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처럼 비웃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5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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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계승자라 할 만하다. 그것도 최고의! 요코미조 세이지는 에도가와 란포와 더불어 근대화기의 일본 미스터리계에 있어 양대산맥이라 할만한 작가다. 그는 소년탐정 김전일이 사건 해결에 앞서 입버릇 처럼 말하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에 있어 그 할아버지인 '긴다이치 고스케'라는, 추리력은 뛰어나지만 범죄를 막기에는 한없이 무기력한 그러나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고 인기있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이 나온김에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를 한 번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같은 시기 활동했다. 그 시기는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단행되었던 근대화가 거의 완성에 이른, 레닌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궁극적 완성이라는 제국주의적 시대이기도 했다. 즉 일본은 에도가와 막부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고유한 전통으로 부터 막부의 필요로 위로부터 적극 유입해온 외래의 서구 자본주의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시기였다. 요코미조 세이지와 에도가와 란포는 바로 그 시기에 활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에도가와 란포는 서양의 추리 문학으로 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답게 철저히 비일본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거의 일본적 특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마치 별개로 떨어져 나온 것 처럼 지극히 서구 '모던'적이다. 반면 요코미조 세이지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드러낸다. 그는 범죄의 현장을 대부분 일본적 전통이 계승되는 장소로 잡는데 거기서 일어난 범죄는 대부분 위기에 처한 일본적 전통의 징후를 드러내는 역할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요코미조 세이지는 바로 외부의 서구 자본주의로 인해 공격받고 단절되는 당시 현재의 일본 모습을 그대로 미스터리 형식으로 담아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란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그 모든 것이 평정되어 버린 완성된 서구적 '모던'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란포와 대비되어 뚜렷이 떠오르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특성이 바로 긴다이치 고스케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는 무기력을 선사하는 이유가 된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는 란포처럼 서구의 자본주의가 과연 긍정할만한 것인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거기다 한 편으론 일본의 고유한 전통 문화가 이렇게 마구 단절되어져도 좋은 것인지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정확히 그러한 작가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페르소나 긴다이치 고스케는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적극적 해결에 나서지 못하고 언제나 후일담 같은 추리를 덧붙이는 것이다. 여기서 받게되는 것은 어쩌면 세이지 자신에게 미스터리 해결 자체는 그리 추구하는 목적이 아닌 것 같다는 인상이다. 아마도 그가 정말 미스터리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것은 외부의 가치로 인해 부서지고 단절되며 그래서 범죄를 통해서라도 지킬 수 밖에 없는 일본의 고유한 전통의 현장 자체가 아닐까 생각된다. 때문에 미스터리 해결 마저도 범인 찾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진실한 해답 찾기라 할 만하다. 즉 요코미조 세이지의 미스터리는 바로 그가 딛고 있었던 사회와 같이 호흡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2. 미쓰다 신조와 요코미조 세이지 

 

   

 

