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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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품을 읽으면 난, 포만감이 든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흥미로우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으로만 이뤄진 만찬을 즐긴 기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작품을 하나 만났다.


 바로 영국 작가  M.W 크레이븐의 데뷔작, ’퍼핏 쇼’. 


 만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신뢰하는 골든대거 수상작. 다른 하나는 범행 방식. 이 소설의 연쇄살인마는 스톤 헨지를 일컫는 ‘환상열석’에서 자신의 잔혹한 범행을 전시한다. 그것도 방화로 태워죽인 시신을. 그리하여 작중에서는 이 연쇄살인마를 ‘이멀레이션(immolation) 맨’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특히나 후자가 내 눈길을 강하게 끌었는데, 그것은 지금껏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을 비롯하여 살해한 대상을 연극 무대처럼 드라마틱하게 전시하는 작품들을 수도없이 만났고 그것을 통하여 갖가지 방법을 봐왔지만 ‘퍼핏 쇼’ 같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소도 그렇고, 살해 대상에 대한 것도 그렇고. 그 기상천외함 때문에 이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갈 것인가 너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치 이색적인 간판에 호기심이 생겨 무작정 식당 안으로 들어간 손님과 다를 바 없이 ‘퍼핏 쇼’를 펼치게 된 것이었다. 그랬다가 앞으로 단골이 되어도 좋을 아주 괜찮은 맛집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제법 운이 따랐던 것 같다.


 각설하고,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점부터 말해 보고 싶다. 그건 바로 연쇄살인이라는 스릴러와 주연 등장인물들 간의 로맨스를 아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의미란, ‘퍼핏 쇼’가 추구하고 있는 주제에 맞게 그 둘을, DNA의 이중나선처럼 유기적으로 잘 맞물리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퍼핏 쇼’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연쇄살인마’란 존재에 집중하고 싶다.


 ‘연쇄살인마’란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존 E 더글러스의 ‘마인드 헌터’다. 거기서 존 E 더글러스가 어쩌다 연쇄살인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는 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연쇄살인마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떠한 탐침으로도 가늠이 불가능한,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지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체불명의 괴물(怪物)이었던 것이다. 그 ‘괴물’을 난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와 달리 표현하고 싶은데, 아마도 그렇게 하면  ‘타자(他者)’가 될 것이다. 이러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될 듯하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는 한 마디로 그 ‘타자’와의 대면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내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타자’를 마주 보게 하고 경험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비상식적이며 비인간적인 그들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유도하고, 내 경험과 이해가 닿지 않는 존재 자체로 혼돈과 불안을 조장한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연쇄살인마라는 타자는 그 존재와 행위의 무지막지함으로 우리 존재를 압도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 하듯이 소설 속 ‘타자’를 쉽게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서 우리는 경마장에서 뛰는 경주마가 그러하듯, 오직 그것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굴러가는 실타래 아래의 가는 실처럼 얽매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소설 속 연쇄살인마는 우리에게 현실에선 간단히 할 수 있었던 무시와 외면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거부할 수 없는 응시와 중지할 수 없는 사유로, 눈앞에 도래한 연쇄살인마가 초래했던 사회 혹은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대답할 - 그것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거나 종국적일 필요는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겠다는 정도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다 - 의무를 초래하는 소환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소환장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내 자의로 함부로 물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난 연쇄살인마가 개설한, 소설이라는 법정에 배심원으로 소환된 셈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바라봐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조금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연쇄살인마 소설은 이런 경험을 가득 선사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연쇄살인마에겐 단지 스릴러 소재로 소비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건 현실에서는 잘 경험할 수 없고, 행여나 한다고 해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타자’라는 존재의 무게를, 비록 허구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여도 현저히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를 보는 것만큼이나 타자를 보듬어 안고 내내 주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통로인 것이다. 


