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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많은 소설을 읽는다하는 일이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주위에 소설을 벗하는 이도 드물다 보니  ‘어디  데도 없는  뭐하러 그리 열심히 읽어?’ 소리를 듣는다하기야 처음 듣는 지청구도 아니다어릴   아버지에게 “소설 그만 읽고 공부  해라!” 말을 허다하게 들었으니까요즘 아버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죽어라고 소설을 읽더니 애가 아주 이상해져 버렸어.”

 

 아버지의 말마따나  현재 이상한 사람으로 통한다주위 사람들에겐 구닥다리 취미를 가진 데다 그들이 모르는 사람알지 못하는 책을 입에 주워 담는 일이 잦다 보니 대화에도  끼워주지 않게 되었다소설 때문에 고독해졌다침묵의 벗이 되었다벌써 오래된 일이다그런데도 아직 읽고 있다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오기를 부리는  아니다그냥 소설이 좋은 것이다장르가 무엇이든국적도 상관없이

 

  그렇게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누구도  먹는 이유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 것과 같다지금까진 그랬다그런데 최근에 문득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어느새 밝아버린 창문으로 하얀 설원이 되어버린 세상을 보고서였다그때 마침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읽고 있던 것도 한몫 했다읽느라 일어날  다리가 저려 얼른 제대로 서지 못할 만큼 오래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다일어나게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아우토반 되었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누이 그리고 아내를 버릴  있다고 말했던 ‘명예의 한순간 과연 잡았는지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였다그는 원하던 것을 갖지 못했다평생을 꿈궈온 영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성을 시작으로 느닷없이 운명에게 옆구리로 발길질을 당하고  것이다그는 눈과 코를 매캐하게 휘감는 포연과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한 대지 위에 벌렁 나자빠진다이제 죽음만이 남았다고 확신한 순간지금까지   번도 보지 못한 파란 하늘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드높은 하늘은 안드레이의 운명은커녕 유럽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마저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초연한 표정으로 정적과 평안만이 가득했다그것을 보면서 안드레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명예의  순간 실은 참으로 보잘  없다는  깨닫는그는 생각한다.

  나는 전에  드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p. 540)



 

 이런 고백이 무심결에 마음의 현을 진동시켜 나도 하늘이 보고싶어졌던  같다그래서 일어났던 것인데 세상이 완전히 변했음을 발견한 것이다팔짱을  채로 풍경을 한동안 응시하다 돌연 깨달았다내가 소설에 매혹을 넘어 중독까지  것은 그것이 안드레이에게 그랬듯이 드높은 하늘을 보여주기 때문이란 .

 

 소설은 그런 손길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하며 골방 같은 일상에 안주하며 세상이 정답이라고 말한  외엔  닫고  막으며 살려는 나를 문을 박차고 들어와 밖으로 이끄는 굳건한 손인 것이다어린 시절 내겐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다방학만 되면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나를 이끌고 온종일 산과 들판을 쏘다니던 녀석이었다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다나는 그곳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인가 감평하는 역할이었다둘이 합의하여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인정되면 ‘비밀기지  이라는 넘버링을 붙였다그리고 둘이 함께 만든 지도에 그곳을 첨가했다모두  당시 열광했던 애니메이션인 ‘보물섬 영향이었다소설은  친구 같다표지를 넘기면 문득 그때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담장을 타고 넘어오던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같고 오늘은  어떤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게 될까 두근거린다어쩌면 나는 여전히 아이일 때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소설 또한 애초부터 그런 존재이지 않았나많은 이들이 문학의 시원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꼽는다고 알고 있다 이야기 속의 오디세우스 역시 낯선 세계로 호출되어 정처 없이 유랑하며 예전에는 보지도만날 수도 없었던 기이한 장소와 존재들을 만난다그리고 끝내 자신의 고향 ‘이타카마저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모험을 통해 오디세우스에게도 안드레이처럼 ‘드높은 하늘 도래한 것이다오디세우스의 후예라고 해도 좋을 소설은  그랬다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단적인 예다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뛰쳐나가는 것이 소설의 사명이라는 것을.



 그러나 단순한 가출은 아니다풍차를 괴물로 간주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리석다 말할 테지만세르반테스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군가가 규정한 협소한 시야에 한없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동시에 강조한다소설의 임무는 그런 구속에서 독자를 자유롭게 만들어 모호함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속에서 이제 모든 의미와 질서를 스스로 찾고 구축해 나가도록 돕는  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올해 읽은 켄트 하루프의 ‘축복 이언 매큐언의 ‘넛셸’도 다시금 확인시켰다.

 

 많은 이들이 ‘축복 두고 평범한 삶을 찬미하는 소설이라 말한다하지만 내겐 정반대로 읽힌다우리가 ‘평범하다 말하는 일상이란 이사할  장판을 걷으면 발견하게 되는 무수한 곰팡이처럼 치졸과 비겁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무수한 자기 검열과 타인에 대한 냉대,  탓하기로 마구 얼룩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남들 눈에 무난하게 보이는 평범한 삶이야말로 오욕이라고 말이다소설에서 그것은 ‘겁쟁이 말로 표현된다굳건한 기독교 신앙으로 우리와 그들이 명확히 구분되는미국 남부 아이오와주의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엔 겁쟁이들이 즐비하다무엇보다 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대드 루이스가 대표적인데그는 남의 눈이 무서워 동성애자인 아들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린다더하여 오 년 동안 자기 밑에서 일한 ‘클레이턴이란 부하 직원이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역시 신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원과 아내의 절박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해고한다 결과아들은 집을 나가고 임종의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으며 클레이턴은 자살한다이것은 그에게 평생 한으로 남는다사실 그는 지금 죽는  아니었다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자비 보다는 냉정을 선택했을 때부터 ‘대드 이름에 이미 ‘죽음(Dead)’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 죽어 있었다이러한 대드의 삶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인 라일 목사를 통해 선명하게 대비된다라일 목사는  마디로 겁이 없는 사람이다동성애가 죄가 아니며 아랍이 적이 아니라고 소신껏 말한다신도들이 격노하여 자신을 비난하고 교회를 떠나도 굽히지 않는다아내와 자식마저 그를 버리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다이름 또한 (Life) 연상시켜 한층  뚜렷하게 대조되는  삶을 보여주며 켄트 하루프는 ‘누구의 삶이 축복인가?’ 질문에 분명히 답한다그것은 바로 라일 목사라고.



 

 이언 매큐언의 ‘넛셸’ 또한 클로드가 트루디를 부르는 호칭 그대로 우리를 ‘생쥐 만드는 세속적 가치에 점령당한 일상을 통박(痛駁)하고 있다. ‘돈키호테 정반대로 현대인의 초상을 정립한 ‘햄릿시간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태아인 햄릿을 화자로 하여 다시 쓰고 있는  작품에서 그런 일상은 클로드의 말버릇이기도  ‘상투어 나타난다클로드는 결국 햄릿의 아버지 존을 살해하는데  존이 하필이면 시인이다구체적인 사물을 거래하는 부동산 업자인 클로드와 모호한 언어로 추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존의 관계는,하이데거를 따라 시가 일상을 점령한 존재자들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존재 본연의 모습이 도래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감안하면 일상과 비일상의 대립이란  더욱 확연해진다그야말로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처럼 쪽에는 ()다른  쪽에는 () 있는 것이다 사이에  사람이 있다바로 햄릿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트루디 여성이다그는 존의 아내다하지만 남편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자 클로드와 어울린다나는  소설에서 트루디란 인물이 가장 흥미로웠다그녀는 일상을 벗어나는 것과 일상에 매달리는  사이에서 용기 있게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갈등속에 흔들리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햄릿은  모든 것의 관찰자다그는 트루디의 몸을 통해 세상을 읽는 독자와 같다바깥 세계를 감각을 통해 만나게 하는 어머니의 자궁이 그에겐 책인 것이다.   모든 읽기를 끝내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슬픔그다음은 정의그다음은 의미나머지는 혼돈이다.’(p. 263)



 

 이처럼 ‘전쟁과 평화’, ‘축복’ 그리고 ‘넛셸’ 모두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 현실 세상이 감추고 있었던 세계로 데려가 그런 진리조차 잠정적으로 통용되는 가설에 불과하며 일상의 현실 또한 여전히 모호한  남아있는 여백이 아주 많다는 것과 아직도 경험과 사색의 항해가 많이 필요한 대양(大洋)이란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은 불가능한 시공을 담는다현실 세계에   번도 재현되지 않는 시공이란 의미에서다당연하다그것은 활자로만 존재하니까일상에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인물의 대기 속에서   번도 울렸던 적이 없는 말들로 소설은 채워져 있다일상에서 불가능한 것은 어리석은 몽상이요부재는 쓸모없는 것이지만소설에선 거꾸로 불가능을 통해 가능을 구현하고 부재를 매개로 존재가 정립된다돈키호테에게 풍차가 괴물이란  진실이었던 것처럼 현실의 모든 의미와 질서는 소설에서 전복되는 것이다벽은 무너지고 토대는 붕괴되며 지도는 재가 된다남는 것은 오직 하나모호하지만 무한하게 펼쳐진 가능성이며 스스로 그것을 발굴해 의미를 세공할 독자 뿐이다.

