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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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으로 존 맥그리거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느낌을 감히 추정해 본다. 한 마디로 낯설 것이다. 대화는 있지만 그걸 나타내는 인용 부호도 없고 단락도 별로 없이 문장만 줄줄 이어질 뿐이니까. 흡사 호세 사마라구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시선은 다양하게 옮겨다니고 이 인물, 저 인물이 교직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예고 없이 무던히 끼어든다. '개들조차도'에 이어 무려 8년만에 나온 존 맥그리거의 신작인 '저수지 13'에서 당신이 보게 될 것은 개인이 아닌 거대한 세상이다. 



 첫 눈엔 스릴러 같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13세 소녀가 나오고 경찰과 마을 주민들의 장기간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마도 이 다음엔 거기에 얽힌 미스터리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전작 '개들조차도'를 읽은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다르다. 홀연히 기대를 벗어난다. 작가의 눈은 소녀의 사건을 훌쩍 벗어나 배회하는 유령처럼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며 이 인물, 저 인물의 일화를 마구 끌어들인다. 두서도 없고 개연성도 없다. 우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풍경과 인물을 마주해야만 한다. '여기서 형이 왜 나와?'란 질문은 애시당초 불필요하다.


 소설은 크레타의 미궁이고 당신은 테세우스다. 하지만 당신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할 아리아드네의 실은 없다.


 8년 사이에 뭔가가 일어났다.

 '저수지 13'은 전작 '개들조차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 다, 어떤 인물의 부재를 시작점에 놓는 것은 같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실종이라는 점에선 다르지만. 그러나 전개 방식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개들조차도'에서는 사회에서 마치 버려진 개처럼 살아 생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던 이의 죽음이 시발점이 되어 그를 아는 자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는지 추적한다. 고고학자가 자기 앞에 던져진 유물에 집중하듯 사회가 쉽게 지워버린 한 개인의 삶에 천착한다. 그래서 발굴이란 표현이 '개들조차도'엔 어울린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독자들이 한 소녀의 실종에 관심을 가질 것을 알지만 연연해 하지 않는다. 작가는 마치 민들레 홀씨를 입으로 훅 벌어버리듯 그걸 사건이 일어난 마을 전체로 광범위하게 산포시킬 뿐이다. '개들조차도'에선 우리 역시 살면서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더 나아가서 기피해버렸을지도 모를 인물의 삶을 발굴해 그것을 보고 듣고 헤아리게 만들어 그 삶 역시 우리가 부둥켜 안아야 하는 것임을 체득하게 한다면 '저수지 13'은 문득 일어난 커다란 비극의 여파 속에서 그걸 껴안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파노라마로 펼쳐 목도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처음 받는 느낌은 어떤 냉혹함이다. 

 우연히 마을로 여행 온 한 소녀가 사라졌고 영영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엔 마을 사람 모두가 아파하고 제 일인 것처럼 찾아 나섰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이상 그만한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녀는 새해가 되기 바로 전날 실종되었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축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벌어진다. 계절이 그렇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모두들 소녀가 아닌 자기만의 관심과 근삼에 빠져 살아간다. 때때로 아직 소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은 나지만 아침 햇살 아래 놓인 풀잎의 이슬처럼 잠깐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내 삶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실종된 소녀를 벗어나 마을의 자연과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섬세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모두 13장으로 이뤄져 있다. 각 장은 1년의 시간을 다룬다. 그렇게 소설은 소녀의 실종 후, 모두 13년의 세월을 다루는 것이다. 제목의 13은 소설이 담고 있는 세월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첫 장을 제외하곤 모두 같은 문장으로 각 장을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자정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을 때'


 균일한 시간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하게 반복된다. 여기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인물과도 같은 시간. 제목의 저수지는 그렇게 커다란 비극이 있어도 쉽사리 변화를 줄 수 없는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브뤼겔의 그림이 문득 떠오른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서 바다로 추락하는 걸 그린. 유명한 그리스 신화 속 사건을 다루지만 그러나 브뤼겔은 그 사건을 사소하게 취급한다. 거대한 화폭에서 이카루스의 추락이 가지는 비중은 미미하다. 브뤼겔은 이카루스보다 거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언덕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더 크게 그린다. 그는 고개를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쪽으로 돌리고 있지 않다. 눈 앞에 놓인 밭 가는 일에만 집중한다. 자신의 삶에만.



