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김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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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스티븐 킹의 '부적'을 읽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80년대의 대표작. 예전에 나왔으나 절판되어 뒤늦게 스티븐 킹의 소설들을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못 보게 되어 아쉬음이 컸었는데 이렇게 황금가지에서 새롭게 발간한 것이다. 표지 디자인도 모두 2권을 오렌지와 하얀색으로 대비시켰는데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물론 '부적'은 스티븐 킹 혼자 쓴 것은 아니고 '고스트 스토리'로 유명한 작가 피터 스트라우브와 같이 썼다. 스티븐 킹이 다른 작가와 협업을 한 것은 이 작품이 처음. 함께 쓰게 된 사연은 이렇다고 한다. 1977년, 스티븐 킹은 가족을 데리고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 간 적이 있다. 거기서 피터 스트라우브 부부를 처음 만났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곧 아주 친해졌고 가족끼리 자주 만나 놀았다고 한다. '부적'에 주인공 잭 가족과 잭 아버지 친구인 모건 가족이 여름마다 시브룩 섬에서 함께 어울렸다고 나오는데, 이건 스티븐 킹과 피터 스트라우브의 가족이 서로 어울려 놀았던 것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러나 함께 '부적'을 쓰자는 이야기는 런던에서 나오지 않았다. 석 달 후 스티븐 킹 가족은 다시 미국으로 이사했는데, 이번엔 피터 스트라우브가 스티븐 킹을 찾아서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두 작가의 우정이 얼마나 커졌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 미국에서 둘은 같이 '부적'을 쓰기로 한다.



 

[어쩌면 너무나 친해서 서로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기에

 '트위너'란 존재를 상상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부적'은 '다크 타워'와 더불어 스티븐 킹의 가장 대표적인 환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둘이 비슷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크 타워'도 현실과 평행 차원의 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이야기인데, '부적' 역시 그러하니까.(어쩌면 그래서 스티븐 킹은 이 둘의 세계를 합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밝히겠지만 '부적'에는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가 등장하기도 한다.) '부적'에는 '테러토리'라는 세계가 등장한다. 지구와 다른 차원의 곳으로 여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 중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소다. 거기엔 평행 차원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지구에 사는 인간들과 똑같은 인간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이들을 '트위너'라 부른다. 쉽게 말해, 우리와 똑같지만 VERSION만 다른, 일종의 복사본인 것이다.(평행세계론이 그러하듯이, 지구의 인간과 트위너는 운명을 같이 한다. 어떤 때는 무의식적으로 둘이 같은 말을 하기도 하는데, 당신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면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말하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아주 희박한 것인데 테러토리의 트위너가 죽었어도 아무 영향을 안 받는 존재가 있는 것이다. 잭 소여가 그러하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이건 결말에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 된다. 왜 아무나 부적을 가질 수 없는 지와 관련하여) 당연하게도 아무나 이동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그럴 수 있는데 어떤 이는 그 능력을 이용해 두 세계만이 아니라 평행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부리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 잭 소여도 그 중 하나다. 

 소설의 시작에서 그의 삶은 외롭고 힘들다. 잭 소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아빠와 엄마인데, 아빠는 죽고 엄마는 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잭은 지금 엄마와 아르카디아 해변에 있는 알람브라 호텔(스티븐 킹의 소설 '토미노커'에도 나오는 곳이다.)에 있다. 엄마가 데리고 왔는데 그 이유는 아빠의 친구이자 동업자인 모건이 엄마에게 남편이 세운 회사 경영권을 포기하라고 무섭게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중고 속에서 우울의 밀물에 쓸려다니기만 하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스피디 파커란 흑인 노인(바로 이 사람이 '다크 타워의 주인공 건슬링어의 트위너다.)을 만난다. 잭을 한사코 '방랑자 잭'이라 부르는 그 노인은 '테러토리'와 엄마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들려주며 엄마를 구하고 싶으면 '테러토리'로 건너 가 부적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부적이란 엄청난 힘을 가진 물건으로, 이 '부적' 때문에 불순한 무리들이 평행 세계 전체 정복이라는 야욕을 가지는 것이다.



[미국 판 인물 소개 삽화로 나온 잭 소여의 일러스트]




 이러한 이동을 위해 스피디 노인은 암녹색 액체가 든 병을 준다. 이걸 마시면 순식간에 테러토리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이 액체 때문에 차원 이동 능력이 없는 트위너나 일반인도 테러토리와 지구 사이를 왕래할 수 있다. 그래서 테러토리의 트위너들이 모건의 명령을 받아 잭을 잡기 위해 지구로 오기도 한다. 그 때 그들은 꼭 지구에 있는 자신의 분신들에 빙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노인은 말한다. 뛰어난 사람은 액체의 도움 없이 마음의 힘만으로도 갈 수 있지만. 처음 이걸 읽었을 땐 복선인 줄 몰랐다. 놀랍게도 정말 그런 걸 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가 바로 잭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아빠의 친구, 모건. 둘은 '테러토리'를 알고 있었고 자유로이 왕래했다. 모건의 '테러토리' 트위너는 여왕마저 위협할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 그는 여왕이 아주 깊은 병을 앓자 그걸 기회로 테러토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까 잭의 '테러토리'에서의 여정도 몹시 위험한 것이다. 모건과 그의 부하들 트위너가 '테로토리'를 장악한 상태이니. 물론 저자를 생각한다면 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공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이름 아래 핑크 만발  폭신폭신한 로드 무비를 기대했단 말인가!


