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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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어쩌면 가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각의 링인 것만 같다. 
 크리스 휘타커의  소설, '나의 작은 무법자'를 읽으면서 내내 떠올린 이미지는 바로 그것이었다. 소설을 서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는 두 주역인, 어린 '더치스'와 서장 '워크'는 물론이고 과거의 죄로 인해 오랫동안 수인의 삶을 살았던 빈센트 킹과 더치스 가족의  커다란 위협으로 존재하는 '다크' 그리고 사랑을 잃고 그대로 낙망해 버려서 더치스에게 어린 시절이란 걸 잃게 만들었던 엄마 '스타'와 그녀의 아버지 '핼'까지도. 모두 내게는 저마다 각자의 링에서 오로지 홀로 삶과 힘겹게 분투하고 있는 복서(Boxer)로 보였다.

 과거에 마주한 비극 혹은 저지른 과오로 인하여 그들 모두가 상대하기가 만만하지 않은 불행과 혹독한 경기를 치르고 있었으나 그 중에서도 마치  권투에 갓 입문한 선수가 첫 상대로 세계챔피언을 만난 것과 같은, 난이도 높은 시합을 하고 있는 것은 단연 '더치스'였다. 비단 그녀가 가장 어려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과의 대전은 그래도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더치스의 것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녀가 자신의 작은 두 주먹만을 의지한 채로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불행의 주먹 세례를 연이어 받아야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출생이란 미명 아래 거기에 던져진 것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더치스는 태어나자마자 도처에 고난이 매설된 불행의 지뢰밭을 오직 혼자의 힘으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기나긴 궤적 위에 서도록 정해졌다. 하나뿐인 엄마는 자신의 고통에 허우적 대느라 의지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신뢰할만한 주위의 어른들이 있지도 않았다.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했기에 혼자서 자기 방어를 할 수밖에 없었던 더치스는 엄마 쪽 조상 중에 무법자가 있었다는 걸 알고난 뒤부터 이름 그대로 자신을 무법자로 규정하고서 거기에 맞춰 살아가려 한다. 그녀에게 무법자란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닥친 고난은 스스로 처리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되어야 했다. 자기와 똑같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더 어린 동생 로빈을 위해서라도.

 소설은 그러한 더치스의 여정을 세밀하게 구현한다. 그녀가 로빈을 지키기 위해서 시간이 갈수록 한층 더 매서워지는 불행이란 강타(強打)에 맞서서 어떻게 버티고 싸워나가는 지를 말이다. 그 강타라는 게, 겨우 찾은 보금자리를 단번에 허물어버릴만큼의 잔혹한 것이라서 난 더치스가 과연 다음 라운드는 버틸 수 있는지, 마음 졸여가며 읽어야 했다. 

 그러나 소설엔 더치스의 여정만 있지 않다. 그와 비슷한 분량으로 더치스가 사는 '케이프 헤이븐'의 치안을 책임지는 서장 '워크'의 여정도 존재한다. 

 워크의 여정은 주로 더치스에게 가장 커다란 불행이라 할 수 있는 엄마 '스타'의 살인 사건과 관련한 추적으로 형성된다. 난 이러한 소설의 구성이 흥미로웠다. 작가는 왜 각각 다른 인물이 주역이 되는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눠 소설을 빚어냈을까 궁금해진 것이다. 읽다보니, 더치스와 워크가 서로 다른 스타일로 불행이란 상대와 분전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어쩌면 바로 이 차이에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그 둘을 마치 대비해 보도록 구성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더치스와 워크의 싸움 방식은 다르다.

 이것은 작가가 주역의 이름으로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단순 명사인 이들의 이름은 그대로 그들이 불행을 대하는 근본 태도를 집약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무법자는 그와 싸우고, 워크(Walk : 원서도 실제 'Walk'로 표기되어 있다.)는 그 안에서 묵묵히 걷는다. 이름 그대로 둘은, 대하는 방식이 정말로 다르다. 타인에 대해서도, 닥친 난관에 대해서도. 더치스는 핼 외할아버지처럼 의지해야 하는 사람에게조차 맹수가 으르릉거리며 위협하듯이 상대의 폐부를 마구 후벼파는 가시 돋친 말만을 쏟아낸다. 반면 워크는 더치스 남매에게 행하듯, 친근하며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려 노력한다. 더치스는 의심과 증오부터 품지만, 워크는 오랜 친구였던 빈센트 킹에게 그러하듯이, 한 번 신뢰를 준 사람에 대해서는 그 미음을 여간해선 버리지 않는다.

