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브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 묶는 것은 조세핀 테이의 대표적인 시리즈 작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앨런 그랜트 경감이 나오는 시리즈죠. 죠세핀 테이는 '브랫 패러'를 쓰고 나서 바로 그랜트 경감 시리즈로 돌아가 다음 해, 1950년에 그랜트 경감 시리즈인 'TO LOVE AND BE WISE'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951년. 그랜트 경감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진리는 시간의 딸'을 내놓게 됩니다. 굳이 이런 계보를 밝히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왕 '브랫 패러'가 나온 김에 여기서 말한 테이의 작품들이 모두 나왔으면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브랫 패러'가 이처럼 그녀의 황금기에 나온 작품임을 알리기위해서 입니다.

 

 이 시기 조세핀 테이가 작품을 통해 천착하는 것은 2차 대전을 통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파시즘이라는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그런 그녀의 주제 의식을 참으로 잘 보여준 작품이었죠. 파시즘이라는 것이 독일이라는 특정한 나라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라는 특정한 인물과 집단이 있어서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편견과 이기심으로 배척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길 수 있는 것임을 잘 형상화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결국 이 시기의 조세핀 테이는 '우리 앞에 나타난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내내 질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프랜차이즈 사건'과 바로 뒤이은 이 '브랫 패러'가 가지는 설정상의 공통점들로 바로 추정 가능합니다. 일단 그 공통점에 주목해보죠. 두 작품 모두는 내부적으로 결속이 강한 집단이 한 편에 있으면 다른 한 편엔 그 집단의 유대를 위협하는 타자가 존재하는 구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작품의 서스펜스는 주로 이 둘이 충돌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 관계를 통해 이어지며 작품의 주제는 그렇게 결속이 강했던 집단이 타자와 얽히면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과 '브랫 패러'는 마치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따라 그리는 것처럼 이렇게 닮은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가의 질문은 반복되고 작가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작가에게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니만큼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해서 보다 그것을 심화시켜서 대답을 살펴보려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현명한 대답은 보다 깊은 숙고를 통해서라야 나올 수 있는 법이니 이러한 조세핀 테이의 반복은 쉽게 말하자면 나사를 한 번 더 조여 더 깊이 내려가 보는 것이죠. 

 

 그렇게 이 '브랫 패러'는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했던 것을 보다 아래로, 보다 깊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바깥 타자와의 간격에서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타자로 나왔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외부에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결속된 집단의 울타리 너머 그녀들이 사는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일원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해도 되나?'하는 식의 반성적 자문은 하지 않아도 되었었죠. 하지만 '브랫 패러'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타자는 더 이상 울타리 너머 저만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아예 가로놓인 간격 조차 없습니다. 즉 '브랫 패러'의 타자는 보다 깊숙이, 아예 그 집단의 일원으로 들어옵니다. 그것도 가장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 만한 가족의 일원으로 말이죠. 그래서 그 타자를 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하고. 다시 말해 반성과 성찰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된 것이죠.

 

