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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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이 횡행하는 요즘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주자들에 대한 정책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듯이 세계 곳곳에서 내가 속한 곳에 있지 않은 이들에 대한 적대를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본다. 우리나라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왔던 예멘 난민에 대해서도 그렇고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볼 때마다 허다하게 올라오는 다른 성별에 대한 적대도 그렇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방송사는 같은 건물인데도 분양을 받은 세대와 임대한 세대를 층으로 나눠 장벽처럼 분리하고 있는 걸 보도한 바 있다. 아래에 사는 임대 세대들은 분양 세대가 사는 윗층으로 결코 올라갈 수 없다고 말이다. 나치가 유태인에게 실시했던 게토 정책을 이제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이런 격리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 됨에 따라 더욱 증가하는 형편이다. 그런 차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나와 동등하게 대우 받으려면 나와 같은 자격을 가질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향도 심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없던 벽을 만들어 너는 여기 못 들어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도시 자체가 방랑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중심지의 거리에서 몸 하나 얹힐 벤치도 찾기가 힘들다. 도시가 산책자마저 거부하면서 사람들을 이런저런 사회적 조건에 따라 영역을 구분하여 거기에만 있을 것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두고 '영토화'라 불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이며 제각각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지만 개인들을 통합하여 일련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움직여야 하는 사회로썬 그런 개인들의 성향을 마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인을 '영토화'한다. 사회가 원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토양에다 개인을 심고는 사회의 주류가 되는 사상과 가치관에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을 자신의 진실된 모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국적이 그렇고, 인종이 그렇고, 성별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은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입혀 놓은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사회가 설정한 행동 양식에 충실히 따르느라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의 토양에서 자라났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진실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은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이론이 아니던가?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 세력의 편의에 따라 제조되고 권위를 갖게 된 견해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거기에서 당장 자유롭게 되진 못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두고 '아비투스'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토양에 심어져 있었던 지라 이제 그것이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뿌리를 내려 다른 사람이나 사상 혹은 신념과 마주할 때 이성으로 제대로 헤아리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좋고 싫음을 느끼게 되는 걸 가리킨다. 그만큼 우리 내부에 깊이 심어져 손쉽게 떨쳐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족쇄를 순식간에 끊을 순 없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지식만이 아니라 경험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가 접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고 장소에 닿으며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하는 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속된 몸으로 부대낀 경험이 누적되어야만 우리는 날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날 식민화 한 영토에서 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의 퇴적을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여행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그만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낯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벗어나 대면하는 타자에 따라 가변적인 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과정, 그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나는 분명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도록 한 대표작이자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기도 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 여행을 전면에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방랑이다. 목적지 또한 없는 게 방랑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공간화가 불가능한 순수한 지속만을 시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순수 시간'으로 이름 붙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순수 시간이야말로 방랑이다. 방랑은 오직 움직이고 있을 때만 존재하니까 말이다. '방랑자들'에서 행해지는 여행 또한 그렇다. 어떤 목적에 따라 선택된 여정이 아니다. 이 책의 모든 여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어느 곳에 있게 된다. 방랑엔 경계가 없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모든 곳이 타향이자 고향인 것이 바로 방랑이다. '방랑자들'의 모든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없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들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얘기를 한다. 저마다 속한 시간과 장소에선 주연이지만, 소설에서 '듣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처럼, 다른 시간과 장소에선 오직 관객에 불과하다. 이는 방랑 혹은 여행자가 어디에 있든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자각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가 속한 곳의 가치관을 섣불리 내세워 자신이 현재 보고 있는 사건과 풍경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겸허하게 들을 뿐이며 자신의 가치관은 최대한 배제한 채, 되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리려 애쓸 뿐이다. 소설 속 멘추가 말했던 어떤 유목 부족이 자신이 깃들고자 하는 부족의 종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듯이, 내가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두고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일반적인 규칙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하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을 일깨워서 굳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p. 149)


 방랑이나 여행은 그러한 타자 중심의 여정이다. 작가가 '방랑자들'에서 여행을 가져온 것은 그래서다. '방랑자들' 자체가 작가가 직접 한 여행 기록을 바탕 삼아 만들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방랑, 여행과 같은 순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라 본 타자와 세계는 더이상 배척과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물리학자가 말한 대로 세상엔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암흑물질이 지천에 널려있고 아무 것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까만 밤이야말로 세상의 본질이기에  내가 무엇을 알 것이며,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p. 344)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밤이 세상을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더 이상 아무런 꾸밈도 포장도 없다. 낮은 빛이요 찬란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예외이고 부주의이며 질서의 붕괴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실 어둠 그 자체이며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으며 차갑다.(p. 347)


 이렇게 무지와 예측 불가라는 한없는 어둠의 베일 속을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동료이기에 타자들은 내게 다만 환대와 대화의 대상일 뿐이다. 어떤 목적을 위한 만남도 아니다. 그 누구도 수단이 아니다. 소설 자체가 그걸 보여준다. 여기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에 대해 좀 말해야겠다. 내가 소설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방랑자들'은 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정형화된 틀을 참 많이 벗어난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인공도 없지만 줄거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건 다만 이야기의 다발 혹은 묶음일 뿐이다. 그렇기에 소설에 흔히 있게 마련인 종결 같은 것도 없다. 여기서의 끝은 결말이 아니라 단지 소진이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제 다 떨어졌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방랑자들'은 방랑 혹은 여행 이야기의 순수 지속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순수 시간 그대로인 것이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p. 280)


 작가는 독자에게 바로 그 시간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영토화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버린 온갖 가치관의 족쇄로부터 날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나와 마주한 이들이 나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눈을 찌푸리며 외면하기 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어 대화 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타자를 중심에 둔 대화 시간의 창출이 바로 '방랑자들'인 것이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p. 191)


 사실 이런 시간의 창출은 현재 폴란드 상황을 보자면 절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2차 대전 당시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적대로 똘똘 뭉친 나치즘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였지만 그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현재의 폴란드는 한없이 전통적 권위와 위계 질서를 숭상하는 보수로 치닫는 중이다.


 낙태가 전면 금지되고 동성혼이 절대 금지되는 등, 유럽이 가고 있는 방향과 정반대의 모습을 잇달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확고하다고 여기면서 그것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모양새다. 이런 까닭에 유럽 사회에선 폴란드가 이러다 독재 국가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태고의 시간들'부터 내내 타자에 대한 포용과 변화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강조했던 작가로서는 이러한 폴란드의 상황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흐름에 제동을 걸고자 '방랑자들'을 썼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호소의 대상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비록 정도는 덜하지만 그 징후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이기도 하다. 소설은 자기보다 많이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를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부터 짧고 강렬한 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한다. 위험천만한 경주와 승리, 그리고 탈진. 그러므로 그들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흥분과 전율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값비싼 삶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비축된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야 하므로.(p. 558)


 비록 젊은 여자를 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모습 또한 이와 얼마나 다를까 싶다. 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욕망을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시간에 천착하느라 이미 우리 영혼의 잔고 또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방랑자들'이 이끄는 대로 숨이 막히는 걸 참으면서도 안주했던 곳을 박차고 나와 담장을 뛰어넘어 탈주를 감행해 보는 건 어떨까? '방랑자들'은 그렇게 하여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마주한 하늘과 대지가 오직 자유로움으로 가득차 환영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기꺼이 넘어가 보자.

