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110KG의 거구의 밥. 그는 뉴욕 플래츠 거리에 있는 커즌 마브의 술집에서 일을 하며 조용히 살아간다. 그것도 벌써 20 년 째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의 삶은 한결 같았다. 내내 혼자였으며 평일엔 술집으로 일하러 가고 주일에는 성당에 가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사람좋은 밥이라 불렀다. 자주 가는 성당의 리건 신부는 그를 사랑이 많은 남자라 그랬다. 하지만 그의 삶은 몸은 비록 바깥에 있을지라도 감옥 안의 죄수와 다를 바 없었다. 소설의 제목은 작은 방울을 뜻하기도 하는 '드롭(DROP)'인데, 정말 그의 삶이 차지하는 영역이란 '드롭'만큼이나 협소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요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은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늘 술집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아 구걸하듯 술을 마시는 노파 밀리처럼. 자의로 그런 삶을 이어왔던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불행도 친구가 될 수 있다.(P. 22)'고. 물론 이유는 있었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존재 하나가 나타난다. 여자? 아니다. 개다. 복서 종의 어린 새끼. 그 개는 플래츠 거리의 쓰레기 버리는 날에 우연히 밥의 눈에 띄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몰골이 너무나 처참해 보였기 때문이다.

 맙소사. 저렇게나 말랐다니. 갈빗대가 다 드러났어. 귀에는 마른 피가 커다란 딱지로 변해 있었다.  개목걸이는 보이지 않았다. 갈색 몸에 하얀 주둥이. 몸에 비해 너무나 커다란 앞발.(P. 23)

 그 개는 쓰레기 더미에 있었다. 바로 조금 전에 밥은 쌓여있는 쓰레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뭐든 손에 넣었다. 빚으로 교수대를 세우고 빚더미가 무게에 못 이겨 무너지려 할 때쯤, 예약 할부제로 집을 사서 교수대 제일 위에 던져 올렸다. 재산을 늘릴 때마다 그만큼, 아니 더 많이 버릴 수밖에 없다. 밥은 쓰레기 더미를 볼 때마다 폭력에 가까운 탐욕을 느껴야 했다. 애초에 금했어야 할 음식을 먹고 똥을 싸지른 느낌.(P. 20)

 개는 거기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다. 나도 오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왔기에 이 문장들이 가슴에 마구 꽂혀오는 중이다. 거주민들이 버린 종이 상자가 대형 트럭만큼이나 쌓여있는 것을 보면 밥의 마음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 뭐,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밥이 하는 일과 상관이 없다. 밥은 개를 똥더미에서 구해주려 한다. 그로써는 처음으로 '드롭'과 같은 삶에 또 하나의 작은 방울 같은 존재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를 받아들이니 세계가 더 커졌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조용했던 밥의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난데없이 커즌 마브의 술집이 두 불한당에게 습격 당한다. 경찰이 찾아오고 마침 토레스란 그 경찰이 같은 성당에서 밥을 봤다고 말하기에 밥은 혹시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불한당 중 한 명이 차고 있는 시계가 멈춰있더라는 말을 해 준다. 커즌 마브는 밥에게 어리석은 말을 했다고 나무란다. 사실 그 돈은 술집의 진짜 주인인 슬라브계 갱단의 것이었고 같은 성당에 다니는 밥과 경찰 토레스가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알고는 밥이 경찰의 끄나풀은 아닐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갱단의 두목은 밥과 마브에게 잃어버린 돈을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바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인물이 밥의 삶으로 들이닥친다. 이름은 에릭. 그는 자기가 개의 주인이라며 밥에게 개를 돌려달라고 말한다. 이미 개와 정이 들 대로 든 밥은 거절한다. 더구나 그는 로크(밥이 붙여준 개의 이름이다.)를 학대한 장본인이 아닌가. 그러자 에릭은 만일 개를 돌려주지 않으면 밥이 개를 학대했다고 신고할 것이라 한다. 개에겐 나중에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 특별한 장치를 쓰면 주인을 알 수 있는 칩이 들어가 있는데 그 칩은 자기가 주인으로 되어 있으니 경찰은 밥의 말을 믿지 않을 것임을 알고 협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앞과 뒤로 마치 밥의 삶을 쪼개려는 듯 세찬 바람이 몰려온다. 과연 밥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로코(개의 수호성인이자 독신자와 순교자의 수호 성인 이름이라고 한다.)와 같이.


