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의 단식법
샘 J. 밀러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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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슈퍼히어로 중의 하나가 스파이더맨이라고 알고 있다. 그가 인기 있는 이유는 그가 아이언맨처럼 부유한 이가 아니라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삶의 비애를 겪고 있는 처지라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한 미국인들에게 공감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기 피터 파커만큼 찌질한 또 한 명의 슈퍼히어로가 있다. 그의 이름은 맷. 바로 미국 작가 샘 j. 밀러의 장편데뷔작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는 슈퍼히어로는 아니다. 다만 초능력을 가졌을 뿐, 이렇다 할 영웅적인 행위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초능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특이하다. 그는 거식증을 앓고 있는데 바로 그것이 초능력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맷은 찌질하다. 십대인 그는 뚱뚱한 외모에 동성애자다.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고등학교에서 그 두 가지 사실은 그로 하여금 늘 외부인으로 머물게 한다. 그 역시 자신은 결코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여긴다. 이런 삶도 견딜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그가 겪는 거식증은 그러한 절망의 양태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혐오하고 늘 주변인으로 만드는 삶을 비관하는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병. 그런데 그 거식증이 남다른 감각을 갖게 한다. 냄새로 타인의 생각까지 읽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은 사실 외부인에게 발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고 섬처럼 주변만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남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무슨 생각을 가지는 것에 대해 예민할 테니까. 그건 어쩌면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열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결국 자신의 사랑을 찾아내고야 마니까.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주변인적인 삶에 대한 십대의 고민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재밌게 풀어간 작품이다. 더구나 그리고 있는 주인공의 심리와 현실적 상황들이 아주 현실적인데 이건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에 바탕되어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진지하게 읽혀지는 대목이 많다. 삶은 고달프다. 그것도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삶이 그러한 꼴을 하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삶은 점점 더 많이 모래알처럼 내 손에서 빠져 나간다. 내 힘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순간이 많아진다. 이런 경험이 있다면 이 소설의 주인공 맷에게 더 많이 공감할 지 모르겠다.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디고 껴안을 수 있는지를 독자로 하여금 어느 순간 깨닫게 만드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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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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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타고난 정체성 하나 때문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포로 바뀌어 버리는 일이 인류 역사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흑인 노예 제도가 횡행하던 미국의 남부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랬을 것이다. 자녀나 형제 혹은 부모가 다른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도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했을 것이며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등으로 쏟아지는 채찍 세례를 감내해야했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거리는 물론이고 백인의 눈을 감히 쳐다봤거나 사소한 말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린 그걸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무단 통치할 때 태어난 소년과 소녀 또한 일본군에 의해 언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1930년대에 그들이 독일을 통치하자 거기 사는 유태인은 삽시간에 독일인이 아니라 다만 유태인이 되어버렸다. 1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들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독일을 위해 군인이 되어 그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런 사실들은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나치에게 중요했던 건 유태인이 뭘 했느냐가 아니었다. 그냥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 중요했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우리는 성별이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나치에게 유태인이 그랬다.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 대상이었고 체포되는 족족 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소설, '여행자'는 바로 그런 일상을 담는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자국 내 유태인이 외국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국경을 모조리 폐쇄해버린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에서 우리는 질버만이라는 유태인과 동행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위해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 때 동료 군인이었던 베커와 함께 꽤 벌이가 잘 되는 사업체도 운영 중이다. 질버만은 베커와 함께 역에서 자기가 타고 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때 그는 그저 도박 중독에 빠져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베커를 탐탁지 않아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타게 될 기차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 되리라는 걸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물론 그는 바보가 아니다. 공공연히 유태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는 건 뼈져리게 알고 있다. 곳곳에서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는 걸 허다하게 보았으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아리안인으로 보이는 외모라 그러한 기습적인 체포에선 살짝 비켜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모 때문에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얼마나 유태인을 혐오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가득 체험하고 있었다. 외모만 보고 자신을 그저 아리안인이라고 여긴 독일인들이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태인에 대한 생각들을 숨기지 않고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무래도 질버만 또한 독일을 떠날 것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과 아내를 위한 비자 발급을 부탁한 상태다. 그러나 아들은 그걸 쉽사리 구하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 질버만의 집이 유태인 체포를 위해 돌아다니는 청년단원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제 집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질버만은 계속 기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제목처럼 '여행자'가 된 것이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p. 214)

 

