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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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흑인 여성 작가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SF 소설계의 전설이다. 하나도 따기 힘든 SF 소설 최고 권위의 상을 3부작 모두가 해마다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휴고상 역사상 최초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년 초에 우리나라에도 발간되면서 비교적 빨리 우리에게 소개된 편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오벨리스크의 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부서진 대지'는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벨리스크의 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엇보다 첫째 권인 '다섯 번째 계절'부터 읽으실 것을 당부드린다.





 배경은 지구. 하지만 아주 먼 미래다. 

 거기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이다. 변화무상한 사계절은 이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황폐와 삭막의 계절 뿐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구는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다. 생존한 인류는 현재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망하기 전 인류는 대지 보다 하늘을 더 숭배했으나, 이젠 아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대지 중심이다. 땅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연히 땅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의 에너지로 땅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오로진'이라 부른다. 아무나 오로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오로진의 통제되지 않는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로진을 괴물 취급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쑨의 남편이 그랬다. 그는 아들이 오로진인 걸 알자 딸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여버린다. 남편 지자는 딸 나쑨 역시 오로진인 걸 알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삽시간에 소중한 아들을 잃고 딸까지 빼앗긴 에쑨 또한 딸을 찾아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부서진 대지'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오벨리스크의 문'은 지자가 나쑨을 데리고 떠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나쑨이 에쑨과 함께 이번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소설은 에쑨과 나쑨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에쑨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과거 스승이자 연인인 알라배스터와 함께 있다.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오벨리스크들을 조종하여 지구에서 벗어나버린 '달'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다섯 번째 계절'의 마지막에 달이 왜 나왔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달이 사라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을 전설의 존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함께 알라배스터는 지구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그가 왜 다시 한 번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에쑨이 하루빨리 오벨리스크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말해준다. 그건 바로 '스톤 이터'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돌로 되어버린 육체 때문에 죽지 않고 있어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 그들의 일부가 지구에 자신과 다른 종족이 존재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나쑨은 여행 도중 우연히 늘 괴물로만 취급되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걸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주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작에서 오로진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가던 샤파다. 아주 모처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나쑨은 샤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가까이에 있는 오벨리스크에서 힘을 끌어내 그걸 증폭시켜 사용하는 걸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 그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걸 시작으로 나쑨에게도 점점 더 큰 비극이 닥쳐온다. 아버지 지자가 조산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나쑨을 그녀의 오빠처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쑨은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편입하기 위해 능력을 연마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다섯 번째 계절'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공존과 차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부각하면서 규모를 더 확장시켰다. 달의 부재는 현재의 지구가 하나만 존재하는 독재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존재할 것을 허락하는 스톤 이터들은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알라배스터가 달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를 다시금 공존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는 세상. 오크림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이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세상. 오로진으로 차별을 많이 받은 알라배스터였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에쑨도 다르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알라배스커의 말을 결국 따르게 되는 건 전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된 스톤 이터 호야의 존재 때문이다. 자신이 스톤 이터이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오로진 에쓘을 도와주려 애쓰는 호야를 보면서 그녀는 왜 같은 것 하나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알라배스터는 그렇게 달을 데려오는 힘을 '마법'이라 말한다. 마법 역시 과학에 밀려 사라진 힘. 그런 의미에서 마법은 달과 유사한 상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주류에 가리거나 억압되어 이면에 머물게 된 것들을 에쑨은 다시 불러오려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바로 그런 이면을 여는 문이다. 영원히.


