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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스치는 바람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뿌리깊은 나무'와 '바람의 화원'으로 지금은 한국 팩션계에 있어 최고 자리에 서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작가 이정명의 신작 '별을 스치는 바람'은 다시 한 번 그가 얼마나 글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믿는지 또한 그가 작가로서 가지는 신념이 얼마나 강한지 깨닫게 한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는 '드릴'과 같은 작가라 생각된다. 그렇게 늘 한 곳을 맴돌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드릴처럼 이정명 작가의 작품들 또한 궁극적으로 다루는 세계의 모습과 주제는 늘 유사한 언저리를 맴돌지만 그 깊이는 좀 더 파고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정명 작가가 다루는 세계의 궁극적은 유사성은 무얼까?

 

 우선은 항상 닥쳐올 해방 직전의 어둔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그것이다. 그의 소설이 그려내는 시대는 마치 동 트기 직전의 여명과도 같다. 진정한 변화가 도래하기 전의 과도기. 이정명의 소설은 바로 그 위에서 잉태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 대왕의 한글 반포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정조가 정적의 반대를 막고 그의 뜻을 펼치기 직전이었으며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해방 되기 직전을 그린다. 그렇게 그의 소설들이 그려내는 시대는 어둡지만 그것은 곧 몰려나갈 어둠이다. 이는 그가 역사에 대해 낙관적임을 시사한다. '닭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신념이 굳게 배여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대의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곧 걷혀질 어둠의 장막이기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막을 누가 걷는가가 된다. 바로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 역사를 보다 희망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 그것이 작가가 정말로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존재들이 하늘에서 저절로 땅으로 뚝 떨어졌을 리는 없다. 무언가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음이 분명하다. 토인비가 '역사의 연구'에서 그랬듯이 존재에 대한 탐구는 저절로 그 존재들을 생성시킨 힘에게로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 그것을 담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된다. 말하자면 주제가 되는 것이다. 그 힘을 드러내는 계기가 하나의 살인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여전히 반복되는 유사성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자꾸만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연상된다. '별을 스치는 바람'에서는 더욱 그랬다. 철저하게 책과 글이 통제된 후쿠오카 감옥은 그대로 중세의 수도원 같았고 그 같은 압박에 저항하여 비밀리에 도서관으로 통하는 통로를 만든 것이나 교묘하게 이중의 의미를 가미함으로써 검열을 피하는 것 또한 아무리 통제를 해도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던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따지고 보면 이정명은 이 작품에 이르러 가장 어둠 속으로 걸어간 셈이다. 일제 시대 그것도 감옥이라는 철저한 어둠으로 말이다. 그는 왜 하필이면 이 어둠을 가져와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어쩌면 이 시대적 설정 자체가 거꾸로 그가 이 작품을 통해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아무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 해도 변화의 싹은 태동하며 바로 그 태동으로 인해 결국은 절망의 어둠마저 끝내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즉 앞서 말한 그 세 꼭지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가는 이정명의 소설들 중에서 이 소설은 '그 힘'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잡초처럼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라도 잘 자라나는지 또한 한 번 자라나면 쉬이 제거되지 않고 궁극적인 변화를 일으킬 때까지 얼마나 질기게 견뎌가는지 그것을 확신에 찬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소설에서 그 힘은 오로지 그 힘을 만들어내는 주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과 그의 뜻에 동조하는 학자들로 나름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였고 '바람의 화원'에서는 예술하는 주체들로 그들 역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자들이었다. 그렇게 전작들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 자체를 하나의 수레 로 비유한다면, 앞에서 끌고 나가는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 '별을 스치는 바람'이 보다 드러내려 하는 것은 거기가 아니다. 그 보다는 뒤... 그러니까 뒤에서 수레를 미는 기층 민중들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말해 그 힘을 궁극적으로 변화를 가져오는 진정한 동력으로 만드는 민중적 차원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별을 스치는 바람'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이정명 작가의 드릴은 가장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간 셈이다. 이를 위해 일제 치하를 시대적 배경으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야 했던 시대를. 그리고 바로 그것은 은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가 바깥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든지간에 '죄수'라는 단일한 신분 밖에 가질 수 없는 형무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윤동주나 최치수를 비롯하여 조선 사람들은 바깥에서 그 무슨 일을 했던지 간에 일본인들에게 '악랄하고 교활한 조선인'으로만 불리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인들에게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배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기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얼른 생각하기엔 이러한 묘사는 우리가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건 아니다. 작가 이정명이 이런 묘사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있든 간에, 소설 속 후쿠오카 감옥에서 조선인들이 공산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민족주의자이든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였듯이, 지금의 우리들도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타고난 지연에 관계없이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이다. 바로 이 하나된 운명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그는 일부러 가장 어두운 시대로 들어가 그것도 가장 깊은 어둠의 장소라 할 수 있는 '형무소'를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선택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 자체에서 그가 보다 민중적 차원에서 그 힘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셈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장치를 아울러 첨가한다. 하나는 조선인들이 부르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어가 철저히 금지되고 그 어떤 조선인 죄수들도 책을 소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조선인들이 휴식시간 내내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나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소설이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둘 모두 보통 사람들의 참여라는 점이다. 합창은 물론 '함께'라는 차원이 강조된 것임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탐정 역할을 맡고 있으며 결국엔 윤동주를 이해하게 되는 일본인 간수 와타나베 유이치는 윤동주에게서 일본 고관들이 참석한 앞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조선의 독립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노래를 불러서 그것이 장차 일으킬 파장을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셈이냐고 묻는다. 거기에 윤동주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 내가 생각한 건 최고의 무대뿐이야." (P. 91)

 "이 노래는 남의 나라 형무소에 갇혀 있는 조선인들의 마음을 가장 절절하게 표현해 줄거야. 조선인이든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이탈리아인이든 노래에 담긴 진심은 듣는 사람에게 분명히 전달될 수 있어" (P. 92)

 

 그에게 최고의 무대는 모두가 다 함께 그들의 진심을 노래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의 시가 조선인과 책에 대해 더없이 악랄했던 스기야마 도잔을 변화시켰듯이 일본의 고관들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하나가 아니라 함께가 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다. 민중적 차원으로의 확장은 바로 여기에 드러난다. 이는 다음 책의 보존에 이르면 더욱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독방행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단지 자신들을 위해서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일주일 동안 최대한 많은 분량의 책 내용을 외웠어. 독방에서 나간 그들은 감방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을 전달해 주었지. 책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기억하고 한 사람이 기억할 수 없을 때에는 두 사람, 세 사람이 나누어 기억했지. 한 사람이 한 파트씩, 아니면 몇 페이지씩 나누어서 기억한거야. 짧은 시를 몇 편씩 외워서 시집 한 권을 완성하기도 했어.(P.173)

 

