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팔기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조영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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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나는 철새였다.

  어디든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른 적이 별로 없었다. 여섯 살 때 집에 큰 위기가 찾아왔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들은 나를 따로 신경 쓸 여력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머니 집에서 외할머니 집으로 외삼촌 집에서 삼촌 집으로 이사 온 날 돌리는 떡 마냥 돌아다녔다. 난 뻐꾸기 새끼였다. 남의 둥지에서 눈칫밥을 먹는 존재. 그렇다고 할머니나 외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외삼촌이 나를 홀대한 것은 아니지만 진짜 집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관찰력이 발달했다. 늘 사람들이 짓는 표정을 세심하게 살펴야 했고 그 표정만큼이나 바깥 동정이나 사물에 신경 쓰느라 가지게 된 것이었다. 늘어나는 건 관찰력만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는 존재는 의문 역시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물어볼 수 없으므로 덩달아 해석하는 능력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물론 그게 객관적인 정답이 아닌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남의 도움을 쉽사리 요구할 수 없는 처지에서 내가 본 것을 내 식대로 해석하는 버릇을 억누르기란 곤란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나에게 있어 관찰력과 해석력이란 일종의 생존 기술과도 같았으니까. 그건 연실에 아슬아슬하게 매어달린 연과도 같아서 내 말투, 내 행동 하나로 또 다시 이 연실에서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은 아닐까 늘 불안하기만 했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는 머리가 쑥쑥 자란다는 여섯 살을 난 그렇게 보냈다. 요컨대 어디에도 한 눈을 팔 수 없는 유년이었다.
 
  그래서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한다.
  읽을 때마다 나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기 때문이다.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 뻐꾸기 새끼로 한 번 자라보았던 사람이라면 가지게 되는 더러는 소심증으로도 오해 받기 딱 좋은 세심한 관찰력과 어떤 것을 대하든 일단 먼저 내 식대로 해석해 버리는 버릇에다가 동시에 그것을 쉽사리 철회하지 못하는 고집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식이 많은 집에 늦둥이로 태어나는 바람에 환영받지 못한 것으로도 모자라 급기야는 두 살 때 다른 집에 양자로 갔다가 그 집이 이혼하는 바람에 다시 생가로 돌아오는 철새 생활까지 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결국은 뻐꾸기 새끼였던 것이다. 비교적 소세키의 후기작에 속하는 소설 '한눈팔기'는 바로 그걸 소재로 삼아 쓴 작품이다.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일종의 생존 기술로서 그것들을 벼리고 벼려왔듯이 그 역시 자기 내부에 그러한 것들을 잔뜩 벼려두고 있음을 말이다. 그 역시 절대 한눈을 팔 수 없는 자인 것이다.
 
  그래서 제목의 '한눈팔기'는 차라리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매인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왠지 그렇게 이해가 된다. 사실은 나도 그랬으니까. 나 역시 얼마나 한눈을 팔고 싶었던가? 주인공 겐조가 그랬듯이 별 다른 수고 없이 운 좋게 세상을 훌쩍 떠날 수 있게 되기를 또한 얼마나 바랐었는지... '한눈팔기', 제목으로 이 네 글자를 쓸 때 한 자 한 자 글자 속으로 흘려보냈을 소세키의 절박함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소세키의 과거와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겐조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겐조는 더부살이를 하는 어린 뻐꾸기가 그러듯이 날개를 가지고 싶어 한다. 보다 고귀한 가치를 흠향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역시 고양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구차한 세속적 삶에 결박될 뿐이다. 마치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욱 달라붙게 되는 거미줄과도 같이 그의 누나, 예전의 양부모 그리고 장인까지 가세해 비상하고픈 그의 발목을 부여잡는 것이다. 해서 희망을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씁쓸한 절망만 맛보게 된다. 소설은 이러한 여정이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낙담과 배신이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그런데 왠지 이 여정이 나에겐 낯설지가 않다. 아니 아주 낯익어 보인다.
 
  그렇다. 이건 완전히 내가 뻐꾸기 새끼로 지낼 때 매일 맛보았던 여정 그대로다. 그 때 난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부모님이 날 데리러 오시겠지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렇게 희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고 밤이 늦어서도 부모님은 오시지 않으셨고 난 시작하면서 품었던 희망의 크기만큼 절망하면서 눈을 감아야 했다. 그리고 이런 하루는 고무줄이 늘어나듯이 이틀, 사흘 무한정 거듭되었다. 이러다보면 희망을 전혀 다르게 느끼게 된다. 바로 희망이란 것은 사실은 절망한 자들이 가장 절망한 가운데 마지막으로 부르는 백조의 노래와 같다고 말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는 남지 않았기에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듯이 억지로 매달려 보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게 있어 희망이란 더없이 처연해 보인다. 그것이 실은 내 무기력의 증표이며 임박한 파국을 헛된 망상으로 잠깐 유예하는 것일 뿐임을 아는 까닭이다. 겐조의 여정이 정확히 그랬다. 그러니까 소세키도 이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나처럼 경험을 통해서 깨달았을 것이다. 나와 똑같이 부모가 자기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다 결국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텅 빈 골목을 마주하고는 실망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가며 붉은 노을빛이 밤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다 기대하는 것의 덧없음, 미래는 현재와 다르리라는 생각의 덧없음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깥으로부터 나의 둥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제 나의 둥지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뻐꾸기 새끼로 더부살이하는 바람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불안한 표류의 감각이 이렇게 보다 확고한 '내 세계'의 정립을 저절로 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소세키 작품에 한 결 같이 등장하는 집이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미로를 헤매는 자들과 같다. 우리 앞으로 나 있는 모든 길이 그대로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할 것만 같아 우리는 불안하다. 때문에 더욱 우리는 출구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를테면 '여기서는 안심하고 출발해도 좋겠구나!'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을 말이다. 바로 그 출발을 위한 단단한 반석으로서 우리는 '자아'라는 것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눈팔기'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 저의 자화상이랄까요.

                                                              아무튼 그것을 한 번 표현해 보았습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관찰력과 해석력으로 벼리고 벼려서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자아는 알고 보면 더 바깥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래서 좀 더 제대로 된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겐조가 최후에 깨닫게 되는 것처럼 타인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보다 그 근원에 자리 잡은 것을 바라볼 수 있도록 나부터 먼저 세파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도록 신중해지려는 것이다. 소세키의 '한눈팔기'를 통해 나는 이러한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감지한다. 그리고 더욱 확신한다. 더부살이의 기억이 있는 우리 같은 자들은 '툇마루'야 말로 우리들이 서식해야 할 공간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제든지 남의 둥지로 들어가서 타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경험을 이 미 했기 때문에 그 어디든 확고한 공간은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솔직히 더부살이의 기억은 내게 불편했고 현재를 불안하게 여기는 마음마저 남겼지만 이제 소세키를 통해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는 무엇보다 겐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겐조는 무엇이든 적당한 거리를 둔다. 완전히 자신에게 빠져있지도, 타인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집으로 치자면 안과 바깥의 경계. 정확히 툇마루이다. 그렇게 완전한 내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외부도 아닌 공간에 머물렀기에 겐조 자신은 몰랐지만 어느새 삶과 타인을 바라보는 신중함과 여유로움을 지닐 수 있었음을 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 소설은 내게 무엇보다 위안이 되었다. 소세키는 결국 비슷한 과거를 가진 나에게 불안해할 것도 조급해할 것도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내 그 툇마루에서 차분히 관조하면서 한 발 한 발 착실히 걸어가면 된다고 다독여 주었다.
 
