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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만화가 오쿠 히로야가 2000년부터 무려 14년에 걸쳐 연재한 ‘간츠’는 현재 일본 SF 만화의 대표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간츠’를 나는 우리나라에 단행본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어왔으니 나름 오래된 팬이라 할 만한데 그건 무엇보다 화려한 작화에 압도당한 게 컸다. 당시는 만화를 CG로 그리는 것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을 때였는데 오쿠 히로야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어 놀라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작가 자신이 워낙 영화 팬이라 그런지 만화의 페이지마다 영화적인 연출로 가득했던 것도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죽은 자들이 낯선 장소로 호출되고 거기에 있는 구체의 지시에 따라 특정 장소로 강제 전송 되어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성인’이라 부르는 존재와 싸운다(고 쓰고 ‘서바이벌 게임’이라 읽는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독특하고, 또 어떻게 보면 뻔하게 보이는 설정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슈트와 메카 그리고 병기의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고 성인과의 전투가 정지 화면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데다 박력이 넘쳐 뒷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장면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간츠’의 커다란 인기 덕분에 몇 번이나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 만들어져 그 소망은 쉽게 성취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차라리 소망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만 낳게할 뿐이었으니….




 원작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기는 커녕 처참하게 실패한 것들만 즐비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작품인만큼 그 때문에 오히려 영상화가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간츠:오'가 영화를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대 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것 같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는 이 작품이 13년간 연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투 이야기를 보여주는 ‘오사카 전투’라는 것. 개인적으로 나는 이 전투가 ‘간츠’의 사실상의 클라이막스라 생각한다. 무력으로 압도하는 적에 대한 공포, 그것을 무릅쓰고 벌어지는 처절하면서도 절박한 전투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에피소드를,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인데, 순수한 CG 애니메이션으로 담다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순수 CG 애니메이션에 대해 만족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만든,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최근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하나 있다. 일본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것들은 다 ‘꽝’이라는 믿음이다. 허황된 믿음이 아니다. 근거가 되는 팩트의 리스트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이제 신념으로 지녀도 좋을 정도다. CG 애니메이션은 더하다. ‘파이널 판타지’부터 시작해서 ‘캡틴 하록’까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린 쥐가 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리운 추억에 이끌려 뒤따라 갔다가 그 그리움마저 탈곡기에 탈탈 털리는 멘붕을 맛보았으니.

 이런 까닭에 처음엔‘간츠:오'에 대하여 회피 전략을 썼다. 그런데 먼저 개봉한 일본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그럼 이제 ‘간츠’의 장면들이 제대로 영상화된 것을 볼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귀가 쫑긋, 눈이 번뜩, 가슴이 벌렁벌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얼른 개봉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간츠 : 오'가 개봉되었다. 결론은 대만족. ‘간츠’의 가장 완벽한 영상화라 할 만하다.

 슈트를 입은 플레이어의 생동감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할 것 없이 뛰어나고 아주 자연스럽다. 


주인공 카토. 정말 실감나는 표정이다.


 특히 오사카 팀의 시마키가 다리 위에서 검을 휘두를 때의 재현은 정말 놀라웠다. 어찌나 유려하고 자연스러운지. 어쩐지 영화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켄신이 생각났다. 초반에 나오는 몇몇 엑스트라 중엔 진짜 인간처럼 보이는 이들까지 몇몇 있었다. 이처럼 CG로 사람을 리얼하게 묘사할 때 받게 되는 어색함이 이 애니메이션에선 꽤 덜한 편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폴라 익스프레스’부터 봐왔다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액션이 좋았던 것도 분명 한없이 자연스럽게 보였던 CG 인물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물 묘사가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이만큼 잘 묘사했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간츠’의 만화를 즐겨 본 이들이라면 두 가지에 특히 더 관심이 가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는 병기나 메카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성인과 싸우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꽤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간츠 : 오’를 통해 간츠의 무기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병기의 묘사가 잘 되어있다. 원작에선 원래 카토의 무기였던 ‘Y건’의 포획이나 ‘Z’건의 중력파 묘사 모두 무척 실감이 날 정도로 재현이 잘 되었다. 덕분에  ‘Z’건의 중력파를 몇 번이나 맞고도 계속 일어서던 ‘텐구’의 무시무시한 멧집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다가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압권이라 할만한 장면 중의 하나는 소의 모습을 한 상체와 거미의 모습을 한 하체를 가진 규유키(오쿠 히로야는 단행본 말미에 오사카 미션에 나오는 모든 성인들이 실은 일본의 유명한 요괴 설화집인 ‘백귀야행’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여기 나오는 성인들이 어떤 요괴를 모델로 한 것인지 밝혀놓고 있다.)와 간츠 대원이 사용하는 거대 로봇의 전투라 할 것인데, 규우키가 강에서 솟아 오르는 장면이나 거대 로봇이 빌딩 사이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나 굉장한 박력을 보여준다. 분명 ‘퍼시픽 림’이 없었다면 이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을 것 같다.




 아! 하나 더 있다. 오다 하치로가 입고 있었던‘하드 슈트’의 묘사도 좋았다. 만화에서의 박력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게 또 있었으니 바로 최종 보스가 되는 누라리횽과의 대결이다.

 누라리횽은 원래 ‘백귀야행’에서 오사카 상인의 모습을 하고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요괴라고 한다.


누라리횽


‘간츠’의 누라리횽은 처음엔 그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변신 능력을 자랑한다. 죽여도, 죽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되살아날 뿐 아니라 갈수록 더 강력해져 싸우는 사람이나 보는 이나 ‘이제 제발 죽어줘’ 하고 절로 애원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 변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괴상하고 더러는 꽤나 망측한데 실은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이것이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이 누라리횽의 변신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라웠다. 딱 하나만 빼고(이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빼도 무방한 존재다.) 제대로 다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누라리횽의 변신 모습 중에는 여성 나체로만 이루어진 거대 여성도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잘 옮겨도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여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마저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대 여성 나체를 무한정 볼 수 있었기에 감탄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카토의 절규와 함께 펼쳐지는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그 비통함이랄까 격노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전해져 CG 애니메이션에서 모처럼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토록 만들었다.


'누라리횽'의 최종 진화형. 후덜덜한 카리스마로 마지막의 긴장감을 책임진다.


 ‘간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간츠’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간츠 : 오’에게 정말 만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있었던 야마자키 안조와 카토의 대화가 조금은 길어지는 바람에 그동안 잘 쌓아왔던 긴장감이 좀 풀어진다는 것과 초반 커다란 얼굴만 굴러다니는 성인과의 총격 장면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일하게  CG 전투처럼 보였다는(현실감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것을 빼면 시쳇말로 꽤나 잘 빠진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간츠’에 대해 조금은 양가적 감정이었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인과 관련하여 무작정 좋아하기가 좀 저어되었다. 성인이 내게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이주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간츠’에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학살 당하는 성인들은 현재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주자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의 높은 인기는 그런 것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해소시켜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만 반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배척과 폐쇄성 때문에 성인과는 무조건적인 대결 뿐이며 주인공들의 결속과 구원 또한 오로지 성인의 제거를 통해 이뤄진다는 게 작품의 이야기와 액션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이 애니메이션이 조금은 가시게 해 줘서 반가웠다. 바로 원작과 좀 다르게 묘사된 카토와 안조의 결말 부분이다. 카토와 안조의 설정도, 전개도 원작 그대로이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결행되는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와 관련해 조금은 희망적인 관측을 낳게 만든다. 그 선택이 나와 전혀 다른 것, 그것을 포용하여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카토는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타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는 성인과 싸우는데, 그런 태도 때문에 더욱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에게로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간츠:오’가 더욱 마음에 든다.


