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비뽑기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셜리 잭슨 지음, 김시현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2월
평점 :
불행에는 인력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이 인간의 이성으로 가늠조차 어려운 거대한 비극은 우리의 영혼을 쉬이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한 영혼의 필사라고 할만한 문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시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비극 안에서 문학은 자유롭지 못하고 그 이유에 대한 '왜'와 대안을 위한 '어떻게'를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테어도어 아도르노가 2차 대전 후에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처럼.
그것을 무엇보다 이번에 나온 미국의 여성 작가 셜리 잭슨의 두번째 단편집인 '제비뽑기'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1949년에 나왔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담겨진 25편의 이야기들이 2차 대전이 남긴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에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여전히 전쟁이 남긴 절망과 아픔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을 때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읽으면 과연 그러할까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모든 단편에서 전쟁에 관한 것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전혀 안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있을법한 지극히 사소한 일상적인 장면만 계속될 뿐이다. 이웃을 사귀고, 누군가를 방문하거나 누군가의 방문을 받고 사소한 대화를 나눈다. 그 뿐이다.
셜리 잭슨은 46년과 48년에 걸쳐 이 단편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47년에 알베르 카뮈는 2차 대전을 흑사병에 비유한 '페스트'를 썼다.) 그토록 시대의 어둠을 가져온 커다란 전쟁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 작품이 세계 제2차 대전의 강력한 자장 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비록 겉모습은 한없이 일상적일지라도 그 속에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되새기고 헤아리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시작에서부터 알 수 있다. 가장 처음에 소개되는 짤막한 단편인 '취중 대화'는 지금부터 우리가 읽으려는 25개의 단편들이 사실은 그러한 작업임을 알리는 선언과도 같은데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 열일곱 살이에요. 큰 차이가 있죠." 그녀가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 나이 무렵이었을 때...." 그는 지나치게 강조하며 말했다. " ... 여자애들은 칵테일이나 남자친구와의 애무만 생각했지."
"그게 문제예요. 아저씨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이 진정으로 무언가를 두려워했다면 현재가 이렇게 형편없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P.17)
미래 역시 밝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열일곱 살의 소녀는 전쟁에 책임있는 과거의 어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를 망쳤다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해야 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이다. 물론 타자를 두렵게 여겼어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 보다는 타자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편리하게 배척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주입한 프레임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여 타인에 대한 편견과 적대로 똘똘 뭉친 괴물과도 같은 우리의 자화상을 말이다. 감히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것이 오늘, 여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태도는 2차 대전을 낳았다.
'제비뽑기'는 거창할 지도 모르지만 그 비극의 반복을 막기위해서 그런 때의 사람들이 가진 진실된 자화상을 밝혀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성찰의 동기를 주기 위한 단편집이다. 그것을 위해 셜리 잭슨은 '제비뽑기' 단편집을 모두 4부로 나누고 각각을 기둥 삼아 마치 정교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처럼 유기적(네 기둥이 차츰 발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으로 하나하나 파악해 나간다.
첫 기둥은 이유에 관한 것이다.
왜 우리는 타인을 그저 불안한 존재로 그리고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을까?
'취중 대화'에 뒤이은 두 편인 '유령신랑'과 '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은 근원적인 상황에 대한 비유적 묘사이다. 거기서 전통적인 타인에 대한 신뢰(유령신랑)와 환대(어머니가 만드셨던 것처럼)는 배반당한다. 더이상 타인들은 내가 믿는 대로, 내 생각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문득 실종되고 속을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홀연히 나 자신의 존재까지 상실할 위험을 가져온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어지는 '결투재판'과 '빌리지의 주민' 그리고 'R.H 메이시와 보낸 시간'은 그 이유를 보여주는 단편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방의 의미인데, 셜리 잭슨의 작품에서 방이 가지는 의미란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이 그러하듯이 그 방을 소유한 자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편들에서 셜리 잭슨은 그 방의 주인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으며 또한 아무리 바뀐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개인의 정체성이 더이상 고유하지 않고 마치 대량생산된 기성품처럼 언제든 교환 가능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존재감의 축소가 타인에 대한 불안과 배척을 낳았다고 그녀는 아주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기둥은 현재다.
