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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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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스티븐 킹의 '부적'을 읽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80년대의 대표작. 예전에 나왔으나 절판되어 뒤늦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못 보게 되어 아쉬음이 컸었는데 이렇게 황금가지에서 새롭게 발간한 것이다. 표지 디자인도 모두 2권을 오렌지와 하얀색으로 대비시켰는데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물론 '부적'은 스티븐 킹 혼자 쓴 것은 아니고 '고스트 스토리'로 유명한 작가 피터 스트라우브와 같이 썼다.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와 협업을 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 함께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1977년, 스티븐 킹은 가족을 데리고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피터 스트라우브 부부를 처음 만났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곧 아주 친해졌고 가족끼리 자주 만나 놀았다고 한다. '부적'에 주인공 잭 가족과 잭 아버지 친구인 모건 가족이 여름마다 시브룩 섬에서 함께 어울렸다고 나오는데, 이건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의 가족이 서로 어울려 놀았던 것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러나 함께 '부적'을 쓰자는 이야기는 런던에서 나오지 않았다. 석 달 후 스티븐 킹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이사했는데, 이번엔 피터 스트라우브가 스티븐 킹을 찾아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두 작가의 우정이 얼마나 커졌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 미국에서 둘은 같이 '부적'을 쓰기로 한다.



 

[어쩌면 너무나 친해서 서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기에

 '트위너'란 존재를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부적'은 '다크 타워'와 더불어 스티븐 킹의 가장 대표적인 환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둘이 비슷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크 타워'도 현실과 평행 차원의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인데, '부적' 역시 그러하니까.(어쩌면 그래서 스티븐 킹은 이 둘의 세계를 합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밝히겠지만 '부적'에는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가 등장하기도 한다.) '부적'에는 '테러토리'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지구와 다른 차원의 곳으로 여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다. 거기엔 평행 차원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과 똑같은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이들을 '트위너'라 부른다. 쉽게 말해, 우리와 똑같지만 VERSION만 다른, 일종의 복사본인 것이다.(평행세계론이 그러하듯이, 지구의 인간과 트위너는 운명을 같이 한다. 어떤 때는 무의식적으로 둘이 같은 말을 하기도 하는데,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면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말하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아주 희박한 것인데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죽었어도 아무 영향을 안 받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잭 소여가 그러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이건 결말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 된다. 왜 아무나 부적을 가질 수 없는 지와 관련하여) 당연하게도 아무나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그럴 수 있는데 어떤 이는 그 능력을 이용해 두 세계만이 아니라 평행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리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잭 소여도 그 중 하나다. 

 소설의 시작에서 그의 삶은 외롭고 힘들다. 잭 소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와 엄마인데, 아빠는 죽고 엄마는 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잭은 지금 엄마와 아르카디아 해변에 있는 알람브라 호텔(스티븐 킹의 소설 '토미노커'에도 나오는 곳이다.)에 있다. 엄마가 데리고 왔는데 그 이유는 아빠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모건이 엄마에게 남편이 세운 회사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무섭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우울의 밀물에 쓸려다니기만 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스피디 파커란 흑인 노인(바로 이 사람이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다.)을 만난다. 잭을 한사코 '방랑자 잭'이라 부르는 그 노인은 '테러토리'와 엄마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들려주며 엄마를 구하고 싶으면 '테러토리'로 건너 가 부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부적이란 엄청난 힘을 가진 물건으로, 이 '부적' 때문에 불순한 무리들이 평행 세계 전체 정복이라는 야욕을 가지는 것이다.



[미국 판 인물 소개 삽화로 나온 잭 소여의 일러스트]




 이러한 이동을 위해 스피디 노인은 암녹색 액체가 든 병을 준다. 이걸 마시면 순식간에 테러토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이 액체 때문에 차원 이동 능력이 없는 트위너나 일반인도 테러토리와 지구 사이를 왕래할 수 있다. 그래서 테러토리의 트위너들이 모건의 명령을 받아 잭을 잡기 위해 지구로 오기도 한다. 그 때 그들은 꼭 지구에 있는 자신의 분신들에 빙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노인은 말한다. 뛰어난 사람은 액체의 도움 없이 마음의 힘만으로도 갈 수 있지만. 처음 이걸 읽었을 땐 복선인 줄 몰랐다. 놀랍게도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잭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아빠의 친구, 모건. 둘은 '테러토리'를 알고 있었고 자유로이 왕래했다. 모건의 '테러토리' 트위너는 여왕마저 위협할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 그는 여왕이 아주 깊은 병을 앓자 그걸 기회로 테러토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까 잭의 '테러토리'에서의 여정도 몹시 위험한 것이다. 모건과 그의 부하들 트위너가 '테로토리'를 장악한 상태이니. 물론 저자를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공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이름 아래 핑크 만발  폭신폭신한 로드 무비를 기대했단 말인가!


 곳곳에서 불길함과 음산함 그리고 죽음의 위햡이 도사리는 여정은 잭에겐 미안하지만 '테러토리'만의 것은 아니다. 지구의 여행은 그보다 더 비참하고 음험하다. 때로 잭은 지구에서 테러토리로 탈출하기도 한다.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한 차의 운전자가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가 하면 고작 12살의 몸으로 오랫동안(잭이 작품 속에서 집을 떠나 여행하는 기간은 무려 6개월이다!) 정처없이 방황하다 보니 경찰에게 부랑자로 체포 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권에서 우리는 더욱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미국이란 나라가 '테러토리' 보다 더 가혹하기만 한 곳이란 걸. '부적'에서 잭 소여를 영혼의 한 방울까지 끝도 없이 착취(오틀리 주점)할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를 정도로 내모는 곳(선라이트)은 다름아닌 미국인 것이다.