야마자키 안조(카토와 안조의 관계가 이 영화의 테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재도 일본에선 만화가 활발하게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의 검심’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망의 도미노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정말 못 만들어서 그렇기도 하고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무시하고 오로지 원작 그대로 무리하게 실사화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는 특히나 CG의 경우 너무 기술적인 측면에만 경도된 나머지 관객이 공감할만한 드라마를 형성하는 데 소홀이 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간츠:오’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지, 그 좋은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놀라운  CG 기술을 선보이지만 그것을 독보적으로 만들지 않고 진행 중인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여 표현이라는 외형과 이야기라는 내면 서로가 균형을 잘 이루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다가가려면 기술도, 이야기도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선 안된다는 걸   ‘간츠: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속편도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마지막 결전인 카타스트로피 편이 궁금한데, 지구가 침공 당하고 미국이 사라지며 간츠 대원 전체가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장대한 스케일인지라 진정 블록버스터 급이라 할만한 그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재현될지 몹시 기대된다.   ‘간츠:오’만큼이나 성공적이어서 이전의 실패작들을 기꺼이 흑 역사로 치부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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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점과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이만큼 재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서는 그저 칭찬만 하기로 한다. 부디 성공해서 카타스트로피 판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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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합니다ㅠb

ICE-9 2017-05-21 14:09   좋아요 1 | URL
앗! 고양이라디오님도 똑같은 마음이라니, 무척 반갑습니다.^^ 그 전 영상화된 작품들에 너무 실망이 컸기에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지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만족할만한 작품들이 나와주길 고대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1 16:50   좋아요 0 | URL
전 반대로 <간츠: O>를 먼저 접하고 간츠 실사판 영화를 찾아보았습니다. 실망감이 몇 배로 크더군요ㅠㅋ 앞으로도 에니메이션 간츠 시리즈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CE-9 2017-05-22 01:57   좋아요 1 | URL
아, 이런, ‘간츠:오‘를 먼저 접하고 실사판을 보셨다면 실망감이 더욱 컸었겠네요. 끝까지 보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얼른 후속작이 나와서 고양이라디오님에게 남아 있는 실사판의 기억을 남김없이 날려버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2 18:19   좋아요 0 | URL
정확하시네요ㅎ... 보통 영화를 보면 끝까지 보는 편이라... 힘들었습니다ㅠㅋ

ICE-9 2017-05-25 20:46   좋아요 1 | URL
동병상련이죠^^ 일본은 이제 실사판은 좀 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혼‘도 그리 기대되지 않아요ㅠ ㅠ
 

  '어느 독재자'는  '칸다하르'와 '가베'로 유명한 이란 출신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2014년에 발표한 영화다.

 원제는 대통령을 뜻하는 'PRESIDENT'. 원래는 2014년에 개봉했어야 할 영화가 지금에서야 개봉한 것은 어쩌면 지금은 전직이 된 당시의 대통령 박근혜 때문일 지도 모른다. 제목이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전화 한 통화로 수도의 불 전체를 끌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와 함께 유리걸식 하다 민중들에게 잡혀선 곤욕을 치르는 영화이니 개봉이 되었다면 그렇지 않아도 유리멘탈인 그녀의 분명 심기를 많이 건드렸을 터. 안 그래도 세월호 참사로 골치가 아픈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느라 바쁜 이들이 알아서 긴다고 아예 대통령 눈에서 치워버리려 했을 수도 있을테니. 그 때는 영화 '변호인' 때문에 CJ가 가뜩이나 청와대에 찍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나니 지금이라도 개봉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거의 독재에 가깝게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이 국민의 촛불로 탄핵을 당해 파면된 지금엔 우리나라 상황이 영화 속 내용과도 얼추 겹쳐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독재자인데 제목이 'PRESIDENT'인 것은 현재 이란이 대통령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이 영화가 2014년에 발표된 것을 고려하면 이 영화가 한창 만들어지던 당시인 2013년에 이란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그 때 이란의 대통령 선거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011년의 재스민 혁명이 과연 이란에도 번질 것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이란 정권은 보수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항할 개혁파 진영은 약체였다. 싸움의 결과는 보나마나다 하는 말들이 곧잘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는 바로 이 변화를 직접 반영하고 있다. 영화 초반 민중들의 거센 저항으로 위기에 몰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런지. 또한 영화 속 독재자는 어디로 보나 강경 보수파로 보이고 라디오에선 계속 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란만이 아니라 모흐센 마흐말바프에게 자못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도 직접 영향을 받는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동안 만은 이란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영화 때문에 이란 정부와 강경 보수파로 부터 테러 위협을 끊임없이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딸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는 더이상 이란에 머물 수 없었다. 무려 2005년부터 계속 테러를 피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부산영화제는 그런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영화 '어느 독재자'가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런 그의 자전적 경험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 주인공 독재자에 의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혁명을 맞아 풀려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독재가가 도망하느라 자신들 처럼 정치범으로 위장하여 바로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독재자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어떤 이는 독재자를 무조건 죽일 것이라 선언하는데 옆에 있는 어떤 이는 그것에 반대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한 정치범은 영화 마지막에 독재자가 민중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렇게 증오와 폭력으로 그에게 복수할 거라면 차라리 자기부터 죽여달라고 기꺼이 목을 내어놓는다. 폭력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민중들에게도 말한다. 이 독재가가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당신들은 무얼 했느냐고. 그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당신들이 실은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그런 그의 모습은 신약 성경의 예수 모습을 떠올린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했던. 독재자가 독재할 수 있도록 방기한 우리들의 책임을 폭력과 제거로 무마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뜻을 내비치는 그의 말은 그대로 감독이 재스민 혁명 이후의 중동 민중들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정치범이 내겐 모흐센 마흐발파프의 분신으로 보인다. 10년이 넘도록 정치범 아닌 정치범으로 조국과 먼 이국의 땅을 방랑했기에 그는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재스민 혁명 후의 이란과 중동 국가들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가 복수 보다 용서, 폭력 보다 노래나 춤을 부르짖는 것은 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에 권력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신에게 저항했던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손자가 계속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조른다. 독재자는 그러는 손자에게 자기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준다고 하면서 발 아래에 펼쳐진 도시의 눈부신 야경을 보라고 말한다. 손자가 그것을 바라보자, 독재자는 전화를 걸어 도시의 불을 당장 끄라고 말한다. 그러자 마법처럼 도시가 암흑으로 돌변한다. 그 광경으로 손자는 권력의 힘을 알게 되고 매혹된다. 