 그러나 낭만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그가 여행하는 건 원해서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까. 그는 단 하룻밤도 몸을 편히 의탁할 수 있는 집이 없는 존재요, 맘 놓고 발들 디딜 수 있는 땅이 없는 존재다. 단골로 이용했던 호텔은 유태인이라 더이상 방을 내줄 수 없다고 하고 아내가 피신한 아내 오빠 또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단 하루만이라도 재워달라는 질버만의 간구를 차갑게 거절한다. 간신히 국경을 넘어 벨기에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벨기에 경찰은 망명을 요청하는 질버만을 묵살하고 독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믿었던 친구 베커는 자신은 당원이고 질버만은 유태인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헐값에 사업을 양도 받는다. 이제 자신의 자랑이던 사업에서마저 쫓겨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뤘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가정, 사업, 친구, 평판 그 모두를.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로. 어디서든 그를 맞이하는 건 냉혹한 차단의 손바닥 뿐이다. 


 그야말로 그는 인간 영역에서 순전히 배제된,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독일엔 인권을 위한 법이 있지만 질버만을 위한 건 아니다. 기차에서 만난, 처음으로 연애 감정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시민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며 시민의 윤리를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독일인의 눈에 그는 더이상 시민이 아니다. 


 "어쨌든 난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버릇을 고칠 순 없어요. 나는 시민으로 태어났고 시민으로 죽을 겁니다. 도주하긴 하지만 시민이에요. 그건 확실합니다."(p. 281)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불과하다. 조르지오 아감벤을 통해 호모 사케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것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여행자'를 읽고서야 비로소 호모 사케르적 상황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자기가 직접 겪었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상황도 현실적이고 묘사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압권인 것은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다.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적인 손해를 보는 건 싫어하는 그야말로 소시민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질버만의 내면 고백을 읽다보면 그냥 내 눈 앞에 질버만이라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것이다. 그렇게나 구체적으로 또 피부에 와닿게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고(이 소설은 정말 몰입감이 대단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태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그야말로 호모 사케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불가능한)에 대해 여실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고발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후자에 대해선 픽션이지만 이 소설만큼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상황을 생생하게 체득시켜 주는 것은 또 없기에 아무래도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려내고 있는 것과 똑같이 동시대 독일에서의 유태인 삶을 그려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소설만큼 이 소설도 정치와 우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어떤 정치 현실을 만드느냐에 우리 일상의 명암이 결정된다는 것도 확연하게 깨닫도록 한다. 질버만은 자기보고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항변한다. "난 독일인이야. 세계 대전 때는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사람이라고!"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정체성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다. 그는 아리아인 여인과 결혼했고 종교 또한 기독교였다. 유태인은 그에게 그냥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필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그는 나치가 아니었으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것이었다. 그것이 설마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만드리라고는 가장 무서운 악몽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는 바람에.


 그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너희 외국인들이 여기 앉아 있구나.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평온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해서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게 너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겠지. 너희 고국에서는 신임투표할 때 감독관이 옆에 기관총을 두는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너희는 그저 독특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사람들이 너희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까. 내게는 위험으로 가득한 원시림이 되어가는 이 호텔도 너희에게는 안락한 공간이라서, 평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돼.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는 제3제국에서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겠지(p. 52 ~ 53)


 질버만도 그런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계층이, 이웃이 비민주적인 처사로 낙인이 찍혀 사라질 때 무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은 전혀 침해받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사업상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다주어 모른 척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둘 내버려 두다 보면 어둠의 수면은 차츰 차츰 차 올라서 결국 자기마저 삼켜지게 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독재의 권력 앞에선 그 어떤 일상의 평온도 아주 얇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을 뿐이니까. 지금도 벌어지는 미얀마 국민이 처한 일상이 그걸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미얀마를 통해, 또 소설 '여행자'를 통해 우리는 뼈가 저리도록 깨달아야 한다. 누구나 '질버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별안간 자신이 호모 사케르가 되고 모든 일상이 파멸과 죽음의 암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국경을 초월하자는 의미에서 사회란 말을 일부러 빼버렸다.) 가장 작고 약한 자가 당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처사에 무심해선 안되면 오로지 사익 추구를 위해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결코 내 일상과 유리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 일상의 평온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움직임이다. 소설 '여행자'는 이러한 각성을 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열차의 존재감으로 도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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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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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심. 사랑의 시작엔 그런 것이 있다. 

