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등급 슈퍼 영웅 NFF (New Face of Fiction)
찰스 유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3등급 슈퍼영웅'의 작가 Charle s Yu...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Yu는 요즘 뜨고 있는 주진우 기자를 참 많이 닮았다.

그래서 친근하고 더우기 인상 역시 좋아보인다.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기 위해 일부러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웃음을 띠고 있는 지는 몰라도 아무튼 이 사람이라면 뭔가 인간적인 만남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한다. 자기가 말하는 것 두 배 이상으로 잘 들어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수트를 입으면 꽤 빈틈없는 변호사로도 보일 것 같다. 적어도 일상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모아 모아 소설을 쓰는 작가로는 안 보일 것 같다. 그것도 이전엔 전혀 본적 없었던 아주 독특한 스타일로 소설을 쓰는 아주 개성적인 작가로는 생각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그의 얼굴 뿐만 아니라 그 삶까지도 글의 스타일과는 너무 달라서 마치 그의 소설이 이종교배 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정말  Yu는 마치 일상인이라는 '지킬'의 이면에 소설가라는 '하이드'를 감춰두고 사는 존재가 아닐까?

 

  자기 내부에 또 다른 하나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 더구나 그것이 일상의 자아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그렇게 일상의 규칙으로 부터 벗어난 그래서 그만큼 더 온전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공항 위에 세워진 '관제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일상에서 맞딱드리는 모든 경험이 뜨고 내리는 비행기라고 한다면 관제탑으로서의 자아는 그것이 언제 내리고, 그렇게 뇌리에 새겨지고 뜨는 그렇게 망각속에 흘려보내는 그 모든 있어야 할 자리와 비워야 할 자리를 지정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보다 쉽게 말한다면 일종의 여과기 기능을 한다고 할까? 그러니까 소설가로서의 자아는 일상에서 겪었던 혹은 느꼈던 경험과 상념들을 다시 반추하고 그것을 일상을 지배하는 속세의 법칙이 아닌 온전히 자신만의 결단에 따라 여과하여 자신의 삶에 있어 그것들이 어떤 의미들을 가지는지 되새긴다는 것이다.

 

  아마도 정확히 그것이 두 자아를 가지고 사는 이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일 것이며 그 과정의 매커니즘을 우리는 바로 이 '3등급 슈퍼영웅'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 실린 세 번째 단편, '그 자신이 된 남자' 같은 곳에서 더 확실히...

 

  이제 차이가 있다면, 데이비드가 무엇인가를 느낄 때'그'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마치 환등기 슬라이드처럼 또는 렌즈가 컬러 필터를 통해서 보는 것 처럼 데이비드의 현재 감정 상태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었다.(p.78)

 

 

 

 '3등급 슈퍼영웅'은 글쓰기를 통해 무심코 자기 내부에 전혀 다른 자아를 받아들인 한 영혼의 '데카르트 식'으로 자신의 자아를 성찰해 나가는 그러한 탐색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중의 자아를 가져버린 '나'란 무엇이고('401 (K)'과 , '그 자신이 된 남자') '나'란 놈의 경험은 또 무엇이고('자기 연구에 대한 문제들'과 '플로렌스') '나'란 놈은 또 어떻게 구성되어지고('사실주의') 내가 '나'로 역할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적 자아로 움직이는지('<나>로 보낸 마지막 날들)... 등등 자신에 대해 관찰가능하고 고찰가능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는 한 모조리 드러내는 한 마디로 Charle s Yu 자신의 임상보고서와도 같다.

 

  그러니까 당신은 '3등급 슈퍼영웅'을 통해 사실은 Charle s Yu의 내면을 여행하는 것이다. 그의 전작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에서 Yu의 내우주를 여행했듯이(이제야 밝히지만 그렇다. Charle s Yu는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의 그 작가이며 이 단편집은 그 전작들을 모아 낸 책이다.) 그대로 말이다. 이미 먼저 읽은 자로서 여기서 읽는 순서에 대해 잠깐 충고하자면 당신은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단편 '3등급 슈퍼영웅'을 사실은 가장 마지막에 읽는 것이 좋다. 비록 그것이 가장 재미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단편은 Charle s Yu가 스스로 감행한 모든 자아로의 탐색을 마쳤을 때 깨달은 일종의 최종보고서와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3등급'에서 가장 중요한 키 포인트는 이 주인공에게 아무런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경계에 서 있는 자인데 그것은 그대로 Charle s Yu가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의 상태 그대로를 반영하는 비유이다. 단편은 처음에는 3등급 슈퍼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그를 그린다. 그것은 Charle s Yu가 자신의 이중 자아가 가져다 주는 혼란을 어느 하나로 결정하여 정리하고픈 욕망을 암시한다. 하지만 일상과 글쓰기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그를 암시하듯 주인공은 내내 3등급이 되는 시험에서 실패한다. 결국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걸 깨닫는다. 그래서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렸을 때 거기 원래 담으려 했던 의미 그대로, 세상이 인정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괴물이 되려 한다. 물론 단편 자체에서는 '악당'으로 나오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Charle s Yu가 거기 이르기까지의 모든 단편을 통해 했던 모든 고뇌를 마치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중 자아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첫 머리에 나오는 '3등급 슈퍼영웅'은 가장 마지막에 Charle s Yu의 결론을 확인하듯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이다. 이것은 아마도 바쁜 일상 틈틈히 글을 쓰는 Yu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지금 리뷰라는 걸 쓰고 있지만 정말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의한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객관화시키는 과정이다. '쓰는 나'가 또 다른 자아가 되어서 쓰기 전의 나를 텍스트화 하는 것이다. 읽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다. 그렇게 쓰는 나는 텍스트화된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그렇게 일종의 대화가 이루어지며 '나'란 더 여과되고 한편으론 더 보완된다. 그런 과정을 다른 말로 '성숙'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그것이 아무리 자폐적 글쓰기라 하더라도 내부로만 침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만 외부에게로 날 개방시켜 바깥의 것을 안으로 들여와 그것에 보태여지고 그것에 덜어내지는 과정인 것이다. 그 외부와의 만남, 그렇게 '타자화된 자아'의 생산. 그것이 바로 글쓰기이고 그러한 열림을 통한 성숙이 본디 글쓰기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매혹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Charle s Yu는 그런 글쓰기의 매혹을 더 매혹적인 글쓰기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이 진정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는 것을! 그래서 '3등급 슈퍼영웅' 처럼 얼마든지 기꺼이 이 정해지지 않은 경계 위에 서 있겠다고 하는 것을!

 

