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치여자 NFF (New Face of Fiction)
사비나 베르만 지음, 엄지영 옮김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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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멕시코는 FTA 때문에 특히나 우리 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오랜 미국과의 NAFTA로 인해 소득 불균등화는 심해져 전체 멕시코 국민 중 51.3%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으로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멕시코. 바로 이런 멕시코가 현재 FTA를 비준한 우리 나라에도 역시 닥쳐 올 미래가 될 우려가 높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마침 멕시코의 여류 작가의 소설 한 편이 우리 앞에 도착했다. 카를로스 푸옌테스 이후로 오랜만인데 바로 사비노 베르만의 '나, 참치 여자'라는 작품이다. 

 

 

 

     제목이 참 특이하다. 

     언뜻 영화 '타짜'에서 '나 이대나온 여자야'라는 김혜수의 대사가 떠 오른다. 원래 제목은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여자'였다. 이 소설은 주인공 여성인 카렌의 자전적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소설 말미에 가면 왜 카렌이 자신의 소설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지 이유가 나온다. (그녀는 자신의 기록에 어울릴 만한 제목을 모두 다섯가지 정도 생각했고 그 중 가장 마지막 것을 고른 것이다. 거기 나온 다섯 개의 후보 제목중 가장 첫번째 있는 것이 '나와 참치'인데 카렌은 그 옆에 '나와 참치'가 주인공이니까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라고 써 놓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판 제목은 바로 그것을 살짝 변형한 것이며 '참치 여자'가 된 것은 이 소설이 무엇보다 한 여성 개인의 정체성을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이건 잠수 얘기가 아니라 참치 얘기인 것이다. 그것도 참치 산업 자체의 얘기인 것이다. 

 

    멕시코의 참치 산업은 실제로 유명하다

    멕시코는 현재 세계 제12위의 참치 생산국이다. 바로 그 멕시코의 마사틀린의 참치 공장이 이 작품의 주요 배경이다. 소설은 카렌의 이모가 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유산으로 이 참치 공장을 상속받아 경영을 위해 멕시코로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이모는 거의 야생 소녀와 같은 꼴을 하고 말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주인공 카렌을 발견한다. 인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늑대 소녀와도 같은 카렌을. 더구나 그녀에게는 학대받은 흔적까지 있다. 이모는 언니가 밝힐 수 없었던 혈육이 아닐까 싶어 카렌을 거두고 자연의 세계에서 문명의 세계로 편입을 시킨다. 하지만 카렌은 남들과 달랐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하듯이 사교적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예 사고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카렌은 스스로의 생각을 전혀 꾸밀 줄 모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니까 태양과 바다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 처럼 자연의 정직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말하자면 카렌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타자인 '자연'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 이모는 이 카렌을 하나의 인간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참치 공장도 경영해야 했는데 말썽이 생겼다.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의 생태주의자들이 참치를 잡을 때 돌고래까지 죽인다고 해서 멕시코에서 수입되는 참치 거부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모는 절대 그런 일이 없었고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 '돌고래 안전' 라벨까지 붙여 판매하지만 미국내 멕시코 참치 불매 운동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모든게 다 미국 참치 회사와 생태주의자들이 협력한 음모였다. 그들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멕시코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불매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모의 참치 공장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되고 할 수 없이 구조조정에 들어가 대량 해고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참치 공장이 있던 마사틀란에는 그 해고로 인해 거지들이 속출한다. 그런데 이것은 소설 속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있었던 현실 속 이야기이도 하다. 즉 사비나가 이 실제 이야기를 소설 속에다 담으려고 한 것은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불평등 보다 정확히는 '일방적 착취'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다소 상세하게 앞부분의 줄거리를 소개했다. 이 소설에는 정확히 세 가지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가장 큰 범주별로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 마지막으로 나와 너의 관계. 이렇게 세 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중첩'이란 단순히 포개어짐 뿐만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 그 관계적 본질이 어떤지 모두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로 쓴 말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 참치 여자'란 카렌 자신의 육성으로 진행되는 '나 홀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자연에게 어떠한지 미국이 멕시코에게 어떠한지 내가 너에게 어떠한지 그 본질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그 세 관계의 본질을 드러냄에 있어서 무엇보다  형식과 내용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한다. 형식면에서는 '말'로써 그리고 내용면에서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를 통해 접근한다. 그리고 그 둘을 통해 관계의 본질을 깨달음으로써 카렌이 궁극적으로 찾아내는 정체성이 바로 '참치-여자'라 할 수 있다. 

 

    먼저, 형식면에서 '말'을 살펴보자. 

    앞서도 카렌은 언어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연적 정직성을 가진 그녀가 그냥 생각한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꾸미거나 돌려서 말해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비유'라는 것을 싫어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예 : 동물들을 죽여서 그걸로, 아니면 그걸 조각내어 팔아서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우는 강좌의 제목은 '축산경제학'이었다.  

   예 : 호모사피엔스들이 동물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설명하는 수업은 '인간 지능'이었다. 

                                                                                       (P.117) 

   즉 카렌이 싫어하는 것이 비유로 말했을 경우 그 진실된 측면이 축소되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 되어 완전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완곡어법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습득하는 자로 하여금 또는 그 자체를 운영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례로 가장 잔인한 도축 방법을 만들었던 카렌의 도축과 교수 헌팅턴은 '인도적인 도축 촉진 위원회'가 수여한 '훈장' 을 받은 자였다. 바로 여기의 '인도적'엔 도축시 벌어지는 폭력성이 도덕적 정당성으로 위장되어 은폐되어 있는데 이런 까닭으로 카렌은 '비유'를 혐오하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유가 그래도 통용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일방적 관점에서 규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소설은 나아간다. 

 

    바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공격을 통해서 말이다. 

  

    안 그래도 데카르트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공격을 많이 받았던 철학자였는데 사비나 베르만은 아예 카렌의 입을 빌어 데카르트의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자라고 선동까지 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비나가 보기에 데카르트야 말로 나와 너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리하여 오로지 나만 있고 너는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서로' 사이에 착취적 관계를 낳게끔 근거를 제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가므로 사비나가 데카르트를 공격한 주 요인 역시 데카르트가 동물을 어떻게 바라보았느냐에 달려있는데 (또한 데카르트의 동물에 대한 사유는 물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기도 하다.) 그 데카르트가 동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동물은 기계 혹은 AUTOMATA(자동장치)이며 즐거움이나 아픔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했었다. 물론 칼로 베면 비명을 지르고 뜨거운 것을 가져다 대면 달아나려고 몸부림 치겠지만 그것은 시계가 태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의 반응일 뿐이다 

   라고...  

