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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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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화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박정희에 대한 선망이다. 그의 출세작이자 가장 성공적인 팩션으로도 알려진 '영원한 제국'이 사실은 박정희를 비호한 작품이라는 것은 이제 알려질만큼 알려진 바이다. 그 때 이런 말을 듣고 설마했던 사람들도 다음에 그가 박정희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인간의 길'을 내놓았을 때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뭐, 이건 별로 감춰진 사실도 아니다. 그가 당당하게 자신의 그러한 선망을 공표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건, 굳이 과거의 전력을 들추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 보다는 그의 작품에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어떤 신념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또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작품인 이 '지옥설계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기 있기에 부러 언급하는 것이다.

 

  그 신념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보다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들을 선도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단순히 말해서 그에겐 '엘리트 주의'가 있다. 박정희에 대한 선망은 바로 그러한 신념이 구체적 모습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그는 철인에 의한 통치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라고 말했던 플라톤의 후계자다. 그 철인의 역할을 이 작품 '지옥설계도'에서는 '강화인간'들이 맡는다. 이름 자체에서 바로 그의 신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소설을 주로 이끌어가는 주체들인 강화인간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원래 태생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약물의 의해 인위적으로 강화된 인간이다. 그것도 몸이 약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죽게 된다. 그래서 강화인간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종의 '어 퓨 굿맨', 즉 '소수의 정예들'이라 할 만하다. 강화인간이 엘리트 주의가 신체화된 표현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단서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보통 인간들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들을 보여준다. 엑스맨으로 치자면 '매그니토' 급인 자우얼이란 중국인은 중국 정부에 의해 처음 강화 인간으로 육성된 자로 무지렁이 산골 농부 청년에서 삽시간에 세계 자본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천재가 된다. 또한 역시 액스맨으로 치자면 '프로페서 X'라 할 수 있는 한국인 이유진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구나 그는 집단 최면을 걸 수 있는 능력도 있다. 구태여 이 둘을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에 비유한 것도 사실 이 둘이 그 둘과 비슷한 능력 그리고 성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자우얼은 매그니토가 자력의 힘으로 금속을 마음대로 움직이듯이 세상의 돈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에겐 야망이 있는데 그건 강화인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다. 능력이 떨어지는 약한 인간들이 강화인간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건 매그니토의 신념 그대로이고 또한 그가 오로지 외부적인 것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자우얼 역시 돈이라는 외부적인 것 밖에는 못 움직인다. 반면 이유진은 그야말로 '프로페서 X' 다. '프로페서 X'가 텔레파시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마음을 움직이듯이 그 역시 그러하다. 또한 뮤턴트와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오로지 지배만을 고집하는 매그니토에 반발하여 인류와의 조화와 공생을 추구하는 '프로페서 X' 처럼 이유진도 그것을 추구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자우얼에 반대하여 강화인간을 주축으로 하는 '공생당'을 만든다. 그 공생당의 핵심 맴버이기도 한 캘빈에 따르면 공생당은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한다.

 

 

 "천만에, 우리의 관심은 오직 행성에 있어. 인류의 대다수가 가난해졌고 자존심과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렸어. 지구 환경은 점점 악화되고 행성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지. 그런데도 이 행성의 미래에 관한 결정들은 어떤 정부보다도 많은 돈을 주무르면서 돈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인간들, 선거에 의해 뽑히지도 않는 인간들에 의해 내려지고 있네. 우리는 이 구조를 바꾸려는 거야."(P. 49) 

 

 이 말을 일부러 인용한 것은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왠지 나는 여기서 왜 이인화가 강한 소수에 의한 지도체제를 원하는지 그 이유를 보게되는 것 같다. 이 말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자본가 계급에 대한 원망이다. 바로 이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현재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 자체에 대한 경멸이 거꾸로 그 자본가 계급을 발 아래 두고 마음대로 휘둘렀던 박정희에 대한 선망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가 싶은 것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그렇게 크게 이 자우얼과 공생당 그리고 강화인간을 제거하고 싶은 인류의 대립 구도로 전개된다. 이것은 그야말로 엑스맨적 구도와 흡사하다. 물론 이 소설은 강화인간들이 전면에 나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당의 설립자 이유진이 살해된 이유와 그 범인을 추적해가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엑스맨에 있어서는 지배냐 아니면 조화냐의 구도였지만 '지옥설계도'는 자본과의 타협이냐 아니면 새로운 가치 질서의 수립이냐의 구도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그런데 왜 제목이 하필이면 '지옥설계도'일까 궁금하실 것 같다. 사실 제목의 지옥은 진짜 지옥은 아니다. '매트릭스'처럼 가상 세계의 지옥이다. 먼저 왜 이런 세계가 등장하게 되었는지 말하는게 순서일 것 같다. 이 세계는 이유진이 죽을 때 만들어졌다. 앞서 이유진의 능력에 대해 말했듯이 그는 집단 최면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은 의식적으로 뿐만아니라 특히나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발휘되기도 한다. 그렇게 이유진이 살해당할 때 그의 능력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어 버렸다. 그런데 공생당의 강화인간들은 강한 텔레파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두 이유진의 능력을 수신해 버렸다. 그게 의식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기에 이유진의 집단 최면 능력을 텔레파시로 수신받은 공생당의 강화인간들은 모두 그 정신이 이유진이 만든 최면 세계에 갇혀버린 것이다. 즉 식물인간 같은 처지가 되어 정신만은 이유진이 설계한 최면 속 세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 세계의 이름이 바로 '인페르노 9'이다. 영원한 꿈만 꾸는, 그렇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들을 다시금 깨우기 위해서는 그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열쇠가 필요하다. 이유진은 미리 그 열쇠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지옥설계도'다. 소설은 이렇게 이유진을 죽인 이유와 범인과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지옥설계도'를 찾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제목에 지옥설계도가 전면에 나온 것은 사실 이 소설이 인터넷 게임인 '인페르노 9'을 위해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후기에 있는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과 게임이 동시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 게임의 설정이 어떠하고 추구하는 세계관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프롤로그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아예 '인페르노 9'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삽입되어 있는데 게임에 구현될 세계가 대략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게 될런지 짐작케 한다.(수십페이지에 걸쳐 인페르노 나인의 연대기를 말해주는 부록까지 있다.) 그렇게 게임을 위해, 게임과 융합된 소설이기에 제목이 '지옥설계도'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왜 일부러 저런 복잡한 설정으로 굳이 인페르노 나인을 끌여들였는지 이해가 된다. 공생당 당원들이 집단 최면으로 인페르노 나인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한 마디로 우리가 온라인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일종의 은유다. 이렇게 한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인페르노 나인이 그냥 가상세계가 아니라 게임적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굳이 게임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 참여하는 자들의 면면 때문이다. 게임적 세계임을 드러내는 이 '인페르노 나인'엔 과연 누가 들어가는가? 강화인간들이다. 보통 인간들 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들만이 들어간다. 또한 그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자본으로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려하는 자우얼에게 맞서 공생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지구를 구원하려는 자들이다. 작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강한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들. 그들만이 인페르노 나인에 참여할 수 있다. 이만큼 말하면 눈치채셨을 것 같다. 맞다. 작가는 게임에 참여하는 자들의 존재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굳이 인페르노 나인에 들어가는 절차를 복잡하게 설정하고 강화 인간이라는 존재들을 가져온 것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인류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존재들은 소수의 정예들 뿐이다.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능력으로 무장한. 인페르노 나인은 그런 자들만이 올 수 있는 세계이다. 그러니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말라!'

