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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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오르는 일은 자주 삶에 비유되어 왔다. 아마도 그 여정이 인생만큼 힘들고 정상이라는 종착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백'으로 유명한 미나토 가나에의 새 소설을 만났다. 제목이 '여자들의 등산일기'다. 갑자기 그녀의 소설 '백설공주 살인사건'이 생각난 건, 혹시 이 소설도 그 소설처럼 인터넷 네트워크가 무대가 벌어지는 살인극이 아닐까 생각되어서였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내게는 미나토 가나에와 살인을 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살인은 나오지 않았다. 소설은 제목처럼 정말 여자들이 등산하는 이야기였다. 제목의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일본에서 등산 붐이 일어나자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등산 정보들을 공유하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하나 생겨났는데, 그 이름이 바로 '여자들의 등산일기'였다. 소설은 모두 8장에 걸쳐 각각 다른 사람의 등산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일본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주로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하는 산 중의 하나가 무대로 때로 그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장소로도 유명한 뉴질랜드의 '통가리로'까지 확장된다. 이 쪽이 꽤 유명한 트래킹 장소이기도 해서 나도 꽤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산들은 이렇게 목차에 지도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의 무대가 되는 산의 위치를 확인하고 읽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시작을 여는 것은 묘코 산을 올라가는 에토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백화점 매장 일을 하는데 하루는 그 백화점에서 최근 거세게 일어난 등산 붐을 노리고 주최한 '아웃도어 페어'에서 '대너 등산화'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 등산화로 인해 생전 처음 등산까지 감행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직장 동료이자 해마다 한 번은 산에 오른다는 마키노의 권유로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묘코 산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등산은 본의 아니게 가장 짝을 이루고 싶지 않은 직장 동료 유미와 단 둘이 가게 됨으로써 먹구름이 일어난다. 에토가 유미를 꺼리는 이유는 그녀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 역시 지금 남자 친구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고민이 깊다. 그녀는 지금 누리는 삶의 모습을 결혼으로 그다지 바꾸고 싶지 않은데 남자 친구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 보니 아무래도 많은 변화가 초래될 것 같은 것이다. 첫 단편은 앞으로 '여자들의 등산일기'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단편들 역시 이 단편처럼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깊은 고민이 함께 엮여져 나오는 것이다. 


 두번 째 단편에서 히우치 산을 맞선 파티에서 만난 남자, 간자키와 함께 오르는 미쓰코 역시 그러하다.

 하고 다니는 스타일 때문에 자주 '거품 경제의 잔재'란 말을 듣는 그녀는 사실 거품 경제가 한창일 때 대형 증권 회사에 근무하여 그 거품의 혜택을 누린 바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회사가 원하는 모습에 맞춰 진짜 자기 자신을 잃어야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자기 외모에 아직 남아 있는 과거의 자신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에 빠진다. 


 세번 째 산인 야리다타케를 오르는 건,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에게 등산을 권유한 마키노다.

 그녀는 등산 취미를 가진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등산을 해 왔고 지금도 꽤 중요한 취미가 되어 있다. 그런 그녀에게 늘 남는 아쉬움이 있으니 그게 바로 야리가타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일이다. 지금까지 두 번 도전했는데, 번번이 타인 때문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내려와야했다. 때문에 더욱 혼자만의 산행을 제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는데 모처럼 일어난 등산붐을 타고 그녀는 다시 세번 째로 정상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타인들이 발목을 붙잡으려 하는데, 과연 그녀는 다시 한 번 혼자만의 산행을 최고로 여기게 될까?


 네번 째는 성격이랑 사고 방식이 자신과 정반대인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을 오르는 노조미가 주인공이다. 가족 이벤트를 열 때마다 늘 비가와서 '비를 부르는 일가'에 속한 그들답게 이번 산행 역시 비가 온다. 우천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등산에서 노조미와 언니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내면의 진심은 어떠한지를 서서히 산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노조미는 의사 아내로서 자기 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던 언니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된다. 형부가 이혼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는 그 언니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이번엔 딸 나나코까지 가세하여 시로우마다케를 오르는 등산에서 언니는 어떻게 이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온전히 깨닫게 된다.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자기 곁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네번 째 마지막의 문장들 그대로...


 "맑은 날은 누구랑 함께 있어도 즐겁지. 하지만..."

 끝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비가 내려도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p. 189)


 여섯번 째, 긴토키 산은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와 함께 오르기로 해놓고 개인 사정으로 빠져 버린 리쓰코가 주인공이다.

