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의 망령들
스튜어트 네빌 지음, 이훈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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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직하고 우직하다. 아일랜드 작가 스튜어트 네빌의 데뷔작,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읽은 첫 느낌이다. 200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데 읽어보니 그럴만 한 것 같다.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1998년 4월 10일에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 사이에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 이후를 다룬다. 그 협정은 수 십년 간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일랜드에서의 갈등을 일단 종식시키긴 했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자면 그저 단순한 봉합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동안 대의와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아무 이유 없이 삶을 희생당한 이들을 모르쇠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존재하는데, 가해자들은 아무런 죄책도 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들의 범죄를 발판 삼아 더 큰 권력과 재력을 가져버렸다. 스튜어트 네빌은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협정이라는 장막 아래에서 손쉽게 지워져 버린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라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의 주인공이자 사라져버린 목소리들의 복수자인 제리 피건을 작가의 대변자로 삼고서.




 제리 피건은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테러리스트였다. 19세 때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첫 살인을 한 그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왕립주의자들과 치열한 갈등을 겪는 동안 내내 그런 일을 해왔다. 조직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하면 찾아가서 가차없이 죽였다. 협정 이후, 더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피건은 괴롭다. 그건 살인을 못 해서가 아니다. 열두 명의 유령이 자신을 따라다니면 조금의 안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제목이 '벨파스트의 망령들'인 것은 그래서다. 그는 유령들에게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유령들은 자신의 복수를 해주지 않으면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피건은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열두 명의 유령들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모조리 '렉스 탈리오니스'의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다. 예전의 동료 모두를.


  "대답을 안 했잖나, 제리.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다니까. 말해 봐." (...)

  "해야만 했으니까요."

  "해야만 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뭐에 대한 유일한 방법?"

  "그들이 날 내버려두게 할 방법." (p. 382)

 

  오래만에 아주 눅진한 느와르를 만끽할 수 있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추천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모두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몰입감에다 무분별한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북아일랜드 분쟁이 남겼던 상흔이 협정이 이뤄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많은 아픔과 비극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없이 미래로만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부질 없는 젓인지 피건의 행보를 통해 물씬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미와 깊이 모두 잘 챙긴 명작. 마리 맥케나와 엘렌 모녀 곁에서 피건이 묵묵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모습에선 라이언 고슬링이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드라이브'가 떠오르기도 해서 '벨파스트의 망령들 역시 영화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게 피건의 신념이자 이 책의 메세지인데, 요즘처럼 검사와 판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벌을 받지 않아야 되는 사람에겐 큰 벌을 주고 정작 벌을 줘야 할 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한 꼴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 여하튼 데뷔작이 이런 수준이라니 스튜어트 네빌이라는 작가 자체가 몹시 궁금해진다. 작가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시작으로 벨파스트 누아르 시리즈란 이름아래 여섯 작품까지 발표한 상태인데 후속작들도 아울러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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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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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에 발표된, 스티븐 킹의 '인스티튜트'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을 때, 입소문이 좋아서 우리나라에도 나오길 기다렸던 작품인데 기대한 것보다 빨리 나와서 더 반가웠다. '인스티튜트'는 단순하게 시설이라는 뜻으로 스티븐 킹은 이 작품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샤이닝의 후속작인 '닥터 슬립'에서 한 번 다뤘던 초능력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구현하고 있다. 그건 총 2권에 걸쳐 펼쳐지는데, 난 그 중 1권을 읽고 이 리뷰를 쓰고 있다.