  그런데 글쓰기란 쓰는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읽는 자에게도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한다. 본디 쓰는 것이나 읽는 것이나 텍스트화된 자아를 만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똑같은 경험은 쉽게 비유하자면 모두가 자신이 만든 우주에 남의 우주를 초대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똑같은 초대와 접대의 과정이 작가에겐 '씀'으로 독자에겐 '읽음'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이렇게 나를 객관화시키고 결국 '타자화된 자아'를 양산하며 그 '읽음' 역시 쓰는 자와 본디 동일한 경험을 갖게한다면 우리가 '3등급 슈퍼영웅'을 읽는 것은 Yu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면마저 여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어쩌면 정말 소설가로서의 Yu의 내면과 그것을 읽는 우리의 내면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사실은 그의 임상으로 들어갔으나 정작 나오게 된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임상보고서 인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Charle s Yu는 그 때문에 이토록 낯설고 독특한 스타일의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닐까도 싶다. 무엇보다도 그의 글쓰기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스타일은 미술에 있어서 추상화를 닮았다. 그러니까 추상화가 그 어떤 정형화된 것이 없기에 오히려 바라보는 자의 내면이 그대로 비춰질 수 밖에 없듯이 Charle s Yu의 이 소설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글쓰기의 원초적 경험을 상기시키고 결국 하나의 글을 읽는 다는 것 역시 소설가와 독자의 그렇게 씀과 읽음의 2인용 협력 게임이라는 것일 다시금 일깨운다. 어떤 것도 일방적 주장이 없으며 끊임없이 소설가와 독자가 무한의 되먹임을 가져다 주는 게임임을... 앞서 Charle s Yu가 글쓰기에 매혹당하고 일상의 자투리시간이나마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 그 외부에서의 되먹임 과정을 통한 성숙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똑같은 성숙의 과정을 밟는 것이 될 것이다. Charle s Yu의 '3등급 슈퍼영웅'은 어쨌든 읽는다는 것이 결국에 가선 나의 경험 폭을 넓히고 타자로 나를 보완하여 성숙시키는 과정이라는 그 단순한 진실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 소설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2-24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관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도 관계의 일종이라 보며, 알라딘에서 제가 페이퍼를 올리는 자체가
저의 관계 행위의 패턴 중 일부분이라 보고 있습니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저는 요즘, 글이 사람과 다른 경우에 대해서 고민 중입니다.
글쓰기도 포장이 가능하구나, 그리고 타인을 감동시킬 언어를 가졌으나 그것 자체가
위선인 사람도 있구나 머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댓글이 뒤죽박죽입니다.
제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때에, 이런 리뷰시라니.... 생각이 많았답니다. ^^

그나저나... 진짜 저를 혹하게 만드시는군요, 리뷰로써.

ICE-9 2012-02-28 01:3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읽으니 조한혜정님의 글쓰기와 삶읽기가 생각납니다. 거기서 조한혜정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할까 하는 것에 대해서 초등학교 시절 도덕 시험 같은 경험이 누차 누적되었기 때문이다와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러니까 우리는 도덕시험 볼때 육교로 건너는 사람에게는 O표를 무단횡단 하는 사람에게는 X표를 치지만 실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 옳은 일인지 알면서도 무단횡단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도덕적 지식은 충분한 토론과 검토없이 그저 암기로만 행해졌고 따라서 그 때부터 우리들 마음속에 그러한 앎이란 삶과 분리된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심어졌기 때문이다 라구요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특히나 폴리페서들) 역시 그러한 경험으로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해두기 때문에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태연히 그른 것을 알면서도 저지른다고 말입니다. 제 생각에 스스로를 텍스트화 하는 것과 본성의 상이성은 아마도 그 자의식 밑바닥에 글과 삶이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말하자면 한국 교육이 가져온 잘못된 보편성이랄까요. 교육이 그랬다면 이걸 삶에서 깨어나가야 하는데 그 계기도 시도도 쉽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리뷰나 블로그나 꾸준한 글쓰기는 참 많은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시키고 타자를 통해 자신을 관찰하도록 하는 이런 글쓰기의 민주화가 저는 그러한 분리 의식을 극복하는 과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상당히 생각이 필요한 문제인데 댓글로 쓰려고 하니 저 역시 많이 뒤죽박죽이네요. 하하^ ^; 하지만 마녀고양이님 감사합니다. 댓글도 댓글이지만 새삼 저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셨어요. 저는 어쩌면 이런 대화를 위해서 리뷰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마녀고양이 2012-02-28 20:56   좋아요 0 | URL
제가 생각해보니 못 한 방향이네요.
감사합니다. 이 부분도 포함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겠어요.

사람이란게 참 신기해서,
묻어놓아도 뇌 속에서는 나름 내재화를 하고 있고, 나중에 다시 꺼내면
좀 더 정리되고 정제된 형태로 통합되어진다는게... 참 놀랍답니다.
이 부분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
 
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1.

 

  파스칼린, 그녀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최근에 커다란 상실을 겪었고 그 때문에 정말 사랑해서 결혼까지 한 남편 프레데릭과 이혼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삶의 전환기에 서 있다. 그 시간이 도래했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자신이 거주할 공간을 새로이 구하는 중이다.

 

  프레데릭은 이제 과거였다. 새 인생 새 집... (p.16)

 

 

   

  프랑스의 여류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의 소설 '벽은 속삭인다'는 막상 보면 저렇게 이제 막 변화를 앞두고 있는 자에 대한 소설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우리에게 일종의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왜냐하면 그 변화라는 것이 사실은 '사랑했던 자'와의 영원한 결별(정확히는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6개월 된 딸의 죽음)이라는 고통이 출산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즉, 삶이 껴안아버린 그러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그저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살기위해서는 지속해야 할 현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단순히 망각해 버리는 것이 정녕 옳으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것은 우리가 늘 건네곤 하는 속편한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더러 우리들 역시도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실연의 상처를 연거푸 들이키는 술로 덜어내려는 듯 모여든 친구들이 후크송의 후렴구 처럼 반복했던 말이기도 했다. "어떡하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지극히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더 묘하게 설득이 되는 이 말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을 억지로 삼켜왔던가... 삶은 그저 앞으로만 앞으로만 쉬임없이 나아가는 콘베이어 벨트와 같아서 나의 과거가 그 어떤 상흔을 남겼든 다시 툭툭 털고 걸어가야만 한다고 얼마나 스스로를 납득시켰던가...

 

  하지만 '벽은 속삭인다'의 로즈네는 그런 우리들의 체념 앞에서 반문한다. "과연 그렇게 잊는 것만이 최선일까?"라고... '오히려 우리는 잊기보다 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2.

 

   이 소설은 짧다. 18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과 군더더기가 없이 담백해서 언뜻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가지게 하는 이 소설은 그 쉽고 짧은 문장 만큼이나 수월하게 읽히지만 사실은 '고통을 기억한다'를 테마로 해서 그 주제가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도록 작가가 꽤 세심하고 정교하게 설계한 소설이다.

 

  '벽은 속삭인다'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파스칼린 그녀는 공간의 대한 감수성이 강하다. 그녀 엄마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 부터 그녀는 유달리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공간에 간직된 기억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공간에 대한 일종의 사이코 메트리 능력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찾았던 그녀는 그러나 그 예민한 감각으로 인해 그만 그 공간이 가진 비밀을 알게 되고야 만다. 그러니까 자기 이전에 그 공간에 살았던 사람이 연쇄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여기서 로즈네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한 공간의 거주자가 바뀌는 것은 곧 그 공간에 깃들었던 과거의 역사가 지워지고 다시 새롭게 쓰여지는 것을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파스칼린이 옴으로써 원래 그 공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이제 망각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라지는 역사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한 여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한 역사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초래한 커다란 고통과 끝모를 상실의 역사이다. 과연 이런 역사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지워지는 것이 옳은 일일까? 당신의 마음은 여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제목의 '벽은 속삭인다'는 바로 이런 질문을 당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벽'만이, 그 역사가 새겨진 공간만이 그런 질문을 한다. 왜냐하면 그 공간이 새로이 사람을 받을 준비가 다 되었듯이 이미 그 역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워져 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로즈네의 질문은 사회적 차원까지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왜 그 아픔을 기억하기도 전에 망각부터 하려드는 것일까? 어쩌다 그 망각을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보편적 치료제로 가지게 되었나?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나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하도록 개인을 길들인 결과일까? 이렇게 말이다.

