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한 마디로 툇마루의 소설이다. 소설 자체가 툇마루에서 시작되어 툇마루로 끝난다. 그래서 마치 소설이 가지는 전 우주가 오로지 툇마루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툇마루란 어떤 공간인가? 

 완전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바깥도 아닌... 경계의 공간이다.

소세키의 소설 '문'은 마치 그 위에 걸쳐 앉은 듯한 소설이다.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나갈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정쩡한 자세로... 소세키는 결단을 주지 않는다. 마치 그 툇마루가 전부인 양 애써 그 곳에 그저 머무르려 할 뿐이다. 연못 속의 겨울잠을 자는 잉어들 처럼 한없이 낮고 조용하게... 그는 왜 이런 식의 문학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계의 공간에 일부러 머무르려 하는 것일까?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개인적 이유 다른 하나는 시대적 이유이다.

 

 먼저, 개인적 이유. 소설 '문'이 연재되던 당시 1910년. 그 전에 한국과 만주 등지를 돌아보고와서(초반의 이토 히로부미 이야기는 이 여행의 체험이 은연중 배여난 것이기도 하다.) 새로이 연재를 시작하려던 그에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가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일이었다. 그는 두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고 결국 그 해 8월 슈젠지 온천으로 요양을 가게 된다. 거기엔 슈젠사란 절이 있는데 바로 이 절이 소설 '문'에서 소스케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최후로 찾았던 산문의 모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보듯이 사실 '문'의 이야기는 나쓰메 소세키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많이 반영된 소설인 것이다. 바로 이 병으로 쓰러진 일과 슈젠지에서의 요양이 그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느낀 것을 소세키는 하나는 에세이로 다른 하나는 소설로 나타내었는데 그 에세이가 바로 '회상'이며 소설은 '문'이다. '회상'을 읽어보면 그 때의 체험이 얼마나 소세키로 하여금 인생을 달리 보게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자신을 치료하던 의사가 그 치료중에 숨진 일이다. 소세키는 그 에세이에서 치료를 하던 이는 죽고 정작 치료를 받던 자신은 더 오래 살게된 삶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한다. 묘하게도 의사가 숨졌을 때 또 하나 소세키에게 의미있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가 바로 소세키 자신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이며 우리들에게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으로 유명한 게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이다. 소세키는 말한다. 의사는 자신의 몸에다 빛을 준 사람이었고 제임스는 자신의 의식에 빛을 준 사람이었다고... 그렇게 빛을 주었던 사람들은 죽고 그 빛을 받았던 자신은 살았다고... 그 아이러니할 정도의 삶이 가진 예측불가성 앞에서 소세키는 하루 하루 그 때 그 때의 일을 기억할 결심을 한다. 그것이 바로 에세이 '회상'이 되었고 '문'에서의 인상적인 그 마지막 대사 장면으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하나의 지배적인 시각이 되어 결국 '문'을 지배하는 조용하고 낮게 웅크린 삶으로 형상화 되었다.

 

소스케는 튓마루로 나가 앉아 길게 자란 손톱을 자르며 "응, 그렇지만 또 겨울이 올거야"라고 대답하고 머리를 숙인 채 가위를 움직였다.(P. 277)

 

 삶의 예측불가성은 소세키에게 더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최상의 삶임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슈젠지에서의 요양을 그 가장 행복한 시기로 기억하는데 무엇보다 별 뜻없이 그냥 한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 되었을 경우 가장 불만스런 부분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 소스케일 것이다. 소스케는 현대인이 보기에 정말 한심할 정도로 무르다. 매사에 적극성이 없고 그 어떤 곤란한 사건을 만나도 그저 알아서 지나가 주기만을 바란다. 그저 드러나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이 모토이기도 하다.  늘 '적극적이 되라' '자기 것을 잘 챙겨라'하는 말만을 들어온 우리들로서는 이 같은 심해의 아귀 처럼 웅크린 소스케의 삶이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어떤 땐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소설 중반을 넘어서면 소스케가 왜 그러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알고보니 젊은 시절의 소스케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의 앞길을 착실히 개척해나가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사랑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절친한 친구가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현재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었다. 소설만 읽으면 이것은 그저 문학적 형상화 같지만 당시의 소세키의 삶을 알고 읽으면 이것은 그야말로 요양중인 소세키를 그대로 담아낸 모습이 된다. 상상해보라. 병을 가지고 있는 자의 일상이 어떨지? 소세키의 병이 바로 소스케에 있어서는 죄의식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 때 죽음 가까이 갔던 사람은 속세인들이 삶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보지 않을까? 그리고 그 경험이 가져다 준 적극성의 무용함에 대한 인식 때문에 조용하고 한적한 삶이야 말로 가장 의미있는 삶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소설 '문'에서 한 편으론 낯설게도 느껴지는 조용한 은둔의 삶은 그야말로 소세키의 이상적 삶의 형태였던 것이다.

