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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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갇힌 여인'. 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5권의 부제다.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은 종종 그러한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일 것이다. 남편에 의해 갇혀졌던 그 여인은 자신의 너무 강한 독립적인 개성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 개성이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히길 거부하였기에 내면의 갈등이 광기로 치닫게 된 것이다. 로드킬은 도로라는 인간 문명이 만든 공간에서 일어난다. 야생 생물이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를 뛰어넘어 인간이 만든 공간에서 자신의 야성을 드러낼 때 로드킬의 운명은 뒤따른다. 


 이러한 로드킬의 궤적은 여성에게도 있다. 여성 또한 남성중심사회가 규정한 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할수록 '제인 에어'에 나오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처럼 광기의 존재로 치부되어 '로드킬'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드킬은 독립적인 여성이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만나게 되는 항존하는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아밀이 단편집의 표제작으로 '로드킬'을 가져 온 것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편집, '로드킬'엔 여섯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소개를 하기 보단 이 단편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에 먼저 주목하고 싶다. 일단 여성이 있다. 그들을 가두는 사회 주류 세력이 있다. 주인공 여성은 그런 사회에 위화감을 가지며 그들에게 규정 당한 존재로 남는 것을 거부한다. 적극적 혹은 소극적으로 저항하다 끝내 그런 사회와 단절한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을 용기 있게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미래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다. '로드킬'처럼 아주 비극적인 결말도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다. 두 번째 단편, '라비'의 결말처럼.


 그런데도 잔류를 거부한다. 마치 결과야 어떻게 되든, 탈주하려는 몸짓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실은 남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이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남으려는 존재에겐 더없이 지옥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는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지는, 철저한 이분법적 체제다. 지배와 순종만이 유일하게 통하는 규칙이다. 그런 세상에서 여성 같은 약자들은 강자가 규정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로드킬'에선 남자에게 간택될 수 있는 전형적인 신부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외시경'의 아내는 작가로 등단까지 했지만 책 읽는 것조차 남편에게 금지 당한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그러는 이유로 '보호'를 내세운다. 하지만 그건 보기에만 좋은 허울이고 정말은 오히려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외시경'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립한 여성들의 강한 자의식 아래에서 희생당할 것임을.



아밀의 '로드킬'을 읽으면서 마치 BGM처럼 떠올렸던 노래는 

루신다 윌리엄스의 'CAR WHEELS ON A GRAVEL ROAD'였다.


Can't find a damn thing in this place
Nothing's where I left it before

(....)

There goes the screen door slamming shut
You better do what you're told. (가사 중에서)



 하지만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오세요, 알프스 대공원으로'의 강시병처럼 막을 수는 없다. 이솝 이야기에도 잘 드러나듯이, 억지로 길들이려는 건 더 강한 반발만 부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를 만든다. 날조해 유포한다. 그들이 보호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그것을 통해 납득시킨다. 스스로 호랑이가 아니라 생쥐라고 여기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강자들이 만든 이야기의 목적이다.


 그래서 작가에겐 담론이 중요해진다. 이건 여섯 단편 모두에게 유장하게 흐르는 강물이다. 이야기에 이야기로써 맞서는 것.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들은 규정과 강요를 통해 주입되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직접 이야기를 창출한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신화에 고백으로 대항한다. 그 분투 속에서 자신을 빚어나간다. 소설에서 탈주의 성공 여부는 도달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 발을 선 밖으로 내딛는 자체에 이미 탈주는 완성되는 것이다. 육체가 아니라 내면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에 말한 '갇힌 여인'으로 돌아가 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 소설에서 갇힌 여인은 알베르틴을 말한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정말 갇힌 사람은 누구인가를 서서히 드러낸다. 그건 바로 갇혀 있다고 여겼던 주인공 마르셀 자신이라는 것을. 알베르틴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마르셀은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를 영화로 새롭게 풀어간 샹탈 아커만의 '갇힌 여인'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려준다. 가두고 억압할수록 정작 더 그렇게 되는 건 행하고 있는 자신이라는 것을. '로드킬'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기꺼이 무단횡단을 하라! 아밀의 '로드킬'은 이런 선포로 무장하고 있다.