 독재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손자의 명령이 곧 자신의 명령이라 말하며 손자에게 수화기를 건네 이번엔 네가 명령해 보라 한다. 손자가 불을 켜라고 명령하자 도시가 다시 눈부시게 변한다. 재미가 들린 손자가 다시 끄라고 하자 도시는 이내 어둠에 잠긴다. 손자와 독재자는 웃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을 한동안 맛보다가 손자가 다시 불을 켜라고 전화로 명령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때 카메라는 방향을 바꿔 도시가 아니라 손자와 독재자를 담는다. 그들이 아무리 명령 해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도시처럼 이제 그들이 어둠 속에 있게 된다. 마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빛을 이제는 자신들이 허락받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런 가운데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수상한 총소리와 폭음을 듣게 된다. 그들은 위협하는 자였으나 이제 위협을 받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자리 바꿈이 일어났다.



 

이 장면에 영감을 준 아프카니스탄에 있는 다룰 아만 궁전

소련 침공과 반복된 내전으로 점철된 아프카니스탄의 아픈 역사를 그 자체로 증거하는 공간이다.

모흐센 감독은 2005년 이 곳을 방문했는데, 이 궁전에서 독재자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에게

 절대 권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 속 장면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독재자'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시나리오 작업 도중 재스민 혁명이 2011년에 일어났고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 언제든 누구의 자리든 정반대로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독으로 하여금 복수 보다는 용서, 폭력 보다는 노래나 춤을 강조하게 만든다. 영화는 내내 이런 자리 바꿈이 일어난다. 손자는 자신의 장난감과도 같았던(마리아가 손자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영화 초반 그들이 공항으로 달아나려 할 때 누나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손자가 마리아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누나는 차 안을 네 장난감으로 넘치게 할 셈이야 하고 나무란다.) 마리아가 된다. 독재자는 자신과 손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손자를 여자로 변장시키는데 그 모습은 꼭 손자가 마리아로 잘못 알고 따라간 소녀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게 손자는 자기가 가진 권력의 대상이던 마리아가 된다. 이것은 군인들에 의해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겁탈 당하고 총살 당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때 군인들이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 스크럼을 짜서 신랑과 그 가족을 막는 모습은 그대로 손자가 마리아를 공항으로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집사들이 스크럼을 짜서 손자를 차 안으로 넣는 것과 정확히 겹친다. 이런 반복은 군인과 신부의 관계가 손자와 마리아의 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독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변장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자신이 위해를 가하거나 박해를 한 인물들이다. 그는 변장을 위해 양치기와 이발사의 옷을 빼앗는데 그렇게 그들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 된다. 정치범과 함께 있을 때는 스스로 정치범인 척 연기한다. 그는 거리의 악사로도 변장하는데 그 모습은 단지 노래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범인 된 인물과 판박이다. 이렇게 그는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자리 바꿈을 한다. 이렇게 연속적인 자리 바꿈은 누구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자신이 배척했던 바로 그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력까지 포함하여 사람의 일에 있어 항상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든 언제든 자신이 피해 입힌 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오늘 내가 가한 증오와 폭력을 내일 내가 받을 수 있다. 그 악순환과 무상성을 알기에 모흐센 마흐발바프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의 입을 통하여 '춤을 추게 합시다!'라고 외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왜 하필 춤일까? 사실 춤은 이 영화에서 '자리바꿈' 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키워드다. 춤은 마리아를 그리워하는 손자의 회상 장면을 통해 영화에서 아주 많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독재자는 거리의 악사로 변장하기 위해 자신이 기타를 치고 손자에겐 여장을 시켜 춤을 추도록 만든다. 손자가 회상 장면 속에서 마리아와 같이 추는 사교 댄스와 실제로 혼자 추는 춤은 여러 면에서 아주 대조적이다. 여기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독재자가 민중의 저항에 위험을 느껴 국외로 망명하러 공항으로 가자 그 전까지 독재자를 위해 연주하던 악대가 독재자가 공항에 나타나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재자에게 총질을 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혁명 후 검문을 하던 군인들이 자신들이 3개월치나 월급을 못 받았다면서 검문에 걸린 사람들의 물건을 강탈하는 장면이다. 그 때 그는 독재자에게 노래를 시키고 모두 따라 부르게 하면서 물건을 갈취한다. 이제 막 결혼한 신부를 강간할  때도 모두에게 노래와 춤을 시킨다. 춤은 이렇게나 많이 나오고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감독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도 영화 감독으로서 속해 있는 예술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춤은 예술의 상징이다. 독재자 체제에서의 예술은 손자의 회상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오로지 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존재였다. 한 사람의 쾌락을 위해서만 부역하는 것에 불과했다. 



 군인들이 하게 만들었던 노래와 춤도 마찬가지다. 모두 현실에 존재하는 시대의 어둠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법에 조용히 순응하거나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예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은 권력의 시녀였고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민중을 길들이는 아편일 뿐이었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 이제 막 풀려난 악사의 반주에 맞춰 바다를 향해 혼자 춤을 추고 있는 손자의 모습을 통해 그런 예술과 대비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 때 손자는 할아버지 독재자와 죽을 운명이었다. 독재자와 같이 자기도 죽여달라며 목을 내놓던 정치범의 호소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한 참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시간이 계속될 지 장담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처형되면 손자 역시 처형될 가능성이 높다. 손자는 그 때 있었던 사람들 중 가장 약한 존재였다. 악사는 바로 그 손자를 위해서만 연주하며 손자는 춤을 춘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바로 사회의 가장 한없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의 호모 사케르들을 위한. 예술이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무언의 외침은 폭력이 아니라 용서(폭력도 끝내는 강자가 되어 보려는 욕망의 굴절된 표현일 지 모른다.)가 결국은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감독은 이렇게 예술가로서의 책임을 자각한다. 물론 이 예술엔 언론도 포함된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부역하지 않으며 오로지 약자를 위해서 그들의 고통과 목소리를 대변하며 거대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예술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절실한 것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런 면 때문에라도 '어느 독재자'는 우리가 꼭 한 번은 봐야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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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시간이 지속될수록 갖게 되는 상실의 수도 늘어난다.

 노년이란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처연히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육신은 더이상 젊은 날과 같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은 점점 더 부재하며 신념마저 전구에 먼지가 점점 더 많이 쌓이듯 빛을 잃어간다.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 가지는 시간이 바로 이러하다. 



영화의 시작 장면과도 같이 현재 로건은 어둠 속에 내던져져 있다. 미래의 어느 때(영화에 정확한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찰스가 '셰인' 영화를 보며 거의 백 년전 영화라고 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2050년 정도가 아닐까 싶다.), 로건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리무진에서 화들짝 깨어나는 것으로 등장한다. 그는 퀭한 두 눈에 피로에 몹시도 쩔어 있다. 술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차 안에서 잠든 게 분명한 그의 모습엔 우리가 알던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부랑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단지 인간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장면으로 영화는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엇일지 관객들에게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영화는 엑스맨 '울버린'이 아니라 인간 '로건'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살면서 우리가 경험한 것과 똑같이 한 때 자신의 앞길을 환히 비추며 어디로 가야할 지 선명하게 알려주었던 빛을 잃어버린, 그래서 이제는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갈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는 인간 '로건'을. 우리처럼 삶에서 맛본 가득한 상실감과 패배 속에서 다만 남은 것은 압도적인 피로 뿐이라 이제는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도, 뭔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도 그저 넌더리가 나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아가기로 작정한 인간 '로건'을. 그래서 우리와 다르지 않고 때문에 그의 내면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인간 '로건'을. 영화는 별다른 기교 없이 정직하게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로건'을 인간이라 말하지 않는다. 도움을 구하는 가브리엘라를 차갑게 외면하는 그를, 그녀가 애타게 부탁한 로라를 자신과 찰스가 위험하자 그냥 버리고 떠나는 그를, 영화는 '짐승'이라 말한다. 영화에서 그와 싸우는 인격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X-24'는 외양만이 아니라 현재 그의 내면을 거울처럼 보여주기도 하는 도플갱어다.