  이것이 중요하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소설이 언제나 그 사회와 더불어 호흡한다는 것. 이것은 그대로 미쓰다 신조에게로 이어진다. 요코미조 세이지에게 범죄란 일본 고유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미쓰다 신조도 마찬가지다. 이전작 '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도 그렇고 이번 작품 '산마처럼 비웃는 것'도 그렇고 공통적으로 딱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이 한창 2차 대전을 벌일 무렵 일본 고유의 전통이 계승되는 현장에서 범죄가 벌어진다.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과 이어지는 작품으로 전작에서 우연히 산마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갑작스럽게 기차에서 내려버린 도조 겐야가 찾아간 산마가 나온다는 마을이 이번 소설의 주 무대가 된다. 책은 전작처럼 노부요시의 수기가 앞에 붙어 있는데 그 수기란 한 지역을 책임지는 가문의 셋째 아들인 노부요시가 그 지방의 고유한 전통적인 '성인-되기' 참배에 참여했다가(그것은 산에 있는 사당을 돌며 참배를 하는 것인데.) 들어가서는 안되는 '부름산'에 잘못 들어간 나머지 거기서 겪었던 기이한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노부요시의 성인-되기 참배는 전작 '잘린머리'에서의 '십삼야 참배'와 동일한 것이다. 미쓰다 신조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성인-되기 참배를 끌어들이는 것은 성인, 즉 어른이 가지는 상징 때문으로 일본 전통의 법칙에 따라 어른이 된다는 것이 바로 전통의 계승, 그렇게 수호된 일본 고유한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지와 똑같이 미쓰다 신조도 바로 거기서 범죄가 일어나도록 만든다. 요코미조 세이지의 세계에서 범죄란 늘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것은 범죄자의 면모를 확인하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하지만 여기서 범죄자를 밝히는 것은 그야말로 스포일러가 될테니 이정도로 넘어가자. '당신이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의 범죄자와 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의 범죄자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공통점으로 자연히 내가 얘기하려고 했던 바를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에게선 완곡하게 표현되었던 것. 그러니까 전통을 단절시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보다 더 확실하게 언급한다. 그러니까 그 단절을 낳는 것이 바로 전쟁 당시 일본 지역 사회를 가장 급속하게 변화시켜가던 서구적 가치관이라는 것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따른다. 일본 고유의 전통 사회에서 서구적 가치관은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에(왜냐하면 그것은 곧 파괴를 가져오므로) 당연히 변형을 거친다. 배척의 타당성을 위하여 보다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말이다. 즉 프로이드가 말했던 '괴물'이 되는 것이다. 그걸 미쓰다 신조는 괴담속의 마물로 다시금 빚어내는 것이다. 즉 미쓰다 신조에게 있어 '잘리머리'에 있어서 '아오쿠비'나 '쿠비나시'라든가 '산마처럼 비웃는 것'에 있어서의 '산녀'나 '산마'의 존재는 바로 그와 같은 상징을 지니고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의미들이 명확해졌으니 왜 미쓰다 신조가 하나의 산 전체를 밀실로 만들어버리는 지 이해가 된다. 그는 특히 3중 4중의 밀실을 만드는 것을 즐겨하는데 그것은 일본 전통 사회의 폐쇄성을 강조하여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대체로 사건이 한 지역을 책임지는 당주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대로 이어져 온 가문의 역사를 통해 그렇게 면면히 뿌리내린 일본 전통 가치를 의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곳을 괴담의 존재들이 활동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것들이 능력이 실로 막강하다는 것이다. '잘린 머리'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는 실로 굉장하다. 그것은 사람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데 거기서 이루어지는 구라타 가네의 주술과 아오쿠비의 저주간의 대결은 그야말로 일본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의 대립을 그대로 은유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등장인물들의 아오쿠비나 산마에 대한 공포들은 바로 그들로 인해 변해버릴 지도 모를 내가 가진 정체성의 위협으로 인한 공포인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 그러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변해가는 머리와 기왕의 몸이 따로 노니는 상황은 전작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신체' 자체로 형상화된다. 몸에서 머리가 분리되는 것이야 말로 정체성의 변화라는 테마에 딱 적당한 신체적 묘사가 아닌가. 그러니까 미쓰다 신조 작품들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이자 굉장한 장점인 조밀하게 엮어가는 공포 분위기는 바로 위험에 노출되어진 정체성 그 자체를 독자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나마 온전히 체험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에서 '산마처럼 비웃는 것'이 일보 전진했다면 그것은 괴담의 존재들이 의미하는 것이 보다 명확해지고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있다. 전작에서 실체는 없이 오로지 심리적 측면으로만 사람들을 지배했던 아오쿠비와는 달리 '산마처럼'에서는 아예 한 지역이 산마의 존재로 인해 금단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또한 아오쿠비의 저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작에서는 그리 명확히 밝히지 못했는데 '산마처럼'에서는 금단의 영역인 '부름산'의 의미를 통해 보다 분명한 의미를 갖게 된다. '부름산'의 또다른 이름은 '금산'이다. 말 그대로 금이 나는 산인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산마처럼'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처럼 살인을 예고하는 동요를 등장시켜 이것을 더욱 강조하는데 바로 그 동요는 금을 채광하는 작업을 묘사한 동요였다. 즉 여기서 미쓰다 신조는 아오쿠비 저주의 실체를 명확하게 밝힌다. 그것은 금 즉 '자본'인 것이다. 그렇게 아오쿠비의 저주는 '산마 처럼'에 와서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으로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미쓰다 신조는 요코미조 세이지의 작품 세계를 계승하면서도 요코미조 세이지에겐 그저 '불길한 것'으로 남아있었던 것을 더욱 진전시켜 보다 명확한 것으로 주조해낸다. 세이지는 변화의 양상을 쫓지만 미쓰다 신조는 변화의 원인을 추적한다. 세이지는 느즈막히 변화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닫지만(그래서 그에게 원인을 생각함은 시기상조다.) 신조는 '왜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렸지?'를 묻는다. 그래서 명탐정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언제나 사건이 대부분 진행되고 난 후에나 마치 후일담 처럼 개입하는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는 '산마처럼'에서 보듯 먼저 찾아가 적극적으로 시작부터 개입하는 것이다. 