 이렇게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초래될 변화의 힘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보존되어 나간다. 이 설정이 보다 정교한 것은 이것이 그대로 윤동주와의 일대일 대면을 통해 변화하게 될 스기야마 도잔과 와타나베 유이치 각자와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루며 그것의 보다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합창'은 피아노 조율사였던 스기야마 도잔의 확장된 형태이며 '책의 보존'은 헌책방 일을 하며 책벌레이기도 했던 와타나베 유이치의 확장된 형태라는 것이다. 이 둘이 각각 집단적 형태로 진화한다는 것이 이 소설이 무엇보다 그 변화를 이끌어내고 지속시키는 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 바탕에 민중적 참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바로 이 측면이 이해되어야지만 왜 하필이면 와타나베 유이치라는 일본 제국주의 시대 가해자였던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그 까닭이 제대로 드러난다. 뿐만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시를 통한 변화와 민중의 참여를 역설하는 이 작품이 하필이면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는지 또한 드러난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윤동주가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이중의 의미를 지닌 교묘한 문장을 썼듯 바로 그러한 이중의 의미를 가진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윤동주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이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설이다. 윤동주가 소설에서 시어가 삶의 비유임을 말했듯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 역시도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시대의 비유인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참여가 강조된 것이며 그래서 그 부분은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럼 먼저 와타나베 유이치로 들어가 본다. 그는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는 시를 사랑한다. 그에게 전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이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이 싫지만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다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윤동주를 만나서 그는 변한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시민들이 아니라 권력을 쥐고 있던 몇몇 미친놈들이었다. 누구도 거리를 활개 치는 그 미친 개들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때려죽이지도 않았다. 결국 그 미친개들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이 전쟁에 죄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직접 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죄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막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를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가려는 자들의 음모를 알지도 못했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거나 알고도 모른척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P.224)

 

 나는 감히 말하지만 바로 이 말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정명 작가가 우리 모두가 공동운명체임을 일깨우는 것도 변화를 가져오는 궁극적 힘이 바로 모두의 적극적 참여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와타나베 유이치의 깨달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유이치 그는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역사적 비극에는 단지 방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비극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세상을 고통과 지옥으로 만드는 상황에서는 무관심 또한 죄악임을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을 쓸 때 이정명 작가가 청자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당연히 오늘의 우리였다고 생각된다. 사실 소설 속 후쿠오카의 세계는 그대로 지금 우리 세계로 옮겨 놓아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정명 작가는 아마도 그 동일성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듯 후쿠오카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를 첨가한다. 그런데 그 음모가 오늘날의 뭔가를 연상시키게 만든다. 그 음모로 인해 사람들에게 주로 일어나는 현상은 의식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기억을 잊고 생각을 잊으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는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제대로 된 진실을 감춰서 민중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를 막으려는 미디어 통제 그대로가 아닌가. 그 후쿠오카 형무소가 보다 강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 조선인들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었듯이 지금의 우리나라 또한 소수의 권력자들이 더 강해지기 위해서 우리의 의식과 생명을 좀먹고 있지 않나...  아니 그대로다. 소설 속 일본의 잔학한 행위들은 그대로 지금 권력자들이 하는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더구나 스포일러가 될까봐 말하지 못한 진짜 스기야마 도잔의 죽음에 대한 비밀마저 그렇다.

 

 이정명은 사실 지금 우리 시대와 그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이중의 의미가 간직된 문장을 쓰던 윤동주의 모습은 바로 이 진실에 다다르기 위한 단서였던 셈이다. 그는 앞에서 인용한 와타나베 유이치의 말을 통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어둠을 바꾸길 원한다면 무엇을 해야할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니 작품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되새겨준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국 이 소설은 그러한 변화는 참여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당신이 뭔가 바꾸기를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부터 하라는 것이다.

 어둠에 눈감지 말고 못 본척 말고 뭔가 이대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책의 보존을 위해 조선인 죄수들이 몇 페이지씩 나누어 암기했듯이 그렇게 시대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뛰어들라는 것이다. 그 죄수 하나하나가 외운 양은 보잘 것 없었는지 모르지만 결국 모두가 참여하여 그토록 많은 책들을 보존할 수 있었듯이 우리가 바라는 변화 또한 그렇게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시에 대해서, 윤동주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의 어둠이 아로새긴 망막의 아픔을 느끼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 이 순간 진정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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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아멘 아멘 - 지구가 혼자 돌던 날들의 기억
애비 셰어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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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나이 때 정말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작은 아마도 추석 때 성묘를 다녀와서 일 것이다. 무덤을 보면서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인지했던 것 같다. 아무튼 다녀와서 죽음에 대해 나름 진지하게 상상했었다. 죽음이 영원한 결별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도저히 어떻게 해서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영원히. 그런데 어떻게 영원히 나로 있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니까 지금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생각을 하고 있는 이 나라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과연 내가 나를 생각하지 않은 채 영원히 있는다는 게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그러한 것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확실히 좀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다. 결별로 인한 슬픔 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로 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그런 것들이나 상상해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죽음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이성으로 헤아리기 힘든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존재 자체가 삶의 절대적 외부에 자리잡고 있기에 우리 사유에 있어 언제나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영원히 불가해한 것이기에 그 반응에 있어서도 천차만별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자끄 드와이용 감독의 영화, '뽀네트'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4살짜리 여자 아이다. 감독은 주인공을 연기하는 여자 아이의 실제 나이 또한 꼭 네 살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고 한다. 연구 결과 5세 이상이 되면 죽음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문명에 포획된 의미의 죽음이 아닌, 언어 이전의, 사회적 의미 이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시선을 담으려 한 것이다. 바로 거기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떠난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는 당연히 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그 상실의 '영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가 돌아올 것을 굳게 믿으며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결국 엄마의 무덤으로 몰래 가서 파헤치기까지 한다. 아이에게 죽음은 인식할 수 없는 무한이 입을 벌린 것과 같았다. 그것은 아이가 절대 이해란 이름으로 포획할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레비나스가 말한 대로 '타자란 바로 무한성'을 입증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음이란 '뽀네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었다. 내가 절대도 넘어설 수 없는 경계 저 편에서 내 한계를 깨닫게 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죽음은 대부분 우리에게 부정의 존재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한계를 깨닫게 하고 내 자아의 영역을 위축시키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지키고 싶듯이 죽음을 밀어내고 설사 죽음과 맞딱드리게 된다고 하더라도 강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더욱 자신의 자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원한 상실을 열어보인 무한의 틈을 의식적으로 없는 것 처럼 메우려든다는 것이다. 마치 죽음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네델란드의 세계적 석학, C. A. 반 퍼슨은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에서 죽음에 대한 서양의 태도를 기준으로 역사적으로 세 단계로 나눈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현대를 죽음을 망각하는 태도로 정의했다.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1세기 전만 하더라도 다반사로 있었던 일이지만 이제 죽음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겉으로는 죽음과 애도를 감추려는 사회 규칙에 의해, 안으로는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인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이웃이 함께 슬퍼하는 일도 이제 없어졌거니와 상복을 입는 일도 이제 드물게 되었다. 진정제나 흥분제의 사용으로 주의 사람은 물론이고 죽어가는 당사자 조차도 죽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죽음도 '소비 가능한 것(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C.A 반 퍼슨, '급변하는 흐름속의 문화' P. 213)