 

 지금의 시대는 갈수록 눈에 보이는 것만을 원하고 있다돈과 외모는 물론이고 인종과 성별 또한 그러하다종교와 민족도 마찬가지다클로드처럼 나와 남을 확실히 구별해  것만을 찾는다내적인 성장은 내버려두고 외적인 것만 중시하다 보니 엷어진 자존감에 자기 보다 훨씬   존재에 기생하여 ‘호가호위’ 하고픈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다그런 시대의 끝에 뭐가 있는가는 ‘축복 보여주는 바와 같다내가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불안에 떠는 겁쟁이가 되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커다란 아픔을  뿐이다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모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상과 가상현실과 몽상과학과 신비실용과 무용 결국은 나와 너를 나누는 지금의 세상이 무한정 그어놓은 경계선을 관통하는 용기가 말이다나는 소설이 그것을 준다고 믿는다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존재가  나만 봐도   있지 않은가그렇기에 남들은 소설의 종말을 운운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소설의 생명은  왕성하리라 내다본다분명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 질린 이들이 차오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설의 우물로 모여들 것이다소설의 기나긴 역사가 증명하듯이소설이란 현실이 감춰놓은 세계를 드러내어 기울어진 시대를 바로잡는 균형추이니까 말이다그러므로 나역시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소설이 초대하는 항해에 기꺼이 뛰어들 것이다모험은 계속된다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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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8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글입니다.
헤르메스님은 정말 소설을 사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전 매년 올해는 소설을 좀 많이 읽자 해 놓고
정작 읽는 책은 에세이 아니면 인문학이더군요.
이 글 읽으니 정말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좋은 소설들과 함께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7-12-28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12-29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좋아해요 하지만 좀 가려서 봅니다 헤르메스 님은 어떤 소설이든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저는 어딘가 가는 거 싫어해요(어렸을 때는 친구하고 밖에서 놀기도 했는데...) 소설에서 떠나는 모험은 좋아합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닌가 그냥 재미있어서 좋아합니다 저는 요새 다시 소설만 많이 봤다 했어요 이것저것 알면 소설을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다른 거 잘 몰라도 소설은 재미있군요


희선

oren 2017-12-29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안드레이가 쳐다봤던 그 파란 하늘의 의미를 이토록 생생하게 되살려 놓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오뒷세이아와 돈키호테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게 읽었고요. 헤르메스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최근에 읽었던 『돈키호테 성찰』 속의 문장들이 줄줄이 되살아나는 느낌도 듭니다. 그만큼 헤르메스 님의 글이 예사롭지 않아서겠지요. 소설이 얼마만큼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만드는지를 이만큼 절박하게 표현하기도 힘들 듯합니다...

(헤르메스 님의 글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렸던 『돈키호테 성찰』 속 문장들을 덧붙여 봅니다.)

* * *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모험담은 억압적이고 견고한 현실을 유리처럼 깨 버린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며 새로운 것이다. 각각의 모험은 세계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유일무이한 과정이다. 그러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우리는 삶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의 경계를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가능성들이 운신할 수 있는 경계의 폭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리 늦어도 30년이면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이 실재를 평가하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 발에 매여 있는 줄의 길이가 몇 미터인지 재 보는 것과 같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인생이야?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쳇바퀴인 거야?˝ 바로 여기에 모든 사람에 대한 위험한 시간이 도사린다.

이 대목에서 가바르니의 재미있는 그림이 생각난다. 그것은 조그만 구멍을 통해 세계를 보여 주는 만화경 옆에 서 있는 교활한 늙은이를 그린 것이다. 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겐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해. 실재는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가바르니는 미학적 리얼리즘을 옹호하는 파리의 작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살았다. 그는 모험담에 쉽게 넘어가는 대중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이렇게 실제로 약한 인종들이 상상력이라는 강력한 약을 우리가 존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놓고 도망치도록 해 주는 악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145∼146쪽)

* * *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

한여름 라만차 지방에는 불덩이 같은 태양이 작열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대지는 종종 신기루 현상을 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물은 진짜 물이 아니지만, 그 근원을 생각해 보면 뭔가 진짜 같은 것도 있다. 그 척박한 근원, 즉 신기루의 물을 만들어 내는 근원은 대지의 절망적인 건조함이다.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두 가지 방향에서 경험할 수 있다. 하나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것이다. 즉 태양이 만들어 내는 물은 진짜 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반어법적이고 비스듬한 시선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기루라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생생한 물의 모습을 통해, 그런 척 위장하고 있는 대지의 건조함을 본다. 모험 소설, 모험담, 서사시 등은 상상적이고 의미심장한 사물을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반면에 리얼리즘 소설은 두 번째 방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것은 첫 번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 소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해 신기루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돈키호테』가 기사도 이야기에 반대해서 쓰인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도 기사도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문학 장르로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그런 현태의 영양 흡수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설명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현재적인 실재가 어떻게 시적 실체로 변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해서만 본다면, 그것은 결코 스스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신화적 영역의 권리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화의 파괴로서,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어법적으로 취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실재는 무기력하고 무의미하며 정적이고 말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동력을 가지면서 관념적 수정체 같은 세계를 상대로 도발을 감행하는 능동적인 힘으로 변모한다. 이 수정체의 환상이 일단 깨지면 그것은 무지개 빛깔의 가루가 되었다가 점점 색깔이 바래면서 마침내 거무스름한 흙더미가 된다. 우리는 모든 소설에서 이러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실재는 시적이지 않고 예술 작품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단지 관념적인 것을 다시 흠수하는 몸짓이나 운동일 뿐이다.(155∼157쪽)

2017-12-2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인적인 무더위다.

 더위에 약한 나는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현관문에 다다른 내 기분은 아주 힘겹게 42.195KM를 완주한 마라토너와 다르지 않았다.

 땡볕 아래 한창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진배없는 몸과 마음이 그저 바라는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 가급적 늦게 찾아오는 것 뿐인.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니요, 더위가 한풀 꺾인 것도 아니건만, 요즘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로 이것,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둥!! 오랜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전권이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근사한 외관으로 강림해 주었다.

 사진은 정면으로 본 모습이다.

 발간되기를 너무나 기다렸던 아이템이라, 이것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절로 보름달을 본 늑대처럼 크고도 긴 하울링이 나왔다.

 하여, 배경의 사진을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당시에 '핑크 플로이드' 그룹 멤버로 유명한 로저 워터스의 '더 월' 라이브 공연 현장 사진으로

 솔직히 지금 내 기쁨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의 기쁨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박스 옆면의 모습이다.

박스에 마치 번진 핏자국 같은 무늬가 있는 것이 보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책 표지에도 이와 동일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책에 있는 무언가(피? 아니면 꿈의 노래?- 이 정체는 직접 읽어서 확인해 보실 것!)가 바깥가지 넘쳐 흐른다는 컨셉인 것 같다.


여기는 반대쪽 옆면. 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무려 66,000원!! 출혈이 컸다만(ㅠ ㅠ),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볼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누구는 게임기 켠 김에 왕까지 간다고 하는데,

나는 찍는 김에 위까지 찍는다. 요모조모 다 뜯어보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기에...

