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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평점 :
2011년이 일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해였듯이 1995년도 그랬다.
아니, 그 충격만 놓고 보자면 사실 1995년이 오히려 2001년 보다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전후(Post World War 2)에 받은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백했다. 전후로 부터 40년간 이어지던 일본의 안전신화가 붕괴하는 것 같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충격으로 자신의 문학에 대한 근본 태도마저 바꿔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다. 1995년은 일본 지식인 사회 전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모두들 현재의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했다. 그 1995년, 일본에는 두 가지 비극이 일어났다. 하나는 천재지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재였다. 그 해 1월 17일 한신과 고베는 거의 도시 전체가 붕괴될 정도로 엄청난 대지진을 겪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0일 도쿄의 한 지하철 안에서 옴진리교 신도들이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승무원과 승객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이 사망했고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후 자국민이 자국민에 대해 일으킨 사상 최대의 테러였다. 전자 보다 후자가 끼친 충격이 더 컸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은 천재(天災)인데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각오하고 있었던 재앙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달랐다. 인간의 짓이었다. 그것도 일본인이 일본인에 대해 아무 이유도 없이 집단적인 무차별 살포를 한 사건이었다. 1968년 전공투에 의한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로 겪어보지 못했던 테러의 경험이었다. 일본은 더욱 휘청거렸다. 누군가 그저 잔잔하기만 한 일본 사회라는 수면에 문득 거대한 돌덩이를 내던진 것과 같았다. 안전은 그때까지 일본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일본은 안전하지 않았다. 더구나 옴진리교의 사고 체계조차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쓰카 에이지는 '전후 사회 내내 우리가 눈앞을 지나쳐 가는 다양한 사건을 그저 내버려 둘 뿐이고 그것들을 역사에 수렴시키는 절차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었던 것의 증좌'라고 하면서 이러한 옴진리교의 사상이 사실은 '오타쿠들의 하위문화로 부터 강력하게 영향받은 것'이라 말했다. SF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으로 부터 형성되어진, 부정적인 세계라면 무조건 새로이 부팅부터 시키고 보는 '리셋'과 현실 보다는 또 다른 세계가 더욱 긍정적이라는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사건을 낳았다고 보았다. 오타쿠들은 거품 경제 동안 마치 인큐베이터 속 태아처럼 편안히 일상을 누려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자신의 취미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회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안정에 취해온 결과였다. 사와라기 노이는 말하길 옴진리교 사건은 '역사가 기능부전에 빠진 장소에서 포스트 모던의 방법을 무제한으로 밀고 나가면 역사에 일격을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닫힌 원환'에 더한층 강고하게 묶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80년대 아사다 아키라가 '도주론'을 시작으로 열어젖힌 '뉴아카데미즘'이 일본의 변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들여왔던 이념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저 표피적으로 소비되면서 오히려 80년대들어 왕성해지기 시작한 일본 소비 사회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비를 찬양했고 그 소비를 통해 일본인들이 새로이 정체성을 써나가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변화는 커녕 안정과 향락에 더욱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일본은 죽 그 상태 그대로 흘러왔다. 그 어떤 수정의 시도도 하지 않고 고인 물로 있었던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옴진리교가 바로 그 결과라고 말했다. 고인 물은 필히 썩기 마련이다. 옴진리교 사건은 그 부패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계속 말한다. 일본은 결코 변하지도 않고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변했다고 생각해도 실은 변하지 않은, 그러므로 지금도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나쁜 장소'라고.
그렇게 1995년의 사건은 일본이 다만 썩은 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생각해야 했다. 선택해야 했다.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위기는 기회다. 그 말 그대로 이건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면 그 때까지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부'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성하게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경제적 곤란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는 이들은 스스로를 상황에 길들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일본은 모처럼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 수구적으로 되어 버린다. 후쿠다 가즈야는 숙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무시되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다시금 복권되기 시작한다. 일본 국내 가요들이 외국 가요들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고 일본 전통 가요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가요들보다 더 많은 각광을 받게 된다. 고이즈미는 대중들의 지지 속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긍지를 가지라고 역설한다. 일본은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겁많은 거북이가 자극을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듯 일본도 그랬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일본은 2000년대를 보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결정적 파국인 2011년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맞았다. 결국 '폐쇄에의 집착은 늘 파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라는 사와라기 노이의 말은 옳았다. 그 모든 것을 보아왔던 이들에게 이건 차라리 단죄였다. 한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스스로 저버린 것에 대한. 그래서 그 아픔이 더욱 비통했는지도 모른다.
