되지 않았다. 저녁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 줄 '빛의 현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오세에게 유키노 가족이 의뢰해 온다.


 "전부 맡기겠습니다.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p. 12)라는 말과 함께.


 유카리가 바라던 집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던 아오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집을 만든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북향의 빛(노스라이트)으로 가족의 삶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집을. 이러한 아오세의 진심어린 노력이 통한 것일까?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북향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아 뛰어난 건축물을 소개하는 '200선'에 'Y주택('Y'는 아마도 요시노의 이니셜이리라)'이란 이름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 


 소설은 아오세가 다른 부부에게서 주택 설계 의뢰를 맡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부부가 아오세를 지명한 건, 'Y주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오세는 'Y주택'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곧 월셋집을 정리하고 이사할 것이라 말했던 요시노가 아예 단 하루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설계사무소의 소장이자 대학교 친구인 오카지마와 함께 시나노모이와케에 있는 그 집을 직접 찾아가봤지만 있는 건 오직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보이는 의자 하나 뿐이었다.


 이 사실은 아오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Y주택' 그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자기 소망의 구현이었고 유카리와 이루지 못한 집에 대한 대리 보상이었다. 천지 사방에 자기 몸 하나 깃들 곳 없는 그가 비록 타인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겨 놓은 둥지였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오아시스처럼, 그 집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외롭고 남루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그런데 그 집마저 버려졌다니. 이건 그에게 두 개의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유카리와의 집을 상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때 키웠던 구관조 '구로'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규타로를 대신해 사왔던 '구로'. 그 새도 어느날 둥지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도 구로를 찾으로 나갔다 목숨을 잃었다. 상실, 상실, 상실. 그렇게 그는 늘 놓치고 버려짐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으리라.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그래서 알아야했다. 요시노 가족이 왜  'Y주택'을 버렸는지를. 유랑과 상실만 반복하는 궤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이름에 우리가 기대하는 미스터리는 여기서 작동한다. 실마리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다. 


브루노 타우트(1880 ~ 1938)


 의자의 출처를 쫓다 브루노 타우트의 삶까지 알게된 아오세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 건축가를 피해왔다는 걸 자각한다. 히데오는 그 이유를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오세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건 브루노 타우트의 삶이 아오세의 것과 닮아있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했다. 그 뒤로도 계속 떠돌아다녔고 결국 타국에서 죽었다. 아오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타우트에겐 집이 없었다. 아오세가 그렇듯이.


 그러므로 히데오가 하필이면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를 가져와 아오세로 하여금 대면하게 한 것은 더이상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내 유카리와 그의 딸 히나코에 대한 것도. 자기가 놓아버린 모든 것들을.


 그는 내버려 두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용기가 없어 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했다. 자기가 나서서 자신만의 집을 직접 만들기 보다는 남의 집을 통해 대리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집을 가질 수 없었다. 달라져야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직시하고 거기 놓여 있는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뛰어들어야했다. 타우트의 의자는 그 출발을 위한 신호였다. 의자를 보고나서 아오세가 요시노를 추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의자라는 소품을 배치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 홀로 있는 의자란 무엇보다 묵상을 위한 장소가 아니던가.


 '빛의 현관'은 단적으로 집을 상실한 아오세가 다시 그 현관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시노 일가의 실종 미스터리는 그 귀환의 주된 안내자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물음이란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는가?'로 이건 태도와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집이란 진정 무엇인가?'로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태도에 대해선 이미 말했다. 바로 직시(直示)요 돌입(突入)이다. 아오세가 자기 발로 직접 뛰며 요시노 일가의 미스터리를 뒤쫓는 것 자체에 이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누군가에 기대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손과 발로 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데오가 아오세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아오세가 오카지마와 더불어 'Y주택'을 찾아갔을 때처럼 누군가와 같이 그 일을 했을 때는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걸 얻을 수 있었을 때는 오직 혼자 했을 때였다. 


 '빛의 현관'은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홀로 자기 손으로 직접 열어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집이란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로 여기기 쉽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집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관건인 문제로 말이다. 그러나 히데오는 소설을 통해 분명하게 말한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히데오는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길잡이로 초대한다. 그것이 바로 오카지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요시노 일가 못지 않게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는 까닭은 아오세가 실존했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를 매개로 요시노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오카지마에 대해서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를 매개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게끔 히데오가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세가 요시노의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타우트의 의자를 통하여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오세가 오카지마라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공모전 출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후지미야 하루코 기념관의 스케치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였다.


 오카지마가 그토록 공모전에 힘을 쓴 것은 아오세처럼 자기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집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도 아오세와 똑같았다. 그 역시 집이라는 둥지가 없는 자였던 것이다. 아오세는 현재의 오카지마가 잘난 척하기 바쁘고 허세나 곧잘 부리던 과거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다는 걸 알고 놀란다. 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알게 되는데, 그 또한 가족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오세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어딘가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집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이렇게 다소 모호하게 쓴 것은 여기와 연관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이니 양해해주시길.)