  결국 '한눈팔기'는 한눈을 팔지 않으면서도 내 기억과 삶 그리고 세계를 긍정하는 법을 알려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일까 소설이 따스했다. 뻐꾸기 새끼로 있었던 시절에 내가 바라는 따스함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 때의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작품이 모처럼 찾게 된 둥지 같은 생각도 든다. 그 때문이리라. 마치 볕이 아주 잘 드는 툇마루와 같은 그 곳에서 소세키와 오래도록 나란히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러다 졸기도 할 것이다. 두 마리의 뻐꾸기 새끼들이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재미있다. 문득 소설과 독자란 것도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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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8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의 다른 이름이 <길 위의 생>이었군요.
어쩌다 한눈 팔면서 책 이름은 본 듯해서요. ㅎㅎ
헤르메스님의 멋진 그림솜씨를 보고 나니, 툇마루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졸고 있는 뻐꾸기 새끼들 그림까지도 마구 보고 싶어 지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2-12-27 03:12   좋아요 0 | URL
와! OREN님 이렇게 들려주신것만 해도 반가운데 좋은 말씀까지 해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
 
쿠코츠키의 경우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7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지음, 이수연.이득재 옮김 / 들녘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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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들에게 알려진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이지만 실은 1983년 부터 작품을 발표해 온 꽤나 연륜이 있는 작가입니다. 이제야 알려졌기에 그동안 꽤나 무명으로 있었나보다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미 93년에 그녀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네치카'로 세계문학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 때부터 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미국의 타임지는 그녀를 유럽의 주요 상을 모두 휩쓴 러시아의 보석이라 불렀고 이웃 일본마저도 우아하게 혼의 울림을 전달하는 매우 러시아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지도에 비해 사실은 뒤늦게 소개되었다고 해야겠죠. 박경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려지게 되어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근데 이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조금 의아하지는 않으셨던가요? 도대체 러시아 작가와 박경리님의 작품과 무슨 상관이 있길래 수상했을까 하구요. 저는 궁금하더군요. 물론 사실 그 때까지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과연 이 두 분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을까 궁금했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읽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한국 문학의 대모이신 박경리님과 러시아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교차점을 알기 위해서 말이죠.

 

 

 

 읽고나니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야 말로 박경리 문학상에 걸맞는 작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그야말로  러시아의 '토지'라 할 수 있는 소설들이었거든요. 박경리님의 토지 하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떠올리시나요? 암울해지는 역사적 상황과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굳세게 역경을 헤쳐나가는 강인한 여성상이 아닌가요? 그야말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파국으로 부터 역사와 사회를 구원하는 그런 여성의 모습이 아니었던가요? 저는 그랬습니다. 저는 토지에게서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박경리님이 새삼 '토지'를 제목으로 가져온 게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토지란 바로 생명을 산출해내는 것, 그렇게 모성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여신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나듯이 말이죠. 이러한 여성성의 긍정과 구원으로서의 그 힘을 강조하는 것이 '토지'라고 한다면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들 역시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알린 '소네치카'도 그렇고 그 뒤에 나왔던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이 책, 2001년에 러시아 부커상을 받아 그녀의 대표작이 된 '쿠코츠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자면 저는 일단 '소네치카'를 먼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이 '쿠코츠키의 경우'를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군요. 왜냐하면 사실 이 두 작품은 꽤나 닮은 꼴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야기가 한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여기에 있어서만큼은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하죠. 울리츠카야의 소설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전개되니까요. 그러므로 좀 더 세부로 들어가 그 닮은 점들을 살펴봅니다. 일단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유사합니다. 지적이지만 성격은 유약하며, 유럽 문명 세례를 받았고 그 때문인지 현실주의적이고 모든 가치에 회의적인 남자 주인공이 보다 러시아 전통적이며 성격은 강건하며 현실 보다는 이상을 그리고 고귀한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주인공에 먼저 반하여 청혼을 하게 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의 주인공 커플인 파벨과 엘레나는 그야말로 '소네치카'의 로베르토 빅토르비치와 소네치카의 판박이 입니다. 또한 그렇게 물과 기름 같은 성향이기 때문에 잘 섞이지 못하고 결국엔 불화하게 된다는 것도 유사합니다. 또한 새로이 변화하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그들의 딸 이름이 '타냐'인 것도 똑같습니다.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가진 성격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마저 음악가라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열거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잔뜩 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바로 결론으로 뛰어넘어가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쿠코츠키의 경우'는 사실 '소네치카'를 전혀 다른 쪽에서 접근해 본 소설이라고...

 

 '소네치카'를 읽고 이 작품을 보시면 바로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드려 보았습니다만 아무튼 이것은 제목에서 부터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소네치카'는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었지만 '쿠코츠키의 경우'에서 쿠코츠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소네치카가 여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두고 쓰여졌다면 '쿠코츠키의 경우'는 남성 주체의 입장을 더욱 중심에 놓고 쓰여 진 작품인 것이죠. 즉 여성을 매개로 밟아갔던 궤적을 이번엔 남성을 매개로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작가 울리츠카야가 왜 하필이면 이렇게 하는 것인가가 궁금할 수 밖에 없죠.

 

 아시다시피 93년의 소네치카와 2001년의 쿠코츠키의 경우엔 시차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작가도 사회 속의 존재인 이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문학이란 사회와 시대를 비쳐주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가리워진 시대의 진실을 찾고 그 진실을 통해 대안을 주려 한다면 더욱 동시대와 더불어 부대껴야 합니다. 다른 작가라면 모르겠지만 충실하게 러시아 리얼리즘을 고수해 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대표작을 새로이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보려 했다는 것은 당시 러시아에서 발생한 상황의 여파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근거가 될만한 상황이 러시아에서 발생했었습니다.

 

 바로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러시아와 체첸 사이의 분쟁입니다.

