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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심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13
미하일 불가꼬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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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개의 심장'은 '거장과 마르가리타'로 뒤늦게 불가코프를 알게된 저에게 있어 오래도록 꼭 한번 읽어 보고팠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말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96년인가 열린책들에서 발간한 '개의 심장'은 벌써 절판의 운명을 걸었고 중고로도 구하기 어려운 참 만나보기 힘든 책이더군요. 그래서 이번에 열린책들에서 나온 '개의 심장'이 특히나 반가웠습니다. 애타게 찾을 땐 한 권도 안 나오더니 창비에서도 '개의 심장'이 나와 약간 헛웃음도 짓게 만들더군요.

 

 

 아무튼 드디어 읽게 되었습니다. 벌써 영화로도 몇 번인가 만들어지고(그 중엔 '제7의 봉인'에 나왔던 막스 폰 시도우가 개-인간을 만드는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로 분한 것도 있습니다.) 소설에서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가 늘 아이다의 아리아 한 소절을 흥얼거리는 것처럼 오페라로도 몇 번 만들어진 만큼 어느정도 작품성은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원래 불가꼬프는 오페라 가수를 꿈꾸었다고 하죠. 필립 필리뽀비치가 흥얼거리는 오페라의 아리아는 그 꿈의 잔재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개의 심장'이 오페라로 만들어진 것을 보았다면 불가꼬프가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런 이유로 필립 필리뽀비치를 작가의 페르소나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특히나 그가 개-인간 '샤리꼬프'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결정적으로 내치는 이유가 샤리코프가 교수에 대해 중상모략 했기 때문임을 보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시의 불가꼬프도 근거없이 쏟아지는 음해와 온갖 중상모략 때문에 가장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요. 필립 필리뽀비치의 샤리꼬프에 대한 분노엔 어쩌면 불가꼬프가 당대의 소련에게 보내는 분노가 그대로 투영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과연 개의 시각으로 진행되는 첫 장면부터 절 휘어잡더군요. 불가꼬프는 상상력이 참으로 왕성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개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없을테죠. 구정물 쓰레기통을 뒤지다 요리사로 부터 옆구리에 뜨거운 물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굶주림을 면할 조금의 음식을 위해 이리저리 구걸하고 눈치보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개의 심리가 참으로 리얼하게 느껴졌습니다. 보통 '개의 심장'은 혁명에 대한 반감을 노출시킨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만 저도 그것과 다른 의미를 잡아내기는 어렵더군요. 그만큼 불가꼬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가꼬프는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혁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죠. 아시다시피 그의 고향은 키예프입니다. 그는 거기서 원래는 의사가 되었었죠. 그러다 세계 제1차 대전이 터지고 불가꼬프는 야전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러시아 남부 전선으로 참전합니다. 글고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불가꼬프는 갑자기 얻은 병으로 그제서야 군복무에서 해제되어 고향인 키예프로 돌아옵니다. 오래도록 떠나있었던 정겨운 고향이었지만 예전의 평온했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시 고향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의 혁명이 맞물려 독일 점령군의 어용 정부와 그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내려는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러시아 혁명주의자들과 거기에 맞서 제정 러시아를 다시 복권시키려는 백위군들이 굶주린 개들이 던져진 뼈다귀 하나를 차지하려고 서로 물어뜯고 싸우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불가꼬프는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개의 심장'에서 보이는 혁명에 대한 반감의 실상은 바로 그거예요. 외부의 힘으로 사람을 억지로 바꾸려 드는 모든 것을 그는 거부하는 것이죠. '개의 심장'도 정확히 그런 입장에서 쓰여졌습니다.

 

 샤리꼬프가 만들어기지 전,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의 말엔 이러한 반혁명적인 것들이 넘쳐나지요.

 

 "우리 아파트에서 더 좋아지는 쪽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거요. 그래요. 저 가수들을(조금 전 장면에서 방 일곱개를 혼자서 쓰고 있는 필립 필리뽀비치에게 방을 인민들과 나눠써야고 주장했던 볼셰비키들을 뜻함.) 진압하기 전까지는 다른 아파트도 모두 매한가지야! 오로지 그들이 자신의 연주회를 중지하기만 하면, 상태는 저절로 더 좋게 변화한다고!"  (p. 77)

 

 그건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가 언제 개-인간 '샤리꼬프'를 경멸하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필립 필리뽀비치가 샤리꼬프를 경멸할 때는 대부분 샤리꼬프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무분별하게 따라할 때입니다. 샤리꼬프가 카우츠키의 책을 읽는다고 말했을 땐 놀라고 새삼 대견하게도 여기는 필립 필리뽀비치는 그 책을 읽고 내놓는 의견이라는게 당시의 볼세비키리면 늘 내놓는 의견을 그대로 따라한 것 뿐이자 네 생각을 말하라면서 대놓고 경멸하게 되지요. 볼셰비키들로 부터 한 자리를 얻어 청소과장이 되었을 때도 도시를 돌아다니며 고양이를 잡아들이는데(샤리꼬프는 원래 개였을 때부터 고양이를 정말 싫어했습니다. 그가 인간의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고양이를 증오하는 것은 필립 필리뽀비치 말마따나 아직 그의 인간 두뇌가 채 접지되지 못하여 남아있는 개의 잔재인 것이죠.) 교수가 그 잡은 고양이들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샤리꼬프는 그걸 다람쥐 털로 만든 외투인 양 속여서 노동자들에게 월급 대신 지불한다는 말을 듣고는 경멸하게 됩니다.(원래 이 소설에 이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영어 번역을 보니 'credit scheme' 이란 말이 있더군요. 뒤에 실린 '악마의 서사시'를 보면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내가 월급을 돈으로 받지 못하고 성냥이나 포도주로 받는데 그래서 'credit scheme'이란 월급 대신 받게 되는 물건이 아닐까 여겨졌고 그걸 비싼 다람쥐 털 외투로 속여 노동자들에게 파는데 샤리꼬프가 일조하고 있으므로 필립 필리뽀비치가 경멸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이런 식입니다. 혁명을 통해 마치 대단한 존재라도 된 듯 뻐기지만 정작 하는 것이라고는 무분별하게 남의 것을 따라하거나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추악한 본성을 제한없이 드러내고 있으니 필립 필리뽀비치는, 그리고 불가꼬프는 혁명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죠. 하지만 필립 필리뽀비치 역시 그 보여주는 입장엔 그리 썩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일단은 엘리트 주의에다 제정 러시아적 귀족 취향에 꽤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하긴 불가꼬프 자신도 그랬죠. 그역시 제정 러시아의 복권을 위해 싸웠던 백위군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러한 혁명에 대한 경멸과 제정 러시아에 대한 은근한 향수를 내뿜고 있는 '개의 심장'은 1920년대의 소련에서 당연히 출간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지어진 지 60년이 지난 1987년이라더군요. 이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가히 얼마나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네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드디어 만나게 된 '개의 심장'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치고 열린책들판 '개의 심장'은 번역이 참 많이 아쉬운 소설입니다. 제가 러시아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직역 하느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직역도 좋지만 그래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문장을 좀 자연스럽게 다듬거나 의미가 정확히 통하도록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참 많이 남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끌림' 이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필립 필리뽀비치 교수의 말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물론 책에서도 별다른 설명도 안되어 있고 말이죠. 일례로 그 끌림이란 말은 이렇게 나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끌림...!"(p. 163)

 

 "이렇게 내 경우로 이미 증거가 나왔습니다. 이야기하세요! 이 쁘리오브라젠스끼가 말했다고. 끝났어요! 끌림!"

 "끌림!"

 그는 다시 반복해서 외쳤다.(p. 189)

 

 "아주 특별하게 예외적인 병신 같은 놈."

 "그러나 그가 누굽니까? 끌림! 끌림!"

 교수는 소리쳤다.

 "끌림 추군낀!"(p. 192)

 

 이렇게 교수의 입버릇인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창비 판에는 뭐라고 되었는지 심히 궁금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영문판에는 'Klim'이라 되어 있더군요. 영어를 보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 짐작 되었습니다. 물론 전혀 아무런 뜻이 없는 러시아 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요. 아무튼 Klim은 만트라의 하나로써 주로 욕망 혹은 정욕의 씨앗을 일컫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필립 필리뽀비치가 인간이 다시 젊어지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무리하게 개에다 인간의 뇌하수체를 연결한 결과 '샤리코프'를 태어나게 했으므로 바로 그 욕심, 혹은 욕망을 스스로 한탄하는 것이 아닐까(혹은 그런 의미로 불가꼬프가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보다 쉽게 독자에게 전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업보'란 말로 번역해보면 어떨까 싶어졌습니다. '업보구나!' 혹은 '업보야!' 이런 식으로...

