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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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작가의 이름이 하세 세이슈였다. 놀랐다.

 '하세 세이슈하면 비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인 '불야성' 시리즈를 쓴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이런 달달한 소설을 썼다고?' 처음 '소년과 개'라는 소설의 표지를 보았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 때는 그래보였다. 아무튼 개가 주연이고 그 개와의 관계를 통해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라고 들었으니까. 하긴 개를 가지고 '불야성'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작품을 썼다간 애견인들에게 무슨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 불야성 시리즈를 완결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 그렇다면 듬뿍 맛 봐주지! 하세 세이슈가 쓴 달달한 소설의 맛을!'하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놀랍게도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대변되는 후쿠시마 사태를 작품의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주연이 되는 개, 다몬은 그 사태 때 주인을 잃은 개였다(이 사실은 소설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기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미스터리가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여기서 밝혀두도록 한다.) 그 개가 일본을 이리저리 떠몰면서 이런저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소설은 그걸 인물 하나 당 각 장 하나를 할애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의 개'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자주 잊지만 개의 조상은 원래 늑대로 그 늑대가 그러하듯이 원래는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 곳곳에서 개 다몬이 옛 주인을 떠나는 이유가 어떤 일로 인해 더이상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어서라는 게 자주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무리를 이루는 것'을 반복해서 내세우는 것에도 물론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이 계속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가족'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연히 다몬과 만나 그를 거둬들이게 되는 남자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를 홀로 돌보는 누나라는 가족이 등장한다. 남자는 장남이라 거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상 그걸 짊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할 수 없이 절도단의 도피를 위해 자신의 특기이기도 한 차량의 운전을 해 주기로 한다. 그 다음, '도둑과 개'에선 '남자와 개'에서 절도단의 리더로 나온 미겔이 주인공이다. 그는 외국인인데, 소설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남미에서 온 것 같다. 그 역시 누나가 있다. 어릴 때 모종의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고 누나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미겔은 그런 누나를 위해 절도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려주려 하고 있다. 그는 다몬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그건 어릴 때 자신을 도와주고 병으로 죽어버린 개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몬과 함께 하면서 미겔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리, 즉 가족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음 편도 그러하다. 모두 가족이 나오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무너져 있거나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밝혀진다. 다몬을 그런 가족 안으로 들어가 그 일원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역시 달달한 이야기 같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세 세이슈가 달달한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커다란 착각으로 밝혀졌다. 역시 '불야성'의 작가답게 이야기 도처에 범죄와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편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미겔은 자신과 함께 한 이는 모두 죽었다면서 자신이 마치 사신과 같다는 얘기를 한다. 알고보면 다몬이 그런 존재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달달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단 건조한 듯 보이지만 가급적 차가운 느낌을 배제한 문장이 그렇고 개와 가족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그렇다. 하드보일드에 자주 등장하는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자신만의 비극적인 사연과 현재의 고통 때문에 그저 누군가를 포용하거나 자신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외롭고 피로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범죄가 일어나고 죽음이 발생해도 마냥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채 꽃 피우지 못하고 져서 애틋하고 그들이 남겨놓은 잔향들이 아련할 뿐이다. 어쨌든 '화차'로 유명한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나오키 상 수상작으로 정하면서 감동적인 수작이라고 했는데, 감동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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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2-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먼 길을 가는 듯하네요 자신이 갈 곳으로 잘 갔을지... 개를 만난 사람은 자기 식구를 생각하고, 개를 만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네요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도 괜찮을 텐데 개는 그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니... 개도 자기 마음이 있겠지요 개와 만나는 사람 끝이 안 좋다니, 그건 아쉽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희선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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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이 길었다. 무려 7년이라니! 

 개인적으로 사회파 미스터리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이 소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타인의 비극을 한낱 자신을 위한 수단 정도로 취급하는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었다. 짜임새와 만듦새에 거장의 아우라가 물씬 느껴졌기에 얼른 다음 작품을 만나길 고대했는데 7년이 지나 이제야 나온 것이다.


