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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드는 커버인데, 이렇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나저나 라이블리가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자신은 부커상을 받았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정작 펭귄출판사에서 모던 클래식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스릴을 느꼈다고 한다. 정확히 그녀가 한 말은 이랬다. "It made me feel dead." 문장만 놓고보면 과연 이게 좋다는 뜻인지 나쁘다는 뜻인지 잘 알수가 없는데 원래 라이블리 자신이 이렇게 모순적인 단어로 감정을 표현한다고 하니 그대로 수긍할 밖에... 그런데, 왠지 '문타이거'의 주인공 클라우디아와 어쩐지 좀 닮은 것 같다. 기성의 관습을 제멋대로 거스른다는 점에서... 

  서두를 이렇게 라이블리 개인으로 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사실 '문타이거'가 추구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문타이거'가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문타이거'는 종군기자였고 또한 대중 역사서로서 성공한 역사가이기도 한 여자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과거사를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객적은 회고담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자기 개인의 역사이지만 세계의 역사 처럼 쓰겠다고! 

  개인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그렇게 이 소설은 그 두개의 역사(라기 보다는 시선)이 교차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주관성과 객관성이 혹은 단독성(가라타니 고진식의 개념이다. 여기에 대해선 뒤에 따로 설명을 할 것이다.)과 일반성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 부터 확실히 드러난다. 소설에 들어가자 마자 우리는 명확하게 구분된 두 개의 장면을 보게 된다. 하나는 '그녀'로 지칭되어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어요.'라고 간호사에게 말하는 장면. 다른 하나는 바로 뒤이어 나오는 이제 '나'로 지칭되어 자신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로 쓰겠다고 말하는 장면. 

  이 연속해서 나오는 두 가지 장면은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두 장면이 가지는 관계가 바로 '문타이거'가 직조하는 세계의 핵심에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얘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일단 이 둘을 대립관계로 놓고 보자. 여기서 대립되는 두 관계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첫 장면은 '그녀'에게서 드러나듯이 3인칭 객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그대로 일반 역사 기술과도 같다. 역사란 언제나 3인칭으로 기술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뒤이은 장면은 '나'에서 드러나듯이 1인칭 주관화된 세계이다. 거기서의 서술은 역사적 기술로는 불가능한 온전한 내면의 영역이 된다.(그렇게 '문타이거' 자체가 소설이니까 소설의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첫장면은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 다음 장면은 그대로 고유한 개체로 남아있는 클라우디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된 클라우디아는 그대로 고유의 개체성을 잃고 그저 하나의 이름만 남은 익명적 존재가 된다. 라이블리는 뒤이은 간호사들끼리의 대화에서 그 간호사들이 저 할머니가 과연 유명한 역사를 썼는지를 두고 수군거리는 장면을 통해 이것을 보여준다. 보편적 역사로 편입되자 역사가로서의 클라우디아는 사라지고 간호사들로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늙고 병든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편의상 둘을 대립관계로 세운다고 했는데 사실 소설 초반에서 부터 이렇게 둘의 대립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라이블리가 '문타이거'를 통해 하려는 말도 여기서 드러난다. 그것은 보편화로서 개인을 그저 익명적 존재로 만드는 역사에 대항해 그 개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성을 드러내는 새로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는 것을. 

 따라서 바로 뒤이어 보여지는 클라우디아의 선언은 사실 이 소설을 시작하는 라이블리 자신의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내 머리속에 연대기는 없어. 나는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들처럼빙글빙글 돌고 뒤섞이고 갈라지는 무수한 클라우디아로 이루어진 존재거든. 내가 들고 다니는 카드 한 팩은 한 없이 뒤섞이고 또 뒤섞이지. 연속성은 없고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 (...) 희한하게도, 집단적 과거라는 게 죄다 이런 식이야. 공공의 자산이지만 심오하게 사적이기도 하거든. 우리는 모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니까.(...) 나의 7세기는 당신이 7세기가 아니야. (..) 내 과거의 신호들은 내가 수용한 과거에서 나오는 거야. 타인들의 삶은 내 삶의 틈새에 끼워져서 칠해지기 마련이라고. 나, 나, 바로 클라우디아 H.(P. 9 ~ 10) 

  이 선언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적 기술의 철저한 파행이다. 클라우디아는(그렇게 라이블리는) 보편적인 역사적 기술 방법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전혀 새로운 규칙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한다. 그것도 오로지 자기가 중심인 역사를. 

  이 흐름에 대한 거스름과 개체성의 전면적인 내세움은 나로 하여금 문득 가라타니 고진이 '탐구'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10대에 철학책을 읽기 시작한 무렵 부터 거기엔 언제나 '이 나'가 빠져 있다고 느껴왔다. 철학적 담론은 반드시 '나' 일반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주관이라 해도 실존이라 해도 인간 존재라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만인에게 타당하지만 언제나 '이 나'는 빠져 있었다. (...) 내가 생각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나'가 특수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전혀 특수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흔한지를 알고 있다. 그러한데도 '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나'의 '이'이지 나라는 의식이 아니다. (...) 예컨대 내가 '이 개'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개라는 유(類)속의 특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바둑이라 불리는 이 개의 '이'것임은 외양이나 성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다만 '이 개'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나'나 '이 개'의 '이'것임을 단독성(SINGULARITY)이라 부르고 그것을 특수성과 구별하기로 한다. 단독성은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다. 특수성이 일반성에서 본 개체성인데 대해 단독성은 이미 일반성에 속하지 않는 개체성이다. (가라타니 고진, '탐구' P.11 ~ 12) 

  일부러 길게 인용한 것은 '단독성'을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기 위함이다. 인용한 부분에서 '단독성'은 충분히 설명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나는 클라우디아가 스스로를 '나'로서 말하며 그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내세우는 것을 고진이 말한 '단독성'의 표출이라 여긴다. 사실 클라우디아 존재 자체가 아예 '단독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설 속 그녀의 모습은 정말 남다르다. 특히나 엄마로서의 모습은 기성의 관습을 철저히 벗어난다. 딸 리사와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모성애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남편 재스퍼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별거로 이루어지는 그녀의 결혼생활 또한 일반적인 결혼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더구나 그녀는 오빠 고든과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하는 근친애적 관계마저 맺는다. 그녀는 어디서나 논쟁을 벌이고 스스로 그것을 즐긴다. 마치 모든 것과 철저하게 타협하지 않으려는 듯이! 그렇게 그녀는 바위산에 매달린 프로메테우스적 존재, 즉 일반성의 그물로는 도저히 건져올릴 수 없는 '단독성'의 존재인 것이다.  초반부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맺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클라우디아를 포섭하는데 결국 실패함으로써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의 단독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단독성'의 존재로 만들고 늘 고유한 단독자로서의 존재를 익명화 시켜서 그저 보통명사화 시키는 역사 자체를 가로지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단독성과 일반성을 서로 대립각으로 세운다. 하지만 이 대립관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 이 단독성과 일반성의 대립을 더욱 더 극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그 또 하나의 대립적 관계가 바로 '신화와 이야기'이다. 앞에서 클라우디아를 프로메테우스적 존재라고 말했지만 이는 그녀 스스로 소설속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더구나 어린시절 그녀의 집에 놀러온 '엄마를 주눅들게 했던 부유한 친척'마저 그녀를 '신화'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계속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적' 외피를 둘러씌우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신화가 무엇이길래 라이블리는 이토록 클라우디아에게 그 외피를 입도록 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마치 답하기라도 하듯 라이블리는 소설에서 클라우디아로 하여금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신화는 역사보다 훨씬 훌륭한 소재야. 형식도 있고 논리도 있고 메세지도 있거든. 한 때는 내가 신화인 줄 알았지 (p.19) 

   이 단순한 비교.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라이블리가 신화와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언급되는 것은 역사다. 대체 역사는 또 무엇이관대 라이블리는 역사를 가져오는 것일까? 정말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쩐지 그것을 제대로 밝혀야만 이 소설에서 신화가 정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역사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당신의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서양 최초의 역사서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셨는지? 그 책을 보시면 헤로도토스가 마치 호메로스가 청중들 앞에서 '일리아드'를 읊어주듯이, 그렇게 하나 하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실 것이다. 그렇게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그의 이야기 'HIS STORY'였다. 결국 역사란 이야기인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이야기와 역사가 동일한 단어로 쓰이지 않는가. 그렇게 라이블리는 이 소설에서 역사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말하기와 소설가의 말하기는 겹치는 것이다. 라이블리에게 있어서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은 사실 '신화와 역사'의 대립이지만 여기에 라이블리는 소설가의 시선까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아우르기 위하여 '신화와 이야기의 대립'으로 또 하나의 항목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또 하나의 반론이 가능하다. "그래서 역사가 이야기라고 치고 그것이 신화와 무슨 대립을 이룬다는 거야? 신화도 어차피 이야기 아닌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를 끌어들이려 한다. 거기에 나와있는 폴 리쾨르의 논의가 라이블리가 바라보는 이야기의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시킬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풍덩 뛰어들어 보자.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에서 리쾨르는 이야기와 시간과의 관계를 알기 위하여 우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의 '뮈토스' 만드는 법을 대비시킨다. 여기서 '뮈토스'는 이야기를 뜻하며 시학에서는 '줄거리 만들기'를 의미한다.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이란 오로지 현재밖에는 없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고 미래는 아직오지 않은 현재일 뿐이다. 그렇게 그것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 사라져버려 한 마디를 이루고 아직 도래하지 않아서 또 한 마디를 이루는, 균열과 불협화음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작용은 이 균열을 참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억지로 메우려고 드는데 바로 여기서 '시간 경험'이라는 게 생긴다고 하였다. 즉 사람들이 시간을 순서대로 여기는 것은 그렇게 균열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것을 어떻게든 하나로 모아보려는 의지의 작용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사람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허구로 여겼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뮈토스'만드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뮈토스'란 이리저리 개별적으로 흩어져있는 사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말하고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떻게 모아야 제대로 모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장 제대로 모으는 방법은 바로 '시간'을 참조하여 그 순서대로 모으는 것이다. 폴 리쾨르는 바로 여기서 '시간'이 나온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시간이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던 것 처럼 하나의 작위적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좋은 이야기를 짓기 위해서 끊임없이 참조해야만 하는 일종의 규칙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외부의 엄연한 실재로서 존재하며 끊임없이 인간의 이야기 짓기에 간섭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시간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경험이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시간이란 자신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도 납득시키기 위한 그렇게 보편적으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트랜스포머'와 같은 것이 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 만들기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간'이란 외부적 규칙에 맞도록 다듬어야 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가 보편적인 집단에 편입되기 위하여 스스로를 규격화시키는 것과 다를바 없다. 라이블리가 '신화와 이야기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시각도 이와 똑같다. 라이블리가 그렇게 신화가 역사(실은 이야기)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가 그렇게 단독성의 주체들을 그 고유성을 잘라내어 그렇고 그런 일반적 존재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독성의 표출인 클라우디아에게 신화의 외피를 둘러씌우는 것은 라이블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문은 남는다. 그것은 내가 빠뜨린 것 때문인데, 아마도 그 의문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신화가 어떻기에 굳이 그것의 외피를 둘러씌우려드는 것인가?"라고. 그건 신화가 보여주는 특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폴 리쾨르의 논의를 다시 떠올리자면 우리는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보다 연대기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얼른 앞서 인용한 클라우디아의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연대기는 짜증난다." 바로 이 대사에서도 라이블리가 이야기를 왜 싫어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신화는 왜 클라우디아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화가 연대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화의 대부분은 파편적이다. 그들을 하나로 모으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신은 그리스 신화의 순서들을 제대로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저자 토마스 불핀치 조차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그리스 신화와 같은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신화엔 연대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신화는 이야기와 달리 철저하게 오로지 개체에만 집중한다. 모든 신화는 그저 개별적 존재하나만 담는다. 이야기가 보편성의 공간이라면 그렇게 신화는 오로지 개체의 공간이며 그렇게 단독성의 공간이다. 바로 이와 같은 신화가 가지는 특성 때문에 라이블리는 클라우디아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소설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클라우디아와 마찬가지로 단독성의 표출이라 할 만한, 그리고 클라우디아가 유일하게 온전히 사랑했던(바로 그 사랑의 모습이 톰 역시도 클라우디아 만큼 단독성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근거가 된다.) 톰과 만나 사랑을 이루어가는 '이집트'가 내내 소설의 다른 곳과는 달리 신화적 색채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그 이집트에서 클라우디아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모습에서 그것을 알 수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늘 한 마디라도 더 보태지 못해 안달하던 그녀가(구체적으로는 미국의 개척민시대를 재현한 곳에서 그 과거의 개척민을 연기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클라우디아가 참견하던 장면이 대표적일 것이다. 라이블리는 이렇게 클라우디아의 대표적인 관광 경험 두 가지를 병치함으로써 이집트가 가진 '신화적 공간'으로써의 특성과 아울러 클라우디아의 '신화적 존재'로서의 특성마저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만큼은 내내 톰의 이야기에 말없이 귀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이집트에서는 누구의 말이 다른 이의 말을 지우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목소리들이 각자의 이야기들이 저마다 개별적으로 동등하게 존재한다. 더구나 그 당시가 2차대전와중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전체주의와의 투쟁이 가열차던 시기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이집트에서 보여주는 톰과 클라우디아의 관계는 정말 동등한 단독성들이 만나 이루어가는 관계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루트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같은 시대 플라톤이 말했던 이데아라는 것에 가장 많이 반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개인만 있을 뿐 그 개인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그는 세계를 오로지 단독성들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 단독성 존재를 그는 '원자'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원자'말이다. 무엇으로도 쪼개지지 않고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개체 '원자'말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것을 '모나드'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그 원자들이 늘 평행선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원자들로 가득한 자연은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할 텐데 지금의 세계란 온갖 존재들로 넘쳐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자손들이 생겨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들이 비처럼 떨어지다가 무슨 원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어떤 의도의 개입없이 아주 우연하게 원자들이 만나는 바람에 존재들이 지금처럼 생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루크레티우스가 하는 말은 이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라든가 섭리 같은 것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연에 의해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 그렇게 '보편'이라든지 '일반'이라든지 하는 것은 없으며 있는 것은 오로지 단독성의 '원자'들 뿐이라는 것.  톰과 클라우디아의 만남은 바로 이와같은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루크레티우스의 이와 같은 말은 정확히 라이블리가 왜 하필이면 소설을 이렇게 여러명의 목소리가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다중 화자'적으로 구성했는지, 또 모든 사건들이 시간적 순서에 관계없이 그 때 그 때에 따라 '만화경'적으로 펼쳐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바로 라이블리 자신이 루크레티우스의 말로 정의내려지는 신화적 특성들을 소설 자체에 아로새겨지길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단독성의 복권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그 누구에게도 반감을 불러일으킬지 모를 지극히 자신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그래서 무례하고 이기적인 그녀를  전면에 내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보편을 담는다. 역사가들은 거기에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를 주저하면 덧붙일때 조차 늘 그것이 설득가능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보편적인 둥지에 깃들수 있도록 말한다. 어디까지나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단독성만이 존재하는 세계를 원하는 라이블리는 기존의 이러한 역사적 글쓰기는 불편했다. 그래서 교감하지 않는, 교감될 수도 없는, 그래서 일반성의 그물로는 절대 건져낼 수 없는, 그렇게 날카로운 송곳처럼 보편성의 장막을 찢고 나오는 그렇게 오로지 단독성으로 충만한 존재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울리는 목소리로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감으로써 라이블리는 그녀가 원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소설에 대해 불편함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은 라이블리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렇게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식 개체들이 되기만을 바라는 소설은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충격 혹은 낯설음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퍼니게임'하고도 비슷할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극장에서 그 영화를 처음 보았던 날이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로 충격속에서 보았는데(같이 관람한 한 여성 역시 내내 충격에 의한 창백한 표정으로 영화에 대한 곤혹스러움을 말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그저 부정적이라고만을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는 그런 영화들 그리고 라이블리의 '문타이거' 같은 작품들은 바흐친이 말했던 일종의 '카니발적 효과'를 일으키는 작품으로 본다. 그렇게 그 작품들은 우리의 굳건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고 결국은 그 토대를 허물어 전복시키는 존재들이라고.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며 늘 돌아다보게 만드는 생채기가 되어 나를 둘러싼 이 일상을 늘 다시금 반추시키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열어보이는 다른 가능성으로 나를 둘러싼 이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도 결국 하나의 가능한 세계임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존재들이라고. 그렇게 나를 '보편'으로 억누르지 않게 하며 '일반'에다 날 맞도록 타협하지 않게하며 그 상식적이고=일반적이고=보편적인 세상을 나 역시 단독자로서, 하나의 대등한 존재로서 바라보게 만드는 존재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제목 '문타이거'는 그야말로 얼마나 적절한 제목인가! 