 이것이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획기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이제 집단의 일원들은 대놓고 타자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의혹의 대상이 되고 불안한 가운데 내린 잠정적 결론만이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신뢰할만한 근거가 외부로 부터 전혀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그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자기가 스스로 믿음의 근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보다 한 차원 나사를 더 돌려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가 물어보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깥으로 부터 아무 것도 주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이 조세핀 테이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독일인이 2차 대전을 일으키고 거리낌없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자행했던 이유만 생각해봐도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때 그들이 그렇게 아리아인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그 외 다른 민족들을 하등 동물 취급하며 세계사의 유례없는 잔혹한 홀로코스트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파시즘'이라는 외부의 것을 통해서였습니다. 바깥에서 온 이데올로기에 그들의 이성과 영혼을 쉽게 내줘버렸기 때문에 양산되어진 비극이었죠. 물론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에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어쩌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독일인이 나치즘과 같은 광기의 포로가 되었나를 연구한 끝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쉽게 바깥의 유포된 선동이나 이데올로기에 쉽게 물드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 사고하기를 귀찮아하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을 도움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은 본성상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게으른 동물이다'라고도 하더군요.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복잡하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귀찮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문가들로 부터 일반인 모두가 그렇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우리 정치 현실에 있어서도 서민 코스프레 같은 감성에 호소하는 홍보 전략이 먹혀드는 것이죠. 안 그래도 살기가 팍팍한 현실이니 더욱 당장은 상관없어 보이는 문제에 매달려보지 않으려 합니다. 나치즘이 일어나던 당시의 독일도 그랬습니다. 지금만큼이나 그 때의 독일인들도 경제적으로 힘들 때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가 횡행했습니다. 히틀러가 유포하는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다시금 재현하자'라는 말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과거를 보라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 그건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리가 과거의 그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려는 세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태인이고 그들과 협력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이다."라는 악의에 찬 거짓을 진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나치 앞에다 바쳤으며 그렇게 이성이 마비되어버리자 소중한 목숨까지 필요하지도 않는 전쟁에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2차 대전 전체 사망자 거의 6천만명 그리고 유태인 사망자 6백만명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로서는 마치 세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 바깥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경계해야 하고 그 목소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이성으로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권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전자의 목적을 위해서 '프랜차이즈 사건'을 썼고 후자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브랫 패러'를 썼던 것입니다. 저만치 물러서 있던 타자가 가족의 일원으로 성큼 들어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은 2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썼는데 이건 '브랫 패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브랫 패러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먼저 제목인 '브랫 패러'는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난 브랫 패러는 원래는 영국 태생이지만 어찌어찌해서 미국과 멕시코를 떠돌다가 향수병으로 인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다가온 것은 브랫 패러가 자신의 조카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는 이름이 패트릭으로 8년 전에 절벽에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웨스트오버에 있는 애시비 가문을 이을 적자로 장차 그 가문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가 될 판이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는 바람에 그의 쌍둥이 동생 '사이먼'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 유예되었던 기한이 다 되어 곧 공식적으로 사이먼이 모든 걸 가질 판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브랫 패러에게 은밀히 제안해 옵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치 않은 패트릭을 패러가 정말 닮았으니 이참에 패트릭을 연기해 그 모든 걸 가져보지 않겠느냐고? 원래 브랫 패러는 재물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훌륭한 말들이 가득한 마굿간이 있다는 말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역시 말을 사랑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도 그랬듯이 말에 대한 사랑이 주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죠세핀 테이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행복해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예 목장을 배경으로 진행되어 말들이 전면으로 잔뜩 등장하니까요.)

 

  

 (사진은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웨스트오버의 풍경입니다. 이런 풍광을 바라보며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조세핀 테이가 그것을 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 지는 쉽게 상상이 갈것 같습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힙니다. 그래서 제목도 '브랫 패러'가 되었습니다. 즉 브랫 패러가 가짜인지 아닌지를 밝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브랫 패러가 들키느냐 안들키느냐가 중요한 서스펜스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프랜차이즈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이 '브랫 패러'에서는 바로 그 타자의 시선으로 결속이 강한 내부 집단을 관찰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낯선 타자를 앞에 둔 집단 일원의 반응들이 객관적으로 관찰됩니다. 더우기 그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자의 시선이라 더욱 면밀하고 정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이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무엇보다 신뢰의 근거가 될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차단된 상황 안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탐색하는 작품이니만큼 그것을 보다 세세하게 그리고 독자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포착하면서 또한 그러한 관찰이 작품의 진행과 별 무리없이 섞이도록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 설정이 택해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설정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다시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 즉 이 작품 역시도 '프랜차이즈 사건' 처럼 오래된 하나의 원본이 있다는 이야기로 돌아가봅니다. 그럼 과연 브랫 패러의 원본은 무엇일까요? 그 단서는 다름 아닌 이름에 있습니다. 즉 8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인 패트릭. 그것이 단서입니다.

 

 이를 보다 더 확실한 단서로 만들기 위해 또 하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브랫 패러'라는 이름입니다. 소설에는 이 브랫 패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인공의 이름이 되었는지 밝혀주고 있는데 영어로 쓰자면 'BRAT FARRAR' 이렇습니다. 여기서 'BRAT'은 '사고 뭉치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수식어 같은 것이니 정작 중요해지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FARRAR'란 성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이 성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성은 'FARRELL'이었죠. 브랫이 우연히 타게 된 배의 선장이 이름을 잘 못 보고 표기하는 바람에 그만 'FARRAR'란 성으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FARRELL'은 유명한 아일랜드 성중 하나입니다. 얼마전 영화 '토탈리콜'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대표적인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파렐도 바로 이 성을 쓰고 있죠.