첫 번째 기둥이 가져온 결과이자 정확히는 2차 대전을 가져온 궁극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역시나 처음에 나온 '마녀'는 두 번째 기둥에 담긴 이야기들의 핵심을 집약하고 있다. 거기서 기차 안에서 꼬마가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는 자기 여동생을 토막내어 먹어버렸다고 태연히 말한다. 불안을 야기하는 타인이 이제 오로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이다. 뒤이은 '이탈자','당신 먼저, 친애하는 알퐁스', '찰스', '리넨에 둘러싸여 보내는 오후', '꽃으로 꾸며진 정원', '도로시와 할머니와 해군들' 모두 그러하다.
특히나 압권은 '이탈자'인데 이 단편의 주인공 월폴 부인은 '레이디'라는 개를 기르고 있다. 하루는 이웃집에서 온 전화를 받는다. '레이디'가 담을 넘어와 자신의 닭을 잡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한 번 피 맛을 본 개는 전혀 막을 수 없으니 주인공에게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죽일 것을 내비친다. 놀란 주인공은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방도를 찾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없애야 한다는 것 뿐이다. 그것도 너무나 즐겁게 말한다.
월폴 부인은 생각했다. 상냥하게 대해야 해. 시골 기준으로 보면 저 영감이 나쁜 놈도 아니고 배신자도 아니야. 누구나 닭을 죽이는 개에 한 마디씩 하겠지. 그렇다고 저렇게 기뻐할 필요는 없을 텐데.(P. 111)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 '이탈자'는 이제 아무런 배려도 받지 못한다. 용서도 없다. 다만 제거할 뿐이다. 같은 고백을 우리는 '꽃으로 꾸며진 정원'의 매클레인 부인에게서도 듣게된다. 그녀는 도시에서 시골로 갓 이사온 이방인이다. 그녀가 가진 도회적인 삶의 자취 때문에 그녀는 차츰 소문의 주인공이 되고 그러다 마을에서 배척당한 흑인을 정원사로 고용하자(오로지 그 이유 하나로!) 그녀 자신마저 소외되어 버린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말도 안 섞으려고 해요. 전에는 울타리 너머로 버턴 부인에게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함께 정원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죠. 그런데 이제는 '안녕하세요'라고만 대답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려요.아무도 우리한테 웃지도 않고 말도 붙이지 않죠."(P.188)
뒤에 폭풍이 불어 버튼 부인의 나무가 매클레인 부인 집으로 쓰러지고 그동안 열심히 가꾸던 정원을 다 망쳐버렸는데도 버튼 부인은 한 번 쓱 보고는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단호히 닫아버릴 뿐이다. '당신과는 완전히 끝났다.'는 표현이다. 결국 매클레인 부인은 이렇게 쓸쓸히 말하게 된다.
"이만 포기해야 할까요, 존스씨? 도시로 돌아가 정원은 완전히 단념하고 살아야 할까요?"(P. 190)
개인이 가진 존재감의 축소는 이렇게 타인에 대한 배척을 가져왔다. 자신의 약점을 약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타인의 희생시킴으로써 보강한 것이다. 이러한 타인에 대한 아전인수적인 태도는 급기야 2차 대전을 가져온 방아쇠가 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세 갈래 길의 궁극엔 그것이 있었다.
세 번째 기둥은 그러한 모습에 대한 질타다.
여기엔 1부와 2부에서 셜리 잭슨의 분신들이 당했던 부조리에 대한 셜리 잭슨의 비판이 있다. '담화'에서는 정작 현실의 문제들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그저 현란하기만 하고 복잡하게 만들뿐인 말과 이론만을 생산하는 지식인들을 비판한다. 그녀가 누구나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만을 작품에 담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에서는 타인(대프니 힐)을 비판하면서 자신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비판한다. '엘리자베스'는 '오래된 좋은 회사', '인형'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까지 이르는 일관된 주제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엷어진 존재감을 물질적 성공이나 자기보다 더 큰 권위에 맹목적으로 기대려는 것으로 강화하려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다.