 갑자기 상대가 환하게 보이고 거기에 내 날개를 접고 앉아 고이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강렬히. 그건 마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다 간신히 찾아낸 등대 불빛과도 같다. 그 끝모를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 마침내 안주할 땅을 찾았다는 밝고도 따스한 반가움. 더이상 지치고 아픈 영혼을 받아줄 곳을 찾아 문전 걸식하지 않고 뿌리내릴 곳을 찾았으니 어찌 환희로 눈부시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눈부심이 지나치면 눈이 멀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사랑하는 나는 사라진다. 사랑은 빛을 받는만큼 주는 것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이 대등하게 상대에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랑은 불균형으로 삐걱거리다 결국 멈추게 된다.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에게 오롯이 함몰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나로 제대로 설 수 있어야 사랑 또한 지속된다. 포함되기 보다는 포용하는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나가 되어서 늘 상대를 위하여 애쓰는 것. 사랑은 그 여정 전체에 비로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종결의 명사가 아니라 진행의 동사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사랑과 참 많이 닮아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성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뜬금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랑, 모성 얘기를 꺼냈던 것은 이번에 나온 영국 작가 제시 버튼의 소설, '컨페션'이 바로 그것에 관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하나는 1980년에서 83년으로, 여기서는 앨리스라는 여성이 주연을 맡는다. 다른 하나는 2017년으로 로즈라는 여성이 주역이 된다. 소설의 처음은 앨리스가 연다. 스무 살의 그녀는 서른 여섯의 작가 콘스턴트 홀든을 우연히 만난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앨리스는 도서관에서 홀든이 쓴 '밀랍 심장'을 읽고 선 매혹되어 버린다. 그녀는 코니(콘스턴트 홀든)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것마냥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고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코니는 확고하게 자기 삶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세상에 뚜렷하게 새기면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음에서 오는 강함이 눈부신 빛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잠시 책의 표지를 본다. 거기엔 초록 토끼가 그려져 있다.




 이는 코니가 나중에 쓸 작품, '초록 토끼'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앨리스라는 이름과 토끼를 통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그 작품에서 앨리스는 갑작스런 토끼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코니가 그 토끼였던 셈이다.


 무대는 바뀌어 이제 2017년이다. 두 번째의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부재하고 있는 엄마를 자신만의 허구로 덧칠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덧칠은 엄마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에 지쳐 열네 살에 이르자 엄마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실감이 치유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늘 뭔가 부족하게 여겨졌고 그 탓에 타자에게 더 매달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행복을 볼 수 있었다. 행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는 데 지쳤다. 내가 가진 숱한 시시한 자아 사이에서 최고의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나는 내 안에서 실패하는 자아나 잠재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 38 ~ 9)

 단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바위를 찾으면 거기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부류였다.(p. 71)

 이건 엘리스가 코니에게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둘은 자신의 허한 부분을 타자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닮은 존재였기 때문인지 작가는 로즈에게도 똑같이 초록 토끼를 선사한다. 엘리스가 '밀랍 심장'을 읽고 업힐 대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로즈 역시 딱 두 권밖에 쓰지 않았다는 코니의 마지막 소설 '초록 토끼'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안길 수 있는 엄마를 찾아낼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초록 토끼'의 작가가 엄마와 밀접한 관계였으며 실종된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란 걸 알게 된 로즈는 신분을 속여 코니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려고 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네살. 앨리스보다 14년은 더 많지만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다. 9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고 이미 남자 집에서도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접받지만 마음 속의 공허는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 친구 집에서도 자신을 가족이 아니라 손님으로 여긴다. 산다는 느낌 보다는 억지로 잘 살고 있다고 연기만 하고 있을 뿐 실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인스타그램 스타로 스타일 유행을 선도하는 친구 켈리는 그걸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지만 로즈는 남자 친구 조가 아이의 아빠로 영 미덥지 못하다. 결국 로즈에게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코니 하나였다. 그녀는 초록 토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 ]



 이제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야겠다. 이미 눈치채셨을 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바로 로즈의 엄마라는 사실을(두둥!). 이걸 깨달으면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코니와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길래 엘리스가 다른 남자 사이에 로즈라는 아이를 낳게 되었나이고 다른 하나는 왜 앨리스는 아이를 두고 사라져버렸는가이다. '컨페션'은 그 미스터리를 1980년대의 앨리스와 2017년의 로즈 이야기로 병행하여 풀어나가며 닮았지만 후반에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그녀들의 여정을 통하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를 시나브로 세공한다.