 뭐, 그래도 허구이니까 재미 이상의 의미를 주는 건 억지 아닌가 하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경험의 영역에선, 허구와 실재가 별 차이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허구의 경험이 실재의 것을 압도할 때도 있다. 우리가 가진 기억만 되짚어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화나 소설에서 체험했던 것이 현실의 일상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해 마음속에서 오래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의 경험으로 철학 혹은 사회윤리 문제를 음미한다고 하여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M.W 크레이븐의 ‘퍼핏 쇼’은 정말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치로 내가 말한 것을 체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단 ‘인형극’을 뜻하는 제목부터가 그렇고 유래가 없는 살인방식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범죄의 강도 높은 잔인함과 참혹성은 분명 독자의 의식을 연쇄살인마에게 붙잡아 놓기 위해서라고, 난 감히 추정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잘 경험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들에게 의식의 빈방을 더 많이, 더 오래 내어주는 편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부터 말 할 것이 내가 이 소설을 두고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부분이다. 나는 좀 전에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라는 존재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걸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짐 톰슨이 자신의 대표작, ‘내 안의 살인마’에서 했듯이 아예 연쇄살인마의 시점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내면까지 충분히 들여다보는 것만큼 더 밀도 높은 경험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독자는 오로지 수동적인 존재로 참여할 뿐이다. 대화의 참여자가 되기 보다는 길게 이어지기만 하는 살인마의 독백만 하염없이 듣는 청자로만 남을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재미도 떨어진다. 서스펜스도 덜하고 반전도 없을테니 말이다. 


 연쇄살인마에게 독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와 대화하려는 마음을 낳게 하는 것은 역시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흥미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 열망을 무한정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연쇄살인마와의 대면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우리 일상 속 존재와 다를 바 없이 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는, 나와는 절대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객체로 만든다. 우리는 그와 대화는 할 수 있어도 내면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타나게 된, 1인칭일 때보다 부족해진 경험의 밀도는 스릴러의 재미로 채워야 한다. 전개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재미로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몰입이라는 형태로 밀도를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퍼핏 쇼’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다. 캐릭터들의 묘사는 생생하고 주연 커플이 빚어내는 앙상블도 흥미롭고 때로 흐뭇한 미소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거기다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되어 사건의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는 것도 능수능란하게 이뤄진다. 놀라운 반전 또한 존재하고 앞에서 뿌려놓았던 떡밥들까지 모조리 회수해 버리니! 이건 뭐, 중반을 넘어가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범인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질 때까지, 거의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여정 내내 연쇄살인마에 대해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멈추기가 어렵다. 그야말로 작가는 연쇄살인마라는 거대한 수영장 속에 독자를 던져넣어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1인칭 시점을 사용하거나 기교를 빌리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라는 스릴러의 근본 도구로만 1인칭 시점으로 읽을 때와 별 차이 없는 경험을 하게끔 만들고 있으니, 이 작품에 ‘뛰어나다’라는 표현을 써도 넘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진정 타자의 경험에 우리를 강도 높게 묶고자 한다면 남녀 주연 캐릭터들의 로맨스는 어떻게 된 것인가? ‘퍼핏 쇼’가 세공하고자 하는 어둠과 결이 너무나 달라보이는 로맨스는 오히려 그 매듭을 풀어버리는 형국이 아닌가?

 

 이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퍼핏 쇼’는 두 개의 차축이 중핵이 되어 움직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연히 ‘이멀레이션 맨’의 추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보기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알콩달콩해 보이는, 로맨스다.


 이 둘은 소설 속에서 함께 간다. 두 개의 차축이라 말한 것은 그래서다. 그만큼 작가는 ‘이멀레이션 맨’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이 둘의 로맨스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저 작품의 흥행을 위한 요소가 아니다. 주제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 그런 것이다.


 하지만‘이멀레이션 맨’ 이야기와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로맨스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은 배척의 관계가 아닌, 협력의 관계다. 서로 조력하여 ‘타자’의 경험 속에서 ‘타자’에 대한 제대로 된 윤리적 태도를 배양하려는 ‘퍼핏 쇼’의 주제를 위해 함께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내 글을 읽고 있는 상상 속 독자가 바로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어떻게?'


 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위해 제시하고 싶은 것은 연쇄살인마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공교롭게도 존재하는 공통점이다. 바로 앞서 언급했던 ‘절대적 타자의 경험'. 이것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마에게서 예고 없이 습격받듯이, 사랑 또한 느닷없이 엄습하는 것을 체험한다. 내게로 다가오는 연쇄살인마에게 눈을 뗄 수 없듯이,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도저히 눈을 거둘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연쇄살인마와 동일하게 연인이란 존재 또한 어느새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의 모든 시건과 상념을 마치 태양계 중심에 군림하는 항성처럼 그 외곽의 궤도로만 공전하도록 만든다. 더구나 한번 포획되고 나면 쉽사리 거부하거나 달아날 수 없는 것도 닮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내가 주관하는 우주 속으로 편입할 수 없고 오직 허용되는 것은 대등한 수준의 공존뿐이며 그런 관계조차도 타자의 협력을 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쇄살인마와 연인 모두 알고보면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양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타자’라는 대양 안에서 표류 중인 것이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나는 작가가 서로에게 차츰 애정을 느껴가는 두 캐릭터를 이 소설에 빚어냈을 것이라 본다. ‘이멀레이션 맨’과 똑같이 독자에게 ‘타자’와 제대로 대면시키도록.