 

  3. 도조 겐야와 긴다이치 고스케 

 

  이 둘이 다른 것. 나는 이것에 미쓰다 신조가 이 작품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의 핵심이 있다고 믿는다. 둘은 하는 일도 다른다. 긴다이치 고스케는 뚜렷하게 하는 일이 없다.(있었는데 읽었는지가 오래되어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룸펜이다. 반면 도조 겐야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항설백물어'에 나오는 모모스케 처럼 괴담 수집가이다. 그렇다. 겐야는 일본 전통 사회에 의해 괴물의 가면을 써 버린 존재들의 얘기를 모으는 사람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온 논의에 따르자면 겐야 자신이 서구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된다. 그는 과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가 지금까지 목도해 온 그것이 가져다 준 폐해를 목격하고서도? 

  '잘린머리처럼'에서 아오쿠비의 저주로 상징되는 서구 자본주의는 분명 위험한 것이었다. 그것은 살인을 불러왔고 일본의 전통 가치는 그에 의해 완전히 사지절단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명탐정 역할을 하는 도조 겐야는 그러한 가치관을 대변하는 괴담을 수집하는 자다. '잘린머리'에서 초반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다카야시키가 기차에서 겐야를 처음 보았을 때 경원시 하는 것도 그래서 이해가 된다. 괴담 수집가가 명탐정 역할을 하며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은 미쓰다 신조가 전편의 작업을 전면 부정한다는 의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그것은 아니다. 도조 겐야의 존재는 미쓰다 신조가 전작에서 대립적으로 구축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과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관계를 전혀 관점을 달리하여 볼 것을 요청한다. 즉 슬라보예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도조 겐야의 존재는 다른 '시차적 관점'으로 보자는 것이다. 

