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의 절망이 잉태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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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애덤 워커는 그 해 컬럼비아 대학 2학년생이었고 베트남 전쟁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67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67년은 미국이 그러했듯 개인인 애덤 워커에게도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꾸는 한 해가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폴 오스터도 그 해 대학 2학년이었다. 그리고 워커 처럼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애덤 워커는 바로 폴 오스터 자신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같은 생각은 그의 전작 '기록실로의 여행' 때문에 더욱 확고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기록실로의 여행'은 바로 폴 오스터가 자신의 창작적 여정을 회고하는 자전적 성격이 강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작품에서 부터 폴 오스터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바로 뒤이은 '어둠 속의 남자' 역시 9.11 이후에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느낌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 '보이지 않는'도 역시 그러한 흐름에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어둠속의 남자' 처럼 스스로가 어떤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 나가는 그런 작품 말이다. 그럼,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어떤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앞서 '기록실로의 여행'에서 부터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소설 속에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둠속의 남자'도 '9.11 사태에 직면한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의미'라는 지극히 작가의 개인적인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때 역시 그러한 의미 -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 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즉, 이렇게 작가가 글에 투영되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말해 소설 속에서 화자라는 주체가 드러나야 하는지 감춰져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은 이전의 두 작품에서 스스로를 반영시켜왔던 것에 대한 일종의 성찰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화자라는 주체는, 작가라는 주체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녹록치 않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 허구 위에 정초되어지는 소설이 가지는 '리얼리티'가 과연 무엇이냐하고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흔히, 근대 초기의 소설들은 H.G 웰즈의 우주전쟁 같이 수기의 형식을 취하거나 서간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곤 했는데 모두 독자로 하여금 지금 읽고 있는 그 글이 진짜 있었던 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소설은 허구를 말하지만 독자에게만은 그것을 진짜로 여기도록 노력해 왔다. 가라타니 고진 같은 학자도 근대문학(그에게 있어 근대문학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의 특성을 리얼리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근대의 소설들은 3인칭 객관적 시점을 유지했다고 한다. 고진이 여기서 특별히 화자(시점)를 언급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라 여기게 만드는 데 있어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3인칭 객관적 시점을 근대 소설들이 주로 썼던 이유가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자가 떡하니 보이게 하면 아무래도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서 현전성이랄까 깊이 같은 것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고정된 한 점의 존재가 그런데 어떻게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것일까? 그것은 회화에 있어서 투시도법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시점을 한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림을 그리면 원근법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내가 실제 풍경을 바라볼 때와 비슷해 지고 따라서 마치 내가 진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그림은 '사실적'이 된다. 소설이 근대의 발명품이었듯이 이 투시도법 또한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이후의 '주체의 발명'과 더불어 나타났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근대 소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주체의 생산에 있었다고 한다.
좀 성긴 논의의 전개이긴 하지만 아무튼 여기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리얼리티와 주체의 문제가 다 연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화자'에다 작가 자신마저 대입시키고 있다. 즉 이 소설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다른 건 다 차지하고, 작품과 작가가 가지는 거리감이 어느정도인지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여기서 거리감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정도인데...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이렇게 나오고 있다. 제목인 '보이지 않는'이라는 말이 유일하게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것은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고민을 토로한 주인공 워커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 작가 친구의 독백하는 부분이다.
'...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되었고 이런 자그마한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 덕분에 나는 그 책을 끝낼 수가 있었다.(p.95 ~ 96)
이 독백은 워커가 1부에 해당하는 소설 부분을 끝내고 나서 2부를 진행하는 데 있어 맞딱뜨린 글쓰기에 대한 저항과 공포 때문에 못쓰고 있다는 고백으로 나온 것이었다. 워커가 왜 '저항과 공포'를 느꼈는지는 2부를 읽어보면 선명하게 이해된다. 때문에 작가인 친구 '짐'의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와 '공간'을 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짐의 충고는 소설에 작가를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카메라가 온전히 찍고자 하는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피사체와의 거리두기, PRAXIS가 필요한 것 처럼 작가 역시 적절하게 작품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짐은 1인칭 시점을 쓰면 내가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왜 1인칭을 쓰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일단 이 의문을 작품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먼저 풀어보려 한다.
