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스테프 차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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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미국을 뜨겁게 달궜던 'Black Lives Matter'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여전히 활발한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다. 특히 그 시위는 과거의 사건을 다시금 기억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1992년에 6일 동안 벌어졌던 'LA 폭동'이다. 흑인 로드니 킹을 경찰 여럿이 집단 구타한 것에서 촉발된 그 폭동은 LA 전역을 걷잡을 수 없는 혼돈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이것은 그대로 인종차별이 미국 사회를 쉽게 붕괴시킬 수 있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미국 사회 모습을 보자면 아직도 그들은 그 사건에서 아무런 교휸을 배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LA 폭동'을 충분히 되새겨보지 못했기에 그런 것일수도 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을 남겼고 또 그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선 무슨 일을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않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소설을 통해 과거의 그 때로 다시 한 번 돌아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마침 그런 기회를 가져다 준 작품을 하나 만났다. 제목은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제목부터 뭔가 오싹한 기운이 풍겨오는 이 소설은 놀랍게도 한국계 미국인 작가의 스릴러 소설이다. 작가의 이름은 스테프 차.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는 이 작가는 그곳을 배경으로 한국계 미국인 사립탐정 주니퍼 송이 활약하는 작품으로 2013년에 데뷔했으며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2015년까지 주니퍼 송 시리즈 3부작을 완료한 그녀가 201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LA 폭동이 일어나기 1년 전에 같은 도시에서 발생한 '라타샤 할린스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려 29년이 지난 뒤 다시 한 번 서로 얽혀드는  상황을 통해 증오와 용서의 상관 관계를 그려나간다. 라타샤 할린스 사건은 일명 두순자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건 15세의 라타샤 할린스를 총으로 쏘아 죽인 사람이 바로 한인 두순자였기 때문이다. 라타샤는 두순자가 운영하는 가게에 우유를 사러 왔다가 절도를 의심한 두순자에 붙잡혔고 억울하게 도둑 누명을 쓴 것에 격분하여 자신보다 몸집이 훨씬 작은 두순자를 네 차례 가격했다. 그리고 쓰러진 두순자를 내버려두고 가게를 나가려다 뒤에서 두순자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평소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한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흑인들(이것은 스파이크 리가 89년에 발표한 영화 '똑바로 살아라'에도 묘사되고 있다.)에게 대대적인 분노의 불길을 일으켰고 결국 LA 폭동 때 한인 가게들이 대거 약탈당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스테프 차는 그 고통스런 기억을 다시 불러온다. 두 인물을 매개로 하여. 하나는 흑인 숀이고 다른 하나는 한인 그레이스다. 숀에겐 빛과도 같았던 누나가 있었다. 이름은 에이바. 피아노를 너무나 잘 치고 활달하며 자주적인 그녀는 소극적인 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누나는 사촌 레이 대신 우유를 사러 한인 가게에 들렀다가 한인 여자가 쏜 총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맞다. 에이바가 바로 라타샤인 것이다. 소설은 29년 뒤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2019년의 LA도 91년의 LA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을 보여주듯 에이바와 비슷한 나이의 평범한 고등학생 흑인 알폰소 쿠리얼이 그것도 자기 집 뒷마당에서 경찰에게 총을 맞아 숨진 것이다. 그저 현관문 열쇠가 없어 뒷문으로 들어가려던 것 뿐인데 범죄자로 오인 받아 사살당한 것이다. 에이바가 살해당한 상황과 똑같이.


 그렇지 않아도 알폰소 쿠리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경찰에게 책임을 묻는 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91년에 죽은 에이바의 이름을 외친다. 그들은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았다. 그 후로도 계속 그녀와 똑같은 억울한 죽음들이 이어져 왔으므로.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일까? 그 시위 현장에 같이 동참했었던 한인 그레이스의 엄마 이본이 장을 보러 나왔다가 그레이스가 보는 앞에서 한 괴한에게 총격을 당한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생명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 이 사건으로 그레이스는 엄마 과거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건 바로 에이바를 쏴 죽인 한인 여자가 자기 엄마라는 사실. 경찰은 29년 전 사건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용의자를 찾아 나선다.



 [스테프 차의 모습과 미국 원서 표지]



 에이바의 죽음으로 한 때 많이 방황하며 갱의 일원이 되어 범죄에 손을 대기도 했던 숀.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겨 지금은 정신차리고 간신히 얻은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평범히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의 일상이 이본에 대한 저격으로 위협받게 되었다. 경찰이 의심의 눈초리를 자신과 가족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얼마 전 감옥에서 출소한 사촌 레이가 문제였다. 자신과 달리 레이는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범법과 합법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겐 아내와 아들 대릴, 딸 다샤도 있었지만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인한 위축된 자존감 때문에 불안하게 흔들린다. 숀은 이본이 에이바를 죽인 바로 그 여자이며 최근 총에 맞았다는 걸 듣자마자 혹시 레이가 그런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피해자는 어느덧 가해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었다. 이런 자리바꿈은 흥미롭긴 해도 사실 좀 위험한 설정이긴 하다. 제대로 묘사하지 않으면 독자에게 꽤 작위적이란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설득력 있는 전개로 그런 위험에서 벗어났다.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제 역할도 잊지 않는다. 과연 이본을 쏜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은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반전도 마련되어 있다. 거기다 그 반전은 작가가 소설을 통해 주려 하는 메세지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도록 연출되어 있다. 아무래도 실제 사건을 모델로 했기 때문인지 작가가 공을 들인 게 역력해 보인다. LA 특유의 분위기는 물론 주요 캐릭터의 묘사도 좋고 이야기 흐름도 유려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러는 가운데 작가는 차별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도 아니라는 걸 슬쩍 내세운다. 차별은 어떤 인종이든, 계급이든, 국적이든 행해질 수 있다고. 타인을 불신하게 만드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레이스가 한 유투버 기자가 쳐 놓은 함정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을 드러내버렸던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지 않아도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어떤 행위를 선택할 때 이성적 판단 보다 자기 내부에  알게 모르게 형성된 편견이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바 있다. 무관심과 무책임한 증오 속에 축적된 편견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를 불살라버릴 성냥개비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 상대방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보려고 하는 것. 파멸의 화염을 막는 소방수의 물줄기는 거기에서 분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이스가 대릴의 손을 맞잡고 자신의 엄마에 대해 알려주는 장면처럼. 이러한 노력들이 현재도 여전히 인종차별의 형태로 횡행하고 있는 적개심의 바다를 가르는 기적이라는 것을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는 몰입감 넘치는 이야기로 선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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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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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나무가 울울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서 산행하기에 적합한 청우산에서 심하게 부패한 여성 변사체 하나가 발견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신작 미스터리 소설, '지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시신의 상태를 보아하니 실족사로 보이는 정황. 하지만 얼마 전에 서울에서 사람을 보이는 대로 너무 믿었다가 세게 뒤통수를 맞아 좌천까지 당해 이곳의 지방 관할로 내려온 형사 백규민은 시신 근처에 신발이 없다는 점 때문에 사인을 의심합니다. 과연 떨어졌으리라 생각되는 지점엔 죽은 여자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 안엔 유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서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증오하면서 사랑한다'(p. 25)


