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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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외부의 감각으로 충만합니다.

 일본은 늘 단일한 풍경만을 가지고 있다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말해왔습니다. 바깥에 눈을 돌리지도, 외부에 있는 타자가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도 않는, 고인 물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일본이라고 말이죠. 그 풍경을 찟는 것. 그 틈으로 외부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 하스미 시게히코, 아즈마 히로키등 현재 일본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바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풍경만을 유지한다면 일본에겐 더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고인 물의 미래가 썩은 물로 정해져있듯이 말이죠.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일까요?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많은 부분 외부에서 무언가가 엄습해 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얼른 기억나는 것은 2000년에 나온 '달의 뒷면'이군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를 독특하게 패러디한 이 소설은 곳곳에 뻗어있는 수로로 유명한 야나쿠로를 무대로 사람을 똑같이 복제하는 물 안의 무언가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는데 결국 두려워하던 타자로 '내'가 변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뒤에 나온 2004년 작, 'Q&A'도 그랬습니다. 쇼핑몰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달아나기 시작하고 그러다 발에 밟히거나 떠밀려서 죽거나 다친 이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아무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원인은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고 그 여파로 인해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른 존재들로 점점 변해갑니다.


 이와 같이 온다 리쿠는 잊을만하면 느닷없이 출현한 정체불명의 타자와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내'가 변해버리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던 것 같습니다. 외부에 내가 노출되는 일이 나의 파괴가 아닌, 나의 구원이 되는 이야기를. 거기에 우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2011년에 나온, '몽위'입니다.



 '몽위'는 '꿈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그 많은 관음보살 중에는 '몽위관음'이라는 보살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정식 명칭은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불길한 꿈을 꾸었을 때 이 관음보살에게 빌면 좋은 꿈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라는 군요. '몽위'는 바로 그 '몽위관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목대로 '몽위'는 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해 두죠. 소설은 꿈을 기계 장치를 이용해 타인들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제 꿈이 깨고 나면 망각으로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원하기만 한다면 그 꿈을 녹화해두고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그것을 '몽찰'이라 부릅니다.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꿈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게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꿈의 해석.

 그게 그들의 직업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프로이트가 같은 제목의 책을 출간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꿈 자체를 영상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꿈'을 보고 진짜로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P. 28)


 '몽위'의 주인공인 히로아키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이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은 한 여성 때문이었습니다. 고토 유이키. 형의 약혼자지만 히로아키 자신도 정말 사랑했던 여자. 그녀는 일본인 최초로 예지몽을 꿀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는 늘 하나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을 바꾸는 것. 늘 남의 불행을 예언하는 꿈을 더이상 꾸지 않는 것이었죠. 그 꿈으로 인해 삶이 너무 힘겨웠으니까요. '몽위'는 그녀의 절실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죽어버렸습니다. 10년 전, 예지몽으로 꾸었던 화재 사고를 막으려다 그만 자신도 그 화마에 휩싸여 버린 것이죠. 히로아키는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꿈해석자'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몽위'를 바랐던 그녀의 소망을 그런 식으로 뒤늦게나마 이뤄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 우연히 히로아키는 도서관에서 스치듯이 고토 유이키를 봅니다. 마지막에 목격된 모습 그대로 도서관의 복도에 문득 나타난 것입니다. 히로아키는 얼른 쫓지만 모퉁이를 돌자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히로아키는 유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동시에 한 학교에서 같은 아이들 모두가 동일한 꿈을 꾸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건 교실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었는데 거기 있었던 반 아이들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하지만 모두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걱정된 부모들이 의뢰를 해왔고 결국 아이들 모두의 꿈을 몽찰하기로 결정납니다. 바로 그 일을 히로아키가 맡게 됩니다. 몽찰을 해보니 그 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통의 인물이 있었고 결국 그 인물이 바로 죽은 고토 유이키라는 게 밝혀집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의 꿈과 고토 유이키가 어떤 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사이 이번엔 아예 학교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사라져 버리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라지는 사건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던 자동차 무리의 운전자들 역시 한 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몽위'는 이런 이야기 입니다. 후반까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일이 계속 벌어집니다. 몽찰이 가능해진 시대에 대한 묘사도 꽤나 디테일하고 등장인물의 심리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욱 손에서 놓기가 힘들어집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 자체에 몰입시키는 온다 리쿠의 능력은 여기서도 한껏 발휘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결국 히로아키는 '달의 뒷면'과 'Q&A'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단일한 자기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가 반복해서 꾸는 꿈처럼 한결 같았던 풍경이 찢어지고 그 틈새로 바깥의 타자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건이 전개될수록 그는 점점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죽은 고토 유이키의 유령을. 그렇게 완전 바깥의 타자를.


 아마도 히로아키를 꿈해석자로 만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일이니까요. 진정한 해석은 언제나 해석하려는 대상 안으로 최대한 들어갔을 때라야 가능합니다. 그 내부로 들어가 타자의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참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죠. 정신분석에 있어 꿈의 해석이 그렇지 않던가요? 분석가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피분석자의 내면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던가요? 공교롭데고 히로아키의 해석은 '꿈을 읽는다'는 점에서 독서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온다 리쿠는 굉장한 독서가로 유명하지요. 반드시 1년에 200권은 꼭 읽는다고 하던가요? 아무튼 그녀의 작품엔 사실 왕성한 독서가로서의 그녀의 경험이 밑받침 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에 외부의 감각이 충만한 것도 그 때문이죠. 무엇보다 읽기란 포르투칼의 시인인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했듯이 '타인의 손을 통해 꾸는 꿈'이니까요. 들뢰즈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타자-되기'의 과정이라고.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자신을 변화시켜 가는 일입니다. 독서가 여전히 유용독하다면 쾌락이 아니라 경험의 폭을 한껏 넓혀주기 때문이겠죠. 수많은 '타자-되기'의 경험들을 통해서 말이죠. 이해의 깊이는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에 섰을 때 가장 깊어지는 법입니다. 독서를 하게 되면 세계와 타인에 대한 헤아림의 수심이 깊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테죠.  과연 히로아키와 같은 꿈해석자들은 '몽찰 멀미'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몽찰 멀미'가 뭔고 하면 몽찰을 너무 많이 해서 꿈과 타인의 몽찰 혹은 현실과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된다는 것이죠. '몽찰 멀미'는 꿈과 현실을 뒤섞어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절대적인 경계로 나뉘어 있던 것들을 말이죠. 들뢰즈가 읽기를 정의했던 것, 즉 '타자-되기'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꿈과 현실이 뒤섞이듯, 나와 타자가 뒤섞이게 됩니다. 소설에서 융이 말했던 '집단 무의식'이 자주 나오는 것도 바로 이것을 드러내려는 것이죠. 그 덕분에 결국 히로아키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저 너머의 진실에 이르게 됩니다. 그 여정의 끝에서 온다 리쿠는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과도 같았던 '몽위'는 진정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해지는 것인가를 아주 제대로 보여줍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꿈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꿈을 바라보는 나를 바꾸는 데 있음을. 똑같이 보는 대상인 타자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 타자를 바라보는 나를 변화시키는 게 나를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진정한 '몽위'임을 말이죠.