 

 현대에 이르러 유독 이렇게 의도적으로 죽음을 은폐시키고 망각하려 드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나'라는 자아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확장되어 가는 것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그 점점 강해져만 가는 자아에게 있어 유일하게 '한계'라는 상처를 입히는 절대적 타자인 죽음이기에 은폐와 망각을 통해 상상적으로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고전 추리 소설이라면 흔히 나오는  탐정의 마지막 추리 쇼와도 일맥상통한다는 게 흥미롭다. 거기서 탐정은 꼭 예전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세부에 있어서까지 정확하게 복원한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과 같다. 아니,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추리 소설은 에드가 알란 포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과 더불어 태어난 근대의 산물이고 그런 추리 소설에 있어 범죄란 늘 진보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파하는 근대성에게 상처를 입히는 얼룩 같은 존재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즉 추리 소설의 시간 되돌리기 추리쇼는 말하자면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복원해 그 상처가 마치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드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한 마디로 은폐와 망각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과 범죄에 대해 근대가 보여주는 태도가 동일하다는 것은 근대에 의해 태어난 자아라는 주체성이 타자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된다. 즉 은폐와 망각이라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이 바로 기본적인 태도라는 사실이다.

 

 즉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대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것은 '나라는 '자아'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그 절대적 타자가 열어보이는 무한 앞에서,  나의 한계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서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끔 강요하는 무한 앞에서 어떻게 내게 존재하는 절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나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것인가가 더없이 중요한 물음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대로 집착이요 그래서 하나의 강박이다. 그것도 내 쾌락의 원인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벌이는 것이기에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도착증적 강박이다.

 

 정확히 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 이라는 소설이다.

   

 

 

 

 이는 정확한 의미에서 소설은 아니다.

 물론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기에 실려있는 내용들은 작가 애비 셰어의 실제 경험과 내면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의 고백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애비 셰어는 자신이 사랑했던 고모와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이 소설에서 정직하게 밝힌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증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불행이 바로 자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강박증이다. 제목의 '아멘 아멘 아멘'은 현실속에서 그녀가 불행한 사건을 만날 때마다 올리는 기도이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늘 빌며 그것을 위해 노력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모든 불행의 씨앗이 되므로 행동을 조심하는 것. 또는 길가의 날카로운 쇠붙이나 유리 따위를 줍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행여나 행인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말 강박적으로 노력한다. 오로지 세상이 불행없이 이대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죽음이 가져온 영원한 상실, 그 변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죽음에 대한 반응은 무엇보다 자아의 보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강박적인 노력들 역시도 그와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녀가 세상에 불행이 없기를 바라며 하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싶다는 그런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러한 현재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겠다는 열망은 그대로 변화에 대한 거부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일어났던 진정한 변화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애비 셰어의 그러한 강박적인 노력은 사실 그녀에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아버지의 죽음을 지우고 그것이 없었을 때의 세계를 되돌리려는 노력에 다름아닌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음이 각인시키는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애비 셰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의 의미다. 그녀는 여러가지 리스트를 만드는데 그러한 계보의 작성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증명했듯이 근대에 이르러 탄생한 것이었다. 즉 이는 자기 세계의 확고한 보존을 드러내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죽음이 열어보인 자기를 삼키려 드는 무한 앞에서 강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분이라면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애비 셰어는 정말 많은 죄책감을 보여준다. 그녀는 세상에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 다 죄책감을 느낀다.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과 타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대로 애비 셰어 역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애비 셰어의 죄책감이 일종의 도착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녀는 왜 세상 모든 불행한 일에 끊임없이 강박적일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가. 이 질문은 죄책감의 진짜 목적을 묻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애비 셰어에게서 혹시 지젝이 '까다로운 주체'에서 말했던 중세의 수사가 신자들에게 금욕적일 것을 요구하여 유혹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유혹에 대한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집요하게 떠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나? 과도한 선이 오히려 과도한 악을 창조하는 모순을... 푸코는 권력 자체가 저항을 생산한다고 말하고 라캉은 금기 자체가 욕망을 낳는다고 말한다. 지젝은 이런 말을 한다.

 

  법 자체야 말로 죄의 영역이다. 법을 위반하려는 사악한 충동들의 영역을 열어놓고 지탱하는 곳이며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도착적이며 병적인 만족감을 얻게 만든다. 그리하여 법의 지배의 궁극적 결과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그 모든 초자아의 비틀림과 역설들로 이루어진다.: 나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자기-반성적 전회를 통해 죄책감 속에서 쾌감을 취한다는 의미이며 사악한 생각을 하는 나를 응징하는 속에서만 향유를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P. 244)

 

 

 

 

 애비 셰어가 느끼는 죄책감의 본질은 이 말대로다. 사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쾌락 추구 행위인 것이다. 그녀는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쾌락을 공급함으로써 자신의 자아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은 쾌락을 위한 하나의 제스쳐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강박은 도착증과 다를바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도착증이 애비 셰어만의 독특한 반응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에 의해서 만들어진 주체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반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도착증과 히스테리를 구분한 적이 있다. 거기서 도착증은 히스테리와 달리 전혀 자신과 세계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당연하다. 도착증은 자신의 쾌락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마저도 그 쾌락을 위해 능동적으로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새디스트를 생각하면 된다. 그는 자신의 쾌락이 피학에서 오는 것임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 앞에서 그 피학으로 유도하는 연기를 한다. 바로 이것이 도착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타자에게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자와 세계마저 마음대로 조작해 가는 것. 이런 의미에서 애비 셰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죽음에 대한 현대의 반응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으로 죽음이 열어보인, 삶을 궁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든 그 변화를 받아들임이야 말로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의 모습인 것이다. 소설은 다행히 사랑을 매개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진정한 사랑 또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전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타자에게 나를 맡김이다. 후반에 그녀는 서서히 강박적인 것이 줄어듦과 동시에 타인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을 병행시킨다. 그렇게 강박으로 집요하게 보존하려 했던 자아에 대한 포기가 바로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임을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소설 초반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에는 질서가 있다.