 인간 '로건'을 그리면서 영화는 왜 지금의 로건을 짐승이라 규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영화가 초반에 로건을 묘사하는 것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로건은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리무진 기사로 나오는데, 그것은 마치 서부 시대에 사람들을 운송했던 말(horse)과 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웨스턴'의 외양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렇게 보면, 왜 영화에서 달아나던 도중에 말들이 달아나는 트럭을 만나게 되며 그것을 도와주는 지도 알게 된다. 다름 아니라 말이 로건의 또 다른 자아 형상이었던 것이다. 찰스는 말들을 텔레파시로 말들을 다시 불러 들이는데, 이것은 정확히 로건을 인간이 되는 믿음으로 이끌고 있는 찰스의 모습과 겹친다. 또한 이것이 그렇게 말들의 'HOME', 집에서 찰스의 고백대로 로건 일행이 수많은 밤들 중 가장 완벽한 밤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로건에게 이제 방황의 시간을 끝낼 때가 다가왔다는 암시이며 정말 그렇게 된다. 이 때 찰스가 죽는 것은 분명 거기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인 '요트'는 불안 속의 방황을 끝내고 진짜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때까지 로건은 짐승이었다. 그건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신념, 희망 그리고 책임감 모두를 잃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믿었었죠. 우리가 신의 위대한 섭리 속에 있다고 당신이 말했던 것을.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난 우리가 신이 범한 오류 같아요.


 이런 면에서 로라 역시 지금 로건의 또 다른 '도플갱어'라 할 만하다.



 전혀 문명화 되지 않은, 있는 것이라곤 동물적 욕구 밖에 없는 로라 역시 'X-24'와 마찬가지로 로건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가르치고 하나의 인간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그대로 로건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찰스는 '에덴'이 설령 로건이 말하는 대로 코믹북 속 거짓말이라 해도 로라가 믿는 이상 거기로 데려다 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에덴'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을 인간답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이 나오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 '로건'은 신약 성서의 이야기를 가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로건에게 찾아와 로라를 맡기는 여성의 이름인 '가브리엘라'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가브리엘은 신약 성서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를 잉태했다는 것을 알린 천사의 이름이다. '가브리엘라'는 바로 그 이름을 여성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 가브리엘과 똑같이 가브리엘라도 로건에게 자식을 데리고 왔다. 예수에겐 생물학적 아버지가 없다. 로라에겐 생물학적 어머니가 없다. 예수는 엄마에게로 왔다. 로라는 아버지에게로 온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때 로건이 찰스를 보살피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나듯이 거의 엄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로건'은 이렇게 성별의 역전이 있다.

 신약 성서와 정확히 반대되는 성별에 동일한 역할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로건을 마리아로, 로라를 예수로 보고 있다는 셈이 된다. 맞다. 나는 영화가 정확히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불성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은, 현실 속 마리아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과연 마리아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수태를 했는가? 역사적으로 성경의 사실들을 고증하는 많은 학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혼모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요셉의 도움을 받아 차츰 드러나게 될 임신 상태에 대해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 여긴다.



 바로 이것이 영화에서는 가브리엘라가 가지고 온 '엑스맨' 코믹북으로 재현되었다

 가브리엘라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 '엑스맨' 코믹북에 나온 것이었다. 에덴의 존재도, 그것이 있다는 좌표도 코믹북에서 가져 온 것에 불과했다. 로건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허망함에 젖는다. 가브리엘라는 자식을 데리고 왔지만 동시에 거짓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로건이 간신히 지키고 있었던 세계를 모조리 붕괴하도록 이끌었다. 그래도 에덴이 진실이었다면 로건은 이 모든 곤경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여정이 허무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공허와 파멸이 예정된 삶. 그것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마리아도 그렇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앞다투어 찾아와 기적으로 잉태된 것에 대해 신을 찬미하며 많은 말들을 해댔지만 마리아에겐 그대로 공허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진실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또 두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통해 이적을 믿고 꿈을 꾸지만, 그것이 모두 한낱 허망한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들의 절망과 그 절망속에서 그들이 자신에게 쏟아낼 분노가 무서웠을 것이다. 아마 혼자라면 결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 낙태마저 감행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곁에 요셉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믿음을 가져왔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수태하게 된 것이라 날마다 그녀에게 찾아와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 마리아 내부에선 매일 진실과 믿음이 격전을 펼쳤을 것이다. 진실은 불안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믿음은 신념과 희망을 가져왔을 것이다. 하나님이 수태한 이 존재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만들어 낼 세상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하나의 희망이 되고 그런 존재의 어머니로서 걸맞는 존재가 되기 위해 지금보다 더욱 올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신념이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찰스는 요셉처럼 믿음을 강조하고 로건은 마리아처럼 진실과 믿음 사이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다 결국 마리아가 그랬듯이 하나의 확고한 길을 찾아낸다.



 신약 성경의 틀을 빌려온 '로건'은 이렇게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영화가 누누이 말하고 있는 바는 '믿음의 대상이 현존하느냐 부재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이것은 그대로 올바르게 살려고 애쓰지만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을 얻지 못할 때 그렇다고 그 삶이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는가와 연결된다.). 옳은 것에 대한 믿음을 갖고 그 믿음대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에 나오는 '셰인'이라는 영화로 더욱 부각된다.

 찰스는 호텔에서 로라에게 자신이 어릴 때 보았던 영화 '셰인'을 보여준다. 셰인은 마침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로라가 영화 속 아이처럼 그것을 주의 깊게 듣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로라를 조금은 인간답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영화 '셰인'은 픽션이다. 셰인과 아이는 허구의 인물이고 셰인이 말하는 대사는 작가가 상상한 말을 대신 전하고 있을 뿐이다. 알고 보면 '셰인' 역시 가브리엘인 것이다. 그리고 영화 '셰인' 자체는 로라가 가지고 있었던 '엑스맨' 코믹북이나 다를 바 없다. 로라 역시 코믹북을 읽으면서 그것을 진짜로 믿었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와 살아갈 바를 설정했으니까. 실은 거짓과 환영일 뿐이었으나 그것이 진실이라 믿음으로써 찰스는 오늘의 찰스가 되었고 로라도 보다 인간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 '셰인'을 보는 장면에서 로건이 사실과 믿음 앞에서 앞으로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이미 드러나 있었던 셈이다.



 나는 앞서 찰스의 마지막 대사는 로건이 그토록 찾았던 진정한 안식의 장소는 바로 로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그것을 어떻게 찾는가? 혹은 마련하는가? 바로 그래서 나는 로건이 아버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란 존재는 무엇보다 대표적인 누군가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가능한 반문이 하나 있다. 로건은 계속 찰스를 맡고 있었다. 그건 책임이 아니었나? 합당한 반문이다. 로건은 찰스와 로라 모두를 책임졌다.