새삼 이렇게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던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이번에 나온 온다 리쿠의 소설, 'Q&A'가 사실은 도쿄 지하철 내 사린 가스 테러를 다시금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M 쇼핑몰이라는 것으로 적당히 윤색하기는 했지만 이야기는 분명히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사건이 바로 그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오로지 질문과 대답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사린 가스 테러와는 달리 사건의 구체적 원인도 주동자도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인터뷰가 시작된 것도 그 탓이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도망가는 도중 다치거나 짓밟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렇다할 만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날 M 쇼핑몰 근저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던 이들을 번갈아가며 인터뷰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건에 가까이 있었던 자라도 멀리 있는 자들만큼이나 사건이 일어난 이유나 그걸 범한 자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건 그대로 수수께끼로 남는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공간으로...
왜 온다 리쿠는 사린 가스 테러를 가져왔음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정작 그 원인과 주동자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침묵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 대화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응, 여기가 딱 블랙홀이야. M이란 큰마트 있잖아? 나가는 데 보이는 거기. 2월에 그런 큰 참사가 있고나서 지금은 영업 안 하지만. 보아하니 지형이란 입지 문제로 그 건물이 전파를 가로막는 모양이야."
아무리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집, 이 건물 전체에 휴대전화가 안 터져. 진짜야. 전화기 들고 건물 안이랑 주위를 걸어 다녀봤는 걸."(P. 144 ~ 145)
소통 불능. 이것이 핵심이다. 트라우마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그것은 마치 블랙홀과도 같이 모든 이해를 위한 노력들을 빨아들여 무화시켜 버린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바로 '외부'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서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바로 그 존재인 것이다. 이로써 온다 리쿠가 왜 현실의 사건을 가져오면서도 그 이유와 행위자에 대해선 침묵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건 일종의 교정이다. 그러니까 95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수구와 보신의 원인으로 전락시켜버린 과거 행위에 대한 교정인 것이다. 이는 소설 속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확인된다.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결국 우리가 죽인 겁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에 찍혀 있던 많은 사람을. 당신들도 공범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그들을 죽인 겁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이미 여러 번 설명드렸을텐데요. 증오의 전파, 공포의 전염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의 기대 탓이라고 해도 될테죠. 이렇게 폐쇄된 시대에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을 잠시 잊고 열중할 수 있는 순간을 모두가 기다렸던 겁니다."(P. 135)
이건 '닫힌 폐쇄가 파국을 불러왔다'며 사와라기 노이가 사린 가스 테러에 대해서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닌가. 때문에 온다 리쿠는 연어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내부로 편입되고 말았던 그 사건을 진정한 외부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외부'란 온다 리쿠에게 있어 중요하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가라타니 고진이 상정했듯 구원의 가능성을 배태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00년에 나온 전작 '달의 뒷면'이 그녀의 외부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달의 뒷면'은 미국 작가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대로 인간을 진짜와 똑같이 복제하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 존재들을 잭 피니가 했던 대로 부정과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달의 뒷면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인류의 다음 밤, 새로운 시작의 밤이." 이토록 그녀는 '외부'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지운 것이다. 사건의 이유와 행위자들을. 그것을 절대적으로 '외부'의 것으로 남겨두기 위해.