 

 아무튼 이런 식으로 매끈하지 못한 표현,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 그리고 얼른 이해되지 않는 모호한 단어들이(이를테면 '덧신' 같은 것. 혹시 밸린키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고유명사로 써 주었으면 좀 더 명확하게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장화를 신어야 하는 부분에 덧신을 신어라는 표현이 있어 의아하기도 했거든요.) 좀 있어 소설의 상황이나 대화들이 잘 와닿지 않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대사도 많이 나오는데 매끄럽게 번역되어 있지도 않고 거기다 같은 문장에서조차 경어로 썼다가 반말로 썼다가 마구 뒤섞여 있는 터라 더욱 몰입을 방해했습니다. 러시아어에 경어가 따로 있어서 일부러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독자로서는 어조를 좀 통일시켰으면 좋겠더군요. 샤리꼬프에게도 경어와 반말이 혼용되어있어 등장인물들이 샤리꼬프들을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는 것인지 얼른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밖에도 체크해 놓은 문장들이 많은데 러시아 원문을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이를테면 샤리꼬프가 인간처럼 능숙하게 보드까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교수가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말을 반복하다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구나! 끌림!"하고 말하게 되는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 다시 또 영어판을 찾아보았습니다.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 은 딱 한 단어 'PHASE'로 표현되어 있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보통 'PHASE' 하나만 나올 때는 뭔가 최종 단계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도 뜻이 통합니다만 그보다는 '진짜 인간이 다 되어버렸어' 이런 뜻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이 다 되어버린 '샤리코프'에게 더이상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게 되어버렸으므로 마지막과 같은 한탄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구요. 이렇게 아무튼 뭐랄까 글의 흐름이 잘 이어지지 않는 번역들이 좀 있는데 (특히 사람 앞에 붙이는 호칭 같은 것. 서양에서는 의례 붙이곤 하는 DEAR 정도의 의미를 굳이 귀여운으로 번역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씨만 붙여도 되지 않을까요? 이름앞에 '친애하는', '사랑스러운', '귀여운'과 표현이 자주 나와서 좀 어색했습니다.) 그런 걸 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더군요. 열린책들에서 나온 러시아 소설 읽으면서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문장들을 만나본 기억은 없는 것 같아서 이번 '개의 심장'은 더욱 아쉬움이 컸습니다.

 

 모처럼 나온만큼 독자들이 불가꼬프의 매력을 더욱 잘 느낄 수 있도록 다가가기 쉽게 나와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이죠. 이런 아쉬움을 마침표처럼 남기면서 '개의 심장'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을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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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이 살았던 시대를 알아야 혁명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그저 개를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하며 놀라워했을지도 모르는데... 개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결국은 바깥에서 바꾸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군요 마지막에는 다시 개로 돌려놓는다고 하더군요 뭐든 자연스러운 게 좋지 않나 싶습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군요 '대단한 경력의 솜씨로군'은 '진짜 인간이 다 되어버렸어'가 더 맞을 것 같네요


희선

까쨔 2015-04-15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끌림은 추군낀의 이름입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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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결핍과 순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가장 인상적인 첫 문장 중의 하나로 시작한다. 쓰쿠루가 스무 살을 넘긴 그 해, 늘 죽음만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 뒤로 하루키는 왜 주인공 쓰쿠루가 '보이는 것은 오로지 짙은 구름으로 소용돌이치는 허무였으며, 들리는 것이라고는 고막을 압박하는 깊은 침묵(p. 9)' 밖에는 없는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는지 들려준다. 한 마디로 그건 상실 때문이었다. 그토록 완벽했던 '일체감'과 '조화로운 어울림의 감각'을 가져다주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공동체로부터 쓰쿠루는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쫓겼던 것이다. 그 친구들의 이름은 아카, 아오, 구로, 시로. 모두 적색, 청색, 하얀색 그리고 검은색을 뜻하는 이름으로 그렇게 모두들 색채가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 이름에겐 그런 색채가 없었다. 그는 그걸 늘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름에 색채가 없는 만큼 자신의 삶에 뭔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게 있다고 여겼다. 다른 친구들은 이름의 색깔 그대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저 혼자 '텅 빈 그릇'처럼 산다고 여겼다. 쓰쿠루가 내쫓겼을 때, 죽음을 계속 생각할 만큼 억울하고 아팠지만 쓰쿠루가 단 한 번도 친구들에게 왜 그러는지 다그쳐 묻는다거나 스스로를 변호하려 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형도 시인이 언젠가 '내 영혼은 온통 검은 페이지니 누가 들여다보려 하겠는가?'했던 것처럼 스스로 색채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리 당한 것이라 스스로 납득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왜 제목이 하필이면 '색채가 없는'이 되었는지 이해할 듯하다. 즉 다자키가 본질적으로 결핍된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16년동안 다자키가 한 것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었다.

 

 늘 사람들이 도착하게 되는 '역'을 만드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존재로 여기고 살았다. 그는 '우연히 주어진 땅'이라 여기는 '도쿄'에서 '망명자'로 살아왔다. 되도록 '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체류허가를 박탈당하지 않도록(p.421)' 조심스럽게 말이다. 한 마디로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는 그가 그 곳에서만은 강제 출국 당하지 않도록 기를 쓰고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스무 살 때의 아픔이 아직도 번번이 목에 걸려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은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과 정면 대결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수영장 밑바닥에 오래 가라앉아 있는 돌처럼 묵혀둘 뿐이다. 하지만 쓰쿠루가 다시금 새롭게 만나게 된 여인 '사라'의 말대로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p.51)다. 아무리 깊이 묵혀두고 애써 잊어버리려 하여도 한 번 일어난 사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쓰쿠르의 노력은 위험을 만났을 때 타조가 하는 짓과 같다. 자신의 적에게서 위협을 느낄 때 타조는 달려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땅에다 눈을 감고 얼굴을 박는다고 한다. 그렇게 눈감아 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진짜 없는 것으로 여기고 안심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타조의 짓이 적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듯 쓰쿠루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진정으로 대면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로 날아가려면 얼레에 매인 실을 끊어야 하듯이 진정으로 새로이 출발하고 싶다면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과거의 매듭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 그런 시기가 찾아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가 늘 함께 있고 싶은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라가 바로 그 여인이다. 그건 늘 수영장 물 아래 밑바닥에서 두 귀를 막고 살고 있는 것 같은 그에게 있어 삶이 모처럼 선사해 준 부활의 기회였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삼켜서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선 먼저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것부터 토해내어야 한다. 뚜껑을 덮어두고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그 과거의 상처 속으로 기꺼이 뛰어 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순례를 떠난다. 그건 과거로의 여정이다. 그 순례의 쓰쿠루는 연어 인간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추방한 그 장본인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산란하기 위하여 자기 내부에 가득 깃들어 있었던 아픔을 '컥컥' 토해내는 여정인 것이다.

 

 앞서 '색채가 없는'이란 말은 결핍을 본질로 하고 있는 다자키 쓰쿠루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한 바 있다. 그렇다면 왜 뒤이어 제목에 '순례'가 나오는지도 수긍이 간다. '순례'란 궁극적으로 보자면 다름 아닌 결핍의 효과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걸. 따지고 보면 우리의 발길을 바깥으로 이끄는 것은 현재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결핍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순례의 발걸음은 그렇게 텅 빈 그릇과 같은 삶을 메우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정말 하루키가 바로 그 충족을 위하여 다자키 쓰쿠루를 순례로 이끌었던 것인가를. 과연 이 소설은 쓰쿠르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색채'를 찾아주는 이야기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다. 하루키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2. 하라다 그는 왜 그렇게 사라졌는가? 혹시 괴테의 '파우스트' 변주는 아닌지?

