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SHOW MUST GO ON....

 

  삶이 비극이라면 그건 어쩌면 머물지 못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뭐, 이것은 소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비로소 도달한 행복의 절정에서 꼭 듣게 되는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순간, 꼭 연인 중 하나는 마치 속삭이듯 이렇게 되뇌이죠. "이대로 시간이 멈춰지면 좋겠다..."고.

 

  사실 이것은 비단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들만의 대사는 아니죠. 우리도 살면서 한껏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며 삶이 딱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영원히 결빙시키고 싶죠. 왜 우리는 이런 말을 되뇌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삶이 저 시간의 비탈을 굴러가기 시작하면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뾰족한 자갈돌과 진창으로 지금 느끼는 행복감이 이내 썰물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죠. 이 삶이란 가파른 비탈 길은 부드러운 잔디밭 보다는 자갈밭과 진창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행복과 평안이란 것도 정말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문에 마주한 행복의 순간을 우리는 정말 '비로소'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말 힘들게 찾은만큼 다시는 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 순간을 더욱 영원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런 대사, 그런 생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한 순간 혹은 기념할만한 순간을 꼭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이러한 결빙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요.

 

 

  COCOON UTOPIA...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는 자라나는 걸 싫어하는 거라고.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로 바라고 바라는 것은 태초에 내가 있었던 곳, 그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라고 말이죠. 내가 태어(胎魚)가 되어 머물던 어머니의 자궁이야 말로 정말은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인 셈이죠. 아니나 다를까 이건 원래 유토피아의 원초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토피아를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는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초원이 그들이 그렸던 유토피아의 모습이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태아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다름아니라고. 

 

 

  FIRST CRACK...

 

  그렇게 인간이 가진 욕망의 본질적 모습은 어쩌면 영원히 삶을 '모라토리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가 이러한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각인된 세상에 나온 그 최초의 기억이 바로 '추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써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가, 저 내부의 어디에선가로 부터 전해져 오는 힘에 억지로 떠밀렸거나 혹은 갑자기 천장이 열리면서 처음 보는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빛과 함께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격리되어 세상에 나왔죠. 우리의 자발적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전적인 추방이었고, 더 이상 양수의 보호를 받지 못한 우리의 연약한 피부가 처음으로 감지했던 건 차디찬 세상의 냉기였기에 또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한 유토피아로 부터 삶으로 나왔지만 그 첫 대면의 순간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죠. 그리고 내내 갑작스런 추방으로 인한 두려움, 안에 있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각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성장이 삶의 다음 순간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라면 그렇게 우리가 받은 성장에 대한 첫 인상은 절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울음은 당연했어요. 영원한 상실의 통감이었고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의 절절한 표현으로써의 울음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힘들면 힘들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막연히 떠올리게 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는 본질적으로 태아적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게 그건 사실 우리 욕망이 아니라 우리 그리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어요. 태초에 내가 있었던 그 '코쿤'에 대한 그리움. 우리가 행복 절정의 순간 멈추고 싶어 하는 것도 비로소 그 '코쿤'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드디어 왔어. 이제 나를 내몰지 말아줘.' 사실은 이런 말이겠지요.

 

  성장이란 우리를 저 사르갓소로 내모는 밀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뭐라도 붙잡고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삶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게 하고 가족을 가지게 하고 책임이란 짐을 두 어깨에 올려 놓습니다. 정말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렇게 내가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에 결빙되는 것이지만 이미 그건 잠시의 꿈으로만 맛볼 수 있는 머나먼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움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감정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그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한 번 누렸으나 이제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사무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을...

 

 

  ONCE AGAIN, KNOCKING ON HEAVEN'S DOOR...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위와 같은 문구가 될 것입니다. 네, 이 소설은 저도 모르게 앞에서 주절주절 말해버린 그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중요한 공간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인공의 과거에 관련된 '장미정원'이고 또 하나는 현재에 관련된 '가합동'입니다. 이야기는 이 두 공간을 중심으로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그렇게 이응준은 주인공 문하가 어떻게 가합동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장미정원'을 통해 이야기하고 또 어떻게 가합동을 떠나게 되었는지 '가합동'을 통해 이야기 합니다. 이 두 공간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주인공 문하에게 있어 앞서 말한 '코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거긴 태풍의 눈, 회전하는 팽이의 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일종의 정점. '이대로 죽어도 좋아'를 외칠 수 있는 공간. 문하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곳. 즉 어머니의 자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뿌리를 내립니다. 그를 단단히 받쳐줄 지지대가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미정원에 있어서는 배다른 형인 인하가, 가합동에 있어서는 박학다식한 거구의 산타페가 존재합니다. 문하는 거기에 기생합니다. 그는 달이 되어 장미정원에서는 인하의 궤도를 돌고 가합동에서는 산타페의 궤도를 돕니다. 그렇게 문하는 세계를 보는 방법과 이해하는 방법을 인하를 통해 배우고 세계와 마주하는 방법을 산타페를 통해 배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똑같은 건 아닙니다.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도는 항성 때문이 아니라 문하 자체가 이미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문하가 가합동으로 왔을 때 그는 최초의 균열을 겪은 태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인하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장미정원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창세기의 아담과도 비슷합니다. 그 때 금지된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듯 문하는 금기된 상황을 목격하고는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확 넓혀져버리니까요. 어쩌면 아담의 이야기 자체가 태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은유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문하는 성장에 따르는 고통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찾아온 곳이 바로 '가합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정원'이 자연적 코쿤이라면 '가합동'은 인위적 코쿤입니다. 다시 한 번 장미정원을 만들고픈 그의 욕망이 다다르게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차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하에겐 이미 더 이상 그런 곳이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구현된 장소 그 곳이 바로 가합동의 '하늘밥도둑'의 공간이며 그 구현된 인물이 '산타페' '물귀신' '미저리' '수인' 입니다.

 

 

   HAUNTED...

