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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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아는 것에 있어선 종결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연구된 것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걸로 충분해 하면서 흙을 덮어선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 예일대 역사 교수로 있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은 탓이다. 예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꽤 많이 읽었다. 물론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러드랜드', 즉 동유럽에 대해서도 익히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었나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무려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내용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당연했다. 저자의 시선이 향하는 눈높이가 이전에 나온 책들과 달랐던 것이다. 여지껏 내가 만난 동유럽을 다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은 초점이 위에 있었다. 전쟁을 지도한 사람, 그 아래서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로 수행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전투. 이러한 군사적인 게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야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을. 그는 말했다. 이 책은 희생자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소환할 것이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의 목소리 또한 울리게(p. 19) 할 거라고.



 그렇게 하자, 새로운 사실들의 대륙이 열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겼느냐에 관한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사실의 얼굴들을 확인하면서 충격과 당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규모는 내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막대했고 그 학살을 수행하는 방법의 잔인성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임산부나 아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기까지 무참히 살육했다니! 더우기 천명도 아니고 만명 단위로 곳곳에서 굶겨 죽이거나 총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내 죽이는 것을 보고 절로 저자도 물었던 물음을 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p. 682). 그것도 같은 인간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는 그 의문의 대답을 찾는 궤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게 인간의 얼굴을 오롯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가?

 그 추적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전개된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 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p. 21)


 정확히 소련이 처음 집단화 정책을 시작했던 1933년부터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1968년까지 모두 11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블러드랜드에 일어났던 일을 담는다. 시작은 1933년, 소련이 열었다. 이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오직 독일만 자행한 줄 알았는데 '독소전쟁'에서 대적했던 소련 또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도 독일보다 먼저.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에 세 번이나 대대적으로 그러한 일을 감행했다. 1차는 집단화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농민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고, 2차는 당시 실시한 계획경제의 성공을 국제 사회에 선전하고자 수출 목표를 여건 상 불가능한데도 무리하게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인해 전자에선 많은 이들이 정든 고향에서 강제추방 되었고 결론이 지어진 3인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했다. 후자에선 오직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해 특히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적으로 굶김을 당했다. 애초에 소련의 사회주의는 농민의 계급적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직 지도자 스탈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기 위해 평범한 농민들마저 당국의 손에 의해 계급의 적인 '부농'으로 둔갑되어 처형되었고 살던 곳에 머무를 자유와 내가 생산한 것을 먹을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소련은 만인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오직 스탈린 하나만을 위한 사회주의였다. 이건 뒤이은 1938년과 1939년에 일어난 3차 학살에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이 자신이 바라는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 이유를 블러드랜드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탓으로 돌려버렸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소수 민족이 소련의 적과 결탁하여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무려 25만 명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p. 195)

 초기 소련은 박해받는 인종과 민족에게 기꺼이 자신의 문을 열어주는 나라였다. 그렇게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 다문화 국가'(p. 171)로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걸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뻔뻔해져 있었다. 소련이 직접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 건 내부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민초들의 반응 같은 건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까마득한 저 아래에 있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스탈린이란 개인과 블러드랜드에 사는 평범한 개인의 차이란 실로 엄청났다. 




 여기에 서쪽으로 스탈린만한 권력을 가진 또 한 명의 개인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히틀러다. 그 또한 염원하는 제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란 미래의 광휘에 눈이 멀어 아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자다. 그에게 인간이란 설령 자국민이라 하여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을 판단하는 관점은 오직 하나 유용성이었다. 거기에 유대인은 독일 제국 건설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걸림돌로 보였다. 그는 그걸 유럽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모조리 격리시켜버릴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폴란드를 다른 유럽 유대인들을 최종 제거 전에 모아두는 집단거주지로 삼고자(p. 202) 소련과 불가침협약을 맺은 뒤 침공한다. 원래 사회주의는 반파시즘을 천명하고 있기에 소련은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서는 안되었지만 바로 눈 앞으로 당도한 영토 확장의 유혹은 스탈린에게 너무나 달콤했다. 소련은 불가침협약과 동시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고 리투아니아를 차지했다. 스탈린의 눈에 블러드랜드의 인민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함께 건설하는 동료가 아니었다. 히틀러와 똑같이 오직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둘의 오만하고 비정한 시선 아래에서 수많은 이들이 게토로 강제 추방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 독일에 의해 공개적으로 또 때로는 다만 지식인이란 이유로 소련에 의해 은밀하게.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인에겐 야망이 있었다.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대국의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문제였다. 제국이 되려면 국토의 식량과 자원이 한정된 이상 바깥의 것들을 가져올 수 있는 해외 통로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바다로 세계 시장과 안정되게 연결되지 않고서도 번영을 구가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지배권을 영구히 확보할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되려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광대한 영토가 필수적(p. 283)이었다. 히틀러의 눈에 마침 그런 나라가 보였다. 바로 소련이었다. 거기 있는 슬라브 민족을 모조리 제거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면 전쟁으로 인한 자국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자원 창고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히틀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오늘의 막역한 동지라도 얼마든지 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한다. 이른바 '독소전쟁'이 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속도가 문제였다. 당초 계획은 12주 안(p. 302)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질질 늘어졌다. 원체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은 이런 상황의 대비책을 전혀 세워두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독일군이 먹을 식량은 매우 부족해졌다. 이에 독일은 1933년에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자기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이 구축한 집단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강제적으로 굶겨죽인 것이다. 레닌그라드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도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여 탈출로를 봉쇄하고 그 안의 시민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위가 끝나는 1944년까지 무려 100만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p. 309) 이런 무자비함은 민간인에게만 행해지지 않았다. 소련인 전쟁 포로 또한 그 대상이었다. '독소전쟁' 동안 나치 독일이 만든 포로수용서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수용된 포로들의 삶을 끝장내버리는 것(p. 316)이었다.