 

 

  벽의 속삭임은 그렇게 깊고 포괄적이다. 그리고 파스칼린은 그 질문을 그녀 특유의 감수성을 통해 듣는다. 벽은 누구에게나 속삭이지만 들을 수 있는 자는 파스칼린 뿐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가진 특유의 감수성 탓이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그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의 아픔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그녀 역시 똑같은 고통 그러니까 사랑하는 딸을 속절없이 잃어버린, 커다란 상실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와 무관하지 않은, 어쩌면 바로 자기에 대한 얘기이기도 한 속삭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스칼린 그녀에게 있어 희생자들은 모두 그녀의 '딸'과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파스칼린이 연쇄살인마에 희생당한 이들이 죽은 곳을 찾아다니며 애도하는 여정은 사실 남편 프레데릭과 그녀의 동료 엘리자베트의 행위로 대표되듯이 모두가 그녀에게 '잊으라', '잊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강요하는 가운데 그것에 저항하여 어떻게든 끝끝내 자신의 '딸'을 기억하고자 하는 애절하면서도 절박한 여정이자 아무리 그 기억이 자신에게 끔찍한 고통이자 커다란 상실감을 안겨주더라도 단순히 잘 살기 위해 그것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오히려 끝까지 그 고통을 껴 안고 당당히 살아가겠다는 선언의 여정인 것이다.

 

 

  고통은 언제나 대체불가능하다. 따라서 파스칼린의 이러한 저항 역시 고독할 수 밖에 없지만 바로 이 저항의 고립성을 통해 로즈네는 사회가 전반적으로 개인에게 강박적으로 행하고 있는 망각 전략으로 확장시킨다. 소설에서 파스칼린의 전남편 프레데릭과 그녀의 동료 엘리자베트는 그러한 사회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와같은 상징성은 프레데릭으로 보자면 그와 연쇄살인마가 가지는 유사성에서 드러난다. 즉, 딸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프레데릭은 어느새 재혼하여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느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죽음을 야기한 연쇄살인마를 그저 감옥에 유폐하는 것으로 간단히 그 모든 죽음과 그것이 야기한 고통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프레데릭이 보이지 않게 치워버림으로 개인들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회의 전략을 의미한다면 파스칼린의 동료로서 누구보다 사교적이며 흠잡을 데 없는 여성으로 나오는 엘리자베트는 치워버린 뒤 사회가 가하는 망각의 후속 조치들을 의미한다. 그러한 사회의 후속조치들은 특히 두 단계에 걸쳐 행해지는데 첫번째 단계는 삶에 아무 도움이 안되니 잊으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하는 것이며 그 다음에는 보다 쉽게 잊을 수 있도록 다른 볼거리, 쾌락거리들을 공급하는 것이다. 소설속에서 엘리자베트는 정확히 그와 일치하여 행동한다. 우선은 자신의 방에서 연쇄살인마에 의해 한 여자가 죽은 것 때문에 파스칼린이 불안을 호소하며 엘리자베트에게 상담을 해 오는 장면이다. 그 파스칼린에게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 역시 파스칼린 처럼 이전 사람이 자살한 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자기는 거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나 같으면 아무렇지 않을 거에요.   옛날에 내가 이사한 원룸 욕실에서 어떤 남자가 자살을 했어요. 하지만 난 까맣게 잊고 살았어요.(p. 30)

 

 

   사실 엘리자베트의 이 말은 우리가 늘 하곤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종의 보편적 행태다. 그렇게 그녀는 파스칼린이 왜 과거의 고통을 잊고 새롭게 다시 출발하는데 그토록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어차피 지나간 과거이지 않은가? 하지만 산 사람은 또 계속 살아야 하지 않는가? 과거의 고통에만 얽매이면 제대로 살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기억일랑 빨리 잊고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더 좋지 않나? 새 술은 새 부대에... 실연이든 실패이든 아무튼 어떤 식으로든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이런 말을 우리는 똑같이 사회로 부터도 참 많이 듣는다. 이를테면 각종 천재지변이나 인재가 일어났을 때 사회는 늘 그 재난과 사고가 가져온 아픔을 헤아리기 보다는 일단 복구로써 먼저 지우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덮어둔 다음 그 위에 서서 외친다. '오늘의 이 아픔을 딛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혹은 광복절날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연설했듯 '이제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이 화합' 운운 하듯이. 늘 그렇게 사회는 '새로운'에 방점을 찍어 뭔가 밝고 희망찬 이미지로 사람들의 눈을 돌리고 그렇게 밝은 내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여기에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정말 그러냐고? 너무나 커다란 아픔은 사회가 잊지 않기 위해 기념관이나 기념물 같은 것을 만들지 않느냐?'고. 사회도 그렇게 말하고 우리의 상식 또한 잊지않기 위해 기념관을 만드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이면의 진실은 다르다. 사회가 그런 기념물이나 기념관을 만드는 보다 진정한 이유는 그렇게 기념물이나 기념관 같은 대표적인 상징을 만들어 거기에 모든 집단의 기억을 집중 투사해서 오히려 개인들 각자가 나눠 가지고 있는 기억들을 지워버리기 위함이다.

 

  행여 이 말이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핸드폰을 한 번 떠올려 보라. 전화번호를 손쉽게 저장시킬 수 있으니까 오히려 머리로 전화번호 외우는 것은 더욱 힘들어지지 않았나?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나 일리아드 같은 대하 서사시도 통째로 암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그러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는 저장매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이치이다. 사회가 흔히 기념한다면서 세우곤 하는 각종 기념물 혹은 동상들은 이러한 저장매체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언제든 가서 되새길 수 있는 대상이 있음으로 개인들이 기억함에 대해 별도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념관, 기념물은 사회가 이런 말을 하는 것과도 같다. "야, 언제든 가서 볼 수 있는데 뭐하러 머리 아프게 기억하려 애쓰냐?" 이렇게. 어쩌면 여기에서도 '뭐, 틀린말은 아니잖아' 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 기념관이나 기념물이 사라진다면? 그 사라짐은 단지 사물의 사라짐만은 아니다. 그것은 거기에 집약된 우리 모두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하나의 사물로 인해 우리는 더이상 개인별로 기억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사회로서도 이득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 그냥 기념물 기념관 하나를 없애는 게 나으니까 말이다. 듣기에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과는 달리 동유럽에 산재한 아우슈비츠 같은 유태인 수용소는 그 어떤 복원과 복구도, 기념물 조차 없이 원래 있었던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그 어떤 후대의 덧칠이나 수식없이 단순히 '존재'한다. 마치 치유가 영원히 불가능한 '영원한 현재'로써... 일종의 트라우마 처럼... 그래서 사실은 지우기 힘든 기억이 된다.

  

 

  그런데 사회가 그렇게 해도 안 넘어가는 이들이 있다.

 

  엘리자베트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파스칼린 처럼. 그럴 때 사회는 어떻게 하는가? 로즈네가 무서운 것은 이 역시도 소설에 정교하게 새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파스칼린의 어머니와 엘리자베트에게서 나타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파스칼린의 어머니는 공간이 간직한 기억에 대해 느끼는 기묘한 능력이 이미 파스칼린에게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파스칼린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인해 파스칼린의 어머니가 지적하고 싶었던 사실이 정말은 파스칼린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그녀의 어머니가 정말 뜻하고 싶었던 걸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해보면 파스칼린이 '비정상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파스칼린 어머니의 말은 언뜻보면 파스칼린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과거의 고통에 집착하는 자신을 파스칼린 스스로 '내가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때문에 이러는 것이로구나' 여기게끔 만드는데 있다. 파스칼린의 어머니는 상실과 고통을 기억하려는 그녀를 고통과 상실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문제라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고통과 상실을 기억함이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정상인이 되려면 그것을 지워야 한다고 은연중에 설득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가 행하는 망각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고통과 상실을 기억함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 과거의 고통을 기억함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병적인 집착'이라는 레떼르를 붙이는 것.  더구나 로즈네는 엘리자베트가 파스칼린에게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장면을 내내 자주 반복하는데 이 역시 이러한 사회의 망각 전략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회는 과거에 매달리는 것은 병적인 집착이며 현재에 천착하는 것만이 정상적인 것이라  유포한다. 개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아픈 과거는 재빨리 지워야 할 것, 도려내야 할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아래의 인용문은 여기에 더하여 엘리자베트가 사실은 '사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기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엘리자베트는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당브르 가에서 시작되었다고. 그 때부터 내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린 사람처럼. 그녀는 위험한 일이라며 나에게는 그녀의 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로베르도 있지 않은가. 로베르도 나를 걱정한다고 했다. 그도 나를 돕고 싶어한다고 했다. 모두들 나를 돕고 싶은 것이었다. (p.132)

 

 

 

   그리고 또 다른 전략의 하나는 얼른 다른 '쾌락거리'를 가져다 줌으로써 잊게 하는 것이다.

