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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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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활약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에드거 월리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킹콩의 원안이 되는 극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트위스티드 캔들'은 1905년, '네 명의 의인'을 데뷔한 그가 13년 뒤인, 19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트위스티드 캔들'은 탐정 역할을 하는 티엑스도 등장하고 밀실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추리 소설 보다는 피카레스크에 속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무시무시한 악의를 내뿜는 '카라'라는 악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존 렉스맨이라는 성공한 미스터리 소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라의 흉계로 인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 출신의 카라는 엄청나게 부유한데다 명망있는 귀족이라 누구도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통해 돈도, 명예도 더이상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가 악당이라고 의심한다. 그가 바로 경시청 최고의 형사, 티엑스다. 소설은 마치 소나타 형식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두 번째 부분은 카라의 가련한 희생자가 된 렉스맨을 구하기 위한 티엑스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카라와 대결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수수께끼의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해명되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전개가 고전 범죄 소설의 형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줄리언 시먼스의 작가에 대한 평가 그대로 여러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비행기를 이용한 탈출이라는 꽤나 대담한 연출까지 선보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 전개와 탐정과 범인 사이의 선명한 선악 구도에 더하여 빠른 전개로 흡인력 있는 작품을 더 인상 깊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영국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구한 렉스맨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힌 카라의 동기가 흥미로운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누구나 할 것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렉스맨과 그 아내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로서는 꽤 이례적인 것으로 이로써 에드거 월리스는 현대에 일어날 범죄는 과거와 꽤 다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티엑스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불쌍한 눈 먼 맹수가 따로 없군." 티엑스는 답답하다는 듯 맨서스를 쳐다 보았다.

 "자넨 엄청난 범죄들이야말로 물질적인 욕망이나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저속한 인간들은 말이지, 맨서스. 아내가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우리 영국인이 지니고 있는 민족성이네.(p. 100 ~ 101)


 제목의 '트위스티드 캔들'은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양초를 뜻한다. 단순히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으로 곳곳에서 이기주의로 인해 타인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약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껏 유린하는 소위 제국이라 말하는 그 때의 강대국들은 거의 카라나 진배 없었다. 집요하고도 잔인학 악당 카라는 정말로 그런 나라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은 나처럼 고전 범죄 소설에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다. 여성에게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도록 협박하는 게 고작 키스라니, 사지 절단이 예사로 나오는 현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겐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인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공격이었고 범죄였던 키스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도 같이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침해하는 정도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그래!" 카라가 홀랜드 양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선 소곤거리며 희롱했다. "이제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만약 소리를 지르면 다시 키스할 거야, 알겠나?"(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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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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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인데,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잖아!'

  '그렇고 말고! 그동안 우리가 취향을 얼마나 억누르고 살았냐? 이제 우리가 좋아하는 쪽으로 원없이 써볼 때도 됐지.그것으로 화끈하게 피날레 해 보자!'


 그리하여 사촌 지간인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엘러리 퀸' 시리즈 3기의 마지막 작품인 '최후의 일격'을 썼다.



 때는 1958년.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엘러리 퀸의 신앙과도 같았던 이성은 그 신뢰를 잃었고, 언제라도 세계를 깡그리 파괴시킬 수 있는 핵무기 앞에서 금전이나 치정에 얽힌 살인 미스터리 따위는 한없이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시절. 이제 제임스 본드나 루 아처를 찾을 지 언정 아무도 명탐정에게는 의뢰하지 않던 시절에 엘러리 퀸의 아버지 만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다네이는 쇠락해가고 있는 탐정들의 존재를 보노라면 더욱 가없이 향수에 젖을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황금기인 1930년대로 돌아가 엘러리 퀸에게 3기의 멋진 커튼콜을 해주려 했다. 그건 거의 30년을 함께 해 온 지기를 향한 당연한 배려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엘러리 퀸이 가장 전성기 시절의 가장 전성기의 모습으로 퇴장할 수 있도록 미스터리 황금기 시절의 특징들을 '최후의 일격'에 모조리 가져왔다. 사건의 배경은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지 않은 폭설로 고립된 저택이라는 클로즈드 서클이 되었고 저마다 동기가 있는 한정된 용의자에 출생에 관한 비밀도 얽혀 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스터리라면 빠질 수 없는 암호문을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동요처럼 한문장씩 날마다 배달되도록 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앨런에게는 이미 얘기했었지만, 이 수수께끼에서는 흥미롭게도 12라는 숫자가 계속 반복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우리 일행은 열두 명이고요. 크리스마스 축제는 12일 동안 지내지요. 그리고 이 열두 명은 우연히도, 정말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열 두 별자리 중 각각 하나씩에 해당됩니다. 오늘 밤엔 선물이 도착했고, 함께 온 카드에 적힌 시 구절은 '12일의 크리스마스'라는 영국 캐럴을 패러디 한 것이에요! (p. 92)


 2차 대전 이후로, 라이츠빌 시리즈 이후로 찾아간 적 없었던 아주 전형적인 30년대의 공간으로 형제는 엘러리 퀸을 데려 간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니 마음껏 이성의 칼날을 휘두르라는 의미로. 과연 수수께끼는 범상치 않다. 용의자는 분명 저택 내의 인물인데 도대체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으며 매일 수수께끼의 시가 있는 선물을 보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까지 가세해 이중 삼중의 수수께끼 장벽이 펼쳐지지만 역시나 엘러리 퀸! 이성의 해머로 모든 수수께끼의 담벼락을 부셔버린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독자들에게 커튼콜을 하고 두 작가와 더불어 환희의 칵테일을 마시려 할 때쯤,


 "이것봐요!" 하면서 편집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두 손으로 허리의 양쪽을 잡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보세요들. 당신들만 생각하면 어떡합니까?

 아무리 마지막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끝을 내면 책이 안 팔린단 말입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세요?  탐정이 추리로만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걸 사람들은 믿지 않아요. 경탄하기는 커녕 억지스럽다고 여긴단 말이에요. 솔직히 독자들은 말이죠. 탐정의 성공을 바라지 않아요. 독자들이 정말 보고싶은 것은 탐정의 실패란 말입니다.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TV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서 시간 때울 요량으로 읽는 그들은 처참하게 망가지는 탐정을 보며 잠깐의 우월감에 젖고 싶어 한단 말입니다. 그 잘난 체하는 탐정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다는 것을 보고싶어 한다구요. 왜냐구요? 알만한 분들이 왜 이러실까? 그야 당연하죠. 지금의 세상은 스스로를 조소하거나 경멸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요. 희망이란 사탕 보다는 절망의 씁쓸한 수액이 더 나은 겁니다. 섣부른 낙관 보다는 익숙한 절망이 자신을 조금 더 버티게 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죠. 그러니 다시 써요. 우리에게 슈퍼맨은 필요 없어요. 독자들은 자신들과 똑같이 아프고 무기력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을 원해요. 리더인 영웅이 아니라 연민으로 연대할 수 있는 이를 말이죠. 솔직히 알고 계시잖아요? 마지막이라서 모른 척 한 것 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하지만 안 돼요. 당신들만 생각해서는. 난 이번에도 많이 못 팔면 실직할 참이라구요. 애가 셋인데 어떡하라구요? 그러니 다시 써요. 퀸이 패배하는 것으로. 패배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가 장담하건대 소송 폭탄을 맞게 해 드리죠."