 

 '지옥설계도'는 이 외침을 위한 소설이다. 여전한 엘리트 주의와 엑스맨과 차이나는 구도 그리고 강화인간과 인페르노 나인의 설정은 복잡하게 뒤엉켜 '오늘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기존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가치관만이 가능하다'라는 것을 부르짖으며 여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그가 게임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그건 뭐 당연하지 않을까? 아직도 우리에겐 게임에 대해선 부정적 시각들이 지배적이니까. 게임은 유희의 마당이요 현실 도피의 통로요 오로지 시간만 낭비할 뿐인 백해무익의 터전이니까. 셧 다운제가 이 모든 부정적 시각들을 체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필요했을 것이다. 게임을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는 통로가. 플레이를 하는 데 있어 당당해질 수 있는 이유가.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이렇게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시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게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사실 나는 게임에 그다지 부정적이지도 않고 저번 '어번던스' 리뷰할 때 썼던 것처럼 게임이 지금 현실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얼마든지 새롭게 보완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옥설계도'가 이러한 취지인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지옥설계도'도 엄연한 소설인 이상 그것이 얼마나 충실히 구현되어 있는지 또는 설득력있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지는 또 달리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작가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지옥설계도'가 좋은 소설인가 아닌가의 문제뿐입니다' 그리고 '좋은 소설은 어떤 사회 속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한 사람 인간의 진실된 모습이 그려져 있는 소설'이라고.

 

 명시한 작가 자신의 좋은 소설에 대한 정의에 비추어 말하자면 그렇게 좋은 소설로 보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부대끼는 한 사람의 모습들은 이유진의 죽음을 추적하는 국가정보원 김호 그리고 공생당의 강화 인간들인 이유진, 새라 워튼, 벤, 준경 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열된 어느 인물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는 진실된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짧고 때로는 다른 에피스드들이 끼어들여 산만해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갈등 혹은 고뇌에 몰입할 여지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엔 이 소설이 너무 디테일하다는 것도 한 몫한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리얼리티를 보다 충실히 하려고 그랬겠지만 정보 기관이나 세계 정세 또는 경제 지식 혹은 이런 저런 이론들이 너무나 세세하게 나열되어 있어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인물들의 감정 동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에서 진행되는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그러니까 독자들이 이야기적 흐름을 잡을 수 있게) 순서로 나오지 않고 더러는 마치 두더쥐잡기 게임에서 튀어나오는 두더쥐처럼 나온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산만하게 나와서 더욱 몰입이 방해되었다.(사실 그래서 이 소설을 몇 번이나 리와인드 했는지 모른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라고 여겼던 것은 정말로 작가가 공생당이 말하는 가치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새라 워튼의 이야기는 작가가 그것을 믿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지만 후반에 밝혀지는 범인에 대한 술회에서는 어쩐지 스스로도 그런 것을 불신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과도 관계되기에 이런 믿음에 대한 통일성은 꼭 지켜져야 할 것 같은데 읽다보면 어떤 혼돈과 망설임의 지점들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소설을 소화시키기 어렵게 만들었다. 좀 더 분량을 늘이더라도 인물들의 고뇌가 충실히 드러날 수 있는 긴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보다 유기적으로 결합될 수 있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게임과 동시에 진행하느라 어려웠을지도 모르고 그의 말에 따르면 눈깜짝할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라니 어쩔 수 없이 잉태하게된 부족함 같기도 하다. 게임을 전혀 새롭게 인지시키려는 시도 자체는 좋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이 소설을 쓰게 한, 그가 온라인 게임에서 느낀 게임 참여자들의 헌신적인 순교자들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제대로 공감시키기 위해서라도 보다 긴 시간을 두고 차분히 숙성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더욱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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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0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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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6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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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7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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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0 0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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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을 기다리며 필립 K. 딕 걸작선 9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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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 봐...'

 이건 커트 보네것의 말이지만 누군가 필립 K 딕의 1966년 작품, '작년을 기다리며'를 읽고난 뒤 들었던 기분을 딱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렇게 말하겠다. 그건 이 작품이 내게 무엇보다 '힐링'이었기 때문이다. 필립 K 딕이 이 책에서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비록 이 책이 66년에 나왔고 지금은 무려 47년이 지난 시점이긴 하지만 내게 딱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그런 힐링의 힘이 간직되어 있을 줄은 몰랐고 정말 우연히 읽게 된 것인데 마치 나에게 주려고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 양 얻게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궁금하실 것 같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내가 받은 힐링의 느낌을 충실히 전하는데 바쳐야 할 것 같다. 때문에 아무튼 일단은 내 자의적으로 끌고 가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 필립 K 딕이 소설의 마지막에 주인공 에릭에게 왜 그런 결단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필립 K 딕의 소설을 즐겨 읽으면 알겠지만 딕은 언제나 자신의 소설 속에 쓰던 당시 자신의 처지를 투영하기를 좋아한다. 딕의 소설의 묘사되는 부부관계가 대부분 그리 원만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당시의 딕 자신이 그리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또한 이 작품을 비롯하여 다른 작품 곳곳에 나오는 마약을 통한 기묘한 체험도 모두 자신이 직접 흡입한 LSD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 때문에, 이건 필립 K 딕의 소설을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팁이기도 한데, 사실 필립 K 딕의 소설은 그것을 쓸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고 읽는 게 더 좋은 것이다. 아무튼 그 정도로 필립 K 딕의 자전적 체험이 소설 속에 눅진히 깔려 있기에 이런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필립 K 딕의 소설은 그가 상처받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현재를 어떻게 관통해 나갈 것인가 그 해법을 스스로 찾아보는 여정이라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쓸 때의 딕의 상황 때문에 더욱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 때의 딕 상황은 역자 김상훈의 후기에 그 상황이 잘 나와 있는데 그걸 여기에 다시 인용해 본다.

