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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자리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예른 리르 호르스트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새롭고 유능한 스릴러 작가를 알게 되는 건 커다란 기쁨 중 하나입니다. 이제 또 한 명의 작가를 그 리스트에 추가해야겠네요. 바로 예른 리르 호르스트란 작가입니다. 산유국으로 복지국가로 유명한 이웃 스웨덴 사람들마저 자주 취업자리를 알아본다는 노르웨이 출신이에요. 노르웨이하면 노르딕 느와르의 거장 중 하나인 요 네스뵈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가, 읽으면서 요 네스뵈의 작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같은 경찰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빌리암 비스팅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만큼 뛰어난 형사이긴 하지만 한없이 외롭거나 위태롭진 않습니다. 둘 다 아내는 없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비스팅에겐 리네란 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루는 것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해리 홀레와 딸에게 인정받는 아버지라는 자리를 어엿하게 유지하는 비스팅은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런 점이 요 네스뵈의 작품들과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작품의 분위기 또한 한결 더 차분하게 만듭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고독'을 강조하고 있다면 호르스트의 비스팅은 '협력' 혹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소개된 소설인 '사냥개 자리'에서 형사인 아버지 비스팅과 기자인 딸 리네가 함께 수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스릴러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가족이 함께 수사하는 건 처음 보았으므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노르웨이 최고의 민완 형사 빌리암 비스팅. 어려운 사건을 여럿 해결한 공로로 TV 출연까지 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최근 그에게 최초로 명성을 안겨다 주었던 17년 전에 일어난 '세실리아 린데 실종 사건'의 핵심 증거가 위조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로 체포된 진범의 변호사에 의해 제기됩니다.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세 속에서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비스팅은 문책을 받고 정직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보다 그 당시 진범의 알리바이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다는 미진함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과거 사건을 수사해 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즈음, 살인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피해자는 50대 남자였는데 리네는 그 사건을 취재하다가 자신만이 발겨한 단서를 찾아내 그것을 쫗다가 그만 범인과 마주쳐 공격을 당합니다. 이렇게 비스팅은 비스팅대로, 리네는 리네대로 서로에게 닥친 사건을 추적해 가는데, 놀랍게도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과연 그 사건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비스팅은 과연 증거를 조작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뜻밖의 반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가지 신선하게 여겨지는 시도로 가득한 이 소설은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힙니다. 주인공 비스팅은 밖으론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수사 능력을 지닌 민완 형사로 보이지만 안으론 지금 곁에 있는 여자 친구와 소원해지는 바람에 고독해 하고 살인과 같은 비극 속에 사라져간 이들에게 경찰로서 과연 본분을 다했는지 거듭 반추하는 따스한 인간미가 흐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건 딸 리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사회적 자아 이면에 고유한 자신만의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독자가 여실히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 정형을 참 잘했습니다. 거기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도 과연 경찰 출신 작가답게 무리한 설정 하나없이 얽힌 실타래를 차근차근 자연스럽게 풀어나갑니다. 전개가 뒤로 갈수록 뜨거워지는 요 네스뵈와 다르게 예른 리르 호르스트는 독자를 조용히 침전시킵니다. 그 속에서 소설이 묻고자 하는 질문, 과연 정의에 복무하는 경찰의 본분은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지요. 주저리 주저리 말했지만 '사냥개 자리'는 한 마디로 읽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독특한 맛을 주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의 스릴러를 찾으셨다면 노르웨이에서 불현듯 찾아온 이 손님을 한 번 맞이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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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11-1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네요 노르웨이 작가가 요 네스뵈만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뭉크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는 말 본 것 같기도 해요 이 소설에 나오는 빌리암 비스팅은 해리 홀레와는 다른 형사기도 하군요 형사는 거의 가정이 괜찮지 않기도 하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왜 소설에서는 거의 그렇게 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사라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ICE-9 2019-11-15 21:27   좋아요 1 | URL
오! 희선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벌써 11월, 그동안 어떻게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너무나 반가워 이렇게 인삿말부터 올립니다. 요 네스뵈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에게 해리 홀레는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실존적 고민을 대신해서 풀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설정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비스팅은 그런 책임을 주인공 하나에게 지우는 게 아니라 연대하여 짊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제겐 참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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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은 진짜 무덥다. 살다 살다 이런 더위는 또 처음인 것 같다. 습한 더위에 휩싸이게 되면 만사가 다 귀찮아진다. 아무리 그래도 책만큼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지라, 이런 더위 속에서도 즐길 수 있는 책을 찾게 되는데, 이럴 때는 역시 장르 소설이 안성맞춤이다. 정말 한동안 더위를 잊게 만들었던 소설을 하나 만났다. 바로 '더 걸 비포'다.