 노인들은 전성기의 향수에 젖는 것만큼이나 말년에 주머니가 비게 되는 것도 두려워 한다.

 서슬 퍼런 편집자의 두 눈을 보면서 그들은 잠시 동안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퀸의 어깨를 위로의 손으로 몇 번 토닥여 준 다음 서둘러 타자기 앞으로 돌아가 결말을 다시 쓰기로 한다.


 하여 퀸은 샴페인 잔을 떨어뜨리고 그 잔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깨어진다. 똑같이 사건 해결에 실패하고 찾아온 로맨스의 기회도 날려버린다. 퀸이 쓸쓸히 등을 돌리고 '그래, 좋은 건 그리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라고 생각할 때, 노인들은 막 타자기로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참이다.


 타이핑을 끝냈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인들은 창을 보았고 하늘이 더 흐려진 것을 알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더이상 명탐정을 위한 햇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잠시 눈에 물기가 어렸다.



 주의 : 편집자가 나타난 뒤의 모든 부분은 전적으로 저의 상상임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최후의 일격'이 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한 퀸 시리즈는 둘의 공저라고 생각하고 이 '최후의 일격'은 사실상 그들이 같이 쓴 마지막 작품이었기에 마지막이라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의 눈의 물기는 함께 즐거이 명탐정의 이야기를 썼던 나날이 이제 끝났음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군요.

 참, 그리고 '최후의 일격'은 초역입니다.

 그리고 날개에 있는 앞으로 번역될 작품들 입니다.

 


 '수수께끼이 038사건'이 제대로 된 번역으로 나올 모양입니다.(아, 팬더추리걸작시리즈의 추억이여...)

 거기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QBI' 도 드디어 나올 모양이군요. 이것도 나온다면 초역입니다.

 아, 이런 저도 왠지 눈물이 나는 걸요... 부디 빨리 만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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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뽑기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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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에는 인력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이 인간의 이성으로 가늠조차 어려운 거대한 비극은 우리의 영혼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한 영혼의 필사라고 할만한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비극 안에서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 이유에 대한 '왜'와 대안을 위한 '어떻게'를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테어도어 아도르노가 2차 대전 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처럼.


 그것을 무엇보다 이번에 나온 미국의 여성 작가 셜리 잭슨의 두번째 단편집인 '제비뽑기'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49년에 나왔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담겨진 25편의 이야기들이 2차 대전이 남긴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여전히 전쟁이 남긴 절망과 아픔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을 때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읽으면 과연 그러할까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모든 단편에서 전쟁에 관한 것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안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지극히 사소한 일상적인 장면만 계속될 뿐이다. 이웃을 사귀고,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그 뿐이다.

 셜리 잭슨은  46년과 48년에 걸쳐 이 단편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47년에 알베르 카뮈는 2차 대전을 흑사병에 비유한 '페스트'를 썼다.) 그토록 시대의 어둠을 가져온 커다란 전쟁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작품이 세계 제2차 대전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비록 겉모습은 한없이 일상적일지라도 그 속에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시작에서부터 알 수 있다. 가장 처음에 소개되는 짤막한 단편인 '취중 대화'는 지금부터 우리가 읽으려는 25개의 단편들이 사실은 그러한 작업임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은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열일곱 살이에요. 큰 차이가 있죠."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 나이 무렵이었을 때...." 그는 지나치게 강조하며 말했다. " ... 여자애들은 칵테일이나 남자친구와의 애무만 생각했지."

 "그게 문제예요. 아저씨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면 현재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P.17)


 미래 역시 밝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열일곱 살의 소녀는 전쟁에 책임있는 과거의 어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를 망쳤다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해야 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물론 타자를 두렵게 여겼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 보다는 타자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편리하게 배척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주입한 프레임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타인에 대한 편견과 적대로 똘똘 뭉친 괴물과도 같은 우리의 자화상을 말이다. 감히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태도는 2차 대전을 낳았다.

 '제비뽑기'는 거창할 지도 모르지만 그 비극의 반복을 막기위해서 그런 때의 사람들이 가진 진실된 자화상을 밝혀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성찰의 동기를 주기 위한 단편집이다. 그것을 위해 셜리 잭슨은 '제비뽑기' 단편집을 모두 4부로 나누고 각각을 기둥 삼아 마치 정교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처럼 유기적(네 기둥이 차츰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으로 하나하나 파악해 나간다.



 첫 기둥은 이유에 관한 것이다.

 왜 우리는 타인을 그저 불안한 존재로 그리고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까?

 '취중 대화'에 뒤이은 두 편인 '유령신랑'과 '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은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비유적 묘사이다. 거기서 전통적인 타인에 대한 신뢰(유령신랑)와 환대(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는 배반당한다. 더이상 타인들은 내가 믿는 대로, 내 생각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득 실종되고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홀연히 나 자신의 존재까지 상실할 위험을 가져온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어지는 '결투재판'과 '빌리지의 주민' 그리고 'R.H 메이시와 보낸 시간'은 그 이유를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방의 의미인데, 셜리 잭슨의 작품에서 방이 가지는 의미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 그러하듯이 그 방을 소유한 자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편들에서 셜리 잭슨은 그 방의 주인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또한 아무리 바뀐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개인의 정체성이 더이상 고유하지 않고 마치 대량생산된 기성품처럼 언제든 교환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존재감의 축소가 타인에 대한 불안과 배척을 낳았다고 그녀는 아주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기둥은 현재다.

 첫 번째 기둥이 가져온 결과이자 정확히는 2차 대전을 가져온 궁극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역시나 처음에 나온 '마녀'는 두 번째 기둥에 담긴 이야기들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거기서 기차 안에서 꼬마가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는 자기 여동생을 토막내어 먹어버렸다고 태연히 말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타인이 이제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뒤이은 '이탈자','당신 먼저, 친애하는 알퐁스', '찰스', '리넨에 둘러싸여 보내는 오후', '꽃으로 꾸며진 정원', '도로시와 할머니와 해군들' 모두 그러하다.

