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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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흑인 여성 작가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은 SF 소설계의 전설이다. 하나도 따기 힘든 SF 소설 최고 권위의 상을 3부작 모두가 해마다 나란히 수상했기 때문이다. 휴고상 역사상 최초다. 2016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년 초에 우리나라에도 발간되면서 비교적 빨리 우리에게 소개된 편이다.

 그리고 작년 12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오벨리스크의 문'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부서진 대지'는 꼭 순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벨리스크의 문'에 관심이 생겼다면 무엇보다 첫째 권인 '다섯 번째 계절'부터 읽으실 것을 당부드린다.





 배경은 지구. 하지만 아주 먼 미래다. 

 거기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이다. 변화무상한 사계절은 이제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황폐와 삭막의 계절 뿐이다. 그것도 영원히. 지구는 모종의 이유로 망해버렸다. 생존한 인류는 현재 세 부류로 구성되어 있다. 망하기 전 인류는 대지 보다 하늘을 더 숭배했으나, 이젠 아니다. 이 세계는 철저하게 대지 중심이다. 땅이 모든 것을 주관한다. 자연히 땅의 움직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땅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것의 에너지로 땅의 움직임을 조종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을 '오로진'이라 부른다. 아무나 오로진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오로진의 통제되지 않는 능력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오로진을 괴물 취급 한다. 작품의 주인공인 에쑨의 남편이 그랬다. 그는 아들이 오로진인 걸 알자 딸이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여버린다. 남편 지자는 딸 나쑨 역시 오로진인 걸 알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떠난다. 삽시간에 소중한 아들을 잃고 딸까지 빼앗긴 에쑨 또한 딸을 찾아 마을을 떠나게 된다. '부서진 대지'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번 '오벨리스크의 문'은 지자가 나쑨을 데리고 떠난 장면에서 시작한다. 나쑨이 에쑨과 함께 이번 소설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소설은 에쑨과 나쑨을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에쑨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다시 한 번 지구에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과거 스승이자 연인인 알라배스터와 함께 있다. 그녀는 알라배스터에게서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오벨리스크들을 조종하여 지구에서 벗어나버린 '달'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한다.('다섯 번째 계절'의 마지막에 달이 왜 나왔는지 여기서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람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달이 사라져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달을 전설의 존재 쯤으로 여기고 있다.) 그와 함께 알라배스터는 지구가 어쩌다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그가 왜 다시 한 번 '다섯 번째 계절'을 일으켰으며 에쑨이 하루빨리 오벨리스크 통제 능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한 말해준다. 그건 바로 '스톤 이터'들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돌로 되어버린 육체 때문에 죽지 않고 있어서 감정을 가지지 않게 된 그들의 일부가 지구에 자신과 다른 종족이 존재하는 것을 더이상 용납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편, 나쑨은 여행 도중 우연히 늘 괴물로만 취급되던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그걸 소중히 여기도록 가르쳐주는 이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전작에서 오로진들을 찾아 수도로 데려가던 샤파다. 아주 모처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 나쑨은 샤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 가까이에 있는 오벨리스크에서 힘을 끌어내 그걸 증폭시켜 사용하는 걸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 그만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돌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그걸 시작으로 나쑨에게도 점점 더 큰 비극이 닥쳐온다. 아버지 지자가 조산술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알자 나쑨을 그녀의 오빠처럼 죽이려 했던 것이다. 나쑨은 공동체에 하나의 구성원으로 당당히 편입하기 위해 능력을 연마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서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다섯 번째 계절'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었던 공존과 차별의 주제를 다시 한 번 부각하면서 규모를 더 확장시켰다. 달의 부재는 현재의 지구가 하나만 존재하는 독재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자신과 비슷한 부류만 존재할 것을 허락하는 스톤 이터들은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것이다. 알라배스터가 달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구를 다시금 공존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고 그 차이를 존중하며 배려할 수 있는 세상. 오크림이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물이 아니라 그저 다른 이웃 중 하나로 여겨지는 세상. 오로진으로 차별을 많이 받은 알라배스터였기에 그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에쑨도 다르지 않다. 그가 싫어하는 알라배스커의 말을 결국 따르게 되는 건 전작에서 우연히 만나 이제는 소중한 동료가 된 스톤 이터 호야의 존재 때문이다. 자신이 스톤 이터이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오로진 에쓘을 도와주려 애쓰는 호야를 보면서 그녀는 왜 같은 것 하나가 아니라 저마다 다른 이들 모두가 공존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알라배스터는 그렇게 달을 데려오는 힘을 '마법'이라 말한다. 마법 역시 과학에 밀려 사라진 힘. 그런 의미에서 마법은 달과 유사한 상징을 가진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주류에 가리거나 억압되어 이면에 머물게 된 것들을 에쑨은 다시 불러오려 한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바로 그런 이면을 여는 문이다. 영원히.


