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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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에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제럴드의 게임'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스티븐 킹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원래 난 스티븐 킹을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작가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로 다르고 있는 장르가 공포이고 더러 피와 살이 튀는 폭력이 난무한데다 흔히 레드넥이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의 마초적인 남성들이 많이 주역도 맡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제럴드의 게임'은 그런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한 마디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거기서 남편 때문에 뜻하지 않게 침대 위에서 갇힌 채로 며칠을 보내는 여 주인공은 알고보니 지금만 갇힌 상태가 아니었다. 실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내내 영혼이 갇힌 상태였다. 남성의 편향된 폭력과 억압 아래에서 한없이 결박된 여성의 내면을 작품은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는 '제럴드의 게임'을 통해 스티븐 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초기작 '캐리'에서 이미 대두되고 있었을지도 모를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말이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는 건 이내 증명되었다. 여기 또 한 편의 페미니즘적 모습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둘째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쓴 '잠자는 미녀들'이다.




 소설은 오직 여성들만 걸리고, 걸리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수면병이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때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이름인 '오로라 병'(샤를 페로의 원작에선 사실 그녀의 아들 이름이다.)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요 무대는 미국의 둘링 카운티. 소설은 오로라 병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차츰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1권의 주된 내용이다. 둘링 카운티에는 둘링 여자 교도소가 있다. 둘링 카운티 주민의 생계는 이 둘링 여자 교도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바로 이곳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갇힌 여자들이 나왔듯이, 이 소설에서도 갇힌 여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잠에 들게 만드는 수면병은 그야말로 여성들을 가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옥과 수면병은 그렇게 직결되고 그 직선은 그대로 여성들을 '갇힌 존재'로 만드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째서 폭력과 억압이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저넷과 리가 교도소에 오게 된 사연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녀들이 감옥에 온 것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려 한 결과 공권력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의 더 커다란 폭력에 의해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교도관에 의해 똑같이 성폭행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터라는 교도관이다. 이처럼 여성 죄수들의 사연과 어디에 있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성폭행들을 보노라면 '억압과 폭력'이란 말을 쓰는 게 그리 무리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계속해서 남성의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여성들을 여럿 선보인다. 마약을 만드는 트레일러에서 헌신짝처럼 취급받는 여성과 십대 남자 아이들에게 거의 학대 수준으로 괴롭힘 당하는 노파가 대표적이다. 수면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한 여성 '이비'(이름에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처럼 이비는 가장 원초적인 여성으로 아담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이다.)가 둘링 카운티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비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녀들을 해방시킨다. 깊은 잠으로써...


 이런 의미에서 잠은 그저 '갇힘'의 의미만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 여성들만 빠지게 되는 잠은 정지다. 남성 중심 사회의 가동을 마치 일시 정지(pause) 버튼을 눌러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정지인 것이다.

나는 분명 수면병이 그런 의미로 소설에서 쓰여지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이 잠들 때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얀 고치가 증거다. 다들 알듯이, 고치는 변태를 위한 과정이다. 나비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봄에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자신이 될 수 있다. 나방 또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되려면 하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마디로 고치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 지금의 갇힘은 영원한 유폐가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인 것이다. 

잠이 보다 나은 몸과 마음의 상태로 깨어나기 위한 과정이듯이.

 

 스티븐 킹은 정말 그런 의미로 수면병을 썼다. 그 뚜렷한 증거가 소설에 나와 있다. 미케일라 '미키' 모건이란 여성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리포터다. 아주 매력적인 다리를 가진 그녀는 보도 방송을 할 때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물론 그녀가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이 그런 식으로 시선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싫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둘링 여성 교도소에 갇힌 여자들이나 트레일러의 여자가 오래도록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랬던 미케일라가 1권 후반에 수면병이 더욱 확대되자, 그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보여 그 일을 자의로 그만둬 버린다. 시선에 착취 당하는 걸 그만두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면병은 단순히 여성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물론 난 1권만 봤기 때문에 2권에서 어떻게 되는진 모른다.)

