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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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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홍규. 그의 글은 처음 읽는다. 잘 마른 손수건이 되어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는 사람.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그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그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위로를 건네는 건, 그가 강해서도 마음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대학 시절'이란 글을 읽어보면 잘 알겠지만 그는 신산한 삶을 살았고 살고 있으며 우리처럼 연약하다. 그런데도 위안을 주고 싶다고 말하는 건, 그 아픔을 자신 역시 겪었기에 그것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버스 차창에 힘없이 이마를 기대고 다친 마음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물기 어린 눈에 어떤 풍경을 담아내는지를. 그러므로 그런 마음이 담긴 그의 글은 자신도 힘든 하루를 보냈으면서 그렇기에 자식이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잘 알아 곧 귀가할 자식을 위로하기 위해 집에 환한 등을 켜두고 맛있는 밥을 짓느라 여념이 없는 어머니의 등을 떠오르게 한다. 너무나 지치고 피로한 하루엔 창가에 어른거리는 어머니의 그림자만 봐도 반가울 때가 있다. 요즘 내 상황이 그래서 나도 이 책이 그렇게 다가왔다.




 저녁이라고 하니 독일의 북쪽에 있는 도시, 함부르크에 처음 갔을 때의 저녁이 생각난다. 오후 일곱시 쯤, 거주하면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려고 시내 중심 상가를 찾았다. 처음엔 내가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생각했다. 시내 중심 상가의 분위기가 마치 새벽 두 세시 같았던 것이다. 식당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상가가 문을 닫고 있었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거리 바닥에 여럿 둘러 앉아서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거나 홀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거나 했다. 거리엔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듯했다. 고요와 자유. 다른 도시의 텅 빈 모습은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데 그 곳만은 비었는데도 오히려 더 넉넉해 보였다. 거기에 취해 나조차 거리에 나온 원래의 목적을 잊고 말았다. 하릴없이 이런저런 거리를 무던히 소요했다. 그러면서 실감했다. 이것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걸,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게.


 우리에겐 저녁이 없다. 저녁은 일상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가족과 함께 오늘은 어땠나 두런두런 말을 나누며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저녁이란 말을 들으면 마음 한 켠에 왠지 따스한 그리움부터 스며드는 것 그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오가는 저마다의 사연 속에서 서로를 향한 관심과 진심 어린 애정이 영그는 시간이건만, 지금의 우리에겐 타인의 사연을 음미할 저녁의 여유가 한없이 부족하다. 돌아오면 침대 위로 시체처럼 쓰러지기 바쁘게 내일 또 아침 일찍 나가려면 시계 알람을 맞춰놓아야 한다는 것만 떠오를 뿐이니. 그저 기계를 너무 많이 가동해 고장이라도 날까 봐 잠시 식혀두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저녁. 그런 우리에게 바깥 세계나 타인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에 깃든 다양한 사연을 헤아린다는 것은 사치일 뿐이다. 그렇게 세상도, 남도, 나도 빈곤하게 보도록 길들여져 간다. 소설보다 보고서가 친숙해지고 명료하게 하나의 의미만 갖는 단어를 더 선호하게 된다. 소는 소일뿐, 소의 사연까지 헤아리는 건 피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면 빨리 판단하고 행동에 옮겨야 하는 우리의 속도를 빼앗기니까. 어느새 이익이 미덕이고 손해는 죄악이라는 걸 금과옥조로 여기게 된 우리들은 더하기만 허용할 뿐, 빼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타인의 사연을 듣고 헤아리는 건 뺄셈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내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문학은 사연을 전하는 일이다. 눈 앞의 소를 넘어, 그 소가 어떻게 오늘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숨은 내력 속으로 인도하는 여정이다. 사전 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밖에 가지지 못하는 단어들을 새롭게 살려내어 미처 우리가 보지 못한 많고도 다양한 얼굴이 있음을 알려주는 작업이다. 함부르크가 전혀 다른 저녁의 낯빛을 보여준 것처럼.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은 낱말과 더불어 사연을 쌓아가는 과정이며 내게 그건 곧 소설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전을 믿어 본 적이 없다. (...) 소설은 스스로 사전이 되어야 한다. 역사에 매정된 숱한 언어들은 사전이 아닌 삶에서 발굴되어야 하고 사전이 아닌 소설에 등재되어야 한다. 소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사전이 된다.(p. 45)


 그렇기에 우리는 차츰 문학을 멀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출판계를 정리한 보도를 보니 사람들이 문학 보다 잡서를 더 많이 봤다고 한다. 특히나 위로를 보내는 에세이를. 내 상처도 제대로 헤아릴 겨를이 없어 어떤 상처가 되었든 일단 된장부터 바르고 보듯 이런 에세이로 응급 처방만 하고 있는 판국에 하물며 타인의 상처를 보듬어 줄 틈이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문학은 바로 그 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만 보는 눈을 타인도 보라고 이끄는 손이라고. 그러나 그런 문학의 초대는 귀찮고 피곤하다. 문학이 설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문학의 사도를 자임했던 이들조차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하나 둘 떠나간다. 저자 역시 어느덧 환멸의 방문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란 문학에 환멸을 느낀 자가 가까스로 참고 견디며 하는 일임을.(p. 175)


 왜 이리 굳건한 것일까? 문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문득 보게 되니,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이 더이상 단순한 산문집으로 보이지 않았다. 4부에 걸쳐 모은 그의 글들이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에게 어떤 문학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그 선택의 근원에는 저자의 초등학교 시절, 탈곡기를 돌리다 절단되어 버린 아버지의 집게 손가락이 있다.


 당신의 손가락 하나가 내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영글어 내가 되고 소설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당신들을 속속들이 알아서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해서, 알고 싶어서, 알아야만 하므로 소설을 쓴다는 걸.(p. 79)


 그가 이렇게 고백하는 건, 그 손가락으로 인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그가 언젠가 들렀던 경주 열암곡에서 본 석불좌상의 형상과도 같다.