 원래 그녀는 우수한 배구 선수로 일본 제일을 노렸지만 발목 부상으로 그 꿈을 접어야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삶을 게임의 미션을 치르듯 영위하면서 늘 자신의 삶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버렸고 그건 산마저 일본 제일을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왜 에토와 유미가 일본 제일인 후지산을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리쓰코는 남자 친구 다이스케에 의해 삶은 정상을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누리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곱번 째는 드디어 뉴질랜드 통가리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네번 째 단편에서 노조미가 자기 친구라고 언급했던 유즈키가 주인공인데, 거기서 잠깐 언급되었던 여행사를 다니다 갑자기 관두고 모자 만드는 일을 하게 된 연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이번 통가리아 트래킹은 두번 째인데, 처음엔 남자 친구와 같이 왔었다. 삶이 선사하는 예측 불허의 상황을 한껏 껴안고 변화를 즐겼던 그가 끝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접어야 했던 상황과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된 그녀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그러면서 두번 째에 등장했던 미쓰코와 간자키, 세번 째 등장했던 마키노 또한 같이 출연하여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통해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는 산의 풍경과도 같은 삶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은 다시 노조미가 등장한다. 늘 누군가와 함께 등산했던 그녀는 이번에는 혼자 가라페스에 오른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얼마든지 혼자 잘 지낼 수 있다고 선언했던 그녀가 사실은 혼자 잘 있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앞에 놓인 외로운 길은 앞으로 가게 될 고독하고 불안한 미래의 삶이었고 그런 그녀의 산행은 우려와 고민을 곱씹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행을 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들이 나눠주는 '맑음' 속에서 삶은 결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순간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기르는 양파 밭처럼, 늘 새롭게 일구어가는 것이라는 걸 체감한다.


 이처럼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삶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등산을 소재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등산하는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하는 것 같은 형식이라서 이야기에 더욱 몰입토록 만든다. 거기다 현장 취재를 세밀히 하는 미나토 가나에답게 산의 묘사 또한 디테일하게 잘 살아나 있어 마치 주인공 곁에서 함께 등산하는 기분도 맛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 등산이 하고 싶어질 것이다. 마침 바깥 나들이 하기 딱 좋다는 5월이 아닌가. 읽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책을 덮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거나 당장 거기로 발길을 옮길지 모른다.


 솔직히 등산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박 3일에 걸쳐 지리산을 종주했던 기억은 각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도 나오던데, 진짜 등산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능선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 종주할  때가 딱 그랬다. 하루 종일 발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며 걷는 건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8월인데도 너무나 추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올려다 보았던 세석 밤하늘의 별들도. 어쩌면 그러한, 일상에서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낯선 풍경의 파노라마가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조미와 언니를 하나되게 했던 그 풍경처럼.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도 나 역시 마키노처럼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 나 역시 마키노처럼 그걸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삶의 변화를 앞두고 고민 중인 분들에게 이 소설을 기꺼이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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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탄두리
에르네스트 판 데르 크바스트 지음, 지명숙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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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고 싶어한다. 

 무대 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지 그 바깥 어둠에 가려진 채로 조용히 박수만 치는 관객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네델란드 작가 에른스트 환데르 크봐스트의 소설, '마마 탄두리'는 이런 존재감에 대한 소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마마 탄두리'는 작가의 엄마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실제 엄마를 그대로 형상화한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인도 사람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간호사로 네델란드에 왔다가 작가의 아빠가 첫 눈에 반하여 오랫동안 구애를 한 끝에 결혼하여 네델란드에 머무르게 되었다. 보통 이방인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이보다 더 타인에 대해 신경쓰며 그 사회에 잘 섞여들기 위해 가급적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우리의 마마 탄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고향 땅이나 다름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치 확성기를 입에 대고 부는 것처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다. 주로 인도 전통 요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화덕을 가리키는 '탄두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작 두 개의 여행 가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네델란드로 왔으면서도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탄두라 화덕에 닭고기를 구워대는 게 바로 그녀인 것이다. 소설은 아들인 작가가 듣거나 보았던, 엄마가 자신의 존재감을 남들에겐 민폐가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한껏 발산하는 모습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담아낸다. 실제로 만난다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것이지만 소설이 가져다 주는 적당한 거리가 유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마마 탄두리는 그런 식으로 평생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없이 나타내며 살아왔다.

 네델란드인 아버지는 전립선 암의 권위자로 저명한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 꼼짝 못하며 거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감 강한 엄마와 별로 없는 아빠 사이에 있었다. 이건 지적 장애 탓으로 어디로 가든 엄마와 똑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큰 형, 아쉬르바트와 얌전하여 아빠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그닥 드러내지 않는 둘째 형 요한 사이이기도 했다. 작가는 원래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래고래 울부짖어 인도 가족들이 '투투 베이비'라는 별명마저 지어줄 만큼. 그렇게 그 또한 원래는 엄마의 궤도 위에 있을 존재였으나 두 사람을 통해 점점 거기서 이탈해 나간다. 하나는 볼리우드 배우인 샤르마 이모부고 다른 하나는 헤르버르트 삼촌이다. 샤르마 이모부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 배후에 있더라도 누구보다 더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굳이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그렇게 누군가의 등 뒤에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감을 보란듯이 내세우는 사람 이상으로 크게 나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아빠를 다시 보게 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엄마에 가려 한없이 작은 존재감을 가진 아빠였지만 사실 엄마가 일으킨 모든 소동과 분란의 뒷감당을 중재하고 해결한 사람은 정작 아빠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테오에게 임금을 계산해주었다. 그동안 많은 인부들에게 그렇게 뒷손질을 해온 것처럼. 그는 노상 어머니와 칠공들, 배관공들, 목수들 그리고 청부업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곤 했다. 법정 소송으로까지 끌고 간 사건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립선암 연구의 많은 시간을 이런 일들에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p. 250 ~ 251)