 '오벨리스크의 문'은 공존과 조화라는 사회적 메세지로 충만하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태에서 보듯,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는 요즘엔 정말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른 차별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해하려는 몸짓보다 경멸과 거부의 몸짓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움직임 끝에 뭐가 있는지는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이 잘 보여주었다. 이란이 자신의 영공 가까이 날아온 민간 여객기를 미군의 보복 공격인 줄 알고 격추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였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목숨들이었다. 차별과 배척 또한 얼마나 많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아픔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던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에쑨과 나쑨의 여정을 통해 그걸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SF, '오벨리스크의 문'. 작품의 가치도 가치이지만,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더욱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얼른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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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1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썼는데 그게 다 상을 받았군요 이어졌다 해도 어떤 건 따로 봐도 괜찮지만, 이건 첫번째부터 차례대로 봐야겠습니다 앞에 이야기를 모르고 이걸 보면 뭐지, 하겠군요 아들과 딸이 오로진이라면 두 사람에서 한사람이 오로진이라는 건데... 에쑨이 그런 듯하네요 자기 자식까지 죽이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보는 거 처음이 아니기는 하네요 자기 자식한테 다른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부모 다른 데서 보기도 했군요

다르다고 무서워하기보다 함께 살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뿐 아니라 동, 식물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죠 이제는 한 지역 한 나라가 아닌 지구를 다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
 
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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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볼모로 잡는 범죄인 유괴 혹은 납치는 스릴러 장르에선거의 클리셰라   있을 정도로 흔하다

 이 정도로 흔하게   다른 범죄보다  생생한 현장감으로 독자를 작품에  몰입시킬  있기 때문이다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진행중인 사건인데다 더하여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정해진 시간 내에 무고한 이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일이라 읽고 있는 이로썬 이야기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그러나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독서에도 적용되어서너무 많이 접하다보면 한껏 올라간 낯익음 때문에 아무래도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그래서 이런 식상함이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가면 장르는 ‘비틀기라는  시도하게 된다사람들에게 익숙한 장르의 틀을 슬쩍 바꾸어 그걸로 새로운 느낌을 갖게 하여 작품의 신선도를 높이는 것이다공포영화에서 ‘스크림  대표적인 사례라  만하다물론 유괴납치물에 있어서도 이러한 비틀기는 이뤄졌다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  것이다그리고 여기   편의 비틀기를 시도한 작품이 있다.





바로 변호사 출신의 미국 여성 작가 섀넌 커크의 ‘복수해 기억해.


 원래 제목은 ‘Method 15/33’. 사실은 소설 속에서 납치된 주인공이 탈출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하는 작전의 이름으로 이것만 가지고선 독자에게 작품의 내용이라든가 분위기라든가 하는   전달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걸 보다 선명하게 전하려고 ‘복수해 기억해 바꾼  같다아마도 이런 제목을 만든 이가 GOD 팬인  같다그들의 노래 중에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아닐까 한다실은 제목을 보자마자 얼른  뇌리 속에서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노래가 BGM처럼 흐르기에 하는 말이다다시 말해 오로지 나만의 추리에 불과하니 너무 신뢰하실  없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래서 어떤 비틀기가  소설에서 이뤄지고 있는가?


 납치물(유괴납치물로 계속 쓰려니  힘들어서 이렇게 그냥 납치물로 퉁치려 한다.) 범죄자의 능동성과 납치감금된 자의 수동성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장르이다권력의 뜻으로  사람에게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키게 하거나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머무르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듯이납치물에서 피해자는 옴짝달짝   없는 그의 육체만큼 존재가 한없는 수동성의 냉기로 빙결된다반대로 가해자는 피해자의 일상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기 뜻대로 얼마든지   있기에 능동성이 태양처럼 훨훨 불타오른다피해자의 생사여탈권마저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납치를 다루는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에서 가해자가 자신을 종종 신이라 운운하는 것도  때문이다앞서 말한 ‘비틀기 바로  관계에 가해진다 마디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해자의 능동성과 피해자의 수동성을 전복시켜버리는 것이다.