 

 내가 아니었던 나를 버리고 타인과 함께이기에 더 커져버린 자유 속에서 나만의 나를 형성하는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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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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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 루페니언의 ‘캣퍼슨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캣퍼슨 포함하여 모두 12편의 단편이 여기에 실려 있다무엇보다 표지가 눈길을 끈다한창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입을 클로즈업한 일러스트다



 독자는  표지에서 무엇을 짐작할  있을까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야한 소설틀린  아니다. ‘캣퍼슨 문득 2000년에 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섹스   시티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 혹은 놀라움을 생각나게 했으니까그러나  소설은 그걸 추구하고 있지 않다 보다는 관심과 사랑에 어리고 있는 폭력을  많이 다룬다표지의 키스 또한 마찬가지다사실 이건  번째에 실린 ‘  유어 게임에서 주인공인 열두  소녀 제시카에게  어른 노숙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키스를 표현한 것이니까 말이다.(이게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다만  생각으로  번째 단편에서      키스가 내내 주인공을   들게  정도로 두려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마디로 야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이면에 깃든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어두운 사랑 이야기다.


  날개에 실린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그녀는 자신을 ‘스티븐 킹을 읽으며 자란 아이라고 밝혔다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스티븐 킹의 흔적이 보인다. ‘  유어 게임 그렇고(후반에 충격적인 내용이 있다.) ‘정어리 그렇고( 역시 마찬가지!) ‘성냥갑 증후군 그렇다.( 또한 마지막이 섬뜩하다.) 스티븐 킹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캣퍼슨’ 역시 마음에  것이라 생각한다.


 ‘캣퍼슨 등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은 연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닥쳐온 난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캣퍼슨에선 처음엔 동경했으나 만나면 만날수록 실망만 안기는 자기보다 한참 연상인 남자와 헤어지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해 고민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결국 그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친구가 무작정 주인공인 척하고 보낸 결별의 문자 덕분에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 번째 단편의 주인공 제시카 역시 어른인데다 찰스 맨슨을 신봉하는 위험한 남자라는  알면서도 자정에  둘이 만나자는  남자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풀장의 소년에선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며 ‘성냥갑 증후군에서도 자신의 진짜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 직접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남성의 권위에 기대어 규정하는 여성이 출연한다아마도 이토록 자주 보이는 여성들의 수동성은 현재 사회의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제한한 영역 안에서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폭력을 그리는 것이 바로 단편집 ‘캣퍼슨 것이다그녀의 소설이 발표 당시 미국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런 폭력성을 두드러지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어떤 분들에겐 주인공 여성들의 행태가 답답하고 자주 스티븐  식의 판타지적인 해결법을 제시하는  불만으로 다가올  같다그러나 내게는 그만큼 지금 여성을 가두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의 방증으로 보인다.





  해결의 어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나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단편들이 ‘나쁜 아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나쁜 아이에선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연히 자신의 집에 동거하게  남자에 대해 처음엔  뜻이 없었다가 그를 관객으로  자신들의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남자에 대한 지배욕을 키워만 가는 남녀 커플이 등장한다. ‘좋은 남자에선 자신을 여성들에게 ‘좋은 남자라고 여기는그러나 여성들이 그다지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남성이 주인공이다.


   단편에서 두드러지는  ‘연기(performance)’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모두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끊임없이 신경쓰면서 자기 검열을 한다커플은 처음부터 그러고 싶어서 그런  아니었다하다보니 거기에 중독된 것일 뿐이다. ‘좋은 남자 주인공 또한 나중에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본성이 그랬던  아니다부족한 외모를 가진 그가 원하는 연애를 하기 위해선 그런 남자인   필요가 있었기에 스스로 속일 정도로 충실하게 연기했을 뿐이다.


  아무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그는 그녀들에게 그렇게 말하려 애쓴다그저 나를 봐주고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란 것뿐이야문제는 모두  착각이었다는 거지나는 좋은 사람인  가장했고 이후에는 멈출 수가 없었어.(p. 274)


 그들은 연기했고  연기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었는가

  연기가 바로 자기 인정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털어놓는다자신들의 연기를 통해 점점  커지는 자신의 존재감이 중독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가없는 과시와 그것을 통한 자기 긍정의 욕구가 있었을 뿐이다연극의 연기는 관객을 중심에 두지만  연기에선 정반대다그들은 연기를 통해 자신들이 참여자를 끌어들인 관객인 상대방을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타자에 대한 태도가 현재 여성들을 두려움에 젖게 만들고 연약하게 몰아가는 남성 중심 사회의 근본에 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성냥갑 증후군에서 드러나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남성들의 여성들이 가진 고통의 규정이나 ‘무는 여자(Biter)’에서 어릴 때부터 자주 물었던 여성을 그걸 부끄러운 병으로 규정하고 치료하려 했던 세상의 모습에 비추어   그러하다이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치부했던 초기 정신 의학의 행태와 유사한데 물론 이런 남성 중심 사회의 처방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 ‘성냥갑 증후군 여성이 가진 고통의 근본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남성에 의해 전혀 근절되지 않으며 ‘무는 여자’ 역시도 고의적인 남성의 폭력에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의 주장이기도 했던 ‘무는  폭발하듯 발현되니까 말이다결국 나를 위해 타인을 도구로 쉽게 전락시키는 사회 혹은 문화의 근본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캣퍼슨 여성에게 폭력적인 현실을 스케치하면서  폭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또한 짚어가는 작품이다그러니 표지로 지레짐작해선 곤란하며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심리 묘사도 뛰어나 가볍게 읽으면서 오늘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만한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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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반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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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페터 한트케란 이름을  편의 영화에서 처음 보았다