 하지만 찰스에 대한 것과 로라에 대한 것은 다르다.

 찰스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일으킨 고백에 대해 참회한다. 그러면서 로건이 내내 주었던 약이 실은 그 비극을 일으킨 죄책감에서 달아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로건은 그동안 찰스가 자신이 저지른 죄를 망각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일조했다. 로건은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호는 아니었다. 근대 이후 개인이 천부인권의 존재로 부상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인격은 어디까지나 책임으로 그 존부가 결정되었다. 속죄는 인격을 가진 존재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로건은 찰스가 그런 참회와 속죄 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것은 로건이 찰스를 비인격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영화는 초반에 로건이 찰스를 짐처럼 여기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로건 보다 더 사실에만 집착하는 칼리번은 더욱 그렇게 여기고 있다. 로건과 칼리번에게 찰스는 인격적 존재이기 이전에 파멸을 가져올 지도 모를 병기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찰스의 폭주는 찰스가 진정으로 인격적인 존재가 되려면 필연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기억하고 그것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은 그야말로 자신의 세계가 산산히 부서지는 것과 똑같은 충격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찰스에 대한 로건의 책임은 진정한 책임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위험한 맹수를 우리에 가두고 돌보는 간수의 의무 비슷한 것이었다. 책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나 맡은 대상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에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로라에 대한 로건의 책임이야말로 그가 보여주는 진정한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책임이 그가 그토록 바랐던 안식의 거처를 마련한다. 진정한 안식은 몰려오는 삶의 위협과 공포로 부터의 도피로 얻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위협과 공포가 자신에게 더이상 아무 것도 아닐 때라야 가능하다. 맞서 싸우면서 관통해야만 누릴 수 있다. 안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바뀌지 않고선 안식도 얻을 수 없다. 그 변화를 진정으로, 또 가장 빨리 가져다 줄 수 있는 게 바로 타인에 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로건은 로라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이미 안식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찰스의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을 가르키고 있었다. 믿음은 이 책임을 적극적으로 맡도록 하고 그 범위를 확장한다. 보상이나 결과를 먼저 헤아리면 섣불리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내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책임지려 하기도 한다. 바로 그 예상과 타산으로 위축되는 책임을 믿음은 과감히 능동적으로 만들며 나와 전혀 관계 없는 이에게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믿음과 책임은 이렇게 연결된다.


'로건'은 한 마디로 이렇게 트럼프 시대에 접어들어 더욱 타인에 대한 적대와 사리사욕을 추구하게 된 지금에 있어 어떻게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하는 영화다. 나는 분명히 이 영화가 트럼프 시대에 대한 하나의 발언이라 믿는다. 웨폰 X로 만들어지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대로 현재 미국에 미래가 없다는 것의 암시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영화가 로건을 하필이면 마리아로 그리고 있는 지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다. 로건은 아이들을 구해 인류에게 미래를 낳는 산모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로건을 보며 "셰인'에게서 삶의 모범을 찾았던 아이처럼 어떻게 살 것인지 그 모델을 확인한다. 뒤이은 아이들의 저항은 분명 그런 깨달음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로건이 낳은 미래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것은 로라가 예수요, 아이들이 바로 그 예수의 사도들이라는 것으로 암시된다. 왜냐하면 로건이 구한 아이들의 수가 로라를 포함하여 열 셋(아마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내가 얼른 세었을 때는 이 숫자였는데 그래서 그냥 그 숫자라고 믿고 싶다.)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로 예수와 열 두 사도들의 숫자다.


 그러므로 영화가 이 모든 이야기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시대의 어둠에 대해 어른으로써 어떻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를 관객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낙담과 실의 속에 어두운 과거를 지속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어른으로 져야할 책임을 지고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가? 슈퍼히어로가 아닌 인간을 그리는 이 영화는 그만큼 더 우리에게 윤리적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이런 시대에 꼭 필요한 윤리를. 이것이 나를 영화 '로건'을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는 영화 중 하나로 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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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7-03-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네요. 영화 ‘셰인‘이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보고 싶습니다...

ICE-9 2017-03-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독이 웨스턴 분위기로 찍은 것도 이 셰인과 관계 있지않나 생각되네요. ^^

Shining 2017-03-18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과 관련해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헤르메스님 글 읽으니 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전 로라와 배우인 다프네라는 이름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만 생각이 났거든요 :)

제 앞줄에 앉으신 분은 이 영화 끝나고도 계속 훌쩍훌쩍 우시더라구요. 영원히 강할 것 같던, 시리즈 내내 강한 뮤턴트의 대명사였던 울버린의 약해진 모습도 충격이었거니와 평생 뮤턴트를 위해, 인간과의 화합을 위해 살았던 프로페서 X의 눈물어린 고해와 마지막 퇴장에 여러모로 마음이 아팠어요. 17년간 울버린으로 살기 위해 탄수화물 섭취를 극단적으로 줄였던 휴 잭맨이 해방되어서 기쁘면서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그립고 아쉽고 그렇네요. 그래도 마지막 시리즈가 (드디어!) 잘 뽑혀서 무척 기분 좋습니다 :)

덧) 그나저나 <셰인>이라니. 누가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을까요ㅎㅎ

ICE-9 2017-03-21 02:28   좋아요 0 | URL
아니, 샤이닝님! 이게 얼마만에 받아보는 댓글인지!! 일단 너무 반갑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네요^^
아, 그러고 보니 ‘로라‘란 이름, 저 왠지 비라 캐스퍼리의 ‘로라‘가 떠올랐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 포획되었지만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멋지게 탈출한 소설 속 로라가 그대로 영화 속 로라와 겹쳐 보였어요. ‘셰인‘이 인용되었듯 혹시 감독은 오토 프레밍거의 ‘로라‘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하게 되네요. 저도 오랜만에 가슴 한 켠이 찡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찰스의 모습은 너무나 가슴 아팠구요.(진심으로 감독이 눈 앞에 있었다면 꼭 그렇게 보내야만 했냐면 멱살 잡고 싶었을 정도로 ㅠ ㅠ)
저도 ‘로건‘ 정도면 피날레로써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딱 한 작품만 더 해 줬으면 좋겠어요.
바로 데드풀과의 콜라보. 울버린의 클론인 데드풀이 한 영화에 나와 이러쿵 저러쿵 하는 모습을 정말 보고 싶네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슈퍼 히어로와 웨스턴의 절묘한 조합이라니! 감독이 웨스턴에 애정이 많다고 하던데 ‘로건‘과 딱 어울리는 영화를 제대로 가져온 것 같아요^^


 