 온다 리쿠의 '몽위'는 문득 다가온 부드러운 기척처럼 그 홀연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여정입니다. 여정이라고 한 것은 이 소설이 결말의 재미를 향하여 치닫는 소설이 아니라 과정에 더욱 집중하는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향의 온다 리쿠의 소설들은 늘 그랬죠. '달의 뒷면'도 'Q&A'도. 결말에서 플롯의 긴장을 폭발시키기 보다는 나아가는 그 단계 자체에 독자를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사실 변화라는 게 다 그렇죠. 어디까지나 '시간의 체험'이니까요. 세잔느가 그토록 많은 정물화를 그렸던 것은 시시각각 이뤄지는 사물 표면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그 시간 속에 나를 내어주고 참여하기 위함이었죠. 히로아키가 꿈해석자라면 모든 미스터리를 낳는 존재인 고토 유이키는 '꿈참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예지몽 또한 단순한 꿈이 아닌 미래의 그 시간을 뚝 떼어다 현재화시킨 것이었죠. 그렇게 고토 유이키는 세잔느처럼 그 시간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그녀가 경계 저 바깥으로 가장 멀리 나아간 존재임을 생각한다면 변화가 무엇보다 '시간의 체험'이라는 것을 온다 리쿠 스스로도 나타내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겠네요. 즉 그녀 스스로 이 소설이 독자에게도 그러한 참여가 되도록 원하고 있음이 뒷받침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몽위'는 하나의 부름입니다. 저 창 밖에서 부르는.

 아마도 읽고나면 스스로 창문을 열고 그 부름에 화답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한 편, '몽위'로 더욱 깨달았습니다. 온다 리쿠는 미스터리로만 국한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 작가 같습니다. 일본이라는 공동체를 두고 이것저것 실험하고 헤아려 보는.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13년에 나온 '밤의 밑은 부드러운 환상'도 빨리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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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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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이 일본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해였듯이 1995년도 그랬다.

아니, 그 충격만 놓고 보자면 사실 1995년이 오히려 2001년 보다 더 강했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상 전후(Post World War 2)에 받은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백했다. 전후로 부터 40년간 이어지던 일본의 안전신화가 붕괴하는 것 같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충격으로 자신의 문학에 대한 근본 태도마저 바꿔버렸다.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다. 1995년은 일본 지식인 사회 전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모두들 현재의 일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했다. 그 1995년, 일본에는 두 가지 비극이 일어났다. 하나는 천재지변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재였다. 그 해 1월 17일 한신과 고베는 거의 도시 전체가 붕괴될 정도로 엄청난 대지진을 겪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20일 도쿄의 한 지하철 안에서 옴진리교 신도들이 사린 가스를 살포했다. 승무원과 승객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이 사망했고 5,5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후 자국민이 자국민에 대해 일으킨 사상 최대의 테러였다. 전자 보다 후자가 끼친 충격이 더 컸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은 천재(天災)인데다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각오하고 있었던 재앙이었다. 하지만 후자는 달랐다. 인간의 짓이었다. 그것도 일본인이 일본인에 대해 아무 이유도 없이 집단적인 무차별 살포를 한 사건이었다. 1968년 전공투에 의한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로 겪어보지 못했던 테러의 경험이었다. 일본은 더욱 휘청거렸다. 누군가 그저 잔잔하기만 한 일본 사회라는 수면에 문득 거대한 돌덩이를 내던진 것과 같았다. 안전은 그때까지 일본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일본은 안전하지 않았다. 더구나 옴진리교의 사고 체계조차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쓰카 에이지는 '전후 사회 내내 우리가 눈앞을 지나쳐 가는 다양한 사건을 그저 내버려 둘 뿐이고 그것들을 역사에 수렴시키는 절차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었던 것의 증좌'라고 하면서 이러한 옴진리교의 사상이 사실은 '오타쿠들의 하위문화로 부터 강력하게 영향받은 것'이라 말했다. SF 애니메이션이나 비디오 게임으로 부터 형성되어진, 부정적인 세계라면 무조건 새로이 부팅부터 시키고 보는 '리셋'과 현실 보다는 또 다른 세계가 더욱 긍정적이라는 세계관이 결정적으로 그와 같은 사건을 낳았다고 보았다. 오타쿠들은 거품 경제 동안 마치 인큐베이터 속 태아처럼 편안히 일상을 누려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자신의 취미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사회가 아무런 변화도 없이 안정에 취해온 결과였다. 사와라기 노이는 말하길 옴진리교 사건은 '역사가 기능부전에 빠진 장소에서 포스트 모던의 방법을 무제한으로 밀고 나가면 역사에 일격을 가하기는 커녕 오히려 '닫힌 원환'에 더한층 강고하게 묶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80년대 아사다 아키라가 '도주론'을 시작으로 열어젖힌 '뉴아카데미즘'이 일본의 변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들여왔던 이념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저 표피적으로 소비되면서 오히려 80년대들어 왕성해지기 시작한 일본 소비 사회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버팀목이 되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비를 찬양했고 그 소비를 통해 일본인들이 새로이 정체성을 써나가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변화는 커녕 안정과 향락에 더욱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일본은 죽 그 상태 그대로 흘러왔다. 그 어떤 수정의 시도도 하지 않고 고인 물로 있었던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옴진리교가 바로 그 결과라고 말했다. 고인 물은 필히 썩기 마련이다. 옴진리교 사건은 그 부패의 결과라는 것이다. 사와라기 노이는 계속 말한다. 일본은 결코 변하지도 않고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변했다고 생각해도 실은 변하지 않은, 그러므로 지금도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나쁜 장소'라고.