'오래된 좋은 회사'는 오로지 남편의 권위에 기대서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아내들이 등장하며, '인형'엔 남편에게 온갖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아내가 등장한다. 그리고 '모호함의 일곱가지 유형'에서는 자기보다 더 많이 안다면 무작정 수용하고 보는 한 사내가 등장한다. 2차 대전을 일으킨 파시즘이 정확히 이런 경로로 출현했는데 당시의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국민들은 강력한 국가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으로 점점 희석되어지는 존재감의 불안을 지웠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셜리 잭슨은 세번째에 실린 단편들에서 그들과 아주 닮은 전형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냉소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비판한다. 결국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타인들보다 더 잘났다고 할 수 있는가 묻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배척했던 이유조차 진실이라기 보다는 무조건적 추종에 불과했으므로 어리석음까지 더불어 공박한다.
그 가장 통렬한 비판은 '인형'에서 아내가 당하는 박해를 목격한 여성이 참다 못해 분연히 일어나 복화술사인 남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경멸을 욕설로 표현하는) 인형의 빰을 세차게 후려치는 것에서 폭발한다. 마지막 단편인 '아일랜드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추어요'에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바탕되지 않는 동정심은 기만일 뿐이며 그것은 받는 자에게 더한 굴욕만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시 미국이 행했던 점령지에서 풀려난 유럽이나 우리나라처럼 식민지에서 해방된 아시아 그리고 제3세계 나라들에 대한 오만한 시혜자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노인(더러운 걸인으로 아처 부인의 방문 앞에서 쓰러지자 아처 부인과 마침 거기에 있던 이웃집 여인들은 그에게 식사를 마련해준다.)은 아처 부인에게 말했다. "제가 흔쾌히 마시기는 했지만 저라면 그렇게 형편없는 화이트와인을 손님에게 대접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요. 부인."(P. 304)
셜린 잭슨도 바로 이 말을 당시의 미국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억지춘향의 동정심이 아니라 받는 당사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도움을 말이다. 이렇게 세 개의 기둥을 경유하고 나면 드디어 마지막으로 네 번째의 기둥을 마주하게 된다.
네 번째의 기둥은 경고다.
만일 지금까지의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여전히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편견을 가지고 타인을 배척한다면 이번에는 바로 당신이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선명한 경고는 물론 '제비뽑기'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셜리 잭슨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그 악습이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 이어져온 전통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한 노인의 입을 통해 이 사실을 보여준다.
워너 영감이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미치광이들. 요즘 젊은 놈들은 입만 열면 불평불만이라니까. 조만간 동굴에서 원시 생활을 하자고, 더이상 일하지 말자고 주장해댈 거야. 어디 한번 그렇게 살아보라고 해. '유월에 제비를 뽑아야 곡물이 금방 익는다'고 옛 어른들이 말씀하셨지. 제비뽑기를 안 하면 별꽃과 도토리로 끼니를 때우게 될 거야. 매년 해왔다고." 노인은 성마른 어조로 덧붙였다.(P.397)
여기에서 보듯이 워너 영감은 2차 대전 때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했던 대중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그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진실이라면서 태연히 쏟아낸다. 나중에 그는 무려 77년을 이렇게 해왔다고도 말하는데 그렇게 그가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제비뽑기'가 그 기원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즉 '제비뽑기'는 오늘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맞닥뜨리게 될 비극이며 워너 노인은 그런 우리의 미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제비뽑기'는 비유하자면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결과다. 그런 한나 아렌트는 악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악이란 무엇보다도 타자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제 우리가 타인의 뒷통수를 노리고 던졌던 부머랭은 다시금 돌아와 우리 자신을 노리고 있다. 네 번째의 단편들 중 '당연하지요'에서 타일러 부인이 문득 마주한 이웃의 독선적인 편견으로 인한 곤경이나 '소금기둥'에서 지금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곧 소금기둥처럼 허물어질 것이란 예감에 결국 자신의 존재마저 소멸되어버릴 것 같아 두려움에 빠진 여인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러한 경고의 선명성은 아무래도 우리의 성찰이 시급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 같다.