 이것은 잠이 든 여성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하얀 고치를 억지로 떼어냈을 때, 그로인해 깨어난 여성들이 하는 행동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소설은 고치의 제거와 함께 갑작스럽게 깨어난 여성들이 자신을 깨운 이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인까지 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 때 스티븐 킹이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게 바로 엄마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이 장면들은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왜 이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려했을까 의문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여성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가장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랜 세월동안 남성 중심 사회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모성은 사회가 여성의 자의식을 가장 많이 억제한 갑주였던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는 열악한 자신의 지위 때문에 사회가 더 많이 덧씌운 옷들을 보다 더 자신으로 여기고 살았다. 수면병은 그 옷들을 벗겨 여성 본래의 정체성으로 되돌리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이건 이비를 따라다니는 나방이 가지는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나방 관찰자를 모서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를 뜻하는 마더와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다르죠.(p. 101)


 남성 중신 사회가 규정한 모성이 아닌, 거기에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모성. 수면병은 비유하자면, 귀향의 행로인 것이다. 


 물론 이건 1권까지의 이야기다. 2권에선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권만으로 스티븐 킹이 아주 선명한 주제로 무장한 페미니즘 소설을 썼다는 건 명백하게 보인다. 이런 면에서 '잠자는 미녀들'은 독자에겐 그간 잘 볼 수 없었던 스티븐 킹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스탠드'와 '셀' 혹은 '미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스티븐 킹의 묵시록 묘사의 재능이 다시 한 번 잘 발휘되어 있어서 이런 쪽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더욱 권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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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0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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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숭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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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작년 내가 읽은 최고의 스릴러는 A.J 핀의 '우먼 인 윈도'였다.

 이 작품은 정말 내게 명불허전을 실감하도록 만들었다. 재밌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게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난 정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 소설을 단번에 흡입해 버렸다. 무려 619페이지에 이르는 두터운 이 작품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열차 안에서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비채는 제대로 홈런을 날려버렸다. 그런데 지금 또 비채가 홈런을 날렸다. 다시 말해 '우먼 인 윈도'에 버금가는 흡인력을 자랑하는 작품이 또 다시 비채에서 발간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J. D. 바커 '네 번째 원숭이'다.





 형사 샘(원래는 새뮤얼) 포터는 동료 내쉬 형사의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을 찾아간다. 누가 갑자기 달리는 버스 앞으로 뛰어들어 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누가봐도 자살이 명백한 사건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영문을 모를 무렵, 내쉬가 포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게 만드는 말을 한다. 그가 검은 리본이 묶인 작고 하얀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시카고는 흔히 '네 머리 원숭이 킬러'라 불리는 연쇄살인마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에머리 역시 네 마리 원숭이 킬러에 대해 잘 알았다. 시카고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연쇄살인범이라서가 아니라, 희생자를 죽이기 전에 고문한 다음 신체의 일부를 가족에게 우편으로 보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p. 109)


 샘 포터는 지난 5년 동안 네 마리 원숭이 킬러(줄여서 '4MK'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놓아 둔 상자를 21개나 보았다. 희생자 한 명 당,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가 담긴 상자를 보내니까 총 7명이 킬러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만한 인원이 죽었는데도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오직 상자만 남길 뿐, 그 외 증거는 완벽하게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자를 가진 채, 버스로 뛰어 든 남자가 그 킬러였을까? 상자에 담긴 귀는 그가 자신의 죽음까지 감행하면서 초대한 마지막 살인 게임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귀는 누구의 것인가? 샘 포터의 내면에서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가운데 죽은 남자의 소지품에서 한 권의 노트가 발견된다. 네 마리 원숭이 킬러가 자신이 살아 온 내력을 적은 기록을. 소설은 그 노트의 발견과 동시에 두 개의 내용으로 병행하며 전개된다. 하나는 4MK를 디뒤쫓는 수사반들의 이야기로, 다른 하나는 노트에 나와 있는 4MK의 고백으로.