 특히나 압권은 '이탈자'인데 이 단편의 주인공 월폴 부인은 '레이디'라는 개를 기르고 있다. 하루는 이웃집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레이디'가 담을 넘어와 자신의 닭을 잡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번 피 맛을 본 개는 전혀 막을 수 없으니 주인공에게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죽일 것을 내비친다. 놀란 주인공은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방도를 찾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없애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것도 너무나 즐겁게 말한다.


 월폴 부인은 생각했다. 상냥하게 대해야 해. 시골 기준으로 보면 저 영감이 나쁜 놈도 아니고 배신자도 아니야. 누구나 닭을 죽이는 개에 한 마디씩 하겠지. 그렇다고 저렇게 기뻐할 필요는 없을 텐데.(P. 111)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이탈자'는 이제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다. 용서도 없다. 다만 제거할 뿐이다. 같은 고백을 우리는 '꽃으로 꾸며진 정원'의 매클레인 부인에게서도 듣게된다. 그녀는 도시에서 시골로 갓 이사온 이방인이다. 그녀가 가진 도회적인 삶의 자취 때문에 그녀는 차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그러다 마을에서 배척당한 흑인을 정원사로 고용하자(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그녀 자신마저 소외되어 버린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말도 안 섞으려고 해요. 전에는 울타리 너머로 버턴 부인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함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죠. 그런데 이제는 '안녕하세요'라고만 대답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려요.아무도 우리한테 웃지도 않고 말도 붙이지 않죠."(P.188)


 뒤에 폭풍이 불어 버튼 부인의 나무가 매클레인 부인 집으로 쓰러지고 그동안 열심히 가꾸던 정원을 다 망쳐버렸는데도 버튼 부인은 한 번 쓱 보고는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단호히 닫아버릴 뿐이다. '당신과는 완전히 끝났다.'는 표현이다. 결국 매클레인 부인은 이렇게 쓸쓸히 말하게 된다.


 "이만 포기해야 할까요, 존스씨? 도시로 돌아가 정원은 완전히 단념하고 살아야 할까요?"(P. 190)


 개인이 가진 존재감의 축소는 이렇게 타인에 대한 배척을 가져왔다. 자신의 약점을 약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타인의 희생시킴으로써 보강한 것이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아전인수적인 태도는 급기야 2차 대전을 가져온 방아쇠가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세 갈래 길의 궁극엔 그것이 있었다.



 세 번째 기둥은 그러한 모습에 대한 질타다.

 여기엔 1부와 2부에서 셜리 잭슨의 분신들이 당했던 부조리에 대한 셜리 잭슨의 비판이 있다. '담화'에서는 정작 현실의 문제들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현란하기만 하고 복잡하게 만들뿐인 말과 이론만을 생산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그녀가 누구나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만을 작품에 담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에서는 타인(대프니 힐)을 비판하면서 자신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엘리자베스'는 '오래된 좋은 회사', '인형'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까지 이르는 일관된 주제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엷어진 존재감을 물질적 성공이나 자기보다 더 큰 권위에 맹목적으로 기대려는 것으로 강화하려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오래된 좋은 회사'는 오로지 남편의 권위에 기대서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아내들이 등장하며, '인형'엔 남편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아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서는 자기보다 더 많이 안다면 무작정 수용하고 보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이 정확히 이런 경로로 출현했는데 당시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국민들은 강력한 국가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으로 점점 희석되어지는 존재감의 불안을 지웠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셜리 잭슨은 세번째에 실린 단편들에서 그들과 아주 닮은 전형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냉소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타인들보다 더 잘났다고 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배척했던 이유조차 진실이라기 보다는 무조건적 추종에 불과했으므로 어리석음까지 더불어 공박한다.

 그 가장 통렬한 비판은 '인형'에서 아내가 당하는 박해를 목격한 여성이 참다 못해 분연히 일어나 복화술사인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경멸을 욕설로 표현하는) 인형의 빰을 세차게 후려치는 것에서 폭발한다. 마지막 단편인 '아일랜드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어요'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바탕되지 않는 동정심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받는 자에게 더한 굴욕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미국이 행했던 점령지에서 풀려난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시아 그리고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한 오만한 시혜자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노인(더러운 걸인으로 아처 부인의 방문 앞에서 쓰러지자 아처 부인과 마침 거기에 있던 이웃집 여인들은 그에게 식사를 마련해준다.)은 아처 부인에게 말했다. "제가 흔쾌히 마시기는 했지만 저라면 그렇게 형편없는 화이트와인을 손님에게 대접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부인."(P. 304)


 셜린 잭슨도 바로 이 말을 당시의 미국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억지춘향의 동정심이 아니라 받는 당사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도움을 말이다. 이렇게 세 개의 기둥을 경유하고 나면 드디어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기둥을 마주하게 된다.



 네 번째의 기둥은 경고다.

 만일 지금까지의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여전히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편견을 가지고 타인을 배척한다면 이번에는 바로 당신이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선명한 경고는 물론 '제비뽑기'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셜리 잭슨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 악습이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이어져온 전통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한 노인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보여준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P.397)


 여기에서 보듯이 워너 영감은 2차 대전 때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던 대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진실이라면서 태연히 쏟아낸다. 나중에 그는 무려 77년을 이렇게 해왔다고도 말하는데 그렇게 그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제비뽑기'가 그 기원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즉 '제비뽑기'는 오늘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맞닥뜨리게 될 비극이며 워너 노인은 그런 우리의 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비뽑기'는 비유하자면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결과다. 그런 한나 아렌트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악이란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제 우리가 타인의 뒷통수를 노리고 던졌던 부머랭은 다시금 돌아와 우리 자신을 노리고 있다. 네 번째의 단편들 중 '당연하지요'에서 타일러 부인이 문득 마주한 이웃의 독선적인 편견으로 인한 곤경이나 '소금기둥'에서 지금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곧 소금기둥처럼 허물어질 것이란 예감에 결국 자신의 존재마저 소멸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움에 빠진 여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러한 경고의 선명성은 아무래도 우리의 성찰이 시급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 같다.

 이렇게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건축물과도 같은 '제비뽑기'를 간략히 소개해 보았는데 더하여 개인적으로 '제비뽑기'가 큰 수확이었다는 것도 밝혀두고 싶다. 이유는 이러하다.



