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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6년 6월
평점 :
나쓰메 소세키가 47세에 쓴 '마음'은, 4년 전의 '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음'에 나오는 선생님(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부부는 '문'에 나오는 주인공 부부와 너무나 닮아있다. '마음'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후반에 나오는 자필 편지에서, 원래 자신의 집은 재산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꽤나 재산이 많았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자신은 재산에 별 관심이 없었기에 재산 관리를 숙부에게 일임했는데, 그 숙부가 아버지 재산 대부분을 횡령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문'의 주인공 역시 그와 똑같은 일을 겪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높은 학력에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진출할 생각도,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맺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은둔한 채로 고적하게 살아간다. '문'의 주인공도 그랬다. 그의 삶은 조그만 연못 속의 한 마리 잉어처럼 조용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린 원인마저 동일했다. 선생님이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은 한 여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먼 나머지 그만 자신의 연적이라 생각했던 K를 자살로 몰아갔기 때문이었다(진실은 온전히 선생님의 책임이라 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선생님은 그의 죽음에 대해 큰 책임을 느낀다.). 그는 그것에 대한 속죄로 이렇게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삶을 택했던 것이다. '문'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예 친한 친구의 반려자를 빼앗았다. 주인공과 연인의 혹독한 배신을 겪은 친구는 그만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주인공은 친구가 언제 자신에게 복수할 지 몰라서 두려워한다. 그래서 되도록 세상에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한 삶을 산다. '마음'과 '문'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마음'은 속죄의 삶을, '문'은 두려움의 삶을 그리고 있다는 것. 이 둘의 차이가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마음'이 가지고 있는 구성을 단순하게 말하자면, '마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마음'은 첫 장의 제목처럼 '선생님과 나' 두 사람이 중심이다. 하나는 바로 그 '나'가 '선생님'을 만나고 그를 멘토처럼 여기며 같이 지내다 일본 천황이 죽은 뒤에 선생님에게서 그의 삶과 자살하는 이유에 대해서 진실한 고백을 편지로 받는 것을 이뤄져 있다. 다른 하나는 선생님의 편지로만 채워져 있다. 소설은 선생님의 편지와 함께 끝난다. 그것을 읽은 뒤의 '나'는 나오지 않는다. 이런 구성은 바로 전작인 '행인'을 떠오르게 한다. '행인'의 마지막도 이와 같았다. 주인공의 형은 아내를 믿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린다. 결국 형은 요양을 가게 되는데, 동생은 형의 지인에게 형과 동행해줄 것을 특별히 부탁하면서 요양 중의 형 상태가 어떠한지 편지로 전해줄 것을 청한다. 소설의 마지막은 그런 동생의 청에 따라 지인이 형에 대해 쓴 편지로 이뤄져 있다. 그 편지의 끝과 함께 소설도 끝난다. 편지를 읽고 난 뒤의 동생은 역시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마음'의 선생님은 '행인'의 형과 비슷하다. '문'의 부부와 또 하나 차이나는 점이기도 하다. 아내에 관한 것이다. '문'의 부부는 배신에 공모했다. 아내도 함께 배신했고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나눠 가진다. '마음'은 다르다. 친구에 대한 배신은 오로지 선생님의 몫이다. 아내는 K의 자살에 얽힌 진짜 사연을 전혀 모른다. 선생님이 아내의 마음에 검은 잉크 얼룩과 같은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히 비밀에 붙였고, 자신이 사랑이 그런 비극을 낳았기에 사랑을 죄악으로 여긴다. 그리고 아내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그럼 사모님도 믿지 못하십니까?"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다소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네. 그렇게 해버린 거지. 그렇게 하고나서 깜짝 놀랐네. 그리고 굉장히 두려워졌지."(p. 49)
이런 선생님의 모습은 '행인'에 나오는 형과 정말 비슷해 보인다. 사랑해서 함께 했지만 그 어떤 두려움도, 상처도 나눌 수 없는 관계. 결국은 죽을 때까지 오롯이 혼자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자의 체념과 고독. 이런 것들이 둘 모두에게서 느껴진다. '그렇게 해버린 거지'란 말은 '행인'의 형에게도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다. 형도 친동생에게 자신의 아내를 유혹해 달라는 짓을 저질러 버렸던 것이다. 그 부탁을 하고 난 뒤, 아내가 정말 자신을 배신할까 봐, 형은 굉장히 두려워했었다.