 바로 이 오카지마의 선택에 소설의 주제가 나타나 있다.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한 히데오의 대답이 말이다. 어쩌면 브루노 타우트와 후지미야 하루코가 가지는 공통점에서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둘 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살았지만 그 타향 또한 얼마든지 집이라 여기고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 이들이었으니까. 이처럼 타우트와 하루코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이와 관련하여 요코야마 히데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작 '64'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거주 보다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 그런지 우리는 종종 집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곤 한다. 그냥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을. 집은 삶의 현장이고 그 속에서 오랜 시간 어우러지며 영글어지는 경험의 총체(總體)다. 


 예전에 아주 유명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선 등장인물이 사는 방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의 방에 들어가는 건 곧 그라는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히데오가 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집이란 곧 사는 사람의 존재인 것이다. 오카지마의 기념관 구상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화가 유족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기념관에 찾아온 관객들이 그 방문을 통해 하루코라는 존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오세 역시 'Y주택'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거기에 북향 깊이 스며든 아버지와의 추억과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타우트는 머나 먼 일본에서 애초에 자신이 건축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을 평범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함으로써 마음을 이어나갔고 하루코는 세상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해 몇 백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누구보다 크고 굳건한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집은 그런 마음들에서 비로소 존재했다. 오직 그런 마음의 터전 위에서라야 진정한 집은 온전히 건축될 수 있었다. '빛의 현관'에서 뻗어나오는 들어오는 이를 소중히 감싸는 따스한 빛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의 열기였다.


 집을 그저 집이라는 기호로 보는 이에겐 집은 결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를 위한 마음으로 집을 지으려는 이에게만 집은 기꺼이 자신의 두 팔을 벌렸다. 이는 전작 '64'에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진짜 비극은 서로 타인의 삶을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 단순한 기호로만 봤던 것에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64' P. 566)


 놀랍게도 이러한 기자들의 행태는 '빛의 현관'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오카지마를 파국으로 내몬 신문 기자의 모습이 그러한데, 오카지마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예단을 정당화 하는 정보만 취사 선택한다는 점이 이와 똑같다. '빛의 현관'엔 사물을 그저 기호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타우드와 하루코는 물론이고 기념관을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하루코라는 존재 자체라고 보았던 오카지마도 그렇고 북향의 빛을 그저 기호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으로 여겼던 아오세도 그렇고 구관조 '구로'를 한낱 기호로써의 새가 아니라 아오세라고 여겼던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곧 삶이요,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아오세는 새로운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롯이 헤아릴 수 있도록.

  '고객님 가족만을 위한 집을 지읍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p. 471)


 이처럼 '빛의 현관'은 '64'에서 경찰 조직을 가지고 보다 방대한 규모로 세공했던 주제를 '집'이라는 존재로 보다 한정해선 더 집중시키고 또한 '집'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곳보다 살아가는 존재를 더 깊이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인만큼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왜 '64'에서도 그렇고 '빛의 현관'에서도 그렇고 타자를 헤아린다는 것에 대하여 천착하는 것일까? 역시나 그건 '원전 사태'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소설에서 버려진 'Y주택'을 보고 떠올렸던 것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원전 사태 이후 후쿠시마에 버려진 집들이었다. 


[원전 사태 4년 후의 후쿠시마 풍경 중에서]


 어쩌면 히데오도 같은 풍경을 보고서 이런 집에 빛을 다시 가져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빛의 현관'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아오세가 거품 경제의 붕괴로 모든 걸 잃어버렸던 것도 '원전 사태' 재난의 비유로 보인다. 이러한 현재의 아오세들에게 소설은 전하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마지막 문장이 둥지를 지을 재료를 입에 꼭 물고 날아가는 제비를 묘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방법으론 그럴 수 없다. 거품 경제 시절에 아오세와 오카지마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삶을 그저 이윤과 교환 가능한 단순한 기호로 보는 한은 말이다. 집의 진정한 부활은 오직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귀 기울여 깊이 듣고 헤아릴 때 도래한다. '빛의 현관'은 이 교훈을 독자의 마음에 차분하면서도 세심하게 각인시키는 여정이다.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고양이 털처럼 뺨에 비비고 싶은 현관의 빛은 무작정 남에게서 받으려 할 때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주려할 때 생성된다는 걸.


 봄의 따스함을 절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영하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처지라 그런지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말이다. 시린 손을 홀로 아무리 비벼봤자 온기는 조금도 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을 보듬고 애정으로 감싸줄 때라야 온기는 비로소 찾아온다. 밤늦게 찾아올지도 모를 객손을 위해 계속 현관의 등을 켜두는 것과도 같이 그런 온기를 먼저 나서서 나눠주는 손이 세상에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덧붙여, '빛의 현관'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작인 '64'와 주제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같이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7년 전에 쓴 '64'에 대한 리뷰를 여기에 링크해 본다.


https://blog.aladin.co.kr/748481184/644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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