 

 그렇게 1995년의 사건은 일본이 다만 썩은 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생각해야 했다. 선택해야 했다. 이 곳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위기는 기회다. 그 말 그대로 이건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말하면 그 때까지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외부'를 통해 변화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왕성하게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경제적 곤란은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든다. 달아나고 싶어도 그럴 여력이 없는 이들은 스스로를 상황에 길들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일본은 모처럼 변화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 수구적으로 되어 버린다. 후쿠다 가즈야는 숙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무시되었던 아버지의 권위가 다시금 복권되기 시작한다. 일본 국내 가요들이 외국 가요들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고 일본 전통 가요가 서양의 영향을 받은 가요들보다 더 많은 각광을 받게 된다. 고이즈미는 대중들의 지지 속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긍지를 가지라고 역설한다. 일본은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겁많은 거북이가 자극을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껍질 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듯 일본도 그랬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일본은 2000년대를 보냈다. 그러다 또 한 번의 결정적 파국인 2011년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맞았다. 결국 '폐쇄에의 집착은 늘 파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라는 사와라기 노이의 말은 옳았다. 그 모든 것을 보아왔던 이들에게 이건 차라리 단죄였다. 한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걸 스스로 저버린 것에 대한. 그래서 그 아픔이 더욱 비통했는지도 모른다.

 

 

 

 

 

 

 새삼 이렇게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던 과거를 복기하는 것은,

 이번에 나온 온다 리쿠의 소설, 'Q&A'가 사실은 도쿄 지하철 내 사린 가스 테러를 다시금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M 쇼핑몰이라는 것으로 적당히 윤색하기는 했지만 이야기는 분명히 지금 이야기되고 있는 사건이 바로 그 사건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은 오로지 질문과 대답으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 사린 가스 테러와는 달리 사건의 구체적 원인도 주동자도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인터뷰가 시작된 것도 그 탓이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도망가는 도중 다치거나 짓밟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이렇다할 만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날 M 쇼핑몰 근저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던 이들을 번갈아가며 인터뷰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건에 가까이 있었던 자라도 멀리 있는 자들만큼이나 사건이 일어난 이유나 그걸 범한 자들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건 그대로 수수께끼로 남는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공간으로...

 

 왜 온다 리쿠는 사린 가스 테러를 가져왔음을 분명히 드러내면서도 정작 그 원인과 주동자에 대해선 알 수 없다고 침묵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은 대화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응, 여기가 딱 블랙홀이야. M이란 큰마트 있잖아? 나가는 데 보이는 거기. 2월에 그런 큰 참사가 있고나서 지금은 영업 안 하지만. 보아하니 지형이란 입지 문제로 그 건물이 전파를 가로막는 모양이야."

 아무리

 "다른 원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 집, 이 건물 전체에 휴대전화가 안 터져. 진짜야. 전화기 들고 건물 안이랑 주위를 걸어 다녀봤는 걸."(P. 144 ~ 145)

 

 소통 불능. 이것이 핵심이다. 트라우마 역시 그렇지 아니한가? 그것은 마치 블랙홀과도 같이 모든 이해를 위한 노력들을 빨아들여 무화시켜 버린다. 소통 자체가 불가능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바로 '외부'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서 그토록 필요하다고 강변했던 바로 그 존재인 것이다. 이로써 온다 리쿠가 왜 현실의 사건을 가져오면서도 그 이유와 행위자에 대해선 침묵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이건 일종의 교정이다. 그러니까 95년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걸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수구와 보신의 원인으로 전락시켜버린 과거 행위에 대한 교정인 것이다. 이는 소설 속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확인된다.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결국 우리가 죽인 겁니다. 그 비디오 테이프에 찍혀 있던 많은 사람을. 당신들도 공범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그들을 죽인 겁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이미 여러 번 설명드렸을텐데요. 증오의 전파, 공포의 전염으로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의 기대 탓이라고 해도 될테죠. 이렇게 폐쇄된 시대에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일상을 잠시 잊고 열중할 수 있는 순간을 모두가 기다렸던 겁니다."(P. 135)

 

 이건 '닫힌 폐쇄가 파국을 불러왔다'며 사와라기 노이가 사린 가스 테러에 대해서 했던 말 그대로가 아닌가. 때문에 온다 리쿠는 연어처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내부로 편입되고 말았던 그 사건을 진정한 외부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외부'란 온다 리쿠에게 있어 중요하다. 그건 그녀에게 있어 가라타니 고진이 상정했듯 구원의 가능성을 배태한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2000년에 나온 전작 '달의 뒷면'이 그녀의 외부에 대한 그러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달의 뒷면'은 미국 작가 잭 피니의 '바디 스내치'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그대로 인간을 진짜와 똑같이 복제하는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온다 리쿠는 그 존재들을 잭 피니가 했던 대로 부정과 제거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진정한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다. 달의 뒷면은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문장으로 끝난다. '인류의 다음 밤, 새로운 시작의 밤이." 이토록 그녀는 '외부'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지운 것이다. 사건의 이유와 행위자들을. 그것을 절대적으로 '외부'의 것으로 남겨두기 위해.

 

 절대적 외부가 되면 무엇이 되는가? 그건 하나의 빗금이 된다. 단절을 가져온다. 단절은 무엇인가? 나의 분리이다. 내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것. 즉 객체화이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선악과'가 그랬다. 선악과를 가장 먼저 따먹은 하와는 자신의 알몸부터 가렸다. 선악과 때문에 새삼 아담 앞에서 그녀가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러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아담으로 부터의 분리였고 하나님이 만든 세계로 부터의 분리였다. 그렇게 동떨어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란 존재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녀가 육체를 가림은 그녀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오로지 자신으로서 보게 되었다는 증거였다. 단절이 보는 이를 보여지는 이로 만든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외부'는 그렇게 거울이 되어 바깥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이제 스스로의 내부로 되돌린다. '외부'는 자신과의 소통은 거부하는 대신 보는 이들 스스로 소통하는 것으로 이끈다. 그들은 '외부'의 대면을 통해 이제 스스로와의 대면으로 나아간다. 이 소설에 담겨져 있는 인터뷰들은 모두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온다 리쿠는 섬세하게도 인터뷰를 당하는 자들이 사건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보다 더 많이 자신에 대해 말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고백한다. 그 때 자신이 보았던 것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부인은 그 사건으로 매미를 잡아먹는 이들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렇게 대답한다. 어쩌면 그건 그 때 불륜의 대상이었던 남자 아내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을까 하고.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좋을 내면의 고백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어떤 건 마치 넘쳐 흘러나오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변한다. 그들은 사건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타인들을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모습 또한 반추하게 된다. 사실 인터뷰의 진정한 기능은 그것의 확인이다. 외부의 것을 진정한 외부로 남겨두었을 경우 우리들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들여다 보게 하는. 그렇게 온다 리쿠의 'Q&A'는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욱 되물어 보는 소설인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저마다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향을 담는다. 어차피 외부를 통해 변화를 받아들임은 이상론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일본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려했음인지 소설에는 그 때 현실의 일본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더구나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존재들을 더욱 많이 확인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사건의 진실로 다가갈수록 더욱 그렇다. 이는 무엇을 반영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교착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대로 그 이후 일본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그 때의 일본이 온갖 이론들을 가지고 외부와의 '교통'을 거절하고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걸 정당화했듯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그러하니까. 아예 그들은 자신의 이권을 위해 그 외부의 힘을 이용하려들기까지 한다. 이로써 온다 리쿠는 현재적 모습에 교착하는 것이 가리고 있었던 이면의 진실을 드러낸다. 한 마디로 그건 '타자의 배제'다. 그들에게서 타자들은 존중도 배려도 받지 못한다. 타인들의 비극은 자신의 행운을 실감할 좋은 기회가 될 뿐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폐쇄된 현재에로의 갇힘이 얼마나 타자를 배제하는지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람을 죽일 때만 그런 게 아냐. 아주 나쁜 일이 있었을 때 남탓으로 돌리지 못하면 괴롭잖아? 절대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 누구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편하지. 후회하고 반성하는 것보다 남을 미워하는 게 훨씬 편해. 그런 때를 위해 신이 있는거야. 난 알았어. 사람은 타인을 죽이는 동물이야. 그렇기 때문에 남을 죽이기 쉽게 하려고 신을 만든거야.(P. 303)