폴 오스터의 소설 '보이지 않는'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세 부분은 워커가 쓰고 있는 '1967년'이라는 소설이 중심이 되어 각각 계절 '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건너가고 결국 '가을'에서 끝난다. 나머지 4장은 일종의 에필로그로, 워커의 친구인 짐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스스로 풀어가면서 얻게된, 워커가 파리에 있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세실 쥐앵의 일기'로 이 소설은 완전히 끝이 난다. 특이한 것은 워커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모두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봄은 1인칭 여름은 2인칭 가을은 3인칭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의 저항과 공포를 느끼게 된 워커가 짐의 충고를 따른 결과이기도 하고 그 자신 생명이 다하고 있음을 느꼈기에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유야 어쨌든 워커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보자면 약간 기묘한 점이 눈에 띈다.
앞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언급하면서 그가 근대소설이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해서 3인칭 시점을 만들었다고 했는데(물론 그 뒤에 그는 이것의 허구성을 공박한다.) 폴 오스터는 오히려 완전히 정반대의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봄'이 가장 객관적으로 진행되고 2인칭에서 3인칭으로 갈수록 점점 더 주관적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인 '가을'에 이르면 자의적인 생략과 비약 마저 일어난다. 그건 '문학적 형상화'에서도 역시 그러한데, 1인칭 시점인 '봄'이 가장 전통적 의미의 '소설'에 가깝다면 시점이 멀어질수록 그렇게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점점 덜 소설적이 되어가는 게 느껴지고 그렇게 3인칭인 '가을'에 이르면 일종의 '초안'의 형태를 띠기에 이른다. 더우기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건 세실 쥐앵의 아주 개인적인 '일기'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묘하게도 작가의 개입 정도와 작품이 가지는 자의적인 정도가 일종의 반비례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즉, 작가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그렇게 완전히 화자가 작가의 아바타가 되어 움직이는 '봄'은 가장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데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그렇게 점점 더 시점이 객관화되어 갈수록 오히려 작가의 자의적 개입이 더욱 더 두드러짐을 보게되는 것이다. 즉, 1인칭 시점에선 작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3인칭에 이르면 작가가 화자를 완전히 압도하고 그의 의도대로 소설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혹시 이것이 바로 짐이 말한, 1인칭 시점을 쓰면 '나는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라는 것의 이유가 아닐까 싶어진다. 즉, 여기서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짐은 그 뒤에 그렇게 되니까 자신이 찾는 것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소설과 연관시켜 보면 짐이 찾고자 했던 것이 일종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워커가 자전적 고백이라며 쓰고 있는 소설 '1967년'이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하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름'의 경우 워커의 친누나 그윈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고 말을 한다. 또한 친구인 짐이 결국 파리까지 가게 되는 것도 바로 워커가 소설에 쓴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짐은 고백하기를 거리를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진실을 더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그것을 묘하게 비튼다. 보른의 소년 윌리엄스의 살인이라는 사실에만 국한해서 말하자면 오히려 1인칭 시점일 때가 가장 진실이고 2인칭, 3인칭으로 갈수록 그 진위가 의심받게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워커는 보른의 변명을 듣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진실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는 짐의 충고대로 3인칭의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행동마저 결국은 추방이라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오히려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가장 마지막의 '세실 쥐앵의 일기 부분'이다. 쥐앵은 거기서 그 때까지 미궁으로 남아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원인이 바로 보른임을 알게된다. 따라서 짐의 말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소설에서는 시점과 진실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여기서 2장에서 부터 마치 간주처럼 삽입되는 짐이 화자가 되는 부분이 모두 '나'라는 1인칭이 되는 것도 주목을 끈다. 소설에서 짐의 부분은 워커의 소설 바깥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독자에게는 모두 진실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이 작품 내에서 정형화 또는 단일화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러두어야겠다. '시점과 작가의 자의성의 정도'이든, '시점과 진리의 관계'이든 그 내부적으로는 또 그것과 정반대의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봄'에서의 워커는 '보른과 마고의 관계'를, 보른이 왜 자신에게 동업 제의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소설은 그래서 스스로 내부에 부정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것은 '봄'에서 워커가 자기 이름의 유래를 말하는 것에서 우회적으로 나타나듯이 어떤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혹시 시점의 변화와 다양한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역시도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은 이러한 다양한 형식적인 장치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문시 한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고 그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가졌던 것 처럼... 폴 오스터는 소설 자체에다 그러한 부정적 계기, 불완전한 진실들을 드리움으로써 의문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윤리적이 된다. 라작은 윤리라는 것이, 개인이 외부로 부터 눈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 바 있다. 이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이 불확정적인 모호함을 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부로 부터의 규정적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스스로의 정체를 끊임없이 미끌어가도록 만들어 오히려 라작이 말했던 대로 '자기 고유의 본질, 자기 고유의 방법, 자기 고유의 목적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두기 위함이다.