박스 위에도 어김없이 흘러 넘친 자국이 있다.



 이제 웬만큼 외관을 감상했으니, 드디어 실물을 받아든 소감을 술회해보려 한다.

 너무나 고대했던 것이라 자못 격정적이 되어도 이해해 주시기를...


  아아... 이 걸작선이 나오기를 기다렸던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은 2008년이었다. 그러니까 한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즐겨 구독하던 '판타스틱'이란 장르 문학 전문 잡지가 있었는데, 2008년 1월호의 '분야별 단신'에서 이렇게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네모 칸 안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엔 단편집이라고 되어 있으나 '샌드킹'이나 '스킨 트레이드' 같은 중편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책일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글에 분명히 'DREAMSONGS'라고 하고 있으니 이 책이 맞다. 이번에 나온 걸작선 표지를 보면 제목 아래 분명히 '꿈의 노래(DREAMSONGS)'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나는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정말 우리말로 읽게 되기를 학수고대 했다는 것이고 무려 십년만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려운 출판사정에도 불구하고 비록 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선뜻 걸작선을 발간해 준 '은행나무'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앞서 보인 것처럼 아주 멋진 양장본 박스 세트로 만들어 소장 가치를 높여주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런 마음이다.


보이는가? 사진은 박스의 뒷면을 찍은 것이다.

 저기, 분명히 ':A RRetrospective' 아래 조금 작은 글씨로 'Dreamsongs'라고 각인된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A RRetrospective',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꽤 재치있어 보인다.

 조지 R. R. 마틴의 그 R. R.에 빗대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A RRetrospective'와 'Dreamsongs' 모두 2007년에 나온 원서의 제목이다.

 원서는 두 권으로 나왔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게 네 권이다.


이는 영어를 한글로 옮기면 원래 분량이 상당히 늘어나므로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책의 표지 역시도 원서와 다르다. 원서는 판타지 표지처럼 디자인 되었다.


둘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판본이 소장 가치가 더 크다.


표지가 전면에 드러나도록 찍어 보았다.

나란히 놓고 보니 색깔도 그렇고 훨씬 더 좋아 보인다.

 (왠지 영어 문법 교과서 원서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면 기분 탓이다.)


책의 뒷 모습.


  사실 이번에 나온 걸작선은 그 의미가 아주 뜻깊다.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발간되는 조지 R. R. 마틴의 선집이기 때문이다. 무려 70년대부터 활동했고 그 때 이미 SF와 호러 양면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R. R. 마틴의 작품들은 장편, 단편을 불문하고 참 만나기 어려웠다. 조지 R. R. 마틴은 최연소 휴고상 수상과 평생 한 번도 타기 어렵다는 휴고상을 한 해에 두 번이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에서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단행본은 커녕, 이런저런 엔솔로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도 아주 소수의 작품만.


 다시 말해,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마틴의 작품은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토탈 호러 1'의 '샌드킹'과

  '토탈 호러 2'라는 SF 단편집에 있던  '나이트플라이어'.

 그리고 도솔 출판사에서 나온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에 실려 있던 '두 번째 종류의 고독'.

 더하여 시공사에서 나온, SF 평론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조지 R. R. 마틴의 가장 친한 지인이기도 한 가드너 도즈와가 편집한 '갈릴레오의 아이들'에 들어 있었던 '십자가와 용의 길'.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잡지 판타스틱에서 연재한 '샌드킹(2회 연재)'과 '스킨 트레이드(3회 연재)'.

 이외엔 없었던 것이다.


판타스틱,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 연속 게재되었던 '샌드킹'.

연재분 1회는 이렇게 양면을 가득 채운 일러스트로 시작되었다

내게 처음으로 마틴이란 이름을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내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세계가 다 동일한 반응이었으니까.

 79년에 발표되자마자 그 해의 SF 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상과 네불러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로커스상까지 받았고

작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 끌어 올린데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SF 작품증 하나로 평가하는 상황이니.

딴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몰입감 가득한 이야기와 강렬한 시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갈등 또한 더없이 치열하여 오래전부터 헐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왔으면서도

 미드 'OUTER LIMITS'에서 시즌 1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것 말고는 아직 성사된 게 없다.

지금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샌드킹'만큼이나 뛰어나고 인상적이며 코스믹 호러가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게 하는 '나이트플라이어'가 먼저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더없이 실망스러웠던 결과만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본이든 제작이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 참. '샌드킹'은 친구가 피라냐를 어항에서 기르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한다. )


이번엔 판타스틱, 2007년 12월호에서 2008년 2월호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된 '스킨 트레이드'의 1회 시작 모습.

'샌드킹'과 마찬가지로 역시 양면 일러스트로 시작하였다.

 '스킨 트레이드'는 원래 스티븐 킹, 댄 시먼스와 함께 '다크 비전 트릴로지'를 위해 발표한 작품으로써

 공포 문학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브램 스토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되었으며, 월드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스킨 트레이드'도 현재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나처럼 일찌기 그의 팬이 되어버린 자들은 얼마나 그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갈증에 허덕였겠는가? 

 이토록 오랜 시간 쌓인 갈망을 헤아린다면, 앞서 이 걸작선이 있어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는 내 말이 결코 허언도 과언도 아니라는 것을 능히 납득하리라고 본다.

 나는 정말 조지 R. R. 마틴이 '왕좌의 게임'을 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대박을 치고 HBO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또 엄청난 흥행까지 하게 된 것 또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콤보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면 요즘처럼 출판계의 빙하기에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발간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문득 '다크 타워'의 서문에 스티븐 킹이 이런 이야기를 썼던 게 생각난다. 아시다시피, '다크 타워'는 스티븐 킹이 무려 30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너무나 오래 연재된 탓에 사람들은 과연 '결말이 어떻게 날까?, 결말이 나기는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했다고 한다. 당연히 독자들에게서 스티븐 킹에게 많은 편지가 왔는데, 그 중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스티븐 킹은 말했다. 하나는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던 할머니. 그녀는 정말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아 아무래도 이대로는 '다크타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으니 자신을 가엾게 여겨 부디 결말을 자신에게만 미리 알려주지 않겠냐고 스티븐 킹에게 편지로 사정했다. 결말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고. 다른 하나는 사형수였다. 그 역시 형이 집행되기 전에 결말을 알게 되길 바랐다.


 마틴의 작품에 대한 내 마음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 활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그의 잡지 데뷔작인 '영웅'을 읽게 되길 원했고 그에게 처음으로 휴고상을 안겨 준 '리아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나게 되길 바랐으며, 그의 판타지 장르 데뷔작인 '라렌 도르의 외로운 노래'와 그가 가장 힘겨웠던 시절에 절치부심하며 써내려 갔던 '터프의 맛'을 한 번이라도 읽게 되길 소망했다. 이왕이면 그가 창안한 세계의 뼈대가 되는 '와일드 카드 셔플'까지 더하여...

 마틴을 알면 알수록 읽고 싶은 작품의 리스트는 자꾸만 늘어나는데, 줄어들 길은 요원하여 반쯤은 포기하고 살아가던 참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다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스티븐 킹에게 결말이 적힌 편지를 받은 할머니의 기쁨이 이와 다를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랜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신약성경과도 같은 그의 걸작선이 나온 마당에 보다 많은 이들을 마틴의 품 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의 절친 가드너 도즈와는 조지 R. R. 마틴의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조지 R. R. 마틴의 책을 펼치는 독자들이 얻는 것은 수많은 현대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메마른 미니멀리즘이라든지 포스트모던 문학 특유의 쿨하고 아이러니컬한 유희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것들 대신 독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강렬한 갈등에 뿌리를 박은 뚜렷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 그것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에 의해 면밀하게 창조된 이야기다. 첫 페이지부터 당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매력적인 이야기인 것이다.(1권, p. 14~15)


 정확히 내가 마틴의 신도가 된 이유와 같아서 일부러 인용해 보았다. 마틴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흠뻑 빠지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야기. 도즈와는 역시 절친답게 마틴의 매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왕좌의 게임'이 가진 매력도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취해 사는 존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 각종 매체를 통하여 이야기를 소비하고 감상한다. 하루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를 관통해 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확 잡아끄는 이야기는 별로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가 우울하고 피로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아주 재밌고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힘을 잔뜩 받은 듯 일상을 활기차게 보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분명 좋은 이야기엔 그런 힘이 있다. 답답한 일상의 숨통을 트여주고 힘든 일상을 지렛대처럼 손쉽게 빠져나오게 만드는 힘이. 알고 보면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디게 만드는 내일의 꿈과 미래의 희망이란 것도 이야기다. 자기 스스로 만드는 이야기. 인간의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두뇌 자체가 빼어난 이야기꾼이라 말한다.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 보다는 먼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맞추어 바깥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말이다. 사람 자체가 이야기의 존재이기에 인간은 밥심 외에 이야기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잡설이 길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탐닉이 그렇게 무용한 것은 아니며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음식만큼이나 살아가는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여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조지 R. R. 마틴의 소설들을 탐독하라는 것이다.