 

 공교롭게도 이 말을 하는 이는 사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이면서 그 사실로 인해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자다. 그렇다. 이 자는 신이다. 하지만 폐쇄된 현실에 갇히고 싶어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신이다. 외부를 인정하지 않는, 변화를 거부하는, 오로지 단일한 세계에서 나홀로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그런 신인 것이다. 그 신이 말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죽일 수 있다고. 이 말은 그대로 이 작품이 쓰여질 때까지도 아무런 자성없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제만 일관해오던 일본에 대해 온다 리쿠가 내린 단적인 정의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바로 그런 나라라고.

 결국 그 신은 사와라기 노이가 말하고 온다 리쿠가 화답했듯이 파국을 피하지 못한다.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외부'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를 통해 온다 리쿠는 타자에 대한 배제가 바로 자신의 파멸로도 이어진다는 것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킨다. 이 부각은 그 선명해진 주제로 인해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변화의 촉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 이 소설은 2004년에 나왔다. 2004년 일본의 아베 내각은 헌법을 고쳐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이 능동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려했다. 이게 온다 리쿠에 대한 일본의 대답이었다. 그랬던 일본은 결국 2011년 3월 11일 미증유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실수하는 자들도 용서하지 않는다.

 

 흔히 온다 리쿠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환상적인 작품을 주로 쓰는 작가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Q&A'로 더욱 확인하게 되는 것은 그녀야말로 늘 동시대의 일본에 대해 사유하면서 적극적으로 말을 거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면모는 이전에 나온 '달의 뒷면'에서도 이미 엿보였으나 이번 작품에선 더욱 전면으로 드러나 있었다. 위에서 당시에 이루어졌던 일본 지식인들의 논의를 길게 설명했던 것도 'Q&A'가 바로 그 논의를 적극 반영한 것임을 나타냄과 아울러 온다 리쿠가 동시대에 일어나는 움직임에 대하여 예민한 작가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개인적으로 'Q&A'는 온다 리쿠를 재평가할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온다 리쿠는 일본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참으로 갑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베 내각은 여전히 폐쇄된 원환에서 나오려 하지 않으며 이번 참의원 선거로도 드러났듯이 일본 국민들은 또 그걸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형편이니.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번 잘못된 흐름은 여간해서는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작 그 계기가 찾아왔을 때 보다 현명한 대처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Q&A'를 들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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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8-2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3페이지에 저도 띠지 붙여놨답니다. 많이 인상 깊었거든요.

Q&A는 몇 년 동안 봐왔던 온다 리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고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이나 직감력은 항상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주더군요. 참 무서웠어요... 읽으면서.
진실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거든요.

일본의 화산 폭발과 원전 사태, 그들의 암울함은 불안정한 섬나라에서 나온다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오다쿠도 그렇고 속 마음을 안 보이는 태도도 그렇고 극단과 극단을 흐르는 문화도 그렇고. 처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참사에 대한 묘사도 그랬지만, 이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넘치는 전개도 굉장히 다가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뭐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이 있어요, Q&A는.

헤르메스님, 잘 지내시지요? ^^
 
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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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마등 같군요." 

 "음?"

 "지나치는 풍경 말입니다. 기차나 차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사고하는 속도 보다는 빠르죠. 죽기 직전에 인생의 온갖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고 하는데, 딱 이정도 속도가 아닐까요?"('달의 뒷면' p.37)

 

 

 2001년에 나온 '달의 뒷면'은 수로로 부터 시작된다. 교이치로의 부탁으로 야마쿠라로 오게 된 다몬은 그렇게 교이치로와 함께 배를 타고 수로를 타내려가다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수로의 속도가 인생을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때의 속도와 닮지 않았냐고? 온다 리쿠가 왜 다몬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분위기의 '불연속세계'라는 (그녀 자신의 표현대로) 기행 미스터리 같은 것을 쓰게 되었는지가 바로 이 말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주인공이었기에 직접 바라 볼 수는 없었던 삶이란 텍스트가 그제서야 객관적으로 마치 책을 보듯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나쳐 온 인생 자체가 한 권의 책처럼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로의 속도란 바로 텍스트를 읽는 속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바로 수로란 책 읽기의 상징이라는 것이 말이다. 뒤이어 나오는 다몬의 느낌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낸다.