 미국의 유명한 시인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불과 얼음'이란 시가 있는데, 난 그 제목이 이 둘과 참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언제든 누구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는 더치스는 그야말로 들끓는 용암과도 같은 불이며, 사람과 사건의 진실을 향해 차분하면서도 성실하게 조금씩 접근해가는 워크는 '바다 위를 느리게 흘러가는 유빙(流氷)'과 같은 얼음이라고 말이다.

 이토록 선명하게 대비되기에 난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여기엔 작가의 의도가 깔려있다고. 
 더구나 소설의 마지막에 가면 둘은 정말 대조되는 결말을 맞이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더치스가 그렇게 싸워야만 했던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간다. 그러나 작가는 묻는다. 계속해서 그런 방식을 고집해도 괜찮은 걸까? 거기에 작가가 부정적이라는 것은 소설 도처에서 나타난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결정적으로 가져다 준 계기는 바로 더치스의 무법자로서의 자세에 있었다. 더치스는 전혀 다른 삶의 색깔을 누려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도 순간의 격정을 참지 못하여 망치고는 언제나 뒤늦은 후회를 했다. 심지어 오해로 인해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를 해치고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던 동생과도 결별하게 된다. 더치스의 여정은 갈수록 파국이다. 그러니 작가가 이와 같은 싸움 방식을 권하고 있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워크의 여정은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사건의 진실에 유일하게 이르는 사람은 그이고 언제나 그리워하고 있던 옛사랑 마사 메이와도 다시 이어진다(소설은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으나 마사 메이는 워크에게 늘 두번재 기회를 줄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국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토머스 노블을 제외하고 워크만이 유일하게 타인으로부터 보살핌을 받게 된다는 것도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토머스 노블과 워크를 비슷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데, 더치스에게 헌신적인 토머스 노블은 한 쪽 손을 못 쓴다. 이와 똑같이 워크 또한 오른 손이 자주 떨린다. 그들은 타인을 대할 때 항상 그 손을 숨기는데, 그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은유라고도 볼 수 있다. 남들에게 쉽게 내비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고통을  더치스처럼 그들 역시 가지고 있다는걸 뜻하는. 
 그걸 하필이면 '손'으로 나타내는 것은 신체의 일부는 항상 자신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서, 포용하는 가운데 묵묵히 견뎌나간다는 것의 암시라고 볼 만하다. 작가는 이것을 노블(Noble)이란 이름으로 드러내듯이, '고귀한 태도'임을 내비친다.

 토마스 노블과 워크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행로를 단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인내' '변화의 수용'이다. 그들은 더치스라면 분노를 드러냈을 순간에 참는 것을 택한다. 그 인내를 바탕으로 먼저 마음을 열고 상대를 품으려 시도한다. 가시가 돋친 말로 자신의 갑주를 두르지 않고 말이다. 더치스에게 마지막으로 보살핌의 둥지가 되어주는 돌리 그러했듯이.

 그렇게 그들은 타인이 가져온 변화를 받아들인다. 타인을 격리시켜서라도 자신의 세계를 고집하려했던 더치스와 다르게. 
 이건 워크에게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래 워크는 누군가 주택 수리 신청을 해도 그걸 갖가지 이유의 이의 신청으로 무마시킬만큼 자신의 동네가 변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건을 추적하는 동안 점점 더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바뀌어 간다. 결국 그만이 사건의 진실을 오롯이 거머쥐게 되는 것도 인내를 초석으로 하는 관대함과 스스로 과거의 자신과 달라지려고 한, 상황에 대한 유연한 태도였다. 