 

  딕이 본서 '작년을 기다리며'를 집필한 것은 히피운동이 세계 청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노골화되던 1963년의 일이었다. 사생활 면에서는 세 번째 아내인 앤과의 결혼 생활이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약물 과용에서 비롯된 극심한 울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최악의 시기이기도 했다. 딕은 각성제인 암페타민을 '연료 삼아' 하루에 A4용지로 60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지만 워낙 박한 고료 탓에 생계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먹고 살기 위해 또다시 암페타민에 의존하며 글을 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졌다.(P. 402)

 

 이 작품을 다 읽고 이 글을 읽으면 작품의 모든 내용이 바로 이러한 미국의 상황과 그 때의 딕 처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란 걸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에서 느껴지는 딕의 상황은 그야말로 '악순환' 혹은 '막다른 골목'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데 소설 '작년을 기다리며'의 주된 분위기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일단 소설의 모든 관계들은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주인공 에릭은 아내 캐서린과 이혼할 지경에 이르고 지구는 현재 우주  전체를 두고 싸우는 지구 보다 훨씬 문명이 발전한 두 외계 종족간의 싸움에 휩쓸려 있다. 그 두 외계 종족이란, 하나는 인류의 먼 조상이 되는 릴리스타 종족이고 다른 하나는 곤충과 닮은 리그라는 종족이다. 물론 지구는 자신의 조상이 되는 릴리스타 편에 서서 리그인들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에릭이 아내 캐서린을 믿지 못하게 되듯이 지구 역시 자신의 우방인 릴리스타를 믿지 못하게 된다. 릴리스타가 전쟁에 미온적으로 참여하는 지구를 못마땅하게 여겨 틈을 보아 강제적으로 합병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계들은 모두 믿음을 잃고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 그래서 그 관계를 이어가야할 책임이 있는 존재들은 모두 병적으로 죽음에 집착한다. 관계를 완전히 없앨수도 없고 또 계속하다니 견딜수도 없고 해서 스스로를 파멸시켜서 그로 부터 해방되려는 것이다.

 이렇게 남편 에릭은 도저히 캐서린으로 부터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자살을 원하고 지구의 최고 권력자 지노 몰리나리는 빠져나올길 없이 점점 악순환만 가중되는 지구 운명에 대해 책임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에릭과 몰리나리는 딕의 당시 모습을 고려한다면 그대로 딕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그건 애커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현실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더욱 과거의 향수에 젖고 싶은 딕의 마음을 체현한 분신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에릭이나 몰리나리 못지않게 악순환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릭이 느끼는 결혼의 고통이나 몰리나리가 안고 있는 지속의 막중한 책임감은 당시 딕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어려움을 둘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은 딕의 분신들이며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살을 원하고 있음은 그 때의 딕역시도 죽음으로써 해방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나 작품 속 지구의 상황은 그대로 당시 미국과 베트남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딕은 릴리스타와 같은 미국의 개입이 순전히 베트남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님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작년을 기다리며'는 당시 자신의 처지와 미국의 당시 상황등 어디까지나 현재를 바탕으로 직조된 견직물이었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서 악순환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처한 상황을 해결하려는 모든 노력은 사실 당시 그와 똑같은 악순환에 빠져 있던 딕이 당시의 곤경으로 부터 헤어나려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한 번 흡입하기만 하면 바로 심각하게 중독되어 버리는 무서운 마약이지만 과거나 미래로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하여 지금 지구가 처한 상황을 해결할 비책도 되는 약, JJ-180 이다.

 

 왜 여기서 마약이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그 때의 딕이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이 '암페타민'이라는 마약이었음을 볼 때 쉽게 이해된다. 이렇게 딕의 실제 삶을 알고 읽으면 설정의 많은 것들이 이해된다. 그가 암페타민을 통해 그래도 고료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듯이, JJ-180 은 처음엔 그저 무서운 무기였으나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처음 그저 죽기만을 바랐던 에릭은 그 약으로 이제 자신이 뭔가 타인에 대해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독자가 되는 걸 무릎쓰고서라도 그 약을 먹고 시간을 이리저리 오가며 지구를 구할 방도를 찾아 다닌다. 다시 말해 그 때의 에릭에겐 유일하게 그 약만이 삶을 계속하게 만드는 희망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건 현실의 딕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오로지 암페타민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에릭이 JJ-180 에 걸었던 희망은 그대로 딕이 암페타민에 걸었던 희망이었다. 그는 간신히 버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베트남에게 개입했고 딕의 상황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JJ-180 역시도 이 악순환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에릭이 느꼈던 좌절은 그대로 딕의 좌절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도 현재에서도 구원의 통로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결국 막다른 골목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젖히기 위해 몰리나리는 스스로 죽는다. 그렇다면 에릭도 그래야할까? 소설의 마지막은 마치 점점 거세어지는 죽음의 유혹과 싸우는 딕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딕의 마음에 떠오르는 수많은 망설임들은 소설 속에서는 에릭이 분신으로 나타나서 이런 저런 선택을 강요한다. 거기엔 결국 마약 중독으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내 캐서린을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분신도 있고 지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벗어버리고 그저 자기 인생에만 열중해 살아가는 분신도 있다. 아마 이건 모두 그 때 딕에게 들렸던 유혹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끝내고 자유로워져라' 아니면 '미국이 베트남을 깽판치던 말던 무슨 상관이야? '네 인생이나 잘 챙겨!' 하는 등등의 육체의 죽음 혹은 영혼의 죽음을 부르짓는 목소리들 말이다. 이러한 수많은 유혹과 망설임은 더욱 그의 신경을 혹사시켰고 그래서 어서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제목 '작년을 기다리며'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로 돌아가고픈 딕의 염원을 절박하게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구원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남은 건 몰리나리가 선택했듯 죽음 밖에는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자살하지 않는다. 인생에 짐만 되니 제발 아내 캐서린을 포기해 버리라고 미래의 자신이 간곡하게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절망하지 않는다. 포기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어디에도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싸워 나가리라 생각한다. 식물인간이 된 캐서린과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지구지만 먼저 나서서 껴안으려 한다. 왜? 도대체 왜?

 

 이런 것들조차도 살려는 굳건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브루스의 말이 옳았다. 이것들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태양과 하늘 아래에서 미미하게나마 자기 자신만의 조그만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뿐이며,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한 요구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수레들이 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한 자리에 머물러서 티화나의 쓰레기가 널린 골목에서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저 양동이 속으로 피신한 존재에게는 아내도, 직업도, 아파트도, 돈도 없고, 그런 것들과 조우할 가능성조차도 아예 없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에서, 저 수레가 자기 존재에 부여하는 가치는 나보다 훨씬 더 높다.(P. 391) 

 

 바로 여기서 에릭이 왜  다시금 삶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하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브루스의 작은 수레 장난감을 보면서 에릭이 깨달은 것은 '저렇게 작은 것도 살려고 하는데 왜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진 내가 포기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국 에릭은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지속이야말로 생명이 가진 모든 것의 의무라는 걸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의 자기 증명임을 믿는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싱겁다. 그동안 보여준 절망의 크기에 비해 여기서 가지게 된 삶의 의지는 다소 미미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의 삶은 그냥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딕이 말하는 삶은 일종의 감각이다. 그것도 고통과 대면하며 시련과 싸움으로서 얻어지는 감각이다.