 지속성의 의무를 엄중하고 부과하고 있는 삶은 그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무지와 방관은 필수적이라는 걸 그림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관심을 끊고 잊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삶은 그렇게 굴러간다. 누구나 각 자의 삶이 있으므로.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너무나 아픈 이별을 겪어서 이제 살아갈 의욕을 모조리 잃고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데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꼬르륵 하며 허기의 신호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허탈한 서늘함을 우리 역시 느껴보지 않았던가. 내일은 이부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삶이란 저수지의 무정함.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정함의 힘을 빌어 우리는 살고 미래를 열어간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비극이 자아낸 공백 속에서. 그렇다고 그 비극 때문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저수지에 아무리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도 그 경계를 조금도 허물지 못하고 마냥 잠겨 버리듯이. 삶은 그냥 어제의 고만고만한 그대로 늘 똑같은 고민을 부여 잡으면서 똑같은 수준으로 해결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없는 불운한 테세우스인 것이다. 


 13.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질 때 모인 사도들의 숫자. 구원의 종결.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제자의 손에 죽었다. 설교는 사라졌다. 뱃사람에게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던 별자리는 까만 밤에 가려져 버렸다. '저수지 13'에서 존 맥그리거가 그리는 냉혹한 세계를 유랑하다보면 그가 어느 시점에선 이런 삶을 견딜만한 혜안을 던져주겠거니 기대하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바랐던 것처럼. 그러나 소설에서 내내 사라져 있던 소녀처럼 그런 건 주어지지 않는다. 맥그리거는 문학이 감히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나마 문학이 줄 수 있는 건, 살면서 쉽사리 체험하지 못하는 걸 대리 충족해 주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다시 그의 첫 소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으로 돌아간다. 알베르 카뮈가 살면서 하나의 육체밖에 소유하지 못하는 인간을 두고 유배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던 것처럼 맥그리거도 개체성이 가지는 한계에 유념한다. 그 한계는 숙명으로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를 벗어나 '너'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광막한 세상에서 겨우 '나'만의 삶을 경험하다 갈 뿐이다. 맥그리거는 '저수지 13'과 비슷하게 하나의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했던 첫 작품부터 '유폐된 나'를 벗어나는데 몰두했다. 개체성의 한계를 넘어 고루 확산되어 다양하게 얽히는 것을 추구했다. '저수지 13'은 그 걸음의 정점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소상하게 담고 있으니.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나를 벗어나 우리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다양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사실 문학만큼 깊이 타자가 되어볼 수 있는 매체는 없다. 맥그리거는 문학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딱 거기까지라고 여긴다. 평소에는 잘 할 수 없는 다채로운 타자들의 삶에 아주 흠뻑 젖게하는 것. 하나의 눈이 아닌 수많은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는 것. 어쩌면 그 교차와 얽힘 속에서 우리는 저수지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을 직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디어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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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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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케루악과 더불어 미국 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 윌리엄 S 버로스. 마약 중독자로서의 자기 고백이 물씬 담긴 소설 '퀴어'는 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다. 일단 이 소설은 '정키'의 후속작이다. 1953년에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정키'는 버로스의 데뷔작이자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편 '퀴어'는 묘하게도 한참 나중에 발표되었다. 그것도 무려 32년이 지난 1985년에. 버로스가 그제서야 '퀴어'를 썼던 건 아니었다. 원래는 '정키' 바로 뒤에 집필했으나 스스로 도저히 세상에 발표할 수가 없어 원고를 서랍에 고이 묵혀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었던 이유가 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 '퀴어' 앞부분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버로스의 육성이 담겨 있는데. 거기서 그는 원고를 쓰긴 했지만 다시 읽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고 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고통과 절망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퀴어'의 원고를 흝자,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만 든다. 나의 과거은 운이 좋은 사람만이 탈출할 수 있는 독이 든 강이었다. 기록된 사건들이 이미 수년 전의 것이라도, 보자마자 위협을 느끼게 되는 독이 든 강. '퀴어'에 대해 쓰기는 커녕 읽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낀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진저리가 난다. (...) 이 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은 애써 피한, 한 사건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1951년 9월, 내 아내 조앤을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든 사고다.(p. 20)



예전에 나온 '퀴어'의 리커버 판. 마치 프랑스 국기를 연상시키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마음에 든다.