 '오벨리스크의 문'은 공존과 조화라는 사회적 메세지로 충만하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태에서 보듯,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는 요즘엔 정말 필요한 메세지가 아닐 수 없다. 인종과 성별 그리고 계급에 따른 차별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 이해하려는 몸짓보다 경멸과 거부의 몸짓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이런 움직임 끝에 뭐가 있는지는 바로 어제 일어난 비극이 잘 보여주었다. 이란이 자신의 영공 가까이 날아온 민간 여객기를 미군의 보복 공격인 줄 알고 격추시켜 버리지 않았던가? 존중과 배려의 마음이 먼저였다면 희생되지 않았을 목숨들이었다. 차별과 배척 또한 얼마나 많은, 있을 필요가 없었던 아픔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던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오벨리스크의 문'은 에쑨과 나쑨의 여정을 통해 그걸 섬세하게 세공하고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이 더 많아지는 SF, '오벨리스크의 문'. 작품의 가치도 가치이지만,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 더욱 읽어야 할 작품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얼른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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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15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부작으로 썼는데 그게 다 상을 받았군요 이어졌다 해도 어떤 건 따로 봐도 괜찮지만, 이건 첫번째부터 차례대로 봐야겠습니다 앞에 이야기를 모르고 이걸 보면 뭐지, 하겠군요 아들과 딸이 오로진이라면 두 사람에서 한사람이 오로진이라는 건데... 에쑨이 그런 듯하네요 자기 자식까지 죽이다니...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을 보는 거 처음이 아니기는 하네요 자기 자식한테 다른 힘이 있으면 두려워하는 부모 다른 데서 보기도 했군요

다르다고 무서워하기보다 함께 살 방법을 찾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뿐 아니라 동, 식물을 생각하지 않는 일도 일어나죠 이제는 한 지역 한 나라가 아닌 지구를 다 생각해야겠습니다


희선
 
검은 얼굴의 여우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비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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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부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검은 얼굴의 여우'는 미쓰다 신조의 소설  최고 걸작이다


 2016년에 발표된  작품이 지금에서야 소개된  너무 안타깝다  일찍 소개되었다면 분명  작품은  많이 소개되고 널리 읽혀졌을테니까 말이다 소설은 미쓰다 신조의 대표작이라   있는 ‘도조 겐야 시리즈 아니다그렇지만 도조 겐야와 비슷한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바로 일본 패전 직후의 시기를 말이다 시기를 염두에 두고 말하건대도조 겐야 시리즈에  불만이 있었다그런 시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전쟁 국가 일본 때문에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한국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도조 겐야 시리즈를 정말 좋아하면서도 그걸  시리즈의 한계로 여겨왔던 참인데이번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는 내가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다소 놀랍게도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다사실 2011년에 일어난 3.11 사태와 아베 정권에 힘입어 일본 우익이 날로 목소리를 크게 내던 마당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만행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을 내기는 쉽지 않았을텐데미쓰다 신조는 ‘검은 얼굴의 여우에서 그걸 해냈다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추리 소설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도 결코 아니어서개인적으론 도조 겐야 시리즈보다  재밌게 읽었다아무래도 최고 걸작이라는 말을  문장부터  수밖에 없었다모처럼 나온 미쓰다 신조의 신작이 이토록 커다란 만족감을 주어서 팬으로서 정말 기쁘다.



 

 후반에 놀라운 반전이 여러  펼쳐지기에 이야기를 소개하기가 조심스럽다가급적 직접 읽었을 때의 재미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말해본다면 이러하다.

 

  청년이 일본을 방황한다이름은 모토로이 하야타

 그는 현재 삶의 의미를 잃었다기차 역에  있지만 어디로 가야   모른다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전쟁 국가 일본이 아닌 만주와 한국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공존할  있는 새로운 일본 국가를 만들기 위해 건국대학이란 곳에서 열심히 공부도 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오직 폐허만이 존재하는 영혼이 되어 이리저리 정처없이 흘러다닐 뿐이다그러다 그를 탄광으로 데려가 광부로 만들어 착취하려는 이를 만난다강권에  이겨 따라갈 수밖에 없게  찰라누군가 그를 구해준다눈에 띄는 미남인 그의 이름은 아이자토 미노루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구해주었느냐고 하야토가 묻자예전에 알았던 한국 청년인 정남선 때문이라고 미노루는 답한다하야토의 모습에서  청년을 떠올렸다고그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기에.