 

  무엇을 해도 합법이고 무엇을 해도 가치 있는 일은 생겨나지 않는 도시. 에릭은 생각했다. 그런 도시에서는 인간은 어린 시절로 억지로 끌려가게 된다. 블록 쌓기 완구나 다른 장난감 따위에 둘러싸인 채로, 전 우주가 손에 닿는 곳에 있었던 시절로. 이런 자유의 대가는 크다. 성숙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P.371)

 

 아내를 저버린다는 행위는, 나는 그런 현실을 견딜 수가 없어. 나만의 특별히 쉬운 상황이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 하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P. 395)

 

 

 그가 말하는 삶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여기서 잘 나타난다. 그는 오히려 삶은 시련과 불안정 속에 처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를 통해 성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실 속 화초가 되기보단 들판의 잡초가 되는 것. 그것이 딕이 바라보는 삶이고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진 존재의 자기 증명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싸우는 가운데,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닥쳐진 죽음 앞에서 끝까지 삶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진정한 삶은 도래할 것이라 그는 믿는다. '작년을 기다리며'는 그런 책이다. 어려울 수록 더 환영하라는 책이다. 왜냐하면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더욱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딕의 솔직한 내면이 짙게 투영된 소설이었기에 마지막에 찾은 이 각오가 그래서 더 마음 찡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의 힐링 또한 그렇체 찾아왔다. 당시의 현실에서 딕이 느꼈던 절망, 소설 속에서 에릭이 느꼈던 좌절감을 나 역시 지금 내가 처한 현실에서 느끼고 있었다. 딕과 에릭이 방황했듯이 나 역시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다녔다. 딕과 에릭이 가장 많이 떠올렸던게 죽음 혹은 회피였듯이 나 역시 포기나 타협 이런 말들을 떠올리고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비슷한 마음, 비슷한 경로를 보여준 딕이 오히려 이래서 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 상황이 왜 더욱 즐길만한 상황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힐링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나는 그러한 나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에릭의 말을 인용하련다. 맨 앞의 문장만큼이나 진실인 이 문장을...

 

 묘한 기분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소름 끼치는 사건이어야 할 이 전쟁 한 복판에서 뭔가 의미있는 것을 찾아내다니 (...)  그 아연 도금된 양동이 안에 숨어있던 레이지 브라운 도그 수레가 갖추고 있는 것과 동일한 욕구가 내게 생의 활기를 불어 넣다니. 아마 나도 마침내 그것의 동포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곁에 서서 내 자리를 지키고 그것처럼 행동하고 그것처럼 싸우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싸우고 때로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기쁨을 느끼기 위해. (P. 393)

 

 

  Thank you, 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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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ㅋㅋㅋ 헤르메스님 제목 어떡해!!!!

ICE-9 2013-01-26 01:37   좋아요 0 | URL
어서 와, 이런 제목 처음이지?
소이진님께도 이렇게 들려드리고 싶네요^ ^

마녀고양이 2013-01-1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의 걸작선이 벌써 9권이 나왔군요....
3권까지 사놓고, 아직 읽지도 못했는데... ㅠㅠ.
거기다 예전부터 이 작가를 좋아해서, 옛날에 사놓은 책과 약간 겹치기도 하고.
정말 커다란 창고를 가지고 싶어요, 책을 왕창 꽂아놓을.
아니면 지하도서관이나 다락방도서관.

그런데, 저자의 그런 사정을 듣고나니 더욱 흥미로운 것은 확실하네요.
헤르메스님, 평온한 한주되셔요.

ICE-9 2013-01-26 01:41   좋아요 0 | URL
과연 완간이 가능할까 생각했었는데 정말 무서운 속도로 완간으로 나아가고 있네요^ ^ 흑흑 저도 예전의 필립 K 딕과 얼마나 겹치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전 유빅까지 전에 나온 건 거의 다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 걸작선을 소장하는데 정말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저 역시 가뜩이나 집이 좁은데...ㅠ ㅠ
재즈광으로 유명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공항의 비행기 격납고를 자신의 소장 재즈 음반 창고로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도 정말 돈을 많이 벌면 그런 창고 하나 가지고 싶어요.^ ^
 
저스트 키즈 - 패티 스미스와 로버트 메이플소프 젊은 날의 자화상
패티 스미스 지음, 박소울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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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퉁이를 돌면 좁은 계단이 있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담배 냄새 가득한 그 계단을 올라가면 건물 4층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모르모트가 현실로 뛰쳐나온 듯한 어둡고 칙칙한 그 곳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이름도 아니나 다를까 '블랙'.  그래서 우리는 들어가면서 스스로 '어둠의 자식들'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보기엔 그래도 그 곳은 명색이 카페였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기 위해 여기를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대화를 위해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었다. 뭐, 대화가 있기는 하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나누는 대화라 그렇지. 이 카페가 바로 앞에 앉은 사람만 간신히 보일 정도로 빛을 최소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골로 다녔을 때가 7년째라고 했는데 아무튼, 그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히려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언어의 밀어 보다는 감촉의 밀어를 나누고 싶은 커플들이 찾았기 때문이다. 모르모트의 어둠이 남들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롭게 마음껏 감촉의 밀어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주인은 결단코 그런 목적으로 카페를 이 같은 분위기로 만든 건 아니었다고 했다. 거기엔 나름의 뜻깊은 철학이 있다고 언젠가 우연히 같이 술 마시던 자리에서 맥주 서너병에 불콰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의 말의 의하면,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그는 시각에 의해 음악이 주는 느낌을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러니까 청각적 환희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라 했다. 아, 내가 깜빡 잊고 말을 안했었는데 '블랙'은 그냥 카페도 아닌 음악 감상을 위주로 하는 카페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비공식적인 버전도 있었는데 지리한 장마가 그 어느 해보다 더 길게 이어지던 어느 해.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 내리는 비로 인해 수리는 자꾸만 지연되었고 마땅히 갈 곳이 없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계속 지켰는데 장마를 피해 찾아온 커플들이 주인이 있음을 보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둠이 눅눅하게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더란다. 주인은 그게 반가워서 주문한 것만 가져다 주고는 거기서 무엇을 하든지 얼마나 오래있든지 상관하지 않았다는데 그러다보니 어느새 커플들이 삼삼오오 여름날 불빛에 몰려드는 하루살이처럼 찾아오더란다. 그 때 그는 갑자기 '아, 이 가게는 빛을 가급적 없애는 게 생명이겠구나' 득도하게 되었고 결국 이런 분위기로 자리잡고 말았다는 그런 이야기다. 어쨌거나 믿거나 말거나이고 뭐가 진실인지는 모른다. 하긴 유래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아무리 장인이 만든 무라마사라 하더라도 무우 따위나 썰면 식칼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못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우리는 두 가지 이유로 그 곳을 우리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하나는 저렴한 비용으로 마음껏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 더구나 주인의 취향은 우리와 비슷해서 더욱 우리를 거기에 붙잡아두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커플들이 여기를 찾았던 이유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그럴 때 우리들은 서로 모른 척 하기로 미리 양해해 두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다시금 그 카페 이야기를 이렇게 새삼스럽게 꺼내는 이유는 내 음악적 성숙의 팔할이 바로 그 카페 덕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 중 5할은 거기서 알게 된 어떤 '뮤즈' 때문이다.