 

 주택가로 들어서면서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노 젓는 소리만 점점 명료하게 들린다. 배는 매끄럽게 나아가는데 시간과 정경만이 저속 촬영한 것 처럼 느껴진다. 오래된 벽돌건물 공장, 창문에 비치는 물의 그림자, 군생하는 창포, 그 각각이 스톱모션처럼 기억에 새겨진다.(같은 책, p.39)

 

 

  이것은 그대로 우리가 책을 읽을 때 받게 되는 인상으로 치환시켜도 통용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같은 고백을 한 뒤에 다몬은 나중에 목격하게 되는 미스터리의 진실된 모습을 암시하는 것 같은 '우렁이 알'을 보게되는데 이렇게 그 원인적 존재의 출현에 대한 복선과 그 존재가 주로 기거하는 곳이 또 수로임을 감안한다면 수로가 책 읽기의 상징이며 '달의 뒷면'이 사실은 이 시대 소수의 쾌락으로 점점 전락해가고 있는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더구나 온다 리쿠는 다몬의 입을 통해 수로가 가지는 특징을 단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것은 바로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야나쿠라 도시 자체를 횡단하며 어디로든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책이 아닐까? 사람과 사람을, 사람과 세계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 그러므로 '달의 뒷면'을 읽을 때 무엇보다 떠올려야 하는 것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 자신이다. 당신에게 지금 책 읽기란 무엇인가? '달의 뒷면' 자체는 온다 리쿠가 당신에게 건네는 이러한 질문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연속 세계'란 책에 대해 쓰면서 앞 머리에 달의 뒷면 이야기를 저리도 길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연속세계' 자체가 '달의 뒷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다몬'으로 말하자면 모두 '다몬'시리즈라고도 할 수 있다.) '달의 뒷면'이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불연속세계' 역시도 무슨 이야기인지 보다 확실하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두 책의 이야기는 같은 주제를 가지고 써 내려간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비록 두 작품 사이엔 7년이란 시차가 있고 별개의 책으로 묶여있다고 해도 말이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은  이 '책' 자체를 상징화한 제목이라 할 수 있는 '불연속세계'의 그 1부라 할만하다. 사실 제목 자체에서 이미 어느 정도 연속성은 감지된다. '달의 뒷면'이란 언제나 같은 면만을 볼 수 밖에 없는 지구에 있어서 도저히 볼 수 없는 부분으로 그렇게 하나의 '불연속세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달의 뒷면'은 위에서도 말했듯 책이 주는 이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이어짐이란 어디까지나 책이 주는 '타자'를 내부에 포용함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작품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불연속세계'이다.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모여있는 이 작품에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단편과 별개로 책 자체에다 붙여진 제목이다. 이건 '달의 뒷면'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달의 뒷면이 이 책 전체가 하려는 이야기의 1부에 해당된다는 말 역시 틀린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달의 뒷면'에 대한 얘기는 나만의 착각이며 '불연속세계'란 제목은 아마도 실려있는 다섯 편 모두가 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것이 아닌 개별적으로 독립적인 이야기라는 단순한 이유에서 붙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있다. 온다 리쿠는 왜 이 단편집을 일종의 기행 미스터리로 만들었던 것일까?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이 책에 대해 직접 말한 부분이다. 아예 후기에서 이 모든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자신이 직접 다녀온 곳을 토대로 쓰여진 것임 또한 그녀는 밝히고 있다. 하긴 '달의 뒷면' 역시도 실제 야나가와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런데 기행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풍경이란 것을 텍스트로 하여 읽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행문'이란 글이 가능한 것도 다녀온 곳이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달의 뒷면을 포함하여 이 모든 이야기들은 온다 리쿠가 그 곳에서의 체험을 미스터리로 우려낸 이를테면 대면했던 풍경들의 독후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여기서도 '책 읽기'란 여전히 '이어진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단편집의 첫 시작을 여는 '나무지킴이 사내'에서 다몬은 아예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한다.

 

 아파트를 나와 주택가를 빠져나와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면 강가가 나온다. 도회지의 강이라 그런지 존재감은 별로 없다. 좀더 큰 강 같으면 가까이 갈수록 존재가 느껴지게 마련인데, 커다란 콘크리트 도랑 밑바닥에 괸 물은 완전히 길들여져 체념한 것 처럼 보인다.

 강은 연속된다.

 다몬은 강가를 산책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강이라는 것은 중단된다는 게 불가능하다.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더라도 강은 건물 사이며 도로 밑으로 이어진다. 찌그러지고 누덕누덕 짜집기된 도쿄, 맥락없는 지상에서 강만은 언제나 연속되며 어김없이 출구를 찾아낸다.(p.9)

 

 여기서 강에 대한 묘사는 인상적이다. 그것이 원래 '달의 뒷면'에 나온 수로에서 이어지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달의 뒷면에서는 그토록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수로는 도쿄에선 미미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미미함의 이유에 대해서 온다 리쿠는 '길들여져'란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아보이는 표현을 쓴다. 그녀는 왜 굳이 이런말을 했던 것일까? 처음부터 난 그게 이상했다. 그런데 이 첫 부분의 묘사가 아파트, 주택가로 부터 시작되는게 의미심장했다. 위에서 인용한 '달의 뒷면'에선 수로에 의해 포위되어 아예 젖어버린 듯 보였던 그 주택가가 이제는 강마저 체념하게 만들 정도로 그 존재감을 뚜려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차이가 바로 강의 왜소해진 이유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때문에 강을 체념시켜버린 진범으로 또한 '커다란 콘트리트'란 묘사가 나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은 그대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정확히 반영하는 듯도 보였다. 콘크리트는 그 육중함으로 인해 단절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닌가. 바로 그것이 강의 이어짐을 막고 있었다. 강의 이어짐은 철길과 맞물려 더욱 강화되는데 그 전에 온다 리쿠는 콘크리트 세상과 강의 세계를 '빠져나와서'란 단어로 잇고 있었다. 즉 여기서 이 모든 문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즉 강이란 것을  '달의 뒷면'의 수로가 가졌던 의미 그대로 책 읽기에 대한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말이다. 여기서 아파트, 주택가는 모두 '콘크리트'로 집약되는 바쁜 우리의 도시적 일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실 그 바쁘디 바쁜 도시의 일상을 영위하느라 독서 시간을 줄이거나 거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도시적 일상에 길들여지고 나중에 가서는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온다 리쿠의 '길들여져 체념한 것'이란 표현은 정확히 그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연속세계'는 불연속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달의 뒷면'의 주제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확장이었다. 이를테면 '달의 뒷면'이 책 읽기가 가져다주는 힘을 총론식으로 다룬 것이라면 '불연속세계'는 그것을 각론식으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다 구체적으로 책 읽기가 주는 힘을 여행을 하면 다녔던 곳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되듯이 다르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다섯편의 구성이 참으로 흥미롭다.