 

그 말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전에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구성상의 '뒤틀림'이다. 어쩌면 당신 역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참으로 기묘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따라다니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바로 하라다의 존재다. 도대체 그는 왜 나온 것일까? 소설의 중반에서 그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끝까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쓰쿠루에게 완벽했던 고등학교의 공동체적 경험의 상징과도 같았던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즉 '순례의 해'를 다시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지만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종적을 감춘다. 베르만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순례의 해'는 이어지지만 그는 나오지 않는다. 문득 지금은 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고 있을 '보이저2호'가 생각난다. 거기엔 혹시나 만나게 될지 모르는 외계인들에게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로 문명화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해 음악 하나가 실려 있다. 그게 바로 바하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이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그것만은 살아남을 것이다. 존재했던 인류의 메아리로써. 하라다 역시 사라진 뒤에는 메아리로 존재할 뿐이다. 소설 후반에 쓰쿠르가 수영장에서 우연히 하라다와 닮은 이를 보고는 그 역시 자신의 목에 걸린 가시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 하라다란 이름도 색채가 있다. 그건 회색이다. 쓰쿠루를 결정적으로 추방시킨 장본인이 바로 검은색을 나타내는 이름을 가진 '시로'라는 걸 떠올려보면 회색은 그 검은색과 가장 가까이 있는 색이므로 어쩌면 하라다와 시로는 일종의 존재의 연속으로 모두 쓰쿠르에게 메울 길 없는 상실을 가져다주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납득하기엔 또 뭔가 부족한 게 있다. 하라다가 들려주는 피아니스트 미도리카와의 에피소드다. 도대체 특정 개인에게 죽음을 건네줄 능력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있으며 또 그런 자들은 사람들이 가진 색채를 볼 수 있다는 말은 왜 나온 것일까? 그 이야기의 의미나 진실 역시도 두 번 다시 소설엔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라다는 음반과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나온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바로 이런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어정쩡하게 끝나버리는, 그래서 뭔가 뒤틀려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구성을 소설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하루키는 왜 하라다를 등장시켰으며 이런 에피소드를 본격적인 순례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배치한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있어 얼른 들어오는 것은 '미도리카와'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도 색채가 있다. 바로 녹색이다. 그 녹색의 이름을 가진 자가 회색의 이름을 가진(정확하게는 하라다의 아버지. 이름은 같다.)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를테면 자네는 악마라는 걸 믿나?"(p.102)

 

 아! 이 말에서 깨닫게 된다. 하루키의 미도리카와 에피소드는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변형한 것임을. 단서는 이미 하루키에 의해 주어져 있다. 저 '악마'라는 말 외에도 미도리카와가 '녹색'이고 하라다는 '회색'임을 감안한다면, 이 말은 저 '파우스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텔레스가 말한 유명한 문장, '모든 진리는 회색이지만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 그대로가 아닌가! 미도리카와가 죽음을 건네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만큼 극적인 삶의 변화를 메피스토텔레스 역시도 파우스트에게 건네줄 수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하루키의 의도는 보다 분명해진다. 미도리카와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에게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하려는 것임을.

 

 하라다는 바로 그것을 전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고 그 때문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결국 '파우스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결핍을 메우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깨닫게 된다. 보다 더 큰 절망의 원인은 결핍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결핍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선에 있었음을.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그와 같다. 한 마디로 구원은 그 부족한 것을 메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변화시킬 때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바로 그 말을 위해서 하루키는 기꺼이 하라다를 영원히 부재하는 존재로 남겨두는 구성상의 뒤틀림을 무릅썼다. '상실'이라는 그 상태 자체에 우리의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시선 자체에 우리의 아픔마저도 달려 있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3. 정말은 그 바라보는 시선에...

 

 그렇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우리가 살면서 필연코 직면하게 되는 결핍과 상실을 그저 메우고 치유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바라 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쓰쿠르가 소설 후반에 하게 되는 고향인 나고야에서 멀리 핀란드에 이르는 순례의 여정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은 왜 하루키는 그 시선을 문제삼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건 분명 이 소설에서만 보이는 특이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전의 소설들, 그러니까 1995년,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린 가스 살포로 인해 이제까지의 문학적 태도를 그동안의 '디태치먼트(무관심)'에서 '커미트먼트(전념, 헌신)'으로 전면 수정한 그에게 있어 그 첫 일보가 되는 '태엽감는새'부터 얼마전에 나온 '1Q84'까지는, 그 결핍과 상실을 메우는 일이 중요했다. 하루키는 그동안 바깥에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세계에만 몰입해서 써왔던 것을 반성이라도 하듯 외부로, 타인으로 향하는 소설을 써 왔지만 그 동기는 어디까지나 지금 문득 안아버린 결핍과 상실을 메우고 치유하는데 있었다. 이는 물론 한신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가스 살포 사건이 새삼스레 확인시킨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 앞에서 이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하루키 스스로의 응답이었다. 그는 현대 일본이 가진 위기가 무엇보다 오래도록 고착화되었던 일본 사회 특유의 폐쇄성에 있다고 보았고 바로 그 폐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외부로, 바깥으로, 타자에게로 자신을 열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더 이상 그런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소설 후반에 펼쳐지는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언뜻 보아서는 전작의 태도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하루키의 세심한 연출과 대화에 주목하면 뚜렷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바로 이 소설은 '위로'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그렇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로 이어지는 다자키 쓰쿠루의 순례 여정은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여정이 아닌 위로의 여정이다. 물론 위로도 치유의 일종일지 모른다. 하지만 둘이 전적으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결정적으로 이 둘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그건 아마도 위로든 치유든 그 받는 대상에 대한 평가에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치유는 그 받는 대상 스스로 부정토록 여기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위로는 그 스스로 긍정하도록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직접 남을 위로할 때를 떠올려만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위로에 있어서 무엇보다 선행되는 것이 그 받는 대상 스스로가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그와 같다. 아오, 아카 그리고 구로 모두는 늘 자신의 삶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쓰쿠루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쓰쿠루는 색채가 없는 그가 색채가 선명한 친구들로 인해 모자람이 채워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것이 바로 쓰쿠루였다고. 이를테면 그는 구로가 만든 도자기의 색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 색채는 남편의 작품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양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어떻게 부각할 것인가, 그것이 색채에 주어진 역할이었다. 색채는 아주 엷고 과묵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문양의 배경을 이루었다.(P. 329)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타인들을 빛나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빛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거꾸로 나눠주는 존재였다. 쓰쿠루는 자신의 색채 없음으로 그 공동체로 부터 추방당했다고 여겼지만 아카는 그토록 완벽했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결정적으로 그렇게 빛을 나눠주던 쓰쿠루가 도쿄로 홀로 가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핀란드에서 하얀색의 이름, 구로는 그 시절 쓰쿠루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주변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사랑받고 긍정받는 존재였다. 텅 비어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텅 비어있을 수 있어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사실은 구로도 그렇다. 하얀색 역시도 배경이 되어 다른 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그렇게 구로는 쓰쿠루와 가장 유사한 존재라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눈부시게 빛나던 소녀 시로 곁에서 늘 부속물 같은 존재로 취급 받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그대로 납득한 가운데 시로를 더욱 잘 보살피던 소녀였다. 이런 관계였기에 어쩌면 쓰쿠루와 구로 둘이 그런 관계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쓰쿠루와 비슷했던 구로였으나 결국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그건 그녀 표현에 따르자면 '나쁜 난쟁이'를 마음에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1Q84'에 나왔던 '리틀 피플'의 변형으로 보이는 그 나쁜 난쟁이'는 뭐라고 명확하게 정체가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그 존재의 있고 없고는 어디까지나 시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미래에 던지는 막연한 불안감의 시선이 바로 그 나쁜 난쟁이들을 불러온다. 구로는 결코 쓰쿠루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여주지 않을거라는 생각에 쓰쿠루를 축출하는데 동의했다. 시로의 곁을 떠나게 된 것도 언제까지 시로를 돌봐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로 역시 그러하다. 소설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이 바로 시로의 삶이다. 그 때 가장 빛났고 모두의 주목을 받았던 시로가 가장 어둡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로는 이렇게 말한다.

 

"유즈(시로)는 더 이상 백설공주가 아니었어. 아니면 백설공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지쳐 버렸는지도 몰라. 너 또한 일곱 난쟁이라는 역할에 지쳐 버렸고."(P. 354)

 

 그녀들을 지치게 만든 결정적인 장본인이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시로는 당장이라도 파국이 오지 않을까 불안했고 구로는 이대로 시로만 돌보다 자기 삶을 살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불안했다. 미래에 던지는 그 불안의 투사, 자꾸만 부정적으로 여기는 마음이 바로 나쁜 난쟁이들의 정체였던 것이다. 이제 더이상 그런 나쁜 난쟁이들에게 흔들리는 '구로'가 아닌  쓰쿠루처럼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도자기를 만드는 의연한 '에리'가 된 그녀는 쓰쿠루에게 말한다. 나쁜 난쟁이들을 조심하라고.