 한편, 장면이 바뀌어 서울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는 여성, 윤의현에게 경찰에서 전화가 걸려옵니다. 그녀가 얼마전에 실종 신고를 한 동생 오기현의 시체를 찾았다고 말이죠. 시신이 정말 동생이 맞는지 확인하러 간 자리에서 만난 규민에게 윤의현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살이 맞는 건가요?(p.30)


  자꾸만 자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윤의현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보이는 대로 믿었다가 큰 낭패를 본 적이 있는 규민은 의현에게 개인적으로 끌리는 것도 있어서 사건 종결을 뒤로 미루게 됩니다. 


 이것을 기점으로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병행하면서 전개합니다. 하나는 물론 오기현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푸는 것이구요, 다른 하나는 윤의현이 강사로 일하는 대학에서 발생한, 이민흠이란 교수가 예나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는 백규민이 주역을 맡고 후자엔 윤의현이 당담합니다. 한때 윤의현은 이민흠의 편에 서서 학내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인지 이번엔 예나를 직접 찾아가 시사 방송에 나가도록 권유하고 이러한 공론화를 통해 사건 때문에 휴직 중이던 이만흠이 아무렇지 않게 교직으로 복귀하는 걸 막으려 합니다. 처음엔 이 둘이 너무나 다른 사건이므로 왜 작가가 이렇게 병행하는지 의문이 듭니다만, 놀랍게도 후반에 가면 이 둘은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그것도 아귀가 딱 맞게. 전혀 다른 사건 같았던 것들이 알고 보니 하나의 사건이 가진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는 걸 확인하는 것도 미스터리 작품을 통해 얻게되는 재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 재미를 이 소설, '지문'을 충분히 만끽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백규민이 마주한 미스터리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단 오기현의 삶 자체가 복잡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읽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셨을 겁니다. '친자매인 것 같은데 왜 언니와 동생의 성이 서로 다르지?'하고 말이죠. 둘은 친자매가 맞습니다. 그런데 둘의 부모가 오기현이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죠. 어머니가 기현을 데려갔고 지금의 아버지, 오창기와 재혼했습니다. 그래서 성이 다른 것이죠. 한편 오창기는 꽃새미 화원을 소유한 부자로, 그가 사는 동네 사람과 경찰마저도 굽신굽신하는 유지입니다. 그러나 안좋은 소문이 돕니다. 오창기가 오기현을 학창 시절부터 학대했다는 것이죠. 그걸 확인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꽃새미 화원에서 일하는 신명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줌 싼다고 맞고, 운다고 맞고, 처먹는다고 맞고(p. 104)


 그런데 이렇게 말한 신명호 또한 오창기가 지속적으로 괴롭혀 온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무 살 이후로 오창기에 의해 꽃새미 화원에 갇혀 누추한 거처에서 아무 보수도 받지 못하고 몇 십년을 화원에서 일했습니다. 얼마 전 세간을 충격 속에 빠뜨렸던 염전 노예와 마찬가지인 신세였던 것입니다. 신명호는 오기현이 학대 당할 때마다 오창기를 막으려했는데 그 때마다 오창기는 약물 주사를 놓아 무력화시켰습니다. 물론 주위엔 신명호가 정신에 문제가 있어 정기적으로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말해두었구요. 이런 식으로 오창기의 범죄는 오랫동안 은페되어왔고 아무래도 그것이 기현의 죽음과 많은 관련이 있어 보였습니다.


 자, 이것으로 소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는 다 한 것 같습니다. 과연, 오기현 죽음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요? 앞서도 말했듯이 이 둘의 해답은 놀랍게도 정확히 하나로 모여지게 됩니다.


 이선영 작가의 '지문'은 근래 읽은 한국산 미스터리 중 가장 만족감이 컸던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사실 소재가 그리 신선하지 않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익숙한 소재를 작가는 능수능란한 솜씨로 신선한 요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문'은 스릴러처럼도 보이지만 아마도 정통 추리 소설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른바 범인을 찾아가는 'WHODUNEIT' 장르 말이죠. 이런 후더닛 장르에선 엘러리 퀸이 그랬듯 얼마나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하느냐가 작품의 성공을 결정하는 관건입니다. 공정한 게임은 작가가 작품 곳곳에 범인을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여 주의 깊은 독자라면 작가가 밝히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여야 인정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충분히 공정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읽고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전 두 번 읽어보니 단서가 여러 곳에서 나와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더군요.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것이 뭔지 밝힐 수 없어서 아쉽군요. '아니! 이런 것도 단서였어?'할만한 것들이 있는데 말이죠.