 그동안 셜리 잭슨은 사소한 일상에서마저 거기에 깃든 불안과 공포를 잘 잡아내는 작가로 유명했다. 또한 그것은 흔히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과 결부된 내적 성향의 반영으로만 여겨졌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것과는 어느 정도 단절된 작가로 생각되었다.(작가 자신이 비사교적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작가 자신의 이러한 모습은 앞서 소개한 '꽃으로 꾸며진 정원'에서 흑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매클레인 부인에게서 나타난다. 이러한 매클레인 부인의 곤경은 훗날 셜리 잭슨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에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몰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회적인 것과 단절된 작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번 독서를 통해 충분히 알게된 것이다. 셜리 잭슨이 민감한 더듬이로 그 어떤 작가들 보다도 사회적인 것과 예민하게 공명하는 작가임을 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을 진하게 우려낼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셜리 잭슨이었다.

 이는 또한 왜 지금의 우리가 그녀의 책들을 그저 한 때 유명했던 작품들의 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가진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거듭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단편들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곤경은 그들만의 곤경이 아니었고 매클레인 부인을 소외시켰던 이웃들이나 워너 영감 같은 존재를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South Park Season 12 Episode 2: Britney's New Look (2008)

 제목에 나오는 이름은 당시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브리트니 스피어스. 악명 높은 사우스파크 답게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고소 당하지 않았을까 염려될 정도로 대차게 굴욕적인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선사하는데 실은 그러면서 파파라치들과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끔찍한 관음증을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나중에 사우스파크의 주인공이 스타도 인격이 있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브리트니는 죽어야 한다고 합창한다. 알고보니 민주주의의 발달로 더이상 공개적으로 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미국인들이 잘 나가는 젊은 여성 스타를 하나 선택해 자살하게 만들어 그간 쌓인 자신들의 폭력성을 해소하려 했던 것.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를 폭력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관음증과 연결시킨 에피소드(전 국민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 죽는 불쌍한 브리트니)로 셜리 잭슨의 단편들이 사회적인 것과 연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나 역시 셜리 잭슨의 이야기를 읽다가 한 아이가 생각났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초등학생 아이의 실화다. 아이는 교회를 다녔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의 유명한 교회였다. 특히 부자가 많이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서 아이는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둘은 단짝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친구의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친구만큼이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웃으며 자기 별장에 놀러오라고 하기도 하고 친구가 어디 어디 유명 사립 학교를 다녔고 다닐 것인지 줄줄 알려주었다. 그러다 아이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아이가 말한 학교는 엄마가 예상한 유명한 사립 학교가 아니라 강북의 평범한 초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를 나간 아이는 단짝 친구가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걸 보게 되었다. 결국 아이는 엄마에게 말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렇게 매클레인 부인은 아직도 우리 곁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영혼들이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어린 영혼이라 할 지라도.

 아픔은 여전하다. 그런 의미에서 셜리 잭슨의 작품들은 확실히 현재형이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안을 야기하고 누군가가 기피되고 배척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녀의 이야기는 부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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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4-2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이 단편이죠? 시리즈를 쭉 읽다가 단편이라 엄두가 안나서 제쳤는데 리뷰를 더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좋은 평가 받는 작품이니까요 :)

헤르메스 2015-04-29 19:58   좋아요 0 | URL
네, 단편집이에요^ ^ 꽤 많은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래도 `제비뽑기`만은 꼭 놓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전 사실 그 단편으로 셜리 잭슨을 처음 만났고 그러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 매료되었는데요,(제가 좀 이 시기 여성 작가들에게 쉽게 매료되는 편이긴 합니다만^ ^) 읽으면 읽을수록 뭐랄까 유정 같은 것이 있어서 자꾸 뭔가 캐낼만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

2015-04-23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1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르메스 2015-05-01 06:11   좋아요 0 | URL
저도 실은 희선님과 그리 다르지 않았요. 요즘은 세상에 너무 실망해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런 걸 써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강하지요. 그러다가 달리 버틸만한 힘이 없다는 생각이 또 들어 쓰기도 하고 그래요. 이상하게 그래도 글 쓸때만은 뭔가 힘을 얻는 것 같더군요. 와, 십이국기를 일본어로 다 읽으신 건가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다 읽어서 아쉽다는 말 저도 어쩐지 알 것 같아요. 예전에 십이국기 다 읽었을 때 제가 그랬거든요^ ^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정말 뒷페이지 넘기기가 싫더군요. 그리고 원래 읽는다는 게 언제든 오독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에 그리 큰 아쉬움을 가지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저도 옛날 리뷰 읽어보면 이게 아닌데 싶어 화끈거리는 게 많더군요^ ^ 희선님 말대로 4월도 다 갔네요. 이제 겨우 하루 남았어요. 왜 이리 속절없이 시간만 서둘러 가는지ㅠ ㅠ 아쉽습니다.

(아, 이런! 희선님 댓글 맞는데 제가 댓글을 달 때 그만 실수를 했나 보군요. 제가 이렇게 좀 허당이에요. 이 댓글도 두번째 다는 건데 처음 것은 그만 로그인을 안하고 써버렸네요. 하하^ ^)

gunho 2019-02-21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이 너무 좋네요. 개인 블로그나 sns는 안하시나요?
 
재앙의 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정태원 옮김 / 검은숲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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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엘러리 퀸씨, 당신의 성생활에 대해 들려주시죠. 그런 게 있다면."


 '말타의 매'로 하드보일드를 탄생시키며 문학이 무엇보다 현실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던 더쉴 해밋이 엘러리 퀸을 두고 한 말이다.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소설에 많은 여자들이 등장하지만 늘 매력적인 독신남으로 나오는 엘러리 퀸이 그녀들중 누구와도 특별한 관계를 가지지 않음을 비꼬며 한 말이다. 한 마디로, 엘러리 퀸은 비인간적이며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사실 그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만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만 것이다. 전쟁은 탐정의 무기력을 입증하는 거대한 증거였다. 탐정은 아무리 어려운 범죄도 관찰과 논리의 힘으로 해결했다. 탐정의 눈부신 이성의 빛 아래에서 해결되지 않는 범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없었다. 그건 탐정 소설을 즐겨 벗했던 대중들에게 근대에 의해 태동한 이성의 힘을 신뢰하게 만들었다. 또한 그 이성이 바탕이 되어 움직일 역사의 진보도 믿게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뢰는 무참히 배반당했다. 독일의 민중이 거세게 나치즘을 지지하는 것을 보고 게오르그 루카치는 '이성의 파괴'라 불렀다. 그렇게 돌연 거대한 광기가 세계를 뒤덮어버렸다. 그토록 눈부셨던 이성의 빛은 삽시간에 꺼져 버렸다. 그건 탐정들이 더 이상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의 뼈저린 확인이기도 하였다. 탐정들은 자신들의 무기력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전쟁은 셜록 홈즈의 후예들도 모조리 아우슈비츠로 끌고 가 버렸다.