 

 누벨바그로 유명한 감독 트뤼포의 영화 '쥘 앤 짐'은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 거기서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했다.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청춘을 사로잡았던 우리보다 두 살 연상의 뮤즈가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패티 스미스'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와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 한 그녀의 생일 날이었다. 그즈음에 그녀는 실연을 했고(그러니까 우리는 짝사랑 중이었다. 우리들끼리는 치열한 경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생일을 기점으로 그 아픔을 모조리 잊기 위해 그는 주인에게 생일 선물의 의미로 각별한 부탁을 하나 했다. 패티 스미스의 'HORSES' 앨범 전곡을 틀어달라고. 오늘 우리들과 같이 전부를 감상하고 싶다고... 아비정전의 장국영이 말하는 '1분'처럼 그 앨범의 전체 시간만큼 우리가 같이 들었던 그 순간을 영원한 기억으로 동결시키고 싶다고.

 

 영문은 몰랐지만 오늘은 그녀가 주인공이니 원하는대로 다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주인 역시도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패티 스미스의 앨범을 들었다.첫 곡 글로리아 부터 마지막 곡 엘레지 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서로의 실루엣만 바라보면서 말이다. 비트는 폭발하는 듯 했고 패티 스미스의 목소리는 읊조림과 절규를 넘나들었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우리의 뮤즈였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패티 스미스는 그렇게 내 인생에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했던 한 여인의 눈물과 함께...

 

 

 '저스트 키즈'는 패티 스미스가 그녀의 연인이자 남편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였던 로버트 메이플소스의 죽음 이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가장 험난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원하는 꿈을 향해 노력하던 시기의 기록이다. 패티 스미스가 새삼 그 때를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낸 것은 이렇게 기록이란 형태로 영원히 동결시켜 이 결빙된 기록만큼이나 영원히 그 때 가장 아름다웠던 로버트 메이플소스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거기에 보존되는 것은 메이플소스만이 아니다. '저스트 키스'라는 제목 그대로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라서 성숙을 시간의 결마다 아로새겨진 상처로 인한 아픔을 감내하며 치뤄낼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럼으로 인해 더욱 서로를 순수히 사랑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그대로를 표현할 수 있었던 그만큼 자유로웠던 시간 역시 보존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일종의 타임머신 같다. 과거의 시간 자체가 보존되어 있어 언제든 들여다 보기만 하면 그 때의 시간을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아마 페티 스미스 역시 펼치기만 하면 그 때의 자신으로 돌아가 있는 경험을 무던히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이지 않을까? 나 역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정작 그 내용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녀와 똑같이 '저스트 키즈'였던 그 때를, 패티 스미스를 처음으로 만났고 이후의 그녀와의 느닷없는 이별로 일찍 아픔을 껴안아 버렸던 그 때를 더 많이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이 책은 각주가 때로 본문 내용의 흐름을 끊듯이 그렇게 문장들마다 각주처럼 따라붙는 나의 기억들이 참으로 날 산만하게 만들었던 책이다. 패티 스미스 하면 바로 연동되어 버리는 기억들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날 방해했었던, 마치 사이렌의 노래 소리처럼 날 부여잡아서 책으로 부터 자꾸 얼굴을 들게 만들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노래였다. '미스틱 리버'와 '살인자들의 섬'으로 유명한 작가 데니스 루헤인에겐 대표작 시리즈물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이다. 거기서 여주인공 제나로는 스트레스가 쌓여서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꼭 듣는 음악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패티 스미스의 노래다. 데니스 루헤인은 제나로가 패티 스미스의 어떤 노래를 듣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난 그 노래가 뭔지 알 것 같다. 바로 앨범 'HORSES'의 첫 곡, '글로리아'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패티 스미스를 따라 'G - L - O - R - I - A'를 외치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저스트 키즈'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올렸던 것도 바로 그 노래였다. 이 노래, 정말 많이 불렀다. 그것도 함께. 같이 따라 부르면 더 즐거워지는 곡이라서 우리는 그 생일 이후로 종종 후렴구를 합창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합창은 함께 있어서 즐겁다는 표시였었고 함께 있어서 든든하다는 고백이었고 함께 있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백마디 말보다 그 하나된 목소리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던 시간. 그래서 내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시간인지라 그 때 정말 예뻐보였던 뮤즈의 목소리를 아련히 되새기며 지금 이렇게 패티 스미스가 했던 것처럼 하나의 글로 결빙시켜 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르고 같이 울고 웃으면서 보냈던 이제 막 자유의 첫 햇살이 비쳐들기 시작하던 스물을, '저스트 키즈'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그 때의 우리들을 말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련다. 이 책은 나에게 가장 소중했던 그 시절로 다시금 돌아가게 해주었던 것 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니, 할 수도 없다. 패티 스미스의 글을 객관적으로 읽기란 내게 불가능하다. 그녀의 이름 자체만으로도 나는 나의 그녀를 떠올리게 되고 패티 스미스의 삶 한 조각마다 마치 그림자처럼 결부되어 그 때의 우리들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삶은 어느 순간이 지나면 미래의 것 보다는 과거의 것이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저스트 키즈'는 그런 과거를, '한때 우리들에게도 빛나는 여름 바다가 펼쳐져 있었지' 하던 때로 돌아가게 한다. 비온 뒤 잠깐 볼 수 있었던 무지개와 같이 짧아서 더 아름답고 진한 그리움을 남기는 그 때로... 지금 이 순간 내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른 생각 없이 더 오래 더 깊이 잠기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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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1 - 송지나 장편소설 신의 1
송지나 지음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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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힐링'이 대세다. 세계 성인 자살률 1위의 나라답게 얼마나 많이들 아프고 힘든 것인지 세대를 막론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여기서는 위로, 저기서는 치유. 그렇게 모두들 '힐링'을 찾는다. 이렇게 모두가 아프고 힘들다는 것. 그렇게 오늘날 고독과 좌절, 무기력과 우울증이 흑사병처럼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 가지 진실을 거꾸로 드러내는 듯 하다. 그건 그 힘듦과 아픔의 원인이 개인에게서 비롯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개인을 넘어선, 뭔가 보다 구조적인 것.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거하고 있는 전체 시스템 자체가 문제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 징후는 이미 몇 년 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서 드러났다. 그건 우리가 익히 배워왔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가치들과 현실적인 세상이 보여주는 괴리감 속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내가 믿었던 가치들이 세상의 폭력과 탐욕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서 '과연 내가 믿어왔던 것은 무엇인가?' 혹은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망연자실함 가운데 떠올랐던 질문들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보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그 때서야 세상이 가면을 벗고 그 진정한 얼굴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고 그동안 우리가 믿고 생각했던 것은 한낱 달콤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이어 나타난 멘토에 대한 열풍도 사실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열풍의 이유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점점 멀어지는 내가 꿈꾸는 세상과의 간극은 매일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지켜온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내가 모르는 것을 일러주는 사람으로서의 멘토가 아니라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나와 같은 것을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멘토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게 '이기적 탐욕'이라는 한가지 색깔로 채색하려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색깔을 끝까지 지키려 스스로 영토를 만들어 나갔던 흐름이 일종의 '멘토' 찾기의 열풍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은 안다. 진정으로 제도적 힐링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개인의 힐링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은 마치 환부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진통제만 먹는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환부를 도려 낼 진정한 '한 방'의 힐링이 필요했다. 때문에 그들은 기다렸고 새끼 손가락을 수줍게 구부리듯 서로의 동지됨을 확인하며 서로 위로하고 지탱해주며 같이 거세게 내리는 세상의 비를 맞으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을 견뎠고 이제 그 긴 겨울의 끝이 비로소 보이는 듯 했다. 대선이 다가온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싱크홀이 생겨버린 마음에 술을 들이부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낸 다음 날.