 

 하야토는 미노루가 일하는 탄광에서 일하기로 한다오직 생산성만 강조하며 광부들을 위한 안전 설비는  몰라라 하는 회사의 태도 때문에 언제라도 갱도가 무너져 생매장당할 수 있는 막장 속 생활은 힘겹기만 하다. 그야말로 패전 후 일본 국민들이 느꼈던 불안과 공포를 빼다 박은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타는 이러한 일본의 가장 밑바닥에서의 체험을 통하여 일본 재건의 씨앗을 찾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서 갱도로 내려가는 걸 잔뜩 두려워하면서도 하루하루 적응해 나간다.


 그러나 마치  희망을 비웃길도 하듯예고 없이 일어난 낙반 사고로 하야토가 가장 의지하고 있는 미노루가 실종되어 버리는 사태가 일어난다.

 낙반이 일어나면 유독 가스가 삽시간에 갱도에 가득차 시간이 지날수록  안에 있는 사람이 생존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상황미노루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하아토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 않고 유독 가스로 인해 구조대 파견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 불구의 몸으로 탄광촌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기도'란 한국인이 검은 여우를 모시는 사당의 금줄로 자신을 목을 매어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다기도가 죽을 당시 낙반 사고 때문에 마을엔 아이들만 있고 어른들은 없었는데기도가 죽기 전에 검은 얼굴을  여우가 기도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한 아이가 보고는 아이들 모두가 집을 지켜 보는 상황이 된다 마디로 기도가 죽은 집은 아이들 눈이 벽이 되어  밀실이었던 것이다그런 가운데 기도의 집으로 들어갔던 검은 얼굴의 여우가 집을 나오는 모습은 목격되지 않은 채, 그야말로 집 안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기도의 죽음은 자살로 굳어지는 중인데, 이튿날 이웃에 살던 전직 특수 고등경찰인 기타다가 기도와 똑같이 밀실 상태에서 금줄에 목을  시체로 발견된다공교롭게도   마침 미노루의 형인 류이치가 미노루의 집을 찾아오다가 검은 얼굴의 여우가 기타다의 집으로 들어가는  발견한다.

 

 

 검은 여우는 언제나 낙반으로 생매장 당할지 모르기에 미신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광부들에게 재앙을 가져오는 것으로 여겨지는 불길한 신이었는데잇달아 발생한 죽음에 동일하게 검은 여우가 출몰하자 탄광촌은 광막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에 휩싸인다


  신은 곡식을 관장한다는 여우신 이나리와는 조금 달랐다하얀 여우님과 검은 여우님 신을 모셨기 때문이다. ‘백여우님’ 혹은 ‘백신님으로 모시는 여우신은 풍요의 신이다. (…) ‘흑여우님’ 혹은 ‘흑신님으로 두려워하는 여우신은 흉작의 신이다여기서는 갱내의 모든 사고를 의미했다.(p. 91)


 하지만 검은 여우의 저주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기타다와 붙어 다녔던 인물이자 죽은 기타다를 하야토와 함께 가장 먼저 발견한 니와 역시 밀실인 자기 집에서 금줄에 목이 졸린 시신으로 발견된다삽시간에 발생한  개의 죽음이 모두 동일한 형태라 이제 도저히 자살이라고 생각할  없게  경찰은 기타다와 니와와  함께 붙어다니던 스가자키를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의심한다


 금줄 연쇄 살인사건.

 이름을 붙인다면 이 정도로 어울리는 사건명도 없을 거이다. 요컨대 검은 얼굴의 여우는 금줄에 구애받고 있다.

 어째서일까.(p. 392)


 그들에게 도박빚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하야토를 마음에 들어하여 아마추어 탐정 흉내를 내는 하야토에게  귀기울여주던 난게쓰 뜻밖의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과거의 어떤 갱도 안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검은 얼굴의 여우의 이야기를.