  '문타이거'는 모기향을 가리킨다. 라이블리는 어느날 우연히 2차대전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그 장면들이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어린시절 있었던 이집트에서 매일 맡았던 '문타이거', 즉 모기향의 향기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2차대전이 배경이 되는 이 소설에 그것을 제목으로 쓴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소설에서 '문타이거'는 이집트에서 톰과 같이 있던 어느 새벽에 등장한다. 바로 그 새벽에 클라우디아는 처음으로 톰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톰의 목소리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오로지 우리는 클라우디아의 귀를 거쳐서 톰의 얘기를 듣게된다. 기이하게도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상징인 톰에게 왜 라이블리는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중 역사서를 쓴다. 그 역사서들은 모두 한 개인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톰의 이야기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서들을 쓸 때 클라우디아는 늘 자신만의 개인적 견해를 꼭 덧붙였다. 아니 아예 자기식으로 해석한 그들의 얘기를 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에게 맞도록 타인의 이야기를 교정했고 재배치했다. 그런데 톰의 얘기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녀는 톰의 얘기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저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 때문에 소설의 후반 톰의 일기는 일기 그대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건 클라우디아가 도저히 개입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클라우디아 만큼이나 단독성의 존재인 톰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톰의 이야기가 들려지는 밤. '문타이거'는 홀로 피어오른다. 단 하나의 어둠의 장막으로 모든 걸 '보편'으로 만드는 그 밤에, '문타이거'는 라이블리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가운데서도 문득 떠올릴 수 있었을 만큼 강한 향내를 그 밤 전체에 걸쳐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 연기는 이내 어둠에게 먹혀 사라지더라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톰은 전장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존재에 대한 기억은 내내 클라우디아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밤에 들었던 톰의 이야기는 결국 나중에 실체로 나타나게 된다. 향기는 실체를 잃은 오히려 그 '흔적'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오히려 실체보다 더 강하게 더 오래 그 실체 자체를 보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자극으로 그리고 그 자극에 기반한 기억이 되어 늘 실체를 떠올리게 만들고 그렇게 떠오른 실체는 일상속에서 그렇게 균열을 만든다. 

  문타이거의 '향기'는 이 모든 것이다. 일반화에 대항하는 단독성의 상징이자 일반화와 대등하게 싸워가면서 오래도록 단독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의 상징임과 동시에 단독성이 바흐친의 '카니발적 효과'를 하게 될 것이라는, 그렇게 저 펭귄클래식의 잠든 여인의 머리맡에서 그녀를 모기로 부터 보호하고 있는 모기향을 그린 커버처럼 그렇게 보편성에 짓눌려 우리의 단독성이 잠들게 되더라도 언제 어느때라도 그 향기로 균열을 일으키고 보편성을 전복하여 우리의 단독성을 보존해 줄 것이라는 수호의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라이블리의 '문타이거'는 바로 그런 소설이다. 

   일반성이라는 장막으로 모든 고유한 존재들을 덮어씌워 익명화시키려 것에 맞서 끝까지 개인이 가지는 단독성을 보존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소설! 라이블리는 문학적으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단독성에 새로운 목소리를 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 보다 외연을 확장하자면, 이렇게 라이블리가 새로운 목소리를 단독성에게 주려하는 것은 어쩌면 남성 중심으로 씌여진 그 보편적 역사에서 소외되고 묻혀진, 그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여성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돌려주려는 시도와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문타이거'는 그러한 무시된 여성성을 단독성으로 새로이 복원하여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쓰기가 가능한가에 대한 탐색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입장에선 개인적으로 충분히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독특한 독서 경험만으로도 단독성을 체감하게 만들었던 이 소설은 다른 건 몰라도 이제 여름내내 모기향 내음을 맡을 때 마다 이내 '문타이거'를 떠올리게 만들 것 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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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절망이 잉태한 소설....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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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애덤 워커는 그 해 컬럼비아 대학 2학년생이었고 베트남 전쟁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67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67년은 미국이 그러했듯 개인인 애덤 워커에게도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꾸는 한 해가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폴 오스터도 그 해 대학 2학년이었다. 그리고 워커 처럼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애덤 워커는 바로 폴 오스터 자신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같은 생각은 그의 전작 '기록실로의 여행' 때문에 더욱 확고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기록실로의 여행'은 바로 폴 오스터가 자신의 창작적 여정을 회고하는 자전적 성격이 강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작품에서 부터 폴 오스터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바로 뒤이은 '어둠 속의 남자' 역시 9.11 이후에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느낌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 '보이지 않는'도 역시 그러한 흐름에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어둠속의 남자' 처럼 스스로가 어떤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 나가는 그런 작품 말이다. 그럼,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어떤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앞서 '기록실로의 여행'에서 부터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소설 속에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둠속의 남자'도 '9.11 사태에 직면한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의미'라는 지극히 작가의 개인적인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때 역시 그러한 의미 -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 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즉, 이렇게 작가가 글에 투영되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말해 소설 속에서 화자라는 주체가 드러나야 하는지 감춰져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은 이전의 두 작품에서 스스로를 반영시켜왔던 것에 대한 일종의 성찰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화자라는 주체는, 작가라는 주체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녹록치 않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 허구 위에 정초되어지는 소설이 가지는 '리얼리티'가 과연 무엇이냐하고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흔히, 근대 초기의 소설들은 H.G 웰즈의 우주전쟁 같이 수기의 형식을 취하거나 서간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곤 했는데 모두 독자로 하여금 지금 읽고 있는 그 글이  진짜 있었던 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소설은 허구를 말하지만 독자에게만은 그것을 진짜로 여기도록 노력해 왔다. 가라타니 고진 같은 학자도 근대문학(그에게 있어 근대문학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의 특성을 리얼리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근대의 소설들은 3인칭 객관적 시점을 유지했다고 한다. 고진이 여기서 특별히 화자(시점)를 언급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라 여기게 만드는 데 있어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3인칭 객관적 시점을 근대 소설들이 주로 썼던 이유가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자가 떡하니 보이게 하면 아무래도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서 현전성이랄까 깊이 같은 것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고정된 한 점의 존재가 그런데 어떻게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것일까? 그것은 회화에 있어서 투시도법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시점을 한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림을 그리면 원근법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내가 실제 풍경을 바라볼 때와 비슷해 지고 따라서 마치 내가 진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그림은 '사실적'이 된다. 소설이 근대의 발명품이었듯이 이 투시도법 또한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이후의 '주체의 발명'과 더불어 나타났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근대 소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주체의 생산에 있었다고 한다. 

 좀 성긴 논의의 전개이긴 하지만 아무튼 여기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리얼리티와 주체의 문제가 다 연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화자'에다 작가 자신마저 대입시키고 있다. 즉 이 소설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다른 건 다 차지하고, 작품과 작가가 가지는 거리감이 어느정도인지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여기서 거리감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정도인데...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이렇게 나오고 있다. 제목인 '보이지 않는'이라는 말이 유일하게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것은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고민을 토로한 주인공 워커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 작가 친구의 독백하는 부분이다. 

'...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되었고 이런 자그마한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 덕분에 나는 그 책을 끝낼 수가 있었다.(p.95 ~ 96) 

  이 독백은 워커가 1부에 해당하는 소설 부분을 끝내고 나서 2부를 진행하는 데 있어 맞딱뜨린 글쓰기에 대한 저항과 공포 때문에 못쓰고 있다는 고백으로 나온 것이었다. 워커가 왜 '저항과 공포'를 느꼈는지는 2부를 읽어보면 선명하게 이해된다. 때문에 작가인 친구 '짐'의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와 '공간'을 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짐의 충고는 소설에 작가를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카메라가 온전히 찍고자 하는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피사체와의 거리두기, PRAXIS가 필요한 것 처럼 작가 역시 적절하게 작품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짐은 1인칭 시점을 쓰면 내가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왜 1인칭을 쓰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일단 이 의문을 작품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먼저 풀어보려 한다. 

 폴 오스터의 소설 '보이지 않는'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세 부분은 워커가 쓰고 있는 '1967년'이라는 소설이 중심이 되어 각각 계절 '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건너가고 결국 '가을'에서 끝난다. 나머지 4장은 일종의 에필로그로, 워커의 친구인 짐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스스로 풀어가면서 얻게된, 워커가 파리에 있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세실 쥐앵의 일기'로 이 소설은 완전히 끝이 난다. 특이한 것은 워커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모두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봄은 1인칭 여름은 2인칭 가을은 3인칭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의 저항과 공포를 느끼게 된 워커가 짐의 충고를 따른 결과이기도 하고 그 자신 생명이 다하고 있음을 느꼈기에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유야 어쨌든 워커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보자면 약간 기묘한 점이 눈에 띈다. 