 나쁜 짓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진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P. 27)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내 나머지 이야기는 불확실성으로 시작한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시작한다. (P. 461)

 

 말하자면, 이런 변화가 바로 애비 셰어의 고백이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설은 노래로 끝난다. 고정적일 수 없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기계적으로 복제되는 것 말고 세상에 같은 노래는 있을 수 없다. 노래는 혼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모두가 같은 노래를 부르나 다 다르다. 왜냐하면 악보에 표시된 음은 다만 단순한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음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와 세계가 하나로 어울려 만들어내는 우연의 조합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음이 상징하는 것, 이 노래 자체가 상징하는 주체가 근대이후로 수많은 비극을 잉태시킨  도착증적인 주체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주체가 늦지 않고 '제 때에 도착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애비 셰어의 '아멘 아멘 아멘'은 그 기도의 공감을 위한 진솔하면서도 설득력있는 여정이라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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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8-1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비 셰어는 변화를 했고 그럼으로써 타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나보네요.
타인에 대한 신뢰는, 즉 자신을 내맡긴다는 진정한 행위는 자신에 대한 믿음과 세계와 분리된 자아 형성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은 항상, 실존적 한계로써 나는 혼자라는 사실과 함께 사람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가 있기에, 삶이 소중한게 아닐까 싶어져요. 제가 얼마 전에 유사한 문제로 고민할 때, 교수님이 켄 윌버의 책을 추천해주셔서 구입하고 아직 못 읽었어요....

만일 말이죠,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세상은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를 가지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아마 발전 속도는 늦지만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제맘대로 생각을 해본답니다.

참 좋은 글이세요, 언제나 그렇듯이...
헤르메스님, 오랜만이신데, 건강하게 잘 계시죠? ^^

추신.
저는 뽀네트를 고등학교 때 문고판으로 읽었는데 읽다가 미치는줄 알았습니다.

ICE-9 2012-08-24 01:00   좋아요 0 | URL
아, 닉네임이 바뀌셨군요.
와!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공부는 원하시는 만큼 잘 되고 계신지 정말 궁금합니다. '불확실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이 거의 항상 발생한다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발전했다면 실존적 고독은 훨씬 적어졌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에는 저 역시 크게 공감되네요. 한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질라 같은 것들이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었죠. 그런데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뭔가를 해 놓으면 갑자기 고질라가 나타나 짓밟고 지나가고 악착같이 쌓아놓으면 고질라의 불길 한번에 다 타버리고... 그렇게 시지프스와 똑같이 주기적으로 허무를 안을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정말 불행해지는 것일까 하고 말이죠. 어쩌면 제 리뷰들은 바로 거기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그 고질라가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고질라만큼 압도적으로 모두에게 체험되지 않기 때문이겠죠. 죽음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체험이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인식되지 않고 중세처럼 좀 더 사회적인 체험으로 자리잡으면 우리의 생각 역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되네요. 그렇다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장례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죽은 자를 기리기 보다는 산자들의 눈을 더 많이 고려하는 의식이니까요. 아마도 중국과 우리나라가 씨족 마을 중심으로 발전해서 자리잡게된 의식이겠죠. 좀 더 죽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그냥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드네요.^ ^; 그런데 저는 뽀내뜨 영화로만 봤는데 문고판으로 나왔던 모양이네요. 처음 알았아요^ ^
 
수비의 기술 1 NFF (New Face of Fiction)
채드 하바크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채드 하바크의 소설 '수비의 기술'은 일단 독특했다.

 지금까지 야구를 소재로 한 소설과 영화를 많이 보아왔지만 유격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오랜만이기도 했다. 이 소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었던 미국 대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독서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에릭 시걸의 '닥터스' 이후로 온전히 대학 생활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는 소설은 처음 만나는 것 같다.(그 에릭 시걸 또한 이미 타계했으니 세월이 얼마나 흐른 것인가.) 그렇게 독특했고 또 오랜만에 재회하는 세계인지라 솔직히 열광적으로 읽었다. 정말 유격수를 뜻하는 영어 'shortstop'처럼 짧은 보폭으로 진행되는 그렇게 빠르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문체라서 더욱 그럴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수비의 기술'은 무슨 이야기인가?

 

 야구 이야기인가? 주요한 소재이긴 하지만 아니다. 사랑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 소설은 뭔가 하나가 부족한 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요한 등장인물 헨리, 그를 웨스티시 대학으로 데려와 정말 하고 싶은 야구를 마음껏 하게 해주는 슈워츠, 그 웨스티시 대학의 총장 어펜라이트 그리고 그녀의 딸 펠라 그 모두가 똑같이 뭔가가 부족한 그래서 결국엔 충족되지 못한 것 때문에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헨리는 그 자신이 동경하는 최고의 유격수 아파리치오(이 사람은 헨리가 거의 성경처럼 여기는 '수비의 기술'을 쓴 전설의 유격수이기도 하다. 헨리는 이 책을 읽으며 최고의 유격수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금은 거의 근접한 상태다. 물론 아파리치오는 실제 인물은 아니며 당연히 '수비의 기술' 또한 가공의 책이다.)와 타이 기록을 이루려는 직전에 어이없는 실책을 범한다. 슈워츠는 헨리를 끌어와 야구로 성공시켜 준 장본인이지만 정작 그의 미래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그는 자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어펜라이트는 진짜 소망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논문을 쓸 때는 그리도 자주 찾아오는 '백열 상태'가 정작 소설을 쓸 때는 찾아오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그 뒤 그는 학문적으로 성공해서 지금처럼 대학 총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여전히 되지 못한 작가에 대해서는 미련을 안고 있다. 그의 딸 펠라는 십대 때 이미 자신의 학교 강사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바로 실패를 하고 그에게서 달아나 웨스티시로 돌아온다.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한 진짜 이유는 그녀가 어펜라이트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펠라의 사랑은 정말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존재를 찾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결국 그녀의 전남편 데이비스와 현재의 남자 친구 슈워츠를 거치지만 '털보에서 털보로 옮겼을 뿐' 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사랑을 얻지는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 모두는 각자가 바라마지 않았으나 결국엔 채워지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부족함이 두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헨리의 경우가 그렇다. 헨리는 슈워츠의 미래를 위한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는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라 여겼던 슈워츠가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그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속 실책을 범한다. 그 첫 실책은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가장 접근하던 날 자신의 룸메이트이기도 한 오웬의 얼굴에 잘못하여 공을 던져 버린 일이다. 결국 오웬은 그 공을 맞고 병원에 실려 입원하게 되는데 여기서 채드는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절묘하게 결합시킨다. 사실 이 '접합'의 묘미가 바로 채드 하바트의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매력이기도 한데 아무튼 채드는 여기서 왜 아파리치오와 오웬을 헨리의 송구로 묶어두는 것일까? 그것도 좌절의 시초가 되는 송구로 말이다. 그것은 아라파치오와 오웬이 이 소설에서 사실은 모두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두 다다르고 싶으나 오히려 그 남은 거리로 인해 더욱 불안감을 부채질할 뿐인 존재인 '이상(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그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와 아파리치오의 관계는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관계와 같다. 때문에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동성애는 사실 다르게 보아야 한다.