 

 홀로 일하고 있는 젊은 남자 광부에게 찾아와 처음엔 그를 도와주다가 나중엔 여인의 몸으로 그를 홀려 다시는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게 갱도의 어둠 속으로 데려가 버린다는 검은 얼굴의 여우는 난게쓰 혼자만 만난  아니었다일본 전역의 갱도에서 그런 존재를 만난 사람이 더러 있었 사라져 버린 이들도 많았다실종된 미노루와 기타다 패거리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쩐지 미노루는 기타다와 미와를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들이  탄광에 모이는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해서 탄광촌엔 죽은 미노루가 검은 얼굴의 여우가 되어 죽은 사람들을 데려간  아니냐 하는 소문이 돌 된다그들이 소문에 더욱 열을 올리게  것은 무엇보다 마을에서 죽은 이들이 모두 빠져나갈 길이 하나도 없는 밀실이었기 때문이다자살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공간에서 살해당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인간이 아닌 존재의 짓이라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러나 하야토는  모든 사건엔 드러나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단서를 모은다뒤이어  다시 2번이나  누군가가 죽지만 굴하지 않고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한다.

 

 ‘검은 얼굴의 여우 줄거린 대강 이러하다

 흔히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징을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으로 설명하곤 한다 소설 또한 그런 특징이  살아나 있다난게쓰의 고백으로 알게 되는 검은 얼굴의 여우 괴담과 탄광에서 발생하는 연쇄 살인의 미스터리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호러로도미스터리로도 분위기와 재미가 한껏  살아나 있는 명작이다하야토가 어쩌다 탄광까지 흘러오게 되었는지  사연을 들려주는 초반부가  지루할 순 있는데거기만 잘 넘기면 정말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마지막까지 거침없이 읽게 된다.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힘이 정말 강하다. 실제로  이걸 휴일의  카페에서 하루 종일 읽었다거기다 도저 겐야 시리즈 내내 흐르던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 또한 여전히 잃지 않고 있다아니이번엔 지금 일본 분위기에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전범국가 일본의 만행을 가감없이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잘못이었는지 오늘의 일본이 그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지 또한 밝히고 있어서  강해졌다고 하겠다하야토가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시리즈이긴 하지만 도조 겐야 시리즈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그런 의미에서 정말 ‘검은 얼굴의 여우 미쓰다 신조가 도조 겐야 시리즈를 통해  오던 것의 절정이라 하지 않을  없다.


  괴담을 끌어오고 호러적 분위기를 잘 연출하지만 그렇다고 밀실 트릭이 허황된 건 아니다. 트릭들은 엄연히 현실 세계의 질서를 잘 따르고 있고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단서 또한 내용에 다 심어져 있다. 다시 말해 작가가 추리 게임을 공정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엘러리 퀸의 소설이 그랬듯이 이 소설도 자신의 추리 소설을 작가와 겨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전부터 미쓰다 신조를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 시리즈로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의 계승자라고 일컬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미쓰다 신조의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검은 얼굴의 여우'는 정말 멋진 선물이 될 것이라 감히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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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0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조 겐야 시리즈 거의 못 봤어요 아마 한권밖에 못 봤을 거예요 그래도 미쓰다 신조가 나오는 건 거의 봤네요 작가 시리즈하고는 다른 거, 작가 시리즈도 그것하고 작가 시리즈는 다르게 말하는 듯하더군요 작가 시리즈도 《사관장》 《백사당》만 봤군요 《작자미상》은 사고 아직도 못 읽었네요

우연히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나왔다는 말 봤는데, 한국에도 나왔군요 두번째도 나온 듯해요 여기에는 한국 사람 이야기도 나오는군요

헤르메스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에는 말하다 그만둔 듯... 한해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책 만나고 글도 쓰고 다른 거 하고 싶은 것도 하시면 좋겠네요


희선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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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다 사나이

 이름을 들으면 절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 접했던 과거로 돌아간다아주 오래된 과거로하루키의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등장했던  사나이  그는 하루키의 페르소나로도 알려졌었다 하필이면  사나이인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당시 하루키의 세계란  개연성이 딱히 요구되는  아니어서 그런 질문은 개똥지빠귀에게  하필 개똥지빠귀냐고 묻는 것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냥 그런 것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아틀라스처럼 독특한 하루키의 소설 세계를 떠받치는 것만 같던 양사나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키의 소설에서 시나브로 사라져갔다최근엔  보기 힘들었는데 어느날 보니 문득 ‘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책이 나와 있었다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입에선 무심결에 ‘오오!’하는 감탄사가 나오고 말았다 번은  다시 만나고 싶었던 그리운 존재였기에.