 

  이응준은 '하늘밥도둑'을 꿈결처럼 모호한 그래서 다소 비현실적은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거기는 내내 음악이 흐르는데 그 소리의 간섭으로 인해 공간이 가진 물리력이 자주 지워집니다. 더구나 손님도 거의 없고 도대체 산타페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는지 정확한 설명도 없습니다. 산타페는 별 이유도 없이 문하를 아끼고 문하 역시 그 애정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합동에서 모든 설정과 인물들은 마치 유령의 느닷없는 출몰처럼 툭툭 던져집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저리'를 만나게 되고 '물귀신'을 조우하게 되며 '수인'과 밥을 먹게 됩니다. '산타페'와의 첫 대면도 별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입니다. 이 상황을 이응준도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에서 운명과 우연이 뭐가 다르겠느냐고 말하죠. 가합동은 그런 공간입니다. 모든 우연이 허용되는 꿈같은 공간. 분위기는 흡사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적막한 공동 묘지를 보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이 주인공 문하를 비롯하여 다들 유령같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저리' '물귀신' '수인'은 툭 던져진 우연만큼이나 작위적인 존재들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이들은 마치 햄릿 앞에 나타난 아버지 유령과도 같습니다. 문하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거지요. 그들은 때로 침묵하고 때로 수다스럽지만 사실은 이렇게 쓰인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길 떠나라. 또 하나의 장미정원은 더 이상 없으니....

 

  그러니까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문하의 분신들이었으며 사실은 더 이상 장미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문하의 무의식이 자신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 불러낸 유령들이라는 것을 말이죠. 때문에 '가합동'의 공간이, 특히 그 '하늘밥도둑'이 비현실성으로 넘쳐났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 곳이 모두 마치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문하 의식 속에나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기에 정말 영원히 머무르려 했습니다. 그건 가합동에서 매일 같이 지내게 되는 인물이 가진 '산타페'라는 이름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산타페'는 번역하면, HOLY FAITH. 즉 성스러운 믿음이란 뜻입니다. 산타페란 이름은 문하가 가진 욕망의 투영이었습니다. 그는 그 정도로 다시 한번 그 장미정원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한 번 세상 밖으로 나온 태아가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그렇게 삶이란 비탈을 굴려내려간 이상 다시 그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공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들에게 불가능하니까요. 아담도 에덴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듯이 말이죠.

 

 인하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인하형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있는 것은 다만 작별뿐이라는 것을. 가합동의 공간과 인물은 모두 그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는 죽음으로, 하나는 미스터리한 영상으로 또 하나는 고백으로 문하가 왜 그 곳을 떠나야 하는지 알려주고 사라집니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같이 말이죠.

 

 

  LIKE GIRL IN THE RED SHOES...

  BUT, TRY TO HOLD ON...

 

  두 번의 추방, 두 번의 실패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영원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우리는 한 발 한 발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억울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어쩐지 긍정이라기 보다는 체념에 가깝다구요? 네,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느낀 것도 체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이 우리의 본질인 것을. 한 번 비탈길에 들어선 이상 한없이 굴러갈 수 밖에 없는 공과 같은 존재인 것을. 삶이 우리의 선택사항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삶은 비극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 동화 속에 나오는 분홍신을 신은 존재와 같아요. 그 이야기가 그토록 슬펐던 이유도 바로 그녀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들리면 무조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그녀처럼 우리도 한 번 어머니의 자궁 바깥으로 나온 이상 영원히 그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며 상실감과 외로움 속에서 삶이란 'SHOW'를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더구나 음악을 가릴 수 없는 그녀처럼 스스로 장르를 선택할 수도 없는 'SHOW'를 말이죠.

 

  제가 이 소설을 좋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이 아무런 섣부른 희망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충치를 낳게 만드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소설은 우리 삶의 본질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우리가 체념 속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진실 말이죠. 그저 견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정직하게 말해주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제목인 '느릅나무 아래 숨은 천국'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생각해보면 느릅나무는 땅 가까이 내려오는 가지들로 인해 왠지 축 저친 어깨를 연상시키고 그래서 얼른 하늘을 힘겹게 이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나무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렇게 모습 자체로 견딤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느릅나무가 아닐까 싶어요. 이응준은 바로 그 아래 천국이 숨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난 뒤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가에 머금게 될 한숨에 대한 위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그 견딤 자체만으로도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소설에서 산타페가 문하를 위로하고 격려했듯 그렇게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고자 함이겠죠. 작가 후기에 스스로도 이 작품을 앞으로의 문학 생애에 있어 벼리로 삼고 있는 걸 보면 그저 저만의 망상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런 소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문득 자신에게 신겨있는 분홍신을 보게 만들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 신으로 인해 아픈 발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어떤 걸 보게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한 상실과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을 같이 안고 살아가는 동지로서 왠지 이 말만은 해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모든 걸음에 건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라하의 묘지 1,2]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라하의 묘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 봅니다.

 사실은 테리 이글턴의 '보이지 않는 것의 날인'이란 책에서 읽은 문구입니다.

그건 거기 실린 한 챕터의 제목인데요, 바로 이것입니다.