 이러한 처사는 나치 독일이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인,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p. 319)


 이 논리는 독일인에게 한 번도 반박당하지 않았다. 대놓고 과오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들 얌전히 추종했고 수족처럼 움직였다. 더러는 하달받은 목표량보다 더 많이 살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히틀러가 머리가 되고 각 독일인들은 저마다 손 발 몸통 등이 되어 거대한 육체를 이룬 듯했다. 토머스 홉스가 국가를 비유한 성경 속 괴수 리바이어던을 묘사했던 그대로. 가히 '전체주의'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었다.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블러드랜드는 두 전체주의의 거인들에게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었고 육체의 부분이 되지 못하는 타자들은 죽음만이 허용되었다.




 애초에 이 거인을 태어나게 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인은 이념이 아니라 꼭대기에 자리잡은 한 개인의 욕망으로 움직였다. 그가 원하는 건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롭고 방해가 되는가에 대한 그의 규정 역시 모두의 규정이 되었다. 지금의 시선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치 독일의 '마지막 해결책'은 그래서 가능했다. 나치 독일은 패전의 기미가 짙어지자 더욱 유대인 대량학살에 박차를 가했다. 본래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훗날에 살길을 도모하고자 관대함을 보이기 마련인데 나치 독일은 거꾸로 나아갔던 것이다. 패색이 차츰 짙어질 때마다 마치 기를 쓰듯 한 명이라도 더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히틀러의 망상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할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그만큼 승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폴란드엔 베우제츠, 트레블린카, 소비부르에서 수용소를 빙자한 학살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건 식량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때때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멈춰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온전히 대량 학살 그 자체만을 위한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단 한 사람의 부조리한 망집이 탄생시킨, 오직 폴란드 외의 유대인 학살만이 목적인 장소. 유대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우리는 유대인이 수용소에 얼마간 있다가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유대인들만이 수용소에서 생활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바로 처형되었다고 한다.(p. 676))


 어쩌면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학살 때문에 유독 '아우슈비츠 수용소'만이 우리 뇌리에 각인되었고 오직 그곳만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안간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었고 그 정점에 달한 것이라 봐야 옳았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소련도 엄연히 독일과 대등할 정도로 대량 학살의 집행자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이미지가 없는 것은 소련은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것과 스탈린이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히틀러와 달리 필요할 때 자제할 줄 알았기(p. 686) 때문이다. 이러한 둘의 성향 차이가 결국 둘의 운명을 갈랐을지 모른다. 스탈린 역시 제국을 꿈꿨으나 이건 확장 보다는 바야흐로 점점 거세지는 서양 제국에 맞서 자기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지키는 것에 강박적이었다. 이것이 전후 폴란드를 비롯한 블러드랜드의 사람들에게 암울한 운명의 장막을 드리웠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대표하듯이, 체제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설령 같은 이념의 헌신자라고 할 지라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생애에 구상한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하는 걸 걱정했지만 스탈린은 누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를 염려했다. 전체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개인이라는 비유는 여기서도 연유한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글에서 개인을 자주 호명하는 것은 티머시 스나이더의 이 책 또한 그런 개인을 역사의 무대 위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에 동조해서다. 물론 그가 데려오고자 하는 건, 지금까지 역사의 어둠 속에 내버려졌던 개인이다. 두 전체주의 체제 사이에 끼여 번갈아가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당시 역사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그들은 이름조차 한 번 호명되지 못하고 망각의 흙더미 아래 묻혀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 흙을 모두 걷어내고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어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하듯이 호명은 부르는 대상에게 유의미한 실존을 가져다 준다. 그는 그렇게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꼭꼭 새겨두기 위하여. 비극적인 역사는 망각과 억압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런 상황이 찾아온다.(p. 714)

 그가 책 곳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희생자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혹은 그녀의 삶을 삽입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서 재현의 중심을 차지했던 가해자 개인들에 맞서 희생자 개인을 대조시킨다. 이는 내가 보기에 서로 대등한 개인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나 또한 그래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개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마땅히 그들에게도 히틀러, 스탈린에 대해 쏟는 것만큼 관심을 분여해야한다는 뜻으로.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이토록 개인적인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그것을 통해 블러드랜드의 비극을 저지할 대안을 슬쩍 내놓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건, 하나가 지배하는 거대한 몸체에 달라붙어 각자가 가진 고유한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가 자행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다. 