 독일 감독인  벤더스의 ‘페널티킥 앞에  골기퍼의 불안이란 영화였다 영화의 원작자와 각본가가 바로 페터 한트케였다 벤더스는 영화사에서 ‘ 저먼 시네마 기수  하나로 불린다.  저먼 시네마 2 대전 독일이 전통 문화의 황폐 속에 있을 때 미국 대중 문화의 세례를 가득 받은 이들이 독일 고유 문화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것을 미국 대중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돌파하려 했던 움직임이었다거기에 인습에 굳어있던 독일 문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페터 한트케도 뜻을 같이  것이다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페터 한트케가 1972년에 발표한 ‘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내가 보기엔바로 그러한 ‘ 저먼 시네마 참여했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표면적으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별의 짧은 편지를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린 아내 ‘유디트 찾아 화자가 미국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이야기다이러한 설정은 사실 그의 데뷔작인 ‘페널티킥 앞에  골키퍼의 불안 유사하다거기서도 뜻하지 않게  명의 여인을 살해한( 여인의 상실이 탈주의 시작을 이룬다는 주인공은 국경 근처의 마을로 도피해선  곳에서 배회하며 사람들을 관찰하는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페터 한트케는 이렇게 언제나 남녀 사이의 로맨스를 허락하지 않는데그건 어쩌면 현재의 문명에선 영혼의 안정을 이룰  없다는  뜻하는 지도 모른다거듭되는 주인공의 방황 역시 표면적으론 그걸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그 심층의 의미에 댛해선 이 글의 마지막에서 말하기로 한다.) ‘페널티킥 앞에  골키퍼의 불안에선 정신 분열과 정처 없는 영혼의 유랑만 가져오는 독일 문화에 대해 비판했다독일 문화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차에 바다 건너편 미국의 문화가 들어왔다. 그건 과연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그걸 화두 삼아서 소설의 무대를 아예 미국으로 옮겨 풀어 간 소설이다. 일단은.




 이 소설은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짧은 편지 다른 하나는  이별이다주의 깊게 읽어보면  둘의 구성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짧은 편지에서 신문 보며 여러가지 소식을 마치 그림처럼 보던 주인공은 ‘ 이별에서 실제 미국의 역사를 그린 풍경화들을 보게 된다(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매체로 재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하다.). ‘짧은 편지에서 로런 베콜의 연극 보던 주인공은 ‘ 이별에도 < 카를로스연극을 보며 연극 평론가들과 대화를 한다. ‘짧은 편지에서 소개되었던 철마 영화의 감독을 ‘ 이별에선 실제로 만나며  영화에 대해 얘기하게 된다또한 ‘짧은 편지 클레어란 여성을 만난 상태에서  포드의 영화를 얘기하다 끝이 나는데, ’ 이별에선 비로소 찾은 유디트와 함께 실제  포드 감독을 만나 얘기하다 끝이 난다이렇게 결말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의 얼개 역시 따지고 보면 유사하다이러한 여정의 반복은 만일 ‘짧은 편지 그가 자주 읽는고프프리트 켈러의 소설인 ‘녹색의 하인리히 대표하듯이 독일 문화의 한계에 대해 보여준다고 말할  있다면 ‘ 이별’ 역시 대안으로 떠오른 미국 문화 역시 엄연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다 선명하게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그가 계속해서 일시적으로 머무를  밖에 호텔을 전전하는 것이나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도 독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미국에 정당하게 머무를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도 독일 문화든미국 문화든 우리가 정주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독일 문화와 미국 문화가 모두 서양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현재의 서양 문명 자체가 현대인에게  이상 구원의 장소가   없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개인의 실존과 확고한 정체성을 중시(이는 주인공이 ‘녹색의 하인리히 대해 클레어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하는 독일 문화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포드가 강조하는 바와도 같이 ‘우리’ 안에서 개인이 쉽게 익명화될  있는 미국 문화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이는 로런 배콜 연극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여배우 로런 베콜은 무대 위에서 연극을  , ‘동작을 취할 때마다  즉시 다른 동작으로 번복’(p. 46)  있을 뿐만 아니라 무대 위와 실제 생활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휙휙 바뀔  있는 존재이다이렇게 가면을 쓰고 이전의 자신과 확연히 다른 연기를 해도 그게 그대로 실제처럼 받아들이는 미국 문화에 그는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그래서 그는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고 그런 그녀가 같이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다  가버려도 아무런 상처를 받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는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한다아내 유디트와의 가정 생활은 거기에 대한 뚜렷한 증거다그녀와 주인공의 관계는 거의 승부에 가까운 경쟁이었다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보장하기 위하여 상대방을 꺾고자 했다그런 관계인데도 그들은 헤어질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도무지 상대방이 혼자 있는 꼴을 보지 못했어.’(p. 130)


 그가 아내의 실종에서 묘한 자유를 느끼는   때문이다페터 한트케는 재밌게도 그런 아내에게 유디트란 이름 사용했다유디트는 성경에 나오는 여성으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하여 적장의 머리를 자른 인물이다주인공은 아내를 그런 존재로 여긴다사라진 유디트는 실제 주인공을 죽이려고도 한다피닉스 빌에 사는 클레어란 여성은 이와 정반대다그녀는 남편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주인공에게 관계이 진척을 강요하지도자신이 옳다고 설득시키기도 않는다그들의 관계는 문자 그대로 대등한 존재들의 동행이다. 주인공은 거기서 평안함을 느끼고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투명하게 내어놓는다클레어와 만나면서 주인공은 비로소 자기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어떤 해석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녹색의 하인리히'   같은 느낌을 가진다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서 만나고 싶었던  포드 감독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한다이러한 클레어는 독일 문학을 전공한 사람으로 미국 문화와 독일 문화를 모두 포용하는 사람이다그녀 역시 ‘녹색의 하인리히’ 그대로 남을 선입견을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사람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노력한다단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대화의 동반자이다.


 여기서 일부러 ‘대화라는 말을  것은주인공이  클레어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전까지 그는 일방적으로 보고 듣는 자였다그러나 클레어를 만나면서 그는 이제 만나는 사람들과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시작한다 부분에서 작가가 영화 ‘철마 주인공에게 ‘가슴속이 아려오는 통증을 느꼈고 음식을 삼키기 힘들었’(p. 104) 외상통을 안겼던 장면은 삽입하는 것도  대화가 소설에서 중요하다는 걸을 넌지시 알려주는  아닐까 싶다이러한 마주 봄과 같은 대화를 통해 주인공은 동경했던 미국 문화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는  깨닫기 때문이다. ‘ 편지 그러한 착각에서 빠져나오기까지의 여정이다. 


 앞서 나는 ‘짧은 편지 ‘ 이별 유사한 행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짧은 편지에선 클레어를 만나기 전까지 대화라는  거의 이뤄지지 않지만 ‘ 이별에선 대화가 이뤄진다는 차이점이 있다페터 한트케는  이런 차이를 두었을까나는 이것에 대해  많이 시간을 들여 생각해 보았는데어쩌면 바로  차이가 작가가  어디서도 정주를   없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그것을 개선할  있는 그나마 대안이라고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보여주려고 그렇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홀로 관찰자였던 ‘짧은 편지에서의 주인공은   모처럼 실존의 가벼움을 가져다 주었던 미국 문화에 대해 선망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편지에서 차츰 오해로 판명난다. 그건 영화 ‘철마 감명을 주었던  포드 감독을 실제 만나는 장면에서 최고점에 이른다그가 클레어의 소개로 만났던 화가 부부도 포드도 모두 실존의 가벼움이 아니라 무거움을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영속적으로 구속시키는 실재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원하고 아내 유디트의 실종에서 느끼는 해방감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가정은 개인을 속박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  하나가 아니던가?). 2 대전의 전범국가라는 독일의 역사적 과오로 인해 더욱 무거워진 실존이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바람으로도 보인다미국 문화는 그것을 가져다   있을  알았다하지만 그런 그들 역시 실재(實在) 깊이 구속되어 있었다화가 부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 와서 모든 것을 역사화를 통해서만 보기 시작했어요풍경이라는 것은  안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비로소 의미를 갖지요 그루의 떡갈나무만으로는 그림이   없어요그것이 다른 무엇을 위해  있을 때만 하나의 그림으로 존재할  있죠.”(p. 124)