 

 여기에 하루키의 진심이 있는 것 같다. 왜 그가 이토록 세세하게 시선을 문제삼는지도 바로 여기서 그 이유가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그런 미래에 던지는 불안의 시선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것과 연결되어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그만두게 함이다. 세상엔 정답 같은 게 없다. 완벽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자명한 진리다. 하지만 우리들은 마치 그런 정답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런 완벽한 삶이 있다고 여긴다.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나와의 간극. 바로 그것이 우리 아픔과 절망의 원인이다. 완벽함이 있는 곳에 고통과 절망이 있다. 가장 눈부신 빛의 가장자리가 가장 어두운 법이듯이 말이다. 시로가 그랬듯이 눈부신 색채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둡고 힘들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 완벽이라는 것, 정답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가상이기 때문이다. 아오가 팔고 있는 '렉서스'의 의미처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이 있어. 렉서스란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아오는 웃었다.

"자주 듣는 말인데, 의미는 애당초 없어. 그냥 만든 말이야. 뉴욕의 광고 회사가 도요타의 의뢰를 받아 만든 말이야. 아주 고급스럽고 의미가 깊은 듯한 울림이 좋은 말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야."(P. 210)

 

 그렇게 완벽함이란 만들어진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토록 실제로 부터 보증받지 못하는 것이기에 시로가 그랬듯 그 중심에 설수록 불안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라가 '잘 가 카롤라, 반가워 렉서스.'라고 했듯이, 에리가 '잘 가 소설, 반가워 도자기'라고 또 반복했던 것처럼 정답과 같은 완벽함이란 이다지도 쉽게 변하는 것들이다. 그러니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시선이다. '언제 또 변할지 모른다'라는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그저 불안할 뿐이지만 '언제 변하든 상관없다. 난 그대로 받아들일테니'하는 넉넉한 시선으로 보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안된다. 그런 말이 하필이면 가장 변화를 긍정하는 사라와 에리가 똑같이 반복한다는 것은 바로 이 시선이야말로 하루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렉서스'에 깃든 의미는 손가락이 여섯 개인 '다지증' 에피소드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쓰쿠루는 일하고 있던 한 역사의 역장으로 부터 역에 버려져 있던 잘려나간 '여섯번째 손가락'을 발견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다지 특이한 경우도 아니고 통계적으로 거의 500명 가운데 한 사람은 거기에 해당될 정도로 확률적으로 흔한데도 우리가 그토록 여섯번째 손가락을 보기 힘든 것은 바로 이렇게 성년이 되어 스스로 잘라서 버리거나 어릴 때 부모들이 잘라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왜 잘라버리는 것일까요?' 묻는 쓰쿠루에게 역장은 다섯 손가락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전에 아오를 만날 때 쓰쿠루가 했던 말이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고등학교의 완벽한 공동체를 다섯 손가락에 비유했던 것이다. 또한 쓰쿠루는 언젠가 꾸었던 시로와 구로가 모두 나와 정사를 벌이는 꿈에서 그녀들의 손가락들을 특히 강조해 말하기도 한다. 그만틈 여기에서의 다섯 손가락은 완벽함과의 상관물이었다. 거꾸로 잘려나가는 여섯번째 손가락은 그 완벽함의 모습에 적합하지 않아서 제거되는 것들의 상징인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제거되었던 쓰쿠루도 스스로를 그런 '여섯번째 손가락'으로 여겼다. 그렇게 잘려나가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그는 꿈을 꾼다.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데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이 옆에서 악보를 기막히게 넘겨주는 꿈을. 하지만 그 꿈의 청중들은 그의 연주를 지겨워한다. 이 꿈은 그대로 완벽함의 가상에 희생당하는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섯개의 손가락을 가진 여인의 능수능란한 악보 넘김은 피아노 연주가 비유하는 완벽함에 있어서 손가락이 다섯개나 여섯개인지는 하등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함의 가상에 집착하고 있는 대중들은 그 연주에 아무런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대놓고 기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완벽함의 가상과 여섯번째 손가락들의 대립이 전면화되는 가운데 청중들로부터 '그로테스크할만큼 증폭되고 과장된 소음과 기침 소리와 불만의 신음 소리만이 그의 귀에 들리지만' 쓰쿠루는 연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설령 이제 아무도 그 음악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꿋꿋하게 자기 식대로 연주를 계속한다.

 

 이렇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기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쓰쿠루가 달인이다. 아오와 아카 그리고 에리가 쓰쿠루를 만날 때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너는 여전히 자기 페이스대로 사는구나!'가 바로 그 말이다. 이것이 하루키의 정답이다. 그건 이미 쓰쿠루란 이름 자체에 나와 있기도 하다. '쓰쿠루'란 이름은 '만들다'라는 뜻인데 쓰쿠르 스스로는 그 '만들다'를 스스로 '무형에서 형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라 정의한다. 완벽함이란 설계도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형성해가는 그 과정 자체를 중시하는 이름인 것이다. 쓰쿠루의 삶도 그랬다. 어디와 닮으려 애쓰는게 아니라 무형의 공간 위에다 '역'이라는 유형의 공간을 만들어왔던 것처럼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그저 한 발, 한 발 착실히 내딛여 왔던 것이다. 물론 그라고 해서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라'와 헤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혹시 시로를 죽인 게 자신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쓰쿠루는 결국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모든 것이 삶이란 거대 여정에 있어 저마다 소중한 한 걸음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늘 규칙적으로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된 손목 시계 처럼 오히려 그 모자람을, 불편함을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제 깨닫는다. 핀란드에서 에리가 말했던 대로 '참을성 있게 어린 새에게 울음소리를 가르치는' 어미 새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이러한 쓰쿠루의 모습은 마지막 사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의 마음은 사라를 갈구했다. 그렇게 마음으로 누군가를 원한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쓰쿠루는 그것을 강하게 실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이것이 처음인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것이 멋지지만은 않다. 동시에 가슴앓이가 있고 숨 막힘이 있다. 두렵기도 하고 어두운 울렁거림이 있다.그러나 그런 고통조차도 지금은 소중하고 사랑스럽다.(P. 436)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뒤이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눈부신 색채로 만개한다.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 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 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P.437)

   

 하루키가 감동적으로 보여주듯이 삶의 모든 걸음이 다 소중하다. 삶이 가진 모든 모습이 다 가치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시선은, 그렇게 나쁜 난쟁이들에게 유혹당해 불안한 마음을 나와 미래에다 투사하는 시선은 삶의 색채를 나누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져야 할 것과 기피해야할 것을 나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루키는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게 나누는 것만큼 우리의 삶 역시 줄어들 것이라고. 타인이 가진 색깔을 볼 수 있었던 미도리카와가 줄 수 있었던게 오로지 죽음뿐이었듯이 말이다. 그런 미도리카와조차 이렇게 충고한다. "논리의 실을 이용하여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자기 몸에 잘 맞게 바느질로 붙여 가는 거야."(P. 116)라고. 그러므로 삶의 모든 순간을 결핍'과 상실이라는 어두운 색깔로 채색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그런 감정들을 낳게 하는 '완벽함'이란 정답 또한 '렉서스'만큼이나 의미없는 가상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키의 조언대로 시선을 완벽함을 찾거나 먼 미래에 두는 게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 보다 정확히는 우리의 발 바로 앞으로. 내게 없다고 해서 안달하지도 않고 잃어버릴까 불안해하지도 않으면서 확실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페이스대로 걸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개쳐지지 않도록' 해주는 구원의 걸음이다. 정말로 신의 아이들에게 결핍과 상실은 없다. 오로지 계속되는 삶을 누리는 '춤'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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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요 그것도 어느 정도 살아봐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쓰쿠루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처음부터 알고 받아들이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은 본래 헤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자라는 것이죠^^