 

 "이탈리아는 없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그냥 수사학적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말 같기도 해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란, 거기에 살고 있거나 직접 가본 사람은 빼고, 그저 텍스트로 만나본 이탈리아 밖에는 없으니까요. 책이든, 사진이든, 영화를 막론하고 말이죠. 네, 우리가 만나는 이탈리아는 어디까지나 그 매체가 무엇이든 누군가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따지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란 순전히 텍스트 위에만 존재하는 환영적 대체물이나 다름없는 것이죠. 진짜 이탈리아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직접 가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설령 진짜 이탈리아를 간다고 해도 이탈리아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죠. 정말은 다만 '확인'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가 익히 보고 들었던 그렇게 집적된 수많은 정보들의 확인. 그동안 글이나 사진으로 만났던 것의 실체를 확인하는 정도겠죠. 그것이 바로 실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매개로 알게 된 '이탈리아'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뿐이니까요. 쉽게 말하면 그가 정답인지 아닌지 답안지를 확인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관광이 이내 식상해지고 별 재미없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나만의 진짜 이탈리아는 만나볼 수 없으며 끝내 체념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건 나는 도저히 '텍스트화된' 이탈리아로 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뿐이니까요. 그래서 관광객들은 어디를 가든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사진 찍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무의식적으로 실재(the real)을 만나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도달한 실재마저도 온전히 내것이 될 수 없다는 질투심(아시다시피 질투심은 내 무력함의 다른 표현입니다.)에 서둘러 또 다른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해서 찍은 사진은 바로 내가 매개한, 나만의 텍스트가 되니까 말이죠.

 

 '이탈리아는 없다'라는 말은 우리가 사실은 모조리 텍스트화된 상황으로 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또한 실재와 환영,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자아도, 가치관도, 취향도 모두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의해 매개된 구성물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나요? 그저 모든 것이 혼재된 뒤죽박죽의 텍스트 덩어리 말고는...

 

 움베르토 에코의 전작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이 그랬죠. 주인공은 처음부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사고로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참 두뇌는 이상하기도 해요, 자신이 읽은 것만은 오롯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영혼은 한 치 앞도 헤아리기 어려운 안개 속인데도 언젠가 읽었던 소설이나 시와 같은 이런 텍스트들만은 갓 잡은 활어처럼 뇌리에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유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추리하며 누더기가 된 자아를 기워나갑니다. 뭐가 진실인지는 당연 몰라요. 사실 인간이 텍스트 너머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저 그런 텍스트가 만든 한계 안에서 최대한 근사치에 가까운 진실을 붙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바라 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였다는 것이죠.

 

  이는 그 전작 '바우돌리오'와는 또 어떻게 연결될까요? 사실 이 바우돌리오는 '프라하의 묘지'의 주인공 시모니니의 원조격인 인물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한창 벌어지는 시기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바우돌리오는 자서전을 써 나갑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골의 무지렁이 농부의 헛것이 보이는 모자란 자식에 불과했던 바우돌리오는 그 문서에서 놀랍게도 당시 유럽에 있었던 모든 중요한 역사적 사건마다 개입하여 사실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내었음을 밝힙니다. 실제 인물들과 실제 역사적 사건들이 교묘하게 엮이어 있어 읽는 이는 얼른 바우돌리오의 말이 과연 진실인지 거짓인지 분간해낼 수 없습니다. 바우돌리오의 서술은 너무도 능숙해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소설임을 얼른 잊는다면 완전 진짜 사실처럼 들리니까요. 더구나 중세 역사하면 또 움베르토 에코 아니겠습니까? 완벽하게 재현된 거기서 '이건 가짜야'하고 우리가 찾아내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따르죠.

 

  하지만 또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쓴, 그렇게 텍스트화된 역사 뿐이고 정말은 그것과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진짜 역사는 바우돌리오의 말대로였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소설과 역사가 그리 잘 구분될 수 있을까요? 만일 이 지구에 다시금 진시황의 분서갱유 같은 일이 일어나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책이 다 사라지고 오로지 바우돌리오만 남게 된다면 그 후의 사람들은 바우돌리오를 유일하게 중세 역사를 설명하는 역사서로 믿는 것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와 똑같이 우리가 철썩같이 믿고 있는 중세 역사서가 사실은 그 때도 움베르토 에코 같은 이가 있어 당시 사람들을 재밌게 하려고 쓴 소설일지 모르고 말이죠. 정말 누가 알겠어요? 그 역사서가 쓰여진 그 때 그 시간으로 가서 목격하지 않는 한, 과연 누가 소설과 역사를 딱 구분해낼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더없이 확인하게 되는 겁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바우돌리오' 이후 '프라하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그건 이것입니다. 실재와 환영의 경계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과 역사가 분리될 수 없듯이 진실과 허위의 경계 따위도 없습니다.  아니 문제는 그걸 구분할 수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더욱 인식해야 할 확실한 사실은 오로지 이것.

 

우리에겐 오로지 '텍스트' 밖에는 없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텍스트들로 교직된 세계를 걸어가는 또 하나의 '워킹 텍스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프라하의 묘지'는 그런 노선을 취한 것입니다.

  이 소설은 히틀러로 하여금 '아우슈비츠'를 만들어서라도 유태인 말살을 결심하게 만든 문건, 지금까지 많은 반유대주의에게 정당성을 가지게 해 준 문건, 분명히 하나의 텍스트로 실재하는 문건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과 사실은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소설입니다. 소설의 주된 내용은 이렇습니다. 문서 위조에 능숙한 재능을 가진 시모니니가 어떻게 해서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이란 위조 문서를 만들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말하자면 그 기원을 제대로 밣혀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의 허위성을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니까 텍스트에 텍스트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에게 있어선 이것이야 말로 가장 제대로 된 대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텍스트의, 텍스트에 의한, 텍스트를 위한, 워킹 텍스트들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이 소설은 소설이라 부르기에도 좀 애매합니다. 여기서 에코에 의해 순수하게 창조된 인물은 오직 단 하나 주인공 시모니니 밖에는 없기 때문이죠. 나머진 다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서라는 텍스트에 기재된 사항이라는 것이죠. 에코는 당시의 문헌, 신문, 역사서나 회고록 혹은 전기에 나와있는 인물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이 90%, 허위가 10%입니다. 참으로 역사 르뽀와 소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과 같은 19세기에 유행한 대중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멩이는 실재인데(물론 어디까지나 텍스트 상으로만) 껍질은 허위인 것이죠. 더구나 번역자의 후기를 보면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19세기적 대중 소설의 문체로 번역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에코는 독자들이 무엇보다 옛 소설의 형태로 받아들이기 원했습니다. 진실이지만 허위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원한 것이죠. 왜 이렇게 했을까? 단순히 옛 소설에 대한 향수나 느끼면서 느긋하게 읽을 수 있도록 한 배려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제가 느끼는 움베르토 에코는 그리 친절한 작가는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쓴 이유는 제 생각입니다면 역시 하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건 '있는 것은 다만 오로지 텍스트 뿐이다'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죠.