 

하루 종일 텅 빈 방에 누워서

잠자코 큰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변함 없네

종일토록 그 자세로 하루를 보냈네

 

 (당시 소세키가 적은 시, 에세이'회상'에서 인용)

 

 

 하지만 소세키가 그러한 삶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소세키의 문학은 '사소설'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지만 소세키 자신은 문학을 개인적 영역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당시 근대에 의해 소생된 소설이 다 그랬듯이 소세키에게 있어서도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시대와 교감하는 장(FIELD)이었다. 그렇게 이 소설엔 시대적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소설이 그랬듯이 근대화된 일본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 자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건 영국에서의 체류 덕분이었다. 그 때 영국에 머무르면서 소세키는 근대화가 가져오는 장점만큼 단점 역시도 보게되었으며 가장 불안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 속도였다. 교통기관의 빠른 속도, 놀라운 변화의 속도 그리고 한없는 분주함. 바로 그런 것들이 소세키에겐 염려의 근거였고 과연 이런 것들이 일본에게 긍정적인 게 될 수 있을까 생각하게 한 비판의 씨앗이었다. 때문에 소세키는 이렇게 자본주의적 사고 방식으로서는 전혀 용납되지 않을 정반대의 삶을 하나의 모델로서 내어놓는 것이다. 왜 서구의 근대는 마치 소스케가 사는 집 툇마루 앞에 우뚝 선 절벽과 같아서 언제 파묻힐지 모르는 위험을 간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회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실제 그런 집에 살고 있던 사촌이 절벽이 무너져 죽었음을 밝힌다. 그런 면에서 장밋빛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서구 근대의 외침은 소세키에게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예측불가능성 앞에서 그러한 장밋빛 미래란 의미없는 공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완성된 삶이며 무엇보다 그 어떤 목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한적함이야 말로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어떤 목적이든 일단 그것이 개입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유로 소세키는 소스케가 외부로 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모든 시도를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문'을 전혀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지금은 정형화 되어버린 서구 자본주의적 일상을 전혀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시각으로써 말이다. 말하자면 소설 '문'은 이제는 우리가 그 옳고 그름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아비투스화 되어버린 이 일상이 과연 제대로 된 일상인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참조점인 것이다. 허먼 멜빌이 '필경사 바틀비'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인간형의 하나로서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해낸 것과 똑같은 일을 소세키는 소설 '문'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스스로 병을 안고 살아가는 가운데 체득한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바로 그 한계지워 진 삶이 오히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그는 삶이 아무런 한계를 가지지 않는 것 보다는 그러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삶엔 더 낫다고 본다. 소스케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그 한계의 상징과도 같다. 바로 그 한계 덕분에 소스케 역시도 소설 마지막 대사 처럼 삶에 대해 더 깊이있는 시선을 가지게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소세키는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완전한 바깥도 아닌 툇마루라는 경계에 기꺼이 머무르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경계라는 한계에 일부러 거주하면서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는 태도가 한 마디로 소설 '문'이 자리잡은 '툇마루'인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이 2012-04-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의 인생과 관련해서 아주 깊이 있게 읽으셨네요. 그런데 <문>이 새롭게 번역되었나 봐요? 제가 읽은 건 저렇게 고급스러운 양장본이 아니었거든요.
글 중에 인용하신 <회상>은 어디에 실려있나요? 소세키 책은 다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 실려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요.

오드득 2012-04-13 22:56   좋아요 0 | URL
아, 반딧불이님 제가 너무 답글이 늦었네요. 선거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이제야 서재에 들르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었네요. 말씀 감사합니다.^ ^ 제가 읽은 것은 이번에 비채에서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회상'은 하늘연못에서 나온 '몽십야'에 실려있습니다. 책은 소설이라고 해 놓았는데 사실은 에세이랍니다. 빨리 알려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이렇게 늦게 알려드리게 되어 죄송하네요. 아무튼 들러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딧불이 2012-04-14 13:57   좋아요 0 | URL
밑줄 그어놓을 것을 보니 분명 읽었던 모양인데....어디가서 소세키를 좋아한다거나 완독했다는 말은 못하겠어요.^.^
덕분에 <회상>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소세키 소설의 단초가 되었을법한 내용들이 참 많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