 이 소설엔 반전이 무려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물론 범인에 관한 것이죠. 분명 단서를 놓치셨다면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두번째 의문 - 윤의현은 왜 나중에 가서 갑자기 예나를 위해 이만흠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 연관된 것인데 이 반전은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사실 전 범인은 예상했는데 이건 정말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작가의 재주가 아주 대단하다고 진심으로 느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가장 만족스런 한국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더군요. 두 개의 반전이 독자에게 가져다 줄 충격을 위해서 작가는 서술 트릭을 썼습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썼던 방법말이죠. 이 소설을 재밌게 읽으셨다면 '지문'도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좋은 얘기만 마구 쓴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척박한 한국 미스터리 소설의 풍토에서 오랜만에 이토록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나고 보니 없는 말, 있는 말 마구 지어내서라도 한껏 응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니 과한 칭찬에 눈살이 다소 찌푸려지더라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여하튼 이선영 작가의 다음 미스터리 작품이 정말 기다려집니다. 그 때도 지금처럼 열화와 같은 응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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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여러 사람이 보고 쓴 글 봤습니다 책을 본 게 아니고 글을 봤다니... 제목인 ‘지문’은 뭘까 싶네요 그건 책을 봐야 알겠지요


희선

초딩 2021-06-0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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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아는 것에 있어선 종결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연구된 것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걸로 충분해 하면서 흙을 덮어선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 예일대 역사 교수로 있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은 탓이다. 예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꽤 많이 읽었다. 물론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러드랜드', 즉 동유럽에 대해서도 익히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었나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무려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내용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당연했다. 저자의 시선이 향하는 눈높이가 이전에 나온 책들과 달랐던 것이다. 여지껏 내가 만난 동유럽을 다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은 초점이 위에 있었다. 전쟁을 지도한 사람, 그 아래서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로 수행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전투. 이러한 군사적인 게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야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을. 그는 말했다. 이 책은 희생자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소환할 것이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의 목소리 또한 울리게(p. 19) 할 거라고.



 그렇게 하자, 새로운 사실들의 대륙이 열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겼느냐에 관한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사실의 얼굴들을 확인하면서 충격과 당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규모는 내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막대했고 그 학살을 수행하는 방법의 잔인성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임산부나 아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기까지 무참히 살육했다니! 더우기 천명도 아니고 만명 단위로 곳곳에서 굶겨 죽이거나 총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내 죽이는 것을 보고 절로 저자도 물었던 물음을 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p. 682). 그것도 같은 인간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는 그 의문의 대답을 찾는 궤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게 인간의 얼굴을 오롯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가?

 그 추적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전개된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 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p. 21)


 정확히 소련이 처음 집단화 정책을 시작했던 1933년부터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1968년까지 모두 11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블러드랜드에 일어났던 일을 담는다. 시작은 1933년, 소련이 열었다. 이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오직 독일만 자행한 줄 알았는데 '독소전쟁'에서 대적했던 소련 또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도 독일보다 먼저.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에 세 번이나 대대적으로 그러한 일을 감행했다. 1차는 집단화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농민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고, 2차는 당시 실시한 계획경제의 성공을 국제 사회에 선전하고자 수출 목표를 여건 상 불가능한데도 무리하게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인해 전자에선 많은 이들이 정든 고향에서 강제추방 되었고 결론이 지어진 3인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했다. 후자에선 오직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해 특히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적으로 굶김을 당했다. 애초에 소련의 사회주의는 농민의 계급적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직 지도자 스탈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기 위해 평범한 농민들마저 당국의 손에 의해 계급의 적인 '부농'으로 둔갑되어 처형되었고 살던 곳에 머무를 자유와 내가 생산한 것을 먹을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소련은 만인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오직 스탈린 하나만을 위한 사회주의였다. 이건 뒤이은 1938년과 1939년에 일어난 3차 학살에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이 자신이 바라는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 이유를 블러드랜드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탓으로 돌려버렸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소수 민족이 소련의 적과 결탁하여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무려 25만 명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p. 195)

 초기 소련은 박해받는 인종과 민족에게 기꺼이 자신의 문을 열어주는 나라였다. 그렇게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 다문화 국가'(p. 171)로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걸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뻔뻔해져 있었다. 소련이 직접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 건 내부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민초들의 반응 같은 건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까마득한 저 아래에 있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스탈린이란 개인과 블러드랜드에 사는 평범한 개인의 차이란 실로 엄청났다. 




 여기에 서쪽으로 스탈린만한 권력을 가진 또 한 명의 개인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히틀러다. 그 또한 염원하는 제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란 미래의 광휘에 눈이 멀어 아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자다. 그에게 인간이란 설령 자국민이라 하여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을 판단하는 관점은 오직 하나 유용성이었다. 거기에 유대인은 독일 제국 건설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걸림돌로 보였다. 그는 그걸 유럽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모조리 격리시켜버릴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폴란드를 다른 유럽 유대인들을 최종 제거 전에 모아두는 집단거주지로 삼고자(p. 202) 소련과 불가침협약을 맺은 뒤 침공한다. 원래 사회주의는 반파시즘을 천명하고 있기에 소련은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서는 안되었지만 바로 눈 앞으로 당도한 영토 확장의 유혹은 스탈린에게 너무나 달콤했다. 소련은 불가침협약과 동시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고 리투아니아를 차지했다. 스탈린의 눈에 블러드랜드의 인민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함께 건설하는 동료가 아니었다. 히틀러와 똑같이 오직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둘의 오만하고 비정한 시선 아래에서 수많은 이들이 게토로 강제 추방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 독일에 의해 공개적으로 또 때로는 다만 지식인이란 이유로 소련에 의해 은밀하게.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인에겐 야망이 있었다.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대국의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문제였다. 제국이 되려면 국토의 식량과 자원이 한정된 이상 바깥의 것들을 가져올 수 있는 해외 통로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바다로 세계 시장과 안정되게 연결되지 않고서도 번영을 구가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지배권을 영구히 확보할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되려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광대한 영토가 필수적(p. 283)이었다. 히틀러의 눈에 마침 그런 나라가 보였다. 바로 소련이었다. 거기 있는 슬라브 민족을 모조리 제거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면 전쟁으로 인한 자국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자원 창고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히틀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오늘의 막역한 동지라도 얼마든지 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한다. 이른바 '독소전쟁'이 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속도가 문제였다. 당초 계획은 12주 안(p. 302)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질질 늘어졌다. 원체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은 이런 상황의 대비책을 전혀 세워두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독일군이 먹을 식량은 매우 부족해졌다. 이에 독일은 1933년에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자기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이 구축한 집단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강제적으로 굶겨죽인 것이다. 레닌그라드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도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여 탈출로를 봉쇄하고 그 안의 시민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위가 끝나는 1944년까지 무려 100만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p. 309) 이런 무자비함은 민간인에게만 행해지지 않았다. 소련인 전쟁 포로 또한 그 대상이었다. '독소전쟁' 동안 나치 독일이 만든 포로수용서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수용된 포로들의 삶을 끝장내버리는 것(p. 316)이었다.