 

 

      체첸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러시아의 공격에 초토화되어버린 체첸의 그로즈니 시

 

 

 

 아시다시피 러시아는 미국 이상으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거의 수천여개에 이르는 소수 민족이 있다고도 하죠. 레닌이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라는 것을 형성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봉합되었던 민족 감정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개방의 흐름을 타고 곳곳에서 분출되었습니다. 다수이자 늘 지배자적 위치를 점유해왔던 러시아 민족은 그러나 이를 두고 볼 수만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적 지위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치를 요구하는 타민족의 요구와 그들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러시아 민족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첨예화되어갔고 그러다 결국 화산처럼 터져나왔던 것이 바로 체첸분쟁이었던 것입니다. 작가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것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였던 러시아가 분열되고 그럴 뿐만아니라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살해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아야했던 것입니다. 흔히 진정한 작가는 시대적 양심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작가는 시대의 아픔에 둔감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올리츠카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녀는 체첸분쟁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서로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죽음과 파괴를 초래하는 이와 같은 비극이 러시아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생각이 실현된 것이 '쿠코츠키의 경우'였고 결국 러시아를 순진하게 긍정했던 '소네치카'는 다시 쓰여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네치카'와 '쿠코츠키의 경우'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점이 생겼습니다. 그건 바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유대관계가 '쿠코츠키의 경우'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소설엔 같은 피를 나누었다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가 달라도 토마처럼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며 또한 마지막에 가서 줴냐와 같은 혈연이 아니라서 거부했던 엘레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 보듯이 혈연이 바탕이 된 관계만큼이나 공고합니다. 울리츠카야는 끊임없이 같은 부모라는 것, 같은 피라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곁에 있는 것, 함께 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관계는 공고해지는 것이라는 걸 설득력있게 보여줍니다. 또한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바꼈습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와 '쿠코츠키의 경우'의 파벨은 앞서도 말했듯이 존재론적으로 유사하지만 둘이 자아내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소네치카의 빅토르비치는 결국 소네치카와 결별하고 맙니다만 '쿠코츠키 경우'의 파벨은 병이 들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엘레나를 끝까지 함께하면서 보살펴 주지요. 더구나 자기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파벨입니다. 반면 엘레나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입니다. 문제는 소네치카와 엘레나가 똑같이 러시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울리츠카야는 엘레나를 톨스토이를 신봉하는 공동체 출신으로 설정함으로써 그녀를 사회주의 성립 이전의 전통적 러시아의 상징으로 만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사회주의가 성립되기 이전의 러시아일까요? 그것은 레닌이 다른 소수민족들을 소비에트 안으로 받아들이기전의, 그러니까 순수하게 러시아 민족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엘레나가 그토록 같은 피가 아니라는 것에 반감을 나타내는지 우리는 납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엘레나가 바로 체첸분쟁을 일으킨 러시아 민족 우월주의를 나타내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 엘레나는 순진한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있어요. 가장 기본적인 진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십 분의 일, 아니면 천 분의 일의 진실이 있단 말이죠. 그리고 난 믿어요. 모든 사물이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p.74)"

 

 이렇게 말이죠. 이는 그대로 단순히 피일 뿐인데 그냥 피가 아니고 그 이상의 뭔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의 사람을 볼 때 그 사람 자체를 보지 않죠.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어떤 민족의 한 사람, 어떤 계급의 한 사람, 어떤 이념의 한 사람으로만 볼 뿐입니다. 그 민족, 계급, 이념 아래서 고유의 색깔로 빛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지워져 버립니다. 그저 어떤 민족, 어떤 계급, 어떤 이념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보통 명사로만 존재할 뿐...

 

 울리츠카야는 바로 이러한 엘레나를 통해 체첸분쟁의 원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로 보지 않고 자꾸만 그 위에다 이런 저런 의미를 갖다 붙이는 행태가 궁극적으로 그와 같은 커다란 비극을 부르지 않았냐고 말이죠. 더이상 엘레나가 상징하는 순수한 러시아라는 것은 없다. 그저 모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러시아가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러한 외침을 들려주기 위하여 울리츠카야는 순수한 러시아를 여성성으로 형상화했었던 '소네치카'를 완전히 새롭게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안 역시 바로 여기서 나타납니다. 단순히 말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죠. 뭔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 내 눈 앞에 존재하는 전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죠. 그래서 울리츠카야는 파벨을 중심에 세웠던 것입니다. 파벨은 의사입니다. 그런데 그에겐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스스로 '내면 투시'라 부르는 것으로 사람의 몸 속의 종양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 능력은 올리츠카야가 파벨이 어떤 사람인가 보여주기 위해 단적인 상징으로 쓴 것입니다. 그가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붙이지 않고 보이는 대로 그것만 믿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는 엘레나와는 달리 지금 보이는 존재 이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피붙이가 아니어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데 상관없었고 엘레나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이 긍정의 모습으로 볼 때 울리츠카야가 그 대안으로써 파벨을 가져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안을 상징하는 인물인 '타냐'를 보면 이 책이 '타인을 있는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비극의 반복을 막는 길이다'라는 주제를 가졌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타냐는 결국 세르게이라는 음악가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소설에서 가장 행복하고도 충실한 삶을 누리다 생을 마감합니다. 타냐가 그런 생애를 사는 동안 그녀는 내내 음악과 같이 있습니다. 마치 울리츠카야가 이런 식으로 음악이 바로 구원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 같이 말이죠. 그런데 음악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실 음악이야 말로 그 자체로 밖에는 만날 수 없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다른 그 어떤 것도 그 이상의 의미로 부가될 수 없는 그렇게 그 순간에 귀로 들려오는 음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만이 전부인 게 음악이 아닐까요? 이렇게 울리츠카야는 타냐를 통해 음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그녀가 파벨을 통해 전하려는 주제를 더욱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를 하려 합니다. 이렇게 보아온 대로 '쿠코츠키의 경우'는 체첸 분쟁으로 터져 나온 시대적 아픔에 울리츠카야의 작가적 양심이 반응한 결과요 성찰한 산물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개에 이르는 러시아 곳곳에 분포된 다양한 민족들은 지배와 배쳑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가 '러시아'라는 하나의 집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들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심합니다. 같은 존재라는 아무런 기반이 없는데 과연 그게 성공적으로 지속될 수 있게냐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울리츠카야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와 엘레나의 관계를 통해 응수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어떤 공통의 근거를 가져야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지속될 수 있다고. 우리가 같이 있다는 자체만으로 그러지 못하는 것은 타인을 의심부터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그 의심을 지워줄 근거를 찾게 되고 그래서 민족이니 지연이니 하는 것들이 그 존재 자체보다 눈에 더욱 크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그러니 있는 그대로 그냥 믿으라고. 어차피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으니 그냥 믿고 받아들이라고. 그러면 파벨과 타냐처럼, 줴냐와 엘레나처럼 오래도록 그 관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파벨과 타냐 그리고 줴냐가 가졌던 그 존재 자체로의 긍정이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쿠코츠키의 경우'에는 바로 이러한 울리츠카야의 진심이 들어있습니다. 시대적 현실의 아픔을 내면의 성찰로 길러낸 끝에 나온 것이기에 그 진심은 더욱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진심은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도 들어야 할 목소리 입니다. 우리들 역시도 비정규직이나 직업 또는 학연이나 지연등 보이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원래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그 이상의 의미로만 규정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그로 인해 가해지는 차별과 받게 되는 아픔이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귀기울여 할 목소리가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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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소년 보름달문고 51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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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에겐 어째서 고통 따위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하듯이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떠올릴 때가 찾아오는 법이다.