 

 세상의 모든 소음과 격리된 채 송지나의 '신의'를 읽었다.  허망한 마음에 숙취까지 가세하다보니 그 날 오전의 내 시야는 온전하지 못했었는데, 새삼 그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신의'란 드라마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보지는 못했다. 송지나씨가 쓴 드라마라서 관심은 있었지만 그 때는 정말 일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설로 나왔다.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뒤에 소설로 나오는 것은 또 처음인 것 같아 적당히 신기했고 그래서 한 번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인데 그 때까지 난 제목의 '신의'가 이 '神醫'인 줄 알았다. 소개에서 여주인공이 고려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의사'로 불린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날 새삼스럽게 들여다 본 제목의 한자는 그게 아니었다. 믿음을 뜻하는, 정확히는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信義'였다.

 

 

 

 

 왠지 글자가 뭉클했다. 그것만큼 또 무가치하게 버려진 말은 또 없다고도 생각되었다. 사실 알고보면 15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은 퇴색되어버린 그 말이 지닌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오로지 한가지 바람으로 기꺼이 한 표를 던졌다고 할 수 있었다. 선거 때의 공약이 표를 끌어모기 위한 홍보용에 불과하다며 당당하게 말을 바꾸는 세상이 아닌. '국민의 뜻대로' '국민을 위하여' '국민의 이름으로' 등등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가 엄마를 찾듯 '국민', '국민' 하지만 하는 걸 가만히 보면 막상 그 '국민'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세상이 아닌. 말이 제 뜻 그대로 쓰이며 그 말로 이루어진 '법'을 비롯한 약속들이 엄중히 지켜지는, 그렇게 '신의'가 온전히 제 무게를 갖는 세상을 바라면서 던진 표였다. 가느다란 하나의 지류지만 그대로 꿋꿋하게 세상의 한파를 견뎌오던 사람들이 모처럼 서로 만나 하나의 커다란 강줄기가 되어 바라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물줄기를 열어보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인위적으로 가로막는 저 4대강에 수도 없이 널린 '보'들 처럼 현실의 장벽은 강했고 우리들은 신의가 사라져 버린 시대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어떤 폐허를 남겼는지 쓸쓸히 지켜보아야 했다. 물론 그건 익숙한 풍경이었다. 뭔가 되겠구나 하는 희망이 잠시 잊게 만들었을 뿐.

 

 소설 '신의'의 배경은 고려말이다. 원나라를 등에 업고 기철이 왕보다 더 큰 권세를 부리며 지식인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아부 떨기 바빴던 시기. 권력 앞에 이념은 빛을 잃고 오로지 껍데기로만 남아 오히려 그들의 홍보를 위해 쓰이던 시기. 지식이라는 것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신념을 굳건히 하고 낮은 자들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출세와 탐욕을 위한 아부와 타산 그리고 협잡을 위해 쓰이던 시기. '신의'라는 것이 패배한 군대의 깃발만큼이나 갈가리 찢겨진 시기. 그건 바로 지금의 우리 모습 그대로였다. 송지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소름이 끼친다. 이런 인간들은. 기철의 뒤를 따르며 최영은 연회장을 채운 인물들을 둘러본다. 하나 더 먹고, 하나 더 가지는 것이 생의 전부인 이것들. 타인의 아픔 따위에는 무감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는 후안무치한 것들. 세상을 파먹는 좀벌레 같은 것들.

 문제는 이러한 것 몇 명 때문에 수천, 수만 명의 가엾은 것들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 보니 그 가엾은 것들 또한 후안무치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염치도 예도 사람으로서의 자긍심도 없어진 존재들이 눅눅한 곰팡이처럼 번식하며 세상을 점점 뒤덮고 있었다. (P. 274~ 275)

 

 아아... 이건 고려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송지나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곳을 말하고 있었다. 더구나 마지막 문장은 내가 이번 대선을 통하여 똑똑히 보게 된 모습이기도 했다. 가라앉았던 숙취가 다시 올라오고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울렁이면서 기어이 억눌렀던 눈물이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희망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견뎌야 하나? 하늘 문을 통해 강림할 신의(神醫)를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주인공 최영처럼 냉소적이 될 것인가? 갈피는 잡기 힘들고 마음은 그저 보물을 잃어버린 상자처럼 허망하며 그 빈자리 가득 상실로 인한 아픔만 들어 찰 뿐이다. 소설을 읽고 나는 알았다. 이 소설은 송지나 개인이 견디기 위해서 쓴 것임을. 스스로 힐링하기 위해 쓴 것임을...