 

 

  

 그러면 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조세핀 테이가 하필이면 주인공의 성을 아일랜드 것으로 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세핀 테이는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소설에 나오는 '패트릭'이란 이름이 정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확실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요. 네 그 패트릭은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로 성 패트릭 이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그래서 지금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리는 이입니다. 그런데 이 패트릭에게 있어 원래 아일랜드는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로 끌려와 살게 된 곳이 바로 이 아일랜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노예로 착취당하던 중 탈출을 했고 오래도록 외국을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울과 같은 영적 체험을 한 그는 선교사가 되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그렇게 아일랜드를 이전과 다른 새로운 땅으로 바꿔버렸습니다. A.D 400년 전후의 일입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바로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브랫 패러의 이야기임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겠죠. 또한 이 패트릭의 일생이 그대로 소설에서 브랫 패러가 걸어가게 될 여정이라는 사실도 말이죠.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성직자라 할 수 있는 성 패트릭

 

 

 조세핀 테이는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를 내부적 결속이 강한 집단으로 부터 축출된 타자가 다시 돌아와 오히려 그 집단을 바꾸게 되는 것의 원형으로 보고 그걸 다시금 문학으로 형상화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패트릭의 쌍둥이 동생의 이름을 하필이면 '사이먼'으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바로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타자의 축출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사이먼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죠. 그렇게 가장 강한 내부적 결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패트릭과 사이먼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야말로 농후해집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는 사실 이 소설로 독자들에게 어떤 반전이나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과 같은 그렇게 결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정으로써 다가가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미리 위장하는 존재를 밝혀서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 탄로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통하여 서스펜스를 죽 이끌어 갔던 것도 독자들이 가급적이면 그 과정을 좀 더 음미해주길 바라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어쩌면 집요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과정에 독자를 붙들어 매여 두려는 것은 그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보다 주고 싶은 것이 홀로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정 앞에서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타인의 존재를 통해 이 소설이 차용한 성 패트릭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떻게 내부적 결속을 허물고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욱 바람직한 집단으로 재탄생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그럼으로 궁극에 가선 타자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 장을 덮는 가운데 깨닫게 만드는 것이죠. 조세핀 테이는 그렇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가졌던 '구원은 타인으로 부터 온다'라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끝에 가서 말들이 두리뭉실해진 것은 가급적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죠세핀 테이의 의도대로 그 과정을 온전히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려면 되도록 아무런 선입관이 없는 것이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긴 말을 쓰고 말았으니 어쩐지 이런 말들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네요. 그래도 조세핀 테이 입니다. 시간을 얼마든지 들여도 아깝지 않은 작가. 그러니 이 '브랫 패러'가 보여주는 과정을 마음껏 벗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기꺼이 권해드려 봅니다.

 

 

 [다음은 그냥 곁다리 입니다.]

 

 