 제목은 '빛의 현관'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암시가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주된 소재는 '집'이다. 주인공인 아오세 미노루는 건축가다. 거품 경제 시절, 무척 잘나갔던 그는 흠모하던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예쁜 딸 하나까지 두어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경제가 붕괴하자 그도 함께 몰락해 버렸다. 거기에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과거의 잔향 속에 매몰되어 자존심만 부린 탓에 이혼까지 당하고 말았다.



 현재 그는 혼자다. 그에겐 집이 없다. 

 한 곳에 언제나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아오세가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소망. 어릴 때도 그는 집이 없었다. 댐 건설을 위해 콘크리트 틀 만드는 일을 하는 아버지 때문에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댐 건설 현장을 찾아 떠돌아다녀야했다. 그런 아오세에게 아버지는 거대한 자연과 새를 만나게 함으로써 머무르지 못한다고 해서 의미없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 했지만 그것도 아오세 마음에 또아리 틀고 있는 강한 정주의 욕망을 허물진 못했다. 건축가가 된 것도, 아내 유카리와 완벽한 가정을 형성하고자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욕망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집이 허락되지 않았다. 저녁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 줄 '빛의 현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아오세에게 유키노 가족이 의뢰해 온다.


 "전부 맡기겠습니다. 아오세 씨가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p. 12)라는 말과 함께.


 유카리가 바라던 집을 지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던 아오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집을 만든다.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북향의 빛(노스라이트)으로 가족의 삶을 부드럽게 감싸는 그런 집을. 이러한 아오세의 진심어린 노력이 통한 것일까?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북향의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평가를 받아 뛰어난 건축물을 소개하는 '200선'에 'Y주택('Y'는 아마도 요시노의 이니셜이리라)'이란 이름으로 선정되기까지 한다. 


 소설은 아오세가 다른 부부에게서 주택 설계 의뢰를 맡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부부가 아오세를 지명한 건, 'Y주택'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오세는 'Y주택'에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곧 월셋집을 정리하고 이사할 것이라 말했던 요시노가 아예 단 하루도 거기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자신이 일하고 있는 설계사무소의 소장이자 대학교 친구인 오카지마와 함께 시나노모이와케에 있는 그 집을 직접 찾아가봤지만 있는 건 오직 나치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던 독일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보이는 의자 하나 뿐이었다.


 이 사실은 아오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  'Y주택' 그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자기 소망의 구현이었고 유카리와 이루지 못한 집에 대한 대리 보상이었다. 천지 사방에 자기 몸 하나 깃들 곳 없는 그가 비록 타인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남겨 놓은 둥지였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오아시스처럼, 그 집이 어딘가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 외롭고 남루한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그런데 그 집마저 버려졌다니. 이건 그에게 두 개의 사실을 환기시킨다. 

 하나는 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유카리와의 집을 상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릴 때 키웠던 구관조 '구로'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규타로를 대신해 사왔던 '구로'. 그 새도 어느날 둥지를 버리고 사라졌다. 그와 함께 아버지도 구로를 찾으로 나갔다 목숨을 잃었다. 상실, 상실, 상실. 그렇게 그는 늘 놓치고 버려짐의 파도 속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으리라.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그래서 알아야했다. 요시노 가족이 왜  'Y주택'을 버렸는지를. 유랑과 상실만 반복하는 궤적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라도.


 요코야마 히데오라는 이름에 우리가 기대하는 미스터리는 여기서 작동한다. 실마리는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다. 


브루노 타우트(1880 ~ 1938)


 의자의 출처를 쫓다 브루노 타우트의 삶까지 알게된 아오세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 건축가를 피해왔다는 걸 자각한다. 히데오는 그 이유를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는다. 그러나 아오세의 심리를 잘 표현해 놓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건 브루노 타우트의 삶이 아오세의 것과 닮아있는 동시에 그의 아버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는 걸. 그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살아야했다. 그 뒤로도 계속 떠돌아다녔고 결국 타국에서 죽었다. 아오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타우트에겐 집이 없었다. 아오세가 그렇듯이.


 그러므로 히데오가 하필이면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를 가져와 아오세로 하여금 대면하게 한 것은 더이상 회피하지 말고 직시하란 뜻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것도, 아내 유카리와 그의 딸 히나코에 대한 것도. 자기가 놓아버린 모든 것들을.