 이는 같이 학창시절을 보낸 정육점 주인인 밀턴이나 브랜던 록과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성기라고 생각하는 과거에서 전혀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스타'의 옆집에 살고 있는데, 하나같이 '스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스타'는 이름처럼 학창시절 최고의 인기녀였고 그들에게 스타를 가진다는 것은 곧 과거의 자신으로 회귀한다는 걸 뜻했다. 어쩌면 더치스가 그토록 로빈을 지키는 것에 집착했던 동기도 이들이 스타에 집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른에게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여 평범한 어린 시절을 깡그리 잃어버린 로빈에게 자신의 헌신을 통하여 그걸 되찾아 줌으로써, 자신의 보호 아래에서 자신이 바랐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로빈을 지켜보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말이다. 그 밀턴이 법의 바깥에서 자신의 힘으로 정의를 관철하는 자경단에 천착한다는 점이 언제나 무법자로 자처하는 더치스와 비슷하기에 더욱 이들과 더치스의 유사성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밀턴의 최후는 과거에 완전히 잠겨버렸다는 것의 비유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혹여 더치스가 자신의 싸움 방식을 계속 고수했을 경우,  직면하게 되었을 마지막이라는 것을 작가가 암시하려고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소설의 원제는 'We begin at the end'이다. 적당히 끝을 시작의 새로운 계기로 여기라는 뜻 정도로 여기면 될 것 같다. 여기에 비추어, 이 소설이 가진 이채로운 구성과 서로 다른 성격의 여정 구현 방식 그리고 이름들의 대비와 인물들의 유사성을 감안한다면 결국 소설 전체는 제목에 뒤이어 따라 올, 필연적인 질문인 '어떻게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작가가 나름대로 제시하는  과정이지 않을까 한다. 소설 속 장면을 인용해서 말한다면, '좁은 감방에 갇혀있으면서도 200만 에이커의 자유를 품에 안는(p.556)법'을 말이다.

 삶에 배태된 불행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적든, 많든 사람은 다양한 불행을 마주하며 상처와 신음 속에서 무력감만 날로 더해가는 일상을 영위하기 십상이다. 누구라도 언제든 끝에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이 침잠하고 있는 화두는 나와 거리가 결코 멀지 않다. 언제든 나 또한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라도 빌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유비무환이라고 했던가? 그 때를 위해서라도 이 소설과의 동행을 통하여 내 나름의 대응 방식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고 부른다'는 로알 아문센의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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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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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품을 읽으면 난, 포만감이 든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흥미로우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으로만 이뤄진 만찬을 즐긴 기분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작품을 하나 만났다.


 바로 영국 작가  M.W 크레이븐의 데뷔작, ’퍼핏 쇼’. 


 만나게 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신뢰하는 골든대거 수상작. 다른 하나는 범행 방식. 이 소설의 연쇄살인마는 스톤 헨지를 일컫는 ‘환상열석’에서 자신의 잔혹한 범행을 전시한다. 그것도 방화로 태워죽인 시신을. 그리하여 작중에서는 이 연쇄살인마를 ‘이멀레이션(immolation) 맨’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특히나 후자가 내 눈길을 강하게 끌었는데, 그것은 지금껏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을 비롯하여 살해한 대상을 연극 무대처럼 드라마틱하게 전시하는 작품들을 수도없이 만났고 그것을 통하여 갖가지 방법을 봐왔지만 ‘퍼핏 쇼’ 같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소도 그렇고, 살해 대상에 대한 것도 그렇고. 그 기상천외함 때문에 이 작가가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갈 것인가 너무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치 이색적인 간판에 호기심이 생겨 무작정 식당 안으로 들어간 손님과 다를 바 없이 ‘퍼핏 쇼’를 펼치게 된 것이었다. 그랬다가 앞으로 단골이 되어도 좋을 아주 괜찮은 맛집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제법 운이 따랐던 것 같다.


 각설하고, 특히나 마음에 들었던 점부터 말해 보고 싶다. 그건 바로 연쇄살인이라는 스릴러와 주연 등장인물들 간의 로맨스를 아주 성공적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성공적’이라는 의미란, ‘퍼핏 쇼’가 추구하고 있는 주제에 맞게 그 둘을, DNA의 이중나선처럼 유기적으로 잘 맞물리게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런 질문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퍼핏 쇼’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나는 먼저 ‘연쇄살인마’란 존재에 집중하고 싶다.