  미쓰다 신조는 이를 위해 하나의 뚝 떨어진 얼룩과도 같은 존재였던 긴다이치 고스케와는 달리 도조 겐야에게 꽤 상세하게 과거를 만들어준다. 물론 그 과거의 대부분엔 아버지가 차지한다. 그는 공작으로 추대된 화족 가문의 장자였지만 스스로 귀족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박차고 나와 경찰을 도와 명탐정 역할을 하고 있는 자였다. 그렇게 그는 기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였다. 그런데 도조 겐야 역시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버지가 아버지만의 명탐정 영역을 구축하고 살았듯이 괴담 수집이라는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여기에 '아버지'가 있다. '산마처럼'은 다양한 아버지들이 나타난다. 사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여기에 유념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겐야가 가진 존재적 독특성에 집약된 신조의 주제 의식은 바로 소설에서 펼쳐지는 이 아버지의 스펙트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처음 수기를 쓴 노부요시의 아버지를 보게 된다. 그 아버지는 전작 '잘린머리'에서 극단의 가부장적 질서를 보여준 '이치가미 가'를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그 아버지는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의미한다. 동경에 까지 유학하여 서구 자본주의적 가치에 노출된 노부요시였지만 일본 전통 사회 자체를 상징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는 전통적 성인-되기 참배식에 참여한다. 다른 한 편에는 '가스미 가'의 당주 다쓰지가 있다. 그 역시 노부요시의 아버지 처럼 한 가문의 당주이지만 그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게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아버지의 스펙트럼은 그처럼 강인한 아버지에서 시작하여 무기력한 아버지로 차례로 이어지는 스펙트럼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버지의 강인함이 그가 소유하고 있는 아들의 숫자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가지토리 가'의 당주 리키히라의 경우, 그는 딸만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 어떤 아버지 보다 타인들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는 심지어 아무 인연이 없는 구도승에게 조차 매일 저녁을 갖다주거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등 인정을 베풀어준다. 그는 남의 일에도 기꺼이 나서며 누구나 꺼려하는 금단의 영역 '부름산'도 맡아서 관리한다. 이런식의 대비는 전작 '잘린머리처럼'에서 나왔던 철저한 '남존여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즉 여기서 '아들'은 전통 질서를 강화하는 상징이고 '딸'은 그 질서를 약화시키고 바깥 것을 받아들임의 상징인 것이다. 딸만 가진 리키히라의 성품은 미쓰다 신조가 부여했던 상징 그대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도조 겐야는 아들이다. 그렇게 아직 기성의 질서로 부터 완전히 달아난 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내내 변화에 열려있는 자다. 그것을 나타내듯 소설에서 유일하게 그는 자신을 맡고 있는 담당 편집자인 여성과 늘 연락을 한다.(신조는 장차 이 둘을 로맨스 관계로 발전시키려 하는 듯 하다.) 즉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상징하는 존재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정체성을 반영하듯 그는 괴담을 수집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신조는 관점을 살짝 비튼다. 그는 도조 겐야의 존재를 통하여 전통과 외래적 가치관의 대립적 관계를 변화를 거부하고 옛 것 그대로를 지키는 수구적 태도와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관계로 비트는 것이다. 그래서 요코미조 세이지가 천착했던 주제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어쩌면 '산마처럼 비웃는 것'은 미쓰다 신조가 요코미조 세이지로 부터 벗어나와 그 진정한 출발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여전히 '잘린머리처럼 불길한 것'이 그의 최고 걸작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 작품이야 말로 도조 겐야의 그 진정한 시작이라는 점에서 또한 뒷받침 된다. 나는 여기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범죄자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직접 읽어보고 범죄자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도조 겐야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미를 가진 그로 인해 아버지의 질서에 안주하려는 수구적 태도와 겐야 처럼 변화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포용적 태도의 대립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4. 덧붙임... 

 

  개인적으로 미쓰다 신조는 일본 미스터리 계에서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미스터리를 형성하는 능력이나 분위기를 주조해내는 능력 그리고 미스터리와 분위기 모두를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에 맞도록 통제해가는 능력, 한 마디로 미스터리 작가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 중에서 가장 최고의 자질을 미쓰다 신조는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가가 요코미조 세이지 처럼 일본 그것도 한창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을 담아내고 있는 것에 천착하고 있음은 흥미롭다. 그는 연이어 하나는 걸작이고 다른 하나는 흥미로운 작품을 내어놓고 있는데 아직 그에게 구체적인 해답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불러도 무방할 도조 겐야 처럼 해답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이다. 다음 작품에서는 또 어떤 관점의 변화로써 그를 정말 좋아하고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나를 또 다른 사유의 시간으로 인도할지 정말 기대가 된다. 한 마디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은 모두 강추다. 일독할 것을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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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yo12 2011-09-06 0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장바구니에 넣어야하는 거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1-09-07 01:04   좋아요 0 | URL
미쓰다 신조는 개인적으로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보잘것 없는 리뷰 좋게 봐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