 그는 내버려 두었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용기가 없어 늘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을 선택했다. 자기가 나서서 자신만의 집을 직접 만들기 보다는 남의 집을 통해 대리 충족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걸로는 집을 가질 수 없었다. 달라져야했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직시하고 거기 놓여 있는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뛰어들어야했다. 타우트의 의자는 그 출발을 위한 신호였다. 의자를 보고나서 아오세가 요시노를 추적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의자라는 소품을 배치한 것도 무관하지 않다. 홀로 있는 의자란 무엇보다 묵상을 위한 장소가 아니던가.


 '빛의 현관'은 단적으로 집을 상실한 아오세가 다시 그 현관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요시노 일가의 실종 미스터리는 그 귀환의 주된 안내자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물음이란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 집을 되찾을 수 있는가?'로 이건 태도와 관련이 있다. 다른 하나는 '집이란 진정 무엇인가?'로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것이다. 태도에 대해선 이미 말했다. 바로 직시(直示)요 돌입(突入)이다. 아오세가 자기 발로 직접 뛰며 요시노 일가의 미스터리를 뒤쫓는 것 자체에 이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누군가에 기대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손과 발로 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데오가 아오세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처음에 아오세가 오카지마와 더불어 'Y주택'을 찾아갔을 때처럼 누군가와 같이 그 일을 했을 때는 제대로 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그가 그걸 얻을 수 있었을 때는 오직 혼자 했을 때였다. 


 '빛의 현관'은 찾아왔다고 해서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홀로 자기 손으로 직접 열어야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집이란 나의 외부에 있는 존재로 여기기 쉽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집이 있고 그걸 발견하는 것이 관건인 문제로 말이다. 그러나 히데오는 소설을 통해 분명하게 말한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어리둥절할 당신을 위해 히데오는 여기서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길잡이로 초대한다. 그것이 바로 오카지마다.

 나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또한 요시노 일가 못지 않게 소설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여기는 까닭은 아오세가 실존했던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를 매개로 요시노라는 존재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이 오카지마에 대해서도 화가 후지미야 하루코를 매개로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게끔 히데오가 설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세가 요시노의 아버지를 쉽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타우트의 의자를 통하여 그의 삶을 깊이 들여다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오세가 오카지마라는 인간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가 공모전 출품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후지미야 하루코 기념관의 스케치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였다.


 오카지마가 그토록 공모전에 힘을 쓴 것은 아오세처럼 자기도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집을 남기고 싶어서였다. 그도 아오세와 똑같았다. 그 역시 집이라는 둥지가 없는 자였던 것이다. 아오세는 현재의 오카지마가 잘난 척하기 바쁘고 허세나 곧잘 부리던 과거 모습과 너무 달라져 있다는 걸 알고 놀란다. 그 이유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알게 되는데, 그 또한 가족이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오세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한다. 어딘가 더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현재 주어진 집을 더 좋게 만드는 것에 충실하기로 한 것이다.(이렇게 다소 모호하게 쓴 것은 여기와 연관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서이니 양해해주시길.)


 바로 이 오카지마의 선택에 소설의 주제가 나타나 있다.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한 히데오의 대답이 말이다. 어쩌면 브루노 타우트와 후지미야 하루코가 가지는 공통점에서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겠다. 둘 다 조국을 떠나 타향에서 살았지만 그 타향 또한 얼마든지 집이라 여기고 누구보다 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간 이들이었으니까. 이처럼 타우트와 하루코는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이와 관련하여 요코야마 히데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작 '64'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거주 보다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 그런지 우리는 종종 집에 대한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곤 한다. 그냥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가 사는 소중한 장소라는 것을. 집은 삶의 현장이고 그 속에서 오랜 시간 어우러지며 영글어지는 경험의 총체(總體)다. 


 예전에 아주 유명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아비정전'에선 등장인물이 사는 방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한다. 그의 방에 들어가는 건 곧 그라는 존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같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히데오가 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집이란 곧 사는 사람의 존재인 것이다. 오카지마의 기념관 구상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화가 유족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기념관에 찾아온 관객들이 그 방문을 통해 하루코라는 존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오세 역시 'Y주택'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건, 거기에 북향 깊이 스며든 아버지와의 추억과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한껏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타우트는 머나 먼 일본에서 애초에 자신이 건축을 통해 하려고 했던 것을 평범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계속 함으로써 마음을 이어나갔고 하루코는 세상의 그 어떤 관심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한 사람을 위해 몇 백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누구보다 크고 굳건한 자신의 집을 가질 수 있었다.