샹탈 아커만의 영화 '갇힌 여인'의 포스터. 정말 시선과 감금의 대상이 되는 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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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9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도 어쩌면 그런 게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연휴는 17일부터였을지...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코로나19는 여전하지만...


희선
 
달콤한 숨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6
유즈키 유코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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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늑대의 피'로 유명한 유즈키 유코의 소설로는 세 번째 만나보는 작품이다. 

 제목은 '달콤한 숨결'. 남자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리기로 찬탄을 받던 작가각 처음으로 여성 주인공을 전면으로 다뤄 화제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점이 내 관심을 끌었다. 그녀가 여성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세계는 아무래도 전작과 다른 이채로운 맛을 주지 않을까 기대되었다. 거기다 유즈키 유코의 소설들은 늘 몰입감 하나만큼은 흔한 말로 '쩔'었으므로 선택은 더 쉬웠다. 역시 이번에도 단번에 읽었다. '달콤한 숨결'은 이야기 구성도 신선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우린 소설 처음에 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름은 다카무라 후미에. 왕따까지 당할 정도로 볼품없었던 외모를 스스로의 힘으로 멋지게 가꿔 중, 고등학교 시절엔 제법 미소녀란 말을 들으며 연애 편력도 나름 화려했던 여인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저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감이 무척 많이 깎여 있다. 외모가 점점 아팠던 시절의 과거로 회귀하는 걸 보면서 그것이 정신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과식증에 해리성 장애까지 앓아버린다. 그러다 응모했던 인기 남자 연예인 디너쇼에 덜컥 당첨되어 후미에는 잃었던 삶의 의욕을 재충전할 기회로 삼고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참석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재충전할 기회가 되었다. 디너 쇼가 아니라 거기서 만난 중학교 동창 때문이었다. 무타라는, 결혼 전 성으로 먼저 자신을 부르며 다가 온 스기우라 가나코는 한 때 미소녀였던 후미에조차 기가 눌릴 정도로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가나코는 이건 성형으로 얻은 외모이며 중학교 때는 전혀 그렇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면서 주인공이 해 준 다정한 말 때문에 힘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의 은혜를 갚겠다면서 자기가 개인적으로 런칭하려고 하는 '뤼미에르' 화장품을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는 강사가 되어달라고 말한다. 자신은 외모 때문에(그녀는 눈 주위의 상처 때문에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으니 대신 그 일을 해 달라고 하면서 한 달에 50만엔을 그 대가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살림살이라 그만한 돈은 충분히 유혹적이었지만 그보다는 그걸 하면 '다시 아름다워질 거야'라는 가나코의 말에 결정적으로 매혹되어 그 일을 받아들인다.


 



 이것만 보면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시름시름 앓기만 하던 삶에 갑자기 찾아온 눈부신 빛과 같은 행운을 얻게 된 여인의 이야기라 생각할 것이다. '달콤한 숨결'이란 제목도 그런 인상을 마구 부추기고 말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작가가 누구인가? 하드보일드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즈키 유코가 아닌가! 마치 그런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작가는 후미에가 가즈코에게 별장 초대를 받는 장면에 바로 뒤이어 독자를 한 남자의 살인 사건 현장으로 인도한다. 도대체 이 사건과 후미에의 이야기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독자는 민완 형사 히타와 이제 막 그의 파트너가 된 미모의 여성 형사 나쓰키의 안내로 접점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 살해된 남자는 주위에 선글라스를 쓴 여인의 존재로 인해 가나코의 사기 피해자로 보였다. 그런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과 후미에가 점점 더 가나코의 일에 깊게 빠져드는 것이 병행 전개 되기에 우리는 후미애 역시 그런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하게 된다. 역시나 너무 밝은 빛은 조심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역시 능수능란한 유즈키 유코는 그런 식상한 전개를 허락하지 않는다. 둘로 나뉘어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반에 놀라운 반전의 사실과 함께 통합된다. 그리고 우리는 만나게 된다. 모처럼 후미에 인생에 찾아온 찬란한 빛과 같은 것 그 너머엔 그보다 몇 배는 더 무섭고 비정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어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지만 후미에는 정말 태양에 매혹되어 자신의 최후를 앞당긴 이카루스처럼 될 뻔했다. 