 그러니까 이 부처는 중생의 떠받듦이 지겨워서 스스로 엎드려버린 것만 같았다. 불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들 속으로 스스로 내려가 그들과 더불어 오체투지를 하고 싶은 거였다.(p. 105)


 그도 그렇게 아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갔던 거였다. 그걸 매개한, 절단된 집게 손가락은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간 아버지가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을 때 마주 잡아주었던 것처럼 사람과 사람을 진심으로 연결하는 존재였다. 그게 문학이 되었다. 삶과 삶을 이어주는 존재. 어느 때인가, 인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가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쉬다가 인도 여자 옆에 앉아서 그이와 타밀어를 하나도 모르면서도 말을 주고받으며 말을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 내면에 쌓인 삶을 들여다볼 수 있었기에 저자에게 "저이도 삶이 힘든가보더라" 말해 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렇게 되길 바란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겹칠 수 있도록. 서로 맞잡은 손은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의 이데아적 형상이다. 우리는 그걸 4부 '슬픔과 고통으로 구겨진 사람'에 있는 '기억이 우리를 본다'와 '늙은 농민'에서 볼 수 있다. 거기서 그는 자기 삶의 경험에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과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포개는 것이다. '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은 이러한 겹침의 순례이다. 타인의 삶이 나의 삶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인식이며 내 삶의 결만큼 타인의 것 역시 깊고도 다양한 것을 헤아리려 드는 동등의 시선이다.


그러다 보면 아이도 알게 되겠지. 같은 방향으로 걷거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비롯해 같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고통과 불안을 안고 견디는 중임을. 타인의 오른손에 나의 왼손을 살풋 얹어 서로에게 기대는 일의 아름다움도.(p. 213~14)


 이는 '문학은 서로 다른 언어로 쓰인 공통의 기억'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맞잡고 저마다 간직한 사연을 통해 네 삶을 내 삶처럼 헤아리도록 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문학이라는 수레를 힘겹게 이끈다. 그가 이웃의 은빛미용실 보조미용사를, 술 한 잔 걸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보게 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취객을 겉모습이 아니라 살아온 이력의 총체로 읽었듯, 많은 이들도 그리하길 빈다.


 사람이 흔하다니. 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연을 지녔는지 알고도 흔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흔한 것이야말로 사람이 흔하다고 말하는 태도가 아닐까.(p. 265)


 그러므로 그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외롭다고 칭얼대면 그럴수록 남에게 더 많이 다가가라 말하고 아프다고 호소하면 그렇기에 타인의 아픔을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모두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동안 겹침을 손해로 여겨 온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겨우 골방밖에 가진 게 없는데 그조차 기꺼이 내줄 수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자신의 사연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글을 계속 접하다보니 점점 더 설득이 되어갔다. 그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그의 삶과 자꾸만 겹치다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내 마음에 휘몰아치고 있는 불안, 취미가 되어버린 좌절을 그동안 나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 모든 게 날 너무 유폐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지 않을까. 환대하지 않는 사람 역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환대받지 못한다는 것.(p. 257)


 그러고 보니 타인의 삶에 허다하게 들어갔던 작가와 달리 난 남의 삶에 제대로 한 번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 사촌, 친구와 관련된 기억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잘도 꺼내는데, 나는 부모님에 대한 것조차 끄집어 내는 게 어려웠다. 누구의 말대로 추억이 재산이라면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결과만 챙기는 삶을 살다보니 삶은 사실 과정의 총체이며 그 과정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어느새 잊고 말았다. 사연을 중시하는 것은 망각 속에 매몰되기 쉬운 과정들을 건져내어 그 모든 것을 삶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토록 빈곤한 삶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보니, 어쩌랴? 이제라도 그의 조언을 마음에 새길 수밖에. 앞으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면 얼른 자고 싶은 마음을 잠시 접고 저녁의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려 한다. 삶과 사람 곳곳에 깃든 사연들을 진득하게 시간을 들여 헤아려봐야겠다. 내 마음의 빈터가 풍성한 꽃밭으로 되는 날을 꿈꾸며...


 사람을 키우는 비와 바람과 햇살은 무엇일까를 헤아리다가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폐허라고만 여겼던 그 공터에 비와 바람과 햇살이 다녀갔듯이 사람의 가슴에 다녀간 것들, 내가 알지 못한 사이에 나를 다녀간 모든 이들,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이들이 순식간에 그리워졌다. 언젠가 저 공터는 무참히 갈아엎어져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고 그 자리에 얼마나 높은 건물이 들어서든 이 기억은 언제까지고 사람의 빈 가슴은 꽃밭이 되어야 하며 거기에 꽃씨를 뿌리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일임을 증언하게 될 것이다.(p. 25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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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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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이사를 했다. 마침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는 시점과 맞물리는 바람에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머물 곳 하나 마련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작별'을 읽으면서 심히 공감하게 된 건 그런 내 사정이 단단히 한 몫했다. 여기엔 본상을 수상한 '작별'에 수상작 후보로 선정되었던 다른 여섯 편의 단편까지 더하여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물론 모두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지면으로 발표되었을테지만 어쩐지 내게는 마치 모든 작가가 미리 합의라도 하고 쓴 것 마냥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최근에 내가 뼈져리게 경험한, 정처할 곳을 찾지못한 이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사로 인해 너무 힘겨운 경험을 한 탓에 그렇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작별'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어디에서도 쉽사리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로 나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정주(定住)의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유랑(流浪)이 천명(天命)이었던 원시 시대 때부터 인류 폐부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하필이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라. 유토피아가 영구적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내 한 몸 오래도록 편안히 뉘일 곳을 가지는 건은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온 소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 욕망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다 오래 머무르고 싶어한다. 비단 그건 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직업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란 그걸 잘 허락하지 않는 게 추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렀듯,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있을만한 견고한 것들은 점점 더 많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을 넘었고 장사 좀 될라치면 건물주에게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세들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느새 올라버린 집값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발로 밀어버린 새알처럼 우리는 느닷없이 자신의 둥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화 속에 자주 나왔던 장면과 흡사하다. 발판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문득 내려다 보니 어느새 발판은 사라져 있고 남은 건 다만 추락밖에 없었던 장면.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그와 다를까?


 그렇기에, '작별' 소설집의 단편들이 '별안간 찾아온 변화'를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별(한강)'의 주인공은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손(강화길)'의 주인공 역시 불현듯 들려온 '퍽'이란 소리에 일상이 흔들린다. 그녀의 아이 역시 갑자기 사라진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에서 곤경을 불러오는 계량기의 소음은 언제 터져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당하는 난처한 상황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이 갑작스레 닥쳐온다. '동네 사람(김혜진)'에서 주인공 일행이 당했던 사고와 곤경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소돔의 하룻밤(이승우)' 역시 어느 날 문득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나그네로 인해 사유의 다양한 결이 초래된다. '언니(정이현)'에서 인희 언니가 겪었던 부당한 일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의 타격이었으며 'Light from Anywhere(정지돈)'에서 양코와 태순마저 우연히 인간환경계획연구소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걸었던 기대와 바랐던 미래에 대한 배반을 선사한다.