 존재감은 그렇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과가 아닌 역사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란 걸, 작가는 깨달은 것이다. 헤르버트르 삼촌 또한 존재감은 타인의 인정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나다워질 때 형성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누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 자기 존재감이란 영토는 제국이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 두 사람이 열어준 문을 통해 엄마의 식민지에서 나올 수 있었고 작가라는, 그의 입장에선 독립국 선언이라고 해도 좋을, 정체성을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토록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그 끝에 결국 무엇이 있는지 엄마보다 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스린 이모를 통해 적나라하게 목격한 탓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슬픔이다. 우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의 궁극엔 상대방의 인정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일방적 드러냄을 연결은 커녕 오히려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었다. 고독의 우리에 유폐시켜서 나날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꾸만 줄어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주하게 할 따름이었다. 남는 것은 처량한 기만이었다. 빈 주머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양 더욱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진하게 풍겨 오는...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본다. 눈 아래 거무스름한 반점들, 그녀에게도 있는 솜털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낀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슬픔. 마치 우리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도 자식들도 없는 외톨이 어머니를. 마무리되지 않은 텅 빈 집에서의 고독. 그녀의 무한대에 가까운 자존심이 파놓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누구도 그녀를 위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 속으로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 일.(p. 256)


 작가는 그 애처로움을 확인하고 '마마 탄두리'의 세계에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마 탄두리'는 어쩌면 우리도 늘 하고 있을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사실 '마마 탄두리'와 같은 유혹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SNS가 발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손쉽게 타인에게 노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커져버린 유혹이다. 오죽하면 지금 사회를 과시 사회라고도 부르겠는가. 그런데 바깥에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위계 질서를 가질 수밖에 없고 가장 꼭대기에 있지 않는 이상 늘 상대적으로 불만족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없이 엷어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체득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강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될 뿐이다. 악순환이다. 


 당신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마마 탄두리'는 작가가 몸소 그랬듯, 그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이 책이 정말 권하고자 하는 것은 샤르마 이모부와 헤르버르트 삼촌처럼 존재감에 대한 집착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과시가 아니라 고유한 내면에 충실한 가운데 점차로 다듬어지는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홀로 존재하는 개성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색깔 중 하나로 고요하게 드러나는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마마 탄두리'는 바로 그런 것들에 당신이 군침을 흘리도록 유혹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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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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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의 집적이다사랑도   하나다.

 언제고  번은 부고장을 들고  있는 실연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나는 사랑에 능숙해서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허세이거나 진짜 사랑을  번도 못해  자다  번도 연인에게 자신의 진심을   적이 없는 사람만 그렇게 말할  있다사랑을 종종 심장에 비유하는  심장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과 같은 불안과 공포 또한 의미하 때문이다그렇게 된다 수밖에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유지태의 절규를 통해 잘 가르쳐주었듯이,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다연애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한낮이고 봄날일  없다어느 순간 밤이 되고 겨울이 온다적막하고 스산한 겨울의 해변에서   추억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미역 줄기와 같은 사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찾아오고야 만다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 또한 아주 아프게 깨닫지 않았던가사랑에는 엄연히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그 끝에서 사랑은 기억이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끝나진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익사체다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꿈에서 깨고 나서야 꿈이란  깨닫는 것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순간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사랑이 곁에 없을 때라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사랑은 그렇게 뒷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롭다부재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다니...

 없는 있다.

그렇기에 연애의 기억은 사막이나  위의 발자국이 되지 않는다그건 그대로 화석이 된다공룡의 화석이 그러하듯이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그것도 실패처럼 사랑의 전모를 기억의 실로 둘둘 감고서.