 생로병사란 그 누구도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구나 정의의 여신마저 장님이 아니라 운명의 여신 역시도 장님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저 우연히 확률적 불운이 작용한 결과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을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의 주인공 경호가 그렇다.

 현재 그의 나이 열 두살. 사람들은 그를 당연히 어린이라 부르고 그렇게 어린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관심과 보호 그리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지만 경호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비유하자면 경호는 운명의 여신으로 부터 사납게 내쳐진 아이라 할 수 있다.

 이유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삶의 의미를 잃고 아들에 대한 사랑마저 놓아버린 어머니. 그리고 친구하나 없이 외톨이로 보내야 하는 학교. 그러한 일상적인 폭력과 한없는 무관심 그리고 헤어날 길 없는 외로움 속에서 경호는 매일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맞은 곳곳 마다 시큰하게 느껴져 오는 통증. 집에 돌아가도 반갑게 맞아줄 이 하나없는 휑뎅그레한 공간에서의 고독 그리고 친구들의 냉혹한 등들이 보여주는 무시와 배척 가운데 경호 역시도 수백번 아니 수천번 그와 같은 질문을 똑같이 묻지 않았을까?

 

 도대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그것도 나만!

 그리고 이런 고통을 겪으며 이제 나는 어떡해 해야 하는지?

 

 마치 그 의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어느날 밤 불현듯이 요괴가 나타난다.

 몽상이 빚어낸 산물이나 거짓 환영이 아닌, 진짜 생생하게 존재하는 요괴가.

 더구나 경호와 비슷하게 생긴 소년의 모습을 한 그 요괴는 이렇게 말한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 봐."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단지 난 네가 그걸 네 입으로 똑똑히 말하는 걸 보고 싶었을 뿐이야."(P. 12 ~ 13)

 

 경호가 겪고 있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지금 경호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건 지금의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리라.

 

 이렇게 사실 전성희의 소설, '요괴소년'은 살면서 우리에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고통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통을 주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고통을 오히려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렇게 말이다.

 

 그렇게 하나는 단순히 없애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쉽고 다른 하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타인마저 포용해야 함으로 어렵다. 어려워도 정말 무지 어렵다. 누구나 다 감기에 걸려 본 경험이 있을테니 하는 말이지만 감기에 몸살까지 겹쳐 꼼짝없이 앓아누워야만 할 때 그 몸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간호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그것도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거기다 아무런 의무도 아닌 일을. 그럴 때 과연 기꺼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오로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될까? 정말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저요!'하고 손을 들 수 없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 두번째의 길은 예수나 석가모니등 종교의 성인들만이 걸어 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예수의 십자가 승천이나 석가모니의 고행을 통한 열반은 모두 자신에게 가한 고통을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단적인 상징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내 고통은 그대로 껴안으면서 타인의 고통만 줄여주는 두번째의 길 보다는 내가 지금 겪는 고통의 즉각적인 해소라는 첫번째 길에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 모른다. 어차피 암환자 말기의 타인이 겪는 고통보다 지금 당장 내 발가락에서 난 상처가 주는 고통이 훨씬 더 아픈 법이다. 아픔은 그렇게 냉정한 객관화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모두 자기가 겪는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그러니 내 고통의 해결은 최우선이 된다.

 

 경호에게 찾아온 요괴.

 그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손쉬운 해결책을 상징하는 존재다.

 단순히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다.

 요괴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면 전성희 작가가 바로 이런 의미로 요괴의 존재를 빚었음이 대번에 드러난다. 그 요괴가 경호의 삶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두 존재,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와 학교에서 자기를 경멸하고 왕따가 되도록 부추긴 4학년 때의 담임, 두 사람을 모조리 없애버리니까 말이다.

 

 그렇게 요괴는 마치 외과의사가 악성 종양을 매스로 잘라내듯 단순히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손쉽게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우리의 바람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손쉬운 해결책은 늘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법이다. 제거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건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치워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뿐이지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통은 특히 그렇다. 왜? 고통이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그것의 대체불가능성 때문이다. 고통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다. 이 말은 거꾸로 이 고통에서 헤어나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우리 자신 밖에는 없다는 말이 된다.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서 비롯되지만 그 외부의 원인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건 단순히 촉발에 불과하고 현존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 뿐이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촉발'을 도려냄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 '촉발'이란 이미 총알이 발사된 권총과도 같다. 권총을 부셔버린다고 해서 총맞은 내가 느끼는 고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손쉬운 해결책이 완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여전히 고통을 느끼는 내가 남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수한다고 해도 과거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것을 야기한 타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궁극적 해결은 내가 그 고통을, 혹은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달려있다.

 

  최근의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도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즉 주어진 환경에 보다 잘 살아남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발달시켜온 것이라는 의미다. 원시 시대 그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를 가장 두려움에 젖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고통이지 않았을까? 근대 초기 홉스나 로크 그리고 루소들이 최초의 사회 상태를 얘기할 때 항상적으로 ' 고통에서 야기된 만인에 대한 만인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의 방증이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이성이란 고통과 마주하며 발달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좀 추상화하자면 현존하는 고통을 어떻게 헤아릴까 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지금처럼 발달해왔다는 말이다. 다소 무리가 있는 억측이긴 해도 이러한 진화론적 사실은 고통의 궁극적인 해결이 그 원인의 제거가 아니라 스스로의 헤아림에 있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과도 같다.

 

  해서 요괴를 퇴치한다는 퇴마사의 존재 조차 결국 경호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이다. 더우기 요괴는 퇴마사를 가리켜 이렇게까지 말한다.

 

 "퇴마사의 주인은 요괴란 말이지"(P. 134)

 

 이렇게 말할 때 요괴의 말이 전혀 과장도 거짓도 아닐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뿐이다. 즉 고통의 원인만 제거한다는 것이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퇴마사의 평가 때문에 전성희 작가의 고통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그 원인만 제거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보다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퇴마사도 요괴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건 단적으로 퇴마사가 요괴를 헤아리기 보다는 단순히 그 존재만 없애려고 드는데서 바로 드러난다. 퇴마사의 해결 방법이나 요괴의 해결 방법이나 같은 것이다. 모두 그 '원인만! 원인만!' 하고 외칠 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요괴가 해 준 모든 것은 사실 경호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죽어버린 아버지와 담임은 유령이 되어 경호 앞에 여전히 출몰한다. 경호는 그들의 존재 때문에 여전히 고통스럽고 이미 그들이 죽어버린 존재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이렇게 손쉬운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경호가 정말 천착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의 길이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 해도 고통에서 정말 헤어나오고 싶다면 걸어야 하는 것이다. 전성희 작가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경호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건 '받아들임'의 과정이다.

 

 부정하려 들지 않고 순순히 긍정하며 그 의미를 헤아려 봄이다. 나 혼자만 존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불어 같이 걸어가겠다라는 포용이다. 칼로 가차없이 도려내듯이 쉽고 빠르게 해결하겠다는 조급증이 아니라 진정한 해결을위해 보다 더 오래 지켜보고 더 깊이 헤아려보겠다는 숙고이다. 이러한 여정을 전성희 작가는 소설에서 단적으로 '달래기'라 부른다.

