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편지 vs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도서관에서 ‘정조의 비밀편지’라는 책을 꺼내든 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년 전 정조의 어찰첩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언급되었을 당시를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정조의 정적으로 알려졌던 한 신하와 정조가 수시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사실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고 어쩌고 저쩌고... 해서 정조의 독살설은 힘을 잃었다는 뉴스 보도 끝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살설이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저자인 이덕일의 인터뷰가 보도됐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에서는 꽤 여러 페이지를 정조독살설에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 보도된 정조어찰첩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자 며칠간 대한민국은 이 문제로 떠들썩했다. 이 어찰을 공개한 학자들은 이를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사료로 둔갑시켰다. 그러면서 정조가 상스런 소리를 서슴지 않았다면서 정조의 격하를 즐기는 듯한 자세로 일관했다. ...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론 벽파는 ‘국왕에게도 할 말은 하는 원칙주의자’로 격상되고, 정조독살설은 시골 사람들이나 주장한 촌스런 이야기로 전락하고, 도시스런 한양 사람들은 정조독살설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 된다. 과연 그럴까?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권 p37-38

 

‘정조의 비밀편지’의 저자인 안대회는 이 논란의 정조어찰첩을 발굴하고 언론에 보도한 당사자이다. 그는 이 어찰첩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비밀편지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와는 성격이 판이하다. 이 특별한 사료의 등장은 정조와 그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충동질한다. 마치 법원의 판결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사건에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한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진행되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정조의 비밀편지 p6-7

 

여기서 말하는 기왕에 밝혀진 사료는 실록과 일성록 등 그간 정사로 알려진 자료들이며, 법원의 판결이 끝났다는 것은 아마도 노론과 정조의 적대적인 관계, 정조의 정치적 성향 등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판결을 뒤집거나 큰 영향을 끼칠 새로운 증거물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 어찰첩이 그간의 평가와는 달리 노론과 정조가 그다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며, 정조는 인자한 성군이기 앞서 노련한 정치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역사라고는 고등학교 때 배운 게 다이고, 이런 역사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밖에 읽어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조독살설이라든지, 정조어찰첩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을 할 처지는 못 된다. 다만 같은 시대, 같은 자료를 가지고 판이한 주장을 하는 두 책을 접하면서 어느 쪽이 옳으냐 보다는 참 흥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정조의 ‘오회연교’에 동조하는 상소를 올린 ‘이서구’라는 사람은 이덕일에 의해서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과 함께 불린 실학사대가로, 안대회에 의해서는 노론 벽파의 핵심 막료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이서구의 상소는 이덕일은 ‘남인재상을 등용하겠다는 정조의 뜻을 받든 것’이고, 안대회는 오히려 ‘오회연교는 벽파를 등용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표명한 글’이기 때문에 이서구가 맞장구를 친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서구를 인터넷 검색창에 쳐 봤더니 ‘시에 능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혀 ‘실학파 문인’으로 평가되고,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실학파라기보다는 ‘실학파 문인들과 사귀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정치적인 성향에서 어느 쪽으로 뚜렷이 분류되는 내용은 없다.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이덕일이나 안대회나 각기 자기 입장에 맞게 가져다 썼다는 느낌이다.

 

두 책은 그 외에도 몇 가지 면에서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당연 정조독살설이다. 정조독살설에 대한 각자 이견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에는 정조와 노론의 관계, 오회연교의 의미, 정조가 앓았던 병의 경중함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정조어찰첩 발견 당시 이 어찰첩이 정조독살설을 부인하는 근거로 제시됐던 이유는 무려 350여통에 달하는 정조어찰의 주인인 심환지가 바로 노론의 영수이기 때문이다.