바로 소설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혼자가 된 파스칼린을 위해 소개시켜 주는 새로운 남자인 '로베르'라는 존재가 그것이다.

 

   내 존재의 가장 은밀한 곳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로베르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를 위해 나를 떠난 프레데릭도 아니었다. 한 남자였다. 살인범과 같은 남자. 살인범과 똑같은 몸짓과 똑같은 움직임을 하는 남자. (p.95)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새로운 연애의 기쁨으로 파스칼린이 가진 과거의 아픔을 대체하려 한다. 사회가 대중문화와 유행으로 늘 새로운 관심거리을 창출하여 현실의 아픔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래서 로즈네는 그런 로베르에게 파스칼린이 거의 넘어갈 뻔 했을 때 파스칼린으로 하여금 프레데릭을 떠올리게 만들고 끝내는 로베르의 목을 조르게 한다. 그렇게 파스칼린 개인의 '이대로 망각하지 않겠다'는, '지금 그대로 고통과 상실을 기억을 통해 껴안겠다'는 의지의 폭발적 분출로 만든다. 그리하여 오로지 그와 같은 개인의 강력한 저항 의지만이 사회가 강요하는 이러한 망각 전략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벽은 속삭인다'는 제인 오스틴의 '엠마' 처럼 표면과 이면이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표면에서는 상실의 아픔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해 급기야는 광기로까지 발전해 버린 한 여인의 여정으로 읽히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보다 더 진실된 얘기는 사회가 강요하는 망각에 맞서 비록 그것이 끔찍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기억함으로 당당히 삶의 일부로 껴안으려 하는 한 여인의 절박하면서도 고독한 투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로즈네에게 물어야 한다. 왜 이토록 정교하게 세공하면서까지 집요하게 기억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인가?

 

   여기에 대해 그녀는 단적으로 대답한다. 망각은 반복가능성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바로 이를 위해서 로즈네는 파스칼린의 전남편 프레데릭이 재혼하여 다시 딸을 가짐과 동시에 감옥에 갇힌 연쇄살인마가 탈출하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다시 임신된 딸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연쇄살인마가 다시금 탈출함으로써 섣부른 망각의 강요는 결국 비극을 되풀이할 뿐이라는 암시를 가지게 된다. 즉 쉽사리 잊혀진 것은 쉽사리 다시 돌아온다. 그것이 로즈네의 결론이며 그래서 그 반복가능성을 끊기 위해 이토록 기억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프레데릭이 재혼한 아내가 딸을 임신했다는 말을 듣고 죽은 딸의 기억을 전해주려 그들의 집 문 앞에 파스칼린이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광기의 행동이 아니라 고통을 환기시켜 같은 기억의 연대로써 비극의 반복적 연쇄를 끊고 싶은 로즈네의 진심어린 최후의 '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즈네의 절절한 호소 아래엔, 저자 자신 서문에서 직접 밝히기도 하고 소설에서마저 삽입하고 있지만, 1942년 7월 16일. 그 검은 목요일의 '벨디브 사건'이 있다. 그건 16일과 17일 양 이틀간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의 어용정부 비시정권 아래에서 자행된 13,152명의 유태인 체포 사건으로 그렇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마구잡이로 잡아들인 유태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로 직행하여 학살당했다. 그러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로즈네가 직접 다시 찾아간 사건이 일어난 넬리통 가에는 그 어떤 벨디브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있는 건 다만 기념비 하나 뿐. 그걸로 벨디브의 비극은 깨끗하게 잊혀졌던 것이다. 세상에 이럴수가! 로즈네는 그 때의 느낌을 파스칼린의 말을 빌어 말한다.

 

 '60년 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그럴수가!' (p.147)

 

 '슬프고 당황스러웠다(p.148)'

 

 

 

  그러니까 '벽은 속삭인다'는 로즈네의 그 때 느꼈던 슬픔, 그 당황스러움에서 나왔다. 어떤 비극이라도 표백시켜 버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 연쇄살인마에 의해 딸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분노로, 다시는 벨디브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딸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파스칼린의 절박함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얇지만, '벽은 속삭인다'는 그런 소설이다. '제발 잊지 말아달라'는 그 호소가 너무나 절박해서 어쩐지 책장을 만진 손끝으로도 묻어나올 지경이다. 그 모든 절박함으로 그녀는 이 한 문장을 알리기 위해 소설을 썼다.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고 그 기억으로 연대하라!'

 

 

  쉽사리 잊혀진 것은 다시 쉽사리 돌아온다. 요 몇 년간 우리 역시 많이 보지 않았는가? 단적으로 이 사회가 다시 80년대로의 회귀했다는 말에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서 그걸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우리에겐 잊지말아야 할 것이 이제 너무나 많아졌다. 용산 참사, 쌍용자동차의 무자비한 정리해고(이와 관련해 이미 2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강정마을 등등... 로즈네의 절박함은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절박함이기도 하다. 쉽사리 눈 감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다면서 고개를 돌리면 언젠가 또 반복된다. 그렇게 이 비극을 또 물려주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오래도록 울리는 그 트라우마적 이명(耳鳴)에 말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2-03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졸립다. 깜짝 놀랐지 뭐에요 저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서 픽픽거리는데 헤르메스님께서는 글을 쓰셨구나! 일단 추천만 날리고 감상은 조금 이따가 해야지요~

이진 2012-02-03 13:49   좋아요 0 | URL
좋다,

일단은 사이코메트리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에 흥미로워요. 사이코 메트리하면 또 제가 껌뻑죽거든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 또 마음이 쏠리구요. 벽은 속삭인다,라는 제목에서도 느껴져요. 소설의 간결함과 깨끗함이.

ICE-9 2012-02-05 20:56   좋아요 0 | URL
후후... 쓰고나서 저도 방전되었어요...
바로 쓰러지듯 잤답니다. ^ ^;
사이코메트리 비슷한 능력이 있긴 한데 거의 미미해요. 내용에 별로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소설은 정말 좋습니다. 과감히 추천드릴만큼.
그리고 소이진님 만화 사이코메트러 에지 좋아하시겠군요. 혹 모르시다면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니까 한 번 봐 보세요. 스토리가 후반으로 갈수록 무너지지만 중반까지는 재미있습니다.^ ^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미우라 시온의 이 소설은 꼭 붕어빵 같다.