 

 이러한 역사와 소설의 모순된 뒤틀림은 사실 앞서도 말했듯 역사와 소설, 진실과 거짓, 실재와 환영을 그리 쉽게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에 다름 아니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텍스트들 뿐이며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겐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텍스트의 중력으로 가득한 '이벤트 호라이즌'을 홀연히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날개가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완전한 실재 혹은 진리가 내뿜는 압도적 열기에 바로 흐물거리며 녹아버릴 밀랍으로 된 이카루스의 날개 뿐이겠죠.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하나의 윤리적 태도를 요청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것이 텍스트 밖에 없으며 우리 존재의 진실은 다만 '워킹 텍스트'라는 자각을 가진다면 필연적으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건 쉽게 말해 겸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믿는 것이, 혹은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완벽한 진실이 아님을 아는 것. 그렇게 나란 존재는, 내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취향까지도 모두 실재와 환영이 뒤섞인, 진짜와 가짜가 마구잡이로 혼재된, 본래와 이식된 것이 아메바처럼 융합되어 있는, 잡탕찌개임을 아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음모론의 계보를 거꾸로 거슬러 훑는 이 소설이 우리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의 이와 같은 부분에서 이 책이 왜 그와 같은 태도를 요청하는지는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왜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는가?(그렇게 엄청난 행운은 고사하고 그저 소박한 바람이라도 이룰 수 있으면 좋으련만 왜 나는 그마저도 얻지 못하는가?)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도 내리는 복이 왜 나한테는 오지 않는가? 사람이 불행한 것은 그 자신이 무능한 탓도 있으련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을 불행하게 만든 죄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뒤마는 욕구 불만에 빠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실패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천둥산 꼭대기에서 열린 모임에서 어떤 무리가 그대의 몰락을 계획했다는 식으로...

 

  따지고 보면 뒤마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았다.(...) 바로 그 점에 비추어 나는 그 시절에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저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 음모론의 보편적 형식이 빛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P. 146 ~ 147)

 

 

 

  시모네 시모니니는 프라하의 묘지에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유태인을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태인을 증오했습니다. 그가 그랬던 이유는 할아버지의 증오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죠. 우리의 증오란 그러합니다. 대부분 사실은 모두 매개된 텍스트에 불과한데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직접 느끼고 경험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감각하고 경험한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조차 사실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형식을 매개해서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해석한, 정해진 규칙으로서의 '말'을 알 뿐입니다. 당신이 보는 색깔도 마찬가지죠. 세상에 진짜 빨강이 있을까요? 아니 아예 우리 세계에 색깔이 있을까요? 완전히 독립된 실재로서 존재하는 색깔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은 우리가 모두 알지 않나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색깔이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색깔이란 빛에 의해 덧칠해진 시각적 정보를 우리의 두뇌가 해석한 영상일 뿐인 것을. 어디까지나 진짜 색깔이 아닌 매개에 의한 하나의 텍스트 뿐인 것을. 사실은 개야말로 진실된 세상의 색깔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은 무채색의 세상인데 우리가 멋대로 색깔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게 정밀히 따지고 든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정말로 텍스트 뿐입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에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로 '말'이 있다는 사실 자체다'라고 말했죠. 벗어날 수도,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의 주된 소재이기도 한 '안개'야 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며 세상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바로 그래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재하는 프라하의 묘지입니다. 이렇게 프라하에는 실제로 유태인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프라하에 오는 관광객이 꼭 한 번은 들르게 되는 관광명소이기도 하지요. 원래부터 유태인은 유럽인들에게 그다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이곳 프라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묘지가 있는 곳은 그렇게 유태인들이 격리되어 살던 곳이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은 아무 곳에나 묘지를 만드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할 수 없이 자신이 사는 곳에다 묘지를 쓸 수 밖에 없었죠. 그것이 바로 저렇게 많은 묘지들이 하나의 군집을 이루게 된 이유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프라하의 묘지 자체가 유태인들이 받았던 박해 혹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실재(the real)로서 말입니다. 그 어떤 허위의 기입이나 조작으로 지워버릴 수 없는 하나의 얼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당신이 실제로 저기에 가본데도 들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프라하의 묘지'는 당신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언어가 매개되지 않는 경험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란 그렇습니다. 영원히 당신이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손을 아무리 내뻗어도 만질 수 없는 절대적으로 저- 너머의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좁은 틈 앞에서 기껏해야 사진을 찍거나 강 밖에서 공무도하가를 부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03-27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장미의 이름> 읽으려고 한 적 있어요 그런데 앞부분만 조금 보고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보면 끝까지 볼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네요
저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비슷하게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한테는 뭔가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나온 책을 본 적도 있는데, 비슷하지만 다른 것도 같더군요
그러면서 제가 별로 겸손하지 못하군요^^

<프라하의 묘지>는 읽는 데 어떤가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테지만, 도서관에 왔더라구요


희선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아버지처럼 큰 힘과 용기를 줄 때가 있습니다. 책에서 읽은 한 줄의 글귀가 어머니처럼 큰 위안과 위로를 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과 글을 만날 때마다 늘 마음 속에 새겨두거나 시작노트 한 귀퉁이에 메모해두곤 했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꺼내어 마음 속에 새기거나 읽으면서 제 인생의 소중한 물과 밥으로 삼았습니다.