 이런 점에 눈길이 가다보면 이 책이 발표된 연도가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84년. 한 마디로 80년대 초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의식하면 소설의 인물들과 여러 장치들이 꽤 재미난 의미를 갖는다. 뉴잉글랜드에서 켈리포니아에 이르는 현실 미국 속 잭의 행로는 더욱 그렇다. 어떤 의미가 나타나기에 사족이 이렇게 긴가 하고 타박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렇다. '부적'은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이뤄진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신랄하고 무자비한 비판이다. 그 행정부를 낳은 신보수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공격이다. '부적'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다. 그러한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그 속에 거침없는 현실 사회 비판의 칼날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왜 주인공에게 톰 소여의 이름과 같은 잭 소여란 이름을 주었는가 그리고 왜 여정을 그 톰 소여가 나왔던 '허클베리 핀'의 여정을 오마쥬하듯 비슷하게 형성했는가 하는 것도 다 그와 관련있다. 이 작품을 그저 재미를 위한 대중 소설로 생각하고 허투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는 설정에 꽤 공을 들인 작품이다. 공포 소설의 두 대가가 협력하여 제대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소설인 것이다.


[84년 초판본 커버. 아마도 부적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듯.]



 왜 이리 호들갑인가? 또 나무라실 것 같다. 이제 그 이유를 당신의 시간을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80년대 초반 미국 경제는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동안 미국 경제의 중추를 떠받치던 러스트 벨트가 몰락하고 플로리다와 켈리포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부흥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점점 성장해 나가는 그들을 선 벨트(SUN BELT)라 불렀다. 그 때의 켈리포니아 인구는 뉴욕의 인구를 초월할 정도로 컸었다. 이제 아셨을 것이다. 잭의 여정은 이 변화의 흐름을 그대로 답보하고 있다는 것을. 잭 소여는 그렇게 러스트 벨트에서 선 벨트로 나아가는 것이다. 잭 소여가 부적을 얻기 위한 최종 목적지 아긴코트 호텔은 바로 켈리포니아에 있다.


 1권에서 모건의 오른팔인 오스먼드에게 채찍을 맞고 테러토리에서 지구로 돌아 온 잭은 거기서부터 현실 미국의 여정을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곳은 뉴욕 주 서부에 있는 오틀리 주점이다. 잭은 거기서 싸구려 임금을 받으며 열심히 일을 하지만 주인 스모키 업다이크에게서 사람 대접은 조금도 못 받는다. 쥐꼬리만한 임금마저 탈탈 털릴 정도로 착취나 당할 뿐이다. 그 오틀리 주점을 가면서 잭이 보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공장 유리창은 거의 다 깨졌고 시내에도 유리창에 널빤지를 덧대어 놓은 집들이 있었다. 울타리 친 콘크리트 마당에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종이 쓰레기도 펄럭거리고 있었다. 고급주택들도 관리를 제대로 안 한 듯 돌출현관이 주저앉아 있거나 페인트도 여러 군데 벗겨져 있었다. 팔 수도 없는 자동차들로 가득한 중고차 전시장의 주인들일지도 몰랐다.(1권, p. 260)




['부적' 미국판 커버 중 일부]



 한 마디로 몰락할 대로 몰락한 폐허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기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제조업의 몰락으로 버려진 공장들, 실업으로 생존 위기로 내몰린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오틀리 주점에서의 잭 소여는 이런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잭은 거기서 탈출했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는 다른 이들이 배척부터 하는 부랑자가 될 뿐이다. 여기서 그는 테러토리에서 만나 함께 지구로 온 늑대인간 울프와 함께 하는데, 이 울프의 외모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따돌림을 당한다. 이러한 상황은 레이건에 의해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배척을 기조로 삼았던 신보수주의가 자국의 하층민에게 보여준 모습이기도 하다.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미국의 중산층들은 하층민을 위한 복지 예산을 줄이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허클페리 핀의 후예와도 같은 이런 부랑자들은 오직 격리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잭 소여와 울프도 그렇게 된다. 그들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판사에 의해 그런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선라이트'로 보내진다. 오직 복종만을 강요하며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선라이트는 가드너란 인물이 독재하는데, 이 가드너란 인물이 정말로 재밌다.


 소설은 가드너를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잘 생겼으며 언변이 화려하고 기독교 광신도로 묘사한다. 가드너의 특징을 곰곰이 따지다보면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그 때의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 너무 나간 추측 아니냐고? 결코 그렇지 않은 걸. 일단 소설에서 가드너에 대해 말할 때 배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이건 분명 레이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그가 다스리는 곳의 이름은 선라이트다. 아시다시피 레이건은 러스트 벨트가 아니라 선 벨트인 켈리포니아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작가들이 하필이면 선라이트란 이름을 지었던 건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 확실하다. 거기다 레이건은 모건의 오른팔이다. 모건하면 얼른 떠오르는 J. P 모건은 레이건 정부 때 영향력을 가장 많이 확장하였다. 거의 레이건이 모건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건을 기업가로 묘사한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자, 이만하면 가드너의 모델이 사실은 레이건이라는 게 어느 정도 납득되실 것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읽으면 2권은 정말 재밌어진다. 그리고 놀라게 된다. '부적'이 너무나 신랄하게 당대의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에. 그 때의 미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도 전혀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게 주류의 흐름이었다. 선라이트에 수용된 수많은 아이들처럼 격리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부적'은 그것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다. 소설이 레이건을 악하게 묘사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 표현은 애교에 불과하다. 이렇게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는 미국에 대해 정신차리라는 뜻으로 작가들은 잭 소여를 '단독자'로 설정했다. 그는 무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부적이 가진 엄청난 치유와 구원의 힘은 오직 단독자에게만 허락된다. 당시의 미국은 자신들이 어떤 범주를 미리 설정하고 모든 개인을 거기에 따라 정의내리고 분류했지만 작가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잭의 친구 '울프'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울프는 우리가 아는 늑대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자신을 위해 다른 짐승을 함부로 살육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온 힘을 다하여 끝까지 보호하는 자로 나오는 것이다. 그는 그런 헌신을 무엇보다 중요한 명예로 생각하고 결국 그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친다. 이런 울프의 묘사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달리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부적이 가진 힘의 원천은 바로 울프와 같은 태도에 있다는 말 말고는.