 복수해 기억해 시작부터 우리가 지금 만나고 있는 납치 소설이 앞으로 전혀 다르게 펼쳐질 거라는  확실히 각인시킨다 괴한에게 납치당하는  여섯  소녀의 리사 일랜드는 공포에 떨기는 커녕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지금 어떤 경로를 통해 끌려가고 있는 것인지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사용하여 냉철하게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판단하는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게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그녀에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제목처럼 이런 고통을 안겨주는 상대에 대한 자비없는 복수 뿐이다 순간의 도래를 위해 리사는 괴한을 속이기 위해 최대한 순종하는 연기를 한다그러면서 상대의 목숨을 끊고 탈출을 도와주는 주위의 물건들을 번호를 붙여가며 하나하나 모은다 모든 것은 자신이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뤄진다바로  작전명이 ’15/33’ 것이다.


 걸크러쉬라는 말이 있다원래는 여자가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최근 대중 문화에선 남성들을 압도할 만큼의 강한 면모를 보여주는 여성이 나오는 작품(여성 ‘테이큰이라고 불러도 좋을 이시영 주연의 영화 ‘언니처럼) 자주 쓰인다그렇다면 ‘복수해 기억해’ 또한 ‘걸크러쉬그것도 아주  걸크러쉬라 하지 않을  없다그런 의미에서 ‘복수해 기억해 주인공 리사 일랜드는 스릴러 소설에 한정하여 가장 대표적인 걸크러쉬라 할만한 사라 패러츠키의 여자 사립탐정 캐릭터 V.I. 워쇼스키의 계승자라  만하다그런데  전복성은 주인공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소설은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되는데 명은 주인공 리사 일랜드이고 다른  명은 리사 전에 납치된 소녀인 도로시 사건을 추적하는 FBI 수사관 로저 리우이다보통의 납치물에선 범죄자를 뒤쫓는 형사가 주인공이고  역시 가해자만큼이나 한껏 능동성으로 무장하고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형편인데, ‘복수해 기억해에선 전혀 그렇지 않다원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꿈조차 이루지 못한 남자( 꿈은 아내가 대신 이뤄 그녀는 현재 미국 전역을 돌며 코미디 순회 공연을 하고 있다.)인데다 사건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이렇다  활약도 별로 없으며 존재감 또한 엷은 것이다작가는 이런 존재에게 이야기의  축을 기꺼이 담당하도록 하고 있는데이건 아마도 자신의 작품이 지금까지 나온 납치물과 얼마나 차이를 갖고 있는가를 독자에게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같다.


 이건 위에서 말한 장르 비틀기 원하는  하나의 효과 때문이 아닌가 한다

 비틀기는 단순히 작품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쓰이지만은 않는다 목적엔  하나가  있는데 그건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 효과 불릴  있는 것이다. ‘소외 효과 흔히 ‘낯설게 하기 풀이할  있는 말로 클리셰처럼 굳어진 장르 규칙에 변칙을 가져다 그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익숙함에 따라 굳어진 자신의 생각취향가치관들을 낯섦음의 효과 속에서   되돌아 보는 계기를 갖게 한다이것이 비틀기가 가진  하나의 목적이다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믿음내리고 있는 판단들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는 시간 말이다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가치관이란 누군가 의도적으로 형성한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그런 가치관을 점점  굳어지게만 했던 문화 자체를 비틀어 문화를 넘어  자신마저 달리   있는 눈을 가져다 주려는 것이다내가 너무 무리하게 설명하고 있어  이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복수해 기억해 비틀기 또한 그런 연장선 상에 있다.


 무엇보다 리사를 납치한 목적이 되는 범죄 그렇다

 그녀가 납치된  임신했기 때문이었다 여섯인데 임산부라고 충격받지 마시길 보다  충격적인  있으니까그들이 리사를 납치한  리사 때문이 아니라 리사가 잉태한 아이 때문이었다알고보니 범죄자들은 리사처럼 어린 임산부를 납치하여 아이를 꺼낸다음 아이가 없는 부모들에게 매매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얼마 전에 개봉한 영화 ‘청년 경찰에서도 이와 비슷한 범죄가 나왔던  같다또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캐나다 작가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생각난다실은  ‘시녀 이야기 작가가 이런 설정을 만드는데 영향을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시녀 이야기 배경으로 하는 세상에서 여성이 가진 의미는 오직 아이의 출산에 한정되기 때문이다여성에게 번식과 같은 동물적인 의미만 갖도록 하는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가장 전형적이면서 대표적인 행위라  만하다작가는 그동안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구현된 여성의 수동성을 보다 선명하게 전복시키기 위하여 형사도범죄도 그렇게 설정한  아닐까 싶다.(원래는 ‘틀림없다 썼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아닌가 싶어서 이렇게   물러선다으음….)