 작가는 JP 덜레이니. 미국 작가다. 필명으로, 과거엔 다른 이름으로 베스트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JP 덜레이니란 필명으로 낸 소설은 '더 걸 비포'가 처음인 것이다. 지금 나는 이 작가의 과거 이름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더 걸 비포'가 썩 괜찮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도, 여성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표현도, 반전도 좋았기 때문에 그의 소설을 더 찾아 읽어보고 싶은 것이다.책을 즐겨 벗하는 이에겐 뛰어난 기량의 작가를 새로이 아는 것만큼 커다란 선물도 없다. '더 걸 비포'는 그런 선물을 내게 주었다.


 그래서 '더 걸 비포'는 어떤 이야기일까?

 갑자기 비극을 마주하게 된 두 여성이 있다. 하나는 에마고 다른 하나는 제인이다. 에마는 자신의 집에서 강도를 당했다. 제인은 소중한 아이를 사산했다. 에마는 너무 무서워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집을 찾아 나선다. 제인은 상실의 고통이 눅진하게 배여 있는 현재의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집이 마침내 나타난다. 그 집은 바로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



 이 말을 듣고 '응? 뭐야, 두 사람이 같은 집을 마음에 들어한다고? 그럼 같은 집을 두고 자신이 차지하려고 두 여자가 서로 싸우는 스릴러인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니다. 여기서 제목이 왜 '더 걸 비포'인가가 드러난다. 에마와 제인은 같은 시간의 사람들이 아니다. 에마는 과거고, 제인은 현재다. 에마는 제인 이전에 그 집에 살았었다. 제목의 '더 걸 비포'는 바로 에마를 가리킨다. 소설은 에마가 주연인 과거의 시점과 제인이 주연인 현재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렇게 같은 집에 살게 된 그들. 하지만 그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용모와 성격이 비슷할뿐만 아니라 똑같이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의 주인이자 그 집을 설게한 건축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독자는 그 사랑이 혹시 위험한 사랑은 되지 않을까 염려한다. 왜냐하면 건축가 에드워드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조짐은 에마와 제인이 그 집에 살게 될 때부터 나타났다. 그곳은 세입자의 자유를 빼앗는 곳이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지켜야 할 규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기면 곧 추방된다. 세입자의 의지는 하나도 개입할 수 없고, 오직 주인의 의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 거기가 바로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다. 싼 값에 황홀할 정도로 멋진 공간을 누리는 대신 자신의 자유와 개성을 아낌없이 바쳐야 하는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이 주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남이 반항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 주위엔 의혹의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역시나 에드워드의 주변엔 원 폴 게이트 스트리트를 자기 뜻대로 만들고자 아내와 자식까지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했다는 의혹이 감돌고 있다. 게다가 에마 역시 그 집에서 사고로 죽었다. 에마와 똑같이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지게 된 제인은 에마에게 일어났던 일과 에드워드의 진실을 알게 위해 열심히 추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이 위험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이를테면 자신의 사랑을 구원하고자 하는 여정이다. 과연 제인은 자신의 사랑을 구할 수 있을까?


 같은 집을 공유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영화 '시월애'가 떠올랐다. 그리고 군림하는 남자와 종속 당하는 여자의 구도에선 최근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처럼 이 소설은 읽는 이의 시야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여기서 결국 사랑이란 불신과 의혹 속에서 위태롭게 걸어가는 줄타기라는 걸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이는 독립적인 여성이 어떻게 남성 권력에 포획되는가로 읽히기도 할 것이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지만 이런 면이 있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부담없이 한동안 흠뻑 빠져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읽고나면 포만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원했다면 당신의 식탁 위로 한 번 초대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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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6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용을 죽인 형사 형사 벡스트룀 시리즈
레이프 페르손 지음, 홍지로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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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웨덴은 최근 주목할 많나 여러 건의 문화 수출을 했다. 여기에는 전 세계의 공항 서점을 북유럽 누아르물로 점령한 것도 포함된다. 대표적으로 3500만 부를 판매한 헨닝 만켈과 6000만 부를 판매한 스티그 라르손이 있다.