 

 ‘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제목대로  사나이가 주인공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번도 주연인 적이 없었던 그가 여기서 비로소 주인공이  것이다 양사나이는 지금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양사나이 협회로부터 다가올  (양사나이들에게 예수 같은 존재라 생각하면 된다.) 승천일( 양은 12 24 구덩이에 빠져 유명을 달리했다.) 기념하여 그를 기릴 음악을 작곡할 작곡가로 선정되었는데 슬럼프에라도 빠져버린 것인지 도저히 작곡을   없었던 것이다그러다 우연히 양박사를 만나고 그에게서 자신이 12 24 구멍이 뚫린 도넛을 먹는 바람에 더이상 양사나이가   없는 저주에 걸렸다는  알게 된다.

 

 “저주에 걸리면  사나이는 이미  사나이가 아닌 거야자네가  사나이 음악을 작곡할  없는 이유는 거기 있다고.”(p. 23)

 

 그러나 낙담은 금물양박사가 저주를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크리스마스 오전 1 16분에  양이 빠진 구덩이와 똑같은 직경과 깊이의 구덩이를 파서 거기로 떨어지면 된다는 것이다이미  사나이 협회에서 의뢰비를 받아 밀린 월세로 지불해버린  사나이는 구덩이를 파서 저주를 풀기로 결심한다그러나  사나이가  구덩이는  사나이가 전혀 예측할  없었던 세계로 그를 데려가고 마는데



 

 하루키가 갑자기 과거의  사나이가 그리워져  책을   아니었다 책의 발행년도를 찾아보니 1985년이다어떤 이들에겐 하루키의 최고작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발표되었던 바로  해다이걸 염두에 두고 읽으면  ‘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개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게  하나의 구덩이로 연결되는지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가 그리 다르지 않는 까닭이다기본 얼개가 비슷한만큼 말하고자 하는 주제도 비슷할 것이라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여기서  말을   없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그렇기도 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하루키가 하고자 했던 말을  사나이가  양이 빠진 구덩이의 직경과 깊이를 100분의 1 줄여서 팠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박사는 말했다.)처럼 축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아닐까 생각한다그렇다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만큼 진지하다거나 무거운  아니다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있는 작품이다이우일의 일러스트 때문에 그림책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같다

 

 ‘양을 쫓는 모험 성공으로 양을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를 열심히 정립해 나가던 무렵에 나온만큼 초기 하루키 모습이 그리웠던 분들에겐 좋은 선물이   같다 역시 지금의 하루키 보다  때의 하루키를  좋아하기에  즐겁게 읽었음을 마지막으로 밝혀둔다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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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1-01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나온 건데 이제야 한국에 나왔군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못 봤는데, 다른 책을 보다 한번 보고 싶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루키는 늘 두 세계를 그리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전에 잘 모르면서 읽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잘 알지 못하는군요


희선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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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이 횡행하는 요즘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주자들에 대한 정책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듯이 세계 곳곳에서 내가 속한 곳에 있지 않은 이들에 대한 적대를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본다. 우리나라 상황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몇 년 전 제주도에 왔던 예멘 난민에 대해서도 그렇고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들여다볼 때마다 허다하게 올라오는 다른 성별에 대한 적대도 그렇고,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한 방송사는 같은 건물인데도 분양을 받은 세대와 임대한 세대를 층으로 나눠 장벽처럼 분리하고 있는 걸 보도한 바 있다. 아래에 사는 임대 세대들은 분양 세대가 사는 윗층으로 결코 올라갈 수 없다고 말이다. 나치가 유태인에게 실시했던 게토 정책을 이제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꼴이다. 


