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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평점 :
어느 날 그녀가 내 삶에 들어왔다. 누군가 키우는 걸 더는 감당할 수 없었는지 상자에 넣어 두고 간 고양이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본 순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고민 끝에 삶을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처음엔 꼭꼭 숨어서 하루에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던 그녀였다. 그녀 덕분에 좁은 내 집에도 숨을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책장에 꽂힌 책 위에서 그 작은 몸을 어떻게든 끼워 잠든 걸 발견했을 때는 처음엔 너무 귀여워서 기절하는 줄 알았고 다음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서로의 거리가 줄어드는 걸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러다 추운 겨울 날, 문득 깨어났는데 그녀가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자기 몸을 밀착시킨 채 곤히 잠든 걸 보고 어마어마한 감동의 물결에 젖은 적도 있었다. 그 날, 그녀가 내 곁에서 집사들 사이에선 흔히 ‘골골송’이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난 생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제목마냥 이렇게 가족이 되는구나 하고…
새삼스레 그녀와 동반한 삶을 반추하게 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한국인 작가 엘렌 심의 ‘고양이 낸시’가 그 소환자였다. 버려진 어린 고양이가 쥐 가족에게 거둬져 길러지게 된다는 독특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을 뼈대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나 가족이 되는 과정과도 유사하여 더욱 깊이 빠져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와 그녀의 동거는 낸시와 더거씨 가족처럼 순탄하진 않았다. 앞서도 말했듯 그녀는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고 값비싼 이어폰 줄을 몇 개나 잘라먹거나 아끼는 책마다 발톱으로 무자비하게 스크래치 해 놓는 등 이런저런 사고도 참 많이 쳤다. 이유없이 밤마다 현관 앞에서 심하게 울어서 근심과 짜증 속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잠을 설치게 만든 일도 많았고 여행을 갈 때면, 대신 돌봐 줄 사람이 없을 경우 늘 원하는만큼 있지 못하고 일정을 많이 앞당겨 돌아와야했다. 그녀와 같이 있어서 즐겁고 행복했던 것만큼이나 불편하고 피곤한 것도 많았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에 작품 속 고양이 낸시는 오빠가 엉터리로 매어 준 옷의 리본도 오빠의 정성을 생각해서 고쳐 매어주려는 아빠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매어 준 것이라 괜찮다고 대답하고 자신도 학교 연극에서 공주 역할을 하고 싶지만 우연히 쥐 친구 아가사가 공주가 되고 싶다고 그린 그림을 보고선 기꺼이 그 마음을 접고 다른 역할을 하겠다고 먼저 자원할 정도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참으로 커다란 착한 고양이다. 그러나 나의 그녀는 그렇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 정반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낸시’를 ‘이건 그냥 동화에 불과해!’라고 하면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에 대한 얘기를 넘어서 고양이가 상징하는 ‘낯선 타자’와 공존하는 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쥐에게 고양이가 그렇듯이, 자신과 완전히 다르고 그 다름으로 불안을 넘어 위협마저 느낄 수 있는 이들과의 공존은 현재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건 그 반대의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더 거세어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기반으로 탄생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의 아베 정권 또한 그 배척에 의존하여 자신의 가냘픈 명줄을 이어가는 형편이며 중국 또한 최근 홍콩 시위가 잘 보여주듯,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주지 않으면 같은 민족에게조차 서슴없이 강한 억압을 행사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작금의 유럽 국가들에서 두드러지는 우경화 경향 역시 이와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부분 거꾸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목소리였다. 많은 이들이 타자에게서 그런 걸 경험한 탓에 자연스럽게 발생한 경향이 아니라 소수의 누군가가 타자의 다름과 그것이 주는 해악을 특별히 강조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전파해서 출현한, 한 마디로 인위적인 형성이었다.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해 적대와 혐오를 쏟아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이 욕하는 대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었다. 오직 누군가가 특정 의도에 따라 유포한 글과 말에 기반한 간접 경험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가장 낸시를 힘들게 만들었던 헥터 삼촌이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낸시를 마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품에서 책은 자주 등장한다.