 모든 소설의 파국 혹은 변화가 이처럼 순간으로 이뤄지는 건, 출근하다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언감생심인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작별'에 나오는 현수 씨처럼 하루 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 뿐이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p. 49)


 피부가 모조리 노출되어 바깥 자극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 그것을 막아줄 껍질을 바라듯, 이토록 내일을 쉽사리 기약할 수 없는,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이 내뱉었던 대사처럼 오늘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더욱 정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우리만이 아니다. 세상 또한 그러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라. 다시금 여기저기서 편가르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제 이념의 힘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인지 지금은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자를 기준으로 '여기 여기 붙어라!'가 횡행하며 무리가 지어지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 상대방을 혐오하고 적대를 공공연하게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주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지고 있다.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결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종종 언급하듯이, 돈과 권력이 바탕이 된 새로운 중세적인 신분제와 종교 근본주의 그리고 인종적 우월성이 다시금 거세게 부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건 사실 근대의 계몽주의 이후 인류가 이성에 힘입어 철폐하거나 와해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향한 복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무리를 이루려 하는 이런 거대한 흐름 앞에서 그들과 다른 타자가 된다는 건 이제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작별'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그런 상황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같이 다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들. 직장에서 이렇다할 인간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작별'의 주인공은 물론, 시골로 내려와 안면 없던 마을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손'의 주인공이나, 레즈비언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희박한 마음'의 할머니 데런, 최근 이사를 와 동네 사람들과 새롭게 교제를 시작해야 하는 '동네 사람'의 주인공들'소돔의 하룻밤'에서 소돔에 사는 롯, '언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 중문과에서 유일하게 전문대에서 편입한 인희 언니'Light from Anywhere'에서 변화의 바람을 찾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양코 모두 그렇다. '손'에 나온 말로 표현하자면 '튀기'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존재감은 점점 증식되는 무리 앞에서 아무래도 권여선의 단편 제목 처럼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작별'에서 눈사람이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적으로 그걸 나타내고 있다. 눈 내리는 밤의 눈사람은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거기다 눈사람이 된 주인공의 육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부서져 간다. 한강은 재밌게도 눈사람이 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다름아닌 모든 인간적인 감정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니까 사랑, 자상함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감정들 말이다. 주인공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차츰 부서져간다. 이는 무리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자는 오직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지우고 사물이 될 때에만 지속이 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에 다름아니다. 이건 다만 문학적 연출은 아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자기보다 약한 이를 한낱 사물로 대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작별'의 현수가 당했던,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즘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려오는 이런저런 갑질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타인의 사물화'가 아니던가. 강화길의 '손' 마지막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주인공은 자신에게 감도는 이물의 내음을 없애려면 몽글몽글한 콩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콩이란 어떤 존재인가? 제삿상에 바치기 위해 걸죽하게 하나가 되도록 끓이고 빻아야 하는 존재다. 이는 곧 독립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그렇고 그런 사물 중 하나가 되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손'이란 존재는 무리 중 하나가 되라는 강요에 대한 저항이며 그 무리를 파괴하고 고유한 개체성을 건져내는 존재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이 뭔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 그 년이 없는 날 귀한 해콩을 삶는 거다."(p. 62)


 '희박한 마음'의 데런 역시 그런 사물화를 당했다. 이 단편에서 데런은 오락가락하는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그건 한 사건의 충격이 가져온 여파다. 먼 과거의 대학생 시절, 디엔과 함께 학생 식당 뒤편에서 담패를 피다 한 복학생이 여자가 담배를 핀다고 역정을 내면서 빨리 끄지 않은 디엔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 느닷없고 어이없는 공격에 그러나 데런은 디엔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복학생의 손찌검은 데런과 디엔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대로 그건 사물화였다. 그런데 이런 남성에 의한 갑작스런 사물화 공격은 할머니가 된 지금 또 찾아온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조금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칠 수 없는 계량기 소음으로 더욱 웅변된다. 이런 항구적인 흐름 속에서 데런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물이 된 것이다. 데런과 디엔이 서로의 꿈 속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존재로 나왔다는 게 이걸 증거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데런이 그 꿈에서 한 선배로부터 디엔이 죽었다는 걸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도 그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배의 요구는 사실 데런과 디엔이 사물이라는 걸 고백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물화'는 '작별'의 눈사람이 그러하듯이 아무 저항 말고 가만히 그대로 있으라는 압박에 다름아니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서 주인공들이 갓 이사 온 동네에서 한 할머니를 차로 부딪힌 것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에게서 받는 압박이 딱 이렇다. 여기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너'다. '나'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들과 되도록 갈등을 피하고 두리뭉실하게 섞이는 걸 선호한다. 기꺼이 사물이 되려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 '너'는 독자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디서나 내며 섞이기 보다는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사건을 이용하여 주인공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너' 때문이다. 평소 자신의 개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다녔던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왜 너는 사물로 있지 않느냐는 집단적 타박인 셈이다. 이는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에서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나그네에 대해 소돔 사람들이 몰려와 요구했던 것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정이현의 '언니'의 인희 언니 역시 동일한 사물화를 당한다. 편입생이라 학교에서 존재 가치가 가장 엷은 그녀를 지도 교수가 그저 번역 기계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물화는 강자인 무리에게 있어서는 자기 존재 지속의 폭력이요 약자인 타자에게 있어서는 생존 방법이다. 물론 그 생존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런 사물화를 방치할 수 없다. '작별'이 잘 보여준 것처럼 사물이 된다는 건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을 사물로만 대했던 체제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기도 했지 않은가? 개체를 그저 집단 속 도구적 사물로만 보는 파시즘의 대표적 존재인 나치가 벌였던 유태인 학살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복고주의도 따지고 보면 파시즘의 그늘이 짙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런 비극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물화에 저항하여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센 움직임이 너무 늦기전에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증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니' 후반에 나오는 인희 언니의 투쟁이다. 그는 교수의 악행에 맞서 1인 침묵 시위를 벌이는데, 아무 말 않고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작별'에서 주인공이 된 눈사람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렇게 겉모습이 비슷하다 보니 사물이 되었던 '작별'의 그녀와 인간을 증명하는 '언니'의 인희 언니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인희 언니는 사물화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많은 눈치와 반대를 받고 그리 많은 호응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희 언니는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자신도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벙커였다. 벙커는 세상의 모든 위험에게서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장 확고한 정주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 벙커는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기생하지 않으려는 태도, 귀찮고 힘들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돌파해 나가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다는 걸, '언니'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다름아닌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의 능동적인 증명이 한없이 가변적인 현실 속에서 홀로라 더욱 불안한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벙커인 것이다. 정주의 욕망은 발견이 아니라 형성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애오라지 자신에게만 기대어 삶을 경작해 나아갈 때,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마지막에서 푸념처럼 나왔던 미래 또한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이렇듯, '작별'이란 단편집은 서로 다른 작가가 서로 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에 발표했어도 비슷한 주제라는 하나의 선율로 노래하는 합창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얘기에 무리한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유를 차곡차곡 진전시키는 것이 가능한, 서툴게나마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쇄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내 말이 믿기지 않더라도 부디 '작별' 한 편만 읽지 말고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을 차례 대로 다 만나보길 원한다. 오늘의 사회란 누구나 손쉽게 눈사람과 같은 타자가 될 수 있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코 나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일상의 현실성을 잘 살린 강화길과 김혜진의 단편은 아주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당신 또한 알게 모르게 사물화의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강요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생계가 걸리고, 가족이 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라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감히 문학이 해답을 줄 것이라고 말하진 않으련다. 그러나 자신의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저런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건 고민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고민일수록 순식간에 해답으로 데려가는 엘리베이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다만 천천히 하나하나 올라가야 하는 계단 뿐. 그렇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도전해 오는 화두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곰곰이 따져 보면서 사유와 경험의 진폭을 차츰 확장시켜 나갈 때 어느 순간 해답이 도래하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작별'은 그런 계단이 되어 줄 것이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진정한 미래를 가져다 주는. 이것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동의한다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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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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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창세기에 따르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것은 명령이었고 어둠과 빛을 분리한 것처럼 모든 걸 구분지었다. 언어의 구현과 같았던 빛은 분리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물에서 육지를 분리했고 육지에서 나무를 구분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물들을 개별로 갈라놓았다. 명령자는 자신의 화신과 같은 남성 존재를 통해 모든 분리된 개체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작업을 완수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로 또 이름을 주는 자와 받는 이로 나뉜 것처럼 명명은 순수한 행위로만 남지 않았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명명(命名)에 따르는 규정이 틀이 되어 명명 받는 자를 속박했으니까 말이다. 명명은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명령처럼 금지였다. 스스로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물의 결정인 눈과 같았다. 한없이 유동의 존재였던 그것은 규정에 포박되어 존재에 내포된 다른 모든 가능성을 잃고 단순한 객체로 고정되고 말았다. 그건 흡사 부검대 위에 올려진 생명이 떠나간 주검과 같았다. ‘도둑 자매’에 나왔던 엄마의 사체와 다름없는. 눈(snow)은 물의 사체(死體)였다. 명령과 금지 위에 세워진 에덴을 신은 누구도 자신의 허락없이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둘렀다. 순응 아니면 추방일 뿐이었다.