앞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언급하면서 그가 근대소설이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해서 3인칭 시점을 만들었다고 했는데(물론 그 뒤에 그는 이것의 허구성을 공박한다.) 폴 오스터는 오히려 완전히 정반대의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봄'이 가장 객관적으로 진행되고 2인칭에서 3인칭으로 갈수록 점점 더 주관적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인 '가을'에 이르면 자의적인 생략과 비약 마저 일어난다. 그건 '문학적 형상화'에서도 역시 그러한데, 1인칭 시점인 '봄'이 가장 전통적 의미의 '소설'에 가깝다면 시점이 멀어질수록 그렇게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점점 덜 소설적이 되어가는 게 느껴지고 그렇게 3인칭인 '가을'에 이르면 일종의 '초안'의 형태를 띠기에 이른다. 더우기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건 세실 쥐앵의 아주 개인적인 '일기'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묘하게도 작가의 개입 정도와 작품이 가지는 자의적인 정도가 일종의 반비례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즉, 작가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그렇게 완전히 화자가 작가의 아바타가 되어 움직이는 '봄'은 가장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데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그렇게 점점 더 시점이 객관화되어 갈수록 오히려 작가의 자의적 개입이 더욱 더 두드러짐을 보게되는 것이다. 즉, 1인칭 시점에선 작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3인칭에 이르면 작가가 화자를 완전히 압도하고 그의 의도대로 소설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혹시 이것이 바로 짐이 말한, 1인칭 시점을 쓰면 '나는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라는 것의 이유가 아닐까 싶어진다. 즉, 여기서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짐은 그 뒤에 그렇게 되니까 자신이 찾는 것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소설과 연관시켜 보면 짐이 찾고자 했던 것이 일종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워커가 자전적 고백이라며 쓰고 있는 소설 '1967년'이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하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름'의 경우 워커의 친누나 그윈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고 말을 한다. 또한 친구인 짐이 결국 파리까지 가게 되는 것도 바로 워커가 소설에 쓴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짐은 고백하기를 거리를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진실을 더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그것을 묘하게 비튼다. 보른의 소년 윌리엄스의 살인이라는 사실에만 국한해서 말하자면 오히려 1인칭 시점일 때가 가장 진실이고 2인칭, 3인칭으로 갈수록 그 진위가 의심받게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워커는 보른의 변명을 듣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진실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는 짐의 충고대로 3인칭의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행동마저 결국은 추방이라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오히려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가장 마지막의 '세실 쥐앵의 일기 부분'이다. 쥐앵은 거기서 그 때까지 미궁으로 남아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원인이 바로 보른임을 알게된다. 따라서 짐의 말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소설에서는 시점과 진실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여기서 2장에서 부터 마치 간주처럼 삽입되는 짐이 화자가 되는 부분이 모두 '나'라는 1인칭이 되는 것도 주목을 끈다. 소설에서 짐의 부분은 워커의 소설 바깥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독자에게는 모두 진실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이 작품 내에서 정형화 또는 단일화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러두어야겠다. '시점과 작가의 자의성의 정도'이든, '시점과 진리의 관계'이든 그 내부적으로는 또 그것과 정반대의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봄'에서의 워커는 '보른과 마고의 관계'를, 보른이 왜 자신에게 동업 제의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소설은 그래서 스스로 내부에 부정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것은 '봄'에서 워커가 자기 이름의 유래를 말하는 것에서 우회적으로 나타나듯이 어떤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혹시 시점의 변화와 다양한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역시도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은 이러한 다양한 형식적인 장치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문시 한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고 그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가졌던 것 처럼... 폴 오스터는 소설 자체에다 그러한 부정적 계기, 불완전한 진실들을 드리움으로써 의문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윤리적이 된다. 라작은 윤리라는 것이, 개인이 외부로 부터 눈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 바 있다. 이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이 불확정적인 모호함을 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부로 부터의 규정적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스스로의 정체를 끊임없이 미끌어가도록 만들어 오히려 라작이 말했던 대로 '자기 고유의 본질, 자기 고유의 방법, 자기 고유의 목적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두기 위함이다. 

 그럼, 왜 폴 오스터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던지려 하는가?  그걸 내부에서 바라봄으로서 살펴보려 한다.

    

 PART 2 - 내부에서...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소 형식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 그러니까 폴 오스터는 왜 여기서 작가의 개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에 대해 생각해 보려한다. 

 

 애시당초 이런 개입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왜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전작 '어둠속의 남자'를 탄생시켰던 9.11 사태 때문인 듯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분명, 폴 오스터는 그 사태를 일으켰던 원인 같은 것을 찾았지 싶다. 모든 고통은 그 원인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과 미국의 역사가 '전환기'라는 점에서 공통으로 교차하는 '1967'년을 기점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가 되기 위한 순수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그렇게 순수한 영혼으로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타협없이 밀고나가는 그러한 청춘의 시절이 폴 오스터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그는 변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며 왜 이렇게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와 똑같이 오스터는 미국을 생각했고 1967년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미국이 어떻게 그 바람이 불기를 그치고 결국은 현재의 비참한 미국이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본다. 

 그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시절의 순수했던 영혼을, 그렇게 순수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해보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해서 '보이지 않게' 되었나를 추적해 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의 작가(워커의 친구 작가)와 워커가 등장하는 점이 이해된다. 

 그러니까 현재의 작가는 지금의 폴 오스터이고 워커는 1967년의 폴 오스터인 것이다. 사실은 다른 인물로 제시된 짐과 워커는 모두 폴 오스터의 분신인 것이며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변해버린 모습과 그 이유를 반추하는 포착과 추적의 과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미국의 뉴욕과 프랑스의 파리가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워커는 1967년 대대적으로 불었던 베트남 반전 세대를, 파리의 세실은 1968년 파리의 혁명세대를 상징한다. 워커와 세실은 모두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묶이는데 그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보른이다. 

 생각해 보면 보른은 그들의 '성'에로의 인도자였고(보른은 워커에게 마고를 세실에게는 워커를 건네준다.) 그의 '살인'으로 워커와 세실을 그의 세계에서 추방한다. 그들은 한 때 보른의 우주에서 일종의 선망을 가지고 섞여들지만 그의 살인과 함께 그 우주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며 결국은 그와 맞써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세실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실의 경우 보른의 살인은 그녀가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알게된 아버지의 살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살인의 대상은 바로 워커다. 바로 세실 앞에서 워커가 사라진 것이다. 워커의 사라짐은 결국 워커를 추방한 것이 보른이었다는 걸 볼 때, 세실 입장에서 보자면 워커가 보른에 의해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워커는 재입국이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른의 살인이 의미하는 것은 흑인 소년인 윌리엄스를 보른이 살해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쟁을 말한다. 따라서 그 살인을 비난하고 그 죗값을 묻기 위한 워커의 행동은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세실 역시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에 뚜렷하게 계기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68혁명의 다른 이름이 '상상력 혁명'이라는 말도 있듯이 전쟁이라는 뚜렷한 외부적 계기 없이 자발적으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해서 일어난 혁명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성세대인 보른과 그에 반발하는 세대인 워커와 세실은 이렇게 헤겔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 워커와 세실은 보른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해 보른은 언제나 그들에게 쫓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은 언제나 '워커' 뿐이다.(파리에서는 다르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워커의 고백으로 인해 보른은 자기가 원했던 여자를 떠나게 된다. 따라서 워커는 결정적으로 보른을 쫓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왜 그럴까? 그건 어쩌면 폴 오스터가 바라본 베트남 반전 세대와 68혁명 세대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이 늘 워커라는 점에서 오스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베트남 반전 세대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 그렇게 68혁명이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68혁명의 한계를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으므로 오스터의 판단 대로 68혁명이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 넘어가야겠다. 그렇다고 베트남 반전 세대가 68혁명 세대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파리에서 보른에게 전면전을 불사했던 워커는 결국 보른의 권력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당한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세실과 그녀의 엄마가 그를 믿지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전략이 너무 치밀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그저 옳은 것은 어떻게든 승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추방당한다. 이는 오스터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 반전 세대에 대한 시각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당시 반전 세대가 내세웠던 가치가 오늘날 미국에서 전혀 살아남지 못했으므로(결국 이것이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패로 여긴다.그리고 그 이유를 워커가 보른에게 했던 것 처럼 너무 순진하게 마음만 앞섰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어떤 체계적인 계획이나 대안을 세우지 못했다. 그 반전 세대가 내세울 가치가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할 그 어떤 것도 마련해 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듯이, 워커의 소설 '가을'의 마지막은 추방으로 끝난다. 

 그렇게 해서 W의 골족들이 사는 땅에서의 체류는 끝이 났다. 추방당하고 모욕당하고 평생 재입국할 수 없는 채로. 그는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고,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P.257) 

 이 말은 그대로 베트남 반전 세대가 주장했던 가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사멸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워커는 이렇게 쓴다. 

 안녕, 마고. 안녕, 세실. 안녕, 엘렌. (이 이름들은 모두다 워커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40년 후, 그들은 이제 유령만큼이나 실체가 없다. 그들은 이제 유령이고 W는 곧 그들 사이에서 거닐게 될 것이다. 

 이렇게 폴 오스터가 바라보는 베트남 반전 세대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었다. 

 미국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을 그 가치들은... 

 폴 오스터는 9.11의 비극은 바로 그 '1967년의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실체를 가졌다면 부시 정권도 없었을 것이고 9.11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었다. 그 어디서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작가 짐은 워커를 만나지 못한다. 그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버린 뒤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오늘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해 일종의 레퀴엠으로서 1967년을 다시 불러오고 싶었던 폴 오스터에게 그야말로 절망의 재확인 밖에는 없는 작품이 된다. 

 그는 어쩌면 다시 살아보려(세실이 보른을 다시 만나려 그 섬까지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1967년을 다시 반추하지만 이제 그것은 영원히 사라졌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씁쓸한 체감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그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폴 오스터에게는 당연히 그 생각이 일어난다. 소설의 앞 세부분이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1967년을 반추하는 내용이었다면, 마지막 네번째 부분은 바로 그 이유를 추척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특별히 그윈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1967년 뉴욕의 여름, 그윈은 분명 워커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 둘은 막내의 죽음으로 하나였고(이 막내의 존재는 워커가 그들 부모에게 반항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살해당한 월리엄스와 같다. 소설 '보이지 않는'의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는 존재 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윌리엄스가 워커의 일생을 바꾸었듯이 막내 역시 워커를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막내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워커와 그윈은 동일하게 베트남 반전 세대임을 의미한다.)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런데 워커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내밀한 고백이 공개된 지금 그윈은 워커의 고백을 부인한다. 

 왜 부인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워커의 고백이 가진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윈의 현재 모습 때문이다. 우리는 그윈의 고백에서 그녀가 아주 성공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게 우리고 보게 되는 것은 그윈이 1967년 그녀가 반발했던 그 기성세대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워커의 고백은 다시 그 시절로 그녀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그래서 그것을 거부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을 위한 그녀의 전략이다. 그녀는 짐에게 익명화를 요구한다. 그렇게 해서 그 누구의 역사가 아닌 그저 그런 역사중의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 역사의 '고유치'를 박탈함으로써 보편적 역사로 만드려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그것이 지금의 1967년이 가지는 의미라고 본다. 고유의 얼굴이 사라진 익명의 역사. 그저 묘비만 있는 무덤 처럼 남은 건 다만 기록 뿐 사멸해버린 역사...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짐 역시 그윈의 의도대로 워커의 소설을 익명화 해버린다. 이건 오스터의 자포자기적 체념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폴 오스터가 짐작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윈이 변화한 이유... 그것은 그윈이 스스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1967년 뉴욕 시절 부터 그윈은 심정적으로 부모님과 같이 있었다. 그녀는 워커 처럼 완전히 기성세대로 부터 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워커의 파리 이주(워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의 극대화)이후, 그렇게 워커와 멀어지자마자 그녀는 바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포섭되어 버린다. 

 짐에게 그윈은 그녀가 워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같이 있는 것을 자주 보았냐고 묻는다. 짐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그윈은 워커에게서 떠났다. 워커에서 떠난다는 것은 보른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세계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그윈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그녀의 진입은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이제는 워커의 고백을 부담스러하게까지 되었다. 짐도 마찬가지다. 짐이 그윈이 워커의 고백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역시 지금 '성공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짐의 얘기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여러 모로 워커의 삶 보다는 부유하고 안정적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여기서 짐작되는 것은 '보른'과 '짐'과의 유사성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짐은 현재의 폴 오스터다. 그는 자신이 순수했던 젊은 시절 '1967년의 워커'를 통해 이 비극으로 부터 빠져나갈 힘을 얻고자 한다. 때문에 짐은 파리까지 날아가서 워커의 얘기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워커의 진실을 향한 순수한 투쟁은 오직 진실이라야 그 가치를 가질 수 있고 그래야 짐이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짐이 워커를 흡혈귀처럼 착취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른 역시 짐과 유사한 행위를 보여준다. 즉 소설 '봄'에서는 순수한 젊은 영혼인 워커의 지성을 돈으로 착취하려고 하고 마찬가지로 '세실 쥐앵의 일기'에서의 그녀의 육체를 결혼으로 착취하려 한다.(섬에서 세실을 다시 만난 보른은 중년이 되어버린 세실에게 실망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더이상 젊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청춘의 피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짐이든 보른이든 그 근저에 깔려진 욕망은 똑같다. 젊은 영혼으로 부터 피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윈과 짐은 보른과 더불어 하나로 묶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은 그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반영한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마지막에 '세실 쥐앵의 일기'를 덧붙인다. 