  하나의 고유한 개체가  자체로 있을  없고 오직 다른 무언가와 연결되어야만 있을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이는 나중에 가서  포드가 자신을 지칭할   ‘우리라는 말을 씀으로써 더욱 굳어진다또한 화가 부부가 모든  사실적인 역사를 통해 바라봤다고 말한 것과 똑같이  포드 역시 자신의 영화에서 사실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선생님은  항상 ‘라는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세요?” 유디트가 물었다.

 우리 미국인들은 사적인 일에 대해 말할 때도 ‘우리라고 합니다.”  포드가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함께하는 공적인 행동의 부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겁니다.”(p. 195 ~ 6)


 그는 주로 자신의 영화를 화제 삼으면서 영화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임을 누차 강조했다.“지어낸 얘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그가 말했다.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p. 202)


 그런데 이런  ‘녹색의 하인리히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단독자로 남고 싶은 주인공의 소망과는 정반대였다더구나 ‘우리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했던  포드는 인디언 여자를 가정부로 데리고 있었다실재가 요구하는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말하곤 있었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미국이라는 나라가 세워질  인디언에게 가했던 만행은 모조리 휘발되고 그렇게 작위적으로 만든 공백에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을 사실로 가공하여 멋대로 채워놓고 있었던 것이다이는 주인공이 유디트와 부부 생활할 때와  닮은 모습이었다남들에겐 다정한 부부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홀로 하는 자위만이 전부였던 것과.


 독일이나미국이나 보이는 모두는 그저 연기(演技,performance) 불과했다실제로 진정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로런 베콜이나 < 카를로스> 연극이 그랬던 것처럼 반복된 연기가 이제는 굳어져 진정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이다이제  어디서도 실재(實在) 인식할  있는 눈은 없었다가상을 그저 실재로 여기고  뿐이었다 연기의 정점에 있는  포드는 그가 아무리 거창한 말을 하고 있어도 실은 그저 누구에게라도 이어지고 싶은 하나의 외로운 노인일 뿐이었다클레어가 정형화된 연기를 하는 배우들에 대하여 말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역사적 인물들을 정지 영상으로만 보는  익숙해 있어요.” 클레어가 끼어들었다. “그런 인물들을 연기해 보여주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모방하여 모사할 뿐이죠그것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제스처만 골라서 말이죠.(…) 그들은 우리가   자기들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그래서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흥미를 주지 못하는 거고요그들은 단지 그들이 했던 아니면 적어도 그들이 살던 시대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하나의 기호에 불과해요.”(p. 152 ~ 3)


 이러한 연기가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어떤 실재를 알아서 우리가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 누군가  연기를 그저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에 있다 포드가 사실로  것도 실은 사실을 연기한 것에 지나지 않을  있듯이누구도 원본을 보지 못한  복사본만 흉내내 이다주인공은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안다작가가 '거대한 침묵의 바다' 앞에서 비로소 유디트와 주인공을 만나게  것도  때문이리라 생각된다우리가 가상의 연쇄 고리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유일하게   있는 일은 단지 연기를 멈추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아니면 존 포드가 영화 '철마'에 출연했던 한 여배우가 연기를 그만두었을 때 갑자기 했던 행동을 말한 것과도 같이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것밖엔 없을 것이다.



 작가가 유디트로 하여금 주인공을 살해하는 걸 포기하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라 생각된다. 그런 살인의 방식 또한 사랑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연기된 것의 연기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의 사는 모양들은 알고보면 다 닮아 보인다. 그건 우리에게 정형화된 삶의 틀이 있기 때문이다. 명절 때 친지들을 만나면 늘 듣게 되면 '언제 취직할래?', '언제 결혼할래?' 같은 게 대표적이다. 남들과 비슷한 꼴로 살지 않으면 근심의 대상이 될 만큼 우리는 고유한 자기만의 삶을 정립할 권리를 잘 얻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정형화는 대부분 클레어가 말한 바와 같이 모방을 통해 형성된다. 예전 '영웅본색'이란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성냥개비를 입에 문 주윤발을 따라했듯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도,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도 어쩌면 반복해서 보아 온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걸 모방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겐 유디트가 주인공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 그래 보인다. 우리가 틀에 박힌 삶이라고 넌더리를 자주 내는 것도 사실 사회가 우리에게 입히려 드는 정형화란 옷에 그걸 입어야 하는 정당한 근거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당한 근거가 없는데도 우리 몸에 맞지도 않는 '정형화'의 옷을 억지로 입을 때, 우리에게 드는 감정은 굴복일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실존이 한없이 엷게 여겨지는 일도 또 없을 것이다.


 ‘페널티킥 앞에  골키퍼의 불안에서 주인공이 분열증에 시달렸던 것은 아무에게나 쉽게 무시될 정도로 한없이 가벼운 자신의 실존 때문이었다자기 내부에서  실존의 무거움을 얻을  없었던 그는 살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실존에 중력 가져다 주려 했다주인공 역시 그런 중력을 얻고자 미국을 방황한다그러나 ‘짧은 편지에서 맛보았던 중력은 사실 중력이 아니었다그건 오직 미래의  포드로 만드는 기만의 힘에 지나지 않았다


 화가 부부도, < 카를로스>에서 행진하는 연기자들도 그리고  포드에겐  가지 공통점이 있다모두 타인의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들은 그들의 세계에 언제나  홀로 있다모든  자기 주관대로 파악하고 행동한다오직 클레어만이 이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갑자기 주인공이 찾아왔어도 그녀는 아이까지 있지만 전혀 성가셔 하지 않고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자기 세계 안 깊숙이 받아들인다. 늘 친분을 이어온 것처럼 진지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 대화를 할 때조차 클레어는 자기가 먼저 말을 하기 보다는 남의 말을 들으며 언제나 사려 깊은 이해의 말을 해준다. 더구나  클레어의 행동엔 그걸 통해 다음으로 이어지려는 목적 같은  없다 순간 자기 앞에 있는 상대와 그가 하는 말에 충실할 뿐이다주인공은 이러한 클레어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아이와 함께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정 형태를 이루기도 한다. 여기서 클레어만이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게 나는 인상 깊다.  문학에서 아이란 종종 구원이 깃든 미래의 상징으로 쓰인다. 난 이 소설에도 그런 의미로 아이가 나오는 것 같다. 이런 까닭으로 클레어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그나마 대안'이라고 내어놓은 게 아닐까 판단한다. 바로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하여.