 소설 '더 드롭'은 톰 하디와 제임스 갠돌피니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원작이다. 맞다. 소설에서 영화로 간 것이 아니고 영화에서 소설로 갔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데니스 루헤인이 썼다. 그것을 좀 더 보완하여 소설로 만든 것이 이번에 나온 '더 드롭'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톰 하디가 주인공인 밥 역할을 맡았고 얼마 전에 타계한 제임스 갠돌피니가 마브 역을 맡았다. 세번째에 나온 여자는 노미 라파스인데 밥과 좀 끈적한 관계가 되는 여인 나디아 역을 맡았다. 혹시 스웨덴 판 밀레니엄 영화를 보았다면 얼굴을 기억할 지도 모르겠다. 리스벳 살란데르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라파스다. 마지막 남자는 에릭 역의 마티아스 스호에 나르츠다.

 소설의 표지는 영화의 포스터를 가져왔다.


 브루클린 브릿지를 총이 기둥이 되어 받치고 있는 모양새다. 처음 이 포스터를 보았을 때는 왜 하필 이렇게 표현했을까 궁금했다. 물론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브루클린이긴 하지만 말이다. 의문은 소설을 읽고 나서 풀렸다. 알고보니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이미지였다.

 중요한 것은 현수교가 흔들리지 않게 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데니스 루헤인이 왜 이 소설에서 등장 인물들을 그렇게 소개하고 있는 지가 이해된다. 이 소설에서 데니스 루헤인은 특이하게도 인물들을 병렬적으로 소개한다. 물론 주인공은 밥이지만 독자는 밥의 삶과 내면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밥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인 밥과 토레스 그리고 에릭의 삶과 내면도 구경하는 것이다.(나디아에겐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도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같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대답은 그들에 대한 데니스 루헤인의  묘사에서 드러난다. 거기서 우리들이 확인하는 것은 태풍 앞의 현수교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는 그들의 삶이다. 그렇다. 그들의 삶은 불안하다. 앞과 뒤로 몰려드는 강풍 탓에 요동치는 밥만큼이나 말이다. 원인은 있다. 모두 저마다 다른 삶의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이 문득 일으킨 균열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억지로 메우다 보니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해 될 것이다. 왜 브루클린 브릿지를 받치고 있는 것이 하필 권총인지. 권총은 대표적은 폭력의 은유다. 즉 브루클린 브릿지가 등장 인물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는 삶을 은유 한다면 결국 그들은 폭력으로 안정을 얻고 있다는 뜻이 된다. 폭력은 억지로 뭔가를 얻으려는 가장 강한 행동이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조급한 마음에 억지로 메우려 하고 있기에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그 때문에 실패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순순히 균열을 받아들였으면 비극은 적었을 것이다. 실패한 그들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 밥은 언젠가 나디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알고 보면 바로 이 말에 그 해답이 있다. 

 누구나 상대한테 얘기하고 싶어해요. 뭐든 자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거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를 보여 줄 때가 되면 찔끔 움츠리고 말아요, 나디아.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이 떠들어 위장하는 겁니다. 해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명하려는 거예요.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하게 떠들어 대죠. 도대체 말이 됩니까?(P. 139)

 보여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자기 존재 안에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균열은 그래서 더욱 위기로 다가왔다. 바람이 불면 언제나 먼저 흩날리는 것은 가벼운 것들이다. 존재감이 엷은 것들만이 산산이 흩어진다. 그들도 그랬던 것이다. 내 안에 채워 놓은 것이 없었기에 조그만 균열도 돌이킬 수 없는 실패의 예감으로 다가왔고 그만 무리를 했던 것이다. 소설은 결국 밥을 통해 그 균열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어디를 보아야 하는 가를 말해준다. 이것도 역시 밥이 나디아에게 들려주는 말에서 나타난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해 본 적 있어요? 당신 생각에?"
 "누구 용서요?"
 밥이 되물었다.
 나디아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뻔하잖아요."
 "네. 예전엔 속죄가 불가능한 죄가 있다고 믿었어요. 후에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결국 악마는 목숨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려요. 이미 영혼을 손에 넣었으니까. 악마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죠. 죽고 나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안됐다. 넌 못 들어와. 용서 못 할 죄를 지었으니까. 혼자 지내거라. 영원히."
 "차라리 악마가 낫겠네요."
 "그래요? 지금 생각은 달라요. 신이 아니라 우리 문제라고 생각하니까요. 이해하겠죠?"
 나디아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울타리에서 나올 생각을 못 해요." (P. 167)

