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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삶은 무수한 시행착오의 집적이다. 사랑도 그 중 하나다.
언제고 한 번은 부고장을 들고 서 있는 실연의 노크 소리를 듣는다. 나는 사랑에 능숙해서 그런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허세이거나 진짜 사랑을 한 번도 못해 본 자다. 단 한 번도 연인에게 자신의 진심을 줘 본 적이 없는 사람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종종 심장에 비유하는 건, 그 심장을 남의 손에 맡기고 있는 것과 같은 불안과 공포 또한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 될 수밖에 없다. 영화 '봄날은 간다'가 유지태의 절규를 통해 잘 가르쳐주었듯이, 사랑은 변하기 때문이다. 연애의 시간은 언제까지나 한낮이고 봄날일 수 없다. 어느 순간 밤이 되고 겨울이 온다. 적막하고 스산한 겨울의 해변에서 저 먼 추억의 바다에서 떠밀려온 미역 줄기와 같은 사랑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서성이는 때가 찾아오는 것이다. 찾아오고야 만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 또한 아주 아프게 깨닫지 않았던가? 사랑에는 엄연히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을.
그 끝에서 사랑은 기억이 된다. 그렇다고 사랑이 끝나진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익사체다. 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른다. 꿈에서 깨고 나서야 꿈이란 걸 깨닫는 것과 똑같이, 사랑을 하고 있는 순간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이 곁에 없을 때라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그렇게 뒷모습으로만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롭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다니...
없는 데, 있다.
그렇기에 연애의 기억은 사막이나 눈 위의 발자국이 되지 않는다. 그건 그대로 화석이 된다. 공룡의 화석이 그러하듯이,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것도 실패처럼 사랑의 전모를 기억의 실로 둘둘 감고서.
자의든, 타의든, 한 번은 발굴된다. 실패를 돌려 기억을 줄줄 풀고자 한다. 그렇게 밤과 겨울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사랑의 주검을 해부대 위에 올려 놓는다. 메스를 갖다 대는 최초의 동기는 혼란이다. 내겐 참 많은 질문이 남았는데 어느 것 하나 해답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사랑은 왜 이렇게 싸늘한 주검이 되어야 했는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내가 뭘 잘못해서 이리 된 건지, 아니면 상대가 원래 나쁜 사람인 탓인지 등등.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난 부지런한 부검의가 되어 꼼꼼이 살핀다. 봉인된 기억의 육체를 가르고 등뼈와 같은 연애의 연대기와 장기처럼 놓여져 있는 이런저런 사건들, 그리고 그 모두에 촘촘히 퍼져있는 신경과 같은 너와 나의 말과 행동들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찝어 들고선 관찰한다. 소설 ‘연애의 기억’이 그와 같다.
그런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거기서 부검의는 케이시 폴이다. 진짜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어쨌든 우리와 마찬가지로 케이시 폴도 기억의 실타래를 풀게 된 건 질문 때문이었다. 소설의 첫문장이 그것을 나타낸다.
사랑을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p. 13)
케이시 폴은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할 이야기가 하나밖에 없다(이 소설의 원제는 ‘THE ONLY STORY’이다.)고. 삶에서 오직 한 가지 일만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할 수 있고 할 만한 가치 있는 이야기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다. 바로 사랑이다. 그건 우리가 풀어야 할, 삶이 가진 유일한 숙제다. 그 밖에 다른 것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십자말 풀이에 불과하다.
하여, 폴은 실을 푼다. 대답을 찾아서. 그건 세 묶음으로 모인다. 소나타 형식처럼 소설이 세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각 파트의 제목은 ‘하나’, ‘둘’, ‘셋’으로 단순하다. 그런데 인칭이 파트마다 달라진다. ‘하나’에선 ‘나’가 되고, ‘둘’에선 ‘너’가 되며, ‘셋’에선 ‘그’가 된다. 얼른 보면 인칭을 파트 제목에 맞춘 인상이다. 물론 이유가 그리 단순할 리는 없다. ‘연애의 기억’에서 사랑은 현실과 대립되어 존재한다. 케이시 폴의 사랑 또한 그렇다. 그는 자기 또래의 자식을 두고 있는 유부녀와 사랑에 빠진다. 거기다 폴은 열 아홉 살로 미성년. 이런 사랑은 아무리 개방적인 사회라 해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아마도 반스가 이런 파격적인 사랑을 설정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현실 앞에 취약한 사랑의 형태를 통해 사랑과 현실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사랑이 독자 또한 이상하게 보일만큼 사랑의 모습이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걸 나타내려는 것이다. 소설에서 수전은 폴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은 탄성이 있어. 희석되는 게 아니야. 늘어나, 줄지 않아.’(p. 102). 그러나 때로, 아니 자주, 우리는 사랑에 전혀 탄성이 없다고 여긴다. 마치 특정 사람에게만 사랑이란 게 가능하다는 듯이.) 게다가 폴과 수전이 사는 ‘빌리지’는 아주 보수적인 마을로 수전의 유일한 친구 조운처럼 남과 좀 다르게 살면 바로 배척당하는 곳이다. 현실은 이웃의 경멸과 폴의 부모 얼굴 또는 수전 남편 매클라우드의 폭력으로 번갈아가며 사랑을 위협해 온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폴의 사랑을 거꾸러뜨리지 못한다. 그는 강한 성벽을 가진 군주처럼 자신의 사랑을 보호한다. ‘나’라는 1인칭은 그런 강한 사랑을 암시한다. 폴은 어떻게 현실에 굴하지 않고 이토록 강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 대답을 찾아가노라면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이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는 까닭이다.