 (마이클 부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중에서)

 

 부스의 이 말처럼 명실상부한 노르딕 누아르의 대표 주자 격인 스웨덴에서 또 한 명의 걸출한 작가가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세 권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 중인 벡스트룀 시리즈의 작가, 레이프 페르손이다. 그는 헨닝 만켈과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아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그리고 카린 포슘 또한 수상하여 마치 노르딕 누아르의 대표 주자가 되기 위한 통과 의례와도 같았던 스칸디나비아 범죄 소설 작가 협회가 주는 유리 열쇠 상까지 2011년에 스탠드 얼론인 'THE DYING DETECTIVE'로 수상함으로써 자신이 계승자임을 증명했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벡스트룀' 시리즈는 일단 벡스트룀이란 캐릭터 자체가 매우 인상적이다.

  노르딕 누아르에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주인공 형사들과 무척이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벡스트룀은 이런 장르의 형사들에게 의례 따랐던 우울과 비관이 없다. 자신에 대해 불신하거나 회의하기는 커녕 자기를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발 아래로 보는 오만방자로 가득하다. 거기다 정의 구현 같은 것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수사 명령을 받으면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부터 신경쓰는 형사다. 가장 놀라운 것은 벡스트룀은 인종 차별주의자에다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는 노르딕 누아르의 특징과 같았던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와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벡스트룀은 가족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며 어린이들은 혐오한다. 한 마디로 그는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벡스트룀이란 존재는 뇌리에 단단히 새겨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런 캐릭터로 어떻게 독자의 관심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어 갈 것인가? 바야흐로 작가의 능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나온 '용을 죽인 형사'는 벡스트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에 뒤이은 작품인 것이다. 소설은 2008년에 발표되었다. 나는 이 소설로 벡스트룀을 비로소 만났다. 읽는 동안 첫 권을 읽지 않았다는 게 자못 아쉽게 느껴졌다. 이 시리즈가 가진 독특함은 벡스트룀 캐릭터에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점이 그동안 읽은 노르딕 누아르와 선명한 차이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작가의 카메라가 주인공에만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벡스트룀 못지 않게 그가 지휘하는 수사팀원은 물론 그를 하루라도 빨리 제거하고 싶어하는, 벡스트룀의 정적이 되는 경찰 내부의 인물을 비롯하여 피해자나 목격자를 포함한 조연들까지 재현의 시선이 골고루 할애되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이 소설은 인류학적인 느낌마저 갖게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연유가 있었다. 작가가 스웨덴 범죄소설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 할만한, '웃는 경관'이 대표작인 마이셰발과 페르발뵈 부부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걸 오마쥬하고 있었던 것이다. 범죄소설사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크다. 일례로 범죄소설 전문 학자인 울리히 브로이히에 따르면 초창기 탐정 소설이 가진, 수수께끼에 빠진 살인 사건과 추적 그리고 해결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혼자 일하는 탐정이 아니라 집단으로 일하는 경찰을 가져와 심리학적 깊이를 더하고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을 추구하려고 시도한 작품 가운데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경감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벡스트룀 시리즈'가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영향을 받았다면 여기엔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어쩌면 그래서 소설의 카메라는 되도록 많은 인물을 골고루 담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알콜 중독자가 많기로도 유명한 스웨덴에서, 벡스트룀 스스로 말하는 바와 같이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사건인 술고래였던 전직 회계사가 후라이팬으로 가격 당해 죽은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더 많이 보여주는 것은 이민자를 가장 많이 받아들여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세계에서 손꼽히며 또한 양성 평등에 있어서도 가장 성공적인 나라로 인정받는 스웨덴이 실은 그 두 가지 면 모두에 있어 여전히 아주 차별적이라는 모습이니까 말이다. 마치 작정하고 그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웨덴이란 나라의 인상을 곡괭이로 깨부수려는 것만 같다.