 여기서 우리는 왜 데니스 루헤인이 밥을 개 그리고 나디아와 만나게 하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개와 나디아(아마도 여기서 데니스 루헤인이  나디아란 이름을 쓴 것은 원래 나디아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요정 이름이기에 원제인 '더 드롭'과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그런 것 같다.) 모두 밥을 울타리 밖으로 불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바로 거기에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손이 권총을 쥘 때가 아니라 도움을 바라는 개의 앞발을 잡아주고 비슷한 상처를 지닌 여인의 손을 연민으로 잡아줄 때 말이다. 그렇게 문득 마주한 균열을 불안을 야기하는 나의 상처로 여길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나를 내보이는 계기로 삼을 때 비로소 우리의 악몽도 끝나리라 소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말한다. 비록 성당은 스타벅스 매장이 되고 사람들이 필라테스를 신으로 섬기더라도 '함께'로 나를 떠받친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는 마브와 토레스 그리고 에릭 모두 밥처럼 바깥으로 불러내는 존재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은 언제나 구원을 주된 테마로 다루어왔었다. 주인공들에겐 늘 쉽게 씻기 힘든 죄의식이 있었고 그 때문에 구원은 그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노력은 모두 실패했다. '미스틱 리버'가 대표적인 예다. 악마는 언제나 승리했다. '살인자들의 섬'에서의 주인공처럼 이미 우리 영혼을 그에게 팔아넘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데니스 루헤인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동안 그의 세계는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울타리 안의 세상이었다. 이제 그는 그 곳을 빠져나가려 한다. '더 드롭'은 비록 작은 물방울만큼 작은 시도일지라도 어쨌든 그가 변하려고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과연 이 발걸음이 데니스 루헤인을 얼마나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할런 지 몹시 기대된다.

 (이제와 드는 생각은 데니스 루헤인이 드롭이란 제목을 단 것은 루크레티우스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우주라는 거대한 것도 알고 보면 빗방울이 우연히 마주친 것과 같은 것의 결과로 생겨났다고 말했다. 모든 존재는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된다. 루크레티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빗방울이 직선으로 떨어지지 않고 뭔가의 이유로 경로를 이탈할 때 세계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세계란 의미다. 우연이 유의미를 만든다. 여기서 밥과 개 그리고 나디아의 만남을 떠올리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밥의 말도 경로를 이탈한 빗방울과 비슷하고 말이다. 그럼, 왜 레인 드롭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물론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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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12-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낮에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그냥 이 글을 봤는데 집에서 보는 것과 글씨체가 다르더군요 제가 보는 것은 돋움체(이것은 돋움보다 낱말과 낱말 사이가 조금 넓어요)예요 맑은 고딕으로 쓴 건가봐요 소스를 보니 그 두 가지가 다 쓰였더군요 컴퓨터에 그 글씨체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다르게 보여서 자동으로 돋움체도 쓰이는 건가 생각했는데, 글을 올릴 때 헤르메스 님이 <span style=˝font-size: 10pt; font-family: 돋움체, DotumChe, AppleGothic;˝><span style=˝font-family: `Malgun Gothic`, `맑은 고딕`;˝> 이렇게 두가지를 다 붙였나보네요 제가 맑은 고딕으로만 한번 써봤습니다 돋움체가 저절로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안 생기더군요 맑은고딕만 쓰면 그냥 돋움으로 보여요 이건 기본이어서 그렇군요 별거 아닌 말을 했네요

다음부터는 돋움체로 보이면 다른 글씨체로 써서 그렇구나 해야겠습니다 그것보다 컴퓨터에 그 글씨체를 저장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것을 이제야 알았군요


희선

yamoo 2014-12-19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영화를 한 번 보겠습니다. 좋은 영화 소개 감사합니다~