 무대 한 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 보는 욕망이다. 하지만 삶이란 알고 보면 주연인 줄 알았던 자신이 실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다는 걸 천천히 그리고 처연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 빛 가운데 설 수 있다는 유혹은 자못 크게 다가온다. 오늘날,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는 한탕주의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만 산다'는 주의야말로 가장 위험하다. 오직 눈부신 태양만 보고 날았던 이카루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은 그러한 눈부신 빛에 현혹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에게 매서운 경고를 날리는 작품이다.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인생 한방이다!'에 빠져 있는 형국이니까 말이다. 여름밤의 풀벌레들을 유혹하는 환한 아크 등이 그러하듯, 빛에 눈이 멀어 가까이 다가갔다간 몸이 타버리기 쉽상이다. 너무나 밝은 빛엔 언제나 그런 위험이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한 번 눈이 멀면 직접 몸이 타오르는 걸 느끼지 않는 한 빠져나올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사정은 그보다 더 나빠서 냄비 안 개구리가 될 수도 있다. 그 개구리처럼 몸이 마구 뜨거워지는데도 '설마 그럴 리가?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이걸 위해 준비 많이 했잖아.'하는 헛된 믿음에 집착하다 푹 삶아져버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소설에서 살해된 피해자들이 바로 그 좋은 예가 아니던가!(나는 지금 피해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썼다. 그렇다. 이 소설에서 살해당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후미에처럼 살면서 한 번은 아니 어쩌면 여러 번 마주하게 될, '실은 내가 별거 아니다'라는 각성의 파고 앞에서 나를 그냥 내던지는 방식으로 익사당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아마도 그 대답 비슷한 것을 주기 위해 난 히타의 파트너 나쓰키가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녀는 가나코도, 후미에도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미모를 소유한 사람이다. 그녀를 본 남자들은 모델 혹은 연예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형사 일에만 최선을 다할 뿐이다. 작가는 그런 식으로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빛을 얻으려 애써 노력하는 것보다 현재의 삶을 지속적으로 성실히 가꿔 나가는 것이 더 빛에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의 삶에 한없이 충실하다보면 구태여 바깥에서 빛을 찾지 않아도 스스로 빛날테니까. 작가는 나쓰키란 존재를 통해 빛은 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라 전한다. 갈구의 대상은 내 외부가 아니라 내면에 있다고.


 이런 저런 투기 광풍이 잘 보여주듯(한국 은행에 따르면 현재 39세 이하 MZ 세대는 역사상 가장 빚이 많다고 한다. 20, 30대가 주식을 위해 증권사에 신용 융자만 3조 4297억원이라고 하니 말 다했다.) 지금은 크고 환한 빛에 많은 이들이 눈이 멀어 있는 상태다. 빛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어둠은 오고 거품은 꺼지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지금 상황에 대해 경고의 말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 사실 지금은 뒤쳐지지 않으려고 남들과 같은 속도로 욕망에 뛰어들기 보다는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추락에 대비해야 할 때는 아닐까? 이런 조심스러움 때문에라도 유즈키 유코의 '달콤한 숨결'을 한 번 더 들이마시게 된다.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그런 나도 기꺼이 껴안고 그저 오늘의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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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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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쳐간다. 행복이라는 것에. 아무리 얻으려 애를 써봐도 도무지 내게로 올 생각을 안 하니까. 이만하면 얻겠거니 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행복은 저만치 떨어져서 날 보며 비웃고 있다. 그때, 누가 어깨를 두드리기에 돌아다보니 불행이 낯익은 표정을 짓는다. '뛰어봐야 벼룩이지.'하는 눈웃음을.