 

  한 겨울에 한 입 배어먹는 붕어빵 만큼 또 따뜻한 것도 없지만 늘 먹어왔던 맛인데도 질리지않고 다시금 찾게 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아마도 그의 소설이 손난로 처럼 따스한 온기와 일부러라도 듬뿍 젖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그리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그리는 세계가 온기와 봄날의 조는 곰처럼 달콤한 평안을 머금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미우라 시온이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굳건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상엔 그리 나쁜 사람은 없다는, 알고보면 정말은 착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른 소설들 같으면 얼마든지 협박과 다툼으로 이어졌을 상황에서 조차 타인을 배려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참으로 자주 보여준다. 첫 단편, 'SIMPLY HEAVEN'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아무런 갈등없이 한데 동거하는 모습도 그렇고 두번째 단편 '심신'에서 아내의 눈을 피해 성적 서비스를 받으려 집으로 불러온 여자가 그 때 아내가 나타나자 어려움에 처한 남편을 위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그가 관리하는 아파트의 한 주민으로 연기를 하는 것도 그렇다. 그리고 세번째 단편, '기둥에 난 돌기'에선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조폭 두목 조차 사람의 정을 소중히 하고 한번 정을 나눈 이를 위해서는 그가 아무리 하찮은 인연으로 엮어졌다 하더라도 잔정 가득한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각 단편들마다 주인공들의 어쩌면 상궤에서 벗어났다고도 할 수 있는욕망의 추구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묘사를 통해 사실은 그 이면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즉 주인공들이 그토록 자신의 욕망 추구에 충실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를 둘러싼 타인들이 무엇보다 그를 참고 그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란 걸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정말 미우라 시몬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드는 단편 조차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검은 음료수'이다. 이 단편은 다른 단편과 달리 만일 그러한 타인의 참음과 배려가 없다면 한 개인의 일방적 욕망 추구가 과연 어떠한 파국을 불러오는지 보여주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미우라 시온은 그 모든 개인의 욕망 추구가 가능함의 이면에 인내와 배려로 모종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타인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연애소동'은 나를 둘러싼 타인에게로 먼저 눈을 돌리게 만드는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미우라 시온은 여러 다양한 세입자가 한데 모여 사는 '고구레 빌라'를 소설의 주된 배경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구레 빌라 처럼 우리 세계 역시도 나와 대등한 욕망을 가진 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살고 있으며 내가 지금 나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타인들이 그런 나를 참고 배려해 주고 있기 때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바로 이러한 미우라 시온의 시선, 나 이전에 나를 나답게 있게 해주는 타인을 먼저 염두에 두는 그 포용의 시선에 담겨진 따스함 때문에 '고구레 빌라 연애 소동'이 따끈한 붕어빵과도 같은 온기를  지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붕어빵은 봉지째 사더라도 바람이라도 훔쳐갔는지 먹다보면 어느새 쉬이 사라진다.

  그처럼 착한 사람들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따스하고도 달콤한 온기에 취해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것을 깨닫는 '착하디 착한' 작품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1-25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번 리뷰는 간결하면서도 딱 떨어지는, 책의 내용을 너무나도 잘 요약한 리뷰군요. 설마 저의 징징스러운 댓글때문에 리뷰의 양을 줄이신것은 아니실테지요ㅎㅎ 하지만 드디어 제가 헤르메스님의 글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붕어빵과같다는 비유에 자그마한 감동까지도 느꼈구요. 이리 별점 5개를 쏴주시니... 재밌겠습니다. 가뜩이나 요즘들어 추운데 가슴따뜻하게 해줄 소설도 필요했구요.

ICE-9 2012-01-25 23:39   좋아요 0 | URL
하하... 사실 소이진님의 댓글이 좀 영향을 미치긴 했죠. 이래뵈도 AS에 꽤 세심한 편이거든요^ ^ 이처럼 말의 양을 가급적 줄여보려고도 하고 있는데 잘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제가 주는 별점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세요. 제가 쓴 글을 훑어보면 아시겠지만 거의가 다 별 다섯이거든요^ ^ 저는 사실 별점 자체를 영화의 20자평 만큼이나 거부하고 있어요. 그런 저항의 의미로 별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도록 늘 별 다섯을 준답니다. 아무튼 소이진님 저의 별점에 낚이시면 안됩니다.^ ^

이진 2012-01-26 00:45   좋아요 0 | URL
후후, 저도 별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저는 게다가 제가 제일 최고다하는 작품들만 리뷰를 쓰기에 (신간평가단 도서는 제외하고)전부 별 다섯개인데 그러기에는 또 민망해서 네개로 주기도 한답니다. 이 얼마나 웃긴일인지 ㅋㅋ 양을 줄이니까 저같은 사람은 편한데 헤르메스님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지 심히 걱정됩니다!

헤르메스님 좋은 꿈 꾸셔요)
저는 이만 꿈나라로 갈게요, 굿밤 :)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압니다.

 저는 지금 당신의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 '아비정전'에서 아비로 분한 장국영이 장만옥을 붙잡아 억지로 '1분'이란 시간을 함께 했던 것처럼 저 역시 활자로 당신의 시간을 이렇게 붙들어 매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보내고 있는 이 시간이 뭔가 소용이 있고 의미가 있을 수 있도록 만족할 만한 무언가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만 재주가 비천한지라 그만한 자신은 없네요.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러니 당신을 가급적 많이 붙잡지 않기 위해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책 이야기입니다.

 '대성당'이라는 단편집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통해 당신이 내 과거의 시간에 참여하고 있듯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그런 예술이란 것들 모두가 그렇게 타인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란 생각이 행여 드시지는 않는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대성당'을 읽고 유독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는 모두 열 두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당신이 레이먼드 카버의 개인사를 아신다면 아마 당신 역시도 저와 똑같은 느낌이 드시지 않을까 싶지만, 그 모두가 쉰 해에 걸친 카버 인생의 어느 한 단면들을 그대로 도려내어 담아낸 것만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마치 쉼 없이 흐르는 삶의 시간에서 카메라 렌즈로 어느 하나를 건져내어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도록 앨범에 붙여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맞아요. 딱 그러네요.

  '대성당'이란 제목의 카버 개인의 사진 앨범을 뒤적이고 있는 기분. 사진은 그렇지요. 특히나 앨범의 사진은 기묘한 인력이 있지요. 흘러가는 시간에 렌즈를 갖다 대어 무턱대고 잘라 공간화 시켜 버려서 그런가, 텅 빈 우주에 문득 블랙홀이 생긴 것처럼 주위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지요. 그것이 '충실한 복원'이 주는 신뢰감 때문인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문어가 여덟 개의 팔로 조여 오듯 시선을 붙드는 건 사실이지요. 그런데 무엇에 대한 복원이기에 그만한 마력이 있는 걸까요? 아마도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그래서 다시는 도래하지 못할 그 '시간'의 복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즉 우리가 그 사진을 보면서 거기 재현된 '진짜-시간(real-time)'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마력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대성당'이 사진 앨범과 같다고 한 건 정말 이 단편집이 그런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대성당'에 실린 단편들은 그냥 이야기가 아닙니다. 카버가 있었던 그리고 느꼈던 그 삶의 '진짜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타임머신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저는 단언할 수 있어요. 이 모든 단편에 실린 그 어떤 경험이든 감각이든 그것이 실제 그에게 있었던 것이라고. 그것을 확신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무엇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을 읽고 나서였죠. 그 단편엔, '삶에는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이 있다. 하지만 삶은 또한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 역시 준비하고 있다(이건 단편을 읽고 든 저의 느낌을 두 개의 문장으로 표현해 본 것입니다만...)'라는 카버의 마음을 담겨 있습니다. 이 단편에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병원에서 간호를 하다가 잠시 쉴 요량으로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후회를 합니다. 혹시 자기가 없는 동안에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하게 될까 봐.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던 자신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까 봐. 그래서 그는 집에 있는 내내 병원에 있을 때 보다 오히려 더 불안해하며 간간히 걸려오는 전화도 오만가지나 되는 불행한 예상으로 받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저는 그 아버지의 얘기를 읽으면서 그건 절대로 문학적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실제 카버의 경험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저 역시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죠. 카버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저 역시 그와 똑같았기 때문이죠. 때문에 아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은 정말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그랬습니다.