 집은 그런 마음들에서 비로소 존재했다. 오직 그런 마음의 터전 위에서라야 진정한 집은 온전히 건축될 수 있었다. '빛의 현관'에서 뻗어나오는 들어오는 이를 소중히 감싸는 따스한 빛은 무엇보다도 그 사람을 위하는 애틋한 마음의 열기였다.


 집을 그저 집이라는 기호로 보는 이에겐 집은 결코 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먼저 사람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를 위한 마음으로 집을 지으려는 이에게만 집은 기꺼이 자신의 두 팔을 벌렸다. 이는 전작 '64'에서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 소설에서 진짜 비극은 서로 타인의 삶을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 단순한 기호로만 봤던 것에서 창출되었기 때문이다.


 사건을 쫓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그들에게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골 경찰, 시골 홍보담당관.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칠 뿐이다. 단순한 기호다. 상대에 대해 알려는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64' P. 566)


 놀랍게도 이러한 기자들의 행태는 '빛의 현관'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오카지마를 파국으로 내몬 신문 기자의 모습이 그러한데, 오카지마에 대해선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예단을 정당화 하는 정보만 취사 선택한다는 점이 이와 똑같다. '빛의 현관'엔 사물을 그저 기호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타우드와 하루코는 물론이고 기념관을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하루코라는 존재 자체라고 보았던 오카지마도 그렇고 북향의 빛을 그저 기호가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뻗어나오는 빛으로 여겼던 아오세도 그렇고 구관조 '구로'를 한낱 기호로써의 새가 아니라 아오세라고 여겼던 그의 아버지도 그렇고.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깨닫지 않을 수 있을까? 집은 곧 삶이요, 마음이라는 것을.

 그러므로 아오세는 새로운 고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오롯이 헤아릴 수 있도록.

  '고객님 가족만을 위한 집을 지읍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p. 471)


 이처럼 '빛의 현관'은 '64'에서 경찰 조직을 가지고 보다 방대한 규모로 세공했던 주제를 '집'이라는 존재로 보다 한정해선 더 집중시키고 또한 '집'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곳보다 살아가는 존재를 더 깊이 실감할 수 있는 장소인만큼 훨씬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작업이다. 이쯤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그는 왜 '64'에서도 그렇고 '빛의 현관'에서도 그렇고 타자를 헤아린다는 것에 대하여 천착하는 것일까? 역시나 그건 '원전 사태'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소설에서 버려진 'Y주택'을 보고 떠올렸던 것은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원전 사태 이후 후쿠시마에 버려진 집들이었다. 


[원전 사태 4년 후의 후쿠시마 풍경 중에서]


 어쩌면 히데오도 같은 풍경을 보고서 이런 집에 빛을 다시 가져다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서 '빛의 현관'이 시작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일까? 아오세가 거품 경제의 붕괴로 모든 걸 잃어버렸던 것도 '원전 사태' 재난의 비유로 보인다. 이러한 현재의 아오세들에게 소설은 전하려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마지막 문장이 둥지를 지을 재료를 입에 꼭 물고 날아가는 제비를 묘사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전과 같은 방법으론 그럴 수 없다. 거품 경제 시절에 아오세와 오카지마가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삶을 그저 이윤과 교환 가능한 단순한 기호로 보는 한은 말이다. 집의 진정한 부활은 오직 타인의 삶을 내 삶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귀 기울여 깊이 듣고 헤아릴 때 도래한다. '빛의 현관'은 이 교훈을 독자의 마음에 차분하면서도 세심하게 각인시키는 여정이다. 너무나 따스하고 부드러워서 고양이 털처럼 뺨에 비비고 싶은 현관의 빛은 무작정 남에게서 받으려 할 때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주려할 때 생성된다는 걸.