 ‘연쇄살인마’란 어떤 존재인가? 여기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존 E 더글러스의 ‘마인드 헌터’다. 거기서 존 E 더글러스가 어쩌다 연쇄살인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는 가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연쇄살인마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기존의 어떠한 탐침으로도 가늠이 불가능한,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지닌, 단적으로 말하자면, 정체불명의 괴물(怪物)이었던 것이다. 그 ‘괴물’을 난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와 달리 표현하고 싶은데, 아마도 그렇게 하면  ‘타자(他者)’가 될 것이다. 이러면 다음과 같은 명제가 성립될 듯하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는 한 마디로 그 ‘타자’와의 대면이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래서 내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타자’를 마주 보게 하고 경험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비상식적이며 비인간적인 그들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유도하고, 내 경험과 이해가 닿지 않는 존재 자체로 혼돈과 불안을 조장한다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연쇄살인마라는 타자는 그 존재와 행위의 무지막지함으로 우리 존재를 압도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 하듯이 소설 속 ‘타자’를 쉽게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서 우리는 경마장에서 뛰는 경주마가 그러하듯, 오직 그것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굴러가는 실타래 아래의 가는 실처럼 얽매일 뿐이다. 이런 차원에서, 소설 속 연쇄살인마는 우리에게 현실에선 간단히 할 수 있었던 무시와 외면을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거부할 수 없는 응시와 중지할 수 없는 사유로, 눈앞에 도래한 연쇄살인마가 초래했던 사회 혹은 윤리적인 문제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대답할 - 그것은 굳이 언어로 표현하거나 종국적일 필요는 없다. 단지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겠다는 정도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다 - 의무를 초래하는 소환장에 비유할 수 있겠다. 


 나는 이 소환장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내 자의로 함부로 물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난 연쇄살인마가 개설한, 소설이라는 법정에 배심원으로 소환된 셈이다. 이제 나는 그것을 바라봐야 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태도를 결정해야 한다. 조금의 과장을 허락한다면, 연쇄살인마 소설은 이런 경험을 가득 선사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연쇄살인마에겐 단지 스릴러 소재로 소비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건 현실에서는 잘 경험할 수 없고, 행여나 한다고 해도 간단히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타자’라는 존재의 무게를, 비록 허구의 형식을 빌리기는 하여도 현저히 체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를 보는 것만큼이나 타자를 보듬어 안고 내내 주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중요한 통로인 것이다. 


 뭐, 그래도 허구이니까 재미 이상의 의미를 주는 건 억지 아닌가 하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경험의 영역에선, 허구와 실재가 별 차이를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니, 오히려 허구의 경험이 실재의 것을 압도할 때도 있다. 우리가 가진 기억만 되짚어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화나 소설에서 체험했던 것이 현실의 일상에서 겪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해 마음속에서 오래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소설의 경험으로 철학 혹은 사회윤리 문제를 음미한다고 하여도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M.W 크레이븐의 ‘퍼핏 쇼’은 정말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장치로 내가 말한 것을 체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단 ‘인형극’을 뜻하는 제목부터가 그렇고 유래가 없는 살인방식이 그러하다. 이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범죄의 강도 높은 잔인함과 참혹성은 분명 독자의 의식을 연쇄살인마에게 붙잡아 놓기 위해서라고, 난 감히 추정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잘 경험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들에게 의식의 빈방을 더 많이, 더 오래 내어주는 편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뿐만이 아니다. 지금부터 말 할 것이 내가 이 소설을 두고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부분이다. 나는 좀 전에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라는 존재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걸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짐 톰슨이 자신의 대표작, ‘내 안의 살인마’에서 했듯이 아예 연쇄살인마의 시점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하나가 되어 내면까지 충분히 들여다보는 것만큼 더 밀도 높은 경험은 없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독자는 오로지 수동적인 존재로 참여할 뿐이다. 대화의 참여자가 되기 보다는 길게 이어지기만 하는 살인마의 독백만 하염없이 듣는 청자로만 남을테니까 말이다. 더구나 스릴러의 재미도 떨어진다. 서스펜스도 덜하고 반전도 없을테니 말이다. 