희선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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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1박 2일'이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점 하나가 흥미롭다. 핵심적인 공통점으로 바로 들어가기 전에 일종의 러프 스케치를 하듯 시작해 본다면 이 세 프로그램들엔 일단 늘상 현재로 부터 줄창 달아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글의 법칙'은 문명의 이기가 전혀 닿지 않은 정글이나 초원으로 달아난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로 유목민적이다. 어느 정도 정착했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짐을 싸들고 다시 또 어디론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떠나기 때문이다. '러닝맨'은 어떠한가. 마치 러닝맨 게임에서 이름표를 떼듯, 언제든지 그리고 그 누구든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그렇게 모든 타인들이 잠재적 위협의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이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1박 2일'은 표면적으로 알려진 모르는 곳을 알아가는 재미 보다는 정작 얽메인 현실에서 훌쩍 벗어나 전혀 낯선 곳에서 전혀 낯선 인물들을 만나면서 낯선 상황이 주는 자유로움을 별 것 아닌 게임들과 목적없는 수다들로 채워 만끽하게 해 주는데 더욱 치중한다. 문제는 이 세 프로그램들은 왜 자꾸만 달아나려고 하고 시청률에서 보여지듯이 대중들은 여기에 화답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드리워진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의 발현이 아닐까. 이렇게 만일 이 프로그램들이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제 얼마나 우리가 가진 정형화된 삶의 모습에 질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말해 우리들은 어릴 때 부터 어른들로 부터 일종의 정답같은 삶이 있다고 배워왔었다. 어릴 때 아이들의 꿈이 비슷비슷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나를 비롯하여 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말했겠지만 알고보면 엄마 아빠로 부터 그런 것이 좋다, 넌 그렇게 되어라는 말을 늘 들어왔었기에 그걸 단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솔직히 삶의 여백을 채 몇 페이지도 채워나가지 못한 아이들이 알면 무얼 알아서 꿈을 운운하겠는가. 이렇게 마치 공장에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기성품처럼 꿈이 비슷하다는 건 그런 것이 하나의 정답 같은 삶으로 우리의 뇌리속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아닌가 싶다. 사실 우리는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항목들이 나열된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어른들을 따라  마치 그 체크 리스트에 'V'자 표시를 하듯 항목들 하나하나를 이뤄가며 걸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우리 역시도 보다 큰 틀에서 보자면 '피그말리온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어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조각한 삶의 틀에다 우리를 억지로 끼워맞춰 그 조각이 생기를 얻도록 한 건 바로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병모 작가의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굳이 청소년 소설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사실 '피그말리온' 은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이 말했듯이 자신의 본래적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오로지 '대타자'라는 사회 일반이 이루고자 하는 욕망만을 그대로 복제하여 자기 욕망으로 알고 이루려 애쓰고 있는 지금의 모든 현대인들의 초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 

이야기는 지난 16년간 절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없는 '낙인도'라는 섬에 세워진 일종의 대안 학교인 '로젠탈 스쿨'에 '마'와 '곽'이라는 한 피디와 촬영기사가 취재를 위해 들어가면서 부터 시작된다. 설립 의도도 교육과정도 교육 방침 조차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회로 부터 상처받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은 거둬 자활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만 듣고 취지에 나섰는데 직접 그 현장을 보고나니 학생과 교직원을 다 합쳐 백 명 정도 있는 그 학교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로젠탈 스쿨은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인간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믿으며 기대하면 언젠가 그 결과가 재능의 발현과 목표 달성으로 나타난다는 로젠탈 효과 이론을 바탕으로 세워진 학교는, (P. 42)

 

 알고보니,

 

 "말로는 아이들의 잠배력을 믿고 끌어올린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실제론 상한선을 두어 가면서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이 아이들의 능력이 그 잘나신 사회 구성원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이 아이들이 사회에 충실히 부역하는 동시에 기득권, 그러니까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모아 놓고 순한 양이 되게 잘 길들이는 임무를 수행 중이시라는 거잖아요." (P. 170)

 

 이런 학교였다. 교육과정도 그들의 여가 생활도 그들이 정보를 얻게 되는 통로도 모두 어떤 정해진 상한선 아래로만 가능하도록 위로 부터 획일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의 획일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내면 그게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엄벌에 처해지고 있었다. '마'피디가 보기에 거기는 학교가 아니라 감옥이었다. 아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전체주의 국가와 같았다. '마'는 거기서 피그말리온을 떠 올리게 된다.

 

 피그말리온 이야기 같잖아.

 (...) 당신은 내가 말하고 믿는 대로 변모한다. 옛 이야기 속에서는 조각상이라는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조각가의 간절한 구애와 기대 끝에 살아있는 미모의 여인이 된다. 현대의 연극과 영화 속에서는 길거리에서 꽃을 파는 아가씨가 태생의 한계를 벗어나 상류층 악센트와 발음을 구사하지, 그것도 공작부인 급으로. 그러나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아프로디테가 그 다리에 피를 돌게 하고 숨을 불어넣어주기 전까지 갈라테이아는 감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조각상이었던 반면 일라이저는 귀족 숙녀처럼 말하게 되기 전에도 이미 인간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끝내 히긴스 교수를 떠나 화원 사업 종사자로 살아간 이유다. 말씨에 품위가 깃들고 쇼윈도가 있는 자기 가게를 가진 것만으로, 거리에서 꽃을 팔던 때보다 신분이 월등히 상승했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그런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자아가 최상의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까. (P. 95)

 

 그렇게 여기서 '마'는 로젠탈 스쿨의 아이들이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에 나오는 일라이저와 똑같다고 생각하고 과연 인간의 자유롭고 다양한 욕망을 어떤 하나의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는 것이 옳은 것인가 여기게 된다. 그 이후 '마'는 학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보단 학교 안에서 자신의 다양한 욕망과 가능성들을 억누르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을 학교의 마수로 부터 건져내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된다. 그는 사사건건 학교의 교육관에 젖어 있는 교직원들과 맞서며 궁극적으로 모두를 구해내기 위해 학교의 악행을 밝히려 한다. 거기에 조력자가 등장하는데 교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은희란 아이였다. 은희는 말하자면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서로 극과 극의 입장에 서 있는 '마'와 교장 사이의 경계에 위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학교의 사고 방식에 완전히 물든 것도 그렇다고 '마'가 대변하는 개인이 가진 다양한 가능성과 욕망의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은희는 '마'를 도와준다. 딱히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학교의 모습은 어딘가 지나친데가 있는 것 같고 그 보다 더 큰 이유는 다시는 선량한 사람을 아무 이유없이 희생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은희는 바로 그 때문에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르지만 '마'를 돕는 모험을 감행한다. 이건 절대로 그녀가 '마'에게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이 모든 행동들은 오로지 은희 혼자만의 결단이었다. 작가 구병모가 이 소설의 결말에서 궁극적으로 '마'와 교장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것은 우리가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 벗어나고 싶다면 결국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은희'의 길이기 때문이다.

 