 마틴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에 의한 존재니까 말이다.

 '이 더위에 무슨 책이냐?' 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조지 R. R.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이렇게 답하겠다.

 '여름의 무더위 따위야 그저 마틴의 서늘한 세계에 더 거세게 빠지게 만들 '거드는 왼 손'에 불과할 뿐!'이라고...


지금까지 언급한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다. 이야기만이 가득한 영토에서 그들은 함성으로 선언한다.

 '이야기여, 번성하고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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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7-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붐칫~붐붐칫~~ 잔치 분위기에 걸맞게 배경 구성지게 바꿔주시고 책도 번쩍번쩍ㅋㅋ 박스세트면 정말 이 정도 화려함은 나와줘야지 싶어요^0^! 외관으로 보자면 66000원 투자가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급~

ICE-9 2017-07-19 21:33   좋아요 0 | URL
앗! AgalmA님^^ 열성 팬으로써 애정에 걸맞는 정성을 보이기 위해 나름 애쓴 것을 눈치채 주셨군요^^
이 책 나왔을 때 정말로 붐칫, 붐붐칫 어깨춤을 췄답니다. 후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마틴의 작품이 다 실린데다 말씀하신대로 외관까지 근사해서 어깨춤이 더 격렬해지더군요.
그러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거금이 홀라당 사라져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올해는 이 정도로 끝내야지 싶었는데, 아작이 또 맹공하네요.
아니! 그토록 발간되길 오매불망 기다렸던 할란 엘리슨 걸작선이 나온다지 뭡니까!
아악~!! 그 소식 듣고 한 5초간 공중 부양 했어요. 이제 다시 총알 장전 해야겠습니다^^

AgalmA 2017-07-20 07:18   좋아요 0 | URL
저도 할란 엘리슨 걸작선 소식 듣고 읽고는 싶은데 살 수는 없는 쪽으로 결정을....쿨럭)

ICE-9 2017-07-20 12:30   좋아요 0 | URL
아앗! 이런! 엘리슨의 팬으로써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네요.ㅠ ㅠ
 












 '여우가 잠든 숲'은 보텐슈타인과 피아 형사 콤비가 주연인 타우누스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함을 빌어 감히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여우가 잠든 숲'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타우누스 시리즈의 결정판 같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친밀해 보이지만 속 모습은 전혀 반대인 공동체, 집단적인 방관과 무책임 속에 은폐되어 버린 과거의 비극,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되어 온 사회, 그 사회의 진정한 구원은 과거의 비극에 깃든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고 무고한 자가 희생양의 족쇄에서 풀려날 때 찾아온다는 것 등등. 타우누스 시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중핵으로 일컬을만한 것들이 '여우가 잠든 숲'에선 모조리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혹시 당신이 보텐슈타인 형사의 팬이라면 이 소설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2권 말미에 실린 넬레 노이하우스의 고백에 따르면, 이 소설엔 무엇보다 올리버 보텐슈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껏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오랜 세월 존재했었던 - 하여,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무방한 - 상처가 여기서 드디어 드러난다. 그가 왜 승진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오로지 사건의 진실만 쫓는 형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자신의 조그만 잘못에도 쉽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타우누스 시리즈의 대표작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피아가 독선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부러라도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투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지, 바로 그 내막이 이 소설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텐슈타인이 지닌 무려 42년 동안 지속된 고통의 결을 헤아리고 동시에 치유를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42년 전, 그러니까 1972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려 그의 오두막을 찾는다.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 뒤, 소설 속 시간은 2014년의 현재로 돌아온다. 한 청년이 시즌이 지나 인적이 뜸해진 캠핑장을 찾는다. 그는 마약 중독자다. 그러나 그 곳을 찾아온 것이 마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찾아왔다. 마약을 완전히 끊기 위해. 그에겐 연인이 있다. 그녀는 사내 아이를 임신했다. 곧 태어날 아들에게 청년은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다. 격리된 이 곳에서 갱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 그리고 사고. 남자가 찾아 온 캠핑장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캠핑카 하나가 전소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불에 탄 시체. 피아의 전남편이자 법의학자인 헤닝은 그 시신이 남자이며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임을 밝혀낸다. 결혼과 일 모두에서 실패하고 이 곳에서 여행을 떠난 동생 대신 캠핑장을 관리하고 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전직 기자 펠리치타스는 폭발 즈음해서 급하게 떠난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딸 소피아의 양육으로 곤란을 겪는 보텐슈타인은 도저히 맡길 데가 없어서 딸을 데리고 범죄 현장으로 간다. 이런 보텐슈타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캠핑장을 찾은 청년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프롤로그까지 포함하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버지와 관련하여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자 그리고 아버지가 된 자. 모두 뜻하지 않게 가정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펠라치타스 또한 마찬가지다. 피아 역시 범죄 현장에서 하필이면 전남편과 같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살며시 보여주는 증상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안정으로 충만한 가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연 그러한 것 같다. 불에 탄 캠핑카 소유주를 시작으로 수사를 확대해 보니 그 어느 가정도 우리가 기대하는 범주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신뢰 대신 적대가, 안정 대신 불구가 되어버린 가정들이 공동 묘지의 묘비처럼 즐비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속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살인 또 살인. 죽음에 임박한 요양원의 할머니가 급사하고 보텐슈타인에게 뭔가 전하려 했던 신부도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살인이 거듭될 때마다 보텐슈타인은 상처를 입는다.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엄격하게 자기 절제를 하는 보텐슈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선 속수 무책이다. 피아가 걱정할만큼 보텐슈타인은 사건 수사에 개인 감정을 드리운다. 그러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려 42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 되어버린 바로 그 아이의 실종 사건에 관련 되어 있음을 알고는 아예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공공연히 선언해 버린다.


 당신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난 이 사건과 그냥 어떤 식으로건 관련돼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 이 뼈의 주인공은 한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소. 42년 전에 실종됐는데, 그 때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소!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말이오. 내 말 알아듣겠소? (1권. p. 316 ~ 317)


그 날 사라진 소년의 이름은 아르투어. 실종된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보텐슈타인이 새끼 때부터 젖을 먹여가며 키운 여우 막시마저 같이 사라졌다. 당시 보텐슈타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던 두 존재가 동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일로 보텐슈타인은 달라졌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 누구도 친하려 하지 않았던 아르투어와 기꺼이 친구가 되고 가련히 여겨 새끼 여우를 아낌없이 보살폈던, 그토록 약한 자에게 공감하며 정이 넘쳤던 보텐슈타인은 사라지고 감정을 억제하고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 하는 보텐슈타인이 되어 버렸다. 사건이 모두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관계가 있어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로 소환된다. 그렇게 넬레 노이하우스는 보텐슈타인으로 하여금 여지껏 피하려고만 했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서.