 이러한 처사는 나치 독일이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인,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p. 319)


 이 논리는 독일인에게 한 번도 반박당하지 않았다. 대놓고 과오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들 얌전히 추종했고 수족처럼 움직였다. 더러는 하달받은 목표량보다 더 많이 살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히틀러가 머리가 되고 각 독일인들은 저마다 손 발 몸통 등이 되어 거대한 육체를 이룬 듯했다. 토머스 홉스가 국가를 비유한 성경 속 괴수 리바이어던을 묘사했던 그대로. 가히 '전체주의'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었다.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블러드랜드는 두 전체주의의 거인들에게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었고 육체의 부분이 되지 못하는 타자들은 죽음만이 허용되었다.




 애초에 이 거인을 태어나게 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인은 이념이 아니라 꼭대기에 자리잡은 한 개인의 욕망으로 움직였다. 그가 원하는 건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롭고 방해가 되는가에 대한 그의 규정 역시 모두의 규정이 되었다. 지금의 시선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치 독일의 '마지막 해결책'은 그래서 가능했다. 나치 독일은 패전의 기미가 짙어지자 더욱 유대인 대량학살에 박차를 가했다. 본래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훗날에 살길을 도모하고자 관대함을 보이기 마련인데 나치 독일은 거꾸로 나아갔던 것이다. 패색이 차츰 짙어질 때마다 마치 기를 쓰듯 한 명이라도 더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히틀러의 망상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할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그만큼 승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폴란드엔 베우제츠, 트레블린카, 소비부르에서 수용소를 빙자한 학살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건 식량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때때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멈춰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온전히 대량 학살 그 자체만을 위한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단 한 사람의 부조리한 망집이 탄생시킨, 오직 폴란드 외의 유대인 학살만이 목적인 장소. 유대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우리는 유대인이 수용소에 얼마간 있다가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유대인들만이 수용소에서 생활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바로 처형되었다고 한다.(p. 676))


 어쩌면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학살 때문에 유독 '아우슈비츠 수용소'만이 우리 뇌리에 각인되었고 오직 그곳만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안간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었고 그 정점에 달한 것이라 봐야 옳았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소련도 엄연히 독일과 대등할 정도로 대량 학살의 집행자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이미지가 없는 것은 소련은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것과 스탈린이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히틀러와 달리 필요할 때 자제할 줄 알았기(p. 686) 때문이다. 이러한 둘의 성향 차이가 결국 둘의 운명을 갈랐을지 모른다. 스탈린 역시 제국을 꿈꿨으나 이건 확장 보다는 바야흐로 점점 거세지는 서양 제국에 맞서 자기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지키는 것에 강박적이었다. 이것이 전후 폴란드를 비롯한 블러드랜드의 사람들에게 암울한 운명의 장막을 드리웠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대표하듯이, 체제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설령 같은 이념의 헌신자라고 할 지라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생애에 구상한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하는 걸 걱정했지만 스탈린은 누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를 염려했다. 전체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개인이라는 비유는 여기서도 연유한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글에서 개인을 자주 호명하는 것은 티머시 스나이더의 이 책 또한 그런 개인을 역사의 무대 위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에 동조해서다. 물론 그가 데려오고자 하는 건, 지금까지 역사의 어둠 속에 내버려졌던 개인이다. 두 전체주의 체제 사이에 끼여 번갈아가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당시 역사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그들은 이름조차 한 번 호명되지 못하고 망각의 흙더미 아래 묻혀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 흙을 모두 걷어내고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어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하듯이 호명은 부르는 대상에게 유의미한 실존을 가져다 준다. 그는 그렇게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꼭꼭 새겨두기 위하여. 비극적인 역사는 망각과 억압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런 상황이 찾아온다.(p. 714)

 그가 책 곳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희생자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혹은 그녀의 삶을 삽입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서 재현의 중심을 차지했던 가해자 개인들에 맞서 희생자 개인을 대조시킨다. 이는 내가 보기에 서로 대등한 개인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나 또한 그래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개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마땅히 그들에게도 히틀러, 스탈린에 대해 쏟는 것만큼 관심을 분여해야한다는 뜻으로.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이토록 개인적인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그것을 통해 블러드랜드의 비극을 저지할 대안을 슬쩍 내놓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건, 하나가 지배하는 거대한 몸체에 달라붙어 각자가 가진 고유한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가 자행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다. 


 개인의 위상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정확히 지적하는 대로 장차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자라날 싹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돋아나 있었다. 그 전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증유의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총력전으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은 물론, 경제와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의 구별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참전한 모든 국가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임했으며 그 압도적인 동원과 조직 속에서 개인의 의미는 미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예전엔 포로로 잡히면 부모나 형제에게 몸값을 받아 풀려날 수 있어서 군인 보단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거래 없이 오직 패배한 부대의 일부분이 되어 1차 세계대전 때 처음 생긴 포로수용소에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면서 속박되었다. 더구나 이 때 개발된 독가스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많은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사람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규모가 그랬던 것만큼 개인 하나를 식별할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개인은 그렇게 고유의 가치를 잃고 자기보다 훨씬 더 큰 것의 부분이 되어갔다. 전쟁의 성격이 사회 전체의 전면적 동원으로 달라져버렸기에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사람들을 필요할 때마다 차출할 수 있도록 애국심이든 민족주의든 이념이든 뭐든 다 이용해서 일원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발맞춰 개인들은 자신보다 자기가 속한 전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설득되거나 선동되었다. 이것은 흘러흘러 마침내 전체주의를 낳았다. 또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본질 보다 외피를 중시하는 것은 타인 또한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도록 이끌고 말았다. 