첫사랑은 늘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벌어진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압도적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들, 다른 시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p. 137)
그러나 사랑의 달콤함에만 취하는 자는 그걸 모른다. 타격이 통증을 통해 몸의 존재를 알리듯, 고통이 수반되어야 깨닫는다. 사랑의 상실이 사랑을 상기시키는 것처럼.
현실의 공성전은 멈추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빌리지를 떠나 헨리 로드에서 드디어 둘이 함께 살게 되었지만 수전은 돌연 알콜 중독에 빠지고 폴에게 거짓말을 잇달아 하는가 하면 나중엔 폴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마저 걸린다.(수전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으므로 돌연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이처럼 시험당하기 쉽다면 그만큼 연약한 것이니 이를 강조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지도 모른다.) 폴은 점점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살 속에 아픈 가시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가시를 품어야할지 도려내야할지 그는 알지 못한다. 첫사랑을 할 때 그는 능동적이었다. 현실, 그것의 총체인 삶은 오로지 자신이 주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폴은 점점 더 수동적이 된다. 삶이 자신의 목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된다. 수전은 폴에게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운 거야. 그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지. 우리 모두 그저 안전한 장소를 찾고 있을 뿐이야. 만일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그때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배워야만 해.(p. 74)
폴은 그런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수전은, 함께 테니스를 할 때 끝까지 공을 따라가 완전하게 상대편 코트로 쳐냈던 것처럼, 삶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하며 신뢰할만 했기에 자기처럼 네트에 딱 붙어 불안하고 충동적인 파트너에게 가능한 최선의 백코트 지원자(p. 70)였으니까. 헨리 로드는 그 정점이라 여겼다.
우리의 사랑을 향한 내 태도는 독특하게 고지식했다.-사실 독특하게 고지식한 것이 모든 첫사랑의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자, 우리 사이에 사랑의 확실성이 자리잡았으니, 이제 삶의 나머지가 그것을 둘러싸고 자기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 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p. 66)
하지만 수전의 삶이 폴의 생각과 전혀 달랐듯, 수전도 안전한 장소는 되지 못했다. 조운처럼 그도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아야했다. 어쩌면 그 때의 수전 역시 자신을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여겼을 지도 모른다. 폴의 존재는 차츰 위축된다. 그것은 폴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타인에게 단 한 번도 수전의 애인이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무심코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이 김정은에게 했던 이런 대사가 떠오를 정도로.
“왜 말을 못해!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구!”
사랑은 연약해진다. 현실의 차디찬 냉기 앞에서 육체의 온기를 서서히 빼앗기듯 마모되어 나간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폴 속에 굳게 또아리 틀고 있었던 자기중심주의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사랑이 점차 실망과 위기, 불안과 피로의 대상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폴은 어느덧 ‘나’를 떠나 ‘너’와 ‘그’의 자리에 있게 된다. 거듭되는 인칭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암시다. 사랑에 대한 정의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는 사랑이 어디까지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 타인의 자리에 서서 타인의 눈과 마음으로 그를 헤아리고 그를 위할 수 있을 때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그게 사랑이 욕망과 구별되고 스토킹이 사랑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사랑을 사유라고 단적으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폴이 ‘너’와 ‘그’가 되어 자신의 사랑을 사유하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연애의 기억’이라는 소설 자체가 그렇게 되었을 때 마치 그 과실처럼 비로소 나왔다는 것도 이걸 어느 정도 시사하는 것 같다.(소설 전체는 수전의 사후에 폴이 자신의 사랑을 회고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해 대답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것에 대한 진짜 대답은 그 사랑이 어떤 것이냐에 달렸다는 것을. 앞서 내가 사랑은 과거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타난다고 했던 것은 이 사랑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를 벗어나 너와 그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사랑. 그런 사랑이라면 아무리 괴롭더라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련다. 우리가 계속 사랑의 부검의가 되어야 하는 까닭을.