 이러한 탐정의 선두에 엘러리 퀸이 있었다. 관찰은 셜록 홈즈에게 한 수 접어야 할지 모르나 치밀한 논리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그만큼 그는 찬란한 이성의 빛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전쟁 앞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무기력을 절감해야했다. 그 어떤 탐정들보다 역사의 둔중한 주먹을 많이 맞은 그는 그동안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믿음은 그저 착각이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제 달라져야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다시는 이와 같은 광기의 전쟁을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길을.


 엘러리 퀸의 제3기라고 흔히들 말하는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렇게 태어났다. 말하자면 이는 엘러리 퀸의 뼈아픈 반성의 산물이다. 당연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엘러리 퀸은 뒤늦게 사건에 뛰어드는 존재가 아니다. 사건의 처음부터 함께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해결사 보다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더욱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건의 처음부터 그는 보고 쓴다. 더이상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의 모습은 그에게 없다. 심장이 없는 듯 보였던 차가운 논리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공감을 한다. 인간적인 공감을. 타인들이 왜 그러는지 현상 보다 그 동기를 더 헤아리려 한다. '라이츠빌'에서 엘러리 퀸은 무엇보다 따뜻한 심장을 지는 인간으로 나타난다. 더이상 그에게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을 찾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되도록 사건이 일으킨 아픔에서 치유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는 자신이 아는 진실을 묻어 둘 수도, 밝힐 수도 있는 인물, 그것이 바로 엘러리 퀸이다. 놀랍게도 그는 사랑도 한다. 이제까지 보여주었던 초식남의 모습은 '라이츠빌'에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엘러리 퀸은 더쉴 해밋의 저 비아냥 거리는 질문에 이 작품을 통하여 제대로 대답한 것이다. 나도 성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그것이 '라이츠빌'이다. 진정 성숙한 어른이 된 엘러리 퀸을 만날 수 있는 시리즈. 그 첫 작품이 되는 '재앙의 거리'는 '라이츠빌'이 간직한 모든 것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완전히 달라진 엘러리 퀸을 보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모두가 평가하듯이 '재앙의 거리'가 그 많은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작품 중에서 세 개의 베스트 안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터닝 포인트'를 너무도 선명히 드러낸데다 마치 얼마나 반성을 많이 했는 지를 보여주려는 듯 완성도와 깊이까지 나무랄 데가 없기 때문이다.


1942년에 나온 '재앙의 거리'의 미국 초판본 표지.

엘러리 퀸이 라이츠빌에서 임대한 주택이자 사건의 주된 배경이 되는 '재앙의 집'이 그려져 있다.


 소설 '재앙의 거리'를 처음 여는 챕터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엘러리 퀸, 미국을 발견하다.'다. 2차대전의 와중에서 엘러리 퀸은 마치 이제야 미국을 발견했다는 듯이 이야기한다. 아예 그 스스로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츠빌은 시골이다. 그는 지금까지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에 있었다. 드보르작은 미국 여행에서 도시를 체험하고는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활력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만큼 미국의 도시는 이성이 열어젖힌 '신세계'였다. 이성이 가져다 줄 진보의 표상이었다. 그 도시들 중 뉴욕은 가장 선두에 있었다. 엘러리 퀸은 그렇게 이성이 가장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었던 뉴욕에서 한적하고 다소 고립된 시골 '라이츠빌'로 온 것이다. 그 곳은 건국 초기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된 것 같은 그렇게 시간이 멈춰버린 곳이다. 바로 이러한 라이츠빌을 두고 엘러리 퀸이 '미국을 발견하다'라고 한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미국이라는 것을 재음미 해보겠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이성에 대한 맹신과는 다른 관점에서... 


 왜 그가 라이츠빌로 온 것일까? 그 이유는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여기서 장기간 머무르면서 소설 같은 걸 쓰기로 작정한 듯 하다. 부동산에 들러 장기 임대할 주택을 알아본다. 페티그루라는 중개업자가 한 집을 소개한다. 이 마을을 세운 라이츠빌 가문이 곧 결혼할 신혼 부부를 위해 만든 집이라 한다. 집을 둘러보고 마음에 들었던 엘러리 퀸은 계약하기로 한다. 한데 퀸이 소설가라는 걸 듣자마자 혹시 소설 쓰는 데 도움될 지 모르겠다면서 집에 얽힌 비밀을 말해준다. 그 집은 라이츠빌 마을에서 '재앙의 집'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집에 살려고 했었던 이들에게 하나같이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살려고 했던 신혼부부는 남편이 갑자기 사라져 그러지 못했고 그 뒤에 이 집을 임대하려던 사람은 갑자기 죽었다.


 미국 초기의 모습을 간직한 듯 보이는 라이츠빌에서 거주할 집은 이제 안전하지 못하다. 집은 재앙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이건 어쩌면 엘러리 퀸이 바라보는 현대의 미국인지도 모른다. 초창기 영국의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왔을 때, 그들이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 자유와 가족의 안전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러리 퀸은 '재앙의 집'을 통해 넌지시 반문한다. 결국 미국이 해왔던 것은 안전해야 할 집을 재앙의 공간으로 만든 것 뿐이지 않느냐고.


 그럼 처음부터 문제는 이 집에 있었던 거였구나. 엘러리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이 사건은 어디서든지 집과 연결되어 있다. 재앙의 집... 앨러리는 맨 처음 이 말을 만들어 낸 신문기자가 혹시 미래를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p. 177)


 엘러리 퀸은 이제 왜 지켜져야 할 집이 도리어 재앙의 공간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탐색한다. 이전과는 달리 따스한 심장을 지닌 관찰자로서...