  조세핀 테이의 소설답게 이 브랫 페러 역시도 두 차례 영화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1963년에 나온 프레디 프랜시스가 감독한 'PARANOIAC'이란 영화입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사이먼 입니다. 여기서는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한 감독 캐롤 리드의 조카가 되는 올리버 리드가 사이먼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제작사가 공포 영화 전문의 헤머 영화사라 원작 보다 좀 더 공포 분위기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또 한 편은 1983년 BBC에서 3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판본이 궁금한데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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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8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ICE-9 2012-12-1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비교해서 리뷰했기 때문에 혹시 전작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리뷰를 참조해 주세요.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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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리라 믿는다. 조세핀 테이는 그녀의 두 번째 필명이다.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매캔토시이다.  그녀는 '조세핀 테이'라는 필명을 1936년 그녀의 두 번째 미스터리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을 쓰면서 사용했고 이 소설은 다음 해인 1937년, 알프레드 히치콕에 의해 'Young and Innocent'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비디오로 나온 적이 있다.) 죠세핀 테이란 이름은 그녀의 어머니 이름과 할머니의 영국식 '성'을 혼합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 딸들 중 장녀였고 버밍엄의 앤스티 체육 전문학교에 들어갔으며(후일 그러니까 1946년 조세핀 테이는 바로 이 학교를 무대로 한 스릴러 'Miss Pym Disposes'를 쓰게된다.) 체육교사로 지내다가 아버지가 몸져 눕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조세핀 테이는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처럼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연애담도 하나도 없다. 그녀의 희곡만을 골라 편찬한 바 있었던 John Gielgud 경은 테이의 연인이 1차 대전중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했지만 밝혀진 것은 없다. 평소 그녀의 결혼에 대한 지론이 그녀의 대표적 캐릭터 그랜트 형사의 말을 통해 나타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랜트는 어딘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타인을 통해서 그 충족을 구하지 않는다네. 결혼도 포함해서 말이지. 오로지 그들 스스로 그 충족을 구한단 말일세." 오로지 홀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충만케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죠세핀 테이의 모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는 평생 그녀의 모토대로 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그야말로 '독립적인 삶' 자체였다. 그녀의 전재산은 영국의 'National Trust'에 모두 기부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 'A Shilling for Candles'에서 희생자로 나온 유명한 여배우도 똑같이 전재산을 'National Trust'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작품을 썼을 때 부터 이미 자신의 삶에 대한 중요한 것들을 미리 결정해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낚시와 승마를 좋아했다. 직업도 체육교사이고 보면 죠세핀 테이의 삶 전체에서 여성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면은 거의 없다. 이런 면에서 왠지 '고독의 우물'을 쓴 작가 '레드클리프 홀'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히나 조세핀 테이는 승마를 좋아했는데 이러한 승마에 대한 사랑은 이 작품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에서도 면면히 나타나고 있다. 단적으로 주인공 변호사인 로버트가 자신은 형사사건에 그리 밝지 못하여 유능한 형사 전문 변호사 케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하지만 로버트는 케빈이 과연 자신이 맡고 있는 의뢰인 샤프 모녀를 믿어줄지 확신할 수 없다. 로버트는 케빈과 샤프 모녀를 직접 만나게 하는데 케빈은 로버트의 우려와는 달리 샤프 모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흔쾌히 사건을 맡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자네 마녀들이 마음에 들었어. (...)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니 참 별일이 다 있지. 최고였다고, 그 영감. 인류 역사상 대략 단 하나뿐인 정직한 말 장수가 아닐까. 그 조랑말을 생각하면 내 정말 한시도 고마움을 잊어본 적이 없다네. 소년이 어떤 말을 처음 갖는지는 아주 중요하거든. 평생을 좌우한단 말이지. 말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까지. 소년과 좋은 말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와 우정엔..." (p.291)

 

   로버트도 그리 생각했지만 케빈은 그 좋은 말을 정직하게 자신에게 판매해 준 그 찰리 메러디스의 동생이라면 누구를 납치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에 대한 신뢰가 인간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오랫동안 승마를 하면서 말과의 관계를 다져온 조세핀 테이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이며 케빈의 고백은 사실 테이 자신의 말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사실 죠세핀 테이의 자전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 있다. 특히 여주인공 매리언 샤프는 그야말로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할 만한데, 스포일러상 여기서 그걸 자세히 밝힐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아마도 조세핀 테이의 실제 모습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어보면, 왜 매리언 샤프를 죠세핀 테이의 페르소나라고 말하는지 저절로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한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1951년 영화화되었다. 왼족이 로버트 가운데가 매리언 그리고 오른쪽이 샤프 부인이다. 영화는 유투브로 감상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말 그대로 프랜차이즈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어느날 로버트에게 그 저택에 살고 있는 메리언 샤프가 전화로 의뢰를 해 온다. 평소 마을에서 은근히 기피되고 있던 모녀로 부터 뜻밗의 의뢰인지라 로버트는 사실 내켜하지 않는다. 더구나 의뢰하는 건 또한 자기들로서는 전혀 일면식이 없는 한 소녀가 자기들 모녀가 그녀를 납치하고 가혹행위를 했다고 고발한 사건이었다. 로버트는 형사전문이 아니라서 다른 변호사에게 넘기려고 하지만 매리언의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마을에 사는 친구로서 진지하게 도움을 구하는 거라는 말에 그만 응낙하고 만다. 매리언의 저택에서 테이의 대표적 캐릭터이자 '시간의 딸'에서 안락탐정의 전형을 보여준 형사 '그랜트'를 만나 사건의 전모를 전해 듣는다.(사실 테이의 소설에 익숙한 사람은 그랜트의 등장과 더불어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조연에 그친다. 테이가 그랜트를 등장시켰으면서도 조연에 머무르게 하는 건 이 소설의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중요하다. 하지만 그랜트의 의미를 말하려면 아무래도 스포일러를 언급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이럴 때 마다 미스터리 리뷰로써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어쩌겠는가 미스터리는 어디까지는 읽는 자의 즐거움이 그 첫째가 되어야 하니까 말이다.)