더거씨가 낸시를 처음 받아들였을 때 무엇을 먹여야 할지 몰라 백과사전에 나오는 고양이 항목을 살펴보기도 하고 낸시가 다닌 쥐 마을 학교에서 친구들이 우연히 책에서 고양이에 대한 부분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헥터 또한 낸시를 추방하기 위해 아버지를 설득할 때 고양이가 위험하다고 말한 책을 몇 권이나 갖다 보인다. 내 생각에 이건 단순한 연출이 아니다. 이는 우리에게 낯선 타자를 헤아릴 때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것 같다. 눈먼 생쥐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코끼리 권위자라고 소개한 사람이 지금 만지고 있는 건 엉덩이라고 말하자 무턱대고 '그래, 이건 엉덩이야!'하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제대로 접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오직 어디서 전해 들은 정보로만 가지고 쉽사리 그를 판단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책은 내가 직접 살펴보지도 않고 누군가 보여주는 것만 보면서 그걸 전부로 여겨버리는, 우리도 일상 속에서 흔히 표출하는 습성의 상징인 것이다.
이것이 왜 위험한가?
그걸 작가는 고양이에 대한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상반된 두 가지 태도를 재현함으로써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헥터로, 그는 상대를 오로지 책의 내용에 따라 판별한다. 반면 낸시를 보살피게 되는 더거씨나 그의 동료들, 낸시의 오빠 쥐 지미나 학교 친구 쥐들은 책에서 고양이에 대해 어떻게 말하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낸시를 직접 보고 경험한 바에 따라서만 판단한다. 이는 단순히 간접 경험과 직접 경험의 차이와 어느 것이 더 적절한가만 보여주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왜 어떤 이들은 간접 경험한 것만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걸 충분하다고 여기는가에 대한 이유까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헥터는 '고양이 낸시' 중에서 '낸시' 보다 '고양이'라는 사실을 더 중시했다. 그의 눈에 낸시라는 고유한 개체성을 사라지고 없었다. 존재하는 건 오직 고양이라는 일반적인 범주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달랐다. 더거씨와 지미,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 눈에 낸시는 고양이가 아니라 그저 낸시였다. 자신과 일상을 함께 하는 가운데 직접 체험을 통해 인식한 개별적이며 고유한 존재로서의 낸시만 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헥터가 아무리 낸시가 위험하다고 하여도 설득되지 않았다. 헥터가 고양이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낸시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내어놓는 대답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낸시라는, 독립적이며 고유한 개체성의 지표인 이름부터 말하며 나아가 우리는 다음 대사에서 낸시를 무엇보다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관계 속의 존재로만 인지하고 있다는 또한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오로지 낸시로만 보고 있었기에 고양이라는 일반적 범주가 지니고 있는 특성 같은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이 고양이에 대해 써 놓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자신에게 위험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에 걸쳐 친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체험 앞에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는 위와 같은 장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연출된다. 낸시의 오빠 지미가 고양이 낸시를 위해 아예 책에 있는 고양이 항목을 찢어 먹어버리는 것이다. 이만큼 간접 경험한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한 것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의도가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남이 규정한 말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끝에 도달한 마음의 소리를 따르는 것. 바로 이것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말 필요하며 소중하다는 것을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헥터는 자신만이 낸시의 진실을 보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낸시를 직접 겪어보고는 깨닫게 된다. 낸시라는 타자의 진실을 가장 잘못 보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걸.
헥터의 자성을 통해 독자인 우리 역시 깨닫게 된다. 하나의 타자를 바라볼 때, 독립적이며 고유한 존재로써의 그를 보지 않고 흔히들 자주 넣곤 하는 인종이라든지, 성별이라든지, 계급이라든지, 국가라든지, 이념이라든지 하는 일반적인 범주에만 집어넣고 바라보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타자와 관련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차별과 배척을 가져오는 건 대부분 타자를 그 개인 자체로 보지 않고 일반적 범주에만 의거하여 보는 탓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때 '톰과 제리'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던 게 기억난다. '톰과 제리' 역시 고양이와 쥐가 나오나 그 관계는 '고양이 낸시'와 정반대이다.