 

 '불연속세계'는 '나무지킴이사내'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 '환영 시네마' '사구 피크닉' 그리고 '새벽의 가스파르' 이렇게 총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성상의 원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공통점이 보인다. 모두 텍스트에서 실체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즉 '악마를 동정하는 음악'은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죽음의 실체적 진리로 나아가고 '환영 시네마'는 영화라는 텍스트에서 출발하며 '사구 피크닉'에서는 소설(나중엔 아예 마츠모토 세이초의 박물관이 등장한다.) 이라는 텍스트가 시작점이 된다. 새벽의 가스파르는 '사진'이 출발점이다.('나무지킴이 사내'의 경우 이 단편집의 우주를 미리 정리해주는 원론 같은 작품이라서 텍스트가 무엇인지 말하기가 사실은 조금 어려운데 아마도 가장 유사한 텍스트가 있다면 그림이 될 것 같다. 그것은 책에 대한 또 하나의 비유이기도 한 '벗꽃' 자체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로 인해 더욱 그렇게 추정된다.) 이렇게 각 단편들은 모두 문득 발현되어진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싼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해석의 놀음들이다. 온다 리쿠가 왜 하필이면 이런 구성을 취했는지는 이것이 책 읽기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유가 명확해진다. 즉 그것들이 그대로 우리가 책 읽기를 통해 접하는 과정과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단편들이 가진 구성 방식은 우리가 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실체'라는 진실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삼월을 붉은 구렁'에서 책을 두고 벌어졌던 잡담들은 정확히 여기에서도 여전히 환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의 가스파르'는 '삼월의 붉은 구렁'에서의 '기다리는 자들'의 완벽한 반복이다. 마치 니체가 말했던 동일한 것의 영겁 회귀와 같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하긴 이 단편집의 원제 자체가 'THE DISCONTINUOUS CIRCLES'이기도 하다.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똑같은 원을 두번 그릴 수 없다. 원제는 이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삼월은'에서의 '기다리는 자들'과 '불연속세계'의 '새벽의 가스파르'의 관계 그 자체에게도 해당된다. 아마도 온다 리쿠는 같지만 완전 다른 이런 반복을 통하여 애초에 제기했던 '불연속'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불연속이란 '콘크리트'가 가지고 있는 단절로서의 불연속이 아니라 '같지만 계속 다르게 나아가는' 그런 의미의 불연속이라는 것을... 사실 이것은 본인이 말했던 '기행' 자체에도 해당된다. 여행이란 그렇게 모두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이지만 결국 그 주체는 나 하나이니까. 그렇게 기행이라는 것도 사실은 같은 원을 그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물론 책 읽기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여러 다양한 책을 읽지만 그것들은 모두 같지 않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우리는 멈춰있지 않듯이 독서에 있어서도 우리는 멈춰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여행이 풍경과 나의 나아감이 서로 교감하는 상태에서 받아들임과 되새김의 연속된 과정이듯 책을 읽는다는 것도 그러한 교감을 통한 되먹임의 연쇄를 통해 우리의 자아와 그것이 포함하는 세계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새벽의 가스파르'의 결말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하나의 대상에 불과했던 책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위로하고 바꾸는 동반자적인 주체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이 책의 첫 단편에 실린 '나무지킴이사내'에서 한 등장인물이 말하는 이 대사는 정확히 '불연속세계'가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타인이 아니야.자기의 일부, 예전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 뿐.'(P.19)

 

 물론 바로 이 책의 대상에서 주체로의 전환은 '달의 뒷면'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은 책이 나의 동반자로서 궁극적인 주체가 어떻게 가능하게 되느냐에 대한 얘기들이며 각각의 단편은 그걸 가능하게 하는 책의 다른 힘들을 암시하고 있다.(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이것은 일부러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므로 표지에 그려진 '계단'이야 말로 이 책에 딱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은 그렇게 문득 당신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는 계단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책 읽기란 엘리베이터 처럼 그냥 순식간에 이동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에스컬레이터 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데려가주는 존재도 아니다. 책 읽기가 계단 오르기인 이유는 정확히 바로 당신 자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책 읽기란 무엇보다도 한 걸음 한 걸음에 해당하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당신에게 주는 느낌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알고자 하는 노력이 톱니처럼 맞물려가는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진적일 수 밖에 없고 책이 주는 것 만큼이나 거기에 들이는 당신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 즉 책 읽기란 그저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하나 얹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미인과 같아서 적극적인 자 만이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 즉 책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그가 가진 것을 더 많이 열어 보여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책 읽기는 온다 리쿠가 했던 그대로 그토록 자주 여행에 비유되어왔을 것이다. 자기 스스로 나아가는 것 만큼 보다 더 넓은 세계의 풍경을 가슴에 안을 수 있게 되는 법이니까!  그렇게 당신은 '블연속세계'라는 또 하나의 계단을 이제 앞에 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어쩌면 이미 올랐는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올라가는 거기서 바라보게 되는 세상의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분명 나와는 무척이나 다를 것인데 이 시간 그것이 정말 궁금해진다. 

 

 언제나 내게 있어 글은 마무리가 어렵다. 끝이 왔다고 생각되면 그동안 내내 벼려왔던 에너지가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고 그 허한 마음 속 공동 속에서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사실은 이 글 역시 그렇다. 나는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불연속세계'를 통해 여기까지에 이른 내 여정은 어떤 식으로 맺어야 할까? 근데 한 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온다 리쿠가 말한 대로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여정이란 같은 원을 계속해서 조금씩 다르게 그리는 행위일 뿐이다. 그렇게 지금의 마지막 역시 다음을 위한 출발이다. 그렇다면 굳이 내 글에 '콘크리트'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곧 다음의 말이 있으리라 연상시키는 말줄임표로 끝맺는 것이야말로 이 '불연속세계'의 리뷰에 가장 어울리는 마침표가 아닐까? 그래서 내 글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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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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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다 리쿠가 돌아왔다. 얼마만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네크로폴리스가 마지막이었으니 그래도 몇 년이 된 셈이다.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온다 리쿠의 책이 두 권이나 동시에 발매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하나는 '달의 뒷면'인데 2001년도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불연속 세계'로 2008년도 작품이다. 두 작품간 시차가 무려 7년이나 존재하지만 이렇게 같이 발간되어야 했던 이유가 있다. 그것이 주인공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두 작품은 하나의 시리즈다. 바로 음악 아티스트 발굴이 직업인 '다몬'을 주인공으로 한!

 

 

 다몬은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의 고이치를 참 많이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물론 다몬은 책 보다는 음반을 많이 듣지만 그래도 달의 뒷면에서 문학작품 제목으로 끝말 잇기를 술술 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음반 만큼 책 역시 많이 읽는 존재가 틀림없다. 다만 고이치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존재라면 다몬은 끝도 없이 돌아다닌다는 차이점이 있다. 직업이 가능성있는 무명의 아티스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보니 어쩌면 방랑자로서의 삶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가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엿하게 프랑스인 아내까지 두고 있다. 잘 생기긴 했으나 성격은 쑥맥에 가까운데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건 아무래도 여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보니 이런 남자들이 오히려 여성들에게 어필한다는 얘기를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본 적이 있다. 이것도 다몬이 사실은 고이치의 발전형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아무튼 '달의 뒷면'과 '불연속 세계'는 그 다몬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 대부분이 어디론가 가는 설정인 만큼 이 두 작품도 어디론가로 가서 벌어진다. 온다 리쿠 스스로는 특히나 이 시리즈를 독자들이 기행 소설로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낯선 땅 낯선 시간속에서 문득 느끼는 새로움. 여행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이런 느낌을 온다 리쿠는 '달의 뒷면'과 '불연속세계'가 독자들에게 전해졌으면 한다.  