 그런데 이런 격리는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 됨에 따라 더욱 증가하는 형편이다. 그런 차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나와 동등하게 대우 받으려면 나와 같은 자격을 가질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향도 심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없던 벽을 만들어 너는 여기 못 들어와 하는 걸 보고 있으면 어쩐지 도시 자체가 방랑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엔 중심지의 거리에서 몸 하나 얹힐 벤치도 찾기가 힘들다. 도시가 산책자마저 거부하면서 사람들을 이런저런 사회적 조건에 따라 영역을 구분하여 거기에만 있을 것을 강요하는 건 아닐까?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이를 두고 '영토화'라 불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존재이며 제각각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지만 개인들을 통합하여 일련의 목적에 따라 그들을 움직여야 하는 사회로썬 그런 개인들의 성향을 마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인을 '영토화'한다. 사회가 원하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토양에다 개인을 심고는 사회의 주류가 되는 사상과 가치관에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고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을 자신의 진실된 모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국적이 그렇고, 인종이 그렇고, 성별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은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사회가 입혀 놓은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어울린다고 사회가 설정한 행동 양식에 충실히 따르느라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의 토양에서 자라났다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진실로 여겼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은 이걸 단적으로 보여준 이론이 아니던가? 인간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특정 세력의 편의에 따라 제조되고 권위를 갖게 된 견해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거기에서 당장 자유롭게 되진 못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두고 '아비투스'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그 토양에 심어져 있었던 지라 이제 그것이 머리만이 아니라 몸까지 뿌리를 내려 다른 사람이나 사상 혹은 신념과 마주할 때 이성으로 제대로 헤아리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좋고 싫음을 느끼게 되는 걸 가리킨다. 그만큼 우리 내부에 깊이 심어져 손쉽게 떨쳐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족쇄를 순식간에 끊을 순 없다. 이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며 그렇게 되기 위해선 지식만이 아니라 경험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내가 접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고 장소에 닿으며 새로운 경험을 부단히 하는 게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지속된 몸으로 부대낀 경험이 누적되어야만 우리는 날 가두고 있는 껍질을 깨고 나와 날 식민화 한 영토에서 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의 퇴적을 위해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여행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그만큼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만나 낯선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나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벗어나 대면하는 타자에 따라 가변적인 정체성을 향유할 수 있는 과정, 그것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나는 분명 이러한 이유 때문에 201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도록 한 대표작이자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작이기도 한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이 여행을 전면에 가져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 방랑이다. 목적지 또한 없는 게 방랑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공간화가 불가능한 순수한 지속만을 시간의 본질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순수 시간'으로 이름 붙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순수 시간이야말로 방랑이다. 방랑은 오직 움직이고 있을 때만 존재하니까 말이다. '방랑자들'에서 행해지는 여행 또한 그렇다. 어떤 목적에 따라 선택된 여정이 아니다. 이 책의 모든 여행은 어느 순간 갑자기 어느 곳에 있게 된다. 방랑엔 경계가 없다. 중심과 주변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모든 곳이 타향이자 고향인 것이 바로 방랑이다. '방랑자들'의 모든 여행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없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사물들이 번갈아가며 자신의 얘기를 한다. 저마다 속한 시간과 장소에선 주연이지만, 소설에서 '듣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 것처럼, 다른 시간과 장소에선 오직 관객에 불과하다. 이는 방랑 혹은 여행자가 어디에 있든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자각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가 속한 곳의 가치관을 섣불리 내세워 자신이 현재 보고 있는 사건과 풍경을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겸허하게 들을 뿐이며 자신의 가치관은 최대한 배제한 채, 되도록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리려 애쓸 뿐이다. 소설 속 멘추가 말했던 어떤 유목 부족이 자신이 깃들고자 하는 부족의 종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켰듯이, 내가 아니라 타자를 중심에 두고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일반적인 규칙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하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을 일깨워서 굳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p. 149)


 방랑이나 여행은 그러한 타자 중심의 여정이다. 작가가 '방랑자들'에서 여행을 가져온 것은 그래서다. '방랑자들' 자체가 작가가 직접 한 여행 기록을 바탕 삼아 만들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방랑, 여행과 같은 순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라 본 타자와 세계는 더이상 배척과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물리학자가 말한 대로 세상엔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암흑물질이 지천에 널려있고 아무 것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까만 밤이야말로 세상의 본질이기에  내가 무엇을 알 것이며,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겠는가?


 "저기 바깥에도 있어요. 사방에 존재하죠. 고약한 건, 그게 대체 뭔지, 그리고 왜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p. 344)


 비로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밤이 세상을 본래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고, 더 이상 아무런 꾸밈도 포장도 없다. 낮은 빛이요 찬란함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예외이고 부주의이며 질서의 붕괴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실 어둠 그 자체이며 거의 검은색에 가깝다. 움직이지 않으며 차갑다.(p. 347)


 이렇게 무지와 예측 불가라는 한없는 어둠의 베일 속을 함께 헤쳐나가야 하는 동료이기에 타자들은 내게 다만 환대와 대화의 대상일 뿐이다. 어떤 목적을 위한 만남도 아니다. 그 누구도 수단이 아니다. 소설 자체가 그걸 보여준다. 여기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에 대해 좀 말해야겠다. 내가 소설이라고 말을 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그렇게 구분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방랑자들'은 소설이라는 말을 들을 때 흔히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정형화된 틀을 참 많이 벗어난 작품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인공도 없지만 줄거리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건 다만 이야기의 다발 혹은 묶음일 뿐이다. 그렇기에 소설에 흔히 있게 마련인 종결 같은 것도 없다. 여기서의 끝은 결말이 아니라 단지 소진이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제 다 떨어졌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방랑자들'은 방랑 혹은 여행 이야기의 순수 지속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순수 시간 그대로인 것이다.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p. 280)