그럼, 왜 폴 오스터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던지려 하는가? 그걸 내부에서 바라봄으로서 살펴보려 한다.
PART 2 - 내부에서...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소 형식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 그러니까 폴 오스터는 왜 여기서 작가의 개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에 대해 생각해 보려한다.
애시당초 이런 개입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왜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전작 '어둠속의 남자'를 탄생시켰던 9.11 사태 때문인 듯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분명, 폴 오스터는 그 사태를 일으켰던 원인 같은 것을 찾았지 싶다. 모든 고통은 그 원인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과 미국의 역사가 '전환기'라는 점에서 공통으로 교차하는 '1967'년을 기점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가 되기 위한 순수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그렇게 순수한 영혼으로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타협없이 밀고나가는 그러한 청춘의 시절이 폴 오스터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그는 변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며 왜 이렇게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와 똑같이 오스터는 미국을 생각했고 1967년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미국이 어떻게 그 바람이 불기를 그치고 결국은 현재의 비참한 미국이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본다.
그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시절의 순수했던 영혼을, 그렇게 순수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해보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해서 '보이지 않게' 되었나를 추적해 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의 작가(워커의 친구 작가)와 워커가 등장하는 점이 이해된다.
그러니까 현재의 작가는 지금의 폴 오스터이고 워커는 1967년의 폴 오스터인 것이다. 사실은 다른 인물로 제시된 짐과 워커는 모두 폴 오스터의 분신인 것이며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변해버린 모습과 그 이유를 반추하는 포착과 추적의 과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미국의 뉴욕과 프랑스의 파리가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워커는 1967년 대대적으로 불었던 베트남 반전 세대를, 파리의 세실은 1968년 파리의 혁명세대를 상징한다. 워커와 세실은 모두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묶이는데 그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보른이다.