 

   바로 여기서 사비나는 데카르트적 사유의 위험성을 보는 것이며 결국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유가 말에 있어서 비유를 가지고 온다고 보는 것이다. 왜 자기중심적 사유가 비유를 불러올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사비나는 작중 인물 '야스코'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마 스스로 뭔가에 의해 보호받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현실은 언제나 두려움을 주니까 (P.331) 

   비유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 사유는 자기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의 획일적 시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비나가 보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 앞에 놓인 대상은 그냥 단순한 사물로 보는 주체이며 내가 규정해야 하지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고 여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상호 이해와 배려에 바탕한 포용의 주체가 아니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만 존재하는 획득의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기댈 곳이 오로지 자신 밖에 없으므로 그 주체는 당연히 불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가 작품 속에 과도하게 넘쳐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국의 참치 시장을 방어하고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멕시코를 핍박하는 미국이요 도축당하는 동물들이 느끼는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효율성만 추구하는 헌팅턴이요 역시나 이윤만 있다면 타인의 삶이든 윤리든 상관않는 카렌의 동업자 굴드 또한 마찬가지고 마사틀란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준다는 공약으로 표를 얻어 요직에 올랐으나 오르자마자 나몰라라 하는 멕시코 장관들이 그렇고 또한 카렌 참치 공장의 페냐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다 이 모든 데카르트적 주체들은 다 남성들이다. 즉 '참치-여자'에서 여자는 바로 이러한 남성으로 상징되는 데카르트적 주체들을 벗어난 존재라는 의미 역시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말'에서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가지 관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바로 그것은 '일방적 착취'이다. 하지만 본질은 때로 상황에 따라 그 드러나는 모습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거기엔 데카르트적 주체들의 마치 타자를 배려한다는 듯한 위선적이며 교묘한 위장과 그로인해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나타날 수 있는 모습마저 살피는 것이 또한 필요한데 사비나는 그것을 바로 내용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리뷰라는 형식상 길이의 한계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중점적되는 것만 말하자면  바로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다. 카렌은 헌팅턴에게서 퇴학을 당한 뒤 이모를 도와 참치공장 경영에 뛰어드는데 거기서 자신이 도축학 수업을 받다가 느낀 문제점을 되도록 수정하기 위하여 참치를 인도적으로 포획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 교활하고 냉혹한 자본가 굴드와 동업하고 나서는 참치의 포획이 아닌 참치 양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카렌의 과정이 정확히 '카렌과 헌팅턴과의 관계'와 '카렌과 굴드와의 관계'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즉, 대학에서 도축학 수업을 받을 때 헌팅턴이 카렌에게 했던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관계는 그대로 포획으로 이어지는 카렌과 참치와의 관계와 대응되는데 그런 관계임에도 헌팅턴이 '인도적' 훈장을 받았듯이 카렌 역시 그런 칭호를 얻는다. 말하자면 모두 '위선적 관계'인 것이다. 두번째 굴드는 카렌에게 주도권도 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참치 양식을 하도록 하지만 카렌이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 하자  공격적으로 나온다. 즉 굴드가 카렌에게 인정했던 자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인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카렌의 '참치양식'과 대응한다. '참치양식'은 가장 참치를 배려하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잡아먹기 가능한 지점까지의 한계 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헌팅턴과 굴드에게 있어 카렌은 카렌에게 있어 참치와 마찬가지인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카렌과 참치는 동일한 존재였고 그렇게 '참치-여자'란 카렌의 정체성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카렌은 서로 다른 과정을 거쳤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있어 본질은 변한 게 없었다. 카렌은 그토록 동물을 위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그녀 역시 여전히 헌팅턴과 굴드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주체의 본질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비니는 결국 이러한 내용적인 면을 통해서 점진적인 변화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결국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 만이 그 벗어남을 가능하게 함을 보이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변화 혹은 탈주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서 정체성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즉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 새롭게 하는 것만이 데카르트적 주체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카렌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이모로 인해 '인간'으로 편입되고 헌팅턴과 굴드에 의해 만들어진 그렇게 '인간 사회' 자체로 부터 규정된 '참치여자'로서의 정체성이었다. 즉 카렌이 이모에 의해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예절이라는 것을 학습할 떼 그녀는 이미 종국에는 벗어나야 할 데카르트적 주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선 그 모든 시초이자 '인간'에 편입시킴으로써 데카르트적 주체로 나아가게 했던 그렇게 인간 문명 자체의 상징이기도 한 '이모'의 죽음이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이모의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통하여 카렌은 결국 사실 그 존재였으나 '인간'에 편입됨으로써 타자가 되어버린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 말 그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잠수해 들어간 장면의 의미인 것이다. 

 

   근본적 변화 혹은 탈주가 소설에서 말하듯 이렇게 근본적 단절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면 구조적으로 중첩된 세 관계 역시도 먼저 근본적 단절이 있어야만 새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비니는 멕시코가 새롭게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이러한 단절은 무엇보다 이전까지의 내 정체성 자체를 파국적으로 지워 일종의 TABULA RASA, 즉 백지상태로 만드려는 것이니 훗설의 '에포크'와도 같다. 그렇게 지금까지 스스로 규정해 온 나를 버리고, 획일적 진리의 집착 마저 버리고 오로지 열려진, 그렇게 포용하려는 나가 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새롭게 변화된 '참치여자'(지배의 대상이었던 참치와 역시나 같은 지배의 대상이었던 여자를 스스로의 정체성으로 삼는 것. 그렇게 타자를 자신에게로 받아들이는 것) 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사비니가 주제로 나아가며 보여주는 논리의 전개는 써 온 바와 같이 꽤 정연한 편이다. 하지만 나는 작가가 멕시코인이라서 또한 그 나라가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를 나라라서 다소 분석적으로만 접근했는데 내 글이 어쩌면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딱딱하거나 재미없거나 하지는 않다.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롭게 때문에 그 자체로도 얼마든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행여 그 참신성이 너무 낯설어서 혹시 다가갈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또 그것으로 외면된다면 안타깝기도 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주제넘게 분석해서 도움삼아 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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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아데나 할펀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야기에 대하여... 

   미국의 여류 작가 아데나 할펀의 경쾌함과 진지함이 알맞게 균형을 이룬 이 작품 '스물 아홉'은 일흔 다섯의 생일을 맞은 한 할머니가 생일 케익에 대고 빈 소원으로 인해 다시금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종의 '백투더 퓨쳐'식의 시간 여행이 아니라 신체의 나이가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모든 건 그대로고 몸만 젊어지는 것이다. 

 

   일흔 다섯살이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겨야 옳거늘. 젠장, 나도 말은 그렇게 한다. 나이 듦의 가장 큰 기쁨은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라고. 그래야만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다 헛소리다. 그러나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두들 절망할텐데. 그들이 내 나이가 되어 진실을 깨닫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일흔다섯살로 사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지 누군가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오래전에 이 상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자살을 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안될 노릇이다. 아마도 무인도 같은 곳에 가서 냉혹한 진실을 강요하는 거울 없이 살았을 것이다 .(P. 9 ~ 10) 

 

    일흔 다섯의 생일 케잌을 앞에 둔 할머니 엘리가 이토록 자신의 나이에 대해 진저리를 치는 것은 그녀 자신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제대로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이 지금 엉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순탄한 인생을 살아왔다. 무난하고 충직한 남편을 만나 속 한번 섞지 않고 비록 평범한 아내이긴 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잘 꾸리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나이먹음에 대해 속절없음의 한탄일까? 그건 또 아니다. 그녀가 저렇게 한탄을 하는 것은 그녀 자신 한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인생을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리거나 처녀시절엔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였고 당시 사회적 통념에 따른 보통 여자의 삶만을 주려했던 엄마의 뜻대로 그녀는 원했던 공부 마저도 포기 하고 그저 평안한 생활을 보장해 줄 능력 하나만 보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렇게 그녀는 연애는 커녕 사랑의 열정 조차 제대로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그저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상품 마냥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위치를 켜는 누군가가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삶만을 살아왔을 뿐, 그 인생 자락 어디에도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이것은 마치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의 첫 소절과도 같다.     