  열 여섯이 되는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가 샤프 모녀가 차로 자신을 납치하고 가정부로 삼는 것에 저항하는 그녀를 가혹하게 학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정확히 프랜차이즈 저택의 모습을 묘사했고 그 내부까지 묘사했기 때문에 경찰도 직접 수사에 나선 것이다. 샤프 모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베티 케인이라는 소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가 되는 미스터리는 바로 이것이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소녀의 고발은 정말 고발일까 아니면 무고일까? 소설은 이것을 주된 줄기로 해서 하나하나 가지들을 새로 돋아나간다. 테이는 이 소설의 사건을 18세기에 영국에서 실제 있었던 엘리자베스 케닝 유괴 사건에서 가져왔는데 그 때 케닝은 한 집시무리가 자신을 납치했다고 고발하는 바람에 그 집시 무리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는데도 안그래도 집시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로 부터 어마어마하게 박해를 받았다. 여기서 드러나듯,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에서의 핵심은 바로 '마녀사냥'이다. 별다른 증거가 없는데도 평소 경원시 되던 존재에 대한 무분별한 비이성적 증오가 핵심인 것이다. 그렇다면 테이는 하필이면 왜 그 사건을 모델로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이 나온 시기를 알면 어느정도 이해가 된다. 이 소설은 1948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2차대전이 끝나고 난지 얼마 안된 시점, 그러니까 파시즘이 가져온 그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로 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 시점에 나온 것이다. 2차대전이 가져온 가장 커다란 비극. 나치에 의해서 6백만명 넘게 유태인이 학살당한 것은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말했을 만큼 전세계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어마어마한 사람들은 모두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처형을 당했다. 테이는 아마 거기서 집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하게 당해야했던 엘리자베스 케닝 사건을 떠올렸던 것이 틀림없다. 테이는 확인했던 것이다. 나치가 초래한 비극은 어떤 특수한 시점에 일어난 유일한 사건이 아니라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그래서 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파시즘은 언제 또다시 일어날지 모른다는. 만일 이렇다면 조세핀 테이는 정말 현명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부터 정말 얼마되지 않아서 우리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라는 또 하나의 마녀사냥식 파시즘을 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조세핀 테이가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는 것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프랜차이즈' 자체가 마녀사냥과 관련하여 사람들 뇌리에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그건 바로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그 때 드레퓌스는 독일과 내통했다는 간첩 혐의에 대해 따로 진범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군부는 그것을 무시하고 끝까지 그에 대한 재판을 강행했는데 그 이유는 다른 이유는 없고 오로지 드레퓌스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만연된 유태인 혐오증 때문에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는 마구잡이로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녀사냥'식 몰아대기. 다시 말 해 원래 혐오하고 있던 자에게 '마녀'의 가면을 씌워 전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배척하고 폭력까지 가하는 무분별한 증오, 파시즘이 보여주었던 그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증오를 독자들에게 떠올리기 위하여 죠세핀 테이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주 무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죠지 4세(영화 '죠지왕의 광기'의 그 죠지를 말한다.)의 섭정 시대 유행했으나 그 후 빅토리아 양식에 밀려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진 '프랜차이즈' 양식으로 지은 저택을 내세워 그와 똑같이 샤프 모녀가  마치 집시나 유태인 처럼 사회에서 고립적이며 열악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로버트가 매리언의 전화를 받고 그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장면에서 놀랍도록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테이는 로버트가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가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는데 거기서 흥미로운 것은 테이가 유독 대립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먼저 '신'거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말을 부리는 가게와 자동차 정비소를 통해 대립 관계를 은연중에 보여주더니 좀 더 나가서는 아예 로버트와 프랜차이즈가 있는 전원적인 밀퍼드와  맞닿은 도시적인 라버러와의 대조를 통해 그 대립적인 관계를 재차 확인한다. 문제는 말도 밀퍼드도 그 대립관계에서 열악한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말은 시대에 뒤쳐짐을 의미하고 밀퍼드는 프랜차이즈가 현재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렇게 프랜차이즈 저택은 열악한 밀퍼드에서 더욱 열악한 자리에 있으며 그들이 그렇게 고립되고 열악한 이유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시대에 뒤쳐진 존재들이라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인상 때문이다. 라버러 사람들에게 밀퍼드가 그렇게 인식되어 기피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프랑스의 아트락 그룹 '샤일록(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그 '샤일록'이다.)의 데뷔 앨범 LP 커버와 같이 찍어 보았다. 커버에 소설 속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둥근 창문이 보인다. 여기에서 보듯이 둥근창문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양식인 것 같다.