 한 마디로 각 개인 간의 거리가 모두 없어진 것이다. 한 몸이 되어 머리의 존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고 욕망하는 대로 욕망했다. 이제 그들의 눈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달라붙은 몸의 눈으로 보았고 다른 몸의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몸이 되었다. 너무 단순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참혹한 비극은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극을 또 언제든 양산할 수 있는 몸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 분리와 거리두기로 개인의 고유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달라붙었던 몸의 생각과 시각의 복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고와 시선으로 다른 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외부적 규정의 간섭이 없다. 오직 서로 함께 경험하면서 생성된 자신만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보고 느낀 것으로 층층이 이뤄져서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 이러면 아무리 힘있는 자가 자신의 규정을 강요해도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책 후반에서 확인한다. 전쟁 후, 블러드랜드의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에게 어떤 꼬리표를 갖다 붙일까 전전긍긍하며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고 스탈린의 손가락이 가리키자마자 충성의 증명으로 같은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점령자들이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 이쪽 저쪽에 달라붙기 바빴던 부역자들도 있었다. 모두 너무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어서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조자 그걸 붙잡을 용기를 못냈던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안전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진 못했다. 몰로토프처럼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조석변개하는 스탈린의 규정 앞에선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것이 궁극의 운명이라면 처음부터 그 길을 걷지 않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티머시 스나이더는 개인에 집중한다. 그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무이(絶代無二)의 주체들이며 단순히 희생자라는 범주에 넣어 뭉뚱그려서 말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p. 703)

 그래서 그가 사이 사이에 살아있는 희생자 개인의 삶을 누벼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겪은 비극과 느낀 참혹함을 감정적으로 공명까지 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단지 희생자의 리스트 속 한 줄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사랑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하여 더욱 그들의 삶을 무참하게 끝장낸 비정한 폭력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곱씹게 만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지워 사물로 만드는 일을 경계할 것이라 다짐케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기 전에 그가 아무리 불가해하더라도 헤아림의 노력을 거두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한 걸음이 모이고 쌓인다면 블러드랜드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p. 703)

 티머시 스나이더의 안내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단순한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과거의 참상을 막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걸 선연히 깨닫는다. 더구나 블러드랜드에서 비극을 가져온 것은 현재도 횡행하고 있기에 그가 재현한 역사와 그를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건 더욱 긴요한 일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 사건이나 최근 단지 아시아 여성이란 이유로 총격이나 구타를 가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이들은 요즘 들어 우익화가 날로 심화되고 타자에 대한 적대가 늘어가는 유럽을 보며 흡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블러드랜드의 비극은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 있지 않다. 사이드미러에 쓰인 글대로 정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며 타자에게 먼저 공존을 위한 대화를 건네는 작지만 더없이 소중한 노력들이 필요한 때다. 바실리 그로스만이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모두의 입에서 울려나올 때까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임을 알았다.(p.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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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 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딘가에서 전쟁 때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말을 보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지요 전쟁을 겪고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봐야 할 텐데... 이건 전쟁 때만 그래야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희선

희선 2021-05-1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로이 님... 우수작 축하합니다 기쁘시겠습니다


희선
 
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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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타고난 정체성 하나 때문에 일상의 모든 순간이 공포로 바뀌어 버리는 일이 인류 역사에는 반드시 존재한다. 만일 당신이 흑인 노예 제도가 횡행하던 미국의 남부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랬을 것이다. 자녀나 형제 혹은 부모가 다른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도 무력하게 바라만 보아야했을 것이며 동작이 조금만 굼떠도 등으로 쏟아지는 채찍 세례를 감내해야했을 것이며 그렇다고 대거리는 물론이고 백인의 눈을 감히 쳐다봤거나 사소한 말실수 하나라도 했다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린 그걸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통해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일본이 무단 통치할 때 태어난 소년과 소녀 또한 일본군에 의해 언제 강제 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갈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1930년대에 그들이 독일을 통치하자 거기 사는 유태인은 삽시간에 독일인이 아니라 다만 유태인이 되어버렸다. 1차 세계 대전 때 유태인들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으로 독일을 위해 군인이 되어 그 참혹한 서부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런 사실들은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나치에게 중요했던 건 유태인이 뭘 했느냐가 아니었다. 그냥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 중요했다. 바퀴벌레를 잡을 때 우리는 성별이나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나치에게 유태인이 그랬다. 유태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청소 대상이었고 체포되는 족족 그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소설, '여행자'는 바로 그런 일상을 담는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이 자국 내 유태인이 외국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국경을 모조리 폐쇄해버린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그 소설에서 우리는 질버만이라는 유태인과 동행한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위해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용감히 싸웠다. 그 때 동료 군인이었던 베커와 함께 꽤 벌이가 잘 되는 사업체도 운영 중이다. 질버만은 베커와 함께 역에서 자기가 타고 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한다. 그 때 그는 그저 도박 중독에 빠져 사업 운영에 차질을 빚고 있는 베커를 탐탁지 않아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타게 될 기차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 되리라는 걸 조금도 예감하지 못한 채.


 물론 그는 바보가 아니다. 공공연히 유태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는 건 뼈져리게 알고 있다. 곳곳에서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체포되는 걸 허다하게 보았으니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은 아리안인으로 보이는 외모라 그러한 기습적인 체포에선 살짝 비켜나 있었다. 하지만 그 외모 때문에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이 얼마나 유태인을 혐오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가득 체험하고 있었다. 외모만 보고 자신을 그저 아리안인이라고 여긴 독일인들이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태인에 대한 생각들을 숨기지 않고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이니 아무래도 질버만 또한 독일을 떠날 것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아들에게 자신과 아내를 위한 비자 발급을 부탁한 상태다. 그러나 아들은 그걸 쉽사리 구하지 못하고 있고 급기야 질버만의 집이 유태인 체포를 위해 돌아다니는 청년단원들의 습격을 받는다. 이제 집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그렇게 질버만은 계속 기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제목처럼 '여행자'가 된 것이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도르트문트에서 아헨,

 아헨에서 도르트문트,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제 여행자다. 끝없이 계속 움직이는 여행자.