[이 역시 '부적' 미국판 커버]



 간략하게 설명한다고 했는데 말이 너무 넘쳤다. '부적' 탓이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책인 것이다(난 지금 울프와 더불어 잭의 소중한 동료가 되는 어릴 적 친구 리처드를 만나게 되는 테이어 학교에 대한 얘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선라이트가 있던 인디애나 주와 더불어 테이어 학교가 있는 일리노이 주는 러스트 벨트를 이루는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므로 테이어 학교를 엘리트를 양성하는 사립 학교로 설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독 거기에만 모건을 따르는 트위너들이 기존의 인간들을 대체하는 장면 묘사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언급하고 싶었지만 글의 길이 때문에 그만뒀다. 하일라이트의 중요한 무대인 아긴코트 호텔도 그렇고. 이 장소가 소설에서 가지는 의미에 비하면 한 문장으로 그친다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이다. 흑흑.) 그 때문인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처럼 다 읽고 나서도 그 내용을 몇 번이나 곱씹게 된다. 그러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피터 스트라우브는 우리에게 생소하니까 예외로 치고 많이 알려진 스티븐 킹은 때로 재미는 있지만 깊이는 없는 작가로 생각하곤 하는데 '부적'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마도 이번에 '부적'이 세롭게 발간된 것은 워너브라더스가 공전의 히트를 친 '그것'에 이어 다음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의 영화로 '부적'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의 많은 팬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다. 나 역시 어떻게 만들어질지 너무나 궁금하다. 특히나 후반에 모건과 잭 소여가 대결하는 장면의 영상 묘사가 정말 기대된다. 그 때의 모건 움직임 때문에 나는 더욱 모건을 자본의 상징이라 여기게 되었다. 자본이야말로 어디에나 순식간에 존재했다가도 홀연히 사라질 수 있으니까. 모건이 J. P 모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생각도 한층 더 굳어졌고.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하튼 바라건대 이 소설에 잔뜩 들어간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 대한 가열찬 비판들도 그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엄청 흥미롭게 될 것 같다. 지금의 미국 또한 그 때의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부적'은 지금 트럼프 정부 미국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여지없이 통용된다. 레이건의 말년을 생각하면 가드너 최후에 대한 묘사는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두 작가 중 누군가 예언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쨌든 추천이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재미라는 감성도, 깊이라는 지성도 다 만족시키는 소설이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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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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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부터 꽤 좋다는 입소문을 많이 들었던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시리즈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그 첫 권인 '다섯 번째 계절'이 마침내 우리나라에도 출간된 것이다. 



 SF 판타지에 속한다고 봐야 할 이 소설은 아마도 지구의 아주 먼 미래가 아닐까 생각되는 '고요' 대지를 배경으로 세 여성의 삶을 담는다. 이 '고요' 대지는 원래는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었던 대륙들이 지각 변동 때문에 어느덧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변동의 여파는 아직도 남아 현재 고요 대지는 늘 불안정한 지각 상태로 거주민들에게 불안을 계속 안겨주고 있는 참이다. 그래서 이들은 무엇보다 땅을 중심에 놓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그들이 쓰는 많은 언어들이 땅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땅의 움직임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조산술'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존재한다. 물론 이 기술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진'이라는 불리는, 그런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들만 '조산술'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조산술을 이롭게 다루려면 높은 수준의 정신 통제력을 필요로 하기에 그런 자제력이 많이 없다고 생각되는 어린 오로진들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고요' 대지의 각 마을(소설에선 '향'이라 불린다.)에선 오로진 아이가 발견되면 중세의 마녀사냥처럼 없애거나 추방한다. 부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서 자신의 자식이 오로진인 걸 알게 되면 아이를 매매하는 자에게 넘기기 일쑤다. '고요'대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제국의 수도 '유메네스'엔 이런 아이들을 모아 조산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펄크럼 오로진'으로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존재한다. 그런 일(어린 오르진들을 유메네스로 데려가는 일)을 도맡아 하는 자들은 '수호자'로 불린다.



 이러한 설정을 깔고 있는 '다섯 번째 계절'은 종말의 태동으로 시작한다.

 한 남자와 스톤 이터('천사' 같은 존재로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 수호 천사 같은 이미지니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땅 밑에서 솟아나는데, 역시 모든 게 대지가 중심인 '고요' 대지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돌을 먹으며 땅속을 공기 속처럼 마음대로 활보한다. 그리고 소설 처음에 등장한 스톤 이터가 그러하듯이 대지를 커다랗게 요동치게 만들 수 있다.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남자의 정체는 마지막에 가서 밝혀진다.)가 유메네스를 붕괴시킨 것이다. 그 뒤, 우리는 에쑨, 다마야, 시엔이란 이름의 세 여성의 삶을 번갈아 보게 된다. 에쑨은 어머니로 최근 자기 아들이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그 사실을 안 그녀의 남편 지자가 아이를 죽인 비극을 겪었다. '오로진'이라면 무조건 적대와 배척만 일삼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센 증오를 느끼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 죽음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오로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자책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남편 지자가 이번엔 자신의 딸 나쑨을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버린 것이다. 에쑨은 딸을 구하기 위해 지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그러다 또 하나의 스톤 이터인,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호야'를 만난다. 뒤이어 등장하는 다마야 또한 집을 떠나게 된다. 오로진이라는 게 밝혀져 마을에 더이상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아동매매자가 자기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자신을 찾아온 것은 유메네스로 데려가려는 '수호자', 샤파였다. 다마야는 유메네스로 가서 펄크럼 오로진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건 시엔이다. 그녀는 펄크럼 오로지이지만 아직 반지가 없는 하급자다.(펄크럼 오로진은 반지의 개수로 상급자와 하급자로 나뉜다.) 그녀는 열 개의 반지를 지닌 상급자 오로진 남자를 찾아간다. 최근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아직 능숙하게 조산술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한 남자 감독관을 붙여준 탓이다. 그녀는 그 남자 오리진, '알라베스터와 함께 유메네스를 떠난다.