 그런 엄혹한 독재 체제 안에서 은 최초의 저항자였다. 그는 속삭였다. 규정을 벗어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너의 바깥이 존재한다고. ‘1979’에서 교사가 본 ‘미숙한 거인’인 소녀가 교사에게 했던 것처럼, 네가 절대라고 믿는 세상이 실은 망상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뱀의 말에 현혹된 최초의 인류는 황무지로 추방되었다. 그 곳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 나온 ‘스키타이족의 무덤’이었 ‘얼이에 대해서’에 나왔던 ‘반두’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수 있는 곳. 최초의 여성 이브가 에덴에 머물러 있었다면 늘 신의 화신인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있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가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었다면 이브에게 추방은 마냥 형벌인 것일까 아니면 구원인 것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브와 그리 다르지 않다. 대부분은 내가 선택한 정체성이 아닌, 주입된 혹은 강요된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때로 그 정체성이란 옷이 나와 맞지 않아 답답하거나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뱀이 다가와 달리 살 수 있다는 바깥이 있으며 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까? 나는 이런 질문을 가진 가운데 '뱀과 물'을 읽었다.


 갑자기 창세기 이야기부터 하게 된 것은 ‘뱀과 물’의 첫 단편인,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가 그것을 많이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그 단편에서 처음 소년으로 나왔던 아이는 소녀로 밝혀지는데, 그가 소년을 가장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밤마다 ‘눈 아이’라는 빨치산 소녀에 대한 책도 읽어주는데, 그것은 저항하다 화형 당한 소녀의 이야기다. 그렇게 소녀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해 정체성을 규정당했고 저항은 곧 죽음이라는 메세지를 주입 당했다. 그런 아버지의 직업이 독립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눈 표범의 조련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소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존재라는 걸 더 뚜렷이 나타낸다. 더구나 에덴과 똑같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부재하고 있다. 그것은 선악과와도 같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야 할 존재로 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소설 중간에 등장하는 소녀가 아버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아동심리학자다. 그녀는 무엇보다 신체가 매우 장신인데, 이러한 길이는 아무래도 뱀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그녀가 소녀에게 주로 하는 것이 질문인 것도 그러하다. 창세기 속 뱀이 이브에게 주로 한 것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뱀이 그렇게 하여 선악과를 먹게 한 것처럼 여성 아동심리학자는 질문을 통해 독립적인 자기 존재의 인식을 가져왔던 선악과와 똑같이 소녀가 그때까지 잘 떠올리지 않았던 진정한 자신과 어머니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게 만든다. 그와 함께 여성 아동심리학자 소녀를 경찰로 상징되는 문명의 세계에서 추방하여 세찬 물살의 강이 있는, 물의 세계로 돌려보낸다. 뱀이 가져다 준 단절과 똑같이 말이다. 그 단절을 통한 탈주에 있어 뱀이 동기를 부여하는 새로운 인식의 근원이라면, 물은 지향점이 되는 새로운 존재의 근원이다. 이러한 닮은 점이 나로 하여금 창세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뱀과 물'의 단편들은('1979'에서 교사가  부동산 업자의 말 때문에 자신이 산 집이 실은 황무지에 있는데도 '과수원'에 있다고 믿은 것처럼.) 우리가 무엇보다 서사(敍事)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기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첫 단편이 창세기의 외양을 띠는 것은 창세기가 우리의 현재 정체성을 구현한 근원적인 서사이기 때문일 것이다.