이렇게 네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건축물과도 같은 '제비뽑기'를 간략히 소개해 보았는데 더하여 개인적으로 '제비뽑기'가 큰 수확이었다는 것도 밝혀두고 싶다. 이유는 이러하다.
그동안 셜리 잭슨은 사소한 일상에서마저 거기에 깃든 불안과 공포를 잘 잡아내는 작가로 유명했다. 또한 그것은 흔히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과 결부된 내적 성향의 반영으로만 여겨졌다. 그렇기에 사회적인 것과는 어느 정도 단절된 작가로 생각되었다.(작가 자신이 비사교적이었기에 더욱 그렇게 생각되었다. 작가 자신의 이러한 모습은 앞서 소개한 '꽃으로 꾸며진 정원'에서 흑인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매클레인 부인에게서 나타난다. 이러한 매클레인 부인의 곤경은 훗날 셜리 잭슨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 '우리는 언제나 성에 살았다'에서 더욱 극적으로 형상화된다.)
몰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회적인 것과 단절된 작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이번 독서를 통해 충분히 알게된 것이다. 셜리 잭슨이 민감한 더듬이로 그 어떤 작가들 보다도 사회적인 것과 예민하게 공명하는 작가임을 말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적인 문제의 근원을 진하게 우려낼 수 있는 작가. 그가 바로 셜리 잭슨이었다.
이는 또한 왜 지금의 우리가 그녀의 책들을 그저 한 때 유명했던 작품들의 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가진 문제들과 관련해서도 거듭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단편들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곤경은 그들만의 곤경이 아니었고 매클레인 부인을 소외시켰던 이웃들이나 워너 영감 같은 존재를 우리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이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South Park Season 12 Episode 2: Britney's New Look (2008)
제목에 나오는 이름은 당시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렸던 브리트니 스피어스. 악명 높은 사우스파크 답게 브리트니 스피어스에게 고소 당하지 않았을까 염려될 정도로 대차게 굴욕적인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선사하는데 실은 그러면서 파파라치들과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끔찍한 관음증을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나중에 사우스파크의 주인공이 스타도 인격이 있고 사생활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쫓아다니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브리트니는 죽어야 한다고 합창한다. 알고보니 민주주의의 발달로 더이상 공개적으로 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미국인들이 잘 나가는 젊은 여성 스타를 하나 선택해 자살하게 만들어 그간 쌓인 자신들의 폭력성을 해소하려 했던 것.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를 폭력이 되어버린 현대인의 관음증과 연결시킨 에피소드(전 국민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 죽는 불쌍한 브리트니)로 셜리 잭슨의 단편들이 사회적인 것과 연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인 것 같아 인용해 본다.
나 역시 셜리 잭슨의 이야기를 읽다가 한 아이가 생각났다.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초등학생 아이의 실화다. 아이는 교회를 다녔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서울의 유명한 교회였다. 특히 부자가 많이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거기서 아이는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둘은 단짝친구가 되었다. 그러다 친구의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친구만큼이나 상냥하고 친절했다. 웃으며 자기 별장에 놀러오라고 하기도 하고 친구가 어디 어디 유명 사립 학교를 다녔고 다닐 것인지 줄줄 알려주었다. 그러다 아이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냐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그러자 엄마의 얼굴이 일순 차갑게 변했다. 아이가 말한 학교는 엄마가 예상한 유명한 사립 학교가 아니라 강북의 평범한 초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다음 주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를 나간 아이는 단짝 친구가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걸 보게 되었다. 결국 아이는 엄마에게 말했다.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이렇게 매클레인 부인은 아직도 우리 곁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하는 영혼들이 이 세상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어린 영혼이라 할 지라도.
아픔은 여전하다. 그런 의미에서 셜리 잭슨의 작품들은 확실히 현재형이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안을 야기하고 누군가가 기피되고 배척되는 곳이라면 언제든지 그녀의 이야기는 부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