 

-  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 중에서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란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이러한 고백은 비단 정호승님 만의 고백은 아닐 것이다. 우리 역시도 살아가는 어느 한 순간, 마치 자기 혼자 세상을 짊어지고 있는 듯 힘겨울 때 마음 어디엔가 새겨진 누군가의 한마디 때문에 위로를 얻고 격려를 느꼈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한없이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기만 했던 말 한마디가 문득 '해님달님'에 나오는 호랑이의 손에서 오누이를 구해 주었던 동앗줄처럼 그 어떤 것 보다도 더욱 튼튼히 날 지탱해주고 힘차게 끌어올려 줌을 느낄 수 있는 때가 말이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그냥 괜스레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땐 정말 그 정도의 가치도 충분히 가질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그런 느낌과 체험을 한 이들이 많았기에 시대마다 나라마다 여지껏 격언이나 금언의 형태로 '한마디'들이 그리도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7년만에 다시 만나보는 정호승님의 에세이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 준 한마디'는 그러한 한마디의 힘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는 책이다. 한마디의 말로 응축되는 글들은 전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만큼이나  여전히 아픈 배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아서 삶이 가져다준 실패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벽 때문에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린 영혼을 따스한 위로로써 어루만지고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다시금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그야말로 지금 무언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진 웹스터의 소설에서 주인공 주디에게 있어 '키다리 아저씨'가 그랬듯이 더없이 의지가 되고 더 높은 곳으로 활짝 날아오르기 위한 도약대가 되어 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정호승님의 글들은 모두 세 개의 묶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개인적인 느낌으론 그 말들의 대상이 각각 다 다른 것 같다. 그러니까 첫 묶음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는 뭔가를 하려고 마음은 먹었으나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아마도 그 때 용기를 갉아먹는 이유들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문제,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대한 우려, 제대로 못해서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식의 불안 등등.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에 모여있는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것들을 겪고 있는 자들을 위한 정호승님의 귀한 조언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걱정하는 이들에겐 '광활한 우주의 시각에서 지금의 현실을 볼 것'과 '모든 벽은 문이다'라는 말로 현실에 가로놓인 장벽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그리고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식의 불안에 대해서는 정호승님 자신도 해마다 실패 기념일을 만들어 기념한다는 일화를 통해 '실패는 기념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의 싹을 틔우니' 오히려 실패에서 배울 것이 더 많으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견딤이 쓰임을 결정합니다. 내게 견딤이 있어야 귀하게 쓰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p. 49) 

 

 

생각한 만큼의 결과가 나올 것인가가 걱정스런 이들에겐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는 성철 스님의 말처럼 진정한 성과는 오로지 많은 시도와 노력 끝에 얻게 되는 법이니 시도와 노력하는 과정 자체를 바로 우리의 삶으로 여기라 말한다. 더구나 삶에 있어 모든 공부란 '눈을 짊어지고 우물을 메우듯' 아무리 눈을 져다 부어도 우물은 그저 우물로서 존재하는 법이니 설령 실패한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은 본디 '나'라는 자아 속에 고귀한 자산으로써 남아있을 것이니 무가치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일단 무조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볼 것을 권한다.

 

  꽃이 보고 싶은 순간에 꽃씨를 뿌리면 이미 늦었다고 아예 뿌리지 않는다면 보고 싶은 꽃은 영영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은 꽃을 볼 수 없지만 일단 꽃씨를 먼저 뿌리는 게 중요합니다.(p. 41)

 

  인간은 목적을 달성하는 이에게 관심을 갖지만, 신은 열심히 노력하는 이의 과정을 소중히 여깁니다. 목적은 결과일 뿐, 목적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목적이 중요할 수록 과정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적에 몰두하되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목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그 목적에 이르게 됩니다.(p. 171)

 

 두 번째 묶음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 는 이미 실패를 경험하고 용기가 꺾여진 이들을 위한 글 모음이다. '엎질러진 물 때문에 울 필요는 없다'는 말로 실패의 원인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늘의 곤경을 해결할 생각부터 할 것이며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기듯' '진주조개가 스스로 이물질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듯' 실패 역시도 성장하는 과정중에 뒤따르게 마련인 성장통인 것이니 거기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 것을 일러준다 중요한 것은 화살이 자신이 떠나온 활 시위를 생각하지 않듯이 뒤를 돌아다 보는 것보다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엔 오늘 내가 느끼는 부정(negative)을 오히려 긍정의 계기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열어준다.

 

 미래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면 미래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미래가 더 불안하게 됩니다. 내 노력과 준비에 따라 미래는 얼마든지 여러 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래서 '미래학은 예언이 아니라 선택의 미학'이라고 합니다.(P. 285)

 

 세번째 묶음 '길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다' 는 첫번째처럼 머뭇거리는 사람이나 두번째처럼 실패로 방황하는 사람 모두가 나아감에 있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모아놓은 글 모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걸음 가운데 우리의 시야를 어디에 둘 것인지 그리고 나아가는 나의 보폭을 어느 정도로 결정할 것인지 그 모든 것을 행하고 결정하는 데 있어 내 마음의 중심은 또한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 자애롭게 들려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이 산문집은 맨 앞에 인용한 그의 말처럼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순간, 또는 다시금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물과 밥이 되는 책이다. 여기엔 참으로 새겨두고 싶은 한마디의 말들이 많다. 그래서 어쩐지 제 느낌엔 그 말들 하나하나가 다들 깃털 같다. 하나로 모이면 날개가 되어 날아오르게 해 주는 그런 깃털들 말이다. 아니,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읽다보면 저도 모르게 공명해 왠지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마치 그대로 날아오르려는 듯 발돋음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많이 느끼게 되니까.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분들은 분명 이 책을 통해 적잖이 위로와 힘을 받으시리라 생각된다. 벽이 더 이상 벽이 아니라 바로 문 이라고 보게 되시리라 믿는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3-03-06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구매했답니다.
정호승님의 산문집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부록으로 손바닥 반만한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책이 왔어요. 제가 요즘 노안이 오는 중이라, 흐흐, 이 책 절대 안 보여염... 출판사에서도 알아주었으면! 에휴휴.