이렇게 보자면, '문'과 '행인' 그리고 '마음' 사이에 어떤 연속적인 경로가 있는 듯도 보인다. 똑같은 체념과 유폐의 삶이었지만, '문'의 주인공은 그래도 함께 나눠 짊어질 수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행인'의 형에겐 그런 아내가 없다. 그래서 그는 광기에 빠진다. '마음'의 선생님도 그런 아내가 없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선택한다. 그것은 '행인'의 형이 없다고 고백했던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통의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인의 형이 광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선생님은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바로 인간 자체가 연약해서 그렇다는 것을.
나는 그저 인간의 죄라는 걸 깊이 느꼈네. 그 느낌이 나를 매달 K의 묘에 가게 하는 거야. 그 느낌이 나에게 장모님을 간호하게 한 거지. 그리고 그 느낌이 아내에게 다정하게 하라고 명령하지. 나는 그 느낌 때문에 길 가는 모르는 사람에게 채찍질당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네. 그런 단계를 하나하나 지나면서 남에게 채찍질당하기 보다는 자신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 자신이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보다는 자신이 스스로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하는 수 없이 나는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가기로 결심한 거지.(p. 269)
선생님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숙부의 배신을 겪었다. 숙부의 배신은, 아버지가 그토록 믿을만한 사람이라 칭찬했던 이의 배신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는 식으로 인간에 대한 불신과 그만큼의 삶 자체의 불안정성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숙부처럼 안 될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어려운 처지에 있는 K를 힘껏 돕는 것으로 증명하려 했다. 그런데 K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으며 언제든 그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적을 따돌리려 치졸한 방법을 썼다. 그렇게 K를 배신했다. 그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숙부와 똑같은 짓을 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을 통해 선생님은 통렬하게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연약하다는 것을. 아무리 올곧은 신념으로 굳건히 무장해도, 갈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만큼이나 쉽사리 속세나 인정에게 흔들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교양은 무엇이며, 학식은 또 무엇인가? 배우고 깨우친 것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자신의 마음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다니. K의 자살은 그것을 깨닫게 했고, 그 때 이미 선생님, 그는 죽은 것이었다.
마음의 연약함. 그것은 곧 사상의 연약함이요, 정신의 연약함이기도 하다. '마음'에 이르러 그것에 대한 깨달음은 왜 이다지도 통렬해졌는가?
이유는 역시 사회적인 것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음'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장면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나'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해수욕장으로 놀러간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집에서 급히 불러 가야 하는 바람에 혼자 있게 된다. 나중에 도쿄에 있게 된 나는 선생님과 같이 지내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다는 연락을 받고는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친구와 똑같은 일을 겪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돌보다 선생님의 자살을 알리는 편지를 받는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다. 마치 집 때문에 선생님의 세계에 영영 다시 가지 못하는 것 같다. 선생님의 편지에서도 우리는, 선생님과 K 모두가 가족에게 배신과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본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선생님이 일본 천황이 죽을 때까지 자살하지 못한 것은 아내 때문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속한 사회(한없이 최소화된 사회이긴 했지만)에 붙들려 있어,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 것에 대한 속죄를 결행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좌절 그리고 아내가 바라는 것만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점철된 감옥과 같은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선생님의 자살은 속죄의 결행, 거기에 투영된 자기 신념에 투철하려는 행위로도 해석된다.
이런 반복은 마치 '마음'에 뚜렷한 하나의 전선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나와 사회의 전선, 대립이다. 나는 나로 있고 싶은데, 사회가 끊임없이 방해하는 모양새를 띄기에 그렇다.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들은 바틀비를 자처한다. 허먼 멜빌의 '바틀비'처럼, 수동적이며 고적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여 사회의 동일화 압박에 저항하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만 있으려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마음'과 같은 해에 행해진 '나의 개인주의'라는 소세키의 연설에서 뚜렷하게 집약되어 나타난 바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이탈하려 한다. 사회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마음'에선 이런 대립이 '문'과 '행인'보다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더하여 '바틀비'가 되려는 개인과 사회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문'에서 '마음'까지는 이런 연속된 흐름도 눈에 들어온다. '문'에서 사회는 바틀비가 되려는 개인들을 그저 두려움에 젖게 만드는 존재였다. '행인'에서 사회는 그런 개인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음'에 이르면 사회는 그런 개인들을 죽게 만든다. 이렇게 바틀비의 후예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는 그렇다면 어떤 사회인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통해 폭력과 탐욕의 민낯이 여실히 드러난 일본 군국주의 사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음'에선 이를 뒷받침 하는 아주 선명한 증거가 둘 있다 하나는 선생님을 속죄토록 만드는 이의 이름이 이니셜 K로 표현된다는 것. 둘은 선생님이 자살을 결심한 것이 바로 메이지 천황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K는 두 말할 것도 없이 Korea, 즉 조선을 나타낸다. 조선에 대한 것은 이미 '문'에서 친구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일어난 만주에서 돌아온다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마음'에 이르러선 뚜렷한 실체가 된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에게 직접 죄책감마저 가지게 한다. 이것은 그대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더욱 가혹해진 처사의 반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소세키는 2년 전에 일어난 메이지 천황의 죽음을 언급한다. 선생님은 바로 이 죽음을 보고 굴욕적이라 할만큼 질기게 이어온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일본에서 천황의 죽음은 한 시대와의 이별을 뜻한다. 메이지 천황의 죽음은 소세키가 살았고 그의 신념이 되었던 메이지 정신의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메이지 천황이 서거했네. 그 때 나는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p. 271)
선생님은 자살을 결행하기 이전에도 늘 스스로를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와 똑같이 메이지 정신도 일본의 본격적인 제국주의적 행보와 더불어 죽었다. 그 최초의 희생양은 조선이었다. 조선의 식민지화는 메이지 정신이 제국주의로 변질되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K의 죽음은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메이지 천황이 죽고, 소세키의 분신과 같은 선생님도 자살을 한다. 메이지 정신은 완전히 소멸했고 희망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이보다 선명한 표현이 또 있을 수 있을까?
