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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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

 

 만일 저에게 아모스 오즈의 소설에 대해 한 문장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내리고 싶군요.

 저에게 아모스 오즈란 광막한 어둠을 홀로 마주하고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 어둠은 광막하기도 하지만 굳건하기도 합니다. 육중한 몸으로 새 날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고 있는 듯해 보이니까요. 그건 희뿌연 새벽의 날 선 푸른 여명조차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멈추고 빛마저 삼켜버리는 단일한 어둠은 그야말로 변화를 거부하는 존재입니다. 제겐 그 어둠이 바로 아모스 오즈가 마주한 어둠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내밀어 타자를 껴안을 여지가 전혀 없는 어둠이므로 그것을 마주한 자에겐 오로지 두 개의 길 밖에는 없는 셈입니다. 기꺼이 삼켜져 완전한 하나가 되든가 아니면 달아나 홀로가 되든가...

 

 오즈는 거기서 두 번째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미 그는 그의 나이 열 다섯 살 때, 그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자발적으로 사유재산이 허락되지 않고 같이 일하고 같이 먹는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키부츠로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훗날 왜 텔 아비브에 머무르지 않고 그 곳으로 들어갔냐고 묻자 오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때 텔 아비브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키부츠는 충분히 급진적이었다."라고. 말하자면 그는 그 때 자신의 이상이었던 시오니즘을 쫓아 과감히 현실을 버린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달아났습니다. 스스로 원래 성인 클라우스너를 버리고 지금의 성인 오즈로까지 바꿔가면서 말이죠. 그는 거기서 무려 25년을 지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장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키부츠는 일주일 중 단 하루만 그에게 글쓰기를 허락했습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그는 열심히 글을 썼고 그렇게 해서 아직도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우는 '나의 미카엘'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일주일 중 삼일을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죠. 그 시간동안 그는 열혈한 시오니스트였고 키부츠는 그의 이상이 구현된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키부츠를 떠나게 됩니다. 그 키부츠가 더이상 자신의 이상에 맞는 존재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말하자면 그는 다시 달아난 자가 된 셈인데 수십년동안 생활하면서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곳이라 여겼던 그 곳에서 그는 왜 또 달아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건 그 이상이 타협없는 독단이 되어 더 이상 타자를 수용하지 않는 어둠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이 또한 어떠한 비극을 불러오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게 된 게 바로 오즈가 직접 참전했던 1973년의 제 4차 중동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을 통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이상이 얼마나 폭력적인 전횡으로 많은 타인들을 고통과 슬픔에 빠뜨렸는지 똑똑히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을 계시를 통해 보았던 요한묵시록의 요한과 같이 그는 자신이 기꺼이 하나가 되었던 그 어둠에 깃들어 있던 진실을 비로소 보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달아난 것입니다. '달아남'이란 거부의 몸짓입니다. 더 큰 가치를 지키기 위한 저버림입니다. 특히 성경에선 더욱 그렇죠. 믿음의 아버지라는 아브라함을 비롯 야곱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롯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내내 속세의 질서와 욕망으로 부터 달아납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사야나 요나를 비롯한 선지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 역시 신의 음성을 듣고 광야를 헤메이게 되지요.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한 요한도 예수도 달아남의 여정을 똑같이 밟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달아남'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자가 신이 진실을 계시했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제시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가 아니라 '진실이 너희를 달아나게 하리라'와 어쩐지 같지 않나요? 아마도 그래서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유랑의 운명을 필연적으로 걷게 되나 봅니다. 그러니까 진실이 그를 달아나게 한다면 그 진실을 앎으로 부터 오는 책임이 그를 끊임없이 유랑하도록 하는 것이죠. 맞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랑이야 말로 오즈의 모든 것입니다. 키부츠를 나오게 된 까닭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는 '여자를 안다는 것'은 여자들 사이를 유랑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삼각관계의 연애담으로 풀어간 '블랙박스' 역시도 욕망과 미련 사이를 끊임없이 유랑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유랑이란 무엇입니까? 머물 수 없는 것.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언제나 다른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끊임없이 맞게 되는 것이겠죠. 그렇게 떠도는 자는 변화의 한 가운데 있으며 쉬임없이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야 말로 그에게 딱 어울리는 이미지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즈의 소설이란 이 글 첫 문장대로 '어둠 속을 흐르는 물'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선지자나 예수에게서 보듯 그저 돌아다니기만 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그는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것도 천지가 다 들을 수 있는 커다란 목소리로 울부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외침은 그의 일상이요 선포는 그의 의무인 존재입니다. 아모스 오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즈는 4차 중동전쟁을 통해 자신이 디디고 있는 그 땅이 바로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활화산의 비탈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유랑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자는 그것을 알릴 책임 역시 당연히 지게 됩니다. 언제 불타버릴지 모를 사람들을 생각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역시 외쳐야 합니다. 선지자들이 목소리라면 그는 글로써 그것을 해야 했습니다.