 

 그런데 퇴마사의 말 중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달래기'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달랜다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벗어나거나 도망치거나 하는 것들과는 분명 다른 무엇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P. 130 ~ 131)

 

 달래는 것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고통을 바라보는 태도 역시도 그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달래기'는 무엇보다 대상의 긍정이요 엄마가 아기를 달래면서 아기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새심하게 관찰하듯이 그렇게 진정한 해결을 위해 상대를 계속 헤아려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후반 경호가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다. 경호는 무조건 없애고 보자는 퇴마사의 종용을 물리치고 요괴를 먼저 인간적으로 헤아리려 노력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요괴가 되었는지 그의 삶을 그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자 경호는 볼 수 있었다. 사실은 그 요괴가 자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요괴와 경호는 그 닮은 용모만큼이나 삶의 모습 또한 판박이였음을. 그 헤아림을 통해 경호는 요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었고 결국 그 공감이 바탕이 된 포용으로 퇴마사도 하지 못했던 요괴의 존재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나보낸다. 표면적으로는 요괴의 사라짐이지만 그 요괴의 삶이 바로 경호의 삶이었기에 본질적으로는 고통으로 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성희 작가는 우리가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건 단순히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원인을 무조건 없애는데 천착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고통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이 왜 생겨났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식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달래기'다. 그리고 그 '달래기'는 일종의 대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우리가 얼른 떠올리는 것은 그 대화의 과정이 어쩐지 프로이트가 말했던 정신분석가와 그 앞에 누워 자신의 고통에 대해 담담히 고백하는 환자 사이의 대화와 닮았다는 것이다.(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지금 정신분석에서 많이 행해지는 '대화법'은 바로 프로이트가 주창한 것이다.) 그러한 대화법에서 나의 고백은 치유를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는 '달래기'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우리는 내 고통의 대상을 긍정하고 함께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고통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러한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헤아려 보고 그걸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대상으로서의 고통을 헤아림은 결국 나 자신을 좀 더 열고 바깥에다 내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달래기'의 바로 이러한 성격 때문에 사실은 우리가 고통에서 진정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야를 수정하는 것 밖에는 달리 없는 것이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청소년 소설로는 흔치 않게도 고통이란 문제를 다루면서도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 모든 걸 사유로 보듬으려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그 보듬어 안음을 통해 결국 그녀가 도달한 종착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해온 대로 나 역시도 동의하는 바이다. 고통은 일단 생겨나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 눈 위로 안대를 씌우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고통은 압도해오는 통증 때문에 자기 밖에는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은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아무리 고통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을 보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유폐되어 있으면 경호가 요괴를 통해 손쉬운 해결을 바라는 것처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안게 될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통에 빠질수록 더 넓게 더 많이 다른 것을 보게 하는 시야가  필요하다. 전성희의 '요괴소년'은 우리가 그러한 안대에 가리워져 있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그것을 찢도록 만들어주는 좋은 채찍질이 되어 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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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20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세상에 청소년 소설이라니 놀랍습니다. 글을 읽으며 헤르메스님의 진중한 문장들과 주제 때문에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못했거든요.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고통을 다룬 청소년 소설은 많은 것 같아요. 아동 성추행, 다문화 가정, 이혼 등으로 고통을 은유하고 있긴 해도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겪는 갈등이, 그러니까 소설에 나오는 갈등이 일종의 고통이 아닐까 생각해요. 즉, 고통이 없는 소설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글이 좋다보니 헤르메스님 서재만 오면 저답지 않게 괜히 진지해지네요. 반가워요!! 요새 뜸했죠ㅠ

ICE-9 2012-11-22 23:47   좋아요 0 | URL
서로가 정말 뜸했죠^ ^;
하하하! 제가 좀 순문학, 장르물, 청소년 문학 안 가리고 쓸데없이 진지하게(과연 진지하게 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 접근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소이진님 말씀대로 정말 청소년 소설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갈등의 모습을 순문학(성인 문학의 의미로 받아들여줘요) 보다 더 잘 형상화하고 있다고 생각되요. 그래서 즐겨 읽는데 그러다보니 리뷰도 이렇게 되네요.^ ^; 릴케도 말했듯이 사람을 문학으로 이끄는 것은 영혼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상처죠. 그리고 문학을 읽는 사람 또한 그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읽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렇게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것이 문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러니 소이진님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얼른 쓰게 되길 빌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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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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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마음 맞는 고참을 만나기란 정말 하늘의 별따기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예외란 녀석은 있는 법이어서 그런 눈 먼 행운 하나가 내게 찾아왔었다. 서로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고 정기휴가까지 맞춰 나온날, 우리는 전라도에 있는 고참 집으로 갔다. 그 집 마당 한 켠에 커다랗게 서 있는 나무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넓다랗게 펼쳐진 잎으로 수북한 가지들이 마치 집 전체를 보듬어 안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인상을 말하자 고참이 내게 그 나무가 있게 된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고참 할아버지가 세상에 태어날 무렵이라고 한다. 아들의 출산을 미처 보지 못하고 가정을 떠나 먼 곳에서 오래도록 있어야 했던 아버지가 아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보게 될 자신의 빈자리를 이것이 대신해 주기를 빌며 심은 것이 바로 그 나무라 한다.

 

 "어디에서나 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나무를 통해 알리려 하신 거지..."

 

 고참은 나무에 얽힌 내력을 그렇게 끝맺었다. 그러고 보니 굵은 가지들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듬직한 팔처럼 보였고 무성한 잎사귀들은 아들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이 쓰다듬고 있는 인자한 손가락처럼 보였다. 파란 하늘 아래 조용히 너울거리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 그 때는 정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흐뭇한 미소 같아서 저런 게 부모의 마음이겠구나 하고 무심결에 감동했다. 그리고 참으로 전하기 어려운 진심을 저렇게 근사하게 남기진 그 아버지가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건 어느 한 순간에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곧 아들 곁을 떠나야 할 것을 안 아버지가 실로 오랜 낮과 밤에 걸쳐 고민한 끝에 나왔을 것이다.

