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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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똥이다. 이번 선거의 최종 결과를 보았을 때 바로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악취가 난다는 뜻이 아니다. 토악질이 난다는 뜻도 아니다. 그저 굳건하다는 의미다.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낙담이다. 선거일. 종일토록 성석제의 '위풍당당'을 읽었다. 성석제를 좋아한다. 때로 그런 작가가 있지 않은가? 마치 자기를 위해 태어난 듯 자기 취향에 딱 들어맞는 작가가. 성석제는 내게 그런 작가다. 제목도 근사했다. 안 그래도 기죽고 왜소해지는 스스로를 늘 느껴왔던 나날이었다. 앞뒤좌우로 꽉 막힌 사무실을 벗어나 한 번쯤 가슴 죽 펴고 대로를 그렇게 걸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가요로도 넘쳐나는 실연으로 질질 짜는 이야기도 아니고 휘몰아쳐 오는 세상의 채찍질에 넋 놓고 쓰러지는 이야기도 아닌 결연히 일어나 피하려들지 않고 노려보며 온 몸으로 맞서 싸우는 그런 얘기가 정말 읽고 싶었다. '위풍당당'은 그런 내 소원에 응답한 것과도 같은 소설이었다.

 

  소설은 강으로 시작했다. 우리 집 앞으로도 강이 흐른다. 그 날의 강은 오후의 햇살이 나른히 몸을 뻗은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선거일이라서 그런지 왠지 지금 세상도 그렇게 강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변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오늘밤 변화된 세상을 승리의 환호와 더불어 제대로 목격하리라 생각했다. 제목처럼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배경음으로 들으면서 말이다. 이야기는 굉장했고 마치 키스를 조르는 여자 아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였고 내가 원하는 결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결말은 달랐다. 변했을 것이라 여겼던 세상은 누군가 싸놓고 치우지 않은 똥처럼 여전했고 '위풍당당'에서 여산이 정욱을 물리쳤을 때 느꼈던 쾌감은 그대로 통한의 눈물로 변하고 말았다. 우울했다. 이야기는 정말 아무런 힘이 없었다. 연약한 갈대처럼 세상의 힘찬 손짓 하나에 그대로 꺾이고 마는 존재였다. 그토록 날 채우고 뜨겁게 만들던 이야기가 세상이 보인 더러운 진실 앞에서 이토록이나 힘없이 주저앉고 마는데 도대체 이야기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과연 이런 이야기가 단비가 되어 굳어진 똥 같은 세상을 조금이나마 허물어뜨릴 수 있을까? 그렇게 저 강으로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왜 이야기를 읽을까? 성석제의 '위풍당당'은 그 날의 비관적인 결말과 더불어 나에게 이런 질문을 가지게 했다. 새삼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늘 책을 배반한다. 세상이 책 대로라고 생각하고 살다보면 상처 받는다. 그러니까 그 날 느꼈던 아픔도 사실은 별 것 아니었다. 늘 반복적으로 겪었던 아픔을 단순히 한 번 더 느낀 것 일뿐. 그런데도 책을 찾는다. 매저키스트도 아닌데 무기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다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성석제의 이야기가 주는 승리의 감각이 결국은 몽정 끝에 하는 자위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 들으려 한다. 여전히 성석제의 소설로부터 위안을 얻길 바란다. 왜 그럴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위풍당당이라는 말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에서 나온 말이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엘가의 위풍당당은 또 세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나온 말임을 알고 있다. 오셀로 하니 그것에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오셀로 게임'이 생각난다. 일본 작가 온다 리쿠는 오셀로 게임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셀로 게임은 동그란 알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계속 설득해 나가는 게임 같다고. 이제 와 생각하면 내가 책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정말 바랐던 게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문학이 예전처럼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은 진작 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비록 거창한 변화는 가져오지 못할망정 '오셀로 게임'처럼 조금씩 하나씩 나를 설득해나가고 있기에, 그렇게 이야기가 주는 단 '한 발자국'의 위안과 희망 때문에 나는 계속 이야기 즉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하자면 이처럼 세상에 거센 비가 내릴 때 나 하나 깃들 우산을 난 소설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에 젖지 않고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념을 지켜갈 수 있도록 어떤 응원과도 같은 우산을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또한 아닐까? 물론 성석제가 '위풍당당'에서 보여준 낙관이 현실적인 눈으로 보자면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직시 보다 긍정과 희망으로 엮어진 꿈이 사람들을 보다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 마음먹게 만든다는 걸 우리는 또한 자주 보아왔다. 대표적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로 상징되는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도 있지 않은가! 갓 잡은 활어처럼 생생한 기운으로 여지없이 충만한 이 소설의 진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소제목으로도 사용한 그룹 '비지스'의 노랫말이 내겐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나는 농담을 시작 했어요.  세상이 모두 울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소설이란 바로 이런 농담이 아닐까?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그래서 나는 그의 농담에 기꺼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고 계속 그의 다음 농담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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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성석제라는 작가 한 명에서 셰익스피어, 오셀로게임으로, 문학과 소설로 뻗어나갈수도 있군요. 변화를 원한다면 먼저 그 변화에 대한 꿈부터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되는 농담... 저도 그 농담을 한 번 겪어봤으면 좋겠어요.

ICE-9 2012-04-16 23:46   좋아요 0 | URL
정말 지금 제게 간절히 필요한 것도 뭔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언젠가는 원하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으로 가득한 농담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침 내가 왜 성석제의 이야기를 이토록 즐기는가 생각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내가 원하는 문학의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쓰게 되었네요. 문학에서 받는 위안이 비록 차 한잔의 따스함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 조금의 꿈꿀 수 있음 때문에 전 아직도 소설을 사랑하는게 아닌가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