 과연 그는 왜 이 일기를 반추이자 추적의 끝부분에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불인 것일까? 이 일기는 소설의 시작인 워커의 '봄'처럼 1인칭이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공통점은 이 두 글들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게끔 만든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반추와 추적에 맞추어 보자면, 워커의 '봄'은 1967년의 원초적인 순수를 세실의 일기는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변해버린 순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것은 1967년의 워커로 부터 변해버린 현재의 폴 오스터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기의 시작 부터 세실은 이미 변해버린 상태에 있다는데 있다. 68혁명 세대인 그녀 역시 짐 처럼 성공적으로 기성 세대로 진입했다. 오스터는 그녀가 짐을 만나고 싶었던 주된 목적이 워커의 이야기 보다 오히려 짐에 대한 설문 조사에 있는게 아닐까 느껴지게끔 서술한다. 이것은 그녀가 워커를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녀는 그런대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워커 뿐이다.)  

 이 세실의 모습은 지금 현재의 폴 오스터의 모습과도 같다. 

 그런데 그녀는 불현듯 보른의 초청을 받는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받았듯이... 

 그녀는 보른과 만날 결심을 한다. 이것은 그윈에게 워커의 소설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 과거 순수했던 그 때로의 소환인 것이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응하기로 한다. 그녀는 보른이 상징하는 67년의 그녀에게로 날아간다. 그런데 결국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워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며 보른이 자신의 아버지까지 그 꼴로 만들었다는 확인이다. 그녀는 기겁하며 당장 섬을 떠나려 한다. 마치 쫓겨나듯 짐조차 가지지 못하고 홀로 공항까지의 먼 길을 내려가는 동안에 그녀는 채석장의 돌 깨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일기의 주된 내용이다. 오스터는 왜 이것으로 소설을 끝냈던 것일까? 

 우리가 마지막의 보른의 고백, 그러니까 보른이 세실의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보른의 고백은 바로 9.11 사태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세실은 그 고백을 통해 워커의 말이 진짜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워커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렇게 보른의 말이 참이라고 믿고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 역시 깨닫는 것이다.(세실은 67년, 워커를 만날 당시에 카산드라시를 번역하려 했던 적이 있다.  카산드라는 아폴로 덕택에 미래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지만 또한 아폴로의 저주 때문에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전혀 믿어주지 않는 예언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산드라를 번역하려까지 했으면서도 세실은 진실을 말하는 워커를 믿지 못한다. 이 역시 68 혁명 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아마도 폴 오스터에게 9.11이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폴 오스터는 미국 전체에게 있어 9.11 사태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일기는 현재 폴 오스터의 마음으로 부터의 고백에 다름아니다. 이건 일종의 고해성사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진지하게 회개하는... 

 세실은 고통 속에서 그 긴 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불현듯이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불모의 땅에서 50~60명의 인부가 돌을 깨고 있는 소리였다. 그들은 스스로 치열하게 돌을 깨고 있었다. 세실은 장엄하기까지한 그 묵묵한 노동의 현장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설도 끝난다. 

.. 그 소리는 앞으로 나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여생동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그 소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있을 것이다.(P.326) 

 대관절 이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한 개인이 묵묵히 이루어나가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모의 땅'이란 말에서 연상되어지는 것은 바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그라운드 제로'이다. 그 폐허 위에서 다시금 역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망치를 들고 돌을 깨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휘두르는 망치 하나하나가... 

 그들이 치열한 노동의 흔적으로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렇게 돌을 깰 때마다 울려퍼지는 소리 하나하나가 다 새로이 역사를 이루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세실의 마지막은 이 새로이 쓰여지는 역사적 현장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67년의 그 자신에게로... 그것을 상징하는 워커에게로 다시금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된다. 물론 67년의 그 순수했던 영혼의 모습, 변화를 일으키던 바람은 사라졌다. 그래서 소설의 끝은 재현이 아니라 다시금 불모의 땅을 개간하는 것이 된다. 완전한 무에서 다시 그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설 '보이지 않는'은 아마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반영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어둠속의 남자'에서 비롯되어진) 9.11 사태로 대표되어지는 현재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거의 순수했던 그 영혼을, 순간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고백처럼 이미 그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 시도는 또한 그대로 부재의 확인이며 그로 인한 비통의 기록이다.(워커의 얘기를 다시 들은 세실의 울음이 바로 폴 오스터가 이 소설을 쓰면서 보였을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 비통 속에서 그는 진심어린 회개를 한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그는 새로운 의지를 되찾는다. 이제 그는 그 의지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건지려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건의 현장을 통해... 

 그 없음에서 만들어가는 순수한 노동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애도하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망치를 들고 희망을 정초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한 오늘의 미국을 위한 진혼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이 제목 '보이지 않는' 처럼 이 소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예외가 되는 한 가지를 이 소설에서 틀림없이 보게된다. 그것은 변화를 갈구하는 애처로운 한 영혼임과 동시에 회개를 호소하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금 앙다문 입으로 바닥부터 희망을 다져가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기필코 이 소설에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 뒤섞인 폴 오스터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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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웃 2011-06-1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의 보이지 않는 리뷰 넘 좋네요. 폴 오스터 작품은 첨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맘에 들었거든요. 이렇게 리뷰 읽으니깐 정리도 되고 제가 미쳐 깨닫지 못한 부분도 알 수 있었고요. 넷상에서도 정독하게 만드는 리뷰! ^^

ICE-9 2013-05-30 13:35   좋아요 0 | URL
아, 노다웃님 정말 감사합니다. 무려 2년도 넘은 댓글이지만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제가 아무런 말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진작 봤으면 좋았을 것을. 언제고 이 댓글을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제가 감사했음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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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듯, 본질로서의 독재를 포착하려 하다. 

 

 '염소의 축제'는 '독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정확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0여년 동안 지배했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을 다룬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독재를 소재로 한 소설'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생생한 기록을 통한 고발이나 독재에 대한 상상적 심판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소설은 '트루히요 정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 어떤 특정 독재 정권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관심은 그 특정 독재를 넘어서 독재 일반이 가지는 어떤 성향이랄까 아무튼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의 독재,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독재적 현상'을 다루는데 있다. 여기서 현상은 보통 어떤 실체를 둘러싼 외부적 상태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훗설적 의미에서 '현상'을 가리킨다. 훗설은 '현상'을 사물이 처해 있는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 안에 들어온 것을 '현상'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현상은 우리가 얼른 인지하기는 힘들지만 사태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훗설은 특별히 '현상학적 방법'을 고안했는데, 말하자면 이 방법은 주위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직관의 힘으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면 폴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는 방식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폴 세잔은 오랜 시간을 들여 정물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물이 시시각각 드러내는 변화하는 존재의 가상적인 측면들을 지워내어 그 사물의 변하지 않는 핵심 즉,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감히 말하자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도 바로 그러한 세잔이 정물을 그리면서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 소설을 통해 특정 체제로서의 독재를 넘어 그 모든 가상적인 것을 제외하고 불변하는 독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포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요사가 포착한 그 본질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2. 호르헤 살라메아의  소설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매개로 살펴보는 독재의 본질.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일단 그것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보다 먼저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썼으며 요사 처럼 특정 독재가 아닌 독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통해 먼저 그 가능한 모습을 실루엣이나마 가늠해 보려 한다. 이것은 살라메아의 소설이 독재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있어 요사의 소설과 공통된 부분이 있으므로 일종의 이해를 위한 매개체로 삼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는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의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브룬둔 부룬다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독재자이다. 그러니까 살라메아는 역시적 실체로서의 독재가 아니라 그 원형으로서의 독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그는 이 소설을 하나의 우화처럼 썼는데, 우화가 시대와 지역을 통해 두루 공감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 그가 묘사하는 독재 역시 그것의 원형이라 볼 수 있고 그렇게  살라메아에게 있어서 모든 독재는  사실상 하나의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독재의 모습들이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그건 그저 모사할 때의 붓 터치의 차이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독재는 많은 부분에서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트루히요의 독재의 많은 모습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어쩐지 등장인물들만 다를뿐 똑같은 상황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는 사실 모든 독재자들의  이데아이고, 거기 우화로 씌여진 상황은 그대로 모든 독재 국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살라메아는 이 소설에서 독재의 원형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여기서는 두 가지 점에서나름의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소설이 주로 다루는 것이 독재자의 장례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중반에 나오듯이 소설속의 독재자가 특히 중요시했던 것이 '말의 압살'이었다는 것을 통해서이다. 

 '장례식'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하나의 의례이며 거기엔 단 하나의 시간만 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살라메아는 장례식의 처음 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의 대부분은 장례식 행렬에 있어서의 행진하는 단체들의 순서에 따른다. 

 이 소설이 그 순서를 충실히 따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소설에는 유일한 하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데, 이 소설이 독재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자면 바로 이 '유일한' 시간이라는 자체가 독재의 본질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례식이란 특정 한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례이므로 당연히 그 시간의 주인공은 지금 장례식의 주인공인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소설은 독재엔 언제나 단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두번째, '말의 압살'을 보자. 소설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룬둔은 인간들의 찢어지는 가난과 그로 인한 고민과 반발이 언어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온 인류의  기억에 남을 만한 부룬둔의 지혜로운 업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의 통치를 받는  대다수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가, 어느 시대에, 다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있을 것인가? 

                                   호르헤 살라메아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중에서 (p.77)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말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말을 죽인다. 완전히 압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독재가 가진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즉, 독재엔 오로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살라메아의 소설에서 보듯, 독재 체제란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과 그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바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특히 트루히요의 마지막 날을 보여주는 '독재자의 시간'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다시 읽기를 권하는 '우라니아의 고백'이라는 폐제(foredosure).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됨에 따라서 달라지는 텍스트의 의미들 

    

 하지만 요사가 살라메아와 독재의 본질적 측면에 있어 공유하는 게 있더라도 그는 좀 더 시야를 넓힌다. 그러니까 살라메아가 오로지 독재자 하나에 맞춰 그 시간성과 목소리를 탐색했다면, 요사는 독재자의 시간을 하나의 부분으로 만들고 거기에 독재자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 존재이자 그에게 박해를 당했던 한 영혼의 시간과 그 독재자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암살자들의 시간까지 더해서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어 다층적인 차원을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 소설이 독재의 본질이라는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히 '반(anti)독재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여러 개의 겹처진 시간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독재자가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가진다는 것에서 비추어 볼 때, 분명 소설 전체적으로 '독재적인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저항은 내가 볼 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반(anti)독재적'임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앞에서 내가 말했던 것, 즉 '독재'라는 것을 하나의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의 '현상'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라깡이 말한 바 있었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자의 이야기는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지배자 담론'이라 할 수 있다. 'I AM WHAT I SAY!' 로 정의되어지는 '지배자 담론'은 주체의 발화내용과 발화행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단독자의 담론이므로 더이상 타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사는 이 독재자 트루히요의 담론을 첫번째 우라니아의 담론과 세번째 암살자들의 담론 사이에 끼워넣었다. 이 두 담론들은 트루히요가 최종적으로 죽음으로서 사라질 때 까지 포위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독재자의 목소리를 그에게 굴욕과 죽음을 안겨주었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박해를 받았던 피해자로서의 다층적인 목소리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트루히요가 붙였던 별명을 가진자가 아무도 없다. 트루히요의 권력층엔 모두 트루히요 자신이 붙인 별명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우라니아와 암살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별명을 붙인다는 것은 의미를 정의하는 권력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부여한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권력자가 부여한 기표들을 거부한 주체들이며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내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그들의 다차원적인 시간과 목소리들은 바로 이 주체들의 드러냄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위로부터의 권력을 거부하는 저항의 목소리들을 통칭 라깡은 '히스테리 담론'이라 부른다. 히스테리 담론은 저항과 분열이 핵심인 담론이다. 그만큼 타자의 개입 여지가 지배자 담론 보다는 많아진다. 

 사회적 이상으로 추앙받는 사회적 문화적 지배기표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심문하려 들 때 히스테리 담론의 구조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118) - 

 따라서 이런 식으로 요사는 담론의 배치를 통해 독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독재'라는 현상을 보다 접근 가능하고 임상가능한 환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살라메아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독재의 본질이 그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를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그것을 약간 구조적으로 비튼다. 거기에 다층적 차원의 시간성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사는 살라메아 소설에서는 그저 수동적 관찰자로서 밖에만 머물 수 없었던 독자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도록 적극적 참여자로까지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요사가 원하는 대로 작품으로 드러난 환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세밀히 살펴보려 한다. 