 내가 이렇게 생각한 건, 주인공이 클레어의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다음과 같이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 사물들의 이름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제껏 내가 얼마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서는 눈꼽만치도 알지 못했다. 그제야 비로소 내 주변의 일상적인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는 아휘가 너무도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차츰 사물을 단지 바라보기만 하면서 "아하!"하고 경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 과정을 끝까지 관찰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p. 121)


 마지막의 문장은 클레어가 대화할 때 자주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아이와 대화하면서 주인공도 그렇게 변한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소설이 대화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대화가 필요해'란 유행가도 있었다. 그걸 지금 BGM으로 살짝 깔고 싶기도 하다. 작가가 대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실존에 중력을 주는 실재로 다가가는 통로가 되기 때문은 아니다. 작가는 사실 실재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언제 어느 때 인력이 되어 고유의 궤도로 돌아가야 하는 개인들을 자기 궤도로 따라 돌게 만드는 굴레가 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가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인공이 변화한 것처럼 대화를 통해 우리가 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보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변화야말로 내적인 성장을 이루어 주인공이 그토록 바라는 중력을 창출할 수 있기에 그렇다.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고 나를 둘러싼 세계가 예측불가해 지면서 우리는 늘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처럼 살아가고 있다. 불안의 한 가운데 있을 때만큼 나 자신의 실존이 한없이 가볍게 여겨지는 때도 또 없다. 그런데 우리가 경쟁에서 이겨 얻고자 하는 것이나 내 불안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이나 모두 대부분 정말로 내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남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회가 점점 더 돈이 전부인 황금 만능주의에 빠지고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자질보다 그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을 더 많이 고려하는 이유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 역시 그저 남들의 바람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허구헌 날 바뀌는 유행이 그러하듯이 한없이 가변적인 남들의 욕망을 무분별하게 모방하기 바쁘다 보니 나 자신이 너무나 가볍게 여겨지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무맹랑한 견해는 아닐 것이다. 작가가 대화를 강조하는 건, 그런 모방의 동작을 정시시켜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돌아다보는 여백의 시간을 주려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골방에 갇혀 거울을 보며 남들을 모방하는 연기에 힘쓰고 있는 나를 타인과 진솔하고 겸허하게 대화할 수 있는 광장으로 이끌어 그런 연기에 잔뜩 몰입하느라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내 내부에 깃든 광맥을 찾게 하려고 말이다. 다른 그 어떤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무거운 중력을 창출하는 자원들을.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가 그 어떤 종착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도중에서 별안간 끝을 맺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삶은 어딘가 닿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한 과정만이 전부라고. 이런 식으로 내게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내 외부에 있는 무언가에 기대어 자신의 실존을 무겁게 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긴 이별을 선언하는 작품이었다.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볼 기회를 가졌기에 더욱 이렇게 말하게 된다. 독일은 한 때 외부의 것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보다 무겁게 만드려는 일을 가장 왕성하게 했던 나라였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결국 유럽 전체를 전쟁의 화염으로 휩쓸고 어마어마한 수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전체주의를 낳았다. 이런 역사에 대한 반성이 작가로 하여금 대화를 중요한 것으로 만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건 독일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요즘 우리 사회에도 타인을 자의에 따라 멋대로 유린하는 갑질과 혐오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혐오와 수치심'을 썼던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가 사실은 자기 긍정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갑질이 근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페터 한트케가 이 소설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은 절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런 인정은 그저 연기를 잘 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날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 있다. 그걸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내 알량한 권력을 남에게 함부로 휘두르고 멋대로 남들을 배척하고 혐오하기 보다는 나를 열고 낮추어 타인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을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들어 대화의 시간 속으로 초대해야 한다.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 오직 나의 것만 필요할 뿐,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작가의 말은 이런 시대에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는가. 모두가 자신의 내면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면 더이상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갑질과 혐오도 한껏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난 마지막으로 이런 바람을 남길 수밖에 없다. 보다 많은 이들이 페터 한트케가 보내는 이 '짧은 편지'를 받아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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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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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평등하다. 누구에게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골고루 영위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두가 저마다 소유한 시간 속에선 주인인 것이다. 세계란 알고보면 개별적인 시간들의 집합이다.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작고 다양한 개체들의 시간이 한데 모여 전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런 풍경을 역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주 어떤 이들만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모자이크 그림의 어떤 한 조각만을 딱 떼어내 보고는 그걸 가지고 그림 전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태고의 시간들'이란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수 많은 존재들의 시간들로 이뤄져 있다. 거기엔 사람만 있지 않다. 개나 집 같은 사물의 시간도 포함되고 저 천상에 있는 성모와 천사의 시간도 포함되며 이승의 건너편에 위치하는 유령들의 시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첫인상을 무척 독특하게 만든다. 소설도 역사와 다르지 않아서 중심과 주변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 소설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과 사람에게 머무른다. 조연이 주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모두 평등하다. 다들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주인인 것과 똑같이. 하물며 사람 아닌 온갖 존재들도 그렇다. 소설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롯하여 모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방에 있는 존재들까지 모두 중심으로 만든다. 하나의 존재가 이끌어가는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켜 자아내는 다양한 결을 최대한 담으려 하고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로 투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내려 한다. 마치 문명이 만든 인간의 편견을 모조리 벗겨내어 모든 존재가 태고적일 때 가졌던 순수한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는 것처럼.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태고와 그것을 둘러싼 예슈코틀레와 고시치나에츠 마을과 백강과 흑강을 마주하고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크워스커가 은둔한 숲을 거닐며 그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시간들을 유영한다. 이 시간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1914년부터 2차 세게대전을 지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과 중첩된다. 우리는 이렇게 겹쳐진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 모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이들은 이분법에 빠져 있다. 나와 타자가 나뉘고, 나가 될 수 없는 타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우린 실제 역사에서 그런 시간들이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과오의 성찰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태고라는 마을을 작가가 이렇게 위치하도록 한 걸 보면 말이다.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부른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p. 7)