 

  즉 아파리치오가 되기 위해 헨리가 야구에 기울이는 온갖 노력과 마찬가지로 어펜라이트의 오웬에 대한 사랑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왜 채드가 헨리가 결정적으로 아파리치오의 기록에 접근하려던 그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이 동경하는 오웬을 보려고 같은 구장에 있도록(그것도 어펜라이트 자신의 치부라 할만한 딸 펠라가 달아나 집으로 오는 그 시간에) 공들여 설계하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채드는 드러낸다. 헨리가 자신의 이상에 근접할 때 어펜라이트 역시 자신의 이상에 똑같이 근접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헨리의 잘못된 송구는 어펜라이트가 자신의 이상, 오웬과 직접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이를테면 헨리가 어펜라이트로 하여금 오웬에게로 데려다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헨리의 그와 같은 실책은 좌절의 시초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지금 서 있는 웨스티시 자체가 사실은 좌절의 땅이었다. 그 대학이 숭배하는 멜빌이 작가로서 한창 좌절을 겪다가 떠난 절망의 순례 가운데 찾아 온 곳이 바로 웨스티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례 여정을 발견한 것은 바로 어펜라이트였다. 그리고 그 발견으로 어펜라이트는 성공한 학자가 된다. 말하자면 멜빌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웠듯이 이제는 헨리의 좌절이 어펜라이트를 키우는 것이다. 결국 멜빌이 어펜라이트가 다가가고자 했던 대상이었음을 볼 때 그 멜빌과 헨리가 어펜라이트에게 똑같은 경로로 기회를 준다는 것은 곧 어펜라이트가 염원하는 오웬이 헨리가 염원하는 아파리치오와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아파리치오와 오웬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헨리의 야구도 어펜라이트의 동성애도 사실은  이상과 현실이 가지고 있는 차이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을 말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동성애적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처음으로 신체적 접촉을 했을 때 어펜라이트가 보여주는 반응일 것이다. 오웬을 만나기 전까지 평생을 이성애자로 살아온 어펜라이트는 그 자신 열망하긴 하였으나 처음으로 동성과 깊은 신체적 접촉을 나누게 되자 그 낯선 이질감에 당혹스러워한다. 바로 이 당혹감이 오웬과 어펜라이트의 관계가 정말을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은 그렇게 모자람 그리고 거기로 부터 비롯되는 두려움을 그리지만 섣둘리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안고 사는 용기라고 말한다. 1부 밖에는 읽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더 길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래서 채드 하바크는 첫 머리에다 웨스티시 대학의 응원가를 삽입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기운을 북돋아요. 나의 친구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요

용감한 우리 하푸너스가

공을 쳐내고 있으니

 

- 웨스티시 대학교 응원가 -

 

 

 

 

 다른 얘기로,

 아파리치오와 오웬이 이렇게 '이데아'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일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여기의 등장인물 또한 일련의 과정으로 재배치 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이를테면 헨리가 이제 막 필드로 뛰어드는 초심자라고 한다면 슈워츠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펠라는 슈워츠가 원했던 미래를 한 번 얻었으나 그것이 가짜의 것임을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그 슈워츠 보다 더 나아간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어펜라이트는 예순이라는 나이나 그의 학문적 성과나 총장이라는 직위로 보아 직선의 가장 끝자리에 온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일직선상의 성장과정과도 같다.

 

 무리하게 이렇게 일직선상에 놓아두는 것은 이 소설에 은연중 드리워진 한 가지 맥락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 맥락이란 다름아닌 이것은 바로 작가로서의 채드 하바크 자신에 관한 얘기라는 것이다.

 

 

 채드 하바크는 이 소설 '수비의 기술'을 쓰기 위해서 자그만치 1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문제는 이 소설이 그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셈인데 그렇다면 그 10년의 세월은 그대로 그가 이 첫 소설을 세상에 출산하여 진정한 작가가 되기까지 겪은 산통의 과정이라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정말 채드 자신이 이러한 산통의 과정 자체를 소설에 담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로 그 근거를 나는 일련적으로 배열 가능한 등장인물들에게서 찾는다. 즉 이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연속적 흐름이 그대로 채드 하바크가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의 주된 얘기가 되는 헨리의 아파리치오 되기는 사실 채드 하바크의 작가 되기의 얘기인 것이다 라고 나는 의심한다.


 근거가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란 수비였다. 그는 짧은 평생 내내 배트에 맞은 공이 튀어 나가는 모양, 각도와 회전을 연구했다.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지, 왼쪽으로 꺾어야 할지, 날아오는 공이 앞에서 높게 솟아오를 것인지, 땅을 쏜살같이 강타하며 굴러갈지 미리 알아내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깔끔하게 공을 잡아냈다. 예외 없이.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송구를 해냈다. 예외 없이. 그럼에도 감독들이 그를 2루에 세우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거나, 아니면 벤치에 버려둘 때가 있었다. 그 지경일 만큼 피골이 상접하고 못 봐주게 처량한 몰골이었다.(p. 19 ~ 20)


 이걸 채드가 하버드 재학 시절부터 꾸준히 글을 썼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문장을 써 내려갈 때의 채드의 심정이 어땠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 같다. 즉 (물론 전적으로 내 느낌일 뿐이지만) 그는 스스로 자기는 이미 작가로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어쩌면 그걸 쓸 때 진짜 했을지도 모를 투정 아닌 투정을 여기다 슬며서 버무려 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더하여, 소설가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작가로서 성공한 어펜라이트가 새삼 오웬이라는 남자에게 끌리게 된 계기도 여기의 근거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렸던 것은 그의 에세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젊은 청년의 에세이에 녹아든 우아함과 광범위한 독서에 감탄했다.(p.142)


 채드는 오웬에 대한 어펜라이트의 매혹이 무엇보다 텍스트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소설에서 내내 보여지는 오웬의 묘사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채드는 오웬을 그 누구보다 박학다식하며 책벌레로 묘사한다. 그는 야구 경기를 할 때 조차 비글호 항해기에 빠져있다. 그의 말투 역시도 구어체 보다는 문어체에 가깝다. 헨리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사귀고 있는 애인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보라. 그는 마치 논문을 쓰듯이 대화를 한다. 채드가 이렇게까지 묘사하고 있으니 여기엔 분명 의도가 있다. 난 그 의도가 바로 오웬이 하나의 텍스트적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즉 독자들이 그를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종의 살아있는 텍스트, 의인화된 텍스트로 봐 주길 원해서 말이다. 왜 채드는 구태여 오웬을 일종의 의인화된 텍스트로 만드는 것일까? 그 오웬이 가장 작가적 정점에 이른 어펜라이트의 애정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드러난다. 오웬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베아트리체라는 것을. 베아트리체는 파우스트의 인생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마지막 남은 이상적인 퍼즐 조각이었다. 어펜라이트에게 그 퍼즐 조각은 쓰지 못했던 소설이다.


 그는 왜 오웬에게 휘트먼을 읽어주려 했던 것일까?