 먼저 총평부터 하자면 근래 읽은 스티븐 킹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닥터슬립'과 '쇼생크 탈출'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걸 하나씩 설명하자면 먼저 이 소설이 두 명의 인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소설의 포문을 여는 인물로 전직 경찰인 팀 제이미슨이고 다른 하나는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손에 납치되어 '시설'에 감금된, 초능력을 가진 열 두살의 소년 루크 엘리스다. 1권이 끝날 때까지 이 둘은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1권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2권에서 이 둘이 만나고 루크가 팀 제이미슨의 보호를 받을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팀과 루크의 관계는 '닥터 슬립'에서 팀의 말대로 '서로 등을 긁어주는' 조력 관계였던 대니와 아브라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다 그들을 위협하는 '닥터 슬립'의 트루낫 역시 이 소설 '시설'과 유사하게 '스팀' 착취라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초능력이 있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 감금한다. 원래 루크는 잠재적 염력 보유자인 TK로 분류되어 시설에 수용되었지만 나중엔 TP인 텔레파시 능력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뛰어난 텔레파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샤이닝을 지녔던 아브라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런 까닭으로 난 '닥터 슬립'을 연상했고 '쇼생크 탈출'을 생각했던 건 '인스티튜트' 1권 후반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결국엔 폐기 처분되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루크가 IQ 수치 자체가 무의미한,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적인 두뇌로 전략을 짜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움직여 '시설'을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보시면 이런 궁금증이 하나 드실지 모르겠다.

 왜 스티븐 킹은 소설의 시작을 하필이면 팀 제이미슨으로 한 것일까? 사실 팀은 1권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며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루크가 듀프레이에 왔을 때 1권 앞부분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팀의 얘기로 시작했다가 뚝 단절하고 갑자기 인물과 배경을 확 바꿔서 루크의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어색해 보이는데, 스티븐 킹은 왜 이런 인상을 주는 위험마저 무릅쓰면서 지금과 같은 구성을 취한 것일까? 난 여기에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이 이 소설, '인스티튜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소설의 핵심이 되는 '인스티튜트', 즉 '시설'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스티븐 킹은 2장 '똘똘이'에서 루크가 시설에 납치, 수용되는 과정을 그린다. 루크는 앞서 말했듯 엄청난 천재로 이미 한 해의 등록금이 하버드대와 맞먹는 영재 전문 교육학교 브로더릭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다. 그는 겨우 열 두 살의 나이로 미국의 SAT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다.


저희 학교에는 영재들이 있습니다. 사실 브로더릭 재학생의 50퍼센트 이상이 영재죠.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루크는 달라요. 로크는 포괄적이에요. 한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P. 81)


 

 스티븐 킹은 루크의 비범한 면을 주로 학교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이 보여주는데, 이건 사실 나중에 나오는 '시설(인스티튜트)'가 독자들에게 일종의 교육 기관처럼 연상되도록 하는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시설에 납치, 수용된 이들은 모두 학교를 다녀야 하는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설'은 오늘날 미국 교육이 가진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티븐 킹은 루크가 다녔던 학교, 브로더릭에서 유난히 학생의 뛰어난 능력을 강조하며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걸 은연 중에 내비치고 또 루크가 SAT를 치르는 날, 성적이 나쁘게 나온 여학생이 깊은 슬픔에 빠져 나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건 모두 미국 교육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의 대표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높은 성취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하는 것. 스티븐 킹은 '시설'에서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을 통하여 현재 미국이 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것들의 진실한 초상은 바로 이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것이다. 시설의 운영자 식스비 부인을 비롯하여 그 곳의 관리자와 직원들을 아이들의 인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게 만드는 폭력까지 서슴없이 자행한다. 수월성 교육이 능력과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무시하듯, '시설'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에 아이들이 도달하지 못하면 폐기해버린다. 