 결론이다


 주인공에형사에범죄에 이런 전복성이 넘치는 ‘복수해 기억해 분명 읽어볼만한 작품이다재미에 관해선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가열찬 복수 이야기만큼 짜릿하게 흥분시키는   있을까재미만이 아니라  하나의 골인 지점을 두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달려나가는작품이 가진 에너지 때문에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대화 보다는 대립이포용 보다는 차별이 횡행하는 것엔 분명 타자를 전혀 달리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익숙함의 중력에 많이 붙들려 있었던 것도 크게 작용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니까그러니  기회를 위해서라도 꽈배기처럼 이전의 납치물을 한껏 비틀어버린  소설을 당신의 배갯머리 옆에 살며시 놓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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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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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장 대표작인 와일드 시드 발간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 출간은 아니다지금은 절판되었는데예전에 오멜라스에서 ‘야생종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다아마도 그것이 장편으론 처음으로 소개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와일드 시드 말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제목인 ‘와일드 시드(야생종)’마저도 어떤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지배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냥우는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알지요.”

 “그래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하지만  여자는 야생종이야제어하기 힘들지 여자를 제어하는  지쳤다.”(p. 355)





 주인공은 여성인 아냥우. 그녀가 바로 야생종이다.

 ‘와일드 시드 1976년에 발표된 ‘패턴마스터’(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한 ‘PATTERNIST 시리즈'  네번  작품으로  시리즈답게 역시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물론 아냥우도   하나다소설은 작품 내내 그녀와 대척점을 이루는 도로의 눈을 통해 독자들 앞에 아냥우가 얼마나 특별하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한다일단 그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으며 성별은 물론 동물까지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있는데다  백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이기도 하다 정도라면 거의 ‘DEMI-GOD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하다도로 또한 아냥우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강탈할  있다자신의 존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때로는 아버지로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주술사 할머니로 자식들을 낳고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냥우를 유일하게 알아보는  또한 도로다그렇게 소설은 도로가 아냥우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아냥우는 자신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겠다는 도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내 그가 상종해선 안되는 악과도 같은 존재라는  깨닫고 반목하게 된다그렇게 17세기 말의 아프리카에서부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난 19세기 중반까지 도로와 아냥우가 이루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와일드 시드.


 아냥우와 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의 성격과  소설의 시작이 하필이면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말이라는 점이며 끝나는 시점 또한 노예 해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임을 감안한다면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무엇보다 지배와 종속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일단 도로만 봐도 그러하다그는 무려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그가 그토록 오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젊고 건강한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타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지배할  있는 사람이다이런 면에서 도로는 권력과 지배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아냥우는 정반대의 사람이다그는 문제가 생기면  쪽에서 먼저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존재다아냥우는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보다는 그늘에 숨어서 타인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변신의 능력은 이러한 아냥우의 성격이 그대로 집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도로는 타자의 신체를 취해서까지 절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냥우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소설에서 아냥우는 도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아냥우는 그야말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대표하는 모성 상징이라  만하다.


 이러한 아냥우의 자질 때문에 독자인 우리 눈에는 도로보다 아냥우가 훨씬  인간답게 보인다.