 자의든타의든 번은 발굴된다실패를 돌려 기억을 줄줄 풀고자 한다그렇게 밤과 겨울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사랑의 주검을 해부대 위에 올려 놓는다메스를 갖다 대는 최초의 동기는 혼란이다내겐  많은 질문이 남았는데 어느  하나 해답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 했는지어쩌다  지경이 되었는지내가  잘못해서 이리  건지아니면 상대가 원래 나쁜 사람인 탓인지 등등 대답을 찾기 위해  부지런한 부검의 되어 꼼꼼이 살핀다봉인된 기억의 육체를 가르고 등뼈와 같은 연애의 연대기와 장기처럼 놓여져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그리고  모두에 촘촘히 퍼져있는 신경과 같은 너와 나의 말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찝어 들고선 관찰한다소설 ‘연애의 기억 그와 같다




 그런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거기서 부검의는 케이시 이다진짜 직업은 변호사이지만어쨌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케이시 폴도 기억의 실타래를 풀게   질문 때문이었다소설의 첫문장이 그것을 나타낸다.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아니면 사랑을  하고  괴로워하겠는가? (p. 13)


 케이시  말한다우리 대부분은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 소설의 원제는 ‘THE ONLY STORY’이다.)삶에서 오직  가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있고  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바로 사랑이다그건 우리가 풀어야 삶이 가진 유일한 숙제다 밖에 다른 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십자말 풀이에 불과하다.


 하여폴은 실을 푼다대답을 찾아서그건  묶음으로 모인다소나타 형식처럼 소설이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파트의 제목은 하나’, ‘’, ‘으로 단순하다그런데 인칭이 파트마다 달라진다. ‘하나에선 ‘ 되고, ‘에선 ‘ 되며, ‘에선 ‘ 된다얼른 보면 인칭을 파트 제목에 맞춘 인상이다물론 이유가 그리 단순할 리는 없다. 연애의 기억에서 사랑은 현실과 대립되어 존재한다케이시 폴의 사랑 또한 그렇다그는 자기 또래의 자식을 두고 있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거기다 폴은  아홉 살로 미성년이런 사랑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아마도 반스가 이런 파격적인 사랑을 설정한 데는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하나는 현실 앞에 취약한 사랑의 형태를 통해 사랑과 현실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사랑이 독자 또한 이상하게 보일만큼 사랑의 모습이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나타내려는 것이다소설에서 수전은 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탄성이 있어희석되는  아니야늘어나줄지 않아.’(p. 102). 그러나 때로아니 자주우리는 사랑에 전혀 탄성이 없다고 여긴다마치 특정 사람에게만 사랑이란  가능하다는 듯이.) 게다가 폴과 수전이 사는 ‘빌리지 아주 보수적인 마을로 수전의 유일한 친구 조운처럼 남과  다르게 살면 바로 배척당하는 곳이다현실은 이웃의 경멸과 폴의 부모 얼굴 또는 수전 남편 매클라우드의 폭력으로 번갈아가며 사랑을 위협해 온다.


 그러나  어떤 것도 폴의 사랑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그는 강한 성벽을 가진 군주처럼 자신의 사랑을 보호한다. ‘라는 1인칭은 그런 강한 사랑을 암시한다폴은 어떻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토록 강한 사랑을   있었을까하지만  대답을 찾아가노라면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란  알게 되는 까닭이다


 첫사랑은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어떻게 그러지 않을  있겠는가압도적 현재형으로다른 사람들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p. 137)


 그러나 사랑의 달콤함에만 취하는 자는 그걸 모른다타격이 통증을 통해 몸의 존재를 알리듯고통이 수반되어야 깨닫는다사랑의 상실이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현실의 공성전은 멈추지 않는다사랑을 위해 빌리지를 떠나 헨리 로드에서 드디어 둘이 함께 살게 되었지만 수전은 돌연 알콜 중독에 빠지고 폴에게 거짓말을 잇달아 하는가 하면 나중엔 폴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마저 걸린다.(수전이 이렇게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돌연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사랑이 이처럼 시험당하기 쉽다면 그만큼 연약한 것이니 이를 강조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폴은 점점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속에 아픈 가시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시를 품어야할지 도려내야할지 그는 알지 못한다첫사랑을   그는 능동적이었다현실그것의 총체인 삶은 오로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폴은 점점  수동적이 된다삶이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수전은 폴에게 언젠가 이런 말을  적이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운 거야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가운데 하나지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p. 74)


 폴은 그런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다수전은함께 테니스를   끝까지 공을 따라가 완전하게 상대편 코트로 쳐냈던 것처럼삶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며 신뢰할만 했기에 자기처럼 네트에  붙어 불안하고 충동적인 파트너에게 가능한 최선의 백코트 지원자(p. 70)였으니까헨리 로드  정점이라 여겼다


 우리의 사랑을 향한  태도는 독특하게 고지식했다.-사실 독특하게 고지식한 것이 모든 첫사랑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사랑의 확실성이 자리잡았으니이제 삶의 나머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자기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것이라고 확신했다.(p. 66)



 하지만 수전의 삶이 폴의 생각과 전혀 달랐듯수전도 안전한 장소는 되지 못했다. 조운처럼 그도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했다어쩌면  때의 수전 역시 자신을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폴의 존재는 차츰 위축된다그것은 폴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타인에게   번도 수전의 애인이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무심코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이런 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 말을 못해 남자가  사람이다 남자가  애인이다 말을 못하냐구!”