 마치 역사를 복기하기라도 하듯, 3년 전 미스터리하게 실종되었던 남편이 돌아오고 내내 그를 기다렸던 애인 노라와 다시 결혼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원래 그들의 신혼집이었으므로 엘러리 퀸은 주저없이 양보하고는 라이츠빌 저택에 기거한다. 그러다 막내딸과 친해지고 우연히 그 막내딸을 통해 로라의 남편 짐이 썼으리라 추정되는 음모의 편지를 발견한다. 그 편지에는 아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도움을 여동생에게 요청하고 있었다. '라이츠빌'은 이런저런 소문들이 금방 확산되는 곳이기에(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있던 마을과 비슷하다. 이 역시 전후 탐정 소설의 한 특징이 아닐까 싶다.) 엘러리 퀸은 집안의 명예를 위해 일단 덮어두자고 말한다. 타자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엘러리 퀸의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편지에는 할로윈,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에 비소를 아내에게 먹이겠다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마스까지 그대로 노라가 비소를 먹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다 드디어 새해. 엘러리 퀸이 빈틈없이 짐을 감시하고 있는 와중에 짐이 노라에게 건네준 칵테일을 당시 이미 와서 함께 기거하고 있었던 짐의 누이동생이 대신 마시고는 그만 죽는다. 그리하여 수사는 시작되고 그동안의 짐이 보여준 수상쩍은 행동들과 결국 비밀로 묻어두었던 짐이 쓴 음모의 편지마저 드러나면서 그는 주요 용의자로 체포된다.


 '재앙의 거리'의 또다른 페이퍼백 표지. 중요한 인물들이 나와있기에 인용해 본다.

 위의 두 여자가 바로 노라와 짐의 여동생이다. 안경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이 짐의 아내 노라이고 칵테일 잔을 가져가려는 금발의 여인이 바로 죽은 짐의 누이동생이다. 그림은 새해에 있었던 그 사건의 결정적 장면을 나타내고 있다. 아래 철창게 갇힌 남자가 '짐'이다. 


 이게 '재앙의 거리'의 주된 사건이다. 이것만 읽으면 엘러리 퀸이 그다지 활약할 일이 없을 것 같다. 일단 범행이 예고된 데다 그 범인이 주된 용의자로 지목되고 또한 정작 엘러리 퀸 자신이 범행 당일 그 범인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결말의 해결은 '역시 엘러리 퀸이로군!' 할만한 것을 마련해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정작 추구하는 건 그 해결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소설의 작중 인물이 말했듯이 '광기의 40년대를 사는' 미국인들의 초상을 바로 가까이에서 보게 하는 데 더 주력하는 작품이다. 이는 막내딸 퍼트리샤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 드러난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엄마 친구들은 누구 하나 전화 한통 걸어주지 않고 뒤에서 험담만 해요. 엄마가 나가던 모임 두 곳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구요. 마틴 아주머니까지도 전화를 안 해요."

 "판사님의 부인 말이군요." 앨러리는 중얼거렸다.(p. 193)


 '재앙의 거리'는 그토록 눈부신 이성의 신세계라 여겼던 미국이 사실은 바로 가까이에서 통제할 수 없는 광기가 도처에서 거세게 숨쉬고 있는 곳이었음을 드러낸다. 집조차 안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재앙은 거기에 있었다. 이는 라이츠빌 마을을 건립한 라이츠빌 가문마저도 그 광기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렇게 미국 초기에 그들을 지탱해주었던 이성이 이제 더이상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재앙의 거리'에서 엘러리 퀸이 차지하는 위치는 그래서 이전과 달라졌고 그만큼 대안을 구현시킨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이성은 이제 범죄와 싸우지 않고 진실과 상관없이 부풀어 오르는 소문과 싸운다. 불안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은 소문들. 소설에서 소문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인상이나 정보들임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제대로 관찰하지도 않고, 헤아려 보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믿어' 버린다. 하지만 앨러리 퀸은 누구보다 많이 관찰하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소문의 주체들은 자신들 입장만 생각하는 데 비해서 앨러리 퀸은 관찰과 헤아림 모두 어디까지나 타자를 중심에 두고 하려고 든다. 그렇게 이 소설엔 소설에 표현된 그대로 '두 세계의 전쟁'이 있다.


 새롭게 변화된 '라이츠빌 시리즈'는 그 전쟁을 치르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그 전쟁의 와중에서 구현된 엘러리 퀸의 모습을 통해 더이상 재앙의 집이 아니라 진정한 집으로 만드는 대안을 찾으려 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바라본 '재앙의 거리'의 모습이지만 '라이츠빌 시리즈'가 미국이라는 것 자체를 질문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백하다. 이같은 변화에 대해 비아냥 거렸던 더쉴 해밋이 과연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알려진 바가 없어 추측밖에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어느 정도는 그래 퀸 당신도 이제는 제법 인간다워졌군.'하고 만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여기서 엘러리 퀸은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PS. 원래 새로 발간되는 '재앙의 거리'의 리뷰였는데 책이 검색되지 않아 구간에 남겼더랬습니다. 이제 검색되기에 여기에도 복사해 둡니다.(기본의 리뷰에 추천해 주신 분들이 계셔서 삭제는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중복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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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로라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비라 캐스퍼리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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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혹이란 말은 이 책을 위해 아껴두어야 했었나 보다.

 드디어 읽었다. 비라 캐스퍼리의 '나의 로라'. 범죄 소설이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던 1940년대. 거기에 대항하듯 힘겹게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한 세 명의 여성 작가가 있었으니 그녀들이 바로 '고독한 곳에'의 도로시 휴즈, 안타깝게도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로 더 유명한 마거릿 밀러 그리고 바로 이 비라 캐스퍼리다. 그래도 마거릿 밀러는 단편으로, 도로시 휴즈는 재작년에 나온 대표작 '고독한 곳에'로 만나봤지만 비라 캐스퍼리는 내내 미싱링크였다. 트로이카중 하나의 바퀴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으니 그 독서의 여정이 어쩐지 비틀거릴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오토 프레밍거가 영화로도 만들어 유명한 대표작 '나의 로라'가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그렇게 읽은 나는 감히 첫 문장을 저렇게 썼다. 하지만 진실이다. 이 책은 나를 매혹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아구타카와 류노스케의 '나생문'을 닮은 구성 때문도, 히치콕 감독의 걸작 '현기증'을 연상시키는 설정 때문도 아니다. 온전히 문장 때문이다. 남자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문장들. 하지만 한없이 보드라운 실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그보다 더욱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문장들. 여성 특유의 감수성이 아니라면 길어내지 못했을 언어들 말이다. 그것이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이마를 쳤다간 졸도할지도 몰라서 무릎을 쳤다. 남자의 하드보일드. 거기엔 과한 생략이 있다. 아, 대상이 편중되어 있다는 말을 빠뜨렸다. 거기의 생략은 편식을 한다. 풍경은 골고루 먹는 대신에 사람의 마음은 하나만 먹는다. 탐정인 자신의 것만. 남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남성의 하드보일드는 그걸 그대로 독자들에게 들려줄 마음 따위 없다. 독자들은 어디까지나 탐정(혹은 형사든)이 먼저 씹어준 것만 삼키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기새처럼 그가 주는 것만을 받아 먹었다. 그리고 자고로 하드보일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드보일드가 우리를 매혹시켰던 것은 말 그대로 하드 보일드, 삶은 달걀의 단단한 껍질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조석으로 변해도 그만은 그 껍질처럼 변하지 않아야 했다. 그 한결같음이 우리가 느낀 매력이었다. 작가들은 잘 알았다. 독자인 우리들이 정말은 어디를 보는지. 세상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탐정 자신이란 걸. 그러니 생략해야했고 생략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여성 작가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드는 우려가 있었다. 여성 작가들이 과연 그런 껍질을 줄 수 있는가였다. 거기엔 어떤 단호함이 필요했기에, 그걸 남자들만의 특성이라 지레짐작한 우리들은 때로는 이러다가 곰살갑게 구는 탐정을 만나는 게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도로시 휴즈와 마거릿 밀러는 그런 우리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남성들 이상으로 단단한 하드보일드를 쓸 수 있음을 그녀들은 증명했다. 그럼, 비라 캐스퍼리는?