 그는 정의를 믿고, 규칙과 가치를 믿었기에 경찰이 되었다. 선과 악도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사라지면서 예전에 그를 가득 채우고 독려하던 사냥 욕구도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속고 바보 취급 당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1권. p. 37)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 신물이 났다. 사라지거나 죽은 피해자에겐 아무 관심이 없는 세상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경찰직을 떠날 생각을 한다. 바로 그런 시점에 넬레는 보텐슈타인을 원점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부 사회의 책임인지, 과연 보텐슈타인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보텐슈타인에게 이 소설의 여정은 더욱  뼈아픈 것이기도 하다. 넬레 노이하우스가 이렇게 보텐슈타인을 은연 중에 심문대 위에 세우는 것은 아르투어와 관련된 그의 태도가 현재 독일 한 편에서 진행중인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사함이란 것은 바로 반응이다. 아르투어가 사라졌을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가족의 아이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 찾는 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했고 방관했다, 그러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하나, 아르투어의 가족이 외지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아르투어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 사건은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아르투어의 부모는 아주 선한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고 남들처럼 계속 우리를 찾아와 꼬치꼬치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였던 것 같아요. 이전엔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적대감이었죠.(1권, p. 370)


 비단 아르투어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루퍼츠하인(실제 지명이기도 하다.)에서 유일한 의사인 레나테 바제도프 또한 외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내 환자들이에요. 그중에는 30년전부터 이 병원을 찾은 사람도 많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름과 질병, 혈연관계에 대해 잘 알아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아요. 나는 여기 토박이들의 눈엔 여전히 이방인이에요.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도요.(2권, p.59)


 바로 이것이 소설 초반, 마치 루퍼츠하인 자체가 저주 받은 것처럼 모든 가정이 붕괴된 것의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비극 앞에서 침묵했고 방관했다.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고 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작태를 외지인이란 이유 하나로 정당화 시켰다. 외지인을 희생양 삼아 비극이 벌여 놓은 공동체의 상처는 쉽게 봉합되고 그들이 바라는 정상 생활 또한 수월하게 되찾았지만 사실 그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모든 가정들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던 것이다. 그 비극과 정면으로 맞서고 치유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은 도미노처럼 이어졌고 무수한 희생자만 낳고 말았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청년도 알고보면 그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마을의 모습은 그렇게 친했고 소중했던 친구와 여우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도 적극적으로 거기에 뛰어들어 뭔가 하기 보다는 42년 동안이나 소극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보텐슈타인에게 너무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저 자신의 상처 달래기에 바빴던 보텐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가해자들 중 하나였다. 넬레가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가 보텐슈타인에게 이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진작에 아르투어와 막시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훨씬 더 빨리 그들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바로 그 마음을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제도프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피아에게 자진해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건네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피아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난 용기를 보여야 할 때 외면한 적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두려워졌어요. 내가 잘 아는 세 사람이 살해되었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는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여기서 일어난 일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두고만 볼 수 없어요. (2권, p. 59)


 나는 바로 이것이 넬레 노이하우스가  '여우가 잠든 숲'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픈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비극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 설령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여우 막시처럼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러니 그것의 진실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것. 그렇지 않으면 방관한 자들의 자녀인 엘리아스와 파올리네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 더 큰 비극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42년 전, 아르투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지금까지 내내 반편으로 살아온 레오 켈러는 그대로 사건 이후 지금까지의 보텐슈타인의 삶이 정말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보텐슈타인 역시도 레오 켈러처럼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소설 마지막에 보텐슈타인이 내놓은 집을 레오 켈러가 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레오 켈러가 이제 진짜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집을 가지게 되었듯이 보텐슈타인도 카롤리네와 소피아와 더불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의미까지 더하여.


 '여우가 잠든 숲'은 최근 시리아 난민과 IS의 테러로 외지인에 대한 반감과 적대가 한층 깊어지고 있는 현재 독일에게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배척 보다는 관용과 대화의 태도를 권유하는. 소설에서 모든 게 자기 일이라 생각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배척과 적대가 실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기세가 좀 꺾였지만 독일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 당이 자국에서 제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무분별한 반감과 적대를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독일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백인 우월주의에다 이민과 이슬람 그리고 페미니즘과 동성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정단 국민전선이 내놓은 대선 후보 마린 르 펜이 1위의 에마뉘엘 마크롱과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결선 투표 진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미국 대선과 참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유럽에서의 이러한 극우의 득세는 거듭된 테러로 실제 자신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진보 세력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기이한 것은 성소수자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극우 세력을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무슬림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배척하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반감이 그들을 적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기엔 지금까지 프랑스가 자랑했던 톨레랑스와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가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서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을 자꾸 연기하게 만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논리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나는 정의의 가장 기본적 임무의 하나는 최대한 공적 정동의 공간을 넓히고 정체성의 축소에 항거하고 또한 불행의 공간이란 결국 우리가 전체 인류 차원에서 직면해야 할 공간이지 결코 정체성에 국한되는 발언에 가두어서는 안 되는 공간임을 기억하고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행에서 오직 정체성만을 중요한 것으로 입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행에서 오직 희생자의 정체성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비극적 사건 자체에 대한 위험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복수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 복수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항상 잔혹함이 반복되는 서막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 위대한 그리스 비극은 정의의 논리와 복수의 논리를 대립시켰습니다. 정의의 보편성은 가족, 지방, 국가, 정체성의 복수와 대립됩니다.

 -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중에서 -




 소설에 외지인과 인간이 아닌 여우 막지를 데려 온 넬레의 마음은 이런 바디우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보텐슈타인이 앞으로 구현할 정의가 바로 바디우가 말한 정의일 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지?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도 결코 멀리 있지 않기에 그 정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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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오면 책이 아냐."

  "책이 아니면 뭔데?"

  "파지(破紙)" ('소각의 여왕' p. 20)


 이유의 소설인  '소각의 여왕'에서 중심 무대가 되는, 해미가 일하는 고물상은 '비정상(非正常)'의 장소다. 바깥 세계에선 내부의 질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는 책이 거기서는 오직 책이 가지고 있는 무게로만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대표하듯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가치는 여기서 모조리 전복되는 것이다. 고물상이 가진 이러한 특성은 해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조건 따로 떨어뜨려놓아야 해. 하다못해 책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거지."(p. 21)


 이런 해미의 말처럼 고물상은 집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철저하게 개체 중심의 세계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분해된 개체가 원래 타고난 재질에 따라서 가치의 위계 질서가 세워진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엄격한 신분 사회의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해미의 아버지이자 고물상의 주인인 지창씨가 고물상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하지만 그 보람도 없이 결국은 파멸하게 된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 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이고, 한 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인 것이다. 그리고 지창씨의 운명처럼, 고물상의 모든 것들 역시도 누군가에게 팔리지 못하면 소각된다. 자본으로 될 수 있는 것만이 생명을 보장 받는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 뿐이다. 더구나 이런 고물상의 세계에서 고물의 획득은 어디까지나 선착순으로 정해진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은 이 세계에 금과옥조와도 같다.


 그런데 이런 고물상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많이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점점 뛰어넘기 힘들어지는 신분 격차 그리고 비정규직이 되면 특히나 더욱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이익이 되지 못하면 가차없이 폐기되어 버리는 상황이라든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저하게 겪어온 경쟁 같은 것들은 사회가 그 어떤 좋은 말로 자신을 형용하였어도 살면서 피부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민낯의 진실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유 작가가 그려내는 고물상은 바로 지금 우리 현실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세계에서 해미는 살아간다. 원래 해미는 재수생으로 사회가 강요한 궤도의 이탈자였다. 하지만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고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세계에 쓸만한 인력이 되어 가면서 어느새 그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에 스스로 동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그녀의 변모는 아버지 지창씨에 대한 불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력을 다해 만드는 이트륨 분리 기계가 자신이 보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고 사기꾼 김씨에게 마냥 놀아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해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비정상이 된 것으로 단순히 정의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가 해미에게 자신이 만든 기계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을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진심'이라고 말했을 때도 코웃음 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비정상이었던 것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바로 해미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애도 보다는 먼저 이것으로 거머쥘 수 있는 액수를 헤아릴 때 단적으로 나타난다.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던가? 비정상의 세계에 살면서 오래도록 그것의 유지와 지속에 일조하다 보니 그만 그녀 역시 어느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찾으려 했던 몸부림이라 볼 수 있는 기계 제작도 허파에 든 바람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허파에 든 바람'은 알고 보면 우리가 그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과 다르게 쓰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허황되고 유치한 몽상이 아닌 것이다. 비정상인 세계에 함몰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려는 노력이자, 그 탈주로 비정상 세계의 지속이 점점 정지된다는 점에서 그 세계에 정상성을 가져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해미도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빨간 불이면 서야 하고, 충돌하면 멈춰야 하는' 궤도가 강요한 규칙이 실은 다만 자신을 비정상 세계에 얽매는 쇠사슬일 뿐임을 깨달은 해미는 그 어떤 충돌과 추격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영원한 탈주를 감행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자신도 할아버지와 아빠처럼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고.