      Have your leaves all turned to brown
      Will you scatter them around you
      C'est la vie 


      Do you love
      And then how am I to know
      If you don't let your love show for me
      C'est la vie

  

  그랬던 그녀였기에 남편이 결국 죽었을 때, 마치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 처럼 애오라지 남편만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주던 근거를 상실한 느낌을 받게되고  중심의 인력이 없어진 물건이 오로지 원심력만의 작용을 받아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리는 것 처럼 그렇게 그제서야 그 인생의 바깥에서 제대로 자기 인생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 모든 게 오로지 후회로 채색되어 있음을.      

      Oh,  c'est la vie
      Oh,  c'est la vie
      Who knows, who cares for me
      C'est la vie 

 

   그래서 엘리는 당연히 지금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20대의 손녀 루시를 질투가 나리만치 부러워한다. 그리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걸어보지 못한 길' 처럼 자신이 걸어보지 못했던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걸어보길 원한다.  '다시 한 번 루시 처럼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절대로 지금 같은 인생은 살지 않을거야.' 라고...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 로버트 프로스트, '걸어보지 못한 길' 중에서 -  

 

   바로 그 바람을 그녀는 일흔 다섯번째의 생일 케익 앞에서 소원으로 빈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이마에 입이라도 맞추어 주었는지 딸 바바라가 실수로 가져오는 바람에 케잌에 꽂혔던 스물 아홉 개의 양초 갯수 그대로 엘리는 다음 날 아침 스물 아홉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스물 아홉 엘리의 하루 동안의 '인생 되찾기 좌충우돌 여정'이 시작된다. 

 

 

 

   작가 아데나 할펀은 우연히 꽂은  양초 개수라는 것으로 스물 아홉의 나이로 돌아간 것에 특별한 의도는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드리웠지만 사실 그 나이를 선택한 게 전적으로 우연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바로 한 해 뒤의 '서른'이란 나이는 종종 서양에서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의 상징 같은 것으로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대 부조리극의 선구자라 불리는 극작가 외젠느 이오네스코는 '남자는 서른 부터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서른'은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로 자기 인생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남자만의 경우는 아니다. 여성 역시도 서른을 중요한 하나의 전환점으로 여겼음을 우리는 바로 독일의 여류시인이자 역시나 극작가이기도 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소설 '삼십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서 바하만은 서른이 되어 비로소 진짜 인생에 눈뜨게 된 남자의 이야기를 빌어와 그녀 자신이 느끼는 서른이 주는 '무거움'을 간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다시금 리와인드 되는 '스물 아홉'은 진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 준비로서의 나이이자 제대로 된 진짜 삶을 선택하기 위한 열려진 가능성의 시간 자체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즉 이 제목과 돌아간 나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 하루 동안의 엘리의 여정 자체가 진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여정은 오로지 보다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이 소설 역시 '부머랭으로서의 여정'인 것이다.

  

  소설에 대하여... 

   이 소설을 음악 형식으로 비유하자면 세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소나티네'라고 할 수 있다. 

    세 부분으로 만들어진 에머슨 레이크 앤 팔머의 노래 'C' est la Vie'를 굳이 인용한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게 엘리가 왜 그런 소원을 빌게 되었는지 스스로 고백하는 첫 시작을 제시부인 1악장으로, 스물 아홉으로 돌아간 엘리의 하루 동안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을 전개부인 2악장으로, 하루 동안의 여정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엘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을 재현부인 3악장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말했듯이 소나타라는 음악 형식 자체가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한다면 이렇게 소나티네 형식으로 보아도 별로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하나의 음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1악장인 엘리의 고백은 조금 느린 안단테 이지만 2악장인 전개부 뒤로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로 경쾌하게 진행되는...  한 할머니의 새로운 인생 찾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렇게 부담없이 간간이 미소까지 머금어가면서 벗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여성이고 등장인물들도 모두 여성들이기 때문에 확실히 남성들 보다는 여성들에게 더욱 어필하는 바가 많을 것 같다. 하지만 더욱 어필할 수 있는 쪽은 아마도 지금 스스로 인생 황혼기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 특히 우리네 부모님들이 아닐까 싶다. 아데나 할펀 역시 책 앞머리에 자신의 어머니에게 이 작품을 헌정하고 있다. 정말로 소설을 읽다보면 할펀이 자신의 어머니 심정을 헤아려가며 써내려 갔구나 하는 게 느껴진다. 어느덧 숙제를 다 마쳐가는 아이와도 같이 등 뒤에 놓인 세월을 뒤돌아보게 되는 시기에 놓인 어머니에게 딸이 진심을 담아 보내는 당신의 인생은 그 자체로 넉넉했고 아름다웠으며 당신다웠다고 속삭이며 깊이 안아주는듯한 그런 위로와도 같은 느낌이... 그래서일까 읽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내 어머니였다. 새삼 당신에게도 '걸어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심하게도 늘 잊고 지낸다. 어머니에게도 '여자'로서의 그녀의 바람이 욕망이 삶이 있었을 것임을... 이 책에 대하여 내가 감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새삼 어머니도 '여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는 것. 공기가 주변에 늘 가까이 있기에 소중함을 모르는 것 처럼 어머니라는 존재 역시도 그런 것 같다. 아데나 할펀 처럼 소설은 못 써 드리지만 자주 연락드리고 할수 있는 한 많이 얘기를 들어드리자 다짐해 본다. 이걸 잊지 않기 위해 '다모클레스의 칼' 처럼 한동안 머리 맡에 두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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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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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들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라비니아'.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곳은 아마도 단테의 신곡이 아니었나 싶다. 거기 흔히 '림보'라 부르는 제1지옥. 그러니까 선하게 살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 받기 전에 죽은 영혼들이라 천국에 가지 못하는 혼들의 거주지에서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로 만났던 인물 중의 하나가 로마 건국의 뿌리가 되는 아이네이스의 아내이기도 한 '라비니아'였다.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통해 트로이 파멸과 로마 건국을 처음으로 연결 시켰던 그 베르길리우스도 아이네이스에 대한 얘기는 그토록 구구절절 읊어 놓으면서도 정작 그의 아내이자 로마의 근원이 되는 '라티움(이름에서 '라틴'의 기원이었음이 바로 드러난다.)의 왕비였던 라비이나에 대해서는 이름 한 번 언급하는 것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는데 그건 단테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자신을 인도하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언급했다는 걸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저 이름 한 번 나오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서양 문명의 모태를 건설했다고 해도 지나치니 않을 로마. 바로 그 로마의 사실상의 가이아(대지의 모신(母神) - 굳이 이 같은 표현을 쓴 것은 아이네이스와 라비니아가 결혼할 때 라비이아를 '가이아'라고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라바니아'의 존재 치고는 이같은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처사는 거의 무시에 가깝다고 할 수 밖에 없는데 행여 그렇게 된 연유가 혹시 당시를 지배했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해보게 된다. 바로 그 의심에서 출발하여 그렇게 역사에서 빼앗기고 지워졌던 '라비니아'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되찾아주려 한 작가가 라비이나, 그녀를 중심으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썼으니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 SF의 거장이기도 한 여류 작가 어슐러 르 귄의 '라비니아'이다.  