 공간적인 배경은 솔나다. 마이클 부스에 따르면 차별이 횡행하는 스웨덴의 어두운 이면은, 흔히 스웨덴 제3의 도시라 일컫는 말뫼에서 드러난다고 하는데, 이 작은 도시 솔나 또한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사건은 거기서 일어나며 전작에서 스톡홀롬에 있던 벡스트룀은 여기에 발령을 받아 온 상태다. 소말리아 난민으로 지금은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청년, 셉티무스 아코펠리의 신고로 사건 현장에 온 벡스트룀은 당연하게도 사건엔 별 관심이 없다. 최근 의사로부터 주당인 자신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 없는 술을 멀리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오직 살기 위해 어떻게 하면 금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벡스트룀은 인종차별주의자답게 신고를 한 아코펠리를 덮어놓고 의심한다. 그런데 살해당한 다니엘손이 알려진 것과 다르게 꽤 많은 현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살해 당하기 바로 전날  찾았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것이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짙어지고 거기다 그가 수상쩍은 거래에 많이 관여했다는 게 그가 쓴 수첩으로 드러나면서 이 살인이 솔나에서 가장 잔혹하기로 이름난 범죄자인 이브라힘 형제와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작가 레이프 페르손은 슬쩍 세 명의 용의자를 독자에게 제시한다. 하나는 벡스트룀이 의심한, 셉티무스 아코펠리. 다른 하나는 수사팀원인 알름이 의심하는 다니엘손 옆집에 사는, 20대로 말은 어눌하지만 수학 계산 능력만은 탁월한 세포 라우렌. 마지막으로 벡스트룀을 호시탐탐 경찰에서 추방하려는, 최대 라이벌이기도 한 토이보넨이 의심하는 이브라힘 형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세 용의자 모두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소말리아 난민, 다른 하나는 사회 부적응자 그리고 마지막은 무슬림으로 따지고 보면 모두 사회 주류가 아닌 주변인적 존재인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스웨덴이란 나라의 낯선 타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용의자가 된 것엔 정황 증거만 있을 뿐, 유력한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가지게 된 의심을 쉽사리 거두지 않는다. 흡사 오직 타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받는 것만 같다. 앞서 말했던 대로 벡스트룀 시리즈가 마르틴 베크의 영향 아래 사회 비판적인 요소가 짙다면 그건 바로 여기서 대표적으로 표출된다. 이러한 용의자 선정과 추적 과정에서 스웨덴의 저변에 깔려 있는 불관용과 배척이 세밀하게 도려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벡스트룀 시리즈'를 세상에 내보인 스웨덴의 두터운 화장 아래 숨겨져 있는 민낯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벡스트룀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도대체 스웨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소설은 바로 그 의문에 답을 주려는 것 같다. 제목에 빗대어 말하자면, 벡스트룀은 스웨덴을 위협하는 용을 죽이는 경찰이지만, 사실 진짜 용은 스웨덴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미국의 폭스 TV가 2015년에 드라마로 만든 벡스트룀 시리즈의 이미지.

 벡스트룀이 타인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인 'TOTAL DICK'이 전면에 나와 있다^^



 셉티무스 아코펠리를 하필이면 소말리아인으로 설정한 건 아마도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이름에 속으면 안 되는 '스웨덴민주당'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이다. 그 정당은 반이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그들의 슬로건이 바로 '소말리아 피자'다. 한 명의 소말리아인의 망명을 받아주면 피자 가게를 운영하여 소말리아에 있는 많은 친척을 데려와 피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많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소말리아는 분명 그 소말리아 피자를 연상시킬 것이다. 따라서 소말리아를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스웨덴 속내에 존재하는 이중적 태도를 꼬집고 있으며 이 소설이 어떤 존재를 용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암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소설은 스웨덴을 향한 날선 비판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재미를 놓치진 않는다.

 범죄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하나의 사건에서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가 독자의 흥미를 계속 지속시키며 앞서도 말했듯 다수의 용의자를 제시하여 그 속에서 진짜 범인을 찾아나가는 고전 미스터리의 형식 또한 지니고 있는데다 최근 범죄 소설의 공식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반전까지 준비되어 있기에 범죄 소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매력을 잘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역시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범죄 소설 보다는 인간 드라마적인 성격이다. 등장인물들을 잘 묘사해 어느 것 하나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없음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욕망과 믿음에 따라 서로 얽히고 풀어지는 걸 보는 재미가 쏠쏠한 것이다. 벡스트룀 또한 마찬가지다. 물론 그의 오만하며 인종과 여성 차별주의자라는 허들을 넘을 수 있어야겠지만 어쨌든 이 캐릭터에 한 번 몰입하기 시작하면 다니엘손의 비밀 금고에 바보같이 혼자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장면처럼 웃겨주는 데가 많다. 이러면 왜 이 소설을 가지고 블랙 코미디 드라마로 만들었는지도 슬슬 이해가기 시작한다.


 이제야 처음으로 만났는데, 진짜 스웨덴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위장막을 블랙팬서처럼 발톱으로 날카롭게 할퀴는 것이나 벡스트룀을 비롯하여 저마다의 개성으로 무장한 인물들이 함께 추는 군무와 같은 드라마도 마음에 들어 시작은 과연 어떠했는지 궁금해진다. 앞서도 말했듯 벡스트룀 시리즈는 지금까지 세 권이 나와 있는데, 다음 권도 얼른 번역되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벡스트룀 시리즈의 미국 번역판 커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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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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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드디어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 '팬텀'이 나왔습니다. 여덟 번째인 '레오파드'가 우리나라에 나온 것이 2012년이니,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이 작품을 빨리 읽고 싶었던 제겐 그만큼 고통의 시간이었죠. 이제 그 시간이 끝났네요. 그러나 해리 홀레는 아직 고통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 커녕 더 깊어집니다.