 '뱀과 물'은 거기에 '1979'에 나오는 키 큰 소녀와 리우진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멍을 뚫고 균열을 일으키려는 것 같다. 뭐든 다 분명해 보이는 환한 대낮과 같은 세상에 구분과 분리가 불가능한 거무스름한 어둠을 가져온다. 그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어디에 서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우리는 지금의 자리가 스스로 선택한 의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사령관이 어디선가 가져와 앉힌 의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의자를 이루고 있는 서사가 어린 시절에 여겼던 것처럼 진실이라 믿었지만 그건 기실 애니메이션에 흔히 나오는, 발판이 있는 줄 알고 걸었는데 뒤늦게 자신이 허공 속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처럼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뱀과 물'은 바로 그것을 보도록 한다. 우리의 발 아래에 진짜 놓여 있는 것을.


 그런 세상은 생각한 것만큼 단일하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뱀의 존재들이다. 아버지가 사라지는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그저 단단한 벽으로만 이 세계가 실은 '물의 결정'에 다름아니라고 얘기한다. 서사가 그것을 결빙시켜 벽처럼 여기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아마도 대부분의 단편에서 학교가 공통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원하는 규격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자발적으로 순응하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기관이 아니던가. 아버지에게서 주입된 서사는 그 곳에서 더욱 확고해진다. 그럴수록 어머니로 상징되는 바깥의 존재는 사라지고 우리의 뇌리 속에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생각 또한 옅어진다. '1979'에서 교사의 동생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을 고향이라 말한 까닭도 그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은 본래 무규정적이다. 남아 있는 미래의 시간만큼이나 가능성이 무한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적히지 않는 페이지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입된 서사는 어린 시절을 하나로 고정해선 그것을 전부라 여기게 만들었다. 산포 가능한 것들을 모조리 붙잡아 억지로 한 줄로 세우곤 언제까지나 하나의 규정 속에 가둬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망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망상을 만든 이들이 형성한 세상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빛을 가져왔다고 했지만 그 빛으로 그들이 만든 것은 획일화된 세계일 뿐이었다. '도둑 자매'에 나오는 바다가 대표적이다. 그 단편의 두 소녀는 문명의 상징인 지프를 운전하는 남자에 의해 바다로 간다. 하지만 그 바다는 태고적 바다가 아니다. 유동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배출하는 곳이 아니라 현실의 모든 것에 순응하도록 만드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은 획일적 근대화의 상징과도 같은 제철소가 되어 버린다. 그렇지 않아도 그 곳은 아이들이 일률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군인처럼 행동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부리는 사냥개는 돼지 장수와 같은 이질적은 존재를 찾아다녔다. '도둑 자매'의 어머니가 그렇듯이, 그들과 닮지 않으면 매장된다. 그 세계는 결코 바깥을 허용하지 않는다. '뱀과 물'의 여교사는 그 세계에 순응하기로 한 이들의 미래에 단 하나의 가능성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자신과 같은 타자들을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규격에 맞도록 길들이는 일이다. '노인 울라에서'에 나온 것처럼 남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연필이나 깎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뱀과 물'은 이런 세상을 흔들고자 한다. 그건 우리가 안주하려는 이 세상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 단편과 '얼이에 대해서'처럼 세계의 서사를 뒷받침 하고 있는 아버지가 어느 순간 훌쩍 사라질 수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1979'가 그러하다. 소설이 왜 하필 이걸 제목으로 가져왔을까? 그 의도에 대해 소설은 딴 척을 한다. 소설은 이란의 레자 팔라비 국왕의 추방으로 그런 아버지의 사라짐이 소설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지만 정말은 다른 걸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1979년은 오랜 독재로 국민들을 이렇게 저렇게 멋대로 규정하면서 아버지로 군림한 박정희가 살해된 해이니까 말이다. 돌연한 아버지의 퇴장을, 그렇게 자기 세계의 뿌리가 잘려가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현실로 경험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망상을 진실로 간주하고 안주하려고 해도 거기엔 엄연한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기필코 찾아오고야 마는 어스름의 시간처럼 우리를 구현하고 있는 서사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언제고 하게 된다. 단편 '뱀과 물'에서 기존 정체성의 연극을 중단시킨 콜레라의 창궐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확고할 수록 우리는 의심해야 하며,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에 맞서 분열된 자아로 남아야 한다. 한 쪽은 현실을 보면서도 다른 한 쪽은 그 너머의 바깥을 보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노인 울라에서' 이후 '뱀과 물'까지 자아의 분열이 계속 나타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나는 이 분열을 순응의 태도(어느 한 쪽이 사라지고 그 결과 남은 한 쪽이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인 울라에서'의 화자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남성 중심 문화에 저항하는 뱀과 같은 존재이기도 한 '흉노 마녀'가 화형을 당하자 자신이 그대로 사라졌다(p. 146)고 말한다. '도둑 자매'에서는 '포항 미스코리아 대회'가 의미하는 바 그대로 남성 중심 사회가 원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상징하는 '뻐드렁니'를 숨긴다. '뱀과 물'에서는 아예 자신과 같은 여성을 남성 문화에 종속되도록 만드는 여교사가 되어 있다. 그들에겐 모두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순응을 위해 그 순간이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로 해석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분열은 어딘가에 다다르기 위한 매개의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라졌지만 소멸된 것이 아니고 '도둑 자매'의 어머니 얼굴에 난 네이팜탄 자국처럼 그 잔영을 남긴다는 점에서 봉합은 끝내 실패하는 것으로 봐야했다. 그러므로 분열, 그 자체가 진짜 의미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하나로 여기지 않을 것. '얼이에 대해서'나 '뱀과 물'에서 시간이 선형적으로 나오지 않듯이, 자아 역시 다양체로 생각할 것.(연속된 시간에 대한 감각과 자아에 대한 감각은 유사하다. 모두 가장 획일화된 감각이니까 말이다.) 소설의 세계가 '노인 울라에서'에서 흉노 여왕에 대한 불길한 소문으로, '도둑 자매'에선 소녀들의 노래로 그리고 '뱀과 물'에선 이런 저런 공상으로 뒤덮이듯이, 그런 균열과 붕괴의 조짐 앞에 자신을 적극 내밀 것('뱀과 물'에서 전학생 길라가 우연히 만난 스님은 이 소문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맞다, 소문은 해치지 않는다. 거꾸로 탈주를 돕는다.).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나 안의 타자를 생성하는 데 인색하지 말 것을 말이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화자가 시를 외워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읊는 것처럼. 그런 그녀가 바랐던 그대로 여행자가 되는 것. '뱀과 물'은 우리를 거기로 데려가는 여정이었다.


