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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 단편선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0. 헨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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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은 무려 자신의 고향으로 부터 5천마일이나 떨어진 뉴욕을 방문했다. 새벽 안개 속에 새벽 닭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산천을 요람을 흔들듯 진동시키는 조용한 자신의 고향과는 달리 뉴욕은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사람들의 무리와 자동차들로 쉴새없이 북적이고 있었고 그 마치 도시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활기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뉴욕의 모습은 그야말로 드로르작에게 충격이었고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발산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적 분위기를 뉴욕에서 그는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에게 거의 신세계를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했고 그것이 바로 그의 최고 걸작이라 평가받는 교향곡 9번,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즉 그 작품은 드보르작이 뉴욕에서 느꼈던 경이로웠던 새로운 활기에 대한 음악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뉴욕은 바로 오 헨리의 뉴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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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헨리는 바로 그러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부에 있었다.
그 시대는 구시대의 유럽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일단 태어나면서 결정되었던, 그렇게 순전히 혈통으로만 계승되던 신분제가 사라졌다. 이제 뉴욕은 전혀 새로운 것에 의해 결정되는 신분제도가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돈, 즉 자본이었다. 오로지 돈 만이 사람들로 부터 존중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으며 그 돈이 가지고 있는 추상성 때문에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보다 중시되었고 또한 돈은 오로지 실용성만이 가져올 수 있었기에 예술 같이 추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 예술이란 것은 오로지 신흥 부르조아지들의 재산을 빛내줄 경우에만 의미있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이러한 구체적 혈통에서 추상적 자본으로의 전환은 사람들에게 많은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국인지라 유럽을 단일한 끈으로 묶어두던 기독교적 가치로 부터도 자유로웠었기에(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나 미국 헌법을 초안한 제퍼슨은 공공연히 성경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니 완전히 믿지는 말라고 자주 말했었다.) 그 전환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 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자본, 즉 돈에 대한 욕망은 그렇게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가속도를 더해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돈이야 말로 스스로의 존재를 귀족처럼 고양시켜 주고 타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근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이제는 생존을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마저 규정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돈이었다. 드로브작이 경이롭게 생각했던 신세계의 실상은 그러한 돈에 대한 욕망으로 휘몰아치는 토네이도였다. 그 광풍처럼 범람하는 욕망이 바로 활력의 원천이었다.
하지만 그 한 가운데 있었던 오 헨리는 중심부로 뛰어들지 않고 오히려 소소한 일상으로 내려간다. 그렇게 한결같이 뉴욕인들의 사소한 일상들을 작품에다 담는다. 마치 부엌이야말로 신이 현상하는 장소라며 내내 일상의 공간만을 화폭에 담았던 18세기의 프랑스 화가 샤르댕 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는 역사적 현장 못지 않게 우리의 사소한 일상 또한 얼마든지 극적인 드라마가 일어나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꿈틀거리는 욕망, 그 좌절로 인한 애환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희노애락을 빛의 스펙트럼처럼 펼쳐보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일상을 담아내면서 돈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가 성급하게 밀쳐내 버린 인간적인 가치들 또한 복원해낸다. 바쁜 일상에 시달리느라 잊어버렸던 웃음, 슬픔, 사랑 같은 사소한 감정들. 그리고 보다 높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보석이나 사치품을 추구하느라 무시해버렸던 사소한 물건들까지. 그는 작품 속에 하나하나 다 살려낸다. 마치 그는 복원전문가 같다. 그렇게 그는 자본주의의 정착과 그로인한 사람들이 가진 더욱 가속화되어버린 욕망 때문에 왜소해졌거나 생명을 잃어버렸던 모든 사소한 것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어 넣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이나 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예술로 인한 구원 같은 이제는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소박한 꿈들까지... 그렇게 오 헨리의 작품은 사소한 것들로 넘쳐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오 헨리의 중심엔 바로 이 '사소성'이 있다.
별 것 아닌 일상, 별 것 아닌 감정, 별 것 아닌 사물 모두 이러한 '사소성'을 특징짓는 것이다. 오 헨리의 단편들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이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각 단편들 사건의 중요한 국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소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지막 잎새'에서의 한 잎의 잎새라든지 '20년 후'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바로 지명수배자임을 알아보게 한 것이 성냥불이었다든지 '다시 찾은 삶'에서의 장미꽃의 핀이라든지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교환되는 선물은 또 어떤가?
이런 식으로 오 헨리의 작품엔 아주 사소한 물건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정작 이 물건들이 가져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을 구원하거나 인생을 바꾸거나 고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등의 아주 커다란 것들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왜 이러한 '사소성'에 천착하는 것인지 알게된다. 그러니까 오 헨리는 당시 미국을 주무르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바로 이 사소성을 가져온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주의란 재화가 가진 가치를 오로지 효용성으로만 따진다. 하지만 오 헨리의 사물들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적 판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효용성으로 따지자면 별 것 없지만 그것들이 가져오는 것은 어마어마한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오 헨리는 사물에 대해 자본주의적 가치가 절대적일 수 없음을, 사물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들을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획일적 잣대로만 볼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불러오는 문제가 여기까지라면 오 헨리의 이러한 사소성의 집착은 그저 한 작가의 독특성 정도로 그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그 시각 자체가 더 큰 문제를 급기야는 불러오기 때문에 오 헨리의 이 '사소성'의 추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오 헨리의 말에 귀를 기울일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오는 더 큰 문제란 바로 자본주의가 팽배해짐으로써 사물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이제는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까지 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재화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도 효용성, 즉 오로지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 아니냐만 기준으로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분명 오 헨리는 당시에 만연된 극심한 빈부격차나 비인간적인 노동력 착취의 현장에서 바로 이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가 작품 속에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따라서 오 헨리의 '사소성'이란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에 대한 왜곡된 시각 자체와 싸우기 위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 헨리의 사소성은 무엇보다 어느 하나의 잣대로만 규정할 수 없는 사물이 가진 다양성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의 존재가 가진 다양한 면모를 가감없이 펼침은 사람에게 적용되면 어느 신분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결정될 수 없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삶 자체에다 갖다대면 자본주의의 획일적 가치관으로 도저히 포획할 수 없는 파노라마 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오 헨리는 궁극적으로 오로지 하나의 효용성,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시각이 낳는 것은 오로지 고고귀한 존재를 그저 도구로 전락시키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별 것 아닌 소소한 일상이지만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점점 그 빛을 잃어가는 신세계에 그 자신이 직접 정말 제대로 된 신세계를 가져오려 하는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온갖 사소한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속 사소한 물건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넘쳐나는 그러한 신세계를. 오 헨리는 바로 그 신세계의 세헤라쟈드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과 자신의 삶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아마도 드보르작은 정말은 이것을 보아야 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가 오 헨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새삼 여기에 그 까닭을 중언하듯 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마도 자본주의적 시각이 가져올 위험을 말할 때 당신 역시도 다 느꼈을 것 같은데, 그 때의 뉴욕과 오늘의 현실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