 해리 홀레가 정말 살아있었다면 요 네스뵈를 아주 증오했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그의 고통과 비애는 깊어지고 격해지기만 하니 말이죠. '레오파드'의 리뷰를 썼을 때 저는 해리 홀레를 단테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지옥을 여행하는 순례자로서 말이죠. 단테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옥의 더 심층부로 내려갑니다. '스노우맨'에서 '레오파드' 그리고 '팬텀'으로 이어지는 여정도 그러합니다. 해리 홀레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더 심한 죄악과 더 커다란 아픔과 절망을 겪으니까요. '팬텀'의 마지막에서 당신은 보게 될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차라리 이대로 유령이 되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그가 시리즈 초반부터 내내 트라우마로 짋어지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동생 죽음만큼이나 거대하고 끈질긴 트라우마를 다시 한 번 가지게 될 순간을...

 '팬텀'은 지옥을 배회하는 유령의 절규로 가득한 작품입니다.




 전작 '레오파드'와 유사하게 '팬텀'에서도 해리 홀레는 누군가 때문에 다시 노르웨이를 찾아옵니다. '레오파드'에선 아버지가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죠. '팬텀'에서는 자신을 아버지로 생각하는 올레그가 살인 누명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그의 죄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해리 홀레는 노르웨이로 온 것입니다. 그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동생의 죽음이 남긴 트라우마의 기억을 공유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해리 홀레는 동생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갔다가 동생을 잃게 되었죠. 그러므로 해리 홀레를 부른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신이 지고 있는 트라우마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생 억누르고 회피해왔던 고통스런 기억과 마주하라고 말이죠. 아마도 그런 이유로 '레오파드'에서 해리 홀레가 노르웨이로 오게 되는 것이 소환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일 겁니다. 심판에 회부되는 것과 비슷하게.


 만약 해리 홀레가 심판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분명 해리 홀레가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라켈과 올레그와 가족이 되지 못하는 이유와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레오파드'가 은연 중에 보여주는 것은 억압과 회피였죠. 그는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고 그동안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고통이 자기 옆으로 흘러가게 내버려뒀습니다. 요 네스뵈가 해리 홀레를 이런 모습으로 만든 것은 이것이 노르웨이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는 2차 대전 때의 노르웨이 과거를 빌려와 현재의 노르웨이가 죄악의 땅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노르웨이는 거기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이 그저 억압과 무시의 암막으로 가려두기 바빴습니다. 정면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고개를 돌리고 못본 척 해버린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했던 것과 똑같이 말이죠. 이처럼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지금의 노르웨이가 잘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던 결과를 바로 이 '팬텀'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레오파드'일 때만 해도 노르웨이의 죄악은 화려한 외관 아래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팬텀'에선 더이상 아닙니다. 위장막은 이미 걷혀져 죄악으로 일그러진 민낯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요 네스뵈는 '바이올린'이란 '마약'을 통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르웨이가 세계에서 제일가는 마약 유통 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산 국가까지 되었다고 말이죠. '팬텀' 소설 초반은 그렇게 마약에 깊이 오염된 노르웨이란 지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엔 우리가 생각했던 노르웨이의 모습은 더이상 없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에 고통을 퍼뜨리는 만악의 근원입니다.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토르 슐츠가 그것을 암시하죠. 그는 국제선 항공기 기장인데 러시아 마피아와 손잡고 다른 나라로 마약을 몰래 운반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식으로 노르웨이로 다시 돌아온 해리 홀레는 '레오파드' 보다 훨씬 더 깊은 지옥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을 나타내듯 그에게 가장 끔찍한 비극과 조우하고 말죠. 아들과 다름없는 올레그가 구스토란 십대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는 비극을.


 그와 같이 일했던 동료말고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해리 홀레는 자신의 조국에서 이제 완전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는 걸 느끼며 홀로 올레그 사건의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더이상 손쓸 수 없게 망가져 버린 노르웨이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올레그 자신이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죠. 전작에서 그토록 죄와 멀어보였던 올레그가 어느새 마약에 중독되어 마약을 중개하는 일을 돕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므로 해리 홀레에게 올레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은 곧 노르웨이의 재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건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아무래도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습니다.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대한 해리 홀레의 태도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으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해리 홀레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결국 좌절하게 될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단서는 해리 홀레만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홀레가 싸우는 거대한 마약 조직의 수장 두바이가 가진 과거 신분 역시 이를 보여줍니다. 그가 신부였다는 사실 말이죠. 한 때 신부였던 사람이 지금은 마약을 유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얼른 떠오르는 것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일 겁니다.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건, 종교가 아편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많은 현실을 스스로의 의지로 변화시키기 보다는 방관과 회피를 일삼게 만들기 때문이었죠. 