 

 

 

 

 

 

 

 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 영문판 표지. 사건의 주무대가 되는 프랜차이즈 저택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런데 시선 처리가 오묘하다. 분명 등장인물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저택의 모습을 그린 듯 하다. 소설을 읽으시면 누군가의 시선인지 아시게 될 것.

  

  조세핀 테이가 전반부에 이렇게 안정된 일상 같지만 그 이면엔 수많은 대립관계가 은밀하게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은 바로 이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이 되는 로버트와 관계가 있어 중요하다. 소설은 로버트로 부터 시작한다. 그는 변호사이다. 변호사는 그의 가문 대대로 이어내려온 직업이다. 그는 그 가문의 성원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변호사가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수백년의 세월이 집적된 견고한 것이었으며 '월, 수, 금요일에는 버터 비스킷이고 화, 목, 토요일에는 다이제스티브'로 집약되듯이 항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견고하고 항구적으로 생각하는 일상은 사실은 그 이면에 저토록 많은 대립관계가 드리워진 것이었다. 그만큼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로버트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이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이것이 네가 이룬 모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일상에 대해 순간 회의감이 든다. 이 정체모를 감정으로 상념에 빠져들 때쯤 매리언에게서 도움을 구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매리언의 그 전화는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로버트, 당신의 일상은 당신이 믿는 것 만큼 견고한가요? 우리에겐 이리도 많은 대립관계가 불안하게 놓여있는데..."

   매리언 또한 분명 로버트 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은근히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그녀들이지만 그래도 지킬 것을 지키고만 살면 괜찮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 의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들의 일상이 마구 파괴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새 마녀 사냥을 당하는 '마녀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테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로버트나 매리언 처럼 우리들의 일상이 견고하고 항구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아무 이유나 잘못 없이 우리의 일상은 오로지 타자의 전적인 악의만으로도 무참히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미 드레퓌스나 파시즘을 통하여 이것을 충분히 경험했다. 테이는 일상 속에 수없이 가로놓인 대립관계를 통하여 우리네 일상이 그 대립관계를 먹이로 해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파시즘에게 얼마든지 먹음직스러운 토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바로 그 파시즘(여기서 파시즘은 아무 이유 없이 가해지는 개인이나 집단적 폭력 전체를 상징해서 쓰는 말임을 일러둔다. 즉 전적인 이기적인 악의로만 가해지는 폭력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에 의해 일상 자체 마저 느닷없이 무참히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세핀 테이는 바로 그것을 '프랜차이즈 저택'의 샤프 모녀를 통해 보여준다. 케빈을 비롯 로버트 그리고 그의 조카 네빌 마저도 샤프 모녀 특히 매리언을 직접 만나고 나서는 끌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네빌이 직접 말하듯 '그녀들은 온전히 열려있고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테이의 대안은 명백하다. 우리의 일상을 언제든지 무참히 깨어버릴 수 있는 파시즘은 어디까지나 대립관계, 즉 나와 남을 결코 조화될 수 없는 '타자'로만 바라보는 그 시각에 있으므로 '샤프 모녀'처럼 스스로를 타자들에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려진 존재로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테이는 소설을 통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등장인물들이 '프랜차이즈 저택'에 직접 와서 그들과 함께 집 내부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편이 되는 이유이며 왜 결정적인 사건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 '둥근 창문'이 되는 것인지의 이유이다.(역시나 스포일러상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하지만 안에서 바라보는 것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보다 죠세핀 테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타자의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세핀 테이의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다. 죽 얘기해 온 것 처럼 파시즘이 남기고 간 그 정신적 폐해와 공황 속에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테이 스스로 생각하는 대안을 차근차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미스터리적 재미가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적 재미와 테이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로버트가 매리언에 대한 짝사랑과 그의 잠재적 라이벌들에 대한 질투를 통하여 로맨스적 재미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 테이의 팬으로선 작가 자신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매리언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언제든 반복될 지 모르는 파시즘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가져야 할 것에 대해 교조적이지 않고 공감가능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낸 솜씨에는 비견될 수 없다. 죠세핀 테이가 이 책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우려는 한시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책은 저마다의 운명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책은 정말 딱 적당한 시기에 우리에게 도달한 것이다. 무분별한 판단과 성급한 비난을 하기 전에 한번쯤 지금의 나 자신은 어떠한 모습인가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읽어둘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해답을 해 주었다는 점에서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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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더욱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의 '나사의 회전'...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6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