 소설의 주인공은 리.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분신이다. 그는 '정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거기에 대해 작가가 직접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내 첫 소설 '정키'에서 주인공 리는 조화롭고 자족적인 인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퀴어'에서 리는 분열되고, 절박하게 만남을 바라고,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전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인물이다.(p. 14)


 왜 이렇게 달라져 버렸는가? 한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마약이다. '정키'의 주인공은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퀴어'의 주인공은 마약을 끊었다. 바로 이 차이가 리에게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온 동력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마약의 유용성 따위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퀴어'는 읽는 것마저 커다란 아픔을 느낄 정도로 작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가 죽은 사고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사는 순간 모두가 온통 후회와 자책 밖에 없도록 만드는 비극을 겪고나면 삶을 보는 눈도 제법 달라지곤 한다. 작가는 그 비극을 관통하며 마약에 기댔던 삶의 시간들이 아무리 좋은 것들을 주었더라도 모두 거짓 환락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뼈져리게 느낀다. '정키'에서 눈 앞에 보여진 길은 착시의 산물이었고 자신이 세상과 조화롭게 영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오산의 결과일 뿐이었다. '퀴어'는 그런 환상이 모조리 사라진 뒤에 잔류한 것을 아주 진솔하게 기록한 소설이다. 썰물이 남겨놓고간 해변의 검은 해조류 사체와 같은 것을.


 '퀴어'에서 리는 청년 앨러틴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다 주어서라도. 그러나 필요할 때만 리에게 곁을 내어줄 뿐, 앨리틴은 리에게 내내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그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멕시코 시티의 온갖 곳을 그를 찾아 다니지만 어렵게 찾아낸다 해도 앨러틴은 쌀쌀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앨러틴의 관심을 받기 위해 리는 이런 말 저런 말 마구 쏟아내지만 종국엔 앨러틴은 이미 가 버리고 계속 혼자 떠들고 있다는 자각 뿐이다. 나중엔 어떻게든 앨러틴을 꼬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약, '야헤'를 찾아 에콰도르로 간다. 그러나 거기서도 야헤는 찾지 못하고 세상의 환대는 커녕 박대만 받을 뿐이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그는 소설 내내 내리막길이고 외롭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서 구차하다. 눈 앞에 놓인 길은 도통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로 뿐이고 그런 길을 걸어갈만한 의지조차 한 조각도 그에겐 남아있지 않다. 진실과 황당한 소문을 자신의 머리로 더이상 구별할 수 없게 된 리는 눈 앞에 보이는 앨러틴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와 스스로 비루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소환하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버텨 보지만 마약을 복용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건 다만 덧없이 흘러갈 뿐이고 남는 건 여전히 한없이 외롭고 왜소한 자신에 대한 쓰디 쓴 자각 뿐이다. 버로스는 이걸 투명하게 담는다. 물론 리와 전혀 다르지 않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나 보다. '퀴어'를 읽지 않고선 버로스를 참되게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고.


겉표지를 넘기면 바로 나오는 윌리엄 S 버로스의 초상.



 밝음의 저편엔 어둠이 있다. 둘은 이 세상에 '정키'와 '퀴어'처럼 같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세상이든, 삶이든 제대로 헤아리려면 이 둘 모두를 다 횡단해야 한다. 인생의 밝음만을 추구하는 이에게 버로스의 '퀴어'는 선뜻 발을 디밀기 어려운 세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버로스의 작품들은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우리네 삶이 주머니 속에 숨겨 놓은 비애를 후미진 골목길에 봄이 와도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길바닥의 눈처럼 눅진하게 그려내는 이 소설은 분명 독특한 경험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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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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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버리다'는 고양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아버지에대해 이야기 할 때'라는 부제가 잘 보여주듯 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쓴 책이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기억과 스스로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아버지의 삶을 사실적으로 담아놓고 있는데, 그 시작은 하루키 자신에게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두 개의 기억으로 연다. 그 기억이란 하나는 아버지와 같이 바닷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갔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매일 아침을 집에 있는 불단 앞에서 불경을 외는 것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 둘은 개인적으로 말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의 삶을 간신히 언어의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읽어보면 어째서 그게 가능했는지 짐작하게 된다.