 개인의 위상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정확히 지적하는 대로 장차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자라날 싹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돋아나 있었다. 그 전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증유의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총력전으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은 물론, 경제와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의 구별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참전한 모든 국가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임했으며 그 압도적인 동원과 조직 속에서 개인의 의미는 미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예전엔 포로로 잡히면 부모나 형제에게 몸값을 받아 풀려날 수 있어서 군인 보단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거래 없이 오직 패배한 부대의 일부분이 되어 1차 세계대전 때 처음 생긴 포로수용소에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면서 속박되었다. 더구나 이 때 개발된 독가스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많은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사람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규모가 그랬던 것만큼 개인 하나를 식별할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개인은 그렇게 고유의 가치를 잃고 자기보다 훨씬 더 큰 것의 부분이 되어갔다. 전쟁의 성격이 사회 전체의 전면적 동원으로 달라져버렸기에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사람들을 필요할 때마다 차출할 수 있도록 애국심이든 민족주의든 이념이든 뭐든 다 이용해서 일원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발맞춰 개인들은 자신보다 자기가 속한 전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설득되거나 선동되었다. 이것은 흘러흘러 마침내 전체주의를 낳았다. 또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본질 보다 외피를 중시하는 것은 타인 또한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도록 이끌고 말았다. 


 한 마디로 각 개인 간의 거리가 모두 없어진 것이다. 한 몸이 되어 머리의 존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고 욕망하는 대로 욕망했다. 이제 그들의 눈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달라붙은 몸의 눈으로 보았고 다른 몸의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몸이 되었다. 너무 단순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참혹한 비극은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극을 또 언제든 양산할 수 있는 몸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 분리와 거리두기로 개인의 고유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달라붙었던 몸의 생각과 시각의 복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고와 시선으로 다른 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외부적 규정의 간섭이 없다. 오직 서로 함께 경험하면서 생성된 자신만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보고 느낀 것으로 층층이 이뤄져서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 이러면 아무리 힘있는 자가 자신의 규정을 강요해도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책 후반에서 확인한다. 전쟁 후, 블러드랜드의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에게 어떤 꼬리표를 갖다 붙일까 전전긍긍하며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고 스탈린의 손가락이 가리키자마자 충성의 증명으로 같은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점령자들이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 이쪽 저쪽에 달라붙기 바빴던 부역자들도 있었다. 모두 너무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어서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조자 그걸 붙잡을 용기를 못냈던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안전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진 못했다. 몰로토프처럼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조석변개하는 스탈린의 규정 앞에선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것이 궁극의 운명이라면 처음부터 그 길을 걷지 않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티머시 스나이더는 개인에 집중한다. 그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무이(絶代無二)의 주체들이며 단순히 희생자라는 범주에 넣어 뭉뚱그려서 말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p. 703)

 그래서 그가 사이 사이에 살아있는 희생자 개인의 삶을 누벼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겪은 비극과 느낀 참혹함을 감정적으로 공명까지 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단지 희생자의 리스트 속 한 줄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사랑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하여 더욱 그들의 삶을 무참하게 끝장낸 비정한 폭력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곱씹게 만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지워 사물로 만드는 일을 경계할 것이라 다짐케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기 전에 그가 아무리 불가해하더라도 헤아림의 노력을 거두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한 걸음이 모이고 쌓인다면 블러드랜드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p. 703)

 티머시 스나이더의 안내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단순한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과거의 참상을 막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걸 선연히 깨닫는다. 더구나 블러드랜드에서 비극을 가져온 것은 현재도 횡행하고 있기에 그가 재현한 역사와 그를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건 더욱 긴요한 일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 사건이나 최근 단지 아시아 여성이란 이유로 총격이나 구타를 가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이들은 요즘 들어 우익화가 날로 심화되고 타자에 대한 적대가 늘어가는 유럽을 보며 흡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블러드랜드의 비극은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 있지 않다. 사이드미러에 쓰인 글대로 정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며 타자에게 먼저 공존을 위한 대화를 건네는 작지만 더없이 소중한 노력들이 필요한 때다. 바실리 그로스만이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모두의 입에서 울려나올 때까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임을 알았다.(p.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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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 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딘가에서 전쟁 때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말을 보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지요 전쟁을 겪고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봐야 할 텐데... 이건 전쟁 때만 그래야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희선

희선 2021-05-1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로이 님... 우수작 축하합니다 기쁘시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