 이것으로 이제 이 세 여성의 공통점이 드러난 것 같다. 

 모두가 오로진이라는 것 그리고 다들 길을 떠난다는 것. 두 말할 것도 없이 오로진은 이종적 존재다. 작가 제미신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이종성은 그대로 그녀가 가진 흑인의 인종적 정체성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오로진이 평생 겪는 배척과 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어느 정도 존중을 받으려면 그들이 부여한 교육을 거쳐야만 하는 것도 그대로 백인 중심 사회인 미국에서 흑인이 겪는 경로와 일치한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여성으로 우리 사회의 흑인 여성이 그러하듯이 인종과 성별에 따른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이러한 여성이 가지는 열악한 상황은 에쑨이 남편이 아들을 무참히 죽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나 펄크럼 오로진인 시엔이 오로지 번식을 위해 사랑도 없는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고요의 대지는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차별과 억압이 들끓는 곳이었던 거다. 그 고요 대지에 군림하는 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어떻게 하면 고요의 대지를 이름대로 고요하게 만드는가다. 땅 아래에 존재하는 저항과 변화의 움직임을 억누르는 것. 이건 그대로 그들이 차별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받는 차별에 순종하도록 그들의 입을 막고 자유를 위한 몸짓을 결박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정한 자리에 모두가 가만히 앉아 자신들이 정한 운명을 오롯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설정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그저 흔한 SF 판타지로 보지 않게 한다. 여기엔 인종과 성별에 대한 이중 차별이 횡행하는 지금 사회에 대한 뭉근한 비판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가진 또 하나의 공통점인, '길 위에 존재'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다들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물론 판타지라는 장르에서 길을 떠난다는 건 거의 보편적 설정이긴 하다. 하지만 그 여정의 의미가 '다섯 번째 계절'에서 더욱 두드려져 보이는 건, 설정 자체가 근본적으로 땅, 대지라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땅하면 얼른 떠오르는 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고정적인 이미지다. 이렇게 모든 게 제자리에 들러붙은 그 곳에서 세 여성들은 움직이고 있다. 그들의 떠남이 더욱 대비되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대지란 또 어떤 곳인가? 바로 가이아 여신을 뜻하는 곳으로 여성의 영역이자 여성의 상징이었다. 스톤이터란 천사와 비슷한 존재조차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오듯, 하늘이 아니라 땅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이 소설이 흔히 말하는 여성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굳이 여성주의에 국한해 이 소설을 볼 필요는 없다. 사실 그것을 넘어 차별을 받는, 모든 존재들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원래 그런 여성의 영토였던 것이 지금은 남성들에게 지배되어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고요의 대지를 그리 불안에 떨게 만드는 '흔들'(소설에서 지진을 가리키는 말이다.)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사실 세 여성의 여정 또한 이런 '흔들'을 너무 닮았다. 그 떠남으로 인해 그녀들 모두 새로운 사람과 경험으로써 유메네스가 부여한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렇게 확고한 주제 의식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작가가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고 끌어나간다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 온다. 그런만큼 설정이나 구성 상의 빈틈은 없으며 모든 게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그래서 나중에 만나는 반전 또한 놀라운 것이다.(사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그 전에 먼저 알아차렸겠지만.) 그런 면에서 나는 주로 이 작품이 가진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걸 제쳐두고서라도 이야기가 여간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무척 재밌는 작품이다. 역시 입소문 대로 오랜만에 아주 기대가 되는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반전과 함께 또 다른 떡밥 하나가 던져졌는데, 그것 역시 오랫동안 여성의 상징인 존재라 그것과 관련된 뒷 얘기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에 이어 다시 한 번 휴고상을 수상한,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오벨리스크 관문'이 어서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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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reau 2019-05-0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 여성. 공통점. 이런 어휘들을 선택하신 까닭은 스포일하지 않으려는 의도이신 것이지요?

ICE-9 2019-05-04 01:00   좋아요 0 | URL
네, 그렇습니다^^
 
페어리랜드 5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캐서린 M. 밸런트 지음, 아나 후안 그림, 김승욱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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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네뷸라 수상작(네뷸라 상 중에는 'Andre Norton Award'라고 해서 영 어덜트를 대상으로 한 과학 소설과 판타지 소설에 주는 상이 있는데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상을 수상했습니다.)이기도 한 캐서린 M 밸런트의 '페어리랜드'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드디어 나왔네요.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라는 부제를 달고 말이죠. 2011년, 클라우드 펀딩의 일환으로 온라인에서 연재되었던 이 소설이 5년이 지나 드디어 완결된 것입니다. 캐서린 M 밸런트는 이 소설을 시작할 때 이미 '페어리랜드'가 다섯 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는데, 결국 그 약속을 지키고 말았네요.