 앨리스와 로즈의 여정은 정말 닮았다. 한 권의 책으로 여정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코니라는 삶에 온전히 뛰어든 순간이 한창 코니의 작품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물론 앨리스의 얘기에선 코니의 작품이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지는 중이며 로즈의 얘기에선 코니가 몇 십년만에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 다 코니의 주체성이 한껏 발현된 현장이다. 코니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이다. 그녀는 소설을 쓸 때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며 온전히 자신만으로 채워진 세계를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이 설령 앨리스라고 해도. 그녀는 집필에 방해가 되기에 아이까지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나는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엘. 그럴 시간이 없어.(p. 114)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그야말로 고유한 주체성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앨리스와 로즈 둘 다, 그 장소에서 섣불리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앨리스는 그렇게 하면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자율성이나 자신감, 요구를 조금이라도 표현하면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느꼈다.(p. 161)


  로즈는 진정한 자신을 죽이고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예 로라라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내 정체성의 실을 풀어 새로 짜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나 자신을 버리고 커다란 구멍에 단어와 판타지를 쏟아붓는 일이 어떻게 이토록 쉬울까?(p. 185)

 그렇지만 로즈의 이 '허구 만들기'가 서로 닮은 여정을 걸어온 앨리스와 로즈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앨리스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지는 동안 내내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단 한 번도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꾼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있었다. 이러한 앨리스의 수동성은 코니의 친구 화가 샤라가 그녀를 그릴 때 단적으로 대표된다. 그녀는 영국에 있었을 때와 똑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 앨리스를 보면서 샤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인어를 그린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걸쳐서 사람과 물고기의 어정쩡한 중간 형태로 남아있는 그녀를.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작가가 여기서 인어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여정이 변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체였다. 코니에게 매혹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와 예전 직장을 정리한 것은 그녀의 결단이었다. 능동적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여행이 어느새 한없이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인어는 거기에 딱 알맞는 상징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 또한 자신의 언어를 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니까 말이다. 그와 동일하게 앨리스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다. 샤라의 붓 앞에 섰을 때처럼 다만 누가 자신을 봐주길 기다릴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품고 인도하기 보다는 누군가 자신을 안고 데려가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로즈는 비록 허구이긴 해도 스스로를 구성하고 전달한다. 자기가 직접 쓴 스토리를 자신조차 믿을 정도의 현실로 만든다(그녀는 소설 마지막에서 코스타리카로 떠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으로 꾸몄던 이력인 코스타리카 여행을 진실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로즈는 코니와 마찬가지다. 삶을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로즈 또한 주체성을 은은한 수준이긴 해도 확실히 빛내고 있었다. 이는 코니가 새로운 소설, '변심'을 쓰는 과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앨리스는 소외되어 있었지만 로즈는 코니와 대등하게 대화하는 관계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코니에게 묻고 대답을 이끌어내며 자신만의 견해를 내놓기까지 한다. 


 분명 이 차이가 둘의 미래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정말로 인어가 되어버린다. 샤라가 그토록 원하는 엄마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주기 보다는 받는 것을 더 원한 나머지 안데르센 동화 속 인어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거품이 터지듯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다르다. 그녀 역시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 조와 다시 합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버티며 낙태를 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앨리스는 아이만 남고 엄마는 사라졌지만, 로즈는 아이가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그렇게 전자는 소멸하고 후자는 항존한다. 앨리스가 인어의 이미지라면 로즈는 로즈버드의 이미지다.(아예 직접적으로 로즈를 '로즈버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손 웰즈가 감독한 영화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삶의 자리가 달라졌어요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마음 중앙에 변항없이 남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로즈는 그야말로 로즈버드인 것이다.



[영화 '시민케인'에 등장한 '로즈버드'의 모습]