[배경은 VAN DER GRAAF GENERATOR의 'H TO HE WHO AM THE ONLY ONE' LP 안쪽 면]



  '버려진 고양이'와 '불경'은 알고보니 하루키 아버지의 삶을 단적으로 집약해 보여 줄 수 있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하루키가 '버려진 고양이'로 책의 시작을 여는 건, 자기 아버지의 삶이 그 고양이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에 버려졌다. 이와 똑같이 하루키의 아버지 또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었다. 하이쿠 짓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문학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교토의 유명한 절의 주지라는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스스로 선택하지는 않았던 승려의 길을 걸어야했으며 그 길조차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과 벌인 전쟁(마침 그 때 그는 세이닌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징병을 4년 유예할 수 있었으나 실수로 정식 행정 절차를 밟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다.)때문에 접어야했다.


 거기다 그는 정말로 버려진 고양이기도 했다. 어릴 때, 동자승이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 어느 절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하루키로 하여금 버려진 고양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 고양이가 특히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게 되었던 것은, 고양이를 버린 뒤에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가 먼저 집에 도착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를 아버지가 보았을 때 안도의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그 때의 하루키 아버지도 고양이를 자신의 분신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가문과 시대라는 거대한 격량 속에 휘말려 어디로 쓸려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왔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저 고양이처럼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있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 같은 걸 발견하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던 건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이 원하고 설정한 모양대로 꾸려가길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위에 인용한 그림은 이 책의 일러스트레이터 가오 옌이 그린 것인데 나는 이것이 가오 옌의 이 책에 대한 독후감 같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 모두는 사실 하루키 아버지처럼 저토록 거대한 광야 같은 삶에서 오직 작은 상자 하나에만 의지한 채, 안도할 수 있는 곳을 평생 찾아다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가오 옌이 비둘기를 그려 놓은 것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에서 영감 받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노아가 불안 속에 찾았던 육지가 어딘가 확실히 있다는 걸 알려주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책을 쓴 하루키의 진짜 목적 또한 그의 아버지가 아침마다 읊었던 불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그렇게 매일 아침 불경을 읊었던 것은 자신이 참여한 전쟁에서 고통당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하루키의 이 책 또한 그렇다.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서이며 전쟁과 아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던 아버지가 그래도 자기 삶에 대하여 안도하는 마음으로 떠났기를 간구하는 기도의 마음 또한 뭉근하게 어려있으니까.





 그렇지만 온전히 아버지만을 위해 이 글을 쓴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건 하루키 마음에 가책으로 자리잡고 있는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는 아버지와 몇 십년 동안이나 말 한 마디 제대로 섞지 않았던 소원한 관계였다고 털어놓고 있다. 원래 하루키 아버지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그는 공부를 좋아했고 잘했다. 그러나 잦은 전쟁의 출전으로 공부를 계속 하기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고 얼마 안 가 하루키도 태어나는 바람에 그 꿈을 포기해야했다. 다시 한 번 그는 원하지 않았던 자리에 서 있어야 했으며 이젠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어야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자신이 못 다 이룬 걸 하루키를 통해 대신 이루고자 했다. 세상이 많은 아버지가 그러하듯이. 그러나 외동인 하루키는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데 왜 면학에 힘쓰지 않는가 하고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하루키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의 공기를 숨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p. 62)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가책이 되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주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는 최근까지 오랫동안 자주 학교에서 시험 치는 꿈을 꿨다고 한다. 시험 치는 동안 아버지가 원하는 성적을 받지 못할까봐 잔뜩 두려워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렇게 퇴적된 죄책감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꿈을 이뤄주지 못하는 아들은 그것이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기에 거리를 벌리는 법이다. 여하튼 이처럼 하루키 또한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바라는 삶을 온전히 영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5년이 지나서 비로소 그의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 본 하루키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동료 의식 같은 걸 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나 아버지나 원하는 걸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삶이라는 광막한 바다 위를 그래도 가고자 하는 곳에 닿기 위해 늘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외로운 존재라는, 한 인간으로서의 동료애를.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루키는 특정한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걸어온 길에서 인간의 삶 자체에 진하게 서려있는 보편적인 궤적을 보았던 것이며 그러한 보편성의 인식을 통하여 아버지나 자신이나 삶을 억누르고 있다고 여겼던 한계들이 진실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한 부분이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이 개인적인 글에서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딱 한 가지 뿐이다. 딱 한 가지 당연한 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p.93)