 봄의 따스함을 절로 그리워하게 만드는 영하의 겨울을 견디고 있는 처지라 그런지 더욱 살갑게 다가오는 말이다. 시린 손을 홀로 아무리 비벼봤자 온기는 조금도 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을 보듬고 애정으로 감싸줄 때라야 온기는 비로소 찾아온다. 밤늦게 찾아올지도 모를 객손을 위해 계속 현관의 등을 켜두는 것과도 같이 그런 온기를 먼저 나서서 나눠주는 손이 세상에 점점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끝으로 남기며 글을 마친다.



 덧붙여, '빛의 현관'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작인 '64'와 주제가 이어지고 있으므로 같이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7년 전에 쓴 '64'에 대한 리뷰를 여기에 링크해 본다.


https://blog.aladin.co.kr/748481184/644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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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나기라 유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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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노래 중에 엄정화가 부른 '하늘만이 허락한 사랑'이란 노래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랑을 하는 이의 입장에서 부르는 노래로, 그래도 우리 사랑은 하늘만은 허락하리라는 애절함이 담겨 있다. 일본 작가 나가라 유의 '유량의 달'을 읽으며 이 노래가 언뜻 떠올랐다. 왜냐하면 소설 속 사랑도 하늘만이 허락할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가나이 사라사. 여성이다. 그녀는 어릴 적 완벽한 가정에서 살았다. 부유해서가 아니다.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사라사가 저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도 야단치지 않고, 말리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집. 반대와 간섭은 없고, 존중과 배려만이 존재하는 집.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주며 설사 세상이 이해하지 못할 개성이라도 해도 그것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응원해 주는 집. 그녀는 그런 곳에 있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때이른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집은 산산조각 나버리고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 살게 된다. 그 때부터 사라사 삶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이모네 집은 자기 집과 정반대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개성을 훈육으로 몰개성으로 만들어비리는 집. 자유는 없었다. 답답함만이 가득했던 그 곳에서 사라사를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건 이종 사촌 오빠가 밤마다 나쁜 짓을 하러 자신의 방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때가 아홉살이었다. 그녀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았다. 그러다 늘 놀이터에 나와서 어린 소녀들을 얌전히 훔쳐보던 후미란 대학생과 알게 되었다. 후미의 집에 놀러간 사라사는 후미가 예전 부모님처럼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존중해주자 마치 다시 예전의 그 집을 찾은 것만 같아서 그 곳에 살고싶어진다. 그렇게 두 달 동안 후미 집에서 살았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모네 가족은 실종신고를 냈고 나중에 후미는 소아성애자에다 유괴범이 되어 경찰에 체포된다. 사라사는 사회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알리고 싶지만 아이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어른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후미 없이 산 지 15년 뒤, 예전의 개성을 소진하고 사람들 생각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던 사라사 앞에 우연히 후미가 다시 나타난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집이 없어진 이후로 늘 그 어디에도머물지 못하고 소설의 제목처럼 유랑하며 살아왔다. 후미를 다시 본 순간, 사라사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유량을 끝내고 진정으로 정박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후미라는 걸. 그러나 세상의 눈이 무섭다. 사회는 아직도 사라사의 유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진실을 모르는 그들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사랑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사는 후미에게로 이끌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이 사랑은 어떻게 될까? 하늘만이 허락할 이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소아성애자와의 사랑이라는 꽤나 충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는 '유랑의 달'은 소재의 불편함만 넘길 수 있다면 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사라사의 심리 표현이 너무나 섬세하게 잘 되어있어 독자의 공감을 잘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해선 안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가 없어 표류하는 이가 간신히 자신의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그런 유랑의 심리라면 우리 역시 살면서 종종 가지기 때문이다. 나가라 유는 처음 만나게 된 작가인데 문장이 좋았다. 그 때문에 더욱 이 소설이 파격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어 마침내 2020년 서점 대상 1위라는 영예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서점 대상은 대중성이 담보된 상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소재가 가지는 한계를 세심한 심리 묘사와 이야기 전개로 제대로 돌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작가의 능력이 상당한 것 같다.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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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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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일본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 이번에 그가 쓴 '무죄의 죄'가 출간되었다. 6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입소문만으로 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만하면 비평과 대중적 인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닌 듯하다. 제목에서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에 속한다는 걸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데 온전히 거기에만 할애되어 있는 건 아니다. 절반은 삶이 지는 씁슬한 비애감과 다소의 뭉클함이 느껴지는, 인간 드라마라고 부를만한 것이 차지하고 있다. 나는 이 소설을 그 둘의 교집합으로 이해하며 그 각각이 하나의 질문을 근간으로 하여 구축되어 있다고 본다.