 휘트먼은 살아 생전 거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시인이다. 즉 그 휘트먼은 소설가가 되지 못했던 어펜라이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웨스티시라는 그 좌절의 땅에서 오웬은 그러니까 어펜라이트가 정말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소설, 그 완성된 이상적인 텍스트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펜라이트는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른 채 마구잡이로 빠져드는 것이다. 즉 어펜라이트가 오웬에게 끌리는 이유는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멜빌 같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가져버린 소설가에로의 미련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베아트리체를 욕망했던 파우스트도 그 바탕엔 결국 미련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어펜라이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오웬을 통해 미처 쓰지 못했던 소설을 다시금 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채드는 예리하게도 오웬과 어펜라이트가 첫 깊은 신체적 접촉을 하는 순간 19세기 빅토리아 소설처럼 그것을 묘사한다. 소설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시기를 말이다. 거기다. 어펜라이트와 오웬의 만남 또한 텍스트 읽어주기로 채워나간다.


 그렇게 채드는 어펜라이트의 사랑을 작가가 완벽한 작품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빗대어 얘기하고 있으며 바로 그 욕망은 작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비의 기술'을 썼던 그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수비의 기술'은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모노로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헨리가 웨스티시 대학에서 처음 보게 된 멜빌 동상의 묘사가 흥미롭기 그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멜빌은 작가인 채드 자신이 가장 도달하고 싶은 이상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동상이 서 있는 웨스티시가 사실은 멜빌이 작가로서 좌절하고 있을 때 방문한 곳이며 그래서 멜빌의 글로 넘치는 웨스티시 자체는 좌절의 글쓰기 현장이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이제 초심자 작가로서 온 헨리는 멜빌 동상에게서 이상한 친근함을 느끼는데 그런데 그 동상의 실상은 이랬다.


 동상은 교정을 등지고 서 있는 바람에 몸 뒤에 채찍질 자국처럼 나 있는 균열과 균열 안에 가득 찬 이끼를 행인들에게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때문에 헨리는 처음부터 뒤죽박죽인 제 머릿속 고민까지 겹쳐서 이 동상이 몹시 고독한 인물로 느껴졌다.(p. 47)


 이 멜빌의 동상 자체가 채드 하바크가 글을 쓰면서 느낀 작가의 모습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게 늘 도달하려고 헨리처럼 어마어마하게 노력하지만 균열은 늘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터지고 또 그 균열이 주는 한계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들어 결국은 고독하게 빈 페이지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작가의 운명을 그는 바로 여기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채울 수 없는 모자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채드 자신이 작가가 되기위해 나아갈 때 마다 느꼈던 균열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말하자면 '수비의 기술'은 이렇게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맨 위에서 말했던 외면의 얘기가 절묘하게 접합된 소설이다.

앞서도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접합'이라고 말했다. '접합'이란 바깥의 세상과 내면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채드 하바크는 그것을 자주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보려 야구장으로 갔을 때 거기 헨리를 스카우트하려고 살펴보고 있던 스카우터와의 얘기가 그렇다. 스카우터는 헨리를 스카우트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그건 또 어펜라이트가 오웬을 유혹 그렇게 스카우트 하는 것과 접합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접합'은 교착된 평행세계를 드러낸다. 이 소설은 두려움을 지우는 소설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가는 가운데 용기를 주는 소설이라 했다. 바로 그 용기가 접합을 통해 결부되어진 이면의 세계를 바라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 접합에 대한 수수께끼는 2부를 다 훑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 그럼, 2권에서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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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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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이렇게 밀란 쿤데라는 작품에서 직접 이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형식에 있어서는 변주로 하되 주된 주제는 타미나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변주를 그 형식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변주라는 형식은 집중이 그대로 발휘된 형식이다. 이 형식은 작곡가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사물의 핵심에 곧장 다가가게 한다.(P. 308)

 

 

 쿤데라가 변주를 소설의 주 형식으로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을 말하게 하고 핵심으로 곧장 다가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에 대해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한 소설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소설이란 인간의 착각의 결실입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뿐입니다. 각자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거죠. 나머지는 권력의 남용일 뿐이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에요.(P. 172)

 

 즉 쿤데라는 이 소설을 가지고 바로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 보고서는 지금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에 그 본질만 말하고 핵심에 곧장 다다르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쿤데라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변주에 대해서 쓴 또 다른 부분에서 드러난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외부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말한 파스칼의 생각을 당신들은 알 것이다. 변주의 여행은 이 다른 무한 속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간다.(P.307)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쿤데라는 변주라는 것을 또 다른 무한성으로의 여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 무한성으로 여행해야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에서 말한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하나의 근원, 즉 아르케를 추구해왔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오로지 하나이며 그렇게 절대인 그것은 결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절대적 일자(一者)'의 사상이 로마 시대 기독교와 결합하여 차이는 무조건 배척부터 하고보는  '독단의 일자'가 되었고 그로인해 서양은 결국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을 껴안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쿤데라가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보다 그는 독재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이 보낸 탱크들에 의해 뭔가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프라하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재의 폭압에 의해서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말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고, 더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과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운이 좋아 그것을 들키지 않은 자들도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증가된 비밀경찰들과 그 끄나풀 그리고 더욱 더 치밀해지는 그들의  감시 업무 아래서 그들은 그야말로 고공 100미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은 손에 잡힌 듯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기분을 소설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그 때 나는 원이 지닌 마법적 의미를 깨달았다. 열에서 이탈했을 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열은 열린 조직이다. 하지만 원은 닫혀서, 떠나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실려 가차없이 멀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에서 떨어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다.(P. 130)

 

 때문에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배척하는 그 '독단적 일자'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됨, 소설에서 '목가', '원무' 등으로 암시되는 그 하나됨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다른 무한성으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그 '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 변주란 소설에 나오는 말로 하자면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타미나 이야기에서 나오듯 한 발로 이 칸 저 칸을 넘나드는 일이다. 쿤데라는 바로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 어디에도 정주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독단적인 일자'가 가져올 비극을 줄이는 길이라 믿는다. 소설에서는 3부 '천사들' 이후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꾸준히 형상화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소설에서 그토록 '정사(情事)'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쿤데라에게서 '성적 행위'가 나오는 이유는 마지막 7부 경계선의 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그가 가장 매료되었다는 고대 소설인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얀이 매료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이상 무얼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포옹 자체가 사랑의 쾌락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흥분했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정사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P. 370)

 

  이 문장만으로는 그 이유를 얼른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쿤데라 역시도 그것을 우려했었는지 소설의 마지막에 얀이 매료당했던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에드위즈와 그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했다. 각자가 상대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그들 사이에는 놀라운 조화가 유지되었다. 몰이해 위에 세워진 경이로운 연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았고, 그에 거의 흡족해했다. (P. 421)

 

 즉, 바로 이것이 쿤데라가 대지를 지배하는 하나의 목가, 모두가 같은 춤을 추도록 만드는 원무가 가져오는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지향하는 바였다. 굳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르려 하지 않으며 비록 상대방이 경계 저 편에 있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받아들여 주는 것. 그냥 그렇게 타자 그 자체로서 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쿤데라가 이 '웃음과 망각의 책'이 지닌 모든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순수히 받아들이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라 할 만한 '정사'를 쿤데라는 소설 내내 그토록 자주 가져 온

것이다.