 나는 이미 이주했어.

 독일 철도로 이주한 거지.(p. 214)

 

 그러나 낭만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다. 그가 여행하는 건 원해서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까. 그는 단 하룻밤도 몸을 편히 의탁할 수 있는 집이 없는 존재요, 맘 놓고 발들 디딜 수 있는 땅이 없는 존재다. 단골로 이용했던 호텔은 유태인이라 더이상 방을 내줄 수 없다고 하고 아내가 피신한 아내 오빠 또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단 하루만이라도 재워달라는 질버만의 간구를 차갑게 거절한다. 간신히 국경을 넘어 벨기에까지 갔지만 거기서도 벨기에 경찰은 망명을 요청하는 질버만을 묵살하고 독일로 다시 돌려보낸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믿었던 친구 베커는 자신은 당원이고 질버만은 유태인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헐값에 사업을 양도 받는다. 이제 자신의 자랑이던 사업에서마저 쫓겨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뤘던 모든 것을 잃었다. 가정, 사업, 친구, 평판 그 모두를. 단지 유태인이란 이유 하나로. 어디서든 그를 맞이하는 건 냉혹한 차단의 손바닥 뿐이다. 


 그야말로 그는 인간 영역에서 순전히 배제된,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독일엔 인권을 위한 법이 있지만 질버만을 위한 건 아니다. 기차에서 만난, 처음으로 연애 감정까지 느끼게 만들었던 한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시민이라고 끝까지 주장하며 시민의 윤리를 도저히 저버릴 수 없다고 하지만 독일인의 눈에 그는 더이상 시민이 아니다. 


 "어쨌든 난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버릇을 고칠 순 없어요. 나는 시민으로 태어났고 시민으로 죽을 겁니다. 도주하긴 하지만 시민이에요. 그건 확실합니다."(p. 281)


 그를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불과하다. 조르지오 아감벤을 통해 호모 사케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것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았다. '여행자'를 읽고서야 비로소 호모 사케르적 상황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선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작가,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자기가 직접 겪었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집필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상황도 현실적이고 묘사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압권인 것은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다.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적인 손해를 보는 건 싫어하는 그야말로 소시민의 심리가 잘 그려져 있다. 질버만의 내면 고백을 읽다보면 그냥 내 눈 앞에 질버만이라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것이다. 그렇게나 구체적으로 또 피부에 와닿게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상황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야기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고(이 소설은 정말 몰입감이 대단해서 중간에 그만두는 게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것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실, 나치 독일 치하에서 유태인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그야말로 호모 사케르란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불가능한)에 대해 여실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자'는 고발 소설이자 역사 소설이다. 후자에 대해선 픽션이지만 이 소설만큼 나치 독일 시절의 유태인 상황을 생생하게 체득시켜 주는 것은 또 없기에 아무래도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려내고 있는 것과 똑같이 동시대 독일에서의 유태인 삶을 그려내고 있으니까.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소설만큼 이 소설도 정치와 우리의 삶이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어떤 정치 현실을 만드느냐에 우리 일상의 명암이 결정된다는 것도 확연하게 깨닫도록 한다. 질버만은 자기보고 유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항변한다. "난 독일인이야. 세계 대전 때는 독일 군인으로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사람이라고!" 그에게 정말 중요했던 정체성은 유태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다. 그는 아리아인 여인과 결혼했고 종교 또한 기독교였다. 유태인은 그에게 그냥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필수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그는 나치가 아니었으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 것이었다. 그것이 설마 자신의 목숨까지 잃게 만드리라고는 가장 무서운 악몽에서조차 나오지 않을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는 바람에.


 그는 호텔 로비에서 한가로이 앉아있는 이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너희 외국인들이 여기 앉아 있구나. 질버만은 생각에 잠겼다. 평온한 사람들의 집을 습격해서 감옥이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게 너희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아니겠지. 너희 고국에서는 신임투표할 때 감독관이 옆에 기관총을 두는 일도 없을 거야. 하지만 여기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너희는 그저 독특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사람들이 너희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않으니까. 내게는 위험으로 가득한 원시림이 되어가는 이 호텔도 너희에게는 안락한 공간이라서, 평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돼.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면, 너희는 제3제국에서도 잘 먹고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하겠지(p. 52 ~ 53)


 질버만도 그런 외국인이었을 것이다. 어떤 계층이, 이웃이 비민주적인 처사로 낙인이 찍혀 사라질 때 무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평온한 일상은 전혀 침해받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사업상의 이익을 더 많이 가져다주어 모른 척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 둘 내버려 두다 보면 어둠의 수면은 차츰 차츰 차 올라서 결국 자기마저 삼켜지게 된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독재의 권력 앞에선 그 어떤 일상의 평온도 아주 얇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을 뿐이니까. 지금도 벌어지는 미얀마 국민이 처한 일상이 그걸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 미얀마를 통해, 또 소설 '여행자'를 통해 우리는 뼈가 저리도록 깨달아야 한다. 누구나 '질버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별안간 자신이 호모 사케르가 되고 모든 일상이 파멸과 죽음의 암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국경을 초월하자는 의미에서 사회란 말을 일부러 빼버렸다.) 가장 작고 약한 자가 당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처사에 무심해선 안되면 오로지 사익 추구를 위해 권력을 잡으려는 이들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결코 내 일상과 유리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내 일상의 평온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근본이 되는 움직임이다. 소설 '여행자'는 이러한 각성을 역에 도착하는 거대한 열차의 존재감으로 도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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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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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심. 사랑의 시작엔 그런 것이 있다. 