 곳곳에서 불길함과 음산함 그리고 죽음의 위햡이 도사리는 여정은 잭에겐 미안하지만 '테러토리'만의 것은 아니다. 지구의 여행은 그보다 더 비참하고 음험하다. 때로 잭은 지구에서 테러토리로 탈출하기도 한다. 우연히 히치하이킹을 한 차의 운전자가 소아성애자로 밝혀지는가 하면 고작 12살의 몸으로 오랫동안(잭이 작품 속에서 집을 떠나 여행하는 기간은 무려 6개월이다!) 정처없이 방황하다 보니 경찰에게 부랑자로 체포 당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2권에서 우리는 더욱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있어 미국이란 나라가 '테러토리' 보다 더 가혹하기만 한 곳이란 걸. '부적'에서 잭 소여를 영혼의 한 방울까지 끝도 없이 착취(오틀리 주점)할 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를 정도로 내모는 곳(선라이트)은 다름아닌 미국인 것이다.


 이런 점에 눈길이 가다보면 이 책이 발표된 연도가 자못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발표된 것은 1984년. 한 마디로 80년대 초에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의식하면 소설의 인물들과 여러 장치들이 꽤 재미난 의미를 갖는다. 뉴잉글랜드에서 켈리포니아에 이르는 현실 미국 속 잭의 행로는 더욱 그렇다. 어떤 의미가 나타나기에 사족이 이렇게 긴가 하고 타박하실 분들을 위해 미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렇다. '부적'은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이뤄진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신랄하고 무자비한 비판이다. 그 행정부를 낳은 신보수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공격이다. '부적'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다. 그러한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그 속에 거침없는 현실 사회 비판의 칼날을 간직하고 있다. 그가 왜 주인공에게 톰 소여의 이름과 같은 잭 소여란 이름을 주었는가 그리고 왜 여정을 그 톰 소여가 나왔던 '허클베리 핀'의 여정을 오마쥬하듯 비슷하게 형성했는가 하는 것도 다 그와 관련있다. 이 작품을 그저 재미를 위한 대중 소설로 생각하고 허투루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는 설정에 꽤 공을 들인 작품이다. 공포 소설의 두 대가가 협력하여 제대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소설인 것이다.


[84년 초판본 커버. 아마도 부적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듯.]



 왜 이리 호들갑인가? 또 나무라실 것 같다. 이제 그 이유를 당신의 시간을 절약한다는 의미에서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보겠다.


 80년대 초반 미국 경제는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그동안 미국 경제의 중추를 떠받치던 러스트 벨트가 몰락하고 플로리다와 켈리포니아가 새로운 강자로 부흥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점점 성장해 나가는 그들을 선 벨트(SUN BELT)라 불렀다. 그 때의 켈리포니아 인구는 뉴욕의 인구를 초월할 정도로 컸었다. 이제 아셨을 것이다. 잭의 여정은 이 변화의 흐름을 그대로 답보하고 있다는 것을. 잭 소여는 그렇게 러스트 벨트에서 선 벨트로 나아가는 것이다. 잭 소여가 부적을 얻기 위한 최종 목적지 아긴코트 호텔은 바로 켈리포니아에 있다.


 1권에서 모건의 오른팔인 오스먼드에게 채찍을 맞고 테러토리에서 지구로 돌아 온 잭은 거기서부터 현실 미국의 여정을 시작한다. 처음 만나는 곳은 뉴욕 주 서부에 있는 오틀리 주점이다. 잭은 거기서 싸구려 임금을 받으며 열심히 일을 하지만 주인 스모키 업다이크에게서 사람 대접은 조금도 못 받는다. 쥐꼬리만한 임금마저 탈탈 털릴 정도로 착취나 당할 뿐이다. 그 오틀리 주점을 가면서 잭이 보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공장 유리창은 거의 다 깨졌고 시내에도 유리창에 널빤지를 덧대어 놓은 집들이 있었다. 울타리 친 콘크리트 마당에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종이 쓰레기도 펄럭거리고 있었다. 고급주택들도 관리를 제대로 안 한 듯 돌출현관이 주저앉아 있거나 페인트도 여러 군데 벗겨져 있었다. 팔 수도 없는 자동차들로 가득한 중고차 전시장의 주인들일지도 몰랐다.(1권, p. 260)




['부적' 미국판 커버 중 일부]



 한 마디로 몰락할 대로 몰락한 폐허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시기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제조업의 몰락으로 버려진 공장들, 실업으로 생존 위기로 내몰린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오틀리 주점에서의 잭 소여는 이런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있다. 잭은 거기서 탈출했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는 다른 이들이 배척부터 하는 부랑자가 될 뿐이다. 여기서 그는 테러토리에서 만나 함께 지구로 온 늑대인간 울프와 함께 하는데, 이 울프의 외모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에게 더욱 따돌림을 당한다. 이러한 상황은 레이건에 의해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배척을 기조로 삼았던 신보수주의가 자국의 하층민에게 보여준 모습이기도 하다. 레이건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미국의 중산층들은 하층민을 위한 복지 예산을 줄이는 것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허클페리 핀의 후예와도 같은 이런 부랑자들은 오직 격리와 통제의 대상일 뿐이었다. 잭 소여와 울프도 그렇게 된다. 그들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판사에 의해 그런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선라이트'로 보내진다. 오직 복종만을 강요하며 그 뜻을 따르지 않으면 살인도 서슴치 않는 선라이트는 가드너란 인물이 독재하는데, 이 가드너란 인물이 정말로 재밌다.