 그건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초반에 인식할 때, 무엇보다 서로 얼른 헤아리기 힘든 존재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따지고 보면, 워싱턴 포에게 있어 틸리 브래드쇼란 존재는 그가 추적해야 하는 ‘이멀레이션 맨’과 그리 다르지 않다. 둘 다, 존재도 사는 방식도 모두 수수께끼인 존재들이니까.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사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고를 헤쳐왔다. 워싱턴 포가 심리를 중시한 감성에 보다 가까이 서 있다면 틸리 브래드쇼는 수학에 기반한 이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워싱턴 포가 발로 뛰어다니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을 대면하는 존재라면 틸리 브래드쇼는 홀로 격리된 장소에서 오직 데이터만 상대하기를 바라는 존재다. 물과 기름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렇게나 다르고 서로에게 진정 낯선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연쇄살인마에게 가까이 접근해 갈수록 서로에게도 다가가게 된다. 연쇄살인마의 정체가 한꺼풀씩 벗겨 때마다 그들 또한 서로의 존재와 상황에 대해 헤아림의 지평이 넓어지게 된다. 맞다. 작가는 이 둘, 그러니까 연쇄살인마의 추적과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 사이에 이뤄지는 애정의 진척도를 병행시키고 있다. 그것도 비례관계로. 


 그러면서 서서히 연쇄살인마와 사랑이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부각시킨다. 연쇄살인마는 자신이 알았어야 할 진정한 진실들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사랑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기존의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존재였다. 그러니 우리는 작품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주제라고 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와 다르고 이해가 불가능한 타자라고 하여도 쉽게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됨을. 그럴수록 더 응시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더 헤아리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이르러 나는 주제와 관련하여 앞서 제기한 질문에 비로소 대답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퍼핏 쇼’의 주제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소설 후반은 이러한 태도와 노력이 얼마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워싱턴 포가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진실은 물론이고 오래도록 묻혀있었던, 차마 입 밖에 내기도 힘든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내막까지 모두 밝혀지니까 말이다. 사건만이 아니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 둘 다 척박한 현실 한 가운데서 늘 홀로 분투하느라 하나쯤 있었으면 했을, 의지할 만한 둥지를 찾게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다면 사건의 진실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는데, 타자와의 대면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 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헤아리려 노력한 결과, 그 둘 모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찌 이로써 책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은 한층 더 또렷해지는 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만하면 내가 왜 이 소설에서 포만감을 한껏 느꼈을 지에 관해 설명이 어느 정도 됐을 것 같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퍼핏 쇼’는 오늘날의 영국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 소설은 2018년에 발표되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그 2년 후인 2020년, 영국은 투표를 통하여 ‘브렉시트’를 감행했다. 그 결과,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얼마 전의 뉴스는 영국 대중이 압도적으로 브렉시트 철회를 원하고 있음을 알렸다.


 ‘퍼핏 쇼’가 들려주려 했던 대로 영국의 많은 이들이 타자를 무시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성을 먼저 허물고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노력했다면, 현재 엄청난 후회로 남은 ‘브렉시트’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사례도 있으니 ‘퍼핏 쇼’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 또한 브렉시트를 초래한 영국의 상황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문득 ‘작가가 왜 제목을 ‘퍼핏 쇼’라고 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퍼핏 쇼’가 뜻하는 ‘인형극’은 줄에 매달린 인형들로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저마다 매달고 있는 줄이 하나씩 있었다. ‘이멀레이션  맨'도 그렇고, 그에게 희생된 자들도 그렇고, 워싱턴 포도 그렇고, 틸리 브래드쇼도 그렇고. 그건 남들에게 쉽게 내어보일 수 없는 어둠이었다. 모두를 자기만의 골방 속에다 유폐시켜 버리는 어둠. 그 어둠에 지배 당하여 그들은 어둠이 이끄는 쪽으로 걸어 가 인간을 포기하고 인형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어둠에 지배당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줄을 끊어버려 인형이 되기를 그만둔 이들도 있었다. 어둠이 삶의 주인으로 내버려 둔 인형에서 스스로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 인간으로 거듭난 이들이 말이다. 