2015-01-01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01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라이트 마일 밀리언셀러 클럽 85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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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자정리'라고 했던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성 사립탐정 캐릭터가 바로 앤지 제나로인데 그녀가 나오는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가 '문라이트 마일'을 끝으로 우리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설마 했더랬죠. '진짜 종결이긴 하겠어? 아이돌들이 흔히 그러듯이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잠정 은퇴겠지, 뭐!' 이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죠. 어쩌면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억지로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르죠. 이대로 영영 앤지 제나로와 이별이라니... 이런 생각만으로도 왠지 울적해지는군요.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읽어보니 이럴수가! 데니스 루헤인은 정말로 이 시리즈를 종결지어 버렸습니다. 다시 시작될 여지는 조금도(!) 주지 않고 말이죠. 어떤 단호함마저 엿보입니다. 자기 인생에는 사립탐정 말고 다른 길은 없다며 내내 그 한 길로만 걸어왔던 켄지가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인 45구경 콜트를 강물에 던져버리니까요. '공무도하가'에서도 나오듯이 물은 죽음을, 그렇게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거기서 죽음으로 헤어진 님을 그리며 여인이 '공무도하'를 부르듯이 켄지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다시는 이 짓 안 해. 마이크 콜레트가 화물회사 일자리를 제안했어. 그 일을 맡을 생각이야."(p. 372)

 

  말하자면, 이건 독자에게는 확인사살 혹은 셜록 홈즈처럼 독자들이 아무리 요청해도 부활시키지 않겠다는 굳센 다짐 같은 것이죠. 아아, 그렇게 님은 떠나갔습니다. 


  물론 앤지도 말이죠. 연인과의 이별과 마찬가지로 헤어짐 뒤에 남는 건 미련 그리고 의문입니다. 의문 역시 미련이 위장된 모습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묻게 됩니다. 아니,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가?'하고 말이죠. 켄지와 앤지도 예외는 아닙니다. 궁금증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왜 떠나야 하는 것일까?' 그러게요, 데니스 루헤인은 왜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를 이렇게 종결시켜 버린 것일까요?


 사실 저에게 있어 모든 리뷰란 스스로가 품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바둑 기사가 대국을 둔 후에 자신이 둔 수를 차례로 복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탐정에게 던져진 밀실의 시체와도 같이 책은 마주한 수수께끼이며 리뷰란 그 풀이인 것이죠. 솔직히 말해 탐정의 풀이가 진실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자신의 추리에 끼워 맞추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듯, 탐정이 찾아낸 진리 역시 그저 수사(修辭)에 불과합니다. 탐정은 답안지의 정답을 말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을 납득시킬만한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이죠. 리뷰 역시 그와 같다고 봅니다. 원 뜻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


 이 리뷰 또한 그렇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이 던져준 사립탐정을 홀로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카우보이와도 같이 저 편의 망각 속으로 보내버린 수수께끼에 대해 왜 그래야 했던 것인지 나름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려는 몸짓인 것이죠.


 그럼, 한 번 '문라이트 마일'와 함께 헤아림의 론도를 시작해 보실까요?

그만큼 경쾌하지 않고 그저 지루할지도 모르겠지만서도...


 시작은 역시 '왜 켄지는 사립탐정을 그만두는 것인가?"가 될 것 같네요.

 일단 거기에 대한 켄지의 말은 이렇습니다.

 

 "당신, 알아? 이 일을 시작할 땐 정말 끔찍한 짓거리만 아니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 아냐, 그게 아니었어. 그 보다 사소한 일들이 더 힘들었던 거야. 정말로 괴로운 건 백만 달러에 사람들이 서로 못할 짓을 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불과 10달러에도 그런다는 사실이지. 이제 더 이상 누구누구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든 말든 관심 없어. 남편도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이더라고. 그리고 보험회사들? 난 놈들을 도와 한 놈팡이의 목 부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밝혀냈어. 그런데 불경기가 오니까 마을 절반의 보상금을 깍잖아."(p. 372 ~ 373)

 

 아시겠지요? 여기엔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켄지의 절망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혀낸들 그게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죠. 더 이상 죄악으로 부터 깨끗한 자도 없고 개인의 사소한 비행은 밝혀낼 수 있을지언정 거대 기업의 구조적인 악 앞에선 무력하기만 하니까요. 이제 더이상 사립탐정이 추적하는 범죄자들은 '트릭스터'들이 아닙니다. 슈퍼 히어로에게 있어 슈퍼 빌란과도 같이 그것 하나만 제압하면 사회는 순식간에 잃어버렸던 질서를 회복하고 다시금 안정을 구가하는 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순진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트릭스터야말로 일종의 눈가림일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가 잘못되었는데 그러한 진실이 드러나면 대중들이 사회 자체의 전복을 염원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구조적 하자를 은폐하기 위하여 대신 슬쩍 들이미는 희생양 말이죠. 확실히 트릭스터는 그러한 존재였죠. 중국의 산해경에 나오는 온갖 기이한 괴물들과 중세시대의 마녀들이 그러했듯이.