 그렇다면 이러한 평범한 이의 이야기를 하루키가 애써 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추모로도 족할 글을 굳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어야 했던 까닭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다음에 그는 빗방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이란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고 교환 가능한 빗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과 역사 그리고 계승의 책무가 있음을.


 그러니까 하루키는 계승의 책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다. 마치 '보라, 여기 한 인간이 이렇게 살고 있었다!'고 우리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는 건 보편가능한 역사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역사다. 하루키 아버지의 삶은 다른 이로 대체 불가능하다. 전쟁 중에도 하이쿠를 짓고 아무런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조용히 참수당한 중국인 포로에 대해 다른 어떤 이보다 깊은 경의를 품고 있는 모습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또한 하루키는 책에서 몇 번이나 언급하지 않았던가? 우연히 벌어진 일일지 몰라도 만일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삶이 되어갔다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보는 건, 이 책을 통해 깊이 음미하고 있는 건 우연이 정형한 평범한 이의 그렇고 그런 기성품이 아니다. 다른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고유한 단독자의 초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보편성 속에서 이러한 고유한 특수성이 태어날 수 있었는가? 그 때 우리 눈에 들어오는 건, 하루키 아버지가 당했던 여러 고난들이다. 접어야 했던 꿈의 상실이다. 삶에 존재했었던 그 스스로 결코 메울 수 없었던 깊은 우물들이다. 그런 우물을 하루키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제 알아차린다. 이러한 우물들이 대체불가능한 나라는 고유한 한 사람을 빚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이것이 이 책의 마지막에 '사라진 새끼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는 연유가 아닐까 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버려진 고양이 이상으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고 많은 여운이 남았던 대목이기도 하다.  소나무 높은 곳으로 홀로 올라갔던 새끼 고양이는 혼자 힘으로 도저히 내려갈 수 없어서 밤새 무서워하며 울다가 아침에 깨어나보니 홀연히 사라짐으로 인해 하루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걸 가지고 별도의 단편을 쓸 정도로. 그러고 보면 말하기 어렵고 막연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삶을 비로소 문자라는 형태로 소환할 수 있도록 해 준 두 개의 기억 역시 부재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다 제각각이다'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우리가 그토록 기피하고자 애쓰는 부정적인 것들이야말로 진정 교환 불가능한 나만의 고유한 단독성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림처럼 우리에겐 저마다 사라진 새끼 고양이가 존재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쯤은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를 곱씹게 만들었던 계기들이. 더러 우리들은 그런 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그런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얼른 망각의 휴지통으로 던져버리지만 하루키는 오히려 그런 기억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 책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삶을 그렇게 더듬어 찾아내었던 것처럼. 바로 그것이 노아에게 육지가 있다는 걸 알려준 비둘기가 되어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그것만으로 안도하며 기댈 수 있는 소나무를 찾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이런 이유로 '고양이를 버리다'는 내게 삶에서 겪는 부정적인 것들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헤아릴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 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곧 부재의 계절, 겨울이다. 그런데 겨울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봄만이 가지는 고유한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계절에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는 건 제법 어울리는 일인 듯하다. 삶의 겨울을 소중히 보듬게 만들어주는 책이니까. 그러면 마냥 아리기만 할 것이라 여겨서 선뜻 손댈 수 없었던 차가운 눈밭 속에 매몰된 기억들도 발굴해선 그 어딘가에서 오늘의 나를 만든 진정한 밀알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더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삶에 대해서도 더 관대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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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1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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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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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만나 보는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가 1917년에 발표한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 그들 모두는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다. 거의 블랙홀과 맞먹는 압도적인 중력으로 날 붙잡아 마냥 끌고 가기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 광기, 죽음은 하나의 표지판이다. 내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땅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려주는. 그 너머는 타인의 땅이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내 힘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사랑 광기, 죽음은 나의 부재로 완성되는 장소다. 여기 실린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와 같이.