 갑자기 상대가 환하게 보이고 거기에 내 날개를 접고 앉아 고이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강렬히. 그건 마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다 간신히 찾아낸 등대 불빛과도 같다. 그 끝모를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 마침내 안주할 땅을 찾았다는 밝고도 따스한 반가움. 더이상 지치고 아픈 영혼을 받아줄 곳을 찾아 문전 걸식하지 않고 뿌리내릴 곳을 찾았으니 어찌 환희로 눈부시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눈부심이 지나치면 눈이 멀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사랑하는 나는 사라진다. 사랑은 빛을 받는만큼 주는 것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이 대등하게 상대에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랑은 불균형으로 삐걱거리다 결국 멈추게 된다.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에게 오롯이 함몰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나로 제대로 설 수 있어야 사랑 또한 지속된다. 포함되기 보다는 포용하는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나가 되어서 늘 상대를 위하여 애쓰는 것. 사랑은 그 여정 전체에 비로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종결의 명사가 아니라 진행의 동사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사랑과 참 많이 닮아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성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뜬금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랑, 모성 얘기를 꺼냈던 것은 이번에 나온 영국 작가 제시 버튼의 소설, '컨페션'이 바로 그것에 관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하나는 1980년에서 83년으로, 여기서는 앨리스라는 여성이 주연을 맡는다. 다른 하나는 2017년으로 로즈라는 여성이 주역이 된다. 소설의 처음은 앨리스가 연다. 스무 살의 그녀는 서른 여섯의 작가 콘스턴트 홀든을 우연히 만난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앨리스는 도서관에서 홀든이 쓴 '밀랍 심장'을 읽고 선 매혹되어 버린다. 그녀는 코니(콘스턴트 홀든)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것마냥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고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코니는 확고하게 자기 삶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세상에 뚜렷하게 새기면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음에서 오는 강함이 눈부신 빛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잠시 책의 표지를 본다. 거기엔 초록 토끼가 그려져 있다.




 이는 코니가 나중에 쓸 작품, '초록 토끼'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앨리스라는 이름과 토끼를 통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그 작품에서 앨리스는 갑작스런 토끼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코니가 그 토끼였던 셈이다.


 무대는 바뀌어 이제 2017년이다. 두 번째의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부재하고 있는 엄마를 자신만의 허구로 덧칠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덧칠은 엄마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에 지쳐 열네 살에 이르자 엄마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실감이 치유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늘 뭔가 부족하게 여겨졌고 그 탓에 타자에게 더 매달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행복을 볼 수 있었다. 행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는 데 지쳤다. 내가 가진 숱한 시시한 자아 사이에서 최고의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나는 내 안에서 실패하는 자아나 잠재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 38 ~ 9)

 단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바위를 찾으면 거기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부류였다.(p. 71)

 이건 엘리스가 코니에게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둘은 자신의 허한 부분을 타자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닮은 존재였기 때문인지 작가는 로즈에게도 똑같이 초록 토끼를 선사한다. 엘리스가 '밀랍 심장'을 읽고 업힐 대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로즈 역시 딱 두 권밖에 쓰지 않았다는 코니의 마지막 소설 '초록 토끼'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안길 수 있는 엄마를 찾아낼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초록 토끼'의 작가가 엄마와 밀접한 관계였으며 실종된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란 걸 알게 된 로즈는 신분을 속여 코니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려고 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네살. 앨리스보다 14년은 더 많지만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다. 9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고 이미 남자 집에서도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접받지만 마음 속의 공허는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 친구 집에서도 자신을 가족이 아니라 손님으로 여긴다. 산다는 느낌 보다는 억지로 잘 살고 있다고 연기만 하고 있을 뿐 실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인스타그램 스타로 스타일 유행을 선도하는 친구 켈리는 그걸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지만 로즈는 남자 친구 조가 아이의 아빠로 영 미덥지 못하다. 결국 로즈에게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코니 하나였다. 그녀는 초록 토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 ]



 이제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야겠다. 이미 눈치채셨을 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바로 로즈의 엄마라는 사실을(두둥!). 이걸 깨달으면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코니와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길래 엘리스가 다른 남자 사이에 로즈라는 아이를 낳게 되었나이고 다른 하나는 왜 앨리스는 아이를 두고 사라져버렸는가이다. '컨페션'은 그 미스터리를 1980년대의 앨리스와 2017년의 로즈 이야기로 병행하여 풀어나가며 닮았지만 후반에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그녀들의 여정을 통하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를 시나브로 세공한다.


 앨리스와 로즈의 여정은 정말 닮았다. 한 권의 책으로 여정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코니라는 삶에 온전히 뛰어든 순간이 한창 코니의 작품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물론 앨리스의 얘기에선 코니의 작품이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지는 중이며 로즈의 얘기에선 코니가 몇 십년만에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 다 코니의 주체성이 한껏 발현된 현장이다. 코니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이다. 그녀는 소설을 쓸 때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며 온전히 자신만으로 채워진 세계를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이 설령 앨리스라고 해도. 그녀는 집필에 방해가 되기에 아이까지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나는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엘. 그럴 시간이 없어.(p. 114)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그야말로 고유한 주체성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앨리스와 로즈 둘 다, 그 장소에서 섣불리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앨리스는 그렇게 하면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자율성이나 자신감, 요구를 조금이라도 표현하면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느꼈다.(p. 161)


  로즈는 진정한 자신을 죽이고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예 로라라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내 정체성의 실을 풀어 새로 짜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나 자신을 버리고 커다란 구멍에 단어와 판타지를 쏟아붓는 일이 어떻게 이토록 쉬울까?(p. 185)

 그렇지만 로즈의 이 '허구 만들기'가 서로 닮은 여정을 걸어온 앨리스와 로즈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앨리스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지는 동안 내내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단 한 번도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꾼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있었다. 이러한 앨리스의 수동성은 코니의 친구 화가 샤라가 그녀를 그릴 때 단적으로 대표된다. 그녀는 영국에 있었을 때와 똑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 앨리스를 보면서 샤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인어를 그린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걸쳐서 사람과 물고기의 어정쩡한 중간 형태로 남아있는 그녀를.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작가가 여기서 인어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여정이 변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체였다. 코니에게 매혹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와 예전 직장을 정리한 것은 그녀의 결단이었다. 능동적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여행이 어느새 한없이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인어는 거기에 딱 알맞는 상징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 또한 자신의 언어를 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니까 말이다. 그와 동일하게 앨리스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다. 샤라의 붓 앞에 섰을 때처럼 다만 누가 자신을 봐주길 기다릴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품고 인도하기 보다는 누군가 자신을 안고 데려가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로즈는 비록 허구이긴 해도 스스로를 구성하고 전달한다. 자기가 직접 쓴 스토리를 자신조차 믿을 정도의 현실로 만든다(그녀는 소설 마지막에서 코스타리카로 떠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으로 꾸몄던 이력인 코스타리카 여행을 진실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로즈는 코니와 마찬가지다. 삶을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로즈 또한 주체성을 은은한 수준이긴 해도 확실히 빛내고 있었다. 이는 코니가 새로운 소설, '변심'을 쓰는 과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앨리스는 소외되어 있었지만 로즈는 코니와 대등하게 대화하는 관계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코니에게 묻고 대답을 이끌어내며 자신만의 견해를 내놓기까지 한다. 