 결국 해리 홀레와 두바이는 닮은 존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올레그의 비극과 구스토의 죽음은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속한 아버지 세대의 죄악을 미래 세대가 대신 속죄하는 것이라 해야겠죠. 정말 의미심장한 것은 소설에 유령이 된 구스토의 독백이 장마다 삽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홀레의 이야기 곳곳에서 구스토는 햄릿 앞에 홀연히 나타난 아버지 유령처럼 끼어들어 그와 똑같이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햄릿이 그랬듯 이렇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들려주는 것은 그 책임을 묻기 위함입니다. 내 죽음이 누구의 책임이고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다시 말해 구스토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당한 비극은 계속 반복될 거예요.'


 '팬텀'이 정녕 놀라운 것은 이런 구스토의 예언이 현실로 이뤄졌다는 겁니다.

 '팬텀'이 나온 2011년, 세상 전체를 놀라게 만든 대학살이 노르웨이에서 일어났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청소년 여름 캠프로 가장 유명한 우퇴위아 섬에서 76명의 십대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사건 말이죠. 그 범인은 극우주의자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였습니다. '레드 스패로우'에서 요 네스뵈가 노르웨이의 병폐로 지목한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학살이 일어난 우퇴위아 섬의 모습


 노르웨이가 은폐하고 있는 죄악을 이대로 방관한다면 미래 세대가 커다란 비극을 당할 것이다라는 요 네스뵈의 예감은 이렇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처음부터 나타나 곳곳에서 등장하는 쥐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쥐 역시 해리 홀레, 두바이와 똑같이 아버지이고 자신에게 딸린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념해야 합니다. 오직 이 쥐만이 다른 길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눈 앞에 나타난 장애물을 피해가려 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어려운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관통하려 합니다. 이러한 회피가 아닌 정면 대응이야 말로 미래 세대를 위한 아버지 세대의 제대로 된 처사가 아니겠느냐고 쥐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타조는 위험이 닥치면 그 빠른 발로 얼른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땅 속에 머리를 처박는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해리 홀레와 두바이가 한 것은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노르웨이가 취했던 태도이기도 했었죠. 이제 그런 것을 끝낼 때가 온 것입니다. 그런 것이 가져오는 건, 다음 세대가 더 커다란 고통을 당하는 것밖엔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제목처럼 유령이 아니라 실체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닥쳐오는 위험과 죄악에 온 몸으로 부딪치는 것입니다. 해리 홀레가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향하고 있는 총구를 정면으로 응시한 것처럼. '팬텀'은 그런 직시를 위한 지옥의 순례입니다.


  미래 세대. 우리는 그 말을 곧잘 언급하지만 과연 어떤 것이 진정 미래 세대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선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그 말을 할 뿐. 그러면서도 현실 문제에 대해선 나만 당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로 그 해결의 책임을 다음 세대로 얼른 넘겨버리죠. 자기 중심주의가 낳은 방관과 회피는 우리 역시 노르웨이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 많은 적폐가 뿌리는 내리고 쑥쑥 자라나 미래 세대의 생기와 희망을 흡혈귀처럼 쭉쭉 빨아들이고 있으니 요 네스뵈가 '팬텀'에서 강조한 태도는 우리 사회에도 참으로 절실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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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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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이게 꿈이야 생시야? 

 갑자기 내 앞에 출현한 책을 보고 볼부터 일단 꼬집었습니다. 얼얼한 통증 속에서도 책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맙소사! 진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계속된 것입니다. 저자의 죽음으로 3부로 끝나버려 너무나 아쉬웠던, 그래서 3부를 읽을 땐 되도록 천천히 읽어 결별의 시간을 하염없이 지연시켜야 했던 그 <밀레니엄> 시리즈가 돌아온 것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밀레니엄 시리즈가 돌아온 것은 의미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돌아와야 밀레니엄 시리즈의 귀한 역시 의미 있는 것입니다. 밀레니엄 시리즈에 있어서 붕어빵의 앙꼬라 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네, 맞습니다. 구태여 이름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부르겠습니다.


 리스베트 살란데르!