 그녀는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남자들이 만든 규칙 따위 깡그리 날려버렸다. 우리들이 익히 알던 하드보일드(혹은 느와르든지 간에)는 산산이 흩어져 재가 되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짖궂은 미소 밖에는 없었다. 어안이 벙벙한 우리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혀 다른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주지!"


 그게 문장이었다. 남자의 탐정들은 언제나 닫아두었던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내면 심리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선 거기 생겨나는 풍경을 확 낚아채는 표현이 정말 뛰어났다. 청새치처럼 펄쩍 뛰어올라 그대로 가슴에 와 콕 박혔다. 둔탁한 기분 좋은 통증을 느끼게 했다. 압권은 로라의 내면을 말할 때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나는 일기다운 일기를 쓰지 못한다. 내 삶을 하루에 한 줄로 요약해 그달 16일에 아침상을 차린 것과 17일에 어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동급으로 만드는 것은 체질상 맞지 않는다." 혹은 "셸비가 너무 잘생겨서 다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다. 셸비의 외모가 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호해주어야 할 기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또는 어쩌면 비라 캐스퍼리 자신의 고백이 아닐까 싶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 하며.


 잘못한 쪽은 셀비가 아니라 나였다. 완벽한 생활을 완성하는 도구로 그를 이용했고,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사랑 놀음을 벌였고 물주의 존재를 온 세상에 알리려고 은색 여우 털 재킷을 입고 다니는 잘 나가는 창녀처럼 보란 듯 그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미혼으로 삼십 대를 맞이하려니 불안해서 그를 사랑하는 척,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끼는 척, 14K 금담뱃값을 선물하는 만용을 부렸다. 바람을 피웠을 때 속죄의 뜻을 담아 아내에게 난초나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남자처럼.

 그런데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그럴듯했던 포장이 모두 사라지자 우리는 수익률 좋은 새로운 품종을 탄생시키기 위해 선택된 두 종류 채소처럼 열정이라고는 없는 관계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연인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끝났지만(P. 253) 


 도무지 70년의 시차를 느낄 수 없는 현대적 감수성에다 세련된 표현들. 그래서 더욱 이런 범죄소설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였던 그것들인데 하지만 내 예상을 깨고 너무나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고 있었다. 같은 치정극을 아침 드라마 형식으로 보다가 뉴웨이브 스타일의 미니시리즈로 본 것과 같았다. 보쌈에 처음 김치를 넣었을 때와 같이 완벽하게 어울리면서 또 색다른 맛을 주는 새로움은 늘 환영받기 마련이다. 아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라면 매혹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문장만 가지고 얘기하는 건 비라 캐스퍼리에게 억울한 일이 될 것이다. 문장만으로 승부하는 작가구나 여기실 분들도 계실테니. 그러니 그런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서 비라 캐스퍼리가 새겨 놓은 것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이고 어디까지나 범인 찾기가 주종이니 스포일러를 피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시작해 본다.   


 괴테는 오직 여성적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구원이란 것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낙원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다. 실은 저 헐벗은 황무지로 내모는 것이다. 익숙함과 안정감을 주는 모든 세계가 해체되고 헐벗은 몸으로 텀블위즈가 굴러다니는 황량한 대지를 마주하는 것. 그것이 괴테가 말하는 구원이다. 이 때 그는 구약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여성 이브를 떠올리고 있다. 아담을 유혹하여 낙원인 에덴에서 매일의 힘겨운 노동이 없으면 생존마저 불가능한 척박한 땅으로 추방당하게 만든 이브. 그 때부터 여성은 불길한 존재였다. 성경만이 아니다. 그리스나 인도 신화를 비롯하여 동서양을 막론한 모든 신화에서도 우리는 자주 여성을 위협적이거나 불길한 존재로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여성들은 괴물의 외피를 둘러써야 했다. 한 때는 노래에 홀릴 경우 죽음만이 기다릴 뿐인 세이렌으로 또 어떤 때는 남자들로 하여금 인간을 포기하고 돼지가 되게끔 만드는 키르케로. 그렇게 그녀들은 늘 남성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며 유혹과 위협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사실은 그게 바로 여성들을 불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남성들이 군림하는 사회라는 배 저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편의 질서로는 규정할 수 없는 절대적 타자로서. 그래서 괴테는 구원으로 여겼다.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이기 때문에.

 그만큼 타자로서의 여성성 앞에서 남성들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고 괴물이 된 여성들의 강한 힘이란 그 무력함을 거꾸로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용맹한 오디세우스와 그 부하들이라 하더라도 솜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수동적으로 유혹에 저항하는 것만이 고작이었듯 말이다.


 그런데 그 무력감을 남성들에게 가져온 것이 바로 정체불명이었다. 누군가 말했다. 여성들은 영원한 수수께끼라고. 맞다. 그것이 여성들 힘의 원천이었고 불길함의 근원이었다. 피라미드 앞을 지키고 있는 스핑크스도 암컷이었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고 대답하지 못하는 이를 잡아먹었다.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들에 대한 공포를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디이푸스가 대답하자 스핑크스는 자살을 한다. 힘의 근원을 상실했다는 것의 과격한 표현이다. 물리친 오디이푸스는 왕이 된다. 정체불명의 절대적 타자인 여성성이 제거되었으니 남성들만의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을 썼다. 거기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흔히들 말하는 '젠더'로서의 여성이다. 여성의 존재는 분할된다. 거기엔 식민지가 된 영토와 독립적인 영토가 공존한다. 그 정확한 경계는 알 수 없지만. 젠더는 자살한 스핑크스의 무덤이요, 그렇지 않은 곳은 여전히 수수게끼로 남아있는 세이렌의 영역이다. 여성의 신체란 전쟁터다. 그 둘 사이의 전선이 나날이 새로 새워지고 있는. 그건 남자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매일 공세를 취한다. '여성답다'는 말의 폭력으로, 혹은 이미지로서. 태고적의 이야기와 똑같이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내면화시켜 길들이려는 상징화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지금 여성은 거꾸로 된 세이렌이다. 온갖 가짜 세이렌 노래 소리에 포박되어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세이렌.