 

 근데 왜 문학일까요?

 

 종교상에서 세상의 어둠이 가진 진실을 밝히는 일은 모두 다 비슷한 형태를 지닙니다. 선지자도 그렇고 예수도 그러합니다. 모두 비유와 암시인 것이죠. 외침과 선포는 진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자가 천국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가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대답하듯이 비유로서의 이야기로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자면 오로지 이야기 속에서만 진실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따지고보면 예수는 유대의 세헤라자드인 셈이죠. 사실 모든 세상의 근원을 얘기하는 설화나 전설들 그리고 태초의 세계관들이 담겨있는 신화와 영웅담들 역시도 이야기들입니다. 이렇게 종교적 담론이 이야기의 형태로 제시될 뿐 아니라 모든 담론의 원초적인 바탕 또한 이야기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여기듯이 한낱 가상의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른 방식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마도 그래서 어둠으로 부터 달아나 유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오즈는 문학에 의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즈에게 문학이란 들으려는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수 있는 '어둠 속을 흐르는 물의 먼 한숨 소리'였던 것입니다.

 

 

 

 2007년에 나온 '시골생활풍경'은 그러한 오즈 문학의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스라엘의 한 시골마을 '텔일란'을 중심으로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하듯 보여주지만 그야말로 이제까지 아모스 오즈가 걸어온 문학적 여정을 그대로 집약해 놓은 작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전히 같은 땅을 디디고 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우리들 각자는 무엇을 해야할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모두 여덟 개의 단편들이 실려있는데 그 중 첫머리에 있는 '상속자'는 단편집 전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의 이혼으로 이제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는 젤니크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텔일란의 집으로 이사왔지만 여전히 옛 삶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음을 암시하듯 이전의 물건들을 광속에 넣어두고 꺼내지 않습니다. 그렇게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미련 속에 서성이다가 문득 부동산의 소유권을 자신들에게 일임해 달라는 한 변호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 땅의 기원을 말해주는데 이것은 그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 변호사가 바로 팔레스타인을 암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미련으로 변화해야 할 오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젤니크는 그를 꺼려하는데 그는 막무가내로 집안으로 들어오고 결국엔 늘 누워있는 어머니의 침대 위에서 젤니크와 함께 셋이서 누워있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결국 이 단편을 통해서 오즈는 그렇게 한 침대 위에 누운 것 처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같이 살 수 밖에 없는 동반자적 존재임을 말하며 동시에 자신의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이제 미련을 버리고 변화된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골생활풍경'의 전체적인 주제입니다. 두번째 단편 '친척'은 젤니크 처럼 변화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길리 스타이너가 변화를 상징하는 자신의 조카인 기드온을 기다리는 얘기인데 오즈는 여기서 전작 '블랙박스'에서 그 누구보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던 존재였던 '기드온'의 이름을 다시 반복하면서 기드온을 마치 구원처럼 기다리는 길리 스타이너가 왜 그렇게 아프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즉 이것은 현재 이스라엘인들의 자성을 촉구하는 단편이기도 한 것이죠. 그들이 그렇게 변화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는 세번째 단편 '땅 파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한때 이스라엘의 유명한 정치인이었지만 이제는 고집과 의심밖에는 남은 것이 없는 퇴락해버린 노인과 그 딸 그리고 한 아랍 청년의 조금은 기묘한 동거 생활을 묘사하는 이 단편은 그들이 왜 난파선의 쥐들 처럼 변화에 민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분명히 들려오는 어딘가에서 땅이 뒤 흔들리는 소리로 상징되는 세계 자체의 변화때문입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들려오는 그 대지의 울림은 바로 세계 자체가 이제 달라지고 있다는 신호와도 같습니다. 그 소리를 통해 오즈는 이제 세계 자체가 달라지고 있으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변화란 선택이 아니며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 네 번째 단편 '길을 잃다'에서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인 가운데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은 '여자를 안다는 것'과 비슷한 주제라 할 수 있는데 당장 어떤 결론을 내지말고 되도록이면 오래동안 그 비어있음을 음미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둠을 만들어내는 독단이란 언제나 두려움 때문에 성급히 결정해버린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성급함이 가져올 수 있는 무모한 위험을 되도록 줄이기 위해서 그는 비어있음을 채우기 보다는 그 열려진 가능성 속에서 보다 많은 사유를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랑의 태도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렇게 이 단편은 마치 그의 문학이 가진 유랑의 본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관망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비어있음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가급적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이지 노자의 '무위'를 가져옴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비어있음을 바라보는데도 하나의 태도가 요구되어집니다.