 훌륭한 영화는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영화는 음식처럼 시간이 오래 흐르면 상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수없이 겹쳐진 시간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강고한 내공을 가진 작품은 많이 없다. 그러나 정말로 훌륭한 영화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포도주가 그러하듯이 더 좋은 향과 맛을 낸다.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진짜 좋은 작품을 선별하는 감별사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04년에 개봉된 바 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정녕 포도주라 할 만하다. 그것도 아주 품질이 좋은. 13년이 흐른 후 다시 관람해 보니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감히 말하건대, 내 생각엔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25편의 영화 중에 '용서받지 못한 자', '미스틱 리버'와 함께 최고작 트로이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영화들엔 공통점이 있다. 죽음과 죄에 대한 감각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 '미스틱 리버'의 지미 그리고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는 모두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다. 그들 모두 과거에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다. 물론 영화에서 프랭키가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딸인 케이티가 오래도록 남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답장을 바라며 쓴 프랭키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계속 반송시키는 것을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케이티는 분명 아버지 프랭키에게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케이티의 존재는 프랭키가 왜 영화 첫 장면에 하필이면 선수의 상처를 지혈시키는 모습으로 등장했는지 알려준다. 그가 지금 하고 있으며 가장 잘 하는 일인, 상처를 심판이 보기에 아무렇지 않게 봉합하고 은폐하는 일은 실은 딸과의 관계를 그렇게 회복하고 싶은 프랭키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낸 것임과 동시에 다시는 과거처럼 상처를 입히며 살지 않겠다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속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속죄의 모습은 자신이 경영하는 복싱 도장에서 더욱 드러나는데, 그 곳을 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달리 어디 갈 데가 없는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인데 바지 살 돈이 없어 늘 팬츠를 입고 다니는 데인저와 한 번도 챔피언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마지막 시합에서 한 쪽 눈까지 잃어 그대로 은퇴한 스크랩(모건 프리먼 분)이 잘 보여주듯이 프랭키는 그런 그들을 거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랭키가 겉으로는 영 탐탁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말이다. 프랭키가 그랬듯이, '용서받지 못한 자'의 빌과 '미스틱 리버'의 지미 역시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모두 가까운 가족들이 대신 짊어졌다. 빌은 아내를 잃었고, 지미는 딸을 잃었다. 프랭키도 딸을 잃었다. 2003년에 나온 '미스틱 리버'에 나오는 지미와 바로 다음 해에 나온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프랭키 모두 딸을 잃었다는 점에서 두 영화를 어느 정도 연장선 상에 놓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에 그들 모두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과 그것도 모두 무고한 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둘의 살인은 엄연히 다르다. 지미는 복수였다. 격한 감정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반면, 프랭키는 희생이었다. 이것은 그가 그것을 결행하기 전에 성당에서 만난 신부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빠져요. 프랭키. 당신은 23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 성당에 나왔어요. 그 어떤 이유가 있다고 해도 그런 짓을 한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은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에 빠질 거고 다시는 자신을 찾지 못할 겁니다.


 프랭키 역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눈물에 푹 젖은 그의 눈과 덜덜 떨리는 입술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기에게 지금의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루 하루 더 살면서 더 죽어갈 뿐이에요."


 그래서 그는 결행한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영원토록 끔찍한 고통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매기가 누렸던 삶에서 최고의 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떠날 수 있도록.

 그의 둘 도 없는 친구이자, 영화의 화자(이 영화의 이야기는 스크랩이 프랭키의 딸 케이티에게 아버지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해달라고 보낸 편지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이기도 한 스크랩은 프랭키가 자신의 아버지가 사랑하던 개 액셀의 고통을 덜어주려 했던 것처럼 자신도 죽여달라는 매기의 부탁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한다.



 프랭키 : 내가 그녀를 죽였어.

 스크랩 : 그런 소리 마. 매기가 처음 이 문을 들어섰을 때 배짱 말고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었어. 세상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것에 대해 아무 기회도 갖지 못한 애였어. 자네 덕분에 그녀는 세계 챔피언과 싸울 수 있었어. 자네가 해 준 거야. 사람들은 매일 죽어, 프랭키. 복도를 청소하다가 죽기도 하고 접시를 닦다가 죽기도 하지. 그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슨 생각을 할 것 같나?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한 방을 날려 본 적이 없어. 그러나 매기는 한 방을 멋지게 날렸지. 자네 때문에. 만일 그녀가 오늘 죽는다면 그녀의 마지막 생각이 무엇일 것 같나? 내 생각엔 '모두 잘 해냈어'일 것 같군."


 여기서 스크랩은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을 향해 제대로 날린 한 방의 의미로 'shot'이란 말을 쓴다. 그런데 이 말은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할 때 그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내가 너에게 주사를 놓을 거야.(I'll give you shot.)"


 여기서 'shot'이 반복된 이유는 분명하다. 스크랩이 말했던 바로 그 최고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떠나게 해 주겠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프랭키의 매기에 대한 마지막 행동은 순전한 희생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고통에 빠질 것을 알지만, 오로지 매기의 행복을 위해서 그는 그 일을 했다. 그렇다고 지미처럼 격한 감정에 흔들린 행동도 아니었다. 영화는 프랭키가 매기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장면을 차분하게 잡는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프랭키는 조용한 말투와 침착한 행동으로 매기에게 앞으로 자기가 할 일을 자세히 알려주고 절차를 차례대로 행한다. 그 모든 것이 프랭키의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영화는 화면으로 보여준다. 바로 매기가 그의 진정한 '모슈쿠라'이기에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매기의 또 다른 이름이 된, 그리고 그녀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나타내는 '모슈쿠라'의 의미는 프랭키가 매기를 보내는 마지막 순간 비로소 밝혀진다.


 "모슈쿠라는 나의 사랑, 나의 혈육이란 뜻이야."


 '모슈쿠라'란 말이 나타내듯, 매기는 프랭키에게 잃어버린 딸이었고, 그녀의 만남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에게 두 번째 기회이기도 했다. 매기가 가진 이러한 의미는 자신의 고향집에 갔다가 돌아오다 들른 주유소에서 매기가 우연히 주유기 건너편의 소녀를 보는 장면에서 엿보인다.



 이 소녀는 분명 매기에게 어린 시절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이것은 이 장면 뒤에 돌아가는 차에서 프랭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에 대한 얘기에서 드러난다. 어릴 때 매기의 집에 액셀이란 개가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즉 매기는 이 소녀에게서 한 아버지의 딸인 자신을 보고 있었고 동시에 이것은 프랭키에게 매기가 지금 그 때와 같이 딸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러한 측면을 더욱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 이 장면의 소녀 역할을 자신의 친딸에게 맡겼다. 그런 의미에서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가지는  여러 생각과 감정도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기와 프랭키 모두 실은 단절된 관계의 회복을 몹시 바라고 있다. 그러나 매기의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매기는 바로 그 경험을 한 뒤 이 장면을 본다. 이것은 매기에게 이제 이전의 가족과 결별하고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암시일 수도 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프랭키를 통해 그 아버지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매기와 프랭키 모두 관계의 회복,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좀 더 충만해지기를 몹시 바라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과거의 수구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과거에 연연해 현재의 자신만 고집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영화는 반복적으로 재현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랭키가 딸에게 보낸 편지가 반송되어 온 것을 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의 진짜 의미는 가장 마지막에 가서, 그러니까 매기의 다리가 결국은 괴사하여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을 안 날 밝혀지는데, 여기서 영화는 전혀 다른 구도로 그 장면을 잡는다. 영화에서 반송된 편지를 받는 장면은 여러 번 등장 하지만 유독 이 장면만 정반대의 구도로 담는 것이다. 그 전까지 카메라는 내내 집 내부에서 밖으로 편지 봉투를 찍었다. 이것은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방어적이 된 그의 내면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그는 한 마디로 실패가 두려워 껍질 밖으로 나가기를 두려워 하는 거북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엇을 얻었던가? 아무 것도 없다. 윌리를 놓쳤고 딸과의 관계 역시 무려 23년 간 그대로이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딸에게 보냈다가 반송된 수 많은 편지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아도 프랭키가 가지고 있는 복싱에 대한 생각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프랭키는 말했다. 복싱은 이상한 스포츠라고. 원하면 거꾸로 해야 한다. 펀치를 날리고 싶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고."