생각해 보면 보른은 그들의 '성'에로의 인도자였고(보른은 워커에게 마고를 세실에게는 워커를 건네준다.) 그의 '살인'으로 워커와 세실을 그의 세계에서 추방한다. 그들은 한 때 보른의 우주에서 일종의 선망을 가지고 섞여들지만 그의 살인과 함께 그 우주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며 결국은 그와 맞써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세실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실의 경우 보른의 살인은 그녀가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알게된 아버지의 살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살인의 대상은 바로 워커다. 바로 세실 앞에서 워커가 사라진 것이다. 워커의 사라짐은 결국 워커를 추방한 것이 보른이었다는 걸 볼 때, 세실 입장에서 보자면 워커가 보른에 의해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워커는 재입국이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른의 살인이 의미하는 것은 흑인 소년인 윌리엄스를 보른이 살해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쟁을 말한다. 따라서 그 살인을 비난하고 그 죗값을 묻기 위한 워커의 행동은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세실 역시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에 뚜렷하게 계기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68혁명의 다른 이름이 '상상력 혁명'이라는 말도 있듯이 전쟁이라는 뚜렷한 외부적 계기 없이 자발적으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해서 일어난 혁명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성세대인 보른과 그에 반발하는 세대인 워커와 세실은 이렇게 헤겔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 워커와 세실은 보른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해 보른은 언제나 그들에게 쫓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은 언제나 '워커' 뿐이다.(파리에서는 다르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워커의 고백으로 인해 보른은 자기가 원했던 여자를 떠나게 된다. 따라서 워커는 결정적으로 보른을 쫓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왜 그럴까? 그건 어쩌면 폴 오스터가 바라본 베트남 반전 세대와 68혁명 세대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이 늘 워커라는 점에서 오스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베트남 반전 세대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 그렇게 68혁명이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68혁명의 한계를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으므로 오스터의 판단 대로 68혁명이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 넘어가야겠다. 그렇다고 베트남 반전 세대가 68혁명 세대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파리에서 보른에게 전면전을 불사했던 워커는 결국 보른의 권력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당한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세실과 그녀의 엄마가 그를 믿지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전략이 너무 치밀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그저 옳은 것은 어떻게든 승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추방당한다. 이는 오스터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 반전 세대에 대한 시각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당시 반전 세대가 내세웠던 가치가 오늘날 미국에서 전혀 살아남지 못했으므로(결국 이것이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패로 여긴다.그리고 그 이유를 워커가 보른에게 했던 것 처럼 너무 순진하게 마음만 앞섰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어떤 체계적인 계획이나 대안을 세우지 못했다. 그 반전 세대가 내세울 가치가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할 그 어떤 것도 마련해 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듯이, 워커의 소설 '가을'의 마지막은 추방으로 끝난다.
그렇게 해서 W의 골족들이 사는 땅에서의 체류는 끝이 났다. 추방당하고 모욕당하고 평생 재입국할 수 없는 채로. 그는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고,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P.257)
이 말은 그대로 베트남 반전 세대가 주장했던 가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사멸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워커는 이렇게 쓴다.
안녕, 마고. 안녕, 세실. 안녕, 엘렌. (이 이름들은 모두다 워커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40년 후, 그들은 이제 유령만큼이나 실체가 없다. 그들은 이제 유령이고 W는 곧 그들 사이에서 거닐게 될 것이다.
이렇게 폴 오스터가 바라보는 베트남 반전 세대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었다.
미국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을 그 가치들은...
폴 오스터는 9.11의 비극은 바로 그 '1967년의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실체를 가졌다면 부시 정권도 없었을 것이고 9.11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었다. 그 어디서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작가 짐은 워커를 만나지 못한다. 그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버린 뒤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오늘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해 일종의 레퀴엠으로서 1967년을 다시 불러오고 싶었던 폴 오스터에게 그야말로 절망의 재확인 밖에는 없는 작품이 된다.
그는 어쩌면 다시 살아보려(세실이 보른을 다시 만나려 그 섬까지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1967년을 다시 반추하지만 이제 그것은 영원히 사라졌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씁쓸한 체감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그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폴 오스터에게는 당연히 그 생각이 일어난다. 소설의 앞 세부분이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1967년을 반추하는 내용이었다면, 마지막 네번째 부분은 바로 그 이유를 추척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특별히 그윈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1967년 뉴욕의 여름, 그윈은 분명 워커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 둘은 막내의 죽음으로 하나였고(이 막내의 존재는 워커가 그들 부모에게 반항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살해당한 월리엄스와 같다. 소설 '보이지 않는'의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는 존재 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윌리엄스가 워커의 일생을 바꾸었듯이 막내 역시 워커를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막내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워커와 그윈은 동일하게 베트남 반전 세대임을 의미한다.)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런데 워커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내밀한 고백이 공개된 지금 그윈은 워커의 고백을 부인한다.