 공민왕에게 '그런 우리와는 다른 왕이기에' 더욱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는 최영의 말에선 공약 따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말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현재 지도자에 대한 냉소를 보았고 끝까지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최영의 모습에선 송지나가 그러한 것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그 열망을 보았다. 나도 최영에게 빙의된 송지나와 같은 냉소와 열망으로 견뎌왔다. 그래서 더욱 아프다. 여주인공 은수에게 칼을 맞고 죽어가는 최영만큼이나 아프다. 생각해보면 이 장면은 꽤나 예언적이다. 하늘 문을 통해 데려온 은수처럼 우리도 구원이 도래하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은수에게 칼을 맞은 최영과 똑같이 품었던 희망만큼 아프고 꿈에 대한 믿음의 크기만큼 쓰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견뎌가야 한다.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그 뒤에 더 많은 날들이 앞으로 남아 있기에. 비록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칠흙 같은 어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을 하지만.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믿는 건. 미래의 전망 따위는 무가치 하다는 사실이다. 미래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서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으면 정말 그런 미래가 오고야 만다. 하지만 현재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면 그 미래를 바꾸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수 있다. 미래의 형상은 어디까지나 오늘 행하는 '조형'에 달려있다는 게 바로 내가 아는 바고 믿는 바다. 그러니 버티련다. 좀 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단단히 지탱하련다. 은수와의 약속을 자신이 바라는 세상의 구현과 똑같이 여겼던 최영처럼 내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나 스스로 배반하지 않도록 노력하련다. 물론 길은 멀다. 최영에겐 기철과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오히려 이런저런 감정낭비로 소모할 시간이 없음을 더욱 느낄 뿐이다.

 

 " 내 이름을 무시하는 자, 누구야 막아 봐."(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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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29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글은 정말 보물 같은 리뷰입니다...
지금까지의 리뷰 중에서 가장 감성적이면서 직설적이고 아픈 글인걸요.
아... 어서 기운 차리죠!

'힐링'하니까 생각난 건데, 얼마전 페이퍼를 쓸 생각만 한 게 있어요. 그러니까 '힐링'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우리를 둘러싼 질문과 대답이, 그것들이 전부 힐링되지 못할 것이란 것이라고. 아, 복잡하네요.

ICE-9 2012-12-31 20:4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을 생각하면 오늘의 이 패배가 더욱 뼈져리게 느껴지네요. 소이진님에게 얼마나 힘겨운 미래가 될지 상상도 못하겠어요. 아무튼 어서 기운 차리고 이 악물로 버텨봅시다. 불끈!

아이리시스 2013-01-1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드라마를 참 좋아해서 책도 읽어볼까 했는데(송지나 작가의 인터뷰도 봤고요) 헤르메스님 리뷰가 정말 좋아요. 고려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도 맞고요. 아마 드라마에서는 특성상 사랑이 빛났지만 결국은 시대를 엿볼 수 있었어요. 공민왕의 고뇌가 고스란히 주제가 되고, 나라와 신하 사이에서 고민하는 걸 보면 내가 왕이 아니라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들을 다 좋아하거든요. 저는 '신의'의 신이 그 '신'인줄 몰랐어요. 관심이 없었어요. 중의적으로 읽힐 거라고 생각만 했는데.. 드라마는 각자의 역할에 빙의해야 쓸 수 있는 작업이고, 소설은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어 좋다던 작가의 말에 소설도 드라마만큼 좋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는데 저는 일부러라도 책 구해서 볼 것 같아요^^

ICE-9 2013-01-26 01:42   좋아요 0 | URL
와! 아이리시스님 반갑고 또 좋다고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
저도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해서 '신의'가 방영되었을 때 꼭 보고 싶었는데 놓쳐버려서 그 아쉬움에 소설판을 잡았는데, 리뷰한대로 이 소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놓쳐버린 드라마가 무진장 아쉽게 여겨지더군요. 하지만 일단 소설로 시작했으니 드라마를 보면 그 느낌을 잃어버릴까봐 소설을 다 보고 볼 작정인데 그래서 더욱 뒷 이야기들이 빨리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

abante10 2013-07-26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 거의 잘 안 보는 제가, 필 꽃혀서 가슴 아프게 이 드라마를 봤었지요...그 때 가을... 대선에 대한 희망을 안고서...설마 바뀌겠지 설마..하지만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결과를 보고서, 저는 오히려 님과 반대로, 책으로 나오면 사야겠다는 결심이 대선멘붕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버렸어요. 개인적으로 바쁘기도 했고 더 이상 신의에게도 내 맘을 둘수가 없었죠. 가끔 문득문득 떠오를때면 애써 무시했죠. 현실이 시궁창인데 무슨 드라마니 소설이니...하지만 폭염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는 여름 어느날 문득 신의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들어온 이곳에서 님의 글을 읽고 또 대성통곡을 하고 싶어지네요...가슴이 꽉 막혀 있는 돌맹이는 언제 부숴질까요...ㅠㅠ

ICE-9 2013-07-31 23:34   좋아요 0 | URL
abante10님의 댓글을 읽노라니 이 리뷰를 썼을 때 먹먹했던 느낌이 다시 오롯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더욱 어둠이 짙어지고 희망 역시 한줌도 채 안남은 듯 하여 마치 빈상자처럼 살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도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요즘은 버티기 위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은 그렇게라도 버텨야겠구나 이겨내야겠구나 마음을 다잡으면서... 언젠가 가슴을 짓누르는 돌맹이가 완전히 부서지는 그 날까지 avante10님도 부디 잘 견뎌내시길 바랍니다.
 
감상소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3
미하일 조셴코 지음, 백용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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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소설'을 읽고나자 갑자기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였다. 언젠가의 밤, 그 친구는 입원한 병실에서 간호에 지친 그의 가족들을 잠시 쉬게 하느라고 홀로 그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내 손을 부여잡았었다. 그리고 숨 가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파... 도와줘..."