 

우의정에 임명되고 노량진에 머물던 심환지는 거듭 사직상소를 올리고 정조와 비밀편지를 왕래하며 상소문의 내용과 정국을 상의했다. 10월 16일 저녁에 정조가 보낸 편지에는 “내일이나 모레 사이에 다시 사람을 보내 돈유할 것이니, 일단은 ‘아직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편지를 보냈다. ... 이 명령을 받고 심환지는 질병으로 명령을 받들지 못한다고 정조의 분부대로 답했다. - 정조의 비밀편지 p56-57

 

실록에는 비밀편지의 내용은 당연히 없고, 정조가 사관을 보내 빨리 벼슬하라고 명령했더니 심환지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찰에서 이러한 비밀편지는 심환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신하들과도 오갔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무하고나 편지를 왕래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측극들과 편지를 통해 여론을 청취하고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정사와 달리 노론과 정조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안대회는 정조와 노론 벽파를 ‘적대적 관계라기보다는 비판적 협력자로서 정치적 동반자 관계라고 보아야 할 만큼 최측근 신료’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가 어찰을 비밀리에 왕래했고 받아보고 즉시 없애라고 명령했음에도 심환지가 이렇게 잘 보관한 이유를 정치적 보험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조어찰은 정조의 정치적 입장이 노론 벽파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동지적 관계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입증해줄 만한 좋은 증거물’이었으며, ‘이들 어찰은 심환지가 정조와 맺은 깊은 관계를, 그리고 심환지가 행한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명확한 증거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이렇게 말한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는 심환지가 정조의 독살설과 무관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정조의 의문사와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 해석해야 마땅한 것이다. 서용보를 내의원 제조에서 체차시킨 정조가 심환지를 왜 내의원 제조로 그대로 두었는지를 말해주는 사료이기 때문이다. -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2권 p.43

 

같은 사료를 두고 서로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 외 정조의 병에 대해서도 안대회는 어찰에서 “나는 날마다 적빙 및 사발과 황련 몇 첩씩을 마시는데 그러고 나면 폐의 열과 답답한 속이 다소 상쾌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토로하는 등 정조가 오래 전부터 병에 시달렸으며 승하하기 며칠 전부터는 중병이었음을 강조한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의 진정한 병은 가슴의 화기’였으며, 그것은 ‘생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것을 목도한 아들 가슴속의 화기이자 부친을 죽인 정파와 20년 이상 함께 정사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던 군주 가슴 속의 화기’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병은 그전부터 갖고 있던 화병과 종기였고 이것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고 대부분의 관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정조가 위독하게 되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인물은 정조의 정적 정순왕후’였으며,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가운데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이고 정조 사망 당일 심환지는 영의정으로 승진한 것을 독살설의 증거로 제시한다.

 

이덕일은 정조 사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독살설의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조시대의 모든 개혁조치를 거꾸로 돌리는 과거사 청산작업이 시작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다름 아닌 심환지’였고, ‘다시 성리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엄금되었고, 노론 일당 독재가 재연’되었으며 만약 심환지가 정조 독살과 무관하다면 ‘그는 최소한 정조 사후 정조가 견지했던 정치노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대회는 정조 사후 ‘개혁군주 정조의 독살과 그 이후 조선의 쇠퇴와 몰락의 구도는 드라마틱하면서도 논지가 정연해 보인다.’고 할 뿐 그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안대회의 독살설 부정은 ‘개혁을 추진한 정조는 선이고, 그에 반대한 노론 벽파가 악이라는 구도의 설정은 민족주의적 정서에 부합하기도 한다. 정조가 죽지 않았다면 조선은 뒤에 멸망하지 않았다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라며 정조독살설을 제기한 쪽에 대해 억울해? 하지만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이라는 투다. 반면 이덕일은 정조독살설과 이후 조선의 역사에 대한 논지를 분노하는 듯한 어조로 써내려가고 있다. 이덕일의 책이 학계에서는 역사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의 주장이 비주류임에도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오며 작가로서 인지도를 가지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이런 성향이 대중과 잘 맞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찰첩에는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너무나 매력 넘치는 정조가 고스란히 보인다. 또한 그의 고뇌에는 연민이 든다. 이도저도 아닌 채 몸을 사리는 자를 질책하고 신하에게 모서리를 드러내어 용기를 갖고 정국을 주도할 것을 주문하는 것에는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보다는 직언을 하는 신하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럴 수 있게 마음과 귀를 열어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을 사지로 몰지 않고 정적이든 내편이든 정사를 나누었으며, 잠을 자지 않고 밥을 못 먹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이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런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겠는가? - 정조의 비밀편지 p.85