 앞 서 얘기했듯이 이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바로 우라니아의 시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독재자 트루히요의 시간(이 시간은 단일한 독재자의 시간으로 그의 마지막 날 하루를 시간순서대로 담아내고 있다. 살라메아의 소설적 시간 그대로이다)이다. 마지막 시간은 그를 암살한 사람들의 시간이다. 마지막 시간만 여러가지 인물이 등장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간과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들이 개별적 층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 연쇄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이 모든 관계가 연쇄적이라는 것을 독자는 소설이 끝날 때 가서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을 통해서다.(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은 소설의 후반에서 서로 포개어진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마지막 부분을 집약해 놓은 것이기도 할 만큼 그 고백은 중요하며 소설 속 모든 시간들은 그 고백을 통해 일종의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시간은 될 수 없다. 요사는 그러한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므로 우라니아가 고백하는 시간을 현재속의 '과거'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현재와 과거라는 '층위'에서 단절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사는 그렇게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면서도 소설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던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맨 마지막에 우라니아를 통해 드러나는 우라니아의 상처의 근원이자 트루히요에게 있어서는 소설속 자신의 시간 내내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는 굴욕을 안겨줬던 그 시간이 왜 하필이면 첫번째 시간의 끝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과 만나는 접점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를 쉽게 얘기하자면 요사는 우리에게 트루히요의 시간을 두 번 읽게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우라니아의 상처와 트루히요의 굴욕을 보게된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읽는 독자는 트루히요의 시간 초반 부터 등장하는 한 계집 아이에 대한 트루히요의 분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요사는 독자가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지점들을 그냥 무시하고 진행시킨다. 왜 어젯밤 만난 계집 아이를 미워하는지 또 침대 위의 얼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트루히요의 시간은 지배자의 담론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궁금해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I AM WHAT I SAY!'로 진행되는 이 시간에서 우리는 궁금해도 말해주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처음에 이 소설적 경험을 완전히 수동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초라한 독재자의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상징으로 계속 남아있었던 계집아이에 대한 분노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 권력자가 도저히 지울 수 없었던 흔적의 확인은 이제 독자에게 하나의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은 지배자 담론에서 수동적 주체밖에 될 수 없던 우리에게 균열을 일으켜 능동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제 모든 것을 파악한 독자가 다시 트루히요의 시간을 읽는다. 그 시간은 더이상 독자에게 지배자의 담론으로 기능할 수 없다. 독자는 처음 읽었을 때는 파악할 수 없었던 균열들이 담론 곳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독자에게 담론은 그 영향력을 잃고 해석 가능한 텍스트가 된다. 그렇게 그 담론은 이제 독자에게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요사가 일부러 그렇게(처음의 시간 끝부분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 부분이 만나도록)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읽는 독자에게도 우라니아와 트루히요의 암살자들 처럼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변화하는 것을 직접 체험시키기 위하여 말이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요사가 이 구조를 통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것 한 가지를 더 얘기하도록 하자. 그것은 '폐제(foredosure)'에 관해서이다. 페제란, 그 개념을 주창한 아니카 르메르에 따르면 이렇다.

 

억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억압은 아직도 수선의 여지가 있는 어떤 찢어짐(rent or tear)으로 드러난다면   '폐제(foredosure)'는 피륙을 짜는 과정에서 갈라진 틈새, 즉 다시는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없는 근원적 구멍(primal hole)을 뜻한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300) - 

 쉽게 말해서 폐제란 뜨개질로 짠 스웨터에서 보이는 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다. 메우려고 푼다면 사라질테고 다시 뜨개질을 해도 그것은 구멍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두번째 읽는 트루히요의 시간은 이제 이런 '폐제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 시간을 '재앙이 닥쳤다는 느낌을 받으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드러난 남자로서의 굴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하나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지병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요실금이다. 독재자는 무엇이든 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절대권력의 속성인데 그러나 요실금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 어느때 흘러나올지 알 수 없어서 그를 괴롭게 만든다. 이것과 관련해 다시 읽어보면 유난히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침대 시트를 꼼꼼히 살폈다. 꼴사나운 우중충한 얼룩이 하얀 리넨을 더럽히고 있었다. 또다시 새어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분노가 치밀어 '마호가니 집'에서 있었던 씁쓸하고 불쾌한 기억마저 밀어냈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것은 그의 내부에, 그의 살 속과 그의 핏속에 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과 기운이 필요한 이 때, 바로 그를 파괴시키고 있었다. 그 비쩍 마른 계집애가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P.33) 

 여기에서 보듯 통제력 상실을 의미하는 요실금은 계집애에 대한 분노와 같이 있다. 라캉에 따르면 히스테리 담론에서는 그 벌어진 틈으로 인한 주체의 분열은 결국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와 똑같이 요사도 요실금을 '마호가니 집'에서 굴욕을 당한 것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결국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동일한 의미이며 모두 그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존재한다. 소설에서 그가 내내 신경쓰는 것은 '마호가니 집'에서 그 계집아이에게 맛보았던 굴욕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는 그 계집애가 벌써 도미니카를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또 굴욕감을 맛본다. 그는 결국 대신할 것을 찾아 그 구멍을 메우려 한다. 그러니까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로서 상상적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는 것이다. 그의 뚜쟁이인 마누엘 알폰소가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를 구했다고 알려온다. 그는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마호가니 집'에서 닮은 그녀를 안음으로써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결국 가는 도중 암살당하고 만다. 결국 다시 읽게 되는 히스테리 담론으로서의 '트루히요의 시간'은 그야말로 폐제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문제는 이 '폐제의 시간'이 각 단위 시간들에서 또 하나의 시간들을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토록 막강하던 권력의 모습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곳곳에 갈라진 균열들과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권력이 강화되는 시간 위에 그대로 바로 이 폐제의 시간이 겹쳐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에서 시간들은 수평적으로 분열되기도 하지만 수직적으로 분열된다.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은,  

조니 아베스 -> 주정뱅이 입헌의원 -> 사이먼 지틀맨과의 만찬장 -> 대통령 발라게르와의 만남 -> 푸포 로만의 처벌 

 이렇게 이어지는데, 이 시간의 진행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첫번째 읽었을 때와 두번째 읽었을 때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지배자의 담론으로 읽었던 시간에서는 권력이 강화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그것은 사성장군 푸포로만의 처벌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두번재 히스테리 담론으로 읽는 시간에서는 그야말로 이 모든 시간은 점점 더 커져만가는 구멍들만을 드러내는 (미국, 반정부 지식인 카톨릭, 아들 람세스 등등) 폐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결국 권력이 최고로 강화된 것을 보여주었던 푸포 로만의 처벌이 바로 트루히요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폐제의 시간'에서라야 이해가능해진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더 넓혀진 구멍이 결국은 그를 삼켜버린 것이다.)  요사가 교묘히 겹쳐놓은 시간의 다층적 차원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세번째 시간은 암살자들의 시간이다. 요사는 이 시간을 암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가질 수 있도록 할애한다. 이 시간은 이렇게 진행된다. 

 아마디토 -> 안토니오 델라 마사 -> 임베르트 -> 사트알라 -> 페드로 리비오. 

 각각이 주체가 되는 시간에서 요사는 그들이 어떤 동기로 트루히요의 암살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첫번째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이 지배자 담론이 되었을 때 이들의 시간은 그야말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기다림은 억압받는 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트루히요에게 고통을 받았는가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히스테리 담론의 시간 아래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저 고통을 받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이 이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겨가는 주체화의 시간으로 바껴지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마호가니 집'에서의 굴욕으로 생겨난 구멍과 얼룩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세번째 시간도 이중의 시간적 층위가 드러난다. 여기서 이 세번째 시간에 참여하는 각 인물들의 동기를 보면 점점 그 동기가 더 큰 차원으로 마치 파문을 그리듯 넓혀져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마디토에서 사드알라까지 그 동기는 개인 -> 가족 -> 사회 -> 종교로 넓혀진다. 특히나 페드라 리비오에 이르면 계급적인 차원에 까지 넓혀진다. 요사가 이렇게 마치 단계별로 확장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번째 시간이 바로 도미니카 국민 전체의 시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이 과정이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구현 단계(가족 -> 시민사회 -> 국가)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체의 확장 과정이라 할 만한데 그렇다면 결국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결국 도미니카 국민 전체가 지배자 담론하에서는 고통을 겪으며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히스테리 담론으로 바껴진 지금, 점점 더 많이 스스로 자기의 시간을 살며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 바뀌어져가고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4. '우라니아의 시간의 결여'라는 폐제가 소설 구조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 

 

 하지만 기이하게도 암살의 성공으로 활짝 피어나야 했을 주체의 해방은 그 사후처리의 미숙으로 주요 참가자들 중 임베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게된다. 요사는 이들의 죽음을 잔인하리만치 조금의 동정의 여지도 가지지 않고 서술하고 있는데 결국 이들은 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그래서라는 대답은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유희에 불과했다는 꼬리표를 붙이는데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바탕위에서 이들의 죽음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때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19장에서 23장까지 우라니아의 시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라니아의 시간이 소멸하는 전조는 이미 18장에서 배태되고 있다. 18장이 더욱 기묘한것은 사실 우라니아의 시간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 트루히요의 시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부터 우라니아의 시간은 구조적으로 구멍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18장, 결정적으로 우라니아가 구멍이 되는 자리가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트루히요는 최후를 맞는다는 사실은 꽤 시사적이다. 이후 23장까지 오래도록 우라니아의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암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 역시 트루히요와 똑같이 최후를 맞이한다. 마치 그녀의 구멍 자체가 그들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그런 구조이다.

 우리는 이 구조에 주목해 봄으로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최후를 맞게되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트루히요와 우라니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트루히요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했던 우라니아가 그와 똑같이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에게도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라니아가 그렇게 트루히요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었듯이 이들에게도 역시나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이 최후를 맞는 동안 우라니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사라져, 구멍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다가오는 방식에선 차이가 있다. 우라니아의 구멍은 트루히요에겐 '체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구조상의 결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트루히요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일 뿐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배자 담론'에서 그는 오로지 '규정하는 자'(그가 각 참모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것에서 드러나듯이)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어떤 타인도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서도 '폐제'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이 진정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히스테리 담론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요사는 그 참여자들의 동기를 통해 도미니카 전체가 주체로 되어가는 과정까지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주체화 과정에서 우라니아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라캉이 말했던 주체화의 과정을 한 번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라깡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언어 질서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사의 소설에서 이 의미는 약간 변형되어 여기서는 독재 체제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언어 질서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주체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던 독재 체제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소리들의 개체들이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의미이다. 그는 상징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매개로 인해 언어 질서에 뛰어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체가 된다. 그런데 독재 체제에서는 문제가 있다. 그 아버지가 참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 강요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개체들로서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의 시간이 결정적으로 비어있듯이, 아무데서도 그 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다. 그것은 참여자들에게 구조적 결함, 구멍, 얼룩 폐제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한다. 

  '폐제'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의 기표'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상적인 주체화 과정을 겪기 위해서 꼭 필요한 아버지의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존재 앞에서 개체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라깡 스스로 사례로 보여주었던 슈레버 케이스 처럼 궁극적으로는 파괴된다. 구조적 결함이 바로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 개체의 사멸을 이끄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왜 요사가 하필이면 우라니아의 자리가 비워져 버렸을 때 트루히요를 비롯한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시간 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소설의 구조적 형식을 통해서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이 그야말로 화해하는 장면인 사면된 임베르트와 그를 환대하는 발라게르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이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그 환대의 장면으로 도미니카가 이제 독재로 부터 해방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요사는 교묘하게도 그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을 위치지음으로써 그렇게 그 들이 서로 환대를 했다해도 그들의 관계는 우라니아의 폐제를 가진 관계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결국은 그 환대로 이루어진 관계 조차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로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우라니아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수 있다. 