절대적 외부가 되면 무엇이 되는가? 그건 하나의 빗금이 된다. 단절을 가져온다. 단절은 무엇인가? 나의 분리이다. 내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것. 즉 객체화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선악과'가 그랬다. 선악과를 가장 먼저 따먹은 하와는 자신의 알몸부터 가렸다. 선악과 때문에 새삼 아담 앞에서 그녀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아담으로 부터의 분리였고 하나님이 만든 세계로 부터의 분리였다. 그렇게 동떨어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란 존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녀가 육체를 가림은 그녀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오로지 자신으로서 보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단절이 보는 이를 보여지는 이로 만든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외부'는 그렇게 거울이 되어 바깥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이제 스스로의 내부로 되돌린다. '외부'는 자신과의 소통은 거부하는 대신 보는 이들 스스로 소통하는 것으로 이끈다. 그들은 '외부'의 대면을 통해 이제 스스로와의 대면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에 담겨져 있는 인터뷰들은 모두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온다 리쿠는 섬세하게도 인터뷰를 당하는 자들이 사건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고백한다. 그 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부인은 그 사건으로 매미를 잡아먹는 이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렇게 대답한다. 어쩌면 그건 그 때 불륜의 대상이었던 남자 아내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좋을 내면의 고백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어떤 건 마치 넘쳐 흘러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변한다. 그들은 사건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타인들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모습 또한 반추하게 된다. 사실 인터뷰의 진정한 기능은 그것의 확인이다. 외부의 것을 진정한 외부로 남겨두었을 경우 우리들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들여다 보게 하는. 그렇게 온다 리쿠의 'Q&A'는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욱 되물어 보는 소설인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향을 담는다. 어차피 외부를 통해 변화를 받아들임은 이상론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했음인지 소설에는 그 때 현실의 일본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더구나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존재들을 더욱 많이 확인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사건의 진실로 다가갈수록 더욱 그렇다. 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교착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대로 그 이후 일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때의 일본이 온갖 이론들을 가지고 외부와의 '교통'을 거절하고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걸 정당화했듯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그러하니까. 아예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그 외부의 힘을 이용하려들기까지 한다. 이로써 온다 리쿠는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것이 가리고 있었던 이면의 진실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그건 '타자의 배제'다. 그들에게서 타자들은 존중도 배려도 받지 못한다. 타인들의 비극은 자신의 행운을 실감할 좋은 기회가 될 뿐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폐쇄된 현재에로의 갇힘이 얼마나 타자를 배제하는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람을 죽일 때만 그런 게 아냐. 아주 나쁜 일이 있었을 때 남탓으로 돌리지 못하면 괴롭잖아? 절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구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편하지.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는 게 훨씬 편해. 그런 때를 위해 신이 있는거야. 난 알았어. 사람은 타인을 죽이는 동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남을 죽이기 쉽게 하려고 신을 만든거야.(P. 303)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하는 이는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이면서 그 사실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자다. 그렇다. 이 자는 신이다. 하지만 폐쇄된 현실에 갇히고 싶어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신이다. 외부를 인정하지 않는, 변화를 거부하는, 오로지 단일한 세계에서 나홀로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신인 것이다. 그 신이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죽일 수 있다고. 이 말은 그대로 이 작품이 쓰여질 때까지도 아무런 자성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제만 일관해오던 일본에 대해 온다 리쿠가 내린 단적인 정의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바로 그런 나라라고.
결국 그 신은 사와라기 노이가 말하고 온다 리쿠가 화답했듯이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외부'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통해 온다 리쿠는 타자에 대한 배제가 바로 자신의 파멸로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킨다. 이 부각은 그 선명해진 주제로 인해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변화의 촉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소설은 2004년에 나왔다. 2004년 일본의 아베 내각은 헌법을 고쳐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이 능동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려했다. 이게 온다 리쿠에 대한 일본의 대답이었다. 그랬던 일본은 결국 2011년 3월 11일 미증유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실수하는 자들도 용서하지 않는다.
흔히 온다 리쿠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환상적인 작품을 주로 쓰는 작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Q&A'로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녀야말로 늘 동시대의 일본에 대해 사유하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면모는 이전에 나온 '달의 뒷면'에서도 이미 엿보였으나 이번 작품에선 더욱 전면으로 드러나 있었다. 위에서 당시에 이루어졌던 일본 지식인들의 논의를 길게 설명했던 것도 'Q&A'가 바로 그 논의를 적극 반영한 것임을 나타냄과 아울러 온다 리쿠가 동시대에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하여 예민한 작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개인적으로 'Q&A'는 온다 리쿠를 재평가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온다 리쿠는 일본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참으로 갑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베 내각은 여전히 폐쇄된 원환에서 나오려 하지 않으며 이번 참의원 선거로도 드러났듯이 일본 국민들은 또 그걸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형편이니.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번 잘못된 흐름은 여간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작 그 계기가 찾아왔을 때 보다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Q&A'를 들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