왜 부인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워커의 고백이 가진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윈의 현재 모습 때문이다. 우리는 그윈의 고백에서 그녀가 아주 성공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게 우리고 보게 되는 것은 그윈이 1967년 그녀가 반발했던 그 기성세대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워커의 고백은 다시 그 시절로 그녀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그래서 그것을 거부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을 위한 그녀의 전략이다. 그녀는 짐에게 익명화를 요구한다. 그렇게 해서 그 누구의 역사가 아닌 그저 그런 역사중의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 역사의 '고유치'를 박탈함으로써 보편적 역사로 만드려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그것이 지금의 1967년이 가지는 의미라고 본다. 고유의 얼굴이 사라진 익명의 역사. 그저 묘비만 있는 무덤 처럼 남은 건 다만 기록 뿐 사멸해버린 역사...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짐 역시 그윈의 의도대로 워커의 소설을 익명화 해버린다. 이건 오스터의 자포자기적 체념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폴 오스터가 짐작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윈이 변화한 이유... 그것은 그윈이 스스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1967년 뉴욕 시절 부터 그윈은 심정적으로 부모님과 같이 있었다. 그녀는 워커 처럼 완전히 기성세대로 부터 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워커의 파리 이주(워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의 극대화)이후, 그렇게 워커와 멀어지자마자 그녀는 바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포섭되어 버린다.
짐에게 그윈은 그녀가 워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같이 있는 것을 자주 보았냐고 묻는다. 짐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그윈은 워커에게서 떠났다. 워커에서 떠난다는 것은 보른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세계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그윈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그녀의 진입은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이제는 워커의 고백을 부담스러하게까지 되었다. 짐도 마찬가지다. 짐이 그윈이 워커의 고백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역시 지금 '성공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짐의 얘기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여러 모로 워커의 삶 보다는 부유하고 안정적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여기서 짐작되는 것은 '보른'과 '짐'과의 유사성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짐은 현재의 폴 오스터다. 그는 자신이 순수했던 젊은 시절 '1967년의 워커'를 통해 이 비극으로 부터 빠져나갈 힘을 얻고자 한다. 때문에 짐은 파리까지 날아가서 워커의 얘기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워커의 진실을 향한 순수한 투쟁은 오직 진실이라야 그 가치를 가질 수 있고 그래야 짐이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짐이 워커를 흡혈귀처럼 착취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른 역시 짐과 유사한 행위를 보여준다. 즉 소설 '봄'에서는 순수한 젊은 영혼인 워커의 지성을 돈으로 착취하려고 하고 마찬가지로 '세실 쥐앵의 일기'에서의 그녀의 육체를 결혼으로 착취하려 한다.(섬에서 세실을 다시 만난 보른은 중년이 되어버린 세실에게 실망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더이상 젊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청춘의 피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짐이든 보른이든 그 근저에 깔려진 욕망은 똑같다. 젊은 영혼으로 부터 피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윈과 짐은 보른과 더불어 하나로 묶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은 그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반영한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마지막에 '세실 쥐앵의 일기'를 덧붙인다.
과연 그는 왜 이 일기를 반추이자 추적의 끝부분에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불인 것일까? 이 일기는 소설의 시작인 워커의 '봄'처럼 1인칭이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공통점은 이 두 글들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게끔 만든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반추와 추적에 맞추어 보자면, 워커의 '봄'은 1967년의 원초적인 순수를 세실의 일기는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변해버린 순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것은 1967년의 워커로 부터 변해버린 현재의 폴 오스터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기의 시작 부터 세실은 이미 변해버린 상태에 있다는데 있다. 68혁명 세대인 그녀 역시 짐 처럼 성공적으로 기성 세대로 진입했다. 오스터는 그녀가 짐을 만나고 싶었던 주된 목적이 워커의 이야기 보다 오히려 짐에 대한 설문 조사에 있는게 아닐까 느껴지게끔 서술한다. 이것은 그녀가 워커를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녀는 그런대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워커 뿐이다.)
이 세실의 모습은 지금 현재의 폴 오스터의 모습과도 같다.
그런데 그녀는 불현듯 보른의 초청을 받는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받았듯이...