 연쇄살인마에게 독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와 대화하려는 마음을 낳게 하는 것은 역시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흥미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 열망을 무한정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연쇄살인마와의 대면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스릴러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우리 일상 속 존재와 다를 바 없이 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없는, 나와는 절대적 거리를 가지고 있는 객체로 만든다. 우리는 그와 대화는 할 수 있어도 내면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타나게 된, 1인칭일 때보다 부족해진 경험의 밀도는 스릴러의 재미로 채워야 한다. 전개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재미로 독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이야기에 참여하도록 만들어 몰입이라는 형태로 밀도를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퍼핏 쇼’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흡인력이 대단하다. 지루한 부분이 거의 없다. 캐릭터들의 묘사는 생생하고 주연 커플이 빚어내는 앙상블도 흥미롭고 때로 흐뭇한 미소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거기다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되어 사건의 새로운 정황이 드러나는 것도 능수능란하게 이뤄진다. 놀라운 반전 또한 존재하고 앞에서 뿌려놓았던 떡밥들까지 모조리 회수해 버리니! 이건 뭐, 중반을 넘어가면 몰입하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범인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질 때까지, 거의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여정 내내 연쇄살인마에 대해 생각을 단 한 순간도 멈추기가 어렵다. 그야말로 작가는 연쇄살인마라는 거대한 수영장 속에 독자를 던져넣어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1인칭 시점을 사용하거나 기교를 빌리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라는 스릴러의 근본 도구로만 1인칭 시점으로 읽을 때와 별 차이 없는 경험을 하게끔 만들고 있으니, 이 작품에 ‘뛰어나다’라는 표현을 써도 넘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이 진정 타자의 경험에 우리를 강도 높게 묶고자 한다면 남녀 주연 캐릭터들의 로맨스는 어떻게 된 것인가? ‘퍼핏 쇼’가 세공하고자 하는 어둠과 결이 너무나 달라보이는 로맨스는 오히려 그 매듭을 풀어버리는 형국이 아닌가?

 

 이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퍼핏 쇼’는 두 개의 차축이 중핵이 되어 움직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당연히 ‘이멀레이션 맨’의 추적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보기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알콩달콩해 보이는, 로맨스다.


 이 둘은 소설 속에서 함께 간다. 두 개의 차축이라 말한 것은 그래서다. 그만큼 작가는 ‘이멀레이션 맨’에 대한 것 못지 않게 이 둘의 로맨스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저 작품의 흥행을 위한 요소가 아니다. 주제를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 그런 것이다.


 하지만‘이멀레이션 맨’ 이야기와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로맨스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 그들은 배척의 관계가 아닌, 협력의 관계다. 서로 조력하여 ‘타자’의 경험 속에서 ‘타자’에 대한 제대로 된 윤리적 태도를 배양하려는 ‘퍼핏 쇼’의 주제를 위해 함께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내 글을 읽고 있는 상상 속 독자가 바로 이렇게 묻는 듯하다. '그게 가능하다고, 어떻게?'


 가능하다. 내가 그것을 위해 제시하고 싶은 것은 연쇄살인마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공교롭게도 존재하는 공통점이다. 바로 앞서 언급했던 ‘절대적 타자의 경험'. 이것이다.


 우리는 연쇄살인마에게서 예고 없이 습격받듯이, 사랑 또한 느닷없이 엄습하는 것을 체험한다. 내게로 다가오는 연쇄살인마에게 눈을 뗄 수 없듯이,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도저히 눈을 거둘 수 없는 자신을 느낀다. 연쇄살인마와 동일하게 연인이란 존재 또한 어느새 우리를 압도하고 우리의 모든 시건과 상념을 마치 태양계 중심에 군림하는 항성처럼 그 외곽의 궤도로만 공전하도록 만든다. 더구나 한번 포획되고 나면 쉽사리 거부하거나 달아날 수 없는 것도 닮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내가 주관하는 우주 속으로 편입할 수 없고 오직 허용되는 것은 대등한 수준의 공존뿐이며 그런 관계조차도 타자의 협력을 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쇄살인마와 연인 모두 알고보면 내 힘이 미치지 못하는 대양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타자’라는 대양 안에서 표류 중인 것이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나는 작가가 서로에게 차츰 애정을 느껴가는 두 캐릭터를 이 소설에 빚어냈을 것이라 본다. ‘이멀레이션 맨’과 똑같이 독자에게 ‘타자’와 제대로 대면시키도록.