 한 편, 귀의 주인공은 곧 밝혀진다. 상자에 수신인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차기 시카고 시장으로 유력한 사회 지도층 인사 아서 탤벗. 샘 포터 일행은 그와 가족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 에머리가 범인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자 속 귀는 그 에머리의 귀였던 것이다. 죽은 자가 진범일까? 정말 진범이라면 귀만 자르고 자살을 결행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런데 만일 다른 자가 범인이라면 에머리의 눈과 혀가 배달되기 전에 구해야만 한다. 샘 포터가 지휘하는 수사반은 죽은 남자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에머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한 편, 노트 속 4MK의 고백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는데...



 이런 소개로 책을 읽으며 설정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이 얼마나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게는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었다. 4MK의 범죄 방식은 물론 노트 속 그 가족의 과거 또한 날 완전히 사로잡았다. 혹시나 궁금하실 분이 계실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네 마리 원숭이'는 일본 닛코의 도쇼구 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 신사의 입구에는 원숭이 상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원숭이는 귀를 가리고 있고 두 번째 원숭이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세 번째 원숭이는 입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각각 악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라고.



 실제 도쇼구 신사의 원숭이는 이 셋 밖에 없지만 미국엔 네 번째 원숭이가 있으며 그건 악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알려진 바 있는데, 소설은 그걸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킬러가 스스로 네 마리 원숭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악행을 저지하는 것이라 그러한데, 5년 전 그의 첫 살인이 그랬듯이 4MK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간 범죄자를 찾아내 처단한다. 그런데 범죄자 자신을 처단하는 게 아니라 그의 가족을 납치하여 귀와 눈 그리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한다. 그가 타인의 소중한 존재에게 커다란 아픔을 입혔으니, 그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는 논리다. 역시나 아서 탤벗 또한 무고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행한 죄의 대가로 숨겨둔 자식인 에머리가 납치된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가? 그건 4MK가 쓴 노트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샘 포터가 주역이 되는 수사 이야기와 4MK가 기록한 노트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읽으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블랙홀에 붙잡힌 빛처럼 이야기가 뿜어내는 중력에 마냥 끌려갈 뿐이다. 특히 4MK가 쓴 노트의 기록은 압도적이다. 선정적인 설정과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반전 속에서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동안 허다한 스릴러를 만났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식상함만 느꼈다면 '네 번째 원숭이'를 꼭 한 번 만나보셨으면 좋겠다. 잃어버렸던 스릴러의 재미를 여기서 찾아낼 지도 모른다.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만큼 소설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그렇게 하면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도 밝힐 것 같고 여러 모로 처음 만나 읽어보면서 느끼게 되는 재미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련다. 그냥 이 소설의 존재를 모르실 분들을 위하여 '여기 정말 재밌는 소설이 나왔으니 꼭 한 번 만나보시라!'는 의미 정도의 리뷰로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를 보니, 아무래도 속편이 나올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걸 하루빨리 보게 되기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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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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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흑인 여성 작가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SF 소설계의 전설이다. 하나도 따기 힘든 SF 소설 최고 권위의 상을 3부작 모두가 해마다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휴고상 역사상 최초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년 초에 우리나라에도 발간되면서 비교적 빨리 우리에게 소개된 편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오벨리스크의 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부서진 대지'는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벨리스크의 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엇보다 첫째 권인 '다섯 번째 계절'부터 읽으실 것을 당부드린다.





 배경은 지구. 하지만 아주 먼 미래다. 