 

 그런데 이상도 하지. 사랑과 광기는 죽음에 맞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기엔 사랑은 능동이고 광기는 수동적인 상태로 다르지만 소설에선 그렇지 않다. 사랑마저 넓은 범주의 광기로 묘사한다. 첫 단편 ‘사랑의 계절’에서 주인공 네벨은 리디아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엘 솔리타리오’에서도 아내는 남편이 세공하는 보석을 보곤 한 순간에 매혹된다. ‘이졸데의 죽음’이나 ‘음울한 눈동자’도 그러하다. 이성으론 그 이유를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사로잡힘이 사랑의 촉발인 것이다. 작가는 이걸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 또한 사로잡힘에서 발아하는 걸 기억한다. 더구나 소설 속 사랑은 일방통행로만 달리는 열정의 착란에서 비롯되어 의혹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다 끝내, 두 편 정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환멸 아니면 비통에 이른다. 광기 또한 이와 유사한 여정을 보여주지 않던가. 이처럼 작가에게 사랑과 광기는 샴쌍둥이인 것이다.

 

 그가 사랑과 광기를 중요한 두 축으로 소설을 형성하는 것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속성 때문이다. 절대군주인 죽음이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곳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예측을 넘어서 있다. 밤마다 베고 자는 베개가 언제든 내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으며(깃털 베개) 잠깐 한 눈을 팔았을 뿐인데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던 막내 딸이 골육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목 없는 닭) 세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자신의 왜소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작가 또한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나의 취약함을 끝도 없이 상기하게 만드는 장소에 나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이 삶의 시간을 어찌 지속시켜야 하나? 난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랑이나 광기와 같은 열정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덤과 사막만을 약속하는 삶을 뚜벅뚜벅 관통해나가려는 존재들이. 가시철조망을 두려움 없이 뛰어넘는 황소(가시철조망)나 우물 안을 벗어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숲으로 뛰어들어 진정한 사냥을 하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은 개, 야구아이 아니면 우물에 뛰어들겠다는 협박으로 비로소 외삼촌에게 대등한 존재임을 인정받은 아이(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처럼. 그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증명하는 길은 바로 용기란 걸.

 

 그건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백치처럼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겁먹고 뒷걸음치기 바쁜 존재들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용기를 감행하는 타자에게 자신을 동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갇혀 있는 유배지를 탈출하려 해 보지만 결코 소심한 구경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더욱 보게 되었다. 그 위에 작가가 찍어놓은 투명한 방점들을. 뭐든 시도가,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당연히 여기엔 위험이 뒤따른다. 어떤 때는 ‘천연 꿀’에 나오는 것처럼 그 시도가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멘수들’에 나오는 벌목꾼 카예,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에서 원주민 칸디유 그리고 ‘음울한 눈동자’에서 사피올라가 화자에게 한 얘기들을 통해 분명히 전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뛰어들라고. 온전한 내 선택과 결단으로.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두 사람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나? 그림자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다만 착란에 의한 사랑 고백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는 모든 걸 마약에만 의지하다 죽어서도 두개골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손으로 만든 지옥’의 인물과 자신이 광견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며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 마침내 끔찍한 범행마저 저질러버린 ‘광견병에 걸린 개’의 주인공과 얼마나 다른가. 이들은 모두 자신이 정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 표류하면서 협소한 자신의 세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표류’에 나오는 파올리노의 분신들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삶이란 언젠가는 끝나야 하는 연극인 것을. 그렇다고 그 종막만을 생각하며 시곗바늘만 초조하게 바라보거나 어차피 허무하게 끝날 거 뭐하러 의미를 만들려 애쓸까 하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무덤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 세계에 갇혀 끝없이 맴도는 장면들은 그걸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왕에 태어나 지속이라는 정언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아주 사소한 배역이 주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며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작가의 혜안대로 진실로 생생한 삶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는 바로 거기서 창출되는 것이니까. 나 아닌 다른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영웅과 비겁자의 것이 다르듯이,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죽음의 의미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이 책 덕분에 살면서 늘 염두에 둬야 할 한 문장을 얻게 되었다. ‘다가올 무한을 근심하지 말고 지금의 유한을 사랑하라!’ 기억하고 또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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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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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금색 공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에 대하여 쓴 책이다. 발표된 해는 2002년.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거쳐갔던 고양이들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양이 집사 7년 차로 동반자에 대한 예의랄까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이것 저것 많이 읽어보았는데, 그런 내게 있어 이 책은 단언컨대 고양이에 대한 책 중에 최고다. 이토록 고양이에 대해 인격적으로 다루면서 또 어느 순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감히 고양이 집사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한다.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련된 서사가 있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기록이다. 책의 대부분은 '금색 공책'을 세상에 막 발표했던 1962년. 런던에서 살 때 길렀던 두 마리의 암컷 고양이, 회색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에 할애되어 있다. 시작의 포문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 길렀던 고양이들이 연다. 이 부분엔 고양이 집사에게 참 충격적인 게 많다. 야생 고양이가 집 주위의 언덕을 차지할까봐 어린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만 보면 총을 쏘아대는 것이라든지, 집 안에 고양이가 너무 불어나 고양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버지가 무려 40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를 살육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나온다. 여기서는 야생 고양이의 존재가 강조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가 은연 중 배여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짐바브웨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연결되면서 단순히 고양이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만든다. 문득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와 두 번째 작품인 '마사 퀘스트'가 떠오르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어디까지나 관습대로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의 경계인 식민지에서 살았던 자전적 경험 때문에 도리스 레싱은 문명과 야만은 충돌하며 서로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명은 통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주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도. 문명이 겉으로는 폭력을 배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 폭력이야말로 유일하게 문명의 존립 수단이라는 것도. 이런 구도가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니까 고양이란 문명의 타자, 야만 혹은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도리스 레싱은 집이라는 문명의 안전을 위하여 야생 고양이가 나타나면 바로 22구경 엽총을 들고 쏘았다. 그건 레싱의 어머니가 집에 기어들면 닥치는 대로 잡았던 뱀이나 흰개미와 마찬가지였다. 수가 너무 불어나 안정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새끼 고양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녀 자신이 말한다. 그 때는 고양이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었다고.