 구병모 작가가 은희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그 은희야 말로 주체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피그말리온'은 타자의 욕망에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렇게 타인이 자신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끔 스스로를 수동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피그말리온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결국 '마'와 '은희'는 같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은희의 손이냐고 물을 수 있다. 이 대답을 위해 중요해지는 것은 구병모 작가가 과연 '마'를 이 작품에서 어떤 존재로 설정했는가일 것이다. 사실상 '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이끌고 가며 그래서 주인공이나 다를바 없지만 개인적으로 구병모 작가는 '마'를 절대 주인공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마'와 '교장'과의 관계를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그야말로 극과 극으로 완전한 대립 구도를 이룬다. 거기다 이 두 입장이 벌이는 논쟁이 소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를 보고 있으면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듯하다. 그야말로 상반되는 신념을 가진 목소리들의 전쟁이다. 이러한 대립구도와 목소리들의 전쟁을 생각한다면 이로서 '마'의 존재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러니까 로젠탈 스쿨의 학생들에게 들렸던 교장의 목소리처럼 이 '마' 역시도 그런 '대타자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즉 은희에게 있어 '마'의 목소리는 '교장'과 똑같은 역할을 한다. 교장의 말 만큼이나 스스로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그 말을 수동적으로 따르게 하는, 그렇게 사실은 피그말리온으로 만드는 목소리인 것이다. '마'가 아무리 좋은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그 이름이 '마'가 된 것도 사실은 이 존재가 또 하나의 '말'의 은유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은데 '말이라고 하기는 무엇하니 그것과 똑같은 음을 가진 뜻의 한자어인 '마'로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즉 여기서 구병모 작가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마'의 말처럼 아무리 좋게 들릴지라도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 말이 옳은지 그른지 오로지 혼자 힘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은희는 '마'에게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혼자 판단하여 그를 돕고 후반에 가서 '마'를 도와주는 아이들 역시도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두 그 자신의 판단으로 도와준다. 사실 '마'는 자신이 아이들을 학교로 부터 구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정작 구원을 받은 것은 오히려 '마' 자신이다. '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도 아이들도 별달리 달라진 점은 없다는 것이 이러한 점을 더욱 증명한다. 결국 구병모 작가는 이런 식으로 아무리 좋은 말이더라도 그게 살아남아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건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들 덕분이라는 걸 보여준다. 즉 '마'와 같은 좋은 이념이 주체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체성의 확립이 오히려 좋은 이념이 자리잡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병모의 전작들을 고려해보면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아도 구병모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은희처럼 경계 위에 선 존재가 많았다. 세계는 항상 그들의 주체성을 빼앗으러 달려드는 하이에나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 경계의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구병모 작가의 소설 속에서 '글'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스스로 글을 짓고 말을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그들을 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종장의 '곽'의 딸 예린이의 이야기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려는 주체성과 그것을 갉아먹고 획일적인 틀에다 끼워맞추려는 세상의 싸움이 은희가 여전히 로젠탈 스쿨에서 투쟁하고 있듯이 그리 쉽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손을 뻗듯이 욕망에 충실함은 스스로를 주체로 만드는 행위지만 반면 세상은 그 예린이가 솜사탕을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엄마가 대는 이유처럼 무한정 욕망의 충족은 오히려 너를 병들게 할 뿐이니 너를 위해서라도 억압과 교정은 필수적이라 말한다. 이렇게 나와 세상의 투쟁이란 항구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주체적이고자 하는 이들에게 '경계위의 삶'이란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는 소설 마지막에 나오는 '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걸 전혀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예린이가 솜사탕을 향해 보여주는 집요함처럼, 은희가 학교 안에서 스스로의 결단으로 당당히 싸워가는 것처럼, 결국엔 '마' 역시도 마지막에 깨달은 것 처럼, 그런 투쟁 자체가 오히려 그 자신을 주체로 만들어주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똑바로 보는 것이다. 스스로 온전히 소화하여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때까지 섣불리 자신을 내어주지 말고  마주 응시하며 저항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계 위에 서 있게 되는 모든 주체가 되려는 이들이 보다 확실한 균형을 잡기위해 필요한 것이며 이럴 때 '경계'는 그야말로 주체성을 위한 더없이 최적화된 공간이 된다. 문제는 경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을 긍정하며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늘상 경계 위에서 '피그말리온'의 운명을 뒤집어 씌워 획일적 틀에 가두려는 세상과 작품을 통해 싸워왔던 구병모 작가가 보여주었던 것이기도 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하는 것도 아직 그녀는 그 싸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이어가리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방어전을 치른 챔피언 같다. 앞으로 그녀는 한 차례 쉬면서 다음 시합을 준비할 것이다. 어떤 시합이 되었든 그 시합도 꼭 관전하고 싶다. 아무튼 스스로를 가두는 것도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도 모두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피그말리온 아이들'을 읽은 지금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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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
  2.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6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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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유한한 존재인 인간으로선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런 우리에게 상실이란 예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편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건만 그래도 우리들은 거부한다. 어떻게든 거기서 나만이라도 예외가 되고 싶어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욕망이란 게 사실은 ''파과(破果)'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학벌을 가지고자 하는 게 다 타인들로 부터 그럴싸한 인정을 받기 위함이니 말이다. 보기 좋은 과일이 먹기도 좋다란 말도 있듯이 그렇게 빛깔과 모양 좋은 과일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이라는 군침을 흘리게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욱 '파과(破果)'란, 그걸 연상시키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혐오와 기피의 대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스스로를 '파과'라 여기는 여성 살인청부업자 '조각(爪角)'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나이는 60대. 한 마디로 늙었다. 노년 또한 '파과'의 대표적인 이미지다. 당연히 기피의 대상이다. 소설은 그녀가 지하철에 올라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녀가 올라타자 소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노년에 따라붙는 혐오와 기피의 이미지를 참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건 민폐까지도 넘나든다. 같은 지하철에서 앉아있는 한 젊은 임산부 여성에게 할아버지가 다짜고짜 상스러운 말투로 역정을 내는 것이다. 그가 역정을 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임산부든 뭐든 상관없으니 얼른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마치 나이가 무기라도 된듯이 그는 인정사정없이 하소연하는 여성을 찔러댄다. 이게 서장의 뒷부분이다. 문득 의문이 든다. 구병모 작가는 왜 이런 묘사를 넣은 것일까? '고의는 아니지만'에서 충분히 맛을 보았듯이 구병모 작가는 어느 장면도 아무 이유없이 그냥 넣지 않는다. 여기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이게 꼭 지하철에서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그 할아버지는 조각의 손에 죽는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나왔던 '조각'의 묘사가 흥미롭다. 왜냐하면 구병모 작가가 노년에 따라붙는 기피의 이미지를 나열한 뒤 '조각'에 대해서는 이렇게 묘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사람들이 간주하는 바람직하고 교양있으며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p. 11)

 

 여기서 문득 깨닫는다. 노년이 다 혐오와 기피의 대상만은 아님을. 그렇다. 임산부에게 무지막지하게 굴었던 그 할아버지처럼 우리는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지 않을 때 혐오하고 기피한다. 노년이 노년답게 행동하면, 다시 말해 '파과'가 '파과'답게 행동하면 우리는 혐오하거나 기피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에피소드는 바로 이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나온 것은 아닐까 싶다. 더우기 소설 가장 앞부분에서 인용된 시(詩)를 고려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떨어뜨림에 익숙해지면

 으깨진 과일에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서효인 '저글링'에서 - 

 

 이 시에서 미련이 없음은 더 이상 과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파과'를 '파과' 그대로 내버려두겠다는 것. 이는 '파과'를 그 자체로 받아들임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파과'임을 자각하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조각'이다. 이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일단 청부살인을 할 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충분히 자각하고 있으며 거기에 아주 충실하게 행동한다. 앞서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의 전형으로 있었듯이 청부살인자의 전형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선을 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을 청부살인의 세계로 이끈 스승이자 연인이기도 한 '류'가 겪은 비극으로 인해 '지켜야 할 것'은 절대 가지지 않은 그녀는 오직 개 한 마리만을 기르고 있는데 바로 그 개를 통해서도 이건 나타난다. 그 개를 구병모 작가는 그녀의 분신 같은 것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그녀가 새롭게 태어나려 할 때 개가 죽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바로 그 개의 이름이 '무용', 즉 '쓸모없음'이기 때문이다. 그런 개에게 그녀는 주인으로써 그래도 할 도리를 다 하고 더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대비해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늘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는데 이는 과연 그녀가 '파과'인 자신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가장 압권인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 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p. 222)

 

 더 이상 달리 어떻게 생각할 수가 없다. 손 안에서 부서지는 갈색 덩어리는 그야말로 조각 스스로 생각하는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그녀는 아파하고 아파하지만 '파과'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연민하여 눈물은 흘리지만 '파과'인 자신을 내치지는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조각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 단, 조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강박사(그 가족을 포함하여)는 예외다. '굳이 먹어보지 않아도 입안에 도는 감미, 아리도록 달콤하며 질척거리는 넥타의 냄새야말로 심장에 가둔 본질이다. 우듬지 끝자락에 잘 띄지 않으나 어느새 새로 돋아난 속잎 같은 마음(p.102)'을 조각에게 알려준 강박사는 사실 조각과 같은 존재이다. 그도 파과인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중요 인물들은 다 반대편에 서 있다. 조각은 청부살인을 한다. 프리랜서가 아니라 어엿하게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있다. 기업 단위로 움직이는 조직의 일원인 것이다. 근데 거기서 자기들끼리 '청부살인'을 바꿔 부르는 단어가 흥미롭다. 구병모 작가는 세심하게도 여기다 '방역'이라는 말을 쓴다. 방역. 벌레 퇴치. 과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존하려 할 때 주로 하게 되는 것이 '방역'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소설의 '청부살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소설에서 청부살인이란 '방역'이라는 말 그대로 과일을 '파과'가 되지 않게 하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을.

 

 그러고보면 그 에이전시에 있는 사람들 이름 역시 예사롭지 않다. 사무실에서 조각에게 의뢰를 알선해주는 여성의 이름은 '해우'고 조각과 같이 청부살인을 하는 젊은 남자의 이름은 '투우' 다. 한문 표기가 나오지 않아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들 이름의 '우'는 근심 우(憂)자로 보인다. 즉 '해우'는 화장실의 또다른 이름인 '해우소'와 같이 근심을 푸는 곳이고 '투우'는 던질 '투(投)'자로 근심을 먼 곳으로 집어던짐이다. 해우는 계속 사무실에만 있으므로 '해우소' 그대로 장소를 강하게 뜻하고 투우는 동작이므로 그렇게 근심을 풀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들은 근심을 가지고 와서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던져버릴 수 있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여기서 근심은 무엇일까? '방역'이라는 이름에 스며들어 있듯이 바로 '파과'에 대한 염려, 두려움이 아니겠는가?