 이처럼 아냥우가 도로보다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왜냐하면 노예무역이 처음 시작되던 17세기 말에 서양 문명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인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에서 도로와 아냥우를 나란히 두고 ‘누가  인간다운가?’하고 묻는 것은 헤겔마저 순순히 인정했던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기다 도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도로가 마음대로 남의 아내를 취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을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오직 우수한 혈통을 만만든다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교배(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시키는 아주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도로는 아내로 삼은 아냥우마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한다그러자 아냥우는 이렇게 거세게 항의한다.


 “ 잘못된  잘못된 거야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당신 일족이 짐승의 젖을 마셔서 자기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냥 모른 척하겠어수치를 겪는 것은  사람들이니까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그들보다  끔찍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는 거잖아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도로 나라 자체가 저주받을 거야당신 일족의 작물이 말라 죽을 거라고!”(p. 239)


  항의가 17세기 말뿐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가지 편리한 이유를 갖다대며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것이라 생각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와일드 시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란 존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차별에 대해 날서린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그런 차별을 온갖 이유로 정당화하며 오직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당당하게 탈주를 감행하는 야생종이 되라고 말이다그건 사회가 흔히 비정상으로 분류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존재가 아니다오히려 그런 편견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존재들이다이런 점에서 ‘와일드 시드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로가 끝내 인간이 되지못하고 홀로 괴물로 남게 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설을 인종차별에 근거해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은 여성차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아냥우가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녀가 도로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되어 하는 것들이나 도로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걸  보여준다 글의 처음에서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라고  것도 그래서다사실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함부로   있다는 생각들이 알고 보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말이다차별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타인의 인정을 다른 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하지만 도로처럼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정작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뿐이다그들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이들의 얼굴에 괴물의 가면을 씌우지만 그들의 얼굴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르고 있다.


 그런 식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로(徒努)  뿐이다.

 여기서 도로(徒努) 일이 잘못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한다물론 옥타비아 버틀러가  도로라는 말을 알고 이름으로 썼을 리는 없지만도로에겐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외롭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결국 도로(徒努외롭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도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인정받을  있는지 모색해봐야겠다. ‘와일드 시드에서 아냥우가 걸어간 길은 거기에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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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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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초에 활약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에드거 월리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킹콩의 원안이 되는 극본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트위스티드 캔들'은 1905년, '네 명의 의인'을 데뷔한 그가 13년 뒤인, 191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3. 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이다. '트위스티드 캔들'은 탐정 역할을 하는 티엑스도 등장하고 밀실 살인 사건이 나오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 추리 소설 보다는 피카레스크에 속하는 작품이다. 누구보다 교활하고 무시무시한 악의를 내뿜는 '카라'라는 악당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의 대부분은 존 렉스맨이라는 성공한 미스터리 소설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라의 흉계로 인해 겪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이 차지하고 있다. 알바니아 출신의 카라는 엄청나게 부유한데다 명망있는 귀족이라 누구도 그가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범죄를 통해 돈도, 명예도 더이상 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이 그가 악당이라고 의심한다. 그가 바로 경시청 최고의 형사, 티엑스다. 소설은 마치 소나타 형식처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첫 부분은 주요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두 번째 부분은 카라의 가련한 희생자가 된 렉스맨을 구하기 위한 티엑스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카라와 대결하는 장면들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은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지만 수수께끼의 밀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해명되는 부분이 차지하고 있다. 전개가 고전 범죄 소설의 형식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아서 조금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으나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었다는 줄리언 시먼스의 작가에 대한 평가 그대로 여러가지 사건을 끊임없이 배치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만든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비행기를 이용한 탈출이라는 꽤나 대담한 연출까지 선보이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다양한 사건 전개와 탐정과 범인 사이의 선명한 선악 구도에 더하여 빠른 전개로 흡인력 있는 작품을 더 인상 깊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에 영국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무구한 렉스맨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힌 카라의 동기가 흥미로운데, 그건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누구나 할 것없이 선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렉스맨과 그 아내에게 있어서만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당시로서는 꽤 이례적인 것으로 이로써 에드거 월리스는 현대에 일어날 범죄는 과거와 꽤 다를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티엑스의 말을 통해서 말이다.