우리는 잘 안다. 사랑이 변하기 쉽고 끝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이건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아무튼 모든 것엔 끝이 있다. 그런 끝에 대한 얘기를 지속적으로 작품을 빚어내는 작가가 바로 줄리언 반스다. 그는 환멸의 작가다. 손에 든 해골을 보며 자신이 이토록 고뇌하고 갈등한 끝에 복수를 하더라도 그 또한 죽음에 삼켜져 결국엔 무의미하게 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햄릿의 후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사랑도, ‘시대의 소음’처럼 예술도 결국엔 시지프스의 형벌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사랑과 예술이 끝이란 게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가? 갑자기 찾아온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이것을 쓰면서 반스는 과연 소설 속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때로 삶은 잔인한 아이러니를 선사한다.)때부터 그는 내내 아주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시야로 그것을 따져왔다.(그것은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가 보여주듯이 아내의 죽음을 기점으로 더 집요해지고 깊어지고 있다.) 제아무리 쇼스타코비치가 위대한 음악을 남기더라도 언젠가는 시대의 소음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전기뿐 아니라 역사도 희미해져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교과서 속의 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시대의 소음’, p.257)) 누구도, 그 무엇도 예정된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나왔던 말 그대로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문제는 그 ‘닫힌 문’이다. 존재가 유한한 이상 우리는 패배의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아니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오직 하나다. 폴이 우리에겐 오직 하나의 이야기만이 가능하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오직 하나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패배에 그저 길들여질 것인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너머를 꿈꾸며 희망을 찾아 다닐 것인가?'
맞다. 이 질문은 그대로 우리 존재의 의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반스에게 환멸은 끝이 아니다. '망할'이라고 내뱉기 보다 '그래서?'라는 의문문을 제시한다. 그에게 환멸이란 새로운 시작을 여는 문인 것이다. 그는 탐험가가 되어 찾는다. 유한의 숙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를. 계속 또 다른 문을 열어 젖히면서.
이번엔 좀 더 근원적인 지점에 이르렀다. 그 전까지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가올 부재를 불길하게 예감하며 말을 했는데 이번엔 아예 부재 이후, 즉 그것을 관통한 지점에서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나는 수전의 죽음 이후라는 시점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 이후에도 뭔가가 존재할 수 있을까? 있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긴 답은 너무 시간을 잡아먹어 해 줄 수가 없었다. 짧은 답은 너무 고통스러워 해줄 수가 없었다. 그 대답은 이런 식이었다. 그것은 상심이 무엇인가, 마음이 과연 어떤 식으로 상처를 입는가,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무엇이 남는가의 문제다.(p. 375)
그래서 반스는 이 소설에 사랑을 데리고 왔다. 폴이 수전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하게 된 것처럼, 사랑은 부재를 통해서 지속하는, 아니 그것을 통해 더 커다란 생명력을 얻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사랑의 가치란 언제나 상실한 뒤에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니던가?) 이토록 취약하고, 이토록 우왕좌왕 서투르며, 나날이 혼돈과 불안이 거듭되는 사랑임에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을 통해 나를 넘어 더 확장되고 멀리 뻗어나갔다. 수전의 남편에게 더이상 증오와 원한의 감정을 품지 않게 된 것처럼, 사랑은 또 다른 걸 낳았다.
이런 연속적인 흐름 가운데 어딘가에서 그는 매클라우드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매클라우드를 용서하지는 않았지만-그는 용서가 증오의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글거리는 반감과 밤 시간에 터져 나오는 분노가 어쩐 일인지 의미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p. 307)
보다 원숙하게 자신의 삶을 바라보게 했고 부모를 비롯한 대립하던 이들과 화해하도록 했다. 그런 폴에게 끝은 있지만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있는데,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폴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은 더이상 비통의 순간이 아니다. 다만 고요한 작별이다. 끝의 허망함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할 정도로.
내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다.(...) 나의 여생이, 비록 이 모양이지만, 그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지만, 나를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었다.(p. 380)
연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건 줄리언 반스의 결론이기도 하다. 실제 아내의 죽음과 픽션 속 수전의 죽음을 관통한 끝에 다다른 환멸의 종막. 거기엔 사랑을 통한, 아니, 기억으로 재생되는 '사랑의 사유'를 통한 초연이 있었다. 그 모든 불길한 예감과 성급한 낙담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그걸 사랑이 한 것이다. 그 사랑으로 패배에 길들여질 필요없이 죽음 너머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꿈꾸며 존재의 의미를 채우고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니 어떻게 나 또한 사랑의 부검의가 되라고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애의 기억'은 단순히 연애 소설만은 아니다. 유한한 우리가 언제나 묻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오직 하나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는 소설이다. 죽음마저 종결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지금 이 순간, 문득 짐 자무시의 다음과 같은 영화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리라.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운 것 보다는 더 하고 더 괴로워하는 게 낫다.
'연애의 기억'은 사랑의 순전한 긍정이요, 끝에 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라는 줄리언 반스의 권유 혹은 유혹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 유혹에 굴복할 것을 바라고 있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