 

 결국 조각은 어차피 에이젼시로 부터 소외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각과 대결하게 되는 투우를 보면 이러한 조각의 고립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알고보니 투우는 자신의 인생을 '파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을 내내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파과'가 되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의뢰인들이 그랬듯이 남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과일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소설의 비극은 언제나 스스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선을 넘을 때 일어난다. 투우도 그렇지만 조각 역시 마찬가지다. 조각이 청부살인자가 되기까지의 이야기가 그렇지 않았던가? 그녀가 그 날 더부살이하게 된 당숙의 딸 방으로 들어가지만 않았던들, 거기서 허락도 없이 폐물만 구경하지 않았던들 그녀는 청부살인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류는 또 어떤가? 가족을 가진다는, 그렇게 청부살인자로서 선을 넘는 행위만 하지 않았던들 비극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소설의 모든 비극은 언제나 그 너머를 욕망할 때 찾아왔다. 현재의 조각이 폐지 줍는 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강박사 가족을 곤경에 빠뜨리게 되는 것도 다 그녀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은 탓이듯이.

 

 이로써 소설의 주제는 명확해진다. 설령 자신의 모습이 '파과'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변화의 거부가 아닌가?'하고 오해하기 쉽다. 물론 '파과'로서의 자신을 인정하며 '파과'가 되지 않으려 선을 넘는 걸 부정하는 게 변화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파과'인 자신을 기피하고 보다 온전한 과일이 되도록 힘쓰는게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우러난 동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으로 파헤쳐 들어가면 우리는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이유를 찾게되는데 그건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즉 우리가 '파과' 되는 것을 두려워 함의 본질에는 타인으로 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남들 눈에 빛깔과 모양이 좋은 과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우리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정체인 것이다.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소설이 이걸 바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손톱'과 관련된 네일아트 장면이다. 소설에서 이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하나는 첫부분에, 나머지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이 두 번의 반복된 등장은 한 마디로 조각이 얼마나 변했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우리는 조각의 변화가 다른데 있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건 구병모 작가의 연출에서도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일단 첫 부분에서 조각은 네일 아트에게서 유혹을 느낀다. 직원으로 부터 권유까지 받지만 결국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같은 자리에 있던 교복 소녀가 '눈쌀을 찌푸리곤 엉덩이를 슬쩍 당겨 옆으로 피하듯 비껴 앉는'(p.54) 대놓고 싫어하는 행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원이 자신을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로 취급해 버릴 것을 지레짐작한 탓이다. 그렇게 그녀는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손톱 꾸미는 일을 그만둔다. 이 손톱 꾸미기는 사실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인데 '손톱'이 바로 조각 자신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조각(爪角)'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손톱'이다. 또한 그녀가 살인청부업자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손톱'으로 불리웠다. 호칭은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게 바로 타인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조각의 호칭은 '대모'다. 존칭이라기 보다는 공격성이 무화된 이름인 것이다. 에이전시는 그 이름을 부르며 무시를 은밀히 깔며 투우는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손톱을 기르라'고 말한다. 때문에 '손톱'을 가꾼다는 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앞서도 보았듯이 타인의 시선 앞에서 가로막힌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는 그 바람을 이룩한다. 더구나 한 손이 없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구병모 작가의 연출까지 고려하면 이 의미는 더욱 부각된다. 첫부분에서 시점은 어디까지나 조각에게 있었다. 조각의 입장에서 네일아트의 아름다움, 교복 소녀의 기피, 직원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가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정반대로 연출되어 있다. 바로 네일아트 직원의 입장에서 조각이 보여지는 것이다. 즉 거기서 조각은 더이상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하지만 첫부분에서 주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워만 하던 조각은 마지막 부분에서 어쩌면 가장 열악한 위치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조각, 그녀가 얼마나 변해버렸는지는 더욱 두드러진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에서 늘 입밖으로 내지 못했던 '누구나 다 어머님이라 하나? 난 당신의 어머니가 아니에요.'도 입밖에 낸다.

 그리고 말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처럼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p.332)'고. 이만큼 그녀에겐 이제 스스로가 '파과'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붙여진 손톱이 진짜 손톱이냐 인조 손톱이냐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 것 처럼.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즉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그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사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것이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바로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가진 '파과'에 대한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를 밝혀 왜 그로부터 해방되어 우리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긍정함이 바람직한 것인지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이는 전작 '피그말리온 아이들'의 주제와도 이어진다. 거기서 '피그말리온'은 원전이 되는 그리스 신화와 똑같이 타인에 의해 형성되는 우리의 자화상을 의미했다. 그렇게 구병모 작가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말들에 의해 스스로의 모습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길들여가는지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번엔 '타인의 시선'이다. 말들과 똑같이 우리의 시신경을 교란시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긍정하기 보단 남들의 기준에 맞춰 늘 모자람과 부정적인 것만 부각시키는 그 시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소설 '파과'는 우리가 보다 자유롭고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바로 여기로 부터 탈출해야 함을 아주 선명한 색채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것도 여름밤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고도 선명해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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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놀랍고도 정교한 나와 당신의 이야기...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6 21:08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2. 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7 17:04 
    1. 베스트셀러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대중들의 은밀한 욕망들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로 기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눈에 띄는 형태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비단 베스트셀러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시청률이 높은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 역시도 이러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인기 높은 프로그램들인 '정글의 법칙', '러닝맨' 그리고 '
 
 
2013-08-17 0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1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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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끝났다. 날들은 온기를 잃었다. 사람들로 가득 붐비던 여름의 해변은 황량하게 버려졌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가버린 여름의 축제를 아쉬움으로 곱씹게 만드는 계절,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한층 더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

 

 75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미국은 그런 계절이었다. 72년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75년 베트남 전쟁 패배로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나라와 거기에 투영되었던 이상이나 꿈들은 광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윙윙' 메마른 바람소리만 맴돌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공허와 회한만을 가득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마치 이것의 반영이기라도 하듯, 이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비극은 모두 가을에 일어난다. 소설의 첫 죽음인,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던 여자 아이 모니카가 죽은 건 가을이었다. 뒤이어 낙마로 달랜더 부인의 아들 레슬리가 죽었던 것도 가을이었다. 여주인공 네드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때도 가을이었고 네드라가 자신의 남편 비리를 떠났을 때도 그랬다. 마치 운명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네드라는 아예 가을에 죽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공교로운 시간의 겹침은 아무래도 우연의 소산이라 보기는 힘들고 그 자체로 분명히 하나의 의도를 드러낸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70년대의 암울했던 미국의 분위기에 대한 비유이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의 말을 살짝 인용하자면,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었던 '모든 단단한 것들은 이제 대기 속으로 녹아 흩어져' 버렸으며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암시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은 58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20년 가까운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이 보여주는 그들의 궤적은 마치 이제 곧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황혼의 아스라한 마지막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가버린 미국에 대한 레퀴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진혼곡이 사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듯 이 소설 역시 그저 지나간 것의 씁쓸함만 되새기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70년대 초반 미국이 그랬듯이 이제 곧 닥쳐올 희망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둔 밤 가운데 어떻게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욱 말해주려 한다고 생각된다. 즉 이 소설은 주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그것은 갑자기 닥쳐온 밀물에 느닷없이 무너지는 모래성만큼이나 연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해변으로 떠 밀려온 유실물들로 생존해 나가듯이 삶이 아무리 산산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 파편 속에서나마 삶의 지속을 위한 교훈은 없는지 또한 찾아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끝이라고 해서 그냥 닫혀진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마저 포용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그 끝을 계속 열어보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나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항로이다.