 태고는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종합 명제(synthese) 자리에 위치한다. 그것은 나와 반대된다고 배척하지 않으며 모두를 포용한다. 이처럼 마을엔 숲으로 상징되는 신화적인 공간과 마을로 대변되는 문명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설은 포용이 사라진 세계가 가져오는 비극으로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남편 미하우가 러시아 군대로 차출되면서 게노베파와 이뤘던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 즈음 마을에서 가장 밑바닥의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크워스카 역시 임신한 자신을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숲에서 홀로 출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문명이 작위적으로 일으킨 분열의 시간을 마을의 존재들이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차례로 보여준다. 어떤 이는 문명을 버리고 신화(크워스카)나 광기(플로렌틴카)에게 자신을 맡기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문명을 더욱 굳건하게 구축한다(보스키 영감, 교구신부). 이토록 다양한 시도들을 작가는 자신의 판단을 하나도 첨부하지 않으면서 그저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여주기만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그렇다고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을 일면적으로 묘사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인데, 모든 존재들을 하나같이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신의 방앗간에 일하러 온 젊은 청년 엘리에게 자꾸만 이끌리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게노베파는 물론이고 크워스카의 딸로 신화적인 공간에서 태어나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으나 문명의 유혹에 쉽게 굴복해 버린 루타 또한 그러하며 독일이 폴란드 점령 당시, 그 점령군으로 온 독일인 쿠르트마저 학살자 면모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이만큼 다변화 하는 묘사를 보다보면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든 간에 단 하나의 규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을 애써 피하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 감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사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주 경계를 넘나드는 게 중요하며 긍정할만한 행위라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노베파가 한 남편의 아내라는 사회가 그어놓은 울타리를 넘어 엘리를 사랑하는 것이나, 루타와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가 서로가 위치한 신화와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좋아하는 것이나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 폴란드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유대인 랍비가 선물한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나 다 그렇다. 물론 이건 대표적으로 거론한 예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월담 행위들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보스키 영감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게노베파의 딸 미시아의 남편이 되는 파부아 그리고 익사자 유령인 물까마귀가 여기에 속한다. 자기 혼자만의 영역에 강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영역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으며 보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나 더욱 협소한 장소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물까마귀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다른 죽은 영혼들과 달리 결코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며 늘 자신이 익사한 개울에만 거처하는 것이다.


 익사자는 영혼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 이런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영혼을 쫓아가려 애썼지만, 그들은 익사자 물까마귀와는 다른 법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익사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p. 204)


 이런 식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월담, 즉 나의 시간을 벗어나 타인의 시간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꺼이 거기로 건너가 서로의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바로 그런 시간들이 많아졌다면 죄없는 플로렌틴카를 쿠르트가 무참히 학살한 것과 같은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가져온 동기는 모두 물까마귀처럼 타인의 시간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의 시간만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가져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단지 타인의 시간을 건너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응시가 되기 위해선   그 바탕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소설에서 미시아의 수호 천사에 대해 얘기할 때 처음 등장한다.


 천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 즉 애정 어린 연민이 미시아의 천사에게도 차오른다. 이것은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다.(p. 15)


 연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소설은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설에 나타난 여러가지 정황으로 추정하건데,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강한 연대 의식을 연민으로 상정하는 것 같다. 이런 연대 의식은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에 발현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대표적으로 이반 무크타의 세상 해석을 통해 잘 보여준 바 대로 우리 모두가 우연 속에 태어나 필멸할 운명이며 후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크타의 영향을 받아 이지도르가 해석한 세상의 모습 그대로.


 이지도르가 목격한 모든 것의 속성은 일시적이었다. 겉은 알록달록한 껍데기에 싸여 있지만, 모든 것은 몰락과 부패, 파멸 속으로 융합되었다.(p. 178)


 이반 무크타는 이러한 무신론에 기반한 허무주의 때문에 타인을 건너다 보면서도 아무런 연민을 가지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타인마저 단순히 기계적으로 결합 가능하거나 그러지 못할 존재로 볼 뿐이며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지도르 앞에서 수간까지 감행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연민이 천사처럼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천사와 달리 인간에게 있어 연민은 결단을 통해 형성되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미시아의 행로도, 문명의 늪 속에 푹 빠졌다가 그것의 독기를 느끼고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써 신화적 공간의 분위기가 다분한 브라질로 떠나는 루타의 여정도, 게임을 통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과정도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민은 이 삶의 끝에 허무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충실히 경작하겠다는 다짐이며 그런 시간을 나 아닌 당신 역시 같이 머리에 힘겹게 지고 있으니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위로이며 응원인 것이다. 그토록 플로렌틴카에게서 원망을 많이 받았던 달이 오히려 그녀에게 따스한 위로를 해주려 했던 것처럼.


 이러한 연민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 미시아가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 미하우에게서 받았던 커피 그라인더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라인더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 제 것처럼 받아들이는 존재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어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려는 것이다.(p. 53)


 이는 게임의 천착을 통해 각성하게 된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말년에 보여주는 모습과 많이 유사하다.


 "아버지는 아예 작은 실험실을 마련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그 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분이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신발 밑창과 부츠가 마치 인류를 구원하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 여기셨어요.(p. 318)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내치지 않으며 다른 이들 눈에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중요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와 포피엘스키는 허무의 숙명 속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여 그 격리와 차별로 삶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문명이 오직 전쟁과 학살이라는 파국을 가져온 것과 달리 미하우가 딸 미시아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만든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터전이 되듯이 세상에 가장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딸이 하는 말에서 확인된다.


 하긴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가요그가 일종의 안전 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수도.(p. 320)


  놀랍게도 작가는 이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이 구원받고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연민을 강조하는 작가의 말에 설득될 밖에. 물론 이건 작가가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 내가 추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난 작가의 이러한 말이 이 시간 참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세상은 2차 대전 중의 폴란드와 다를 바 없이 타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깎아내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혐오의 말부터 내뱉는 일들이 주위에서 현저하게 일어난다. 최근엔 한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 못해 비극적인 선택을 해버린 일도 있었고 말이다. 우리에게 연민이 있었다면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니 더욱 올가 토카르추크가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내미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미시아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p. 345 ~ 346)


 맞다.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를 넘어 내 집 마련과 인간 관계도 포기하는 '5포'란 말이 나오더니 지금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란 말마저 공공연히 나오는 현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과 비관, 불안과 고통은 점철되기만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껍데기만큼 필요한 것도 또 없다. 작가는 같은 운명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껍데기가 되어주자고 말한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껍데기가 되어주라고 말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깊이 깨닫게 된 나는 작가의 말에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주기 위해 나 역시 그라인더처럼 연민 속에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며 한껏 포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디 '태고의 시간들'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이러한 연민의 시간에 참여하여 배제된 차별과 혐오로 불편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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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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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역사에는 골방이 존재한다. 누군가로부터 헤아림의 빛이 단 하나도 들지 않았던 곳이 말이다. 거기에 은둔하는 자들이 있다. 그 어떤 기록에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마냥 잊혀져버린 존재들이. 영국의 작가 세라 워터스는 그러한 골방의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다. 손전등을 그 안에 비추는 사람이다. 가려졌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잊혀졌던 그들의 삶을 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빅토리아 시대에 쉽게 무시되었던 남장한 여성 배우의 삶을 훑었고(벨벳 애무하기) 금기시 되었던 레즈비언의 삶을 세밀히 복원하였다.(핑거스미스)