 

이처럼 다정다감하기도 했다. 정조는 독살되었는가 병사했는가? 노론(벽파)와 정조는 정적이었는가 정치적 동반자였는가? 심환지는 왜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어찰을 꼼꼼하게 남겨두었는가? 이 모든 의문에도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우리가 위대한 군주를 너무 빨리 잃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비밀편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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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3-01-1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와 함께 글 잘 읽었습니다! 얼음무지개님!
반갑습니다^^

얼음무지개 2013-01-17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어색하네요.. 제 글에 댓글이라니..ㅎㅎㅎ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시대가 만든 운명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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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역사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는 한다. ‘구제도의 모순’이라고 일컬어지는 중세 신분제도 안에서의 배고픔과 차별을 견디지 못한 민중들은 목숨을 바쳐 프랑스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공포정치를 지나 다시 나폴레옹을 황제로 받아들였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으로 등장한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지만 그 결과는 독재정치였고, 독일의 나치즘 하에서 무수한 학살을 당한 유대인들은 현재 자신들의 역사를 반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의 아이러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도한 역사의 물결은 바꿀 수 없다. 그리고 변화는 민중들 안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런 변화를 감지한 지도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치지만,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결국 시대에 커다란 짐을 지우고 비참한 결말을 맺는다. 이 책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18세기 후반의 조선. 영조가 죽고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올라 민중을 위한 열린사회, 웅대한 나라 조선을 꿈꿨던 정조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역사의 흐름을 반대로 되돌리려 했던 노론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역사의 한 가운데를 통과한 정약용을 통해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정약용의 일생(中 특히 정조와의 관계), 둘째 정조암살설, 셋째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당시 남인들 포함)의 사상. 그 중 1권은 정약용의 출생과 정조 사망 전까지 정약용의 활약을 그린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정약용과 사도세자의 연결고리를 단단히 하여 정조까지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런 연결은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핏대를 세우는 노론에게 정약용은 훗날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론에게 최대의 정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정약용이 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간 이후 벼슬이 동부승지, 형조참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조의 사람을 쓰는 방법이다. 정조는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사도세자를 죽인 자들을 바로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며, 오히려 정승의 자리에 올려 정사를 논한다. 그것은 저자가 말한 대로 피눈물을 흘리는 초인적인 인내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남인들을 키운다. 정약용은 영의정까지 오르는 체제공과 함께 정조에게 가장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신하이자, 밤 깊도록 학문을 논하고 농을 하는 동지였다. 하지만 그런 지위에 오르기까지 정조는 정약용의 사람됨과 학문을 한 눈에 알아보지만 바로 기용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시험하고 과제를 주며 단련시킨다. 때로는 아버지처럼 감싸주고 때로는 스승님처럼 혼을 내고 가르치며 정조는 정약용을 자신의 사람이자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재상으로 만들어갔고 정약용은 정조의 기대에 부흥한다.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함께 실현할 신하로서 남인들을 그렇게 조금씩 키워갔다.

 

탁월한 식견을 가진 왕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 정직하고 능력 있는 신하들이 만들어가는 사회는 과거의 모순을 조금씩 고쳐가고 서서히 발전하고 있었다. 만일 정조가 그 때 죽지 않았더라면 하는 탄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약용과 이가환 등 정조에 의해 키워진 신하들이 곧 정승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정조의 꿈을 품은 계획도시 화성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조 사후의 역사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낙향한 정약용에게 조용히 내각 서리를 보내 곧 부르겠다는 따뜻한 전갈을 보냈던 정조는 얼마 안 있어 승하하고 말았다.