 

 

 5. 우라니아, 그 영원한 불규정성만이 우리를 진정한 주체로 만든다

     다시금 새로이 드러나는 성(Sexuality)의 층위 

 

 그녀는 첫번째 시간의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과연 그녀가 이 소설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는 첫번째 독서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마지막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을때라야 소설에서 그녀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트루히요와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요사의 진정한 의도에 충실하자면 도미니카 국민 전체)에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 모두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요사가 왜 하필 우라니아를 그러한 폐제의 존재로 만들었을까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우라니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첫번째 시간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두번째와 세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남으로서만 나타난다. 첫번째 시간이 이 두 시간 모두에게 폐제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털장갑에 존재하는 구멍은 털장갑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요사는 이 '폐제'의 구멍이 어떤 것인지 첫번째 시간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소설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층위인 '성(sexuality)'이 드러난다. 이 '성(sexuality)'의 층위는 오로지 첫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체득될 때 드러나는 새로이 겹쳐지는 층위이다. 바로 이것이 우라니아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사가 이렇게 새로이 '성(sexuality)'의 층위를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찾지못했던 진정한 아버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봄으로써 비어있는 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독재 체제에서 신음하는 개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알아보려는 탐색이다. 여기서 모두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우라니아가 바로 여성이라는 것은 그 '여성'이라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사의 대답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여기에 유의하면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특히 트루히요 측근들, 그 남자들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자신이 내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의 측근들의 아내나 딸들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게된다. 이것은 트루히요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지만 새로이 드러난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보자면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러니까 트루히요는 그들의 아내나 딸을 마음대로 가져감으로써 그들에게서 남성적 자부심을 뺏고 '여성적'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트루히요의 측근들 - 조니 아베스, 헨리 치리노스, 카브랄, 호아킨 발라게르, 푸포 로만 - 모두가 성적관계가 전혀 없거나 남성성의 특징들이 전혀 표출되지 않는 '여성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이 '여성적'인물의 공통점은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게 주체가 되지 못한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는 데 있다. 이 '여성적'인 것은 그러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트루히요에 의해서 부여된 인위적인 여성성이다. 그리고 이 부여된 '인위적 여성성'의 본질은 그들의 공통적 특징에서 드러나듯이 '온전한 수동성'에 있다. 이것은 오로지 여성성이라는 것에서 부정적인 특질만을 모아서 규정한 그러한 여성성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새로운 대립항이 태어난다. 바로 우라니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한데, 우라니아가 의미하는 '진정한 여성성' 대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의 대립항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인물은 바로 푸포 로만이다. 그는 세번째 시간에서의 참여자들이 암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실패하게 만든 인물이다. 요사 스스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물로 사실 이 소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인물은 중요해지는데, 결정적으로 이 인물이 그 모든 성공으로 이끌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 되는 건 이 사람이 트루히요 곁에 31년 동안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트루히요가 부여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하게 내면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래도록 길들여진 '여성성' 때문에 트루히요가 죽었어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던 나머지 자신의 파멸마저 초래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세번째 참여자들의 주체가 되려는 시도가 결정적으로 실패에 이르도록 만든 것이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라니아와의 대항적 관계가 선명해지면서 우라니아가 가진 진정한 여성성이야 말로 요사가 그 아버지의 자리에 앉히고 싶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럼 여기서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우라니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문학을 주관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라니아의 시간에서 별빛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통 거북이(고대에서 거북이는 우주를 바치고 있는 존재로 흔히 묘사된다)의 등을 밟고 지구의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녀는 별들의 위치를 보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으며 우주적 사랑과 성령의 상징이며 철학과 하늘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특히 사랑하는 여신이다. 우라니아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독한 행성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신 우라니아는 지구의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나듯 지구 자체를 초월한 탈영토화된 존재다. 그녀는 그렇게 우주라는 텅 빈 여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폐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우라니아가 이 여신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라니아는 그 이름처럼 탈영토화된, 규정되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는 카브랄 박사, 우라니아, 우라니타 등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도미니카 여자답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아울러 아무런 인간관계 조차 맺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완벽하게 지구의 바깥, 타자(the other)자리에 차지한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우라니아의 시간을 통해서 그녀 자신의 내부에도 타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러니까 우라니아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반문을 하는 또 하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는 걸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유독 우라니아에게만 나타나는 특유한 것이다. 여타 다른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의문을 품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존재 자체도 완전히 타자의 영역에 있지만 그 스스로도 타자적이다. 이것은 그녀가 영원히 불가해한 그 어떤 외부로 부터도 규정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좌표축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구토마저 일으킬 혼란에 처한 신체로 부터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 속에서 계속 전장을 사고한다는 것은 새로운 신체의 구축과 새로운 좌표를 희구하는 것이다. 기억은 담론이 아니라 무엇보다 신체와 실천을 구성하는 일인 것이다.  

                                                                -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중에서 - 

 따라서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에서 규정된 인위적 여성성과 대립적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일종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독재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다. 거기서 목소리는 바로 규정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렇게 독재는 오로지 하나의 규정하는 권력에 의해 모든 것들이 다 규정되어진다. 트루히요는 그렇게 국가와 도시, 시민들 그리고 측근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별명을 부여함으로써 새롭게 그들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을 여성의 부정적 특징들만을 총합한 '여성적' 자아로 만든다. 따라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독재의 권력에 언제든 포섭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 건 영원한 불규정성 뿐이다. 이렇게 요사는 그 대립적 관계를 통해 우라니아처럼 '절대적으로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오로지 개체가 온전한 주체로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새로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성의 층위가 밝혀지기 까지는 그것이 오로지 폐제로 인한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는 그들이 폐제를 가지게 된 이유가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 폐제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특히 안토니오 델라 마사에서 드러나듯이 그들 자신이 복수와 폭력으로 묶어지는 남성성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남성성은 어떤 남성성인가? 그것은 트루히요에 의해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인 것이다. 독재는 모든 것을 새로이 규정한다. 트루히요가 여성성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규정했듯이 남성성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박정희 독재 시절 그들은 남성성을  주로 '산업전사'나 '산업역군' 같은 호명을 통해 마초적인 것으로 재정의했다. 그 호명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같이 주어짐으로써 모든 국민을 그렇게 '남성-되기'에 참여시켰다. 이 '남성-되기'는 사실상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생산자로서의 기표를 과장시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박정희의 독재로 부터 받는 억압을 희석화시기키 위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자신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로 국가를 재편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은 새로이 규정된 왜곡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새로이 내면화시켜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 독재 체제 아래에서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체제 아래서 30년 넘게 살아온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라는 게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이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들은 그대로 비규정적인 새로운 여성성인 '우라니아'를 영원한 폐제로 가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편, 역시 도미니카 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 체제의 상흔을 다루고 있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그 소설에서 화자는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이 트루히요 이래로 대대로 가지고 있는 '푸쿠'에 대해 얘기한다. 거기서 '푸쿠'란 바로 저주의 일종으로 고통의 근원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트루히요 체제 이래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트루히요가 걸어놓은 푸쿠 때문이고 그 푸쿠란 건 다름아닌 트루히요가 규정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은 오랜 트루히요 체제를 거치는 동안 그들 스스로 내면화한 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역시나 화자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그래서 그는 과도한 남성성의 집착을 보인다. 때문에 화자의 눈에 소설의 중심 인물인 오스카 와오는 더없이 찌질이로 보이는데 그는 그야말로 규정된 남성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트루히요의 푸쿠를 끊어버리는 자가 된다. 여기서 오스카 와오의 규정성을 초월(오스카 와오가 특히 집착하는 것이 SF와 판타지 와 같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유추될 수 있다.)하는 타자적 특성이 우라니아와 만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세대가 다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주노 디아스가 공히 그러한 규정성을 초월해 영원히 비규정적인 영역에 머무는 타자적 존재를 온전한 주체로 만드는 하나의 구원 가능성으로 상정하는 것은 흥미롭다. 

  더하여 그 참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이가 임베르트(그 외 또 한 사람 '루이스 아마미아'가 있으나 그는 1권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아니므로 논의에서 배제시킨다.)뿐이라는 것 역시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가 이 암살에 참여한 진짜 이유는 그 자신 미라발 자매를 흠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그렇게 그녀가 내보이는 여성성에 유일하게 매혹된 사람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결국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여성성, 그 모든 것으로 부터 규정당하지 않고 영원히 타자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는 여성성만이 우리를 자신의 시간과 목소리를 가진 온전한 주체로 만들어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6. CODA... 

 

 마리오 바르가사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쉬운 소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단순히 그것을 고발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 전체로써 - 내용 뿐만이 아니라 구조적 형식 그 자체로서도 - 독재적인 것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적인 것에 저항해 이 소설은 다자(多者)적인 시간과 목소리를 도입하고 여기에 시간의 배치를 통해 하나의 폐제를 구조 자체에다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두 번 읽기를 요구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읽음에서 라깡식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전이를 통해 요사가 진정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온전히 드러나는 아주 신비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시간들에서도 그 위에 또 포개어지는 새로운 의미의 층들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의 지점들이 생성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가진 모든 신비한 측면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우라니아 같이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온전한 주체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이 소설 자체를 어떤 하나의 의미로 절대로 규정되지 않는 영원한 불규정성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래도 꽤 길게 세세하게 요사가 깃들여놓은 의미들을 파헤치려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불모지가 남아있을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의 이 소설에 대한 독해가 궁금하다. 그 누군가의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바로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보다 더 많은 목소리가 이 책을 통해 창출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또 요사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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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미 2011-08-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퍼가겠습니다.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안된다 하시면 댓글달아주세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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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쥬'라는 게 원래가 자신의 창작적 혈통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려는 것임과 동시에 일종의 작품 창작의 동지적 선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문학에서도 '오마쥬'라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둘 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테마로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 자신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쓰는데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두 작품은 시기적으로도 비슷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1886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나왔죠. 이렇게 두 작품은 공히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 역시 19세기의 유럽을 휩쓴 격변의 물결을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달로 귀족사회는 점증하는 신흥 부르조아지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의 바람 또한 중세 이래로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사회체제를 마구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드보르작은 귀족사회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한창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신세계 교향곡'을 지었고,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대변하던 낭만주의는 척박한 노동과 빈곤한 삶의 질곡을 담아내고 있는 사실주의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겠죠.

바로 그러한 정신적 혼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들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 였다고 생각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로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수 있는 약을 먹으려 결심하면서 한 생각입니다. 지킬은 이렇게 그 약을 먹음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두 존재로 인한 갈등과 번민에서 해방되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킬은 본래 쾌락을 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고결한 척 해야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과 행동의 괴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싶지만 남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양심의 가책은 모두 '초상화'에 떠 넘긴 채, 쾌락을 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플라톤의 대화 중에 '사람들이 왜 도덕적이 되느냐?'에 '기게스의 반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기게스의 반지'는 약지에 끼고 돌리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신기한 반지입니다. 플라톤과 대화하는 상대방은 바로 이 '기게스의 반지'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는 것은 바로 남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남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 누구도 도덕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킬' 역시 그러합니다. 그가 그의 추한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하이드'를 만들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나중에 H.G 웰즈에게 문자 그대로 중요한 주제로서 쓰여지게 됩니다. 그 작품이 바로 '투명인간'이죠.

 스티븐슨과 웰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에서 중요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죠. 그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이 초상'에서도 똑같습니다. 바질은 도리언에 대한 온갖 추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도리언을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모든 추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일을 하면 아무리 감추려해도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데 도리언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순수했기 때문이죠.

 

 이 시선,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이 그들 모두에게는 중요했습니다. 그걸 이른바 '명예'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렇게 그 시선들은 '신사다움'을 보는 것이고 그건 그가 '얼마나 매너를 지키느냐?'하는 것을 판별하는 시선에 다름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은 그 매너, 사교 예절 등등을 수립한 '서양 문명'으로 부터 오는 시선이었습니다.

 로베르토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그런데 이 문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이 문명은 자연발생적이 아닙니다. 문명이라는 말은 1760년 미라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렇게 그건 근대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은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중세의 '궁정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문명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중세 당시 왕들은 많은 영주를 거느리고 있는 체제였습니다. 왕은 그 많은 영주를 주로 토지를 나눠줌으로서 지배했는데 아시다시피, 귀족이 많아지면 나눠줄 수 있는 땅은 점점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왕은 언제까지고 땅을 통해 귀족들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낸 귀족 지배 방법이 바로 매너(예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매너(예절)이란 왕과 귀족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거기에 맞는 격식, 예절들을 만들고 교화시킴으로서 스스로 자기 자리의 본분을 지키도록 해 나가도록 만든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죠. 이 프로그램은 성공했고 격식과 예절을 지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 신분을 알려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잡자 마자 신흥부르조아지들은 혈통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귀족과의 차이를 이 격식과 예절을 흉내냄으로서 상상적으로 따라잡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격식과 예절이 주는 '신분적 기호' 덕분에 그건 유럽 전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들은 그 기원과 상관없이 문화가 되고 미라보에 의해 '문명'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로베르토 엘리아스가 보았던 것 처럼 '권력 유지를 위한 지배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엔 자연 억압 효과가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매너'라는 것이 곧 자신을 나타내는 잣대이므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거기에 맞출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고 자연, 외부로 부터 강요된 문명이라는 것에 맞춰 자신의 본성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스카 와일드, 웰즈가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피하고 싶었던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이 그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 바로 자신을 억압하는 시선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19세기에 몰아닥친 격변 때문이었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가 그 이중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것을 수직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킬은 자주 그의 하이드를 '저급한 존재'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나타나듯이 그는 하이드를 자신보다 덜 발달한, 아직 진화론적으로 미숙한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수 동물... 말하자면 서양 문명이 자신에게 맞지않는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 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지요. 여기서 지킬이 아직
그 거대한 문명적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건 단적으로 서문에 드러납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리얼리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비친 얼굴을 보지 못해 화가나서 미친듯이 날뛰는 것과 같다


 여기서 캘리번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을 말합니다. 그는 프로스페로에 의해 길들여지는 야수이기도 하죠.