 거기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이다. 변화무상한 사계절은 이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황폐와 삭막의 계절 뿐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구는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다. 생존한 인류는 현재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망하기 전 인류는 대지 보다 하늘을 더 숭배했으나, 이젠 아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대지 중심이다. 땅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연히 땅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의 에너지로 땅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오로진'이라 부른다. 아무나 오로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오로진의 통제되지 않는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로진을 괴물 취급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쑨의 남편이 그랬다. 그는 아들이 오로진인 걸 알자 딸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여버린다. 남편 지자는 딸 나쑨 역시 오로진인 걸 알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삽시간에 소중한 아들을 잃고 딸까지 빼앗긴 에쑨 또한 딸을 찾아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부서진 대지'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오벨리스크의 문'은 지자가 나쑨을 데리고 떠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나쑨이 에쑨과 함께 이번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소설은 에쑨과 나쑨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에쑨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과거 스승이자 연인인 알라배스터와 함께 있다.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오벨리스크들을 조종하여 지구에서 벗어나버린 '달'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다섯 번째 계절'의 마지막에 달이 왜 나왔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달이 사라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을 전설의 존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함께 알라배스터는 지구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그가 왜 다시 한 번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에쑨이 하루빨리 오벨리스크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말해준다. 그건 바로 '스톤 이터'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돌로 되어버린 육체 때문에 죽지 않고 있어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 그들의 일부가 지구에 자신과 다른 종족이 존재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나쑨은 여행 도중 우연히 늘 괴물로만 취급되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걸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주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작에서 오로진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가던 샤파다. 아주 모처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나쑨은 샤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가까이에 있는 오벨리스크에서 힘을 끌어내 그걸 증폭시켜 사용하는 걸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 그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걸 시작으로 나쑨에게도 점점 더 큰 비극이 닥쳐온다. 아버지 지자가 조산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나쑨을 그녀의 오빠처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쑨은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편입하기 위해 능력을 연마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다섯 번째 계절'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공존과 차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부각하면서 규모를 더 확장시켰다. 달의 부재는 현재의 지구가 하나만 존재하는 독재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존재할 것을 허락하는 스톤 이터들은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알라배스터가 달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를 다시금 공존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는 세상. 오크림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이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세상. 오로진으로 차별을 많이 받은 알라배스터였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에쑨도 다르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알라배스커의 말을 결국 따르게 되는 건 전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된 스톤 이터 호야의 존재 때문이다. 자신이 스톤 이터이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오로진 에쓘을 도와주려 애쓰는 호야를 보면서 그녀는 왜 같은 것 하나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알라배스터는 그렇게 달을 데려오는 힘을 '마법'이라 말한다. 마법 역시 과학에 밀려 사라진 힘. 그런 의미에서 마법은 달과 유사한 상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주류에 가리거나 억압되어 이면에 머물게 된 것들을 에쑨은 다시 불러오려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바로 그런 이면을 여는 문이다. 영원히.


 '오벨리스크의 문'은 공존과 조화라는 사회적 메세지로 충만하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태에서 보듯,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는 요즘엔 정말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른 차별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해하려는 몸짓보다 경멸과 거부의 몸짓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움직임 끝에 뭐가 있는지는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이 잘 보여주었다. 이란이 자신의 영공 가까이 날아온 민간 여객기를 미군의 보복 공격인 줄 알고 격추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였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목숨들이었다. 차별과 배척 또한 얼마나 많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아픔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던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에쑨과 나쑨의 여정을 통해 그걸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SF, '오벨리스크의 문'. 작품의 가치도 가치이지만,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더욱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얼른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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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1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썼는데 그게 다 상을 받았군요 이어졌다 해도 어떤 건 따로 봐도 괜찮지만, 이건 첫번째부터 차례대로 봐야겠습니다 앞에 이야기를 모르고 이걸 보면 뭐지, 하겠군요 아들과 딸이 오로진이라면 두 사람에서 한사람이 오로진이라는 건데... 에쑨이 그런 듯하네요 자기 자식까지 죽이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보는 거 처음이 아니기는 하네요 자기 자식한테 다른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부모 다른 데서 보기도 했군요

다르다고 무서워하기보다 함께 살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뿐 아니라 동, 식물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죠 이제는 한 지역 한 나라가 아닌 지구를 다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
 