 

이 책이 많은 부분 할애하고 있는 정조암살설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사람이 다름 아닌 정조의 정적 정순왕후였다는 것과(조선시대 임금의 임종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여자는 지켜볼 수 없는 것이 법도였음에도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 둘이 있는 가운데 죽었다.) 정조는 의술을 배워 자신의 병을 스스로 치료할 정도로 극도로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했고, 수렴청정 반교문이 반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정순왕후는 정조 사망 당일 불법으로 인사권을 행사해 자신의 주변인들을 승진시켰다는 점 등을 증거로 들고 있다. 정조암살설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주장대로 정조가 암살되었다 확신하기에는 이르지만, 조선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열린사회를 지향했던 군주 대신 당색에 사로잡혀 오직 당론만을 쫓았던 노론에 의해 퇴보하기 시작했기에 정조의 죽음에 안타까움과 의문이 더해지는 것이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권은 정조 사후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이 남인들을 제거하기에 혈안이 된 노론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남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사상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 시대의 천재 이가환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는 단지 반대당파에 속한다는 이유로 천재를 죽이지는 않는가?” 이승훈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는 주류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고,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몰지는 않는가?” 정조는 이렇게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는 나처럼 부친을 죽인 적당과 타협하며 미래를 지향했던 정치가가 있는가?” 정약전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에도 불의한 세상에 대한 절망을 민중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있는가?” 그리고 정약용은 물었다. “너희들의 시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를 죽이지는 않는가?”    1권 p.13-14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을 반추해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이 물음들에 있다. 이 책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열린 사회, 열린 사고를 지향했던 사람들이,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죽였던 자들에 의해 사지에 몰려야만 시대를 정약용을 통해 복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는 성리학이 아닌 유학의 본질인 공자의 유학을 공부하고자 했고 자신만의 학문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그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성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는 조선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남인들이 천주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다. 성리학이 아닌 학문은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이용된 것이다. 남인들이 죽거나 유배를 간 이후 조선은 노론의 세상이 된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힘 한번 써 보지 못하는 순조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에 휘둘리다 1910년 나라를 잃고 만다.

 

역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고, 안타까운 순간도,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다행스러운 순간도 있다. 역사를 단지 지나간 과거로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볼 수 있고,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시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가환, 이승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들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는 지금 천명을 받아들이는 세상인가? 아니면 다산의 사상을 불 속에 처넣고 태워버리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정약용이 도를 펼칠 수 있는 사회인가? 아니면 서용보, 이기경, 홍낙안 등이 득세하는 세상인가? 우리 사회는 다산이 꿈꾸었던 그런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오늘 정약용은 이런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2권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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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vs D에게 보낸 편지

 

 

 

 

 

 

 

 

 

 

 

 

 

 

 

 

 

당신은 연인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은 ‘이메일과 핸드폰, 카카오톡이 있으니 편지에 대해 말 한다는 것이 매우 지루하다’는 것쯤은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너무도 자주 언급되었으니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오히려 이 스마트한 세상에서 정성스럽게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았을 때 더욱 감동을 받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편지지를 고르고 볼펜을 들어 어떤 내용을 써야 할 지 고민을 거듭하기까지 몇 시간 혹은 며칠, 몇 달 제법 긴 시간이 걸립니다. 엄지로 문자를 찍고 발신 버튼을 누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물론 한 마디의 문자를 보내는 순간에도 수없이 망설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드디어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어 서툰 솜씨로 글씨를 써 내려가고, 편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기까지 우린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편지를 받을 상대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긴 편지를 받는다는 것은, 우체국이 없어서 편지를 전달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던 예나 버튼 하나로 문자를 주고받는 지금이나 참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만약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내게 전해 준 편지 한 통이 연인에게서 온 것이라면 기분이 어떨까요?