 "정말이지 불쌍한 눈 먼 맹수가 따로 없군." 티엑스는 답답하다는 듯 맨서스를 쳐다 보았다.

 "자넨 엄청난 범죄들이야말로 물질적인 욕망이나 구체적인 이익을 얻을 가능성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자신의 아내를 때리는 저속한 인간들은 말이지, 맨서스. 아내가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주변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우리 영국인이 지니고 있는 민족성이네.(p. 100 ~ 101)


 제목의 '트위스티드 캔들'은 고문도구로 사용되는 양초를 뜻한다. 단순히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해 자행되는 고문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는 또한 세계 제1차 대전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으로 곳곳에서 이기주의로 인해 타인의 삶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었다. 약자들의 삶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껏 유린하는 소위 제국이라 말하는 그 때의 강대국들은 거의 카라나 진배 없었다. 집요하고도 잔인학 악당 카라는 정말로 그런 나라를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더 흥미로운 이 소설은 나처럼 고전 범죄 소설에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이에겐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이 되어줄 것 같다. 여성에게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고 꼼짝 못하도록 협박하는 게 고작 키스라니, 사지 절단이 예사로 나오는 현대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 이들에겐 귀엽게 보이기까지 하는 연출인데, 당시만 해도 엄청난 공격이었고 범죄였던 키스를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과도 같이 그만큼 우리가 타인을 침해하는 정도에 대해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도 든다.


  "두려움에 떨고 있군, 그래!" 카라가 홀랜드 양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선 소곤거리며 희롱했다. "이제야 두려워하고 있어. 그렇지? 만약 소리를 지르면 다시 키스할 거야, 알겠나?"(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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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8-12-25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정말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합니다 실제로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제가 잘 모르는 거고 갈수록 사람은 잔인해지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소설을 보면 무엇을 얻으려는 그럴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자존심 때문이라니... 누구나 자신을 좋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다니, 그런 모습은 사이코패스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소시오패스라고 해야 할지...

성탄절이네요 저는 그날이라고 다를 건 없지만... 오늘 하루 평화로우시길 바랍니다


희선

2018-12-26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6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 1 밀리언셀러 클럽 46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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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정말 좋아한다. 이렇게 시리즈를 전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이유는 많다. 일단 캐릭터가 너무 좋고(그 중에서 앤지 제나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다.) 이야기가 다들 흥미로우며(시리즈의 마지막 '문라이트 마일'은 어쩔 수 없이 우울했지만) 마음에 훅 들어오는 문장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건 이 두 주인공들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는 고민을 하고 내가 그러는 것처럼 힘겹게 버텨가면서 그 고민에서 헤어날 길을 찾아 분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민이냐고?

 그건 당신이 최근 일어난 PC방 아르바이트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나 곧 결혼을 앞둔 어린이집 교사가 아무 것도 아닌 이유로 맘 카페 회원들에게 신상이 털리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끝내 자살해 버린 사건 아니면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 커다란 아픔으로 남아 있는 세월호 참사를 보았을 때 드는 생각과 비슷하다. 이토록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세상이 온통 우리가 헤아리기 어려운 악의로 가득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켄지와 제나로는 늘 이 고민을 마주한다.


 대표적으로 '가라, 아이야 가라'가 그렇다. 한 아이가 실종된다. 무책임한 엄마에게서 자주 방치되고 학대 받는 아이였다. 아이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아이의 외숙모만이 걱정하여 켄지와 제나로에게 찾아온다. 아이를 찾아달라고. 그런 부인에게 켄지는 말한다.


  "맥크레디 부인, 돈 낭비가 될 겁니다."


 그러자 외숙모는 이렇게 대답한다.