 비슷한 세계에 살면서도 처음부터 계속 허파에 바람이 들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다. 한탸 역시 해미처럼 책이 버려지는 곳에서 일한다. 그는 지하실에서 홀로 폐지를 기계로 압축하는 일을 한다. 누구도 잘 오려 하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잘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삼십오 년째.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한탸는 해미와 다르다. 해미는 개체를 나누고 단일한 개체마저 낱낱이 뜯어 팔 수 있는 것과 팔 수 없는 것을 가른 다음, 자본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소각시켜 버리지만, 한탸는 나뉘어진 개체를 한데 모으고 그것이 하나의 총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며 그러는 한 편, 그 단일성과 융화 시키기에 아까운 고유한 가치를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발굴하여 자신이 직접 마련한 서재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미와 한탸가 하는 일은 이렇게나 정반대다. 해미가 하는 작업이 분해와 소각이라는, 결국 타자의 말살을 바탕으로 한 자기 이익 추구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한탸의 작업이란 융합과 발굴을 매개로한 타자 보존과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는 해미에게 그런 작업을 강요하는 세계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는 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바로 한탸에게 결코 메울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준 어린 집시 여인에게서다. 혈육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던 그녀가 한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오직 당시 체코를 지배하던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문자 그대로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이 한탸를 삼십오 년동안 홀로 자신의 자리만 지키면서 묵묵히 폐지 압축 일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한탸가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독자성(獨自性)으로 충만한 세계이다. 지창씨가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이트륨 분리 기계가 공간화되었다면 나타났을 그런 곳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창씨가 이탈에 성공했다면 보여주었을 그 모습을 우리는 한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탈주한 자아만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순전히 개인만의 영토이며, 바깥 세계는 거기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의 고물상이 비정상의 장소라고 한다면, 한탸의 지하실은 '정상(正常)'의 장소라고 할 만 하다.


 이러한 한탸의 공간이 가지는 성격은 역사적으로 비정상 체제였다고 평가 받는 독일 파시즘과의 대비로 더욱 뚜렷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독일 파시즘은 개인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체제였다. 거기엔 한탸가 책에게 하듯이, 내적인 면을 헤아려 발굴하는 작업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가지고 평가했고, 그 평가 기준 또한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아니면 자신과 얼마나 동일화될 수 있는가만 따져 보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었다. 파시즘은 그 기준을 개인과 타자에게 강요했고,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배제하거나 소각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어린 집시 여인을 죽여버린 독일의 민낯이었고, 그녀의 죽음을 통해 독일 파시즘과 함께 그에 뒤이어 체코에 또 다시 자리 잡은 전체주의의 본성을 깊이 깨달은 한탸에게 그의 작업은 사실 그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그가 세계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업을 떠나게 되었을 때, 끝내 스스로 압축기에 들어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최후의 순간, 한탸는 집시 여인의 죽음 뒤로 내내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비로소 기억해 내는 것이다. 


 한 편, 나는 여기서 해미의 고물상과 독일의 파시즘이 서로 꽤나 닮아 있음을 본다. 아마도 해미의 고물상은 해미와 똑같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오포(연애,출산,결혼,내 집 마련, 인간관계 이 다섯 가지를 포기하는 것.)'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소묘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독일의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내게 동일한 하나의 흐름이 다만 얼굴만 바뀌어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남긴다. 그렇지 않아도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 역사를 동일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닮을 수 없는 것은 배제하고 보는 것이 서양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독일의 파시즘은 다만 그 동력이 다만 극한에 도달한 모습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파시즘이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뒤이어 출현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남미와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세계 각지에서 출몰했던 독재국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결같이 자신의 체제에 도움이 되거나 순종하는 이들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개인들은 모조리 억압하거나 배제해 버렸다. 그런 독재 국가조차 역사에서, 최근의 자스민 혁명까지 더하여 쏙쏙 퇴출 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이 질긴 악연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남아 여전히 우리들의 통증과 신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 흐름과 절연할 필요가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결별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에 노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취미로 인문서를 주마간산 하는 게 전부인,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이 물음에 뭐라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이다. 다만 오늘 이야기한 두 권의 책이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거기서 도출되는 대안 또한 유사하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말해 본다면, 역시 이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그런 흐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그 흐름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심을 두고 다른 모든 것을 그것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는 노력이란 다름아닌 자신만의 차이를 발굴하고 형성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독자성의 영역을 생성하고 지속하는 자발적인 탈주만이 진정한 방법이라고 감히 말해 본다.



 아마도 또 다른 한 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여기서 매듭이 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을 나중에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 '인도 야상곡'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호스. 그는 한 여자의 부름을 받고 친구인 사비에르를 찾기 위해 인도를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호스가 하는 일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는 직업을 묻는 한 여성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소설가시군요." 여자가 따져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경험 삼아 써보는 겁니다. 제 직업은 따로 있어요. 죽은 쥐들을 찾는 일이지요."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고문서들을 뒤져서 오래된 연대기들이나 시간 속에 파묻힌 것들을 찾아내는 것. 그게 제 직업입니다. 그걸 죽은 쥐 찾기라고 한 거죠."('인도 야상곡', p. 104)


 그 역시 한탸처럼 발굴과 보존이 주업(主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는 한탸처럼 타자 지향적이고, 그랬기에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여인의 호출이었지만 기꺼이 자신의 조국을 떠나 자신에겐 더없이 생소한 타자의 땅인 인도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탸와 다른 점은, 한탸는 영혼만 탈주했지만, 호스는 육체마저 탈주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아예 정주(定住)라는 개념이 없는 듯 보였다. 인도에서 내내 호텔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인도 자체도 타자의 영토인데, 호텔마저 잠시 깃들다 갈 뿐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공간이다 보니, 그는 그렇게 겹쳐진 타자의 영역에서 어디든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이러저리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마치 소설 전체가 타자의 영역 속에서 자아는 고정된 자신을 가지기 어려우며 다만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존재가 될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은 내게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는 또 다르게, 타자의 영역으로 완전히 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탸가 전혀 나아가 보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타자 속을 거듭 전전했던 예전 한탸의 연인 만차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성스러운 존재가 된 것을 보았을 때 한탸가 가지게 되었던 낙담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지도 몰랐다.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너무 시끄러운 고독', p. 104)


 '인도 야상곡'의 호스는 바로 이런 만차와 이어지고 있었다. 흐라발은 만차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 내막을 나는 타부키의 소설에서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성스러운 전화(轉化)란, 자신을 타자를 통해 부단히 변화시키는 것에서 도래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한탸와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한탸 역시 타자가 쓴 책을 통해 자신을 계속 변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호스와 한탸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탸의 변화는 고정된 자신에 타자를 계속 덧붙이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가 하는 폐지의 '압축'은 이 변화의 단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신의 독서 행위가 실은 압축이며 자신의 육체 또한 족히 3톤이 되는 책들이 압축된 백과사전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압축은 지층이 쌓이는 것과 같다. 타자로부터 오는 것들은 고정된 내 위에 쌓여갈 뿐이다. 변화는 나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오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게에 못 이겨, 타자가 내리 누르는 강압 때문에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뿐이다. 한탸 자신도 어느 게 자신의 생각이고 책에서 읽은 것인지, 또 읽은 것이라면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그 이유를 타부키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탸의 변화가 압축을 통해 이뤄진다면, 호스의 변화는 여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그 여행이란 것이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懷疑)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자의 영토인 인도는 호스에게 계속해서 과연 네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게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연장되어 네가 알고 있는 자신이 진정한 네 자신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장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 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인도 야상곡', p. 17)


 멀리서 느릿하고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도 소리이거나 외롭고 암담한 한탄의 신음 소리일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요청도 못 하고 한탄 그 자체만을 표출할 뿐인 그런 소리 말이다. 나로서는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평탄하고 차이가 없이 모든 게 뒤섞인 것 같은 소리들의 우주.(같은책, p. 42)