 

여기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서로 사랑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연인이 주고받은 편지이고, 또 한 권의 책은 이제 인생의 황혼에서 평생 동안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아내에게 쓴 편지입니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센터미터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킬로그램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합니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던, 아니 소속될 수 없었던 불안한 정체성이 공통점이었기 때문일까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떠나버린 상태에서 대부 아래서 자라 고아 아닌 고아였던 도린과, 세계2차 세계대전 당시 성(姓)과 종교까지 바꿔야만 했던 유대인이었던 고르는 1947년 첫 만남 후 서로에게 이끌리고, 1949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에콜로지스트 선언’으로 소개 된 책으로 유명한 일종의 생태사회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저작을 발표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사실 고르는 도린을 만났을 때만 해도 가난뱅이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춥고 배고팠던 기간은 결혼을 하고서도 꽤 오래 갑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철학을 세상에 발표하고 왕성한 활동을 하기까지 도린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묵묵히 고르의 곁을 지킵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1983년 아내 도린은 불치병 진단을 받습니다. 허리디스크로 전신 마취 수술을 받기 위해 몸에 주입된 물질의 일부가 두개골로 올라갔고 도린은 이후 24년 동안 고통을 받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 고르는 자신의 첫 저작(배반자)에서 아내를 그릇되게 표현한 것과 평생 자신에게 헌신했던 아내에 대해 그동안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됩니다. 사랑과 감사의 고백을 담은, 오직 아내에게 헌사하는 편지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 D에게 보낸 편지

 

 

60년을 함께 했던 도린과 고르는 함께 생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둔 한 남자는 죽음의 두려움보다 아내가 없는 삶이 더 두려웠습니다. 물론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동반자였고, 서로가 없는 삶 이상의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도린이 없었다면, 그녀의 사랑이 없었다면 자신의 사상과 저작은 물론, 자신조차 존재할 수 없었노라고 고백하는 편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됩니다.

 

 

“네가 없는 집이 얼마나 적막한지 모르겠어. 네가 떠난 순간 너무 맥이 빠져버려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네가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봤지만 그 답은 찾을 수 없어. 그냥 모든 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뿐이야. 생명력 없는 삶, 바로 그게 지금 나의 삶인 것 같아.”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마르셀 세르당이 에디트 피아프에게 첫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마르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디트를 만났을 때 마르셀은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과 에디트의 사랑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고되는 것은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마르셀 세르당.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견디고 사랑에 상처받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고, 각자의 일로 떨어져 있는 날이 많았던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 동안 편지를 쓰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정상에 있었던 두 사람의 편지는 예상 외로 사춘기 소년․소녀가 썼을 법한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그런 탓에 문학적인 가치는 적을지라도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르셀 세르당이 죽은 뒤에 마르셀의 편지는 에디트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둘의 편지는 나중에 에디트 피아프 기념관 관장에게 물려주게 되고 세상에 공개됩니다.

 

 

“내 심장은 너만을 향해서 고동치고 있고, 너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너를 꼭 안고 싶어. 내가 마음껏 너를 사랑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이제 열이틀만 지나면 너를 만날 수 있겠지?”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하루라도 빨리 연인이 보고 싶었던 에디트는 마르셀에게 예정했던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자신에게 와 주기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에디트를 만나러 가는 도중 비행기는 어느 산꼭대기에 추락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에디트는 마르셀이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없었지만, 마르셀을 위해 1950년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를 발표합니다. 저는 이 노래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사랑의 찬가’는 마르셀을 위해 에디트가 쓴 또 한 통의 편지일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버려도, 땅이 꺼져버린다 해도 그대만 나를 사랑한다면 아무래도 괜찮아요. 당신이 원하신다면 조국을 버리겠어요. 친구도 버리겠어요. 사람들이 비웃는다 해도 당신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든지 나는 해내겠어요.” - 사랑의 찬가

 

 

앙드레 고르에게 생의 마지막 편지는 아내에게 보내는 연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고백이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습니다. 서로를 너무도 그리워했던 에디트와 마르셀의 편지는 고스란히 사랑의 증거로 남아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이야기하는 것은 추억과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치환되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아날로그는 유효합니다. 소중한 마음을 전하고 받는 편지는 싸구려 아날로그가 아닌 진솔한 마음 그 자체일 것입니다.