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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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볼모로 잡는 범죄인 유괴 혹은 납치는 스릴러 장르에선거의 클리셰라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정도로 흔하게   다른 범죄보다  생생한 현장감으로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킬  있기 때문이다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사건인데다 더하여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무고한 이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일이라 읽고 있는 이로썬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독서에도 적용되어서너무 많이 접하다보면 한껏 올라간 낯익음 때문에 아무래도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그래서 이런 식상함이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면 장르는 ‘비틀기라는  시도하게 된다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르의 틀을 슬쩍 바꾸어 그걸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여 작품의 신선도를 높이는 것이다공포영화에서 ‘스크림  대표적인 사례라  만하다물론 유괴납치물에 있어서도 이러한 비틀기는 이뤄졌다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것이다그리고 여기   편의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 있다.





바로 변호사 출신의 미국 여성 작가 섀넌 커크의 ‘복수해 기억해.


 원래 제목은 ‘Method 15/33’. 사실은 소설 속에서 납치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하는 작전의 이름으로 이것만 가지고선 독자에게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하는   전달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걸 보다 선명하게 전하려고 ‘복수해 기억해 바꾼  같다아마도 이런 제목을 만든 이가 GOD 팬인  같다그들의 노래 중에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아닐까 한다실은 제목을 보자마자 얼른  뇌리 속에서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노래가 BGM처럼 흐르기에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오로지 나만의 추리에 불과하니 너무 신뢰하실  없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어떤 비틀기가  소설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납치물(유괴납치물로 계속 쓰려니  힘들어서 이렇게 그냥 납치물로 퉁치려 한다.) 범죄자의 능동성과 납치감금된 자의 수동성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장르이다권력의 뜻으로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게 하거나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듯이납치물에서 피해자는 옴짝달짝   없는 그의 육체만큼 존재가 한없는 수동성의 냉기로 빙결된다반대로 가해자는 피해자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기 뜻대로 얼마든지   있기에 능동성이 태양처럼 훨훨 불타오른다피해자의 생사여탈권마저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납치를 다루는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에서 가해자가 자신을 종종 신이라 운운하는 것도  때문이다앞서 말한 ‘비틀기 바로  관계에 가해진다 마디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해자의 능동성과 피해자의 수동성을 전복시켜버리는 것이다.


 복수해 기억해 시작부터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납치 소설이 앞으로 전혀 다르게 펼쳐질 거라는  확실히 각인시킨다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여섯  소녀의 리사 일랜드는 공포에 떨기는 커녕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금 어떤 경로를 통해 끌려가고 있는 것인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사용하여 냉철하게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판단하는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게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그녀에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제목처럼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상대에 대한 자비없는 복수 뿐이다 순간의 도래를 위해 리사는 괴한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순종하는 연기를 한다그러면서 상대의 목숨을 끊고 탈출을 도와주는 주위의 물건들을 번호를 붙여가며 하나하나 모은다 모든 것은 자신이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바로  작전명이 ’15/33’ 것이다.


 걸크러쉬라는 말이 있다원래는 여자가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 대중 문화에선 남성들을 압도할 만큼의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여성이 나오는 작품(여성 ‘테이큰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시영 주연의 영화 ‘언니처럼) 자주 쓰인다그렇다면 ‘복수해 기억해’ 또한 ‘걸크러쉬그것도 아주  걸크러쉬라 하지 않을  없다그런 의미에서 ‘복수해 기억해 주인공 리사 일랜드는 스릴러 소설에 한정하여 가장 대표적인 걸크러쉬라 할만한 사라 패러츠키의 여자 사립탐정 캐릭터 V.I. 워쇼스키의 계승자라  만하다그런데  전복성은 주인공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설은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명은 주인공 리사 일랜드이고 다른  명은 리사 전에 납치된 소녀인 도로시 사건을 추적하는 FBI 수사관 로저 리우이다보통의 납치물에선 범죄자를 뒤쫓는 형사가 주인공이고  역시 가해자만큼이나 한껏 능동성으로 무장하고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형편인데, ‘복수해 기억해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원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꿈조차 이루지 못한 남자( 꿈은 아내가 대신 이뤄 그녀는 현재 미국 전역을 돌며 코미디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인데다 사건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이렇다  활약도 별로 없으며 존재감 또한 엷은 것이다작가는 이런 존재에게 이야기의  축을 기꺼이 담당하도록 하고 있는데이건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납치물과 얼마나 차이를 갖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같다.