ICE-9 2013-03-12 18:19   좋아요 0 | URL
와! 달여우님 저랑 너무 비슷하세요^ ^ 저 역시 정호승님의 산문집을 좋아하는지라 바로 구해 읽게 되었거든요^ ^ 저도 그 작은 책 있어요. 저는 귀엽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문제점도 있겠군요. 아무튼 정말 반갑습니다^ ^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 NFF (New Face of Fiction)
메이어 샬레브 지음, 정영문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아모스 오즈에 이어 우리나라에 또 한 명의 이스라엘 작가가 소개되었다. 그가 바로 메이어 샬레브다. 1948년 이스라엘 나할랄에서 태어난 그는 텔레비젼과 라디오등에서 일하다가 1988년 첫 작품 '푸른 산'으로 데뷔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논픽션이나 아이들 책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집필해왔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은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라는 것으로 2011년에 나온 그의 가장 최근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주목하게 된 건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아모스 오즈 외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소설의 번역자다. 혹시 얼마전에 나온 '어떤 작위의 세계'란 소설을 읽어보셨는지? 더없이 독특한 문체에 소설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그 정체불명성으로 오히려 더욱 고유의 가치를 지녔던 그 소설의 작가 정영문이 바로 이 소설의 번역가이다. 그 때문인지 전혀 다른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어쩐지 정영문적 분위기의 내음을 맡을 수 있었는데 특히나 그렇게 다가왔던 건 이 소설 역시도 별다른 서사가 없었던 '어떤 작위의 세계'처럼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이지만 사실은 연대기에 가깝다. 말하자면 작가 메이어 샬레브와 그 가족의 역사인 것이다. 여기의 이야기는 지극히 자전적이다. 그는 아예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려는 듯 자기 가족의 사진들까지 함께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별 다른 사건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보통 가족들이 그렇듯이 남의 이목을 확 끌만한 드라마틱한 사건들은 일상에서 그리 잘 일어나지는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메이어 샬레브가 굳이 이렇다할 굴곡도 없이 평범했던 삶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란 형태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할머니 때문이다. 더없는 개성으로 무장한 할머니의 존재를 소설이란 형태로 영원히 각인시켜 시간속에 풍화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의 잡설이 길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메이어 샬레브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의 할머니가 가지는 고유한 존재 가치를 이 소설에 담으려 했는데 그래서 다른 그 어떤 소설로도 대체 불가능해 보였던 '어떤 작위의 세계'를 쓴  소설가가 이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더없이 적역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튼 정영문의 번역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내겐 이 소설을 주목할 가치는 충분하다.

 

 잠시 환기를 위해 여기서 밑줄을 그을 게 있다. 그건 '고유성'이다. 그러니까 샬레브의 할머니처럼, 그리고 정영문 작가의 '어떤 작위의 세계' 소설처럼,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존재 가치를 나타내는 그런 고유성이다. 왜 메이어 샬레브는 이것을 담으려 했던 것일까? 이것은 내가 이 소설에 주목하게 된 세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다. 그건 바로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나할랄' 이다. 나할랄은 키부츠와 같은 공동체다. 역사도 비슷하다. 그러니까 1930년대. 이스라엘 유태인들 사이에 시오니즘의 바람이 대대적으로 불어닥치고 그 영향으로 많은 유태인들이 쏙쏙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바야흐로 초기 이스라엘 정착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두 개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바로 키부츠와 나할랄이다. 하지만 1936년에 생겨난 나할랄은 키부츠와 조금 달랐다. 키부츠는 경작할 땅이 자기들 소유였으나 나할랄은 그 토지의 소유권이 국가에게 있었다. 즉 국가로 부터 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키부츠는 뭐든지 집단으로 경작하고 나누어 가졌으나 나할랄은 개인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즉 자기가 가꾼 것은 자기가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할랄은 키부츠 보다 더욱 농업 중심적이 되었다. 키부츠는 농사에서 수공업까지 생산 방식을 다변화시켜갔으나 나할랄은 계속 농업만 고집했다. 그래서 더욱 세파에 물들지 않고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런 나할랄이다.

 