  

 

 

   말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도착한 르 귄의 '라바니아'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그 자신 무시하거나 지워버렸던 주체를 다시금 복원하여 오히려 그 주체의 시각으로 다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슐라이허마허 이후로 역사 기술이 랑케가 말했던 식으로  역사가가 그 기술에 있어서 오로지 사실 그 자체에만 근거하여 온전히 가치중립적으로 쓰기란 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역사란 역사가가 가진 시각과 역사적 사실이 상호작용 하면서 일종의 인위적인 구성물이 되는 것임이 드러났는데 이로써 지금 역사를 쓰고 혹은 보고 있는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그 '누가' 바라보는가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GENDER)  역시도 중요한 차이를 가져올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역사이래로 남성은 지배자의 위치를 여성은 거기에 종속적인 위치를 점유했기에 그렇게 서로의 계급적 위치가 현격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성의 시각으로서의 역사 새롭게 쓰기는 이렇게 여성으로서의 시각과 남성으로서의 시각을 대조해 보게 하며 역사 기술이 사실의 기술이 아닌 관점의 해석임을 깨달아 지금까지 남성에 편향된 역사를 바로 잡고 보다 균형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미라벨로 카바로니의 '제단의 라비니아' 


   따라서 베르길리우스의 남성적 시각이 아닌 이러한 르귄의 여성적 시각으로 로마의 뿌리가 형성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다. 사실 르귄의 이러한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쓰기는 르귄이 처음인 것도 아니요 그녀 자신의 비브리오 그래피에 있어서도 처음이 아니다. 그녀의 비브리오 그래피에선 이미 그녀의 대표작 판타지이기도 한 '어스시 이야기'에서 여성인 테나의 관점에서 마법사의 섬 '로크'를 새롭게 써내려 갔으며 르귄 이전에 독일의 여류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그동안 그리스 신화에서 희대의 악녀로만 묘사되던 '메데이아'를 여성 주체의 관점에서 새롭게 써내려간 적이 있다. 
  

                       

 

 

 

 

 

 

  

  크리스타 볼프와 르귄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동안 남성적 시각에 의해서 왜곡되고 무시되었던 목소리들(크리스타 볼프의 원래 제목은 '메데이아, 목소리들'이다.)을 되찾아 여성성을 다시금 진실되고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이아를 공포와 악행의 존재가 아니라 지배자 남성이 가진 권력을 적극적으로 되찾아 남성 중심의 질서를 전복하고 여성을 지배자로  위치시키는 주체로 새롭게 묘사하며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에 의해서는 무시되었던 여성의 관점에서 멸망한 트로이의 유민으로 부터 로마의 기원이 되는 라티움의 통치자가 되고 그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새롭게 기술한다. 하지만 르귄의 '라바니아'는 볼프의 '메데이아'와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는 데 그 독특성이 있다. 자신의 욕망 성취와 권력 획득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던 메데이아와는 달리 '라바니아'는 기묘하게도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거나 자신의 의지나 권리를 적극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그녀는 기꺼이 신탁을 통해 조우하게 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따라 자신을 적극적 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욕망을 포기한다. 그녀는 그저 '남자에게 인도되기 위해 잘 여문' 여성으로서의 지위에 스스로 머무르며 베르길리우스가 예언한 상대를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소 이상하다. 이왕에 무시되었던 여성으로서의 시각을 적극적으로 복원하려 했다면 남성성(베르길리우스로 대표되는)에 한계지워진 운명의 굴레로 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다 더 합당하지 않나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비니아는 아이네이스의 충실한 내조자로서 그의 라티움 통치를 그 그늘에서 도와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는 라비니아의 친어머니와 비교하면 그 수동성이 더 현격해진다. 라비니아의 어머니는 오히려 메데이아적 인물에 가깝다. 그녀는 라비니아를 자신이 원하는 남자와 결혼시키기 위해서(그리고 그것 자체로서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반대편에 선다. 그리고 이 의미는 남성성의 규정을 오히려 거스르는 여성의 메데이아적 적극성을 상징한다.) 왕의 명령마저 무시하며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더구나 라비니아를 투르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숲에서 보여주는 여왕이 중심이 된 여성들만의 축제는 크리스타 볼프가 메데이아를 야성의 여성성으로 규정한 것과도 통한다. 

  거기서 여왕은 라비니아를 밤의 숲으로 데리고 가면서 거기서 축제가 열릴텐데 그 축제는 오로지 여자들만을 위한 축제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파수꾼을 세울거다. 남자가 근처에 오면 멀리 쫓아내야 한다. 만일 그가 가지않겠다고 하거나 우리를 엿보려고 한다면, 그는 죽음을, 죽음보다 더한 일을 당할 것이다! 그는 거세당한 사내가 되어 산을 내려가게 될 것이다! 발레나가 네 자루의 날카로운 검을 가져왔고, 네 명의 강인한 여자들이 밤낮으로 길을 지킬 거다.(.P.176) 

 

  파수꾼, 죽음, 거세라는 말들로 인해 우리는 그 축제가 오로지 여성성만으로 충만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하는 모든 여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신분(물론 그 신분은 전적으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결정된 것이다.)과는 전혀 반대되는 의복을 입는다는 것이 또한 흥미롭다. 그러니까 노예는 여왕과 공주의 의복을 입고 여왕과 공주는 노예의 의복을 입는데 바로 이 의복의 전복은 실상 남성이 규정한 사회적 질서의 전복이며 그렇게 새로운 여성 중심의 질서를 다시금 정초시키는 상징이다. 바로 이처럼 라비니아의 어머니 여왕은 그야말로 볼프가 말했던 '메데이아적 주체'를 강하게 암시하는데 하지만 이 여성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그녀는 자결하고 만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그러한 메데이아적 주체가 가지는 전복적, 투쟁적 여성성의 길로는 나아가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왜 르귄은 아버지가 신탁으로 이끌었고 거기서 만난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순응하는, 그렇게 온전히 남성이 규정한 틀 안에서만 움직이는 라비니아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시되고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아주려는 것과는 왠지 상반되는 결과가 아닌가? 

  문제는 이것이 '라비니아'가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르귄은 이미 어스시 이야기에서도 여성 테나를 통해 이렇게 말하게 한 바가 있다. 

 

  남자들이란 어찌나 여자들을 겁내는지! 테나는 늦게 핀 장미꽃 사이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여자들 한 명 한 명은 겁내지 않지만, 여자들이 함께 얘기하고 함께 일하고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그러면 남자들은 거기서 책략과 음모와 강제를 보고, 덫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이 옳다. 여자들은 여자로서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구속으로 보는 유대와 남자들이 속박으로 보는 결속을 짰다.

                                                                     ( 어스시 전집 6권, '또다른 바람' P. 271 )

 

  테나의 이 이야기 - 그러니까 여자는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편들고 남자들은 구속으로 여기는 유대와 남자들은 속박으로만 생각할지 몰라도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고 좋아한다는 사실-는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형상화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우리는 여기서 볼프의 '메데이아적 여성성'이 페미니즘의 한 입장에서는 오히려 남성성에 오염된 여성성으로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획득적, 투쟁적은 그야말로 남성성의 특징인데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여성성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비판이다. 여성성은 남성성에 오염된 것이 아닌 고유의 여성성 자체로서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유의 여성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될 수 밖에 없고 오로지 반대 정립만으로 정의가 가능할 뿐인 우리들은 그렇게 남성성에 전적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밖에는 고유의 여성성을 정립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형상화하게 된 고유의 여성성과 가장 유사한 모습을 보이는 것(고유의 여성성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매개자)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 '모성'이라고 한다. 