 

  이런 것이 더구나 비단 이 단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카버의 실제 체험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생각은 더 커져 갔습니다. '대성당'의 인물들은 대부분 알콜 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카버 자신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그 중독을 치료하기위해 1년 사이에 네 번이나 입원한 전력도 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이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이란 단편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오기도 하지요. 또한 '대성당'의 관계들은, 주로 부부 관계를 다룹니다만, 모두 파탄 나 있거나 그 직전이거나 한없는 권태로움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저 몸만 '함께'이거나 '상실'을 지울 수 없는 얼룩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카버의 부부 생활 역시 그랬죠. 오래도록 별거를 반복했고 결국 죽기 6년 전, 그의 멘토였던 존 가드너가 사망했을 때 오래도록 그의 아픔이었고 망집이었던 부인과도 역시 이혼합니다. 그 6년 전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상실을 안긴 해였습니다. '대성당'은 그 바로 다음 해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성당'은 카버가 가장 힘겨운 시간에 쓰여 진 것입니다. 고통 속에 써내려 간 글쓰기 이며 앨범으로 치자면 가장 쓰라린 시간속의 자신의 모습을 모은 앨범인 것입니다. 기형도가 언젠가의 시에서 '온통 검은 페이지뿐이니 뉘라서 보아줄 것인가'라고 말했던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카버가 '대성당'의 열 두 편의 단편을 쓰며 바로 그 힘겨운 시간을 버텨내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리얼 타임'으로 재현되는 '대성당'은 그 때 카버가 겪었던 상실의 아픔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려던 노력하던 시간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상실의 아픔은 작품 도처에서 느껴집니다. 처음 '깃털들'에서부터 카버는 다시는 도래하지 않을 진실한 만남의 순간을 씁쓸히 되새기죠. 상실의 감각은 거기로부터 시작되어 '체프의 집'에서는 삶을 새로이 시작할 가능성을 가져다 준 공간의 상실로 이어지고 더 이상 가지고 살기 보다는 차라리 버리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체념하게 되는 '보존'으로 까지 나아갑니다. 여기까지가 '상실'을 안고 사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면 그 뒤의 얘기는 그러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카버 자신의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칸막이 객실'에서 상실된 것의 집착이 다만 자신의 헛된 망집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별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에서는 상실에 대한 위안의 가능성이 처음 나타납니다. 그 뒤 '비타민'과 '대성당' 까지는 모두 그 위안과 치유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카버가 보는 인생은 언제 프레온이 바닥날지 모르는 냉장고만큼(보존), 언제 차 앞으로 날아들지 모르는 공작만큼(깃털들), 문득 합석한 손님에게서 느닷없이 해꼬지를 당할지 모르는 만큼(비타민), 우연히 굴뚝 청소하러 온 여인에게 '두 다리를 달달 떨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알 수 있을 정도로 반할만큼(내가 전화를 거는 곳)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 그 끔찍한 스스로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상실을 안게 될 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생일케잌을 준비했었는데 생일날 아이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별 것은 아니지만...'의 주인공 엄마처럼. 한 마디로 예방 접종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겪는 것뿐입니다. '칸막이 객실'이나 '비타민' 혹은 '열'에서 보듯 그 상실을 상실 자체로 보듬지 않고 그것을 억지로 메우기 위하여 떠나가 버린 상대에게 매달리거나 혹은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처럼 알코올과 같은 다른 것에 의탁하여 단지 그 아픔만 넘기려 한다면 결국 얻게 되는 것은 더 큰 비극뿐입니다. 카버는 그 지난한 시간들을 글쓰기로 견디면서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조심'까지가 거짓 치유의 시간들이었다면 그 깨달음이 비로소 피어나는 곳은 그 다음 단편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서부터입니다. 거기서야 카버는 진정한 치유는 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타인'으로 부터만 올 수 있다고 깨닫게 되죠. 그리고 그 진정한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상실을 상실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자세임도 역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열'에서 '굴레'는 바로 그러한 '변화의 받아들임'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카버는 거기서 분명 깨닫습니다. 상실은 그저 변화할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며 인생에 그 어떤 굴레가 있던 그것은 이제 다르게 한 번 걸어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카버는 진정한 타인과 만나게 될 때까지 그 어떤 일시적 망각을 가져다주는 것에 기대지 않고 묵묵히 '굴레'의 베티나 '나'처럼 스스로 견뎌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성당'에 이르러 '타인과의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 것인가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그 작년에 영원히 이별해 버린 자신의 멘토인 '존 가드너'에게 바치는 소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분명 거기서 주인공에게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이 어떤지 경험하게 해주는 '맹인'의 존재는 '존 가드너'를 강하게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가 그 단편에서 그토록 인상적으로 마치 '접신'과도 같은 '타인과의 하나 됨'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는 것도 존 가드너와의 체험이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아마도 카버는 스승을 추억하다 그와의 행복했던 교감을 떠올렸고 그 교감의 순간에 자신이 맛보았던 것이야 말로 자신이 정말 추구했던 것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요? 아무튼 그렇게 '고통 속에 써내려간 글쓰기'는 결국 낙관적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서 또한 상실을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타인과 진정한 하나 됨' 역시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전혀 예기치 않은 인물로부터도 올 수 있음을 알려 아무리 예측 불가능성으로 넘치는 인생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랑할 자격이 있음도 깨닫게 해 주죠. 단편집의 제목이 그리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이 '대성당'인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대성당' 자체가 삶에 대한 하나의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카버는 모든 고통의 여정을 끝낸 후에 대성당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맹인'을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이보게 그런 식이라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게 아니겠는가?" (P.348)

 

그렇습니다. 평생을 바쳐도 그 완성을 볼 수 없는 대성당처럼 인생은 불완전합니다. 생래적으로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실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침묵에서 시작해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상실에서 태어났고 상실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하니 카버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상상해서 말하자면, '인생이 어차피 이토록 불완전한 것이라면 상실을 스스로 변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고 그래도 그 아픔이 너무도 커서 견딜 수 없다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라.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말고 행여 그 손이 거부당할까 두려워하지도 말고 내밀어라. 내미는 그것이 중요하다. 인생은 당신의 계산과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예측불가능성으로 풍부하다. 그러니 어느 순간 어느 모퉁이에서 문득 당신의 내민 손을 잡아주는 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밀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조차 아예 생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죠.

 

 

  제가 많이 당신의 시간을 뺏었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대성당'이 무엇보다 카버 자신의 진실한 기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정말 커다란 상실을 겪었고 '대성당'은 그 아픔의 와중에 쓰여 진 기록이 틀림없으니까요. 당신도 그의 일대기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면 작품 곳곳에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그 고통과 성찰의 편린들이 묻어나고 있음을 분명 느끼실 거예요. 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집이 무엇보다 진실 된 기록이라면 상실이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또한 그의 인생과 다르지 않으니 언젠가 도래할 상실의 순간을 보다 잘 이겨가기 위해서라도 한 번 시간을 들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그래서 이렇게 부득이 당신의 시간마저 빼앗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들인 시간만큼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리뷰란 것도 제가 당신에게 내미는 손이 아닐까 싶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타인에게 내미는 손이란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간으로 참여하도록 건네는 손짓일 테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손을 맞잡듯 리뷰를 읽고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면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것이겠죠. 이건 카버가 '대성당'에서 묘사했던 '타인과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맹인은 주인공의 손에다 자신의 손을 그대로 겹치면서 주인공이 본 대성당의 모습을 눈을 감고 그리도록 하죠. 그렇게 감은 눈을 통해 동일한 존재가 되어 그 겹쳐진 손을 통해 대성당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하나로 공유합니다. 그것이 주인공에게 가져다 준 느낌은 이러합니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P.353)

 

 

  뭐, 저의 리뷰가 그런 정도의 느낌까지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만 이 리뷰들로 가득한 광장 역시도 대성당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그들이 쌓아올린 수많은 돌과 나무로 이루어지듯 그렇게 수없이 내미는 손과 맞잡는 손으로 가득한 '대성당'같은 곳이 아닐까요? 돌과 돌이 서로를 지탱하고 나무와 나무가 서로를 받쳐주듯, 전세대가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후세대가 대신 이루듯 그렇게 여기도 애초부터 불완전하게 태어난 인생들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보완해주고 세계를 지탱해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 저는 그렇게 생각되는군요.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 지칠 때면 자주 이곳을 떠올리고 또 지금처럼 누군가 맞잡아 줄 손을 기대하며 이렇게 또 한 부분의 나를 담아 내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당신은 정말 저의 손을 아주 굳세게 잡아주신 셈이로군요. 그렇게 맞잡아 주신 손에, 시간을 들여 함께 해준 당신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함께 있어 주신 그 시간이 얼마이든 그것으로 정말 행복하다고 진정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하루키여, 하루키여...