 

 불현듯 이 일을 떠올리게 된 건 우연히 책 소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p. 228)

 

 나는 책보다 이 문장을 먼저 읽었고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그 때의 나무가 홀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김연수 작가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자 그런 나무를 심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아니면 이런 문장을 토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나무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한 사람의 마음에 가닿고 싶어하는 애틋함. 남김없이 그 속내를 전하고 싶은 절절함이 마치 그 문장의 말들 하나하나가 무심코 바다 속에 손을 넣었다가 우연히 만져진 생선의 비늘만큼이나 생생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 느낌이 김연수가 세상에 날려 보내는 날개와도 같은 이 작품으로 날 인도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p. 274)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읽고보니 이런 절망 가운데 생겨난 날개였다. 그러니까 타인의 진심을 알기도, 타인에게 내 진심을 알리기도 불가능하다는 절망 속에서 마치 키가 너무도 커서 아래로 부터는 수분을 공급받지 못해 위의 안개로 나마 수분을 공급받아야 했던 레드우드(p.12)처럼 그래도 과연 불가능하기만할까, 뭔가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검은 바다 위를 날아가는 나비처럼 띄워보낸 날개였다. 아마도 그런 절박함이 태어나자마자 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의 엄마 찾기로 형상화되었을 것이다. 자그만치 25년이라는 그 긴 시간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진짜 핏줄을 찾는 것만큼 절박한 것은 또 없을테니까. 그렇게 카밀라에게 엄마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이 관계된 진실을 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빛바랜 사진으로 제시된 희망은 거기에 낙관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는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에 나오는 나비와 같았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았다.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p. 108)

 

 그녀를 그처럼 지치게 만든 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이었다. 진심을 알리고 싶거나 알고 싶은 사람들이 결국 절망해서 뛰어드는 소설 속 밤바다와도 같은 심연. 그런데 그렇게 건너기 힘든 심연이 된 건 그저 사람마다 속내를 알기 어렵도록 가림판 같은 것이 존재해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연이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된 것은 사람들 스스로 가림판을 세워두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실리와 욕망에 몰두하느라 때로는 속내를 들키기 싫어서 때로는 무관심해지고 싶어서 나온 가림판이었다. 교장 신혜숙이 보여준 열녀비는 그렇게 타인과의 진실한 소통을 가로막는 도처에 존재하는 심연의 대표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그것은 '아는 척'하는 것의 표상이기도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여 진실을 알기 위한 노력도, 진심으로 다가오고자 하는 마음도 단번에 차단해 버리는 그러한 고개짓을 조각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 '아는 척' 앞에서 타인은 이해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어서 떠나주었으면 하는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진짜 알려져야 할 진실 역시도 쉽게 망각되고 만다. 진심을 알리는데 절망한 정지은이 뛰어들었던 그 밤바다처럼 그 까만 심연 속으로 깊이 깊이 가라앉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출생의 진실을 찾기 위한, 엄마의 진심을 알고 싶은 카밀라의 여정은 그 심연 속에 망각된 기억들을 다시금 건져내는 것이 된다. 아마도 그래서 카밀라를 바다에서 건져내고 절망한 카밀라에게 다시금 새로운 단서를 찾아주는 지훈의 직업이 손님들을 위해 바다 속에서 해산물을 건져내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것들 역시도 검은 바다와도 같은 광막한 심연 속에서 용케도 지워지지 않고, 잊혀지지 않았던 기억들 덕분이었다. 도서관 어디에 간직되어 있었던 정지은의 시와 산문이 수록된 '바다와 나비'라는 문집이 그렇고, 쉬이 잊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오래도록 보관하고 있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 즉 '양관'의 존재가 그랬다. 여기서 특히나 '양관'의 존재가 인상적이다. 망각 속에서 건져낸 이야기들의 보고, 양관은 서양식 건축물로 이미 존재자체가 이국적이다. 게다가 엘리스라는 서양 소녀의 비극적 최후와 겹쳐 유령이 출몰하고 악운이 따른다고 하여 사람들이 기피하는 공간이다. 그렇게 이 '양관'은 사람들에게 있어 건너편에 존재하는 '타자'였다. 하지만 결국 카밀라가 찾고자 했던 모든 진실은 여기에 담겨 있는데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김연수가 이 작품을 통해서 찾고 싶었던 희망의 날개가 아닐까 하고. 카밀라로 하여금 진실로 인도했던, 그렇게 망각의 심연 속에서도 용케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억들은 모두 '기록'이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건 사진이었고 문집의 글이었으며 라디오의 사연이었고 신문의 기사였으며 양관에 보존된 기록들이었다. 그것들은 그 하나로는 진짜 진실로 인도하지 못하는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데 모으고 나니 카밀라를 진실로 인도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게 바로 김연수가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통해 들려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 되었다.

 

 우리는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 때문에 타인에게 가닿지 못하는 존재들일지 모른다.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그게 김연수로 하여금 작가로 되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글을 써도, 정지은의 글이 그랬듯이,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내보일 수도, 타인의 진심에 가닿을 수도 없다. 그 역시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에 나온 그 나비처럼 아무리 검은 바다와 같은 광막한 심연이라도 글이라면 쉬이 건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건 소설 속에서 한국의 지도를 거꾸로 걸어 남해를 북해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도 작위적인 믿음에 불과함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작은 날개 밖에는 가지지 못한 나비 앞에 놓여진 대양만큼이나 절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카밀라는 바로 김연수 자신이었다. 글로 하나가 될 수있다는 희망을 잃어버린 그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카밀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절망에 입양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작가였고 작가인 이상 글이 아무리 무기력하다고 하더라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글이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파도가 바다라면'의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카밀라가 생애 처음 쓴 글로 인해 엄마를 찾는 여정에 나서게 되듯이 그와 똑같이 초심으로 돌아가 글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찾아냈다. 하나의 글이라면 모자라고 무기력할지도 모르지만 글이 모이고 모여 더 많아지면 심연을 건너갈 날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그래서 여기저기 남겨진 글들이 모두 단서가 되고, 카밀라는 자기 혼자 힘이 아니라 지훈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도움을 얻도록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죽어서 모두에게서 지워졌다고 여겨졌던 카밀라의 엄마까지 나서서.

 

  이 카밀라 엄마의 목소리. 현실에서 완전히 지워졌다고 생각되었으나 분명히 존재하고 숨겨진 진실을 들려주는 존재가 조금은 뜬금없이 소설에 나왔던 것은 김연수가 글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게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야'라고 어린왕자에도 나오듯이 굳이 글이 줄 수 있는 힘을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고정할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진실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인 '양관' 역시 그렇게 타자의 자리에 놓인 것이다. 모두에게 버려지고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래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정말 알고 싶은 진심을 들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글 역시도 존재하는 이상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설령 그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진심을 알려줄 혹은 타인의 진심으로 다가갈 매개가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의 상징으로써. 스스로 작가의 말 마지막에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라고 쓴 것도 사실은 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고보면 타인의 진심에 다가가기 위해 필요한 것을 왜 굳이 '날개'로 비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왜 에밀리 디킨슨의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인용했는지도. 그것이 비상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더 높이 날아오르면 더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절망은 어쩌면 시야의 한계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저 '아는 척'이나 하면서 쉽게 처내어 버린 수많은 잠재된 가능성 자체에 우리의 절망 역시 잉태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다 많은 세계를 품어야 한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글, 누군가에게 남아있는 기억, 때로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유령일지라도, 그리고 그 유령이 출몰하여 대부분이 기피하는 공간일지라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거기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서양 소녀 에밀리의 묘비를 끝까지 지켰던 양관 주인의 엄마처럼 그 모두를 긍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시야의 확장인 것이지만 정작 우리에게는 날아오를 날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비상은 가능하다. 우리에겐 바로 믿음이란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저 믿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늘 글을 쓰고 노래하고 있음을. 비록 눈에 드러나는 어떤 증거도 없을지라도 어떤 글을 대하든 섣불리 가림판을 쳐서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도 진심을 다해 쓰고 노래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 진심을 듣고 알아주리라 믿으며. 비록 들려오는 메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작가 김연수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아마도 김연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은 날개 달린 것'을 다시금 인용했을 것이다. 그것도 여정이 거의 끝난 막바지에...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드센  바람속에서 가장 감미로운 그 노래를.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가장 차가운 땅에서도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나는 들었네