 3부작을 끝으로 이제 영영 못 만나나 했던 그녀가 이렇게 떡하니 다시 찾아 온 것입니다. 그것도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하지만 3부작에서 계속된 그녀 과거의 이야기와 여전히 이어진 채로! 그것도 3부작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간절히 제가 바랐던 것, 그러나 이뤄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과거 이야기가 완전히 결말 짓는 것을 보고싶다는 갈망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이러니 제가 어떻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환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밀레니엄 시리즈의 4편인 '거미줄에 걸린 소녀'를 말이죠. 비록 저자가 원작자인 스티그 라르손이 아니라 해도.



 네, 저자가 다른 사람입니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고 하는군요. 스티그 라르손과 똑같이 스웨덴 출신에다 관록 있는 범죄 전문 기자 출신 작가로 스웨덴에선 꽤나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된 '앨런 튜링 최후의 방정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저도 아직 이 책은 못 읽어봤는데, '거미줄에 걸린 소녀'가 밀레니엄의 팬으로서 제법 높고 깐깐하다고 자부하는 제 눈에 너무나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 책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거미줄에 걸린 소녀'는 천재 해커인 리스베트의 면모가 한껏 살아난 작품으로 해킹과 보안의 세계가 수학과 맞물려 본격적으로 펼쳐지는데 '앨런 튜링의 최후의 방정식'과 연관 있어 보입니다. 무엇보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여 미스터리를 낳는 존재가 되는, 인공지능의 세계적 권위자 프란스 발데르가 아무래도 앨런 튜링을 모델로 쓴 것 같거든요.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의 연구에만 매진하며 그것을 위해 인간관계까지 기꺼이 희생한다는 점에서 앨런 튜링의 그림자가 엿보이네요. 실제 튜링은 동성애자로 결혼을 한 적도, 아버지가 된 적도 없지만 프란스 발데르는 분명 튜링이 결혼을 하여 아버지까지 된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 태어난 것 같아요. 물론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맞다고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튜링이라 생각하고 읽으니 더 재밌더군요. 그래서 프란스의 최후가 더욱 안타깝기도 했지만 말이죠.


 스웨덴 판도 표지에 삼부작과 통일성을 주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커버이기도 합니다.


 아, 이런 기쁜 마음에 주저리 주저리 떠들었더니 아직 줄거리조차 소개하지 않았네요. 당신의 이마에 내 천자(川)가 그려지기 전에 얼른 말하도록 할게요. 소설은 한 남자의 회심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바로 프란스 발데르입니다. 그는 늘 자신을 형편없는 아버지로 여겨왔어요. 연구를 핑계대고 가족을 소홀히 한 까닭이죠.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은 여덟 살이 되었는데도 말 한 마디 못하며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폐아인데도 말이죠. 아내와 이혼하고 자식마저 버리고 미국으로 떠났다가 몇 년이 지나 그는 이제껏 못했던 아버지 역할을 다하기 위해 스웨덴으로 돌아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아내에게서 아들 아우구스트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아우구스트에게 놀라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눈으로 본 것을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똑같이 그리는 능력이죠. 그것을 통해 프란스는 아우구스트가 '서번트'(자폐아 열 명 중 한 명은 '서번트'라고 합니다.)라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이 연구하고 있던 인공지능 개발까지 중단하고는 아들의 서번트 능력을 개발하는데 주력합니다. 놀랍게도 아우구스트의 서번트 능력은 그림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처럼 수학에도 엄청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원래 서번트는 하나의 능력만 가질 수 있는데 아우구스트는 두 가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까지 보게 되자 프란스는 아우구스트의 천부적인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오직 아들의 양육에만 심혈을 기울입니다.


더스트 커버를 벗긴 모습입니다. 은근히 분위기가 있네요.