 켄지는 비로소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립탐정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인 'PRIVATE EYE'처럼 언제나 'PRIVATE'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켄지는 이제야 그 진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사실은 너무나 뒤늦게 찾아온 깨달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켄지가 깨닫게 된 상황이란 이미 전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으니까요. 그랬습니다. 그 때도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에게 똑같은 것을 선사했습니다. 사립탐정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도록 말이죠. 하지만 젊어서일까요? 켄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계는 이미 달라져 있는데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음이 흔히 가지는 약간의 오만에 기대어 세상이야 어쨌든 자신의 신념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겼었죠. 그렇지만 착각이었습니다. 휘지 않는 대나무는 결국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그와 똑같이 켄지도 그 착각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 지를 아주 뼈아프게 알게 됩니다. 물론 그 착각을 나무랄수는 없습니다. 그 착각을 가져온 켄지의 신념이란 사립탐정물에서 고고하게 이어져온 사립탐정의 전통과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그건 여반장으로 바뀌는 세상의 선악과 가치 속에서 그래도 자기만큼은 흔들리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요, 모두가 이해득실을 쫓아 이합집산을 이루지만 그래도 자신만은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쫓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사립탐정이 백열전구라면 그 신념은 필라멘트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빛을 오래도록 보존하는 것. 그것이 사명이었고 또한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시대는 가버렸습니다. 트릭스터들을 잡는 것만으로 질서를 복구할 수 있는 시대는 가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2010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책이 쓰여지고 있었던 지난 2년간의 미국은 아시다시피 대공황 이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 도래한 경제 위기는 결코 한 개인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일이었죠. 노엄 촘스키가 단적으로 그건 '지난 30년간 집요하게 추진된 금융 자유화가 적지않은 원인이다.'라고 말했듯이 소수 금융 지배 계급의 입김으로 좌우되는 기형적인 미국 자본주의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한 명의 악덕 금융업자가 아닌 그런 금융업자가 활개치도록 방기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그 책임을 묻지 않는 미국이라는 사회 자체가 이미 거대한 하나의 사회악으로써 사립탐정 켄지 앞에 군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문라이트 마일'은 그들이 숨겨왔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는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의 트릭스터만 잡으면 된다라는 순진한 믿음을 고수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러한 순진한 믿음을 독자에게 가지도록 한다면 데니스 루헤인 역시 트릭스터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오디이푸스가 정해진 운명대로 걸어갔듯이 켄지의 은퇴 역시도 필연적인 귀결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끝을 내버린 것이죠. 켄지에게 가장 트라우마가 되었던 '가라 아이야 가라'를 다시금 소환하면서. '문라이트 마일'은 98년에 나온 '가라 아이야 가라'의 속편입니다. 작품상으로도, 실제 시간으로도 똑같이 12년이 흐른 것이죠. 그런데 왜 데니스 루헤인은 켄지의 은퇴를 위해 하필이면 '가라 아이야 가라'를 가져왔을까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라이트 마일'이 실제 미국이 처한 상황의 반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은 '가라 아이야 가라' 역시 그 반영이었습니다. 사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가라 아이야 가라'부터 그 이야기의 지평이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진다고 할 수 있는데 그 결정적 계기를 낳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라 아이야 가라'가 결국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을 본다면 그 답은 바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바로 한창 위태롭게 전개되고 있던 미국의 중동 정책이라는 것이 말이죠. 90년대에 들어와 냉전 시대가 종언을 고하게 되자 세계에서 가장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은 그 다음 타겟으로 중동 지역을 삼았었죠. 이라크가 대표적인 목표였습니다. 지금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듯이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정치 공세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온갖 빌미로 UN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난 회수의 사찰도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된 미국은 막강한 힘을 아낌없이 휘둘렀습니다. 개입은 설령 그 나라에 내정간섭이 되더라도 자유 세계의 리더인 미국에게 당연한 사명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신념을 고집했고 단 한 번도 그러한 행보에 대해선 성찰해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무반성적이고 과도한 개입은 9.11의 비극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의 미국은 자신의 신념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되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립탐정과 참 많이 닮아보입니다. 어쩌면 이 사실을 데니스 루헤인도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가 지금까지의 노선에서 벗어나게 된 건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리하여 개입하여 자신의 신념만 고집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묻는 이 소설이 결정적으로 켄지에게 트라우마를 가지도록 해버린 것이 아닐까요? 켄지와 똑같았던 당대의 미국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로.