 분명 이 차이가 둘의 미래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정말로 인어가 되어버린다. 샤라가 그토록 원하는 엄마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주기 보다는 받는 것을 더 원한 나머지 안데르센 동화 속 인어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거품이 터지듯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다르다. 그녀 역시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 조와 다시 합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버티며 낙태를 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앨리스는 아이만 남고 엄마는 사라졌지만, 로즈는 아이가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그렇게 전자는 소멸하고 후자는 항존한다. 앨리스가 인어의 이미지라면 로즈는 로즈버드의 이미지다.(아예 직접적으로 로즈를 '로즈버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손 웰즈가 감독한 영화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삶의 자리가 달라졌어요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마음 중앙에 변항없이 남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로즈는 그야말로 로즈버드인 것이다.



[영화 '시민케인'에 등장한 '로즈버드'의 모습]



 로즈는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서 작가는 책임을 제시한다. 이것이 수동적인 존재를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주는 뼈대라고.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다. '앨리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주체성을 발휘한 선택이 아닌가?'이다. 대답하자면 아니다. 앨리스가 엄마가 된 것은 주체화(主體化)에서 비롯된 결단이 아니었다. 진실은 도피의 일환이었고 코니가 여배우 바버라와 바람을 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앨리스는 코니가 바버라에게 매혹당했다고 여겼는데 그건 바버라가 코니 보다 더 빛나는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눈부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코니에게 그랬듯 코니 역시 바버라에게 홀렸다고 생각했고 샤라가 그토록 바라는 엄마가 되면 자기도 바버라만큼 눈부신 존재가 되어 코니의 마음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런 식으로 앨리스는 계속 욕망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걸 택했다. 그것이 어려워지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 그냥 달아나버렸다. 코니의 바람으로 상처를 받자 사랑하지도 않는 샤라의 남편 (달아날 때조차 앨리스는 혼자서 못하고 자신을 데려갈 사람을 필요로 한다.)을 유혹하여 멕시코의 해변으로 떠나버렸던 것처럼. 앨리스는 코니의 존재감에 위축되어 자신을 작다고 여기거나 소외되어 있다고 느낄 때마다 수영장이나 바다처럼 언제나  가까이 있게 되는데, 아마도 그건 삼켜진다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라는 주체가 지워지는.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한 번 바다로 갔다는 것은 현재 마주한 고난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버거워서 회피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코니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당신은 책임과 마주하는 족족 달아났어. 가까워지면 달아났지. 아버지에게서, 내게서, 맷에게서 달아났어. 살면서 또 누구에게서 달아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내겐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당신이 또 그럴거라는 예감이 들어."(p.467 ~ 8)

 코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앨리스는 아이를 책임져야했을 때 달아나버렸으니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끝내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앨리스도 그렇게 되었다. 수동적인 예속 상태에 안주하는 한, 기다리는 건 사랑의 상실과 나란 존재의 소멸 뿐이다. 로즈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홀로 자신을 책임지려했고(로즈와 조가 공동 투자한, 그러나 단 한 번도 축제 장소엔 가보지 못하고 내내 부모님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부리토 트럭은 로즈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조에게 매인 존재였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냥 녹만 쓸 뿐인 트럭을 조는 로즈가 독립적 주체가 되자 자신의 오랜 망집에서 놓아준다. 처분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돈은 로즈의 자립을 위한 자본이 된다.) 아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로즈의 중절 수술은 엄마가 되는 두렵고 낯선 모험의 여정을 회피한 것이 아니다. 코니의 고백(컨페션)을 통해 앨리스가 어쩌다 자신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양육에 있어 자기 역량을 깊이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부족한 자신이 아이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남자 친구 조가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마냥 부리토 트럭을 붙잡고만 있다가 로즈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달리 말이다. 그러고보면 앨리스에게 있어 로즈 또한 부리토 트럭인 셈이다. 코니는 로즈가 조와 헤어졌을 때, 이런 조언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 진정한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p. 276)

 하지만 이 말이 사랑과의 결별이 주체로 만든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사랑에 마냥 매달리다 거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분별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말라는 조언이다. 앨리스의 패착처럼. 역량은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인데 그건 독립적인 주체로 제대로 섰을 때라야 알 수 있다. 그제서야 자신이라는 영역의 경계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의존으로 매몰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며 나도 대등한 버팀목이 되어 관계를 당당히 떠받치는 책임. 로즈가 코니의 집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책임은 주체를 가동시키는 높은 옥탄가의 연료인 것이다. 


 사랑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가 또한 주체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위에서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란 말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정비례 관계다. 타인의 등에 업혀 사랑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도 서로의 책임을 통해 항상 충전되어야 하는데 기대거나 매달리기만 하는 사랑은 착취이기 때문이다. 오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두 발로 서서 그것을 위해 내가 먼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을 거듭 헤아리는 자만이 사랑 또한 오래 보존한다. 로즈의 마지막 장면은 자못 뭉클하다. 로즈는 어릴 때 자신을 두고 저주라고 말했던 코니의 배웅을 받으며 코스타리카로 떠난다. 소설에서 코니는 단 한 번도 남을 배웅한 적이 없다. 그런 코니가 떠나는 로즈를 오래도록 지켜볼만큼 그녀는 성장했고 앨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눈부신 빛을 얻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의 눈부심 속에서 눈이 멀지 않으려면 빛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컨페션'이란 초록 토끼가 궁극적으로 우릴 데려가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사랑은 향유가 아니라 책임에서 비로소 개화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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