 그는 이런 말로 앞으로 나아가 변화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정당화 시켰다. 하지만 원하는 곳 끝까지 가 본 적 있는 스크랩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반박한다.


  "그러나 너무 멀어지면 주먹을 날릴 수 없다."


 스크랩에 따르면 프랭키는 제대로 복싱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복싱은 이런 것이다.


  복싱엔 존중이라는 게 있어.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상대의 것을 빼앗는 것이지.


 프랭키는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에만 너무 빠져 있다. 상대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것을 먼저 내어주어야 한다는 걸 그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아마도 스크랩은 프랭키에게 매기를 지도하도록 은근히 인도했을 것이다. 시골의 깡촌에서 상경하여 자신의 삶이 쓰레기라는 것을 벌써 절감해 버린 여자. 가족이라고는 자신을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에다 정부에게 양육비나 속여 먹는 여동생 그리고  감옥에 간 오빠밖에 없어 자기말고는 세상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 오로지 자신이 좋아하는 복싱만이 삶의 유일한 희망인 여자. 그래서 30살이 되어서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남들이 뭐라고 해도 복싱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여자. 그녀가 바로 매기였다.



 "제가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야겠죠. 중고 트레일러나 하나 사서 튀김이나 오레오나 먹으며 살아야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것이 제가 하면서 좋다고 느끼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에요. 저도 알아요. 제가 이 짓을 하기엔 너무 늙었다는 것을. 하지만 이것말고 제겐 아무 것도 없어요."


 어쩌면 그런 절박함, 가진 것이 쥐뿔도 없고 누가 봐도 복싱을 하기엔 한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뛰어드는 그런 모습이 스크랩의 마음을 움직였을지 모른다. 실패와 상처가 뻔히 예상되는 데도 앞만보고 저돌적으로 달리는 매기의 모습은 분명 실패와 상처가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 하는 프랭키와 정반대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는 매기가 프랭키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복싱에는 이런 마법의 힘이 있기 때문에...



 "만일 복싱에 마법 같은 게 있다고 한다면, 그 마법은 부러진 갈비뼈나 파열된 신장 그리고 찢어진 망막 너머에 있어. 너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바로 복싱의 마법이지."


 자신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꿈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것. 그것이 복싱이 가진 마법의 힘이었다.

 프랭키에게 그 꿈은 잃어버린 딸을 되찾는 것이었다. 과연 스크랩의 생각대로 프랭키는 변화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앞에서 말한 프랭키가 현관에서 편지 봉투를 보게 되는 장면이다. 거기서 영화는 처음으로 위치를 정반대로 옮겨 밖에서 안으로, 프랭키가 집 안에 놓인 편지 봉투를 보는 것을 찍는다. 밖에 있는 그의 시선 속에 안에 있는 편지 봉투가 들어온다. 이 장면은 딸에게서 반송된 편지가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도는 바깥의 그가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강조한다. 이전과 달리 그는 좀 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문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  때는 프랭키가 영화에서 가장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던 순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매기 역시 처음으로 완전히 절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프랭키는 어떠했겠는가? 프랭키의 마음이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바로 드러난다. 그런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고 보면 지금 나타난 문은 사실 프랭키에게 하나의 진정한 시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이 뒤에 완전히 절망한 매기에게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늘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다. 그는 되도록 상처 받지 않고 지금 있는 이대로를 지키는 게 자신이 가진 삶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매기의 부탁은 그런 원칙에 정면으로 위반한다. 예전의 그라면 결코 따를 수 없는 요청. 과연 그는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그는 들어간다.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입증한다. 이제 그는 전혀 다른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과거의 원칙을 포기하고 삶이 가져다 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걸.


 이것은 스크랩이 매기에 대해 말할 때, '매기가 문을 들어섰다'라는 문장을 썼던 것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런 대사들을 통해 영화가 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문'은 변화를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이 말이다. 그 문이 나타남은 변화의 부름이며,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변화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매기가 영화에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녀는 링 위에서 윌리를 열심히 치료하고 있는 프랭키를 멀리서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그런 그녀의 뒤로 'EXIT'의 문이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복싱이 현재의 비참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진정한 변화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스크랩의 '문'이란 말은 바로 이 장면과 연결되는 것이다. 매기도, 프랭키도 결국엔 자신 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했다. 과연 그 문을 그렇게 통과하자 프랭키는 예전에는 슬픔과 상처 속에 쥐었던 반송된 편지 봉투를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집으면서 망설임도 없이 안으로 성큼 사라진다.


 여기서 하는 말이지만,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단순히 복싱을 너머 진실로 우리 삶에 대해 얘기하는 영화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그런 우리 앞에 놓인 삶은 예측 불가능으로 더없이 넘쳐 더욱 우리의 근심과 불안을 조장한다. 이런 상황 안에서는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데인저처럼 느닷없이 패배를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겐 우연이 필연이 된다. 한 번의 패배가 영원한 굴레가 된다. 그래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재기의 가능성을 보기 보다는, 마주할 공격과 받을 상처만 두려워 하여 자신의 굴 속에 갇히는 쪽을 택하는 이도 많다. 정녕 프랭키가 우리와 먼 모습일까? 적어도 내겐 그렇지 않았다. 프랭키의 주저와 망설임 그리고 두려움은 분명 나도 언젠가 지녔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삶은 계속 이어지고 프랭키 앞에 나타난 매기처럼 늘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문은 나타난다. 윌리와 매기에게 다가온 챔피언 타이틀의 기회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우리는 속으로는 무척이나 변화를 바라면서도 막상 그것에 뛰어들었을 경우 어떻게 될 지 알지 몰라 그 때문에 지레 겁먹거나 막연히 안 좋을 것이란 예감으로 내 앞에 나타난 많은 문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처음엔 단순한 선택으로 여긴다. '아직 마땅한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을 뿐이야. 그런 기회가 찾아오면 반드시 뛰어들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그런 수동적인 상황에 너무나 길들여져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눈에 들어왔을 그 문조차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되는 탓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그런 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 정말 중요한 것은 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들어 준다. 매기처럼 자신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프랭키가 윌리의 경우 그랬듯이 아무리 좋은 문이 나타나더라도 뛰어들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 능동적이며, 그래서 너무나 주체적인 매기를 통해 프랭키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스크랩은 프랭키가 매기의 한 방을 만들었다고 했지만 매기는 그보다 더 한 것을 프랭키에게 선사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이자 절망일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어둡고 작은 가게에 유폐되어 있는 그를 그려 이런 생각을 유발시킨다. 하지만 그는 지금 불빛이 따스한 가게 안에서 그 스스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던 맛있는 레몬 파이를 먹고 있는 중이다. 영화에서 혼자의 모습으로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마음 편한 식사의 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그의 안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신에게서 구하려 했던 것을 매기를 통해 비로소 얻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제목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는 2차 대전에 참전한 폭격기 기수에 그려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이것을 제목으로 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변화를 상정하고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폭격기는 무수한 폭탄과 더불어 모든 것에 소멸을 가져 온다. 그렇게 완전한 과거의 소멸, 동시에 진정한 변화. 바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제목으로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폭격기가 일으키는 변화는 죽음을 매개로 이뤄지므로, 여기엔 매기의 죽음을 통한 변화라는 암시도 있는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통해 삶을 얼마나 원숙한 시선으로 헤아리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그도 우리처럼 삶이라는 링 위에서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하고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략한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했다. 감독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예술이기 이전에 삶으로써 영화에 다가갔다는 게 이 영화를 그의 최고 작품으로 만든 진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훌륭하게 숙성된 포도주를 음미하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경험이다.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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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무더운 여름입니다. 원래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그렇지 않아도 여름엔 책 읽기가 힘든데, 이제는 살인적인 무더위마저 가세해 책 읽기가 여간 어렵지 않네요. 덕분에 한동안 손놓고 있었던 영화를 보게 되는군요. 주말엔 소장한 DVD로 호금전의 '소오강호'를 봤습니다.