 그건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초반에 인식할 때, 무엇보다 서로 얼른 헤아리기 힘든 존재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따지고 보면, 워싱턴 포에게 있어 틸리 브래드쇼란 존재는 그가 추적해야 하는 ‘이멀레이션 맨’과 그리 다르지 않다. 둘 다, 존재도 사는 방식도 모두 수수께끼인 존재들이니까.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사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고를 헤쳐왔다. 워싱턴 포가 심리를 중시한 감성에 보다 가까이 서 있다면 틸리 브래드쇼는 수학에 기반한 이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워싱턴 포가 발로 뛰어다니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을 대면하는 존재라면 틸리 브래드쇼는 홀로 격리된 장소에서 오직 데이터만 상대하기를 바라는 존재다. 물과 기름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이렇게나 다르고 서로에게 진정 낯선 존재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연쇄살인마에게 가까이 접근해 갈수록 서로에게도 다가가게 된다. 연쇄살인마의 정체가 한꺼풀씩 벗겨 때마다 그들 또한 서로의 존재와 상황에 대해 헤아림의 지평이 넓어지게 된다. 맞다. 작가는 이 둘, 그러니까 연쇄살인마의 추적과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 사이에 이뤄지는 애정의 진척도를 병행시키고 있다. 그것도 비례관계로. 


 그러면서 서서히 연쇄살인마와 사랑이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부각시킨다. 연쇄살인마는 자신이 알았어야 할 진정한 진실들을 알려주는 존재였다. 사랑은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기존의 자신을 바꾸는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존재였다. 그러니 우리는 작품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주제라고 할 만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나와 다르고 이해가 불가능한 타자라고 하여도 쉽게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됨을. 그럴수록 더 응시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더 헤아리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에 이르러 나는 주제와 관련하여 앞서 제기한 질문에 비로소 대답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퍼핏 쇼’의 주제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소설 후반은 이러한 태도와 노력이 얼마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워싱턴 포가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진실은 물론이고 오래도록 묻혀있었던, 차마 입 밖에 내기도 힘든 비극적 사건의 진정한 내막까지 모두 밝혀지니까 말이다. 사건만이 아니다.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 둘 다 척박한 현실 한 가운데서 늘 홀로 분투하느라 하나쯤 있었으면 했을, 의지할 만한 둥지를 찾게되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골몰해 있었다면 사건의 진실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는데, 타자와의 대면을 회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마주 보며 같은 눈높이에서 헤아리려 노력한 결과, 그 둘 모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찌 이로써 책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은 한층 더 또렷해지는 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만하면 내가 왜 이 소설에서 포만감을 한껏 느꼈을 지에 관해 설명이 어느 정도 됐을 것 같다.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퍼핏 쇼’는 오늘날의 영국 현실을 감안하면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이 소설은 2018년에 발표되었는데, 아시는 바와 같이 그 2년 후인 2020년, 영국은 투표를 통하여 ‘브렉시트’를 감행했다. 그 결과,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얼마 전의 뉴스는 영국 대중이 압도적으로 브렉시트 철회를 원하고 있음을 알렸다.