고양이 톰은 생쥐 제리를 못 잡아먹어서 늘 안달이고 제리는 그런 톰을 피해다니느라 바쁘다. 톰에게 제리는 그저 쥐라는 일반적 범주일 뿐이고 제리에게 톰 역시도 그저 고양이라는 일반적 범주일 뿐인 것이다. 그런 톰과 제리의 세계는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고양이 낸시'가 재현하는 세상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타자에 대한 적대와 혐오가 표출되는 요즘은 그야말로 '톰과 제리'의 세상이라 하여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오늘 차별과 적대를 당하고 있는 이가 결코 자신에게 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듯, 우리 역시 언제든 어느 누군가에 의해 멋대로 규정 당하여 차별과 배척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 사태 때문에 오직 중국과 가까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호주의 기숙사에서 쫓겨난 이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한 사람을 그가 속한 조건이 아니라 직접 부대끼며 그 자체로 보고 헤아릴 것을 강조하는 '고양이 낸시'는 그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직접 체험과 그 독립적이며 고유한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헥터의 이야기를 작품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3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시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고양이를 쥐의 가족이나 친구로 설정하는 건 모험이다. 현실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양이와 쥐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되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독자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가 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것에 크게 성공하고 있는데, 그건 1부와 2부 내내 낸시와 쥐 마을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잘 만들어나가는지 충실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언제나 타자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들의 모습을 본다. 그 관계에서 깊이 느껴지는 따스함 속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범주의 고양이와 쥐가 형성하는 현실 속 관계는 어느새 잊어버리고 쥐 마을 사람들이 낸시를 고양이가 아니라 나의 가족이자 이웃이며 친구인 낸시로 받아들이는 것을 당연히 그럴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정은 단지 몇 장면의 나열만 가지곤 절대 일궈낼 수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품의 절반이나 할애하면서 그들의 관계를 재현한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지미가 헥터에게 했던 아래의 말에서 감정의 울림을 느끼고 헥터의 눈에 왜 눈물이 어리며 자신이 낸시를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다는 고백을 하는 것까지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된다.
변화는 헥터에게만 찾아오는 게 아니라 독자인 우리에게도 다가온다. 우리 역시 일반적 범주에 따른 고정된 정체성으로만 바라보았던 고양이와 쥐에 대한 눈이 어느덧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작품을 통해 직접 체험했듯이, 타자를 직접 경험하며 온전히 그것만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 관계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절감한다.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며 시간을 들여 그를 직접 경험하려는 의지를 가지기 보다는 미리 주입된 편견에 따라 먼저 거부부터 하도록 이끄는 마음을 경계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가 '고양이 낸시'를 읽으면서 그녀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던 것 같다. 그녀와 겪었던 그 모든 시간의 과정이 이 작품에서 강조하는 직접 경험하며 알아가는 여정 자체였으니까 말이다. 늘 그녀가 뭔가를 요구할 때마다 싫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나 조금이라도 침울하게 있는 걸 보면 혹시 아파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드는 것도 다 그런 시간이 영글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그녀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일반적 범주의 고양이가 아니라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그녀가 되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그의 입장에서 헤아리는 것도, 배려하는 것도 그렇게 커다란 의지를 들여야 하는 일이 아니다. 고양이 낸시에서 고양이를 뚝 떼어내고 '낸시'로만 바라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다시 한 번 몸소 부대끼며 함께 축적한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오로지 그 시간의 척도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만이 그를 가늠하는 진실한 잣대인 것도 체득한다. 이는 앞서 누누이 말했던 대로 '고양이 낸시'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목소리이기도 하다. 불행한 내 삶에 원망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랑하고 책임지는 것보다 무시하고 싫어하며 증오하는 게 쉽고 편하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저 내게 유익이 된다는 이유로 불화와 혐오 그리고 적대에 쉽게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톰과 제리의 세상이 가속화 되는 상황 속에서 '고양이 낸시'는 더욱 더 널리 울려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부디 많은 이들이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