  최가박당으로 유명한 허관걸이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 역을 맡았었죠.

   

 

  영화는 1990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호금전이 오래만에 일선에 복귀해 홍콩 뉴웨이브의 기수 서극과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김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영화로 만든 것은 78년의 왕우가 주연한 영화에 이어 두 번째라는 군요.

 

 

 호금전과 서극의 만남은 당시의 영화 팬들을 몹시도 흥분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신구세대의 거장들이 힘을 합하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죠. 하지만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 공명을 두고 '어찌 하늘이 이 주유를 천하에 태어나게 놓고도 또 제갈 공명을 태어나게 한 것인가?'라고 한탄했듯이 역시나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고 뛰어난 두 사람이 힘을 합치기는 어려운 일인지 호금전은 연출 방향을 두고 서극과 불화를 일으키다 결국 중도하차하고 맙니다. 당시의 호금전은 '협녀'에서 해왔던 대로 경극과도 같은 동선과 군무와 같은 무예의 합을 그리는 식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지만 서극은 '접변'이나 '천녀유혼'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 세례를 받은 특수효과를 더욱 많이 쓰려고 하였기에 일어난 불화였죠.


 그래서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연출이 앞과 뒤가 다릅니다. 그건 전반부의 좌냉선과 영호충 일행이 풍랑당의 배에서 벌이는 무예 장면과 후반에 대내동창과 악불군이 벌이는 무예 장면만 비교해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극은 이 영화의 감독으로 '호금전'의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호금전이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은 평소 호금전을 존경한 서극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죠. 결국 중도 하차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존경의 의미에서, 그리고 또한 그가 감독으로서 영화에서 이루어 놓은 부분이 적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것 같습니다.


 이런 화면 구도는 그야말로 호금전의 것이죠.

 

 영화는 무상함에 대한 것입니다.

 힘과 권력에 대한 무상함,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것의 무상함 같은 것들을 말이죠. 제목의 '소오강호'는 영화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대내동창의 앞잡이 좌냉선의 추적을 피해 영호충 일행이 우연히 숨어든 배에서 만나게 되는 일월신교의 신도 노귀('강시선생'으로 유명한 임정영이 연기했습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셨죠.)와 풍랑당 당주 노곡('천녀유혼'의 은둔 고수를 연기했던 '우마'가 분했습니다. 이 분도 폐암으로 타계하셨군요.)이, 한 사람은 정파(풍랑당)로 또 한 사람은 사파(일월신교)로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었지만 그래도 30년간의 우정은 변치 않았고 그러면서도 그 우정을 숨겨야 했던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도대체 이러한 이념 따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의 취지로 지은 노래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오강호'는 실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중국과 홍콩에 대한 것입니다. 영화가 추구하는 무상함은 중국과 홍콩이 취하고 있는 다름과 반목의 무상함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사실 영화의 주제는 바로 그 노래 가사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특히나 풍랑당의 교주 노곡이 그 후임자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는 법이네...

  그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말게..."

 

 생각해보면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은 모두, 나중에 풍청양이 이야기하듯이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고 결국 그 권력욕의 본질엔, 후반에 장학우가 분했던 구양전이 그러하듯이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등이 그러한 힘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낳게 하는 것이죠. 영화에서 가장 커다란 악역인 대내동창도 사실은 규화보전이 강탈 당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정적들이 모함으로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그리 맹렬한 추격에 나선 것이었구요. 


 본질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풍랑당 당주 노곡은 그러한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임을 잊지말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 노귀와 노곡의 이야기가 정파와 사파로 나누는, 그렇게 사람을 이런 저런 외부의 것으로 나누는 짓의 헛됨을 보여준다면 영호충이 추격을 당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풍청양의 이야기는 힘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독고구검'이라는 강호 제일의 무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데 영호충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강한 무공을 가지더라도 소인배들이 가족을 가지고 위협하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일이네. 인간의 감정 앞에선 무공은 힘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래서 나는 강호를 떠났네. 가족도 떠났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풍청양의 고백은 영화 초반 규화보전을 훔쳤다고 의심받는 임진남의 집을 대내동창이 좌냉선을 앞세워 습격했을 때, 임진남 앞에서 아내의 두 눈과 혀를 잘라버리는 데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을 이미 관객들이 보았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힘을 쫓지 말고, 이름만큼 허망한 것도 없으니 명예도 쫓지 말며,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쫓으라고 말하는 것이 꽤나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절기 '독고구검'을 영호충에게 전수해 줍니다. 영호충이 자신에게 전수한 검법이 무엇인지 묻자, 풍청양은 그건 '독고구검'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 패배에서 나온 검법이라네."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공인 '독고구검'은 풍청양이 숱한 패배에서 얻었던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검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앞서 노곡이 말했던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 호걸이 나오지 않는다.'란 말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기고 지는,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소오강호'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니.'

 

 즉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오로지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순간의 승자와 패자로 모든 것을 이겼다, 졌다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승패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거대한 삶이라는 시간 앞에서 새벽 첫 햇살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슬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도,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힘과 권력을 쫓는 일도 말이죠. 결국 영호충의 스승, 악불군은 제자까지 죽여가면서 '규화보전'이라는 힘과 권력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딸에게마저 버림을 받고 말죠. 그가 마지막에 찢어 하늘에 날려보내는 피에 물든 '소오강호' 악보는 피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깨우치게 된 무상함의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소오강호는 김용의 원작에 그리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야기는 재미있고 무예의 연출도 멋집니다. 하지만 더욱 좋은 것은 이런 식의 삶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러한 통찰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끌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뜻 스쳐가듯 묘사되어서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하는 식으로 그리 강요하듯 제시되지 않는 까닭에 더욱 마음에 듭니다.

 

 


 











제가 소장한 것은 검색되지 않는군요. 할 수 없이 블루레이를 링크합니다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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