 그는 실험대상이었고 그들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급이 낮은 TP와 TK, 그러니까 분홍색들만 추가로 검사를 받았다. 이유가 뭘까? 그들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일이 잘못되면 더 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기 때문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루크가 보기에는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점들이 사라졌고 아이리스도 사라졌고 점들은 다시 돌아올 지 몰라도 아이리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리스는 뒤 건물로 넘어갔고 그들은 이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P. 281 ~ 2)



  이러한 '시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이다. 아이들을 '뒷 건물'로 보내서 자신들의 목적(이건 1권 후반부에서 밝혀진다.)에 보다 유용하게 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시설'의 어른들은 오직 아이들을 통제할 뿐이며 자신들이 세운 질서에 복종할 것만 강제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군인처럼 징집당한 것이며 오늘의 희생으로 나라가 크게 도움을 받을 거라는 둥, 여기서의 생활은 포스터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라는 둥 듣기 좋은 말을 해대지만 아이들은 속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언과 폭행, 바깥 사정을 하나도 알 수 없는 고립과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약물 투입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좋은 말로도 포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우리는 납치한 거냐고? 맞아. 우리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냐고? 맞아.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그건 몰라. 하지만 엄청난 작전일거야. 여기가 이렇게 엄청난 걸 보면. 수용소잖아. 의사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자칭 관리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숲속에 박혀 있는 소규모 병원이나 다름없어.”

(………)

 “도대체 말이 안 돼. 미국에서 이게 가능하다고?” 루크가 말했다.

 “여긴 미국이 아니야. ‘시설’ 왕국이지.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창밖을 내다봐, 엘리스. (·········) 여기처럼 초록색으로 된 콘크리트블록 건물이. 나무에 섞여서 잘 안보이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거기가 뒤 건물이야. 모든 시험과 주사 투여가 끝난 아이들이 가는 곳.”

 “거기에 가면 어떻게 되는데?”

 이번에는 칼리샤가 대답했다.

 “우리도 몰라.”(p. 151 ~ 2)


 잘생긴데다 시설에 가장 많은 반항을 하여 '시설'에 수용된 여자 아이들에게 많은 흠모를 받는 니키는 이 흐름에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이러한 니키로 인해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 전선은 더욱 선명해지며 어른의 나쁜 면은 한층 더 부각된다. 그 어른들은 입으로 아무리 좋은 말을 내뱉어도 그저 아이들에게 끔찍한 악몽만 선사하는 존재다.


 프리실라가 다시 그의 뺨을 때렸다. 이제 귀가 더 세게 울렸고 루크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시설이 악몽인 줄 알았더니, 몸의 절반이 빠져나간 채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카드에서 뭐가 보이느냐는 질문을 받고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뺨을 맞는 지금 이 상황이 진짜 악몽이었다.(p. 270)

 

 바로 여기서 우리는 소설 처음에 나온 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반에 팀과 팀이 뜻하지 않게 하게 되었던 여행 중에 같이 했던 어른들은 '시설'의 어른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설'의 어른들은 초능력을 부려서 더욱 자신들과 다른 타자인 아이들을 무조건 통제하려 들지만 팀과 초반에 나온 어른들은 타자를 통제하지 않는다.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주어 격리하거나 차별하지도 않는다.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팀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 그 때, 그 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인 여정은 '뒷 건물'이라는 목적지가 명백하게 정해진 '시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기서 나는 스티븐 킹이 포스터 문구를 통해 인용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가 얼마나 재치있게 도입한 장치인지 감탄하게 된다. 아마도 소설 초반에서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에게 보인 모습이 아니었다면 난 이 문구를 그냥 단순하게 시설이 아이들에게 하는 흔한 선전문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바로 이 문구 자체에 스티븐 킹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집약되어 있었다.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는 영어로 'ANOTHER DAY IN PARADISE'다. 어딘가 낯익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필 콜린스의 동명 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제목이 같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스티븐 킹은 분명히 이 노래를 생각하고 그 문구를 가져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와 만나는 장면 때문이다. 필 콜린스의 노래 또한 한 남자와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노숙자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노랫 속 주인공 남성은 도움을 호소하는 노숙자 여인을 무시한다. 휘파람을 불면서 아무 말도 못 들었고 자긴 거기 없다는 척을 하며 황급히 떠나버린다. 이런 남자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오직 도구의 모습만 볼 뿐 그 외의 것은 깡그리 무시해버렸던 '시설' 어른들의 모습과 판박이다. 그러나 팀은 다르다. 그는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 노숙자 할머니에게 기꺼이 다가가 말을 건네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는 필 콜린스 노래 가사처럼 그녀 얼굴의 주름을 보고 그녀가 있는 곳을 본다. 필 콜린스가 이렇게 보고 곁에 있어 준다면 천국일 거라고 노래했던 타자를 향한 전폭적인 열림. 그걸 팀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열려 있고 노숙자 할머니가 열심히 뜨고 있는 거대한 목도리처럼 서로 연결하는 존재다. 그러한 그는 우연의 섭리로 닿게 된 듀프레이 마을에서 야경꾼이 된다. 야경꾼은 마을 순찰을 돌지만 정식 경찰은 아니다. 경찰과 일반인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두를 연결하며 포용할 수 있는 존재다. 