 소설은 가드너를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말 잘 생겼으며 언변이 화려하고 기독교 광신도로 묘사한다. 가드너의 특징을 곰곰이 따지다보면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그 때의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 너무 나간 추측 아니냐고? 결코 그렇지 않은 걸. 일단 소설에서 가드너에 대해 말할 때 배우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데 이건 분명 레이건을 떠올리게 하려는 것이다. 거기다 그가 다스리는 곳의 이름은 선라이트다. 아시다시피 레이건은 러스트 벨트가 아니라 선 벨트인 켈리포니아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작가들이 하필이면 선라이트란 이름을 지었던 건 이런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함이 확실하다. 거기다 레이건은 모건의 오른팔이다. 모건하면 얼른 떠오르는 J. P 모건은 레이건 정부 때 영향력을 가장 많이 확장하였다. 거의 레이건이 모건의 오른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모건을 기업가로 묘사한 것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자, 이만하면 가드너의 모델이 사실은 레이건이라는 게 어느 정도 납득되실 것이다. 

 이걸 염두에 두고 읽으면 2권은 정말 재밌어진다. 그리고 놀라게 된다. '부적'이 너무나 신랄하게 당대의 미국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에. 그 때의 미국은 자신과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도 전혀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게 주류의 흐름이었다. 선라이트에 수용된 수많은 아이들처럼 격리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부적'은 그것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다. 소설이 레이건을 악하게 묘사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 표현은 애교에 불과하다. 이렇게 다름을 차별의 이유로 삼는 미국에 대해 정신차리라는 뜻으로 작가들은 잭 소여를 '단독자'로 설정했다. 그는 무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인 것이다. 부적이 가진 엄청난 치유와 구원의 힘은 오직 단독자에게만 허락된다. 당시의 미국은 자신들이 어떤 범주를 미리 설정하고 모든 개인을 거기에 따라 정의내리고 분류했지만 작가들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잭의 친구 '울프'를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거기서 울프는 우리가 아는 늑대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자신을 위해 다른 짐승을 함부로 살육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온 힘을 다하여 끝까지 보호하는 자로 나오는 것이다. 그는 그런 헌신을 무엇보다 중요한 명예로 생각하고 결국 그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친다. 이런 울프의 묘사와 희생 앞에서 우리가 달리 무엇을 말할 수 있으랴. 부적이 가진 힘의 원천은 바로 울프와 같은 태도에 있다는 말 말고는.


[이 역시 '부적' 미국판 커버]



 간략하게 설명한다고 했는데 말이 너무 넘쳤다. '부적' 탓이다. 할 말이 너무 많은 책인 것이다(난 지금 울프와 더불어 잭의 소중한 동료가 되는 어릴 적 친구 리처드를 만나게 되는 테이어 학교에 대한 얘기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 선라이트가 있던 인디애나 주와 더불어 테이어 학교가 있는 일리노이 주는 러스트 벨트를 이루는 중요한 한 축이다. 그러므로 테이어 학교를 엘리트를 양성하는 사립 학교로 설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유독 거기에만 모건을 따르는 트위너들이 기존의 인간들을 대체하는 장면 묘사가 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언급하고 싶었지만 글의 길이 때문에 그만뒀다. 하일라이트의 중요한 무대인 아긴코트 호텔도 그렇고. 이 장소가 소설에서 가지는 의미에 비하면 한 문장으로 그친다는 건 정말 너무한 처사이다. 흑흑.) 그 때문인지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처럼 다 읽고 나서도 그 내용을 몇 번이나 곱씹게 된다. 그러다 내가 원래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피터 스트라우브는 우리에게 생소하니까 예외로 치고 많이 알려진 스티븐 킹은 때로 재미는 있지만 깊이는 없는 작가로 생각하곤 하는데 '부적'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오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마도 이번에 '부적'이 세롭게 발간된 것은 워너브라더스가 공전의 히트를 친 '그것'에 이어 다음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의 영화로 '부적'을 제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의 많은 팬들이 영화로 만들어지길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다. 나 역시 어떻게 만들어질지 너무나 궁금하다. 특히나 후반에 모건과 잭 소여가 대결하는 장면의 영상 묘사가 정말 기대된다. 그 때의 모건 움직임 때문에 나는 더욱 모건을 자본의 상징이라 여기게 되었다. 자본이야말로 어디에나 순식간에 존재했다가도 홀연히 사라질 수 있으니까. 모건이 J. P 모건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생각도 한층 더 굳어졌고.


 이야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여하튼 바라건대 이 소설에 잔뜩 들어간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에 대한 가열찬 비판들도 그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엄청 흥미롭게 될 것 같다. 지금의 미국 또한 그 때의 미국과 그리 다르지 않으므로. '부적'은 지금 트럼프 정부 미국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읽어도 여지없이 통용된다. 레이건의 말년을 생각하면 가드너 최후에 대한 묘사는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두 작가 중 누군가 예언자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어쨌든 추천이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재미라는 감성도, 깊이라는 지성도 다 만족시키는 소설이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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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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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만나 보는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가 1917년에 발표한 단편집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를 읽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내가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것. 그들 모두는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다. 거의 블랙홀과 맞먹는 압도적인 중력으로 날 붙잡아 마냥 끌고 가기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 광기, 죽음은 하나의 표지판이다. 내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땅은 여기까지라는 걸 알려주는. 그 너머는 타인의 땅이다. 제 아무리 용을 써도 내 힘이 결코 미칠 수 없는  곳. 사랑 광기, 죽음은 나의 부재로 완성되는 장소다. 여기 실린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와 같이.