 그러나 최악의 처지일 때도, 단 한 번도,

 그 새는 내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않았네. (p.321)

 

 

 카밀라로 빙의했던 김연수는 이제 모든 방황을 끝내고 기꺼이 저 시 속의 작은 새가 되려한다. 세상을 긍정하고 심연마저 포용하여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전해지리라 믿으며 진심을 다해 노래하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아들에게 항상 자신이 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나무를 심었던 그 아버지와 닮아 보인다. 아버지가 그 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들이 그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아들은 아버지를 가까이서 느끼며 자라났다. 설령 그 아들에게 진심이 전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무 아래 섰을 때 나만은 그 진심을 느껴볼 수 있었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라는 말이 이미 죽어버린 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처럼 진실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믿는 것이다. 그리고 가닿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날개'가 희망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날개 짓을 그만두지 않을 때다. 오랜 고뇌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아버지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결국 그 모든 여정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한 권의 믿음으로 담아낸 김연수처럼. 우리도 믿으며 자신의 진심을 담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이다.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희망으로 울창한 그늘이 되어줄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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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 2012-10-22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이 댓글을 남기고 싶어 오랜만에 로그인합니다.

ICE-9 2012-10-30 00:09   좋아요 0 | URL
와, 들러주신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렇게 오랜만에 로그인까지하셔서 좋은 말씀 남겨주시다니 더욱 감사합니다.^ ^

이진 2012-11-2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와 나비, 저 시 박인환의 것인줄 알고 있었는데 김기림의 시였군요. 어쨌든 무슨 시든 헤르메스님의 리뷰가 더 좋은 걸요. 요새 헤르메스님 리뷰 학원 다니십니까? 원래 좋았지만 더 좋아졌어요!

ICE-9 2012-11-22 23:43   좋아요 0 | URL
웃! 소이진님 정말 고마워요. 요즘 리뷰가 전혀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사실은 좀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소이진님 덕분에 왠지 힘이 나는데요.^ ^ 아마추어 주제에 슬럼프인가 싶어서 스스로 비웃기도 했는데 요즘은 정말 글이 생각대로 안되네요.ㅠ ㅠ 아무튼 고마워요. 힘이 부쩍 납니다.^ ^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감히 말씀드리자면,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를 읽기로 생각하셨다면 일단 장소를 신중하게 선택하셔야 합니다. 가급적 버스나 지하철 혹은 강의실이나 도서관 같이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는 피하시는 것이 어떨까 말씀드리고 싶네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구쳐 흘러내리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면 말이죠. 지하철에서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당황했던 경험자로서의 말이니 유념하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라는 말을 우리는 식상하리만치 흔히 보지만, 또 곧이곧대로 믿고 보았다가 실망한 경험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지만 이 책 만큼은 그 말이 순도 100%의 진실입니다. 16세의 말기 암환자로 언제 멈출지 모르는 폐를 위해 별도의 산소통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 소녀 헤이즐. 예정된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모든 치료는 다만 그것을 조금 지연 시키는 것에 불과할 뿐인, 마치 사형집행일이 예정된 사형수와도 같은 그 마음의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새벽이 찾아올 때 풀잎들이 그렇듯이 저절로 마음 여기저기 돋아난 감성의 잎새에 송알송알 슬픔이 맺혀서 커지고 커지다가 그 잎새가 무게를 못 이겨 절로 눈물로 뚝 하고 떨어지게 되니까요.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던 그 날은 잔뜩 흐렸던 오후였습니다. 또 하나의 태풍이 저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다는 뉴스가 들렸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나의 태풍이 이제 막 지나갔는데 또 하나의 태풍이 온다니. 삶은 그러한 어려운 고비의 연속인가 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편이죠. 아직 우리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새로운 태풍이, 험난한 난관이 닥쳐와도 하얗게 비어있는 미래로 인해 내일을 다르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결정된 미래가 있다면. 그것도 곧 닥쳐올 것이 확실히 예정되어 있다면... 그러지 못하겠지요. 어쩌면 모든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어요. 만나는 사람은 먼저 이별을 예감해야 하고, 하고 있는 일들은 미처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예감해야 하며,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없어졌을 경우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생각해야 할테죠. 아니 존재 자체가 이미 그들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말로도 지울 수 없는 힘겨움을 짙고 길게 남기기 때문에 그로 인해 늘 미안해하고 늘 아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렇게 물을 수 밖에 없겠지요.

 

 나는 왜 태어났는가?

 왜 이런 몸으로 태어나서 사람들에게 힘겨운 고통과 끝없는 상실감만 주고 가는가?

 도대체 내가 겪는 고통 그리고 가족이 안게 되는 고통... 이 모든 고통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여기에 무슨 의미는 있기나 한가?

 

 헤이즐이 찾고자 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 때 한 책이 그녀에게 빛을 가져다 주었죠. 피터 반 호텐이 쓴 소설 '장엄한 고뇌'가 바로 그 책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 안나 역시 헤이즐 처럼 말기 암 환자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해서 그 소설을 수십번이나 반복해서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이 그토록이나 숭배에 가깝게 열광적으로 읽은 것은 그 책이 바로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엄의 고뇌'에서 그 부분 알지? 안나가 체육 수업인갈르 하기 위해 축구장을 가로 질러 가다가 풀밭에 그대로 엎어지고 그래서 암이 신경계에 재발했다는 걸 깨닫는 거. 그렇게 일어날 수가 없어서 얼굴이 축구장 잔디에서 1인치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은 상태로 꼼짝 못하고 풀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빛이 풀에 비치는 모습을 알게 되는..., 문장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안나가 인간성이라는 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 휘트먼적인 계시를 받게되는 부분이었어. 그 부분 알지?"(p. 185)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인간성이 창조의 위대함에 감탄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신경계에 재발한 암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듯이 자신에게 닥쳐온 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운명 역시도 무언가를 위한 하나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었기에 열광적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반복된 독서는 사실 자신의 삶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갈망의 표현에 다름아니었습니다. 헤이즐은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인류가 신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난 뒤 내내 현존하는 고통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었고 그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신이 존재하고 성경에서 말하듯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어째서 고통과 죽음 같은 것을 허락하는 것이냐?'는게 그 질문이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신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심이다' 하는 게 당시 대표적인 대답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게 바로 구약 성서의 '욥기'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기독교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신을 믿는 모든 종교들은 고통을 다 비슷하게 해석합니다. '아무 의미없는 고통은 없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헤이즐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열정적으로 수 십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읽을만큼 강하게! 그렇게 위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의미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정작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자신은 죽어 없어지는데... 사후세계의 존재가 불확실한만큼 그 의미의 여부 또한 불확실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헤이즐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고통과 죽음의 의미가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의미에 집착해 보았자 자신은 그저 미래가 아직 결정되어지지 않은 운 좋은 이들이 삶에 대해 더욱 애착을 가지도록 봉사하는 것 뿐임을. 정확히 고통의 의미에 대한 집착은 그저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해서 내가 당하고 있는 이 불운을 좀 더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 부당함을 희석시키려는 자기 기만에 불과할 뿐임을...