 저자 자신이 고백했듯이, 원래 이 소설은 별 기대없이 시작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 셉템버(9월)라는 열 두살 꼬마의 요정 나라 여행기가 오랜 시간 이어졌을 뿐만아니라 다섯 권 모두 멀리 있는 우리나라마저 번역 소개될 정도로 커다란 인기와 좋은 평가를 얻었으니 아무래도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다섯번째 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페어리랜드'와 만났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권만으르도 왜 '페어리랜드'가 그만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 좀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일단 굉장이 독특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판타지 소설을 읽어보셨더라도 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페어리랜드' 같은 소설은 절대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흔히 판타지 소설은 현실 세계에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일들이 가능한 세계를 묘사하는 것으로 정의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 '페어리랜드'는 진정한 판타지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엔 정말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소금 한 알갱이 보다도 더 안 나오거든요. 당신의 상상으로 현실의 모든 것을 마음껏 변화시켜 보세요. 현실에선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모조리 그려 보세요. 그런 세계가 바로 '페어리랜드'입니다. 한 마디로 'ALL THAT FANTASY!'인 것이죠. 그래서 저 역시 그랬습니다만, 처음엔 좀 적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의 문장마저 현실에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들이 간단히 섞이고 카멜레온처럼 변화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따라 잡는데 애를 좀 먹게 되더군요. 그러나 차츰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페어리랜드'의 스타일에 점차 적응하고 보니 무척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매혹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제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겠군요. 여기엔 뭔가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정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유를 꿈꿉니다만 그것을 실현하긴 어렵죠. 살다 보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일에 얽매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 자체가 알고보면 그런 중력의 산물이죠. 거기에 진정한 나는 없습니다. 오직 사회화를 통해 사회와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동화될 수 있도록 사회가 형성한 정체성의 '나'가 있을 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언젠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이죠. 라캉이 왜 이렇게 말했나 하면 그는 생각 자체를 언어의 산물로 보았는데 그 언어라는 게 진정한 자아를 사회의 식민지로 만드는 대표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아닌 것이죠.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지게 되는 욕망 역시 이러한 언어의 연장선 상에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욕망하기 보다는 남들이 다들 좋아하는 것을 욕망하게 된다고 라캉은 말했습니다. 지금의 우리를 지배하는 많은 돈, 좋은 집, 커다란 차, 어여쁜 이성에 대한 욕망은 사실 우리 스스로 형성한 고유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사회에 잘 순응하도록 사회가 주입한 욕망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사회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 그것을 저는 중력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력에, 우리가 피로를 느끼면서도 기꺼이 끌려가는 것은 많은 것들이 그 중력을 정당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가 살면서 흔히 만나게 되는 온갖 학문이 그러하죠. 물리학, 생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등등. 이처럼 학문으로 촘촘하게 만들어진 그물망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우리는 더욱 사회가 가하는 중력을 진리라 여기고 행여나 거기서 달아날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한채 진정한 나가 아니라 남과 닮은 나가 되기 위해 오늘도 기를 쓰고 더 잘 돌아가는 사회의 톱니바퀴로 있는 것입니다.


 '페어리랜드'는 바로 그 중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선사합니다.

 불가능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이죠. 이성이 만든 규칙 따위 여기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여도 자연 법칙이 되고 절대 명제가 되며 실정법이 되기 때문이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자유 분방하다는 건 아닙니다. 여기의 이야기는 명확한 주제에 따라 일관된 흐름을 엄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 주된 줄기는 부제에 나왔든 '경주(race)'입니다. 셉템버는 여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도전하는 많은 존재들과 경주를 해야 하죠. 이 경주조차 제멋대로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 있는 경로도 없고 내가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알 도리도 없으며 내가 가진 탈것에 기대기도 어렵고 경주를 주관하는 심판이 내키는 대로 경주자의 자리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이토록 자유분방한 경주에서 셉템버가 승리하는 길을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는 것. 이제는 왜 부제에 '심장'이 있는지 아시겠죠? 심장과 경주. 이것이 바로 이번 책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경주를 하면서 셉템버가 거쳐가는 곳이 의미심장해요. 셉템버는 도서관이나 바다 등을 지나가게 되는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빼앗기만 하고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을 다스리는 그리니치라는 놋쇠 공은 이런 말을 하죠.


 시간은 모두 못됐어. 가져가기만 하고 돌려주지는 않으니까.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때는 쏜살같이 흐르고 쏜살같이 흘렀으면 싶을 때는 굼뱅이처럼 기어가지. 시간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뚱하니 흘러가. 수천 번 방향을 꺾어도 되련만. 일단 시간이 가져간 건 다시는 돌려받을 수 없어.(p. 165)


 그리고 원래 바다 요정인 세터데이(나중에 셉템버의 연인이 되는 소년이죠.)는 자신의 할머니 바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따뜻한 물살이나 상냥한 고래 같은 건 아니야. 나이가 아주 많아서 자기만의 방식이 굳어져 있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집을 관리하지. 바다는 모든 걸 쌓아두기만 하거든. 파도가 가 닿을 수 있는 모든 것을 훔쳐 와. 그리고 동전 하나라도 다시 내놓는 법이 없지.(p. 209)


 시간과 바다. 이렇게 둘은 가지기만 하고 내주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둘 모두 다른 것을 끌어당기기만 할 뿐, 자유롭게 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중력과 닮아있는 것입니다. 셉템버는 그런 곳을 횡단하며 심장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심장이란 존재가 참 특이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일상 속에서 생각하는 그런 심장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장은 태초의 모습을 뜻합니다. 소설 속 거대한 도서관은 원래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거대한 도서관을 꿈꿨기에 그런 도서관이 된 것이죠. 그 도서관의 심장은 오두막입니다. '페어리랜드'의 심장 역시 태초의 페어리랜드의 모습인 것이죠. 이것은 그대로 사회화 되기 전의 개인이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과 닮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셉템버는 현실 사회처럼 중력을 발산하는 존재들이 은폐한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 다니는 것이죠. 이러니 제가 라캉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죠. '페어리랜드'를 두고 철학 동화라고 평가하기도 하던데, 이것으로 저도 그 말을 납득했습니다.