그녀는 보른과 만날 결심을 한다. 이것은 그윈에게 워커의 소설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 과거 순수했던 그 때로의 소환인 것이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응하기로 한다. 그녀는 보른이 상징하는 67년의 그녀에게로 날아간다. 그런데 결국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워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며 보른이 자신의 아버지까지 그 꼴로 만들었다는 확인이다. 그녀는 기겁하며 당장 섬을 떠나려 한다. 마치 쫓겨나듯 짐조차 가지지 못하고 홀로 공항까지의 먼 길을 내려가는 동안에 그녀는 채석장의 돌 깨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일기의 주된 내용이다. 오스터는 왜 이것으로 소설을 끝냈던 것일까?
우리가 마지막의 보른의 고백, 그러니까 보른이 세실의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보른의 고백은 바로 9.11 사태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세실은 그 고백을 통해 워커의 말이 진짜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워커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렇게 보른의 말이 참이라고 믿고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 역시 깨닫는 것이다.(세실은 67년, 워커를 만날 당시에 카산드라시를 번역하려 했던 적이 있다. 카산드라는 아폴로 덕택에 미래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지만 또한 아폴로의 저주 때문에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전혀 믿어주지 않는 예언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산드라를 번역하려까지 했으면서도 세실은 진실을 말하는 워커를 믿지 못한다. 이 역시 68 혁명 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아마도 폴 오스터에게 9.11이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폴 오스터는 미국 전체에게 있어 9.11 사태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일기는 현재 폴 오스터의 마음으로 부터의 고백에 다름아니다. 이건 일종의 고해성사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진지하게 회개하는...
세실은 고통 속에서 그 긴 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불현듯이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불모의 땅에서 50~60명의 인부가 돌을 깨고 있는 소리였다. 그들은 스스로 치열하게 돌을 깨고 있었다. 세실은 장엄하기까지한 그 묵묵한 노동의 현장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설도 끝난다.
.. 그 소리는 앞으로 나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여생동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그 소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있을 것이다.(P.326)
대관절 이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한 개인이 묵묵히 이루어나가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모의 땅'이란 말에서 연상되어지는 것은 바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그라운드 제로'이다. 그 폐허 위에서 다시금 역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망치를 들고 돌을 깨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휘두르는 망치 하나하나가...
그들이 치열한 노동의 흔적으로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렇게 돌을 깰 때마다 울려퍼지는 소리 하나하나가 다 새로이 역사를 이루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세실의 마지막은 이 새로이 쓰여지는 역사적 현장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67년의 그 자신에게로... 그것을 상징하는 워커에게로 다시금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된다. 물론 67년의 그 순수했던 영혼의 모습, 변화를 일으키던 바람은 사라졌다. 그래서 소설의 끝은 재현이 아니라 다시금 불모의 땅을 개간하는 것이 된다. 완전한 무에서 다시 그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설 '보이지 않는'은 아마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반영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어둠속의 남자'에서 비롯되어진) 9.11 사태로 대표되어지는 현재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거의 순수했던 그 영혼을, 순간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고백처럼 이미 그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 시도는 또한 그대로 부재의 확인이며 그로 인한 비통의 기록이다.(워커의 얘기를 다시 들은 세실의 울음이 바로 폴 오스터가 이 소설을 쓰면서 보였을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 비통 속에서 그는 진심어린 회개를 한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그는 새로운 의지를 되찾는다. 이제 그는 그 의지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건지려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건의 현장을 통해...
그 없음에서 만들어가는 순수한 노동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애도하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망치를 들고 희망을 정초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한 오늘의 미국을 위한 진혼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이 제목 '보이지 않는' 처럼 이 소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예외가 되는 한 가지를 이 소설에서 틀림없이 보게된다. 그것은 변화를 갈구하는 애처로운 한 영혼임과 동시에 회개를 호소하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금 앙다문 입으로 바닥부터 희망을 다져가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기필코 이 소설에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 뒤섞인 폴 오스터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