 오스카 와일드가 일부러 캘리번을 언급한 것은 스티븐슨의 '하이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스티븐슨이 하이드의 비문명성을 저급한 것으로 보았던 것을 비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아예 인간의 본성이 비문명적인 것이며 이중성이란 바로 '어디서 바라보느냐?'란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리얼리즘과 낭만주의가 삶과 예술을 다르게 바라보듯이 말이죠.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스티븐슨이 애써 다른 존재로까지 만들어서 감추고 지우려 했던 문명화되지 못한 본성들을 당당히 존재의 본성으로 선언합니다. 모든 존재는 캘리번이고 문명적이라는 것은 그에 덮어씌우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그는 더이상 '기게스의 반지'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더이상 문명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개인의 삶 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예술과 삶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렇게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사조의 명칭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리얼리즘은 그냥 '현실적인 삶', 낭만주의는 그냥 '예술'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 예술은 '도리언'으로 '삶'은 바로 도리언의 초상화로 형상화됩니다. 그렇게 '도리언의 초상화'는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짊어져야 하는 책무, '양심'에서 떠오르듯 윤리...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윤리라고 해도 좋겠죠. 하지만 이것은 문명적인 것을 넘어선 것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원초적 배려'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자유로운 예술(서문에도 나와있듯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가 그걸 말하고 있죠)과 거기에 책임을 지우려는 윤리적인 삶과의 투쟁입니다.

 사실 이건 오스카 와일드가 하나의 우화로서도 얘기한 바가 있지요.

 그게 바로 우리들이 잘 아는 '행복한 왕자'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모든 사람들이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적으로 완벽한 그 왕자는 타인들의 삶을 신경쓰게 되고 그렇게 윤리적인 선행을 베푼 나머지 모든 예술적 환영을 망가뜨리고 퇴락한 존재로 돌변해 버립니다.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바라보는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아주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윤리'라는 것은 예술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리는 예술을 좀먹는 것이며 결국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반복됩니다. 결말도 그렇지만 특히 도리언이 그토록 매혹되었던 시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를 선언하는 장면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도리언이 시빌과 절교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은 시빌이 도리언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삶의 진정성을 깨닫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기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빌은 예술적 환영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줄 연기를 도리언이 보는 앞에서 마치 그것이 가상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려는 듯 일부러 엉성하게 만들어 버리죠. 행복한 왕자가 자신의 눈부신 금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듯이...  그렇게 행복한 왕자가 사람들에게 버려졌듯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시빌 역시 도리언에게 버림받게 되는 것이죠.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네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적 격변에 의해 균열이 벌어진 틈 사이로 문명의 억압적 시선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스티븐슨은 자신도 모르게 알게된 그 비문명적인 것을 감추기 바빴고, 오스카 와일드는 비웃으며 그걸 가볍게 벗겨버리고는 비문명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자기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 

 그렇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예술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혹은 '윤리가 예술에게 지울수 있는 책무는 어디  까지인가?"하는 질문에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가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보는 사유의 과정의 산물이라 정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적 시선'을 벗어난 인간은 과연 어디 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의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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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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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로스비'로 가는 길 

 회의론자로도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귀납법'을 두고 그것은 인간이 하루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으니 내일도 있을 것이라는 이 단순한 논리는 정말은 내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그 막연한 두려움을 과거의 사실을 통해 애써 잊어보려는 작위적 환상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마치 이러한 흄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 후일 버트란드 러셀은 귀납법이 가진 오류를 이렇게 말한다. '어제도 먹이를 주었고 오늘도 먹이를 주었다고 해서 닭은 내일도 주인이 먹이를 줄 것이라 기대하겠지만 내일은 주인이 그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지도 모른다' 

 인생은 변화무상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 내일 일을 전혀 모르는 우리에겐 삶이란 문은 계속 불확실성으로 열려있다. 톨스토이의 우화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신의 물음에 그것은 바로 '미래를 아는 능력'이라고!

 삶에 내재된 미래의 불확실성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 유한성을 직면했을 때의 반응이다. 그것은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의 말마따나 유한성의 자각이 무한성의 동경을 낳아 그렇게 종교적이 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네델란드의 철학자 반 퍼슨의 말처럼 오히려 그 무한성을 애써 잊도록 만들수도 있다. '오컴의 면도날'과도 같이 불가해한 것은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2009년의 퓰리처 수상작이기도 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 또한 삶의 불확실성을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이 있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이란 우리네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삶의 불확실성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건 바로 그 불가해함에 있다. 앞서 톨스토이의 우화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한성'과 연결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일찌기 이 무한성에 대해 사유했었다. 하이데거에 이르러서는 그 '무한성'이 바로 '타자'라는 존재 자체가 된다. 즉, 우리가 내일 내가 어떻게 될 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앞에 나타나는 타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타자란 마주한 우리에게 있어 완전히 불가해한 영역 속에 있다는 것이다. 레비나스 역시 '타자의 얼굴'이야 말로 우리를 무한성에게로 인도하는 체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말이 옳다고 한다면 우리가 늘 마주하게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란 그거 하나 하나가 우리에게 있어 유한성을 자각시키는 무한성의 체험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우리에게 우리의 세계란 것이 그저 하나의 단일한 개체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 환기 속에서 우리는 앞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단순하게 말해서 두 가지 반응중의 하나를 하게 된다. 즉,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게 되거나 아니면 타자를 무시하여 내 세계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다.   

 바로, 이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도 그와 같은 것을 담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이 단순히 주인공의 이름인 이유도 어쩌면 그것을 강조해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소설은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해 그녀가 수없이 마주치는 타자와의 순간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가는 지를 보여주려 한다.  리뷰란 일종의 '복기'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텍스트라는 물리적 경계 안에서 작가가 걸어간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작가가 이리저리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깔아 놓은 사유의 편린들을 찾아다니며 헤아려 보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도 그저 따라가 보려 한다. 그려면서 되도록 작가가 우리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것을 충실히 재현하려 한다.


 2. 스트라우트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여기, 올리브 키터리지가 있다. 

 키터리지는 오랜 교편 생활을 뒤로하고 이제는 은퇴하여 여유롭게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여인이다. 그녀는 조금 독선적인 성격으로, 남의 말을 들으려 하거나 남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하지 않는다. 오랜 교사 생활에서 늘 아이들을 판단해 왔던 경험 탓에 사람들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한 눈에 파악하려든다. 그래서 어쩐지 그 시선이 차갑게 느껴지고 주눅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성격, 그녀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보여지듯, 그녀는 인생이 늘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항구적이라고 여긴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면서 누구에게나 늘 미소를 지어보이는 남편 헨리처럼 말이다. 아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녀에게 하필이면 '수학교사'라는 직업을 주었던 것도 그러한 올리브의 인생관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올리브 키터리지를 가장 먼저 얘기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사실은 이 소설 전부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남편 헨리로 부터 시작해서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속마음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에게서 어떤 연속성이 느껴진다. 앞에서 일어났던 일을 뒤에서 받아서는 다시 또 다음으로 넘겨주는, 뭐랄까 마치 바톤을 주고 받는 릴레이 경주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의 연쇄 작용들은 사실 올리브 키터리지의 변화와 상응하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올리브 키터리지가 어떻게 변화를 맞아들이게 되었는가에 그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된다.

 

  2 - 1 : '약국'과 '밀물'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남편 헨리가 중심이 되는 '약국'으로 부터 시작해 올리브가 변화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강'으로 끝난다. 헨리가 처음에 나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보여진다. 하나는 헨리와 올리브가 살고 있는 해안가의 마을 '크로스비'의 성격을 미리 알려주기 위함이다. 헨리는 마치 그 마을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모습과도 같다. '크로스비'는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육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이미지이다. 나중에 상세히 말하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육지는 고정적인 삶의 모습을,  바다는 '타자'와도 같이 어떤 불가해한 것이며, 그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는 이미지라는 정도로만 얘기해 두자. 그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두 가지가 끊임없이 교차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는 걸 뜻한다. 해안가의 모래사장이 늘 밀물과 썰물이 넘나드는 것 처럼.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해안가 마을 크로스비에 사는 주민들 또한 늘 마음 한 구석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약국에 새로이 들어온 종업원 데니즈 때문에 불현듯 불륜의 유혹에 시달리는 헨리와 뒤늦게 깨달은 데이즈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하먼이다. 데니즈와 데이즈. 이 두 여자는 이름도 비슷하지만 둘 다 모두 헨리와 하먼에게 그들이 걸어온 시간속에 쌓아왔던 안정된 세계로 부터 벗어나 새로이 낯선 변화속으로 뛰어들기를 갈망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도 같다. 하지만 '경계에 서 있는 마을'답게 그들이 쉽게 그러지 못하도록 붙잡고 육지로 이끄는 중력이 있다. 그것은 세월이며 그 세월동안 차곡차곡 가꾸어 온 삶이며, 그 삶을 같이 꾸려온 '동반자'이다. 헨리에겐 올리브가, 하먼에겐 보니가 마치 깃대 처럼 그들을 매어 붙든다. 그렇게 헨리와 하먼은 간절히 바다를 꿈꾸지만 그들의 염원은 깃대에 매달린 깃발처럼 그저 한 곳에서 나부낄 뿐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 된다. 

 여기서 굳이 헨리와 하먼을 인용하는 까닭은 결국 이 둘의 에피소드는 일종의 반복이며 사실은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약국'에서 헨리와 데니즈의 관계는  '굶주림'에서의 하먼과 데이지의 관계로 반복된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변화에 직면한다. 남은 건 그들의 선택 뿐이다. 거기에 한 사람의 죽음이 끼어든다. 그것도 같다. 여기서 타인의 죽음은 영원히 이대로일 것 같았던 삶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고정적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더욱 더 확실한 계기로 작용한다. 이 계기들은 주인공들이 좀 더 쉽게 받아들이기 위해 의도된 장치들이다.(의도는 이미 반복에 개입되어 있으니까, 이 장치들 또한 의도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하먼은 데이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개심술 수술 뒤에 살아서 깨어날지 죽어서 깨어날지 모른다고 말했던 머크 루핀을 떠올린다. 여기서 보듯, 하먼으로 하여금 그 변화를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하지만 같은 걸 깨달았던 헨리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 늙어버렸다는 자조적인 변명을 해대면서 데니즈에 대한 미련으로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결국 '올리브'란 깃대에 매어달리는 인생을 택해버리고 만다. 헨리가 그야말로 크로스비를 인격화한 인물이라고 본다면 이 선택은 왠지 수긍이 간다. 크로스비는 아주 유래가 깊은 마을로 그 기나긴 세월동안 이렇다 할 변화없이 그저 세월속에 웅크려 왔었던 마을이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늘 바다를 동경하면서도 그 동경을 속으로 삭이면서 버텨왔던 마을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헨리가 안주하기를 선택하는 순간 스트라우트가 깔아놓은 또 하나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올리브 키터리지다. 우리는 헨리의 눈을 통해 올리브 키터리지의 단단한 인간성을 본다. 유악한 헨리의 눈인지라 그 단단함은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녀는 헨리가 속한 소우주의 중심이었고 어마어마한 인력으로 헨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력은 사실 헨리 자신의 어머니로 부터 그대로 이어져온 인력이다. 올리브는 자신의 시어머니 플린을 싫어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기에 플린과 올리브는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들도 헨리가 올리브와 같이 사는 건 자신의 어머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 오래도록 길들여져 버린 인력 탓에 헨리는 갈망을 속으로 삭이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약국'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등대처럼 높고 강인한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 이어져온... 하지만 이제 작가는 이 단단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자아를 서서히 깨뜨려 갈 것이다. 