 야경꾼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일자리거든요. 적어도 듀프레이에서는요.(P. 51)


 이러한 팀의 모습은 확고한 상하 관계로 이뤄진 조직의 위계 질서 속에서 타자에 대해선 통제와 관리만이 존재하는 '시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소설 '닥터 슬립'에서 타인을 통제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트루낫'과 타인이 가진 고통과 고뇌의 자신을 전부 열었던 '알콜 중독자 협회'가 그토록 달랐듯이.


 그런데 앞서 '시설'은 아이들에게 오직 악몽만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이번 BLACK LIVES MATTER!' 시위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 들어 더욱 노골화된 미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악몽을 더이상 안겨주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팀의 길을 따르는 것이란 걸.


 '인스티튜트' 1권은 확실히 재밌다. 첫 장을 넘긴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달음에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도 넘친다. 그렇지만 재미만이 이 책이 가진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배치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와 같은 여러 세부 장치들을 헤아리다 보면 지금까지 리뷰를 써 온 바대로 이 소설이 현재 미국 사회에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 또한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시설'처럼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한다. '샤이닝'에서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너무 넘친 나머지 자신의 가족마저 살해하려고 들었던(죽음은 절대적 통제 상태이니까 말이다.) 잭 토런스의 저주가 미국 사회 대기에 넘실대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닥터 슬립'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잭 토런스라는 저주의 유령을 퇴마하려 한다. 닥터 슬립의 대니와 아브라를 통해 했던 것처럼 팀과 루크의 협업을 통해서.


 과연 이 협업이 루크를 납치하기 위해서 부모마저 눈 깜짝하지 않고 비정하게 살해해버리는 살인 집단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아이들을 납치 살해하고도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전모가 짐작되지 않는 '시설'의 위협에 맞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얼른 2권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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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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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세대 SF 작가들 중 가장 신뢰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가인 N. K 제미신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놀랍게도 이번엔 단편집이다.

 제목은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 단편집은 현재 그녀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서른 살에 이르러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가 거의 초기 시절이라고 할만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22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작가로 첫 발자국을 떼고나서 오늘에 이르는 전 여정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에 있어서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은 이전에 나온 <부서진 대지 3부작> 중 두 편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이기에(그녀는 이 3부작으로 한 편도 받기 힘들다는 SF계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단편도 과연 잘 쓸까 궁금했던 터이기에 특별히 더 반가웠던 단편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책머리에서 이 단편집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작가인 그녀에게 있어 성장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 N. K 제미신을 좋아하는 이로써 어떻게 부푼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당장 저마다 독특한 색채로 빛나고 있는 22개 단편들의 성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작을 여는 것은 2018년에 발표한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단편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제미신이 이 단편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단편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편은 여성 SF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모방이자 반응(p.12)'인 작품인데 여기엔 두 세계를 굳건하게 가르고 있는 장벽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한 남자와 그의 딸이 등장한다. 남자를 처형한 이들은 사회복지사로 불리는데, 그들은 그렇게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세계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딸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복수할 거야.(...) 당신들이 아빠를 죽인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죽일 거야. (...)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어떻게."(p. 29)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이러한 설정, 즉 한 쪽엔 보호 혹은 진보란 이름으로 나누고 가두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엔 그들이 설정한 벽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가로지르고 서로 연결하려는 이들이라는 양분된 구도가 여기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구획과 횡단의 투쟁 연대기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러하듯이 적은 자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듯, 적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다. 나는 적의 아주 작은 일부만 다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망가진 채 돌려보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좋다. 최후의 결전 때가 온다면 놈은 다시 내게 달려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내게. 우리에게. 그렇다.(p. 59)