 

 바로 그 집착의 무용성을 오매불망 그리워 해 온 피터 반 호텐와의 직접적 만남에서 헤이즐은 여실히 깨닫는 것입니다.

 

 헤이즐이 '장엄의 고뇌'에서 안나가 죽고 난 이후의 일들을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건 안나의 고통과 죽음이 의미가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호텐과 만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자신의 집착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달았고 그 때문에 자신이 왜 그토록 의미에 집착했었는지 그 진정한 이유도 알게 됩니다. 바로 미래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녀는 미래라는 게 이미 결정되어져버린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 미래란 다름아닌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미래였습니다. 자신이 부재한 거기서 남아있게 될 사람들이 자신의 상실로 인해 겪게 될 고통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될 수 있도록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죠. 그것이 안나의 죽음 이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호텐은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습니다. 신이 모든 불행에 대해 침묵하듯이 말이죠. 신이 헤이즐에게 가져다 준 불운과 마찬가지인 호텐의 폭언을 들으면서 미래는 우리가 도무지 어쩔 수 없으며 삶은 오로지 이 현재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바로 거기서 헤이즐은 숫자 '0'(삶) 과 '1'(죽음) 사이에는 무수한 무한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까 수학 이야기를 할게요. 전 수학자가 아니지만 이건 알아요. 0 과  1 사이에는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습니다. 0.1도 있고 0.12 도 있고 0.112도 있고 그 외에 무한대의 숫자들이 있죠. (...) 어떤 무한대는 다른 무한대 보다 더 커요. 저희가 에전에 좋아하던 작가가 이걸 가르쳐주었죠. 제가 가진 무한대의 나날의 크기에 화를 내는 일도 꽤 많이 있습니다. 전 제가 가질 수 있는 숫자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아, 어거스터스 워터스에게도 그가 가졌던 것 보다 더 많은 숫자가 있었기를 바라요. 하지만 내 사랑 거스. 우리의 작은 무한대에 대해 내가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말로 다할 수가 없어. 난 이걸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거야.(p. 273)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이란 다름아닌 수 많은 현재입니다. 헤이즐은 삶이란 바로 현재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총합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저 더 큰 총합이 있고 더 작은 총합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더 큰 총합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아니라해도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총합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색깔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남겨진 자들을 위해 오늘을 부정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순간 순간 주어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서 보다 많은 의미있는 추억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보다 현명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이즐은 그동안은 자기가 죽고 난 뒤 남겨질 어거스터스의 상실감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그의 애정을 거부했었지만 호텐을 만난 다음 들른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는 드디어 어거스터스에게 열정적으로 키스를 합니다. 지금 존재하는 현재를 어거스터스와의 사랑으로 싱싱한 초록으로 채색하기 위해서... 이 안네 프랑크는 사실 '장엄의 고뇌'의 안나와 이어지고 그녀들이 모두 상실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헤이즐의 이 행위는 안나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 헤이즐 자신이 가졌던 질문에 대해 자기 스스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었습니다. 결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문득 고 정채봉 선생님이 쓰셨던 우화 하나가 떠오르네요. 심한 바람 때문에 삼일간 배를 타지 못해 여관에서 기다리던 사람들 이야기인데 한 사람은 바람이 잦아들어 배를 타기만 기다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은 그 시간동안 옷을 빨고 식물을 가꾸는 등 바람을 핑계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람이 가져다 준 비어버린 시간을 적극적으로 의미로 채워갑니다. 삼일에 불과했지만 배를 오르는 그들의 행색은 하지만 참으로 달랐습니다. 삼일 간 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바람에 행색이 꼬질꼬질 해져버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웠던 사람은 깨끗한 의복에 열매를 맺은 식물마저 안고 있었죠. 이것이 바로 삶에 대한 비유임은 두 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될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를 짧지만 이 이야기만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은 또 없다고 생각됩니다. 헤이즐은 바로 이 우화 속 '현재를 적극적으로 의미를 채우는 자'가 된 것이죠. 그러고보면 헤이즐과의 사랑을 통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생애를 의미있는 것으로 채워가는 연인에게 '어거스터스'란 이름을 부여한 것도 흥미롭습니다.

 

 어거스터스란 이름은 어딘가 낯이 익습니다. 바로 8월을 나타내는 '어거스트' 때문이죠. 이 두 이름이 비슷한 것은 '어거스트'라는 이름 자체가 어거스터스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터스는 로마에서 케사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였습니다. 그는 케사르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7월'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고 자기도 질 수 없다며 '8월'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원래 8월은 31일이 될 수 없었는데 케사르가 31일이면 자기도 31일이어야 한다면서 아예 그 날 수 까지 31일로 바꿔버린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시간이라는 그야말로 주어진 현실을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로 바꿔버린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결정된 미래에 상관없이 지금 존재하는 현재에 모든 것을 거는 어거스트에게 그 이름은 참으로 합당한 것이죠. 어거스트는 자신도 암환자에다 더구나 그 때문에 한 쪽 다리까지 절단된 상태이지만 그로 인해 비관하지 않습니다. 무기력하지도 않구요. 오히려 더없이 주어진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충실하게 삽니다. 헤이즐에게 '장엄의 고뇌'가 있다면 어거스트에게는 '새벽의 대가'가 있습니다. 한 영웅의 고군분투 대학살 생존기인 '새벽의 대가'는 모든 현재를 적극적으로 채워나가는 어거스트에게 있어 그야말로 어울리는 책입니다. 그는 친구 아이작이 당했던 실연을 보복할 수 있게끔 도와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 스스로 뭔가를 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헤이즐이 어거스트에게 끌린 것도 당연하겠죠. '장엄의 고뇌'에서 찾고 싶었던 진정한 해답은 바로 어거스트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존 그린의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깊이 느끼게 해 주는 책입니다. 존 그린은 그것을 보다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삶과 죽음에 있어 가장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의 영혼을 데려온 것입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누구로부터 상처를 받을지는 고를 수 있었요. 난 내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p. 325)

 

그렇습니다. 아무리 헤이즐 처럼 어거스트 처럼 그 삶이 한계지워져 있다고 해도 결국 삶은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현재가 아니라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현재라는 사실을.  이런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만일 존 그린이 이 책을 선택해서 좋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그 때 헤이즐이 들려주었던 그 대답을 똑같이 들려주겠습니다.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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