당신은 연인에게 편지를 써 본 적이 있습니까?

 

 

D에게 보낸 편지 ★★★★

마르셀 세르당과 에디트 피아프의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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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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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꽃이다. 사상의 뿌리, 정치․ 제도의 줄기, 경제․ 사회의 건강한 수액이 가지 끝까지 고루 펼쳐진 다음에 비로소 문화라는 귀한 꽃은 핀다. 지금 한국 문화는 겉보기에는 화려한 듯싶으나 내실을 살펴보면 주체성 혼란, 방법론의 혼미로 우리 정서와 유리된 거친 들판의 가시밭길을 헤매고 있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야 한다. 문화는 선인들의 과거를 성실하게 배워 발전적 미래를 이어가는 재창조 과정이다. 문화의 꽃은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가 김홍도 시대에 못지 않은 훌륭한 사회를 이룰 때에만 피어난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워져야 한다.

 

 내 책장에는 많은 양의 책은 아니지만 비교적 다양한 분야의 책이 있다. 한 곳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보다는 팔랑귀마냥 이게 좋다 그러면 이쪽을 기웃거리고, 아니다 저게 좋다더라 하면 또 저쪽을 기웃거린 탓이다. 어쨌든 소유하고 있는 책들은 책장 한 칸에 같은 분야의 책들을 묶어 정리하는 편인데, 한 권 두 권 뜸하게 사들이던 미술관련 책들이 어느 순간 한 칸을 넘어서 옆 칸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 접한 미술 책은 이명옥의 ‘팜므파탈’이었다. 이 책을 읽고 예술이라는 건 뭔지, 미술의 세계는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미술이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뒤이어 읽은 몇 권의 책으로 얻게 된 얄팍한 정보와 미천한 안목으로 반고흐전이다, 모네전이다, 클림트전이다 하는 등등의 전시회를 찾아다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제야 접한 이 책은 나를 부끄럽게도 하고 자랑스럽게도 한다. 또 미소 짓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책의 표지를 보고서도 그렇다. 바늘보다 가는 붓으로 수천, 수만 번의 붓질로 완성한,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수양을 쌓은 마냥 조선의 호랑이를 그려낸 김홍도의 그림은 세계 최고의 호랑이 그림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지만, 이런 그림이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기는커녕 격에 맞지도 않는 일본식 표구로 되어 있는 사진에는 가슴이 싸해지기도 하다.

 