 이제보니 소설 전체는 작가가 그렇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녕 인간일까, 인형일까? 인형이라면 현재 내 목을 감고 있는 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하여 타자의 삶을 함부로 짓밟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점점 더 만연해가는 가운데 그들과 닮은 인형이 아니라 그들마저 태워버릴 바람직한 인간으로 남는 길은 정녕 무엇일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핏 쇼’를 초롱불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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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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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엘리자베스 문이라는 이름은. 나는 그 이름을 '어둠의 속도'란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2002년에 발간 되었을 때. SF 팬덤 사이에서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해서 만나게 된 작품이었다. 벌써 거의 20년 전에 읽은 것이라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래도 자폐아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이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 살짝 엿보는 것 같았던 기분은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런 작가였다. 자폐가 정말 꼭 치료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도록 이끌었듯이,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내면과 동조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작가. 그렇게 하여 기존의 나라는 한계에 갇혀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거기서 훌쩍 벗어나, 너머를 보고 헤아리도록 하여 더 넓은 범주에서 나와 타자를 가늠하도록 하는 것으로 내적인 성장을 가져다 주는 작가였다. 그런 작가이기에 그녀의 새로운 소설이 이번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잔류 인구'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이다. 노년의 여성, '오필리아'는 '심프스 뱅코프 콜로니'라는 한 식민지 행성에서 회사 소속이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개척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에서 막 도착한 함대가 정체 불명의 외계인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하자 컴퍼니는 식민지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다들 함선에 올라 극저온 수면 장치에 들어가 동면한 채로 이주할 것을 명렴 받았지만 할머니 오필리어는 그 장치에서 살아남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모두가 떠나버린 그 곳에서 자의로 '잔류 인구'가 된다. 하지만 그 별에 존재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잔류 인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별에서 원래 살았던 원주민들. 그녀는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오필리아는 마침내 그들에게 존경 받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러다 다시 지구에서 다시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원주민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접촉하려 하는데, 군인과 과학자인 그들은 오필리아의 말에 전혀 귀기 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오필리아는 단지 쓸모없는 할머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원래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다. 그녀는 햄릿의 연인이었지만 햄릿이 만든 사건 앞에서 주체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오필리아는 다르다. 결말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르쳐 주니까 말이다.


(초판본 표지}



 노년은 효용성을 점점 더 중요하게 따지는 지금 사회에서 가장 그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게 가장 뚜렷한 증거다. 예전엔 노년이 그 때까지 살면서 체득한 지식과 정보를 아주 중요한 정보로 간주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경로사상은 바로 그것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경험과 지식은 '꼰대'로 취급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옛것은 쉽게 도태되고 새것은 과장되게 환영받는 세태에서 '잔류 인구'는 참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나게 만든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쳐든다'를 썼던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들의 기록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주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그것들 대부분은 살아있는 할머니의 기억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무시되고 버려져서 기록할 수 없었던 기억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것이 오늘날 여성 운동의 목표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잔류 인구' 또한 그 흐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쓸모'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그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 본, 그것도 잠정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을 쉽게 규정하고 가치 또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점점 더 횡행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경향인지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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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이 소설 리뷰가 종종 올라와서 호기심 업 시키네요^^

ICE-9 2021-11-18 21:5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의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라 다들 많이 기다렸나 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지라 이번 작품이 무척 반가웠어요^^

2021-12-16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5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뭇잎처럼 2023-03-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보긴 하였지만 헉슬리 책 때문에 여기까지 왔네요. 쓰신 글 보고 무작정 읽고 싶어졌습니다.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꾸욱.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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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독일을 휩쓴 파시즘의 매혹과 그것에 대항하여 희망을 재건하는 휴머니즘을 두 여성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조명하는, 묵직하면서도 강렬해 그 여운이 오래 남는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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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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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밸라드의 팬들이여 기뻐하시길! 드디어 '콘크리트의 섬'이 발간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크래시' 그리고 '하이 라이즈'와 더불어 도심 재난 3부작을 이루고 있는 의미 깊은 작품이지만 지금껏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아 여간 궁금했던 책이 아닌데, 드디어 우리들 눈 앞으로 당도한 것이다. 꽤 마음에 드는 표지와 함께. '콘크리트의 섬'은 여러모로 우리나라 영화 '김씨 표류기'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그 영화가 도저히 표류자가 생길 것 같지 않는 서울의 한강에서 표류되어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듯이 이 소설 또한 고속도로 사이에 있는 교통섬에 우연히 갇혀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로빈슨 크루소의 후예들이다. 바다 저 멀리 있는 섬이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만 다를 뿐