 로즈는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서 작가는 책임을 제시한다. 이것이 수동적인 존재를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주는 뼈대라고.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다. '앨리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주체성을 발휘한 선택이 아닌가?'이다. 대답하자면 아니다. 앨리스가 엄마가 된 것은 주체화(主體化)에서 비롯된 결단이 아니었다. 진실은 도피의 일환이었고 코니가 여배우 바버라와 바람을 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앨리스는 코니가 바버라에게 매혹당했다고 여겼는데 그건 바버라가 코니 보다 더 빛나는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눈부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코니에게 그랬듯 코니 역시 바버라에게 홀렸다고 생각했고 샤라가 그토록 바라는 엄마가 되면 자기도 바버라만큼 눈부신 존재가 되어 코니의 마음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런 식으로 앨리스는 계속 욕망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걸 택했다. 그것이 어려워지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 그냥 달아나버렸다. 코니의 바람으로 상처를 받자 사랑하지도 않는 샤라의 남편 (달아날 때조차 앨리스는 혼자서 못하고 자신을 데려갈 사람을 필요로 한다.)을 유혹하여 멕시코의 해변으로 떠나버렸던 것처럼. 앨리스는 코니의 존재감에 위축되어 자신을 작다고 여기거나 소외되어 있다고 느낄 때마다 수영장이나 바다처럼 언제나  가까이 있게 되는데, 아마도 그건 삼켜진다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라는 주체가 지워지는.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한 번 바다로 갔다는 것은 현재 마주한 고난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버거워서 회피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코니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당신은 책임과 마주하는 족족 달아났어. 가까워지면 달아났지. 아버지에게서, 내게서, 맷에게서 달아났어. 살면서 또 누구에게서 달아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내겐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당신이 또 그럴거라는 예감이 들어."(p.467 ~ 8)

 코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앨리스는 아이를 책임져야했을 때 달아나버렸으니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끝내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앨리스도 그렇게 되었다. 수동적인 예속 상태에 안주하는 한, 기다리는 건 사랑의 상실과 나란 존재의 소멸 뿐이다. 로즈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홀로 자신을 책임지려했고(로즈와 조가 공동 투자한, 그러나 단 한 번도 축제 장소엔 가보지 못하고 내내 부모님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부리토 트럭은 로즈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조에게 매인 존재였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냥 녹만 쓸 뿐인 트럭을 조는 로즈가 독립적 주체가 되자 자신의 오랜 망집에서 놓아준다. 처분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돈은 로즈의 자립을 위한 자본이 된다.) 아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로즈의 중절 수술은 엄마가 되는 두렵고 낯선 모험의 여정을 회피한 것이 아니다. 코니의 고백(컨페션)을 통해 앨리스가 어쩌다 자신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양육에 있어 자기 역량을 깊이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부족한 자신이 아이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남자 친구 조가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마냥 부리토 트럭을 붙잡고만 있다가 로즈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달리 말이다. 그러고보면 앨리스에게 있어 로즈 또한 부리토 트럭인 셈이다. 코니는 로즈가 조와 헤어졌을 때, 이런 조언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 진정한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p. 276)

 하지만 이 말이 사랑과의 결별이 주체로 만든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사랑에 마냥 매달리다 거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분별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말라는 조언이다. 앨리스의 패착처럼. 역량은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인데 그건 독립적인 주체로 제대로 섰을 때라야 알 수 있다. 그제서야 자신이라는 영역의 경계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의존으로 매몰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며 나도 대등한 버팀목이 되어 관계를 당당히 떠받치는 책임. 로즈가 코니의 집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책임은 주체를 가동시키는 높은 옥탄가의 연료인 것이다. 


 사랑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가 또한 주체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위에서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란 말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정비례 관계다. 타인의 등에 업혀 사랑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도 서로의 책임을 통해 항상 충전되어야 하는데 기대거나 매달리기만 하는 사랑은 착취이기 때문이다. 오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두 발로 서서 그것을 위해 내가 먼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을 거듭 헤아리는 자만이 사랑 또한 오래 보존한다. 로즈의 마지막 장면은 자못 뭉클하다. 로즈는 어릴 때 자신을 두고 저주라고 말했던 코니의 배웅을 받으며 코스타리카로 떠난다. 소설에서 코니는 단 한 번도 남을 배웅한 적이 없다. 그런 코니가 떠나는 로즈를 오래도록 지켜볼만큼 그녀는 성장했고 앨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눈부신 빛을 얻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의 눈부심 속에서 눈이 멀지 않으려면 빛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컨페션'이란 초록 토끼가 궁극적으로 우릴 데려가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사랑은 향유가 아니라 책임에서 비로소 개화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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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나무 아래 - 시체가 묻혀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이현욱 외 옮김 / 위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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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평탄하지 않다. 그건 눈을 따갑게 만드는 먼지들이 풀풀 날리며 자꾸만 발에 채이는 자갈돌도 많은 거친 길이다. 이마를 환하게 만드는 눈부신 빛보다 차마 마주하고 싶은 어둠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다. 삶은 그렇다. 바랐던 꿈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저 멀리로 홀연히 사라지고 원치 않는 옷을 입고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식물처럼 붙박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만 곱씹다가 물러갈 때가 되면 후회 속에 사라진다. 삶이란 정말로 벚꽃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는 것과 같다. 잠깐 누리는 화려함은 오랜 번민과 절망 그리고 고통을 거름삼아 피어나는 것이다. 7년간 지하 속에 날다가 고작 7일만 바깥 세상에 나와 울다가 최후를 맞는 매미와 같이.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은 봄에 읽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비 오는 처연한 봄밤이라면 어울릴 것 같다. 찬바람 씽씽 부는 늦가을이나 겨울밤에 읽기엔 더욱 제격이다. 그의 글들을 모은 책이 나왔다. 제목은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다면 아주 낯익을 문장이기도 할, '벚꽃나무 아래 시체가 묻혀 있다'이다. 