 
  당장 뛰어나가 간호사를 불렀다. 당직 의사가 달려왔고 휴식을 취하던 그의 가족들도 들어왔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고 죽은 듯이 자는 친구를 난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새벽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까지 내내 나를 잡았던 친구 손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삶이라는 거대한 밀물은 나를 그 자리에 놓아두지 않았다. 나는 다시금 일상으로 떠밀려갔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느라 그 손의 감촉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삶이란 건 무정하다. 또한 잔인하다. 언제나 예고 없이 이별을 가져다주어 참회할 순간을 앗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 날은 내게 있었던 그 많고 많은 평범한 날들 중 하나였다. 아무런 전조도 예고도 없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고 학생식당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렸으며 오후 강의에서 살짝 졸았던 것까지도 똑같았던 반복된 일상이었다. 그 뒤, 도서관으로 가서 기말 리포트 준비를 위해 자료 복사를 했다. 그러다 전화를 받았다. 도서관의 거대한 유리창으로 이제 막 저물기 시작하는 햇살이 책상 위로 자신의 붉은 나신을 드리우는 것을 보면서 난 그 소식을 들었다. 친구가 떠났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누군가 세상 전체를 진공관을 씌워버린 듯 정적에 휩싸여 버렸다. 아니, 오직 하나의 소리만 들려왔다. 흐느낌. 그리고 울먹이느라 띄엄띄엄 어렵게 이어지던 목소리. 핸드폰을 쥔 손이 떨렸다. 마치 칼바람 앞의 문풍지 같았다. 그 손은 그날 밤 친구가 도와달라며 잡았던 바로 그 손이었다. 그래서 내게 그 떨림은 질책으로 들렸다. 너는 어찌하여 그 날 밤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만의 일상에 골몰하느라 그를 무심히 잊어버리고 있었느냐 하면서 잔뜩 꾸짖는 것 같았다. 좀 더 신경 써 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했고 그 사실을 친구에게 고백해 용서받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죄책감이 남아있을 뿐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에 때로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이 가진 비정한 손톱이 할퀴어버린 깊은 상흔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친구가 떠난 순간을 회상하면 더욱 괴로웠다. 같은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그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난 밥을 먹으면서 오늘은 반찬이 별로네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게 사람을 정말 치사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영원한 상실의 순간에서조차 동물적 일상 행위를 반복하게 만듦으로써 나를 더욱 더 구차하게 만들고 그런 내 뒤에서 삶이란 것은 크게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문득 가버린 친구가 생각났고 그 때 못했던 참회를 위해 그에게 편지를 써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건 이 소설에서도 그 때 내가 들었던 삶이 내는 비웃음 소리를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상소설'은 여덟 개의 단편들이 모여 있다. 그렇게 그 각각의 단편들의 주인공이 되는 존재의 삶을 하나씩 담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삶을 만만하게 본다. 그들이 가진 능력에 비해 현실은 무기력하다고 생각한다. 피아니스트 아폴론 세묘노비치도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이반 이바노비치도 오케스트라에서 트라이앵글을 연주하여 세상에서 지극히 사소한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세상 변화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보리스 이바노비치 코토페예프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한결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패배한다. 자기가 하기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조율 가능해 보였던 삶은 그들이 매달리려 하자마자 그들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어 그들을 압도해 버린다. 결국 그들이 듣게 되는 건, 주저앉은 자신의 등을 짓밟고 서서 차갑게 웃고 있는 삶의 비웃음 소리뿐이다. 이 소설엔 그런 비웃음이 가득하다. 강인하고도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 무기력한 인간들을 가지고 놀면서 내는 야멸찬 비웃음 소리가 말이다. 듣기에 이 소설은 러시아 풍자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렇게 평가받게 된 것 역시 이 책에 가득한 비웃음 때문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는 그 비웃음 속에서 삶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서글픈 초상을 확인한다. 절망한 세묘노비치는 무덤지기로 살다 생을 마감하고 이바노비치는 그 모든 재산과 아내까지 빼앗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삶의 잔인함은 아무리 사소한 직분을 맡았다고 해도 내버려두지 않으며 '라일락 꽃이 핀다'의 볼로딘은 그래도 이 세상 사랑만큼은 고귀한 가치라 믿었으나 결국 확인하게 된 것은 사랑을 비롯한 삶의 모든 것이 고작 타산의 결과일 뿐이며 결국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다고 낙담한다. 그렇게 그들은 패배하고 굴종하며 타협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삶이라는 장벽을 뚫고 나가겠다고 작심하지만 결국 확인하게 되는 건 그들 모두가 자동차 충돌 실험에 쓰이는 오로지 부서지기 위해 만들어진 '크래쉬 테스트 더미'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했다. 이 소설은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연약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전시관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연약한 크래쉬 테스트 더미들... 

                        그 연약함 때문에 서로를 껴안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그 관람을 마쳤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비관이 아니다.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은 확인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는다. 내가 친구에게 새삼 참회의 편지를 써야겠다고 느꼈던 것도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셴코는 우리의 연약함이 종착지가 아니라 사실은 출발지라고 말한다. 즉 이토록 우리가 연약하기에 우리는 서로를 보듬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홀로라면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타인과 연대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셴코는 말한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때문에 '무서운 밤'이란 단편에서 보리스가 하는 이 같은 호소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거기서 삶이 숨긴 잔인한 진실을 우연히 알게 된 보리스가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호소하는 걸 듣게 된다.
 
"저... 제발 부탁인데요.... 이 순간 한 인간이 파멸하고 있습니다..."(p. 121)
 
  호소는 연약함에서 나온다. 우리가 우리의 어려움을 홀로 해결할 수 없기에 타인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날 밤 내 손을 부여잡으며 도움을 호소했던 친구처럼 말이다. 우리의 연약함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준다. 조셴코는 바로 여기서 우리가 연약하지만 절망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스스로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더욱 더 적극적이 될 것이다. 조셴코는 이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 소설을 그토록 연약함의 박물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난 그 친구에게 참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손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잊고 무심히 내버려두었던 나를 말이다. 너무나 뒤늦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기에 과연 친구가 나를 용서해 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미안함 때문에라도 앞으로는 더욱 다른 이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리라 다짐한다. 오늘 밤은 아주 긴 편지를 쓰게 될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큼 연약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또 없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 후회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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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16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안그래도 오늘 헤르메스님 생각했단 말이야!
이렇게 제 생각과 알맞은 시기에 찾아와주시니 반갑습니다... 헤헤
일단 댓글 먼저 달고 글을 읽어야지. 저도 마침 오늘 리뷰 하나 쓰려구요.

ICE-9 2012-12-17 03:26   좋아요 0 | URL
와! 그래도 절 잊지않고 생각해주는 건 소이진님 밖에는 없는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어서 소이진님 리뷰를 읽지는 못하겠고 내일(라고 했지만 벌서 오늘이네요.) 얼른 달려가 확인할게요.^ ^

2012-12-17 15: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2-12-2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마음 아팠습니다.
오래도록 남아있으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니까요. 다들 그렇게 도움을 주고 받을 때도 있고,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고, 그게 인간인 듯 합니다. 편지를 쓰셨나요? 긴 편지가 되었을거 같아요.

헤르메스님, 그림은 헤르메스님께서 그리시는건가요?
살짝 뒤틀린 등짝이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

ICE-9 2012-12-29 02:27   좋아요 0 | URL
와! 달여우님 정말 반가워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을만 되면 이유없이 마음이 아려와요. 그동안 저도 모르게 널어놓은 아픔은 또 얼마나 될지 생각도 하게 되고... 그 탓인지 편지 정말 쓰기가 힘들더군요. 아직도 제마음 속에 자리잡은 그 미안함의 크기에 새삼 놀랐습니다. 쓰고 지우고, 때로는 구기고, 멍하니 있다가 좀 울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

네. 그림은 제가 그렸는데, 어떻게 하면 껴안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이 보이게 될까 고민하다가 저렇게 그렸는데 그런 뉘앙스가 느껴지시나요? 그래도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