 

 

 

  모성 역시도 헤르더의 민족관념이 형성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거기다 '어머니'라는 것도 일종의 '신화'로 남성 중심 사회의 지속을 위해서 여성을 더욱 종속적으로 만들기 위해 심어진 관념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모성으로서의 여성성이 남성성과 가장 차이가 나는 것 역시 사실이니 만큼 전적으로 폐기되어야만 할 것은 아니다. '라비니아'를 보면 르귄 역시도 여기에 '비판적 지지'의 관점에 서 있는 것 같다. 

   앞서도 말했지만 라비니아는 수많은 구혼자들이 지배자가 되기위해 획득해야 하는 '여문 열매'라는 위치에서 아이네이스와 혼인 할 때는 '가이아'의 칭호를 얻는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들 중 제우스의 아버지적 세대인 티탄족으로 하늘을 의미하는 우라노스와 함께 모든 신들의 근원이다. 가이아는 대지의 여신이고 모든 존재가 다 대지에서 비롯되므로 그렇게 라비니아는 '근원적 어머니'의 상징이 된다. 

  가이아는 그리스 어로 '삶'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바로 여기에 왜 르귄이 라비니아를 그렇게 순응적 존재로 그렸는지, 그렇게 그리면서도 '모성'마저 가져오는 것인지(라티움에서 라비니아는 여왕이 된다.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어머니인 여왕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기존의 어머니를 지우고 새로운 어머니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르귄은 모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통해서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라비니아적 주체'를 정립하는 것인데 거기서 르귄이 생각하는 모성의 궁극적인 의미는 바로 '삶의 유지'이다. 

 

  즉, 르귄은 삶을 지켜내고 이어가게 하는 것이 모성의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테나의 여성들은 다음 세대를 편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의 의미이여 왜 그녀가 라비니아로 하여금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을 그토록 충실히 따르게 했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즉 라비니아는 스스로 자신의 욕망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자신을 비롯한 라티움 전체 삶이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예언에 의해 규정된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희생함으로서 미처 베르길리우스마저 끝맺지 못했던(베르길리우스는 내내 '아이네이스'가 미완성임을 말한다. 이는 그것이 온전히 남성의 시각으로서만 쓰여져서 불완전한 편협성에 머물고 말았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삶 자체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 희생과 유지하고 지속으로의 헌신에서  르귄은 어머니야 말로 남성성에 오염되지 않은 고유의 여성성의 모습이란 것을 보는 것이다. 

 

  라비니아는 바로 이러한 르귄의 이상화된 여성성의 상징이다. 어쩌면 이 르귄의 이 모든 이야기가 그냥 자기 합리화가 아니냐고 할 수 있다.희생과 외부에 규정당한 삶일지라도 그 유지와 지속에 힘쓰는 것 자체가 남성성의 지배를 영속화시키는 자세가 아니겠냐고 말이다.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우리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여전히 '여인의 초상'의 결말은 논란중이다. 왜 여주인공 이사벨은자신의 결혼이 사랑이 아니라 오로지 남편의 자기 재산을 노린 지극히 타산적 욕망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알면서도 그 혼인 생활을 스스로 계속 이어가려 하느냐 한느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눈에 그러한 이사벨의 선택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고 작가 헨리 제임스 역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로 점철된 인물이었구나 여겨진다. 하지만 정작 헨리 제임스의 의도는 달랐다. 그건 결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고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는 보다 고귀한 인간다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협잡과 타산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그 내부에 머무름을 선택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이 그렇게 온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존재가 아님을,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오지 않더라도 내내 스스로 희생할 수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우리들 눈에 이 생각은 어쩌면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헨리 제임스는 그걸 또 다른 작품 '비둘기의 날개'에서 또 반복한다. 한 가난한 연인들이 그 돈을 노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미국인 여자를 유혹하려 한다. 결국 연인의 남자 애인은 계획했던 대로 상속녀와 결혼하는데 성공한다. 나중에 상속녀는 모든 진실을 알게되지만 오히려 그 연인들에게 자기 재산을 상속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이 자기 욕망대로 움직이는 것만은 아님을 보여 이해타산으로 밖에는 타인을 보지 못했던 연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러한 여성성의 창조는 사실 칸트의 '의무윤리'와도 그 맥락이 상통한다. 칸트는 인간이 의무를 따를 때 진정 자유롭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공리주의가 바라보듯이 인간이 오로지 자기 욕망, 이해만을 따라 스스로 선택한다 해도 그것은 그 자신 내부의 동물적 본능에 결국은 지배받아 그런 것으로 노예의 행동이지 자유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그 어떤 본능적 호소에도 굴하지 않는 오로지 내 욕망이나 이익과 전적으로 무관한 의무만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라고. 헨리 제임스의 고귀하고 이상적 여성들도 모두 이러한 칸트의 진정한 자유를 상징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들은 모든 것으로 부터의 전적인 자유로움으로 인간을 기초지웠던 계몽주의의 이념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헨리 제임스의 인물들이 혹은 르귄의 라비니아가 어리석어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자본주의적 관념에 찌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칸트와 헨리 제임스가 있었던 자본주의의 위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던 시대에서는 그런 인간이 오히려 더 자유롭고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르귄의 '라비니아'는 전(pre)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바라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가 라비니아를 쓰면서 떠올렸던 것은 저 원시시대의 모성중심사회에서 통용되던 여성성이었을 것이다. 대지의 모든 것을 받들고 그것과 유기적으로 하나되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여겼던 어머니의 모습 그것이었을 것이다. 

 

  르귄의 라비니아는 단순히 베르길리우스에게 무시되었던 존재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찾아준다는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인류학적 시선으로(지금의 시각이 아닌 그 전 시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이 여성성을 형상화 해보려는 야심찬(베르길리우스와 대적한다는 의미에서) 시도이기도 하다. 메데이아적 주체가 아닌 라비니아적 주체로서의 여성성이 과연 다른 이들에게도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성 혹은 여성적 주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여지들을 마구 촉발시킨다는 점에서 한번쯤 벗해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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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22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비니아 라는 제목이 익은데,, 하고 보니 르귄의 소설이었군요.

흑흑, 헤르메스님, 여기서부터 제가 갑자기 감동이 밀려오는거예요.
사실 알라딘 서재 활동하면서 이렇게 왕래하는 분 중에, 저랑 취향이 동일하게
리뷰를 올리시는 분은 헤르메스님 밖에 못 봤거든요.
(아니다, 지금 안 오시는 히어나우님도 계시네요.) 여하간 이 무한 감동이라니!

저는 르귄 여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사실 여자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어스시 시리즈를 읽으면 흐름이 좀 부드럽네 라고만 생각했는데, 기프트 시리즈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저자에 대해서 찬찬히 찾아본거죠... (제가 저자 약력을 대충 보는 경향이..)
르귄 여사는 정말, 그분만의 분위기가 있어서 너무 좋아요.