 

 

  사랑이 언제든 상처가 되었더라도

그래도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좋았던 기억들이다.

 

  내게도 그랬다. 내가 그녀를 떠올릴 때 항상 먼저 그리게 되는 것은

그 어느 여름 새벽 몰래 단 둘이 빠져나와 어떤 둔덕에 앉아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던 모습이다. 바로 그 때 그녀가 내 어깨에 살포시 기대었던 그런 우리들의 뒷모습을 잡은 장면으로 떠오른다. 물론 그 때의 내가 어찌 뒷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하련만은 이상하게도 그렇게만 떠오른다. 정면으로 다가드는 햇살로 인해 눈부신 실루엣으로 차츰 변해가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천천히 `ZOOM-IN`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그 때의 우리 모습을 내가 그런 식으로 가장 보고 싶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정겨웠던 장면을 가장 정겹게 간직하고 싶어서. 하루키를 내게 알려준 건 그녀였다. 그 여름에 나는 그녀가 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시간 날 때 마다 미류나무 그늘 아래에 기대어 읽었다. 매미가 울고 길마다 피어오르는 열기의 아지랑이로 가득해 사람을 마치 문득 해변에 밀려온 표류물을 만나듯이 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간간히 이마를 닦아주는 바람이 있어 좋았다. 처음으로 만나는 하루키의 문장이 그와 같았다. 당시의 문학은 무거운 것이 잔뜩 이라 주제도 문장도 범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는데 하루키의 소설은 주제도 문장도 바람처럼 가벼웠다. 나는 그저 거기에 맡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연주하는 피아노를 들을 때처럼 해석하지도 말고 평가하지도 말고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되었다. 온 몸과 마음을 처마에 매어달린 풍경으로 만들어 공명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하루키를 읽게 되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통해 알게 된 작가는 그 사람과 이별하면 같이 떠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나의 하루키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시작해 `세계의 끝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개정판)`에서 끝났다. 짧다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연애는 풀잎의 이슬로 영그는 새벽의 우연한 입맞춤처럼 시작했다가 낙엽들만이 열심히 구보를 하는 황량한 가을의 연병장에서 끝이 났다. 그렇게 하루키를 보냈다. 철망처럼 촘촘한 나뭇가지들 너머로 저녁놀에 지워져가는 철새들의 행렬에 실어... 저 철새들이 어디에 머무를지 내가 모르듯 그렇게 하루키도 모르게 될 터였다.

 

 

  언젠가 하루키 꿈을 꾼 적이 있다. 아직은 새끼손가락만한 풋고추처럼 사랑이 풋풋할 때. 꿈에서 만나는 사람이 다 그렇듯 유명인을 만나도 놀랍지도 않았고 처음 만나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옆집 아저씨가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 신고 찾아온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가 내게 캐치볼을 하자고 했고 난 이게 그의 소설에 나왔던 두 마리 원숭이 장면 그대로란 걸 인식했지만 다른 말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공간은 겨울날 저녁 8시처럼 이미 어둠으로 흐릿해져 있었는데도 하루키의 얼굴과 손에 든 공만은 뚜렷하게 보였다. 그는 마치 머리만 있는 유령처럼 웃고 있었고 손은 영화 `아담스 패밀리`에 나왔던 손처럼 제멋대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공이 날아왔다. 나는 받았고 그것을 다시 그에게로 던졌다. 머리와 손만 있는 것 같은 하루키가 그것을 받았고 다시 던지면서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이 뭔지 알아?" 굳이 대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아 말하지 않고 공만 받았다. 다시 그에게로 공을 던졌고 그는 "이게 커뮤니케이션이야."하며 공을 되받아 던졌다. 어둠속에 저 홀로 덩그마니 밝은 뜬 공을 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다면 캄캄한 터널 속에서 거세게 달려오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2. 당신과의 커뮤니케이션 -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천체로의 여행

 

 

 

  단 한 번 꿈에 나타났던 하루키가 왜 유독 `커뮤니케이션`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생각해보면 하루키와 나는 그런 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었던 것 같다. 그는 연애와 더불어 내게 던져진 공이었고 결별과 더불어 던져버린 공이었다. 그는 내게 자폐 속에서 스스로 완성할 수 있는 세계의 비전을 던진 공으로 보여주었지만 단 한 명이 빠져나갔을 뿐인데도 속절없이 무너지고야 마는 내 세계의 허약함을 보고는 다시 던져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잊어야 했고 그에 결부된 하루키 마저 잊어야 했다. 원래 존재를 망각함은 그 잔여물까지 포함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파묻어도 기억이란 게 있는 이상 종종 불현듯 찾아든 유령처럼 소환되곤 하는 법이어서, 우린 그것을 미련이라 부른다지?, 그 후로도 오래도록 괴로워하긴 했지만. 그렇게 하루키는 내게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래도록. 온 몸 여기저기에 껌처럼 달라붙은 미련을 버리는 데 걸리는 시간만큼. 그렇게 늦가을 연병장에서의 흐느낌마저 파스텔 톤으로 덧칠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을 때라야 비로소 옛 무덤에서 유물을 발굴하듯 다시금 하루키를 손에 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하루키는 내게 초등학교 동창생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잡문집`이 나왔다. 산문 또한 오랜만인데 책으로 낼 것을 의식하지 않고 이곳저곳에 발표한 여러 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퇴적된 지층 같은 느낌의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게 좋다. 처음부터 가벼움으로 만났던 작가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자신도 조금은 부담을 던 상태에서 썼는지 연말 바쁜 일정에 시달린 탓에 온 몸이 께느른한 가운데 있었는데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마치 강아지가 제발로 찾아와 뺨을 핥아주는 양 위안을 느꼈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었다. 하루키에겐 세 개의 자아가 있다고. 글을 쓰는 자아, 음악을 듣는 자아 그리고 번역을 하는 자아. 하루키란 존재는 그 세 개의 항성을 중심으로 도는 복잡한 천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의 작품들은 내게 여지없이 자폐의 산물로만 보였다. 그의 글 쓰는 행위 자체가 프루스트만큼이나 자폐적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딘가 심해를 천천히 헤엄쳐나가는 거대 오징어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는 압도적으로 홀로이고 세계는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양자택일의 대상이었다. 타인을 비롯한 세계를 대하는 그의 방법론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투과`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 일단 자기의 자아로 걸러내는 `여과`였다. 그는 내내 스스로를 구원해 줄 `양`을 찾았지만 그런 게 바깥에 있을 리 없었다. 쇼펜하우어처럼 그 외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 하물며 세계조차도. 그래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그가 자폐적 자아의 내부로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세계의 끝에 도달했다. 그 끝은 자신의 자페적 자아 세계의 끝이었으며 더 이상 `홀로로는 안 된다`는 한계의 도달이었다. 말하자면 내 생각에 하루키의 작품들은 그 절망의 끝에서 시작된`타자에게 나를 내어 보임`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 글쓰기를 받치고 있는 자폐적 자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음악을 듣는 자아와 번역을 하는 자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은 당연히 외래적 촉발이다. 그것은 엄습이요 투과이지 여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의지에 아랑곳없이 간섭한다. 그것은 `세계의 끝...`에서의 사이렌 소리와 같이 자폐적 세계 전체에 울려 퍼지며 그것 밖에도 존재들이 있음을 알려 혼란을 가져다준다. 음악의 외부의 감각이다. 너 외에도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공존`에의 호소다. 잡문집에 실린 음악에 대한 그의 글들을 읽어보면 분명 느낄 수 있다. 그는 음악을 매개로 아티스트 자체와 교류한다. 그렇게 그는 음악이라는 사실은 그 어떤 객관성도 담보할 수 없는 순수하게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음악을 서로가 완전히 똑같은 느낌으로 듣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대한 절대 해석이 불가능함을 상기한다면) 매개체를 가지고 타인과 서로의 `주관`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자아는 `나를 내어 보임`에 있어 일종의 중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서로의 자아가 상호 대등한 상태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더 넘어서 간다면 `번역하는 자아`가 있다. 번역이란 말 그대로 그 발화의 주체가 되는 타인을 중심 항성으로 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일이다. 그렇게 내 안 깊숙이 그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 자아 내부에 그를 담고 그의 입장에서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키의 자아는 `대화하는 자아`에서 `헤아리는 자아`로 나아간다. 하지만 헤아림은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번역 또한 결국은 남의 언어에 자기의 언어를 대입하는 것이니 거기엔 자신의 판단, 경험을 비롯하여 자아가 투영된다. 즉 번역을 하는 자는 남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자신마저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잡문집의 번역에 대한 하루키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렇게 상호 되먹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자신의 이해 역시 깊어진다. `잡문집` 가장 처음에 나오는, 소설가란 독자들 앞에 가능한 선택지가 많아지도록 가설을 쌓아가는 사람이며 독자는 그 앞에 소설가가 샘플처럼 놓아 둔 이야기에 호응하여 스스로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란 그의 말은 바로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끝에서 마주한 벽에서 문득 문이 하나 생기게 되고 그것을 열어 보다 레벨이 높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갑니다. (P.115)