 낮 보다는 밤을, 밝음 보다는 어둠을, 희망 보다는 절망을 찬양했던 작가.

 

이런 모든 것이 햇빛이 비추는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곳에는 감정의 이완, 신경의 둔화, 이성의 기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햇빛이 상징하는 행복의 내용이다. 아직도 이 세상이 생각하는 행복이 이것들을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처럼...('겨울 파리' p.121)


생명력 넘치는 여름만을 원하는 이들에게 실은 더 중요한 게 살을 에이며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이라고 알려주는 작가. 


  이 골짜기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휘파람새와 박새도 하얀 햇빛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나무의 새싹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몽롱한 이미지에 불과하지. 나에게는 슬프고도 잔인한 사건이 필요해. 그런 균형이 있어야 내 이미지가 명확해지거든. 내 마음은 악귀처럼 우울하게 메말라 있어. 내 마음속 우울함이 완성될 때만 내 마음은 온화해지지.('벚꽃나무 아래'중에서 p. 200)


그가 바로 가지이 모토지로다. 기형도 시인은 자신의 시 속에 이런 구절을 남긴 바 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 볼 것인가'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도 그렇다. 다른 이라면 한창 다가 올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스무 살에 폐결핵에 걸려 늘 그 병을 그림자처럼 짊어지고 살았던 작가. 나이가 들수록 요양을 위해 이 여관 저 여관을 전전해야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나 다다미에 놓은 이불 속에서 누워 보내야 했던 작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건 폐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 뿐이고 그렇게 자기도 언젠가 가리라는 것을 늘 절감하며 살아야했던 작가. 그런 작가가 새로 돋는 새싹 보다 곧 쓰러질 고목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우울을 옷으로 삼고 비애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더라도 삶을 쉽게 포기하려 했던 건 아니다. '겨울 파리'라는 단편이 잘 보여주듯, 그럴지라도 삶이 허락하는 모든 순간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고 그걸 자기 스스로 실천했다. 그는 증명하고자했다. 모든 이들이 기피하는 고통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릴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의미있는 경험임을. 그것이 바로 시체 위에서 태어나 더없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벚꽃나무란 이미지의 참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좌절을 위로하고 새롭게 보도록 이끌어주는 작가. 그러므로 가지이 모토지로의 글은 벗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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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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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의 역사도 이제 제법 오래되었다. 

 초창기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서프러제트가 일어났던 건 19세기 초였으니까 말이다. 세월이 그만큼 흐르다 보면 이념 역시 그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상황은 늘 유동적이고 아무리 어제 새로운 것이라 하여도 내일이 되면 곧 낡은 것으로 바뀌어져 버리니까. 때로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늘 옛 것만 고집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황이 달라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현실을 왜곡하며 옛 것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런 걸 사람들은 종종 독선이라 부른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듯, 그런 이념의 독선 또한 많은 폐해를 남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허다하게 그걸 보아왔다.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이 그러하고, 나치즘과 스탈린이 그러하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태도나 이슬람의 테러리스트들에게서도. 이념은 어디까지나 삶의 유용성을 증진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하지, 삶을 통제하는 것을 넘어 남의 삶을 유린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이념 보다 삶이라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작품을 만났다. 바로 2019년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버나딘 에바리스토의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이란 소설이다.





 5부에 13쳅터 그리고 에필로그 하나. 


이러한 형식을 가진 소설에는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 모두 12명의 인물이 저마다 화자가 되어 등장하며 그들의 위치는 대등하다. 중심과 주변의 나뉨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이념적으로, 인종적으로, 계층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에 위치한 사람들을 서두를 여는 인물인 엠마가 연출하는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를 기점으로 하여 한데 모아선 독자 앞에 펼쳐 보인다. 마치 한 사람씩 차례대로 나와 무대 중앙에서 일인극을 하듯이.