 사랑은 연약해진다현실의 차디찬 냉기 앞에서 육체의 온기를 서서히 빼앗기듯 마모되어 나간다그런데 그와 동시에  속에 굳게 또아리 틀고 있었던 자기중심주의 썰물처럼 빠져나간다사랑이 점차 실망과 위기불안과 피로의 대상이 되어가는  보면서 폴은 어느덧 ‘ 떠나 ‘ ‘ 자리에 있게 된다거듭되는 인칭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암시다사랑에 대한 정의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어디까지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타인의 자리에 서서 타인의 눈과 마음으로 그를 헤아리고 그를 위할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있다는 그게 사랑이 욕망과 구별되고 스토킹이 사랑이   없는 이유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사랑을 사유라고 단적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폴이 ‘ ‘ 되어 자신의 사랑을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  있지 않을까? 연애의 기억이라는 소설 자체가 그렇게 되었을  마치  과실처럼 비로소 나왔다는 것도 이걸 어느 정도 시사하는  같다.(소설 전체는 수전의 사후에 폴이 자신의 사랑을 회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문장에 대해 대답을   있을 듯하다그것에 대한 진짜 대답은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달렸다는 것을. 앞서 내가 사랑은 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했던 것은 이 사랑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를 벗어나 너와 그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사랑. 그런 사랑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련다. 우리가 계속 사랑의 부검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이 변하기 쉽고 끝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이건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아무튼 모든 것엔 끝이 있다. 그런 끝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작가가 바로 줄리언 반스다. 그 환멸의 작가손에  해골을 보며 자신이 이토록 고뇌하고 갈등한 끝에 복수를 하더라도  또한 죽음에 삼켜져 결국엔 무의미하게  거라는  너무나  아는 햄릿의 후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사랑도, ‘시대의 소음처럼 예술도 결국엔 시지프스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사랑과 예술이 끝이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있는가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이것을 쓰면서 반스는 과연 소설 속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때로 삶은 잔인한 아이러니를 선사한다.)부터 그는 내내 아주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시야로 그것을 따져왔다.(그것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가 보여주듯이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 집요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제아무리 쇼스타코비치가 위대한 음악을 남기더라도 언젠가는 시대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시대의 소음’, p.257)누구도 무엇도 예정된 운명을 피할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나왔던  그대로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아니다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문제는  닫힌 이다존재가 유한한 이상 우리는 패배의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아니 우리가 물어야  질문은 오직 하나다폴이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이야기만이 가능하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그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오직 하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패배에 그저 길들여질 것인가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너머를 꿈꾸며 희망을 찾아 다닐 것인가?'


 맞다 질문은 그대로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반스에게 환멸은 끝이 아니다. '망할'이라고 내뱉기 보다 '그래서?'라는 의문문을 제시한다. 그에게 환멸이란 새로운 시작을 여는 문인 것이다. 그는 탐험가가 되어 찾는유한의 숙명을 뛰어넘을  있는 무언가를계속  다른 문을 열어 젖히면서.


 이번엔   근원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전까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가올 부재를 불길하게 예감하며 말을 했는데 이번엔 아예 부재 이후 그것을 관통한 지점에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수전의 죽음 이후라는 시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이후에도 뭔가가 존재할  있을까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긴 답은 너무 시간을 잡아먹어 해 줄 수가 없었다. 짧은 답은 너무 고통스러워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심이 무엇인가, 마음이 과연 어떤 식으로 상처를 입는가,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다.(p. 375)


  그래서 반스는  소설에 사랑을 데리고 왔다폴이 수전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게  것처럼사랑은 부재를 통해서 지속하는아니 그것을 통해  커다란 생명력을 얻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사랑의 가치란 언제나 상실한 뒤에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이토록 취약하고이토록 우왕좌왕 서투르며나날이 혼돈과 불안이 거듭되는 사랑임에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을 통해 나를 넘어 더 확장되고 멀리 뻗어나갔다. 수전의 남편에게 더이상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된 것처럼, 사랑은 또 다른 걸 낳았다. 


 이런 연속적인 흐름 가운데 어딘가에서 그는 매클라우드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매클라우드를 용서하지는 않았지만-그는 용서가 증오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반감과 밤 시간에 터져 나오는 분노가 어쩐 일인지 의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p. 307)

 

  보다 원숙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했고 부모를 비롯한 대립하던 이들과 화해하도록 했다. 그런 폴에게 끝은 있지만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있는데,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폴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더이상 비통의 순간이 아니다. 다만 고요한 작별이다. 끝의 허망함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정도로. 