 

  따라서 `잡문집`에서 번역의 다음 여정이 `인물에 관하여`인 것은 당연하리라.

 

 

 

 

  내 말이 이 세 개의 자아들이 일종의 진화론적 직선 관계에 있다는 걸로 들릴 수 있을 것 같아 부언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정말은 순서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한 순환 고리를 이룬다. 어릴 때 하던 놀이처럼 그것은 서로가 손을 맞잡고 전기를 주고받는 그런 관계인 것이다. 그래도 첫 시작은 물론 `음악을 듣는 자아`였을 것이다. 공존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면 남에게 내어 보일 글쓰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루키 자신도 그렇게 고백한다. 음악이 글쓰기를 낳았고 스타일 역시 그것에서 배운다고. 이렇게 음악이 하나의 촉발이라면 자폐적 세계를 구축하는 글쓰기는 대화와 번역을 통해 교환되고 숙성되어진 것들을 여과하여 감정하는 과정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굴튀김`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가리킨다. 그는 진정한 자아란 타자와의 간격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사람과의 거리, 사물과의 거리 바로 그 거리의 감각이 자아를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루키의 글쓰기란 그 거리의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일종의 `변압기(transformer)`적 행위인 것이다.

 

 

`새로운 음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P.407)

 

 

 

  이 모든 세 개의 항성으로의 여행을 통하여 우리는 그 모든 항성이 서로가 조응하여 하나의 `소설가`라는 하루키를 이루고 있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소설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깊어지고 넓어지는 자신의 세계에 그는 무엇을 담으려 하는가?

 

  혹시 여기에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거기에 부딪쳐서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그 알의 편에 서겠다.(P.91)

 

조금 놀랐다. 내가 꿈을 꾸었던 것. 그리고 그의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나왔던 원숭이들끼리의 공 주고받기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주고받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개개인의 영혼이 더할 나위 없는 소중함을 명확히 밝혀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진지하게 허구를 만들어 갑니다. (P.92)

 

  그렇게 그 알이 깨지지 않도록 받아 주는 것 혹은 벽 자체를 아예 부숴버리는 것. 그래서 알이 알로써 제대로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바였고 진정한 그의 커뮤니케이션이었던 것이다.

 

 

 

 

  3.  다시금 공을 주고받다.

 

 

  잡문집의 글들은 그가 첫 소설을 발표한 1979년에서 바로 최근인 2010년 사이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 때 그 때 써온 글들을 모은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단일한 주제가 있을 리 없고 그 때 그 때의 하루키 인생에 따라 그에 조응하여 나온 글들이다. 더구나 거창한 주제의식 없이 쓰여 진 글이라 오히려 그의 솔직한 속내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잡문집`은, 비유하자면, 베토벤의 소나타를 닮았다. 베토벤은 소나타 32곡을 평생에 걸쳐 작곡했다. 그 소나타 하나하나는 작곡 당시의 베토벤 인생의 단면들이 담겨진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들이 모인 `전곡으로서의 소나타`는 베토벤 인생 자체를 담고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소나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인생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하루키의 이 `잡문집`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한다. 이 `잡문집`은 `세 개의 항성을 가진 우주`를 가진 전체로서의 하루키를 그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그 여정의 순간 순간마다 존재했었던 하루키 역시 엿보게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 하루키를 넘어 인간 하루키 마저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때문에 아마도 우리는 그의 소설을 또다시 벗하게 될 때 마다 그가 제시하는 가설들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라도 다시금 이 잡문집의 글들을 빌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커뮤니케이션에 따르자면 이 잡문집의 모든 글들은 그가 내게로 던지는 공들이 될 것이다. 혹은 그 시간의 결마다 보존하고 있었던 하루키의 알일 수도 있겠다. 그런 그의 글들을 읽으며 어느 순간 다시금 손을 내밀어 그 공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늦가을의 연병장 저물어가는 하늘 저멀리 던져버렸던 그의 공을 말이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의 미소는 푸근했다. 늘 사오정 같다고 생각했던 용모도 여전했다. 우리는 그 때 미류나무 아래에서 소나기 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람소리를 간간히 들으며 공을 주고받던 기억을 나눴고 이제 그 추억을 다시금 재현하듯 서로 공을 주고받았다. 나는 공을 받을 때마다 맨손으로 아주 오래 주물렀다. 그가 건네는 가설을 내 틀에 맞춰 다듬듯이... 그 때는 저녁 8시의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새벽 5시의 하늘 같다. 다시 던져주기를 바라는 그의 조금은 수줍은듯한 미소를 보며 이렇게 같이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12-2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 매니아랍니다.
소설도 열심히 읽고, 산문집은 더 열심히 읽죠.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너무 좋아해요, 읽고 나면 성실히 살아야하는 느낌이 든달까.
그런데 반대로 소설을 읽고 나면 너무 나른해져 버려요.

저는 하루키의 책에 대해서 정리도 안 되고 통합도 되지 않고 있어요.
엄청나게 좋아하는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그래서 더욱 좋아하는걸까요? 인간은 모호함을 더 사랑한다 하더군요.

언젠가, 저도 이런 리뷰를 쓸 날을 기대해봅니다... ^^

ICE-9 2011-12-25 20:59   좋아요 0 | URL
호오~ 역시 마녀고양이님도 하루키 매니아셨군요.
저도 에세이를 소설 만큼이나 좋아합니다. 그의 에세이를 통해 카버를 알았고 재즈의 빅밴드 시절을 좋아하게 되었죠. 그의 글을 벗하면 뭔가 같이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있어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한 라디오 DJ의 말을 읽었을 때 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뭔가 전하고 싶으 진심. 그런게 그의 글에 있으며 그 진심들이 작품에 따라 시간이 흘러 갈수록 점점 변해간다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더욱 친근한 벗처럼 여기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
마녀고양이님의 하루키에 대한 리뷰를 어서 만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