 그 질문이란, 하나는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제도는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이다. 

전자의 질문은 인간 드라마 부분이, 후자의 질문은 미스터리 부분이 해답을 찾아간다.



 책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시작의 프롤로그와 끝의 에필로그 그리고 본편이 되는 1부('사건 전야')와 2부('판결 이후')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이제 24세가 된 여성, 다나카 유키노. 그는 방화로 임산부와 그녀의 쌍둥이 두 딸을 살해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다. 시작에서 우리는 그녀가 막 사형 집행을 당할 순간에 있음을 본다. 프롤로그에선 법정에서 피고인은 인생을 건 연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취미로 재판 방청을 즐기다 급기야 교도관까지 된 여성 사도야마의 눈으로 다나카 유키노와 그녀가 저지른 사건 정황이 소개된다. 소설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도 그녀가 화자를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의 사건은 단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거기서 우리는 다나카 유키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자신을 버린 남자 게이스케를 집요하게 스토킹 했으며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한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나 새아버지에게서 학대를 받았고 강도 치사로 아동자립지원시설에 입소한 전력이 있다는 걸 듣게 된다. 그런 불우한 과거와 끔찍한 범죄 때문에 사회는 그녀를 서슴없이 '괴물'로 부르고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저런 쓰레기는 빨리 죽여야 해'(p. 27)'라고 말한다. 그렇게 이 사건도, 사람도 사도야마가 술집에서 들었던 어떤 낯선 남자의 말처럼 '딱 그래 보이네'(p. 33)하는 한 문장으로 모두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사건 전야'라는 제목을 가진 1부는 이런 생각이 오해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여정이다.

여기서는 마치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처럼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가 있는 주변 인물들의 육성 고백을 통해 하나하나 계단을 올라가듯 유키노라는 인물과 그 범행의 진실을 보여준다. 열일곱 살에 호스티스로 일했다는 것 때문에 무책임한 엄마로 낙인찍힌 유키노의 어머니 히카루는 '단 한 사람에게라도 큰 사랑을 받으면 그 아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로 히카루가 유키노를 낙태하는 걸 그만두게 한 산부인과 의사 단게의 고백으로 오히려 자식에게 책임을 다하려고 애쓴 정반대의 인물로 밝혀지고 법정에서 '태어나서 죄송합니다'란 말로 모두를 놀라게 한 유키노 역시 배다른 언니 요코의 고백을 통해 백 살까지 살기를 꿈꿨던 천진난만하고 착한 소녀에 불과헸다는 게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유키노가 프롤로그에서 봤던 것과 전혀 다른 존재였다는 것, 그렇게 사람도, 사건도 모두 '딱 그래 보이네'라는 말로 단정이 결단코 불가능한 복잡한 이면이 배여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아무 죄 없이, 제목처럼 무죄라는 죄 때문에 거기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판결 이후'라는 제목을 가진 2부는 그런 무죄의 죄 때문에 갇혀 있는 유키노를 사형에서 구하기 위한 여정이다.