 

 그런데 이상도 하지. 사랑과 광기는 죽음에 맞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우리가 보기엔 사랑은 능동이고 광기는 수동적인 상태로 다르지만 소설에선 그렇지 않다. 사랑마저 넓은 범주의 광기로 묘사한다. 첫 단편 ‘사랑의 계절’에서 주인공 네벨은 리디아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엘 솔리타리오’에서도 아내는 남편이 세공하는 보석을 보곤 한 순간에 매혹된다. ‘이졸데의 죽음’이나 ‘음울한 눈동자’도 그러하다. 이성으론 그 이유를 도저히 간파할 수 없는 사로잡힘이 사랑의 촉발인 것이다. 작가는 이걸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우리는 광기 또한 사로잡힘에서 발아하는 걸 기억한다. 더구나 소설 속 사랑은 일방통행로만 달리는 열정의 착란에서 비롯되어 의혹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다 끝내, 두 편 정도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환멸 아니면 비통에 이른다. 광기 또한 이와 유사한 여정을 보여주지 않던가. 이처럼 작가에게 사랑과 광기는 샴쌍둥이인 것이다.

 

 그가 사랑과 광기를 중요한 두 축으로 소설을 형성하는 것은 그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속성 때문이다. 절대군주인 죽음이 자신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있는 곳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계산과 예측을 넘어서 있다. 밤마다 베고 자는 베개가 언제든 내게 죽음을 가져올 수 있으며(깃털 베개) 잠깐 한 눈을 팔았을 뿐인데 무엇보다 지키고 싶었던 막내 딸이 골육에게 무참히 도륙당하는(목 없는 닭) 세상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아무래도 우리는 거의 부재에 가까운 자신의 왜소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작가 또한 가까이서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 똑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주장할 수 없는, 나의 취약함을 끝도 없이 상기하게 만드는 장소에 나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이 삶의 시간을 어찌 지속시켜야 하나? 난 이 단편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사랑이나 광기와 같은 열정의 힘을 빌려서라도 무덤과 사막만을 약속하는 삶을 뚜벅뚜벅 관통해나가려는 존재들이. 가시철조망을 두려움 없이 뛰어넘는 황소(가시철조망)나 우물 안을 벗어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숲으로 뛰어들어 진정한 사냥을 하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은 개, 야구아이 아니면 우물에 뛰어들겠다는 협박으로 비로소 외삼촌에게 대등한 존재임을 인정받은 아이(우리가 처음 피운 담배)처럼. 그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의 존재를 제대로 증명하는 길은 바로 용기란 걸.

 

 그건 그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백치처럼 아예 모든 것을 놓아버리거나 겁먹고 뒷걸음치기 바쁜 존재들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용기를 감행하는 타자에게 자신을 동화하는 것으로 자신이 갇혀 있는 유배지를 탈출하려 해 보지만 결코 소심한 구경꾼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더욱 보게 되었다. 그 위에 작가가 찍어놓은 투명한 방점들을. 뭐든 시도가,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암시하는. 

 

 당연히 여기엔 위험이 뒤따른다. 어떤 때는 ‘천연 꿀’에 나오는 것처럼 그 시도가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멘수들’에 나오는 벌목꾼 카예,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들’에서 원주민 칸디유 그리고 ‘음울한 눈동자’에서 사피올라가 화자에게 한 얘기들을 통해 분명히 전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일단 뛰어들라고. 온전한 내 선택과 결단으로.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두 사람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나? 그림자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존재 가치와 다만 착란에 의한 사랑 고백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던가. 이는 모든 걸 마약에만 의지하다 죽어서도 두개골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손으로 만든 지옥’의 인물과 자신이 광견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정하며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다 마침내 끔찍한 범행마저 저질러버린 ‘광견병에 걸린 개’의 주인공과 얼마나 다른가. 이들은 모두 자신이 정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정신적으로 표류하면서 협소한 자신의 세계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표류’에 나오는 파올리노의 분신들인 것이다. 

 

 우리는 안다. 삶이란 언젠가는 끝나야 하는 연극인 것을. 그렇다고 그 종막만을 생각하며 시곗바늘만 초조하게 바라보거나 어차피 허무하게 끝날 거 뭐하러 의미를 만들려 애쓸까 하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미 무덤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자기 세계에 갇혀 끝없이 맴도는 장면들은 그걸 비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왕에 태어나 지속이라는 정언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면 아주 사소한 배역이 주어졌다고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며 현재라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작가의 혜안대로 진실로 생생한 삶이라는 걸 느껴볼 수 있는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는 바로 거기서 창출되는 것이니까. 나 아닌 다른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죽음이라 하더라도 영웅과 비겁자의 것이 다르듯이, 삶의 의미가 달라진다면 죽음의 의미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삶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이 책 덕분에 살면서 늘 염두에 둬야 할 한 문장을 얻게 되었다. ‘다가올 무한을 근심하지 말고 지금의 유한을 사랑하라!’ 기억하고 또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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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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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아미타빌, 일본의 주온. 모두 특정한 공간이 가득한 공포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예로부터 공간은 다 동일하지 않았다. 어떤 공간은 신성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고 또 어떤 공간은 아주 사악한 힘이 깃들어져 있다고 믿어졌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현재 도시에 떠도는 괴담들 역시 어떤 공간을 무대로 한 것이 많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악의를 제한없이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을 유발시키는, 이른바 '이야미스' 장르에 있어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일본의 여성 작가 마리 유키코. 그녀가 이번에는 모처럼 이야미스 장르를 떠나 아미타빌이나 주온처럼 공간을 무대로 한 호러 연작집을 들고 나왔다. 제목은 '이사'. 일본에선 2013년에 발표된 책이다.