 

  이렇게 '웃음과 망각의 책'은 그 자신 역시 희생자였던 무참하게 짓밟힌 프라하의 봄을 통해 체험했던 비극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천착한 일종의 사유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한 마디로 쿤데라 자신의 사유의 보고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아예 실명으로까지 등장하여 개인 사유의 보고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이렇게 보고서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보다는 먼저 독자를 자신의 사유 속으로 참여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다소 특이한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앞서도 쿤데라가 변주의 형식을 취한다고 고백했음을 말했지만 정말 이 소설은 정형화된 소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가 마치 예화를 말하듯 상상된 이야기임을 분명히 드러내는가 하면 곳곳에서 에세이 같은 분석이나 사유의 글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다 본질적으로는 쿤데라가 그것에 관해 이루어갔던 모든 사유의 결들을 마치 곤충도감을 만들듯 독자가 얼마든지 관찰가능하도록 펼쳐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독자 역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사유로 된 책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은 책을 쓸 때 세계로 바뀐다. 그리고 한 세계의 속성은 그것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P. 205)

 

 이러한 면모는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웃음'은 경계를 넘어선 개인의 고유성을, '망각'은 그 고유성을 소멸하여 하나의 전체성으로 포섭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제목은 이 책이 그 둘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며 지속해 나가는 사유의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표지에 나온 그림에서도 증명된다. 표지에 나온 저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것으로 제목이 바로 '헤겔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이 리뷰도 어쩌면 쿤데라가 펼쳐보인 그 여정에 참여한 끝에 나온 나만의 표지 그림과 같은 '변증법적 완성형'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잠언과도 같은 놀랍고 재기발랄한 말들의 향연에서 당신이 결국 집필할 책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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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2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헤르메스님 리뷰!
이번 책과 리뷰는 저에겐 한없이 어려워만 보이는군요.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 이름부터 소용돌이에 빠진 듯 쑥쑥.
요새 알라딘이 침체기에 접어든 거 같아요. 분위기도 싸하고 밝지 않고, 많이 보이던 분들이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알라딘에 와도 심심하기만 하네요. 그 와중에 헤르메스님께서 글 한편 남겨주셔서 좋군요. 하아. 내일은 또 열심히 학교가고, 일해야 겠죠? 헤르메스님도, 나도 파이팅!

ICE-9 2012-05-23 01: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쿤데라는 저 역시도 어려워요. 아마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작가중의 하나가 아닐까도 싶네요. 그래서 리뷰도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되고 마네요. 제가 제대로 소화시키고 있지 못한 결과로^ ^;
소이진님을 위해서라도 꼬박꼬박 글을 남겨야 하는데 요즘은 통 그런 시간이 안 나더라구요. 그래도 제게 파이팅 해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정말 무덥던데 이럴수록 건강 잘 챙기고 학교 생활 제대로 잘 해내시길 빌어요. 아무튼 글을 자주 자주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근데 요즘 정말 글 안 써지네요... 슬럼프인가? ㅠ ㅠ)

프레이야 2012-05-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는 이 책을 구판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좋아요.
밑줄긋기도 많이. 저 표지 그림의 정체를 알게 됐네요. 헤겔의 휴식! 이군요.^^
변증법적 완성형,이란 말이 쏙 들어옵니다.

ICE-9 2012-05-23 01:16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이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뵙는 건 처음인데도 오래 알던 분 같아요^ ^
쿤데라가 새삼 정말 글을 깊이있게 잘 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꼈습니다.
저도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둔 말이 참 많아요. 이런 혜안이 질투날 정도로 부럽더군요^ ^ 이번에 나온 쿤데라 전집엔 모두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용되었던데 누가 이 책의 표지로 헤겔의 휴식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 표지만큼은 제대로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프레이야님 방문도 댓글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

마녀고양이 2012-05-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기억이란 변주와 같다는 요지의 페이퍼를 쓴적이 있었어요...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는, 제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또는 기억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제 정체감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네요. 변주, 다들 사실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다들 fact에 대한 변주를 보여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으로 아까 '정사'에 관해 인용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게 한계이지만, 한계를 알아야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도 같이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ICE-9 2012-05-23 01:30   좋아요 0 | URL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서 더욱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지금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있는데 저 '정사'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더군요. 이를테면 쿤데라의 '불멸'은 사실 어떻게 하면 '불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사유의 여정입니다. 불멸은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데 쿤데라는 그 기억이 오히려 존재에 대한 피상적 인식만으로 채워지므로(설사 그것이 괴테나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존재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끝을 못 보았기에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만 작품에서 이렇게 기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져 타자를 만날 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더군요. 그래서 영원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존재들에겐 형벌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져요. 이렇게 보면 불멸 보다는 찰라적인 것을, 항구적인 것 보다는 변주적인 것을 그렇게 쿤데라는 꾸준히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군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한계 자체의 긍정이 무엇보다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불멸'은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살펴보는 작품 같기도 합니다.) 마고님 댓글에 저도 이렇게 자꾸 생각을 발전시키게 되네요. 늘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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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는 포착할 수 없다."

 

 

 줄리언 반스의 출세작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주인공 브레이브웨이트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는 그 죽음이 바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플로베르를 통해 아내 죽음의 진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걸 찾지 못하고 결국엔 저렇게 고백하고야 마는데,  특별히 이 문장을 언급하는 것은 사실 줄리언 반스의 모든 작품은 바로 이 문장과 겨루려 드는 것과도 같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흔히들 역사와 진실 그리고 사랑을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가 그렇게 역사 혹은 과거를 작품의 중심 테마로 가져오는 이유는 바로 데뷔작이면서 반스 자신의 60년대 학창시절을 많이 반영하기도 했던 작품인 '메트로랜드'에서 드러나는데 그것은 68혁명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하여 모든 속물적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이상을 꿈꾸었던 삶이 어쩌다가 이렇게 도리어 속물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삶으로 변해버리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함인 것이다. 즉 반스는 과거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면 현재적 삶마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깃들어있는 명확한 진실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때로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처럼 문학을 통해서 때로는 '10과 2분의1장으로 쓴 세계사'처럼 역사를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대한 확고한 기록이라면 진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의 기대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브레이브웨이트처럼 여지없이 무너지고 결국 그가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에이드리언 핀의 다음의 말과 같은 깨달음 뿐이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결국 문학과 역사 그 어느 것이든 과거를 진실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그는 이제 먼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재적 삶 그 자체로 눈을 돌린다. 보다 지금에 가까우면 그만큼 과거를 파악할 수단도 더 많아지고 정확해질테니 가능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서 나온 작품이 바로 91년작 '내 말 좀 들어봐(Talking It Over)'였다.