군국주의에 대한 우려는 '마음' 바로 다음 해에 발표한 '점두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1차 대전을 통해 창궐하는 독일의 군국주의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한다.
개인의 경우에도 싸움에 강하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헛되이 다른 사람을 해칠 뿐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여서, 단순히 승리할 가능성이 많다고 해서 함부로 창과 방패를 드는 것은 주변 국가들에게 폐를 끼칠 뿐이다. 문명을 파괴하는 결과 외에 어떤 효과도 없다. 승리한 국가는 승리한 후에 인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명에 대해서 단순히 손해를 보상한다는 수준 이상으로 공헌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는 현재의 독일에 이만큼의 사명을 완수할 정신과 실력이 있을지 어떨지에 대해서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점두록' 중에서)
소세키가 일본을 바라보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같은 글에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언급하며 그것이 사상과 전혀 별개의 것이며, 설령 둘 사이에 어떤 연쇄가 발견된다고 해도 그것은 발매금지와 같은 억압으로 인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단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는 정신도, 이념도 없는 맹목적인 괴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광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너나할 것 없이 거기에 휩쓸려 자신의 고유한 내면, 신념을 잃고 있었다. 식민지화는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메이지 정신이 열었던 모든 개화기 인물에게도 똑같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또는 어떤 대안을 만들어 갈 것인가? '마음'은 그것에 대한 무력함의 고백이었고, 뒤이어 나온 '나의 개인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그 연설에서 소세키는 이런 말을 한다.
당파심이 없고 옳고 그름이 분명한 그런 주의입니다. 붕당을 만들고 단체를 조직해서 권력과 금력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의 개인주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면에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고적(孤寂)함도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당파가 아닌 이상,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자기 마음대로 갈 뿐이고, 그와 동시에 타인이 가야 할 길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때, 어떤 경우에는 인간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제각각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고적(孤寂)입니다. ('나의 개인주의' 중에서)
일본이라는 국가는 하나로 모으려 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 대열에서 이탈하라고 한다. 휩쓸리지 말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고. 그가 다시금 '문'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문'에서 '마음'까지 계속 작품에다 누벼온 그 고적한 삶이 지금으로써는 더이상 죄를 짓지 않는, 그리고 지금까지 지은 죄에 대한 속죄로써 최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사람이 무리를 짓는 것은 불안과 공포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 없다. 여전히 무리를 짓고, 무리로 나누려는 온갖 무분별한 소문들과 불확실한 정보들이 '나'라는 한 개인 위를 정신없이 횡단한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이런 흐름은 더욱 거세진다.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기생(그것이 의존이든, 배척이든)하여 내 불안과 공포를 지우려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가 경험했듯이 이런 것들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삶을 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소세키 말대로, 타인의 감정과 생각에 무분별하게 전염되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을까?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는 소화하기엔 너무나 많은 정보들로 넘쳐나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의 구원은 보다 많은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나에게 몰려드는 정보들을 얼마나 최대한 단순화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 시대에 맞게 소세키의 고적함을 응용한다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마음'은 바로 그런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어쩌면 그 때나 현재의 일본 그리고 오늘의 유럽이나 IS에서 볼 수 있듯이, 시대의 비극을 막거나 지연시킬 지도 모를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