 어느덧 '행복하니?'란 말을 들어보지도 묻지도 않게 되었다. 닭살이 돋아서가 아니다. 내 주위 사람들의 삶이란 게 돈 없고 달리 기댈 데도 없다는 점에서 다 고만고만해서 혼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굳이 말로 꺼내어 해묵은 상처를 일부러 후벼 팔 필요가 없는 까닭이다. 일례로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 앞에서 가볍게 묵살당하는 내 성실한 노동의 가치를 보며 삶의 의욕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짙은 우울에 젖는 것만 해도 비단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니니까. 겨우 몇 년 몸을 의탁할 집을 구하기 위해 이제 또 어디서 벌이의 몇 배가 되는 돈을 마련하나 하는 걱정만으로도 행복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뒤로 돌아보아도, 앞을 내다보아도 요원하기만 한 행복. 차라리 박정한 팔자소관으로 치부하고 기대도 하지 않고 욕심도 내지 않는 것이 최소한 정신 건강에 이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정유정 작가의 신작, '완전한 행복'에서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인물은 지유였다. 어린 지유, 그녀는 엄마, 유나가 만든 세계에 갇혀 있다. 종속과 복종만이 그녀의 우주를 구성하는 전부다. 그래야만 유나 곁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종종 지유를 협박한다. 말을 듣지 않으면 보육원에 보내버리겠다고. 그 세계에 매달리기 위하여 지유는 두 가지 능력을 키웠다. 하나는 눈치를 잘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고 싶은 걸 꾹 참는 것이다. 그래서 난 지유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 모두 나 또한 내 세계를 건사하기 위하여, 하고 있으며 기르고 있는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노심초사(勞心焦思)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지금의 내 삶을 단적으로 형성하는 사자성어들이다. 살얼음을 걷듯 살피고 또 살피며 시집살이하듯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아 참고 또 참는다. 그러지 않으면 버텨낼 수가 없다. 덕분에 피로와 두통이 떠나가지 않는다. 아침마다 베개 위로 수북이 떨어진 머리카락을 확인하는 것은 덤이다. 내색은 안 했으나 속으론 곪아갔던 지유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난 지유와 똑같이 남이 만든 세계에 갇혀 있고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본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지만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다. 지유가 그랬듯, 거기서만 내가 유일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적은 이들은 그만큼 더 쉽게 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간신히 마련한 안정된 기반을 포기하기가 더 어렵다. 아무리 창밖으로 넓은 대지로 쭉 뻗은 길이 내다보여도 모험의 매혹보다는 불안의 예감에 더 사로잡히게 된다. 매섭고 가혹한 삶의 겨울을 이미 제대로 한 번 겪었기 때문에 그걸 다시 경험하기가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지유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아무리 곤경에 처하고 학대를 당하더라도 유나의 세상에서 쉽게 발을 뺄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소설 후반에서 난 충격을 받았다. 알고 보니 엄마 유나도 어릴 적엔 지유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경험을 했던 것이다. 격리와 고립이 있었고 자신과 꼭 닮은, 군주처럼 군림하는 할머니 때문에 오직 규정과 강요만이 전부인 관계 속에 놓여있었다. 지유와 똑같은 상처를 받았던 그녀는 그것이 원한이 되어 결국엔 타인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살인 행위의 근본은 엄마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지유와 그리 다를 게 없었다. 지유가 위태롭긴 해도 그나마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오늘의 자리를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했듯이 유나 또한 간신히 찾은 둥지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갈망 때문에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지유와 유나는 이처럼 여러모로 비슷했다. 하지만 나아간 길은 달랐다. 지유는 마침내 수동적인 안주에서 벗어나 이모 재인의 목숨마저 구한다. 반면에 유나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지유와 유나는 처지와 속에 품은 바람이 닮았기 때문에 지유 또한 엄마의 세계 속에 계속 있었다면 얼마든지 엄마처럼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유는 엄마와 같은 자폐적 행복의 사슬을 스스로 끊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난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그걸 찾아내면 나 또한 예전의 지유와 같았던 소극적인 안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질문을 염두에 두고 거듭 읽었다. 그러다 찾았다. 바로 재인 때문이란 걸. 지유는 노아가 사망했을 때, 재인의 보호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아플 때 재인의 극진한 간호를 경험했다. 소유물로써의 인형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랑받는 느낌을.


  그것이 지유에게 과거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도록 이끌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세계에선 유나가 전부였다. 세상의 기준은 유나였고 유나의 존재가 자신이 해석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그러나 재인을 통해 전혀 다른 가능성을 만난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엄마처럼 행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그런데도 엄마가 지켜주는 행복보다 더 따스하고 진정한 행복을. 재인을 통하여 그렇게 달리 살 수 있음을 한껏 실망했기에 지유는 용기를 내어 엄마가 쳐놓은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나 이모를 구하고 자신마저 구원한 것이다. 