 1부, 요코의 기억에서 잠깐 소개된 유키노의 어릴 적 친구 단게 쇼와 신이치가 여기서 주역을 맡는다. 다나카 유키노를 버린 게이스케의 친구로 등장해 게이스케와 다나카 유키노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 핫타 사토리 또한 등장한다. 1부가 인간 드라마적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미스터리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다나카 유키노가 진범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친구였지만 다나카 유키노가 이기적인 외할머니 다나카 미치코에게 끌려가 강제로 이별한 뒤로 오래도록 못 봤지만 단게 쇼가 매스컴이 묘사하고 있는 다나카 유키노의 모습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기억 속 그녀가 진짜 모습이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나카 유키노와 아무런 개인적 접점이 없는 이들이 자기식대로 편집하고 해석하며 덧칠한 일반론을 따르기 보다는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웠던 어린 마음 속에 와 닿았던 그녀의 말과 마음을 따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 기대어 커다란 먹구름으로 자라난 세간의 정의(定義)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건 신이치, 핫타도 마찬가지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주변 인물들의 눈을 통해서 다나카 유키노라는 인물상을 구성해 나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한다. 바로 그 개인적인 접점이 중요하다는 걸. 단게와 요코, 핫타와 쇼 그리고 신이치와 같이 내가 판단하려는 상대와 함께 한 눅진한 경험이 없다면 남들이 일으키는 풍문에 따라 덮어놓고 판단해선 안된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왜 한 챕터를 시작할 때 다나카 유키노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문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인용하는 이유 또한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은 '딱 그래 보이네'에 따라 형성된 일반론의 집약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 내용들은 그걸 차례로 배반한다. 우리는 아주 잘 알게 된다. 판결문은 아무런 진실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편견과 무지 그리고 오해와 무책임의 덩어리라는 것을. 이런 것을 근거로 내려지는 사형을 우리는 과연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사형은 과연 존치할만한 것인가?'의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그걸 내리는 판사는 피고와 아무런 개인적인 접점이 없다. 오직 제출된 증거와 변론만이 전부다. 판관은 그래야 객관적일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만일 그 근거가 되는 것들이 다나카 유키노의 경우처럼 잘못되었다면? 사형은 형법이 가진 최고의 형벌이므로 그것을 언도하는데 있어선 그 무게에 걸맞는 신중함이 요구된다. 원죄, 즉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사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피고의 모든 인격과 삶을 철저히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다. 경우에 따라선 쇼와 신이치처럼 아주 개인적이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험이 있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진실된 초상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을 여는 사도야마도 그렇고, 쇼와 신이치도 그렇고, 블로그를 통해 개인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 있는 핫타도 그렇고 계속 편지라는 형태의 개인적인 글로 다나카 유키노와 관계를 맺게하는 이유가 뭘까? 매스컴 앞에선 오직 괴물의 면모만 보였던 다나카 유키노가 참된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열어보이는 것도 그런 개인적인 편지들인데 과연 그 이유는 뭘까? 굳이 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진실은 급하게 먹어선 도저히 알 수가 없고 마치 뜸을 들여야 밥이 익는 것처럼 깊고도 오래된 경험의 공유가 있고서야 마침내 드러난다는 말 외엔.


우리는 그렇기에 섣부른 추정이 불러 올 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사형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한계로 인해서 무죄의 죄가 언제든 생길 수 있으므로...


이건 비단 사형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로써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 어서 빨리 죽고싶다는 열망밖에 없는 다나카 유키노를 만난다. 그녀는 왜 그런 절망만을 안게 되었던가? 그녀는 단게가 말했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사랑해주었으면 이러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쇼와 신이치, 핫타를 본다.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코와 오조네 리코도 본다. 그녀의 바람은 충족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살 방도가 열릴 수 있는데도 유키노는 그러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러한 것들이 그녀에게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선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지만 유키노에게 보이는 건 사막 뿐이었다. 편지를 통해 작은 반딧불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사막을 밝히기엔 너무나 모자라 보였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래서 걸음을 멈춰버린 것이다. 만일 그 작은 반딧불을 그저 미력하다고 여기지 않고 더 큰 것으로 봤었다면 어땠을까? 그것을 곧 적만한 어둠이 올 것이라는 황혼이 아니라 밝은 아침이 찾아오리라는 여명의 빛으로 인지했었다면 결말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쇼와 신이치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시절에 가장 좋은 추억을 공유했던 친구들을 신뢰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왜 사회가 멋대로 만든 규정을 스스로 받아들여버렸을까? 너무 단순한 판단인지도 모르겠지만 사회가 다나카 유키노를 바라봤던 것처럼 유키노 역시 삶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난 생각한다.