. 이런 일이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그만큼 발라드가 현실감 넘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발라드의 소설답게 한 번 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놀라운 몰입력으로 끝까지 내처 읽게 만든다. 주인공은 로버트 메이틀랜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한 건축가인 그는 운전 도중 과속으로 교통 사고를 일으키고 교통섬에 고립된다. 주위엔 차들로 가득하지만 그의 구조 요청엔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바로 지척에 안온한 일상을 두고도 가지 못하며 참혹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 커다란 절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곧 거기에 자기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처럼 교통섬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는데도 거기에 머무르는 걸 선택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와 규칙으로 살고 있다. 메이틀랜드는 차츰 그 공동체에 적응해 간다. 그러면서 전보다 훨씬 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랬듯이. 그 역시 거기 있는 다른 이들처럼 그렇게 지내는 것에 매력을 느껴 머무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지만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생각하여 빠져나갈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과연 그에게 탈출할 기회는 찾아올까? 소설은 열린 결말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콘크리트의 섬'은 문명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은 무자비한 자연 앞에서 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명을 만들어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문명에 너무 의존하느라 오히려 더 약해져버렸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메이틀랜드의 곤경은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오히려 더 소외되기만 하는 인간 보편의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은 장면을 매개로 문명과 격리된 교통섬의 공간으로 삽입되게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 문명의 안에선 불가능하다는 뜻일까? 어쨌든 메이틀랜드는 야만의 영역이라 해도 무방한 교통섬에서 전보다 더 강한 인간이 되는 건 사실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현대 문명에 빗대어 새롭게 써내려 간 '콘크리트의 섬'은 이처럼 찾아낼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어 더욱 연거푸 읽게 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왜 여전히 J. G 밸라드의 팬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원서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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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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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1943년. 미국은 독일 점령 하의 프랑스에서 군사 정보를 획득할 목적으로 오직 여성으로만 첩보 부대를 결성, 잠입시킬 것을 계획한다. 여성만으로 이뤄진 첩보 작전을 결행하게 된 것은 그동안 프랑스에 보낸 남성 첩보원들이 계속해서 독일 비밀 경찰들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유태인 출신 여성 장교 엘레노어가 이 부대의 총책임자가 되어 원래 군인이 아닌, 여러 사연을 지닌 민간인 여성들을 고용, 첩보 부대원으로 훈련시키기로 한다. 오직 프랑스 말을 잘 한다는 이유로 고용된 그녀들은 평범한 여성들로 마리 같은 경우는 양육비가 필요해서 요원이 될 것을 수락한 것이었다. 훈련은 잘 이뤄져 마리를 포함한 12명의 여성 대원들은 프랑스에 투입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독일 경찰에게 전원 체포되어 미스터리 하게 사라진다. 그래서 제목이 '사라진 소녀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팜 제노프의 '사라진 소녀들'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 소설은 인물들을 번갈아가며 그 각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소설의 시작을 여는 것은 그레이스란 여성이다. 그녀는 역에서 우연히 가방 하나늘 발견하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것은 놀랍게도 위에서 말한 '사라진 소녀들'에 대한 파일들이었다. 이 때가 1946년. 이렇게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다룬다. 하나는 '사라진 소녀들'이 주축이 되는 1943년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들이 왜 사라졌으며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추적하는 1946년이다. 엘레노어는 부대의 책임자로서 자기 부하들이 사라진 시건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유족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파헤칠 것을 다짐하고 결국 그걸 해낸다. 그레이스는 우연히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지만 자신과 동일한 평범한 여성들이 그토록 많이 갑작스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그저 없던 일로 치부해버리려는 정부에게 분노하여 자기 힘으로라도 진실을 찾으려고 한다. 이 둘이 끝내 알게되는 사건의 내막은 진실로 충격적인 것이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덧없이 사리진 개인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비극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정부도 많다. 더구나 그것을 획책까지 해 놓고서 말이다. 소설은 그렇게 정부가 조장하고 방기한 개인들을 다시 역사의 중심에 올려놓고자 한다. 그들처럼 아직 관심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이들 또한 우리의 시선 앞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팜 제노프의 '사라진 소녀들'은 첩보 소설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깊은 역사적 주제를 담고 있는, 그런 까닭에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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