 내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다.(...) 나의 여생이, 비록 이 모양이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지만,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p. 380)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건 줄리언 반스의 결론이기도 하다. 실제 아내의 죽음과 픽션 속 수전의 죽음을 관통한 끝에 다다른 환멸의 종막. 거기엔 사랑을 통한, 아니, 기억으로 재생되는 '사랑의 사유'를 통한 초연이 있었다. 그 모든 불길한 예감과 성급한 낙담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그걸 사랑이 한 것이다. 그 사랑으로 패배에 길들여질 필요없이 죽음 너머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꿈꾸며 존재의 의미를 채우고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나 또한 사랑의 부검의가 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애의 기억'은 단순히 연애 소설만은 아니다. 유한한 우리가 언제나 묻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오직 하나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소설이다. 죽음마저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금 이 순간, 문득 짐 자무시의 다음과 같은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운 것 보다는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게 낫다.

  '연애의 기억'은 사랑의 순전한 긍정이요, 끝에 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라는 줄리언 반스의 권유 혹은 유혹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 유혹에 굴복할 것을 바라고 있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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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0-25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은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잘 써서 똑같은 책을 읽은 사람에게 달콤한 열등감을 안겨 주시나요 ㅎㅎㅎㅎ 으하하하.....ㅠ

ICE-9 2018-10-25 21:43   좋아요 0 | URL
앗! syo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 과찬이세요. 사실 열등감은 늘 저의 몫이니까요. 하하하^^;

syo 2018-10-26 14:30   좋아요 0 | URL
무려 헤르메스님께 열등감을 안겨줄 수 있는 괴인(?)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미쳤어, 미친 세상이다....

ICE-9 2018-10-26 20:53   좋아요 0 | URL
그 괴인들이 너무 많아서 마치 가면라이더에 나오는 괴인 연합 같아요. 그 중의 총수급이 syo님이라면 믿으시려나요? ^^

syo 2018-10-28 10:31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읽고 리뷰를 써볼까 머리를 쥐어짰는데 아무 것도 안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썼나 검색했다가 헤르메스님 글을 보고 저는 리뷰를 포기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 제가 총수라니요.... 괴인연합 너무 날로 잡아드시려는 거 아니세요 헤르메스라이더님? ㅎㅎㅎ

ICE-9 2018-11-01 20:44   좋아요 0 | URL
그 때는 제가 원기옥 같은 걸 먹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더에게도 때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죠. 보통 땐 그저 바이크도 잘 다루지 못하는 초짜 라이더일 뿐 ㅠ ㅠ
 
인듀어런스 - 우주에서 보낸 아주 특별한 1년
스콧 켈리 지음, 홍한결 옮김 / 클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우주는 소년의 로망이다.

 소년이라면 한번쯤 우주에 가봤으면 하는 꿈을 꾼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가 높은 인기를 얻었던 까닭은 그러한 소년의 로망을 비록 간접 체험이지만 한껏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철이는 둘을 모두 떠나 보낸다. 하나는 '999'라는 열차고 다른 하나는 동반자 메텔이다. 이건 소년의 로망을 둘 다 떠나보내는 것과 같다. 메텔과 같은 아름다운 여인 또한 소년의 로망이니까 말이다. 소녀는 그렇게 로망과 결별하면서 어른이 된다. 철이 든다는 것은 그래서 매우 슬픈 일이다. 나 또한 언젠가 소년이었기에 우주에 대한 꿈을 꿨다. 지금도 가장 커다란 소망은 우주에 한 번 나가 보는 것이다. 거기서 나는 '무한'을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무한한 공간을 보고, 그 속에 있는 것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그걸 한 번 느껴보고 싶다. 그러나 이루기가 어려운 꿈이다. 민간 우주 여행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많은 돈과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낙담 혹은 체념이 이 책과 만나게 한 것 같다. 바로 스콧 켈리의 '인듀어런스'란 책이다.




 스콧 켈리는 우주인이다.