  모두 여섯 편이 단편이 실려 있는데 제목이 '이사'인 것은 그 내용이 다들 이사와 관련있기 때문이다. 

 첫 단편, '문'에선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살인마가 살던 곳이라는 걸 알게된 여성이 이사를 위해 어떤 집을 방문하여 살펴보다가 숨겨진 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나오고 두 번째 '수납장'은 남편 없이 홀로 외동딸을 키우는 여성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창 이사 준비를 하다 수납장에서 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발견하게 되는 이야기이며 세 번째 '책상'은 이사짐 센터 업체에서 전화 접수 업무를 갓 맡은 주부가 자기가 쓰는 책상에서 전에 일하던 여성이 써 놓은 편지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며 네 번째 '상자'는 직장에서 사무실 이사를 했는데 유독 자기 짐만 잃어버려 커다란 곤란을 겪는 한 정규직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다섯 번째 '벽'은 어린 시절의 가정 폭력으로 불우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자기 동료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벽을 통해 옆집의 심각한 가정폭력을 알게되었는 걸 듣게 되는 이야기이며 마지막 '끈'은 이야기의 무대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제 막 새집으로 이사 온, 이사를 참 좋아하는 여인이 다시 한 번 첫 번째 단편에 나왔던 '문'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책의 제목으로 '이사'만큼 어울리는 것도 또 없을 듯하다.


  마리 유키코로서는 처음 도전하는 호러장르일텐데, 결과는 첫 시도 치고는 꽤 괜찮게 나왔다.

'이야미스' 장르를 쓸 때, 마리 유키코는 주로 묘사를 건조하게 했는데 이건 '이사'에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장면 묘사를 통하여 무서움을 전달하지 않고 별다른 자극없이 무덤덤한 기술로 독자를 슬쩍 호러의 장소로 데려간다는 뜻이다. 여기 실린 소설의 공포 대부분은 반전을 통해서 온다. 평범한 공간이 삽시간에 죽음의 공간이 되고 여기가 무서움의 장소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게 별안간 독자 앞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사'는 소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자의 정신마저 '이사'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환, 전복이 꽤 깔끔하고 앞서 세세한 단서를 두어 설득력있게 이뤄지기 때문에 나는 '이사'를 호러 소설로도 꽤 괜찮다고 한 것이다. 거기다 '상자' 같은 단편에선 마리 유키코만의 장기인 '이야미스'또한 가득 맛볼 수 있었기에 더욱 만족했다.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작품 해설'이다.

  보통 작품 해설은 해설이기 때문에 독자는 그것이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간단히 말해 허구가 아니라고 말이다. 소설의 작품 해설은 바로 그러한 독자의 사고 습관을 멋지게 이용하고 있다. 해설에서 소설 속 이야기가 모두 실화인 것처럼 설명하여 독자로 하여금 픽션인줄로만 알았던 소설 속 이야기가 진실일 수도 있다는 오리무중에 빠뜨리는 것이다. 거기다 해설하는 사람의 이름까지, 분명 이 소설을 읽었다면 눈치채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소설에 꼭 등장하는 이름인 '아오시마'로 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살짝 소름마저 일으키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난 작품 해설이 정말 해설인지 의심스럽다. 어쩌면 이 작품 해설까지 마리 유키코가 쓰지 않았을까 싶고, 그래서 여기에 실린 단편은 여섯이 아니라 실은 일곱으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여하튼 이처럼 독특한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여 '이사'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마리 유키코의 책이 늘 그랬듯이 벗할만한 매력이 있다. 가볍게 괴담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으시다면 얼른 손에 한 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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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30 0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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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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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에 발표된, 스티븐 킹의 '인스티튜트'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작년에 이 책이 미국에서 나왔을 때, 입소문이 좋아서 우리나라에도 나오길 기다렸던 작품인데 기대한 것보다 빨리 나와서 더 반가웠다. '인스티튜트'는 단순하게 시설이라는 뜻으로 스티븐 킹은 이 작품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샤이닝의 후속작인 '닥터 슬립'에서 한 번 다뤘던 초능력자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구현하고 있다. 그건 총 2권에 걸쳐 펼쳐지는데, 난 그 중 1권을 읽고 이 리뷰를 쓰고 있다.