 켄지는 그 선택으로 선령한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고 결국 사랑하는 연인 앤지와도 헤어졌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고립과 자책 뿐이었습니다. 이건 미국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9.11으로 실현된.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뒤이어 나온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가 그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가라 아이야 가라'와 연속성이 있습니다. 똑같이 독선적 개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여기서의 주된 범죄자가 그러합니다. 그는 남의 인생에 멋대로 개입해 자기 뜻대로 조정하고 결국엔 완전히 파멸시키는 걸 쾌락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쾌락만 제외한다면 켄지와 닮았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의 범죄자는 켄지의 또 다른 분신이다!'라고. '문라이트 마일'에서  다시금 소환되는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 유괴된 아이였던 아만다의 지금 삶을 보면 이 말은 너무나 정확하게 보입니다. 그 때 켄지가 조금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고 남의 말에 귀기울였던들 아만다의 삶은 지금과 분명 180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켄지가 추적하고 싸웠던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의 자신. 그건 트라우마가 된 과거와의 대면이었고 그렇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복기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리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데니스 루헤인이 켄지에게 선사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아만다라는 트라우마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켄지에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구원이란 그야말로 '비를 바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데니스 루헤인은 그 구원의 도래를 위한 기우제를 켄지를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범죄자를 보면서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가 보아야 할 곳과 버려야 할 것들을.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는 갈증을 적셔줄 찬 비를 맞을 수 있는가에 대한.


 그렇게 배웠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자신만 옳다는 신념을 버려야 함을. 그래서 앤지와 만나 가족도 이루었습니다. 가족을 가진다는 건 켄지가 이제 그렇게 변했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나마 켄지는 사립탐정으로서의 자신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한껏 드러낸 금융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왔기 때문이죠. 그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에서 한 명의 트릭스터를 상대할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켄지에게 남은 건 냉정한 인식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엔 더이상 사립탐정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제목의 '문라이트 마일'은 롤링스톤즈가 71년에 발표한 'STICKY FINGERS' 앨범 B면 마지막 곡으로 실린 'MOONLIGHT MILE'에서 따온 것입니다. 'MOONLIGHT MILE'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오죠.


 I am just living to be lying by your side

But I'm just about a moonlight mile on down the road...


 가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라이트 마일이란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떠밀려 왔음을 의미합니다.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길입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켄지가 이 소설에서 걷고 있는 길 그대로죠.



[가지고 있는 'STICKY FINGERS' 초판 LP를 배경으로 한 번 찍어봤습니다. 사실 'STICKY FINGERS' 커버는 LP 커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커버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커버는 앤디 워홀이 디자인했는데 원래 커버 자체도 진짜 남자 바지로 착각할만 하지만 아예 커버 바깥에, 혹시나 몰라서 책으로 살짝 가려놨는데, 실제 내리고 올릴 수 있는 지퍼까지 달려 있어서 더욱 진짜 바지처럼 보이는 커버입니다. 거기다 지퍼를 내리면 그 사이로 남자 팬티까지 비쳐보여 더 외설스럽죠. 워홀다운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무장한 커버입니다.] 


 사실 이 제목은 '비를 바라는 기도'의 프롤로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 프롤로그는 주로 켄지의 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거기서 켄지는 '문라이트 마일'을 자동차로 달리고 있죠. 처음에 켄지가 가족을 이루었고 자식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들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프롤로그에서 켄지는 다섯 살 나이의 아들과 함께 달리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딸이었습니다. 그 변화가 왠지 예사롭지 않더군요. 설마 데니스 루헤인이 건망증이 심해 자신이 뭐라고 썼는지 잊어버렸을 리는 없을테니까요.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일까? 그러자 그 꿈속의 질주 마지막에 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운전해야 한다. 차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기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배도 고프지 않으리라. 차 안은 따뜻하고 내겐 아들도 있다. 이제 아들은 안전하다. 나도 안전하다. 나는 계속 운전을 할 것이며 지치지 않을 것이다. 멈추지도 않으리라. ('비를 바라는 기도' P. 11)