 이건 내게 시사하는 바가 참 컸다. 나는 지금까지 홀로 버텨왔다. 그리스 신화 속 아틀라스처럼 온통 나 혼자 짊어지고서 버거워했다. 이런 나는 유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유나도 모든 걸 혼자서 책임졌다. 자신이 마주한 세상을 오로지 홀로 해석하고 거기에 따라 살아갈 방향을 정립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과거의 기억은 자기 주위 사람 누구도 믿지 못하게 했으니까. 그걸 재인이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재인은 유나의 맹렬한 원한 앞에서 포기해 버렸다. 그러고 보면 재인이 지유를 구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지유 역시 재인을 구했다고 해야 하리라. 지유를 진정으로 보살핀 것 때문에 그동안 방관자로만 있었던 것에서 벗어나 유나가 망가뜨린 자신의 세계를 끝내 복구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유나가 가두고 있었던 건 지유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녀는 재인도 속박하고 있었다. 지유와 똑같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그저 불편으로 여기고 고개 돌려 무시하는 것으로 일관하게 만들었다. 유나는 현재의 남편인 은호에게 행복은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것(p. 112)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재인이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해 온 것도 사실은 그것이었다. 성가신 것으로 치부하고 모르쇠를 하는 것으로 불행의 요인들을 제거해왔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건 은호도 마찬가지다. 아들 노아를 두고 유나와 빚은 갈등에 있어서도, 자신의 엄마와 유나가 벌이는 대립에 있어서도 관망하는 자로 남았다. 


 인제 보니, 유나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지유, 재인, 은호)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홀로 감내하다 끝내 혼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고 아픈데 달리 기댈 데가 없으면 사람은 그렇게 된다. 나 혼자 챙기기도 벅차서 타인에게 눈 돌릴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잘 안다. 지유나 유나 뿐만 아니라 재인, 은호 또한 알고 보면 나의 도플갱어들이다. 세상에 내몰려 유폐되고 거기서 벗어날 줄 모른다는 동일한 궤적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다 지유와 재인 그리고 은호는 결국 더 커다란 비극을 당했다. 모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다. 이만큼 내게 오늘의 모습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는 없었다. 나와 너무나 닮은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비극은 나의 비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재인과 지유의 관계로 눈이 돌아갔다. 오직 타인을 위해 자폐의 벽을 허물고 서로 껴안은 이들의 모습을. 그들은 내게 이것을 강한 울림으로 전하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를 홀로라는 섬에 가두려 하지만 그럴수록 타인을 연결하고 포용하는 다리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진정으로 나를 주눅 들고 초조하게 만드는 온갖 불행이란 것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행복은 고독한 여정 속에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진심으로 함께할 때 비로소 개화하는 것임을. 


 그래서 난 후반의 우혜리 집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중요한 등장인물들이 다 그곳을 찾아온다. 우혜리의 집은 유나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괴몰이 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소다. 지유가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유나 세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그곳은 죽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근처엔 반달늪도 있다. 은 타자를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 그 어떤 흔적도 찾지 못하게 삼켜버리므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적으로 유나가 꾸려가는 세계를 집약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소설은 시작부터 이곳에 오직 유나만이 오리 먹이를 주기 위해 찾는다는 것으로 이를 강화한다. 그런데 이랬던 장소가 변화한다. 지유가 재인을 구하고 재인이 은호를 살리는 구원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뒤 바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같은 공간이라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색채를 가지게 된다니! 늘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난 안 될 거야' 지레짐작하고 오늘의 모습을 고수하는 걸 선택했던 내겐 변모의 용기를 절로 품게 만드는 연출이었다. 