 바로 이러한 나할랄이 이 소설에서 전면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주목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먼저 소개된 작가 아모스 오즈는 키부츠 출신이었다. 그의 오래된 키부츠의 경험은 비록 오래전에 거기로 부터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작품에다 키부츠적 경험의 흔적을 남겼다. 쉽게 말해 아모스 오즈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아, 이런게 키부츠적인 것이로구나.'하는 유추가 가능했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 생겨났으며 이스라엘 정신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나할랄이 흔적이 드러나는 작품도 보고 싶었다. 작품을 통해 이런 것이 나할랄이로구나 느껴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이 작품을 만난 것이다. 샬레브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스라엘 초기 정착민이다. 나할랄이 세워질 때 부터 같이 있어 온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삶은 그야말로 나할랄적 정신으로 충만하다. 말하자면 고유한 나할랄을 느껴보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가족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의 원초적 정신을 그 나할랄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태어났고 온 생애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새 체화되어버린 나할랄을 말이다. 그는 나할랄이 바로 자신의 할머니라고 생각한다. 그 할머니만이 가진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개성. 세속적 가치에 물들지 않는 순수한 신념이 나할랄이고 그것이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스라엘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것이 다 좋지만은 않다. 할머니의 모든 점이 가족에게 다 환영받지 못했듯이. 거기엔 누그러뜨러야 할 고집도 덜어내야 할 막무가내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기대한 것만큼 소출하지 못하는 땅이라 해도 그 땅을 버릴 수 없는 농부처럼 말이다. 그것은 단단한 기억으로 결부되어 있고 바로 그 연대된 기억이 자신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렇다. 간직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선택은 없다. 그것이 나할랄이고 이스라엘이다. 그는 그렇게 할머니를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나할랄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 중의 하나인 '모샤브' 그대로다. '모샤브'는 어느 것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각자의 소임이 있고 그 나름대로의 고유의 운명이 있는 것이니 어떤 작은 것 하나라도 함부로 내치거나 방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모샤브'다. 그것은 대지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처럼 무한의 긍정이다. 그 모샤브 정신에 의해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주한 남편의 형이 보내준 진공청소기를 버리지 않는다. 비록 잘 사용하지도 않고 거기다 결국 고장까지 나서 이제는 사용만 하면 오히려 바닥을 더럽히더라도 말이다(할머니는 무엇보다 깨끗한 것에 집착한다. 청소는 그녀의 지상명령이다. 할머니의 이러한 깨끗함에 대한 집착을 때묻지 않은 이스라엘 고유한 이념에 대한 추구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할머니에게 있어 효용성은 존재의 쓸모를 결정하는 가치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효용성을 뛰어 넘어 그 존재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것을 다만 금지된 욕실에 보관할 뿐이다. 그것도 무려 40년 동안이다. 어떤 배쳑도, 버림도 없는 금지된 욕실은 그야말로 '모샤브'로 충만한 영역이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그냥 버려야 할 물건들이 한없이 보관되어 있다. 쓸모는 없을지 몰라도 그 자체로서 가족들과 추억과 결부되어 고유의 존재적 가치를 가지는 물건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금지된 욕실'은  지금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이스라엘 과거를 상징하기도 한다. 일종의 이스라엘 흑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메이어 샬레브는 모샤브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그 어떤 과거든 버리지 말고  과거의 잘못을 똑똑히 기억해 둔 상태로 다 안고 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모샤브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건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전기청소기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전기청소기는 그 금지된 욕실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태평양을 건너 온 것이다. 우리는 이 전기청소기의 타자적 특성 그리고 공간을 같이 점유하고 있다는 것에서 어쩔 수 없이 현재 이스라엘과 분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로 전기청소기는 그 팔레스타인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전기청소기를 할머니는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는 깨끗함에 오로지 방해물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않는다. 40년간이나 살뜰하게 보관한다. 후에 그 전기청소기를 만든 회사의 대리점주를 아버지로 두고 있는 딸이 와서 높은 가격에 팔라고 해도 응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매매란 존재의 영혼을 버리는 것과 같다. 존재의 가치는 현실적인 이득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나와 함께 한 이상 대지와 농부가 그렇듯이 운명적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모샤브에 충실한 할머니의 신념은 그렇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스라엘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보여주는 배척은 원래 이스라엘을 이루는 중요한 신념인 모샤브에 위배되는 것이라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샤브를 통한 신의 명령은 선민의식에 빠져 타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하나까지도 나와 공동 운명체라는 생각으로 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스라엘은 여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메이어 샬레브는 이러한 귀 기울임을 요청한다. 이스라엘이 진정 시오니즘을 주장하고 싶으면 초기 정착민들이 믿었고 삶의 일부분으로 체화시켰던 '모샤브'부터 실천하라는 것이다. 할머니는 욕실을 금지시켰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문은 잠겨져 있지 않았다. 벽은 다만 구획일 뿐이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이것은 샬레브가 이스라엘에 보내는 중요한 상징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야말로 타자의 열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내 러시아 할머니의 미제 진공청소기'는 이러한 소설이다. 감상을 말하자면 소설은 좋았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어도 잔잔한 가족의 일상은 언젠가의 내 가족들마저 떠올리면서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비유하자면 따스한 온천에 한가롭게 잠겨있는 곰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이건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린 번역 덕분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읽고 싶었던 나할랄 이야기라서 방금 전 갓 잡은 연어를 먹은 곰처럼 든든하기까지 했다. 이만하면 곰으로써 최대의 행복이나 다름없다. 한 편으론 또 욕심이 생긴다. 더 많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들려주는 작가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이러한 곰의 소망은 언젠가 이루어질까? 문득 어느 날 강을 거슬러 올 또 한 마리의 연어와도 같은 이스라엘 작가를 곰은 한가롭게 누워서 꿈꾸고 있다. 아, 생각만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3-02-22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아주 특이함의 극치를 달리는군요. 저는 엊그제 이스라엘 산(?)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했는데 애석하게도 볼 수 있는 곳이 없어 그만두었습니다만 이스라엘 산은 영화도 책도 다 귀하군요. 이제 한국에 두 명 소개되었다니. 박한 거 같기도 하고, 그 나라 자체에 작가라는 직업이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을 거 같구요. 정영문 번역이라니... 와우!! 이스라엘에 관심이 가는 군요. 이 소설 찜할게요. 헤르메스님 굳밤 :D
 