 그녀가 고양이를 자기 곁에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작가가 되고 나서 였다. 자신이 어떻게 하여 작가가 되기로 하였는가에 대한 자전적인 경험이 물씬 배인 '마사 퀘스트'에 따르면 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위선을 깨달은 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문명이 허용하지 않는 자신이 내부에 간직한 타자성을 문명의 폭력에 순응하여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여 양성시키기 위해 그녀는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문명에 식민화된 자아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인 자아를 지향하기 위하여.


 겨우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첫 단락을 설명하느라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건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도리스 레싱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여기에 담긴 고양이에 대한 얘기들은 자신이 지금껏 써온 작품들의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보다 깊이 혹은 색다르게 헤아리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첫 단락을 읽으면서 '풀잎은 노래한다'와 '마사 퀘스트'를 떠올렸듯이, 암컷 고양이에 대한 중성화 수술의 필요와 새끼를 낳지 않은 회색 고양이와 낳은 검은 고양이의 대비를 보면서 완전히 낯선 타자인 아이를 낳은 공포를 그린 '다섯째 아이'나 다섯 공책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했던 안나 울프를 그린 '금색 공책'을 떠올릴지 모른다. 너무 나간 판단일지 모르지만 내게 자연이 부여한 모성과 회색 고양이보다 열등한 위치라는 한계 속에서 새끼를 키우고 가르치는 암컷 고양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검은 고양이는 네 권의 공책 속 안나 울프로 보였고 도도하게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주체성을 뽐내는 회색 고양이는 '금색 공책'의 안나 울프로 보였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령 고양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작가로서의 도리스 레싱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고. 물론 그 전에 그녀의 대표작들을 읽어보았다면 말이지만.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고양이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리스 레싱에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놓칠 수 없는 책임엔 틀림없다. 30km나 되는 낯선 땅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직 생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갖가지 고난을 넘어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라든가 자신의 새끼들을 구하고자 작가의 집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찾아왔으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그래도 작가에게 간신히 목숨을 구한 고양이라든가 또 커다란 아픔을 겪은 뒤, 불편한 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새로이 세계에 편입되려 노력하는 루퍼스의 이야기처럼 때로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또 때로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들이 스며들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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