삶에 정말 도움이 되는 진실들은 그저 감처럼 툭 떨어지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 깊고도 오랜 숙성이 필요하다. 물론 나는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만한 깜냥은 안된다. 자격도 없다. 다만 이런 말만 남겨두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절망은 우리의 성급함이 자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조금은 긴 호흡으로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 사형에 대한 것도, 우리가 만나는 허다한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나보는 작가, 하야미 가즈마사의 '무죄의 죄'는 이런 문장들로 응집될 파문들을 계속 일으키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도 오래도록.


이 소설엔 놀라운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충분히 납득되도록 단서도 다 깔아두고 있는데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일절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한다. 이걸 쓰는 이유는 그런 반전 때문에 미스터리 물로써도 꽤 읽을만한 작품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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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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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미타빌, 일본의 주온. 모두 특정한 공간이 가득한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로부터 공간은 다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은 신성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또 어떤 공간은 아주 사악한 힘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졌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재 도시에 떠도는 괴담들 역시 어떤 공간을 무대로 한 것이 많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악의를 제한없이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이른바 '이야미스' 장르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일본의 여성 작가 마리 유키코. 그녀가 이번에는 모처럼 이야미스 장르를 떠나 아미타빌이나 주온처럼 공간을 무대로 한 호러 연작집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이사'. 일본에선 2013년에 발표된 책이다.




  모두 여섯 편이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 '이사'인 것은 그 내용이 다들 이사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첫 단편, '문'에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살인마가 살던 곳이라는 걸 알게된 여성이 이사를 위해 어떤 집을 방문하여 살펴보다가 숨겨진 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나오고 두 번째 '수납장'은 남편 없이 홀로 외동딸을 키우는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창 이사 준비를 하다 수납장에서 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세 번째 '책상'은 이사짐 센터 업체에서 전화 접수 업무를 갓 맡은 주부가 자기가 쓰는 책상에서 전에 일하던 여성이 써 놓은 편지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며 네 번째 '상자'는 직장에서 사무실 이사를 했는데 유독 자기 짐만 잃어버려 커다란 곤란을 겪는 한 정규직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다섯 번째 '벽'은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으로 불우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자기 동료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을 통해 옆집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알게되었는 걸 듣게 되는 이야기이며 마지막 '끈'은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 온, 이사를 참 좋아하는 여인이 다시 한 번 첫 번째 단편에 나왔던 '문'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책의 제목으로 '이사'만큼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듯하다.


  마리 유키코로서는 처음 도전하는 호러장르일텐데, 결과는 첫 시도 치고는 꽤 괜찮게 나왔다.

'이야미스' 장르를 쓸 때, 마리 유키코는 주로 묘사를 건조하게 했는데 이건 '이사'에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장면 묘사를 통하여 무서움을 전달하지 않고 별다른 자극없이 무덤덤한 기술로 독자를 슬쩍 호러의 장소로 데려간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소설의 공포 대부분은 반전을 통해서 온다. 평범한 공간이 삽시간에 죽음의 공간이 되고 여기가 무서움의 장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게 별안간 독자 앞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사'는 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자의 정신마저 '이사'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 전복이 꽤 깔끔하고 앞서 세세한 단서를 두어 설득력있게 이뤄지기 때문에 나는 '이사'를 호러 소설로도 꽤 괜찮다고 한 것이다. 거기다 '상자' 같은 단편에선 마리 유키코만의 장기인 '이야미스'또한 가득 맛볼 수 있었기에 더욱 만족했다.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작품 해설'이다.

  보통 작품 해설은 해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 허구가 아니라고 말이다. 소설의 작품 해설은 바로 그러한 독자의 사고 습관을 멋지게 이용하고 있다. 해설에서 소설 속 이야기가 모두 실화인 것처럼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픽션인줄로만 알았던 소설 속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오리무중에 빠뜨리는 것이다. 거기다 해설하는 사람의 이름까지, 분명 이 소설을 읽었다면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소설에 꼭 등장하는 이름인 '아오시마'로 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소름마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난 작품 해설이 정말 해설인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이 작품 해설까지 마리 유키코가 쓰지 않았을까 싶고, 그래서 여기에 실린 단편은 여섯이 아니라 실은 일곱으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여하튼 이처럼 독특한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여 '이사'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마리 유키코의 책이 늘 그랬듯이 벗할만한 매력이 있다. 가볍게 괴담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으시다면 얼른 손에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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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