 ‘퍼핏 쇼’가 들려주려 했던 대로 영국의 많은 이들이 타자를 무시하거나 적대하지 않고 워싱턴 포와 틸리 브래드쇼가 서로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성을 먼저 허물고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리려 노력했다면, 현재 엄청난 후회로 남은 ‘브렉시트’는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의 사례도 있으니 ‘퍼핏 쇼’가 전하고자 하는 말을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작금의 한국 현실 또한 브렉시트를 초래한 영국의 상황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문득 ‘작가가 왜 제목을 ‘퍼핏 쇼’라고 했을까?’에 생각이 미친다. ‘퍼핏 쇼’가 뜻하는 ‘인형극’은 줄에 매달린 인형들로 펼쳐진다. 그러고 보니 소설 속 주요 인물들은 저마다 매달고 있는 줄이 하나씩 있었다. ‘이멀레이션  맨'도 그렇고, 그에게 희생된 자들도 그렇고, 워싱턴 포도 그렇고, 틸리 브래드쇼도 그렇고. 그건 남들에게 쉽게 내어보일 수 없는 어둠이었다. 모두를 자기만의 골방 속에다 유폐시켜 버리는 어둠. 그 어둠에 지배 당하여 그들은 어둠이 이끄는 쪽으로 걸어 가 인간을 포기하고 인형이 되었다. 하지만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어둠에 지배당하는 것을 멈추고, 스스로 줄을 끊어버려 인형이 되기를 그만둔 이들도 있었다. 어둠이 삶의 주인으로 내버려 둔 인형에서 스스로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된 인간으로 거듭난 이들이 말이다. 


 이제보니 소설 전체는 작가가 그렇게 인간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정녕 인간일까, 인형일까? 인형이라면 현재 내 목을 감고 있는 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기적인 욕망에 충실하여 타자의 삶을 함부로 짓밟아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이들이 점점 더 만연해가는 가운데 그들과 닮은 인형이 아니라 그들마저 태워버릴 바람직한 인간으로 남는 길은 정녕 무엇일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참에 제대로 한 번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핏 쇼’를 초롱불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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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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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엘리자베스 문이라는 이름은. 나는 그 이름을 '어둠의 속도'란 책으로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2002년에 발간 되었을 때. SF 팬덤 사이에서 신선하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이 하나 나왔다고 떠들썩해서 만나게 된 작품이었다. 벌써 거의 20년 전에 읽은 것이라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래도 자폐아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들이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 살짝 엿보는 것 같았던 기분은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문은 그런 작가였다. 자폐가 정말 꼭 치료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도록 이끌었듯이, 타자의 입장에서 타자의 내면과 동조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작가. 그렇게 하여 기존의 나라는 한계에 갇혀 전혀 보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거기서 훌쩍 벗어나, 너머를 보고 헤아리도록 하여 더 넓은 범주에서 나와 타자를 가늠하도록 하는 것으로 내적인 성장을 가져다 주는 작가였다. 그런 작가이기에 그녀의 새로운 소설이 이번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손에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작품의 제목은 '잔류 인구'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이다. 노년의 여성, '오필리아'는 '심프스 뱅코프 콜로니'라는 한 식민지 행성에서 회사 소속이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개척민으로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에서 막 도착한 함대가 정체 불명의 외계인들에게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하자 컴퍼니는 식민지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다들 함선에 올라 극저온 수면 장치에 들어가 동면한 채로 이주할 것을 명렴 받았지만 할머니 오필리어는 그 장치에서 살아남을지 확신할 수 없어서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모두가 떠나버린 그 곳에서 자의로 '잔류 인구'가 된다. 하지만 그 별에 존재하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잔류 인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별에서 원래 살았던 원주민들. 그녀는 그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 유대 관계를 형성한다. 오필리아는 마침내 그들에게 존경 받는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데, 그러다 다시 지구에서 다시 사람들이 온다. 그들은 원주민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접촉하려 하는데, 군인과 과학자인 그들은 오필리아의 말에 전혀 귀기 울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오필리아는 단지 쓸모없는 할머니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원래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다. 그녀는 햄릿의 연인이었지만 햄릿이 만든 사건 앞에서 주체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오필리아는 다르다. 결말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가르쳐 주니까 말이다.