단순히 외향만을 닮게 그려낸 것이 아니라 정신을 오롯이 담아낸 우리 초상화의 가치, 다른 색으로 조금 더 쳐진 가지의 길이, 긁혀진 소나무조차 그냥 그려진 것이 아니며, 꽉 차있는 것보다 오히려 비어있음이 무릎을 치게 하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화가의 예술적 경지임을 말해주는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은 서양의 문화를 동경한 채 우리의 것을 등한시했던 우리 모두에게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을 동시에 일깨우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한국의 미 특강’ 이라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한국의 문화에 대해 깊게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실제로 청중들을 앞에 두고 강의 했었던 내용을 보충하여 엮은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딱딱하지 않고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술술 읽힌다. 미술에 대해서 깊은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으니 내용도 어려울 리가 없다. 아주 쉽지만 절대 가볍지 않다. 책장이 술술 넘어가면서도 깊은 무게감으로 우리 문화에 대한 식견을 높여준다. 적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우리 그림을 보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오른쪽에서부터 그림을 보다 도무지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는 당혹감에 부딪치고야 마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혼자서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가 지리도 잘 몰라서 한참을 헤매는 바람에 박물관 전체를 다 둘러보지도 못하고 그냥 내려와야만 했었다. 이제 그 국립중앙박물관을 반드시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오주석의 책을 읽었고, 그 때 내가 김홍도의 그림을 너무도 잘 못 보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그림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서둘러야 할 것 같다.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 ․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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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비룡소 클래식 16
루이스 캐롤 지음, 존 테니엘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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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내 기억은 매우 단편적이다. 그러니까 아주 어릴 때 TV에서 노란 머리색을 가진 한 여자아이가 말하는 토끼를 따라간다거나, 동물들과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등의 몇 가지 장면들로만 기억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거 어떤 여자애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되서 이상한 모험을 하는 그런 거 아니야? 물론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이제서야 읽게 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이상했다. 사실 동화라는 것을 접할 때는 어떤 편견이라고 해야 할까, 고정관념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게 있다. 서양 동화는 대체적으로 공주와 왕자가 나온다. 주로 시작은 아주아주 먼 옛날에...이다. 공주는 어떤 저주로 성에 갇히게 되거나 어떤 못생긴 동물로 변하거나 아니면 얼음처럼 차가워서 여러 남자들의 구혼을 거절하거나.. 등등. 물론 멋진 왕자님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주와 왕자는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산다. 동양 동화.. 그러니까 우리나의 전래동화는 주로 권선징악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은 착한 사람을 구박하지만 나중에는 착한 사람이 하늘의 도움으로 잘 살게 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어쨌든 동화라는 것은 교훈을 주기 마련이다. 착하게 살자 라든지, 여자는 예뻐야 한다 라든지, 외모가 아닌 마음을 봐야 한다 라든지..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였을까. 오.. 앨리스.. 너는 정말 정말 이상했다.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괴테나 세익스피어의 저작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 읽는 동화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실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읽은 사람은 없는. 그럼에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리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시공간을 초월해 읽히고 또 읽히는. 또 하나를 덧붙이자면 누구나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하나로만 해석되고 결론지어지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이상한 동화는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독서모임에서 동화를 읽어보자고 누군가 제안했을 때 내가 떠올렸던 책은 '오즈의 마법사'였다. 사실 오즈의 마법사 역시 어릴 때 읽었나 안 읽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확실한 건 그 유명한 '오버더레인보우'를 멋지게 부른 주디 갈란드 주연의 영화 '오즈의 마법사'는 틀림없이 봤다는 것이다. 내 머릿 속에서 오즈의 마법사는 영화로 각인되었지만, 그 멋진 이야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비로운 동화로 남아있다. 그런데 내 입이 미처 열리기 전에 누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말했다. 그 분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화로 봤고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지만, 그 순간 뭔가 번쩍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너무 늦은 나이에 읽게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이상한 이야기만큼이나 내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오.. 앨리스, 너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거니?

 

세 살때 엄마가 읽어주는 신데렐라, 초등학교 때 내가 직접 읽는 신데렐라, 그리고 어른이 되어 읽는 신데렐라. 느낌이 어떨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는 동안 나는 왜 어릴 때 이 책을 읽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들 수 밖에 없었던 건 자꾸만 등장 인물 하나 하나, 대사 한 줄 한 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못된 버릇(?) 때문이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가게 된 건 우연히 발견한 토끼때문이었다. 주머니가 달린 조끼를 입은 토끼를 따라 굴 속에 빠지게 되는 앨리스는 한참을 떨어지다가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들에 나는 어느샌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앨리스가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건 어린이의 정신적 성장을 의미하는 걸까? 쥐에게 자꾸 고양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동물들은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걸까? 울기만 하던 아이가 돼지로 변한 이유는 뭐지? 여왕은 왜 자꾸 소리를 지르고 목을 자르라고 하는 걸까? 가짜 거북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 이야기가 계속되고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마다 나는 새로운 의미찾기를 하고 또 하고 있었다. 그러다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앨리스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동물들이 말을 하는게 이상하지만 대화를 주고 받고,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게 이상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져서 자신의 몸을 자유자재로 상황에 알맞는 크기로 만든다. 어떤 상황이 와도 결코 당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건 동화니까. 어떤 편견도 고정된 지식도 강박관념도 없는 그저 신나는 모험과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앨리스와 같은 순수한 아이의 시선에 맞춘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찾기는 머리 아픈 걸 좋아하는 어른들이 만들어 낸 골치아픈 물음일 뿐이다.