ICE-9 2011-11-22 23:04   좋아요 0 | URL
와! 마고님도 르귄 여사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저는 르귄 여사를 오래전에 '어둠의 왼손' 부터 만났고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모든 작품을 소장할 만큼 무척 좋아하지만 주위에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가 전혀 없어 거기에 대해 한 번도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늘 혼자 애정을 간직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같은 작가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니 정말 반갑고 기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서재활동 을 할 걸 하는 후회도 마구 드네요. 마고님과 더불어 르귄 여사의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흥미진진한 시간들의 기대가 마구 몰려오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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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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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1년,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특수로 인해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금 부활을 위한 기회를 잡게 되었던 그 때. 구로자와 아키라는 '라생문'이란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한다. 그 작품은 역시나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생문'과 '덤불숲'을 합친 것으로 한 부부와 한 도적이 얽힌 아내의 강간과 남편의 살해사건을 다루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제각각이라 그 진실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거기서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관련자 모두가 객관적 입장이 아닌 저마다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깊이 들어가 있는 바탕에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아키라는 분명 그 영화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 냉전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타내려 하고 있었다. 즉, 냉전체제라는 것 역시도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깊이 침윤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각자가 원하는 진실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니스와 아카데미가 최고의 상을 그에게 바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성찰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그 영화를 통해 아키라가 묻는 것은 단적으로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있겠느냐? 오로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부분적 진실밖에는 없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그것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관철할 뿐인 그런 진실들인... 이와 비슷한 말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도 했었다. 그는 우리의 상식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과학적 진실마저도 그 시대 주류 세력들이 담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의 진실을 철회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태라는 것이다. 즉, 주류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수 없는 진실은 여전히 혹세무민의 낭설로 격하되거나 배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뼈저리게 알게 된다. 진실엔 그림자처럼 내가 원하는 것 역시 결부되어 있음을. 즉 진실이란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혹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비춰주는 또 하나의 욕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음을. 물론 우리는 불과 60년 밖에는 되지 않은 냉전체제의 경험으로 인해 이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버마스조차 아예 이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가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서로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가급적 상대방의 욕망과 조화를 시킬 수 있는 게임의 규칙 즉 ‘담론 윤리’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에 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진실은 없다. 적어도 너와 나 사이에 있어서는...’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서로가 ‘주장하는 진실들’뿐이다. ‘진실’이라는 담론 게임에 참여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의 이러저러한 욕망들이 깊숙이 투사된 그런 진실들 말이다. 따라서 진실을 주장함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과 같으며 여전히 프로이드나 라캉식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들이 담론 분석에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접속하고 있는 매체는 그 어떤 매체든 수많은 욕망들로 들끓는 용광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어떻게든 당신과 접속되기를 바라며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케이블들의 다발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글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주체든 그리고 어떤 객체든 오로지 부분적 진실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많은 파편화된 욕망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얇은 귀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가' 혹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리라. 혹은 탐정. 그렇게 모든 글을 당신의 내부 깊숙이 들려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신의 개입을 바라는, 판단도 평가도 오로지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는, 한낱 텍스트로 대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했던 ‘말’ 중심주의에서 ‘문자’ 중심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거나 ‘텍스트 외부엔 그 어떤 것도 없다.’란 말의 의미이며 욕망의 태피스트리와도 같은 정보화 물결 속에 우리가 견지해야만 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와 똑같은 것을 요청하는 하나의 작품이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바로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작가들에겐 그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고유의 표지들이 있다. 대부분 그 표지들은 작가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들로 나타날 것인데 그렇다면 알베르토 망구엘 - ‘독서의 역사’라든가 ‘밤의 도서관’ 같은 책에 환장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움을 선사했을 책의 저자인, 그래서 그들에게는 생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이름이 높았을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인 그- 에게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바로 ‘밤의 도서관’의 머리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신학과 환상문학을 제외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특별한 의미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 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낙관적 인 생각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의미와 질서로 포장하려는 처절한 목적을 가지고서 두루마 리와 책 과 컴퓨터에서, 그리고 도서관의 선반에서 이런저런 정보 조각들을 끊임없이 모 아댄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걸까? (...)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11 -

 

  이렇게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우리가 하나의 진실을 온전히 그대로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는 그 시도가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에 호기심을 갖는다. 왜 그런가? 왜 우리는 레밍이라는 동물처럼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실이라는 무모한 희망을 위해 그 아래로 기꺼이 뛰어내리는 것일까? ‘밤의 도서관’이 그 의문을 ‘도서관’이라는 것을 통하여 풀어내려 했다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는 그 의문을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풀어내려 한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단순히 말하자면, 그러한 뛰어듦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염원 자체에 이미 그 자신이 원하는 개인적 욕망이 내밀하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이 실현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오로지 나만의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면모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자각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 스스로의 정당화. 바로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한낱 허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구성 자체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섯 부분은 모두 화자를 달리한다. 그들 모두는 아르헨티나에서 오래도록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망명한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의 죽음에 대해서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나 그 순서의 배치가 눈에 뛴다. 처음 부분 ‘변호’는 실제 이 소설의 작가이기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의 육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죽은 베빌라쿠아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육성(헛소동), 편지(푸른요정), 독백(두려움에 대한 참작)등 스타일을 달리해가며 말한다. 여기서 얼른 드는 의문은 왜 처음 부분 ‘변호’에서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느냐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서였을까? 물론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앞부분 ‘변호’의 이야기들과 뒷부분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변호’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들려주는 베빌라쿠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종의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거기엔 오로지 알려진 사실들만이 있고 그것은 더 이상 가공의 여지가 없는 ‘공식화’된 사실들이라는 점에서 뒷부분들의 이야기와 절대적인 차이가 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얘기를 했던 것도 그러한 ‘공식화’된 사실임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책’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또한 ‘거짓말 예찬’이라는 베빌라쿠아의 유일한 작품인 책에 대한 미스터리(즉 이 책을 과연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이다.)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변호’는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대하는 책에 기록된 ‘글’ 자체와 같으며 이로써 우리가 더욱 깨닫게 되는 건 이 소설에서 ‘변호’에서 망구엘이 말했던 부분과 그 뒷부분에서 밝혀지는 진실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 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책’ 자체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 얼마 되지 않으며 담겨진 진실 또한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저자가 바라는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망구엘은 ‘책’ 자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변호’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그 자신 직접 참여하면서까지 그 사실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가 텍스터 자체에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보낼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는 감정가나 정신분석가 또는 탐정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뒷부분들의 이야기들이 가진 형식이 점점 더 ‘사적(私的)인 형식’이 된다는 것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대화에서 더욱 사적인 ‘편지’ 그리고 더더욱 사적인 ‘독백’으로 점증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나열은 마치 정신분석가 앞에 누워있는 환자를 분석하는 과정도 흡사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망구엘은 이 책의 내용이나 구성 모든 것을 다하여 독자에게 주지시키려 한다. 그저 망연하게 책(뿐만 아니라 그 어떤 텍스트든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고 그 글에 투여된 작가의 욕망의 그림자를 발견해내려 애를 써라. 진실은 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욕망과 당신의 욕망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게임 자체에 있다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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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꿋꿋하게 응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상처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중도에 멈추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모조리 까발려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처를 이처럼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강하지 않으면 하기가 어렵다. 강함은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기에 강한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나는 구병모 작가와는 이 '고의는 아니지만'으로 처음 만났지만 이런 까닭으로 지금 내게 있어서는 가장 매력적인 작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표지에는 단촐하게 소설이라고만 나와 있으나 사실은 소설집인 이 '고의는 아니지만'은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가 아쉽다. 바로 수록된 작품의 순서이다. 소설집은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발표되거나 미발표된 작품들로 묶여져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순서가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이면 시간순으로 배열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가 작품마다 그 때의 사회와 분명히 서로 조응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투쟁기이다. 그 시간의 지층마다 상처로 절망으로 작가를 익사시키려 했던 사회에 굴하지 않고 저항과 희망으로 열심히 자맥질해 온 기록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그의 호흡이었고 문학은 그의 무기였다. 더 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는 더 크게 헤엄쳤고 그렇게 이 소설집은 헤엄친 거리만큼 더욱 넓고 깊어진 성찰의 여정과도 같다.