 이번에 나온 ‘나이트 워치’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41년과 44년 그리고 47년의 일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해롤드 핀터의 희곡인 ‘배신(Betrayal)’처럼 말이다. 우리는 주요한 등장인물인 케이와 헬렌 그리고 비브와 덩컨의 미래를 먼저 보고 나중에 그들의 과거를 본다. 이건 케이의 말로 시작되는 첫문장인 ‘결국. 이런 인간이 되었단 말이지.’의 연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케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했던 말, “영화 중간쯤에 들어가 후반부를 먼저 볼 때도 있고. 뒤를 먼저 보는 편이 더 좋더라. 보통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잖아.(p. 145)”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란 전쟁을 다루지만 우리가 다른 전쟁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은 이 소설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라 워터스는 이전에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잘 시선을 던지지 않았던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사회가 죄악시 하는 탓에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로. 그리하여 우리는 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동성애자 케이와 헬렌을 만나고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비브와 남자라면 누구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당시 상황 속에서 병역을 거부한 덩컨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골방의 존재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쟁 상황에서 예외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 중심에 있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성향과 신념에서 촉발된 오직 자신만의 전쟁을 말이다. 정녕 그건 전쟁이었다. 언제든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타인의 시선은 날아오는 총탄과 똑같았으며 그 비밀이 밝혀질 경우 타인의 돌변으로 인간 관계가 깡그리 깨어지는 것은 갑자기 터지는 폭탄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피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더 혹독하게 전쟁을 치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기에 빅토리아 3부작을 끝낸 세라 워터스가 돌연 2차 세계 대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 그들이 움트고 있었던 골방의 문을 열어젖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골방은 고립의 장소다. 사회가 찍은 낙인 때문에 자신의 성향과 신념을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사람은 무연의 고립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단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느껴서는 안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같은 거야.’(p. 568)



 비밀이 드러났을 경우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연히 타인의 시선과 소리에 예민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인물들도 자기 주위의 상황과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들은 늘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고 지금 어쩌고 있는지 소리를 통해 추정한다. 


 그런 면에서 야간 순찰을 뜻하는 제목인 ‘나이트 워치’는 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야간 순찰을 하는 자는 주위를 꼼꼼히 주시하고 들려오는 모든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자기가 아니라 그 외부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는 존재다. 그만큼 바깥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자이기도 하다. 야간 순찰은 자신이 정주하는 곳을 지키기 위하여 도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내보여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을 만들거나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찰만 돌다보면 그런 곳을 마련할 여지가 없다. 타인이 가져올 잠재적인 위협에 불안하여 늘 그것만 살피다간 언제까지나 맴돌기만 할 뿐인 것이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1947년의 케이와 헬렌, 비브와 덩컨 모두가 그와 같았다.


 골방에 있다는 건 그들이 '온전한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이 일하는 라벤더 힐의 방 하나를 빌려 지내고 있으며 과거 케이의 연인이었던 헬렌은 지금은 줄리아와 셋방에서 지내고 있다. 이 방들은 모두 방음이 전혀 안되어 옆방의 소리를 훤히 들을 수 있는 장소다. 그러므로 이쪽에서도 당연히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만드는 소리라면 더더욱. 방이 방이 아닌 것이다.


 비브는 집에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모습이란 마치 집이 아예 없는 듯,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게 대부분이다. 


 비브는 그게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스러웠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아 더 의식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레지와는 이렇게 어딜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에 가본 적도 없고 그저 외진 곳만 줄기차게 찾아다녔다.(p. 181)



 덩컨은 병역 거부로 인해 교도소에 있었을 때, 가장 친절한 교도관이었던 먼디의 집에 얹혀 살고 있다. 세라 워터스는 이들에게 왜 이런 상황을 가져다 주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헬렌의 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동성애 때문에 사랑으로 인한 고민과 상처를 늘 숨기고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 하는 헬렌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는 순간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마치 전처와 후처 사이처럼 한 사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런 얘기는 그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었다. 케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옛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아니면 케이에 관해서는 비밀로 했다.’(p. 362)



 소설에서 이란 바로 그런 장소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타내는. 일종의 해방구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이도, 비브도, 덩컨도 그걸 바란다. 그들은 그걸 찾기 위해 야간 순찰을 계속 하지만 케이의 이 말 그대로 현실은 부정적인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47년의 케이가 여성을 유혹할 때마다 거부를 당하는 것처럼.


 “무너지는 중이야.” 케이가 말했다. “진짜로 바람이 세게 분다 싶으면 집이 흔들리는 게 느껴져. 집이 신음하는 소리도 들리고. 곡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 그게 용케도 버티고 서 있는 건 전적으로 선생 덕분이야. 순전히 정신력으로 그 집을 떠받치고 있는 거지.”(p. 146 ~ 147)



 그들은 모두 집을 잃었다. 44년의 케이가 구급대원으로 가장 많이 목격했던 것도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린 집의 잔해였다. 사회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간다운 연민과 진솔한 유대를 나눌 수 있는 장소들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하필이면 44년의 줄리아와 헬렌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거기서 줄리아는 아버지와 함께 이제는 더이상 집이 될 수 없는, 그저 잔영에 불과한 빈집들을 살피러 돌아다니고 헬렌은 집이 무너져 살 곳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그들이 삶을 다소나마 복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 줄리아의 일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줄리아는 오히려 가득한 허무와 통렬한 슬픔을 확인할 뿐이다.


 나는 이 전쟁이 아름다움 보다는 야만성에 대한 애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대변되는 그 정신은 희미해졌어요. 이젠 금박처럼 다 들떠서 벗어져나간 거죠. 지난번 전쟁에서 세인트폴이 우릴 지켜주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도 우릴 지켜주지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우리가 성당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싸워야 한다면 이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져야 하는 거죠?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얼마나 크게 자리해야 하는 건데요?(p. 473)


 헬렌 역시 집을 잃은 이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일이었으나, 상담하러왔던 여성의 이 말처럼 헬렌이 하고 있는 일은 사실 그들을 늘 여기저기로 떠도는 불쏘시개로 만들 뿐이다.


  그래도 여자는 자기 손에 든 서류 쪼가리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난 불쏘시개인가봐요.” 여자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냥 불쏘시개 같아서.”(p. 372)


 이 둘이 치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건 모두 자기 내부에 구원할만한 힘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헬렌의 이와 같은 고백처럼.


 첫 대공습 때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주려 애썼다. 어떨 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을 무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약한 자들을 돕는 영웅이라도 된 양 일에 덤벼들었는데, 하고 헬렌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p. 472)


 나중에 이 둘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가 많은 교회(지켜야 할 성스런 가치의 상징으로써)가 무너진 폐허이며 빛이 거의 없는 어둔 장소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줄리아는 거기서 자신들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 내부에 상황을 개선할 아무 동력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신들에게 참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케이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줄리아와 헬렌은 전쟁을 핑계로 점점 자기가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걸 정당화했지만 케이는 전쟁을 핑계대지 않았다. 줄리아와 헬렌은 바깥의 작은 소음에도 긴장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바짝 죽였지만 오히려 케이는 바깥의 소란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냥 집에 들어앉아 소란을 듣는 것보다 이렇게 그 소란통에 나와 있는 게 더 편할 뿐이에요.(p. 655)


 결정적으로 케이는 레지조차 버리고 달아났던 비브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레지라는 거짓의 집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던 그녀에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 때의 케이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발전기를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헬렌의 생일날 헬렌에게 선물했던 진줏빛 새틴 잠옷은 그것의 총화라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헬렌 또한 그 잠옷에서 비로소 집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47년의 헬렌이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줄리아 때문에 번민할 때 그것이 문득 자신이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잠옷으로 떠올랐던 것을 보면.