 먼저 총평부터 하자면 근래 읽은 스티븐 킹 작품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 중 하나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닥터슬립'과 '쇼생크 탈출'을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걸 하나씩 설명하자면 먼저 이 소설이 두 명의 인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것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소설의 포문을 여는 인물로 전직 경찰인 팀 제이미슨이고 다른 하나는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손에 납치되어 '시설'에 감금된, 초능력을 가진 열 두살의 소년 루크 엘리스다. 1권이 끝날 때까지 이 둘은 만나지 않는다. 그러나 1권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2권에서 이 둘이 만나고 루크가 팀 제이미슨의 보호를 받을 것은 명백해 보인다. 이러한 팀과 루크의 관계는 '닥터 슬립'에서 팀의 말대로 '서로 등을 긁어주는' 조력 관계였던 대니와 아브라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다 그들을 위협하는 '닥터 슬립'의 트루낫 역시 이 소설 '시설'과 유사하게 '스팀' 착취라는 그들의 목적을 위해 초능력이 있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 감금한다. 원래 루크는 잠재적 염력 보유자인 TK로 분류되어 시설에 수용되었지만 나중엔 TP인 텔레파시 능력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뛰어난 텔레파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샤이닝을 지녔던 아브라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런 까닭으로 난 '닥터 슬립'을 연상했고 '쇼생크 탈출'을 생각했던 건 '인스티튜트' 1권 후반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결국엔 폐기 처분되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루크가 IQ 수치 자체가 무의미한, 누구보다 뛰어난 천재적인 두뇌로 전략을 짜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움직여 '시설'을 탈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읽어보시면 이런 궁금증이 하나 드실지 모르겠다.

 왜 스티븐 킹은 소설의 시작을 하필이면 팀 제이미슨으로 한 것일까? 사실 팀은 1권에서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며 이야기의 순서를 바꿔서 루크가 듀프레이에 왔을 때 1권 앞부분에 나온 그의 이야기를 시작해도 별로 어색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렇게 팀의 얘기로 시작했다가 뚝 단절하고 갑자기 인물과 배경을 확 바꿔서 루크의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어색해 보이는데, 스티븐 킹은 왜 이런 인상을 주는 위험마저 무릅쓰면서 지금과 같은 구성을 취한 것일까? 난 여기에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이 이 소설, '인스티튜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소설의 핵심이 되는 '인스티튜트', 즉 '시설'에 대한 얘기부터 해보자. 스티븐 킹은 2장 '똘똘이'에서 루크가 시설에 납치, 수용되는 과정을 그린다. 루크는 앞서 말했듯 엄청난 천재로 이미 한 해의 등록금이 하버드대와 맞먹는 영재 전문 교육학교 브로더릭에서도 손꼽히는 존재다. 그는 겨우 열 두 살의 나이로 미국의 SAT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다.


저희 학교에는 영재들이 있습니다. 사실 브로더릭 재학생의 50퍼센트 이상이 영재죠. 하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루크는 달라요. 로크는 포괄적이에요. 한 분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그렇습니다.(P. 81)


 

 스티븐 킹은 루크의 비범한 면을 주로 학교라는 것과 관련하여 많이 보여주는데, 이건 사실 나중에 나오는 '시설(인스티튜트)'가 독자들에게 일종의 교육 기관처럼 연상되도록 하는 교묘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시설에 납치, 수용된 이들은 모두 학교를 다녀야 하는 나이의 어린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설'은 오늘날 미국 교육이 가진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스티븐 킹은 루크가 다녔던 학교, 브로더릭에서 유난히 학생의 뛰어난 능력을 강조하며 그것이 사회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걸 은연 중에 내비치고 또 루크가 SAT를 치르는 날, 성적이 나쁘게 나온 여학생이 깊은 슬픔에 빠져 나온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건 모두 미국 교육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의 대표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높은 성취만을 강조하며 개인의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 하는 것. 스티븐 킹은 '시설'에서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모든 것을 통하여 현재 미국이 하고 있는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것들의 진실한 초상은 바로 이것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것이다. 시설의 운영자 식스비 부인을 비롯하여 그 곳의 관리자와 직원들을 아이들의 인권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잃게 만드는 폭력까지 서슴없이 자행한다. 수월성 교육이 능력과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무시하듯, '시설' 또한 자신들이 원하는 기준에 아이들이 도달하지 못하면 폐기해버린다. 


 그는 실험대상이었고 그들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급이 낮은 TP와 TK, 그러니까 분홍색들만 추가로 검사를 받았다. 이유가 뭘까? 그들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일까? 일이 잘못되면 더 쉽게 폐기처분할 수 있기 때문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루크가 보기에는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그는 알 수 없었다. 점들이 사라졌고 아이리스도 사라졌고 점들은 다시 돌아올 지 몰라도 아이리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리스는 뒤 건물로 넘어갔고 그들은 이제 다시는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P. 281 ~ 2)



  이러한 '시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이다. 아이들을 '뒷 건물'로 보내서 자신들의 목적(이건 1권 후반부에서 밝혀진다.)에 보다 유용하게 쓰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시설'의 어른들은 오직 아이들을 통제할 뿐이며 자신들이 세운 질서에 복종할 것만 강제한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을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군인처럼 징집당한 것이며 오늘의 희생으로 나라가 크게 도움을 받을 거라는 둥, 여기서의 생활은 포스터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라는 둥 듣기 좋은 말을 해대지만 아이들은 속지 않는다.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폭언과 폭행, 바깥 사정을 하나도 알 수 없는 고립과 내용물을 알 수 없는 약물 투입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좋은 말로도 포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우리는 납치한 거냐고? 맞아. 우리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냐고? 맞아.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그건 몰라. 하지만 엄청난 작전일거야. 여기가 이렇게 엄청난 걸 보면. 수용소잖아. 의사도 있고 기술자도 있고 자칭 관리인이라는 사람도 있고... 숲속에 박혀 있는 소규모 병원이나 다름없어.”

(………)

 “도대체 말이 안 돼. 미국에서 이게 가능하다고?” 루크가 말했다.