 

  '달의 뒷면'은 2001년 작품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기행 소설 보다는 97년에 나온 '삼월은 붉은 구렁'에 보다 가까와 보인다. 분위기나 주제나 할 것 없이. 사실 어쩌면 정말로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장편으로 버전 업 되지 않은 네 번째 소설 '새 피리'가 '달의 뒷면'으로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달의 뒷면'에서 주요한 소도구가 바로 비둘기 피리이기 때문이다.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나왔던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의 유명한 초반부 카페 안의 잡담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대화 장면도 '달의 뒷면'에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뭐, 온다 리쿠의 정형화된 스타일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문학 작품 제목으로 끝말잇기 하는 것은 '삼월은 붉은 구렁'에서 첫번째 단편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나왔던 등장인물들의 책을 둘러싼 대화들을 참 많이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니 구성원들까지 어쩐지 비슷한 것 같다.

 

 

 자꾸만 '달의 뒷면'과 '삼월은 붉은 구렁'의 유사성을 말하고 있는데(어쩌면 정말로 이 작품은 네번째 '새피리'의 버전 업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달의 뒷면'의 결말 때문이다. 내 생각에 이 결말 때문에 이 작품의 호불호가 꽤 갈리지 않을까 싶다. 하긴 온다 리쿠의 팬을 자처하는 나 조차도 그 결말에는 동의할 수 없으니 말 다했긴 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결말을 포함하여 '달의 뒷면'에서 행해지는 얘기를 소설에 드러난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하지 않나 싶다.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이 작품과 '삼월은 붉은 구렁'의 유사성을 자꾸만 끌어들이는 것이다.

 

 '달의 뒷면'은 한 마디로 잭 피니의 유명한 소설 '바디 스내처'의 온다 리쿠 버전이다. '바디 스내처'를 모른다면 50년대의 돈 시겔이나 70년대의 필립 카우프만의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떠올리면 된다.(돈 시겔은 우리들에게 '더티 해리'로 유명하고 필립 카우프만은 '참을 수 없는 존재들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 쟁쟁한 감독들이 앞다두터 영화화 했을만큼 '바디 스내쳐'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화 리스트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헐리우드계의 이단아 '어딕션'으로 유명한 아벨 페라라도 90년대에 바디 스내쳐란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인베이젼'이라는 바디 스내쳐 원작중 가장 실패작이라는 니콜 키드만 주연의 영화도 있다. 아무튼 바디 스내쳐는 그 독특하면서도 자극적인 설정,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른 똑같은 무엇으로 바꿔치기 당한다는 (아마 이것의 원본은 옛날 유럽에 전해지던 전설중의 하나인 '체인저링'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바로 지금까지도 거듭 영화화 되어왔는데 유독 이 설정이 그럴 수 있었던 까닭에는 무엇보다도 그 '바꿔치기'에 담긴 상징성 때문이었다. 처음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람의 의식이 한 순간 바뀌는 것을 문자 그대로 신체의 강탈로 은유화했다. 그렇게 몸은 그대로이지만 의식만 달라지는 것을 어떤 외계의 힘에 의해 외부에서 보기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탈당한 사람과 똑같지만 그 속은 전혀 다른 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잭 피니는 바꿔치기한 신체에게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변화를 다루고 있음 역시 강조했는데 무엇보다 사회주의는 개인의 감정(혹은 창의성)을 억누르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필립 카우프만까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은유로 형상화했다면 아벨 페라라는 90년대 들어 새로이 나타나 온 세계를 공포에 떨게한 에이즈에 대한 포비아의 은유로 신체 강탈을 가져왔다.(비단 미국뿐이 아니다. 일본에도 이 비슷한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가 아마 그 대표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최근엔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의 극장판 하나도 바디 스내쳐를 다루었다.)

 

 

 

 

 

  그렇다면 온다 리쿠는?

  여기서 온다 리쿠를 만일 잭 피니와 헐리우드 감독들과 같다고 보면 뭐,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결말은 여지없이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결말까지과는 과정은 온다 리쿠 특유의 분위기와 내용답게 흠뻑 몰입하게 만들고 귀담아 둘만한 것 또한 많아서 어쩐지 그 결말 마저 그대로 버리기 아깝게 만든다. 그래서 난 다시금 살펴보았고 그러다 삼월은 붉은 구렁과의 유사성이 눈에 띄게 되었다. 또 같은 질문이 반복되지만 그렇다면 온다 리쿠는 신체 강탈을 무엇으로 은유하는 것일까? 물론 개인적인 견해를 전제하고 하는 말이지만 난 그걸 '책 읽기'라고 부르고 싶다.

 

  '삼월은 붉은 구렁'은 책 읽기에 관한 소설이다. 하지만 거기서 책 읽기란 그냥 보통의 취미는 아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 소수만의 취미이다. 아마도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온다 리쿠는 점점 책을 안 찾고 안 읽게 되는 이 사회에 대해 나름의 안타까움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마도 책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삼월은 붉은 구렁'을 쓰지는 않았을까. 바로 그렇게 이제는 소주의 연대로까지 추락해 버린 '책'에 대한 연민이 개인적으로는 그대로 '달의 뒷면'으로 이어져 신체 강탈의 하나의 은유로 쓰여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여기서 바껴진 신체들은 이른바 '책'이란 쓰여진 글을 자신의 내부에 포함해버린 존재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여러가지다. 일단 대부분의 사건 정황이 일단 텍스트를 통해 밝혀진다는 것. 시기를 감안하더라도 시각적 매체가 전혀 나오지 않은 것이 이 소설의 특색이라 할 만한데 아마도 그것은 봄이 아니라 읽음이라는 감각을 온다 리쿠가 더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이 소설의 한 부분의 어떤 인물은 아예 만나는 사람 역시도 책 처럼 읽게 된다는 고백까지 한다. 또한 신체 강탈을 일으키는 미지의 존재를 처음 대면한 곳이 도서관이라는 점도 여간 상서롭지 않다. 배경이 되는 야마쿠라가 작은 도시라 해도 그 많고 많은 곳들중 왜 하필이면 도서관일까?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대낮에. 그 역시 '책'이란 신체 강탈에 있어 본질이 되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별히 고른 곳이 아닐까 싶다. 또한 앞서도 말했듯 다몬을 비롯한 사건을 추적하는 네 사람이 모두 책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점 그리고 문학 작품의 제목을 가지고 끝말잇기를 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점도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다. 무엇보다 스포일러상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의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우주를 그대로 야마쿠라 전체로 확장한 듯한 네 사람만의 장면은 이 '달의 뒷면' 역시도 '삼월은 붉은 구렁'과 같이 책 읽기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음을 은연중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텍스트가 되고 네 사람이 그것을 탐독하는 장면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지 않을까?