 

 이건 작품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면 바로 드러난다.

 

 2009년에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개인 차원의 얘기로, 뒤이은 2010년에 발표된 '마치... 같은 이야기'나 '타자의 탄생'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자체에 대한 얘기로, 그 후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그런 사회 속에서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얘기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야는 넒어지고 있다. 이건 물론 단순히 바라보는 지점들이 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 끝에 옮겨가는 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며 그 깨달음이란 다름아닌 사회가 은폐한 진실을 다시 찾아옴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여정은 그 되잧아오는 진실들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같다. 사회로 부터 익사당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자아 역시 그 되찾은 진실에 양육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몸의 비만은 자아의 비만이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의 비만이다.

  

 가장 먼저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일단 들여다보자. 

 

 이 두 이야기는 모두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절멸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봉틀 여인'에서 사회가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보다 무리없이 섞일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선을 잘 꿰메두고 있었던 소년은 결국 원하는대로 그 사회와 하나가 되려는 결정적인 순간 갑작스럽게 결별을 당하고 만다. '곤충도감'의 주인공 남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만 한 쪽이 파열해 버린다. 이렇게 모든 관계는 하나가 되려는 순간 어느 한 쪽이 파국적 결말을 맞아버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설은 분명 그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사회 자체가 그 파국의 원흉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재봉틀 여인'의 소년을 보자. 그가 그렇게 감정선을 꿰매야 했던 것은 선생님의 폭력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 그 자체를 대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첫문장에서 작가는 일부러 '어른들의 관용어'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언어적 대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편가름이며 그렇게 소설 속 개인들이 단순히 개인들이 아닌 그 속한 무리의 대표로 보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선생님의 폭력을 어른 일반의 폭력으로 치환시킨다. 그 치환을 통해 선생님의 자리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 질서를 그 근저에서 구조화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한다. 선생님의 폭력은 소설 속 교장과 선생님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속한 사회적 소통의 진실한 단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대상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양육이다. 그들은 길러진다. 가르치는 어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통하도록! 폭력이다.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 대화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려와 이해의 차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하는 자의 일방적 명령과 강요가 있을 뿐이다. 한 쪽은 말하는 입만 있고 듣는 쪽은 오로지 귀만 있는 관계. '재봉틀 여인'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년은 폭력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그저 재봉틀로 기울 수 밖에 없다. 소년은 점점 진정한 자신의 신체를 잃어가고 어른의 폭력에 길들어진 변형된 신체가 된다. 그러면 소설에서 과연 재봉틀 여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에서의 개인이 프로이트적 오디이푸스 삼각형에서 한 꼭지점을 맡고 있는 인물들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재봉틀 여인은 물론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로 부터 폭력을 당한 아들에게 위안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그녀는 어루만져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역할을 했다. 거기서 연고로 상처가 봉합되었듯이 재봉틀 여인은 소년의 상처를 재봉틀로 봉합한다. 재봉틀 여인이 바로 어머니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기서 소설의 진실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얼핏 환상 소설의 외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진실은 한 가정내에서 자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소통의 진실된 단면이기도 한 폭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차적 사회화 임무를 맡고 있는 가정의 원형적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폭력 유전의 핵심적 공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서의 폭력은 어디까지나 소통, 즉 의사 교류의 유형으로써의 폭력이다. 가정에서 아들은 흔히 아버지의 권위로 상징되곤 하는 사회 질서를 준수할 것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있지 않나?'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고 위안을 준다. 하지만 그 위안은 어떤 위안인가? 어떤 치유인가?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안과 치유가 아버지의 폭력이 재차 반복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아라는 등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질서의 전복을 꿈구는 아들의 기를 죽여 놓는다. 일방적 폭력의 강요로 존속하는 가정의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연장한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트너인 것이다. 경찰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나쁜 경찰과 좋은 경찰로 이루어진 파트너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안과 치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대안도 없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방식 속에서 그저 또 하나의 아버지로 되어 버리는 것 말고는.

 

 아들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하나의 원형으로써의 가정이 가진 진실이다. 아들의 진정한 자아와 아버지의 질서는 양립 불가다. 아버지의 복제가 되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감정을 잃어버린다. 더이상 자신의 감정으로 무엇을 느껴볼 수가 없다. 이만큼 자신의 순수 자아를 상실해버렸다는 걸 잘 나타내주는 게 또 어디있을까? '재봉틀 여인'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양립 불가능한 이유가 애초부터 가정 자체에 뿌리박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가정은 또한 사회의 일차적 사회화 기관이다. 그렇다면 사회 자체가 오로지 그 폭력적 소통 말고는 다른 방법은 모르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소년 소녀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자아를 희생당한다. 이러한 희생을 막고 그들을 이러한 일방적 폭력으로 부터 해방할 길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뒤이은 작품 '곤충도감'의 화두이다.

 

 소설의 남자는 사회로부터 비밀리에 레이저로 곤충을 주입받는다. 이 곤충이 바로 소년 소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순수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 질서를 의미하고 있음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분리불가능성이다. 이식된 존재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의 것에 오래도록 길들여지게 되면 과연 그것이 내 천성인지 아니면 단순히 길들여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아이들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오래도록 가치관을 주입받으면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판단이고 어느 것이 강제로 이식된 가치관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특별히 '아비투스'라 말했다. 사회화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 사회적 관습들이 마치 내 본성처럼 달라붙어 또 하나의 신체처럼 떼어내기 어렵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비투스가 되어버린 신체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사회 관습이 켜켜이 코드화되어버린 신체 자체를 절멸시켜 버리는 것. 그 뿐이다. 폭발, 파열. 과연 이 말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의 신체는 산탄총을 맞은 수박처럼 파열해 버린다.

 