 작가는 독자에게 바로 그 시간의 경험을 하도록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영토화로 인해 나도 모르게 이식되어버린 온갖 가치관의 족쇄로부터 날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나와 마주한 이들이 나와 아무리 다르다 하더라도 눈을 찌푸리며 외면하기 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어 대화 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타자를 중심에 둔 대화 시간의 창출이 바로 '방랑자들'인 것이다.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p. 191)


 사실 이런 시간의 창출은 현재 폴란드 상황을 보자면 절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2차 대전 당시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적대로 똘똘 뭉친 나치즘에 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였지만 그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는지 현재의 폴란드는 한없이 전통적 권위와 위계 질서를 숭상하는 보수로 치닫는 중이다.


 낙태가 전면 금지되고 동성혼이 절대 금지되는 등, 유럽이 가고 있는 방향과 정반대의 모습을 잇달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확고하다고 여기면서 그것만이 옳다고 집착하는 모양새다. 이런 까닭에 유럽 사회에선 폴란드가 이러다 독재 국가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태고의 시간들'부터 내내 타자에 대한 포용과 변화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강조했던 작가로서는 이러한 폴란드의 상황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흐름에 제동을 걸고자 '방랑자들'을 썼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호소의 대상은 폴란드만이 아니라 비록 정도는 덜하지만 그 징후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이기도 하다. 소설은 자기보다 많이 젊은 여자에게 집착하는 남자를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신이 처음부터 짧고 강렬한 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착각한다. 위험천만한 경주와 승리, 그리고 탈진. 그러므로 그들을 살아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흥분과 전율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값비싼 삶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비축된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면 그때부터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아가야 하므로.(p. 558)


 비록 젊은 여자를 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모습 또한 이와 얼마나 다를까 싶다. 나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욕망을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시간에 천착하느라 이미 우리 영혼의 잔고 또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기 전에  '방랑자들'이 이끄는 대로 숨이 막히는 걸 참으면서도 안주했던 곳을 박차고 나와 담장을 뛰어넘어 탈주를 감행해 보는 건 어떨까? '방랑자들'은 그렇게 하여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우리가 마주한 하늘과 대지가 오직 자유로움으로 가득차 환영할 것이라 말한다. 그러니 기꺼이 넘어가 보자.

 

 내가 아니었던 나를 버리고 타인과 함께이기에 더 커져버린 자유 속에서 나만의 나를 형성하는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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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퍼슨
크리스틴 루페니언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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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틴 루페니언의 ‘캣퍼슨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캣퍼슨 포함하여 모두 12편의 단편이 여기에 실려 있다무엇보다 표지가 눈길을 끈다한창 키스를 나누고 있는 남녀의 입을 클로즈업한 일러스트다



 독자는  표지에서 무엇을 짐작할  있을까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처럼 야한 소설틀린  아니다. ‘캣퍼슨 문득 2000년에 HBO에서 방영한 드라마 ‘섹스   시티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 혹은 놀라움을 생각나게 했으니까그러나  소설은 그걸 추구하고 있지 않다 보다는 관심과 사랑에 어리고 있는 폭력을  많이 다룬다표지의 키스 또한 마찬가지다사실 이건  번째에 실린 ‘  유어 게임에서 주인공인 열두  소녀 제시카에게  어른 노숙자가 갑자기 달려들어  키스를 표현한 것이니까 말이다.(이게 정말 그런 것인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다만  생각으로  번째 단편에서      키스가 내내 주인공을   들게  정도로 두려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마디로 야한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이면에 깃든 폭력성에 초점을 맞춘 어두운 사랑 이야기다.


  날개에 실린 작가에 대한 소개글을 보니 그녀는 자신을 ‘스티븐 킹을 읽으며 자란 아이라고 밝혔다고 한다그래서 그런지 스티븐 킹의 흔적이 보인다. ‘  유어 게임 그렇고(후반에 충격적인 내용이 있다.) ‘정어리 그렇고( 역시 마찬가지!) ‘성냥갑 증후군 그렇다.( 또한 마지막이 섬뜩하다.) 스티븐 킹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캣퍼슨’ 역시 마음에  것이라 생각한다.