그곳과 사귀다
이지혜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골목을 사랑한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는 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담쟁이 덩쿨마냥 엉켜 있었다. 그래서 술래잡기 하기엔 딱이었다. 골목에 있는 모든 집들의 대문들이 우리의 작은 몸을 숨겨 주었다. 때로는 담장 위로 송이 송이 얼굴을 내민 장미가 맞아주었고 때로는 석류나 무화과가 숨어서 고개를 조금 빼내고 술래가 오나 안오나 이리저리 살피는 날 흐뭇하게 굽어보기도 했다. 물론 다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운이 좋지 못하면 시끄럽다는 할머니의 원성이나 떠들어서 잠을 못 자겠다는 아저씨의 박대를 들어야 했다. 그렇게 어릴 때 동네 골목엔 추억이 많다. 놀면서 담장 마다 내가 찍었던 손바닥이나 디뎠던 발자국 만큼이나 알알이 여물어 있다. 그랬던 나이기에 서울에 와서 가장 많이 아쉬웠던 것도 내가 사는 주변에 골목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파트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가 있을 뿐 골목이 없다. 어릴 때 골목을 걸었던 추억을 떠올리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를 걷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릴 때의 골목을 떠올려보면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건 그 곳에 있던 집들이 하나같이 다 달랐다는 사실이다. 담장 위로 보이는 나무들도 그랬고 지붕의 모습도 그랬으며 층수도 마찬가지였다. 골목의 집들은 저마다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집은 저렇게 생겼구나, 흐음 이 집은 이런 나무를 키우네 혹은 왜 저 집은 빨래를 저렇게 널까 하는 식으로 도저히 풀 수 없는 호기심을 보는 집마다 품어가며 걸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더러 피아노 소리가 담장 밖으로 들려오면 기대어 듣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엔 우리 집도 오늘 저걸 먹었으면 좋겠다 하고 절로 침을 꼴깍 삼키기도 했다. 이런 저런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골목을 걷는 건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길었으면 할 정도로 즐김과 누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다르다.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모습. 더구나 그 어떤 사람의 소음이나 내음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회색의 담벼락은 죽 놓여진 거리를 걷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거리는 즐김과 누림의 거리가 아니라 그대로 될 수 있는 한 빨리 줄여야 할 거리가 된다. 소거말고는 다른 의미라고는 없는 거리가 된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빨리 걷는 게 서울 사람이라고 하는데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걷게 된 건 어쩌면 골목이 사라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골목이 사라졌듯 사실 우리 주변엔 많은 공간들이 사라진다. 내가 사는 동네만 보아도 자주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갔던 단골 빵집이 사라졌고 만화책을 주로 빌려 보던 대여점도 사라졌다. 서점은 여기 살 때 부터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음반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학생 때 이후로 서점과 음반은 내 일상의 시간을 가장 많이 잡아 먹던 가게들이었는데 이제는 볼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공간의 사라짐은 단순히 어제 있던 것이 오늘은 없다 그 정도만이 아니다. 골목이 사라지면 그 골목과 공존하던 나의 모든 추억과 경험들이 사라진다. 서점과 음반 가게가 사라지면 그 곳을 통해 만났던 책과의 인연, 음반과의 인연 역시 사라진다.  아마도 내가 이지혜의 '그 곳과 사귀다'를 선택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란 무엇보다 공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존재이며 하나의 공간이 삶의 자리에 차지한 의미 역시도 생각보다 결코 적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곳과 사귀다' 는 노래방, 놀이터 혹은 영화관과 같은 우리가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50개의 공간에 지은이가 느낀 감정을 가볍게 터치하듯 써내려간 책이다. 그녀는 말하는 공간과 결부된 추억을 말하고, 가지게 된 인연을 말하며, 받게 된 위로를 말한다. 책에 담겨진 건 그렇게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공간이 사람과 얼마나 많은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지 보게 된다. 공간이라는 것이 단순히 용도를 넘어 인격적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지혜의 이 책은 공간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도록 한다. 요즘은 힐링이 대세다. 이지혜는 그 힐링을 공간으로부터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공간과 사귐, 즉 인격적 교감을 하려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말이다. 이 책은 작고 가볍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을 가지고 지은이가 말하고 있는 공간에 가서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그러면 이 책이 좀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저자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덕분에 공간에 대해 마음을 열고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 깨닫게 되었다.

 

 공간도 사람처럼 살고 죽는다.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을 보니 골목이나 음반점, 오락실등 내가 많은 추억을 보낸 낯익은 공간 몇몇이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공간들은 죽었다. 그리움으로 애타는 우리들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서부 영화의 주인공처럼 추억의 유물만을 남긴 채 석양 속으로 쓸쓸히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공간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하고서 슬프지만 다가 온 변화에 적응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빈 자리를 메운 새로운 공간들과 또 새롭게 인연을 이어가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또 흐르다 보면 이 책에 실린 50개의 공간들 중 몇몇도 언젠가 분명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비워진 그 자리를 또 다른 새로운 공간들이 채워나갈 것이다.

 

 한 10년 뒤에 작가가 또 한 번 '그곳과 사귀다'를 써 주면 좋겠다. 그 때의 남은 공간과 사라진 공간들을 보면서 내게 찾아온 '변화'의 정도를 가늠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hining 2013-01-3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책들은 어떻게 발견하는거에요, 헤르메스님?+_+ 좋은 책 소개해줘서 고맙습니다(꾸벅).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

ICE-9 2013-02-05 22:34   좋아요 0 | URL
SHINING님이 이렇게 말씀해주시다니 더욱 기쁘고 감사하네요. 제가 이 책을 통해 받았던 힐링을 SHINING님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희선 2013-02-01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골목길 하면, 갑자기 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듭니다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은 아닌데, 중학생 때 학교에 가는 길에 개를 만났어요
그길 평소에는 잘 다니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날은 그냥 갔다가 그렇게 됐죠
개가 저를 노려보는 듯해서, 개를 보면서 뒤로 걷다가 넘어졌어요
아무래도 그때 기절했나봐요 그 길을 지나던 아줌마가 일으켜준 것 같아요
그러고서 학교에 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별일없이 살아있습니다

헤르메스 님은 이것저것 알고 싶었던 게 많은 어린이였군요
(지금도 그런 듯하고...)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어땠는지 거의 생각나지 않아요


희선

ICE-9 2013-02-05 22:38   좋아요 0 | URL
와! 어떻게 딱 맞추셨네요. 정말 호기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캐물어서 자주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었죠^ ^ 어릴 때 제가 가장 열심히 보았던 책이 어린이 백과사전이었다면 말 다했겠죠. 너무나 많이 봐서 책이 거의 떨어질 정도였어요. 저는 골목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참 많습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니 어쩜 당연하겠지요. 거기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지 많이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엔 그런 교류가 흔해서 소중한지 잘 몰랐는데 서울에 올라와보니 그런 교류들이 정말 소중한 것이더군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누려볼 수 없는 아이들이 어쩐지 좀 안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추억할 공간들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많이 적을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추억의 풍성함은 떠올릴 공간의 풍성함과도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