 그런데 그 상황이 흥미롭다. 하필이면 그가 파열하던 순간이 성관계를 나누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남녀 사이의 일대일 성관계야 말로 개인의 주체성이 가장 명확히 형성되는 순간이라 한다. 즉 한껏 고양된 남자의 주체성이 외부의 것으로 철저히 이식되고 변형된 아비투스적 신체를 깡그리 날려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파열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있던 여자는 죽음이 아니라 남자가 해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두 작품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공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다. 타자와의 대화,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들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써의 사회. 두 작품은 그 형상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제 관측은 좀 더 깊은 곳을 향한다. 그 다음 작품에서 시점이 사회 자체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작가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설집에는 가장 첫머리에 나오나 2010년의 작품인 '마치... 같은 이야기'는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오로지 실용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유법이 금지되고 오로지 직설법만 통용되는 소설 속 공간은 MB 시절 표현의 자유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떠들석했던 '쥐벽서' 사건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기소까지 되어버렸던 사건을 그 그림을 그렸던 강사는 단적으로 상상력과 권력과의 싸움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바로 이 상상력과 권력이 이루는 대항관계가 그렇지 않아도 '마치.. 같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상상력은 소통의 차원을, 권력은 일방적 강요의 차원을 의미한다. '재봉틀 여인'에서 드러났듯이 아버지에게 체화된 사회의 권력은 그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상대편이 반응하길 원한다. 그것이 권력이며 소통의 거부란 권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는 주인공 시인이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마치'라는 비유법적 공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카페와 권력자가 움틀고 있는 직설법적 공간의 상징인 시청과의 대비적 묘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마치'의 공간은 여러 사물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곳인 반면 시청은 반듯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구획된 공간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뒤섞임이 소통을 의미하고 반듯한 구획이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일부러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작가는 '쥐벽서' 사건이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2010년 현재의 권력에 의한 소통 부재의 한국을 소설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뒤이은 '타자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 또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가져왔다. 소설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명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남자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크레인에서 홀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씨를 상징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 볼 수가 없다. 소설 속 남자가 그랬듯이 김진숙시가 그 고공크레인에 구멍에 빠진 남자처럼 갇혀 있었던 이유도 권력이 소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마치... 같은 이야기'가 소통 부재를 가져오는 사회의 일방적 권력을 드러낸다면 '타자의 탄생'은 그 권력이 이제 어떤 비극을 낳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게 바로 구멍이다. 김진숙씨나 소설 속 남자 처럼 개인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두는 '구멍'이 권력에 의해 사회 곳곳에 마구 생격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구멍들이 생겨나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정해진 규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홀연히 생겨나서 개인을 가두고 고립시키며 밥벌이를 빼앗아 버린다. 고립과 생존 위기를 한달음에 가져오는 구멍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일방적 선택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므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김진숙씨가, 혹은 소설 속 구멍 속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이 말이다. 구멍에 빠진 남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고.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 만나는 사회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권력이 원하면 누구나 구멍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는 것.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규칙도 없어서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 누구도 언제든 구멍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 희생자라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동굴 깊숙한 곳에서 회중전등을 비춘 것과도 같이 문학이란 빛 안에서 거대한 벽화처럼 나타난 진실이었다.

 

 그 거대한 벽화는 이제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한다. 잠재적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를. 그러므로 뒤이은 소설들, 즉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가 '나' 자체를 화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자신이 잠재적 희생자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혹은 언젠가 받게 될 위험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게 바로 2010년에 발표된 '어떤 자장가'이다.

 마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 일상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묘사가 세세한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카프카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카프카도 이 작품 속 여인 처럼 글을 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방해가 되었던 존재인 '일상'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게 바로 '모든 일상적인 일'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카프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글은 쓰는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던 글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좀처럼 쓸 수 없었다. 사사건건 일상적인 일들이 글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에 대한 카프카의 혐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유언으로 자신이 모든 글들을 불살라버리라 할 정도였다. 그 카프카처럼 '어떤 자장가'에서의 여인도 글쓰기에 방해되는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싫어한다. 작품 속에서 방해가 되는 그러한 일상적인 일들은 특히나 그녀의 아이로 상징된다. 소설에서 여인은 종종 아이를 세탁기에 넣거나 오븐에 넣거나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일을 반복적으로 상상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가 얼마나 방해가 되는 일상적인 일들을 제거하고 싶은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겨움을 낳게 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그건 바로 사회다. 국가다. 정부가 저출산을 우려하며 아이 낳을 것을 종용하기만 하고 정작 더욱 중요한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전혀 줄여 줄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은 생존이 절박한지라 일 때문에 육아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데 정부는 복지 제도 확충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마저도 부담을 나눠지려 하지 않는다. 하는 것만 보면 정부는 아이를 마치 화초나 농작물로만 생각하는 듯 하다. 그저 물이나 뿌려주고 빛만 비춰주면 대충 자라게 되는 그런 정도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잡초처럼?

 

 여인의 고통은 정부의 그러한 무관심 때문이며 그녀의 신음은 아이를 기르는 엄마와 가난한 가정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 소통만 존재하는 정부의 구조적 폭력 때문이다. 개인이 고통과 신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러므로 단 하나다. 그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응시하고 분쇄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뒤이은 '고의는 아니었지만'과 '조장기'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는 제목 그대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고의가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개인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구분된 사회 구조 자체가 그 고통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유치원 교사 F가 그리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필이면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장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은 그녀는 현재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녀는 매일 하루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된 건 결코 그녀가 게을러서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노력파이고 성실하다. 하지만 국가는 폭우 피해를 받은 주인공의 가정을 구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그녀는 타고난 외모 탓에 취업이 어렵다. 이렇게 그녀가 이다지도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린 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진짜 원흉은 어려움을 만난 국민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국가, 외모로 고용을 결정하는 것처럼 취업에 있어 부조리한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고치려 들지 않는 정부에 있었다. 두 소설 모두에게 있어서 이런 식으로 개인의 곤경과 고통은 바로 이미 구축된 사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010년의 작품들이 '하나'의 대상으로써 사회의 모습만을 표출했다면 2011년의 작품들은 실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곤경과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그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작가가 그 내ㅜ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은 이전의 작품 '타자의 탄생'에서 갇혔던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가 갇힌 이유를 헤아려보기 위함이다.

  

 즉 구멍은 왜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사회가 그 구멍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라는 걸 보여준다. 거기서 사회는 마치 공양을 받는 괴담속 괴물과 같다. 그 괴물이 강물에 던져지는 처녀들을 잡아먹음으로 존속하듯 사회도 그렇게 가장 약한 자들을 희생양삼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존재인 사회에게 구멍이란 그러므로 필수적인 존재이다. 개미핥기가 함정을 파고 그 속에 빠진 개미를 먹듯이 사회 역시 약한자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한 것이다. 구멍이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는 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잠재적 희생자란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늘 뒤쳐지거나 앞에 있거나 둘 중 하나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매머드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만 뛰고 있는 원시인들과 같다. 그것도 영원히 종착지가 없는. '고의가 아니지만'에서 유치원 교사 F의 죽음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일하게 계급적 무리를 이루지 않아서, 즉 가장 약한 존재가 되는 바람에 결국 죽임을 당한다. '조장기'의 주인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절대 새들에게 쪼아 먹힐리 없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가장 헐벗은 처지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가 된 그녀는 새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힐 운명에 처한다. 뒤쳐지면 죽는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뛰는 것으로 하루의 생명을 보장받는 게 유일한 우리의 대안이라고! 외면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 그러지 못하도록 작가는 이 모든 소설적 여정에 촘촘히 진실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외면할 수 없도록 보이는 모든 방향에다가. 그래서 진실은 잔혹한 것이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하는 의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은 그 진실을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작가가 더없이 정직하고 강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어떤 일말의 대안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주지 않기에 더더욱. 이는 두 작품 모두 죽음의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작가는 그 죽음을 묘사하는데 있어 미묘하게 해방의 순간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했다. 어떻게 읽으면 주인공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밟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레이스'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오로지 죽음만이 이 현저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만큼 절망적이라고 말이다. 그걸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한다. 피하지도 말고 핑계대지도 말고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이 소설집을 읽고났을 때 섬뜩함부터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 어느 때 사회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이제 당신이 갇힐 차례가 다가온 것일 뿐..."

 

 진실은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말자. 작가가 한 줌의 절망을 위하여 그 오랜 시간을 자맥질해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진실된 목적은 진정한 시작에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보다 제대로 된 대안의 구축은 언제나 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라야 가능하다. 진실에 대한 정직한 응시가 보다 올바른 구원을 가져온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응시이며 때문에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을 향한 그 진정한 첫발인 것이다. 예로부터 건물을 제대로 세우려면 말뚝부터 제대로 박아야 했다. 깊이 잘 박을수록 건물은 더 오래 버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뚝을 깊이 박으면 박을수록 육체는 힘들고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 소설집의 고통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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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6 21:07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