 여지없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소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엔 융합의 움직임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의 자유는 이분법적 사고에서의 자유이기도 합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는 천방지축과 진지함, 미성숙과 성숙, 실제와 환상, 책임과 방종이 쉽사리 구분되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내세우기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는 일 따위, 이 소설에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경주에 임하는 셉템버의 상황에서 드러납니다. 셉템버는 한 편으로 여왕이 되어 자신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철부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지만 한 편으로는 왕관이 주는 책임의 무게에서 자유롭고도 싶습니다. 그 왕관의 무게가 무거워질 때면 셉템버는 자신이 떠나온 현실 세계의 집을 그리워 합니다. 그런데 그 집으로 쉽게 돌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결투에서 지는 것입니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경주를 하는 경주자들이 어쩌다 만나게 되면 무조건 결투해야 하는 게 경주 규칙인데, 그 결투에서 지면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이 정말 그립다면 셉템버는 결투에서 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심장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굉장히 아이러니 합니다. 페어리랜드는 자유이고, 현실 세계는 의무입니다. 원래 셉템버가 현실 세계를 떠나올 때 세계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고 있었죠. 그만큼 현실 세계는 중압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셉템버를 '페어리랜드'로 데려온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바람이 가지는 의미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겠지요. 그런데 지금은 페어리랜드와 현실이 가지는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현재의 셉템버에게 '페어리랜드'는 의무이고, 현실 세계는 자유입니다. 이 작품에선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를 소설은 세터데이와 셉템버의 관계를 통해 넌지시 일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확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무한한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삶의 속성이 천변만화(千變萬化)이기에 우리는 고정된 의미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고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일 필요도 없으며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융합에 있어서도 거리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든 태도를 하나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아마도 자유가 되겠죠.. 자유, 그건 무엇보다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페어리랜드', 그 곳은 세터데이에게 시간이 그러하듯이 자유의 대지입니다. 펼쳐보시면 산에서 맞는 아침의 안개처럼 오롯이 들어찬 자유의 운무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동화적인 외양을 가지고 있지만 한 켠엔 깊은 철학적 사유도 슬쩍 감춰둔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어릴 때 소풍 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읽을수도 있더군요. 찾아냈을 때의 기쁨도 아울러. 특히 환상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께, 정말로 독특한 환상 소설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페어리랜드'를 살짝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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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퀸 : 적혈의 여왕 1 레드 퀸
빅토리아 애비야드 지음, 김은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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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문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영어덜트 판타지 소설에도 관심이 많다. 이번에 나온 '레드 퀸'도 거기에 속한다. 이 책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마존에서 꽤 높은 순위를 오래도록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더구나 이제 갓 25살이 된 작가의 데뷔작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젊은 여성의 데뷔작이 이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니 얼른 '트와일라잇'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떠오른다. '레드 퀸'도 '트와일라잇'처럼 3부작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된다. 과연 빅토리아 애비야드는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가 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쨌든 1부가 엄청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영화화 작업도 한창 진행중이라고 하니까. 뒤이은 2부와 3부가 성공하고 영화까지 흥행한다면 애비야드를 제2의 스테프니 메이어라고 불러도 누구든 부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레드 퀸'이 가진 설정의 얼개는 헝거 게임과 유사하다. 일단 계급의 격차가 현저한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거기다 제목에 '퀸'이라고 나와 있듯이, 열악한 계급의 보잘 것 없었던 한 소녀가 결국 그 디스토피아를 허물게 된다. 여기서 벌써 식상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이런 설정은 헝거 게임의 커다란 성공과 더불어 이 장르의 대세가 되어 버렸다. 이후, 얼마나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헝거 게임' 설정을 답습했던가? 솔직히 말해 '지긋지긋한 판타지 소설들''이라는 '커커스 리뷰의 표현은 결코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애비야드는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설정을 그대로 가져왔다. 신물이 날만큼 흔한 설정을 가져왔다는 것은 알고도 가져왔다는 것일테고 그렇다는 것은 그 식상함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신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다. 하지만 그것도 다 독자가 식상함을 느끼지 않고 소설을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할 때라야 예뻐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 자신감마저 마이너스로 채점될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자가 소설 끝까지 흥미를 가지도록 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데, 그것을 위해 애비야드는 변화를 추구했다.


 일단 소설이 담은 세계가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비록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헝거 게임과 같은 것은 아니다. 헝거 게임은 근대의 독재 국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드 퀸'은 중세의 전제 군주 나라에 가깝다. 왕이 있고, 왕과 함께 소수의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 그들을 특별히 '은혈(silver blood)'이라 부른다. 서양 속담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태생이 아주 좋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유행어가 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은 물론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은 아주 옛날, 그러니까 중세 때  이미 존재했다. 하필이면 '은수저'가 된 것은 그것이  당시 귀족들에게 최고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애비야드는 이 은수저의 의미 그대로 은혈을 쓰고 있다. 그들은 특권 계층이며 막강한 힘으로 다수의 약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한다. '은혈'은 비유가 아니다. 실제 그들의 피는 은색이다. 그리고 그 피 때문인지 그들은 영화 '엑스맨'의 뮤턴트들 처럼 초능력을 쓸 수 있다.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고, 손을 바위처럼 만들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동물들을 자기 뜻대로 부릴 수도 있고 식물을 순식간에 자라나게 한다거나 상처도 얼른 치유할 수 있다. 하지만 엑스맨과 똑같이 한 사람이 한 능력만 쓸 수 있다. 그런 능력으로 '적혈(red blood)'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다수의 민중을 이루고 있는 적혈은 붉은 피의 소유자들로 아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의 세계는 엑스맨의 매그니토가 그토록 바랐던 세계이기도 하다. 뮤턴트가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는. 이렇게 사람도 달라졌다.