 그렇다고 해서 이 투쟁이 승패를 가르고자 함은 아니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 하는 건 작가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있어 적은 변화를 통해 성장하기 위한 계기의 제공자일 뿐, 근절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다. 식물처럼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 것, 늘 구획된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야 말로 작가가 이 단편집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모티브를 특별히 많이 사용한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조리하는 것이다.

 꿈은 두 번재 단편인 '위대한 도시의 탄생'을 비롯하여 '수면 마법사'까지 자주 등장한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로이 소녀(세계관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작가가 장편으로도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책머리에서 작가는 단편으로 끝내겠다고 해놓아서 참 아쉬웠다.)'는 이러한 꿈의 테마가 가장 한껏 재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가상 현실 같은 곳에서 오직 생각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들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흔히 말하는 전뇌 공간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인간에게 다운로드 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 프로그램들은 한 어린 소녀 프로그램을 통하여 변화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궁극의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꿈은 한 마디로 대지와 정반대에 있는 영토이다. 현실과 비현실, 중력과 무중력으로 대비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꿈은 무엇이든 하나로 고정시키려는 지상이 허락하지 않은 정체성의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정체성을 찾거나 현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도 한다. 끌어당기는 중력도, 고정시키는 영토도 없어서 오로지 물 흐르듯 부유하거나 유영할 수밖에 없는 꿈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직 변화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통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다는 점에서 작가는 변화 속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리(요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꿈이 내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조리는 외적인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조리사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에 기이한 고객의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들지만 후반에 가선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여 음식을 만든다. 이러한 주제는 나중에 '퀴진 드 메므아'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남이 만든 레시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을 그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작가가 왜 하필 조리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는가 하는데 있다. 바로 거기서 난 이 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외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란 각각 개별적인 재료들을 훌륭한 맛을 위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가장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어느 하나도 쉽게 배척되지 않는다. 또한 재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재료 하나에도 나를 헤아리는 것만큼의 깊은 헤아림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조리사의 자세가 작가는 타자를 대하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SF 소설계에서 쉽게 지워졌었던 자전적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소설을 쓸 때조차 암묵적으로 백인 남성 주인공을 상정하고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쉽게 무시된다는 건 우리 역시 익히 보아왔던 바다. 그것이 최근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작가는 여러 단편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조리를 할 때와 같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재료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과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이처럼 구획과 횡단의 투쟁기는 종반엔 변화와 공존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제미신의 역량은 단편에서도 여전했다. 어떤 단편들은 장편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가 더 농밀하게 구현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차례대로 세워 놓은 22개의 표지판을 통과하면서 왜 이 단편집을 그녀가 성장의 연대기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부서진 대지 3부작'의 성공 역시 그냥 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제미신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부서진 대지 3부작도 이제 '석조 하늘' 하나만 남은 상황. 얼른 그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한편, 과연 이 다음의 성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부디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참 제목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이 단편집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제목은 단편이 아니라 2013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것이라고 한다. 검은 미래의 달은 흑인이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검은 미래가 하얀 미래와 동등하고 달이 태양과 대등하게 되는 공존과 조화의 시대에 다다르는 것이 부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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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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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에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제럴드의 게임'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스티븐 킹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원래 난 스티븐 킹을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작가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로 다르고 있는 장르가 공포이고 더러 피와 살이 튀는 폭력이 난무한데다 흔히 레드넥이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의 마초적인 남성들이 많이 주역도 맡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제럴드의 게임'은 그런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한 마디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거기서 남편 때문에 뜻하지 않게 침대 위에서 갇힌 채로 며칠을 보내는 여 주인공은 알고보니 지금만 갇힌 상태가 아니었다. 실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내내 영혼이 갇힌 상태였다. 남성의 편향된 폭력과 억압 아래에서 한없이 결박된 여성의 내면을 작품은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는 '제럴드의 게임'을 통해 스티븐 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초기작 '캐리'에서 이미 대두되고 있었을지도 모를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말이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는 건 이내 증명되었다. 여기 또 한 편의 페미니즘적 모습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둘째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쓴 '잠자는 미녀들'이다.