  인도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잇달아 발견하며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기억 또한 진실된 순간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인위적 재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의 확인으로 이어지고 끝내 그런 기억의 집적이라 볼 수 있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라는 것 또한 결코 분명하지 않다고 수긍하게 된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는 여러 호텔이 가득하다.  조지프 콘래드나 서머싯 몸의 책들에서, 키플링이나 브롬필드이 소설을 각색한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는 벌써 여러 호텔을 만난 바 있다.
 마치 그곳에 가본 듯 친근하다.(같은 책, p. 83)

 이러한 모습은 한탸와는 정반대이다. 한탸는 고정된 자아를 중심으로 타자가 집적되는 형태를 보여주었지만, 호스는 그렇게 이미 정립된 자아라는 것은 없으며, 그 자아조차도 타자의 매개로 이뤄지고 그렇기에 타자를 통한 변화란 원래 없었던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자아가 그 순간 조우한 타자로 인해 비로소 발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보이는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같은 책, p. 113)

 섣부른 정의(定義)가 편견을 만들고 그것이 하나의 한계가 되어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을 협소하게 이해하도록 만들며 그것을 통해 타자 또한 무분별하게 가르고 배척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한탸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 정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다. 한탸는 책의 지식을 아무런 질문 없이 무분별하게 섭취했고, 그것의 진실됨을 회의(懷疑) 속에서 검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독서엔 자신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할만 한 게 전혀 없었다.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통째로 생략된 것이되다. 그래서 한탸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존재의 극한에 이르고자 했었지만, 나 자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어떤 의미에선 자신에게 보다 강고하게 유폐되는 것이라 할 만한 자신의 죽음으로 그 여정을 완성하고 만 것이었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이 시끄러운 고독' p. 130)

 그의 여정은 다른 이에게로, 미래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미 근대의 초기부터 허먼 멜빌의 단편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주어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차이와 균열을 만들어내는 저항의 움직임이 계속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흐름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었는지도 모른다. 한탸가 했던 압축의 독서가 실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수집과 같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어떤 타자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개인의 수집으로 그치고 마는 한탸 식의 타자 지향적인 저항은 결국 발터 벤야민이 수집의 종말에 대해 말했던 다음과 같은 예언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고 하겠다.

 수집이라는 현상은, 만약 그것이 그 주인을 잃게 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중에서.)

 이런 면에서 인도 야상곡의 결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호스는 마지막에 결코 홀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틴이란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을 향한 질문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의 여정은 여인의 여정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미래를 가져온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이것 역시도 작위적인 해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감히 말하자면 한탸의 마지막이 끝내 살아서 만나볼 수 없었던 집시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고 호스의 마지막은 마치 그 부름에 응답하듯 여인이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호스의 길을 좀 더 우리가 취해야 할 대안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응답하여 도래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어야 그 반대편의 역사적 반복을 저지할 하나의 흐름이 연속적으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스는 그 만남에서 자신이 정말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깨닫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정확히 그런 건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나를 찾은 지금은 더이상 날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도 그 사람이 날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요. 우리 둘 다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자는 거지요.(같은 책, p. 111)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적극적인 사유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변화의 힘은 책을 비롯하여 그 어떤 타자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자를 지향하더라도 거기엔 나의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 그리고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미처럼 무분별하게 동조하게 되거나 한탸처럼 변화를 만들어낼 그 어떤 움직임도 자아내지 못한 채, 나 자신의 존재감만 키우는데 국한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선동과 유폐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호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단한 사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알랭 바디우는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의 오베르빌리에 시립극장에서 일어난 IS 테러집단에 의해 민간이 무수히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을 추모하면서 이런 비극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의무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유의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커다란 비극일수록 그것에 대해 신중히 사유하지 않으면 실제 역사가 증거하는 바대로  곧 감정적인 복수와 비이성적인 광기에 휩쓸리고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드는 비극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유 또한 타부키와 마찬가지로 질문이자 회의의 여정이다. 내게 대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절대적인 것과 확신을 부정하고 차이와 균열을 생성하는 저항의 몸짓, 그것이 바로 사유인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확신과 고집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있다. 손쉽게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여 멋대로 이름 붙이고 서슴없이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 예를 굳이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세간을 뜨겁게 달군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이 이런 실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도 처음 시작은 참으로 미약하였으나 누군가의 적대가 상대편의 적대를 부르고 그렇게 몇 차례 오고가다 보니 둘러싼 모두를 활활 태우는 거센 불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메갈리아 논쟁의 모습은 따지고 보면 테러의 여파와 유사하다. 9. 11의 미국의 시민이 그랬고, 오베르빌리에 극장 테러 이후의 프랑스 시민이 그랬듯이, 갑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정체성의 충성도가 충동적으로 강해지고, 그렇게 격양된 정서 속에서 전쟁을 불사하는 국가적인 보복이라는 참으로 비이성적인 행위마저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복수(復讐)는 정의가 될 수 없다. 하물며 한 국가나 성별에게 국한될 수도 없다. 그래도 정의의 이름을 빌어 그것을 관철하고 싶다면 미국이나 프랑스 시민은 현재도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더 큰 빈도로 일어나고 있는 이라크나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와 콩고의 학살에도 똑같이 제재하라고 나서야 하며, 남성들 역시 여성이 당하는 다른 모든 차별에도 그러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의는 어느 하나에 편중되지도 않고, 편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유는 그러한 충동을 막기 위해서다. 비이성적인 감정의 감염을 저지해,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모든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에도 나오는 다음과 같은 페소아의 시,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마주할 때 취해야 할 준비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는 듯하다.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눈먼 과학은 불모의 땅을 일구지요. 미친 믿음은 자기를 찬미하는 꿈을 먹고삽니다. 새로운 신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찾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모든 건 감춰져 있습니다.(p.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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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9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31 2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


 니헤이 츠토무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블레임'이 해적판으로 국내에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으니 나름 꽤 오랜 팬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막상 '시도니아의 기사'를 봤을 때는 좀 이질감도 느꼈었다. 특유의 거친 펜선이 아닌, 이토록 깔끔한 펜선이라니(하기사 이 변화는 이미 '바이오메가'에서부터 나타났지만.). 거기다 대사는 왜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 거야. 어라, 이번엔 내 머리가 에피소드를 따라갈 수도 있잖아. '블레임' '아라바' 그리고 '바이오메가'에 비하자면, '시도니아의 기사'가 좀 대중화된 것 같아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오든 말든 그냥 자기가 내키는 대로 질주하던 니헤이 츠토무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대중의 눈치를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는 71년 생이다.)


 그래도 아직 예전의 근성이 다 죽지는 않았는지 이야기가 그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 핵심적인 장면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뭔가 제대로 로맨스로 발전하거나 활약할 것 같은 인물이 허무하게 죽기도 하여, 역시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구나 인정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리보고 조리봐도 다 비슷한 인물들의 얼굴이란!!!(여기서 느낌표 세 개를 찍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니헤이 츠토무의 브랜드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니까. 인물들 구별이 힘들다는 것이 '블레임'도 그랬고, '바이오메가'도 그랬듯이 무엇보다 니헤이 츠토무의 악몽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아니었던가. 주인공은 상대를 죽이지만, 그것이 정말 적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알 수 없다. 그 모호성과 불가해성이야 말로 니헤이 츠토무가 독자에게 주려하는 핵심이다. '넌 지금 뭔가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게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몰라.')