(초판본 표지}



 노년은 효용성을 점점 더 중요하게 따지는 지금 사회에서 가장 그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령화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게 가장 뚜렷한 증거다. 예전엔 노년이 그 때까지 살면서 체득한 지식과 정보를 아주 중요한 정보로 간주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경로사상은 바로 그것의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경험과 지식은 '꼰대'로 취급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옛것은 쉽게 도태되고 새것은 과장되게 환영받는 세태에서 '잔류 인구'는 참으로 여러가지 것들을 생각나게 만든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쳐든다'를 썼던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들의 기록은 남성중심사회에서 자주 보존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그것들 대부분은 살아있는 할머니의 기억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그렇게 무시되고 버려져서 기록할 수 없었던 기억의 태피스트리를 짜는 것이 오늘날 여성 운동의 목표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잔류 인구' 또한 그 흐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쓸모'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다. 그건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점에서 바라 본, 그것도 잠정적인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도 요즘은 사람을 쉽게 규정하고 가치 또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 점점 더 횡행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문의 '잔류 인구'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경향인지 아주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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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8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이 소설 리뷰가 종종 올라와서 호기심 업 시키네요^^

오드득 2021-11-18 21:5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의 엘리자베스 문의 신작이라 다들 많이 기다렸나 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작가인지라 이번 작품이 무척 반가웠어요^^

2021-12-16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25 0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뭇잎처럼 2023-03-0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게 보긴 하였지만 헉슬리 책 때문에 여기까지 왔네요. 쓰신 글 보고 무작정 읽고 싶어졌습니다.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꾸욱.
 
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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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독일을 휩쓴 파시즘의 매혹과 그것에 대항하여 희망을 재건하는 휴머니즘을 두 여성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조명하는, 묵직하면서도 강렬해 그 여운이 오래 남는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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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의 섬 JGB 걸작선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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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 밸라드의 팬들이여 기뻐하시길! 드디어 '콘크리트의 섬'이 발간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크래시' 그리고 '하이 라이즈'와 더불어 도심 재난 3부작을 이루고 있는 의미 깊은 작품이지만 지금껏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아 여간 궁금했던 책이 아닌데, 드디어 우리들 눈 앞으로 당도한 것이다. 꽤 마음에 드는 표지와 함께. '콘크리트의 섬'은 여러모로 우리나라 영화 '김씨 표류기'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그 영화가 도저히 표류자가 생길 것 같지 않는 서울의 한강에서 표류되어 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듯이 이 소설 또한 고속도로 사이에 있는 교통섬에 우연히 갇혀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로빈슨 크루소의 후예들이다. 바다 저 멀리 있는 섬이 아니라 도시 한 가운데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만 다를 뿐




. 이런 일이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인다. 그만큼 발라드가 현실감 넘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발라드의 소설답게 한 번 그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놀라운 몰입력으로 끝까지 내처 읽게 만든다. 주인공은 로버트 메이틀랜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성공한 건축가인 그는 운전 도중 과속으로 교통 사고를 일으키고 교통섬에 고립된다. 주위엔 차들로 가득하지만 그의 구조 요청엔 아무도 응답하지 않는다. 바로 지척에 안온한 일상을 두고도 가지 못하며 참혹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 커다란 절망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곧 거기에 자기 혼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자신처럼 교통섬에 고립되어 살아가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는데도 거기에 머무르는 걸 선택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와 규칙으로 살고 있다. 메이틀랜드는 차츰 그 공동체에 적응해 간다. 그러면서 전보다 훨씬 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그랬듯이. 그 역시 거기 있는 다른 이들처럼 그렇게 지내는 것에 매력을 느껴 머무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지만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생각하여 빠져나갈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 과연 그에게 탈출할 기회는 찾아올까? 소설은 열린 결말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콘크리트의 섬'은 문명 비판을 담고 있다. 인간은 무자비한 자연 앞에서 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명을 만들어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문명에 너무 의존하느라 오히려 더 약해져버렸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메이틀랜드의 곤경은 문명의 발전 속에서 오히려 더 소외되기만 하는 인간 보편의 운명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은 장면을 매개로 문명과 격리된 교통섬의 공간으로 삽입되게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인간의 진정한 성장이 문명의 안에선 불가능하다는 뜻일까? 어쨌든 메이틀랜드는 야만의 영역이라 해도 무방한 교통섬에서 전보다 더 강한 인간이 되는 건 사실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를 현대 문명에 빗대어 새롭게 써내려 간 '콘크리트의 섬'은 이처럼 찾아낼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어 더욱 연거푸 읽게 되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왜 여전히 J. G 밸라드의 팬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원서 초판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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