 이건 위에서 말한 장르 비틀기 원하는  하나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틀기는 단순히 작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이지만은 않는다 목적엔  하나가  있는데 그건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 효과 불릴  있는 것이다. ‘소외 효과 흔히 ‘낯설게 하기 풀이할  있는 말로 클리셰처럼 굳어진 장르 규칙에 변칙을 가져다 그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익숙함에 따라 굳어진 자신의 생각취향가치관들을 낯섦음의 효과 속에서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이것이 비틀기가 가진  하나의 목적이다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믿음내리고 있는 판단들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는 시간 말이다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가치관이란 누군가 의도적으로 형성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그런 가치관을 점점  굳어지게만 했던 문화 자체를 비틀어 문화를 넘어  자신마저 달리   있는 눈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다내가 너무 무리하게 설명하고 있어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복수해 기억해 비틀기 또한 그런 연장선 상에 있다.


 무엇보다 리사를 납치한 목적이 되는 범죄 그렇다

 그녀가 납치된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여섯인데 임산부라고 충격받지 마시길 보다  충격적인  있으니까그들이 리사를 납치한  리사 때문이 아니라 리사가 잉태한 아이 때문이었다알고보니 범죄자들은 리사처럼 어린 임산부를 납치하여 아이를 꺼낸다음 아이가 없는 부모들에게 매매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청년 경찰에서도 이와 비슷한 범죄가 나왔던  같다또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생각난다실은  ‘시녀 이야기 작가가 이런 설정을 만드는데 영향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녀 이야기 배경으로 하는 세상에서 여성이 가진 의미는 오직 아이의 출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여성에게 번식과 같은 동물적인 의미만 갖도록 하는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행위라  만하다작가는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구현된 여성의 수동성을 보다 선명하게 전복시키기 위하여 형사도범죄도 그렇게 설정한  아닐까 싶다.(원래는 ‘틀림없다 썼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물러선다으음….)


 결론이다


 주인공에형사에범죄에 이런 전복성이 넘치는 ‘복수해 기억해 분명 읽어볼만한 작품이다재미에 관해선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가열찬 복수 이야기만큼 짜릿하게 흥분시키는   있을까재미만이 아니라  하나의 골인 지점을 두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달려나가는작품이 가진 에너지 때문에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대화 보다는 대립이포용 보다는 차별이 횡행하는 것엔 분명 타자를 전혀 달리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익숙함의 중력에 많이 붙들려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그러니  기회를 위해서라도 꽈배기처럼 이전의 납치물을 한껏 비틀어버린  소설을 당신의 배갯머리 옆에 살며시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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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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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장 대표작인 와일드 시드 발간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 출간은 아니다지금은 절판되었는데예전에 오멜라스에서 ‘야생종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다아마도 그것이 장편으론 처음으로 소개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와일드 시드 말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제목인 ‘와일드 시드(야생종)’마저도 어떤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지배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냥우는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알지요.”

 “그래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하지만  여자는 야생종이야제어하기 힘들지 여자를 제어하는  지쳤다.”(p. 355)





 주인공은 여성인 아냥우. 그녀가 바로 야생종이다.