 

황금빛 오후 내내 / 한가로이 물 위를 흘러가네. / 어설프나 어린 어깨는 / 부지런히 노를 젓고 / 어린 손들이 부질없이 / 길을 안내하느라 애쓰네

아, 잔인한 세 사람이여! / 이렇듯 꿈결같이 몽롱한 시간에 / 조그마한 깃털 하나도 날려 보낼 수 없을 만큼 / 나지막한 숨결로 이야기를 해달라니! / 그러나 가엾은 목소리 하나가 / 어찌 세 혀를 이기리오.

오만한 맏이가 먼저 나서서 / "시작하세요!" 명령하고 / 둘째는 상냥하게 / "재미있는 걸로요!" 부탁하고 / 셋째는 일 분마다 이야기에 끼어드네.   p. 7~8

 

오! 앨리스... 너는 순수한 어린아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는 귀여운 아이. 환상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그런 작고 어여쁜 아이. 토끼를 따라 끝없는 동굴에 빠진 앨리스가 어떻게 될 지, 누구를 만날지 몹시 궁금한 호기심에 가득찬 아이. 오... 앨리스..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야!

 

그러다 갑자기 모두들 입을 다물고 / 환상 속으로 빠져드네. / 저 땅 속 낯설고 신비로운 이상한 나라에서 / 새와 짐승과 다정하게 재잘거리며 / 헤매고 다니는 꿈의 아이를 쫓아 / 그것이 정말 사실인 듯.

이제 상상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 이야기도 다 말라 버리고 / 이야기꾼은 지친 목소리로 / "나머지는 다음에"하면 / "지금 해주세요, 지금요." / 행복에 겨운 소리가 메아리치네.  p. 8~9

 

자! 동화를 읽을 때는 동화를 읽어야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듯이 읽어서야 되겠는가. 의미찾기와 교훈 발견하기를 중단하고 이야기 자체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3살 때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 글을 깨우치고 난 후 내가 스스로 읽는 동화, 어른이 되어서 읽는 동화가 같은 내용임에도 그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 사회를 보는 눈과 깊이가 쌓이고, 당시의 주변 상황 때문이기도 혹은 번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몸이 커가고 머리가 굵어질수록 동화를 동화로 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리하여 이상한 나라가 생겨났네. / 이렇게 서서히 하나씩 하나씩 /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네 / 우리의 즐거운 뱃사공들은 노를 저어 / 저물어 가는 노을 속에 집으로 돌아가네.

앨리스! 너의 부드러운 손으로 / 동심이 가득한 이 이야기를 가져가 / 추억의 신비로운 가닥 속에 놓아 두어라. / 어린 시절의 꿈들이 엮이어 있는 그곳에. / 멀고먼 나라에서 꺾어 온 / 순례자의 시든 꽃다발처럼   p. 9

 

오! 앨리스.....이제야 너를 알겠구나.

너는 그저 작고 귀여운 어린 아이일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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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1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동화는 동화로.. 앨리스에 각주가 엄청 달린 책을 사가지고 저는 계속 분석해야 한다고만 느껴서 어렵게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즈의 마법사>는 저도 봤지만 이건 안 읽어봤거든요. 얼음무지개님, 리뷰 좋아요. 현빈 책인데, 히히히 현빈이 읽어도 절대 읽어지지 않던 책이었어요. 무지개님땜에 읽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얼음무지개 2012-05-14 22:54   좋아요 0 | URL
저는 시크릿가든이라는 드라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현빈에 의해 소개된 책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구요..ㅎㅎㅎ 책의 마지막 문장쯤을 보는데 갑자기 동화를 읽는 내내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제 자신이 한심해져서 문득 동한 마음으로 쓴 리뷰입니다. 리뷰라고하기에도 뭐하네요..^^물론 깊이있게 읽으려면 엄청난 각주가 필요하겠지만 어떤 책이든 내가 느껴지는 대로 읽을 필요도 있지요..특히 그것이 동화라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