 

 그렇게 소설은 과연 처음엔 참으로 단단하고 완벽한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대함을 믿고 있는' 비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p.65)' 여기며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나날을 그리며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리라 생각하고 있고 '네드라'는 '식사와 침대 시트 그리고 옷'이라는 오로지 '실존의 핵심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가사와 거기에서 비롯된 허기를 메워줄 뉴욕에서의 사치스러운 쇼핑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50년대 중산층 백인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그 'WASP'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50년대는 분명 그랬다. 냉전시대 덕분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의 승리로 고양되었던 미국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중산층 백인 가정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그저 가벼운 나날들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와서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가려졌었던 인권과 평등 문제가 불궈지고 거기에 차츰 사람들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이제 그런 미국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인권과 평등 모두에 있어서 사각지대에 있던 흑인과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엄과 권리를 부르짖었고 거기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대처로 인해 국가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로부터 개인의 전적인 해방을 주장하는 히피즘도 나타났다. 60년대에 들어와 이제는 전처럼 '파티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픈 욕망'도 없고 '유명한 사람들을 알고 싶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네드라의 변화는 정확히 이를 나타낸다. 그녀는 아울러 '혼자 있는 것'이나 '나이 드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히피즘이 바로 그랬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히피즘의 모토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네드라는 남편이 아닌 남자 지반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행복한 부부란 건 지루해. 더 이상 믿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 행복한 부부란 건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고'하면서 남편 비리와의 이혼을 생각한다. 비리 역시 카야란 여성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되면서 결혼을 이미 선택한 이상 다른 것은 할 수 없게 만드는 굴레로 여긴다. 균열은 이렇게 찾아왔다. 균열로 두 갈래로 나뉘어버린 흐름이 물과 기름처럼 전혀 만나지 못했던 당시의 미국이 그랬듯이 비리와 네드라의 결혼 역시도 그저 의무감에서 지속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파국의 가을이 찾아왔고 그토록 완벽하고 견고해 보였던 비르와 네드라의 결혼은 대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똑같이 60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케네디는 암살 당하고 그동안 꿈꾸었던 모든 이상에 대한 차가운 마지막 비웃음이기라도 하듯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손에 의해 벌어진다.

 

 여전히 50년대의 미국을 믿는 중산층 백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비리는 그제서야 묻는다.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 다정하고 쾌활한 웃음이 넘치던 애머갠셋의 집은 이제 비워졌다. 결국 그는 네드라에 대한 기다림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을 팔아버린다. 거기서 보냈던 완벽한 여름은 이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계절에 열여섯의 네르다는 당시에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탈출했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한껏 열린 계절. 하지만 그 여름의 의미는 이제 변질되었다. 네드라는 애머갯센의 집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또다시 탈출을 꿈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자신의 내적인 삶에 충실하기 보다는 비리의 고백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p.67)

 

 거기서 환한 햇살은 이제 더 이상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주목을 향한 열망에 가리워져 있었던 삶의 진실을 보게 만든다. 빛 가운데서 은폐는 더 이상 힘을 잃는다. 이는 소설 초반부터 이미 나와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비리와 네드라의 집을 묘사할 때 부터 말이다.

 

 강가의 집은 온실의 지붕을 따라 철제 장식이 있는 집이다. 강가의 집이라 오후 햇살을 받기에는 지대가 너무 낮았다. (...) 집은 정오가 되면 찬란한 햇살에 잠겼다. 칠이 더러워지거나 벗겨진 곳이 눈에 뛴다.(p. 24)

 

 햇살은 이렇게 완벽한 가정이 사실은 어떤 위장임을 드러낸다. 두번째 문장에서 가정이 환영에 불과한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것은 햇살을 충분히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걸 은연중 드러내기도 한다. 햇살의 이러한 의미는 이보다 먼저 소개된 '어젯밤'에 나오는 첫단편인 '혜성'에서도 암시된다. 그 단편의 주제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인데 여자주인공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러다 환한 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몸으로 깨닫게 된다. 빛은 이렇게 진실을 드러내는 창구가 된다. 네드라는 여름의 환한 햇살 속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진실과 진정한 자기 욕망을 깨닫는다. 네드라에 대한 비리의 미련은 그런 빛을 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한 봄볕 속에서 자신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공교롭게도 그 때의 깨달음에 이르게 한 건 거북이다. 사실 그 거북이는 이전에도 한 번 나타났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P. 67)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이건 이 소설의 대전제다. 두 번 등장하는 거북이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려 하는 것은 그 전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북이와 마지막의 거북이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인용된 문장의 거북이는 먼 눈으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저 생각없이 걷고만 있다. 한 마디로 이 거북이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길을 선택한 순간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비리가 그랬다. 그는 한 번 가정을 선택했다면 아예 다른 선택은 생각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카야에 대한 미련도 아이들을 위해서 접고 이탈리아에서의 다른 여성과의 만남으로 또 한 번 삶의 변화를 맞딱드렸을 때 조차 여전히 네드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지막의 거북이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슬처럼 맑은, 연한 색의 눈이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고 '등딱지 속으로 몸을' 숨긴다. 비리가 땅에 내려놓기까지 했으나 움직이지도 않는다. 걷지 않는 거북. 주위의 상황을 가만히 헤아리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그걸 보고 비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은 숨을 쉬는 듯했다. 마치 그를 알아보고 숲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변화를 느꼈다. 깊게 감사하듯 감동을 느꼈다. 피가 머리를 빠져나와 온몸에 돌았다.(p. 436)

 

 여기에서는 빛의 변화도 감지된다. 처음 거북이를 떠올렸을 때 비리는 이제 막 비쳐드는 아침 햇살 속에 있었다.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햇빛이었기 때문에 모처럼 깨닫게 된 삶의 대전제에 대해서도 그릇된 태도를 지향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는 오래도록 고통을 느낀다.  그가 그 햇살을 '차갑게 느낀'(p.65)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포근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였다.

 

 이미 이 소설이 새로이 열려는 시작이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암시되고 말았다. 그렇다. '변화를 받아들임'이다. 손 끝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쥐려 애쓰지 않는 것. 방생을 하듯 닥쳐온 변화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제임스 설터가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그마나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언이었다. 소설에서 햇살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햇살은 앞서도 진실을 밝히는 창구가 되었듯 다른 여러가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 네르다는 사랑스러운 햇살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녀의 딸 프랑카와 함께 햇살 속에 있을 때는 성스러운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햇살일까? 이는 그저 가을이란 계절(처음에 난 이 소설을 가을의 소설이라 말했다.)이 여름날 그 많았던 햇살을 그리워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 눈부심, 따스함 보다 사실은 그 충만함 때문이다. 빛은 장소와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자신을 나눠주는 것이 바로 햇빛이다. 그만큼 타인에게 열려있고 다른 세계에 열려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햇빛이다. 제임스 설터가 햇빛을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때의 미국이야 말로 필요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비리와 네드라처럼 60년대의 미국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때의 균열은 그때까지의 거짓된 환영을 부수고 새로이 이상적인 미국을 열 수 있는 변화의 계기도 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닥쳐온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과거의 가치를 고수했고 다른 변화를 이끌었던 이들조차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보단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국 미국은 제멋대로 뻗어나간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터는 거기에 다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노인 화가처럼 여전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잎새를 붙이려 한다. '끝이 아니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 걸어야 할 땐 걷고, 웅크릴 땐 웅크리는, 그렇게 세계를 두루 살피고 변화에 나를 열며 타인과 서로 교감하자.'는 잎새를. 때문에 이 소설은 환멸을 딛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세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만큼 환멸도 반복되었다. 미국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90년대 초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릭 루디라는 작가는 그 때 다시 한 번 붕괴된 가치관을 제임스 설터처럼 70년대의 한 부부에게 닥쳐온 가치관의 위기에 빗대어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게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만든 이안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었던 '아이스 스톰' 이었다. 어쩌면 릭 루디는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들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의 위기를 그리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위기를 형상화하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나날'이 나온 2년 후에 영화 감독 로버트 브레송은 '아마도 악마가'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설터가 느꼈던 비슷한 환멸을 드러낸 영화로서 여기엔 어른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소년들이며 그들은 그 어떤 이념도 믿을 수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 한다. 더이상 어른들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로버트 브레송은 제임스 설터와 우리를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총체적 꿈은 깨어졌으며 우리는 그 파편들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공유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제임스 설터의 세밀화가 그저 개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는 분명한 동시대에 대한 언급이었고 대안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유통기한이 70년대에 머무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시대에 대한 환멸만큼이나 이 소설의 생명력 또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릭 루디가 '아이스 스톰'에서 다시 한 번 비슷한 세계로 들어간 것과도 같이 2001년의 9.11에서도 그 뒤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또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에서도 늘 다시금 들춰지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그만큼의 희망 역시 깃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한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러리라 생각한다. 시대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이 몸을 가위처럼 누를 때마다 소설 속 그녀가 잎새를 보았듯이 그 세밀하고 사려깊은 문장들 틈에서 자신만의 희망 광맥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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