남들에게는 작품의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부분이 내겐 오히려 니헤이 츠토무의 낙관으로만 보이니, 나는 정말 츠토무의 '빠돌이'인가 보다. 어쨌든 '시도니아의 기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회는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뷰랍시고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2. 츠토무의 세계란 알고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사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을 리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건 이제 막 구구단을 깨친 아이가 미적분을 푸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리뷰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의 굉장한 그림과 동선이 확실한 액션 묘사에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처럼 '꺅! 꺅!'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시도니아의 기사'는 좀 더 대중친화적이 되어 그나마 리뷰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기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경향은 여기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서사를 파악하기가 힘든데, '시도니아의 기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그런 것은 니헤이 츠토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이해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머리를 쓰려하지 말고 츠토무가 재현한 세계에 가슴을 열고 풍덩 뛰어드는 게 그의 작품을 즐기는 제대로 된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니헤이 츠토무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독자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저 압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건물들로 꽉 채워진 세계는 그야말로 한없이 작아진 엘리스가 마주한 구멍속 세계와 아무래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어떤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구성과 질서를 파악해야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엘리스의 세계에선 이렇게 해선 안된다. 파악하고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탈출은 커녕 오히려 그 세계에 더욱 갇히게 된다. 그저 그 세계가 무엇을 보여주든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로 나부껴야 문득 홀연히 출구가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여 달라진 시각으로 보게 되어 그렇다. 예전의 눈이었다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문이, 달라진 눈으로 보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의 세계다. 세계를 내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 보다는 그 세계에 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출구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이해가 아닌 경험이 주가 되는 것이다. 이해는 외계에 실재하는 것을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먼저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경험은 그냥 나에게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것으로써, 태생적으로 번역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타자에 맞춰 날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3. 시도니아와 가우나 그리고 츠무기, 타니카제와 오치아이 - 나인가, 타자인가?


 물론 엘리스와 똑같이 경험을 중시하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에도 이런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도니아의 기사'도 변함 없다. 아니, '시도니아의 기사'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작에선 그저 모호하게 나타났던 타자가 '시도니아 기사'에서는 뚜렷한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우나'란 우주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다. 지구는 이미 가우나에게 멸망 당한 상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도니아를 타고 다시금 인류를 번식시킬 별을 찾아 우주를 유랑하고 있다. 그래서 시도니아를 파종선이라 부른다. 인류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배라는 뜻이다. 물론 가우나는 여전히 시도니아를 공격한다. 가우나가 어디서 어떻게 지구로 오게 되었는지 인류는 모른다(가우나의 진짜 목적은 후반에 밝혀진다.). 당연히 왜 공격하는 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공격해 오니까 맞서고, 인류가 다시금 부활하는데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기에 무찌르려는 것 뿐이다. 이런 시도니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에서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시도니아는 광활한 우주에 이렇게 홀로 떠다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정말로 츠토무는 시도니아를 홀로 분투하는 개인이 우주선화(宇宙船) 된 것으로 설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유사성은 시도니아 역시 엘리스의 분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가우나에 대한 시도니아의 초반 대응이 눈에 띈다. 시도니아는 가우나에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우나를 앞질러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다. 가우나는 늘 인류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공격해오기 때문에 출현한 그 순간을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하다. 이는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의 주인공이 했던 것과 같다.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가 있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먼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그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려는 지에 대해 전력으로 눈과 귀를 기울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맞춰 보자면, 시도니아의 디자인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시도니아는 이렇게 생겼는데,



 선체 위쪽을 둘러싸고 있는 소혹성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쪼그라든 인간의 뇌로도 보인다. 이것이 타자 앞에서의 나라는 주체의 왜소성, 즉 자기 중심적 파악과 이해의 한계를 나타내는 디자인이라면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인 것일까? 하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가우나 최상위 군집인 대형 슈가후젠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렇게 터무니 없는 해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슈가후젠은 이렇게 생겼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나? 응? 해파리라고? 으음, 그렇게도 보이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의 뇌로도 보이지 않는가? 아래에 달려 있는 촉수들은 뇌의 척수들이고 말이다. 얼마든지 억측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내겐 대형 슈가후젠이 사람의 두뇌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도니아의 쪼그라든 뇌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거기다 크기의 차이도 어마무시하고 말이다.


 두뇌를 갖지 못한 주체와 두뇌를 가진 타자.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가우나의 대응 방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가우나의 공격 방식은 특이하다. 한 번 패배를 당하면 다음엔 자신을 패배시킨 대상을 모방하여 공격해 온다. 가우나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패배로 인해 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얼른 자신을 압도한 타자를 받아들인다. 모방은 자신의 타자를 흡수를 통해 이뤄지는데, 그러면서도 호시지로 시즈카에게서 볼 수 있듯이 타자를 말살하지 않고 보존해 둔다. 이러한 가우나의 흡수와 모방 관계는 어떻게 보면 공존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가우나와 인간의 융합 개체인 츠무기의 존재가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더구나 츠무기는 타나카제와 사랑에 빠진다.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런 츠무기는, 만일 가우나가 타자를 오로지 포식하기만 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츠토무가 이렇게 뇌의 모습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도 보다 온전한 형태를 지닌 뇌의 쪽이 보다 강한 주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가우나는 강한 존재다. 가우나와 대적하는 인간형 병기 모리토는 가우나 촉수에 한 번만 맞아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우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츠무기와 같은 융합 개체다. 물론 타니카제도 강하다. 그러고 보면, 츠무기와 타니카제 모두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타니카제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츠무기마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다. 그가 정말 강한 것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타자 중심의 주체야말로 진정 강한 주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오치아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오치아이도 타자를 지향한다. 그는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지금 인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를 연구한다. 하지만 오치아이의 타자 지향은 그냥 듣기 좋은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타자 지향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치아이는 츠무기, 타니카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타자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혈선충으로 타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활을 위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기도 한다. 그에겐 오직 자신밖에 없고 나중에 거대해져 버린 신체는 그가 가진 자기 중심주의의 크기가 실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오치아이이기에, 대형 슈가후젠과의 최종 결전 바로 전에 다시금 맞붙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니아가 슈가후젠을 물리친다는 것은 이제 진정 타자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전쟁이 아닌, 인류의 부활을 앞두고 앞으로의 인류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대안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시도니아가 거쳤던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배운 것이 그 대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대안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오치아이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다. 극단에 위치한 사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향한 최종 단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관통할 필요가 있었다.


 4.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 학습


 나는 앞서 시도니아가 마지막에서 찾는 대안이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을 했다. 왜 이 말을 반복하느냐 하면 츠토무가 압도적인 타자를 통해 이해 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학습' 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츠토무에겐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에서 함장은 가우나가 공격할 때, 왜 자신들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지 학습시켜 주자는 말을 하고, 츠무기는 여러 장면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이 나온다. 오치아이가 100년 전, 융합 개체를 만들어 일으켰던 최초의 파국적 사태는 융합 개체가 아무런 학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츠무기에 이은 두 번째 융합 개체 카나타도 마찬가지다.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자, 막무가내로 행동하려 한다. 100년 전, 융합 개체나 카나타는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유아적인 자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는 또한 오치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나타는 가우나와 융합하려는 오츠아이를 두고 친구가 태어난다는 말을 한다.


 배우기 위해선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배우려는 대상을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에게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학습은 타자 중심적인 행위다. 츠토무는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이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스 적인 세계를 연출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시도니아의 기사'가 츠토무의 작품 이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이전 작품까지 은밀히 전개되어온 학습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비로소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도니아의 기사'가 학원물 비슷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왜 많은 작중 여성들이(중성인 이자나를 비롯하여) 타니카제에게 들러붙는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모두 학습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타니카제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며, 세계를 배운다. 그런 식으로 타자와 나를 그리고 공존을 배운다. 타니카제를 둘러싸고 아예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중성인 이자나,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 츠무기, 로봇 테루루등)까지 얽히는 설정도 이와 관계 있다. 타자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것의 반영인 것이다.


 5. 츠토무의 지향점인 융합


 그러고 보면, 첫 작품 '블레임'부터 츠토무는 내내 융합을 지향해 왔다. 마치 일본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처럼 신체와 기계를 융합시켰다. 그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경계를 지워왔다. 사실 어디까지나 배운다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에겐 기존의 고정된 경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그 경계는 늘 새롭게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융합의 지향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츠무기는 지금까지 일관해온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인격화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츠무기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츠토무의 학습과 융합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내가 '시도니아의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다. 그저 착각과 오해의 산물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론 지어 본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츠토무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의 정점을 찍었다고.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어떤 태도를 추구했는지 보다 인지가 쉬운 형태로 만들어 제대로 경험케 만든 것이다.


  이제 츠토무는 다음엔 어디로 발을 내밀게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블레임'이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참에, 절판된 '블레임'도 애장판으로 재간되기를 희망해 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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