 외계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ISS, 즉 국제우주정거장에서 1년 넘게 있었다. 정확히 340일을 우주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그 체험을 오롯이 기록한 책이 바로 '인듀어런스'다. 제목 그대로 우주에서 1년 동안 버터낸 날들의 기록이다. 어떻게 우주정거장으로 갔으며 또 어떻게 거기서 1년의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해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놓치지 않고 온전히 기록하고 있기에, 소년의 로망을 아직 품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겐 꽤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아주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게 우주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 이 책은 간접 체험의 목적을 가득 충족시켜주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정보들이 정말로 가득했다. 특히나 스콧 켈리는 이번 여행이 우주 공간에서의 생활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나도 처음 알았는데, 우주 공간에서 지내는 것은 인체에게 더러 안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무엇보다 시력이 저하된다고 한다. 아직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인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알아보기 위해 특별히 스콧 켈리를 선발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쌍둥이 형제로, 대조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생 마크는 지구에 있고 켈리는 우주로 가, 그 둘의 상태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현재 스콧 켈리의 표본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 중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 중의 하나는, ISS에서 대원들이 무중력 상태에서 함께 보여 '그래비티'라는 영화는 보는 장면이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과연 어떤 자세가 될까? 뭔가 지구에서 볼 때와 다른 자세가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지구 위에서와 똑같이 무중력 상태에서도 옆으로 누워 보게 된다고 한다. 그건 사실 외부 환경 때문은 아니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어떤 자세를 취하든 편하기 때문이다. 단지 사람의 머릿속에 누우면 편하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 무중력 상태에서도 누워 보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ISS의 우주인들에게 '그래비티'는 꽤나 섬뜩한 공포였다고 한다. 영화 중에 ISS가 불타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건 곧 자신들이 있는 집이 타는 것과 같았으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삶이 아주 현실감 있게 그려진다. 소변을 처리하여 물로 만드는 것이라든가, 작업을 위해 정거장 내에 물건들을 치우다 보면 둥둥 떠다니는 작은 조각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자주 누군가 흘려 놓거나 숨겨 놓은 초컬릿이라 생각하고 넙죽 받아먹는데 알고보니 쓰레기라는 것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말이다. 그 모든 걸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에 우주 생활에 관심이 있는 이에겐 어느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이 없다. 아주 현실적인 우주 생활을 알고 싶었다면 이 책,'인듀어런스'만큼 좋은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ISS(국제우주정거장)의 모습


 스콧 켈리는 책의 마지막에 우주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워했던 것들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그가 가장 그리웠던 것은 지구에서는 아주 평범하게 누릴 수 있는 일상이요 감각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주에서의 그의 일상이란 하루하루가 내일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무엇보다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것이 가장 그리웠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별 것 아니라 생각하는 일상이 실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정말로 소중한 것이기에 그리도 자주 영화에서 함께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스콧 켈리는 화성에 가기 위한 일환으로 이번 1년의 우주 생활을 치뤄냈다고 한다. 그가 바란대로 언젠가 화성에도 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러면 그의 책을 통해 또 한 번 간접 체험을 할 수 있을테니. 화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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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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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란 무엇일까?

 세상이 점점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우리는 그저 믿을 곳은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러나 이번 추석과 같은 명절 때 함께 있다 보면 가족처럼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도 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이라면 한바탕 퍼부어주었을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꾹 참고, 남이라면 거침없이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일도 가족이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할 때 마음 속 한 켠에 기타노 다케시가 슬며시 나타나 기분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속삭이는 게 들려오는 것이다.

 "거 봐, 내가 뭐랬어? 가족이란 건 남이 안 보면 슬쩍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잖아."


 알다가도 모를 존재인 가족.

 생각해 보면 이제는 일본 영화의 거장이라고 평가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내 가족에 대해 말해왔다. 그 시작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아무래도 '아무도 모른다'(개인적으로 두 번은 절대 볼 수 없는 두 편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타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 나는 정말 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오빠가 없을 때 어린 여동생 혼자 하루를 보내는 장면을 보며 엉엉 울었다. 그래서 도저히 두 번은 볼 마음이 안 난다.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왜 여기서 하고 있담?)일 것이지만 본격적인 개진은, 나 역시 그의 최고작이라 평가하는 '걸어도 걸어도'가 될 것이다. 그 때부터 그는 가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걸 이렇게 저렇게 여러 방향으로 굴러보며 고찰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나온,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좀도둑 가족'은 뭐랄까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 말해왔던 것을 좀 집대성한 느낌이다. 나는 그가 소설까지 쓴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영화의 바탕이 되었던 소설이 나왔다. 어느 것이 먼저인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영상으로 잘 담아낼 수 없는 마음의 속살들이 선명하게 나와 있어 좋았다. 가족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감독의 생각이겠지만.







 아무튼 '좀도둑 가족'이 전하는 것을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다. 가족은 딱히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가족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결과가 아니며 과정 속에 형성되며 그래서 선택으로도 얼마든지 가족은 가능하다. 이런 걸 보여주는 '좀도둑 가족'의 구성은 이러하다. 할머니 하쓰에(78세), 아들이자 집안의 가장인 오사무(47세)와 그의 아내 노부요(38세). 큰 딸인 아키(21세)와 둘째 아들인 쇼타(11세). 그리고 오사무가 데려와 가족이 되어버린 린(5)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가족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첫 장면은 오사무가 아들 쇼타와 함께 평소 자주 훔치는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광경이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 앞에서 물건 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잘 훔친다면서 자랑하는데 그건 그가 평소 가지고 있는 '가게에 진열된 상품은 아직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라는 신념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생각에 물들어 어린 쇼타 역시 거리낌 없이 물건들을 슬쩍한다. 아니, 가족 모두가 필요한 것은 훔쳐서 마련하는 걸 자연스러워 하기에 처음엔 절로 '뭐, 이런 가족이 다 있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별종으로써의 가족 모습은 그들이 사는 공간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그들의 집은 한창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에 마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주위는 온통 유행의 첨단을 걷는 신축 아파트이지만, 그들의 집만은 오래 전 처음 지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다.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져 있으며 또한 그만큼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