 '레드 퀸'의 세계는 오직 '피'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모든 것이 타고난 혈통으로 결정되던 중세와 흡사하다. 이것이 '레드 퀸'만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대부분 헝거 게임 류 판타지 소설들은 근대 국가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 퀸'은 중세 왕국이 모델인 것이다.그것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 엄격했던 중세만큼이나 심한 소설 속 세계의 계급 간 차별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보면, '레드 퀸', 즉 적혈의 여왕이니 우리의 주인공은 적혈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맞다. 그녀는 적혈이다. 이름은 메어 배로우(Mare Barrow). 작가는 주인공의 성을 배로우(Barrow)로 하여, 그녀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배로우(Barrow)란 성이 낯익다면 당신도 메리 J 노튼의 'The Borrowers(마루 밑 버로우즈)'를 분명 읽은 것이다. 이 성은 바로 거기서 따온 것이다. 인간에게 기생하여 마루 밑에서 살던 조그만 인간 버로우즈. 메어의 처지도 그들만큼이나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지만 모두 전쟁터로 끌려가고 말았다. 오직 적혈이라는 이유로. 은혈이 인정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 적혈들은 18세가 되면 무조건 전쟁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어야 한다. 두 명의 오빠가 이미 죽었다. 아버지는 불구로, 메어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소매치기를 한다. 결국 18세가 되어버린 메어는 직업이 없어서 군대로 징집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난 뒤, 은혈의 왕궁으로 갑자기 소환되어 거기서 일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이 바로 왕자 칼이었고 그 때, 메어는 소년에게 신세 한탄을 했는데 그 때문에 왕궁에서 일하게 해 준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칼의 신부를 뽑는 이벤트가 열리게 되고 왕자의 신부가 되고픈 은혈 가문들의 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뽐내게 되는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 그만 메어가 거기에 휘말린다. 목숨이 위험해지려는 찰라, 메어는 놀랍게도 은혈만 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을 구한다. 그녀가 발휘한 것은 전기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능력. 압도적인 능력을 시전한 탓에 메어는 삽시간에 왕자비로 간택받는다. 엘라라 왕비가 적혈이 초능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무마하기 위해 메어를 유명한 은혈 가문의 잃어버린 자식으로 꾸미고 사람들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아예 둘째 왕자 메이븐의 짝으로 선포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만일 적혈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메어뿐 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이제 메어는 생존을 위해 은혈인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은혈만이 가득한 그 곳에서 유일한 적혈인 것도 외롭지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감춰야 한다는 것이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은혈의 적혈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보면서도 무시하거나 은혈 편을 들어야 하는 나날이 계속된다. 유일하게 적혈인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알고 있는 칼과 약혼자인 메이븐, 그리고 그녀의 스승이자 칼의 외삼촌 줄리언 뿐이다. 칼의 어머니는 왕의 첫째 왕비였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이유로 사망했다. 그녀의 동생 줄리언은 정략적인 이유로 누나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은혈 체제를 증오한다. 그래서 메어의 정체를 알고도 기꺼이 돕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완고한 성격 탓에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지만 메어를 마음에 두고 있다. 물론 메이븐도 그러하다. 어머니가 억지로 짝을 지어주었지만 그 역시 현재 체제는 문제가 많다고 여겨 적혈을 도와주고자 하는데 그러다 서로 좋아하게 된다. 이렇게 형제를 두고 메어는 삼각 관계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적혈이 이런 체제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조직을 만들어 저항한다. 그것이 바로 '진홍의 군대'다. 메이븐은 적혈의 혁명을 위해 그들과 협력한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엘라라 여왕의 감시 아래에서 메어는 자신이 적혈이라는 것을 숨겨야 할  뿐 아니라 적혈의 혁명까지 도모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게 된다.


 이상이 '레드 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라 할 수 있다. 세계와 사람이 중세와 유사하게 바뀌고 정체성의 연기가 가져다 주는, 언제 들킬 지 모른다는 서스펜스와 형제 사이의 로맨스가 강조되었다. 이것이 애비야드가 꾀한 변화였는데, 어쩌면 이마저도 '뭐, 그리 참신한 변화는 아닌데?'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작 그녀의 자신감은 필력 혹은 이야기의 연출력에서 나왔다고 해야할 것 같다. 진부한 소재들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도록 소설의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하게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급 속에서 살아가는 메어의 고독과 두려움 그리고 적혈의 부조리한 처지에 대한 자각과 행동에 대한 결심들이 잘 묘사되어 있고 초능력을 통한 대결 장면도 인상적이며(아레나 같은 곳에서 능력들을 겨루는데, 그래서 리들리 스콧의 '글라디에이터'가 생각났다.영화에선 꽤나 화려하게 연출되지 않을까 싶다.) 후반의 반전은 놀라웠다. 무자비한 장면을 연출해야 할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일단 재미 면에서 왜 소설이 그만큼 성공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깊이 면에서도 날로 계급적 격차가 심해져가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소설이 잘 반영하여 왜 점점 가속화되어가는 그런 경향에 대해 우리가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확실히 2부와 3부를 기다리게 만든다. 아직 풀리지 않은 떡밥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1부라서 캐릭터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탓이라 생각되니 그 점은 2부와 3부를 다 읽고나서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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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더스(Enders)'는 리사 프라이스의 디스토피아 소설 '스타터스'의 속편이다. '스타터스'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아마도 10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전쟁에서 사용된 포자 형태의 생물학 병기로 인해 중장년들('스타터스' 세계에서는 '미들'이라 부른다.)이 모조리 죽고 오로지 미성년자와 노인 밖에는 없는 세상이다. 그 세계에서는 미성년자를 '스타터(STARTER)'로 노인을 '엔더(ENDER)'로 부른다. 이름의 의미는 단순하다. 이제 막 삶을 시작(START)하는 나이이기에 스타터고, 인생의 종막(END)에 접어들었기에 엔더인 것이다.



 중장년들이 없어졌다는 게 왜 최악이야 하고 궁금하실 분들이 있을텐데 물론 그것이 최악은 아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미성년자들에게 부모가 될 중장년들이 모두 사망했으니 당연하게도 도시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성년자들이 엄청 많다. 이들은 홀로 생존해나가야 하는데 근로권을 비롯하여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권리가 거의 없는 편이다. 구걸과 절도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부와 권력은 모조리 노인들 차지고 그들의 보호를 받는 스타터들만이 풍족한 삶을 산다. 그 세계에서 미성년자는 노인보다 우월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젊음'이다. 그들을 부르는 '스타터'라는 말 자체에 담겨 있듯이 '엔더'라 불리는 노인에 비해 월등하게 강한 육체에 담긴 싱그러운 생명력이 그들이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엔더들이 젊은 그들의 몸을 차지하기 위하여 '바디 뱅크'라는 것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스타터의 두뇌에 칩을 넣어 그 칩으로 엔더의 의식과 링크하여 엔더가 스타터의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다. 얼른 이해가 안된다면 영화 '아바타'를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주로 10대 청소년들의 육체가 그 대상이 되는데 그렇게 노인의 의식에 지배된 청소년을 '렌터(RENTER)'라고 한다. 그렇게 틀린 명칭은 아니다. 정말로 렌터가 된 청소년들의 육체는 렌트카와 다를 바 없으니까. 살인을 제외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엔더는 노인의 육체로는 못하는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와 약과 술 그리고 섹스로 넘쳐나는 문란하기 그지 없는 환락을 즐긴다. 그것을 두고 소설에서 누군가 비아냥거리듯 말한다. 렌터가 된 엔더들은 렌트한 육체보다 자신의 차를 더 소중히 한다고. 이 말 그대로다.