 이제야 왜 하필이면 되강오리가 소설에서 계속 언급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되강오리 또한 우혜리 집과 반달늪의 변화와 연결되는 존재였다. 되강오리는 모두 네 개의 서로 다른 울음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때로는 늑대나 고양이처럼 울 수도 있고 또 때로는 개구리처럼 울 수도 있다. 이처럼 하나의 존재가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이 우리를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유나는 상황을 탓했다. 그것에 지배당해 용서받을 수 없는 길로 나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소설은 우혜리 집과 반달늪 그리고 되강오리를 통하여 선명하게 강조한다. 상황은, 처지는, 현실은, 그걸 뭐라고 부르든 간에 나를 둘러싼 환경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으로 채색될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어느덧 혼술, 혼밥이 보편이 되고 1인 가구가 갈수록 증가하는 현실이다. 언제든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는 치열한 경쟁과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생활고(生活苦)는 우리를 더욱 격리한다. 요즘은 청년 고독사도 늘고 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중의 하나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그만큼 달리 나아질 희망이 별로 없으니 비관하게 되고 자책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원망할 대상을 찾아 나선다. 요즘 들어 더욱 왕성해진 것만 같은 서로 간의 적대는 홀로이기에 너무 아파서 나타나게 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만 아픈 게 아니다. 너도 나도 같이 아프다. 우리 모두가 알고보면 다 지유, 재인 혹은 은호인 것이다. 지유와 재인이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이 아픔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픔이 견고한 자아의 외벽을 허물고 유대의 다리를 놓아 준 것이다. 되강오리가 그러하듯, 아픔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건 유나처럼 이기적인 고립을 초래하기도 하고 지유와 재인처럼 협력 속에 상호 구원하는 토대를 낳기도 한다. 나의 아픔만 보면 전자가 되겠지만 남의 아픔도 내 아픔처럼 보듬어줄 수 있다면 후자처럼 되리라. 


 상황에 속박되어 스스로 변할 줄 몰랐던 유나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 있다. '난 참 운이 없어'란 말이 그것이다. 마음이 무척 찔렸다. 나 또한 그 말을 곧잘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유나가 왜 그런 말을 자주 할까 내 마음에 비추어 생각해봤더니, 모두 스스로 변하려고 노력하기 싫어서 둘러대는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운을 탓하는 것은 알고 보면 현실의 힘이 내 의지를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는 고백의 다름 아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오늘의 내 모습을 빚어내는 데 분명히 일조했을 자신의 책임은 회피해 버리게 된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지옥을 스스로 가져다주었으면서도 살의를 가지는 것마저 당당할 정도로 끝까지 남 탓으로 일관했던 유나가 너무나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런 측면에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인 '아니, 나는 참 운이 없어'(p. 519)라는 유나의 대답은 사실 이런 질문을 독자인 우리에게 던지는 것과도 같다. '혹시 당신도 남 탓만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의 인도로 더욱 선연하게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이 내 마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현실의 풍경을 임의로 채색하는 것임을. 다시 맗해, 지금 내가 부닥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내 책임을 방기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현실이 힘들어서 그를 외면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현실을 그렇게 주조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복해지는 것에 지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애쓰는 게 싫어서 지레 그만둬버린 것이었다. 


 여기까지 내가 어떤 착오에 빠져 있었던가를 성찰하고 나니 그동안 내던져 두었던 행복에 대한 꿈을 다시금 가져와 어루만지게 된다. 지금껏 행복을 언감생심으로 여기도록 나를 짓누르던 현실의 중력이 그다지 강고하지 않음과 진짜 행복이 어디서 도래하는지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다. 내게만 골몰했던 시선을 거두고 타인을 더 담으려 노력할 것이다. 녹록지 않은 세상의 한기는 날 여전히 움츠리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타인과 함께 온기를 나누는 몸짓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그리고 소망한다. 언젠가는 모든 것을 다 내 책임으로 받아들이며, 유나처럼 나를 위해 희생시킨 타자의 시신을 담은 수레가 아니라 공존하는 가운데 서로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 현실의 하중을 견뎌 나가는 포용과 환대의 수레를 끝까지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소설에서 길어낸 다음과 같은, 하나의 확신 속에서.


 '완전한 행복은 타인 속에 있다!'



#완전한행복#완행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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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 록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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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독일을 휩쓴 파시즘의 매혹과 그것에 대항하여 희망을 재건하는 휴머니즘을 두 여성을 중심으로 섬세하게 조명하는, 묵직하면서도 강렬해 그 여운이 오래 남는 느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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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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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전쟁을 다룬 역사책은 많았지만 이 책만큼 희생된 개인들을 세밀하게 복원한 건 없었다. 전쟁사(史)도 결국은 인간사(事)라는 걸 보여준 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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