 그 진줏빛 새틴 잠옷이 떠올랐다. 줄리아의 옆에서 손가락 하나 닿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누워 돌이켜보니, 그게 지금까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잠옷이었다.(p. 213)



 이런 대비는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덩컨과 프레이저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둘은 서로가 속한 계층도 하류와 상류로 전혀 다르고 하루를 보내는 모습 또한 아주 차이가 난다. 덩컨은 말없이 한 곳에 우두커니 정지해 있을 때가 많지만 프레이저는 끊임없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회 측에서 보자면 보통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류계급(교도관들도 그가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어 한다.)에다 많이 말하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을 존재감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덩컨은 아무래도 존재감이 엷다고 여긴다. 교도소의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덩컨은 겁이 많고 허약하다고. 하지만 독일이 교도소를 폭격했을 때, 사실 겁이 많고 존재감이 약했던 것은 프레이저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 신념을 믿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한심한 겁쟁이일까?

 하지만 병역거부자들도 알아. 피어스 우리도 두려움을 느껴… 한 편에는 씩씩하게 싸우러 나가는 제일 흔한 타입의 남자들이 있지. 그들이 바보라서 덜 용감한 건 아니잖아? 전쟁이 끝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그런 사내들 덕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 (p. 575)


 누구보다 약해 보였던 덩컨은 오히려 아무런 동요 없이 프레이저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덩컨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자신을 얽매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묵묵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비웃는 프레이저에게 자신이 열심히 변호한, 30년 째 같은 자리를 지키며 똑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교도관 먼디처럼.


 그렇게 케이와 덩컨은 자기 안에서 지탱할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이들만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와 같은 집에 살게 한 설정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과 덩컨은 먼디와 함께 산다. 레너드와 먼디 모두 바깥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키며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케이는 레너드만이 다 무너진 집을 유일하게 지탱하고 있다고 말하며 별 건 없지만서도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장 집 다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오직 먼디 뿐이다. 그런 레너드는 헬렌을 잃은 뒤, 자신이 가진 내부의 힘을 상실하고 좌절의 야간 순찰을 계속하고 있는 케이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제가 보기에 랭그리시 양도 그런 영혼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찾는 중이지만, 아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건 당신이 눈을 내리깔고 찾기 때문입니다. 흙먼지밖에 안 보이잖아요. 눈을 들어야 합니다. 이내 사라질 것들로부터 눈을 들어 멀리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p. 228)



 이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현혹되어 비관하거나 주눅들지 말고 언제나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과거의 케이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 먼디 또한 상황에 대해 똑같은 조언을 한다.


 어떠한 생각도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생각이 당신을 잠식하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장애는 존재하지 않아요. 조화의 힘이 당신과 당신의 모든 장기에 퍼져 있다고 단언합니다.(p. 23)

 

 상황에 굴하지 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마주하여 스스로 한없이 무력해보여도 그것에 널 쉽게 휩쓸리게 해선 안된다. 내가 보기에 레너드와 먼디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는 케이와 덩컨 모두에게 과거의 자신을 회복시키는 주문과 같았다. 그랬기에 케이는 불현듯 비브가 넣어 준 반지를 통해 이처럼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지는 어스레하게 반짝거렸다. 담뱃재 틈에서도 자꾸 시선을 끄는 통에, 얼마 안 있어 케이는 다시 반지를 잿더미에서 꺼내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앙상한 손가락에 끼운 뒤 빠지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p. 229)


 덩컨 또한 어느새 사회에 길들어져 타인의 시선에 휩쓸려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바라는 쪽을 선택하는 결단을 순식간에 내릴 수 있었다. 그 밤의 산책을 통해 덩컨은 '보여지는 자'에서 '보는 자'로 나아간다. 그러자 오로지 위협적인 것만 가득했던 세상이 어느새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차(p. 221) 있는 것을 보게 되며 드디어 프레이저가 암막을 걷고 열어준 창문을 통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마치 덩컨이 비로소 집을 찾았다는 듯이 여기서 그들을 찍는 카메라를 멈춘다. 이와 같이 자신을 자꾸만 불안한 야간 순찰꾼으로 만드는 상황을 타개할 힘은 나의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내부에 있다.


 41년의 비브를 보라. 그 때의 비브 또한 케이, 덩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을 만들 수 있는 힘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지를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아주 좁은 화장실이었지만 그조차 사랑을 나누는 집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물론 그 즉흥적이며 사소한 결정이 훗날 자신의 삶을 여지없이 칭칭 얽어매긴 했지만. 


 아무튼 좁은 화장실과 둘이 열정적으로 나누는 사랑의 대비는 마치 원효 대사의 '일체유심조'처럼 상황이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리 강하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누나와는 반대로 알렉이라는 집을 잃게 되는 덩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은 덩컨의 집에서 일어났다. 덩컨의 가족만이 사는 온전한 집이다. 하지만 그 일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덩컨이 집을 잃었던 이유와 비브가 찾았던 집이 훗날 변질된 이유는 많이 다르지 않다. 모두 상대에게 자신을 너무 매여두고 있었던 탓이다. 영원히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늘 불안한 헬렌이 그러하듯. 


 그 어떤 상황에 있다고 하여도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말고 나를 위한 그가 아니라 그를 위한 나를 더 많이 보도록 하는 것. 내게 '나이트 워치'는 바로 이 말을 우리 심장 깊이 새겨두기 위한 여정으로 보인다. 사실 인간은 그리 강하지 않기에 환경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자주 우리는 자신의 힘을 넘어선 상황을 핑계대며 무력한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남들은 다 하고 있는데,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표가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옳은 선택을 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스스로 얼마나 많이 잡아왔던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이트 워치'가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지가 가져다 주는 한계로 날 정당화하며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안전 확보를 도모하면 할수록 우리는 정주할 집을 얻기는 커녕 한없이 계속되는 불안한 야간 순찰 속에서 스스로를 더욱 좁디 좁은 골방으로 내몰 뿐이다. 세라 워터스는 우리가 자신을 골방 속에 가두는 존재가 아니라 케이처럼 골방에 갇혀 있는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자신이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이것이 오직 소설의 인물들처럼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때로는 남에게 뒤쳐질까 혹은 나도 모르게 조직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어느 정도는 야간 순찰을 하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면 그 사슬을 끊는 시작을 '나이트 워치'로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느새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마저 광장으로 이끌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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