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의 단편들은 그 때 요구되어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그 태도란 바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고 그들을 위해 행위로써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즈는 그 태도의 중요성을 바로 다시 한 번 '소리'를 통해 강조합니다. 세번째 '땅파기'에서 들렸던 대지의 진동음이 이제는 하늘의 성가와도 같은 합창소리로 바뀌는 것이죠. 희미한 암시에 불과했던 그 소리가 이제는 구원의 합창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한 존재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 때 그는 이 합창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니 오즈는 분명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구원은 바로 도움을 필요로 하나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그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있다고. 바로 그것이 비어있음을 오래도록 관망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며 만일 여전히 타인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진 고통에 무관심해진다면 결국 닥쳐올 것은 마지막 여덟번째의 단편이 말하는 바와도 같이 지옥이고 그 어둠에 깃들어 나 역시 괴물로 변해갈 뿐이라고 오즈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생활풍경'은 바로 그러한 변화를 껴안으려는 태도의 중요성 그리고 그 태도가 어디까지나 타인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에 기반해야 하는 것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즈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하여 특별히 한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반복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공간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모든 단편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주인공들이 삶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그렇게 변화의 계기를 가져다 주는 결정적인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 공간이란 다름아닌 '벤치'입니다.

 

 '벤치'란 어떤 장소입니까. 한 마디로 영원히 정주할 수 없는 공간이죠. 잠시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임시 거처. 그것이 바로 벤치입니다.  오즈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바로 이 '벤치'와 같은 곳으로 여기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치 유랑자에게 있어 주막과도 같이 언제 다시 훌쩍 떠날지 모르는 찰라의 장소가 되어  내가 어디에 있든 내 땅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벤치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집이라는 침범 불가능한 장소에 홀로 틀어박혀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벤치에 같이 앉아 삶을 잠시 나누는 동반자로 여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불현듯 찾아온 '시골생활풍경'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을 다루고 있는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멀리서 들리는 물의 한숨 소리 처럼 은밀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자신이 늘 꾸는 악몽을 좀 상세히 풀어놓은 것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악몽이란 바로 여덟번째 단편일 것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런 세계가 오기를 두려워하며 그 세계가 오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독자들이 충분히 자신의 일로 느낄 수 있도록 앞의 일곱편의 단편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실 청맹과니들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똑똑히 드러났지요. 모두 자기 몸 하나밖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우리는 나를 넘어 다른 사람을 그리고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종일관 답답하고 더러는 분노하는 세상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덟번째의 단편을 읽으면서 거기서 그리는 세계가 바로 오늘의 한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유랑하는 자에게 있어 지금 존재하는 현상은 어디까지나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이 될 뿐입니다. 보다 크고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자기 일 처럼 여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좀 더 우리를 이런 숨막힘 속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오즈를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결국 구원이란 나를 먼저 허물고 내어주는 순간에 오는 것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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