 소설은 오직 여성들만 걸리고, 걸리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수면병이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때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이름인 '오로라 병'(샤를 페로의 원작에선 사실 그녀의 아들 이름이다.)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요 무대는 미국의 둘링 카운티. 소설은 오로라 병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차츰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1권의 주된 내용이다. 둘링 카운티에는 둘링 여자 교도소가 있다. 둘링 카운티 주민의 생계는 이 둘링 여자 교도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바로 이곳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갇힌 여자들이 나왔듯이, 이 소설에서도 갇힌 여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잠에 들게 만드는 수면병은 그야말로 여성들을 가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옥과 수면병은 그렇게 직결되고 그 직선은 그대로 여성들을 '갇힌 존재'로 만드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째서 폭력과 억압이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저넷과 리가 교도소에 오게 된 사연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녀들이 감옥에 온 것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려 한 결과 공권력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의 더 커다란 폭력에 의해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교도관에 의해 똑같이 성폭행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터라는 교도관이다. 이처럼 여성 죄수들의 사연과 어디에 있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성폭행들을 보노라면 '억압과 폭력'이란 말을 쓰는 게 그리 무리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계속해서 남성의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여성들을 여럿 선보인다. 마약을 만드는 트레일러에서 헌신짝처럼 취급받는 여성과 십대 남자 아이들에게 거의 학대 수준으로 괴롭힘 당하는 노파가 대표적이다. 수면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한 여성 '이비'(이름에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처럼 이비는 가장 원초적인 여성으로 아담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이다.)가 둘링 카운티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비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녀들을 해방시킨다. 깊은 잠으로써...


 이런 의미에서 잠은 그저 '갇힘'의 의미만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 여성들만 빠지게 되는 잠은 정지다. 남성 중심 사회의 가동을 마치 일시 정지(pause) 버튼을 눌러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정지인 것이다.

나는 분명 수면병이 그런 의미로 소설에서 쓰여지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이 잠들 때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얀 고치가 증거다. 다들 알듯이, 고치는 변태를 위한 과정이다. 나비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봄에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자신이 될 수 있다. 나방 또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되려면 하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마디로 고치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 지금의 갇힘은 영원한 유폐가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인 것이다. 

잠이 보다 나은 몸과 마음의 상태로 깨어나기 위한 과정이듯이.

 

 스티븐 킹은 정말 그런 의미로 수면병을 썼다. 그 뚜렷한 증거가 소설에 나와 있다. 미케일라 '미키' 모건이란 여성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리포터다. 아주 매력적인 다리를 가진 그녀는 보도 방송을 할 때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물론 그녀가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이 그런 식으로 시선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싫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둘링 여성 교도소에 갇힌 여자들이나 트레일러의 여자가 오래도록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랬던 미케일라가 1권 후반에 수면병이 더욱 확대되자, 그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보여 그 일을 자의로 그만둬 버린다. 시선에 착취 당하는 걸 그만두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면병은 단순히 여성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물론 난 1권만 봤기 때문에 2권에서 어떻게 되는진 모른다.)