 "조카를 낭비하는 것보단 낫겠죠."(1권, p. 21)


 미국에선 매일 2,300명의 아동이 실종된다(p. 15). 그 중에서 300명의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p.16).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걸 2권에서 아주 아프게 확인한다. 어른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처참하게 희생되어버린 몰골로. 켄지와 제나로는 아이가 관련된 사건을 가급적 맡지 않으려 한다. 그 사건을 통해 또 얼마나 무섭고 어두운 세상의 악의를 보게 될 지 두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악의 때문에 절망하여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라, 아이야 가라'에선 너무나 많이 보아버린 세상의 어둠 때문에 인간과 괴물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켄지와 앤지가 큰 호감을 갖고 있는, 아동 유괴 범죄 담당의 브루사드 형사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맡은 업무로 인해 자주 이성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는 인간의 어두운 모습을 만나게 되는 브루사드는 어떻게든 사라진 아이를 찾는 것만이 온통 까만 밤과도 같은 이 세상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까스로 버텨 나가고 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켄지와 제나로, 브루사드를 비롯하여 '가라, 아이야 가라'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 우리의 도플갱어들이며 그들의 길은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를 대신하여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내 손을 강하게 잡고 있는 어둠을 놓아버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대역이 된 그들은 고민하고 갈등하며 버티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켄지는 붕괴된 질서를 방치하고 있는 신을 원망하고 앤지는 조금이라도 구원이 될 수 있는 걸 선택한다. 부바는 일단 눈 앞의 악부터 제거하고 본다. 길이 이렇게 다른 건, 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더하여, 누군가 대신 답을 해 줄 수 없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대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 또한 그러하듯이, 어둠을 몰아낼 여명이 쉬이 찾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아니, 가면 갈수록 더 큰 어둠을 목도하며 그 앞에서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다는 걸 절감하는 탓이다.


 이 소설에서 켄지와 앤지의 길이 그러하다. 믿었던 인물은 자신을 배신하고, 아이를 위해 최선이라 여겼던 선택도 아이의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구원을 찾으려 뭔가를 하면 할수록 더욱 흐려져 버린 흙탕물을 마주할 뿐이다.


 "올해 워싱턴에서 생면부지의 엄마에게 딸의 양육권을 넘긴 판결이 나왔죠. 단지 생모라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생모는 태어난 지 6주 된 또 다른 딸을 죽인 죄목으로 복역했어요. 딸 아이가 울어대자 화가 나서 아이의 목을 졸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는 바비큐파티에 갔다는 겁니다. 이 여자한테는 남은 아이가 둘 있었어요. 하나는 친조부모가 키우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수양 부모에게 있었죠. 그녀는 딸을 살해한 죄로 2년 밖에 복역하지 않았고 지금은 양부모에게서 뺏은 딸을 키우고 있어요. 양부모가 법원에 양육권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이건 실화예요. 찾아보세요."

 "말도 안 돼요."

 앤지가 말했다.

 "아니, 말 돼요."

 "도대체 어떻게...."

 "그게 미국이니까요. 모든 성인은 자기 아이를 산 채로 씹어먹을 전적이고도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2권, p. 215)


 어둠은 갈수록 강하고 우리는 늘 차라리 거기에 먹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괴물이 되는 길과 사람으로 남는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 그로 인한 고통을 너무나 잘 아는 데니스 루헤인은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받아들여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스스로 생각토록 한다. 진정한 강함은 누군가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한 자발적인 각성 속에서 비로소 도래하기 때문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독자에게 바로 그런 것을 주려고 한다. 


 '가라, 아이야 가라'는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마치 스릴러 판, 단테의 '신곡'과도 같이 희망 없는 지옥의 순례이며 그 지옥 속에서 인간의 위엄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베르길리우스라 할 수 있다. 물론 눈 앞에 펼쳐진 광막한 악의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남는 길을 선택할 때의 얘기지만.


 만일 당신도 사람으로 남고자 한다면 당장 켄지와 앤지를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나처럼 그들의 신도가 되라고.

 걸으면 걸을수록 더 커다란 어둠을 마주하는 그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인간다움을 굳건히 유지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희망이 되어 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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