 마치 그런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두 번째의 단편 제목이 '밀물'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로 여기서 앞에 '크로스비'의 마을을 설명하면서 단순하게 얘기했던 바다가 가지는 이미지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난다. 소설에서 바다가 전면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이것 밖에 없다. 여기서 오래도록 고향을 떠났다가 자살을 결심하고 다시 고향을 찾아온 케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물려받은 유전적 성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유전적으로 결정되어졌다'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똑같이 고정불변의 삶이라는 심연에 갇혀있는 존재들이다. 앞서 헨리 역시도 그가 떠나지 못했던 건 사실은 '어머니의 우주'였음이 드러났다. 어쩌면 케빈은 그렇게 헨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유전이라는 감옥에 갇혀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케빈이 끝내 다다른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케빈과 올리브는 바다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눈다. 자살의 결심은 삶이라는 육지의 끝에 서 있다는 것으로 해석 할수도 있으리라. 기이하게도 올리브 역시도 계속 자살한 아버지를 얘기한다. '약국'에서 보던 올리브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독자들이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생경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바다를 바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가가 보여주는 바다의 이미지는 있는 그대로 어떤 변화이다. 그리고 제목인 '밀물'에서 드러나듯이 그러한 바다가 몰려옴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임' 것임을 보여준다. 가장 고정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두 인물이 바다 앞에서 죽음을 읊조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서 작가가 바다를 묘사하는 방식 역시 주목을 끈다. 그녀는 바다를 소용돌이 치는 아주 변화무상한 모습으로 묘사한다. 바다는 그렇게 한점의 고정적인 모습도 가지지 않는 곳으로 그려진다. 더구나 그런 변화무상한 모습은 케빈이 구하게 되는 패티가 입고 있는 치마의 휘몰아치는 모습으로 까지 강조된다. 그렇게 케빈은 결국 패티를 구하게 된다. 그가 힘차게 잡고 있는 패티의 팔뚝은 바로 밀물처럼 밀려드는 변화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하는 듯 하다. 그리고 작가는 아울러 패티의 팔이 강하게 그를 붙들었다는 것으로 케빈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앞의 두 에피소드를 일부러 길게 얘기한 것은 이 두 에피소드가 올리브 키터리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삶에 있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변화를 상징하는 바다의 이미지이다. 이건 이 소설에서 일종의 기초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이렇게 기초 작업을 다진 다음, 이제 본격적으로 올리브 키터리지의 그 단단했던 삶이 어떻게 허물어지고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2 - 2 :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 까지 

 '피아노 연주자'에서 안젤라 오미라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현재의 삶과 유사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그녀가 연주하는 래퍼토리 만큼이나 그녀의 삶은 완벽한 하나의 경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데 결말에 가서 그녀가 느닷없이 뺨을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뒤이은 '작은 기쁨'에서 올리브 키터리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앤'을 며느리로 맞게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자신의 품에서 있을 줄만 알았던 크리스토퍼가 어느날 자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앤'과 결혼한다는 것은 오미라가 뺨을 맞는 충격과 맞먹었을 것이다. 이건 그녀가 오미라처럼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던 그녀의 삶에 균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오미라는 다시 그 경계안에 안주하지만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앤'의 물건을 훔쳐가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이게 시작이다. 올리브의 훔치는 행위 즉, 일종의 범죄는 이 소설에서 올리브가 둘러쓰고 있는 단단한 삶의 외피에 균열을 일으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범죄'에 내포된 의미 그대로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질서를 유린하고 넘나드는 것이 바로 범죄의 본질 이니까. 여기서 시작된 균열의 조짐은 훨씬 뒤의 에피소드인 '불안'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다음에 헨리의 또 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하먼이 등장하는 '굶주림'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정신적으로)갈라지게 되는'다른 길'이 등장한다. 

 여기서, 이 에피소드들이 분명한 의도하에 배치되었음이 드러난다. 작가는 앞의 두 에피소드로 기초 공사를 끝낸 다음, '피아노 연주자'에서 '다른 길'까지, 올리브의 세계가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바다의 이미지를 주목해야 한다. 바다는 '굶주림'에서 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굶주림'은 마리나 카페에서 시작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카페이자 '밀물'에서 케빈이 변화를 받아들였던 바로 그 곳이다. '굶주림'의 시작이 바로 마리나 카페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바로 그곳에서 그 역시 자신의 삶에 변화를 받아들이게 될 커플을 만나게 된다. 그가 애정을 가지게 되는 데이즈가 사는 곳 역시 바닷가에 위치한 '휴가용' 별장(얼마나 세심한 설정인가)이다. 이렇게 바다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하먼 역시 케빈처럼 헨리와는 다르게 변화를 받아들인다. 이러한 바다의 이미지가 가진 의미는 뒤이은 '다른 길'에서 헨리와 올리브가 결정적으로 서로로 부터 떨어져 나가는 곳이 바로 하필이면 '바다 위'라는 것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만큼 이르면 우리는 작가가 의도한 바다의 이미지를 무시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게 된다. 그렇게 바다는 변화를 의미하고 바다를 마주한 사람들은 그 변화를 받아들인다. 헨리 역시 바다 위에서 올리브와 결별하지 않는가! 그렇게 바다 위에서 올리브 역시도 이제 지금의 세계가 예전과는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절감한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에게서 멀리 떠나가 버렸고 헨리 역시 이제는 멀어져 버렸다. 그 바다 위에서 올리브는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라고 했던 한 아이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2 - 3 : '겨울 음악회' 부터 '불안' 까지 

  '겨울음악회' 부터 '불안'까지 이제 그녀는 아주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마치 늪에서 헤어나려면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봐야 한다는 말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다른 길'에서 올리브가 느끼는 헨리와 이제는 결별했음에 대한 예감은 '겨울 음악회'에서 제인의 남편 '밥'의 외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밥의 외도로 의심되어지는 장소가 '마이애미'에서 드러나듯이 밥 역시 헨리처럼 바다를 통해 변화를 마주한 것이 암시된다. 밥이 그러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은 '음악당 지붕이 언제 무너질 지 모른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삶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이었다. 제인은 밥의 고백을 듣고도 그의 곁에 머물러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헨리와 완전히 떨어져 버렸음을 예감한 뒤의 올리브 마음을 간접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책망하느라 흘려보내기 싫기 때문이라고 제인은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힌다. 헨리와 밥의 고백은 그녀들의 삶에 변화의 계기를 줄 수 있었지만 그녀들은 이제 그러기엔 너무도 늙어버렸음을 탓하며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그 짧은 여생 동안 남은 건 서로 밖에 없다고 자위하며... 그런데 그것은 '약국'에서 헨리가 데니즈를 포기했었던 바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는 '겨울이야기'에서 헨리가 했던 것을 올리브로 하여금 반복하게 만든다. 그렇게 헨리가 데니즈가 포기하며 걸었던 길을 올리브도 똑같이 걷도록 만든다. 물론 의도적이다. 그렇게 포기했었던 헨리는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것이다. 헨리의 결심을 올리브가 반복했다는 것은 올리브 역시 헨리와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 암시한다. 그렇게 뒤이어 '튤립'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튤립'은 소설에서 가장 육지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리브가 가꾸는 정원의 '튤립'은 더욱 더 육지적인 그렇게 '고정적인 삶'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런데 이 가장 육지적인 이미지를 가진 제목의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곳이 인상적이다. 자녀의 범죄 때문에 자신의 집에 고립되어 살고 있는 라킨 부부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야먈로 육지 이미지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고립된 라킨 부부는 올리브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다. 심지어 라킨 부부는 한 집에서 일층과 이층으로 서로 따로 떨어져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이 에피소드 내내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홀로 고립된 올리브이다. 헨리마저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지낸다. 육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단편이 보여주고 있는 게 오로지 고립이란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거기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다. 자기 보다 더 고립된 라킨 부부에서 위안 받으려다 오히려 조롱까지 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작가는 '강위에 뿌연 안개가 걸려 있어 물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고 묘사한다. 변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순간 그녀는 가장 고립된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거기에서 그녀가 듣게되는 건 욕 뿐이었다. 물로 상징된 변화의 이미지와 육지로 상징된 고립의 이미지가 선명히 대조를 이루며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 뒤의 에피소드의 제목인 '여행바구니' 처럼 희망을 가지려 애쓴다. 그리고 희망은 두번째 결혼으로 뉴욕으로 이사한 아들의 부름으로 나타난다. 올리브는 희망에 차서 뉴욕으로 떠난다.(떠남은 그 이전 에피소드인 '병속의 배'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결국 배는 아무 곳으로 떠나지 못했다. 거기에서 드러나듯이 이는 뒤이은 '불안'에서 올리브의 여행이 아무런 결과를 얻게되지 못하리란 걸 암시한다.) 하지만 결국 올리브가 마주하게 된 것은 '여행바구니'가 그저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했듯이 아들과의 완전한 결별 뿐이다. 그녀는 이제 절감한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불안'의 끝장면이 떠나려는 '공항'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이제 그녀에게 떠나는 것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떤 떠남일까? 단순히 크로스비... 그녀의 삶이 온전히 있을 수 있었던 그 곳으로? 아니다. 작가는 여기서 그 떠남이 바로 그러한 그녀의 삶에서 떠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으로의 떠남'이다. 마치 그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그녀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보안요원의 말을 과감히 무시하는 일종의 '공무집행방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여준다. 

 

 2 - 4 : '범죄자' 와 '강' 

 그리고 이 범죄의 단초는 이제 목사의 딸로 태어나 엄격한 도덕적 질서를 강요받아오던 레베카가 처음으로 물건을 도둑질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의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범죄자'란 규정된 사회적 질서를 가로지르는 자를 말한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를 넘나듬이고 올리브가 '불안'의 끝에서 했던 것도 바로 이 넘나듬이었다. 레베카는 이제 그것을 확장시킨다. 이 단편의 말미에 레베카의 집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우리는 여기서 '불안'에서 끊임없이 올리브를 괴롭히던 소리를 떠올린다.)로 가득차는 것은 바로 이제 올리브와 레베카가 단단히 서 있던 육지가 완전히 유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레베카의 과거 역시 올리브의 세계 만큼이나 고정적이고 획일적이었음을 우리는 그녀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뒤이어 이 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 '강' 이 나타난다. 소설에서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두 번째의 제목이다. '밀물'에서 자살까지 각오했던 케빈이 다시 '패티'라는 변화를 받아들였듯이,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린 올리브,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않았음을 깨달아버린 올리브가 이제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리라는 것이 제목에서 부터 감지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규칙적으로 바닷가 산책로를 따라 달리기를 한다. 헨리도 떠나고 없는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매일 바다를 마주하고 달리고 있다. 산책로, 달리기, 바다... 이 에피소드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게 인상적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제 세상과 자신을 고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바로 그 산책로에서 그녀와 인연이 될 잭 케니스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올리브는 하게 된다. 일찌기 경멸해 왔었고 거기다 산책로에서 구해준 것을 인연으로 데이트 비슷한 자리에서 알게 된 바 대로,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부시에게 표를 던진 공화당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브는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변화가 전혀 낯설지 않다. 앞서 얘기한 대로 작가가 아주 공을 들여 세심하게 올리브가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차근차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그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불안'의 에피소드가 아닐까 한다. 그녀는 아들의 집에서 세입자로 인해 한때 자신 역시 어떤 변화를 받아들이려 했었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거의 기억으로 부터 이어지는 소리를 매일 들으며 그녀는 괴로워한다. 여기서 어쩐지 헤세의 '데미안'에서 그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아브락사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 소리는 기억의 환기이자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일종의 신탁 같은 것으로 보인다. '불안'에서 '범죄자' 그리고 '강'으로 연결되는 에피소드는 보기에 따라 어쩌면 그리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강'에서 나타나는 올리브의 변화가 그저 속절없이 늙어감에 대한 일종의 타협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안'에서 끊임없이 울려나오는 이 '소리'는  그 때부터 이미 올리브가 변화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임을 미리 감지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강'에서의 그 변화가 타협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올리브 스스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만든다. '범죄자'에서 레베카가 자신의 의지로 가출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해 놓은 장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3.  또 다른 시작 

 '강'에서 변한 올리브 키터리지의 모습 처럼 그렇게 자신의 단단하고도 완고한 껍질을 깨고 변화를 받아들이듯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작가가 타자의 얼굴로 체현되는 무한성에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열고 타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달리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우기 주제를 위해 일련의 의도를 가지고 세심하게 아로 새긴 암시와 상징들은 이 소설 전체가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만든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자세히 분석해 왔던 것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뚜렷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얼마나 체계적으로 그것을 아주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엮었는지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것에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이다. 아무튼, 내가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많이 읽었지만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공감의 깊이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한 상찬은 많은데도 막상 이 소설이 독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세밀하게 연출되어 있는지, 그 하나 하나의 에피소드들에 담긴 설정, 묘사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쓰여졌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글은 보이지 않았다. 읽어 보면 스트라우트가 이 소설을 꽤 공을 들여 세공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느낀 작가가 기울인 노력의 흔적들을 찾아 밝혀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영화에만 왜 하필이면 굳이 저렇게 장면을 찍었을까 궁금증이 있으랴? 문학도 영화처럼 결국은 작가의 연출이고 보면 왜 작가가 그렇게 설정이나 연출을 했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문학은 그래도 세세히 일러주는 평론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외국소설의 경우에는 그나마도 없는 형편인지라 아마도 이런 리뷰만이 소설을 읽다가 생긴 궁금점들을 유일하게 해소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리뷰를 썼다. 혹시나 소설을 읽고 '좋다. 훌륭하다. 하지만 왜 좋고 훌륭한지는 모르겠다.'라고 의문이 들었던 사람들 중에서 서정적인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나처럼 뭔가 세세한 짚어보기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서... 그렇게 이 리뷰를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더욱 더 자세한 논의를 위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대화'라는 건 타인을 받아들이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그렇게 대화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올리브 키터리지'로 부터 느꼈던 것을 내면화하는 복기의 과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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