 때로 세상엔 너무 환해서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어스름 가운데 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 진실은 명확한 문자가 아니라 암호처럼 해독 불가능한 문자들 사이에서 보다 더 드러날 때도 있다. 유동하는 물과 같은 세상에선 뭐든 가능하다. 우리의 존재도 그러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잊고 있었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서사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맞게 멋대로 이리저리 잘라내고 비틀어 그 바깥은 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뱀과 물'은 새로운 서사를 주려 한다. 그것은 '얼이에 대해서'와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서 선로에 가로 누워 있던 것처럼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온전히 인정하고 놓아두는 서사이다. 개체를 특정 범주에 넣지 않으며, 개체 그대로 존중하는 서사이다. 자기가 원하는 옷을 타자에게 입히는 서사가 아니라 직관 속에서 타자의 나신(裸身)이 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서사이다. '뱀과 물'은 그런 이종(異種)의 서사를 주려고 하는 것이다. 태초의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건 마지막 단편에서 화자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에서 구현되어 있다. 그런 서사로 나와 다른 것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날로 깊어가는 이 시대에, 어디서나 나보다 더 큰 것에 기생하여 그들의 권력에 힘입은 정주(定住)의 열망을 가열차게 드러내는 이 시기에, 거기에 반대하여 점이 아니라 흐름이 되라고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말하길, 글쓰기엔 흐름 이외에 다른 기능이 없고 흐름은 돌연변이를 만드는 것이라 했다. '뱀과 물'도 바로 그것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뱀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것 같다. 예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환영하는 세상. 보다 많고 다양한 돌연변이의 출현이 가능한 세상. 새로이 만난 뱀의 말에 설득된 나는 그런 세상이 얼른 오기를 기꺼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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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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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주인공 삼순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삶엔 정말 그런 바람이 생겨나는 순간들이 참 많다. 하도 많이 넘어지고 상처받는 게 우리네 삶이라 그런가 보다. '82년생 김지영'을 쓴 조남주 작가의 또 다른 책, '그녀 이름은'은 그러한 신신한 삶들을 엽편의 길이로 줄줄이 엮어낸 소설집이다. 그야말로 특별하지도 별나지 않는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충실하게 반영된 책인 것이다. 가장 앞부분에 있는 소진의 삶부터 가장 마지막에 있는 초등학생 최은서의 삶까지,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연령도 직업도 처지도 다른 이들의 삶이 스펙트럼처럼 죽 나열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을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회'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모든 여성들이 심장이 딱딱해져버렸으면 하는 상황을 만난다. 소진은 직속 상사에게서 성추행을 당하고 계약서 한 장 없이 업무 내용도 시간도 페이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을 시작하여 퇴근도 제대로 못하고 회사에서 칼잠을 자야할만큼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는 막내 방송 작가도 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 때문에 갑작스런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만남조차 허락받지 못한 딸이 있는가 하면 양승태 대법원장이 재판 거래하여 대법원에서 어이없는 판결이 나는 바람에 갑자기 날아온 배상금 상환 명령 때문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감당할 수 없어 자살한 동료를 보아야 하는 전 KTX 여승무원도 있다. 이처럼 소설엔 성별로 차별받는 이만 나오지 않는 것이다. 흙수저라서, 사회적 약자라서 차별을 당해야 했던 삶도 허다한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들의 목소리를 소설집에 모아 독자에게 들려주려 했던 것 같다.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삶이라는 이유로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었고 용기를 내어 말해도 잘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기껏 반응을 받아도 그저  '너만 왜 그래?' 혹은 '괜히 과민 반응 하는 거 아니야?' 또는 '거 참 예민하게 구네.' 같은 것만 있었던 목소리들을. 그런 목소리를 채집하여 되도록 온전히 복원, 이 소설집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삶은 당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 분명 어느 순간 당신의 발길이 머물고 한참을 응시하게 되는 삶의 초상화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땐 그랬지' 하면서 잊혀졌던 추억을 소환하거나, 그 때 참 아팠던 당신을 위로하는 느낌도 받게 되리라. 그리고 대답하리라. 당신의 눈길이 머문 초상화의 그녀 이름은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다고.


 '82년생 김지영'이 그랬듯, '그녀 이름은'도 발굴에 중점을 둔다. 몰라서 내버려두기도 했고 알긴 하지만 누구나 다 겪는 흔한 것이기에 시류에 편승하여 바로 잡을 생각도 없이 무심히 흘려 보냈던 것들을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당신을 단순한 감상자를 넘어 고고학자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의 삶일 수도 있고 혹은 부모나 자식의 삶일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삶일 수도 있는 것들을 보며, 아무렇지 행한 말과 일 속에 상처 입히는 가시는 없었는지,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거라고 합리화 하면서 더 많은 상처들을 더 심하게 곪게 만들진 않았는지 따져보게 되니까 말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은 복수하려는 유지태에게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고의가 아니었고 아주 사소한 잘못에 불과했다고 항변한다. 그런 최민식에게 유지태는 이렇게 답한다.

 '모래든 자갈이든 가라앉는 건 똑같아.'


 사소하다는 것, 별거 아니라는 것은 그저 상처를 준 자에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하는 입장에선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온갖 갑질들, 비리들은 늘 이런 변명을 해댄다. 한 집의 귀한 자식을 무릎 꿇리고 억 대의 돈을 특별 활동비로 많아 사적인 일에 마음껏 유용하면서도 그리 큰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 관례였다는 변명으로 일관한다. 알고 보면 우리 사회의 적폐들은 거악에 의해 쌓인 게 아니라 이러한 사소한 범행들의 누적이다. 그 사람의 신분에 비해 저지른 잘못이 별 거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쉽게 눈 감아 준 덕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는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도 사람을 가린다고 봐야 한다. 돈 많고 위세 등등한 이들에겐 일반인이 저지르면 엄청난 죄도 별 거 아니게 되고, 뒷배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인은 아주 별 거 아닌 잘못도 크게 처벌 받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편의점에서 겨우 담배 두 갑 훔쳤고 그걸 돌려줬는데도 판사가 징역 1년을 선고하고 구속시켰다는 보도가 있었다. 같은 날 법원은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수백 억에 달하는 세금을 탈루했음에도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담배 두 갑에는 보장되는 않는 피의자의 방어권이 어찌하여 수백 억 탈루에는 보장되는 것인지. 대기업 회장 쯤 되면 그 정돈 별 거 아닌 잘못이라 그런 건가? 사소한 잘못도 별 거 아니라고 해서 자꾸 눈 감게 되면 이처럼 사소한 잘못의 범위가 점점 늘어난다. 이재용 재판처럼 우리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으로 말이다. 사소하다고 해서 방치하면 안 되는 이유다.