 이것은 잠이 든 여성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하얀 고치를 억지로 떼어냈을 때, 그로인해 깨어난 여성들이 하는 행동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소설은 고치의 제거와 함께 갑작스럽게 깨어난 여성들이 자신을 깨운 이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인까지 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 때 스티븐 킹이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게 바로 엄마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이 장면들은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왜 이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려했을까 의문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여성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가장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랜 세월동안 남성 중심 사회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모성은 사회가 여성의 자의식을 가장 많이 억제한 갑주였던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는 열악한 자신의 지위 때문에 사회가 더 많이 덧씌운 옷들을 보다 더 자신으로 여기고 살았다. 수면병은 그 옷들을 벗겨 여성 본래의 정체성으로 되돌리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이건 이비를 따라다니는 나방이 가지는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나방 관찰자를 모서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를 뜻하는 마더와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다르죠.(p. 101)


 남성 중신 사회가 규정한 모성이 아닌, 거기에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모성. 수면병은 비유하자면, 귀향의 행로인 것이다. 


 물론 이건 1권까지의 이야기다. 2권에선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권만으로 스티븐 킹이 아주 선명한 주제로 무장한 페미니즘 소설을 썼다는 건 명백하게 보인다. 이런 면에서 '잠자는 미녀들'은 독자에겐 그간 잘 볼 수 없었던 스티븐 킹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스탠드'와 '셀' 혹은 '미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스티븐 킹의 묵시록 묘사의 재능이 다시 한 번 잘 발휘되어 있어서 이런 쪽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더욱 권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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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0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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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원숭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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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작년 내가 읽은 최고의 스릴러는 A.J 핀의 '우먼 인 윈도'였다.

 이 작품은 정말 내게 명불허전을 실감하도록 만들었다. 재밌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그게 조금도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난 정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 소설을 단번에 흡입해 버렸다. 무려 619페이지에 이르는 두터운 이 작품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오가는 열차 안에서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이 책을 출간한 비채는 제대로 홈런을 날려버렸다. 그런데 지금 또 비채가 홈런을 날렸다. 다시 말해 '우먼 인 윈도'에 버금가는 흡인력을 자랑하는 작품이 또 다시 비채에서 발간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J. D. 바커 '네 번째 원숭이'다.





 형사 샘(원래는 새뮤얼) 포터는 동료 내쉬 형사의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을 찾아간다. 누가 갑자기 달리는 버스 앞으로 뛰어들어 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누가봐도 자살이 명백한 사건에 왜 자신을 불렀는지 영문을 모를 무렵, 내쉬가 포터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게 만드는 말을 한다. 그가 검은 리본이 묶인 작고 하얀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당시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시카고는 흔히 '네 머리 원숭이 킬러'라 불리는 연쇄살인마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에머리 역시 네 마리 원숭이 킬러에 대해 잘 알았다. 시카고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가 연쇄살인범이라서가 아니라, 희생자를 죽이기 전에 고문한 다음 신체의 일부를 가족에게 우편으로 보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p. 109)


 샘 포터는 지난 5년 동안 네 마리 원숭이 킬러(줄여서 '4MK'라고 부르기도 한다.)가 놓아 둔 상자를 21개나 보았다. 희생자 한 명 당, 처음에는 귀 다음에는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혀가 담긴 상자를 보내니까 총 7명이 킬러에게 살해된 것이다. 그만한 인원이 죽었는데도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오직 상자만 남길 뿐, 그 외 증거는 완벽하게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자를 가진 채, 버스로 뛰어 든 남자가 그 킬러였을까? 상자에 담긴 귀는 그가 자신의 죽음까지 감행하면서 초대한 마지막 살인 게임이었을까? 그렇다면 이 귀는 누구의 것인가? 샘 포터의 내면에서 이런 의문이 일어나는 가운데 죽은 남자의 소지품에서 한 권의 노트가 발견된다. 네 마리 원숭이 킬러가 자신이 살아 온 내력을 적은 기록을. 소설은 그 노트의 발견과 동시에 두 개의 내용으로 병행하며 전개된다. 하나는 4MK를 디뒤쫓는 수사반들의 이야기로, 다른 하나는 노트에 나와 있는 4MK의 고백으로.