 ‘캣퍼슨 등장하는 주인공 여성들은 연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닥쳐온 난관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캣퍼슨에선 처음엔 동경했으나 만나면 만날수록 실망만 안기는 자기보다 한참 연상인 남자와 헤어지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해 고민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결국 그녀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친구가 무작정 주인공인 척하고 보낸 결별의 문자 덕분에  남자와 헤어지게 된다 번째 단편의 주인공 제시카 역시 어른인데다 찰스 맨슨을 신봉하는 위험한 남자라는  알면서도 자정에  둘이 만나자는  남자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풀장의 소년에선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등장하며 ‘성냥갑 증후군에서도 자신의 진짜 고통이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지 직접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남성의 권위에 기대어 규정하는 여성이 출연한다아마도 이토록 자주 보이는 여성들의 수동성은 현재 사회의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반영으로 보인다그렇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제한한 영역 안에서 관심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폭력을 그리는 것이 바로 단편집 ‘캣퍼슨 것이다그녀의 소설이 발표 당시 미국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런 폭력성을 두드러지게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어떤 분들에겐 주인공 여성들의 행태가 답답하고 자주 스티븐  식의 판타지적인 해결법을 제시하는  불만으로 다가올  같다그러나 내게는 그만큼 지금 여성을 가두고 있는 현실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의 방증으로 보인다.





  해결의 어려움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나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단편들이 ‘나쁜 아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한다. ‘나쁜 아이에선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연히 자신의 집에 동거하게  남자에 대해 처음엔  뜻이 없었다가 그를 관객으로  자신들의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남자에 대한 지배욕을 키워만 가는 남녀 커플이 등장한다. ‘좋은 남자에선 자신을 여성들에게 ‘좋은 남자라고 여기는그러나 여성들이 그다지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남성이 주인공이다.


   단편에서 두드러지는  ‘연기(performance)’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모두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끊임없이 신경쓰면서 자기 검열을 한다커플은 처음부터 그러고 싶어서 그런  아니었다하다보니 거기에 중독된 것일 뿐이다. ‘좋은 남자 주인공 또한 나중에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본성이 그랬던  아니다부족한 외모를 가진 그가 원하는 연애를 하기 위해선 그런 남자인   필요가 있었기에 스스로 속일 정도로 충실하게 연기했을 뿐이다.


  아무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그는 그녀들에게 그렇게 말하려 애쓴다그저 나를 봐주고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란 것뿐이야문제는 모두  착각이었다는 거지나는 좋은 사람인  가장했고 이후에는 멈출 수가 없었어.(p. 274)


 그들은 연기했고  연기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었는가

  연기가 바로 자기 인정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아이 커플도, ‘좋은 남자 주인공도 털어놓는다자신들의 연기를 통해 점점  커지는 자신의 존재감이 중독이라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가없는 과시와 그것을 통한 자기 긍정의 욕구가 있었을 뿐이다연극의 연기는 관객을 중심에 두지만  연기에선 정반대다그들은 연기를 통해 자신들이 참여자를 끌어들인 관객인 상대방을 오직 자기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타자에 대한 태도가 현재 여성들을 두려움에 젖게 만들고 연약하게 몰아가는 남성 중심 사회의 근본에 있지 않은가 묻고 있는 것이다.


 ‘성냥갑 증후군에서 드러나는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남성들의 여성들이 가진 고통의 규정이나 ‘무는 여자(Biter)’에서 어릴 때부터 자주 물었던 여성을 그걸 부끄러운 병으로 규정하고 치료하려 했던 세상의 모습에 비추어   그러하다이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정신병의 일종으로 치부했던 초기 정신 의학의 행태와 유사한데 물론 이런 남성 중심 사회의 처방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입증된다. ‘성냥갑 증후군 여성이 가진 고통의 근본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남성에 의해 전혀 근절되지 않으며 ‘무는 여자’ 역시도 고의적인 남성의 폭력에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자기 정체성의 주장이기도 했던 ‘무는  폭발하듯 발현되니까 말이다결국 나를 위해 타인을 도구로 쉽게 전락시키는 사회 혹은 문화의 근본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캣퍼슨 여성에게 폭력적인 현실을 스케치하면서  폭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또한 짚어가는 작품이다그러니 표지로 지레짐작해선 곤란하며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심리 묘사도 뛰어나 가볍게 읽으면서 오늘 우리 사회의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만한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덧붙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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