 

 단적으로 온다 리쿠가 왜 '달의 뒷면'에서 책 읽기를 신체 강탈의 은유로 삼고 있는지는 '기다리는 사람들'에 나왔던 한 대사에서 추정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러니까 그 단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히려면 책을 금지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바로 이 말이다.

 

 그러니까 바로 이러한 안타까움에서 온다 리쿠는 책 읽기를 통해 보다 확장된 타자를 내부에 포함한 이를 강탈당하고 바껴진 존재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더이상 책을 읽지 않으므로...

 

 그런데 왜 책을 읽어야 하지?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 온다 리쿠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이것 역시 '기다리는 사람들'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이어서 써나가고 이어서 이야기해 나가는, 전설이 새로운 전설을 낳는 이야기" 책은 바로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늘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부는 바람처럼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데 책을 읽지 않으면 그런 것이 단절되니까 그런 것이다. '달의 뒷면'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여기서 주인공 일행이 하는 것 역시도 인용한 저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서로가 모여서 기록을 하고 자신의 기록을 남의 기록과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월은 붉은 구렁'과 '달의 뒷면'의 연속성을 떠올리게 되었기도 했지만 말이다. 여기서 보듯 온다 리쿠는 무엇보다 이어지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 공간적 배경 역시 도시를 관통하는 수로들이 사방팔방 이어지는 '야나쿠라'(물론 이 도시는 일본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유명한 '야나가와(柳川)'가 모델이다.)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실제 야나가와의 모습 (이렇게 사진을 보니 다시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신체를 강탈해가는 미지의 존재 또한 물의 이미지를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책을 읽음이란 외부와의 교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쓰여진 글과 내가 이어지듯이 그 글을 기록한 타자와 나의 자아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 타자의 자아를 내부에 간직하게 되며 그렇게 그의 생각에 내 생각을 이어가듯 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거듭되고 발전해나간다. 또한 그 이야기로 인해 우리 역시도 예전의 작았던 자아에서 보다 확장된 자아로 나아간다. 그렇게 우리의 내부에 타자를 이해할 공간들이 수로처럼 흐르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온다 리쿠는 '달의 뒷면'을 통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든 것들을 책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이렇게 처음엔 잭 피니의 바디 스내쳐를 좀 다른 식으로 고쳐 쓴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나 다시 음미해보니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얘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아마도 그토록 바디 스내쳐가 많이 리메이크 되었으나 이를 책 읽기와 연결시켜 풀어나갔던 것은 온다 리쿠만이 유일할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독특한 개성에 놀라고 그런 식으로 신체 강탈을 은유한 것에 감탄한다. 하지만 지극히 독창적이라 오해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도 처음엔 결말의 부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온다 리쿠는 결말이 중요하지 않은 작가중 하나이다. 삼월의 붉은 구렁의 제 4부가 미완결로 끝났어도 많은 이들이 그 책의 매력을 느꼈듯이 그렇게 과정 자체가 주는 분위기와 이야기의 흐름의 매력이 진정한 온다 리쿠의 매력이 아니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달의 뒷면' 역시도 커다란 만족감을 줄 것이다. 나 역시 독특하면서도 신비로운 야마쿠라의 매력에 취하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서는 못 배기었듯이 말이다. 한 마디로 '달의 뒷면'은 진정 책이야 말로 벗할 가치가 있는 것임을 온다 리쿠 스스로가 증명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인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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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05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다리쿠는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미스터리 작가라고는 하는데 저는 한 번도 읽어보질 않았어요. 얼마 전(얼마전이... 꽤 오래되었군요) 출간 된 <우리집에는... 어쩌고>를 집에 사두기만 했고 펴보지는 못했죠. 한 권은 읽어봐야 할텐데.
우리나아의 번역은 전부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게 바로바로 번역을 안한다는거에요. 아니, 2001년 작품을 지금 번역하면 어쩌잔 거예요! 저같이 차례대로 작품을 거슬러 올라가고픈 독자는 그저 웁니다...

헤르메스 2012-04-05 23: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일단 저 역시 소이진님의 말씀에 공감하지만 국내 장르문학 시장이 가진 정말 협소한 여건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출간해준 것 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에요. 일본처럼 미스터리 시장이 광범위하다면 우리가 바라는 만큼과 바라는 속도로 제깍제깍 나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소이진님 아직 온다 리쿠를 접해보지 않았다면 먼저 '삼월은 붉은 구렁' 부터 접하시고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해드리고 싶네요. 개인적으로 온다 리쿠에게 있어서 그 작품은 하나의 원점이라 생각됩니다. '달의 뒷면'과 '불연속 세계'를 읽고나서는 더욱 확신하게 되더군요^ ^

마녀고양이 2012-04-1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다 리쿠의 왕팬이지만,
제가 어쩐 일로 서점에 들러서(사실 약속 시간이 남아서), 온다 리쿠 신간에 눈을 반짝이면서 달의 뒷면을 읽어보는데... 이게 좀 와닿지 않더라구요. 저는 삼월~ 시리즈의 열광자인데 말이죠. 최근의 온다 리쿠 작품으로 번역되어 온 책들이, 예전처럼 착 감기지 않아서 속상합니다.... ㅡㅡ;;;

헤르메스 2012-04-11 03:38   좋아요 0 | URL
오! 마녀고양이님도 온다 리쿠의 팬이셨군요. 르 귄 여사에 이어 같이 좋아하는 작가가 또 한 분 계시다니 많이 반가운데요^ ^ 아, 그런데 예전처럼 착 감가지 않으시다니... 저도 네크로폴리스에선 그랬는데 이번에 온다 리쿠의 매력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님도 얼른 다시금 온다 리쿠의 매력을 발견하게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두 작품을 연달아 읽어보니 아직은 버리기 아까운 작가라는 생각이 마구 들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