 굉장히 비장한 어조입니다. 지치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죽을때까지 자신의 길을 간다는 말은 어쩌면 타협하지 않을 사립탐정의 신념을 나타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그는 차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합니다. 자동차 실내라는 그 협소한 공간이 아예 폐쇄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더욱 분명해집니다. 켄지의 꿈은 전통적인 사립탐정의 모습을 은유한 것임을. 켄지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타인을 지키기 위해 사립탐정은 그렇게 달려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아들은 그저 지켜야 할 존재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사실 아들은 아만다를 뜻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계속 운전하는 동안 아들이 안전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해버린 아만다의 삶이 자신이 바랐던 대로 앞으로도 계속 안전하게 지켜지기를 원한다면 지금보다 더 충실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었죠. 이것이 켄지 개인적으로는 '비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러니 어조가 비장해지 것도 무리는 아닐테죠. 그랬습니다. 그래야 했습니다. 어딘가 있는 진실을 찾아 거짓과 환영이 얼른 잘 구분되지 않는 달빛 어스름한 길 위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사립탐정은 자신을 혼돈으로 이끄는 온갓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아야 했습니다. 스스로를 유폐시켜 냉정한 관찰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더쉴 해미트와 로스 맥도널드까지 대대로 고수해온 그리고 지켜가야할 사립탐정의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신앙은 더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기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길이 달라졌으니까요. 누군가를 지키길 원한다면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길을 버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계속 고집한다면 원래 바랐던 대로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기는 커녕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문라이트 마일'을 달릴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하듯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도 놓아야 합니다. '비를 바라는 기도'는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켄지는 변해야했고, 하여 꿈속의 아들은 현실에선 딸이 된 것이겠죠. 그리고 이 소설 '문라이트 마일'에서 이제는 장기 한 알이 아니라 판을 모조리 뒤엎고 재배치하지 않고서는 누군가를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동안 당연시 여겨온 사립탐정의 존재마저 버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립탐정의 종언은 이렇게 찾아왔던 것입니다.


 좀 더 무리하게 말하는 걸 허락하신다면, 이건 미국에 대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과감히 포기하라!'고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말하는 것처럼 국민을 정말 안전하게 지키기를 바란다면 곪아 터진 환부를 헛된 희망의 링겔만을 꽂은 채 방치하지 말고 과감히 도려내라고 주문하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2010년에 찾아온 미국의 금융위기는 2008년 때 그 환부를 제대로 도려내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더욱 거대해진 구조적 모순 앞에서 사립탐정은 이제 그 적실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라이트 마일'에서 켄지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기력을 술회합니다. 그러면서 확인합니다. 이제 자신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가버리고 자기 보다 훨씬 머리 좋고 비정한 존재들의 시대가 와버렸다는 것을. 그것도 거기 대량으로 쌓여있는 블루레이나 아이패드가 종이책들을 대체해버린 것 만큼이나 빠르게 말이죠. 하여 데니스 루헤인은 과감히 사립탐정을 떠나 보냅니다. 지키기 위해서 놓아야 한다는 걸 몸소 실천한 것이죠. 아마도 그는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싸우고 그 대안을 가져올 새로운 세력을 구상하여 다시금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 단초가 바로 2012년에 나온 '리브 바이 나이트'이지 않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아무튼 저 역시 똑같은 마음으로 앤지를 떠나 보내렵니다.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려드리렵니다. 혹시 아셨나요? 사실 이렇게 쓴 것은 이제 앤지와 결별해야 하는 제 마음을 스스로 납득시키고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렇게 나름 이별 의식이었다는 걸. 

 

 그러보니 롤링스톤즈의 앤지(Angie)란 노래가 생각나네요.

사실 이 리뷰를 쓰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만 혹시 데니스 루헤인이 앤지라는 이름을 정말 이 노래에서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각설하고, 이제 떠나는 앤지에게 이 노래 가사 하나를 인용해 그대로 들려주고 싶네요. 가사 때문에 질투 많은 켄지가 제 멱살을 잡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헤어지는 마당에 몸사릴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With no loving in our souls

And no money in our coats

You can't say we're satisfied

But Angie, I still love you, baby

 

Everywhere I look I see your eyes

There ain't a woman that comes close to you

Come on baby dry your eyes

But Angie, Angie

Ain't it good to be alive?

 

 앤지,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세상이 그래도 조금은 살만했어요.

 이건 정말이에요.

 

... see you Angie sometime, some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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