 “여긴 미국이 아니야. ‘시설’ 왕국이지.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면 창밖을 내다봐, 엘리스. (·········) 여기처럼 초록색으로 된 콘크리트블록 건물이. 나무에 섞여서 잘 안보이게 하려는 수작이겠지. 거기가 뒤 건물이야. 모든 시험과 주사 투여가 끝난 아이들이 가는 곳.”

 “거기에 가면 어떻게 되는데?”

 이번에는 칼리샤가 대답했다.

 “우리도 몰라.”(p. 151 ~ 2)


 잘생긴데다 시설에 가장 많은 반항을 하여 '시설'에 수용된 여자 아이들에게 많은 흠모를 받는 니키는 이 흐름에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이러한 니키로 인해 어른과 아이들의 대립 전선은 더욱 선명해지며 어른의 나쁜 면은 한층 더 부각된다. 그 어른들은 입으로 아무리 좋은 말을 내뱉어도 그저 아이들에게 끔찍한 악몽만 선사하는 존재다.


 프리실라가 다시 그의 뺨을 때렸다. 이제 귀가 더 세게 울렸고 루크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시설이 악몽인 줄 알았더니, 몸의 절반이 빠져나간 채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카드에서 뭐가 보이느냐는 질문을 받고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뺨을 맞는 지금 이 상황이 진짜 악몽이었다.(p. 270)

 

 바로 여기서 우리는 소설 처음에 나온 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초반에 팀과 팀이 뜻하지 않게 하게 되었던 여행 중에 같이 했던 어른들은 '시설'의 어른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설'의 어른들은 초능력을 부려서 더욱 자신들과 다른 타자인 아이들을 무조건 통제하려 들지만 팀과 초반에 나온 어른들은 타자를 통제하지 않는다. 기꺼이 자신의 곁을 내주어 격리하거나 차별하지도 않는다.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팀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여행을 한다. 그 때, 그 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뿐인 여정은 '뒷 건물'이라는 목적지가 명백하게 정해진 '시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기서 나는 스티븐 킹이 포스터 문구를 통해 인용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가 얼마나 재치있게 도입한 장치인지 감탄하게 된다. 아마도 소설 초반에서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에게 보인 모습이 아니었다면 난 이 문구를 그냥 단순하게 시설이 아이들에게 하는 흔한 선전문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바로 이 문구 자체에 스티븐 킹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이 집약되어 있었다.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는 영어로 'ANOTHER DAY IN PARADISE'다. 어딘가 낯익게 느껴진다면 그건 당신이 필 콜린스의 동명 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제목이 같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스티븐 킹은 분명히 이 노래를 생각하고 그 문구를 가져왔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팀이 노숙자 할머니 애니와 만나는 장면 때문이다. 필 콜린스의 노래 또한 한 남자와 그에게 도움을 구하는 노숙자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노랫 속 주인공 남성은 도움을 호소하는 노숙자 여인을 무시한다. 휘파람을 불면서 아무 말도 못 들었고 자긴 거기 없다는 척을 하며 황급히 떠나버린다. 이런 남자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오직 도구의 모습만 볼 뿐 그 외의 것은 깡그리 무시해버렸던 '시설' 어른들의 모습과 판박이다. 그러나 팀은 다르다. 그는 마을에서조차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는 노숙자 할머니에게 기꺼이 다가가 말을 건네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그는 필 콜린스 노래 가사처럼 그녀 얼굴의 주름을 보고 그녀가 있는 곳을 본다. 필 콜린스가 이렇게 보고 곁에 있어 준다면 천국일 거라고 노래했던 타자를 향한 전폭적인 열림. 그걸 팀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열려 있고 노숙자 할머니가 열심히 뜨고 있는 거대한 목도리처럼 서로 연결하는 존재다. 그러한 그는 우연의 섭리로 닿게 된 듀프레이 마을에서 야경꾼이 된다. 야경꾼은 마을 순찰을 돌지만 정식 경찰은 아니다. 경찰과 일반인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두를 연결하며 포용할 수 있는 존재다. 


 야경꾼 자체가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일자리거든요. 적어도 듀프레이에서는요.(P. 51)


 이러한 팀의 모습은 확고한 상하 관계로 이뤄진 조직의 위계 질서 속에서 타자에 대해선 통제와 관리만이 존재하는 '시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소설 '닥터 슬립'에서 타인을 통제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트루낫'과 타인이 가진 고통과 고뇌의 자신을 전부 열었던 '알콜 중독자 협회'가 그토록 달랐듯이.


 그런데 앞서 '시설'은 아이들에게 오직 악몽만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건 이번 BLACK LIVES MATTER!' 시위에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트럼프 행정부 들어 더욱 노골화된 미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악몽을 더이상 안겨주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한 해답은 분명해진다.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팀의 길을 따르는 것이란 걸.


 '인스티튜트' 1권은 확실히 재밌다. 첫 장을 넘긴 순간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달음에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몰입감도 넘친다. 그렇지만 재미만이 이 책이 가진 전부는 아니다. 이야기 속에 교묘하게 배치된, '천국에서 보내는 또 다른 하루'와 같은 여러 세부 장치들을 헤아리다 보면 지금까지 리뷰를 써 온 바대로 이 소설이 현재 미국 사회에 보내는 강렬한 메시지 또한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이 '시설'처럼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한다. '샤이닝'에서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너무 넘친 나머지 자신의 가족마저 살해하려고 들었던(죽음은 절대적 통제 상태이니까 말이다.) 잭 토런스의 저주가 미국 사회 대기에 넘실대고 있음을 목도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닥터 슬립'에서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잭 토런스라는 저주의 유령을 퇴마하려 한다. 닥터 슬립의 대니와 아브라를 통해 했던 것처럼 팀과 루크의 협업을 통해서.