 '그녀 이름은'은 그런 사소함의 중요성을 차분히 되새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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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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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공포 소설이다.

 나는 정녕 그렇게 여긴다. '저스티스맨'이란 제목과 모두 10명의 희생자가 나오는 연쇄 살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 소설을 얼른 스릴러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이다. 물론 피칠갑 된 살인이나 토막 사체 같은 것이 나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설 속 살인 장면 묘사는 그닥 무서울 게 없다. 연쇄살인범은 언제나 이마에 두 개의 탄흔만 깔끔하게 남긴다. 물론 빠져나온 탄환이 머리 뒤로 피의 무늬를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만들어놓긴 하나 그건 범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일 따름이다. 이야기 자체에 무서운 것은 전혀 없다. 거기다 독자에게 현장을 체험하게 하는 형식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두고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이 소설을 공포 소설로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다. 바깥 현실에서 우리가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불안과 공포가 소설의 언어와 재현을 통해 비로소 구체화 되고 명확해지는 것에서 오는 호러(horror)인 것이다. '아, 내가 느끼고 있던 무서움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게 되었을 때 오는 소름 같은 것 말이다. 소름은 불현듯 어떤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우리 몸이 일으키는 무의식적인 반응이라 할 만하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의미의 소름을 가져다 준다. 감정이 아닌 이성의 공포, 정체 불명에서 오는 게 아니라 정체 확인에서 비롯되는 공포니까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글의 초장부터 공포 운운하느냐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내려간 당신을 위해 얼른 말하자면 그건 바로 악에 대한 것이다.





 우선 한 학자의 말 하나를 인용하고 싶다. 그 사람은 미국의 윤리철학자 수잔 니먼이다.

 그녀는 자신이 쓴 '근대 사상의 악'이란 책에서 라이프니츠로 하여금 신에 대해 변론하게 만들었던 재난이기도 한 1755년,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이 근대철학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악에 대해 사유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근대 철학자들은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를 인간이 저지르는 악과 구별했다.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자연 재해엔 의도나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런 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인간의 악 보다 자연 재해를 근대철학자들은 더 두려워했다. 의도와 목적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 사전 예방이 가능한(그리하여 포이에르바흐는 예방에 기초하여 독일 형법을 최초로 정립시키기도 했다.) 반면에 자연재해는 원인과 이유가 불명확하고 예측도 어려워서 예방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 재해를 막는 것에 보다 더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생각이 보기좋게 빗나간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아우슈비츠의 '제노사이드'였다. 이 사건은 인류에게 이제는 인간의 악 역시도 자연 재해만큼인 모호함과 혼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것의 계시였다. 여기에 대해 니먼은 이렇게 정리했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인간과 다른 인간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때 인류는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 사이에 놓인 심연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고 깊어졌다. 처음엔 유태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또 이민자이든지 간에 낙인이 찍히고 그에 따라 온갖 차별과 위해를 받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집단과 연계되어 이뤄졌을 뿐, 한 개인에 대한 심판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통신 기술이 발달하고 이제는 제자리에 앉아서 세계의 모든 곳과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광대한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자 개인마저 언제 어디서든 심판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것은 범죄처럼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사람만 해당되지 않았다. 사소한 도덕적인 잘못이나 우연히 저지르게 된 실수마저 그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실은 모든 사람이 예기치 않게 심판의 무대 위로 오를 수 있었다. 더하여 지금은 누구나 손쉽게 핸드폰으로 다른 이들을 촬영할 수 있고 그것을 각종 네트워크 매개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포할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아무런 규칙도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프로그램에.


 이처럼 사생활의 보호막이 허약해진 우리들은 껍질 없는 갑각류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조그만 악의로도 우리는 커다란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악의적인 왜곡과 편집이 행해지면 인격 살인마저 당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모두는 이런 상황을 잘 느끼고 있다. 인간의 악이라는 게 자연 재해와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실은 모두가 잠재적인 피해자이며 운이 좋아서 자연 재해에서 벗어난 것과 똑같이 단지 불운과 아직 만나지 아니하여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이것은 당연히 우리 모두에게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언제 나를 익사시키는 쓰나미가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인데 어찌 공포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비록 아직은 내게 닥쳐오지 않아서 실감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당사자가 숨기고 싶은 사생활을 누군가 멋대로 찍어 올린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며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경멸적인 명칭이 붙은 것을 보노라면 막연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말이다. 다만 나의 언어로 구체화시키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저스티스 맨'이 바로 그것에 언어를 찾아주고 실체를 부여한 것이다. 무차별이고 몰인정하며 예측 불허로 넘치는 인간의 악을, 거기서는 누구도 쉽게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것도 섬뜩하게 말이다. 막연하게 두려워만 하고 있던 것을 이토록 확실한 형태로 섬세하게 세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 소설이 공포 소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엔 연쇄 살인범이 저지른 열 개의 살인이 나온다.

 그 중 하나를 제외하고 다른 아홉 개의 살인들은 실은 최초 희생자에게서 파생된 살인들이다. 그 최초 희생자란 사회가 정한 옷에 맞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맞추느라 뜻하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그만 만인에게 '오물충이 되어버린 '보험 설계사'와 우연한 일탈이 그만 치명적인 동영상으로 남게 되어버린 여고생 그리고 엄마와 단 둘이 잘 살아 보겠다는 사소한 욕망이 파멸의 굴레가 되어버린 펜션 여주인, 이렇게 셋이다. 이 세 명의 최초 희생자에서 파생되어 각각 세 건의 살인이 이뤄진다. 그렇게 아홉 개의 살인이 되는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들은 연쇄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최초의 희생자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 즉 '파생된 살인'의 피해자야 말로 연쇄 살인범이 죽인 자들이다. 그런데 최초의 희생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뭔가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우연이, 또 때로는 별 것 아닌 흥미가, 또 때로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단순한 욕망이 일으킨 결과일 뿐이었다. 공포는 바로 여기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누구든 최초의 희생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든 파생된 살인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속에서.


 현대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러한 악의가 지니고 있는 무작위와 무차별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세 사람에게 각각 얽힌 세 개의 살인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형식으로 만들었다. 처음의 보험설계사는 자신과 불화 중인 '잿빛 무지개'와 같은 사회에서 비록 위태로울 망정 그래도 간신히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오물충'이 되기 바로 전 도로 위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장면은 바로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희생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경로를 걷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적응의 방식은 달랐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틀을 벗어나 삶을 주체적으로 형성하려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선 주체화의 경로는 죽음의 심판이 예정된 길이었다. 어째서?