 한편, 밀레니엄 시리즈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밀레니엄' 지의 대표 기자인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퇴출될 위기에 처합니다. 재정난 때문에 노르웨이의 미디어 그룹인 세르네르의 투자를 받아들인 적이 있는데 그것을 주도한 장본인이자 미카엘이 신출내기 기자이던 시절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오베가 그룹 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그 위기를 빠져나갈 목적으로 '밀레니엄'의 근본 편집 방침에 간섭을 해 온 것입니다. '밀레니엄'이 전적으로 거부했던 친 기업적인 기사나 가쉽 거리를 쓰라고 말이죠. 여기에 미카엘이 반발하자 그를 쫓아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위기에 봉착한 미카엘에게 리누스란 남자가 찾아옵니다. 미카엘이 프란스 발데르를 꼭 만나봐야 한다면서 말이죠. 네, 여기서 미카엘과 프란스의 접점이 생깁니다. 리누스는 프란스가 미국에서 돌아온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는데 그건 '솔리폰'이란 회사가 자신의 기술을 도둑질한 증거를 잡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쩌면 그것은 거대한 비리일지 모르니 프란스 발데르를 만나봐야 한다고 말이죠. 반신반의하는 미카엘에게 리누스는 프란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말해줍니다. 그것을 도와준 한 여성 천재 해커가 있었다고 말이죠. 미카엘은 그가 누군지 바로 짐작합니다. 여기서 드디어 등장합니다. 그토록 재회하고 싶었던 우리의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말입니다. 그렇게 미카엘은 2부에 했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여 몇 년만에 리스베트와 연락을 시도합니다.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저자의 사인과 스웨덴과 스톡홀롬 시내 지도가 있습니다. 뒷면에도 스톡홀롬 근교와 군도 지도가 있습니다.


 그런 리스베트는 3부에 뒤이어 여전히 개인적인 추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버지 살란데르가 남긴 어두운 유산을 말이죠. 리스베트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가 건설한 범죄조직이 사라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를 잘라내면 두 개의 머리가 자라는 히드라처럼 아직도 이 세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의 유산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유산을 찾아내 깡그리 파괴할 때 비로소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완성된다고 믿는 리스베트는 해커로서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해킹의 난공불락 요새였던 국토안보부까지 무너뜨리며 드디어 유산의 꼬리를 찾아냅니다. 바로 '더 스파이더'라는 이름의 조직을 말이죠. 네, 제목에 나와있는 거미줄은 바로 그 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거미줄에 걸린 소녀'란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조직과 소녀, 리스베트의 대결에 대한 암시였던 셈이죠. 제목처럼 정말로 조직과 리스베트 간의 한 판 승부가 펼쳐집니다. 상세한 소개는 읽으며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해 생략하도록 할게요. 다만 리스베트 혈육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밝혀진다는 것만 말하겠습니다. 리스베트의 혈육과 관련하여 2부와 3부에 걸쳐서 그렇게나 지속적으로 말해왔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있다니! 궁금하시죠? 그렇다면 얼른 4권을 읽으세요? 분명 저처럼 5권과 얼른 만나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조직의 이름이 '스파이더'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조직의 수장이 거미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죠. 거미처럼 자신의 존재감이란 거미줄로 타인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제 멋대로 조종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그는 언제나 중심입니다. 늘 아웃사이더로 다른 이들과 잘 못 섞이며 배척 받는 것도 당연했던 리스베트와는 그야말로 정반대인 것이죠. 때문에 둘의 대결이 더욱 흥미롭습니다. 더하여 여기엔 리스베트가 <밀레니엄> 시리즈 내내 이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고 해킹의 세계로 빠져들었는지에 대한 것도 나옵니다. 그만큼 리스베트의 내면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리스베트가 그 때 얼마나 이해했고 나중엔 어느 정도나 알게 됐는지는 전혀 모르네. 어쨌든 살라첸코가 자기 엄마만 괴롭힌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야. 이자가 다른 여자들의 삶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어. 바로 그 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리스베트가 태어났다고 할 수 있네.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여자."

 "정확하네.(...)" (p. 427)


 팬으로서 작가가 바뀌면 아무리 똑같은 캐릭터가 나온다고 해도 뭔가 튀거나 어색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당연히 걱정하게 마련입니다. 실은 저도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돌아오는 것만으로 기쁘긴 했지만 혹시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건 기우로 끝났습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그대로더군요. 개성과 매력은 한결같으면서 능력만 좀 업그레이드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변함 없어 좋았습니다. 덕분에 아무런 어색함 없이 다시 찾아온 밀레니엄 시리즈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전작을 많이 연구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와 무리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말이죠. 그래서 리스베트가 본격적으로 활약할 5부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4권을 다 읽은 지금,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어서 5권을 읽고 싶다'는 것. 기다리다 현기증으로 쓰러지기 전에 얼른 나와 주세요.


 스웨덴에서 만든 영화 <밀레니엄> 시리즈. 누미 라파스가 리스베트를 연기했었죠. 이 역할로 '에이리언 프로메테우스'의 주연까지 되었구요. 갈수록 여전사가 되는 리스베트의 모습을 누미 라파스가 잘 소화했기에 전 리스베트 하면 누미 라파스 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너무 지나서(삼부작은 2009년에 나왔습니다.) 4편이 영화로 만들어져도 다시 리스베트 연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야속한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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