 하지만 읽다보면 점점 더 이 가족만큼 가족다운 가족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당장 내일 먹을 것이 늘 걱정이고 벽장 속에서 잠자야 하는 쇼타나 할머니 하쓰에와 늘 같이 잠자야만 하는 아키가 잘 보여주듯 한없이 빈궁한 삶이라 어쩔 수 없이 사소한 다툼이 있지만 그보다 더 따스하고 강한 유대감이 서로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린이라는 존재를 통해 한층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진짜 가족과 살았지만 가족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던 린은 진짜 가족이 아닌 이 가족에게서 오히려 진짜 딸처럼 사랑을 받는 것이다.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라고.


 뒤이어 더 커다란 가족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좀도둑 가족'이 전하고픈 진짜 주제라는 걸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가족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게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스포일러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에 그만 밝히고 말았다. 여하튼, 오사무는 하쓰에의 아들이 아니다. 노부요는 오사무와 정식으로 혼인한 적이 없다. 아키 역시 하쓰에가 데려온 존재다. 쇼타는 오사무가 자동차에 갇힌 그를 꺼내 데려왔다. 이처럼 모두가 린과 같았다. 그들 모두 혈연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이란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제목처럼 그렇게 가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족의 모습은 그 어떤 가족보다 더 가족답다. 따스하고 끈끈하다. 그런데 혼자 떼놓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믿음이 가지 않고 뭔가 모자라며 어딘가 어긋나 있다. 대표적으로 하쓰에가 그러하다. 하쓰에는 자신을 버린 남편의 집을 기일마다 찾아가 거기 살고 있는 전남편 아들 부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돈을 뜯어낸다. 그렇게 자신에게 큰 상처를 입힌 존재에게 복수한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어딘가 낯이 익다. 맞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자기 아들을 죽인 이를 아들의 기일마다 억지로 불러선 곤란을 겪게 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공교롭게도 이 때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와 하쓰에를 연기한 배우가 같다. 얼마 전 작고한 키키 키린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포스터.


 이처럼 혼자는 비틀어져 있다. 강하지 못하다. 린이 그렇듯 말이다.

 그런 그들을 오늘까지 버티게 만들고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은 '함께'라는 경험, 그 속에서 절로 형성되어갔던 '가족'이었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으로 형성되는 가족.

 '좀도둑 가족'은 이런 가족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잔잔한 감동 속에 보여준다. 물론 거기엔 노부요가 린을 위해 생계를 위해서 꼭 해야 했던 일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처럼 결단한 것에 상응하는 정도의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런 것을 우리는 흔히 '책임'이라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좀도둑 가족'은 이런 것도 보여준다고 하겠다. 권리가 주가 아니라 책임이 주가 되는 가족을. 그리고 그럴 때야 말로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좀도둑 가족'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지금까지 영화를 통해 '가족'에 대해 사유했던 것의 집대성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집대성 끝에 내놓은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현재 일본 사회에 보내는 메세지라고도 여겨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사회를 두고 자폐의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일본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라 타자라는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일본 사회는 타자의 존재에 대해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고 헤아리려 노력하기 보다는 위기로 단정하고 배척하여 자신의 것만 고수한다는 의미다. 그런 일본 사회의 모습은 이런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선택은 무슨! 존재가 전부다!'


 현재 일본 우익 정부는 이것을 노골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그들이 '좀도둑 가족' 영화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천명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것을 말하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만이 아니다. 존재를 모든 것으로 여기는 움직임은 전세계에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는 이주자들에 대한 차별을 대놓고 나타내는 우익 세력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인종과 종교 그리고 성별에 따른 적대도 심해지고 있다. 마치 많은 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리는 세상을 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미 인류의 역사가 저멀리 떠밀어 보낸 것을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좀도둑 가족이 살았던 시대에 뒤쳐져 보였던 공간은 거꾸로 가장 시대를 앞서 나가는 현장으로 해석되어야 하리라.) 그런 시대의 움직임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좀도둑 가족'은 반대의 말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존재는 과정과 행위 그리고 책임의 분여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런 진심이 통했기에 '좀도둑 가족'이 황금종려상을 탄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여기에 지지의 한 표를 보태고 싶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압도적으로 짓누르는 숨막히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존재가 전부였던 중세의 어둠을 몰아냈던 르네상스의 빛은 어디까지나 인간은 태어난 모습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신념의 불길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 큰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좀도둑 가족'이 소지(燒紙)가 되어서라도 빛을 더 밝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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