 그렇게 우리는 소설을 매개로 저마다 다른 행로로 뻗어나가는 12개의 선들을 보게 된다. 앞서 5부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다만 군집의 의미만 띨 따름이다. 그러니까 관계가 깊은 인물끼리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단 뜻이다. 1부엔 아프리카계 흑인이자 레즈비언인 엠마와 그녀의 딸, 야즈 그리고 엠마의 레즈비언 친구 도미니크가 등장한다. 2부엔 오직 엠마가 가장 친한 친구들끼리 만든 '언퍽위더블'의 자매인 셜리와만 관계가 있을 뿐인 캐럴과 그녀의 엄마 버미, 친구 라티샤가 중심을 이룬다. 3부엔 엠마의 이성애자 친구이자 캐럴에게 큰 상처를 준 교사 셜리, 그녀의 엄마 윈섬 그리고 처음엔 싫어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젊은 선생님들 때문에 저절로 동지가 되어버린 퍼넬러피가 전면에 나선다. 4부에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한 메건/모건 그리고 그녀/그의 할머니 해티, 그 해티의 엄마 그레이스가 무대 중앙으로 나와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렇듯 이 책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흑인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저마다 다른 계층과 생각 그리고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를 고발하는 게 중심이 아니며 그처럼 부조리한 사회에 내던져진 이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대화를 시도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개인으로 내던져졌을 때 이들은 내면의 강한 신념엔 너무나 안 어울리게 불안하게 흔들리고 연약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나 도미니크가 그렇다. 그녀는 엠마조차 반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강인한 신념의 소유자였지만 우연히 한 눈에 반한 은징가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의존적이 되며 급기야 구타마저 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2부의 캐럴 역시 친구 라티샤가 초대한 파티에 갔다가 성폭행을 당한 뒤론 속세의 성공만이 자기 존재를 보장해주리라 믿으며 살아간다. 그녀의 엄마 버미는 셜리가 나이지리아인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게 불만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나이지리아 문화 때문에 심한 핍박을 겪었고 오직 혼자 힘으로 성공을 일궈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홀로일 때 의지할 수 있는 가지가 필요한 존재로 그려진다. 어쩌면 그래서 두드러지게 가족이 묘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부 모두 가족이 등장한다. 주로 모녀 관계로 나타난다. 서양 속담에는 조물주가 전생의 원수들을 모녀 관계로 태어나게 한다는 게 있는데 마치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소설에 나오는 모녀 관계는 상충한다. 큰 틀에서 모두 페미니스트인 엠마와 야즈조차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실천하는 방식도 다르다. 캐럴과 버미도 그렇고 셜리가 레즈비언인 엠마와 가까워지는 게 영 못다한 윈섬의 관계도 그렇다. 소설 전면에 등장하진 않으나 성전환한 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메건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가족이란 종종 서로 다른 이들을 그저 하나의 묶음으로 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선명하게 타고난 정체성이 있고 어떤 대상을 봤을 때 그것을 규정한 오래도록 전통으로 자리잡은 가치관이 있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에겐, 특히 후발 세대의 경우, 타고난 것보다는 자라면서 경험한 것들이 시야와 신념의 형성에 더 커다란 영향을 준다. 만일 내가 생각한 대로 이 소설에서 가족이란 게 페미니즘이라는 이념 범주를 비유한 것이라면 후발 세대의 이러한 행태들은 페미니즘 또한 오래된 옛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그만큼 달라진 세월과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걸 뜻하는 것일수도 있다. 더구나 소설 속 12명이 가진 생각, 처한 위치가 다양한 것처럼 페미니즘 또한 계속적으로 변화하면서 확장되지 않으면 이 모두를 포용할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작가가 1부의 완전히 페미니즘적 지형(엠마와 도미니크는 자신을 따돌리는 백인과 남성 중심 주류 사회에 수류탄을 던지는 사람들이다.)에서 2부, 3부가 거듭될 수록 점점 더 비 페미니즘적 지형(투사에서 그냥 보통 여성으로)으로 나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원래 페미니즘 역사에서 엠마가 위치한 흑인과 레즈비언은 버려졌었다. 마찬가지로 성전환자 역시 오래도록 운동의 바깥에 있었다.(최근 우리나라에도 성전환자가 그 이유로 입학한 여대에 가지 못하거나 그걸 이유로 강제 전역 당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서서 입학을 불허해야 한다고 외치거나 불합리한 처사에 침묵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페미니즘의 지형 안으로 편입되어 갔다. 이와 똑같이 셜리와 버미, 퍼넬러피 또한 포용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성 중심주의에 쩔어있다고 해서, 설령 적대적이라 하더라도 내쳐선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인 여성 코트니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인용하여 야즈에게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중요해진다.