 왕자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 공주.


 인어 공주는 그러한 젠더로의 여성, 과연 그 끝에는 뭐가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투명하고 가벼운 공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인어 공주의 언니들은 왕자의 심장을 찌를 칼을 쥐어주는 것이다. 존재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온전한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자 한다면 그 단호한 결별의 몸짓만이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로라'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로라는 살해당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 로라가 아닌 그 로라를 통해 만난 남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지금의 로라로 만든 레이데커와 주검으로써 로라를 처음 만나게 된 형사 맥퍼슨. 레이데커는 자신이 아는 로라를 말하고 맥퍼슨은 수사를 통해 알게 된 로라를 말한다. 그 남자들이 화자가 된 세상에서 로라는 죽어있다. 레이데커라는 남자에 의해 만들어졌고 맥퍼슨이라는 남자에 의해 파악된 로라는 공기로 변해버린 인어공주였다. 그런데 돌연 로라가 부활한다. 죽었던 로라가 살아서 돌아온 것이다. 알고보니 살해당한 건 전혀 다른 로라였다. 그렇게 두 명의 로라가 존재했다. 죽은 로라와 산 로라. 죽은 로라는 남자 없이는 못 살던 존재였다. 정확히 길들여진 세이렌, 수수께끼를 잃어버린 스핑크스였다. 하지만 산 로라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던 모든 이들의 생각에서 비껴나간 존재였다. 아무도 그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모든 남자들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였다. 그녀는 자유라는 의미를 남자와는 전혀 다르게 정의하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달라요.(...) 저에게 자유란 한심하고 쓰잘머리 없는 일상을 유지하고, 습관을 내 스스로 조절하며 주체적으로 사는 거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P. 151)


 이렇게 비라 캐스퍼리는 로라라는 '죽은 로라'와 '산 로라'로 신체를 양분한다. 지금의 여성이 정확히 젠더와 그렇지 않은 수수께끼의 영역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남성 사회에 포섭되지 않는 산 로라에게 비라 캐스퍼리는 의미 심장하게도 자신의 목소리마저 허용한다. 남자들만이 떠들던 그 세계에 그 대등한 참여자로서 산 로라는 자기 목소리로 당당히 말하며 그 순간 남자들의 세계는 붕괴된다. 말들은 거짓이 되고 권위는 억압으로 지혜로운 권고라 여겼던 것들은 모두 질투와 옹졸함의 소산이었음이 밝혀진다. 여성이 제 목소리를 얻고 자신의 두 발로 서려고 하자 남자의 세계가 초라한 민낯을 드러내며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마침내 인어 공주가 왕자의 가슴에 단도를 꽂은 것과도 같이.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남자의 항복 선언으로 끝난다.


 그 어떤 남자가 그녀를 향해 독기를 발산하더라도 그녀를 멸하지 못하리라(P.333)


 '나의 로라'는 이런 이야기다. 남성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여성 스스로 그 존재 가치를 보유하려면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그것도 40년대에. 그녀는 세이렌에게 진짜 자신의 힘을, 스핑크스에게는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인어 공주에게는 단검을 쥐어주려 한다. 이것은 그녀가 있었던 문학판이든, 영화판이든 글쓰는 여자들은 흔히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처럼 소외시키던 모든 남성 중심 세계의 경험이 낳은 결기다. 오래 시간이 지났지만 그 결기의 예리함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도 없다. 아직도 세이렌들을 기화시키려 드는 남성적 질서는 여전하므로.


 모든 여성이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가 아니라 '나의 로라'에 나오는 로라가 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다. '나의 로라'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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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4-02-15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여자한테 넘어갈 수 있지만 여자는 남자한테 넘어가지 않기도 합니다 이성의 유혹이라고 해야겠군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여성을 위협스럽고 불길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는 말을 보니 생각난 겁니다^^

이런 것도 생각나는군요 부부 가운데서 아내가 죽고 남편 혼자 남았을 때는 힘들어하고 오래 못 살지만,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남았을 때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오래 산다는 게

1940년에 앞으로 여성이 어떻게 될까 내다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그것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희선

헤르메스 2014-02-24 03:22   좋아요 0 | URL
희선님 죄송해요. 제가 그만 너무 늦게 확인했네요.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요. 저만 정신이 없는 것인지 ㅠ ㅠ...
'팜므파탈'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죠. '메데이아' 같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근대에 들어와 특별히 생기게 된 것도 아니고 이미 그리스 신화부터 그러한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은 있어왔죠. 그러다 기독교가 강력한 부권을 형성하고 있을 무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말기에 종교개혁 같은 것이 서서히 떠오를 때쯤, 그렇게 그 부권이 흔들릴 무렵 마녀로 부활했고 근대에 들어와서도 역시나 남성 질서가 흔들리던 대공황 시기와 더불어 팜므파탈 장르가 또다시 유행하게 되었죠. 질서가 흔들릴 때 잇달아 남성의 두려움을 대변한 존재들이 이렇게 부활한다는 것 자체가 제겐 흥미롭고 아마도 그 시각에서 '나의 로라'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



아이리시스 2014-03-04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뜸하시네요, 헤르메스님! 표지가 핑크라 저도.. 엘릭시르에서 출간되는 시리즈가 구색맞추기 좋아서 저도.. 리뷰 먼저 읽는것도 좋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헤르메스 2014-03-09 15:46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이렇게 찾아오시고 일부러 안부까지 물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최근에 이사를 하느라 준비에 뒷정리까지 마치느라 들어올 여유가 없었답니다. 거기다 이사 후유증으로 아직도 몸이 아파서요. 이사, 하면 할수록 점점 힘드네요ㅠ ㅠ
이번에 이사하면서 책정리를 다시 했는데 엘릭시르는 역시 함께 꽂아놓으니 보기가 좋더군요. 번역도 깔끔하고. 오래도록 계속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시리즈입니다^ ^

2014-03-13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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