 

 '내 이름은 스튜어트이고 난 모든 걸 기억한다.'

 

 

 이 같은 주인공 스튜어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특히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너무 비슷한 설정이라서 흥미를 끈다. 이렇게 늘 자신만만했던 스튜어트는 자신의 아내 질리언이 친구 올리버와 바람이 나는 바람에 버림을 받게 되는데 그래서 그는 평생 아내와 친구를 저주한다. 이 같은 관계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주인공 앤서니 웹스터와 그의 연인이었지만 그와 헤어지고 친구인 에이드리언 핀과 사귀게 되는 베로니카가 이루는 관계와 완전히 똑같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내 말 좀 들어봐'를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주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말 좀 들어봐'는 아무런 지문 없이 세 사람이 서로 돌아가며 하는 독백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소설 보다는 희곡에 가까운 구성인데 반스가 이렇게 다소 독특한 구성을 취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말에만 독자를 집중시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보다 현재적 삶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과연 과거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가를 독자 스스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우리는 그래도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보고 느끼고 그래서 가지게 되는 진실 역시 완전 달라져 버림을 보기 때문이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라는 말도 있지만 과거의 진실 역시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원제 'Talking It Over'는 의논 또는 상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다수를 상징하고 있다. 해서 반스는 생각한다. 혹 과거의 진실을 찾기 힘든 이유가 여러 많은 사람들이 각자 보고 싶은 대로 진실을 보기 때문이라면 그럼 한 사람만이라면 어떨까? 오로지 그가 가진 기억뿐이라면 과거의 진실에 대해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이 작품으로 형상화 된 것이

바로 이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그동안 해왔던 것의 집대성이라 할만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은 이 작품이 가진 이러한 성격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일단 주인공의 60년대 학창시절에 나오는 동급생 '롭슨'의 죽음은 '메트로랜드'에서 단절되어 죽어버린 60년대의 과거를 의미한다. 또한 베로니카의 어머니의 죽음은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의 아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두 죽음이 과거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긴밀한 연관성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에이드리언 핀의 죽음은 '내 말 좀 들어 봐'에서의 결국엔 질리언과 결별하게 되는 올리버 그대로이다. 에이드리언은 일기를 통해 앤서니를 분석하는데 그것은 올리버가 내내 스튜어트를 분석했던 것과 또한 이어진다. 이렇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이 작품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가 밟아왔던 단계를 하나 하나 모두 다시 담고 있다. 해서 마치 이 작품은 그 모든 여정을 거쳐 다다르게 된 어떤 결론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반스가 다다르게 된 종착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모호성의 포용이다. 즉 그렇게 앤서니 혼자만의 기억에 의지해 보아도 과거의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하니 결국 우리 인간은 이 모호성을 삶이 간직한 하나의 본질로써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반스가 앤서니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거꾸로 증명된다. 반스는 앤서니를 무엇보다도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린다. 그가 에이드리언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그가 명확성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했을 때, 그에겐 사고를 정연히 정리하는 것이 마치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 자연스럽게 여겨졌다.(P. 152)

 

 에이드리언은 자신의 삶을 책임졌고 그것을 지휘했으며 온전히 포착했다. 그리고 놓아주었다. 우리-살아남은 우리-중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P.153)

 

 또한 그는 전부인 마거릿의 아래와 같은 여자에 대한 구분에서도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P.116)

 

 

 매사에 분명한 여자가 좋다고 말을 한다. 이외에 그가 그토록 에이드리언의 일기를 가지고자 하는 것 또한 나이가 들어감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모호함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라는 것에서도 앤서니가 얼마나 '명확성'을 추구하는 인물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묘사했던 앤서니는 결국 그 어떤 진실도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만다.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종잡을 수 없었던 베로니카와는 영원히 결별했으며 에이드리안 핀의 일기가 쓰다 만 문장도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소설은 아예 그 자체에 가장 중요한 내용을 텅 빈 공백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앤서니의 모든 노력이 텅 빈 수포로 돌아가 버렸음을 더욱 강조하는데 결국 이를 통해서 더 분명히 알게되는 건 그 모든 진실 추구의 노력이 좌절될 만큼 삶은 모호성으로 가득차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독자인 우리는 그가 놓쳐버린 진실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진실인지에 대한 보증은 사실상 소설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은 그저 막연한 추정 뿐인데 이것은 또한 '내 말 좀 들어 봐'에서 세 인물이 보여줬던 모습과 그대로 판박이가 아닌가! 그러므로 반스는 우리가 알았다는 것 또한 단순한 오해일 수 있으며 우리의 시도 역시 앤서니처럼 실패할 것임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소설에 자리잡은 공백은 바로 독자에게 그와 같은 체험을 가져다 주려는 의도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삶이 본질로서 가지고 있는 모호성을 독자인 우리도 받아들이게끔 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작업인지도 모른다.

 

 이는 무엇보다 소설에 나오는 세 가지의 죽음이 다들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게되면 명확해진다. 소설에서의 죽음은 한결같은 작용을 한다. 즉 일단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속에 묻혀진 진실을 찾도록 끌어들이지만 결국엔 오로지 그 죽어버린 자들만이 진실을 소유하고 있음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는 종국적이고도 명확한 진실은 오로지 죽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마도 소설의 원제인 'THE SENSE OF ENDING' 역시도 바로 이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간은 생의 종말을 향해 나아간다. 아니다. 생 자체가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그 생에서 변화 가능한 모든 변화의 닫힘을 향해.(P. 254)

 

 죽음만이 종국적 진실을 가진다면 살면서 보내는 우리의 여정은 그저 근사치의 진실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는 모호성으로 넘쳐나는 공간이 된다. 즉 이 소설에 이르러 반스는 드디어 확고한 진실을 얻으려던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모호성과 기꺼이 포용하려 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모호성을 포용하려 하는가? 그 이유는 소설에서 보여준 앤서니의 모습을 보면 추정이 가능하다. 앤서니는 그야말로 과거의 진실에 집착하는 자가 어떤 모습의 삶을 보여주는지 거기에 대한 제대로 된 초상이니까 말이다. 현재적 삶의 구원을 위하여 과거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어차피 삶이란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이는 반스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 모든 문학적 여정의 결론이기도 하다.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p.255) 

 

 

 이 거대한 혼란 속에서 그 누가 쉬이 진실을 찾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의 집착은 현재에 구원을 가져다 주기는 커녕 집착으로 부터 오는 고통까지 덤으로 전가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반스는 모호성 자체를 기꺼이 껴안으려 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재를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첫 걸음이라는 것이 반스가 여기 종착지에서 느끼게 된 예감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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