 코트니는 록산 게이가 '특권 올림픽'을 하지말라고 경고했으며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특권은 상대적이며 전후 사정을 따져 살펴야 한다고 썼다고 대답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야, 야즈. 그러니까 내 말은 이 모든 게 어떻게 귀결되느냐는 거지, 마약쟁이 싱글맘과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나 이동주택 주차장에서 자란 백인 힐빌리가 오바마보다 더 특권을 누리나? 고통에 시달린 시리아 난민 보다 중증 장애인이 더 특권을 누리나? 록산은 불평등을 논하기 위한 새 담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p. 98)


 나 또한 여기에 동의하며 이런 취지로 작가가 가족을 전면에 부각시켰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그러하듯이 아무리 나와 다른 이라 하여도 껴안아야 한다는 뜻으로. 또한 가족이라면 내 마음에 아무리 안 들어도 싫다고 내치기 전에 허심탄회한 대화부터 시작하지 않겠는가? 록산이 담론을 더 강조했듯이! 가족이란 유대의 설정은 그 둘을 다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소설은 단독자가 아닌 연대를 강조한다. 4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여전히 세상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차별을 지양하는 페미니즘적 신념이 필요한 곳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메건/모건처럼 다른 성정체성을 지향한다는 이유로 사회적 차별을 받는 이들, 오직 아프리카계 흑인 여성이란 이유로 하녀밖에 될 수 없었고 딸을 낳은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던, 그렇게 온갖 차별의 집중 포화를 당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같은 여성들조차 그런 이들을 쉽사리 보지 못한다. 셜리는 캐럴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오직 흑인 아이들을 백인처럼 성공시키겠다는 교사의 신념에 빠져 그걸 보지 못했다. 셜리의 엄마 윈섬은 흑인 하녀에게 봉사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에겐 타고난 환경, 자라면서 주입 받은 가치관 때문에 그 너머나 상대 삶의 깊은 속살을 보지 못하는 판막이가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무엇보다 아직도 제 목소리를 찾지 못하고 무관심의 그늘에 있는 그들에게 관심의 빛이 도달하여 대화의 참여자로 만드는, 그렇게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식 지평의 확장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전투 중심의 페미니즘 보다 더 강조하기 위해 연극이란 무대를 등장 인물들을 한데 모으는 중심점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연극은 바라봄, 즉 주시의 대상이니까. 


 어쨌든 내가 소설을 통해 느낀 것들을 이리저리 두서 없이 써보았는데그래도 소설이 뭘 말하려 하는가에 대해선 부족하나마 전해졌으리라 믿는다.(마구 쓰다가 문득 올려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기에 뜬금없는 전개이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그것을 감안하고 말하건대, 나는 이 소설을 다 읽었을 때 작가가 원했던 대로(비록 내 식으로 이해한 것이긴 하지만) 인식의 지평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지 몇 자의 단어로만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설령 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바로 눈 앞에 선 이의 삶부터 깊이 헤아려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기 전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혐오와 배척의 주먹을 들 게 아니라 존중 속에서 공존을 위한 담론 창조에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이념을 위한 신념은 그것이 아무리 헌신적인 것이라 하여도 결코 그걸 지닌 사람의 인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은징가처럼 자신이 당한 비극만 생각하고 피해자라 여겨 아무에게나 막대해도 좋다고 여긴다면 그건 지닌 신념이 아무리 아름답다한들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말로 내세우는 진보보다 살아가는 태도 전체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진보가 진정한 진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아닌 삶의 중시, 주장이나 구호가 아닌 실천의 중시.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에서 새겨들어야 할 귀중한 조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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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6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들어본 적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이었군요 꼭 그런 것만 나타내지 않겠지요 여자 남자 성으로 나누기보다 저는 모두 같은 사람으로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긴 게 페미니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니...


희선

함치르르 2021-03-14 03:45   좋아요 0 | URL
페미니즘 소설이긴 한데 저는 페미니즘 보다 삶적인 차원의 중시라는 게 더 와 닿더군요. 희선님 말씀대로 자신과 다르다 하더라도 먼저 존중과 대화의 대상으로 보는 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원래는 페미니즘도 그런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