 ‘와일드 시드 1976년에 발표된 ‘패턴마스터’(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한 ‘PATTERNIST 시리즈'  네번  작품으로  시리즈답게 역시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물론 아냥우도   하나다소설은 작품 내내 그녀와 대척점을 이루는 도로의 눈을 통해 독자들 앞에 아냥우가 얼마나 특별하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한다일단 그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으며 성별은 물론 동물까지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있는데다  백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이기도 하다 정도라면 거의 ‘DEMI-GOD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하다도로 또한 아냥우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강탈할  있다자신의 존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때로는 아버지로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주술사 할머니로 자식들을 낳고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냥우를 유일하게 알아보는  또한 도로다그렇게 소설은 도로가 아냥우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아냥우는 자신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겠다는 도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내 그가 상종해선 안되는 악과도 같은 존재라는  깨닫고 반목하게 된다그렇게 17세기 말의 아프리카에서부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난 19세기 중반까지 도로와 아냥우가 이루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와일드 시드.


 아냥우와 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의 성격과  소설의 시작이 하필이면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말이라는 점이며 끝나는 시점 또한 노예 해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임을 감안한다면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무엇보다 지배와 종속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일단 도로만 봐도 그러하다그는 무려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그가 그토록 오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젊고 건강한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타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지배할  있는 사람이다이런 면에서 도로는 권력과 지배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아냥우는 정반대의 사람이다그는 문제가 생기면  쪽에서 먼저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존재다아냥우는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보다는 그늘에 숨어서 타인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변신의 능력은 이러한 아냥우의 성격이 그대로 집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도로는 타자의 신체를 취해서까지 절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냥우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소설에서 아냥우는 도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아냥우는 그야말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대표하는 모성 상징이라  만하다.


 이러한 아냥우의 자질 때문에 독자인 우리 눈에는 도로보다 아냥우가 훨씬  인간답게 보인다.

 이처럼 아냥우가 도로보다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왜냐하면 노예무역이 처음 시작되던 17세기 말에 서양 문명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인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에서 도로와 아냥우를 나란히 두고 ‘누가  인간다운가?’하고 묻는 것은 헤겔마저 순순히 인정했던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기다 도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도로가 마음대로 남의 아내를 취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을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오직 우수한 혈통을 만만든다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교배(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시키는 아주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도로는 아내로 삼은 아냥우마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한다그러자 아냥우는 이렇게 거세게 항의한다.


 “ 잘못된  잘못된 거야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당신 일족이 짐승의 젖을 마셔서 자기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냥 모른 척하겠어수치를 겪는 것은  사람들이니까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그들보다  끔찍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는 거잖아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도로 나라 자체가 저주받을 거야당신 일족의 작물이 말라 죽을 거라고!”(p. 239)


  항의가 17세기 말뿐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가지 편리한 이유를 갖다대며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것이라 생각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와일드 시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란 존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차별에 대해 날서린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그런 차별을 온갖 이유로 정당화하며 오직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당당하게 탈주를 감행하는 야생종이 되라고 말이다그건 사회가 흔히 비정상으로 분류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존재가 아니다오히려 그런 편견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존재들이다이런 점에서 ‘와일드 시드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로가 끝내 인간이 되지못하고 홀로 괴물로 남게 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설을 인종차별에 근거해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은 여성차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아냥우가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녀가 도로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되어 하는 것들이나 도로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걸  보여준다 글의 처음에서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라고  것도 그래서다사실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함부로   있다는 생각들이 알고 보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말이다차별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타인의 인정을 다른 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하지만 도로처럼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정작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뿐이다그들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이들의 얼굴에 괴물의 가면을 씌우지만 그들의 얼굴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르고 있다.


 그런 식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로(徒努)  뿐이다.

 여기서 도로(徒努) 일이 잘못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한다물론 옥타비아 버틀러가  도로라는 말을 알고 이름으로 썼을 리는 없지만도로에겐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외롭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결국 도로(徒努외롭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도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인정받을  있는지 모색해봐야겠다. ‘와일드 시드에서 아냥우가 걸어간 길은 거기에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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