 이 의문의 답은 조금 미루고 두 번째의 여고생을 일단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날로 쌓여가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더위를 피해 냇물로 뛰어들듯 일탈을 감행했다. 냇물 속 수영이 실은 다시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듯, 그녀의 일탈도 본래는 자신의 삶을 더 잘 지속하기 위해 잠깐 뛰어든 '아른아른한 물결'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녀를 피해자로 만든 가해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들 그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일탈이자 그 일탈에 대해 그녀가 품었던 것과 똑같은 별 것 없는 흥미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 펜션 여주인도 다르지 않다. 좀 더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에 스스로 취했던 '연보랏빛 안개'와 같은 소박한 욕망이었고 그것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한 것일 뿐이었다. 그녀의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악행의 수위는 그녀와 많은 차이가 났을지라도 그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가 행한 이유 그대로 당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되는 것도 너무 엇나간 상상은 아니지 않을까?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는 우리에게 마치 어떤 유형들을 보여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유형들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실 이런 유형들은 알고 보면 과거 우리가 한 때 취했거나 현재 우리가 취한 모습이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보험설계사처럼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나와 맞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맞춰 살아가며 또한 여행사에서 날아오는 팜플렛을 보며 여기 한 번 갖다오면 앞으로의 일상을 더욱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으로 일탈을 꿈꾸고 보다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욕망에 따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 우리이기에 소설 속 희생자들이 결코 나와 별개로 여겨지지 않고 그런 자들에게 가차 없이 무자비한 죽음을 선사하는 이 소설이 한층 더 섬뜩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항변하고 싶다.

 왜 이런 우리의 경향과 사소한 동경 그리고 욕망으로 심판 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처음의 경우엔 사회가 강요하는 것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 하려다 당하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게 아닌가? 작가의 전작 '스파링'은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저스티스맨'의 심판은 모순이 아닌가? 마치 그런 반론을 작가가 예상하기라도 한 듯, 작가는 하나의 살인을 더 부가한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열 번째의 살인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누가 희생되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 이유만 말하겠다. 그것은 오직 타인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드높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 살인의 진실과 그 이유는 소설 거의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데, 거기서 다시 아홉 개의 살인으로 되돌아가 보면 그 모든 상황마다 바로 이런 욕망이 깔려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형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을 추동시킨 기저에는 바로 이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그 욕망을 바로 '권력 욕망'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이런 권력욕이 전혀 통제되지 않고 '저스티스맨 카페'에 몰려든 수많은 누리꾼들처럼 날로 확장되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과가 바로 '불꽃' 장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 재해와 같은 인간의 악이 메가 쓰나미처럼 일어난, 한 마디로 지옥도이다.


 잭슨 폴록의 '불꽃'


 사실 이 '불꽃' 장은 뜬금 없는데, 소설의 이야기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분명 누군가의 상상일 터이나 그 주체가 특정되지도 않는다. 분명 누군가는 이 '불꽃' 장 때문에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설의 골격을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작가가 그런 약점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장을 구태여 집어넣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이 장의 묘사가 아홉 개의 살인에 동일하게 흐르고 있는 본질적인 욕망의 최종적 결과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그 의도란 분명 그러한 비극적 결과를 막기 위하여 작가가 제시하고 싶은 대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

 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바로 열 번째 살인의 이유가 된 권력 욕망, 즉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드높이고 싶은 욕망을 적어도 자제하거나 최대한 없애는 것이다. 첫 유형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이들이 심판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특히 세 번째 희생자 기자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기자는 그동안의 성공에 염증을 느끼고 이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순간(그렇게 자신의 삶에 온전히 주체가 된 순간)에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전작 '스파링'과 완전히 모순되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자가 처형되는 것은 그렇게 주체적으로 살기를 결심했으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여전히 타인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지향점은 달라졌을지 모르나 가고자 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으므로 단죄의 총알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의 주체로 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따라서 '저스티스 맨'은 '스파링'과 비교해 보다 확장된 시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파링'에서 삶의 주체가 되는 중요성에 대해 말했다면, '저스티스 맨'에선 단순히 주체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달리 더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력 욕망의 배제가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이다.


 작가는 지금 이 시대에 대해서 살인자의 목소리를 빌어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정의한 바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지혜 자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도 그들에겐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의 감정에 따라 맹목적으로 타자의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배척했다. 그러니 그것은 이중적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양면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p. 242)


 이처럼 모든 잣대가 사라진 시대이지만 사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남을 이용해 나를 높이라는 권력 욕망이다. 어쩌면 그 명령이 너무가 강고하기에 거기에 방해되는 모든 잣대들이 사라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 독일 나치의 아우슈비츠 만행 또한 결국엔 유태인 말살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영속하려 한 것이었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지금 자신을 공포에 젖게 만드는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인간의 악 또한 권력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런 욕망의 근절을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더욱 피부로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모든 악행이 끝내 똑같은 형태로 부머랭이 되어 돌아온 것에 있어서도 작가가 거기에 뒤집어 놓은 형태로 결부시킨 또 다른 해법 하나를 우리는 찾을 수 있다. 악행이 그런 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우리의 선행 역시 그러하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타인을 나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대할 때, 나 역시 타인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것이며 이런 가운데 우리의 불안과 공포 역시 한결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게 암시되어 있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문득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


 '저스티스 맨'은 피해자로 자임하고 있지만, 그래서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바깥만 탓하고 있지만 거기에 가해자로서의 우리 책임은 없는지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듯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궁극엔 왜 이 모든 악의 사슬을 끊기 위한 첫 발자국을 바로 나부터 내딛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기 위한.


 소설의 마지막은 비행으로 대지의 중력을 곧 벗어날 공항(그것은 곧 규격화된 정체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해방되는 의미이기도 하다.)에서 하염없이 자신의 의문과 사유에 빠져 있는 살인자의 모습이다. 가장 타자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전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삶을 만들어 나간 존재가 소설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거듭 되돌아 보면서 과거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다. 왜 이 모습을 마침표로 찍었을까 궁금했다. 분명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길 바라는 마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일 게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그의 말마따나 '결계처럼 제한된 규범의 세계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자신의 영혼을 되돌아 보는 일(p. 9)'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작가의 제안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저스티스 맨'은 토템과 부적이 되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의 여정을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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