 과연 이 협업이 루크를 납치하기 위해서 부모마저 눈 깜짝하지 않고 비정하게 살해해버리는 살인 집단을 거느리고 오랫동안 아이들을 납치 살해하고도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전모가 짐작되지 않는 '시설'의 위협에 맞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얼른 2권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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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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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세대 SF 작가들 중 가장 신뢰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가인 N. K 제미신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놀랍게도 이번엔 단편집이다.

 제목은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 단편집은 현재 그녀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서른 살에 이르러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가 거의 초기 시절이라고 할만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22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작가로 첫 발자국을 떼고나서 오늘에 이르는 전 여정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에 있어서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은 이전에 나온 <부서진 대지 3부작> 중 두 편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이기에(그녀는 이 3부작으로 한 편도 받기 힘들다는 SF계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단편도 과연 잘 쓸까 궁금했던 터이기에 특별히 더 반가웠던 단편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책머리에서 이 단편집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작가인 그녀에게 있어 성장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 N. K 제미신을 좋아하는 이로써 어떻게 부푼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당장 저마다 독특한 색채로 빛나고 있는 22개 단편들의 성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작을 여는 것은 2018년에 발표한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단편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제미신이 이 단편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단편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편은 여성 SF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모방이자 반응(p.12)'인 작품인데 여기엔 두 세계를 굳건하게 가르고 있는 장벽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한 남자와 그의 딸이 등장한다. 남자를 처형한 이들은 사회복지사로 불리는데, 그들은 그렇게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세계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딸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복수할 거야.(...) 당신들이 아빠를 죽인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죽일 거야. (...)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어떻게."(p. 29)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이러한 설정, 즉 한 쪽엔 보호 혹은 진보란 이름으로 나누고 가두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엔 그들이 설정한 벽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가로지르고 서로 연결하려는 이들이라는 양분된 구도가 여기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구획과 횡단의 투쟁 연대기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러하듯이 적은 자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듯, 적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다. 나는 적의 아주 작은 일부만 다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망가진 채 돌려보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좋다. 최후의 결전 때가 온다면 놈은 다시 내게 달려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내게. 우리에게. 그렇다.(p. 59)


 그렇다고 해서 이 투쟁이 승패를 가르고자 함은 아니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 하는 건 작가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있어 적은 변화를 통해 성장하기 위한 계기의 제공자일 뿐, 근절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다. 식물처럼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 것, 늘 구획된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야 말로 작가가 이 단편집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모티브를 특별히 많이 사용한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조리하는 것이다.

 꿈은 두 번재 단편인 '위대한 도시의 탄생'을 비롯하여 '수면 마법사'까지 자주 등장한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로이 소녀(세계관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작가가 장편으로도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책머리에서 작가는 단편으로 끝내겠다고 해놓아서 참 아쉬웠다.)'는 이러한 꿈의 테마가 가장 한껏 재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가상 현실 같은 곳에서 오직 생각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들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흔히 말하는 전뇌 공간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인간에게 다운로드 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 프로그램들은 한 어린 소녀 프로그램을 통하여 변화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궁극의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꿈은 한 마디로 대지와 정반대에 있는 영토이다. 현실과 비현실, 중력과 무중력으로 대비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꿈은 무엇이든 하나로 고정시키려는 지상이 허락하지 않은 정체성의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정체성을 찾거나 현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도 한다. 끌어당기는 중력도, 고정시키는 영토도 없어서 오로지 물 흐르듯 부유하거나 유영할 수밖에 없는 꿈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직 변화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통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다는 점에서 작가는 변화 속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리(요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꿈이 내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조리는 외적인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조리사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에 기이한 고객의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들지만 후반에 가선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여 음식을 만든다. 이러한 주제는 나중에 '퀴진 드 메므아'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남이 만든 레시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을 그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작가가 왜 하필 조리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는가 하는데 있다. 바로 거기서 난 이 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외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란 각각 개별적인 재료들을 훌륭한 맛을 위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가장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어느 하나도 쉽게 배척되지 않는다. 또한 재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재료 하나에도 나를 헤아리는 것만큼의 깊은 헤아림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조리사의 자세가 작가는 타자를 대하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SF 소설계에서 쉽게 지워졌었던 자전적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소설을 쓸 때조차 암묵적으로 백인 남성 주인공을 상정하고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쉽게 무시된다는 건 우리 역시 익히 보아왔던 바다. 그것이 최근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작가는 여러 단편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조리를 할 때와 같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재료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과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이처럼 구획과 횡단의 투쟁기는 종반엔 변화와 공존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제미신의 역량은 단편에서도 여전했다. 어떤 단편들은 장편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가 더 농밀하게 구현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차례대로 세워 놓은 22개의 표지판을 통과하면서 왜 이 단편집을 그녀가 성장의 연대기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부서진 대지 3부작'의 성공 역시 그냥 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제미신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부서진 대지 3부작도 이제 '석조 하늘' 하나만 남은 상황. 얼른 그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한편, 과연 이 다음의 성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부디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참 제목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이 단편집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제목은 단편이 아니라 2013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것이라고 한다. 검은 미래의 달은 흑인이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검은 미래가 하얀 미래와 동등하고 달이 태양과 대등하게 되는 공존과 조화의 시대에 다다르는 것이 부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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