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vs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도서관에서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책을 꺼내든 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년 전 정조의 어찰첩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언급되었을 당시를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정조의 정적으로 알려졌던 한 신하와 정조가 수시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사실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정조의 독살설은 힘을 잃었다는 뉴스 보도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살설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저자인 이덕일의 인터뷰가 보도됐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에서는 꽤 여러 페이지를 정조독살설에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보도된 정조어찰첩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자 며칠간 대한민국은 이 문제로 떠들썩했다. 이 어찰을 공개한 학자들은 이를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정조가 상스런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면서 정조의 격하를 즐기는 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론 벽파는 ‘국왕에게도 할 말은 하는 원칙주의자’로 격상되고, 정조독살설은 시골 사람들이나 주장한 촌스런 이야기로 전락하고, 도시스런 한양 사람들은 정조독살설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된다. 과연 그럴까?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권 p37-38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인 안대회는 이 논란의 정조어찰첩을 발굴하고 언론에 보도한 당사자이다. 그는 이 어찰첩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밀편지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이 특별한 사료의 등장은 정조와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충동질한다. 마치 법원의 판결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사건에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한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진행되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정조의 비밀편지 p6-7
여기서 말하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는 실록과 일성록 등 그간 정사로 알려진 자료들이며, 법원의 판결이 끝났다는 것은 아마도 노론과 정조의 적대적인 관계, 정조의 정치적 성향 등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 어찰첩이 그간의 평가와는 달리 노론과 정조가 그다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정조는 인자한 성군이기 앞서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역사라고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다이고, 이런 역사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밖에 읽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조독살설이라든지, 정조어찰첩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할 처지는 못 된다. 다만 같은 시대, 같은 자료를 가지고 판이한 주장을 하는 두 책을 접하면서 어느 쪽이 옳으냐 보다는 참 흥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정조의 ‘오회연교’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린 ‘이서구’라는 사람은 이덕일에 의해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불린 실학사대가로, 안대회에 의해서는 노론 벽파의 핵심 막료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이서구의 상소는 이덕일은 ‘남인재상을 등용하겠다는 정조의 뜻을 받든 것’이고, 안대회는 오히려 ‘오회연교는 벽파를 등용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명한 글’이기 때문에 이서구가 맞장구를 친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서구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 봤더니 ‘시에 능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혀 ‘실학파 문인’으로 평가되고,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실학파라기보다는 ‘실학파 문인들과 사귀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정치적인 성향에서 어느 쪽으로 뚜렷이 분류되는 내용은 없다.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이덕일이나 안대회나 각기 자기 입장에 맞게 가져다 썼다는 느낌이다.
두 책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면에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당연 정조독살설이다. 정조독살설에 대한 각자 이견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에는 정조와 노론의 관계, 오회연교의 의미, 정조가 앓았던 병의 경중함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조어찰첩 발견 당시 이 어찰첩이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근거로 제시됐던 이유는 무려 350여통에 달하는 정조어찰의 주인인 심환지가 바로 노론의 영수이기 때문이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노량진에 머물던 심환지는 거듭 사직상소를 올리고 정조와 비밀편지를 왕래하며 상소문의 내용과 정국을 상의했다. 10월 16일 저녁에 정조가 보낸 편지에는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 돈유할 것이니, 일단은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편지를 보냈다. ... 이 명령을 받고 심환지는 질병으로 명령을 받들지 못한다고 정조의 분부대로 답했다. - 정조의 비밀편지 p56-57
실록에는 비밀편지의 내용은 당연히 없고, 정조가 사관을 보내 빨리 벼슬하라고 명령했더니 심환지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찰에서 이러한 비밀편지는 심환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과도 오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하고나 편지를 왕래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측극들과 편지를 통해 여론을 청취하고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정사와 달리 노론과 정조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안대회는 정조와 노론 벽파를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비판적 협력자로서 정치적 동반자 관계라고 보아야 할 만큼 최측근 신료’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가 어찰을 비밀리에 왕래했고 받아보고 즉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심환지가 이렇게 잘 보관한 이유를 정치적 보험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어찰은 정조의 정치적 입장이 노론 벽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동지적 관계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입증해줄 만한 좋은 증거물’이었으며, ‘이들 어찰은 심환지가 정조와 맺은 깊은 관계를, 그리고 심환지가 행한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이렇게 말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심환지가 정조의 독살설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정조의 의문사와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다. 서용보를 내의원 제조에서 체차시킨 정조가 심환지를 왜 내의원 제조로 그대로 두었는지를 말해주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 p.43
같은 사료를 두고 서로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 외 정조의 병에 대해서도 안대회는 어찰에서 “나는 날마다 적빙 및 사발과 황련 몇 첩씩을 마시는데 그러고 나면 폐의 열과 답답한 속이 다소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하는 등 정조가 오래 전부터 병에 시달렸으며 승하하기 며칠 전부터는 중병이었음을 강조한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의 진정한 병은 가슴의 화기’였으며, 그것은 ‘생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것을 목도한 아들 가슴속의 화기이자 부친을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 함께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 가슴 속의 화기’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병은 그전부터 갖고 있던 화병과 종기였고 이것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정조가 위독하게 되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인물은 정조의 정적 정순왕후’였으며,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고 정조 사망 당일 심환지는 영의정으로 승진한 것을 독살설의 증거로 제시한다.
이덕일은 정조 사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시대의 모든 개혁조치를 거꾸로 돌리는 과거사 청산작업이 시작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심환지’였고, ‘다시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엄금되었고, 노론 일당 독재가 재연’되었으며 만약 심환지가 정조 독살과 무관하다면 ‘그는 최소한 정조 사후 정조가 견지했던 정치노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대회는 정조 사후 ‘개혁군주 정조의 독살과 그 이후 조선의 쇠퇴와 몰락의 구도는 드라마틱하면서도 논지가 정연해 보인다.’고 할 뿐 그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안대회의 독살설 부정은 ‘개혁을 추진한 정조는 선이고, 그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악이라는 구도의 설정은 민족주의적 정서에 부합하기도 한다. 정조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뒤에 멸망하지 않았다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라며 정조독살설을 제기한 쪽에 대해 억울해?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이라는 투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독살설과 이후 조선의 역사에 대한 논지를 분노하는 듯한 어조로 써내려가고 있다. 이덕일의 책이 학계에서는 역사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의 주장이 비주류임에도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며 작가로서 인지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런 성향이 대중과 잘 맞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찰첩에는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매력 넘치는 정조가 고스란히 보인다. 또한 그의 고뇌에는 연민이 든다. 이도저도 아닌 채 몸을 사리는 자를 질책하고 신하에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용기를 갖고 정국을 주도할 것을 주문하는 것에는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직언을 하는 신하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럴 수 있게 마음과 귀를 열어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을 사지로 몰지 않고 정적이든 내편이든 정사를 나누었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이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겠는가? - 정조의 비밀편지 p.85
이처럼 다정다감하기도 했다. 정조는 독살되었는가 병사했는가? 노론(벽파)와 정조는 정적이었는가 정치적 동반자였는가? 심환지는 왜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어찰을 꼼꼼하게 남겨두었는가? 이 모든 의문에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우리가 위대한 군주를 너무 빨리 잃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