 전작 '스타터스'는 주인공인 10대 여성 '켈리'가 아픈 동생 '타일러'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바디 뱅크'에게 육체를 대여했다가 전체 스타터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거대한 음모에 휩쓸리게 되는 이야기였다. 그 모든 음모의 배후에는 '올드맨'이란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결국 잡히지 않고 끝난다. '엔더스'는 바로 그 올드맨과 켈리가 치르는 마지막 결전이다.


 일단 되도록 '엔더스'를 읽기 전에 '스타터스'를 먼저 읽으시라고 간곡하게 부탁드리고 싶다. '엔더스'의 이야기 자체로는 전작을 읽지 않아도 따라가는데 무리가 없으나 이 '엔더스'에서 '스타터스'의 놀라운 반전들이 다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읽으면 '스타터스'가 지닌 뛰어난 서스펜스의 감칠맛이 휘발되기 때문이다. '스타터스'는 정말 재밌다. 신체 대여 장르가 주는 정체성의 의혹과 반전을 잘 살려낸 작품으로 끝까지 뒷 페이지를 넘기는 흥미를 유지한다. 아마도 마지막 반전에선 꽤나 놀라게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엔더스'에게도 그만한 반전이 있다. 작가 리사 프라이스는 렌트된 육체의 진짜 정체성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능수능란하게 독자의 허를 찔러 반전을 만드는데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 같다. 도입부'는 '엔더스'가 더 굉장하다. 켈리가 우연히 예전에 알던 렌터를 만나 뒤따라갔는데 그만 눈 앞에서 그 렌터가 말 그대로 폭발해 버린 것이다. 알고보니 그 폭발은 올드맨이 일으킨 것이었고 그는 렌터의 뇌 속에 이식된 칩을 마음대로 폭발시킬 수 있었다. 이제 켈리는 자기뿐만 아니라 똑같이 칩을 이식당한 남자 친구 마이클과 동생 타일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올드맨을 찾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올드맨이야말로 바라는 것이었다. 그도 켈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스타터스'에서 켈리의 칩은 모종의 개조를 당했다. 덕분에 한 명만 접속할 수 있었던 칩이 여러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칩이 되어 버렸다. 다수의 엔더들이 하나의 육체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드맨은 거기서 훌륭한 도구 혹은 병기로서의 효용성을 깨닫는다. 하나의 육체를 여러 명의 전문가가 동시에 접속하여 일한다면 그 육체는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 올드맨은 그 칩을 필요로 한다. 켈리의 뇌에서 떼내어 분석하고 연구해서 대량 생산할 수 있도록. 이렇게 켈리와 올드맨은 누군가 하나 떨어져야만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며 다가서고 있다.


 '렌트 가능한 신체'는 SF의 고전적 아이디어 중의 하나다. 내 기억으로 그 시초는 아마도 로버트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일 것이다.



1959년에 나온 이 소설은 영혼과 내세가 정밀하게 규명되고 그리하여 영혼 이식 기술이 발달한 22세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서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부유한 자들의 불사를 위해 과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들을 타임 슬립시켜선 그들의 몸을 부유한 자들에게 영구 임대한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당대 자본주의에 대한 선명한 비판이 되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와 더욱 가속화된 노동 착취 상태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육체 그리고 정신만은 자기 것으로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셰클리의 '불사판매 주식회사'는 그마저도 자본주의는 착취할 것이라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몹시도 불길한 예언이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이 실현되었음을 보고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에서 말이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가 다름 아니라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을 자본가처럼 만드는 것이라 간파했다. 자본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정말로 이제 사람들은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고 노동의 권리 보다 기업의 이익을 더 칭송하며 복지 보다 경쟁을 더 선호한다(물론 복지 역시도 원래는 노동 계급의 연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온 것이었지만.) 부자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현재 가정과 정부는 빚더미에 올라 앉았는데도 편파적인 기업 절세로 대기업의 사내 보유액은 9백조에 달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황과 살인적인 고용란에도 대기업은 조금의 희생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말도 안되는 임금피크제 같은 것으로 노동자의 임금만 어떻게든 줄이려 한다. 그런 상황인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의 일이라는 듯이 강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으니 셰클리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기다 그것을 획책하고 있는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연령층을 감안한다면 '스타터스'와 '엔더스'의 이야기도 그저 공상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고령화 사회'는 소수의 젋은 세대가 다수의 노인 세대를 부양하게 된다.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의료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평균 수명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니 젊은 세대에 부과되는 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면 젊은 세대들이 과연 자신의 육체를 자기의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싶다. 육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부양에 따르는 온갖 사회적 의무의 쇠사슬로 칭칭 감겨져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스타터스'와 '엔더스'도 '불사판매 주식회사'처럼 예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점차 진전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 그만큼 전면화 될 세대 착취를 우려하여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활로를 이제라도 찾자는 뜻에서 한 편의 소설로 형상화 된 예언. 너무 앞서 나간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 아무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도 가열차게 '고령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데다 다수의 노년들이 렌터가 된 엔더의 모습을 보이고 있으므로. '스타터스'와 '엔더스'는 실은 바로 그 노년들에게 읽히고 싶은 작품이다. 암울하기 그지 없는 미래를 앞둔 젊은 세대들을 부디 좀 헤아려 달라는 간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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