 한 편, 귀의 주인공은 곧 밝혀진다. 상자에 수신인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차기 시카고 시장으로 유력한 사회 지도층 인사 아서 탤벗. 샘 포터 일행은 그와 가족을 찾아갔다가 그의 딸 에머리가 범인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상자 속 귀는 그 에머리의 귀였던 것이다. 죽은 자가 진범일까? 정말 진범이라면 귀만 자르고 자살을 결행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런데 만일 다른 자가 범인이라면 에머리의 눈과 혀가 배달되기 전에 구해야만 한다. 샘 포터가 지휘하는 수사반은 죽은 남자의 진실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에머리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한 편, 노트 속 4MK의 고백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무시무시한 사실을 털어놓고 있었는데...



 이런 소개로 책을 읽으며 설정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이 얼마나 전해질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게는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는 설정이었다. 4MK의 범죄 방식은 물론 노트 속 그 가족의 과거 또한 날 완전히 사로잡았다. 혹시나 궁금하실 분이 계실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네 마리 원숭이'는 일본 닛코의 도쇼구 신사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 신사의 입구에는 원숭이 상 세 개가 있는데 첫 번째 원숭이는 귀를 가리고 있고 두 번째 원숭이는 눈을 가리고 있으며 세 번째 원숭이는 입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각각 악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라고.



 실제 도쇼구 신사의 원숭이는 이 셋 밖에 없지만 미국엔 네 번째 원숭이가 있으며 그건 악을 행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알려진 바 있는데, 소설은 그걸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킬러가 스스로 네 마리 원숭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악행을 저지하는 것이라 그러한데, 5년 전 그의 첫 살인이 그랬듯이 4MK는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간 범죄자를 찾아내 처단한다. 그런데 범죄자 자신을 처단하는 게 아니라 그의 가족을 납치하여 귀와 눈 그리고 혀를 자른 다음 살해한다. 그가 타인의 소중한 존재에게 커다란 아픔을 입혔으니, 그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 한다는 논리다. 역시나 아서 탤벗 또한 무고한 사람은 아니다. 그가 행한 죄의 대가로 숨겨둔 자식인 에머리가 납치된 것이다. 그는 과연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가? 그건 4MK가 쓴 노트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샘 포터가 주역이 되는 수사 이야기와 4MK가 기록한 노트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결합된다.

 읽으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 어떤 이야기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블랙홀에 붙잡힌 빛처럼 이야기가 뿜어내는 중력에 마냥 끌려갈 뿐이다. 특히 4MK가 쓴 노트의 기록은 압도적이다. 선정적인 설정과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반전 속에서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그동안 허다한 스릴러를 만났지만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 식상함만 느꼈다면 '네 번째 원숭이'를 꼭 한 번 만나보셨으면 좋겠다. 잃어버렸던 스릴러의 재미를 여기서 찾아낼 지도 모른다.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만큼 소설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그렇게 하면 본의 아니게 스포일러도 밝힐 것 같고 여러 모로 처음 만나 읽어보면서 느끼게 되는 재미를 망칠 것 같아서 그만두련다. 그냥 이 소설의 존재를 모르실 분들을 위하여 '여기 정말 재밌는 소설이 나왔으니 꼭 한 번 만나보시라!'는 의미 정도의 리뷰로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에필로그를 보니, 아무래도 속편이 나올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걸 하루빨리 보게 되기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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